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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매월1-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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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사도행전 강해 10장 9절-23a절
2008/04/03 오후 1:13 | 사도행전 강해: 매월1-2주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사도행전 10장 9절23a절
2008년3월30일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진실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고, 행하시고, 사람들을 모으시고, 교회를 세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적으로,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박해로,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고 가십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유대인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의 만남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넬료는 로마인으로 이방인이며, 더군다나 점령군이기에 만날 수없는 그런 운명의 사이입니다. 또한 고넬료는 군대 대장입니다. 당시의 무명인 베드로, 고기잡이였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3년이나 따라다닌, 맹신자라고 불릴 정도의 하류급 사람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됩니까? 왜 만나야 합니까?
베드로는 사도였습니다. 사도 중에도 지도자적인 사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고넬료는 평판이 좋은, 구제를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신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나타나십니다. 먼저 고넬료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고넬료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했습니다. 경건한 것만으로, 구제하는 것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청하도록 환상가운데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때문에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자존심도 문화의 장벽도, 민족의 차별도 뛰어 넘게 됩니다. 예수 때문에 넘어야 당신의 할 장벽은 무엇입니까?

가이샤라에서 약 40킬로 떨어져 있는 욥바에 체재하고 있는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 고넬료에게 나타나신 시간이 오후 3시경입니다. 그 다음날 정오경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십니다.

정오라고 한다면 점심식사시간입니다. 모두가 식사할 시간입니다. 베드로 역시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기도하려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보통 때와는 다르게 아마도 베드로 마음에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난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시장합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맨 것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 안에는 땅의 각색 네 발을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소리까지 들려옵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자마자, 14절에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레위기11장, 신명기 14장에 음식에 관한 율법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음식에 대한 새로운 율법을 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7장에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더욱 사람을 더럽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새로운 율법을 가르쳐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여기서,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왭니까? 아마도, 베드로는 거절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그동안 자신을 지배해왔던 습관, 풍습, 편견, 선입견등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선입견과 생각 때문에 많은 피해를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으니까, 그냥 따라서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선입견과 당신들의 고집은, 은혜의 성장과 진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됩니다. 교회가운데도, 내 신앙생활 안에도, 많은 고정된 관념들과 행동들이 사실은, 나의 은혜 충만을 방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3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거절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것처럼, 그는 주님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그 후에 환상이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절하긴 했지만, 뭔가 이상합니다.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17절에, 환상을 본 베드로는 속으로 의심합니다.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라는 이 17절의 의미는 아주 중요합니다. 즉,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지만 정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환상이란 그 환상자체만으로는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환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꿈과 환상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환상은, 말씀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고넬료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 베드로 역시 그렇습니다. 즉 표시입니다. 표시란 말씀이 같이 따라와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그 징표에 말씀이 수반되기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은, 인간이 주관대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해석되고 인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환상이라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럼 베드로의 환상이 어떻게 말씀으로 인도됩니까? 첫째로, 그가 그것을 보고 생각하며, 간구할 때입니다. 보여주신 환상을 그냥 간단히 이렇다, 저렇다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일까? 기도합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17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의심하고 생각할 때 바로 “마침” 그 때에, 사람들이 왔고, 19절에 다시 베드로가 “환상에 대하여 생각 할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바로 그 때에 성령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사가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자들이 도착하는 그 순간에, 성령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보내어 주시는 환상은 말씀과 함께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말씀과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지금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상이, 바로 주님께서 보내신 환상이요, 교회 선교를 위한 환상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28:9를 참고.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0절에서 “(그러나) 일어나 내려가라,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고 합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네가 믿기 어려울 것이지만, 그러나, 일어나 가라, 라는 뜻입니다. 아주 강하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가라. 22절에 사람들이 설명을 합니다.

23절,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하룻밤을 통하여,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잠이 잘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그래서 진리라고 믿었던 사실들이 거부되는 이 상황 속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여러분, 이방인에게 가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왔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확신시켜주시는 듯한 역사로, 사람들이 다가온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의 고통과 갈등을 아신 주님은, 고넬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사람들을 베드로에게 보낸 것입니다.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이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믿었겠습니까?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짐승을 먹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의심하지 말고 가라는 말씀하신 그 음성, 이방인에 집으로 가야 된다는 이야기,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볼 때, 그 날 밤, 베드로의 머리를 메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한 젊은이의 갈등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할것인가? 아니면 계속적으로 안정된 목회를 안전한 일을 계속할 것인가?

오늘 당신의 결정은 어느 편입니까? 여전히 당신의 생각과 고집으로 꽉메운 삶을 사시렵니까? 아니면, 오늘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말씀에 아멘, 주여 가겠사옵나이다. 라고 고백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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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사도행전 강해 10장 1-8절
2008/03/28 오후 2:31 | 사도행전 강해: 매월1-2주

고넬료에게 왜 베드로가 필요한가
사도행전 10장 1-8절
2008.3.16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실 그 당시,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확실히 이 세상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성취되어 갈지, 제자들은 궁금해 하며, 불안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안과 걱정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를 증명하듯이, 주님께서는 자신의 방법대로 교회를 세워 나아갔습니다.

특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설립되고 성장되어갔습니다. 성령 받음으로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그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다. 성령받기 전에 그들은 병 고침도 할 수 있었고, 이적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기 전에 그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 앞에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받는 다는 것은, 그 성령을 보내신 분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하면, 힘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그래서 전도는 바로 힘입니다.

이러한 설교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특히 우리는 복음 선교에 하나님께서는, 앉은뱅이와 같은 자들을 사용하시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거짓말하는 자들을 사용하시고, 동시에 또한 스데반, 사울, 바나바, 고넬료와 같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고, 평판이 좋은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교회가 없는 상태에서 교회를 세워나가는 초대교회 상황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34절에 나오듯이 외모를 취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논리가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보다 깊은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는 것입니다.

그들의 설교가 적용되고, 그들의 전도가 효과적으로 전파되기 위하여, 때로는 주님께서 평판이 좋고, 인정받고, 유력한 자들 사용하신 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뿔)역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그는 군대의 백부장이라고 소개 됩니다. 가이샤라는 아주 큰 도시입니다. 원래는 등대하나 밖에 없는데 헤롯이 세워서 로마황제에게 바친 도시입니다. 따라서 무역이 성행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큰 도시입니다. 이런 곳에서 100부장이란 아주 신분이 높은 것을 의미합니다.(여기 군으로 번역된 것은 600명으로 편성된 부대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백 명의 대장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도 백부장과 관계되는 사건이 누가복음7장에 나옵니다. 특히 저자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다고,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백부장이 나옵니다. 이러한 자들이 예수를 믿음으로서, 많은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신분이 높은 고넬료가 예수를 영접하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후쿠로이키타 교회에도 여러분과 같은 유력한 분들이 계심으로서, 지역사회로부터도 인정받는 교회로 성장함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고넬료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경건하고,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유력한 자, 신분이 높은 자만을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경건, 경외, 구제, 기도하는 자였습니다. 스데반과 일곱 집사들이 소개될 때도,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고, 평판이 좋은 자들이었습니다.

경건이란, 예배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말합니다. 8장에 빌립이 이 곳 가이샤라에 와서 복음을 증거했다는 증거가 나옵니다. 아마도 그 때 믿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좋아하는 자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창조하시고, 주장하시고, 지금도 인도하고 계심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좋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족 전원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가족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니카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은 당신이 눈물로 기도하면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백성을 구제했습니다. 그가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가이사랴 교회에 참가하여 같이 구제사역에 참여한 것입니다. 즉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도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언제나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3절에 제 구시, 오후 3시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정해놓고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초대교회도 오후 3시가 되면 기도하자고 정해놓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찾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시편141편 2절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わたしの 祈を, み 前にささげる 薰香のようにみなし, わたしのあげる 手を, 夕べの 供え 物のようにみなしてくださ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만나주십니다.

고넬료는 교회가 정한 기도시간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힘들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이 낮에 시간을 내어서, 교회가 정한 시간에 나온다는 것은 힘든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좋아했고, 경외했기에, 나오는 것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오순절 교회건축 특별기도회를 개최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사건입니다. 교회가 정한 시간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고, 만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4절에, 하나님의 사자가 말합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바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러한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 그를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하냐고 제자들이 책망을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기억된 자였습니다. 세상 끝까지 주님께 기억되는 자의 삶을 주님은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었던 이 의미가, 이방인에게도 적용되었다는 것은 복음의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오늘 고넬료 역시, 주님께 기억된 사람입니다. 주님께 잊혀져가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되어야 우리의 삶이 행복합니다. 주님께 기억되는 자에게 주님은 축복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참된 평안을 주십니다.

왜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필요합니까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고 합니다. 오늘 설교의 마지막 포인트는 이 곳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를 청하라, 라는 것은 “너 자신을 위하여 사람을 보낸다.” 라는 뜻입니다. 내 자신을 위하여 진정으로 해야 할 것은, 기도와 구제와 예배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나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볼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천사가 고넬료에게, 당신은 정말로 구원받은 착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은 순간이 아닙니까? 너는 정말로 착하구나, 예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사, I was onc e lost like you, but one  day Jesus saved me.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넬료는 여전히 하나님밖에, 주님밖에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생각을 하면, 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는 기도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고, 하나님께 예배도 잘 드리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십니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구제와, 경외와, 예배 이상으로 뭔가를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구제와 경외와 예배만으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궁극적인 삶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말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접에는 나중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제를 잘한다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삶의 빛이며, 진리이시며, 길이시기에, 그 분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주신 길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에 있어 나중은 없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만나야 합니다. 절박합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천사가 떠남과 동시에, 종들을 불렀습니다. 즉각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이런류의 삶을 순종의 삶이라고 합니다. 즉각적은 순종은, 삶속에 기적과 같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당신의 마음에 도전이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그것에 즉각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즉각적인 순종에 기쁘하실 것이며, 그 순종에 대한 결과를 이미 허락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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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사도행전 강해 9장 31-43절
2008/03/13 오후 4:19 | 사도행전 강해: 매월1-2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행전9장31-43절
2008.3.9일

성령강림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모이기 시작한 출발점입니다 (2장).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의 미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침으로서, 사람들은 복음에 참여합니다(3장). 4장에서 복음 선교를 훼방하고 반대하는 자들의 계략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은 전진합니다.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베드로의 활동은 더욱 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6-8장을 통해서 사탄의 압력은 더욱 거세어져 가지만, 그 어떤 박해와 핍박도 복음의 선교를 막지 못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교회를 더욱 성장하게 합니다. 더욱이 9장을 통해서 바울이라는 한 인간의 변화와 아나니아와 바나바의 사역을 통하여, 그가 사도가 되는 사건이 기록됩니다.

우리가 9장 마지막 부분까지 사도행전을 연구하여 오면서, 이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것은, 성령강림도 아니고, 기적도 아니고, 방언도 아니고, 치유도 아니고, 순교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복음을 선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 지상 명령의 실행입니다. 모든 사건의 초점은 오로지 복음 선교입니다. 성령이 강림한 것도 선교를 위해서, 기적이 일어난 것도 선교를 위해서, 스데반이 죽은 것도 선교를 위해서, 사울이 변화된 것도 선교를 위해서입니다. 지금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자리를 잡고, 어떻게 성장했는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의 이야기를 일단 13장까지 접어두고, 다시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첫 절 32절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였다, 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금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적어도 베드로와 사도들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이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교회에 국한된 신앙생활, 전도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찾아오는 사람뿐만 아니라, 스스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는 패턴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교의 형태, 삶의 형태의 변화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초대 교회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수동적인 선교의 삶에서, 활동적으로 밖으로 나아가는 적극적 선교의 삶의 형태라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수동적으로 다가오는 자들에 대한 선교 형태뿐만 아니라, 이제 적극적으로 밖으로 나아가는 선교 형태가 서로 상호보완의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주일날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의 모습임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교회,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무조건 밖으로 나아갔습니까? 그냥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나아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방황하듯 전도하러 나간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루살렘 밖으로 나아가기 까지는, 그 곳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순교의 피 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역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베드로를 변화시키고, 무엇이 그를 밖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흩어짐이란 바로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스데반과 같은 순교의 피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와 그 박해로 인한 스데반의 죽음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선교적 죽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그 사람의 죽음으로, 교회는 흩어졌고, 그 흩어진 교회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일본 땅의 우리도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여러분은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앞에 선교적 평가를 받게 됨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을 통하여, 박해를 피하여 많은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졌습니다. 이 흩어짐은 박해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 흩어짐은 각 지방과 도시에 교회를 세우는 동기가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에, 각 처소에서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 라고 표현 한 것입니다. 따라서 31절이 말하는 교회는 어느 어느 한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전체적 의미를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평안하여, 성장하여 나아가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각 지방과 도시에 교회라기보다는 “성도”들의 모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중요시 합니다. 성도: 아직 이렇다 할 교회 형태는 없지만, 롯다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있었고, 서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백성입니다. 본래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그 거룩하신 그 분께서 거룩하다고 인정하고, 칭의 해주신 자들은 그 분의 은혜로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22장 32절에,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 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 칭의 하신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지 예수를 알고 싶어 하는 자들이 아니고, 단지 뭔가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뭔가 문제 해결을 받기 원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다 칭한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룻다에는 말씀전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토대를 닦은 교회가 체계적으로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각 사도들을 각 지방과 마을로 파견하여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격력하고, 교회를 세워 간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있는 곳에, 주님은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를 보내어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입은 백성들에게도 문제는 여전히 있습니다. 그들도 여전히 병들고, 여전히 죽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다 병들고 죽는 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 칭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거룩하지 못한 자들과 동일한 아픔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다릅니까?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다른 점은,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이고, 그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달되고, 그리스도가 실질적으로 전달되는 것, 이것이 참된 치유이며, 참된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말합니다. 선교, 복음의 가장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잠깐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에는 8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중풍병자 애니아와, 이미 죽은 여제자 다비다에 대한 베드로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각 마을을 다니면서, 설교하는 가운데 만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을 누가는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취급을 하는 듯한 느낌까지 줍니다.

왜냐하면, 비록 중풍병자와 죽은 자에 대한 사건이지만, 그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35절 “룻다와 샤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고 기록하며, 42절에도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고 기록합니다. 저자는, 두 사건의 결론을 거의 동일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기적에 민감합니다. 이상한 일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치유를 위한 치유를 생각합니다. 이상한 일 그것으로 그냥 만족합니다. 그러나 오늘 누가는, 그러한 신앙을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참된 성경적 치유란, 예수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로 인도되지 않는 치유나 기적에 대하여 사도행전은 철저히 멀리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로 인도되어지는 치유와 기적만을 성경은 고집합니다.

왭니까? 사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롯다의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합니까? 다비다가 다시 산 것을 본 사람은 욥바에 모인 성도들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 35절, 또는 “많이” 42절에,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질적으로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그 마을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으로 다, 많이 예수 믿기로 하였다, 라고 기록합니다.

어떻게 그들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어떤 치유였기에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치유는, 단순히 병 고침을 받고 마는 그러한 사건이 아닙니다. 위로를 순간적으로 받고 기분이 좋아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여러분들이 참된 가르침에 참된 믿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치유였기에 룻다와 욥바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참된 치유란, 그리스도가 확실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치유와 다시 살아남의 사건의 주인공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치유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그 자체가 전달되는 역사가 바로, 참된 치유입니다. 그것은 그 본인의 치유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치유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모여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그 분이 치유를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한 것입니다. 예수가 전달되는 치유와 기적만이, 사람들을 예수앞으로 모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베드로는, 34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 고 합니다. 지금 낫기를 바라는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미래형이 아니라, 지금 현재형으로 선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아닙니다. 주문이 아닙니다. 선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즉시로 일어나는 사건을 선언하는, 공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치유입니다. 바로 즉시로 예수님 그 분이 직접 이 자리에서 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 그 분이 직접 고친 치유이다 보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듣고,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이니까, 사람을 믿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치유가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왜 힘이 없습니까? 왜 그리스도로 인도하지 못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는 그리스도가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전에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사람들이 베드로를 대단한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3장 12절에서 “우리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살아계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의 역사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치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 번째 사건도 그렇습니다. 다비다 라는 여 제자, [선행과 구제하는 일 심히 많더니], 제자라는 말이 남성에만 적용되는데,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다비다의 신앙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예수 중심이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다비다의 선행과 그의 믿음을 논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베드로가 기도하고, 다비다야 일어나라, 했을 때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는 것입니다.

그녀가 다시 산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의 예수가 부활하여 산 것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에게는 내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주신다고 하신 것을 우리는 여기서 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녀의 산 것이 되신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베드로가 살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삶을 산 것으로 확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이 다시 사신 그 능력의 기쁨으로, 다비다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된 것입니다. 이상하네, 라고 말만하고 끝나는 그런류의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그 자체를 다비다를 통하여 보여 주시니, 사람들이 다비다를 보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베드로가 병을 고쳤다는 사실에 주요점을 둡니다. 왜? 결과가 무엇인가? 에는 관심이 잘 가질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주셨는가?입니다. 선교입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그 분이 결과요, 그리스도 그 분이 실질적으로 역사하심이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무용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건의 결론을 동일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주를 믿더라, 주께로 돌아가리라. 두 기적적인 사건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동일하게 베드로를 통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대로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사실 마가복음 2장과 마가복음 5장에 거의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사역을, 그 분 자신께서 수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사탄과 악마가 날뛰더라도, 그 분은 자신의 교회를 끝까지 지키시고, 그 교회를 성장케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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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사도행전 강해 9장 31절
2008/03/03 오후 2:57 | 사도행전 강해: 매월1-2주

그리하여의 삶
사도행전 9장 31절
2008.3.2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동안 바나바의 삶을 살았습니까? 난 당신의 바나바가 되겠습니다, 라는 삶이 언제나 계속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하여]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그리하여, 라는 이 단어는 저자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50회 이상 나오는 말로, 특히 6장 7절, 12장 24절, 16장5절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확실히, 정말로, 사실, 진실로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이렇게 하여] 진실로 교회가 평안하고, 기초가 세워져 가고, 주님을 경외하고, 성령으로 위로받고, 신자가 늘어났다, 고 저자는 말하고자 합니다.

그럼, 그리하여 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냅니까? 아마도 성령강림이후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사울의 등장은 초대교회에 하나의 큰 에포크가 되는 사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간단한 이 본문은, 9장과 구체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9장에는 어떤 사건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까? 우리가 계속적으로 강해하여 오면서 머리에 남는 것은, 구체적으로 바울, 아나니아, 그리고 바나바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하여져 가는 가운데,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9장 1절 말씀만을 놓고 보면, 풍전등화와 같은 아주 위태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박해와 핍박,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사탄의 핍박가운데, 하나님의 교회는 멸망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다 신앙을 버리고, 교회는 결국 문을 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영원히 역사가운데 살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박해가운데,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초대교회의 역사가운데, 세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이들의 등장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해답의 실마리가, 9장에 나옵니다. 15절에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택하심의 은총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만이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바나바역시 이를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은총을 받아 택함을 입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순종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거역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실존적으로 생각을 하자면,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과의 만남속에서, 한 번도 난 유대인으로 당신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을 만나라고 말씀하시는 아나니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아나니아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바나바는 어떻습니까? 아무도 바울을 인정하고자 하지 않을 때, 그는 바울을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그를 예루살렘 교회에 인정받도록 도와줍니다. 바울만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바나바가, 하나님의 섭리와 택하심에 순종할 때, 그 곳에 은혜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리하여] 란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서, 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하는 것이 정확한 인식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똑똑하고, 영리하고, 학문적이어서, 오히려 그러한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울과 아나니아, 바나바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순종한 것은 교회를 바꾸는 역사, 박해를 평안으로 바꾸는 역사로 나아갑니다. 오늘 당신의 삶의 문제는 혹시,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하심에 대한 거역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은, 바로 평안으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에는 두 개가 서로 조인하여 하나가 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있다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누구랑 같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린 누구에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 손을 잡고 있다면 불안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순종은 결국 교회가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워지는, 더욱 결속하게 되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하심, 주님께서 우리 교회와 같이 하심,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과 같이 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평안입니다. 주님과의 평안은 당신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께 붙어있을 때, 우리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성장의 가장 큰 저해 요인 중 하나가, 분열입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될 때 교회는 죽게 됩니다. 갈 5:15절의 말씀을 보면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라고 했습니다. 평안은 성장이며, 견실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섭리와 선택에 순종하는 삶은 [주를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 진행하여]하는 삶으로 변화를 말합니다. 경외, 우리는 이 말에 대하여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무서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을 좋아한다”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선택권이 언제 주어졌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히 부를 수도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길 바랍니다. 존경하시길 바랍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 2장 12절. 하나님은 말 그대로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분께 철저하게 모든 것을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무엇이 찾아옵니까? 내가 다가갈 수 없고, 부를 수도 없는 그 분, 그래서 모든 것을 내가 내어놓고 헌신할 때, 주님은 나를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당신의 파라클레이토스가 되어 주십니다. 당신의 위로자, 당신의 변호인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원입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시며, 경외하여야 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경외할 때, 역으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로하여주시고, 따뜻한 손길로 나의 삶의 후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결론적으로 무엇입니까? 성장입니다. 교회의 성장 비결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고 순종함으로서, 하나님과 평안을 누리고, 기초가 세워져 가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말미암아, 성령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파라클레이토스가 되어 주실 때, 교회는 성장하고,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 축복이 이 번 한 주간 여러분과 같이 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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