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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장로교회사
2007/01/29 오전 11:57 | 장로교회사

제2부 개혁파 장로주의 역사
서론 (교회회의)
종교개혁과 함께 싹트기 시작한 장로제의 역사는 개혁교회의 신학과 아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 갔다. 처음에는 「장로」라는 직분조차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장로제를 만들어낸 교회적 토양이 있었다. 이러한 교회적 토양은 다른 계통의 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회의」를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교회 회의의 확립」을 강조했다. 왜 회의를 강조했는가. 만약 회의를 중시하지 않으면 결국, 이전대로 주교의 권위가 중시되게 된다고 생각했다. 주교의 권위가 중시되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경시되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상은 장로제 형성기에 일관되게 인시된 것이다.
이처럼 교회 회의를 중요시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토양은 교회 참된 개혁과 성장을 위해서「교회규칙」이라는 교회법적 제도를 마련한다. 개혁교회는 교회의 질서를 올바르게 유지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교회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교회의 사역을 수행하였다. 그 교회법 또는 「교회규칙」은 각 교회의 신학적 특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신학적 산물로서, 특히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교회의 직제, 교회 예배, 교회의 훈련 등을 제정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영적이고 신앙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증될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장로교회의 발단에 접근하고자 한다.

장로교회의 역사적 구분

제1기
가장 오래된「교회규칙」은 1526년에 만들어진 헷센(Hessen)시의 「헷센 교회규칙」이다 (Reformatio Ecclesiarum Hassiae, 또는 Homberger Kirchenordnung). 헷센의 영주는 자신의 州를 종교개혁하기 위하여 프랑소와 람베르 (Francois Lambert, 1486-1530) 라는 프랑스 신학자를 초빙했다. 람베르는 루터보다 앞선 생각을 가진 종교개혁자로서, 그가 만든 교회 규칙에는 회의가 교회의 최고 기관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순수한 교회적 회의가 성립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제네바 Consistoire 역시 순수한 교회적 회의로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장로들이 시의회에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시의회의 간섭을 배제한 교회에 의한 장로단이 순수하게 구성되는 것은 프랑스 개혁파교회에서 정식적으로 보게 된다.

교회규칙의 실시와 훈련(양육)
장로제적 형상을 주장하는 개혁파 교회는 「교회규칙」을 통해서 교회를 올바른 제도로 개혁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규칙에 의거하는 「교회훈련」을 중시했다. 교회훈련을 중시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성경에 일치되지 않는 것을 강력하게 배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성경과 일치됨은 물론 이거니와, 교회훈련을 중시하는 개혁주의 교회가 자유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그 당시 국가와 종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각 도시국가는 그들의 정치적 결정에 의해서 종교개혁을 수행했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각 도시국가들은 시민의 도덕 생활수준을 향상시킴으로서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주장은 취리히의 츠빙글리의 사상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바젤의 에코람파티우스는 츠빙글리의 사상을 수정하여, 교회훈련이 단순히 시민의 도덕 수준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을 합당하게 참여하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합당하게」먹고 마실 수 있도록 성도들을 지도 훈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객관적인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합당하게」먹고 마셔야 그 분의 진정한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 고린도 전서 11장 29절에 나와 있듯이, 주의 몸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외적 훈련으로 치리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구석구석까지 합당한 신앙생활이 영위되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교회 영적 문제이다.
문제는 이러한 교회적 훈련을 누가 실시하느냐에 있다. 물론 이것은 교회가 다루어야 할 영적 문제이기 때문에 세속적 정치기관이 실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만은 안았다. 그 당시 각 도시의 시의회 결정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단행되었기 때문에, 시의회는 교회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교회 속에 세속적 정치권력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교회 문제에 간섭하고 문제를 제기했다. 각 도시의 교회는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적 권력과 전투하는 교회였다. 교회가 단독으로 교회훈련을 실시하게 되는 것은 칼뱅 이후가 되어서야 가능했다.

평신도 참가
교회와 시 정부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1530년대 초반에 작성된 교회규칙은 다음과 같다. 1530년 바젤의 교회규칙과 1531년 우름(Ulmer)시의 종교개혁을 위해서 부쳐에 의해서 초안된 「교회규칙」에는 교회 훈련과 치리를 위하여 위원회를 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위원회는 시 의회로부터 4명, 설교자에서 2명, 회중에서 2명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이 위원회에 회중 즉 평신도가 참여하여 교회의 중요한 사항을 결정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회중에서 위원을 선출한다는 것은 결국 후대의 장로를 선출하는 의미가 된다. 평신도가 교회의 중요한 결정 사항에 참여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루터의「만인 제사장」주장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종교개혁 신학은 평신도들의 활동과 참여에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루터는 급진파 종교개혁자들이 만인제사장설을 이용하여 교회질서를 혼란시킬 것을 염려하여 신학적인 발전을 전개하지 않았지만, 개혁주의 교회는 만인제사장 이론을 전개시켰다.
바젤시과 우름시에 이어 주목해야 할 것은 마르티 부쳐의 지도아래 있던 슈트라스부르그 교회의 교회규칙이다. 1534년의 슈트라스부르그 교회의 「교회규칙」에는 「교회를 보살피는 사람」(Kirchenpfleger)라는 직분을 세우고 있다. 의미상 장로교회의 「장로」에 해당하는 것을 이해된다. 불행하게도 스트라스부르그 교회의 종교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부쳐는 추방당하게 된다. 국가 즉 시정부와 교회간의 확실한 신학적 정립의 부재가 근본적인 원인으로 간주된다.


제2기
1541년 제네바 교회규칙(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 de L」Eglise Geneve)
개혁주의 장로교회 형성을 논함에 있어 우리는 칼뱅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칼뱅이 실질적으로 「장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장로제 형태의 구체적인 교회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교회제도에 관심을 가지지 시작한 것은 1539년 이후이다.
칼뱅이 제네바 교회의 예배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제네바 교회규칙」(Ordonnaces)을 처음으로 기록한 것이 1537년이며, 이어서 1541년 과 1561년에 걸쳐서 개정판을 출판했다. 더욱이 그는 1558년 「프랑스 개혁파 교회 규칙」(Discipline Ecclesiastique) 의 초안을 작성했다. 따라서 칼뱅은 4차례에 걸쳐서 개혁파 교회의 「교회규칙」을 저술한 셈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1541년 판과 1561년의 것 사이에는 뚜렷한 상이점이 보이지 않았지만, 1537년 판과 1541년 판 사이에는 상당한 변화와 개정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537년판은 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만찬, 예배와 시편가, 어린이의 신앙교육, 그리고 결혼에 대한 규칙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1529년의 바젤 교회의 교회규칙과 비슷하다.
1537년판과 1541년 판의 내용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제네바에서 추방되어1538년에서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르게 되면서 교회제도에 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질적으로 장로라는 직분은 없었지만 스트라스부르그 교회는 제네바 교회보다 앞서 의미상의 장로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장로교회 역사적인 관점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칼뱅의 4직분 체제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론으로서, 이것은 스트라스부르그의 결정적인 영향이다.

1538년 칼뱅의 제네바 추방은 장로교 역사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그의 추방은 교회와 시당국과의 대립에 기인한 것이다. 그 당시 개혁파 교회에는 교회와 국가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크게 두 부류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취리히-베른 모델」이다. 제네바 교회와 시 의회 등 다수파가 이 모델을 취하고 있었다. 이 베른시의 모델은 취리히를 중심으로 하는 츠빙글리에 유래하는 사상으로 정치권력과 밀착하면서 교회개혁을 수행하고자 한 입장이다. 여기에 반하여 「바젤-슈트라스부르그 모델」이 있다. 바젤의 에코람파티우스를 선구로하는 슈트라스부르그의 부쳐등으로 이어지는 사상으로, 교회를 국가로부터 분리하고자 하는 신학적 입장이다. 칼뱅은 에코람파티우스와 부쳐의 노선을 지지한다. 따라서 취리히-베른 사상을 옹호하는 제네바 시의회의 대다수는 칼빈의 주장에 반기를 들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가 추방하게 되었다. 칼뱅의 추방은 개혁파 신학가운데 흐르는 두 신학적 흐름의 대립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칼뱅이 교회제도에 신학적으로 사색하기 시작한 것은 1538년 이후이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 1539년판 이후에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의 신학적 작업의 결과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1541년 「교회규칙」에 나타났고, 신학적 이론은 1543년판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다. 사실적으로 개혁파교회 역사가운데 교회 직분으로서의 「장로」라는 용어가 대두된 것은 바로 1541년의 제네바 교회규칙이다. 그는 이 규칙에서 그의 특징인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라는 4 직분제를 주장했고, 예배시간과 예배 장소 등이 규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장로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1541년의 제네바 교회규칙에 의하면 장로는 12명으로 규정되었다. 장로는 목사와 함께 콘시스토와르 (consistoire 프랑스용어로, consistorium 라는 라틴어에서 유래. 보통 당회로 번역)를 구성한다. 이 당회의 중요한 임무는 교회 교육을 통한「훈련」이다. 콘시스토와르는 지금의 당회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노회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칼뱅은 콘시스토와르라는 용어를 고집하기보다 때로는 프레스비테리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 두 단어는 동의어라고 간주해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제네바 교회는 새로운 「교회규칙」에 의하여 장로를 선출하게 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제네바는 교회와 정부 간의 신학적 결론을 아직도 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로는 여전히 시의회(참사회)에서 뽑았다. 장로는 영적인 직분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충실한 자를 교회가 교회적 방법으로 선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 의회라는 정치적 수단에 의해서 선출되었기 때문에 콘스토와르가 올바르게 기능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콘시스토와르가 올바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가운데 칼뱅은 목사회를 만들었다. 제네바 목사회는 교회의 독자적 기구로서 교회의 참된 자립을 확립하고자 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장로 선거가 얼마나 중요한지 언급하고 있다. 장로를 택하고 임명하는 것은 교회가 가장 엄숙하게 거행해야 할 예식이며, 금식기도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도록 간구해야 한다(4.vi.11,12). 장로선택에 있어 교회가 금식기도로 준비하고 시행했다는 것은 장로주의 신학의 근본이 인간적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장로는 회중의 대리인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이러한 칼뱅의 신학적 작업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네바 교회는 그것을 완전히 실행하기란 어려웠다. 칼뱅에게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장로제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로 발전하여 가면서 그 체제가 완성되어 갔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뱅은 장로주의 신학적 기초를 둔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다.

장로제에 대한 칼뱅의 신학적 작업
장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칼뱅은 장로제, 또는 장로주의 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기독교 강요 4.4.1에서 칼뱅은 바람직한 교회 정치를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의해 전해 온 질서」라고 표현한다. 칼뱅은 1559년 프랑스 신앙고백 제29조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여 주신 질서에 의해서 통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개혁주의 노선을 대변하는 1561년 벨기에 신앙고백 제33조는 「주가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친 영적 통치방식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한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말씀에 의한 질서」또는 「영적 통치 방식」은 개인적 고안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성경주석과 해석의 작업 결과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정하여 놓으신 통치방식이 무엇인가를 기도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교회를 목표로 했다. 인간의 편의야 판단 또는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가 되신 그 분이 자신의 교회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계획과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것이 장로제의 근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칼뱅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표현한 이러한 성경 중심적 통치방식과 함께 칼뱅에 의해서 구체화된 교회의 4직제가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더욱 발전되고 전개되어 일반적으로 일컫는 「장로제」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칼뱅의 4직분론 (quatre orders d‘offices)
교회의 미니스테리움(사역)을 강조하는 것이 종교개혁 교회의 공통점이지만, 루터는 말씀에 봉사하는 설교직분만을 주장하여 언제나 단수형을 사용한 반면, 개혁교회는 설교직과 더불어 실천 직분과 봉사 직분을 강조하는 복수형을 사용한다. 이러한 교회 사역자를 복수 형태로 주장한 최초의 교회규칙은 람베르(Francois Lambert)에 의한「헷센 교회규칙」이다. 헷센 교회는 감독(episcopus)과 집사(deaconus)라는 2 직분론을 주장했다. 헷센 교회의 직분론의 기본적 사고가 부쳐와 칼빈을 통해서 전개되고 더욱 발전되어 갔다.

말씀 봉사하는 사역 : 목사와 교사 (les pasteurs, les docteurs)
칼뱅은 특히 에베소 4장 11-13절의 성경 주석에 근거하여 교회 직제를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되는 4 직분론을 주장한다.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는 특별한 직분으로서 일시적으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한 사역이다. 그러나 목사와 교사는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의「말씀 사역에 봉사하는 직분」으로서 일시적이 아니라 항구적 직분이다. 「목사와 교사가 없으면 교회는 통치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특히 목사와 교사에 관하여 헬라어에 관사가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 두 직분을 한 직분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목사와 교사는 각각 그 고유의 사역이 있다. 교사는 성경을 해석하는 특별한 은사와 필요하고, 앞으로 목사가 될 자를 양육하는 사역을 감당한다. 그러나 목사는 특정한 교회 공동체를 맡은 자이다.
특히, 이러한 직분은 「성도를 온전케」하는 사역이다. 직분이다. 「온전케」( καταρτισμός) 라고 하는 용어를 라틴어로 constitutio라는 언어로 번역한 칼뱅의 깊은 뜻을 상술했다. 혼란 상태를 가르침으로 합법적인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 「온전케」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칼뱅은 목사 직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가르치는 온전케 하는 항구적인 사역으로서 중요시한다.

교회를 다스리는 사역 : 장로 (les anciens, 이것은 위원 comys라고 부르기도 했다)
칼뱅은 디모데 전서 5장 17절을 통해서 두 종류의 장로가 있음을 강조했다.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장로와 그 말씀에 의거해서 교회를 지도하고 다스리는 장로이다. 후자는 목사의 가르침과 지도하에 교회를 관리하는「관리자」(고린도전서 12장 28절)이다. 특히 이들은 장로회를 통하여 사역을 수행하였다. 다스린다는 의미가 보다 강하게 나타난 이유는 바울 시대에는 지금처럼 관헌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 장로가 사회의 풍기 문란 등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자로서 장로 직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의 지도를 받아서 교회를 지도하는 사역이다.

봉사 사역 : 집사 (les diacre)
로마서 12장 8절의 「구제하는 자」와 「긍휼을 베푸는」자는 교회의 보살핌의 사역을 말한다. 교회의 보살핌은 구체적으로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것으로 교회의 공적 헌금을 배분하는 사역이다. 따라서 교회의 보살핌, 공적 헌금의 배분의 사역을 맡은 자를 디아코노스 (deaconus, 집사)라고 하며, 이 직분이 교회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6장이다. 초대교회와 고대 교회에서는 집사직이 성경적 의미로 올바르게 기능을 했지만, 후대에 와서 점차적으로 그 의미를 잃어갔다.
칼뱅이 교회의 보살핌의 직분으로 집사직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이처럼 성경 주석과 해석에 의한 결과이지만, 그러한 시사를 얻은 것은 슈트라스부르그의 부쳐의 영향이며,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람베르의 「헷센 교회규칙」제25장에 「교회 집사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De diaconis ecclesiarum et pauperum provisione) 에 기인한다. 따라서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집사직을 재건하고자 하는 첫 시도이며, 개혁교회의 중요한 사역론의 특징 중 하나이다.

제3기
제네바에서 프랑스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의 탄생 위그노(Huguenotes)
프랑스의 개신교 교회를 논할 때 하나의 시발점으로 위그노 교회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움직임은 약15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각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부흥의 결과로 프랑스 파리 대학의 루페부르 교수가 신약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되었다. 칼빈이나 파렐 역시 이러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 프랑소와 1세(1494-1591)와 여동생 마가렛토는 종교개혁에 호의적이었다. 마가렛토의 딸 제인은 완전히 종교개혁으로 개종까지 한다. 이 제인의 아들 앙리가 후에 앙리 4세(1589-1610)가 된다.
그러나 프랑소와 1세는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다가,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받아 모든 개신교도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칼뱅과 그의 동료들이 국외로 도망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어, 종교개혁은 한층 진전되어 갔다. 1559년에는 프랑스에 2천여 교회가 있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이미, 프랑스의 개혁파 교회는 제네바 교회 목사회의 지도와 인도로 장로제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교리도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고 있었다. 목사들은 거의가 제네바 신학교에서 칼뱅에게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칼뱅이 교육시켜 프랑스로 파견한 목사들은 약 120명이라고 전해져 내려 올 정도이다.
프랑스 신앙고백과 교회규칙
1559년 프랑스 개혁파 교회가 제1회 총회를 파리에서 개최하여 자신들의 신앙고백과 교회규칙을 결의했다. 이 신앙고백과 교회 규칙의 초안을 잡은 자가 바로 칼뱅이다. 교회적 신학입장을 표명하는 신앙고백과 교회규칙은 개혁파 교회가 중요시 하는 사항이다. 1559년까지 프랑스는 제네바 교회 목사회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프랑스 교회는 가혹한 시련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성장한 교회로서 제도가 곧 바로 뒷받침되지 못한 미숙한 교회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 교회 목사회의 도움이 필요했다. 따라서 칼뱅은 제네바에서 이루지 못한 교회 형태를 꿈을 프랑스 개혁파 교회를 통해서 구현하고자 했다.
프랑스 개혁파 교회는 칼뱅의 4 직분론이 아니라, 목사, 장로, 집사3직분을 두었다. 또한 각 교회마다 콘스토와르(당회)를 두고, 그 위에 시노드 프로방샤르(노회)를 두었다. 그리고 시노드 내셔널, 시노드 제네라르, 즉 전국회의, 총회를 두었다. 물론, 이러한 회의 구조가 칼뱅이 생각했던 신학적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인지 문제가 된다.
프랑스 개혁교회가 대 규모로 대회를 열고 성장을 거듭함에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군대를 동원하여, 개혁파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칼뱅은 「만약 한 방울의 피를 요구하는 저항에 가담하게 되면, 강과 같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수치스런 일을 하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전부 죽는 것이 났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개혁파 개신교도들을 위그노라는 이름을 불렀다. 약 1세기에 걸친 그들의 박해는 여기서 상세히 언급할 수 없다.
성 바르토로마이 축일의 대 학살
1572년 8월 24일 그리스도교 사상 최대의 학살이 일어났다. 개신교 나봐르 공 앙리와 로마교도 마그릿드의 결혼식을 구실로 개신교도들을 파리로 모았다. 정부는 이것을 계기로 개신교와 로마교사이에 화해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교회에는 개신교를 죽이려고 하는 음모가 있었고, 8월24일 새벽 종소리와 함께 모든 개신교도들이 암살당했다. 7만에서 1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기록한다. 로마 교황은 이 소식을 듣고, 데 데움, 하나님께 찬양을 부르고, 기념주화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 학살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는 점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낭트칙령
앙리가 앙리 4세로 등극한다. 그는 개신교도 이었지만, 왕이 되면서 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한다. 그러면서, 낭트칙령을 1598년에 발표하여 신앙의 자유와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1610년 앙리4세가 암살되면서, 낭트칙령은 사장되고, 1685년 루이14세에 의하여 낭트칙령은 무효화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는 약 50만 명의 개혁파 교회원들이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
종교개혁 당시 네덜란드는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다 포함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장로교회는 이 네덜란드에서 이주하여 간 개혁파 장로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루터의 가르침이 이 나라에도 전래되었지만, 이윽고 전달된 칼뱅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 신학이 이 나라에 안착하게 되었다. 종교개혁도 아주 힘 있게 진전되어 1531년까지 성경 전체가 완역된 종류만도 25종(네덜란드어, 프란다스어, 프랑스어 등)이 된다고 한다. 일상 생활어로 번역되기도 하고, 또한 많은 신학서적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동시에 박해와 학살이 끊임없었다. 1523년에 개신교 순교자가 처음으로 나왔다는 점에서 네덜란드(벨기에 포함)는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장로교회의 성립
1559년 개신교 운동은 조직화되어 결집되어 하나의 교회를 설립했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칼뱅의 지도로 제네바에서 수학하고 1567년에 순교한 기이도 데 브레이 (Guido de Bräs, 1567몰)가 초안을 작성하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1561년 불어로 완성된 「벨직 신앙고백」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는 1563년 앙토와프 회의에서 장로제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헌법이 작성됨으로서 네덜란드에 많은 장로제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 놓인 벨직 신앙고백은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로 구성되는 교회직제를 고백하고 있다. 더욱이 네덜란드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박해와 탄압으로 1569년 자국에서 회의를 개최할 수 없는 사정을 고려하여 독일 엠덴에서 총회를 열고, 프랑스 개혁파 교회와 비슷한 당회, 노회, 대회로 구성되는 교회 회의제를 결정했다.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에 기독교가 언제 전해졌는지 역사적으로 증거를 될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 단지, 세인트 콜롬바(Saint Columba)가 약 563년경 아일랜드에서 지금의 스코틀랜드 아이오나(Columba of Iona) 섬에 도착하여 전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약 2세기가 지난 후 이제는 스코틀랜드 동부에 성안드레가 선교를 시작하여, 그 결과 Culdees라는 공통체가 생겨났다고 한다. 여기에 대하여는 학자들 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일치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셀틱 교회(Celtic church)가 계속되는 가운데 데이비드 1세의 치하에 셀틱 교회는 완전히 로마 가톨릭화 되었다. 따라서 벌리(Burleigh)의 주장대로 스코틀랜드 개혁자들은 셀틱 교회나 로마 교회의 모든 것에 떠나 하나님의 말씀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16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찰할 필요가 없다.
16세기가 되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특히, 패트릭 하밀톤(Patrick Hamilton, Abbot of Ferne)은 프랑스와 독일로 유학을 다녀와 세인트 앤드류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는 종교개혁 신학을 가르친 이유로 1528년 화형으로 순교 당했다. 하밀톤과 동일하게 교회 개혁 설교가인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 역시 1546년 3월1일 세인트 앤드류에서 화형 당했다. 그는 존 녹스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수로 또한 봉사하기도 했으며, 그가 설교할 때 존 녹스가 양손에 검을 들고 그를 지켰다고 말한다. 위샤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따르던 자들이 봉기하여 추기경 비튼의 암살하게 된다. 그들은 도망하여 앤드류 성안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동료들의 추천으로 녹스가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로마 군인들은 세인트 앤드류로 침입하는 것에 실패하여, 프랑스 군의 파병을 요청 결국 프랑스 군에 의해서 개혁자들은 체포되었다. 존 녹스는 프랑스 노예선에서 학대와 고난을 받고는 석방되어, 잉글랜드로 가서 에드워드 6세하에서 궁정 목사가 되었다. 에드워드6세 이후 피의 메리가 메리튜드가 왕이 되면서, 개신교를 탄압하여, 결국 그는 유럽으로 도망하게 되었다. 녹스는 제네바에서 수학하면서 영어권 망명자들의 교회 목사가 되어 봉사하였다. 그 교회가 일 년마다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를 선출했다는 사실은 교회 정치사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다. 1559년 그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종교개혁의 선봉자 역할을 감당하면서,「하나님 저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최초의 장로회 총회
1603년까지 자신들의 왕과 국회를 가진 독립 국가였다. 1560년 8월, 녹스의 지도하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로마교회 신앙을 폐기하고, 개혁파 신앙을 고백하기로 한다. 존 녹스와 함께 다섯 명의 존이라 불리는 자들이 의회의 요청으로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4일 후에 제출했다. 철저하게 개혁파 신학적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을 의회가 채택함으로서 장로제를 중심으로 하는 스코틀랜드 국교회(the established church of Scotland)가 탄생하게 되었다. 1560년 12월 제1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출석자는 목사 12명중 6명이 출석하고, 장로 36명이 참가하였다. 이 총회에서 「교회규칙」(Book of Discipline)이 작성되었다. 이 교회규칙에는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 직분을 세울 것을 규정하고 있다. 장로와 집사의 임기는 1년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장기간 다스림으로 오는 폐단을 막고자 한 장치이다. 이 교회규칙은 일상생활까지 도덕 생활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존 녹스가 개혁을 단행할 때, 스코틀랜드 교회에는 여전히 감독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슈퍼인텐댄트(superintendents)라고 불렸던 이들은 로마 가톨릭의 감독보다 그 권한이 많이 축소된 형태로, 실질적 권한을 회의에 두었다. 따라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장로제가 정착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 스코틀랜드 교회가 장로 제도를 헌법상 규정한 것은, 그들이 「교회규칙」(the Seconde Book of Discipline)을 채택한 1581년이다. 이 제도를 작성한 자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이다. 그 역시 제네바에서 수학하고, 칼뱅의 후계자 드 베쟈의 감화를 강하게 받은 자이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직제를 보자면 각 교회에 당회(Kirck Seccesion)가 있고, 그 다음에 노회(Presbytery)가 있다. 프레스비테리는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라틴어 프레스비테리움을 번역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당 안쪽에 「내진」이라는 곳이 있는데, 사제 즉 프레스비테르들이 앉는 자리이다. 이 장소를 프레스비테리움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사제들의 모임이라는 뜻도 이 용어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장로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장로제가 갑자기 생겨난 교회 제도가 아니라, 비록 로마 가톨릭에 의해서 오용되었지만, 성경에서 시작하여 교회역사가운데 진행되어온 제도라 간주한다.
노회 다음에 대회(provincial Synod)가 있는데 지역별 회의를 말한다. 그 다음으로 총회(General Assembly)가 있다. 더욱이, 멜빌의 교회 구조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교회 안에 국제적 교회회의를 두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아주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엠덴 회의1571년, 토르도 회의,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모두가 국제회의이다. 장로제는 한 나라에 국한된 교회건설이 아니라, 이웃 국가와의 관계를 도모하는 하나님 나라 건설 확장에 앞장서는 교회라는 사실이 처음부터 강조되었다.

메리 스튜어드
장로주의가 스코틀랜드에 순조롭게 진행될 때, 1561년 8월 메리 스튜어드가 프랑스로부터 귀국했다. 그녀는 1558년 16세에 후에 프랑스 왕이 되는 프랑수와 2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1560년 11월에 남편이 죽음으로서, 모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불가해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귀국하자 홀리루드 궁전에서 로마교회 미사를 올렸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의회가 제정한 헌법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녹스는 이것에 대하여, 한 번의 미사는 일만 명의 외적이 상륙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이다, 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로마교회로 되돌려 놓기 위해 온갖 힘을 쏟아 붙지만 결국 그녀의 愚行과 단정치 못함은 폐위로 끝나고 잉글랜드로 도망하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 역시 그녀를 런던탑에 감금 처형시킨다. 녹스는 1572년 죽기까지 스코틀랜드의 장로제 개혁교회의 정착을 위해서 끝까지 분투했다.

앤드류 멜빌
멜빌은 녹스 이상으로 학식이 있는 자로서, 녹스를 이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직접 칼뱅주의를 배운 자이다.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는 자이다. 1574년 글라스고 대학 학장으로, 6년 후에 세인트 앤드류 대학의 학장으로 봉사했다. 그의 지도하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상당한 발전을 거듭했다.
1581년 그는 교회규칙을 새롭게 개정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보다 철저하게 장로교회화 하였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젊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와 긴 투쟁을 하게 된다. 제임스 6세는 160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왕으로 제임스 1세가 된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감독제로 돌려놓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멜빌은 왕에게 이 나라에는 두 왕이 있다. 하나는 당신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교회의 수장은 당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라고 주장했다. 결국, 왕은 멜빌을 런던탑에 감금한 후 이윽고 국외로 추방했다. 멜빌은 프랑스 세단이라는 곳에서 1622년 죽기까지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국민계약 (National Covenant)
제임스 1세가 1625년에 죽고, 그 아들 찰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부친 제임스 1세 보다 완고한 사람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영국 국교회의 정치형태와 예배방식으로 통일시키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계획은 켄트베리주교 윌리엄 로드의 지지를 받았다. 찰스 1세와 로드 주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교회의 예배형식까지 통일시키려고 했다. 1637년 7월 23일 까지 스코틀랜드 전체 교회가 영국 국교회 예배 형식을 채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날 에든버러 대주교좌 대성당 참사회원(Dean)이 존 녹스가 한때 설교했던 세인트 자일 교회에서, 대주교 로드의 기도서에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자 했을 때, 어떤 부인 노동자가 의자를 집어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으로 스코틀랜드 국민은 찰스와 로드의 명령에 불복하고자「국민 계약」에 서명했다. 생명을 걸고 서로 도와가며, 개혁파 장로제 교회 신앙을 충실히 견지할 것을 서약했다. 1638년 알렉산더 핸더슨의 지도하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는 자신들의 교회로부터 모든 영국 국교회적 요소를 제거하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주의를 수복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찰스왕은 장로교 주의자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침공하지만 실패한다. 찰스 왕은 새로운 공격을 위해서 군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의회에 자금과 군의 동원을 요청하지만 의회는 거부할 뿐만 아니라 왕의 정책을 비판했다. 이 의회가 「단기의회」(Short-Partiament)이다. 결국 왕을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에 의한 내분이 일어나, 의회파의 지도자 올리브 크롬웰이 승리를 거둠으로서 1648년1월 찰스왕은 처형되었다.
찰스 왕이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비록, 찰스 왕이 영국 국교회를 강요했지만,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코틀랜드의 왕이었기 때문에 처형까지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롬웰이 죽은 후 1660년, 네덜란드에 망명했던 찰스의 아들을 데리고 와서, 국민계약에 서명하게 하고, 찰스 2세로서 영접했다. 그러나 찰스2세 역시 왕이 되자마자, 국민계약을 파기하고, 장로주의자들을 경멸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다시 한 번 국민계약아래 뭉쳤다. 이들을 「언약자들」(Covenanters)라고 불렀다. 찰스 2세 때는「살인시대」라 불릴 만큼 고난이 심했다.
명예혁명과 종교 관용령
1685년 찰스2세가 죽은 후,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1688년 제임스2세가 추방되고, 프랑스에 망명하면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 일어나,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윌리엄은 장로교주의자 이었다. 1689년 「관용령」(Toleration Act)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종교적 자유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주어졌다.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장로교회 역사는 박해와 탄압, 그리고 투쟁의 연속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영국 국교회,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알미니안적 신학과의 투쟁이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결국 신학적 교회적 논쟁과 투쟁으로 성장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분열
스코틀랜드 교회 (The Church of Scotland)에서 일어난 최초의 분열은 1733년, 에른스킨 (Ebenezer Erskine)에 의하여 일어났다. 그는 「교직 천거령」(the Lay Patronage Act)에 반대했다. 「한 줌의 토지 때문에, 그리스도 왕국의 사항에 관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만약, 이 법령에 복종한다면, 우리들은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경외하는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에른스킨과 그의 동료들은 스코틀랜드 교회를 나와서 「협력 노회」(Associate Presbytery)를 조직했다. 이 협력노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역시 분열하여 갔다. 지금 미국의 The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의 원조이다. 1752년 토마스 길레스피(Thomas Gillespie)는 가 교직 천거령으로 학대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구제대회」(Relief Synod, ) 을 열지만 그러나 결국 그 역시「교직 천거령」에 반대하여 이탈했다.
교직 천거령에 반대하여 일어난 가장 큰 분열은 1843년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가 472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탈하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를 설립한 사건이다. 이것이 이른바 대분열(Great Disruption)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교회의 직분자들 (목사, 장로, 집사)은 교회의 등록교인들의 투표에 의해서 선출해야 한다는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주장한 사건이다. 그들은 기존의 모든 토지와 재산을 다 버리고 나왔다. 1874년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직 천거령」을 폐지함으로서 교회 직분자들을 교회에서 선출하는 장로제로 돌아왔다.

스코틀랜드의 공헌
분열과 합동을 거듭하여 나아가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해외의 장로교회의 어머니로 불리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타당하다. 아일랜드 장로교회, 아메리카 장로교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 남아프리카 장로교회, 한국 장로교회등 해외의 많은 장로교회가 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선구자 존 녹스와 맬빌이 제네바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은, 결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신학이 제네바와 칼뱅 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많은 신학자와 설교가를 배출함으로서 세계 장로교회사에 큰 발전을 기여했다.

잉글랜드 장로교회
잉글랜드와 종교개혁
잉글랜드는 1534년까지, 로마교회에 대항하는 소수파의 공동체가 존재했지만, 그러나 국가 전체는 로마교회였다. 1534년 헨리8세가 로마교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로마교황을 대신하여, 잉글랜드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다는 수장령 (Act of Supremacy)을 의회에서 가결되었다. 헨리 8세에 의하여 로마 교회에서 이탈은 했지만, 여전히 교리, 예배 형식, 그리고 교회 직제 등은 변하지 않았다. 제네바나 독일에서와 같은 종교개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고난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여 켄트베리 토마스 크랜머의 지도하에「39개조」(Thirty-Nine Articles)를 교회의 새로운 신조로 작성하고, 또한「국교회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도 작성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이 외면적인 것에서 내면적으로 이행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1553년 에드워드는 죽음으로서 문제가 발생한다. 에드워드 다음으로 「피의 메리」라는 메리 튜더가 왕이 되었다. 헨리 8세와 그의 첫 부인 케스린과의 사이에 태어난 메리 튜더는 자기 모친을 따라 로마 교회의 열심 신자였다. 그녀는 자기가 왕이 되자마자, 자기 아버지와 오빠가 수행했던 종교개혁을 전복시키고, 영국을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시켰다. 대주교 크렌머와 함께 많은 자들이 처형당했으며, 또한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대륙으로 망명했다. 망명자들 가운데 상당한 숫자가 제네바로 가서, 칼뱅의 감화를 받고, 영국인 망명교회를 세우고, 또한 칼뱅주의/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직제(장로제)에 관하여 배우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William Whittinham과 Miles Coverdale등이 중심이 되어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후세의 「제네바 성경」(Genevan Bible)이 탄생하였다. 영어 성경으로는 처음으로 장과 절의 구분이 수록되어 있는 성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게 되었다.

청교도의 출현
1558년 메리가 죽은 후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여, 1603년까지 통치한다. 그녀는 수장령을 부활시키고, 프로테스탄트 망명자들이 귀국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귀국자들은 망명생활을 통하여 제네바 성경과 함께 명확한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 직제를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잉글랜드에서는 아직까지 본격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가 보다 성경적인 예배 형식과, 보다 성경적인 생활, 보다 성경적인 교회 형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 신앙은 틴데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20년대부터 대륙의 종교개혁 영향을 받음으로서 성경적 신앙과 신학의 필요성을 주장한 자들이 1560년대가 되면서 보다 적극적인 개혁을 원하면서 하나의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퓨리턴 신학의 중심사상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삶과 교회의 개혁이었다. 그들의 신학과 신앙은 동일하지만 그러나 교회 정치 형태는 다양했다. 그들 가운데는 회중파도 있고, 국교회파도 있었고, 또한 장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570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한 경건한 개혁주의자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영국 국교회는 제네바 교회 모델을 따라 장로 주의적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퓨리턴이 너무 급속하게 성장함을 보고 놀랐다. 처음에는 관용적인 자세를 취하다, 점차적으로 영국 국교회 정치와 예배를 그들에게 강요하고 진압하였다.

제임스 1세와 퓨리턴
160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메리 스튜어드의 아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왕이 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나는 퓨리턴을 복종시키기로 결심했다. 반항하는 자들은 토지를 몰수하고, 보다 엄격한 벌을 내린다고 선포했지만 실패로 끝난다..

찰스 1세와 퓨리턴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1625-1649까지 재임했다. 그의 조언자 켄트베리 주교 윌리엄 로드(Archbishop Laud)와 함께, 찰스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영국 국교회의 감독제도로 바꾸려고 했다. 그 결과 앞장에서 배운 바와 같이 국민계약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는 이 계약으로 장로제를 목숨 걸고 수호했다. 앞장에서 배운 바와 같이 찰스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위해서 군인과 군용자금 조달을 위해서 의원을 선거하였지만 의원들의 대부분이 청교도 신학과 신앙을 수호하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해산시키고 (단기 의회), 다시 선거를 하지만 더욱 많은 청교도 의원들이 선출되어 다시 해산시키려고 하지만 청교도 의원들은 찰스에 명령에 불복종했다. 이렇게 하여 의회파와 왕당파사이에 내전이 발발한다. 이것이 장기의회이다. 이 장기 의회는 특히 종교문제에 아주 관심을 가진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
퓨리턴이 많이 선출된 이 의회는 종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국 국교회가 보다 성경적이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이며, 이제야 그것을 관철할 때가 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라 불리는 회의를 소집한다. 이 회의는 영국에서 훌륭한 목사와 신학자 121명, 하원의원 20명, 상원의원 10명, 합계 151명으로 구성되었다. 2명의 목사를 제외하고 모두가 영국 국교회 목사로서 퓨리턴들이며, 개혁적 신학 경향을 가진 대학 출신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는 최초로 1643년 7월 1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개최된 이해로 5년 6개월간 약1163회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회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의 참석이다. 그들이 참여하게 된 경위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내전에 의한 것이다. 의회군이 불리하게 되자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파병을 요구하게 되고, 스코틀랜드는「엄숙동맹 계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서명하는 조건으로 원군 파병에 동의 한다. 이 계약은 스코틀랜드 장로파가 초안하고 잉글랜드 의회가 동의하는 식으로 되었고, 스코틀랜드 대표단 파견 조항도 포함되었다. 1643년 8월 17일 스코틀랜드 교회가 이 계약에 승인하고, 1643년 9월에 스코틀랜드 대표단이 런던에 도착하여, 9월 25일에 영국 의회가 「엄숙동맹계약」을 승인함으로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즉 이 계약이 인준되면서, 영국 의회 안에 큰 변화가 생겨났다. 지금까지는 39개 조항을 개정하는 것에 힘을 기울려 왔다. 새로운 신앙고백을 작성하는 것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 조항으로 말미암아 잉글랜드 의회는 39개 조항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영국 국교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회가 「엄숙동맹계약」에 서명함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의 주된 임무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존속과 방어, 또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교리, 교회 정치, 예배, 규칙, 치리를 철저하게 개혁하여, 가장 개혁된 교회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모범이 되는 교회를 건설하기로 서약한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는 브리티시 교회 전체에 대한 「완전한 종교 개혁적 임무」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총 6명을 파견한다. 2명의 장로와, 알렉산더 헨더슨, 로버트 벌리(Robert Baillie), 죠지 길레스피, 샤뮤엘 루더포드로 구성된 목사 4명이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가한 신학자들은 저명한 신학자들이면서 모두가 경건한 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로버트 벌리는 말하기를, 「윌리엄 트위스의 기도로 시작하여, 마샬씨가 약 2시간 동안 가장 엄숙하고 거룩하게, 그리고 감격적으로 지혜롭게 의회 회원들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렸다. Arrowsmith가 약 한 시간가량의 설교와, 시편가를 부르고, Vines가 약 2시간동안 기도를 드리고, Palmer가 한 시간 동안 설교를 하고, Seaman이 약 두 시간동안 기도를 드리고, 시편가를 불렀다. 핸더슨이 회의의 고쳐야 할 결점 등을 토의하는 간단한 회의를 사회하고, 트위스 박사의 기도와 축도로 마쳤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임재하시기에, 우리들은 회의와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주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의 업적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는 약 5년 반 동안 진행되면서 1163번의 전체회의와 함께 위원회와 소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회의와 논의 속에서 많은 문서들이 작성되었다. 이러한 문서들은 「겸허한 조언」으로서 의회에 송부되고, 의회역시 곧 바로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검토했다. 특히 장로교와 관련되어 「장로주의 기준」이라는 중요한 문서를 작성했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장로주의 기준」이 작성되었다.
「공동예배지침」(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이 1644년 12월에 완성, 1645년 1월에 의회의 승인을 받아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대신에 사용되게 되었다. 「정치규정」(Form of Church Government and Ordination)은 1644년 11월에 완성되어 의회가 1648년에 승인했다. 이 「정치규정」이 영국 교회의 정치형태는 장로주의를 표방함으로서, 법적으로 영국 국교회는 감독과 대주교제를 포기하고 장로주의를 공식 교회정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6년 12월에 완성하여, 의회가 1648년 3월에 승인했으며「대소요리문답」은 1647년 12월에 완성 1648년 9월에 승인되었다. 또한 그들은「시편가」(Psalter)에 대하여, 새로운 음율체를 작성하고자 했지만, Francis Rous가 작성한 것이 채택되었다. 영국 교회가 시편가를 사용한 것에 대하여, 장로파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회중파가 먼저 주장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장로제를 반대한 영국 국교회의 2천여 명의 목사는 교회와 목사관으로부터 나와야 했다. 그러나 의회는 쫓겨난 목사에게도 이전의 사례의 5분의 1을 지급하기로 했다. 사실 장로제가 영국 잉글랜드에 명목상 건설되었지만, 잉글랜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민중들은 감독제에서 장로제로 대체된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와 인식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민중들은 자연적으로 이전의 감독제를 더 선호하고, 감독제의 교회로 헤쳐모여식이 되어버렸다.

대 추방
정치적 흐름은 1649년1월 찰스 1세의 런던탑에서 처형, 올리브 크롬웰의 호민관 정치가 1658년 그가 죽을 때까지 진행되고, 1660년 찰스 2세가 양국의 왕이 된다. 찰스 2세가 왕이 되면서 영국 교회는 감독제 영국 국교회로 복귀한다. 이전의 국교회 정치와 예배형식이 다시 의회에서 통과됨으로서, 각 교회에 강요하게 되고, 결국 복종치 않는 자들을 추방하게 되었다. 이것은, 1662년「통일령」(Act of Uniformity)에 의한 것이다. 더욱이 추방된 목사는 그 교회와 마을로부터 5마일 이상 떨어져야 했다(Five Mile Act, 1665). 또한, 목사가 전직하여 될 수 있는 교사도, 비국교회원은 교사가 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었다(Corporation Act, 지방자치체법).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 치하에 장로교 주의자들이 받은 박해는 교회 역사상 가장 고통스런 핍박중의 하나였다.

폐지후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윌리엄과 메리의 공동통치가 된 1688년과 그것을 이은 「관용론」(Toleration Act, 1689)의 선포로 장로제를 가질 자유는 주어졌지만, 장로교회의 조직화는 인정되지 않았다. 유리테리안과 같은 이단들이 대두되면서 점점 장로교회는 쇠퇴하여 갔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존 웨슬리의 복음적 부흥운동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로 이주해온 자들이 중심이 되어 장로제 교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876년에 장로제 교회와 그 신앙을 주장하는 자들이 「영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England)를 결성되었다. 약 270여 교회와 5만여 명의 교회원이 중심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지금은 캠브리지 대학과 긴밀한 연결을 가진 웨스트민스트신학대학을 소유하고 있다. 가장 신학적으로 비평학적으로 자유주의적인 학교라 할 수 있다.
결론
웨스트민스터 제 문서는 여전히 전 세계의 장로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 장로교회가 역사적으로 가진 의미는 크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이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가 작성한 문서를 통해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에 장로제 교회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꿈은 각 세계로 흘러들어가, 많은 교회들이 장로제의 신앙을 가지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소유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장로교회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사람이란 영어로 Scotch-Irish 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Ulster-Scots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타당하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아일랜드 사람과 결혼함으로서 생겨난 자들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 북아일랜드로 이주하여 살던 사람들로서,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미국 장로교회에 공헌한 것은 이루어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언제 아일랜드에 기독교가 전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일찍이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기독교 지도자는 Patrick라는 전설의 인물이다. 그는 317년경 스코틀랜드에 태어났지만, 16세에 아일랜드로 노예로서 팔려가, 그 곳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켈트교회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교회로서 오랫동안 존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게 아일랜드를 로마교회화 시켜 통치하도록 명령함으로서, 1170년경 로마교회의 국가가 되었다.
1534년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의회에 제출하여, 가결시킴으로서, 그는 잉글랜드와 함께 아일랜드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이 수장령을 거절했다. 이 이후로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것은 잉글랜드가 아일랜드 교회에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 형식과 정치형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분쟁은 전쟁으로까지 비약되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말기에, 알스타를 포함한 북 아일랜드의 인구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반으로까지 감소되었다.
제임스1세
엘리자베스 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는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베이컨(Brancis Bacon)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는 개신교도들을 아일랜드에 이주시킬 것을 조언하여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경에 사는 자들을 이주시켰다. 1603년에는 양국이 합병되어 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했다. 더욱이, 제임스1세와 찰스1세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탄압하고, 잉글랜드 퓨리턴을 박해함으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성도들이 북아일랜드로 많이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남부 아일랜드는 여전히 로마교회가 건전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찰스 1세는 잉글랜드의 퓨리턴과 스코틀랜드의 장로주의자들을 북아일랜드에 이주시킴과 동시에, 그들에게도, 그리고 남부의 로마교도들에게도 영국국교회의 정치와 예배, 교리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찰스 1세는 악명 높은 토마스 웬트월쓰(Thomas Wentworth)를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하여, 그는 남부 로마교도와 북부 장로교도들을 국교회에 복종시키기 위해 가혹한 박해를 가했다. 그리고「복음서 기자 이름으로의 서약」(Oath upon the Holy Evangelists)에 서명하게 함으로서, 무조건적으로 언제나, 어떤 방법으로도 저항하지 않고, 국교회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게 했다. 이것은 무지한 백성들에게 무조건 서약하게 한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 이것이 「암묵서약」(Black Oath)으로 알려지면서 거부하자 심한 박해와 고문을 가했다. 결국 그는 장기의회에 소환되어 1640년에 처형되었다.
토마스 웬트월쓰가 죽고 난후, 장로교도들은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는 듯 했다. 그러나 돌연 청천벽락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남부 아일랜드의 로마교도들이 북부 장로교도들을 습격하여, 1641년부터 시작된 대 학살로 북부 장로교도들이 몇 만 명이 죽었다. 이것은 바돌로마이 사건 1572년의 위그노 학살 이래로 개신교의 대학살 사건이었다.
영국 의회는 폭동을 진압하고 대학살을 저지하기 위하여 약1만 명의 병사를 파병했다. 그들 병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이 대부분이었다. 각 연대마다 종군 목사가 배속되었다. 그들은 군인으로서, 또한 전도인으로서 아일랜드에서 봉사했다. 그들은 각 연대에 장로교회와 당회를 설치했다. 1642년 6월 10일 이러한 교회가 중심이 되어, 각 교회 대표자들은 벨파스트 북쪽 카리크펄거스(Carrickfergus) 라는 마을에 모여서 첫 노회를 조직했다. 5명의 목사와 4명의 장로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 총회는 목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하여, 6명의 목사를 파견했다. 1660년경에는 80여개의 장로교회와 70여명의 목사와, 5개의 노회, 10여만 명의 교회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찰스 2세가 1660년에 즉위함과 동시에, 「통일령」을 발표하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전 주민에게 감독제, 대주교제도와 로마 교회에 가까운 고교회(High Church)의 예배 방식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 명령을 거부함으로서 정부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 1687년 로마교에 심취한 제임스 2세가 즉위함으로서 사태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통치를 하게 됨으로서 그들에 의한 종교 「관용령」이 통과 되어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퇴위된 제임스 2세가 아일랜드로 도망 와서, 왕위 탈환을 위하여 로마 교도들로부터 병사를 모집했다. 윌리엄은 즉시로 군대를 파견하여 아일랜드는 전쟁터가 되었다. 제임스2세의 패전으로 일단 평화가 돌아왔다.

대 이주
윌리엄이 1702년에 죽음으로서, 제임스 2세의 딸 안(Anne)이 즉위하여 「심사령」(Test Act)을 발표했다. 그것은 모든 공직자들은 임명됨과 동시에 3개월 안에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에 의거한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로마교와 거의 동일한 이 성찬식에 장로교도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박해와 함께 기근이 심해져 많은 북부 아일랜드 장로교도는 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705년에서 1775년 사이에 역 50만 명이 이주했다고 한다.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숱한 박해와 핍박을 고난을 알 때, 그들이 왜 아메리카 독립을 위해서 싸웠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오늘날의 아일랜드 장로교회
현재 북 아일랜드에는 600개 이상의 장로교회와 15만 명의 성도들이 있다. 인구 50만의 벨파스트는 장로교회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북부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중심지이다. 신학적인 이유로, 또는 예배 중에 악기를 사용해야 하는가? 시편가와 찬송가를 동시에 사용해도 되는가? 등등의 이유로 분열의 경험을 하고 있지만, 북부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장로교회로 남아 있다.

아메리카 장로교회
아메리카 합중국 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초기 이주민들 사이에는 장로제 중심의 교회원들도 많이 있었다. 물론, 개신교들 가운데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도 장로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거의 모두가 신학적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했지만,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장로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특히 회중교회원들이 많이 있었다.
역사에 의하면 1607년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으로 이주한 것이 최초의 영국 이민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 이주하여 온 자들은 영국 국교회 성도들이었다. 물론, 영국 국교회 성도였지만, 그들 대부분은 개혁주의(칼뱅주의)적 신앙을 가진 퓨리턴들이었다. 1620년에 필그림 파들스 (Pilgrim Fathers)가 메사츄세스주 플리마우스(Plymouth)에 상륙했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에서 이탈하여, 네덜란드로 건너가, 그곳에서 다시 영국(Sauthampton)에서 8월 15일 2척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주했다.
그 후, 많은 영국 퓨리턴들이 새 대륙 아메리카를 찾아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퓨리턴들은 메샤추세스와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신학적으로는 엄격한 개혁주의자들이었지만, 교회 정치적으로는 회중제도를 선호하였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장로제를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일찍이 1623년에 뉴욕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장로교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후대에 「미국개혁파교회」(Dutch Reformed Church in America)를 만들었다. 이들은 엄격한 장로제를 주장한 교회이다.
프랑스 위그노들 역시, 본국의 박해를 피해서 뉴잉글랜드, 뉴욕, 버지니아, 남카로라이주, 조지아 주에 정착하여 신학적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 결국에는 장로교회에 가입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 사람들도 초기부터 이주하여, 뉴저지 주, 북카로라이, 남카로라이등에 정착하여, 아메리칸 장로교회의 기초를 닦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은 특히 1705에서 1775년 사이에 약 50만 명이 이주했다고 역사가들이 말한다. 그들은 대부분 뉴저지 주, 펜실베이니아 주에 정착하고, 그들 가운데 메릴랜드 주, 버지니아 주, 남카로라이주에 정착하는 자들도 있었고, 펜실베이니아에서 서쪽으로 피츠버그까지 전진했다. 이들은 여기에 도시를 건설하여 피츠버그는 아메리카 최대의 장로주의 도시가 되었다. 이들은 펜실베이니아 남쪽으로도 이동하기도 했고, 찰스톤의 북쪽으로도 나아가기도 했다. 이들은 장로주의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 교회를 세웠다. 이들이 장로교회의 토대가 된 자들이다.
상당수의 독일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자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대부분 펜실베이니아 주로 이주했을 1700년에서 1770년 사이에 많이 이주했다. 그들은 「합중국 개혁파교회」(German,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를 건설했다.

이와 같이 각 나라의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언어, 문화, 습관 등이 달랐다. 학교도 없었다. 교회도 없었다. 말 그대로 광야 교회시대였다. 교회는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당시 목사 전도사는 유럽에서 건너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충실한 병사로서, 모든 고난을 감당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전도사를 소개하자면 Francis Makemie 목사였다. 그는 1683년 북아일랜드 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인이었다. 그는 25세에 미국으로 건너와, 아메리카 메릴란드주 동해안을 따라 장로교회를 개척하고, 뉴욕에서 조지아 주까지 3번에 걸쳐서 순회전도를 한 복음의 일꾼이었다. 그 당시, 정치적으로는 아메리카가 영국의 식민지령이었기 때문에, 개신교 목사는 영국 국교회의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마케미 목사역시 뉴욕에 투옥되었다.

최초의 미국 장로교회 노회
1706년 필라델피아에 가까운 곳에서 마케미에 의해서 최초로 미국 노회가 개최되었다 (정확한 장소는 미확인). 7명의 목사와 약간의 장로가 참석하였다고 전해진다. 마케미 목사는 「이 노회는 그리스도교의 질적 향상과 그리스교의 전도를 위해 가장 좋은 수단들을 의논하기 위한 회의이다」라고 말했다.
제1회 장로교회 대회
최초의 노회가 개최된 그 시기에, 북아일랜드 사람들의 이주가 본격화 되면서 급격하게 장로교회가 성장하게 되었다. 마케미 목사는 일생을 복음 전도를 위해 진력을 쏟아 붇고, 1708년 50세의 나이로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된다.
1717년 4개의 노회에서 시작되는 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어「필라델피아 대회」라고 불린다. (the Synod of Philadelphia). 17명의 목사와 7명의 장로가 출석하였다. 그 당시 아메리카 장로교회는 19명의 목사와 40명의 장로, 약 3천명의 성찬 식구가 있었다.

신조채택
필라델피아 대회가 끝난 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의 모든 교리를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대략적으로 스코틀랜드 출신 목사는 수용을 원하는 반면, 잉글랜드와 웨일즈 출신 목사는 반대했다. 최후적으로 타협안이 작성되어 1729년에 필라델피아 대회에서 「신조채택결의」(The Adopting Act)를 승인함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이 장로교회의 교리기준으로 채택되었다. 따라서 모든 교직자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은 믿음의 가장 기본적이며 믿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 사항에 관한 기독교의 기본 교리의 계시와 체계를 충실하게 표현했다」라고 서명을 해야 했다. 누구든지 양심적으로 이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의 어느 부분에도 양심적으로 거리낌이 있다면, 목사는 노회나 대회에 의견을 제출할 의무가 있었다. 보고를 받은 노회 또는 대회는 제출된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고 그 부분을 판단할 의무가 있었다. 제출된 사항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판단되면, 노회나 대회는 제출한 목사에게 탈퇴를 권고했다.

구파와 신파의 분열과 재 합동, 성장
1741년 필라델피아 대회에서, 장로교회는 구파(Old Side)와 신파(New Side)로 분열되었다. 신파는 1745년에 조직되어 「신파뉴욕대회」(New Side Synod of New York)라고 했다. 구파를 「구파필라델피아대회」(Old Side Synod of Philadelphia) 라고 불렸다. (결국 1741년부터 재합동이 일어나는 1758년까지 두개의 장로교회가 존재했다).
이 분열은 교리적 상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일어난 신앙부흥운동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서 일어난 것이다. 스코틀랜드와 북 아일랜드 출신의 많은 목사들은 그 당시의 부흥운동을 「새로운 열광주의」(New Enthusiasm) 이라 부르면서, 그들이 사용한 전도방법역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길버트 테넨트(Gilbert Tennet)에 의해 지도되는 신파의 젊은 목사들은 전도에 열심이었고, 특히 신파의 반대는 영적 죽음에 의해 생겨난 반대라고 비난했다. 특히, 테넨트의 「회심하지 않은 목사의 위험」(The Danger of an Unconverted Ministry) 이라는 설교 책자를 통해서 분열과 논쟁이 가속화 되었다.
그러나 신파와 구파는 1758년에 합동하여 하나의 교회가 되어 대회를 개최하여 이름을 「뉴욕/필라델피아 대회」라고 불렀다. 이때의 교회 수는 2000여개의 교회와 98명의 목사, 만 명의 신자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가운데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고, 기독교주의 학교가 설립, 인디안 전도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독립전쟁 (1775-1783년)
아메리카 독립전쟁은 시민의 정치와 종교적 자유를 위한 위대한 전쟁이었다. 장로교 사람들이 이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지도자가 되었고, 장로교 사람들을 지도한 자들이 스코틀랜드계 북아일랜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역사가는 말하기를, 대영제국과 모든 관계를 끊고 독립하자고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들은 잉글랜드 사람도, 스코틀랜드 사람도, 프랑스 사람도, 독일 사람도 아닌, 스코틀랜드계 북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한다. 장로교 사람들이 독립 선언문을 1744년에 작성하기 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 후 독립을 위해서 용감히 싸운 자들 역시 장로교 사람들이었다. 미국 헌법이 장로교회의 정치 형태와 현저하게 비슷하다는 사실이 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제1회 총회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의 제정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장로교 사람들은 장로교 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장로교 총회의 결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준비에 의해서, 1788년 5월에, 「뉴욕 필라델피아 대회」자체를 4개의 대회와, 16개의 노회로 나누었다 (the Synod of New York and New Jersy, the Synod of Philadelpia, the Synod of Virginia, and the Synod of the Carolinas). 4개의 대회는 각각 대회를 개최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