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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연길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로서 연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연길시의 총면적은 1,350평방키로메터이고 인구는 39만6천명이다. 그중 조선족이 23만1,3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8.4%를 차지한다.
연길은 청나라가 동북지구를 봉금한 시기에는 <남항위장> 이라고 불리웠으며 후에는 연집강, 연길강이라고 불리웠다. 현재 연집향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것이다. 청나라가 봉금정책을 페지한 다음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이주하게 되였다. 연길시가 위치하고있는 지형을 놓고보면 분지로서 지세가 비교적 낮고 주위가 높은데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그리하여 이곳은 늘 <연기가 뒤덮인것이 안개처럼 자욱해> 사람들은 연길을 <연집>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연길은 비교적 일찍 개발된 지역의 하나이다. 당시 조선사람들은 연길을 芝陀所 또는 芝丹城이라고도 하였으며 1907년 이후에는 국자가라고도 했다.
연길시 중심부를 흘러지나는 부르하통하란 강 이름은 녀진어로 버드나무가 무성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1931년 <9.18> 이후 일본제국주의는 연변을 강점하고 연길에다 <간도성공서>를 설립했다가 후에 <간도시>로 개칭했다. 1952년 길림성 인민정부에서는 연길을 연길시로 개칭했다. 그후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였다.
도문:
도문은 만족어 <투먼써친>에서 유래했다. <투먼>이란 만이란 뜻이고 써친은 강의 원류라는 뜻으로 <투먼써친>은 여러 갈래의 물이 합친다는 뜻이다. 력사기록에 따르면 도문은 <통문(通门)>, <토문(徒门)>, <타만(驼满)>, <도문(图门)>, <토문(土门)>, <두문(豆门)>, <치문(驰门)>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웠다.
청나라때 도문은 <남항위장>(연길)에 귀속되였으며 188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는 회막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은 역전 부근은 우후평이라 불리웠다. 1933년에 돈화---도문철도가 개통되면서 회막동은 시발역이 되였다.
당시까지 도문의 명칭이 통일되지 않아 각계에서 문제가 제기되였고 또한 회막동이라는 명칭이 국제도시의 이름에 부합되지 않았으므로 1933년5월21일 회막동경찰서에서는 9명의 관민대표를 불러 지명개칭에 대한 일을 론의한 결과 6월1일부터 정식으로 도문으로 개칭하기로 했다. 1965년5월에 도문진은 연길현에서 분리되여 주 직할시로 되였다.
화룡:
화룡은 토명으로 화룡욕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화룡 개발초기 조선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다. 화룡욕(峪)이란 만족어로는 두산이 한 골짜기를 끼고있다는 뜻이다.
화룡은 달라즈, 삼도구라 불리기도 했다.
광서 10년 즉 1884년에 중국과 조선이 서로 래왕하면서 상부지로 개방되였으며 광서 28년(1902년)에는 연길부의 관할하에 귀속되였다. 1910년에 화룡현을 설치하였는데 그 당시 현소재지는 달라즈(지금의 룡정시 지신향)였으며 1940년에는 삼도구로 소재지를 옮겼다. 삼도구란 오늘의 화룡진이다. 옛날의 화룡현은 해란강을 경계로 지금 룡정시에 귀속된 해란강 남부와 화룡시 귀속된 해란강 남부 지역이다. 해란강 북쪽 지역은 연길현이였다. 또 비암산을 경계로 서쪽은 화룡현, 동쪽은 연길현이였다.
훈춘:
훈춘이란 이름은 <금사>에도 나오는데 처음에는 <강물>, <지류> 란 뜻으로 쓰였고 점차 그 뜻이 바뀌여 <성읍>, <변경>, <국경지역>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명나라는 훈춘 일대에다 훈춘위를 설치하였으며 청나라는 강희 53년 즉 1714년에 훈춘협령을 설치했다. 그후 광서 7년에 훈춘부도통을 설치했다. 1905년에 훈춘은 상부지로 개방된 뒤 연훈지방의 중요한 통상구가 되였다. 그래서 문헌에는 <인가가 조밀하고 말이 줄쳐 다닌다>고 기록되여있다. 1931년에 훈춘진이 되였다가 현재는 훈춘시가 되였다.
왕청:
왕청은 력사상 하나의 역참에 불과했다. 그것은 너무 편벽하여 개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였다. 이 지역은 지형이 군대를 주둔시켜 수비하는데 유리했으며 변경의 요충지였다.
왕청이란 녀진어의 <보루>를 의미하는 왕친(旺饮)의 음역인데 본래 뜻은 <가죽이 두꺼운 돼지>라는 뜻이다. 몇년간 자란 돼지는 가죽이 두꺼워 쉽게 파렬되지 않으므로 <보루>라는 뜻으로 파생된것이다. 또한 재산이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는 뜻도 나타내고있다.
청나라 선통 6년인 1902년에 왕청에 현을 설치하고 하순참이란 곳에 소재지를 두었다가 후에 지금의 배초구로 옮겼다. 1935년 목도선 철도가 개통된후 대두천 즉 오늘의 왕청진으로 소재지를 옮기였다.
룡정:
룡정은 조선족들이 이주해온 력사가 아주 긴 고장이다. 19세기 7, 80년대에 조선사람들이 이주해와 살면서 이곳을 룡드레촌이라 불렀다. 룡정은 조선 회령으로 드나드는 륙도구의 산골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한족들은 이곳을 륙도구라 부르기도 했다.
룡정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우물에서 룡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하여 룡정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1900년부터 청정부에서는 륙도구와 룡정촌 두가지 지명을 함께 <9.18>이후 정식으로 룡정촌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1907년 일제는 룡정촌에다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했으며 1909년 11울에 간도총령사관으로 개칭했다. 청정부는 이곳에 상부국을 건립하였고 1913년에 중화민국정부에서는 연길현을 설치했다.
돈화:
돈화는 오도리성 혹은 아크돈이라고 불리웠는데 만족어로 <바람어구> 혹은 <견고하다>는 뜻이다. 돈화는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있다. 돈화는 옛 도읍지로서 일찍 698년에 발해국은 여기다 도읍을 정했다. 청나라가 연변지구에 대한 봉금정책을 실시할 때 돈회는 액목 혁라좌령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후에는 황실의 사냥터로 되였다. 돈화는 청나라 광서년간인 1880년에 현으로 되였다. 돈화현의 제1임 현장이였던 조돈성의 말에 의하면 <돈화는 풍속에 의해 이름을 지운것인데 덕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1914년에 연길도에 속했다가 1929년에 길림성에 귀속되였고 1958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관할에 귀속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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