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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9/04/15
 

양만춘 장군 ] 

   

고구려 보장왕 때의 명장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安市城)의 성주였다. 안시성의 성주는 누구인지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正史)에는 전하지 않지만 야사(野史)인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楊萬春)이라 전해지고 있다.

 

[ 안시성의 위치 ]

   

안시성은 현재 중국의 요녕성(遼寧省, 구,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위치하여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더불어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 영지로, 고구려가 요하(遼河)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동성(遼東城)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소재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금사》 지리지에 따라 만주 개평(蓋平) 동북의 탕지보(湯池堡)라 하기도 하고, 《이계집(耳溪集)》 또는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따라 만주의 봉황성(鳳凰城)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 여녕성(遼寧省) 장대철도(長大鐵道)의 해성(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안촌홀(安寸忽)이다. 안시성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요새였으며 주변에 병기의 주원료인 철광석 산지와 곡창지대가 있었다. 신성(新城:지금의 요녕성 무순(撫順) 부근)과 건안성(建安城:지금의 요녕성 가이핑[蓋平])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들을 방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烏骨城)·국내성(國內城)을 비롯하여 전국의 성을 수호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였다.

[ 안시성 대첩 ]

   

연개소문(淵蓋蘇文)은 혁명에 의해 영류왕과 간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지만 양만춘 안시성주만이 유일하게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그에게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태종의 침입 때 힘을 합쳐 당태종에게 치욕을 주기도 했다.  

보장왕 4년, 당 태종은 친히 수륙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와 당차·포차 등의 신무기를 이용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안시성(지금의 해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645년(보장왕 4년) 645년 3월 15만의 병력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을 받은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撫順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항전 끝에 함락되었다.

   

645년(보장왕4)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고구려에 쳐들어와 요하 일대의 개모성(蓋牟城)·비사성(卑沙城)·요동성(遼東城: 遼陽)·백암성(白巖城, 연주성<燕州城> 성주 손대음장군 항복)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당태종은 이제 그에게 치욕을 안겨줄지는 까마득하게 모른채 역사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
   당태종은 안시성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오직 안시성만이 연개소문에게 대항을 했고 연개소문 역시 안시성만은 굴복시키지 못했던 내막을 알고 있기에 안시성을 우회하여 건안성, 오골성을 쳐서 평양성으로 내려가자는 생각이었다.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이나 장손무기는 안시성을 그냥 두고 건안성을 공격하다가는 안시성의 급습을 받게 되고 그래서 보급이 끊기는 날이면 모두가 몰살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결국 이세적(李世勣)의 건의가 채택되어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사실 고구려 성의 특징은 하나의 성이라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면 다음 성을 공격하지 못하게 전략적으로 성을 쌓았으며, 설사 안시성을 포기하고 진군한다면 보급로가 끊기게 되는 전략을 당대 최고의 군사전문가로 불렸던 당태종이 간파를 못했지만 뛰어난 장수(?)를 수하로 두어 공격을 결정했지만 안시성은 당나라 군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견고한 고구려의 자랑스런 성이었다.  

   

이 때는 이미 양만춘 장군이 당군의 침입을 미리 예상하고 군비를 갖추고 군사를 정예군사로 조련시켜 놓은 상태였으며, 연개소문은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가 이끄는 15만의 고구려·말갈 연합 구원군을 출병시켰으나 이 구원군은 안시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당태종의 유인 작전에 넘어가 안시성 근처 8리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당태종은 항복한 장수인 고연수 고혜진에게 벼슬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고 포로중 3,000명만 내지로 압송하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해 주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말갈병 3,300명은 산채로 모조리 구덩이에 파묻혀 죽였다. 이것은 고구려 병사에게는 당에게 항복하도록 하고 말갈족에게는 고구려를 도와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이제 그 누구의 원조도 없이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안시성은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성주 양만춘(楊萬春/梁萬春)과 군사와 주민들은 보여준다.  

   안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일 뿐 아니라 그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 또한 백전불굴의 용사들이었다. 또한 안시성 지역은 고구려의 중요한 철산지로써 이곳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국력이 좌우되었던 지역이다. 당태종은 총력을 다해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의 군사들은 요지부동으로 굳건히 버티었다.

   

당태종의 지휘아래 당나라 대군은 계속 공격을 하지만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군대는 공격목표를 그 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후 당태종은 휘하 장수 도종(道宗)을 책임자로 하여 16일 동안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올려 점점 성높이와 같게 하여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곧 목책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고구려 병사들도 성 위에 흙을 쌓아 성의 높이를 높였는데 결국은 당나라의 토산이 안시성을 아래로 내려보게 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태종은 도종을 토성수비대장으로 삼고, 도종은 다시 부하인 부복애(傅伏愛)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 토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지키게 했다.

 

그런데 태종이 이렇게 공을 들여 쌓은 토산 한모퉁이가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 흙더미가 안시성 성벽을 덮치자 성벽 또한 무너져 내렸다. 이때 마침 부복애가 자리를 뜨고 없었는데 그 때를 틈타 안시성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토산을 탈취해 버렸다. 당태종은 부복애를 처형하고 토산의 탈환전을 위해 3일 동안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끝내 토산을 탈환하지 못한다. 날마다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총공세로 나왔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병마(兵馬)의 양식도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하여 당군의 사기도 땅에 떨어지게 된다. 이때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은 고구려 수군을 이끌고 당군의 보급로 였던 현재 대련 주위(장산군도)의 해상을 장악하여 당나라군의 보급로는 물론 퇴각로까지 차단한다. 이것은 당태종에게는 청천벽력같은 급보였다. 그동안 돌궐 정복과 서역으로의 진출 등 중화민족을 중흥을 진두지휘했던 영웅 당태종과 한족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급보였으며 그와 당나라 군대가 몰살 할 수 있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다.

 

자신의 무덤은 고사하고 타국에서 개죽음을 당할 처지에 허겁지겁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태종은 성안에서 쏜 화살을 눈에 맞아 상처가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퇴각을 결정한다. 10만 대군이 몰살될 걸 아는지 모르는지 북쪽으로 돌아서 후퇴를 못하고 황급히 오로지 하나의 퇴각로인 서쪽으로 직진하여 무덤의 늪 요택으로 밖에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장수의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결국 태종은 포기하고 물러나가면서 안시성의 성주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대단히 잘 싸웠다고 하면서 비단 100필을 하사하고 갔다고 한다. 안시성 성주 역시 성 위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표하자 당태종은 적(敵)일지라도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絲繪)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고 전하지만 실은 안시성주를 안심시키고 퇴각시 시간을 벌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름대로의 어설픈 전략이었다.

 

 

[ 당태종 이야기  GO ]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 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안시성 전투 이후 당은 산발적으로 고구려 국경을 침범해 왔지만 다 물리쳤고 당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잠언에 `경영(經營)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니 모략(謀略)을 가지고 전쟁하라'고 한 것처럼 당 태종은 나름대로의 전략을 가지고 고구려 공략에 임했다. 즉 수나라의 패전을 교훈 삼아 장마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였고, 안시성을 우회하여 평양을 직접 공격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안시성 전투가 이토록 길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요동지역의 혹한을 전혀 염두에 두지 못하는 해서는 안 될 실수를 범한다. 이는 물론 양만춘이라는 고구려의 명장이 안시성을 끝까지 지켜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구려 본기는 철군을 일찍 결정하는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게 되지만 11성(城)은 당나라에 반대하여 끝까지 항전하게 되며 검모잠(劒牟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의 요동지역 중심지가 되었으나 671년 7월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는 것이 안시성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에 대한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려 준다.

           

율곡 이이선생의 自警文

 

1.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

하면 나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2. 心定者言寡 定心自寡言始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3. 時然後言 則言不得不簡

제 때가 된 뒤에 말을 한다면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다.

 

4. 久放之心 一朝收之 得力豈可容易 心是活物 定力未成 則搖動難安 若思慮紛擾時

 作意厭惡欲絶之 則愈覺紛擾 숙起忽滅 似不由我 假使斷絶 只此斷絶之念 橫在中此

亦妄念也 當於紛擾時 收斂精神 輕輕照管 勿與之俱往 用功之久 必有凝定之時

 執事專一 此亦定心功夫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일은, 그런 힘을

얻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정력(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힘)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잡념이 분잡하게 일어날 때에 의식적으로 그것을 싫어해서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분잡해지는 것과 같다. 금방 일어났다가 금방 없어졌다가 하여 나로 말미암지 않는 것같은 것이 마음이다. 가령 잡념을 끊으려 할 때에 이 '끊어야겠다는 마음'이 가슴에 가로걸려 있기만 해도 이것 또한 망녕된 잡념이다. 마음이 분잡할 때에는 정신을 수렴하여 담담하게 관조하고, 그 분잡함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오래도록 공부해나가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안정되는 때가 있게 될 것이다. 일을 할 때에 전일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또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공부이다.

 

5. 常以戒懼謹獨意思 存諸胸中 念念不怠 則一切邪念 自然不起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유념하여 게을리 함이 없다면, 일체의 나쁜 생각들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6. 萬惡 皆從不謹獨生

모든 악은 모두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음'에서 생겨난다.

 

7. 謹獨然後 可知浴沂詠歸之意味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있다.

 

8. 曉起 思朝之所爲之事 食後 思晝之所爲之事 就寢時 思明日所爲之事 無事則放下 有事則必思 得處置合宜之道 然後讀書 讀書者 求辨是非 施之行事也 若不省事 兀然讀書 則爲無用之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그냥 가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변하여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오똑히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 된다.

 

9. 財利榮利 雖得掃除其念 若處事時 有一毫擇便宜之念 則此亦利心也 尤可省察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은 비록 그에 대한 생각을 쓸어 없앨 수 있더라도,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다. 더욱 살펴야 할 일이다.

 

10. 凡遇事至 若可爲之事 則盡誠爲之 不可有厭倦之心 不可爲之事

   則一切截斷 不可使是非交戰於胸中

무릇 일이 나에게 이르렀을 때에, 만약 해야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거나 게으름피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만약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일체 끊어버려서 내 가슴속에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마음이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11. 常以行一不義 殺一不辜 得天下不可爲底意思 存諸胸中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12. 橫逆之來 自反而深省 以感化爲期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악행을 가해오면, 나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를 감화시키려고 해야 한다.

 

13. 一家之人不化 只是誠意未盡

한 집안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쪽으로) 변화하지 아니함은 단지 나의 성의가 미진하기 때문이다.

 

14. 非夜眠及疾病 則不可偃臥 不可跛倚 雖中夜 無睡思 則不臥 但不可拘迫 晝有睡思

   當喚醒此心 十分猛醒 眼皮若重 起而周步 使之惺惺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서도 안 된다.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

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십분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든 일어나 두루 걸어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15. 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

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된다.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늦추지도 않고 서둘지도 않으면서 죽을 때까지 해나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린다면) 부모께서 물려주신 이 몸을 형벌을 받게 하고 치욕을 당하게 하는 일이니,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의 절대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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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절대긍정 

 

우리는 각자 맡은 자기의 분야에서 걸출한 업적을 낸 위대한 위인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 걸출한 업적을 내기 까지 갖은 고난과 실패의 여정에 함께 마음 아파하고, 그 역경을 딛고 이룩한 위대한 성공에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한 분야에서 걸출한 업적을 내는 것도 어려운 것이 인간의 삶이다. 하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와 인정을 받는 소위 말하는 슈퍼위인 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를 꼽을 수 있겠다. 그의 업적은 회화, 조각, 건축, 천문, 물리, 수학, 지리, 해부, 식물, 동물 분야를 총 망라하고 있다. 실로 엄청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이와 같이 다 방면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위인이 누구일까? 본인은 주저 없이 다산 정약용 선생을 꼽고 싶다. 다산은 경전의 미묘한 뜻을 객관적 고증을 통해 해석한 걸출한 경학자(經學者), 복잡한 예론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정리하고 해석한 탁월한 예학자(禮學者), 진정 백성을 위하는 목민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따뜻한 행정가요, 효율적인 학습방법을 역설하고, 교육서를 집필한 교육자요,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역사서를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재해석한 위대한 역사가였다. 그는 또한 이러한 인문학 뿐만 아니라, 수원성의 축조를 총감독하고 효율적인 축조를 위해 거중기, 배다리, 유형거 등을 개발한 토목공학자요, 발명가 였으며, 아방강역고, 대동수경 등을 편찬한 지리학자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마과회통, 촌병혹치 등의 의서를 편찬한 의학자 인가 싶으면, 형법의 체계를 분류한 법학자, 우리나라의 속담과 방언을 정리한 국어학자 겸 시인, 문예비평가 이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은 여기서 이러한 다산의 방대한 업적들이 대부분 그의 18년 동안의 귀양살이 동안에 나온 작품임을 강조하고 싶다.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유망한 정치가에서 당파싸움에 의해 억울하게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던 다산의 마음으로 한 번 돌아가 보기를 주문하고 싶다. 별다른 죄 없이 죄인으로 취급 받아야 했던 억울함과 분노, 한 가문의 자손으로 가문을 일으키지 못한 자괴감과 수치심으로 그 또한 처음에는 세상을 원망 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분노와 자괴감과 같은 그런 낮은 에너지 상태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 하는 위대한 사색과 집중과 몰입의 시간으로 승화시켰고, 그의 업적은 조선의 위대한 자랑이 되었다.

 

18년 만에 자신의 성과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 당시 조선의 내노라는 지식인들이 다산의 그 방대한 편찬과 작업에 경악을 했음에 주목해 보자. 본인은 여기서 다산의 절대긍정 의 정신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아닌, 그 환경에 대한 우리의 반응임을 명심하라!

 

절대긍정 이란 어떠한 시련과 역경에서도 그 시련과 역경을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감사의 선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그러하기에 절대긍정 의 마음 앞에서는 오직 성장과 감사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산은 그 시련의 시기를 오히려 학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다시금 받아 들였고, 이를 통해 조선의 학술계의 위대한 존재로 기억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기였을 지 모르나, 역사적이고 학문적인 관점에서는 과히 축복이라 부를 만 하다.

 

역사를 배우고, 위인의 삶을 뒤돌아 보는 이유는 그 과거의 교훈을 통해 현재의 나를 바로 잡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어떠한가? 주어진 현실을 비관하고 비평과 불만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같은 환경이라도 우리의 마음먹기 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되어 질 수 있음을 기억하자. 이제는 다산의 절대긍정 의 마음가짐을 우리의 삶에 접목해 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의 그 환경 덕분에 당신이 더 성장할 수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 특히 조직을 이끌고 있는 리더라면 더욱 더 이러한 절대긍정 의 자질이 필요하다. 다산의 그 수많은 업적은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 없었다면, 수 백권 분량의 위대한 저술을 남기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을 것이다.

 

작게는 몇 명의 팀원이 모여 있는 소규모 조직에서부터 많게는 수 만명 이상의 직원들을 이끄는 대형 조직에 이르기까지 리더가 가진 생각과 사고는 그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쉽게 전염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팀이나 조직을 이끌다 보면, 때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난관과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이때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성품이 또한 절대긍정 의 마음가짐이며, 리더의 절대긍정 은 구성원들에게 강인한 희망의 에너지를 주며, 위기극복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

 

지금부터 라도  우리 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에 감사하고, 그를 통해 적극적인 성장을 도모하자. 특히 당신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리더의 위치라면 더욱 더 이러한 절대긍정 의 자질을 키우기 위해 힘 써야 할 것이다.

 

자료출처:닥터안 실천경영연구소 (www.akh.co.kr)

(Dr. Ahn Institute of Practical Management)

안광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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