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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03/26
 

조상님이 살았던 모동을 찾아서


나에게 이상한 일이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내 거시기 두 쪽을 잡고 죽어라죽어라 하며 잡아당기는 겁니다.
내가 두발로 걷어차며 버둥거리고 있자,
옆에서 가위에 눌렸는가 보다하는 말소리에 깨어났습니다.
진땀이 나더군요.
백오미리가 쏘아 대는 조명탄이 환하게 비추어 지는 모래밭의 야전침대에서,
옆의 전우들이 잠을 못 이루고 있던 투이호아 도착 첫날밤에 일어난 가위눌림입니다.
불길한 예감으로 긴장되더군요.
다행히도 자주 나타났던 두 분의 저승사자는
나를 포기하였는지 이 전쟁터에서는 볼 수 없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점점 심해져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위에 눌려 고통스러운데
아내는 자다말고 왜 그래 잠꼬대하나 하며 옆에서 중얼거리더군요.
발버둥치다가 겨우 깨어나서 아내에게 화를 내며 야단을 쳤습니다.
아내는 내가 가위에 눌 린지 몰랐다고 하네요.
나는 가위에 잘 눌리니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마구 흔들어 깨우라고 하였죠.
아내가 옆에서 지켜주니 가위눌림도 은근히 사라지더군요.

그런데요, 이번에는 한 여름 밤에 매년 일어났던 일입니다.
티비는 열대야로 시민들이 잠을 자지 못했다는 뉴스를 보도할 때,
나는 동 내의를 꺼내서 옆에 두고, 솜이불도 꺼내어 옆에 두고 자야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더워서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 못하겠다고 별 이상한 사람이야 하며
밖의 원두막에서 잠을 잡니다.

사내발 이라고 임산부가 해산한 후 산후조리를 잘못하면 일어나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사내발이 일어나면 솜이불 등으로 온몸을 감싸 바람을 막아주고 뜨거운 물을 먹이는        응급조치를 한 후에 방에 불을 지피는 등 난방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내도 산후에 한번 사내발이 일어났으나 다행이 옆에 경험 있는 어른이
응급 조치해 주셔서 무사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나에게 사내발이 일어나다니 요.
그것도 겨울이라면 추위를 잘 타서 일어난다고 이해 할 수 있지만 한여름에 이게 뭡니까.
나도 덥기는 마찬가지라 윗통을 벗어버리고 갈증도 나고 하여 물 한 모금 먹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공포의 사내발이 나를 사랑한다며 껴안지 뭡니까.
나는 얼른 동 내의를 주어 입고 솜이불을 덮으며 덜 덜 덜 떨며
이빨 부디 치는 소리가 요란하지요.
아내도 능숙하게 물을 끌이며 옷장의 이불을 꺼내서 덮어주지요.
뜨거운 물을 한 모금 한 모금 먹고 한참을 떨 은 후에야 비상사태가 끝이 납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달력에다 표시해두어야겠다, 매년 같은 날짜인 것 같으니
이 날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하며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깨보면 밤중에 일어났던 사내발의 기억과 날짜를 표시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나지를 않더군요.

황당한 일은 겨울에도 일어납니다.
가장 춥다는 겨울밤에 일어나지요.
새벽이나 한밤중에 아내의 성난 목소리에 깨어보면 아 이게 웬일입니까.
내 몸에 실 호루라기하나 걸치지 않는 완전 나체지 뭡니까.
아내가 의심을 하더군요, 어디 가서 바람피우고 왔다고 족치지 뭡니까.
이 매서운 추위에 발가벗다니 요.
어느 때는 몹시 추워 눈을 뜨면 역시 완전 나체이더군요.
위풍이 있는 방이라 방바닥만 뜨겁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 지 원인을 캐어 진상을 규명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해 겨울에 내 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죠.
잠결에 내가 일어나서 내복을 벗고 팬티까지 벗을 찰나
눈을 뜨고 범인을 체포하였습니다.
아 그 범인은 바로 목이 긴 티셔츠 지 뭡니까.
아무리 추워도 목이 긴 내복이나 티셔츠는 지금도 입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기억

저녁식사를 하고 난 다음부터는 왜 그렇게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한지
숨을 못 쉬겠더군요.
아 그런데요 더욱 이상한 것은 아홉 시 뉴스를 보면 뜬 금 없이
곧 나라가 망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는 겁니다.
불학무식한 내가 무슨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정말 모를 일입니다.
나는 정치는 물론 세상일에 관심도 없이 살았죠,
내 삶이 고달프고 바빠서 이웃과 왕래하지도 않고 시내에 나가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큰아이가 군에 입대하고 둘째 애도 특전사에 자원 입대하였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 애들에게 해준 것도 없고 공부도 시키지 못하여  항상 마음이 아팠는데요
내 자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유언인
모동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조상 님들의 노여움이 있을 가봐서입니다.
그렇지만 주소를 그렇게 외웠는데도 모 하나하고 상주라는 지명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 삼 학년 때인 것 같습니다.
역사시간에 조선조 말기에 노비들과 농민들이 봉기하여
활빈당이라고 자처하고, 부자 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르는 일이 전국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심한 지방이 경상도 상주라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할아버지들이 대문이 여러 개가 있는 부자 집에서 노비들을 부리고 살았던
고향이 상주로구나 하고 기억하여버렸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 어느 날 할아버지의 유언을 상기하고 상주의 모 로 시작하는
고향을 찾아가기로 하고 어머니에게 유언내용을 다시 들려 달라고 하였죠,
그런데요 이게 웬일입니까.
어머니는 이미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토막 난 기억을 말하면 그런 일도 있었니
난 전혀 모르겠다 하며 나에게 전해준 당시의 상황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기억을 더듬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유언임을 알았지만 
내용은 기억 할 수 없다는 군요 .
그러니 나도 별 수가 없지요.

드디어 IMF가 터지더군요,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불안했던 마음이 안심이 되면서 나라 걱정이 사라집디다.
이제부터 뒤로 밀어 놓았던 할아버지들의 무덤을 찾기로 하였습니다.
98년 2월 중순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하여 상주군의 모동면과 모서면의 마을마다
노인정을 찾아갔죠.
모자로 시작되는 모동면이 아리송하더군요.
내가 기억하기로는 면 다음인 리로 기억하고 있었죠.
모서면이 그 당시 아주 심했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알려준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더군요.
내가 잘못 기억한 것이지요.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어
모동을 찾아야 하는데.


 김해 김씨 無派

어른들은 너 어디 김씨냐고 물어 보죠,
아버지한테 물었더니 김해 김씨랍니다.
당연히 김해 김씨라고 대답하였죠.
한번은 어떤 어른이 묻습디다. 어디 김가냐고요,
김해 김가라고 대답했더니 상놈이구나 하더라고요.
氏라고 하면 양반이고 家라고 하면 상놈인가 보죠.
그리고선 派가 무슨 파냐고 또 묻습디다. 왠 파를.
모른다고 대답하였죠. 그랬더니 진짜 상놈이다 고 우습디다.
상놈이 어디 있고 양반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상놈에게는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는가 보죠.
아버지에게 물어 보았죠, 김해 김씨 무슨 파냐고 그랬더니
우리가문은 파가 없다고 합디다.
또 누가 물으면 무 파라고 대답하라고 하면서 묘하게 웃으십디다. 
이렇게 조상에 관계되는 질문을 하면 아버지는 항상 알 듯 모를 듯 한
묘한 웃음으로 얼버무립니다.

1960년도 일겁니다.
나를 찾아왔던 중년의 경상도 아저씨의 정체가 궁금하더군요.
경상도에는 친척이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는 분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한집 걸러 경찰서이고요, 그 앞이 소방대입니다.
의용 소방대 옆 건물이 새한 인쇄소입니다.
어느 날 인쇄소 앞을 지나가다가 인쇄소 간판 옆에 또 하나의 간판이
걸려 있는 게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한문으로 김녕김씨 대동보소라고 써 있더군요. 寧 자는 몰랐습니다.
그 뒤에 신문을 보았는데,
광고란에 김녕김씨가 족보를 조치원 새한 인쇄소에서 만든다고 나와 있습디다.
그런데요 이상하게도 이 광고와 김녕김씨 대동족보라는 것이 눈에 밟힙디다.

아버지 연배 비슷한 분인데요.
방에서 가게로 나가자 나를 보더니 성큼 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네가 김성열 씨의 아들이냐고 물어봅디다.
그렇다고 하자 반갑다 많이 컸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족보 만드는데서 왔다고 합디다. 
그분은 또 나에게 족보 만드는 곳에 한번 놀러오라고 하지 뭡니까.
아 나와 김녕 김씨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나는 김해 김씨인데.

저녁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물어 봤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아버지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걸 놓치지 않았죠.
그러면 뭐합니까. 눈치도 없고 맹해서 누가 뭐라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였지. 
왜, 무엇을, 어떻게, 누가 하는 의심과 의문 그리고 상상하고 추리하는 뭐 이런 게
나에게는 전혀 없었죠.
그러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의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내 기억에서 사라졌고
이 사람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김녕김씨 충의공파

족보라는 말에 호기심과 경상도에서 왔다는 분이 우리 집 아니
나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더군요.
우리는 경상도에 친척은커녕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놀러오라는데 안 가볼 수 없었죠.
인쇄소 사무실에 들어가 물었더니 족보 만드는 사무실은 정동에 있다는 겁니다.
가리켜 주는 데 내가 전에 살던 곳이 아닙니까.
그 골목의 예전 우리 집의 맞은 편이더군요.  
문을 들어서자 첫째 방이더군요. 문을 다 떼어놓아 방안이 다 보입디다.   
벽 옆에 족보들이 수북히 쌓여 있고 문 쪽으로 향하여 세분이 앉은뱅이 책상을
앞에 하고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더군요.
나를 찾아왔던 경상도 그분은 오른쪽에 있습디다.
그분들 앞에는 등을 나에게 향 한 노인 한 분이 역시 앉은뱅이 책상 위에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습디다.
수줍음 많은 내가 용기를 내어갔는데요 그냥 우두커니 서서 있었지요.
그러자 나를 본 그 분이 너 왔구나 합디다.
그리고선 지금 이렇게 바쁘단다 하더니 인사들 하시죠.
이 애가 역전 앞의 김성열씨 아들입니다 하더군요.
나를 향하여 말합디다.
이분들은 각파에서 오신 분들이다 인사를 하여라 고 합디다.
나를 쳐다보기에 인사를 하자 그분들도 목례를 하더군요.
그리고 앞의 노인에게 인사를 하라는 군 요  도유사 라고 합디다.
지금은 이런 말 쓰지 않고요 무슨 족보편찬 위원회 위원장이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바빠서 도유사가 너에게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다 하니,
도유사 노인이 등을 돌려 나를 보더니 마루에 걸 터 앉으며
나보고도 옆에 앉으라고 하더군요.

도유사 노인이 나에게 한말입니다.
진천이 고향이며 족보를 만들기 위해 가산을 정리하여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군 요.
김녕김씨 족보는 해방이후 처음으로 만들며,
이곳 조치원과는 아무 연관되는 것은 없고,
단지 인쇄비가 싸기 때문에 조치원에서 만든다고 하는군요. 
아무리 숙맥인 나도 들으면서 조금 이상합디다.
그리고 유명한 사람이 누구누구인데 그 중에는 국회의원도 있다고 합디다.
후원금 이야기도 하는데요,
누가 얼마 내고, 누가 얼마 냈는데,
그 국회의원은 만 오천환을 보내 왔다는 군요. 그러면서
충북도경국장은 이 만환을 보내왔다고 하면서 국회의원이 
도경국장보다 못하다고 불평을 합디다.
멸치라도 몇 포 보내시지.
아시죠 누구인지, 처음으로 이 국회의원의 존함을 알았죠

그리고 나서 나보고 불쑥 해대는 말이 너의 충의공파 들이 두 패로 나누어서
파보를 만들 자느니, 이곳에서 대동보를 만들 자느니 싸우고 있다면서,
너도 파보를 만들고 싶으면 대구의 충의공파로 연락하고,
대동보를 만들고 싶으면 여기서 하라고 합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지요.
뭔 충의공파.  처음 듣는 말이지요.

경상도에서 왔다는 그분을 가리키며 나와 가까운 친척으로 부산대학교의 강사인데, 
바쁜데도 불구하고 여기에와 열심히 대동보를 위해 일하고 있는데,
너의 아버지는 어찌하여 코빼기도 안 비치냐고 화가 나서 말합디다.
도유사의 설명이 끝나자 그분이 말하기를 족보를 만들려면 가첩를 가져오라고 하네요.
가첩은 또 뭐고. 그런게 전혀 없던데.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어리다면 어리고 철부지라면 철부지일 수 있는 사춘기 무렵의
나는 정말 황당할 수밖에 요.
조금만 영리하다면 할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는데도
나는 정말 숙맥인 게 확실한가봅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죠.
아버지는 또 알지 못할 소리 없는 웃음만 짓습디다.
할아버지유언에 전라도 족보를 믿으면 큰일난다는 어머니의 말을 까맣게 잊은
나는 진안에다 가첩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연락하였죠.
아버지가 거기 다 연락해보라고 하여서 입니다. 
아버지는 그렇다 하여도 어머니는 말릴 것이지 정말 너무 들 한 것 아닙니까.
군산의 친척만 돈을 부쳐와 그분만 족보를 하였지,
아버지는 끝내 족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아버지는 그 족보 만드는 경상도 분과 조치원에 사는 김녕김씨
두 분을 초대하여 청요리로 대접하더군요
그런데요 김녕김씨가 드물다는 손님들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아버지는 계속해서 우리 김해 김씨는 거시기 두 쪽에 점이 있다나
어쩐다나 큰소리로 떠듭디다. 나 들으라고.


환부역조

족보를 보니깐 요
할아버지가 삼 형제로 되어있고 진안에 친척들은 둘째 할아버지로
군산의 친척은 세 째 할아버지 자손입디다.
그런데요 여기서도 맹한 나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우리조상들은 대대로 독자로 아버지까지 이어왔고 딸도 두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왜 할아버지가 삼 형제이고 대전에 사는 고모가 할아버지의
딸인가를 의심을 하지 못 한 거죠.
지금 와서 푸념해봐야 뭐 합니까, 버스는 떠나간지 몇 십 년이 되는데
이제서야 손을 든들 웃음거리 도 못 되는 거죠.

이제부터 조상 대대로 살았던 할아버지들의 고향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방법이란 나를 찾아왔던 경상도 사나이를 찾아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족보 즉 조치원 보가 군산에서 진안으로 옮겨갔다는 군 요.
군산의 그분이 병으로 고통스럽게 살다가 자손도 두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족보를 진안에서 가져갔다 네 요.
진안에 가서 족보를 보고 뒷면에 있는 봉단원 인가요 적어 가지고 왔습니다.
역시 진안이분들도 가만 두지 않았더군요.
조상 벌 무서운 줄 모르고 환부역조 한 죄 벌을 받았더군요.
아 살짝 한가지 더
호적도 증조 할아버지 아들로 만들었더군요.
그러니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죠.
이 이야기는 아직 쓰면 안 되는데.
換父易祖하는데는 족보로도 하고 호적으로도 하는가 봅디다.

충의공파의 봉단원이 지금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 데요
주소가 경남 거창 둔동으로 나왔습디다. 
면이 빠져 있더군요, 어떻게 찾는담 하고 이 궁리 저 궁리 하다가
지도에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납디다.
거창군의 지도를 북쪽부터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하였죠.
북쪽에서 두 번째 칸을 본 순간 난 넋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
아  모 동리가 있지 뭡니까.
그 제서야 기억이 되 살아나더군요.
모 字로시작하는 모전이 할아버지들의 집이었고 모전 앞 동네가 석동이며
석동에는 김씨들이 네 가구가 산다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기억 나더군요.
위천면 이더군요 그 옛날 어머니가 전해 주셨던 할아버지의 유언인
고향주소가 외우기가 그렇게 어렵던
거창군 위천면 모동리가
몇 십년 후인 이제서야 기억이 납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소리높이 외쳤습니다.
한시바삐 달려가야지요.

김천에서 3번 국도로 빠져나갈 무렵입니다. 
승합차를 몰고 가는 내 차를 중앙선 좌측의 대항 차들이 유심히 보고 있습디다.
운전하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옆 조수석을 유심히 들 보더군요.
나는 그 제서야 알았습니다. 
얼굴을 옆으로 돌려 조수석을 보고 아 할아버지가 타셨군요.
할아버지도 기쁘시죠 하였죠.
내가 할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나의 고조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에는 고조 할아버지가 장손을 보호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장손에게 유훈을 하신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할아버지의 혼이 장손을 지키고,
그 장손 할아버지가 또 당신의 고손자을 지키며,
그 고손 할아버지가 다시 고손자을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본적도 없고 느낀 적도 없어서 기억 속에 사라졌었는데,
고조 할아버지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던 가봅니다. 
국도의 우두령 이란 푯말이 있는 고개를 넘자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하는군요.
다시 말하였죠, 할아버지 기쁘세요.

어머니가 전해준 대로 석동의 첫 집에서 골목 끝에 있는 넷째 집까지 네 가구의 김씨들은 이미 오래 전에 모동을 떠났다 더 군 요.
가장 연장자인 노인과 첫 번째 집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 유언 속의 모동을 확인하였습니다.
동학도들이 습격한 것이고, 열 두 대문 집이라고 하더군요.
사성비(四性碑)를 물어보자 김녕김씨들이 가져갔다는 겁니다.  

내가 무덤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 보지 못한 것은 할아버지들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장손 할아버지들이 자신의 아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유언을 하신 나의 할아버지조차도 어머니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물을 수가 없었죠.
내가 유언 내용을 묻고 다녔다면 혹시나
내 아내와 내 자식들에게 벌을 받게 된다는 생각에 온몸이 저릴 정도였으니까요.
내가 누구입니까
불학 무식한자가 아닙니까.


경주김씨 백촌공파


석동에는 김씨들이 네 가구 살았답니다.
첫 번째 집에 살던 김씨는 이웃마을 인 원당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더군요.
마을 골목 끝에 살던 김씨를 찾았지만 왠 일인지 석동이 아니라
원당 이라고 끝가지 우기더군요.
그러면서 두 번째 집의 김씨는 일본에 살면서 연락이 안 된다는 군요.
세 번째 집의 김씨도 찾았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군산에 친척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작고한
부친으로부터 들었다고 합디다.
내가 그때서야 알았죠.
군산 친척이라고 찾아왔던 분이란 것을.
노인들이 그러더군요.
원당으로 이사간 김씨가 처음에는 김해 김씨라고 하였는데 그 조카가
김녕 김씨로 하자고 졸라서 김녕 김씨로 바꿨답니다.
그런데 그 조카가 다시 경주 김씨로 바꾸면서 종손이라고 한답니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유언에 의하면 골목 끝에 있는 네 번째의 김씨가
할아버지와 가깝다고 하였죠.
네 번째 김씨 역시 이미 작고하였고,  그분 아들인데 칠십이 다 된다고 합니다.
모전 마을 앞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잔디 손질이 되어있어 앞집에 물어보니
부산 사는 사람이 하였답디다.
전화번호를 알아 가지고 연락을 하였더니 만나자고 하여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분 말고 또 한 분을 만나야 하기에 내려간 것이죠. 
둔동을 찾아 가보았지만 그분은 이미 작고하였고,
부산에 친척이 그 당시에 조치원을 갔다왔다고 그 분을 만나보라고 하여서입니다.
조치원보를 만든 그분은 대학교 강사가 아니라 부산에서 서당을 하였고 합디다.
자기도 조치원에 갔었지만 나의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고 합디다. 
그러면서 집안어른들이 모동의 통정대부 묘를 벌초 한 적은  있다고 들었답니다.
이분은 물론 내가 만나본 분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족보 이야기입디다.
내가 족보 때문에 모동을 찾고 있는 줄 알고 있더군요.
족보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습니다.

이분도 역시 그러더군요 김녕김씨 충의공파로 하던지 경주김씨 백촌공파로 가던지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합디다.
허 어 참 그놈의 족보가 무언지.
이윽고 만난 모동의 김씨는 만나자마자 자기가 경주의 어느 왕릉에  능 참봉인가요
뭐 그런 것에 됐다고 자랑합디다.
그리고는 집에 올라 갈 때 반드시 대구에 있는 분을 만나야 한다고 합디다.
내 앞에서 대구에 전화를 넣더니 손님 한 분이 찾아 갈 것이라고 합디다.
내가 반드시 만나볼 분은 고교 교장을 은퇴하고 백촌공파들이 처음 족보를 만들 때의
편찬위원장이라고 하네요.

동대구에 있는 그분의 집에서 만났습니다.
자기가 처음 만들었지마는 두 번째 만들 때에는 참여하지를 않았답니다.
말들도 많고 아무나 무슨 한자로 된 쪽지 한 장이라도 가져오면 족보에 올렸다고 합니다. 만든 족보를 보내와서 살펴보니 엉터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네 얘기는 맞는 말이지만 세상사람들은 구전을 믿지 않는다고 합디다.
아니 누가 믿어달라고 이 고생을 하고 다니는 줄 아십니까.
사람들은 인쇄된 글자를 믿지 구전은 믿지 않는다면서 인쇄된 문서가 없느냐고
자꾸 묻더군요.

우리 할아버지들은 절대로 문서를 만들지도 않았고,
손자를 데리고 할아버지 무덤으로 가서 입으로 유훈을 알려주셨고,
할아버지들이 조상 대대로 왜 이곳에서 살고있는지를 문서가 아닌 말로 가르쳐왔고,
조상이 누구인지 자식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는데 누가 알아달라고 말을 하였나요,
믿어달라고 말 한 적이 있나요.
그래 나는 불학무식해서 문서나 책 같은 것 물려받은 것 일절 없다 됐냐.
그리고 왜 김씨 타령들 하시나,
충의 공은 무어고 백촌 공은 또 뭐여.  
나는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조상 님들의 무덤을 찾을 뿐입니다 하자
종손을 만든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 일 순위가 부산 김씨인데 자기는 사양한다고 하여 원당의 김씨로 정했답니다.
그러나 자기는 관여하지 않아 다고 하네요, 어째 듣기가 한발 빼는 것 같습디다.
내가 족보들을 보자고 하니 지금은 없고 계보를 만들었다고 합디다.
상자 속에 두루 마리 종이가 여러 개 있습디다.
그래프 용지를 반으로 잘라서 여러 장 붙여 놓은 것인데 요, 
펴 보이자 이름들만 죽 적혀 있더군요.
한 두루 마리가 족보 한 질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더군요.


아! 김문기 선생, 고대사의 비밀 때문에 죽임을,

가장 오래된 족보가 서기 천 팔백 삼십 팔 년인가 그럴 겁니다.
이 계보를 펴 보여주면서 맨 첫 번 째 줄을 가리킵디다.
그 첫 이름이 김문기 선생, 그리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아들이 당시 거창 현감 김현석 선생,
김현석 선생의 맏아들 김계훈 선생, 
밑에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바로 김문기 선생과 직계 손들의 이름이 밑으로 칠 팔명의 이름이 이어져 있더군요.
그러면서 나보고 하는 말이 너는 바로 이 첫 줄에 있다고 하더군요.
바로 직계 손이라는 말이죠.

아 그 목이 잘린 할아버지가  김문기 선생이고,
장손 할아버지가 바로 김계훈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할아버지가 김문기 선생이시라니.
그런데 할아버지의 유언에는
김문기 할아버지가 고대사 즉 중국역사 때문에 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김문기 선생을 죽인 임금 즉 세조는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지,
뭔 조카를 협박하여 왕위를 넘겨받았다는 이야기는 한 말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임금의 어린 손자를 볼모로 하고, 
왕권을 행사하여 왕위를 노리던 신하를,
세조가 죽이고 어린 손자를 구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노산군 이야기 같습디다.
노산군은 왕위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조가 죽였다는 터무니없는 말까지 하는데요 전혀 아니올시다.

그리고 우리모두가 알고 있는 사육신이란 말과 노량진의 사육신 가짜 무덤이란
말씀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사육신이란 자체가 없었습니다.

김문기 할아버지의 노비 막쇠가  흩어 졌던 할아버지 댁의 노비들을 비밀히 불러모아
가짜무덤 다섯 개를 만들어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세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김문기 할아버지 내외 무덤으로 둘,
김현석 할아버지 내외 무덤으로 둘,
그리고 한 개는 손자들의 합동무덤으로 다섯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영등포 쪽에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지만 대구노인은 두루 마리 종이를 죽 펴 보이면서
중간쯤을 가리키며,
부산 김씨가 이 부근이고,
원당 김씨는  두루 마리 종이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고 일러줍디다.
속으로는 너무 놀랐죠.

흥분 속의 며칠 후 나는 할아버지들의 이름을 알아보려고 다시 대구에 내려가
노인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들의 무덤을 이야기하자 자기는 가보지를 못했다고 합디다.
원당에 갔었다고 하면서도 안가보고 이야기만 들었다는군요. 

김문기 선생 과 김계훈 선생의 무덤이 모동에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더군요.
이 세상 그 누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이들이 이야기하는 무덤은 정안동의 무덤을 말하는 것입디다.
김문기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 김계훈 할아버지와 생사를 같이하고,
바로 노량진에 다섯 개의 가짜무덤을 만든 막쇠,
바로 그분의 무덤입니다.
죽어 혼이 되어서라도 장손들과 같이 김문기 선생의 무덤을 지키겠다고 
서쪽 방면의 이 장소에 묻어 달라고 유언 하셨다 합니다.

대구 노인이 족보들을 확인하러 여러 곳을 방문하던 중에 있었던 일이라더군요.
거창에서 모동으로  들어오는 마을에 어떤 김씨가
김계훈 선생의 후손이라면서 선생의 무덤이 자기마을 에 있다고 하여 가보았다고 합디다.
그런데 족보는 다른데 있다고 하면서 보여 주지를 않더랍니다.
마을 사람들한테 확인하여 보니 한 이 백 여년 된 옛 무덤이 마을 뒷산에 있는데, 
이 사람이 자기 조상 묘라고 하더니 김계훈 선생의 무덤이라고 한 다는군요.

내가 계보를 보여 달라고 하자 대구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보상자를
선반에서 내리려는 순간, 내가 나도 모르게 혼자말로
이놈들이 조상 벌 무서운 줄 모르고
김계훈 할아버지의 가짜무덤을 만들어하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는데,
대구노인이 황급히 내 앞에 앉더니 조상벌이 무어냐고 묻습디다.
자꾸 캐묻는걸 보니 모동에서 귀동냥은 하였는가봅니다.
모른다고 할 수 밖 에요.
모릅니다 하지, 당신은 무슨 벌을 받고 있습니까하고 물을 수는 없죠,
다 알면서 그러는 걸 나도 눈치는 조금 있죠. 
그 놈의 족보
에휴 그놈의 돈이 웬수여.
그놈의 돈만 많으면 조상벌이 두렵기나 허것슈.

모든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조상 덕이 있는 줄 아는데요 천만에 만만에 콩떡입니다
조상 덕이란 없습니다.

왜 사람으로 태어나는 줄 아십니까.
조상을 위해서입니다.
조상을 위하여 제사를 올리지 않거나, 악행과 죄를 저지르면 조상벌이 바로 뒤따릅니다.
조상 벌은 이승의 자손들은 물론이고, 저승에 있는 조상들까지 벌을 받습니다.
설날입니다.
설날에는 조상에게 제를 올릴까요 아닐까요
나는 모든 제사를 면제받았습니다.

부산 김씨가 모동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디다.
모전에 같이 가 집터를 알려주더군요.
마을 사람들도 모였더군요, 지금은 논으로 변하였죠,
노인들이 말하는데요, 지금도 깊이 갈면 기왓장이 나온다고 합디다.
내가 물었죠, 
서당을 세웠다고 그러셨는데 어디 있느냐고 하니 마을뒷산을 가리키며
저곳에 서당을 세웠는데 비가 많이 와 산사태로 파묻혔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장비가 없어서 복구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 그런데요 옆에 있던 동네 노인이 서당은 저쪽에 하며 말끝을 흐리더군요.
다른 노인이 이산이 소나무가 많아 송산이라고 한다 합디다.
이 말을 듣고 창씨 개명한 이야기가 기억 속에 서 살아나더군요.
할아버지가 모전과 석동 사이에 강이 있어 여름에는 목욕도 하였다는데
강이 있느냐고 묻자 길옆에 있는 냇가를 가리키며
여름에는 물이 많아 목욕도 하였다고 합니다.
부산 김씨는 어느 해 자기 조부가 내린 비로 불어난 저 개울 에 휩싸여 떠내려가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고 합디다.
할아버지가 말씀한 벌받은 이가 부산 김씨의 조부였더군요.
모동 초등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더군요,

이산 정상에는 네 개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무덤에만 비석이 있죠,
이 비석에 통정대부 김사발 이라고 새겨 있습니다.
며칠 전에  모전에 들렸을 때 마을에 있는 할아버지의 무덤 앞집에 사는
강노인의 안내를 받아 올라 와본 적이 있습니다.
이 네 개의 무덤은 가짜무덤입니다.
그리고 비석과 비문에 얽긴 사연도 있습니다.
비문을 적으려고 하였습니다.
한문도 배우지 않았으면서 구부리고 앉아 적는데요 자꾸 뒤가 오싹합디다.
옆에  강노인이 서있는데도 말입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무덤저쪽에서 누가 무섭게 쳐다보는군요,
그리고 온몸이 갑자기 추우면서 손이 시려 워 볼펜을 쥘 수도 없고
글자도 안보이더군요,
적다말고 그만 내려왔죠. 
강노인이 보고 있는데 내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을 할아버지가 막는가 봅니다.

부산노인이 집에서 가져온 마른 오징어와 과일 몇 개를 놓고 같이 절을 하자고 합디다.
그리고 내려와 석동 옆에 있는 마을에 무덤들이 있다고 하면서 들어가는데요,
끝 집에 있는 분들이 나와 있다가 부산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인사를 하고
서로 안부를 주고받더군요,
그런데요 이곳에서도 이상한 것이 내가 그분들에게 뭘 물어보려고 하면 
황급히 내 말을 끊으며 그분들과 말할 틈을 주지 않더군요.
이산에 있는 무덤들은 장손할아버지들의 아들들의 무덤들입니다.

경사가 이루어지고 밑에 집이 있는 곳에 오더니 여기도 무덤인데
봉분이 없어져 나무로 표시하였다고 합디다.
밑에 집에서 산밑을 바짝 파고들어 와 석축을 쌓았더군요.
둘이 절을 하고 나서 가려고 발길을 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산 김씨가 먹으라고 준 오징어를 상의저고리 주머니에 넣고 왔는데,
땅에 떨어져 있더군요.
절하면서 빠져 나온 것 같습니다.
큰 주머니 인 데 이상하다면서 오징어를 집어든 순간,
무덤에서 아이 배고파하는 소리가 들립디다.
나는 즉각 고조 할머니이시다  아 잡수세요 죄송합니다 하며 오징어를 다시 놓았습니다.
고조 할머니가 나에게 무덤을 알려주시려고 한 것이지요.  

할아버지 삼대가 노비들에게 의해 전라도로 쫓겨날 때
할머니는 노환이라 거동이 불편하시어서 집에 남기로 하셨답니다.
할머니가 궁금한 나의 할아버지가 집에와 보니 할머니는 거의 돌아가시게 되셨답니다.
할머니가 겨우 들려주신 이야기는 누구하나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모든 물건은 다 가져가고 물을 마시려고 우물에 갔더니 두레박까지 가져갔다 는 군 요
목이 마른 할머니는 밑에 개울까지 기어가 입으로 물을 마셨다고 하네요.
이들은 옥수수 한 자루를 가져와 땅문서하고 바꾸자고 하였고, 고구마 하나를
가지고 와 땅문서를 가져갔답니다.
족보들도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몰려들어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지고 이며
다 가져 갔다는 군 요.  
그 말씀을 하신 후 할머니는 세상을 하직하신 것이지요.
마을사람들은 모두 외면을 하고 할머니 시신을 옮길 지게조차 빌려주지 않았답니다.  
겨우 낡아서 버린 지게를 구하여 할머니 시신를 옮겨 구덩이를 혼자 파서
할머니시신을 묻었다는 군요,
그런데 이들은 이 밑에도 집을 짓고 집터를 넓히느라 산을  파고 들어와
할머니 무덤이 훼손될까봐 할아버지 혼자서 돌을 날라 석축을 쌓았다는 군요
할아버지의 할머니이시니 나에게는 고조 할머니입니다

 

족보를 포기하고

부산 김씨는 원당 김씨와 나와 셋이서 삼자 대면을 하자고 내려오라고 하였지요.
내가 족보를 찾아 가져가야겠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모동에 들릴 때 면, 
김씨들 중 동네에서 네 번째 집에서 머물렀다고 하십니다.
이 집하고 제일 가까운 사이로 나의 할아버지가 오시면,
이 집 할머니가 붙들고 우셨다고 하십디다.
할아버지는 땅도 밟지 않으시고 노비들의 등에서 크셨다고 합니다.
그런 귀한 자손이 모든 것을 빼앗기 고 방랑하는 처지를 매우 안타까워하며
할아버지를 붙들고 이 집에서 사실 것을 말하곤 울곤 또 말하고 울곤 하셨답니다.
얼마나 가까운 친척인지  나는 짐작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유언에 다 말해 주었다는데 나는 몰랐습니다.
그런데요 지금은 알고 있지요. 불학무식하게
알게 되었는데요,
할아버지의 인척 즉 할아버지의 처가입니다.

할아버지가 당신의 할머니로부터 (나에게는 고조 할머니죠) 들은 족보와 땅문서를
가져갔던 자들의 얼굴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답니다.
그 자들을 찾아가 되찾은 족보를 네 번째 집에 두었다고 하네요.
이 집의 사랑방에 머물러 계시던 중 측간에 가서 볼일을 보시고 나오는데,
이 집 며느리가 사랑방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더랍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부엌으로 가보니 며느리가 족보 한 권을 가지고 나와
군불을 지피려고 불 쑤시개로 쓸려고 하더랍니다.
깜짝 놀라 호통을 치고 야단을 치셨답니다. 

출타 후 돌아와 보니 족보가 없더랍니다.
족보를 어떻게 하였느냐고 묻자 세 번째 집의 갑산 이란 아이가 와서 달라고 하여
내주었다고 합니다.
갑산이 에게  추궁을 하자 진안 김씨들이 와서 부탁을 하여 심부름을 한 것이라고 합디다.
진안김씨 들에게 화를 내며 야단을 치자 족보를 만들려고 가져 왔다면서,
곧 되돌려 주겠다고 하였답니다.
할아버지가 너희들이 우리족보와 무슨 상관인데,
족보를 하느냐고 묻자 성씨를 갖지 못한 설움,
족보에 이름석자가 없어 사람들한테 받는 냉대와 무시당한 설움을
통곡하며 호소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자식들에게는 이런 설움을 넘겨 줄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하며,
빌고 빌며 선처를 호소하더랍니다.
이에 할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누구집안에 넣어 족보를 만들고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옥천에서 함양으로 이사온 사람의 집안으로 자기들의 족보를 하였다고 합디다.

노쇠한 할아버지는 이제 생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어,
조치원아들집으로 가기 위해 족보를 가져가려고 하였으나
힘이 없어 가져 갈 수 없어 남겨 놓기로 하였답니다.
가까운 집이 네 번째 집이지만,
무식한 그 집 며느리의 불 쑤시개 사건을 보고 언제 또 불을 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집에 맡기기로 하였답니다.
첫 번째 집에 사는 아이가 영리하여 글을 좀 알고 있기에 그 집에 맡기기로 하고,
그 아이에게 부탁하고 맡기셨다 는 군 요.
내가 오지 않으면 내 아들이나 내 며느리가 가지러 올 것이니 잘 보관하라고 하셨답니다.

내 말이 끝나자 부산김씨는 맞습니다 하며 족보를 내주어야한다고 합디다.
나는 부산김씨의 표정을 살폈죠, 자기어머니의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원당 김씨가 나에게 하는 말이 왜 일찍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합디다.
그 첫 번째 집에 살던 분이 김동하 이고 자기 숙부라고 합디다.
그리고 원당으로 이사를 왔다는 군 요.
몇 년 전까지 그분이 살아 계셨는데 그때에 찾아 왔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디다.
어느 날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는데,
숙부인 김동하의 집 마당에서 연기가 올라오더랍니다.
불이 난 줄 알고 급히 산에서 내려와 숙부 집으로 가보니 숙부인 김동하가 마당에서
족보를 싸놓고 불을 붙여 태우고 있더랍니다.
족보가 그때 다 타서 없다고 합디다.
안 주겠다는 심보이지요.
그러나 나는 이미 족보가 원당김씨 집에 있다는 것 알고 말 한 겁니다.

내가 대구 김노인 한테 물어보았죠,
첫 번째 김씨 집에 할아버지가 족보를 맡겨 놓았는데,
알고 있느냐고 하였더니 조카인 원당 김씨 집에 있다고 합디다.
첫 번째 집의 김씨가 김동하 라고 하며 만나보았답니다.
매우 점잖으신 분이라고 합디다.
처음에는 김해 김씨에서 김녕김씨로, 또 경주김씨로 본관을 바꾸는 것을 말렸다고 합디다.
조카가 족보를 내달라고 하였을 때도 내주지 않았답니다.
족보주인이 엄연히 있고 언젠가는 찾으러 올 것인데 하며 거절하였답니다.
그런 후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족보를 내 주었고,
대구 김노인도 그 족보를 조카인 영식이 집에서 보았답니다.
이 족보의 계보가 대구 김노인이 나에게 보여준 것이지요
이렇게 불학 무식하게 알려 준 다니까요.

내가 대구 김노인이 당신 집에서 보았다고 하였는데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하자,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여 원당으로 갔죠.
정말 내 주는 줄 알았죠.
가는 동안 이 궁리 저 궁리 하였는가봅니다.
족보를 보자고 하니 경주김씨 백촌공의 두 번째 만들었다는 족보를 내어놓습디다.
우리 할아버지의 족보를 내 놓으라고 하니까,
원당김씨는 족보를 궤짝에 넣고 보관하는데 지금은 자물쇠가 없답니다.
집안열쇠는 자기 부인이 가지고 있는데,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러 먼 지방에 갔다는 군 요.
이러니 난들 어찌 하겠습니까.
이일도 불학무식한 나에게 어떤 메시지가 아닐까요

새로 만들었다던 백촌공의 족보를 보니 모동 학교 뒷산에 있는 통정대부 비를
가지고 족보를 만들었더군요.
통정대부 비의 내용을 안다면 기절 초풍하겠지요.
비 뒷면에 보면 김 사발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알고 있으니까요 알려 드리지요
김사발은 김문기 할아버지가 사용하셨던 가명입니다.
사자가 선비 士자인데요,
이 족보는 사람인자에 선비사인 仕의 사발이더군요,
내가 이것을 지적하며 이런 엉터리 족보를 왜 만들었냐고 하였죠.
그랬더니 그 글자가 왜 틀리냐고 합디다.
내가 근거 없이 말하겠습니까.
나도 녹취록 비슷한 것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부산의 김녕 김씨가 알려 줍디다.
사람들을 만나보고 알아보려고 하면, 언제 누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적어야 하는 것이지,
맨손으로 다니면 그 내용을 어떻게 다 기억하느냐고 충고 비슷하게 말합디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쓰지 않는 노트를 반으로 잘라 가지고 다니면서 기록하고 있었죠.
적다 말은 비문을 보여주자 얼른 백촌공 족보를 뒤에 감추더군요.

나는 이때 깨달았습니다.
김동하가 할아버지의 족보로 경주김씨 백촌공 파 족보를 만든 이유를 알았던 것이지요.
대구 김노인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김동하가 김녕 김씨들과 어울렸답니다.
그 때가 바로 조치원보를 만들 때이고 둔동의 김씨에게서 나의 아버지 소식을
기대 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버지가 둔동의 김씨에게 나에게 모동 이야기를
하지 말고 족보도 하지 않으며, 모동의 조상들과 인연을 끊었으니
찾지도 말라고 신신 당부 하였다 네 요.
이에 실망한 김동하도 조카와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족보를 내준 것이라 합니다.
이 모두가 아버지가 한 일인데요,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불학무식한 내 탓이지요.

나는 족보에 대한 미련을 이때 다 버렸습니다.

이윽고 부산 김씨가 정안동의 무덤을 알려 주겠다고 하여 셋이서 갔습니다.
네 개의 무덤이 줄지어 있고 앞 무덤에만 옛 비석이 있더군요.
모동의 김사발 비도 그렇죠, 맨 앞 무덤에만 비석이 서 있죠.
부산 김씨가 그러더군요,

비석이 있는 무덤이 김계훈 할아버지의 아들인 김자용 무덤이고,
나머지 세 개는 빈 무덤이라고 합디다.
속으로는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은 할 수 없었습니다.
비석 앞에서 들여다보니 움푹 파인 곳에 자용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더군요.
내가 물었죠,
누가 김자용 이라고 새겨 놓았느냐고 하자,
부산김씨가 김녕김씨들이 써놓으면 지우고 또 써넣으면 지으면 한다고 합디다.
내가 화를 내면서 당신이 써놓았느냐고 하니 아니라고 합디다.
원당 김씨에게 그럼 당신이 써놓았느냐고 하니 마지못해 그렇다고 합디다.
석수 쟁이를 불러다 새겼다고 하는군요.
화가 난 내가 당신이 무언데 써넣었냐고 하자,
아무 말도 없습디다.
한참 후 부산김씨가 전라도 어디에선가 지명을 기억하지는 못하겠군요.
백촌 할아버지의 시제가 있다고 하면서 참석하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줍디다.

이들이 경주김씨 백촌공파를 만들었던 근거를 이 비석으로 하고 있습니다.
충의공파는 이 비석을 훼손하려 시도하였다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있습니다.
그리고요 이 비석의 주인공이 막쇠 할아버지라는 것은 어제 알려 드렸습니다.

이 네 개의 무덤 중에는  한 명의 시신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요.
뭐 어려울 것 있습니까.
바로 정감록의 비밀을 캐려는 자의 시신이 들어 있습니다.

이 무덤으로 내려오는 산줄기를 잘라 길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그 위에 또 네 개의 무덤이 있는데 모두 권씨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무덤들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비문이 새겨 져 있습니다.
본관이 없는 비문이더군요 왜, 왜.
그리고 이 무덤들은 왜 막쇠 할아버지의 무덤보다 위에 있을까요.
막쇠 할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일까요.
이 무덤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아 또 가짜무덤 이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얼음 회초리로 맞아 가면서까지.

나는 너무 지쳐 있었고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기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찾으라던 족보도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지 오래 됐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유언으로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을
물어 볼 수도 없어 답답하였죠.
족보에 의해 할아버지들의 무덤을 찾기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삶에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茅東을 찾아간 것만으로도 조상 님들에게 후손으로서 효를 다했다고
생각을 한 것이죠.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켰음을 인정하실 것으로 여긴 겁니다.

티비에서 방영하는 동물의 왕국을 나는 즐겨 봅니다.
모동에서 돌아와 때마침 방영하는 이 프로를 보며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일 미터가 넘는 기다 란 뿔을 가진 영양이 포식자들에게 잡혀 먹히는 장면인데요,
나는 왜 날카롭고 긴 뿔로 치타나 표범 같은 포식자에게 대항 한번 못해보고 
잡혀 죽는지 안타까워하며 보았죠.

이날 밤 꿈입니다.
나는 무엇 때문인지 급하게 산으로 가야했습니다.
기억 자로 구부러지는 골목에서 빠져 나와 앞이 환하게 보이는 언덕으로 뛰어가려는 순간,
언덕 위에 황소 한 마리가 영양의 뿔과 똑같은 긴 뿔이 있는 머리로
나를 노려보며 앞발 한쪽으로 땅을 탁 탁 치고,
불길이 일어나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코에서는 거센 코방귀를 꾸니 센바람이 확 일고 있습디다. 그러더니
꼬리를 뒤로 일직선 되게 쫙 세우더니,
머리를 숙여 두 뿔이 나를 향하게 하더니 질풍과 같이 달려옵디다.
저 뿔에 받치면 내 몸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하며 뒤로 돌아 뛰어 도망갔습니다.

구부러지는 동네 어귀에 오니 두 명의 형사가 앞을 가로막지 뭡니까.
이번에는 사복을 하고 나타나 나를 손가락 짓을 하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얼굴에는 웃음으로 벌겋게 달아 있습디다.
도망 오는 내가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성난 소가 달려오는데도 계속 우 습디다.
그런데요, 이상하게도 이 두 형사는 나하고 무척 친한 사이 인 것 같습니다.
내가 형사는커녕 경찰관과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데 이상합디다.
왜 저승사자가  또 나타나는 거야  하며 나는 선수를  치고 빠져나가려고
오래간만이야 하며 악수를 청하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른 손을 거두었습니다.
형사가 내 손을 잡으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승사자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음에 봐 어쩌고 하면서 옆으로 해서 골목으로 들어갔죠.
그런데요 집집마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겁니다.
성난 황소가 곧 들이닥칠 텐데 하며 발을 동동거리다가 눈을 확 떴습니다. 

할아버지들의 무덤을 찾아가지 않으면 나에게도 무서운 벌이 내린다는 경고이었지요.
있는 용기, 없는 능력, 온갖 방법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결심하고,
다시 모동으로 내려갔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란 세 번째의 김씨를 수소문하는 것 외엔 없었습니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갑산이란 이름입니다.
면사무소에 가서 찾아보았지만 없습디다.

석동마을 입구에서  일하고 있던 한 분에게 물어 보았지요,
모전과 석동에 찾아가 보면 이상하게 마을사람들이 눈에 띠지를 않더군요.
안의 어디에 산다는 소문만 들었답니다.
어머니가 들려준 할아버지의 유언에는 이 세 번째 집에 살던 김씨에게 딸이 있어
다른 성씨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내가 다시 물어보자 내가 앞서 만났던 그 아주머니라고 합디다.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내이야기를 한참동안 듣더니 집주인이 안의에 전화를 합디다.
열두 대문 집 손자가 찾아왔다고 하니 밤중인데도 그분이 오겠다는군요.
왜 내가 물었는데도 시치미를 뚝 떼고 가르쳐 주지 않느냐고 하자,
낮선 사람에게 어떻게 알려 주느냐고 합디다.
네 번째 집의 김씨네가 골목 끝 집이 맞는다고 하면서 지금은 밭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산 김씨가 그 집 자손이 맞는다고 합디다. 

삼십 분 후에 안의 김씨가 와 서로 확인을 하였죠.
김갑산은 자신의 부친으로 오래 전에 돌아가셨답니다.
군산에 친척이 있다는 말을 부친으로부터 들었을 뿐 왕래는 없었다고 합디다.
족보에 할아버지 동생으로 올라있는 군산 친척이라는 분을 말하지요.
할아버지의 유언을 듣고 모동을 어렵게 찾아 왔지만,
할아버지 무덤을 알 수가 없어 그만 포기하려고 하였으나,
꿈에 조상 님이 나타나 화를 내셔서 다시 찾아왔다고 하였죠. 
혹시 옛날 족보를 가지고 있으면 보여 달라고 하였더니,
자기 집 족보를 다른 집에 보관하고 있다며 보여 주겠다고 하는군요.
며칠 후 다시 찾아와 확인하였으나 할아버지의 이름이나 무덤위치를
족보에 올릴 리가 없지요.

나는 이때까지 착각하고 돌아 다녔지요
정말 불학 무식하게 찾아야 하는데 왜 족보에 그렇게 집착을 하였는지
지금도 어리석은 행동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분은 김녕 김씨로 하였답니다.
이 들 김녕김씨 족보는 김문기 할아버지의 장손으로 충립이라고 하였더군요.

며칠 후 안의 김씨가 전화를 했더군요,
함양에 사는 김씨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집에 옛날족보가 있다고 하니 내려와 보라고 합디다.
방에 있던 노트를 반쯤 찢어 전화번호와 주소를 받아 적고 옆에 놓았습니다.
통화가 끝난 다음 종이를 찾으니 없는 겁니다.
방안을 샅샅이 뒤져보고 쓰레기통까지 뒤져보았으나 없더군요,
아내도 내 옆에서 보았고 같이 찾아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없앴다고 그 전화번호를 모를 것 같냐고 하면서
다시 안의 김씨에게 함양 김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보려고 전화를 걸려고 하였지요. 

갑자기 목 뒷덜미에서 밑의 엉덩이 꼬리뼈 부분까지 얼음 같은 차가운 것이 흘렀는데요,
선뜻 하더군요.
꼭 얼음 회초리로 때리는 줄 알았습니다.
할아버지가 그곳에 가지 말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내가 할아버지들의 무서운 경고를 받는 것은 이미 예정 되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부산김씨와 만났을 때 마을 노인이 할아버지 무덤들이 뒷골에 있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산김씨는
뒷골로 안내하지 않고 정안동의 무덤에만 가르쳐 주더군요.
내가 뒷골의 무덤부터 가야하는데 하자,
두 김씨들이 서로 누가 가르쳐 주었지 하더군요.
이들은 뒷골의 무덤을 가리켜주지 않더군요.
뒷골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시 할아버지 무덤을 찾아야 하겠다고 결심하였을 때,
뒷골에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여유 아닌 여유를 부린 것입니다.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려 주시려면 얼굴에 바람을 조금만 뿌려 주세요

또 족보에 홀렸나 봅니다.
함양 사는 김씨가 선대의 조상이 옥천에서 이사왔다는 그 가문이라는 말에,
할아버지의 유언을 확인도 할 겸 내려가려고 한 것이지요.
할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이번 한번만 함양에 갔다온 후 뒷골로 찾아 뵙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찾지 않겠다는 것 이 아니라 며칠 후에 찾아 뵙겠다는 데 이렇게 무섭게 하십니까.

나는 함양 김씨를 만났습니다.
선대에 옥천에서 이사왔다는 것을 집안 어른한테 들었다는군요.
이 집 가문의 절손된 이의 후손으로 넣어 족보를 한 것이지요.

아 진안 김씨.
당신들만 환부역조 하실 일이지 왜 우리할아버지들까지 비싼 돈
들여가며 넣어 놓으셨나요,
우리 할아버지들은 절대로 환부역조 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불학무식하니까요.
역시나 였죠 족보가 집안 형 집에 있어서 보여 줄 수 없답니다.
전화로 약속을 해놓고, 그래서 그 먼길을 달려왔는데.

김녕 김씨 충의공파의 종손은 김이휘의 자손 중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을 
추대 하였다는군요.
아니 혈연이 가깝다는 것이 아니라 족보상에서 가깝다는 것이지요.
의성에 사는데 목수였다고 합니다.
종손으로 추대된 후 순방 길에 자기 집에도 들렸다고 합디다.
그런데요 얼마 살지 못하였다고 하고요 아직 죽을 나이는 아니라고 하는군요.

여기서 김이휘金爾輝라는 이름 주목하여 주십시오
이분의 정체를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불학 무식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팔십 년대에 족보한 이를 만나 보려고 하였더니 중풍이 들어 언어장애로
손님과 만나지 못한답니다.
육십 년대에 족보한 이도 중풍으로 고생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칠십 년대에의 부산 김녕 김씨는 며느리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다고
나보고 그럽디다.
이후의 족보한 이들의 소식도 궁금하군요
족보 한 이들이란 수단한사람을 말합니다

족보를 못 보았으나 할아버지의 유언을 확인하였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더군요.
상쾌한 마음까지 들어 저녁을 뭐 거하게 먹을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김천시내 못 미쳐 기사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죠.
커피도 한잔 뽑아 마시면서 기분 좋게 휴식을 취한 다음 차에 올라탔습니다.

아 그런데 김천IC로 가면서 머리가 어떤 압력으로 고통스럽게 하더군요.
두통도 아니고 편두통도 아니고,
헉 숨도 막혀 가쁘게 어깨로 내쉬어야만 하였지요.
고속 도로에 들어서자 더욱 심하더군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주행선으로 오십 키로 미만의 속도로 갔습니다.
손발이 굳어지고 있어 양쪽 발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손가락도 쉬지 않고 움직였습니다.
휴게소마다 들어갔지만 차 옆에서만 고통스럽게 서 있었습니다.
즐기는 커피도 싫고 소변도 보기 싫어 화장실도 가지 못했습니다. 
빨리 집에만 가고 싶더군요.
다음휴게소의 거리를 확인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또 다음휴게소 까지 가곤 하였습니다.

청주IC를 이 키로미터인가 앞둔 곳에 안내판이 보이는데 더 이상 가지 못하겠습디다.
갓길이 넓은 곳이 나오더군요.
그곳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려 승합차 문을 열고 들어가 좌석에 누었죠.
그런데 숨이 더 막혀 죽는 것 같습디다.
다시 밖으로 기어 나와  백미러의 대를 잡고 서자마자 온몸이 굳더군요.
아 죽는구나 생각하니 왜 그렇게 공포가 온 몸을 적시는지 무섭더군요,
그러면서 숨이 곧 멎어 지는 것 같습디다.

할아버지. 죽이 실 것 같으면 죽이라고 악을 썼죠,
내가 무얼 그렇게 잘못하였느냐고 소리쳤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소리는 나오지를 않습디다.
아침이 되면 내 시체를 발견하고 달려온 가족들이 얼마나 애통하겠습니까.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고속도로 옆 마을 의 불빛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승길에 오를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렇게 몸이 서 있는 걸 보니
살려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랬죠 할아버지 저를 살려주시려면 얼굴에 살짝 바람을 보내주세요 하였죠,
그래야만 몸이 풀리고 숨도 쉬고 살 것 같았습니다.

아 그랬더니요,
세 가닥의 머리털보다 가늘고 부드러운 바람이 코끝을 살짝 스치더군요.
발가락을 움직여보았죠 움직입디다.
그 다음에 손을,
그런 다음 온몸이 풀리자 숨을 쉬고 심호흡을 하였습니다.
머리는 고통스럽지만 다음 휴게소인 옥산 휴게소로 천천히 차를 몰고 갔습니다.

이렇게 위험하고 어려운 운전을 하며 드디어 오산IC를 나오니 이게 웬일입니까.
모든 고통이 싹 사라지고 기분이 상쾌하기까지 합디다.
라디오의 음악소리에 맞춰 흥얼거리며 집 마당에 도착하니 새벽 네 시의 시보가 울립디다.
김천에서 밤 여덟시 반에 출발 하였었죠.
며칠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장소가 나하고 무슨 연관이 있지 않나 하고요,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상행선 우측은  청주이고 좌측은 조치원입니다.
얼마 후 이 장소의 맞은 편에서 똑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습니다.

 

김문기 선생의 居然臺

사진
앞에서부터 김계훈 선생 무덤   김현석 선생 무덤  김문기 선생 부인 신씨 무덤 뒤에 봉분이 약간보이는 김문기선생 무덤

사진
김문기 선생 무덤과 상석 그리고 비석
비문에는 折衝將軍嘉善大夫金海金生男之墓라고 쓰여 있습니다
왼쪽에는 康熙五十六年丁酉十月初五日立碑로 새겨 있습니다
뒷면에는 長子 士善  子 士發  子 士哲이 새겨 있습니다
비석 머리에는 앞쪽에 善을 상형문자 화하여 새겼고,
뒷면에는 王을 상형문자 화하여 새겼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할아버지들의 무덤에 놓을 제수를 사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와 아내는 산소에 가본 적이 없어 어떤 제수를 사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죠.
북어와 밤 대추 산자와 과일과 술을 사왔습디다. 

새벽에 일어난 나는 다음날 일찍 떠나기로 정하고 난생 처음 오 십이 넘어서
가는 데 고유 문을 써 가지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티비를 보면 묘 앞에서 고유 문을 읽는 것을 보았죠,
그래서 나도 고유 문을 쓰기로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적었습니다.
김문기 할아버지와 김계훈 할아버지의 이름을 넣고,
그 동안 찾아보지 못한 이 못난 장손을 용서하시라고 하고,
내가 살고 있는 개방된 이 시대에 할아버지들의 무덤을
세상에 공개하도록 하자고도 썼습니다.
모동을 찾아 와 보았더니 김녕김씨 충의공 파와 경주김씨 백촌공 파로 나뉘어
서로 종손을 세우고, 서로 할아버지의 후손이라며 법정에까지 가 싸우고 있다고도 썼습니다.

깨끗한 종이에 옮겨 적을 찰나 갑자기 숨이 막히고  머리를 압박하더군요,
고속도로에서 있었던 증상입디다.
그리고는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습니다.
나는 재빨리 알아차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몸이 상쾌해 지더군요,
할아버지의 이름을 써넣은 것을 말리신 것이지요.

다시 고유 문을 썼습니다.
김계훈 할아버지를 첫 번째 장손할아버지시여, 그리고
김문기 할아버지를 장손할아버지의 할아버지시여
하고는 늦게 찾아온 것을 용서하시라고 썼죠.

밤이 되자 비가 오기 시작하더군요,
일기예보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사흘동안 온다고 합디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고 갈등이 생깁디다.
빗 길이라도 가지 아니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새벽에 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모동에 도착하여 강노인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뒷골을 알려 달라고 부탁을 하였지요. 거절을 하더군요.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시제를 지내야하니 가르쳐 달라고 계속 졸랐습니다.
이분이 경운기 사고를 당하여 뇌수술을 받았다고 하면서 먼 거리는 가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다시 말했지요.
마을 사람 한 분을 소개 하여달라고 하였지요.
안내하여 주면 수고 비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알아본다고 나가더군요.
나도 한참 후에 나오니 마을 사람들이 나와 있고 강노인이 한 분을 소개하더군요.
임씨라는 분인데요  같이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는 도중 길옆이 개울이 있고 큰바위가 있습디다.
바위 앞에 석축으로 빙 둘러 쌓여 있고 가운데는 흙과 모래가 섞여 있더군요
臺를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 앞 바위에 居然臺라고 쓰여 있더군요
여기에는 臺라고 썼습니다만 실제로는 臺의 古字로 새겨 있습니다
거연대의 居를 破字하면 尸古然臺입니다
내 선조이신 김문기 선생의 시신이 들어 있는 무덤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居然臺詩 幷 小 가 새겨 있습니다
이 글자는 몇 달후에야 발견한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고,
나만 알도록 할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개울 바닥은 바위로 되어있습디다.
길에서 한 이미터 밑에 있는데요 순간적으로 나는 깨달았죠.
이곳이 김문기 할아버지가 모든 장손들이 무사가 쳐들어오는 유사시에 자결하여
혼이 되어 할아버지 무덤으로 와 지키라는 그 장소입니다.
깊지 않아 몸을 던져도 죽지 않으니 가지고 있는 칼로 자결하라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저 글자가 무엇을 나에게 알려 줄려고 새겨 놓았는지 기억이 안 납디다.

산으로 올라가면서 내가 물어봤습니다.
할아버지가 유언으로 말씀하시길 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니 소나무가 눈에 띄지 않는군요 하였죠.
그랬더니 임씨가 그럽디다.
육 이오 동란 후 산 판으로 모두 배었다고 합디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내 몸을 톱으로 자르는 것 같은 아픔이 가슴에 일어납디다.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길을 가리키며 이 길이 당시에 산판 길로 닦은 것이라고 합디다.
김문기 할아버지와 장손할아버지들의 무덤이 있는 작은 산밑에 이르렀습니다.
임씨는 오랜만에 와봐서 올라가는 길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일직선으로 올라갑디다.   

밑에 무덤이 보입니다.
옆을 지나가며 장손할아버지무덤인데 몇 번째 장손할아버지인지
알 수가 없이 뒤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위에 이르자 임씨가 가르쳐 주더군요
여기도 묘라고 하는데 봉분은 거의 없어지고 초목만 무성합디다.
나는 그저 죄스러움에 가슴이 미어집디다.
이 할아버지의 무덤을 지나 잔 소나무를 지나자 헉 무덤들이 보이는데
제일 밑에 무덤은 봉분은 반 이상이 허물어지고 축대도 허물어져
돌들이 나 뒹굴고 있지 않겠습니까.

김계훈 할아버지 무덤인걸 나는 알고 있었지요,
임씨는 밑에 있는 묘라 제일 많이 허물어 진 거라고 말합디다.
올라가면서 속으로 성깔이 무섭더니 무덤까지도 성깔같이 무너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때까지도 김계훈 할아버지가 제일 무서웠고,
나의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유언의 주체가 김계훈 할아버지 인줄 알았습니다.
김문기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 가셨고,
모든 일을 김계훈 할아버지와 장손 할아버지들이
한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이었죠.

모든 벌은 김계훈 할아버지가 내린다고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 제는 김계훈 할아버지가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 놓으신 상석과 석관 같은
형상을 한 바위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김문기 할아버지 무덤 앞에 있는 상석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장손할아버지가 만드신 비석도 확인하였습니다

비문에는 折衝將軍嘉善大夫金海金生男之墓라고 쓰여 있습니다
왼쪽에는 康熙五十六年丁酉十月初五日立碑로 새겨 있습니다
뒷면에는 長子 士善  子 士發  子 士哲이 새겨 있습니다
사발은 모동초등학교 뒷산에 있는 무덤의 비문에 있는 그 김사발입니다
비석 머리에는 앞쪽에 善을 상형문자 화하여 새겼고,
뒷면에는 王을 상형문자 화하여 새겼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글자는 강희오십육년시월초오일입비입니다.
김생남은 김문기 할아버지의 아명이고요
사선 사발 사철은 김문기 할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장자와 자는 큰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석관모양의 바위를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안 보이는 겁니다.
어디 있지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임씨가 제일 위 묘부터 순서이니 가져온 제수를 놓으라고 합디다. 
그러나 나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과 붙어있는 
또 하나의 무덤이 누구인지 기억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김문기 할아버지 무덤 상석 밑에 무덤이 붙어 있어 절을 할 수 없게 하였더군요.
그렇다고 이 무덤 위에서 김문기 할아버지 무덤에 절을 할 수도 없잖습니까.

김문기 할아버지가 김계훈 할아버지에게 여기에는 무덤자리가 셋밖에 없으니
위에는 김문기 할아버지무덤으로 쓰고 가운데는 아들이신 김현석 할아버지의 무덤으로 쓰고
그리고 남은 한자리는 네 무덤으로 쓰라고 하셨답니다.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돌연 조치원 로타리에서 싸우는 장면이 연상되더군요.
어떤 중년의 남자 둘이 격하게 욕하며 싸우자 사람들이 구경하느라고 주위에 몰려들었죠.
힘이 센 듯한 남자가 주먹으로 때리려고 하자 키가 작고 힘이 없어 보이는
남자 옆에 있던 부인이 갑자기 달려들어 그 남자를 가로막습디다.
두 팔을 뒤로하여 힘없는 남편을 싸안으며 힘 센 남자에게 나를 때리라고 소리치자
그만 팔을 내려놓습디다.  
남편의 위기를 가로막는 장면이 회상되면서 어디에선가 아흔 아홉 살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 서야 나는 아 할머니 하였죠.

바로 김문기 선생의 부인이신 신씨 할머니 무덤입니다.
맏손자 김계훈 할아버지가 하신 일 중에는 할머니를 구출하여 모동으로 모시고 와
아흔 아홉 살까지 사셨답니다.
돌아가실 무렵 할머니는 당신의 무덤자리에 고민하는 손자에게 할아버지무덤을 파헤치는
합장을 하지 말고, 또 남은 자리는 네 자리라고 할아버지가 유언하셨으니,
내 무덤은 할아버지와 네 아버지 사이에 무덤을 쓰라고 하셨답니다.   
임씨가 또 재촉을 하는군요.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요.
그런데 이를 어쩝니까.
임씨를 그만 내려 가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합디다.

장손들이 시제를 지내려 올 때는 제수도 노비는 물론이요,
아들에게조차도 들게 하지 않습니다.
장손이 손수 등에 지고 와 진 설합니다.
노비들과 인척들은 올라오지 못하고 밑에 있어야 합니다.
장손이 김문기 할아버지에게 절을 올릴 때는 아들은 뒤로 돌아서 올라왔던
길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보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이렇게 할아버지까지 오백여 년을 끊임없이 지켜왔는데
임씨가 옆에 앉아 보고 있으니 이를 어찌한담.

어쩔 수없이 나는 김계훈 할아버지 무덤 앞에 절을 올리고, 
꿀 어 앉아 고유 문을 읽었지요.
눈물이 줄줄 흐르고 흐느끼면서 이 큰 불효를 용서하시라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진안읍사무소에서 발급 받은 전적 증명서에다 내 이름 金基台 라고 써넣었습니다.
이미 가죽 주머니를 아버지가 불태웠고,
네 이름을 네가 써넣어라 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있었기에
할아버지의 전적증명서로 대신한 것이지요.

산에 올라오면서부터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할아버지무덤에 오자
비가 그치면서 햇살이 나오더군요  허 어참
제물인 술과 과일을 먹자고 임씨에게 말했더니 술은 그 자리에 버리고
나머지는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합디다.
마을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하네요.
내려가려 할 때 내가 말하였죠.
여기에 괴상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하자,
이쪽으로 내려가면 있다고 하면서 내려갑디다.

이 산에는 바위가 없습니다.
김계훈 할아버지가 이 산에 관같이 여러 개가 파인 바위를 옮겨다 놓은 것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나자 노비들과 같이 다음해 농사철까지 이 바위를 옮겼다는 것입니다.
이 바위는 김문기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김현석 할아버지의 무덤과
김계훈 할아버지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찾아올 나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김계훈 할아버지가 노심초사 끝에 하신 일이랍니다.
나는 그저 황송할 따름이지요. 
제일 밑에 있는 장손할아버지의 무덤부근에 있더군요.

마을 회관 옆 나무그늘에서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디다.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찾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석동에 살았다는
김씨들의 행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죠.
부산 김씨가 맞는다고 하더군요.
노인 한 분이 말하는데요 나보고 조상산소를 빨리 찾았다고 합디다.
자기가 아는 어떤 분은 코앞에 두고도 마을사람들이 가리켜주지 않아
이년 후에나 찾았다고 합디다. 
가려고 일어서자 강노인 부인 이 점심을 지어 놨다고 하여
노인 한 분과 같이 식사를 하였죠.
이 노인이 조상 님이 누구냐고 물어 보기에
뒷골에 계신 분 은 오 백년 전의 역사에 나오는 유명하신 분이라고만 말하였죠.
혹시나 이렇게만 말했는데 고속도로에 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 가
걱정을 하면서 모동을 떠났습니다.

 

무덤을 손대지 못하게 임씨를 보내 말리시니

그렇게도 애타게 찾았던 모동의 김문기 할아버지무덤들을 찾았지만 기억이 사라지고 없어
유언내용을 확인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손은 할아버지들과 통한다고 하였는데,
그런 기미도 없고 두 번째 장손할아버지서부터의  무덤들도
어느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난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할아버지무덤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고요,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을 세상에 공개하여야 하는데,
절대로 남에게 알리지 말라 하였으니,
만약에 세상에 공개하면 나에게 벌주는 것은 상관없지만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벌을 줄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라 전전긍긍하였지요.

이씨조선이 멸망한지 오래됐고,
민주주의가 가치관인 지금 세상에 김문기 할아버지의 유훈인
계훈을 자식들에게 따라 달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해를 하게 설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알릴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더군요.
그리고 또 한가지 걱정은 할아버지 때부터 김씨 성을 가진 자들이
정안동의 묘비를 훼손하고 또 훼손하였다고 합니다.
원당의 경주 김씨도 묘비명을 자기가 썼다고 하였는데,
김문기 할아버지 비석과 김사발의 비석도 훼손한다면 유언내용을 확인 할 수가 없잖습니까.
묘 한기를 봉분 하는데도 수 백만원이 든다고 합디다.

할아버지 무덤은 아들이나 노비들이 접근 금지이고,
장손들이 직접 봉 분을 하고 석축을 쌓았다고 합니다.
나는 맏손자가 없으므로 혼자서 일요일마다 조금씩 하기로 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비문들을 탁본하기로 하였습니다.
아 탁본한 경험이 있느냐고요, 경험은커녕 구경도 못하였지요.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고요. 난 불학무식 하잖아요,
무 대 포로 하는 거죠.

티비에서 보았던 공사인부들이 모래를 담고 질 머지는 그 질 통을 만들었습니다.
잔디도 구입하려고 물어보았더니 일주일전에 주문을 하여야 한다고 하여서
다음에 미루기로 하였습니다.
탁본할 준비물도 구입하고 출발을 하였지요.
승합차 운전석에 앉자마자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더군요.
그러나 개의치 않고 출발을 하였습니다.
무언가 석연치 않는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가지 말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오산IC를 지나자,
안성IC로 빠져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마음속에서 강렬하게 일어납디다.
그러나 나는 고집을 부렸죠,
할아버지들의 무덤을 돌보고 탁본도 해두겠다는 건데,
내가 무슨 잘못하고 있는 가요하고 말하였죠.
그런데 자꾸만 머리를 강하게 압박을 가하고 숨도 쉴 수 없게 하더군요.
며칠전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휴게소마다 들려 심호흡을 하고 가볍게 운동도 하며 계속해서 갔습니다.

청주IC에 이르자 더욱 심하게 고통스러워 더 이상 갈 수 없어
갓길이 넓은 곳에 차를 세웠죠.
차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할아버지 제발 가게 해달라고 빌었죠.
맞은편 위 쪽 옆을 보니 지난번의 그 장소가 아닙니까.
이 장소가 뭔가 나에게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죠.
우측의 조치원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이고
좌측의 청주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이지요.
그러나 왜 할아버지들이 이곳에 나를 세웠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시 심호흡을 하며 쉬고 또 쉬고 하여 모동 입구까지 왔습니다.
여기서도 잠시 쉬고 차에 타자 이게 웬일입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상쾌해 지더군요.
할아버지들이 나를 말리지 못하신 것이죠.
무덤이 있는 산으로 가는 입구 한쪽에 차를 세우고 준비한 물건들이 들어 있는
베낭을 등에 걸머졌습니다. 
짐이 많아서 질 통은 가지고 갈 수가 없더군요. 
긴 끈 달린 가방을 앞에 메고 양손에 삽과 낫 그리고 큰 전지 가위를 들고
막 출발하려고 하는 순간,  옆에 개울에서 사람이 쑥 올라오는 겁니다.

나를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으로 안내하였던 임씨이더군요.
앗 할아버지들이 임씨를 나에게 보냈구나.
차 옆에 앉은 임씨는 내가 할아버지 무덤을 돌보려 왔다고 하자 말립디다.
산소는 함부로 건들면 큰일난다고 하면서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날을 잡아 하는 것이라고 말합디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하네요.
산소 잘못 건들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하며 오늘은 그냥 집에 가라고 합디다.
내가 물었습니다.
지금 농사철도 아닌데 여기에는 어떻게 왔느냐고 하니까
그냥 방금 왔다고 하더군요.
속으로 이 못난 후손이 고집을 피우고 오니까 임씨를 보내 만류하셨구나 하였죠.

이왕 먼길을 달려 왔으니 할아버지들에게 절이나 하고 가자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제일 아래에 있는 할아버지 무덤으로 올라가자,
그 옆으로 올라가는 길이 환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따라 올라 갔죠.
이 길을 오백년 동안 할아버지들이 김문기 할아버지에게 아침으로 올라가
문안 인사를 올렸던 것이지요.
내 눈에는 길이 빛나는 것 같습디다.

어렵지 않게 위에 올라가 김문기 할아버지부터 절을 올렸지요.
경험이 없는 나는 술을 장만하지 못하고 내가 먹으려고 사온 콜라로 대신 따라 놓았지요.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 콜라는 미국에서 만든 음료수로 모든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고 하였지요. 
무덤 위에 나있는 나무뿌리도 뽑을 수 없고,
무너진 돌들도 바로 세울 수도 없이 앉아 있다가만 내려 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옆에 도랑이 있는데,  그게 환하게 보입디다.
아 기억이 나더군요.
어느 할아버지가 내가 찾아올 때 여기가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주려고 만든 것이랍니다. 
그런데 장손할아버지 아홉 분 중에 김계훈 할아버지와
그 밑에 할아버지 그 옆의 밑에 또 한 분 올라가는 곳에 한 분 이렇게 네 분
할아버지의 무덤은 찾았는데 나머지 다섯 분은 어디에 있는 지 영 기억이 안 나는군요.

김문기 할아버지가 다른 장손들의 무덤을 따로 만들어
쳐들어오는 무사를 막으라고 하셨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나의 할아버지는 조치원에서 화장을 하셨고,
고조 할아버지는 마이산이 보이는 첫 동네에 무덤이 있으니 세분 무덤만 찾으면 되겠군요.

거연대에 와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피며 할아버지가 유언하신 내용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거연기로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전해주신 말에 의하면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을 감추려고 이곳에서 바둑두는
곳이라고 하여 둥그렇게 석축까지 쌓았다는군요.
그래서 바둑기 자인 줄 알았습니다.
이곳도 장손할아버지가 후대에 내가 찾아오면 알아보도록 바위에 새긴 것입니다.
내가 집에 들어와 옥편에서 찾은 건 데요 대의 고자라고 나와 있습디다.      
거연대 인 것이죠.

그리고 동네에 있는 무덤도 일곱 번째 장손 할아버지이신 줄 알았습니다.
마을 노인이 말하기를 무덤 옆에 길로 예전에는 위천면의 학교로 다녔다고 합디다.
모동 초등학교앞길도 할아버지들이 닦아놨다고 합니다. 
나의 고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이신 이 할아버지는 김문기 할아버지의 유훈 데로
세상이 변해오자 당신이 죽으면 무덤을 이곳에다 써라 하셨답니다
이곳에서 양쪽 길을 지키다가 무사들이 오면 막겠다고 하셨답니다.

 

조상 단에 감응하시다

나는 김문기 할아버지의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이나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도
사육신이란 말은 전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왜 사육신이라는 말이 없었는지 또 이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하였었지요.
더욱이 내가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은 영등포부근에다 할아버지가족의 가짜 무덤을
다섯 개를 만들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육신의 가짜무덤이란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없었죠.

고사가 중국역사라고 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임금한테 죽임을 당 하셨다 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고요.
우리 나라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는 상식대로
세조의 왕위찬탈 때문이라고만 알았었지요. 

할아버지 삼대가 모동에서 쫓겨 간 시기와 주모자들은 관아에서
어떻게 하였는지도 궁금하였지요.
이곳저곳을 불학무식 하게 들쑤시고 다녔습니다.
그런데요 모동에 있었던 일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 기록으로는 남아있지 않답니다. 
참 고민 많이 하였습니다.

어느 날 향토사가와 영매사 이야기가 떠오릅디다.
마지막으로 이들을 붙잡고 해결하고 싶었지요. 
97년도에는 각 티비에서 혼이나 영혼 혼령 등의 이야기가 많이 방영되더군요.
혼과 연결하는 사람을 영매사 라는 소개 자막이 나오고요,
지방의 역사 전설 등을 연구하는 사람을 향토사가 라고 티비는 자막으로 보냅디다.
나는 할아버지들과 통하고 싶었습니다.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을 공개 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향토사가와 영매사를 찾아가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알아본 결과 무당을 영매사 라고 티비에서 임의로 붙였답니다.
향토사가도 우리 나라에는 없답니다. 이것도 티비가 임의로 붙인 것이라고 합디다  .
아시죠 왜 일기예보의 모 통보관 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야 그분이 밝히기를 원래
그런 직 제는 없고 티비가 임의로 붙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티비에서 들었습니다.
아내에게 무당을 알아보라고 하였지요.
남자무당은 법사 여자무당은 보살 그러는군요.

이 법사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조상 단을 차리라고 한답니다.
내 조상이 직접 그러느냐고 하니까  법사가 그럽디다.
자기가 모시는 장군 신이 내 조상들 옆에 사셔서 물어보았더니
우리조상들이 그렇게 말하더랍니다.
조상 단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죠,
자기도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합디다.
나는 꿈도 해몽할 수 있느냐고 물었죠,  당연히 안다는 겁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일본순사복장을 한 두 사람의 저승사자가 계속 나타나는데
왜 그러는지 해몽을 하여 달라고 하니.
신장 님이라고 합디다.
내 조상 중에 높은 벼슬을 하신 분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셔서 신장이 되신 것이라고 합디다.
그 제서야 일본순사 복장을 하신 두 분이
김문기 할아버지와 아들이신 김현석 할아버지라는 것을  그리고
같이 나오는 소가 장손이신 김계훈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주일 후 이 법사가 조상 단을 설명해 주더군요.
자기도 알지 못하여  자기 신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하였답니다.
이 법사의 신 어머니는 서산에 사는 팔십 노인으로 평생동안 무당을 하였다는데 도
조상 단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며 모른다고 합디다. 
무당들의 협회에 가서 선배 무당한테 알아 가지고 왔다는 군요

적어준 대로 만물상에 가 향을 최고급인 일제로 샀습니다.
향로도 백자로 된 것으로 사고 초는 제일 큰 것으로 겉이 佛자가 길게 쓰여 있고 작은 글자로 불경이 쓰여있는 것으로 샀습니다.
평생 써도 될 것 같습디다.
공양을 담는 밥그릇도 절에서 쓰는 걸로 샀습니다.
내가자는 방에 조상 단을 차려야 한다고 해서 티비 옆 빈 공간에 밥상으로
사용하던 상을 펴놓았습니다.
며칠동안 할 것인지는 스스로  정하고 시간도 알아서 정하라는데요,
자기네는 밤 한시나 두시 사이가 기도하기가 제일 좋다고 합디다.
적어도 이 십분 에서 삼 십분 정도는 기도를 하야한답디다.
나는 이날부터 실행하기로 하였습니다.

한밤중에는 피곤하고 졸려서 저녁 여덟 시에 제를 올리고 일주일동안 기도하여 할아버지의
계시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밥을 새로 지어 올리고 과일 몇 가지를 차려 놓은 촛불을 켜고 향도 사른 다음
아내와 같이 절을 하였죠,
그리고 꿀 어 앉자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을 세상에 공개하여 달라는 말을 하려 하였으나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입에서 나오지를 않더군요.
이 법사가 알려 주기를 소망하는 것을 조상 님께 소리내어 말하라고 하였는데
못하고 말았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삼 십분이 지나가더군요.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습디다.
뜬눈으로 세웠는데도 전혀 졸음이 없고 정신이 맑으면서 온 몸이 개운하더군요.
이렇게 사흘동안 낮과 밤을 잠을 자지 않고 지냈습니다.
물론 낮에는 일도 평소에 다름없이 하였죠.
아내가 놀리더군요, 당신 무당 되는 거 아녀.
그리곤 자기 언니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신이 들려 몇 날 몇 칠을
잠을 자지 않고 공부만 합디다
당신도 잠을 자지 않으니 공부나 하시지 하며 놀려대더군요.

나흘 째되는 날밤에는 잠이 쏟아져 다음날 아침까지 한번도 깨지 않고 잤습니다.
마지막 날에야 겨우 한마디하였죠.
할아버지 공개하십시다.
이제 는 할아버지의 현몽만 기다려야지요.
조상 단을 차려놓기 전에 조상님이 현몽으로 알려 주실 것이라고 법사가 이야기하였죠.

아내에게 현몽으로 알려 주시더군요.
우리는 매년 고추농사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꿈에 고추밭에 갔는데 가지와 잎은 무성한데
그 많은 고추나무에서 고추가 열려 있지를  않더랍니다.
겨우 한 그루에서 밑에 가지에 새기 손가락 만한 고추가 딱 한 개가
열려 있는 꿈을 꾸었다는군요

조상 님이 감응하신 것이라고 법사가 말하더랍니다
그럴 수 밖에요,
김문기 선생의 혈육은 이 세상에 나 혼자 뿐입니다.
김문기 선생은 아들 한 분과 딸이 한 분으로 남매를 두었고요.
아들이신 김현석 선생은 아들만 열 두 형제를 두었지요.
김현석 선생의 맏아들인 김계훈 선생은 아들 하나만 두었고요.
김계훈 할아버지가 어머니와 열 한 명의 동생을 구출하였으나
모두 혼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습니다.
이후 아들 하나씩 두어 독자로 나에 이르기까지 계속 내려온 겁니다.

일주일의 조상단 공양이 끝난 후 아내에게 현몽을 하셨습니다.
꿈에 머리와 상반신만 거대하게 보이는 할아버지할머니가 아내를 보고 있더랍니다.
두 분의 눈에서 나오는 광채가 너무나 눈이 부셔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었다는 군요.
굳게 다문 입의 얼굴에는 위엄이 가득 차 있어 무섭기조차 하였답니다. 
아침 일찍 일하고 있는 나에게 아내가 묻습디다.
모동의 할아버지 무덤이 몇 개냐고 네 개라고 하였더니,
둥그렇게 있느냐고 또 묻습디다.  줄지어 있는 줄 무덤이라고 하였죠,
김문기 할아버지 무덤 뒤에 소나무가 울 창하느냐고 하여 그렇다고 하니까
또 꿈을 꾸었다고 합디다.

다음날에는 무덤 곁에 서있었답니다.
둥그렇게 네 개의 무덤이 있는데 제일 위 무덤에서
꿈에 나타났던 할아버지가 쳐다보시는데,
빨려 들어 갈 것 같아 몸을 지탱하느라 애를 썼답니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제일 위 무덤에서 일어나는데, 티비에서 본 토네이도와 똑같더랍니다.
무덤 뒤에는 소나무 숲인데 회오리바람이 일자 소나무들이 한쪽으로 쏠리고요,
회오리바람이 할아버지를 감싸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하늘로 올라가시더랍니다.
내가 아내에게 말하였죠.
김문기 할아버지가 당신이 우리가문의 며느리임을 확인시켜 주시려고 
감응하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해탈을 하여 주셨으나

조상 단은 계속 차려 놓고 매월일일과 보름날에 새로 지은 밥 한 그릇과
물 한 그릇만 올리라고 합디다.
유월 초하룻날입니다.
이때부터는 제일 좋은 시간이라는 밤 한시에 공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공양에 제물로 과일 몇 개도 놓았습니다.
공양이 끝나자 아내가 곶 감 한 개를 반으로 잘라 반쪽은 자기가 먹고 반쪽을
나에게 건네주며 먹어 라고 합디다.
나는 받지 안고 거절하였지요.

저녁 식사 후에는 간식과 음료수 심지어는 물도 마시지 않습니다.
다이어트 한다고 요, 만만에 말씀입니다.
먹었다 하면 체하여 소화제를 먹고 한동안 고통이 지나야 잠을 잡니다.
또 하나는 등을 벽에 기대고 먹었다 하면 체합디다.
아내는 괜찮다고 하며 먹으라고 손에 쥐어 줍디다.
할 수 없이 곶 감 반쪽을 조심스럽게 먹었습니다

역시나 였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하여 물을 먹었습니다.
사내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내발이란 단어가 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더군요.
요즈음 자주 나오는 저체온증이 아닌가 합니다.
동 내복을 입고 솜이불과 요를 깔고 덮고 이빨을 부디 치며 덜덜 떨었지요,
아내가 가져온 뜨거운 물도 마셨지만 너무 추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얼마 후 사내발이 물러가자 덥기 시작하더군요.
솜이불을 걷고 엷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였지만 이번에는 불면증이 놀자하여
잠들기는 글렀는가봅니다.
그럴 때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잠이 오도록 합니다.
그 중에도 티비에서 본 영화의 섹스 장면을 연상하면 잠이 잘 오더군요.
어느 영화인지 그런 장면을 분주하게 찾고 있는 중에 그런 장면들을
누군가 잡아당기더군요,
나도 안간힘을 쓰며 잡아당겼죠,
내 손은 어느새 굵은 동아줄을 잡고있고 섹스장면들은
네모난 거대한 바위로 변해 있더군요.
여러 가닥의 동아줄이 이 바위를 묶어 놨더군요.
그래도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거대한 바위를 잡아 당겨씁니다.

그러자 큰소리가 들립디다.  귀로 들리는 게 아니고요 정신 속에서 들리는 것이죠.
내가 들린다고 하는 표현은 귀로 소리를 듣는 게 아닙니다.
인 석아  백촌 할아버지 셔 하자마자,
내 손에 있던  동아줄과 거대한 바위는 사라지면서 도화 색 같은 밝은 빛으로 변합디다.

항상 옆으로만 구부리고 자는 나를 똑바로 눕히더니 양손을 배 위에 얹어 놉디다.
턱이 약간 위로 올라갔는지 턱을 내립디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무리 마음을 편하게 먹어도  머리 속엔 항상 티끌 같은 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이든 들었던 망상과 허상이 떠돌고 있었는데 이런 게 없지 뭡니까.

아 이런 것을 해탈이라고 하는구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니 아침이더군요.
이후에는 사내발이 없어졌고요,
한밤중에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어도 탈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알아본 바 김문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
유월 팔일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사내발로 김문기 할아버지가 나에게 알리려고 그렇게도 애를 쓰신 것이지요.

한겨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게 한 것은 김계훈 할아버지가 나에게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김계훈 할아버지의 돌아가신 때를 알리려고 하신 건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학 무식하게 알았습니다
바로 정감록을 동지에 기술한 것입니다.

유월 칠일날 밤에 처음으로 김문기 할아버지와 김현석 할아버지 제사를 지냈습니다.
간소하지만 정성 들여 만든 제물을 차려놓고 우리 부부는 절을 올렸지요.

틈만 나면 열 세살 때의 나와 어머니가 그 안방에서 마주앉아 할아버지의 유언을 전해듣는 장면을  회상하였습니다.
유언내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문기 할아버지는 감응만 하셨지 내게 어떠한 말씀도 하시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무덤에 나 있는 잡풀도 손대지 못하게 하시고 무너져 내린 돌들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니
비만 오면 나는 근심걱정에 잠을 못 이루었지요.
잘 보지 않았던 일기예보 도 열심히 보게되고 특히 거창 지방에 비 소식이 있으면
할아버지들의 무덤이 무너질 가봐 노심 초사하였습니다.
자책감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죠

아내가 나 몰래 무당이나 철학관등에가 물어 봤다는 군요
나를 조상 님들이 누르고 있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한답니다.
아내에게 신신당부하였죠.
두 번 다시 무당이나 점쟁이들을 찾아가지 말라고 할아버지들한테 벌받는다고 하였죠.

너무 신경을 썼는지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두통도 아니고 편두통도 아니고요,  머리를 무슨 큰 압력 같은 것이 조여오고
기분이 그렇게도 불쾌하고 숨도 가쁘고 합디다. 
어머니가 말해준 유언 내용을 기억하느라고 하면 더욱 심해져 견딜 수가 없더군요.

고통스러운 나는 수원의 성 빈센트 병원의 신경 정신과를 찾아갔습니다.
내가 할아버지의 유언인 고향을 찾아갔더니 김문기 선생의 무덤과 조상 님들의 무덤이 있더라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죽는 줄 알았다고 증상을 말하였죠.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의사는 죽는 것 같아도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라고 합디다.
뇌 검사를 하고 약을 육 개월 정도 먹으면 완치된다고 합디다.
그러면서 요즈음 티비 프로를 예고하는데 제목이 용의 눈물이라고 합디다.
약을 보름 치를 지어주어 복용하였지요.
마음놓고 옛날 집의 안방에서 어머니와 나를 재생하여도 괜찮더군요.
계속 복용하여야지요, 보름 후 다시 병원에 갔습니다.
역시 보름 동안 복용할 약을 조제하여 주더군요.
그런데요 내가 그랬죠, 가끔 숨이 막힐 때가 있는데 머리와 관계가 있습니까 하였더니
내과에 진단을 받으라고 하더군요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요 하자
내과의가 자기와 친하다고 하면서 전화를 하더군요.
내과로 갔습니다. 병원이 증축인가 하느라고 내과동이 임시막사로 되어있더군요.

내과 5과 에서 대기하였죠 왜 그렇게 환자들이 많은지
밖에 대기실이 있고 안에 또 대기실이 있고 그 다음에 진찰실입디다.
밖의 대기실에서 안의 대기실에 들어가는 문 옆에 혈압계가 있습디다.
간호사가 호명하고 쪽지를 주면 나와서 혈압계에 손을 집어넣고 혈압을 잰 다음 적어서 간호사가 호명하면 쪽지를 주고 진찰실로 들어가더군요,
나도 하는 순서를 유심히 보고 익혔지요.
안의 대기실로 호출되고 혈압을 재고 그 수치를 적으라며 쪽지를 주더군요
안의 대기실에 그 많던 환자들도 진찰이 끝나 약을 타러가고 밖의 대기실엔
아내가 혼자서 낮잠에 빠져 있더군요.

혈압계에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나도 혈압이 궁금하던 차에 계기 판을 보았죠.
헉 이게 웬일입니까, 내 팔의 혈압 재는 부분을 이 혈압계가 인정 사정없이 조입디다.
보는 사람도 없고 아내에게 구원을 요청하려고 해도 잠에 취해 있고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목에서 나오지를 않더군요.
계기판을 봤죠, 바늘이 왔다갔다하는데 바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릅디다.
팔이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공포에 질려 있었죠, 그러더니 혈압계가 스스로 풀더군요.
손을 빼지 않고 그냥 있었죠, 혈압계가 부드럽게 조이더니
계기판은 150에 95가 나오더군요.

진찰실에 들어간 후 의사를 유심히 보았죠.
간호사가 순서대로 준 맨 앞의 내 진찰서를 뒤에 넣더니
다른 진찰서를 보며 나보고 경과가 좋으냐고 묻습디다 의사가 순간적으로 착각하더군요.
간호사가 진찰서를 바꿨잖아요 하고 의사에게 말합디다.
다음날 여러 가지 검사를 한다고 굶고 오라는 말을 귓전에 흘리고
병원에는 지금까지 출입금지입니다.
처방 받은 보름 치의 약을 집에 와 한 봉을 먹었습니다 그런데요 더 심하더군요.
아 그 제서야 알았습니다.
어머니와의 그 기억은 상당부분 잘못 된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조화인 것을 알았습니다.
전에 처방한 약과 똑 같다고 하였는데  결국 이 약을 모두 버리고  말았습니다.

벌초를 하러 모동을 가려고 몇 번이고 별렀지만
조상 님들이 만류하고 계시다고 하니 가지 못하였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할아버지의 조화임을 알았습니다.
고집부리는 나를 간접적이지만 알려주시기 때문에 추석을 지낸 후 가기로 하였습니다.

내가 제물이 들은 배낭을 등에 매고 아내와 큰아이는 삽과 큰 전지가위 낫 등을
나눠 가지고 막내는 풀 깎는 기계를 등에 지고 올라갔습니다.
내가 가족들에게 김문기 할아버지의 무덤을 안내한다는 기쁨에
자신만만하게 앞장을 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올라가는 도중 우측 옆에 나무들을 베어 잣나무를 심어 논 곳이 있더군요.
이곳을 지날 적마다 무심히 지나갔습니다.
내가 맨 앞에서 이곳을 지나가자 얼마 못 가서 할아버지 무덤을 지나쳐 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상하다 하면서 다시 내려가 잣나무를 심어 논 곳으로 다시 왔죠.
아내와 아이들에게 잠시 쉬고 있어라 하고 올라갔습니다.
할아버지들이 계신 산으로 가는 길이 영 아닌 것 같고 계속 가보려고 하니
왜 그렇게 무서움이 전신을 엄습하는지 다시 내려 왔습니다.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영 체면이 안 서더군요.

몇 번 왔으면서도 길을 못 찾아 헤 매다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또 올라갔습니다.
이번에는 앞에 가는 길이 있으면서도 또 하나의 길이 보입디다.
내 눈으로 보는 앞의 길이 왼쪽에서 한 장면이,
오른쪽으로 다른 한 장면이 동시에 두 장면으로 보이는 겁니다.
덜컥 겁이나 다시 내려왔죠, 정말 이상하더군요.
갑자기 옆의 잣나무를 심은 위에 올라가고 싶더군요.

올라가니, 앗 할아버지 무덤이 위엄 있게 있습디다.
한 할아버지의 무덤은 옆에 있고,
다른 할아버지의 무덤은 안쪽에 잔디가 없는 붉은 흙으로 봉 분이 되어있습디다.
이 할아버지 무덤들을 알려주시려고 조화를 부리신 것을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이제서야 장손할아버지 무덤들은 다 찾은 것이죠.
할아버지, 김문기 할아버지무덤에 인사 먼저 드리고 찾아 뵙겠습니다하고
다시 가족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

김문기 할아버지 무덤이 있는 산 옆에는 조그마한 계곡이 있어 이곳에서부터 물이 시작되어
계곡으로 흘러서 거연대를 지나 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꼼꼼하게 챙겨야 하는데 융통성 없고 머리도 나쁜 내가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런 것 저런 것 생각 할 여유도 없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곳에 수초가 수북하게 있더군요.
이곳을 건너야 위로 가기에 수초를 조금 베고자 하였습니다.
막내가 지고 있던 풀 깎는 기계를 시동을 걸어 내가 등에 졌습니다.
소리가 요란하더군요.
할아버지 여기를 건너야합니다.
수초를 조금만 베겠습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한 다음 풀을 베고
김문기 할아버지 무덤으로 올라 가려하니 내가 올 땐 그렇게
잘 보이던 길이 전혀 보이질 않더군요. 할 수없이 일직선으로 내가 앞장을 서 올라가
김계훈 할아버지 무덤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내가 가지고 온 제물을 김문기 할아버지 상석에 진설하고 절을 할 때 모두 뒤로 돌아서
온 길을 바라보고 있으라고 하였죠.
김문기 할아버지의 유 훈이기 때문입니다.
상석에 제물을 차려놓고 있는데 막내가 다급한 소리로 나를 부르더군요.
풀 깎는 기계에서 휘발유가 센다고 하는군요.
아 뿔 사 할아버지의 노여움인가보다 하고 내려가 보니,
휘발유냄새가 풍기면서 휘발유로 땅이 적셔져 있더군요.
풀 깎는 기계를 자세히 살펴보니 연료통과 캬브레타를 연결하는 호스 중간이
바늘구멍만 하게 뚫려 있고 휘발유가 샙디다.
호스는 움퍽 들어가 있어서 사람이 일부러 바늘로 찌르려해도 어려운 위치에 있습니다.
연료 통의 휘발유를 다 버리고 나서 가족들이 무서워 할까봐
할아버지가 너희들이 반가우셔서 증명 해 주신 거야 하였죠.

모동을 다녀온 후 풀 깎는 기계를 수리하러가서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옆에 있던
어느 노인이 깜짝 놀라면서 묘를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난다고 합디다.
그 호스 조금 두텁더군요,
내가 바늘로 일부로 찔러도 잘 안 들어갈 것 같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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