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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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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특징과 신학적 비판 (2)
2006/06/22 오후 12:05 |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재평가

계약신학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이 가지는 두 번째 특징은, 계약신학이다. 16세기에서 시작하는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가운데서 「계약신학」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이다. 계약신학에 관하여, 벨직 신앙고백(1561)이 타락한 인간의 회복에 대하여 17조항에서 언급할때, 계약신학적 요소를 암시하고 있으며, 또한 도르트 신조 제2장에서 알미니안적 계약신학이 가진 오류를 지적하는 가운데서,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계약신학에 대하여 신앙적으로 고백하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이다 .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제3장「하나님의 작정에 관하여」, 제4장「창조에 관하여」, 제5장「섭리에 관하여」, 제6장「인간의 타락, 죄, 그것의 형벌에 관하여」, 그리고 제7장에서 「하나님의 인간과의 계약에 관하여」를 고백한다. 다시 말해서, 계약신학은 타락한 인간의 구속과 구원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언급하는 문맥가운데서 다루어지고 있다. 계약신학, 또는 언약신학은 성경에 나타나는 구원론적 계념이다.제7장 2조에,

「II.인간과 맺은 첫 언약은 행위 언약(foedus operum)이다. 이 언약으로, 아담에게 그리고 아담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어 있었다. ……… III.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되었지만, 주님은 두 번째, 언혜언약(foedus Gratiae)을 맺기를 기쁘하셨다. ……… IV. 이 은혜 언약은 성경 가운데서는 때때로 유언 (testamenti)으로 나타난다(indigitur)」.

하나님의 구속과 구원 역사의 도입 부분을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라는 2중 구조로 설명을 하고 있다. 언약신학은, 특히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적 구조안에서 아주 중요한 역활을 감당한다. 이것은, 일련의 성경적 논제(loci) 또는 교리적 죄(sedes dcotrinae)를 비교하고 연구한 결과에서 얻어진 신학적 지식이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보아온 것처럼, 모든 신앙과 신학을 해석하는 기준을 「성경」이라고 고백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WFC제1장) 신학은, 언약신학을 성경의 기본적 교리(sedes doctrinae)에서 파생된 2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2중적 언약신학은 석의적, 언어학적, 신학적, 히브리에서 헬라로 라틴어로 넘어오는 언어적/문화적 전이의 콘텍스트, 특히 기독교 해석학의 역사와 전통,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의와 원죄, 성경속에 나타난 구속사, 율법과 복음등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고려하고 연구한 신앙적/신학적 학문 연구의 결과이다 . 따라서, 언약신학은 16세기 17세기에 나타난 돌연적 신학 테마가 아니라, 성경에서 부터 시작된 구속사적 이해의 표현이며, 성경의 모든 구속사적 계시를 구체화한 것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은 언약신학이라는 표현법으로 통해서, 구속의 역사적 표현을 그들의 성경해석학과 교의학에 부여한 것이다. 구속신학의 도입부분으로서 언급된 언약신학은 신학 전체의 구조를 체계화하는 프레임이 아니라, 성경의 중심을 흐르는 구속사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연구의 결과이며, 결국 성경을 통한 신학적 구심점의 하나로서, 구속론의 중요시하는 신학의 표징이다.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개신교 초기 교의학의 발전과 성장속에서, 성경과 교부신학을 통한 해석학적 전통과 그것의 신학적 결과에 근거해서, 그 당시의 최상의 해석학적 지식과 도구를 사용함으로서, 그 당시 최고의 성경 해석를 구사하여, 그것을 신학적 해석 공식의 패턴이나 방법으로 포장했다. 따라서, 20세기의 성경 해석과 그 주석으로, 17세기의 성경 해석과 주석이 만들어낸 신학적 체계를 이해하고, 그러한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그러나,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종교 개혁자들, 특히 칼빈을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현대의 신학적 파라다임으로 16세기17세기의 신학을 사정한다. 특히,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언약신학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2중 구조의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율법을 우선시하는 반 알미니안주의적 신학이라는 비판이요, 또 하나는 이중적 언약신학 구조를 통해서, 신학의 능동성을, 합리적 이성적인 구조화로 바꾸어 경직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정당한 답변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그 당시의 신학를 연구하는 학문적 방법에 대하여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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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특징과 신학적 비판(1)
2006/06/10 오전 11:02 |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재평가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특징과 신학적 비판
1. 성경론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성경 고백에서 시작한다. 물론,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대부분이 성경 고백에서 시작한다. 하이델 베르그 신앙문답이 성경론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할애하지 않은 문제점에 대하여, 우리가 여기서 언급할 수는 없지만, 제네바 신앙고백(1536)은 첫항에서, 「성경은 신앙과 종교의 기준」(rule of faith and religion)으로 고백하고 있다. 또한, 제1스위스 신앙고백과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역시, 성경고백으로 시작하고 있다. 프랑스 신앙고백과 벨직 신앙고백은 일차적으로 신론을 고백하고, 2차적으로 성경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배열에서 오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이 성경론에서 시작한다는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성경론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모든 신앙과 신학의 근원(source)를 여기에 둔다는 의미로, 개혁주의 교회 신앙 고백의 필수 불가결한 형태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종교개혁 신학이 처음부터 내 걸었던 종교개혁의 원리중의 원리였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신앙의 케치 프레이즈인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라는 것은, 우리가 믿는 복음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sola Scriptura란 모든 복음적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근거, 출발, 또는 원리을 말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성경은 모든 것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모든 것의 원리가 되었다. 따라서, 모든 신학적 논쟁의 시작과 그 결론은 성경에서 시작되고 성경에서 도출된다(WCF 1/8). 특히, 개혁주의 교회는 이러한 오직 성경만으로, 라는 신앙의 출발점을 중요시 한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따라서 그것이 가지는 절대적 권위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고백함으로서, 성경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모든 인식적 근거(congito principia)와 존재적 근거(essendi principia)로서 고백한 것이다. 더욱이, 16세기와 17세기의 개혁주의, 또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특징을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라고 한다면, 개혁파 스콜라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출발하는 신학임을 가르쳐 주는 좋은 예가 된다.

신학의 인식적 근거로서 성경을 모든 신앙과 신학의 본질적 근원(source)으로 간주하는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신학은,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생활」에 관한 모든 것의 기준이 되며, 모든 판단에서 그 권위를 가진다고 고백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기록한 책으로, 천상의 형태를 가진「완전」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 곳에 인간의 조그마한 실수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의 신학이 가진 성경이해가, 많은 학자들의 도전을 받아 왔다. 특히, 20세기 초 부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후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이에 신학적 비연속성을 주장하는 논문들이 신정통주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 사이에 대두되면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비 연속성 논리는,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포함한 개혁파 정통주의, 또는 개혁파 스콜라주의는 개혁자들의 신학, 특히 칼빈의 신학에서 심하게 왜곡된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론에 대한 공격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정리 대표하는 프레이즈를「로저스-맥킴 프로포즐」(Rogers/McKim Proposal) 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레이즈는 우드브릿지 박사가, 젝 로저스와 도널드 맥킴에 의한 『성경의 권위와 해석: 역사적 접근』(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the Bible: An Historical Approach)이라는 책을 비판하면서 ,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 『성경의 권위: 로저스/맥킴 프로포즐』(Biblical Authority: A Critique of the Rogers/McKim Proposal)에서 유래한 것이다 .

로저스는 네덜란드에서 벨카우어 (Berkouwer) 박사의 지도아래서,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의 성경론」(Scripture in the Westminster Confession, 1967)이라는 박사 학위 연구를 통해서 스승의 이해를 습득하고, 이어서 벨카우어의 조직 신학「성경론」(De Heilige Schrift, 1966-67)을 영어로(1975) 번역하면서, 스승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보다 구체화 시켰다.

벨카우어가 이 주제에 관하여 문제시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개념들이, 성경 시대와 그 이후의 계속 되는 시대속에서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이 써여진 시대와 지금 시대는 여러면에서 그 개념들이 발전하고 전개되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그 권위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즉, 「성경의 영감성」과 그것의 시대적 「계속성」의 문제이다. 따라서, 그는 이 두 가지를 서로 만족시키는 견해로서,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기능적」(functional) 견해와「정식적」(formal) 견해를 서로 구분했다. 벨카우어에 의하면, 성경의 무오성이란, 사람들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으로 이끈다는 일차적 목적의 그 「기능성」에 있어서는 인정되지만, 그러나, 성경 그 자체의 모든 것들을 그 「정식적」 (formal) 의미에서, 인에런시를 주장한다는 것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식적 의미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적 사고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와같은 벨카우어적 해석을 그대로 답습한 주장이, 「로저스-맥킴 프로포즐」이다.사실, 이 문제는 특히 아메리카의 교회사적으로 볼때, 특히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C. A. Briggs의 성경론에서 시작하여 미국 교회에서 일어난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논쟁」, 또는 「inerrancy 와 infallibility논쟁」의 재점화라고 볼 수도 있다. 예를들면, 샌딘(Sandeen)은, 이러한 성경의 「정식적」formal inerrancy의 계념은, 스콜라주의적 소산으로 프린스톤 신학의 알렉산드 핫지, 워필드의 심각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

여기서,「로저스-맥킴 프로포즐」에 대한 비판이나, 또는 「현대주의와 근본주의 논쟁」을 상세히 논할 수는 없다 .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문제점은, 이러한 논쟁과 이해들이, 그것들을 주장한 저자들의 신학적 기획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라는 것이다. 즉, 원전이 말하고자 하는 콘텍스트를 중요시하기 보다, 자신들의 현재의 콘텍스트를 원전에서 합리화 할려고 하는 시대착오적 시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해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연구의 근본 원리를, 원전에서 원전을 해석하고, 그 원전의 콘텍스트 속에서 그 본문을 해석하기로 한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앞서 말한대로, 성경론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제1장을 면밀히 검토하여 보면, 성경 고백으로 곧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필연성에 관한 도입부분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나 신학체계의 도입부분은 크게 두 형태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바로 성경론 그 자체에서 시작하는 구조이며, 또 하나는 신학에 대한 정의와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을 언급한 후에 성경 계시로 옮겨가는 구조이다. 따라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후자에 속한다.

제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자연의 빛,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사역」(naturae lumen, operaque Dei cum Creationist um Providentiae)을 허락하시고 보여 주셨지만, 이러한 것 만으로는 참된 구원의 지식으로서의 하나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 분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고, 자신의 뜻을 교회에 선포하기 위하여, 모든 구원에 필연적인 진리를 문서에 계시하시기로 하였다. 이것이 성경 계시이다. 즉, 로저스와 맥킴의 주장과는 엄연히 다르게, 명확히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인간에게 나타난「계시의 두 형태」를 제공하고 있다 . 자연의 빛, 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만으로는 하나님의 참된 지식을 얻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은, 하나님의 특별적 자기 계시를 필요로 한다. 즉, 웨스트 민스트신학은 자연신학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신학이다.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이 자연신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로저스와 맥킴의 견해는, 그들이 신정통주의적 영향을 통해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을 이해하고 있다는 전형적인 예가 된다. 사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신학은 자연신학조차도 일차적으로 성경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제1장 성경론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 써여진 하나님의 말씀」(Sacrae Scriputrae nomine, seu Verbi Dei scripti, 제1장2절,) 은 66권으로서「이 모든 써여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신앙과 삶의 기준이 된다」(Qui omnes divina inspitatione dati in Fidei vitaeque regulam). 따라서, 이 외의 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인간의 권위에 의한「인간의 책」(humana scripta)일 뿐이다. 따라서, 신앙고백은 성경의 「저자」(authore, 제1장4절 )가 하나님이 되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으며, 「그 분에 의해 직접 영감된」(immediate a Deo inspirata, 제1장8절) 것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성경」은 「천상의 책」(materies insuper eius coelestis)이며, 「전체적으로 완전한」(perfectionem summam) 책이며, 따라서 「무류의 진리」(infallibili veritate) 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먼저 이슈화 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권위 문제이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성경이 써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자신이 그것의 「저자」이며, 또한 그 분이 저자이기에 「성경」(Sacra Scriptura)은 써여진 하나님 말씀(Verbum Dei scripti)으로 그 권위를 가진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성경의 영감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영감의 형식이나 형태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성경의 형태와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헤페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감은 기록의 형태가 아니라, 그 내용이라는 주장이 신정통주의적 신학의 성향으로 나타난다. 헤페는,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author)라기 보다는, 그 분 자신이 선포하신 교리(내용)의 저자라고 한다 . 즉, 어떤 형식을 영감한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영감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내용들이, 많은 시대를 거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구전되고 전승되고 전수되어, 「결국」 이러한 역사의 「계속되는 진보에 의해서 진실된 교리는 존속되어」(by a continuous advancement) 왔고, 기록되게 된 것이다 . 따라서, 그 형태보다, 그 내용이 영감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기록된 형태(the form of its recording)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내용(content), 즉 기록된 형태속에 증거되는 계시된 사실들 위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자들의 성경 권위 이해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의해서 왜곡되었다고, 헤페는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자는 하나님의 실제적 계시 행위에 성경의 권의의 근거를 두고자 한 반면, 후자는 성경의 권위가 하나님의 직접 영감이란는 그 방법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말씀」, 「권위」, 그리고 「영감」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계념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권위」란 「영감」에서 추론되어지는 결론이라기 보다, 「영감의 직접적 당연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권위」란, 저자의 정체성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성경의 경우에 있어서는 영감이란 저자가 사역하는 방법이다. 신적 증거는, 믿음의 체험적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말미암아 인식되는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당연한 결과이다. 따라서, 헤페의 주장과는 다르게,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이 말하는 성경의 권위는, 전적으로 그것의 저자인 하나님께 있다(Authoritas Scripturae Sacrae…… sed a solo ejus authore D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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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구조와 시대적 정황
2006/06/06 오전 10:41 |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재평가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구조
먼저,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신앙고백은 매우 방대한 것으로, 그 내용이 상세하며,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몇개의 조항으로 보다 세분화된다.

제1장에서는 성경론이 고백되고, 그를 이어 제2장에서 삼위일체, 제3장에서 작정론을 고백한다. 제4장과 제5장에서 창조와 섭리, 제6장에서 타락과 죄, 죄에 대한 형벌이 언급된다. 제7장에서는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은혜언약과, 구언약과 신언약의 구분과 일치가 고백되고, 제8장에서는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 자리를 잡고 있다. 제9장에서는 자유의지, 제10장에서 18장까지 유효한 소명, 칭의, 양자론, 성화, 구원하는 믿음, 생명에 이르는 회개, 선행, 성도의 견인, 은혜와 구원의 확신등을 다룬다.
제19장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다루어지고, 제20장은 19장과의 관계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루고 있다. 계속해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율법에 대하여 고백하는데, 제20장에서 예배, 안식일, 제21장에서는 합당한 맹세, 제23장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임명받은 관헌, 제24장에서는 결혼과 이혼을 다룬다.

제25장과 26장은 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다루며, 제27장에서 29장은 세례와 성찬을 다룬다. 제30장에서 교회치리, 제31장은 교회 회의, 제32장과 33장은, 죽음과 부활,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시대적 정황
상술했던 것과 같이,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고백의 특징중 하나는 다양성속에서의 일치성이다. 따라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 역시, 개혁신학의 다양성과 그것의 일치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특히, 신학적 정황의 상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특히,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Catholicity보편성(공회성)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종교개혁에서 출발한 개혁주의 교회는 신앙고백의 다수성(multiplicity)이란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신앙고백의 다수성, 또는 다양성을 견지하면서도, 그 가운데서 본질적 일치성을 견지한다는 개혁주의 교회의 특성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 신앙고백은 특정한 개인에 의하여 써여 진 것이 아니라, (교회) 회의를 통해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콘스탄틴이 니케아 회의를 315년에 소집했듯이, 또한 네덜란드 국가 의회(the Ducth States General)가 도르트 회의를 1618년에 소집했듯이, 장기국회(long Parliament)가 신학자 회의를 소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 Peter Toon, (b) Puritans Calvinisim).

이 사실은, 17세기에 접어 들면서 개혁주의 신학계에서는 더 이상 단독적, 개인적 신앙고백 작성의 작업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적 정황의 특징과 관련있다는 것 또한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성립시기가 가지는 시대적 정황은, 흔히, 종교개혁주의 신앙고백의 시기가 막을 내리는 시기이다. 즉,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을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적 신앙고백은 그 막을 내린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위텐베르그에서 시작된 종교개혁가들의 신앙과 신학은, 어떤 새로운 신학을 창조하는 신학이 아니라, 그 당시의 교회가 가졌던 신앙적, 교리적, 신학적 오류을 지적했다. 그들은 신학을 바르게 정립하기 위하여, 신학적 오류와 문제점등을 제기하고 수정하고, 개혁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당연히 반대를 야기시키게 되었고, 더욱이 제기된 문제 그 자체에 대하여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즉,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공격과 프로테스탄트 내부의 논쟁이라는 콘텍스트가 존재한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신학적 논쟁」뿐만 아니라, 그 당시는 순수한 학문적 운동이 일어난 시대였다. 즉, 인문주의적 운동이다. 고전들이 번역되고, 새로운 학문적 방법이 수정 보완 발전되어 가는 시대 였다. 따라서, 단순한「인문적」 방법 뿐만 아니라, 각 대학들은 교수법 또는 연구 방법, 학문 방법으로서 「스콜라적」방법을 수정하여 사용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자신들의 신학을 정립하고, 자신들의 신앙이야 말로 참된 말씀 중심의 성경적인 신학으로, 로마 카톨릭교회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교회야 말로 참된 기독교의 보편성(Catholicity)를 가진 교회임을 증명하면서, 자신들의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하는 시기였기도 한다. 따라서,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은, 학문저 정황, 논쟁적 정황, 교회적 정황이라는 복합적 논쟁과 콘텍스트의 흐름속에서, 제2세대, 제3세대들의 신학을 통하여, 올바른 신학, 올바른 가르침이 체계화되고, 교회의 보편성이 강조되고, 종교개혁 신학을 신학화하는 학문화 작업이 이루어져 나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세 가지의 정황(context)를 고려하면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을 다시 재 조명할때, 이 신앙고백은 거의 이러한 정황의 종국적 시기에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다 대담하게 말하자면, 개혁주의 신학의 총결산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신학이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그 성립 시기에서 보자면,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내용은 개혁파 신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있다. 개혁파 신학이란, 칼빈에만 의존하는 신학이 아니라, 칼빈과 더불어 그 당시의 모든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가는 신학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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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재평가(3)
2006/05/29 오전 9:29 |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재평가

마지막으로 영국 국교회주의(Episcopalians)의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 를 언급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적 영향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일란드의 알마그 주교(Archbishop of Armagh)로서 당대의 칼빈주의의 대표자 였다. 물론, 그는 하원으로부터 웨스트 민스트 신학자 회의 출석을 요구 받았지만, 그 회의가 왕의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법적 문제로 인하여, 그는 출석을 거절한다 . 베이커는 하원이 그를 선택한 이유로 세가지를 들고 있다. 칼빈주의 신학, 그의 경건성, 그리고 신학적 학문성이다 . 그는 오랫동안 칼빈주의 신학자들과의 네트를 연결하고 있었다 . 그의 개혁주의적 신학 성향과 그 특징에 대하여는 그 어느 누구도 인정하고 있다. 특히, 학생때부터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과 논쟁함으로서, 교황이 안티 그리스도임을 증거했다. 예를들면, 핸리 핏츠시몬(Henry Fitzsimon)과 트리니티 대학에서, 교황의 오류에 대하여 논쟁했다. 그 후, 그는 교부들의 저술을 18년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습득했다 .

그는 영국 국교회주의자로서 어셔는, 윌리엄 라우드의 알미니안주의 신학과 교회의 일치에 대한 그의 열정에는 반대했지만, 윌리엄 라우드의 법적 권위에 대한 충성을 인정했다. 왕당파로서, 왕에 대한 법적 권위를 옹호한 그의 열정은 상원도 그를 어떻게 할 수없었다 . 그러나, 신학적으로 그는 확신에 찬 칼빈주의자로서, church of Ireland를 세운자였다. 그의 신학은 성경, 신학체계, 신앙고백으로 나타난다. 특히 그의『성경 연대기』(Annals of the World,1650) 는, 그가 성경신학자로서 성경을 연대기로 기술하면서 그림을 삽화하기도 했다. 또한, 셉투어진트에 대하여 최초로 연구를 시도하여, De Graeca Septuaginta Interpretum Versione, 1655 것을 발표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이 체계적으로, 더욱이 그 당시의 학문적 방법론을 반영한 문답식 형태로 기록된 『신학체계』(A Body of Divinite, London, 1653)는 그의 신학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개혁파 조직신학의 고전이다 . 그의 『신학체계』는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대요리 문답의 원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로마 교회의 사도신조』(De Romanae ecclesiae sympolo apostolico, 1647)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그는 고대 사본을 사용한 신조연구의 개척자였다. 또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 뿐만아니라, 그 당시의 개혁파 교회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그의 『아일란드 신앙조항』(The Irish Articles of Religion, 1615)을 언급하지 않을 수없다. 이는 아일란드의 개신교 성직자들에 의해서 1615년에 수용되었다. 물론, 『39개조항』으로 대치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국교회의 『39개조항』과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과의 연결적 역활을 감당한다. 이 조항은, 주일 개념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미사와 교황의 오류, 그리고 절대적 예정론과 견인에 대하여,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에 영향을 미친 아주 중요한 모델로 작용했다 . 더우기 미첼은 말하기를, 그의 조항은,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주요한 자료중의 하나로,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교리적 설명으로 말하자면, 「정확한 원형」(exact prototype)이다 .

영국 국교회자, 에라스투스주의자(Erastianism), 장로교주의자, 독립교회주의자, 설교자, 뉴잉글랜드 신학자, 그리고 런던 목회자 등등 많은 사람이 출석 임명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신학을 우리가 여기서 상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술한 트위스, 굿윈, 어셔등을 통해서, 151명의 신학자들이 가진 신학적 특징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웨스트 민스트 신학자 회의에 모인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이단들, 즉 로마 카톨릭, 특히 예수회와 알미니안주의, 소시니우스 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 분의 자유로운 은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퓨리턴」으로 연결되는 개혁주의자 또는 「칼빈주의자」였다. 그들이 비록 교회 정치 형태에 있어 이견을 보이지만,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신앙과 신학적 추구와, 말씀 중심의 신앙 생활을 지도하는 신학교리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일치된 자들이다 . 따라서, 웨스트 민스트 신학자 회의에 소집된 신학자들의 일치된 교리와 신학은, 그 당시의 모든 이단들로 부터 교회를 수호하고, 참된 교회 정치를 추구하면서, 성숙한 칼빈주의적 교리 체계의 신학적「심볼」로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을 만들어 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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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재평가(2)
2006/05/29 오전 9:28 |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재평가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의 신학적 정황 (theological context. 1)

일본그리스도교신학교 강의(2)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이 성립되기까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상고하여 왔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견지하여 온 개혁신학의 콘텍스트에 주목해야 한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 신학이, 종교개혁신학, 특히 칼빈 신학과 그 신학적 특징에 있어 연속성을 가지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는 다음 장에서 논하기로 하고, 우리는 이 신앙고백이 개혁파 교회가 만들어 낸, 개혁주의 신앙고백이라 믿는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이 처음으로 출판된 것은 1647년이다. 이 시기는 종교개혁 다음으로 일어나는 개혁파 정통주의, 또는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한 참 무르익을 때이다. 말하자면, 개혁파 정통주의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종교개혁와 초기 정통주의의 특징중 하나는, 신앙고백의 다산성이다. 특히, 루터파와 개혁파 교회에서는 많은 신앙고백서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 중반이후로 접어들면서 현저하게 줄어들지만, 개혁파 진영에서 한 획을 긋는 신앙고백서가 1647년의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개혁파 교회가 많은 신앙고백을 가지는 것은, 특히 루타파와 비교하여 볼때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다. 즉, 루타파 교회와는 다르게, 개혁파 교회가 자신들의 교회 건설과 신학 정립이라는 정황속에서 보여준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신앙고백의 다양성과 다산성이다. 적어도 신앙고백적 측면에서 보자면, 루타파 교회는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화협신조( the Book of Concord)에서 그 발전과 다양성을 멈추고 있다. 물론, 그들은 이 신앙고백속에서 교회의 일치를 견지한 것이다.

그러나, 루타파와는 다르게, 각 지방과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개혁파 교회는 동일한 신앙과 신학을 소유하면서도, 각 지방과 각 교회가 자신들이 놓인 여러가지 콘텍스트속에서, 자신들만의 신앙고백을 발표함으로서, 개혁파 교회안에는 여러 종류의 신앙고백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성속에도 불구하고, 개혁파 교회는 그 신앙과 신학에서 그들만의 일치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루터파와 비교하여 볼때 의미 깊은 일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도르트 신조가 성립되어가는 정황속에서, 그러한 다양한 개혁파 신앙고백서가 도르트 회의에서 일치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618-19년에 걸쳐서 진행된 도르트 회의는 특히 알미니안주의와의 신학적 몸부림속에서, 개혁교회가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고 표명해야 하는, 당시 유럽 대륙의 개혁파 교회 전체에 주어진 신앙 고백적이며, 역사적 사명이었다. 따라서, 이 회의는 올바른 성경적 신앙 고백이 고백될 수 있도록, 많은 외국의 대표자들과 각 지방의 사절단들을 초청했다 . 하나님의 자유하신 은혜와 그 분의 영원한 작정이라는 큰 과제를 놓고, 네덜란드 신학자뿐만 아니라, 각국의 신학자들이 모여서 토론을 전개한 것이다. 비록, 프랑스와 스코틀란드, 그리고 동 유럽 국가와 지방들의 참석이 없었지만, 도로트 회의는 에큐메니탈적인 교회 회의였다. 다시 말하자면, 각 지방과 국가의 파견단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모인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 잉글란드 대표단은 39개조(39 Articles), Bremen의 대표자들은 베르만 신앙고백(the confession of Bremen), 파르츠 지방의 사절단들은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과 제2스위스 신조, 바젤로 부터는 바젤 신조(1534)와 제2스위스 신조, 제네바 대표단들은 제네바 카테키즘(1541)등,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모였다.

각 대표단들은 성경과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주어진 신학적 과제를 해결할려 한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토대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서, 도르트 신조가 탄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도르트 신조는, 개혁파 교회가 다양한 신앙고백을 소유함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는 일치성이 유지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다양성속의 일치성이 바로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적 신학의 특징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파 신학의 신앙고백사속에, 도르트 신조가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다양성속에서도 충분하게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성립이 가능함을 입증한 고백이다.

도르트 신조가 성립되고 난 후, 도르트 신조에 지지를 보내었던 잉글란드 교회와 제임스 1세의 태도가 급변한다. 특히, 정치적 상황에서 우리가 고려했던 것 처럼, 찰스1세의 교회에 대한 태도는 개혁주의 신학에 반대를 표방하고 나선다. 잉글란드 교회 지도자들 역시 알미니안주의로 흘러가면서, 칼빈주의적 신학 노선은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잉글란드 국회는 무엇보다도 잉글란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라우드의 카톨릭적 국교회로의 회귀는,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주의로의 방향전환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상기한 정치적 정황을 고려함과 동시에, 신학적 정황을 검토하자면, 그 당시의 잉글란드는 로마 카톨릭적 알미니안 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의 대립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마치, 도르트 회의가 알미니안주의 신학과의 대립속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재 확인한 것처럼, 웨스트 민스트 회의는 제임스6세와 찰스1세로 이어지는 로마 카톨릭적 알미니안 주의와의 대립속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신학을 성경으로 말미암아 재정립하고자 한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교회 개혁적 작업이, 도르트 신조가 그러했듯이, 순수히 그들 만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외국의 신학적 조류와의 교류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들면, 웨스트민스트 신학자 회의가운데, 아일란드 신조와 스코틀란드 대표단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가 무시해서는 않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아이란드 신조와 6명의 스코틀란드 대표단에 대한 신학을 여기서 상세하게 논 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이의 없이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개혁주의 신학에 의한 교회 개혁의 재확인이었다.

또 한가지 간과해서는 않될 사항은, 참가한 신학자들이 가졌던 교회 정치 형태에 대한 검토이다. 의회가 웨스트 민스트 신학자 회의를 1643년 7월1일에 모이도록 결정한 1643년 6월12일이라는 시점은, 적어도 법적인 의미에서(legislature) 영국 교회가 어떤 특정한 교회적 정치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때였다. 따라서, 웨스트 민스트 신학자 회의 주된 외적 목표는,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적 교회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 비록 교파적 입장에서, 독립교회주의자 또는 회중교회주의자 (Independents, 또는 congregational), 장로교주의자들이 부름을 받았지만, 신학역사적 용어로서 그들은 퓨리턴이다. 신학자 회의에 부름을 받은 자는 총151명이다. 그 가운데 30명이 평신도(Lords 10, Commoners 20), 121명이 신학자 였다.

참가자들의 신학을 상술하는 과제를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중요한 몇몇 신학자들의 신학적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 보는 것은, 우리의 과제를 푸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학자는 누구보다도 웨스트 민스트 신학자 회의의 의장(proloqutor: prolocutor, proloqui의 과거분사)인 윌리엄 트위스William Twiss (1575-1646)일 것이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수학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트위스는, 브레드 왈데인(Thomas Bradwardine)의 De Causa Dei contra Pelagium을 번역하며 교정하는 일에 참여 하기도 했다. 그는 그의 뉴버리(Nebury) 사제(Vicar)로서 삶은 신앙과 신학의 연구 그 자체였다. 그는 1618년, 제임스1세가 공포한 「스포츠에 관한 왕의 서」(the King’s book of sports)를 거룩한 주의 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거부한다 . 더욱이, 그의 알미니안 주의에 대한 다산의 라틴어 문서는 그의 신앙과 지식을 국내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인정받게 된다 . 트위스는 많은 신학서적을 기술했다. 그가 저술한 책은 거의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예정에 대한 글들이 많다. 특히, 알미니안주의 신학과 예수회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하고자 그의 에네르기는 당대의 모든 신학자들로 부터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많은 이단들로 부터 개혁주의(칼빈주의) 신앙과 신학을 옹호하기 위해 트위스가 집필한 「하나님의 은혜, 힘, 섭리에 대한 변호」(1632)는 그의 신학적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가늠자가 된다 . 이 책에 대하여, 커닝햄은 그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없는 신학적 업적이라고 평가한다 . 그의 사후에 출판된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De praedestinatione et Gratiae, Amsterdam, 1649) 역시 알미니우스 주의에 대한 반박설로 가득차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그의 저술은, 「진노의 그릇에 대한 그 분의 절대적 버리심에 모순하지 않는 자비의 그릇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