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약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쏘지 않았다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지금처럼 후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9년 11월7일 밧줄에 묶인 김 부장이 권총을 든 채 박 전 대통령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사진 80보도사진연감
그때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쏘지 않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30여 년 전 역사를 들춰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죽음 이전과 이후, 극명하게 엇갈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박 전 대통령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1979년 10월26일 이전으로 잠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10·26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과 마산에서 터진 부마항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때가 1979년 10월19일이었다. 훗날 김 부장은 부마항쟁을 ‘민란’으로 표현했다.
서울로 돌아온 김 부장이 곧바로 찾은 곳은 청와대였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보고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계원 비서실장이 동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 부장은 정부가 근본적 민심 수습책을 내놓지 않으면 부마항쟁이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를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1980년 1월28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항소보충이유서’)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차지철 실장이 거들었다. 차 실장은 박 전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며칠 뒤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20여 발의 총소리와 함께 숨졌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역사학)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해 부마항쟁이 가장 직접적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없었다면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나올 수 없었듯, 부마항쟁 없는 10·26은 상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서 교수는 “김 부장이 ‘유신의 심장’을 쏘지 않을 수 없다고 결심한 것은 부산에 갔다와 박 전 대통령에게 부마항쟁 실태를 보고한 직후로 보인다”며 “김 부장이 10월24일 이후락을 만났을 때 지나치는 말로 ‘제가 싹 해치우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나, 자신의 요청으로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직을 떠맡았던 이종찬이 더 이상 유정회 의원을 못해먹겠다고 하소연하자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말한 것도 부산에서 돌아온 직후였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1980년 1월28일 항소이유보충서를 통해 부마사태의 원인을 이렇게 정리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봉기로서, (중략)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 1970년대 경제성장률/연도별 소비자물가 등락률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듬해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마이너스 성장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 정부 정책 불신, 물가 폭등 등 김재규 부장이 꼽은 부마항쟁의 세 가지 배경은 모두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실제로 1970년대 들어 물가는 거의 매년 두 자릿수 이상 뛰었다. 1979년에는 물가 폭등에 제2차 오일쇼크가 겹쳐 서민의 주름살은 더욱 깊어졌다. 그해 7월10일 기준 석유제품의 가격은 59%, 전력요금은 35% 뛰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몰아친 부동산 투기 바람은 저임금 노동자의 주거난을 부채질했다. 부동산 투기는 1977년 행정수도 이전설로 불붙었다. 1978년 들어 땅값이 49% 뛰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8월8일 이른바 ‘8·8 투기억제 조치’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습적인 세금 인상도 서민에게 반감을 샀다. 1978년 제10대 총선을 앞두고 유신정권은 안정적 세원 확보를 명분으로 갑자기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했다. 말하자면 박정희식 ‘세금 폭탄’이었다. 부가세 도입은 가뜩이나 오름세인 물가를 더욱 부채질했다. 증권시장도 거래세 신설로 주가 폭락을 겪어야 했다.
기록적인 물가 폭등과 세금 인상, 부동산 투기가 서민의 불만을 샀다면, 유신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중화학공업의 침체는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끼쳤다. 서중석 교수는 “(정부의 비호 아래) 대재벌이 자기 자본 없이 무리하게 중화학공업에 투자한 탓에 1970년대 후반 과도한 중복 투자가 큰 문제가 됐다”며 “1979년 창원공단의 중화학공업 단지 가동률이 현저히 떨어져 50% 안팎이었고, 현대양행의 대규모 공장은 가동을 멈춰 ‘세계 최대의 창고’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중화학공업의 불황 등으로 1979년 말 외채가 200억달러를 넘었다. 외채망국론이 제기됐다. 박 전 대통령의 상징이었던 경제성장도 가속도를 잃었다. 1977년까지는 그나마 두 자릿수 성장률을 유지했지만, 1978년 9.3%를 기록한 뒤 1979년에는 6.8%로 떨어졌다. 10·26 바로 다음해에는 마이너스 1.5%였다.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사태였다.
4·19와 같은 사태가 눈앞에
»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유신정권 말기 물가 폭등과 빈부 격차,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원인이 됐다. 사진 한겨레 자료
심각한 경제난과 유신정권에 대한 불신은 1978년 12월 제10대 총선에서 여당의 참패로 나타났다. 개표 결과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은 31.7%였다. 신민당(32.8%)에 비해 1.1% 뒤진 결과였다. 정권에 대한 불신은 무소속의 선전으로도 나타났다. 무소속 득표율은 28.1%였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참패한 사실은 당시 민심 이반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라며 “애초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1978년 총선 이후 사실상 정치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유신정권 말기 민심 이반으로 인한 여당의 총선 참패와 부마항쟁 사이에 두 개의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8월11일 터진 ‘YH사건’이었다. 가발 제조업체 YH무역의 부당한 폐업 조치에 반발한 172명의 여성 노동자가 서울 마포 신민당사에서 철야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전격 투입됐다. 여성 노동자 1명이 투신해 숨졌다. 이 과정에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등 국회의원까지 구타당했다. 1천 명의 경찰이 동원돼 힘없는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내는 장면은 TV 뉴스를 통해 국민에게 전해졌다.
공화당이 10월4일 줄곧 유신정권과 각을 세웠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결의안을 단독으로 처리한 것은 부산과 마산 시민의 궐기에 기폭제가 됐다. 그것이 부마항쟁이었다. 유신정권을 둘러싼 총체적 민심 이반의 결과가 부마항쟁으로 나타난 셈이다.
김재규 부장에 따르면 부마항쟁이 터진 부산과 마산의 상황은 심각했다. 그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이 될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다”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권에 입문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주장도 다르지 않다. 이 전 의장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부마사태와 10·26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따른 인권 탄압, 강경 통치와 경제적 혼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이 원인이 됐다”며 “만약 부마사태를 강경 진압했다면 4·19처럼 서울까지 번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신정권이 심각한 시민 저항에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박 전 대통령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마항쟁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자 벌컥 화를 냈다는 것이 김 부장의 주장이다. 그는 “이와 같은 위기에 처하여 박 대통령은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몰라 국민의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부장의 결심은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에 울린 총성으로 이어졌다. 서중석 교수는 “10·26이 부마항쟁으로 인한 대규모 유혈참극을 방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서 교수는 “정치적 폭주와 경제적 위기, 빈부 격차 등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반발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며 “박정희와 차지철은 유신체제를 지키기 위해 어떤 유혈 참극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서 교수 등의 지적에 따르면 10·26은 당시 더 큰 파국을 막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10월26일 울린 총성은 죽음 이전과 이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극명히 엇갈리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주장이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그때 박 전 대통령이 죽었기 때문에 업적이 살아서 지금도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아 있지, 만약 10·26이 나지 않아 부마사태가 서울까지 확산되기라도 했다면 박 전 대통령의 말로도 좋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인기가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처럼 인기 얻기 어려웠을 것”
이 전 의장의 말처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죽음 이전과 이후 분명하게 갈린다. 1970년대 내내 서민을 괴롭혔던 심각한 물가 인상과 빈부 격차, 이후 정권의 짐이 된 막대한 외채를 남겼지만, 그는 여전히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정치적으로도 이미 1978년 총선을 통해 유권자로부터 냉정한 심판을 받았지만, 죽어서는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당시 자신의 충견 김재규에 의해 죽지 않았으면 얼마나 더 독재의 정권을 연장했을지 모른다.
그는 권력의 연장을 위해서는 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또한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4. 인권탄압
그의 인권탄압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학원과 학생운동에 대한 인권 유린.
(학원 사찰, 학교의 병영화, 학교의 교육 재량권 박탈)
2)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에 대한 생존권 압살과 이에 대한 저항
(전태일분신사건, 카톨릭농민화와 도시산업선교회 탄압, 광주대단지'폭동'사건, 철거민투쟁)
3) 정치권과 정적에 대한 탄압
(김영삼 의원 초산테러, 김대중 납치, 공화당 항명파동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개입)
4) 언론 탄압
(동아일보 광고 탄압,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탄압, 검열)
5) 문화 예술에 대한 탄압
(사전심의제도, 판금조치, 문인간첩단 사건.)
6) 종교계 탄압
7) 유학생간첩단 사건과 외국인 성직자 추방 등 국내법의 자의적인 적용
8) 안보, 반공이란 차원에서 반국가사범의 조작
9)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 침해(필화사건)
박정희시대 인권의 탄압이 탈법, 비법, 불법뿐 아니라
다양한 반국가사범에 관한 처벌규정과 연동되어 자행됨으로써 인권탄압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특히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사회안전법은 일제시기 악법의 연장으로
인권유린의 최고공격수 역할이자 반공주의에 의한 마녀사냥의 도구로 쓰여졌다.
인권탄압은 다양한 국가기구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특히 중앙정보부는 국가테러리즘의 상징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공포정치를 펴면서 한층 더 강화된 극우반공주의.
반북한주의를 기반으로 '군사문화'를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고루 전파시킴으로써 한국 사회 전반에
반민주주의적 독소를 깊이 뿌리내리게 했고 경찰,
군수사기관 등 각종 기관들이 인권유린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한국 사회는 상층의 정치구조가 바뀌어도
하부의 인권유린은 발본색원되기 어려울 정도로 인권유린의 구조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유신시대의 고문은 범죄 사실을 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만들기 위해 권력자와 그 하수인의 의도대로 각본을 짜기 위한 강제도구로 작용했다.
여기에는 일제시기의 고문기술과 한 사회가 이룩해놓은 과학.기술까지 총동원되었으며,
국가공무원이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국가의 범죄였다.
아울러 고문에 대한 공포를 사회에 만연시켜 "저항하는 자에게는 고문"이라는
극도의 공포감을 확산시켰다. 고문은 피해당사자를 포함해
익명의 국민 개개인 또한 폭력 앞에 떨어야하는 동물적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고문의 방법도 극악해
물고문, 전기고문, 수면방해, 구타, 천장에 거구로 매달기,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넣어 비틀기,
겨울에 옷을 발가벗기고 찬물에 집어넣기, 불이나 담배불로 지지기, 비녀꽂기, 통닭구이,
강간.윤간.기타 성고문, 물속에 머리 처박기, 고춧가루물을 코에 붓기, 원산폭격, 빈대붙기,
칠성판에 묶고 구타하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정치적 사건들 경우에는 고문문제가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범죄, 그리고 이른바 공안사건의 경우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알려지더라도 인권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인권의 불평등" 현상이 두드러졌다.
5.변태같은 생활
박정희는 술과 여자를 무척 좋아했다. 그가 죽게된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으며,
10.26사태가 일어나던 날도 박정희와 그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권력자들인
중앙정보부장, 청와대비서실장, 경호실장, 이렇게 4명이 저녁에 벌인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는 여자 둘이 동석했는데 한 여자는 유명가수였고
다른 한 여자는 여대생으로 아르바이트 패션모델이었다.
이런 식의 대통령 술자리에 한번씩 왔다 간 여자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입을 벌릴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다.
국정 최고책임자이며 국민의 정신적 지주여야 할 대통령이
국민의 눈이 닿지 않는 중앙정보부 부속 비밀연회장에서
사흘에 한 번 꼴로 술자리 행사를 갖고 있었으며 충격적인 것은
그 자리「술시중 여인」으로 일류 탤런트와 가수를 비롯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나이 어린 여대생까지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대통령전용 비밀요정의 호스티스를 시중에서 조달하는 책임자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역할이었고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대통령의 채홍사로 그는 최고의 비밀관리자였다.
◈ 박정희 경제기적의 허구.
박정희는 친일반민족행위, 군사반란, 독재, 자유.민주.인권의 파괴,
부정부패를 저지르다 종국에는 자신의 부하에게 총 맞아 죽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대한민국의 경제를 일으켰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박정희 숭배자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다. 이런 나라 세계 어디에 있는가?
(*다 조중동의 끝없는 선전에 박정희가 영웅으로 조작되어 온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전부 박정희가 이루어 낸 거다??
제대로 된 경제학자에게 다 물어 봐라. 그 말에 동조하는가.
그것은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이 만들어 낸 허구이다.
경제학자 강기춘의 정권별 경제성적표 (김영삼정권 2년까지)에 따르면
1위: 전두환.노태우정권 각각 12점, 김영삼정권:10점, 박정희: 6점의 이었다.
박정희 경제가 꼴찌였다.
박정희시대 경제지표들
정말 대단하다! 박정희는 정말 통이 컸다 말아먹을 것 확실히 막아먹을려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않좋은 것들은 죄다 최고기록을 했다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기위해
어떻게 이지경이 되도록 만들어놨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아마도 아래의 신기록은 앞으로 누가 대통령을 해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소비자물가 상승률(cpi)]--역대최고
박정희시절의 소비자 물가는 평균 년 16.5%의 상승률을 보였고 63년 20%, 1964년 29%를 기록하는 등 60년대 동안 해마다 10% 이상 폭등.1974년 24.3%, 1975년 25.7%, 마지막해인 77년 12.1% 78년 21%(78년에 고추 한근에 1만원이었고, 배추 한포기에 3천원---정말 대단하다) 1979년에는 18.3%(79년에는 유류가격이 59%, 전기요금이 20-30% 인상) 살인적인 물가상승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도 1973년만 빼고 매년 10% 이상의 물가 상승을 기록
[은행대출금리]
60년대 은행대출 금리가 년17.5%-26%였다. 1965년도에는 금리가 년 30%까지 치솟았다. 이런 상황도 찬양의 대상인가?-노무현.김대중 같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가 상승률]--연평균땅값상승률 33.1%, 역대최고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다. 땅값상승에 따른 불로소득은 326조원이다(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1년 예산이 200조 전후이다 그당시 국민소득 최대 1천불로쳐서 326조돈을 현재 국민소득 1만7천불로 계산하면 계산이 안나온다)
[노동시간, 산업재해, 소득상황]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박정희의 친인척비리가 불가사의하게도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를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있어도 잡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는 걸 몰라? 박정희의 친인척 가운데 쓸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 썼을 뿐이지, 쓸만한 사람은 다 갖다 썼다
박정희의 딸 박재옥
사람들이 박근혜가 큰 딸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박재옥이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첫째 부인 김호남이 낳은 딸이다. 박재옥은 한병기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한병기는 1931년 평남 안주 출신이다.힌병기는 불과 30살의 나이에 별 경력도 없이 주뉴욕총영사관 영사가 되었다.
35살의 나이에 건설공제조합 이사장이 되기도 했다. 선주협회 회장을 지내고 박정희 시절 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유엔대사, 캐나다대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공화당 총재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DJP연대로 사촌 동서인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득세하자, 방송개혁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자문위원장이 되는 등, 조금 고개를 들었다.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
박정희는 박재홍의 작은 아버지다. 1941년 경북 구미 출신이다. 대구상고, 고려법대를 졸업하였다. 28살의 나이에 포항제철 행정실장이 됐고 32살의 나이에 동양철관 회장이 되었다. 이거 정상적인 건가? 민정당, 민자당에서 국회의원을 4번씩이나 해 먹었다. 그 후 자민련으로 갔다가 다시 한나라당으로 갔다가 국민회의로 건너오는 등 이상한 정치행각을 보여주었다.
또 박정희의 또 다른 형 남노당 간부였던 박상희의 아들 박준홍
1947년생이다. 경북 구미 출신이다. 계성고, 경희대 정외과,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였다.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이 박준홍의 누나다.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 정무조정실장이 되었다. 요거 요즘같은 대명천지에 가능한 얘긴가? 그러더니 32살 때 그 막강한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박정희 사망으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방황하다가 매형 김종필이 만든 자민련에 들어가서 자민련 경북 구미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사촌형인 박재홍과 맞붙기도 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의 오빠,
박근혜의 외삼촌인 육인수 같은 경우에도 학교 교사로 있다가 반란군인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승승장구하면서 5선의원 씩이나 지낸 거 아닌가? .그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을 지내고, 충청일보 사장을 거쳐서 현재 일신산업 회장이다. 김종필 같은 경우에도 박정희가 끔찍이 생각했던 형 남노당 빨갱이 박상희의 딸인 박영옥의 남편 아닌가?
박정희의 조카사위 김종필이 이후락 등과 함께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이다. 25년 전에 887억원이면... 이건 계산이 불가능한 돈이다. 이래도 개정희가 청렴결백한 놈이었다고 얘기 하겠는가?
이래도 박정희가 깨끗하고 청렴한가? 박정희 개인은 절대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김종필만큼 축재할 필요가 없었을런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가 총칼로 빼앗은 재산은 이루 말할수 없이 많다. 부산일보, 엠비시지분,영남대학, 스위스 비밀계좌, 남산 어린이 회관등등 그재산이 천문학적 숫자이다. 박정희 덕이 아니라면 박근혜가 어떻게 정수장학회를 지배하고 있나? 장물인 정수장학회가 말이 장학회지, 그 규모가 1조 300억원에 이른다. MBC의 30%가 정수장학회 소유다. 부산일보도... 경향신문 사옥 부지도...
박정희의 또 다른 딸 박근영(박근령으로 개명)
육영재단도 수 천억원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무슨 수로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짜리 대박을 치나? 그놈은 매일 마약과 술, 창녀들로 인생을 망치던 개망난이었다.
이게 청렴한 대통령의 표상이라는 박정희의 모습이다.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딸 박재선을 의사와 결혼시키고, 형 박상희의 둘째 딸 박계옥의 남편 김용태를 그 막강한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박상희의 세째 딸 박금자를 총리실에서 근무하는 반기언과 혼인시키고, 결정적으로는 박상희의 막내 딸 박설자를 벽산그룹 창업자 김인득의 아들인 김희용과 결혼시켰다. 김희용은 현재 벽산계열인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회장이다.
이 박정희의 조카 박설자의 남편 김희용의 형 김희철이 현재 벽산그룹 회장이다.
김희철의 부인, 그러니까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가 바로 LG그룹의 한 축인 삼양통상의 창업자 허정구의 딸 허영자다.
이 허영자의 조카사위, 그러니카 허영자의 남동생의 사위가 바로 조선일보 후계자로 알려진 방준오다. 이러니 조선일보가 입에 거품을 물고 박정희와 박근혜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인 허영자의 오빠 삼양통상 회장인 허남각
이 허남각의 딸 허정윤이 얼마전에 정대호라는 청년과 결혼을 했는데 이 정대호가 그 유명한 황해도 재령의 대지주의 아들인 강원산업 창업자 정인욱의 손자이자, 현재 강원산업 회장인 정문원의 아들이다. 이 정문원의 부인 최금자의 언니가 최금숙이다. 최금숙이 누구냐? 바로 얼마 전에 형제의 난으로 물러난 두산그룹 회장 박용오의 부인이다.
게다가 정문원의 동생이 정도원인데 정도원에게 두 딸이 있다.
큰 딸 지선이는 기아자동자 회장인 정의선과 결혼했다. 정의선은 누구냐? 현대자동차 정몽구의 회장의 외아들이자 정주영회장의 손자다.
작은 딸 지윤이는 박성빈이라는 청년과 결혼했다. 이 박성빈은 또 누구냐? 포항제철 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그러니까 포철 박성빈이랑 현대 정의선이랑 동서가 된다. 따라서 현대그룹이 철강산업을 하려고 부지까지 선정하러 다니다가 포기한 배경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박성빈은 미국 실리콘 밸리에 있다가 요즘 무슨 통신 솔루션 업체인 사운드파이프 코리아 대표이사로 있다.
이 회사를 가만히 보니까 무슨 다국적 기업인 것 같은데 국내 대리점을 영업하는 듯 하다. 전자신문 같은 걸 보면 꽤 잘 나가는 듯 하다. 잘 나갈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사운드파이프에서 무선랜 환경을 구축했다는 아산병원은 현대계열 아닌가?
박성빈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박태준이 국무총리직에 있을 때 드러난 박성빈의 부동산만해도 강남구 역삼동의 170평짜리 카센터와 강남구 신사동의 빌딩 등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한남동에 빌라도 있었다.
박성빈의 매형 김형수를 주목해야 한다. 김형수는 박태준의 한국화가 딸 박유아와 결혼을 했는데, 박유아는 본래 변호사 고승덕과 살다가 헤어졌다.
이 김형수는 또 이력이 만만치 않다. 한국맥도널드 사장과 국내에서 일본 도요다 자동차 렉서스를 수입판매하는 렉서스 케이모터스 대표이사다.
김형수의 부친이 그 유명한 동일고무벨트 창업자인 김도근이다. 이 김도근의 이력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지향적인 것이 분명하다. 김형수의 형인 김진재다 박정희시절부터 여기저기 부산지역을 마구 쑤시고 돌아다녔다. 청년회의소니 부산 싸이클 연맹이니 뭐니 닥치는대로 자리라는 자리는 마다하지 않았다. 총력안보 부산시 협의회 특별위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부산시 청소년 선도위원도 맡았다. 부산 동래구 새마을지도자연합회 고문직도 맡았다. 열심히 하면 위에서 알아보는 법, 전두환이 급조한 민정당 간판을 달고 11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막론하고 내리 5선의원이 되었다.
이 김진재의 아들인 동일고무벨트 기획이사 1972년생 김세연이 그 유명한 춘천 한승수의 딸 한상은과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왜 한승수가 무소속으로 있다가 뒤늦게 또 다시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는지 답이 나온다.
그런데 이 괴상한 상황을 우리들이 알아야 한다. 이 한승수가 박정희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한승수의 장모가 육영수의 큰언니 육인순이다. 그러니까 박근혜에게 한승수는 이종사촌 형부다. 한승수의 장인은 일제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이다.
이 박정희의 동서 홍순일의 사위들이 세명이나 국회의원이 됐다. 예전에 서주산업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혀바닥 시뻘겋게 되는 아이스바를 다들 먹어봤을 거다. 그 서주산업의 회장이 바로 국회의원을 지낸 홍순일의 다섯째 사위 윤석민이다.
한승수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홍소자가 혜원여고 교장을 지냈는데알아보니까 혜원여고 이사장 윤석민의 처형이네?
홍소자랑 열우당 이미경의원이랑 친하게 지내지 않기를 바란다.
또 만주지역에서 엄청나게 크게 농장사업을 벌였던 천재라는 장덕진이라는 사람이 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사위다. 이 사람은 박정희정권 하에서 장관도 지냈다. 분명히 장덕진과 한승수가 춘천고 동문으로 친분이 있어서 동서가 된 거 같다. 전국민이 뻔질나게 소풍가는 한국민속촌 회장 정영삼도 육인순의 사위로서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어쨌든 이렇게 오만가지 요직은 다 해먹었는데 무슨 박정희가 친인척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승수의 아들 한상준은 얼마전 이희현이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이희현의 아버지, 그러니까 한상준의 장인은 유니드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이화영이라는 사람이었다.
이화영이라는 사람이 동양제철화학그룹 명예회장 이회림의 아들이었다. 다들 봐서 알겠지만 ITV 폐업할 때 그 모습이 마지막 개성상인의 모습인가?
내가 그동안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후원회장 이회림이 왜 그랜드 서클 안에 안 들어오나, 의아했다. 그러니까 이회림과 한승수가 사돈을 맺은 거다.
어쨌든 한승수같이 유엔총회 의장까지 지낸 학벌 좋고, 경력 좋은 사람이 부인까지 데리고 가서 박정희를 추모하고 애도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 깜빡 속아넘어가겠다.
여러분, 한승수는 박정희의 조카사위에요, 조카사위!
아까 언급했던 박태준의 사위 중 튀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박태준의 딸 가운데 디자이너인 박경아가 있는데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과 이혼을 하고, 김병주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김병주는 1962년생인데 얼마전까지 미국 칼라일 그룹 아시아지역 회장 겸 이사였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를 졸업하였다. 김병주는 국민의 정부시절 자민련이 연정을 할 즈음 박태준이 총리가 되기 직전에 칼라일 코리아 사장이 되었다. 김병주는 쌍용정보통신을 꿀꺽하더니, 5000억원을 쏟아부어 한미은행을 먹었다.하나은행마저 잡아먹기 위해 공을 들였다.
한미은행을 4억달러에 사서 씨티은행에 27억달러에 팔아먹었다. 물론 그 이익은 미국 칼라일의 몫이었다.이토록 한국의 부를 외국에 팔아넘기는데 그들은 서슴치 않는다. 매국노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인맥들이 자신들의 배만 채우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있고 부의 국외 유출을 하고있는가를 잘알수 있다.
부시 아버지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외국계 인사로 초대된 것으로 봐서 한국인이기 보다는 미국인으로 추정된다.
요즘 칼라일 간부 5명과 `MBK 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를 만들어서 돈을 긁어들이고 있다. MBK는 마이클 병주 김의 약자다. 싱가포르 정부투자기관에서 5억 달러를 끌어들였고, 캐나다 교직연금에서 2억 5천만 달러를 끌어들였다. 삼성생명, 대우정밀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 인물은 민주개혁세력이 끊임없이 눈여겨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
연필장사를 하다가 박정희 덕분에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었다.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던 조부영같은 사람이 거기 이사출신인 걸 보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거다
박무희의 또 다른 아들 박재호는 벽돌공장에 다니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 동양육운 회장이 되었다.
박정희가 친인척에게 엄했고 공사구별이 철저했다는 소리는 다 뻥이다..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겠다.
중앙정보부(중정)는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 2명을 활용해 200여명의 여성 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발을 드는 여성을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궁정동 말고도 한남동과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 등 5∼6곳에도 안가가 있었던것으로 알려졌다.
전 중앙정보부 안가 관리직원은 최근 한겨레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연회 접대 여성은어떻게 준비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이 같이 밝히고 "접대 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않는다. 대통령 눈에 들어 혹시 임신을 하거나 대통령이 여성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차단하기 위해서다"라며 "대통령이 찾으면 만류해보다가 잘 안 되면 추가로 딱 1번만 더 접대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 아니면 모든 안가는 24시간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면서 "하루 중 언제라도 불시에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대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경호실이 아니라 중정에서 직접 안가를 관리한 이유에 대해 "경호실은군처럼 경직된 조직이어서 안가 관리에 적합하지 않았다"면서 "대통령도 딱딱한 분위기에서 술자리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아 중정에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한겨레21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라 10·26에 가담한 박선호(사형집행, 당시 46살) 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진술을 소개하기도 했다.
1980년 1월 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차 공판에서 박 과장은 '대통령의 여인들'과 관련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21은 "당시 박 과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가 접견(1980년 1월15일) 내용을 기록한 노트에는 '여자 연예인 100명'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않았던, 당시에는 신인급에 속한 유명 여자 탤런트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보도했다.
강 변호사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김 부장에게 여러 차례 물었지만, 겨우 '한 100명쯤 된다'는 얘기만 한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아버지의 문란한 여자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1975년부터 3년간 서울신문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혜씨 등 자식들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문란한 여자관계"라며 "큰 행사, 작은 행사등의 얘기가 근혜씨의 귀에도 흘러들어가 문제가 됐었다. 주변에서 박 대통령을 재혼시키려고 애를 많이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일 수교를 앞둔 1965년 6월 22일 딘 러스크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이 독도 문제를 중재하려 하자 "수교 협상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독도 문제다. 해결하기 위해 섬을 폭파시키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 중인 한.일 수교 관련 외교 문서를 통해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러스크 전 국무장관이 한.일 공동으로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관리하는 방안을 제안하자 "공동 설치 방안은 어렵다"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과거사 진실위원회 우선조사 대상 사건 중 언론과 관련된 ‘정수장학회’와 ‘경향신문’ 사건의 쟁점과 현안을 짚어본다. 40여년전에 발생했지만 지금도 언론계와 정치권의 현안으로 계속되고 있는 두 사건을 통해 언론사 소유구조에 따른 영향과 논조 변화, 그리고 바람직한 해답은 무엇인지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