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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구려의 건국신화
「옛날 북이의 탁리국왕의 시비가 임신하였으므로 왕이 죽이려고 하니 시비가 변명하여 말하기를 크기가 닭 알 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나에게 내려왔기 때문에 임신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시비가 후에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것을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서 덥게 해주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또 그것을 마구간에 넣었더니 말이 역시 입김으로 불어 주어서 죽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왕은 그것을 하늘의 아들인 줄 알고 그 어머니에게 명령하여 기르게 하였다. 그의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소,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므로 왕은 그가 왕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여 버리려 하였다. 동명이 이 기미를 알고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떠서 다리를 놓았으므로 동명이 건너갈 수 있었다. 동명이 건너간 후 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져서 추격하여 오던 군사들이 건너가지 못하였다. 동명이 이에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왕이 되었으므로 북이가 부여국을 가지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BC 37년에 주몽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로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2. 영토확장과 전성기
고구려는 소수림왕(재위 371∼384) 때 불교 공인과 태학설립(372), 율령반포(373) 등으로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이 구축되었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북으로는 후연을 쳐서 요동을 차지하고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중국의 남 ·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등 새외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체결하였다. 472년(개로왕 18)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사를 청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목표는 한강 유역이며, 그 요충지는 충주지방이었다. 475년 결국 그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패사시켜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아산만까지 진출,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죽령이북의 땅을 잃었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은 494년 부여를 복속시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을 겨루었다.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가 당시의 광대한 판도를 밝혀주고 있다.
3. 멸망과정
6∼7세기 초의 정세를 보면, 589년 나제동맹이 체결되고 신라 진흥왕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위 ·진 ·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
고구려 영양왕은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상실하자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서진정책을 단행, 요서지방을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충돌하였다.
수나라는 약 30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왔으나,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이었다.
이로써 수나라는 618년 내란이 일어나서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는 당나라에 대한 태도가 더욱 강경하였고, 당나라와 연결한 신라를 백제와 더불어 자주 공격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을 평정하였으며,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이적·장량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약 60일 사투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2차 ·3차(647년 ·648년)에 걸쳐 이적 ·우진달·설만철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68년(보장왕 27) 나 ·당 연합군과의 싸움에 패함으로써 주몽 이래 700여 년을 이어온 고구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당시의 내정은 70여 년에 걸친 수 ·당나라를 비롯한 거란 ·신라와의 투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은 많은 국력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독재는 민심을 혼란시켰고, 666년 연개소문이 병사한 후 남생·남건·남산세 아들의 불화로 지도층이 분열되었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고,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나 ·당 연합군은 668년 김인문이 이끈 27만의 신라군과 이적 ·설인귀가 이끈 당나라 군사 50만으로 평양성을 공격 ·함락시켰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설인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 42주(州)로 나누어 지배하는 한편, 2만 8200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신라
시조 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하였다. 국호는 신라·신로사라 서나·서야·서라·서벌등으로 불렀는데, 모두 마을을 뜻하는 사로로 해석된다.
신라는 《삼국사기》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① 상대(上代:시조∼28대 진덕여왕, BC 57∼AD 654)는 원시부족국가 ·씨족국가를 거쳐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골품제도가 확립된 시기이다. ② 중대(中代: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는 삼국을 통일하고 전제왕권(專制王權)이 확립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③ 하대(下代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골품제도의 붕괴, 족당(族黨)의 형성 및 왕권의 쇠퇴로 호족(豪族) ·해상세력이 등장하고 멸망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밖에 29대 무열왕 이전을 삼국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1. 상대
신라의 모체는 진한(辰韓) 12개 성읍국(城邑國)의 하나인 사로(斯盧:慶州 ·月城)였는데, 사로국은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及梁),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沙梁), 취산(山)의 진지촌(珍支村:本彼),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漸梁),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漢祗),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 등 6개촌과 6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해서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BC 57년이 건국연대로 되어 있으나 사로국이 성립된 것은 이보다 빠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는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곁에 있던 알[卵] 속에서 나온 아이인데, 고허촌장인 소벌공(蘇伐公)이 데려다 길렀다. 혁거세의 나이 13세가 되자 6부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왕호를 거서간(居西干:君長),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혁거세는 즉위 후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았는데, 알영은 사량리(沙梁里)의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용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조의 난생설화(卵生說話)는 신라의 건국설화라기보다는 6부족의 연맹체인 사로국의 전설로 짐작되고 있다. 사로국을 모체로 하였던 초기의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의 3성(姓) 중에서 왕을 추대하고 이들이 주체가 되어 6부족의 연맹체를 이끌어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대륙과 멀리 떨어진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간헐적으로 경주분지에 정착한 유리민(流離民) 집단의 이질적 요소 등으로 3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발전하였다.
4세기에 들어 내물왕이 거서간(居西干:제사장) ·차차웅(次次雄:무당) ·이사금(尼師今:계승자)으로 변천한 왕호를 마립간(麻立干:통치자)으로 개칭하고, 3성 중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면서 고대국가의 실질적 시조로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는 377년, 광개토왕이 국위를 떨치고 있던 고구려와 국교를 맺고, 볼모를 보내어 화친정책을 썼으며, 377년과 382년에는 고구려의 알선으로 중국의 전진(前秦)에 사신(使臣)을 보냈다.
또한 내물왕은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괴롭히자 399년 고구려에서 5만의 원병을 얻어 백제군과 합세하여 왜구(倭寇)를 무찔렀다. 눌지왕 때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427) 등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자 그 대비책으로 백제와 나제공수동맹(羅濟共守同盟)을 맺었고, 왕권의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막기 위해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다.
20대 자비왕은 중앙집권화를 위해 경주의 방리명(坊里名)을 정하였고(469), 소지왕은 지방의 귀족을 중앙으로 흡수하는 한편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市肆]을 열어 물화(物貨)의 원활한 유통을 꾀하는 등 서정쇄신에 힘썼으며, 대외적으로는 백제의 동성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양국의 관계를 더욱 굳게 하였다(493).
지증왕 때에는 왕권강화와 내물왕계의 혈족결합을 전제로 왕위의 세습제를 확립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통치자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개칭하였고, 지방에 주 ·군 ·현(州郡縣)과 2소경(小京)을 두어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의 기반을 굳혔다.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어 실직주(悉直州)의 군주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정벌하게 하여 이를 신라영토에 편입시켰다(512).
왕권의 안정기에 들어간 신라는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律令)을 공포하고(520), 백관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528), 불교를 공인하고,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법흥왕 23년을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으며(536), 병부(兵部)와 상대등(上大等) 등 새로운 관제를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이룩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南朝)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대가야국(大伽倻國:高靈地方)의 혼인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회유하였으며, 524년에는 왕 자신이 남쪽의 경계를 순시하여 국경을 개척하였고, 532년에는 본가야(本伽倻:金官國)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이어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인 죽령(竹嶺) 이북에서 고현(高峴:鐵嶺) 이남에 이르는 고구려 10군(郡)을 점령하였다. 또한 백제를 공격하여(553) 한강 유역의 백제영토를 전부 차지하여 이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신주(新州:漢山州)를 두었으며, 이로써 120년간 지속되어온 나제동맹은 깨어졌다. 진흥왕은 낙동강 유역에도 손을 뻗쳐 562년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게 되어 합천(陜川)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백제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동북 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안변(安邊)에 비열흘주(比列忽州)를 설치(556)하고 이원(利原)의 마운령(摩雲嶺)까지 진출하여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단양의 적성비(赤城碑)와 창녕 ·북한산 ·황초령(黃草嶺) ·마운령에 세워진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가 웅변하여 주고 있다. 이후 당항성(黨項城:南陽灣)을 거점으로 하여 중국(陳 ·北齊) 통로의 관문으로 삼았다.
이어 진평왕은 관제의 정비에 힘써 위화부(位和府) ·조부(調府) ·예부(禮府) ·승부(乘府) 등을 신설하여 관부를 직능별로 조직화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수(隋) ·당(唐)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선덕여왕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침공을 본격화하였으며, 이로 인해 나 ·당(羅唐) 통로의 거점인 당항성도 크게 위협을 받았고, 백제는 대야성(大耶城:陜川)을 점령하여 백제와의 서부국경은 경산(慶山)까지 후퇴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유신을 압독주(押督州:慶山)의 군주로 삼아 대처하였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적극화하여 당에 유학생 ·유학승도 보냈다.
647년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의 반란을 진압한 뒤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김춘추 ·김유신 일파는 진평왕의 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중앙 관제를 정비 개편하여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로 분리하고 좌 ·우 이방부(左右理方部)를 설치하는 한편,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의장인 상대등(上大等)을 상징적인 위치로 바꾸고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侍中)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귀족층에 의한 관직독점이 배제되는 등 권력구조에 변혁이 일어나 귀족연합정치가 무너지고 전제왕권이 성장하게 되었다.
2. 중대
신라 진덕여왕 때 정권을 주도하였던 진골(眞骨) 출신의 김춘추가 상대등 알천(閼川)의 양보로 왕에 추대되어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자 성골(聖骨) 출신의 왕계는 진덕여왕으로 끝나고 이로부터 진골출신의 왕계가 비롯되었다. 무열왕은 당나라에 청원하여 나 ·당 연합군을 편성, 백제를 멸망시켰고(660), 문무왕은 백제의 부흥항쟁을 진압하는 한편 역시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그러나 당나라는 일방적으로 백제의 고토(故土)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자국의 관리와 군대를 주둔시켰고, 신라마저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라 하고 문무왕을 계림도독에 임명하였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는 등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획책하였다. 신라는 당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검모잠(劍牟岑)의 고구려 부흥군을 도와 당에 대항하도록 하였고, 또한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 이하 4,000여 호(戶)의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 금마저(金馬渚:全北 益山)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게 하는 등 영토의 잠식투쟁을 하였다.
671년 신라는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泗省:扶餘)을 빼앗아 당군을 몰아내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675년에는 당의 20만 병력을 매초성(買肖城:仁川) 등지에서 섬멸하고 676년에는 서해를 통하여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錦江下流)에 쳐들어온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부대를 격파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백제 멸망 후 16년간 존속하여온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게 되었고, 위축된 당나라의 세력은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도 만주의 요동성(遼東省:遼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동강에서 원산만으로 이어지는 선의 이남에 이르는 반도를 통치하게 된 신라는 역사상 최초의 단일 왕국에 의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어 이로부터 통일신라시대가 개막되었다. 통일신라는 3배로 늘어난 영토를 조직적 ·능률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제왕권의 확립을 위한 지배체제의 정비 및 개편과 새로운 문화창조에 힘썼다.
신문왕은 중앙관부에 예작부(例作府)와 공장부(工匠府)를 설치, 당나라 6전(典) 조직과 비슷한 정무(政務)분담형식의 집사부(執事部) 이하 14관부를 완성하여 일원적 지배체제를 이룩하였다. 지방제도에 있어서는 전국을 9주(州)로 나누어 그 밑에 군(郡) ·현(縣)을 두었으며, 요소에 5소경(小京)을 두어 이곳에는 서울인 경주와 같이 6부제를 실시하고 왕이 때때로 순주(巡駐)하였다.
그리고 지방세력의 억제책으로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실시하고 689년에는 녹읍제(祿邑制)를 폐지하였다. 통일신라는 성덕왕(702∼737) 때 극성기(極盛期)를 맞이하였고, 통일 후 120여 년 간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 오늘날 안압지 ·임해전 ·포석정 등이 당시 상류사회의 호화로운 한 모습을 전하여 주고 있다.
3. 하대
통일신라시대의 사회적 안정과 전제적(專制的) 관료제는 귀족 세력의 대두를 유발하여 경덕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한화정책(漢化政策)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하고 지방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녹읍제도를 부활하였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의 왕권도전이 표면화하여 768년(혜공왕 4) 김대공(金大恭)의 난을 시발로 96각간(角干)에 의한 반란이 3년간 계속되다가 내물왕의 10대손 김양상(金良相)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가 신라 하대의 첫 왕이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족당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왕권의 강화책으로 골품에 의한 소수 귀족의 관직독점을 방지하고 관리를 인재 본위로 등용하기 위해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科擧의 일종)를 설치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는데, 이는 내물왕계의 원성왕이 왕위를 이으면서부터 무열왕계의 반격이 개시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헌덕왕 때에 이르러 무열왕계인 웅주도독(熊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은 앞서 선덕왕이 죽었을 때 왕위에 오른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내물왕계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부르고 한때 청주 ·충주 ·김해 등지를 장악하였으나 토벌되었다. 왕위의 쟁탈전은 흥덕왕 이후에 더욱 격화되어 민애왕은 희강왕을 살해하여 즉위하고 신무왕(839)은 민애왕을 살해하여 즉위하였으며, 하대의 기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재위 1년 미만의 왕이 4명이다.
이와 같은 왕권의 불안정은 중앙의 행정체제를 뒤흔들어 귀족연립적인 정치형태로 변질되고 정치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는 군진(軍鎭)을 근거로 한 해상세력이 등장하였다. 군진은 9세기에 들어 해적이 발호(跋扈)하면서 이에 대처해서 설치된 청해진(淸海鎭:莞島) ·당성진(唐城鎭:南陽) ·혈구진(穴口鎭:江華) 등인데, 이 가운데 완도의 청해진이 해상세력의 중심이었다.
청해진은 828년 당나라에서 활약하다 돌아온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것으로, 그는 1만의 병력으로 해적을 일소하고 해상권을 장악, 신라와 당나라 ·왜국 사이의 무역을 관장하여 해상의 패자(覇者)로 군림하였다. 그는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앞서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민애왕을 살해하여 신무왕을 즉위시키는 등 막강한 실력을 행사, 그의 딸을 문성왕에게 차비(次妃)로 바쳐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히려다 실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이와 같이 왕권이 무력에 의해 유린되어 통치체제가 무너지자 지방에서는 새로운 호족(豪族) 세력이 형성되어 행정 ·징세권까지 장악하여 농민을 수탈하는 등 중앙의 경제기반을 잠식하였다. 진성여왕에 이르러 국정의 문란은 절정에 달하여 나라에서는 조세조차 거두지 못할 정도였고, 호족 ·군도(群盜)들에 시달린 백성들은 일본 ·중국 등으로 유망(流亡)하거나 사병(私兵) ·도둑 등으로 변신하였다.
중앙의 정치적 부패와 통치권의 무정부상태에 따라 지방에서는 군호(群豪)가 나타나 북원(北原:原州)의 양길(梁吉), 죽주(竹州:竹山)의 기훤(箕萱)과 적고적(赤袴賊) ·초적(草賊) 등이 무리를 지어 발호하였다. 이 중에서 전라남북도지방을 차지한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세우고, 강원도 북부 ·경기도 ·황해도 및 평안도지방을 차지한 궁예(弓裔)는 마진국(摩震國)을 세웠으며, 신라의 세력은 지금의 경상남북도를 차지하는 데 그쳐 이로부터 한반도는 얼마 동안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전개된다.
918년 후삼국 중 가장 강대하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의 신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자 신라의 경명왕은 이를 기존국가로 인정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수호하였다. 927년 견훤은 신라의 서울 경주까지 침범하여 경애왕을 잡아 자살하게 하고 왕제(王弟) 경순왕을 즉위시켜 신라의 국가적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935년 신라의 국토는 더욱 축소되어 민심은 고려로 기울어 나라를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경순왕은 마지막 화백회의(和白會議:君臣會議)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에 가서 그 절차를 밟았다.
고려의 태조는 경순왕을 정승(政丞)에 배(拜)하여 태자의 상위(上位)에 예우하고,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여 매년 1,000섬의 녹(祿)을 주었다. 이로써 시조로부터 56대왕, 992년을 이어온 신라의 사직(社稷)은 끝나고, 고려는 이 해에 후백제마저 병합하여 이로부터 한반도는 새로운 통일왕조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백제.
성립과 발전
2백제 고이왕(234∼286)은 16관등급, 6좌평(佐平)의 관제를 정비하고 관복(官服)제정, 율령 반포, 남당(南堂) 설치 등 고대국가의 체제를 마련하여 백제의 실질적 시조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낙랑군(樂浪郡)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한강 유역을 통합하였다.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정복군주로서 대방군(帶方郡)의 옛 땅을 확보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살해하는 등 국위를 떨쳤다. 한편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여 그 세력이 오늘날의 전라도 남해안까지 미치고, 중국 랴오시 지방까지 진출하는가 하면 중국의 남조(南朝)인 동진(東晉)과 통교하여 문화를 수입하고 다시 일본과도 접촉하여 한학(漢學)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근초고왕 치세(治世)를 전후로 한 4세기 중엽에는 랴오시 지방, 산둥 반도 및 일본의 북부 규슈[九州] 지방까지 진출하여, 고대상업 세력을 형성하고, 특히 중국의 송(宋) ·제(齊) ·양(梁) 나라와의 교역은 물론, 일본에 대한 한반도의 문화이식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제17대 아신왕(阿莘王) 5년(396)에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군대에 패하여 한성을 침공당하고 한강선(漢江線)까지 후퇴하여 임진강 유역을 잃었다. 비유왕(毗有王:427∼455)때에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신라 눌지왕(訥祗王)과 나제동맹(羅濟同盟:433)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했으나 개로왕(蓋鹵王:455∼475) 때에는 장수왕의 압력이 더욱 가중되었다.
결국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에 침공하여 개로왕을 패사시키고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때 문주왕(文周王:475∼477)은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천도하였으나(475) 국세는 더욱 쇠약해졌다. 삼근왕(三斤王)에 이은 동성왕(東城王:479∼501)은 남제(南齊)와 외교하고, 신라 소지왕(炤知王)과 결혼동맹(結婚同盟:493)을 맺어 양국의 유대관계를 굳혔으나 임류각(臨流閣) 같은 궁전을 짓고 방종과 사치에 젖어 끝내 반신(反臣)인 좌평 백가(加)에게 피살되었다.
무령왕(武寧王:501∼523)이 즉위하면서 안으로는 전국에 22개의 담로(魯:邑에 해당하는행정단위)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 지방 통치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平山)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다. 또한 말갈(靺鞨)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중국의 양나라와 통교하면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聖王:523∼554)은 부왕(父王)의 업적을 기반으로 하여 중흥의 군주로 활약하였다. 그는 수도를 사비(泗:부여)로 천도하고(538)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는 한편, 중앙에 22부를 두고 지방을 5부, 5방 제도로 정비하여 국력의 쇄신에 진력하였다. 그는 중국 남조인 양나라와 통교하여 문물을 수입하는 한편,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썼다. 그리고 신라 진흥왕(眞興王)과 제휴하여 독산성(獨山城:지금의 禮山으로 추정)에 침입해온 고구려군을 격퇴시키는 등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으나, 신라 진흥왕의 배반으로 나 ·제동맹은 결렬되고(553) 관산성(管山城:沃川)에서 싸우다가 왕이 전사(554)하여 한강 유역은 신라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제의 국운은 날로 쇠약해지기만 하고 위덕왕(威德王) ·혜왕(惠王) ·법왕(法王)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600∼641) ·의자왕(義慈王:641∼660) 때 지나친 토목공사와 신라의 침공 등으로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고 민심이 이반함으로써 국정은 문란해졌다.
멸망
백제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은 초기에 문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무신인 윤충(允忠) ·계백(階伯) 등을 등용하여 선정을 베푸는 한편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643년에 고구려와 화친한 것을 계기로 당항성(黨項城)을 공략하는 등 지나친 외정과 사치스런 태자궁(太子宮) ·망해정(望海亭)의 건축 등 향락에 빠지고 흥수 ·성충 등의 인재 배척이 민심을 이반시키면서 국정은 문란해졌다.
이 틈을 타고 나 ·당연합군이 합세하여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김법민(金法敏:文武王) ·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군대로 탄현(炭峴)을 넘어 공격하여 백제의 장군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하고,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백강(白江:錦江 하류)으로 침입, 백제군을 격파하니 660년(의자왕 20)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 때 소정방은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 및 신하 93명과 백성 1만 2870명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당나라는 백제 땅에 5도독부(都督府:熊津 ·馬韓 ·東明 ·金漣 ·德安)을 설치, 통치하다가 다시 이를 개편하여 웅진도독부를 최고의 치부(治府)로 하고 그 밑에 7주(州) ·52현(縣)을 두어 잠시 통치하다가 훗날 신라가 통치하게 되었다
출처 : 풀잎냄새... | 글쓴이 : 풀잎 내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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