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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이 살았던 모동을 찾아서 나에게 이상한 일이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내 거시기 두 쪽을 잡고 죽어라죽어라 하며 잡아당기는 겁니다. 내가 두발로 걷어차며 버둥거리고 있자, 옆에서 가위에 눌렸는가 보다하는 말소리에 깨어났습니다. 진땀이 나더군요. 백오미리가 쏘아 대는 조명탄이 환하게 비추어 지는 모래밭의 야전침대에서, 옆의 전우들이 잠을 못 이루고 있던 투이호아 도착 첫날밤에 일어난 가위눌림입니다. 불길한 예감으로 긴장되더군요. 다행히도 자주 나타났던 두 분의 저승사자는 나를 포기하였는지 이 전쟁터에서는 볼 수 없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점점 심해져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위에 눌려 고통스러운데 아내는 자다말고 왜 그래 잠꼬대하나 하며 옆에서 중얼거리더군요. 발버둥치다가 겨우 깨어나서 아내에게 화를 내며 야단을 쳤습니다. 아내는 내가 가위에 눌 린지 몰랐다고 하네요. 나는 가위에 잘 눌리니 내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마구 흔들어 깨우라고 하였죠. 아내가 옆에서 지켜주니 가위눌림도 은근히 사라지더군요. 그런데요, 이번에는 한 여름 밤에 매년 일어났던 일입니다. 티비는 열대야로 시민들이 잠을 자지 못했다는 뉴스를 보도할 때, 나는 동 내의를 꺼내서 옆에 두고, 솜이불도 꺼내어 옆에 두고 자야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더워서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 못하겠다고 별 이상한 사람이야 하며 밖의 원두막에서 잠을 잡니다. 사내발 이라고 임산부가 해산한 후 산후조리를 잘못하면 일어나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사내발이 일어나면 솜이불 등으로 온몸을 감싸 바람을 막아주고 뜨거운 물을 먹이는 응급조치를 한 후에 방에 불을 지피는 등 난방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내도 산후에 한번 사내발이 일어났으나 다행이 옆에 경험 있는 어른이 응급 조치해 주셔서 무사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나에게 사내발이 일어나다니 요. 그것도 겨울이라면 추위를 잘 타서 일어난다고 이해 할 수 있지만 한여름에 이게 뭡니까. 나도 덥기는 마찬가지라 윗통을 벗어버리고 갈증도 나고 하여 물 한 모금 먹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공포의 사내발이 나를 사랑한다며 껴안지 뭡니까. 나는 얼른 동 내의를 주어 입고 솜이불을 덮으며 덜 덜 덜 떨며 이빨 부디 치는 소리가 요란하지요. 아내도 능숙하게 물을 끌이며 옷장의 이불을 꺼내서 덮어주지요. 뜨거운 물을 한 모금 한 모금 먹고 한참을 떨 은 후에야 비상사태가 끝이 납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달력에다 표시해두어야겠다, 매년 같은 날짜인 것 같으니 이 날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하며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깨보면 밤중에 일어났던 사내발의 기억과 날짜를 표시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나지를 않더군요. 황당한 일은 겨울에도 일어납니다. 가장 춥다는 겨울밤에 일어나지요. 새벽이나 한밤중에 아내의 성난 목소리에 깨어보면 아 이게 웬일입니까. 내 몸에 실 호루라기하나 걸치지 않는 완전 나체지 뭡니까. 아내가 의심을 하더군요, 어디 가서 바람피우고 왔다고 족치지 뭡니까. 이 매서운 추위에 발가벗다니 요. 어느 때는 몹시 추워 눈을 뜨면 역시 완전 나체이더군요. 위풍이 있는 방이라 방바닥만 뜨겁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 지 원인을 캐어 진상을 규명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해 겨울에 내 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죠. 잠결에 내가 일어나서 내복을 벗고 팬티까지 벗을 찰나 눈을 뜨고 범인을 체포하였습니다. 아 그 범인은 바로 목이 긴 티셔츠 지 뭡니까. 아무리 추워도 목이 긴 내복이나 티셔츠는 지금도 입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기억 저녁식사를 하고 난 다음부터는 왜 그렇게 불안하고 가슴이 답답한지 숨을 못 쉬겠더군요. 아 그런데요 더욱 이상한 것은 아홉 시 뉴스를 보면 뜬 금 없이 곧 나라가 망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는 겁니다. 불학무식한 내가 무슨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정말 모를 일입니다. 나는 정치는 물론 세상일에 관심도 없이 살았죠, 내 삶이 고달프고 바빠서 이웃과 왕래하지도 않고 시내에 나가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큰아이가 군에 입대하고 둘째 애도 특전사에 자원 입대하였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 애들에게 해준 것도 없고 공부도 시키지 못하여 항상 마음이 아팠는데요 내 자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유언인 모동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조상 님들의 노여움이 있을 가봐서입니다. 그렇지만 주소를 그렇게 외웠는데도 모 하나하고 상주라는 지명밖에 없었습니다. 중학교 삼 학년 때인 것 같습니다. 역사시간에 조선조 말기에 노비들과 농민들이 봉기하여 활빈당이라고 자처하고, 부자 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르는 일이 전국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심한 지방이 경상도 상주라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할아버지들이 대문이 여러 개가 있는 부자 집에서 노비들을 부리고 살았던 고향이 상주로구나 하고 기억하여버렸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 어느 날 할아버지의 유언을 상기하고 상주의 모 로 시작하는 고향을 찾아가기로 하고 어머니에게 유언내용을 다시 들려 달라고 하였죠, 그런데요 이게 웬일입니까. 어머니는 이미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토막 난 기억을 말하면 그런 일도 있었니 난 전혀 모르겠다 하며 나에게 전해준 당시의 상황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기억을 더듬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유언임을 알았지만 내용은 기억 할 수 없다는 군요 . 그러니 나도 별 수가 없지요. 드디어 IMF가 터지더군요,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불안했던 마음이 안심이 되면서 나라 걱정이 사라집디다. 이제부터 뒤로 밀어 놓았던 할아버지들의 무덤을 찾기로 하였습니다. 98년 2월 중순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하여 상주군의 모동면과 모서면의 마을마다 노인정을 찾아갔죠. 모자로 시작되는 모동면이 아리송하더군요. 내가 기억하기로는 면 다음인 리로 기억하고 있었죠. 모서면이 그 당시 아주 심했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알려준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더군요. 내가 잘못 기억한 것이지요.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어 모동을 찾아야 하는데. 김해 김씨 無派
어른들은 너 어디 김씨냐고 물어 보죠, 아버지한테 물었더니 김해 김씨랍니다. 당연히 김해 김씨라고 대답하였죠. 한번은 어떤 어른이 묻습디다. 어디 김가냐고요, 김해 김가라고 대답했더니 상놈이구나 하더라고요. 氏라고 하면 양반이고 家라고 하면 상놈인가 보죠. 그리고선 派가 무슨 파냐고 또 묻습디다. 왠 파를. 모른다고 대답하였죠. 그랬더니 진짜 상놈이다 고 우습디다. 상놈이 어디 있고 양반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상놈에게는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는가 보죠. 아버지에게 물어 보았죠, 김해 김씨 무슨 파냐고 그랬더니 우리가문은 파가 없다고 합디다. 또 누가 물으면 무 파라고 대답하라고 하면서 묘하게 웃으십디다. 이렇게 조상에 관계되는 질문을 하면 아버지는 항상 알 듯 모를 듯 한 묘한 웃음으로 얼버무립니다. 1960년도 일겁니다. 나를 찾아왔던 중년의 경상도 아저씨의 정체가 궁금하더군요. 경상도에는 친척이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는 분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한집 걸러 경찰서이고요, 그 앞이 소방대입니다. 의용 소방대 옆 건물이 새한 인쇄소입니다. 어느 날 인쇄소 앞을 지나가다가 인쇄소 간판 옆에 또 하나의 간판이 걸려 있는 게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한문으로 김녕김씨 대동보소라고 써 있더군요. 寧 자는 몰랐습니다. 그 뒤에 신문을 보았는데, 광고란에 김녕김씨가 족보를 조치원 새한 인쇄소에서 만든다고 나와 있습디다. 그런데요 이상하게도 이 광고와 김녕김씨 대동족보라는 것이 눈에 밟힙디다. 아버지 연배 비슷한 분인데요. 방에서 가게로 나가자 나를 보더니 성큼 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네가 김성열 씨의 아들이냐고 물어봅디다. 그렇다고 하자 반갑다 많이 컸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족보 만드는데서 왔다고 합디다. 그분은 또 나에게 족보 만드는 곳에 한번 놀러오라고 하지 뭡니까. 아 나와 김녕 김씨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나는 김해 김씨인데. 저녁에 들어오신 아버지에게 물어 봤더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아버지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걸 놓치지 않았죠. 그러면 뭐합니까. 눈치도 없고 맹해서 누가 뭐라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였지. 왜, 무엇을, 어떻게, 누가 하는 의심과 의문 그리고 상상하고 추리하는 뭐 이런 게 나에게는 전혀 없었죠. 그러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의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내 기억에서 사라졌고 이 사람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김녕김씨 충의공파
족보라는 말에 호기심과 경상도에서 왔다는 분이 우리 집 아니 나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하더군요. 우리는 경상도에 친척은커녕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놀러오라는데 안 가볼 수 없었죠. 인쇄소 사무실에 들어가 물었더니 족보 만드는 사무실은 정동에 있다는 겁니다. 가리켜 주는 데 내가 전에 살던 곳이 아닙니까. 그 골목의 예전 우리 집의 맞은 편이더군요. 문을 들어서자 첫째 방이더군요. 문을 다 떼어놓아 방안이 다 보입디다. 벽 옆에 족보들이 수북히 쌓여 있고 문 쪽으로 향하여 세분이 앉은뱅이 책상을 앞에 하고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더군요. 나를 찾아왔던 경상도 그분은 오른쪽에 있습디다. 그분들 앞에는 등을 나에게 향 한 노인 한 분이 역시 앉은뱅이 책상 위에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습디다. 수줍음 많은 내가 용기를 내어갔는데요 그냥 우두커니 서서 있었지요. 그러자 나를 본 그 분이 너 왔구나 합디다. 그리고선 지금 이렇게 바쁘단다 하더니 인사들 하시죠. 이 애가 역전 앞의 김성열씨 아들입니다 하더군요. 나를 향하여 말합디다. 이분들은 각파에서 오신 분들이다 인사를 하여라 고 합디다. 나를 쳐다보기에 인사를 하자 그분들도 목례를 하더군요. 그리고 앞의 노인에게 인사를 하라는 군 요 도유사 라고 합디다. 지금은 이런 말 쓰지 않고요 무슨 족보편찬 위원회 위원장이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바빠서 도유사가 너에게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다 하니, 도유사 노인이 등을 돌려 나를 보더니 마루에 걸 터 앉으며 나보고도 옆에 앉으라고 하더군요. 도유사 노인이 나에게 한말입니다. 진천이 고향이며 족보를 만들기 위해 가산을 정리하여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군 요. 김녕김씨 족보는 해방이후 처음으로 만들며, 이곳 조치원과는 아무 연관되는 것은 없고, 단지 인쇄비가 싸기 때문에 조치원에서 만든다고 하는군요. 아무리 숙맥인 나도 들으면서 조금 이상합디다. 그리고 유명한 사람이 누구누구인데 그 중에는 국회의원도 있다고 합디다. 후원금 이야기도 하는데요, 누가 얼마 내고, 누가 얼마 냈는데, 그 국회의원은 만 오천환을 보내 왔다는 군요. 그러면서 충북도경국장은 이 만환을 보내왔다고 하면서 국회의원이 도경국장보다 못하다고 불평을 합디다. 멸치라도 몇 포 보내시지. 아시죠 누구인지, 처음으로 이 국회의원의 존함을 알았죠 그리고 나서 나보고 불쑥 해대는 말이 너의 충의공파 들이 두 패로 나누어서 파보를 만들 자느니, 이곳에서 대동보를 만들 자느니 싸우고 있다면서, 너도 파보를 만들고 싶으면 대구의 충의공파로 연락하고, 대동보를 만들고 싶으면 여기서 하라고 합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지요. 뭔 충의공파. 처음 듣는 말이지요. 경상도에서 왔다는 그분을 가리키며 나와 가까운 친척으로 부산대학교의 강사인데, 바쁜데도 불구하고 여기에와 열심히 대동보를 위해 일하고 있는데, 너의 아버지는 어찌하여 코빼기도 안 비치냐고 화가 나서 말합디다. 도유사의 설명이 끝나자 그분이 말하기를 족보를 만들려면 가첩를 가져오라고 하네요. 가첩은 또 뭐고. 그런게 전혀 없던데.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어리다면 어리고 철부지라면 철부지일 수 있는 사춘기 무렵의 나는 정말 황당할 수밖에 요. 조금만 영리하다면 할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는데도 나는 정말 숙맥인 게 확실한가봅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죠. 아버지는 또 알지 못할 소리 없는 웃음만 짓습디다. 할아버지유언에 전라도 족보를 믿으면 큰일난다는 어머니의 말을 까맣게 잊은 나는 진안에다 가첩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연락하였죠. 아버지가 거기 다 연락해보라고 하여서 입니다. 아버지는 그렇다 하여도 어머니는 말릴 것이지 정말 너무 들 한 것 아닙니까. 군산의 친척만 돈을 부쳐와 그분만 족보를 하였지, 아버지는 끝내 족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아버지는 그 족보 만드는 경상도 분과 조치원에 사는 김녕김씨 두 분을 초대하여 청요리로 대접하더군요 그런데요 김녕김씨가 드물다는 손님들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아버지는 계속해서 우리 김해 김씨는 거시기 두 쪽에 점이 있다나 어쩐다나 큰소리로 떠듭디다. 나 들으라고. 환부역조
족보를 보니깐 요 할아버지가 삼 형제로 되어있고 진안에 친척들은 둘째 할아버지로 군산의 친척은 세 째 할아버지 자손입디다. 그런데요 여기서도 맹한 나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우리조상들은 대대로 독자로 아버지까지 이어왔고 딸도 두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왜 할아버지가 삼 형제이고 대전에 사는 고모가 할아버지의 딸인가를 의심을 하지 못 한 거죠. 지금 와서 푸념해봐야 뭐 합니까, 버스는 떠나간지 몇 십 년이 되는데 이제서야 손을 든들 웃음거리 도 못 되는 거죠. 이제부터 조상 대대로 살았던 할아버지들의 고향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방법이란 나를 찾아왔던 경상도 사나이를 찾아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족보 즉 조치원 보가 군산에서 진안으로 옮겨갔다는 군 요. 군산의 그분이 병으로 고통스럽게 살다가 자손도 두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족보를 진안에서 가져갔다 네 요. 진안에 가서 족보를 보고 뒷면에 있는 봉단원 인가요 적어 가지고 왔습니다. 역시 진안이분들도 가만 두지 않았더군요. 조상 벌 무서운 줄 모르고 환부역조 한 죄 벌을 받았더군요. 아 살짝 한가지 더 호적도 증조 할아버지 아들로 만들었더군요. 그러니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죠. 이 이야기는 아직 쓰면 안 되는데. 換父易祖하는데는 족보로도 하고 호적으로도 하는가 봅디다. 충의공파의 봉단원이 지금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 데요 주소가 경남 거창 둔동으로 나왔습디다. 면이 빠져 있더군요, 어떻게 찾는담 하고 이 궁리 저 궁리 하다가 지도에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납디다. 거창군의 지도를 북쪽부터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하였죠. 북쪽에서 두 번째 칸을 본 순간 난 넋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 아 모 동리가 있지 뭡니까. 그 제서야 기억이 되 살아나더군요. 모 字로시작하는 모전이 할아버지들의 집이었고 모전 앞 동네가 석동이며 석동에는 김씨들이 네 가구가 산다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기억 나더군요. 위천면 이더군요 그 옛날 어머니가 전해 주셨던 할아버지의 유언인 고향주소가 외우기가 그렇게 어렵던 거창군 위천면 모동리가 몇 십년 후인 이제서야 기억이 납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소리높이 외쳤습니다. 한시바삐 달려가야지요. 김천에서 3번 국도로 빠져나갈 무렵입니다. 승합차를 몰고 가는 내 차를 중앙선 좌측의 대항 차들이 유심히 보고 있습디다. 운전하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옆 조수석을 유심히 들 보더군요. 나는 그 제서야 알았습니다. 얼굴을 옆으로 돌려 조수석을 보고 아 할아버지가 타셨군요. 할아버지도 기쁘시죠 하였죠. 내가 할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나의 고조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에는 고조 할아버지가 장손을 보호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장손에게 유훈을 하신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할아버지의 혼이 장손을 지키고, 그 장손 할아버지가 또 당신의 고손자을 지키며, 그 고손 할아버지가 다시 고손자을 지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본적도 없고 느낀 적도 없어서 기억 속에 사라졌었는데, 고조 할아버지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던 가봅니다. 국도의 우두령 이란 푯말이 있는 고개를 넘자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하는군요. 다시 말하였죠, 할아버지 기쁘세요. 어머니가 전해준 대로 석동의 첫 집에서 골목 끝에 있는 넷째 집까지 네 가구의 김씨들은 이미 오래 전에 모동을 떠났다 더 군 요. 가장 연장자인 노인과 첫 번째 집에 살고 있는 노인에게 유언 속의 모동을 확인하였습니다. 동학도들이 습격한 것이고, 열 두 대문 집이라고 하더군요. 사성비(四性碑)를 물어보자 김녕김씨들이 가져갔다는 겁니다. 내가 무덤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 보지 못한 것은 할아버지들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장손 할아버지들이 자신의 아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유언을 하신 나의 할아버지조차도 어머니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물을 수가 없었죠. 내가 유언 내용을 묻고 다녔다면 혹시나 내 아내와 내 자식들에게 벌을 받게 된다는 생각에 온몸이 저릴 정도였으니까요. 내가 누구입니까 불학 무식한자가 아닙니까. 경주김씨 백촌공파
석동에는 김씨들이 네 가구 살았답니다. 첫 번째 집에 살던 김씨는 이웃마을 인 원당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더군요. 마을 골목 끝에 살던 김씨를 찾았지만 왠 일인지 석동이 아니라 원당 이라고 끝가지 우기더군요. 그러면서 두 번째 집의 김씨는 일본에 살면서 연락이 안 된다는 군요. 세 번째 집의 김씨도 찾았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군산에 친척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작고한 부친으로부터 들었다고 합디다. 내가 그때서야 알았죠. 군산 친척이라고 찾아왔던 분이란 것을. 노인들이 그러더군요. 원당으로 이사간 김씨가 처음에는 김해 김씨라고 하였는데 그 조카가 김녕 김씨로 하자고 졸라서 김녕 김씨로 바꿨답니다. 그런데 그 조카가 다시 경주 김씨로 바꾸면서 종손이라고 한답니다.
어머니가 들려주신 유언에 의하면 골목 끝에 있는 네 번째의 김씨가 할아버지와 가깝다고 하였죠. 네 번째 김씨 역시 이미 작고하였고, 그분 아들인데 칠십이 다 된다고 합니다. 모전 마을 앞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잔디 손질이 되어있어 앞집에 물어보니 부산 사는 사람이 하였답디다. 전화번호를 알아 가지고 연락을 하였더니 만나자고 하여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분 말고 또 한 분을 만나야 하기에 내려간 것이죠. 둔동을 찾아 가보았지만 그분은 이미 작고하였고, 부산에 친척이 그 당시에 조치원을 갔다왔다고 그 분을 만나보라고 하여서입니다. 조치원보를 만든 그분은 대학교 강사가 아니라 부산에서 서당을 하였고 합디다. 자기도 조치원에 갔었지만 나의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고 합디다. 그러면서 집안어른들이 모동의 통정대부 묘를 벌초 한 적은 있다고 들었답니다. 이분은 물론 내가 만나본 분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족보 이야기입디다. 내가 족보 때문에 모동을 찾고 있는 줄 알고 있더군요. 족보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습니다. 이분도 역시 그러더군요 김녕김씨 충의공파로 하던지 경주김씨 백촌공파로 가던지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합디다. 허 어 참 그놈의 족보가 무언지. 이윽고 만난 모동의 김씨는 만나자마자 자기가 경주의 어느 왕릉에 능 참봉인가요 뭐 그런 것에 됐다고 자랑합디다. 그리고는 집에 올라 갈 때 반드시 대구에 있는 분을 만나야 한다고 합디다. 내 앞에서 대구에 전화를 넣더니 손님 한 분이 찾아 갈 것이라고 합디다. 내가 반드시 만나볼 분은 고교 교장을 은퇴하고 백촌공파들이 처음 족보를 만들 때의 편찬위원장이라고 하네요. 동대구에 있는 그분의 집에서 만났습니다. 자기가 처음 만들었지마는 두 번째 만들 때에는 참여하지를 않았답니다. 말들도 많고 아무나 무슨 한자로 된 쪽지 한 장이라도 가져오면 족보에 올렸다고 합니다. 만든 족보를 보내와서 살펴보니 엉터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네 얘기는 맞는 말이지만 세상사람들은 구전을 믿지 않는다고 합디다. 아니 누가 믿어달라고 이 고생을 하고 다니는 줄 아십니까. 사람들은 인쇄된 글자를 믿지 구전은 믿지 않는다면서 인쇄된 문서가 없느냐고 자꾸 묻더군요. 우리 할아버지들은 절대로 문서를 만들지도 않았고, 손자를 데리고 할아버지 무덤으로 가서 입으로 유훈을 알려주셨고, 할아버지들이 조상 대대로 왜 이곳에서 살고있는지를 문서가 아닌 말로 가르쳐왔고, 조상이 누구인지 자식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는데 누가 알아달라고 말을 하였나요, 믿어달라고 말 한 적이 있나요. 그래 나는 불학무식해서 문서나 책 같은 것 물려받은 것 일절 없다 됐냐. 그리고 왜 김씨 타령들 하시나, 충의 공은 무어고 백촌 공은 또 뭐여. 나는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조상 님들의 무덤을 찾을 뿐입니다 하자 종손을 만든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 일 순위가 부산 김씨인데 자기는 사양한다고 하여 원당의 김씨로 정했답니다. 그러나 자기는 관여하지 않아 다고 하네요, 어째 듣기가 한발 빼는 것 같습디다. 내가 족보들을 보자고 하니 지금은 없고 계보를 만들었다고 합디다. 상자 속에 두루 마리 종이가 여러 개 있습디다. 그래프 용지를 반으로 잘라서 여러 장 붙여 놓은 것인데 요, 펴 보이자 이름들만 죽 적혀 있더군요. 한 두루 마리가 족보 한 질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더군요. 아! 김문기 선생, 고대사의 비밀 때문에 죽임을,
가장 오래된 족보가 서기 천 팔백 삼십 팔 년인가 그럴 겁니다. 이 계보를 펴 보여주면서 맨 첫 번 째 줄을 가리킵디다. 그 첫 이름이 김문기 선생, 그리고 밑으로 내려오면서 아들이 당시 거창 현감 김현석 선생, 김현석 선생의 맏아들 김계훈 선생, 밑에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바로 김문기 선생과 직계 손들의 이름이 밑으로 칠 팔명의 이름이 이어져 있더군요. 그러면서 나보고 하는 말이 너는 바로 이 첫 줄에 있다고 하더군요. 바로 직계 손이라는 말이죠. 아 그 목이 잘린 할아버지가 김문기 선생이고, 장손 할아버지가 바로 김계훈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할아버지가 김문기 선생이시라니. 그런데 할아버지의 유언에는 김문기 할아버지가 고대사 즉 중국역사 때문에 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김문기 선생을 죽인 임금 즉 세조는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지, 뭔 조카를 협박하여 왕위를 넘겨받았다는 이야기는 한 말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임금의 어린 손자를 볼모로 하고, 왕권을 행사하여 왕위를 노리던 신하를, 세조가 죽이고 어린 손자를 구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노산군 이야기 같습디다. 노산군은 왕위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조가 죽였다는 터무니없는 말까지 하는데요 전혀 아니올시다. 그리고 우리모두가 알고 있는 사육신이란 말과 노량진의 사육신 가짜 무덤이란 말씀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사육신이란 자체가 없었습니다. 김문기 할아버지의 노비 막쇠가 흩어 졌던 할아버지 댁의 노비들을 비밀히 불러모아 가짜무덤 다섯 개를 만들어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세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김문기 할아버지 내외 무덤으로 둘, 김현석 할아버지 내외 무덤으로 둘, 그리고 한 개는 손자들의 합동무덤으로 다섯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영등포 쪽에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지만 대구노인은 두루 마리 종이를 죽 펴 보이면서 중간쯤을 가리키며, 부산 김씨가 이 부근이고, 원당 김씨는 두루 마리 종이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고 일러줍디다. 속으로는 너무 놀랐죠. 흥분 속의 며칠 후 나는 할아버지들의 이름을 알아보려고 다시 대구에 내려가 노인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들의 무덤을 이야기하자 자기는 가보지를 못했다고 합디다. 원당에 갔었다고 하면서도 안가보고 이야기만 들었다는군요. 김문기 선생 과 김계훈 선생의 무덤이 모동에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더군요. 이 세상 그 누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이들이 이야기하는 무덤은 정안동의 무덤을 말하는 것입디다. 김문기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 김계훈 할아버지와 생사를 같이하고, 바로 노량진에 다섯 개의 가짜무덤을 만든 막쇠, 바로 그분의 무덤입니다. 죽어 혼이 되어서라도 장손들과 같이 김문기 선생의 무덤을 지키겠다고 서쪽 방면의 이 장소에 묻어 달라고 유언 하셨다 합니다. 대구 노인이 족보들을 확인하러 여러 곳을 방문하던 중에 있었던 일이라더군요. 거창에서 모동으로 들어오는 마을에 어떤 김씨가 김계훈 선생의 후손이라면서 선생의 무덤이 자기마을 에 있다고 하여 가보았다고 합디다. 그런데 족보는 다른데 있다고 하면서 보여 주지를 않더랍니다. 마을 사람들한테 확인하여 보니 한 이 백 여년 된 옛 무덤이 마을 뒷산에 있는데, 이 사람이 자기 조상 묘라고 하더니 김계훈 선생의 무덤이라고 한 다는군요. 내가 계보를 보여 달라고 하자 대구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보상자를 선반에서 내리려는 순간, 내가 나도 모르게 혼자말로 이놈들이 조상 벌 무서운 줄 모르고 김계훈 할아버지의 가짜무덤을 만들어하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는데, 대구노인이 황급히 내 앞에 앉더니 조상벌이 무어냐고 묻습디다. 자꾸 캐묻는걸 보니 모동에서 귀동냥은 하였는가봅니다. 모른다고 할 수 밖 에요. 모릅니다 하지, 당신은 무슨 벌을 받고 있습니까하고 물을 수는 없죠, 다 알면서 그러는 걸 나도 눈치는 조금 있죠. 그 놈의 족보 에휴 그놈의 돈이 웬수여. 그놈의 돈만 많으면 조상벌이 두렵기나 허것슈. 모든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조상 덕이 있는 줄 아는데요 천만에 만만에 콩떡입니다 조상 덕이란 없습니다. 왜 사람으로 태어나는 줄 아십니까. 조상을 위해서입니다. 조상을 위하여 제사를 올리지 않거나, 악행과 죄를 저지르면 조상벌이 바로 뒤따릅니다. 조상 벌은 이승의 자손들은 물론이고, 저승에 있는 조상들까지 벌을 받습니다. 설날입니다. 설날에는 조상에게 제를 올릴까요 아닐까요 나는 모든 제사를 면제받았습니다. 부산 김씨가 모동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디다. 모전에 같이 가 집터를 알려주더군요. 마을 사람들도 모였더군요, 지금은 논으로 변하였죠, 노인들이 말하는데요, 지금도 깊이 갈면 기왓장이 나온다고 합디다. 내가 물었죠, 서당을 세웠다고 그러셨는데 어디 있느냐고 하니 마을뒷산을 가리키며 저곳에 서당을 세웠는데 비가 많이 와 산사태로 파묻혔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장비가 없어서 복구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 그런데요 옆에 있던 동네 노인이 서당은 저쪽에 하며 말끝을 흐리더군요. 다른 노인이 이산이 소나무가 많아 송산이라고 한다 합디다. 이 말을 듣고 창씨 개명한 이야기가 기억 속에 서 살아나더군요. 할아버지가 모전과 석동 사이에 강이 있어 여름에는 목욕도 하였다는데 강이 있느냐고 묻자 길옆에 있는 냇가를 가리키며 여름에는 물이 많아 목욕도 하였다고 합니다. 부산 김씨는 어느 해 자기 조부가 내린 비로 불어난 저 개울 에 휩싸여 떠내려가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고 합디다. 할아버지가 말씀한 벌받은 이가 부산 김씨의 조부였더군요. 모동 초등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더군요, 이산 정상에는 네 개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무덤에만 비석이 있죠, 이 비석에 통정대부 김사발 이라고 새겨 있습니다. 며칠 전에 모전에 들렸을 때 마을에 있는 할아버지의 무덤 앞집에 사는 강노인의 안내를 받아 올라 와본 적이 있습니다. 이 네 개의 무덤은 가짜무덤입니다. 그리고 비석과 비문에 얽긴 사연도 있습니다. 비문을 적으려고 하였습니다. 한문도 배우지 않았으면서 구부리고 앉아 적는데요 자꾸 뒤가 오싹합디다. 옆에 강노인이 서있는데도 말입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무덤저쪽에서 누가 무섭게 쳐다보는군요, 그리고 온몸이 갑자기 추우면서 손이 시려 워 볼펜을 쥘 수도 없고 글자도 안보이더군요, 적다말고 그만 내려왔죠. 강노인이 보고 있는데 내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을 할아버지가 막는가 봅니다. 부산노인이 집에서 가져온 마른 오징어와 과일 몇 개를 놓고 같이 절을 하자고 합디다. 그리고 내려와 석동 옆에 있는 마을에 무덤들이 있다고 하면서 들어가는데요, 끝 집에 있는 분들이 나와 있다가 부산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인사를 하고 서로 안부를 주고받더군요, 그런데요 이곳에서도 이상한 것이 내가 그분들에게 뭘 물어보려고 하면 황급히 내 말을 끊으며 그분들과 말할 틈을 주지 않더군요. 이산에 있는 무덤들은 장손할아버지들의 아들들의 무덤들입니다. 경사가 이루어지고 밑에 집이 있는 곳에 오더니 여기도 무덤인데 봉분이 없어져 나무로 표시하였다고 합디다. 밑에 집에서 산밑을 바짝 파고들어 와 석축을 쌓았더군요. 둘이 절을 하고 나서 가려고 발길을 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산 김씨가 먹으라고 준 오징어를 상의저고리 주머니에 넣고 왔는데, 땅에 떨어져 있더군요. 절하면서 빠져 나온 것 같습니다. 큰 주머니 인 데 이상하다면서 오징어를 집어든 순간, 무덤에서 아이 배고파하는 소리가 들립디다. 나는 즉각 고조 할머니이시다 아 잡수세요 죄송합니다 하며 오징어를 다시 놓았습니다. 고조 할머니가 나에게 무덤을 알려주시려고 한 것이지요. 할아버지 삼대가 노비들에게 의해 전라도로 쫓겨날 때 할머니는 노환이라 거동이 불편하시어서 집에 남기로 하셨답니다. 할머니가 궁금한 나의 할아버지가 집에와 보니 할머니는 거의 돌아가시게 되셨답니다. 할머니가 겨우 들려주신 이야기는 누구하나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모든 물건은 다 가져가고 물을 마시려고 우물에 갔더니 두레박까지 가져갔다 는 군 요 목이 마른 할머니는 밑에 개울까지 기어가 입으로 물을 마셨다고 하네요. 이들은 옥수수 한 자루를 가져와 땅문서하고 바꾸자고 하였고, 고구마 하나를 가지고 와 땅문서를 가져갔답니다. 족보들도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몰려들어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지고 이며 다 가져 갔다는 군 요. 그 말씀을 하신 후 할머니는 세상을 하직하신 것이지요. 마을사람들은 모두 외면을 하고 할머니 시신을 옮길 지게조차 빌려주지 않았답니다. 겨우 낡아서 버린 지게를 구하여 할머니 시신를 옮겨 구덩이를 혼자 파서 할머니시신을 묻었다는 군요, 그런데 이들은 이 밑에도 집을 짓고 집터를 넓히느라 산을 파고 들어와 할머니 무덤이 훼손될까봐 할아버지 혼자서 돌을 날라 석축을 쌓았다는 군요 할아버지의 할머니이시니 나에게는 고조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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