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독립운동가. 자는 순오(舜五), 호는 부재(溥齋).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
사진 / 이상설 생가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H.B.헐버트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를 익혔다.
사진 / 이상설 존영을 모시고 있는 곳. 숭렬사
1894년(고종 31) 식년문과에 급제, 성균관 교수 겸 관장 등을 거쳐 궁내부특진관·학부협판·법부협판·의정부참찬 등을 지냈다. 1904년 일본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서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고,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회장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고 자결을 기도하였다.
사진 / 이상설 생가에 피어 있는 무궁화.
1906년 이동녕(李東寧)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으며,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했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했다.
사진 / 이상설 생가 옆의 숭렬사 앞 .
1910년 국권피탈 뒤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 등과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했다.
사진 / 이상설 생가.
그 뒤 11년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보》를 발행했으며, 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 등과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고 15년 상하이〔上海〕 영국조계(英國租界) 안에 박은식(朴殷植) 등과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사진 / 이상설 동상- 이상설 생가에 세워져 있습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여행일 / 2009. 07. 24.
사진 / 김 강 한
사족 - 나도 어린 시절 이런 초가집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시절가지 살았습니다. 그 시절이 그리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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