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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의 창조적 축복(절망에서 희망으로)
요한복음9장1절-7절
2007년 1월 28일
1절,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았다, 이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상대편에 반응도 아닙니다. 그 누구도 지금 뭐라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바라보신 것입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바라보심을 본문의 사건의 출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바라보심이 곧 사건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바라보심은 사건이입니다. 예수님의 바라보심은 이미 그 속에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예수님이 바라본 것은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였습니다. 그 당시 병을 낫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눈이 먼 자를 보이게 하는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들에 관한 소문은 전 유대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비었으며, 또한 병자들은 고침을 받기위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킨 이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마도 그는, 태나면서부터 소경이기 때문에 그리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과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를 몰랐을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본다는 것의 만족감, 또는 계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눈을 뜨고 싶어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졌다고 보기도 힘들 것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운명이러니 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삶속에 나타나는 불행을 운명이러니 하며 체념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여 주는 논리가 2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물어봅니다. 이렇게 소경이 된 것은 누구 탓이냐? 부모 탓이냐, 아니면 본인 탓이냐, 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불행을 바라보는, 아니 인간의 구구절절한 삶의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극단적 입장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를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운명이란 원리와, 예수님처럼 인간의 삶 하나하나를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는 원리입니다.
운명을 믿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남 탓하는 사람, 과거 집착적인 사람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2절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은 운명이러니 하고 살아가는 소경과 똑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소경이라는 문제를 누구 탓입니까? 라고 과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불교의 논리를 빌리자면 전생에 죄가 커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세상은 운명을 믿지만, 예수님은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사물을 바라볼 때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봅니다. 불행이던 다행이던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각방식입니다.
2절에 나와 있듯이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과거 집착적이며, 비판적이며, 남을 탓합니다. 비판적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은혜로 사는 우리에게는 그렇습니다.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다름 아닌 내가, 당신이 더 많은 비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비판 투성이 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신 분입니다.
언제나 비판하고, 과거 중심으로 생각하고, 남을 탓하는 자에게는 절대로 발전이 없습니다. 그 속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 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라볼 때, 교회를 바라볼 때, 또는 뭔가를 바라볼 때, 언제나 비판적으로 과거 집착적으로 바라봅니까? 아니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십니까?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순서가 여기 잇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보시고, 인생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이전에, 이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길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려 함이라, 라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당신의 현재를 미래를 중심으로 판단하시렵니까, 아니면 과거를 중심으로 판단하시렵니까? 미래를 향해서, 내일을 향해서 오늘을 노력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할 때 창조가 있고 변화가 있습니다.
4절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고집하는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희들은 가만히 보고 있어라.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지금 할 테니까, 라고 주님께서 말씀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출14:14)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암몬자손과 모압 자손이 유대를 침공했을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적군을 치셨다” (역하20:29)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 백성이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셨습니다. 승리의 주역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유대백성이 싸웠습니다. 유대백성이 피를 흘리며 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싸웠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주님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시지만, 우리와 같이 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을 통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승리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속에 구원의 축복을 가져다주십니다.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라고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냄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하나님 그 분께서 실제적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보냄 받은 예수님께서 이 소경의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 소경에게 있어 눈을 뜨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 소경의 인생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6절에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 고 하십니다. 그냥 여기서 고쳐주시면 되는데 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고쳐주십니까? 그것은 창조적 축복을 나타냅니다. 진흙이라 하면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이 맨 첫 부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을 빗어서 만드셨습니다. 그 진흙은 창조의 재료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는 진흙을 빗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에게 진흙을 바르셨다는 것은, 이 자에게 새로운 삶, 새로운 영적 존재를 창조하여 주신다는 것임을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단순히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주를 바라보고, 구원의 하나님을 통해서, 영적 눈을 뜨고, 참된 삶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창조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언제나 인생에 새로운 창조를 가져다 주는 창조적 축복입니다. 그에게 눈을 뜬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또 한 가지는 왜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여 잘 걷지도 못하는 이자를, 바로 이 자리에서 낫게 하여 주시면 될 텐데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까? 왜 실로암까지 보내십니까?
실로암은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내리막길입니다. 그리고 그 우물가에 내려가기 위해서는 33개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된다고 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아직 그는 소경입니다. 혼자서 내리막길을 가고, 또한 33개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실로암에 도착합니다. 아무 곳에서나 씻으면 되지 왜 실로암에 가야 합니까?
실로암은 히스기야 왕때에 만들어진 연못이지만(열왕기하20장20절), 그 샘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특히 이사야 8장에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암을 물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다른 이방을 따랐다는 뜻입니다. 실로암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가 실로암에서 씻음으로서 눈을 뜨게 된 의미는,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속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경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가 재창조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살핌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이러한 재창조함과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원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인생속에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오늘 당신을 실로암으로 보내십니다.
물론, 비탈길입니다. 계단이 있습니다. 힘듭니다. 그래서 가기 싫습니다. 가다가 포기합니다. 뭐 그렇게 힘들게 사나, 이게 내 팔자야, 라고 하면서 포기하고 살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당신이 새로운 삶을 원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하신다면, 하나님과 더불어 보냄을 받은 자가 되길 원하신다면, 오늘 당신은 실로암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절망이 희망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이 실로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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