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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에서 de Botton 은 미술 작품이 여행지를 감상하는 데 미치는 영향력을 얘기하면서 그 예로 프로방스와 고호를 들었다. 이에 프로방스 여행을 앞두고 나는 Kuenster 와 Grames 란 사람이 쓴 <van Goghs Provence>(고호의 프로방스) 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어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한 번도 사이프러스 나무를 내가 보는 것처럼 그리지 않았다는 게 놀라워. 선과 비례에 있어서 저 나무들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다워. [...] 사이프러스는 파란 하늘에 대비해서 봐야 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파란색 속에 서 있는걸 봐야해. 여기 자연을 그리려면, 물론 다른데도 다 그렇지만, 아주 오래 여기서 머물러야 해." -고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중에서
고호 이후로, 프로방스 산지에 그 수많은 나무종 중 하나로 묵묵히 서 있던 사이프러스 나무가 관광객의 이목을 끄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아를과 생 레미 근처에서 보이는 사이프러스들이 어렵지 않게 고호의 출렁이는 사이프러스 모습으로 오버랩된다. 고호의 사이프러스가 특히 재미있는 것은, 바람이 없는 날의 이 나무를 보면 '어떻게 저걸 보고, 그렇게 그렸지?' 란 의문이 바로 떠오르는데, 2년동안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해가 찌나, 이 나무를 관찰한 고호가 그 계절에 따른 변화무쌍한 나무의 모습을 한 순간으로 포착해 그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람이 불때의 출렁임과, 찌는 햇빛속에서의 여러 빛깔, 비오는 날의 흑빛을 한 몸에 지닌 고호의 사이프러스가 등장한다.

고호는 1853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1888년, 34세의 나이로 프로방스 지방, 아를에 오게 되는데, 도착한 순간부터 그는 남부의 풍경에 매료된다. (그의 친구였던 고갱이 고호의 간절한 부탁으로 내키지 않게 프로방스로 내려와서는 '이렇게 지저분하고, 작고, 촌스런 곳은 본 적이 없다'며 몸서리를 쳤던 것과 무척 대조적이다)
고호는 그간의 자신의 힘겨운 삶은 끝나고 남부에서 이상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의 열정은 그가 프로방스에 머물던 27개월동안 그린 작업수로도 나타난다. 아를에서는 15개월간 무려 190졈의 유화를 그렸고,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던 상 레미 에서도 일년간 150점을 그렸다. 이 밖에 스케치가 200장 정도가 있다.
미스트랄이 불때는 화폭을 움켜잡고 바람과 싸우며, 겨울에는 눈 속에서 떨며, 여름에는 한 낮의 이글거리는 태양을 안고 거의 매일 한 점씩 유화를 그렸다고 하니, 그 열정은 소름이 끼친다. (특히, 아무도 자기 그림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저럴수 있다는 건, 정말, 화가로서의 숙명을 수긍한 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짓 같다.)
고호는 아카데미 사실주의 화가들이 실제로 자연이 보여주는 색을 쓰지 않고 이론에 따라, 톤이 비슷한 색들을 쓴다며 흥분했다. 그는 프로방스의 파란 하늘과 노란 햇살을 그대로 그리려고 했다. 섞지 않은 순수한 색채에 대한 미를 깨달아 가면서, 그의 그림은 더 밝은 색의 조합으로, 더 힘있는 터치로 발전한다. <Van Goghs Provence> 에서는 고호의 작품은 '단순화된 색의 배합 reduktive Farbzusammenstellung' 으로 그려지며, '이런 단순화는 그에게 예술의 진실로 오르는 단계를 의미했다 Vereinfachung zeigt ihm die Stufe zur Wahrheit der Kunst'고 씌여있다.
Arles 에서 그의 집 -노란집- 을 구한 이후로, '남부의 아뜰리에'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점점 강해졌다. 그는 계속해서 고갱에게 프로방스로 와 달라고 간청했다. 고갱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고호가 고갱을 무지 존경했으며, 적잖이 주눅도 들어있단 느낌이다 ("당신의 그림에 비하면 제 그림은 너무 평범합니다" 따위의 말을 남기며...) 그에 반해, 고갱은 - 그도 고호의 동생 테오로 부터 돈을 받아쓰는 처지였다면서- 시종일관 거만하다고나 할까?
하여간, 고갱은 1888년 10월 처음에 프로방스로 왔을때부터 고호와 함께 머무를 생각이 없었으며, 그 해 12월에 마침내 떠나겠다고 얘기했을때, (그게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는지는 아직 미궁인 듯 하나) 고호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터진다. 원래도 꽤나 집착적인 고호를 곱게 보지 않던 아를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그를 완전 '미친놈'으로 낙인 찍고, 공공연히 피했다. 그가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아를 사람 81명이 시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해서 그를 가둬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기록에는 사람들이 그를 '사람잡는놈' Menschenfresser 로 표현했다고..)
1889년 5월, 고호는 St. Remy 에 위치한 St. Paul de Mausole 병원으로 옮겨지고 이때부터 그의 사회적 매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끔 발작이 있을뿐 대부분 정상적이고, 4개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사고에도 이상이 없었던 그는 제한된 외출을 허락 받으며 이 곳에서도 약 150점의 유화와 100점의 스케치를 그린다. 물론, 의사와 수녀들은 그의 그림을 정신병자가 그린 끄적거림정도로 치부하고 고호가 감사의 선물로 그림을 전하자' 제비똥같다' '이런 끌적댄 낙서가지고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병원의 약사만 어쩔수 없이 받아두었는데 후에 그 그림으로 집안이 폈다고..)



1890년 5월 16일, 퇴원한 고호는 동생이 있는 파리로 돌아가고 1890년 7월 27일, 노을지는 들녘에서 총으로 자살을 기도 한다. 이틀후, "슬픔은 영원히 남을거야 Die Traurigkeit wird immer bleiben" 이란 말과 함께 동생 테오의 품에서 죽는다. 젊은 가장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테오 역시 형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다가 91년 1월에 죽는다.

아를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잠시 아를에 돌아왔던 고호는 이 그림을 그린다. 아름다운 도시와 과수나무는 저 뒤편에 있고 감옥살과 비슷한 포플러 나무 기둥이 그와 아를의 사이를 굳게 가로막고 서있다.
이 그림을 보면 눈물이 날것 같다...

"여기 검은색이 없는 밤풍경그림을 보내. 아름다운 파랑과 보라 초록, 그리고 이 주변풍경은 창백한 유황노랑과 레몬빛 초록으로 환하게 비춰진 곳이야. 밤풍경을 그 자리에서 그리는 건 표현못하게 즐거워" -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고호가 주장한것처럼, 프로방스의 맑은 파랑이 지나간 밤하늘은 여전히 검지 않고, 투명한 파랑빛을 지니고 있었다..
사족으로 고호가 프로방스에 미친 영향력, 내지는 부작용은 대단했다. 내 눈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프로방스에서 그림을 파는 대부분의 화가들이 '고호의 색', 그 하늘색, 그 노란색, 그 빨강만을 쓰고 있었고, 고호가 그린 모티브 이외의 것들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그 하늘, 그 사이프러스, 그 올리브나무, 그 지붕들, 그 해바라기와 양귀비, 그 라벤다 밭... 돌아보면 무척이나 다양한 꽃과 나무와 풍경이 있는데도 모두들 고호의 틀 속에 갇혀버린듯 했다.
고호가 그린 노란 카페에 갔을 때 마크가 말했다. "이 옆 집에서 땅을 치겠다. 왜 고호가 우리집을 안 그린거야? 하면서 말야"
프로방스 이곳 저곳에서 수근덕 거림이 들리는 듯 했다.
"왜 고호가 나는 안그린거야?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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