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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누구신가
히브리서 1장 3-14절
2007년 12월 9일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이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에 관하여 히브리서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 2절에, 성경 기자는 첫째로,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엘로힘이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보다 구체적인 창조 사역은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고, 병 고침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왜 그 분이 가능했습니다. 왜 그 분이 그러한 모든 일들이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그 분이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분의 창조 사역의 진실성을 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그 분이 단지 육신의 질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자연을 제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그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저어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나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배에 물이 차고, 아주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성난 물결을 꾸짖으시니, 바람과 물결이 곧 그치고 잔잔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놀라서, 서로 말하기를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을 호령하시니, 그것들까지도 이분에게 복종할까?" 하였습니다.
바람과 물까지 예수님께 복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분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장본인,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성경 기자는, 3절에, 그 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 고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동일, 동질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앙을 믿습니다. 동일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그 한 분 하나님은, 삼위의 고유의 실체를 가지신 분으로 믿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천사와 같은 류의 피조물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성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으로 보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가운데 너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세상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기를 거부합니까? 고린도 후서 4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세상의 신들이 인간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참된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신들은, 돈으로, 직업으로, 종교로, 가족으로, 관습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참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참된 예수님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합니다. 세상의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참된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것은, 세상의 신들이 당신의 관심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세상 신들은 당신의 인생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절대로 책임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짊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을 생명을 책임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세번째) 그 분은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붙드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아트라스가 지구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로 향하는 주님을 말합니다. 그 곳에는 당신의 죄를 위한 고난의 참음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통해서, 당신에게 말합니다. 내가 다 이루겠다고 말입니다. (누가 복음23장 26절, 요한 18장29절, 로마 9장22절)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붙드시고 계신다는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서 당신의 무거운 짐을 지시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당신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메인테인하는 것입니다. 보수할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합니까?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분은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말씀으로 지금도 이 세상과 당신을 그렇게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말씀으로 고치고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없이는, 성령도 역사하지 않습니다.
요즘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심리학이나 카운슬링이 교회 안에 침투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교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치유와 고침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사람을 고칩니다.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힘입니다. Psa 33:9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말씀으로 세상을 치료하시고, 당신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그 분이야 말로,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 말씀으로 세상을 붙들고 인도하시는 분이 주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3절에,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라고 고백합니다.
왜 죄를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중요합니까? 죄를 정결케 하는 능력이 없이는 참된 평안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평강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경우는,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후였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평강이 함께 할지어다, 누가25장 36절입니다. 완성한 것입니다.
참된 위로와 평강은, 죄의 해결 없이는 안 됩니다. 죄의 해결 없는 심리적 만족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폴 트루니에는, 우리 죄의 고백과 하나님의 용서를 함께 경험하지 않고는 참 자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죄를 정결케 합니다. 그래서 그 분만이 우리를 참된 평안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보고,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 복음 8장에 나오는 사실. 누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업도록 해라. 11절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어둠에 있지 않고 빛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 7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창조와 용서를 가지고 만물을 자신의 주관아래서 이끌고 가시는 이 분이야 말로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다섯 번째로 우편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편 좌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베소1장 20절 이하에,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가장 잘 아는 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하시고, 우편에 앉으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당신을 아십니다. 세상을 아십니다. 당신을 잘 아는 분은, 다름 아닌 당신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의사보다, 자기가 자기를 더 잘 안다고 하는 사람, 이 병원 저 병원 기웃거리는 사람, 이것은 아마 목사들에게도 통할 것입니다. 처방전대로 하면 좋은데, 안합니다. 하다가 관둡니다. 세상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많이 치료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이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천사보다도 못한 자로 생각합니다. 천사를 더 좋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지적합니다. 어느 누구 천사를 향해서, 나의 아들이라(5-6절), 고 한 적이 있느냐, 고 합니다. 모든 천사가 그에게 경배합니다. 7절에, 천사는 바람으로, 사역자들의 불꽃입니다. 그들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보좌는 영원합니다. 그 분은 공평한 홀이시며,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10절에, 이 모든 세상은,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신 것도 그렇습니다. 13절에, 어떤 천사에게,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어라, 고 하셨습니까? 그 분만이 우편에서 모든 권능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 분은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시며, 말씀으로 세상을 인도하시며, 참된 평강을 주시는 정결의 능력을 가지시고, 지금도 우편에 앉으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 주를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이 분이 오십니다. 당신의 영혼 속에 오십니다. 문을 여십시오. 만물을 인도하는 능력으로, 죄를 사하는 권세로,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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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오심
히브리서 1장 1-3절
2007년12월 2일
여러분,
오늘은 대강절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성탄절,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우리는 매년 이 문제를 생각하고 은혜를 나눕니다. 왜냐하면,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막상 왜 오셨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이 문제의 해답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요즘, 일본에는 많은 거짓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모리아 전차관의 사건, 그리고 식품관계 거짓 이야기, 와이로의 사건등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형사입건될 죄와 처벌이 따르는 사건입니다. 한 마디로, 죄 이야기가 엄청나옵니다.
그런데 죄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나와서, 그 문제에 대하여 사죄를 합니다. 작은 사건은, 보통 사원이 나와서, 사건을 설명하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그러나 아주 큰 문제가 생기면 그 회사의 사장이나, 최고 책임자가 나와서, 설명하고, 문제를 신속히 해결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렇게 해야, 문제에 대한 책임과 해결법에 대한 확실성과 신빙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이와 같이 설명할 수 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일어난 엄청난 문제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지고, 해결하겠다는 사실을 공포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자회견을 하러 이 세상에 오셔서, 앞으로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에 생긴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죄라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 뭔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에 의해서, 인간들의 삶속에 일어난 문제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죄입니다. 이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단절입니다. 인간이 꼭 친교를 해야 하는 어떤 분과 단절된 것, 이것이 죄입니다. 꼭 연결되어, 그 곳으로부터 얻어야 할 것을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이 일어납니다.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은 참된 양식을 공급받고, 생수를 공급받아야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절되다 보니, 영양없는 식생활로 우리의 육신이 부패하여져 가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단절,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입니까? 죄를 지은 우리 인간들 가운데 누군가 책임을 지고, 기자회견을 하고, 사죄하고, 나아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왜 예수님이 오십니까? 인간의 최고 책임자가 나와서, 해결을 해야 하는데, 왜 예수님입니까? 여러분, 회사가 완전히 망하면,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때 누군가 다른 회사가 그 회사를 사들여서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합병이랄까.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으로서는 이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대표로 기자회견 하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실 이 계획을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라고 합니다. 최고 책임자가 나타날 때 까지, 사장의 심부름꾼들이 그렇게 되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주 중요한 시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시간, 때가 차매, 보내신 것입니다. 그 분은 본래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만물을 상속받은 세상의 주인이며, 주권자입니다. 이 분만이 모든 것의 최고 책임자이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분이 죄라는 단절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죄를 다 사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그 분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2 천 년 전에 당신을 오신 이 분은, 지금도 당신의 영혼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이 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분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용사이며, 최고 책임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을 한 가지 생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고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꼭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단순히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셨는가? 아닙니다. 보다 더 풍성한 은혜가 이 곳에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다 용서하시고, 새롭게 세상을 시작하셨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죄가 관영함을 보시고, 후회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라고 하는 의인과 그 가족을 살려두시고, 나머지는 물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참 아름다운 세상이 되리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죄를 짓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참된 인간들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합니까? 여전히 인간은 죄를 좋아하고, 죄 속에 거하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를 행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재창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아무리 깨끗게 하여 새롭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죄속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함을 입은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그 본인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몇 번이고 용서하시며, 그를 지켜주시며 보호하여 주시는 주님안에서의 재 창조이기에 문제가 없습니다.
단순히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영원히 죄로 말미암아 불행하여 질 수 없는 안전하고 축복받은 삶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단순히 재창조하시지 않으시고, 예수님과 연결된, 예수님의 육체에 연결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그래서 크리스쳔 이라는 자들을 만든 것입니다. 새롭게 물로 씻어,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물로 씻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 다시 단절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누가 죄를 또 다시 짓지 않는다고 보장하시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우리의 사랑을 끈을 자가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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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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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12/08
(토) 오전 9:37 [미카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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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때문에
시 107:4-9
2007년 5월 27일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인생이 외롭다고 합니다.
마라톤처럼 골을 향해서 혼자서 외롭게 달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결국 나 혼자야, 라는 속삭임이 들여옵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인생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래서 괴롭고 쓸쓸하고 고독해 질 때가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도, 가족을 통해서도 가시지 않는 외로움에 사로잡혀
우울증으로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증상의 차이가 있을 지언즉, 당신과 나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이 없습니다.
그 무엇을 해도 시시 껄껄 합니다.
세상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 는 현실적 사실 앞에 새삼스럽게 놀라며,
움칠 거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인생 문제, 가정 문제, 자식 문제, 부부 문제, 경제 문제, 인간관계, 직장 생활 등 현실을 둘러보면 암담한 문제뿐입니다. 이런 문제에 파묻혀 결국은 낙망하고, 절망하여 답답함을 느끼고, 걱정과 근심만이 나를 억압합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며, 참된 안식처를 얻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광야 생활, 무슨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한때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생선도 먹고, 싱싱한 오이도 먹고, 수박도 먹었습니다.
부추와 파와 마늘이라는 인간의 먹성을 만족시키는 그런 재미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입니까?
모래바람만이 나불거리는 이 황량한 땅에서, 그들은 인생의 재미를 잃었습니다.
아니 인생의 참된 재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참된 인생의 재미를 얻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아침저녁으로 밀려오는 고독과 외로움들에 사무쳐 허우적거리기 보다는,
그러한 고독함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기도 없이도 마실 수 있었던 물이었습니다.
간구함이 없이도 먹을 수 있었던 고기였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간구하게 하셨습니다.
너무 교만해서, 그러한 것들이 조물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도 모르고,
인생을 즐긴 자들에게, 하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고독이란 엄살일지도 모릅니다.
참된 하나님, 내 삶을 주관하시고,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그 분 하나님을
잊고 사는 인간들의 엄살입니다.
고독이란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서 고독은 살아집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서 우리 삶의 우울증은 살아집니다.
사십년 동안에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한 사실(신명기8:4절) 앞에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인생의 고독보다도, 인생을 인도하시는 그 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 왔던 일들이 이제는 내 눈앞에 그렇게 보여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생이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계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이 먹고 삽니다. 그렇지만 배부르다고 인간이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옷을 잘 입었다고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잘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잘 산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먹고 마시는 것들이 해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내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의 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내가 지금도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어볼 가치도,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숨을 쉬며, 먹을 수 있으며, 살아갈 수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이스라엘백성은 이전에, 지금의 우리처럼 무감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내가 살수 있고, 우리 가정이 살 수 있고, 우리 교회가 살 수 있고,
우리 국가가 살 수 있고, 이 세상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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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 8:1-18
2007년 5월 20일
인생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인생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인생은 투쟁의 연속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총과 칼로 싸우는 싸움도 투쟁이지만, 그러한 무력적인 싸움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과 우리는 언제나 투쟁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공부와 싸워야 합니다. 직장인들은 직장과 일과 싸워야 합니다. 이웃 간의 싸움이 있습니다. 친구 간에 싸움이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에도 투쟁적 요소가 있습니다. 가족 간에도 그렇습니다. 환경과도 싸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과도 싸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싸울 싸움이 참 많습니다. 인생은 싸울 싸움이 많은데, 오늘 우리들은 환경과도 싸워야합니다. 싸움에는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습니다. 이 모든 싸움에서 이기는 자는 승리요, 지면 분명히 낙오되어 실패한 삶인 것입니다. 전쟁에는 2등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면 실패요, 이기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승리는 좋은 것입니다. 요즘, 승리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이 많습니다.
나쁜 투쟁이 아니라, 삶을 바르게 형성하고, 사회를 바르게 형성하고, 국가를 바르게 형성하기 위한 싸움에서는 꼭 승리해야 합니다. 더욱이,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꼭 이겨야 합니다. 이런 싸움에서 지게 되면, 우울증이 옵니다. 슬럼프에 빠집니다.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생은 약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가 없으면 신앙생활의 슬럼프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물론 방법이야 많겠지만, 성경을 통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다윗은 전쟁의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 전쟁이라는 측면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다 보면, 성경을 오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평화를 강조합니다. 평화가 성경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사이에 평화가 존재하길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언제나 보호하여 주신다는 구원적 의미가 강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8장의 특징은,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입니다. 8장에서 이 말씀은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기게 하다, 넓게 하다, 자유롭게 하다, 구원하다, 이기게 하다. 이 단어는 성경이 특히 다윗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많이 사용되는 말입니다. 즉, 다윗의 인생은 언제나 이기는 인생이었다, 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윗은 왜 이기는 인생을 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는 자유로운 구원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해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다윗의 삶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소년일 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무엘상16장). 그러나 여전히 사울이 이스라엘의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사무엘하 2장에서 처음으로 언급이 됩니다. 다윗은 40세가 되어서야, 헤브론에서 일개 유대 지파의 왕이 됩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사울이 파란만장한 왕의 인생을 끝내고, 다윗이 왕에 등극하게 되는 것은 5장에서 나옵니다. 7년 6 개 월 동안 헤브론에서 유대 지파의 왕으로 지낸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임직을 받게 됩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서 성경은 그에 대하여, 5장 10절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고 합니다. 즉,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축복입니다. 그가 삶을 승리와 축복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년 때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30세가 되기까지, 그는 숫한 역경과 고난 속에도, 하나님께서 같이 하심을 믿고 기다려왔습니다. 기다리는 신앙, 참고 견디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심이란, 좋은 일이 일어날 때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일에도 하나님께서 같이 하심을 믿는 신앙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골리앗과의 투쟁을 기억하십니까? 사무엘상 17장 45절 이하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전하겠고, 또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당신과 같이 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의지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다는 것은, 내가 그 사실을 믿고 행할 때 현실적인 축복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즉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인생을 살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5장 19절과 23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교제합니다. 물어 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상의하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나도 모르는 일들이 일어날 때 당황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한 마디만 했어도, 라며 아쉬워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상의할 때 그 분은 기뻐하십니다. 삼하 2장 1절에는 그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물어봅니다.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과 상의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참된 위로자, 상담자가 있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과 함께 당신의 인생을 논의하시길 원하십니다.
묻는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5장 21절-22절에 이삭이 에서와 야곱에 관하여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모습이 아닙니다. 사사기 1장 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삶은 말씀되로 사는 삶이며,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는 자, 언제나 하나님께 물어보는 자, 이것이 바로 다윗이 축복받은 자였음을 보여주는 간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6장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임재를 절대적으로 사모하는 삶입니다. 법궤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언제나 교제하기를 원하기에,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리워하고, 사모했습니다.
사울은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았지만, 그는 끝없는 애착과 그리움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하나님에 대한 끝없는 애정은, 바로 성전 건축으로 나아갑니다.
셋째로 다윗의 축복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애착입니다. 성전 건축입니다. 7장 2절에 나는 백향목 집에 거하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텐트에 머물고 계신다. 는 심정입니다. 교회 중심입니다. 같이 예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것입니다. 물론 건물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임재를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이 역사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성전 건축에 대한 애정입니다. 다윗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을 보시듯이, 다윗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단순히 성전 건물을 건축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기에, 그 분의 집을 짓고자 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중심을 하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7장 9절에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저희를 해하지 못하며 10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그 나라를 집안을 견고케하리라, 그러나 사울에게서 빼앗은 것처럼 빼앗지는 않겠다. 영원히 견고하리라”(16절) 고 합니다.
8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다윗의 축복받은 삶의 예증들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니까, 여호와가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사무엘상 2장 30절.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져간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삶을 축복으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당신이 그것을 믿고 행할 때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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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이야기
누가복음 15장 11-32절
2007년 4월 22일
김 산덕 목사
우리가 잘 아는 탕자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또는 예화를 통해서 이 탕자 이야기를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만큼 이 탕자 이야기는 아주 중요하며,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많다는 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예화는 15장 1절부터 나오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와 함께, 한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무나 기뻐하신 다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설교를 시작할까 합니다. 첫째는, 둘째 아들이 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분깃”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에게는 아버지를 떠나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며칠이” 지나서(13절), 둘째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떠나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둘째가 아버지를 떠나려고 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셋째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둘째가 아버지께로 돌아오려고 결심한 것은, 그가 “돼지를 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가 아니라, 16절에 “죽는구나” 라는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맏아들의 문제입니다. 그는 과연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있었는가?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아버지의 존재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아주 자상하고 용서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은 왜 자기의 분깃을 받고자 했습니까? 저는 이것을 인간의 소유욕이라고 해석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가지고자 합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가장 큰 도구는 비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비교당할 때, 그들은 자기들에게 무엇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가지고자 하는 욕구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 창조적 신앙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신앙이지만, 그러나 자기중심으로 가지고자 하는 마음은 사탄에게서 나온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땅만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에게 아주 적은 양이라도, 뭔가를 소유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조금의 물질이 있다면, 조금의 지식 있다면, 조금의 건강이 있다면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며,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13절에 나와 있듯이 그는 아버지를 떠납니다. 아버지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자기가 가진 소유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담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