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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자유공원을 28년 만에 방문소회(1)
가까운 곳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과의 인연에서도 그렇습니다. 결혼상대를 고를 때에도 연분을 만나기 위하여 인터넷과 전문 중개업소들에 신상등록을 하면서 그들이 엄격한(?) 기준하에 선정한 상대배필을 만나 봅니다. 그러나 정작 만나본 당사자에 대해 이른 바 “필”이 꽂히지 않는다면 그 선정을 해준 기관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치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생각하는 사고와 전문가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한다면 꼭 사람과의 연분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1978년도에 서울 청계천 7가에 있던 회사가 인천으로 회사를 이전하면서 함께 내려와 기숙사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기숙사에는 한방에 7명이 정원으로 서울에서 함께 내려온 사람들의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때에 한방에서 함께 기숙하던 동료들과는 남다른 우정을 쌓았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모두 순수하여 남을 속이거나 하는 일은 좀체 볼 수 없었습니다. 일터 안에서는 직급에 대한 존칭이 엄격했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형과 아우로써 지난시절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1978년 그때에 우리들은 저녁이면 인천 앞바다를 구경한다고 하며 인천교(매립전)를 뛰어 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일을 마친 늦은 시간인 밤에 인천교에서 내려보는 바다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검푸른 모습이어서, 한참을 바라보노라면 차가운 밤바다 바람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온몸으로 전달되는 검푸른 바다풍경은 소름을 끼치게 할 정도로 음습함을 느낄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천교 위에서 내려다보는 밤바다 풍경도 좋았지만, 당시에는 멀지도 않게 느껴지던 콜롬비아군 참전 기념비까지 왕복하는 체력다지기에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에서 내려와서인지 주말이면 모두들 서울에 있는 집을 찾아 무리를 지어 빠져 나갔습니다. 일요일인 다음날 기숙사에 남은 사람들은 호(號)대항별 축구와 야구 또는 농구를 하며 음료수 내기 시합을 하였습니다.
한낮의 운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한 후 저녁에는 송림동에 위치한 현대극장이나 오성극장 또는 미림극장과 문화극장등을 순회하며 무술영화를 관람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혈기 왕성한 10대후반의 마지막 근로 청소년들과 20대 초반의 팔팔한 청년들이어서 일요일에는 기숙사에 남아 책을 읽는 이가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야근과 철야작업을 밥 먹듯이 했기에 휴일에는 모두들 운동이나 휴식을 취했습니다.
또 다른 한주가 마감되는 일요일에는 인천주변의 명소들을 찾아 한주일동안의 묵은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였습니다. 그때에 인천의 명소였던 자유공원을 나들이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겼습니다. 필름 50방을 찍을 수 있는 올림푸스 카메라를 대여점에서 빌려 들고서 봄을 맞아 피어나던 꽃들을 배경으로 많은 추억을 담기도 했고, 자유공원의 구경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짜 장면으로 허기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정도 시장의 어려움으로 인해 회사가 부도일보 직전의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모두들 제 살길을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한사람이 먼저 가서 자리 잡은 후에 연락을 취하면 다음달에는 다수가 빠져 나가면서 점점 더 공장안은 썰렁해졌고, 기숙사는 비어가는 호실이 늘어났습니다. 처음 입소할 때의 기숙사인원도 7명에서 3명 이하로 줄어들어 그야말로 평안히 수면을 취할 수 넓은 공간이 마련됐습니다.
그런 연유에는 동료들이 회사를 떠나면서 빈 호실을 찾아 떠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처음에는 편안한 수면을 취해서 좋았으나, 점차적으로 주변의 텅빈 공간을 생각하며 떠나간 한 방의 동료들을 그리워하게 됐습니다. 그때에 사회에 진출한 이후 처음 느겼던 삶의 퍽퍽함 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수도가 설치되어 물이 나왔지만, 수도에서 나오는 짠물에 적응이 안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왜 인천사람들이 그토록 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주말이면 대부분의 기숙사 생활인들은 서울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서울에 갔다 오는 날이면 서울의 물을 한통씩 지고 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인천의 짠물에 적응해갈 때쯤에 모든 이들이 그렇게들 떠나갔습니다. 또한 그 시절 잘 먹지 못한 상태에서 격한 노동으로 인해 몸에 무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당시로선 거금을 들여 수술을 해야 할 상황에 처했지만, 당시 경제적인 형편상 수술은 엄두를 내지 못한 상태인지라, 조용히 쉬겠다는 뜻에서 자진 사표를 제출하면서 책임자에게 만 말하자, 그는 윗선에 보고를 하게 되고, 회사 측은 성금모금 공고를 내면서 모든사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준 성금으로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고, 병원에서 한달 동안 휴식도 취했습니다. 그 당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병원을 찾아주었던 선한 사람들의 고마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는 회사 측과 동료들의 배려로 육체적으로 하는 생산의 일이 아니라, 경비실에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처음 접했던 책이 “뿌리”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때에 본인에게 이 책을 주며 평안히 읽어볼 것을 권유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후에, 갓 취업한 여성이었습니다. 그 여성은 자신이 뿌리를 읽으면서 겪었던 인간승리의 모습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나 봅니다.
그 여성의 착한 마음의 배려로 뿌리를 읽으며, 한 흑인 노예의 남성이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갖은 핍박과 차별에서 꿋꿋하게 딛고 일어서서 미국사회의 한 일원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한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동료들은 나의 모습을 모두들 부러워하며 뿌리에 대한 독서를 하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벌였던 모습들이 모두가 흑백필름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쳐갑니다.
1978년도 인천의 가좌동의 모 회사의 기숙사에서 함께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들을 다시금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회사의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하고 속에 담가 두었던 마음을 지금 전합니다. 그시절에 나에게 뿌리를 읽어보기를 권했던 여성을 비롯해서 지금은 모두들 40대 중반으로 들어섰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을 정말 그리운 요즘입니다.
<1>하위용 공장장님
기숙사 사감 역할까지 맞으며 어른이 되 주었던 분 이었습니다.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그냥 잠자리에 들면 그날에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피로회복이 늦어질 수 있다며 모두가 한 입으로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야~호”란 고함을 치면 괜찮을 거라고 도움말과 함께 배려를 해주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저녁시간이면 우리들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지르는 자장가와(?)도 같은 고함(야호)소리에 여타 호실의 남녀 기숙생들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매우 고통스러워 하며 협박도 하고 함께 고함을 질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준 점에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김■운씨
듬직한 체력에서 나오는 힘을 바탕으로 강인한 리더십을 선 보이며,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어 주었고, 휴일이면 자신의 집이 있던 금호동과 인접해 있던 신당동 자신의 집으로 기숙사 동료들을 초대하여 영양가 높은 음식을 대접해 주었고, 때로는 남산과 장충체육관과 장충공원 수표교로 안내하여 사진을 찍게 하여 지금까지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게 해주었던 참 다정다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후 그의 집은 철거가 되고, 그의 바로 밑 여동생은 인천의 모 공장에 취업을 한후에는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에 따른 공개수배자 생활을 하기도 하다가 좋은 연분을 만나 동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권력은 그녀의 행방을 탐문하기 위해 김■운씨가 근무하는 직장으로 찾아와 여러모로 부담을 안겨준 공권력에 의해 김■운씨는 여러번 직장을 그만두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알고있던 그의 여동생은 매우 순박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180도 돌변한 모습으로 그의 오빠와 내게 다가왔는지 지금도 의문에 휘싸이게 합니다. 결국은 여동생은 가정생활에 파탄을 맞았고, 이런 오빠와 언니의 불행한 모습을 본 막내 여동생은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하여 직장생활을 하다가, 집안 좋은 남성을 만나 결혼을 하였고, 그후 막내는 오빠와 언니와는 연을 끊었다고 들었습니다.
집은 재개발 로 인해 철거가 되고, 가족 모두는 뿔뿔이 흩어져 다시는 함께하기 힘든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던 김■운씨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어려움을 겪었지만, 꿋꿋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본인과는 인연의 줄이 이어져서 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어느 순간 아무 연락없이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을 알 길이 없어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3>간■구씨
쉬는 틈틈이 또는 일을 마친 늦은 시간에도 철학책을 끼고 살면서 인생이 어떻고 칸트가 어떻게 심히 어려운 말을 하였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늘 콧수염을 달고 다녀 주변의 어른들로부터는 “지저분하게 그게 뭐냐” 란 핀잔을 들었지만, 동료들로부터는 철학자란 칭호를 듣던 괴짜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현실에 적응하기 위하여 한때는 오성극장 영사실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지인들로부터 들었으나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오성극장은 다른 간판으로 달아 운영이 되었지만, 이마저도 얼마가지 않아 문을 닫은 횅한 모습의 오성극장 앞을 거니노라면 그 시절 걸걸한 웃음과 콧수염을 단 순진한 청년 간■구란 사람이 생각납니다.
<4>김■성씨
멀리 충청도 대전의 명문고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서도 가정형평상 돈을 벌어 잠시 접어둔 학업을 이어가겠다며 인천으로 상경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어떠한 교과서적인 문제를 제기해도 뭐든지 척척박사 식으로 명쾌한 답을 내놓아 박학다식하단 소리를 들었지만, 그 정도가 좀 지나쳐서 그가 갖고 있는 지식에 대한 논쟁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서울의 여느 회사에서 책임자급 자리에 올라 열심히 산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그의 모나고 폐쇄적인 성격상 많은 이들과의 교류를 스스로 끊어버린 상황이어서 소식은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5)소■웅씨
이름과 성이 특이하여 많은 동료들로부터 늘 놀림의 대상이 되었지만, 유쾌한 모습으로 넘겨주었던 사람, 또한 당시로서는 특이하게 혼자 군 침낭이 편하다며 침낭예찬론자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소■웅씨는 언젠가 지인의 소개로 다시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그는 동대문인지 남대문인지는 모르지만 옷가게에 옷을 건네주는 사장의 자가용을 운전해주는 일을 하다가 사정상 그만 두고 택시운전을 하는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입니다.
<6>노■섭씨
당시 인기가수였던 현숙씨가 부른 “타국에서”에 삽입된 개인의 이름이 나오는 곳을 나에게 들으란 듯이 그 노래를 자주 불러주어 나를 유쾌하게 만들어주었던 순수청년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7>김■길씨
명절 때면 서울이 고향인 나를 그의 고향인 인삼의 고장인 금산에서도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여있는 그의 집으로 나를 반 강제로 끌고 가서 고향 시골 사람들의 구수한 인심을 선뵈어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8>신■철씨
어린나이에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사람으로 그에게 일을 맡기면 하도 치밀하게 책임 완료를 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기술력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고 칭송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여느 공장의 책임자가 되어 지금은 해당공장이 중국공장을 설립하면서 중국지사장으로 장기 출장 근무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9>뿌리를 읽게 해준 여성
참 마음이 고왔던 꽃과 같았던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녀의 이름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녀의 신분보호 차원에서 이름을 공개하진 않겠습니다. 그녀는 앞서 언급된 철학자 간■구씨와 다툼이 있었습니다.
당시 철학자 간■구씨가 그녀에게 호감이 있어 더욱더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취한 행동이었는데, 이런 행동에 대해 불쾌해 했던 그녀의 반응에 모두들 놀라 그이후로는 그녀에게 함부로 행동을 하거나 접근하는 이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이후 회사를 떠나 인천의 자유공원 인근에 있었던 언니가 운영하던 음반판매점에 함께 근무했다는 것을 여느 지인들에게 소식을 들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나가길 기원합니다.
<10>지금은 이름도 잊혀진 50여명 이상의 사람들.
그들 개개인을 보면 알겠지만, 이름은 기억하질 못합니다. 그들에게 본인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들에게 받은 은혜를 남을 돕는 일과 나 자신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책무를 안겨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개인적으로는 멀리서 그분들 모두가 이 세상 어떠한 자리에 있든 있는 그 자리에서 신의 충만한 보호를 받으면서 평안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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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만에 자유공원 산책 [새노야 는 아름다운 사랑 나눔,무소유의 자유,인류애가 공존.공생하는 세상을 생각합니다.] 2006.04.27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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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자유공원 28년만에 방문소회(2)
28년여 만에 방문한 자유공원은 1978년보다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류열풍에 따른 북성동 차이나타운 재건 마스터플랜에 따라 중국 및 대만의 화교들과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 속에서 일부 개선해야 할 점들이 보입니다.
북성동 차이나타운의 좁은 골목은 자가용으로 인해 사람이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또한 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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