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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2007/01/22 오전 10:59 | 비전사냥 시리즈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고린도전서4장2절
2007년 1월 21일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당파와 분쟁입니다. 교회에 속한 형제자매가 서로 서로 분파를 형성하여, 어떤 이는 바울, 어떤 이는 아볼로, 어떤 이는 게바, 어떤 이는 그리스도 등으로 나뉘어 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어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의 바램은 두말 할 나위 없이 고린도 교회가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합하는 것이었습니다(1:10). みな語ることを一つにし、お互いの間に分争がないようにし、同じ心、同じ思いになって、堅く結び合ってほし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중심과 근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1장 10절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듯이,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동일한 세례를 받아,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히 합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분쟁의 원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음에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분쟁이 생겨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원인을 알고 해결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적 과제입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합니다. 고린도 전서 1장에서 3장까지를 읽어 보면 바울은 십자가의 도와 세상 지혜를 비교 강조하면서, 세상의 지혜는 결단코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세상을 지배하는 논리이지만, 결단코 교회를 지배하는 논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리도 교회는 예수를 믿는 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적 지혜와 세상적 원리로 교회를 바라보니,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로 나눠지는 비극을 당한다고 바울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세상 지혜로 믿음 생활하면 우리는 결국 세상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세상 논리대로 교회 생활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상적 지혜로 판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란?
교회는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가르침, 십자가의 원리가 지배되어지는 곳입니다. 그럼 십자가의 도란 무엇입니까? 성령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도(lovgos)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지만, 우리가 가진 십자가란 하나님의 능력이다. 안 믿는 자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18).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의 원리, 또는 가르침이란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원리, 즉 하나님의 능력이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은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존재 원리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2장 2절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했다. 私は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以外のことは、あなたがたの間で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た。당신을 강하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은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입니다(2;5). 信仰は人の知恵によらないで、神の力によるものとなるためである。神の知恵ではない。神の力である。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에 속한 사람과 세상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2:14). 御霊によって判断すべきことであるから、この世の知恵を持っては理解できない。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변이나 논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체험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고리도 교회의 분쟁은 이 사실에 기인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적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고 판단하려고 하는 자들 때문에 언제나 교회가 힘들어 합니다. 세상의 지혜로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능력이 넘치는 교회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고,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는 동역자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다
그러기에 바울은 3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당신을 향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요 집,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합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도, 구원의 능력이신 하나님의 비밀을 관리하는 관리자입니다. 관리자란 지키는 것입니다. 관리하는 것입니다. 관리 스튜디어스, oivkoumevvh 오이쿠메네란, 집과 법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해석하자면, 집안을 법으로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말씀으로 집안을 (즉 교회를)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관리합니까?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당신의 비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대로를 지키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세상적 지혜로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논리가 지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해서 세상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세워 나갈 실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기에 손도 없고 발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자신의 뜻에 맡게 인도하여 가시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이 되어 주고 발이 되어주는 자들을 들어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손처럼, 하나님의 발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시는 자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요구되어지는 것은 충성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스튜디어스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이란 바로 믿음에서 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충성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확신입니다. 신실함입니다. 누구에게 충성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원리, 십자가의 가르침,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논리, 하나님의 능력에 충실한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디모데 전서 6장 20절에 “テモテよ、あなたにゆだねられていることを守りなさい。そして、俗悪なむだ話と、偽りの「知識」による反対論とを避けなさい。ある人々はそれに熱中して、信仰からそれてしまったのである」디모데여,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쫓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모두들 자기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니 누가 충성된 자를 만나리요(잠20:6). 自分は真実だという人は多い、しかし、だれが忠実な人に会うであろう.

다음 주일 우리는 교회의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게 됩니다.

세상 논리와 세상 지혜로 교회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지혜로 교회를 세워나가겠다는 생각은 아주 현명하게 보이고, 이론적이며, 아주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もっともらしく、まことしやかに、그러나 결과는 다릅니다. 교회는 세상의 논리가 지배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지혜로 성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가 상처입고 힘들어 하고 능력이 없어지는 이유는 너무 이성이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충성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충성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의한 충성입니다. 당신의 충성에 대하여 하나님은 많은 칭찬을 주십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라고 합니다. 유대왕 아사의 세상적 지혜를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를 버렸습니다. 아사왕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를 전심으로 찾는 자에게 내가 내 힘과 능력을 나타내리라고, 하십니다.
先見者ハナニがアサ王に次のように告げる。主の目はあまねく全地を行きねぐり、自分に向かって心を全うする者のために力をあらわされる。今度の事では、あなたは愚かな事をした。ゆえにこの後、あなたに戦争が臨むであろう。心を全うする者とは、忠誠を尽くすことである。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삶속에 나타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께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훌륭한 왕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따라 가지 못합니다. 왭니까?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4절에, 그는 주님에 대하여 끝까지 진실,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속삭임에 말려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입니다. 오늘 당신이 하나님께 충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5절에 神からそれぞれ誉れを受けるであろう。하나님의 칭찬이 있다고 합니다. 당신의 갈길을 다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 후쿠로이키타 교회의 장로와 집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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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젼 사냥 시리즈 6
2007/01/20 오전 11:59 | 비전사냥 시리즈

2006년 12월 24일
누가 복음 19장 10절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속하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감사하는 성탄절 감사예배입니다. 성탄절이란 영어로 크리스마스라고 합니다. 이 말의 유래에 대하여는 많은 설이 있지만, 요한일서 2장 20절에 나오는 ‘기름부음 받은’(crivsma) 자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한 단어가 주격으로 사용될 때 시그마 S를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crivsms로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동사 크리오(crivw), 기름붓다, 헌신하다, 는 뜻에서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성탄절이란 누군가가 누군가에 헌신하기 위하여 태어난 날이다, 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럼 누가 누구를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는 ‘인자가 온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그럼 누가 잃어버린 자입니까. 당신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먼저 삭개오를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삭개오를 잃어버린 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 당신은 삭개오와 같은 자입니까. 본문을 통해서 삭개오를 보시고, 당신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삭개오 그는 돈이 많은 부자입니다. 자신의 직업상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지만, 전체 문맥상 삭개오는 자신의 직업을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자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추측컨대 직업 그 자체의 문제로 그에게는 친구도 없고, 인생의 참 만족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뭔가 1페센트가 모지라는 삶이었습니다. 먹어도 만족이 없고, 잠을 자도 만족이 없고, 돈을 벌어도 만족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를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19장 3절에 나오듯이, 그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습니다. 뭔가에 끌리었습니다. 왜 보고자 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삶에 참 만족 뭔가 모지라는 뭔가의 1퍼센트를 체우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도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아 사람들 때문에 예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정도에서 포기하고 돌아갈 수 도 있었지만,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가 보고 싶었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니, 뽕나무에 올라갈 정도로 예수가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잃어버린 자란, 바로 뽕나무까지 올라가서라도 예수를 꼭 보아야 겠다는 심경을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키가 작은 자, 직업상의 이유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자, 체면을 마다하고 뽕나무에 올라갈 용기를 가진자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당신은 어떤 뽕나무에 올라갔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내려와라, 내가 너와 함께 거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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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젼사냥 시리즈5
2006/12/21 오전 11:39 | 비전사냥 시리즈

주의 일을 부흥케 하옵소서

하박국 3:3
2006.12.17
본문 말씀은 주여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하바국은 분명하게 하나님,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시켜 주시옵소서. 라고 합니다. 부흥이란 재생입니다. 새롭게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다시 힘을 얻어서 도약하는 것입니다. 다시 흥행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이 아니라, 내 꿈과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아 수년 내에 다시 부흥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바국 예언자는 하나님의 일이 부흥되길 원했습니다. 내가 먼저 부흥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먼저 부흥되고, 하나님의 사역이 먼저 빛을 발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요, 하나님 중심의 판단입니다. 하바국 예언자는, 이 땅에 먼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이 부흥되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황무한 후쿠로이 땅에, 영적으로 메말라가는 이 시즈오카 지역에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 임재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우선시 되는 순간들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이 우선 될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내가 너희에게 더하리라.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 삶의 원리입니다.

학개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성전 재건은 중단되어 있고, 사람들은 “자기의 집에 빨았다” (학개1:9)고 탄식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만, 자기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순서는 언제나 내가 먼저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가 먼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일이 먼저 부흥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먼저 부흥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럼, 하바국이 “내가 주께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라고 말하는 소문, 즉 주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 부흥, 리바이블입니다. 타락하고 공의를 하수같이 흘리는 자들을 벌하시고,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회복 부흥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바국이 예언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나뉘어,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맹위를 떨치던 앗시리아도 서서히 쇠하여 져가면서, 바빌론에 의해 정복되면서 바빌론은 이웃나라들을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유대 나라도 바벨론에 멸망당하기 직전입니다. 유대나라는 지금이라도 멸망될 수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국제적 정세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바빌론 역시 유대 땅을 점령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 나라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바빌론에 아부하고, 자신의 부를 축척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을 탄압하고 박해합니다. 정의가 설 곳을 잃어버린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이 탄압받고,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땅 끝까지 추락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내적 부패와 외적 위협이 팽배한 가운데 하바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당신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여 주시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7장11-13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이스라엘 왕국을 보호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이렇습니까? 내적으로 부패와 정의가 무너지고, 외적으로 강대국의 침입과 강포에 너무 힘듭니다. 왜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당신은 정의의 하나님이 아닙니까? 왜 가난한 자들이 힘들어야 합니까? 이러한 부조리 속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바국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을 사용하여, 유대 땅을 심판하고, 그 곳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부흥시키리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13절에 나와 있듯이 백성들을 향해서, 불탈 것으로 수고하며, 헛된 일로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하십니다. 그런 헛된 삶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14절에 이제 조만간에, 물이 세상을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이 온 세상에 가득할 날이 온다고 합니다. 핍박당하고 환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 회복되고, 이 황무한 땅에 하나님의 부흥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부흥되는 것,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던 자들이 다시 살게 되는 부흥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바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란 것입니다. 2절 초반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2절)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날이 속히 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하바국은 기뻐했습니다. 참된 희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3장 첫 부분에 나오는 '시기오놋'이란 바로 하바국의 열망적인 노래라는 뜻입니다.

하바국은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진정으로 사랑하는 백성들이 부흥을 얻게 된다는 하나님의 비전을 듣는 순간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은 열정으로 타올랐습니다. 3장 17절 이하의 유명한 노래는 하바국의 심정입니다. 지금 내가 고난을 당해도, 지금 나에게 소산이 없어도, 하나님의 일이 부흥될 것을 생각하니 참 기쁘다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당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 순간 하바국의 기쁨과 같은 기쁨이 마음에 가득하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하바국은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 소산이 없어도 행복했습니다. 회복이라는 엄청난 희망, 다시 살리시겠다는 부흥의 참된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역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 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이 부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40년 동안 우리는 작고 큰 많은 환란 속에서 선교사역에 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들을 부흥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기쁘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 새롭게 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부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여기에 다시 임하도록 기도하십시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사는 길이요, 당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길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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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사냥 시리즈 4
2006/12/18 오후 12:00 | 비전사냥 시리즈

느헤미야의 비전
느헤미야1장4-11절
2006-12-10

오늘 우리에게 허락된 본문의 주인공은 느헤미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임재 장소인 예루살렘 신전을 다시 세우고자 함에 있어, 그것을 맡아서 사역을 감당할 자로 느헤미야를 택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성전 재건이라는 특별한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택함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느헤미야를 택하셨습니까? 그에게 택함 받을 만한 특별한 무엇이 있었습니까? 제가 보기엔 없었습니다. 그는 제사장도 왕족 출신도 아닙니다. 택함 받을 만한 외면적인 어떤 특별한 이유가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를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을 섭리하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택함을 받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지금까지 약12차례의 포로귀한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여전히 이방의 땅, 바벨론에 남아 있습니다. 왜 그는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까? 11절을 보면 그는 왕의 급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직업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고생하느니, 여기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매국노라고 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바빌론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왜 남아있었습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미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성전 건축 작전이 시작되었고, 그것을 위해 느헤미야가 선택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느헤미야를 통해서 신전을 재 건축하고자하는 섭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인생앞에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시작되었습니다. 남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그는 남았습니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요셉은 왜 애굽에 팔여가야만 했습니까? 요셉은 왜 고향을 떠나서 애굽에 살아야만 했습니까? 에스더는 왜 페르시아 왕의 왕비가 되어 수산궁에 머물러야 했습니까? 다니엘은 바빌론에 왜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그 곳에서 이루시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당신이 왜 여기에 남아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은 교회가 싫다고 합니다. 특히 현대사람들은 교회를 싫어합니다. 성경적 신앙을 싫어합니다. 유일신 신앙을 싫어합니다. 마치 자기가 아주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 모든 종교를 인정하자고 합니다. 이러한 현대의 종교적 누수현상속에, 왜 당신은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그냥 나와 있습니까? 우연입니까? 운명입니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을 통해서 자신의 비전을 완성하시고자, 당신을 이곳에 있게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당신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미 뭔가를 섭리하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계획이 당신의 시간속에, 당신의 삶속에 보여 오는 순간 놓치기 마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느헤미야의 훌륭함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는 일견 보통 사람이었지만, 할아버지, 아버지로 부터 전해들어온 신앙을 고수하는 신앙인이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 신앙인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뜨거운 신앙인이였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전이 불에 타서 폐허가 된 상태로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털석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 울기 시작합니다.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오열합니다. 털석 주저앉아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게됩니다. 그런 것과 같습니다. 그가 단순히 기다리는 마음을 가진 수동적인 마음을 소유한 자 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적인 마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다르게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구름 조각같은 조그마한 비전을 보여주었을때, 그는 마음으로 감동받고, 영혼으로 그것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과 비전을 보여 주었을때, 느헤미야는 이것이다. 이것 때문에 내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비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비전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 여기에 왜 있습니까? 왜 이 교회에 남아 있습니까?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언제나 우연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당신은 우연한 삶을 살지 않기에, 인생의 계획도 세우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인생이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나의 비젼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마음에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 신전을 느헤미야에게 보여주듯이, 오늘 당신에게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비전을 열정적인 눈물로 이루어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느헤미야는 술 관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왕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비서에 해당되는 고위직입니다. 그는 유대백성으로 아주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는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입니다. 더 이상의 바램이 없을 만큼 만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적인 성공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을때, 그의 마음은 거룩한 열망으로 불탔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순간, 자신의 안락함과 편함에 안주하기 보다, 눈물로 그 비전의 성취를 바랬습니다. 열정적인 마음으로 바랬습니다. 내가 왜이렇게 성공했는가? 이것은 하나님을 위함이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토마스 칼라일은 ‘머리가 알아내기 전에 늘 먼저 보는 것은 가슴이다.’ 성경은 마음이 뜨거운 자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향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예레미야는 9장1절, 하나님 백성으로 말미암아 눈물샘이 마르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실때,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는가? 누가복음24장32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합니다. 마음이 냉랭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 졌을때, 그들은 무서워서 도망갔던 장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뜨거운 감동이 없는 머리만의 신앙은 절대로 기적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계시록3:15-16절, 미지근한 신앙,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신앙은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학개서1장13-14절, 백성들의 마음이 감동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짓게 된 것입니다. 뜨거운 감동이 강물처럼 흘러 내마음을 적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후쿠로이키타 교회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셨습니다. 성전건축이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듣는 순간 당신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듣는 순간 풀석 주저앉아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기도했습니까?
하나님 성전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가진 자를 주님께서 지금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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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사냥 시리즈 3
2006/12/04 오전 10:34 | 비전사냥 시리즈

솔로몬의 바램
2006-12-03
김 산덕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배로 비유하실 때가 많습니다. 언제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가자, (막4:35, 눅8:22)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교회는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은 전도입니다. 목표는 저편입니다. 동기는 예수님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입니다. 목적 의식이 분명하면 목표가 보여 옵니다. 그럴때 교회가 살아 납니다.

신약성경의 요한 계시록의 첫 부분에 주님께서 아시아의 일곱교회에 편지하신 내용을 보게 됩니다. 그 가운데 주님은 특히 사데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너희들은 살아있으나 죽은자라고 책망합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하면, 3장 2절을 보면,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하나님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 라고 합니다. 사데 교회는 열심히 살아왔지만 무엇긴가를 잊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아주 중요한, 그래서 꼭 해야 할 무엇인가를 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못찾고 있는 상태가, 죽은 상태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으니 죽은 것과 같습니다. 목적이 없으니 활동이 없고, 활동이 없으니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야 당신도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성막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장막 한 중간에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십시요. 후쿠로이키타 교회를 중심으로 당신의 삶을 계획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제일이라고 생각하십시요. 그 교회에 충성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당신이 섬겨야 하는 교회입니다. 다른 곳에서 기웃거리기 보다 당신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요즘 철새 교회들이 많습니다. 집에 앉아서도 인터넷보고 설교보고 다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교회 목사 설교는 잊고 삽니다. 축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바로 예배가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배가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나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좀더 감동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좀 더 내 삶이 변화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중심의 삶은 바로 교회중심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솔로몬이야 말로 예배중심 교회중심의 삶을 살아간 신앙인입니다. 솔로몬은 사울,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3대 왕으로 성전을 건축한 왕입니다. 또한 그는 지혜의 왕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을 건축하기 이전에, 지혜의 왕으로 알려지기 이전에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였습니다.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산 자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3장2-3절을 보십시오. 아직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여,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라고 기록합니다. 오늘 열왕기상을 기록한 저자는, 2절 말씀을 통하여 솔로몬이 성전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먼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직” 없었다는 것은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개역번역처럼 아직도 없었다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이 말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의 삶을 사는 자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장소가 없다는 것은, 성전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이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매일같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교회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산당이란 높은 곳입니다. 그 당시 신전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명기 12장 5절에 이하에 나오듯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시고, 택하신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마, 솔로몬은 산당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에 하나님의 신전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4절을 통해서 은연중에 나타납니다.
4절을 보면 그는 기브온으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역대하 1장 2-4절을 보면,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과……하나님의 회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여호와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는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예배는 여호와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회막을 보면서 하루빨리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회막에서 일천번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번제를 천번이나 드렸다는 것입니다. 번제란 자발적인 제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그 하나님께 자신을 철저한 복종시켜 나아가는 자기 헌신을 말합니다. 철저한 자기 헌신,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일천번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솔로몬은 철저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자신을 불태워 하나님께 바쳐 드린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정치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길 원했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회개에서 비롯되는 철저한 희생과 순종입니다. 회개 없는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