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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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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의 창조적 축복
2007/01/29 오전 11:54 | 요한복음 강해

실로암의 창조적 축복(절망에서 희망으로)
요한복음9장1절-7절
2007년 1월 28일

1절,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았다, 이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상대편에 반응도 아닙니다. 그 누구도 지금 뭐라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바라보신 것입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바라보심을 본문의 사건의 출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바라보심이 곧 사건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바라보심은 사건이입니다. 예수님의 바라보심은 이미 그 속에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예수님이 바라본 것은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였습니다. 그 당시 병을 낫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눈이 먼 자를 보이게 하는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들에 관한 소문은 전 유대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비었으며, 또한 병자들은 고침을 받기위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킨 이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는, 태나면서부터 소경이기 때문에 그리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과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본다는 것의 만족감, 또는 계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눈을 뜨고 싶어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졌다고 보기도 힘들 것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운명이러니 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삶속에 나타나는 불행을 운명이러니 하며 체념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여 주는 논리가 2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이렇게 소경이 된 것은 누구 탓이냐? 부모 탓이냐, 아니면 본인 탓이냐, 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불행을 바라보는, 아니 인간의 구구절절한 삶의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극단적 입장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를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운명이란 원리와, 예수님처럼 인간의 삶 하나하나를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는 원리입니다.

운명을 믿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남 탓하는 사람, 과거 집착적인 사람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2절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은 운명이러니 하고 살아가는 소경과 똑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소경이라는 문제를 누구 탓입니까? 라고 과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불교의 논리를 빌리자면 전생에 죄가 커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세상은 운명을 믿지만, 예수님은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사물을 바라볼 때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봅니다. 불행이던 다행이던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각방식입니다.

2절에 나와 있듯이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과거 집착적이며, 비판적이며, 남을 탓합니다. 비판적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은혜로 사는 우리에게는 그렇습니다.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다름 아닌 내가, 당신이 더 많은 비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비판 투성이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신 분입니다.

언제나 비판하고, 과거 중심으로 생각하고, 남을 탓하는 자에게는 절대로 발전이 없습니다. 그 속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 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라볼 때, 교회를 바라볼 때, 또는 뭔가를 바라볼 때, 언제나 비판적으로 과거 집착적으로 바라봅니까? 아니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십니까?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순서가 여기 잇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보시고, 인생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이전에, 이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길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려 함이라, 라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당신의 현재를 미래를 중심으로 판단하시렵니까, 아니면 과거를 중심으로 판단하시렵니까? 미래를 향해서, 내일을 향해서 오늘을 노력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할 때 창조가 있고 변화가 있습니다.

4절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고집하는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희들은 가만히 보고 있어라.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지금 할 테니까, 라고 주님께서 말씀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출14:14)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암몬자손과 모압 자손이 유대를 침공했을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적군을 치셨다” (역하20:29)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 백성이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셨습니다. 승리의 주역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유대백성이 싸웠습니다. 유대백성이 피를 흘리며 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싸웠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주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시지만, 우리와 같이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을 통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승리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속에 구원의 축복을 가져다주십니다.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라고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냄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하나님 그 분께서 실제적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보냄 받은 예수님께서 이 소경의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 소경에게 있어 눈을 뜨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 소경의 인생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6절에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 고 하십니다. 그냥 여기서 고쳐주시면 되는데 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고쳐주십니까? 그것은 창조적 축복을 나타냅니다. 진흙이라 하면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이 맨 첫 부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을 빗어서 만드셨습니다. 그 진흙은 창조의 재료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는 진흙을 빗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에게 진흙을 바르셨다는 것은, 이 자에게 새로운 삶, 새로운 영적 존재를 창조하여 주신다는 것임을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단순히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주를 바라보고, 구원의 하나님을 통해서, 영적 눈을 뜨고, 참된 삶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창조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언제나 인생에 새로운 창조를 가져다 주는 창조적 축복입니다. 그에게 눈을 뜬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또 한 가지는 왜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여 잘 걷지도 못하는 이자를, 바로 이 자리에서 낫게 하여 주시면 될 텐데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까? 왜 실로암까지 보내십니까?

실로암은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내리막길입니다. 그리고 그 우물가에 내려가기 위해서는 33개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된다고 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아직 그는 소경입니다. 혼자서 내리막길을 가고, 또한 33개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실로암에 도착합니다. 아무 곳에서나 씻으면 되지 왜 실로암에 가야 합니까?

실로암은 히스기야 왕때에 만들어진 연못이지만(열왕기하20장20절), 그 샘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특히 이사야 8장에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암을 물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다른 이방을 따랐다는 뜻입니다. 실로암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가 실로암에서 씻음으로서 눈을 뜨게 된 의미는,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속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경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가 재창조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살핌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이러한 재창조함과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원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인생속에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오늘 당신을 실로암으로 보내십니다.

물론, 비탈길입니다. 계단이 있습니다. 힘듭니다. 그래서 가기 싫습니다. 가다가 포기합니다. 뭐 그렇게 힘들게 사나, 이게 내 팔자야, 라고 하면서 포기하고 살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당신이 새로운 삶을 원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하신다면, 하나님과 더불어 보냄을 받은 자가 되길 원하신다면, 오늘 당신은 실로암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절망이 희망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이 실로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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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요한복음 강해 1장6-8절
2006/06/28 오후 4:01 | 요한복음 강해

제4회 요한복음강해 1장6-8절

오늘 본문 첫 말씀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신 분은 아마 여기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지금까지“빛”에 대하여 증거하여 오다가 여기서 갑자기 “요한”에 대하여 증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절에 가서 다시 본래의 주제인 “빛”에 대한 증거로 되 돌아 옵니다.

저자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말씀”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따라서 이“말씀안에 참 생명”이 있으며, 이“생명”이야 말로 사람들의 영원한 진리의 “빛”이 된다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6절부터 저자는“세례 요한”에 대하여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자가 말하기를 세례 요한은 먼저“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자”(6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러”고 온 자(7절)이며, 자신은 빛 그 자체가 아니라 “빛을 증거하는 자”(8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왜 갑자기 주제를“빛”에서 “세례요한”으로 바꾸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저자는 1장20절 이하에서 “세례요한”에 대하여 정식적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때에 설명을 하면 될텐데 여기서 꼭 “요한”을 언급해야 하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당시, 새로운 가르침, 새로운 전도 방법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회개운동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종교개혁과 같은 혁신적 사역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3장 3절을 보면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을 전했는데,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따랐고, 요한을 마치 메시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를들면, 사도행전18장 마지막 부분에서 19장 첫 부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가운데 아직도 여전히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만큼 요한의 영향력과 요한의 전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입었고, 또 그를 따른 자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참된 메시야, 빛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과 참된 빛되신 예수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요한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요한만을 고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주 유명한 부흥사, 아님 설교가, 아님 종교가가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릅니다. 그 사람의 설교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의 냄새를 맞고 도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 한 인간의 말에 매료되어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그 설교를 통해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까? 그 말씀들이 당신을 야훼 하나님, 유일신 하나님으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아님, 눈에 보이는 교회만을 바라보게 하고, 세상에 허접한 이야기에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그리스도의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저자 요한은 이 사실이 안타까운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요한만을 알려고 하고, 더 이상 참된 빛 예수를 알려고 하지 않는 사실에 그는 놀란 것입니다. 저자는 세례 요한이 참된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언급하지 않고저는 도저히 그 분에 대하여 증거할 수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세례요한 빛이 아니라, 빛을 증거하러 온자라고”확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에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있는 자는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당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자가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증거하는 자이지, 예수가 아닙니다. 오늘 당신이 흠모하는 설교가가 있습니까? 그 분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아시길 바랍니다. 대형교회 사역자들이 이전에 속해있던 자신들의 기존교단에서 이탈하여 자기들끼리 연합하여 연합교회를 만들어 돈 받고 목사 안수한다는 이야기를 일본에서 듣습니다. 한국의 대형교회는 기형아 형상입니다. 문제는 요한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설교가, 목회자라고 해도, 그 사람은 당신의 그리스도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요.

그럼, 그는 무엇입니까? 그는 증거하는 자입니다. 그는 나중에 오시는 자를 증거하는 였습니다.“증거”란 무엇입니까? 이 단어는 “순교”라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죽도록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는 세상에 목표를 두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다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과 목표는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증거에 있습니다.

그럼 증거하는 자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보내는 자로부터 “어떤 귀중한 사명”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처럼 하늘로서 내려온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였습니다. 따라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는 중요한 사명, 즉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예비된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이시다”라는 의미의 요한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을 나오듯이, 아들을 얻지 못한 스가랴와 엘리사벳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이름까지 “요한”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또한 천사가 말하기를 누가복음1장17절에 “저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합니다.

즉, 요한은 태어나면서 부터, 엘리야와 같은 성령 충만함과 능력으로, 주님의 길을 예비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백성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예비하는 자였습니다. 이것은 말라기4장의“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고 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에 나오는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고 했습니다. 이 21절의 의미는 그 당시 백성들이 생각하는 통속적인 의미의 엘리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입니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23절에 나오듯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라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이사야 40장3절의 말씀으로 연결되는 이 말씀은, 요한은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엘리야가 아니라,“광야의 소리”또는“광야에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 즉 요한이라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증거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요단강 부근”의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전도할려면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하는데 그는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광야에 누가 있습니까? 누가 살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입니다. 예수, 참된 메시야, 세상을 비추일 참된 빛이 도래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와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요한으로 나아오기 위해서는 “다 나와야”했습니다.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생활, 이전의 습관, 이전의 종교, 이전의 자신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광야 전도는 새 시대, 예수 시대, 참된 생명의 빛의 시대를 예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선택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증거자 였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보냄을 받은 자의 증거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명은 “증거”입니다. 무엇을 증거합니까? 빛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그럼 문제는 요한의 증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 예수, 참된 인생의 빛이 되신 주님을“증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증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증거, 성령 하나님의 인도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5장37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즉, 요한보다 더 위대한 증거,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그리스도를 증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의 증거가, 인간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전달됩니까?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달됩니다. 15장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는,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시지만 성령받은 자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즉, 보냄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이것이 보냄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증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힘을 통해서 증거해야 합니다. 요한을 포함한 우리의 증거는, 어디까지나 2차적인 증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가 인간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달된다는 성경적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7절에 나와 있듯이 “모든 사람을 믿게 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증거는 전도를 목적으로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증거를,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증거할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게 한다는 것은, 이미 본것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보지 못한 것을 믿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그러나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들었습니다. 들은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들었습니까? 듣지 못한 것을 전달하지 마십시요. 들은 것을 증거하십시요.

세례 요한은 오늘날 우리들의 선교사역의 모델이 됩니다. 암흑가운데 빛을 증거하는 모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광야에서도 증거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당신은 광야와 도시 어디를 증거의 장소로 삼겠습니까? 당신은 분명히 도시에 사람들이 많으니 도시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래야, 전도가 잘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건 당신의 생각입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럴때 주님께서 광야로 나가라고 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보내신 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로 뛰쳐나갈 신앙적 용기가 있습니까?

당신의 전도 모델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신앙의 삶의 모델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당신은 빛이 아닙니다. 당신은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빛을 증거하는 자임을 잊지 마십시요. 그것은 보내신 자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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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요한복음 강해 1장4-5절
2006/06/10 오전 11:51 | 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 1장4-5절

후쿠로이키타 교회 목사 김 산덕

「그(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당신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우리 모두는 아무런 느낌없이, 예 나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이다.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아주 귀중하게 여긴다. 누구든지 이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없다.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한다.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고 당연하기에 설명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생명」을 소유하는 것은, 자연적으로, 자동적으로, “그냥” 그렇게 생긴 것이고, 따라서, 아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당신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라는 어떠한 의심이나, 의문도,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사실 어떠한가? 조금 냉정히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지금 당신에게, “당신은 정말로 당신의 진정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본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주저없이, 가지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아마 주저 할 것이다. 마땅하고 당연해서 전혀 의심도 문제도 없는 것 처럼 보인 자신의 생명이지만, 우리는 사실 이 생명에 대하여 자신이 없다.

진정으로,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도 가지고 생활한다. 그 어느 누구도, 「생명, 또는 사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소유하고 있지 않다. 우리 모두가 50년후나, 60년후를 생각해보라. 아니 적게는 1년후, 한 달후를 생각해보라, 아니, 내일을 생각해보라.

당신은 정말로 내일 아침에도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100% 장담할 수 있는가? 당신은 정말로, 일년후에도 문제없이「생명」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우린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 치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내일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생명이 어디론가 달아 갈지 모른다. 그래도 당신은 「난 내 생명을 가지고 있다」, 확실히 말 할 수있는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렇다. 우린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을 끌고 다니다. 언젠가는 이 「죽음」이 지금의 내 생명을 삼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생명」이 없다. 당신이나, 나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전혀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에겐 「생명」이 없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은, 죽음을 초월하는, 아니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진자는, 분명히 그 생명의 영원성에 대하여도 깊은 생각을 가진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명」의 참된 의미를 아는 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당연한 논리를 하나 발견한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나 내가 가진 「생명」이라는 것과, 죽음을 초월하는「영원한 생명」이 다르다는 것이다. 형용사 「영원한」이란 수식어를 붙임으로서, 우리는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의 「생명」과 구별하게 된다.

즉,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라는 말씀을 접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전제로,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풀어가는 전제조건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내가 살아 있다」, 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 라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된다. 하나님께서 「살아계는 것」과, 내가 「살고 있는 것」과는 그 삶, 또는 「생명」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죽음을 끌고 다니는, 결국 죽음에 삼켜지는 「생명」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죽은 생명, 자기 소유의 것이 아니라, 죽음의 소유물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을때는, 「죽음」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서5장21절에 나오듯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인간은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죽음 없는 생명에서 죽음있는 생명으로 옮겨졌다.

오늘, 본문의 「그(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란, 그리스도안에 「생명」이 있으니란 말이다. 이 생명이 우리가 추구하는 생명, 죽음을 초월한 생명이다. 따라서,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이 「말씀」안에서, 이 「말씀」을 통해서 찾으라고,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을 하자면, 「말씀」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영원한”「생명」이다.

더욱이 「말씀」을 통해서, 전달된다면 그 말씀이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아는」것이다. 즉, 「지식」이다. 「아는 것」 또는「지식」은 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아는 것」이란 단순한 지식적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 습득이 아니다. 「아는 것」이란 인격적 사건이요, 삶 전체를 통털어 일어나는 에포크이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사건이다.
예수는 자신의 「양」을 알기 때문에, 그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어 놓으신 분이다. 이 사건은, 그 분이 자신의 「양」을 「알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안다」, 라는 것은 「생명과 죽음」을 뛰어 넘는 사건이다.

생명이 있는 말씀은, 껍질 뿐인 말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말씀이다. 오늘날 교회의 설교가 「생명」이 없다 라고 말들 많이 한다. 뭔가, 시시껄껄한 예화로 가득하고, 사람을 웃기는 만담으로 가득한 것이기 떄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 속에 그리스도가 없기때문이다.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이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 그 자체」의 「지식」이다. 따라서, 말씀을 아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그리스도 그 분안해 용해되어가는 사건이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은 지금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창조적 논리에서, 구체적으로 「사람」에게로 다가온다. 「사람의 구원」을 말하고자 한다. 즉, 「구원은 말씀에 의한 것이다」라고 요한은 주장하는 것이다.

5절로 가면,「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보통 사람들은 빛이 비취면, 어두움은 자연적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때, 그랬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낸다.

그런데, 5절은, 빛이 있어도 어두움이 사라지지 않는, 마치, 빛보다 강한 어두움이 있는 것 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이란, 이 세상에 「들어온 죄」를 말한다. 1장 9-10절을 보면「참 빛 곧 세사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라고 나온다.

어두움속에서 빛을 보면 그 빛이 잘 보인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 참 빛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말하기를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죄」라는 구름이 있기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시편 36편9절에 「주의 광명(빛) 중에 우리가 광명 (빛)을 보리이다」. 빛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참 빛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 세상적 지혜로, 지식으로 우리는 참 빛을 발견하지 못한다. 지금 당신옆에 참 빛이 있음에도 당신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참 빛을 통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 빛은, 생명이다. 그 생명은 말씀이다. 말씀은 전달된다. 그리스도가 전달되는 것에, 참 빛이 비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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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요한복음 강해 1장2-3절
2006/05/26 오후 5:01 | 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1장2-3절

후쿠로이키타 교회 목사 김 산덕

2절「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우리는 1절 말씀에서, 「말씀」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다. 2절의「그가」란, 1절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았듯이, 바로 잠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지혜되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 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태초부터」란 어떤 시간적 연대적 순서 또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시작, 근원, 원리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스스로 계시는 자」이다. 처음, 시작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시작이란 끝을 전제한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시작이란 없다. 그냥, 스스로「계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그 분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도 그 분과 함께 「스스로」 계셨다.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 존재한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 따라서, 만물은 무에서, 아무 것도 없는 것 가운데 창조되었다. 어떤 말하기 좋아 하는 자들처럼「무」라는 질료에서 창조한 것이 아닌가, 라고 주장하는 억측에 대하여 우리는 일언의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바다와 산, 그리고 당신과 나도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분의 성호를 노래해야 한다. 이것이 피조물의 당연한 자세이다.

그런데, 「그로 말미암아」, 라고 했으니, 이것의 의미는 모든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말씀하시는 그대로 되었다, 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이다. 어떤 도구나 수단을 사용하셨어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말씀하시는 그대로 창조가 일어난 것이다. 세상의 바다와 별과 산과 모든 것, 또한 당신과 나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면, 모든 만물은 이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존재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존재 근거, 존재의 의미, 존재의 목적은 다 이「말씀」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1장16-17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당신의 시작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사실, 당신의 가족의 시작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 당신의 모든 것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말씀을 떠나서는 당신의 시작이 없음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당신의 문제도 이 말씀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믿는가? 삶의 문제, 가족의 문제, 직장의 문제, 교회의 문제, 신앙의 문제, 국가의 문제, 이 모든 시작의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따라서, 이 말씀으로 모든 문제를 풀자. 말씀이 우리의 시작이요, 근원이요, 원리이다(태초란 의미가, 시작, 근원, 원리, 토대등이다, 라는 사실을 1절을 통해서 배웠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요한은 먼저 우리들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아니, 우리모두가 이 사실을 각인하지 않으면, 그의 책을 옳바르게 읽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기란 힘들 거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 만물의 시작, 창조가 누구로 부터인가, 이 창조관 또는 세계관이 분명하지 못하면, 삶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또한 옳바르지 못할 것이다. 세계관은 인생관으로 이어진다. 창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당신의 인생관에 불가결한 요소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주 만물이 창조되었다면, 그 분은 위대하신 분이시요, 힘과 능력이 있고, 세상을 인도하시는 그런 분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 특히 복음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그 분은 한없이 낮아진자, 머리 둘곳도 없는 버림받은 자, 비참속에 배반당한 자, 힘없이 죽어간 자등으로 성경은 기록한다. 부활했다고 하지만, 그는 모든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만 나타내 보여 주셨다. 문제는, 이런 사실들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음을 받았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요한복음 1장3절의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우리가 그냥 묵상하고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위안을 얻고, 심리적 만족을 얻는 정도의 좌선이나, 불공이 아닌가? 잠시 세상의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떠나, 현실과 동떨어진 또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잠시나마 한숨돌리는 그런 것이 아닌가? 현실도피적이고, 현실의 모든 상념들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묵념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아닌가? 사실, 이런 세계는 잠시, 순간적인 만족은 가져다 줄수 있지만, 영원한 만족은 가져다 주지 못한다. 보라, 결국 그들은 또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고, 그 현실과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세상을 잠시 잊는 다는 것은, 착각 현상에 지나지 않느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선언은 현실과 괴리하는 그런 묵념적이고, 별세계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연약성을 나타내는 몇가지의 형용사들은, 현실속에 비추어진 그 분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자신의 모습속에, 그러한 연약함이 있다는 것은, 창조의 위대함과 더불어, 그 분속에는 현실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시는 구체성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교회 생활이란 그렇다. 어떤 종교처럼 한 동안 자신과 현실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져서, 잠시만의 심리적 평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와서, 잠시 평안을 얻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교회를 떠나면 전혀 도움이 안되는, 그런 믿음 생활이 교회 생활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몸으로 말미암아 창조 역사를 이루신 그 분이, 이제 그 창조된 역사속에 들어오셔서, 몸소 역사의 아픔을 체험하셨기 때문이다. 몸소, 배반을 당하시고, 몸소 머리 둘 곳을 찾으시고, 몸소 죽음의 현장에서 고뇌의 기도를 올리시고, 몸소 죽음을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그 분의 아픔은 추상적인 아픔이 아니다. 그 분의 죽음은 심리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 분의 아픔은 실제적 육신의 아픔이요, 그 분의 죽음은 실제적 육신의 죽음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참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평온과 부활의 즐거움, 참 생명의 기쁨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일시적 자기 도취나, 일시적 무아지경의 심리적 만족으로 이해하지마라. 우리는 현실로 언제나 돌아와 현실속에 살아야 한다. 그 현실속에서, 얻어진 은혜와 사랑이 진실된 것이요, 진실된 것이기 때문에 현실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기 때문에, 그 분께서 그 모든 것의 종말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여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라고 마태복음 25장31절에 기록하고 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들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스스로 지시기 위하여,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스스로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세상의 모든 고난과 슬픔을 담당하시고, 짊어지시고, 모든 아픔을 체휼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지만, 그러나 그 분은 천군천사를 대동하여,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마지막 날의 심판자로서 오실 것이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그 분께서 만물을 종극을 선언하시는 날, 그 분의 실제적 은혜에 참여한 자들은 그 분과 함께 공중에서 참된 하늘 나라의 기쁨에 참여 할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세상은, 그리스로 말미암아 또 그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세계관을 요구하신다. 세상이 자연적으로 끝없이 흘러간다고 믿는 세계관속에서는, 참된 인생의 목적을 향한 인생관이 나올 수없다. 만물을 창조하신 그 분은 지금도 창조의 사역으로 세상과 자신의 백성을 마지막날까지 견인하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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