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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장4-5절
후쿠로이키타 교회 목사 김 산덕
「그(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당신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우리 모두는 아무런 느낌없이, 예 나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이다.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아주 귀중하게 여긴다. 누구든지 이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없다.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한다.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고 당연하기에 설명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생명」을 소유하는 것은, 자연적으로, 자동적으로, “그냥” 그렇게 생긴 것이고, 따라서, 아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당신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라는 어떠한 의심이나, 의문도,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사실 어떠한가? 조금 냉정히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지금 당신에게, “당신은 정말로 당신의 진정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본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주저없이, 가지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아마 주저 할 것이다. 마땅하고 당연해서 전혀 의심도 문제도 없는 것 처럼 보인 자신의 생명이지만, 우리는 사실 이 생명에 대하여 자신이 없다.
진정으로, 우리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도 가지고 생활한다. 그 어느 누구도, 「생명, 또는 사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소유하고 있지 않다. 우리 모두가 50년후나, 60년후를 생각해보라. 아니 적게는 1년후, 한 달후를 생각해보라, 아니, 내일을 생각해보라.
당신은 정말로 내일 아침에도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100% 장담할 수 있는가? 당신은 정말로, 일년후에도 문제없이「생명」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우린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한 치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내일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생명이 어디론가 달아 갈지 모른다. 그래도 당신은 「난 내 생명을 가지고 있다」, 확실히 말 할 수있는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렇다. 우린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을 끌고 다니다. 언젠가는 이 「죽음」이 지금의 내 생명을 삼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생명」이 없다. 당신이나, 나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전혀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에겐 「생명」이 없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은, 죽음을 초월하는, 아니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진자는, 분명히 그 생명의 영원성에 대하여도 깊은 생각을 가진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명」의 참된 의미를 아는 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당연한 논리를 하나 발견한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나 내가 가진 「생명」이라는 것과, 죽음을 초월하는「영원한 생명」이 다르다는 것이다. 형용사 「영원한」이란 수식어를 붙임으로서, 우리는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의 「생명」과 구별하게 된다.
즉,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라는 말씀을 접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전제로,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풀어가는 전제조건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내가 살아 있다」, 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 라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된다. 하나님께서 「살아계는 것」과, 내가 「살고 있는 것」과는 그 삶, 또는 「생명」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죽음을 끌고 다니는, 결국 죽음에 삼켜지는 「생명」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죽은 생명, 자기 소유의 것이 아니라, 죽음의 소유물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을때는, 「죽음」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서5장21절에 나오듯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인간은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죽음 없는 생명에서 죽음있는 생명으로 옮겨졌다.
오늘, 본문의 「그(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란, 그리스도안에 「생명」이 있으니란 말이다. 이 생명이 우리가 추구하는 생명, 죽음을 초월한 생명이다. 따라서,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이 「말씀」안에서, 이 「말씀」을 통해서 찾으라고,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을 하자면, 「말씀」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영원한”「생명」이다.
더욱이 「말씀」을 통해서, 전달된다면 그 말씀이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아는」것이다. 즉, 「지식」이다. 「아는 것」 또는「지식」은 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아는 것」이란 단순한 지식적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 습득이 아니다. 「아는 것」이란 인격적 사건이요, 삶 전체를 통털어 일어나는 에포크이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사건이다.
예수는 자신의 「양」을 알기 때문에, 그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어 놓으신 분이다. 이 사건은, 그 분이 자신의 「양」을 「알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안다」, 라는 것은 「생명과 죽음」을 뛰어 넘는 사건이다.
생명이 있는 말씀은, 껍질 뿐인 말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말씀이다. 오늘날 교회의 설교가 「생명」이 없다 라고 말들 많이 한다. 뭔가, 시시껄껄한 예화로 가득하고, 사람을 웃기는 만담으로 가득한 것이기 떄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 속에 그리스도가 없기때문이다.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이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 그 자체」의 「지식」이다. 따라서, 말씀을 아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그리스도 그 분안해 용해되어가는 사건이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은 지금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창조적 논리에서, 구체적으로 「사람」에게로 다가온다. 「사람의 구원」을 말하고자 한다. 즉, 「구원은 말씀에 의한 것이다」라고 요한은 주장하는 것이다.
5절로 가면,「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보통 사람들은 빛이 비취면, 어두움은 자연적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때, 그랬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낸다.
그런데, 5절은, 빛이 있어도 어두움이 사라지지 않는, 마치, 빛보다 강한 어두움이 있는 것 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이란, 이 세상에 「들어온 죄」를 말한다. 1장 9-10절을 보면「참 빛 곧 세사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라고 나온다.
어두움속에서 빛을 보면 그 빛이 잘 보인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 참 빛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말하기를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죄」라는 구름이 있기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시편 36편9절에 「주의 광명(빛) 중에 우리가 광명 (빛)을 보리이다」. 빛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참 빛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 세상적 지혜로, 지식으로 우리는 참 빛을 발견하지 못한다. 지금 당신옆에 참 빛이 있음에도 당신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참 빛을 통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 빛은, 생명이다. 그 생명은 말씀이다. 말씀은 전달된다. 그리스도가 전달되는 것에, 참 빛이 비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