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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 Ocean Family Buff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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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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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에 나무를 심으면 "困" 字가 됨으로...

2007.03.04 17:19 | 국내 여행 | 에드

http://kr.blog.yahoo.com/ekim3004/1057 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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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안채에는 나무 한그루도 없다.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가 시집와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안채는 입구 모양의 사각으로"ㅁ"자 모양인데 그안에 나무(木)가 드어가면, 괴로울, 부족할 곤(困)자가 되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심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해협 유람선에서본 돌마바흐체궁전(일명:해변궁전)

보스포러스 해협 - 11월 12일 마지막날
8박 9일간의 터키 여행에서 여기온 가장큰 보람과 낭만과 역사적인 중압감과 동서양을 가르는 문명의 갈림길을 체험했던 순간은 보스 포러스 해협을 선박으로 유람했던 것일것이다.

한국 같으면 강번으로 높은 아파드를 지어 그 뒷집은 생각 하지도 않았을 곳에 2~3층 정도의 높이로
집을 지어 서로 아름다운 해변을 나누어보는 지혜가 있었고 사이사이 적절한 숲들이 숨을 쉬고 있는것이 후진속에서도 선진화를 보여주는듯 했다.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분기점인 보스포러스 해협의 길이는 31.7킬로미터이다. 보스포러스의 아시아 해안선은 길이가 35킬로미터이고, 유럽 해안선은 55킬로미터이다. 평균 바다 깊이가 50 ~100미터인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은 루멜리 히사르가 있는 지점으로써 660미터이고, 가장 넓은 곳은 흑해와 만나는 곳으로써 3.4킬로미터이다.

마치 한강 유람선을 타는것보다 약간 넓게 느껴지는 보스포러스 해협은 평균 흐름의 속도가 시간당 3-4 킬로 미터이며 양 방향으로 강한 급류가 흐른다. 마르마라에서 흑해 쪽으로 흐르는 바다 물은 바다 표면으로 흐르고, 흑해 쪽에서 마르마라 쪽으로 흐르는 물은 60미터 깊은 바다 속으로 흐른다. 이 때문에 흑해와 마르마라해의 염도와 높이가 틀린 것이다. 물의흐름이 시간당 8-9킬로미터까지 이른다. 지중해를 거쳐 대서양으로 가려는 루마나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의 배들은 이 보스포러스 해협을 꼭 거쳐야 하는데, 이 해협은 몬트렉스 조약(1936)에 명시된 것처럼 터키의 통제를 받는 터키의 영해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해안선을 따라있는 작은 숲들, 카페, 찻집, 술집들, 그리고 식당들은 주말과 여름에는 특히 혼잡하다. 보스포러스는 네 번째 지질기에 지층이 붕괴되면서 형성되었고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은 7,500년 전이다. 이 이름은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 신은 부인 헤라 여신의 질투로부터 그의 애인인 이오를 구하기 위해, 이오를 소로 변신시켰다. 그러나 헤라는 사실을 알았고, 이오를 괴롭히도록 파리를 보냈다. 이오는 이 파리를 피하기 위해 이 바다를 건넜고, 이 때부터 이 곳은 소의 문을 뜻하는 '카우 게이트’ 즉 보스포러스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보스포러스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려는 원정 부대가 꼭 거쳐야 할 장애물이었다. 이 곳에 놓여진 최초의 다리는 BC4세기 시티안으로 군사 원정을 가던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다. 700,000만의 다리우스 군사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배와 뗏목을 이어 붙여서 다리를 만들었다.

해상 무역이 발달하면서 이스탄불을 무역 중심지로 만든 보스포러스는 비잔틴 시대에 최초로 여름 궁전이 세워지면서 그 중요성을 더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따라 세워진 몇 개의 요새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오토만은 이 도시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보스포러스를 통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정복 전에 아나돌루 요새와 루멜리 요새를 건축했다. 도시를 정복한 후에는 오토만 황제들은 도시 중심에 가까운 보스포러스 지역에 거주했다.

이스탄불에 증기선이 도입되면서 그들은 여름 별장에 살기 시작했고, 조금 떨어진 해안가에도 정원과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원래 이러한 곳들은 서로 접촉이 거의 없던 어촌들이었다. 그러나 오토만 술탄들이 고위 관직자에게 상으로, 또는 그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선물로 이 지역의 땅을 주기 시작하면서 목재 빌라와 별장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보스포러스 역사의 또 하나의 전환점은 1973년때 있었다. 1973년에 최초의 보스포러스 브릿지가 개통되면서 아시아와 유럽이 최초로 연결되었고, 두 번째 다리가 1988년에 개통되었다. 매년 50,000척의 화물선, 대규모의 탱커들, 그리고 커다란 크루즈 선박들이 운행되고 있는 보스포러스 해협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번잡하며 가장 위험한 바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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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따라 죽은 화순옹주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과 영조의 큰딸 화순옹주의 사랑이야기

위 사진에서 추사고택의 오른쪽에 "화순옹주정려문"(4번표시)이 있다.
박승해 문화유산 해설사가 들려준 "화순옹주"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화순옹주는 조선 영조의 둘째 딸로서 당시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인 김한진(1720 - 1758)과 13세 때 결혼하였다. 김한진은 벼슬이 수록대부 오위도총관에 이르렀고 글씨에 능하였으며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가 된다. 부군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옹주는 음식을 전폐하여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영조는 부왕의 뜻을 저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정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정려를 내렸다. 김한신이 영조 임금님의 큰딸 화순옹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영조가 부마인 김한신에게 충청도 예산에 수령들로 한 칸씩 맡아서 집을 짓게 하여 하사한 것이 추사 고택이다.

본래 영조는 큰 딸 화순옹주를 많이 사랑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김한신은 충청도에 상주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한양에서 많은 시간을 머물며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영조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던 모양이다.

일설에 의하면 화순옹주의 남편 김한신도 사도세자와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나 말다툼을 하다가 세자가 던진 벼루에 맞아 병이 나서 죽었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43집)에는 다만 "김한신이 卒하였다…어찌 한 병으로 효험이 없을 것을 뜻하였겠는가"라고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 적고 있다.

화순옹주는 김한신의 나이 13살에 시집을 와서 25년 이상을 살았지만 그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김한신이 죽자 완전히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 죽고자 결심을 했다. 그가 시집을 와서 남편 김한신과 살기를 25년. 한 점 혈육도 안 남기고 남편이 세상을 등지고 보니 그녀에게 세상은 자신이 살아야 할 아무런 의미가 없는 황량한 사막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곡기를 끊고 드러누워 죽기를 자처하자 주변에서는 그녀의 이러한 처사에 당황한 나머지 음식을 강권해 보지만 그녀의 결심은 단호해서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기를 이레째 되던 날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 임금은 사랑하는 딸이 남편의 죽음에 상심한 나머지 곡기를 끊고 죽기를 자처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의 권위와 체통을 내려놓고 딸의 사저를 친히 찾아가 미음을 권하였고, 임금인 아버지가 찾아와 친히 미음을 권하자 옹주는 임금의 명령을 냉정히 거절할 수가 없어 임금이 건네주는 미음을 받아 몇 숟가락 뜨는 듯이 하다가는 그 음식들을 모두 토해 내면서 음식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다며 그냥 내려놓았다한다.

화순옹주가 곡기를 끊고 남편의 뒤를 따르겠다고 결심을 한 지 14일. 그녀는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의 뒤를 따라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예에 따라 남편인 김한신과 함께 지금의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고택 후원에 부부 합장묘를 만들어 장례를 치러주고 그녀의 정절을 높이 기려 열녀로 기리는 열녀 정려문을 하사하여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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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 추사 김정희 선생의 古宅을 방문하고.....

사진: (위로부터)
1. 추사고택 대문
2. 고택 안채
3. 해설사: 박승해 선생(사랑채에서)
4. 안채
5. 백송(잎 30년생)
6. 백송의 몸채와 가지

그동안 입춘이 지난지 한참이었지만 2월은 아직 겨울만 같았다.
그러던 오늘, 날씨가 평년을 많이 넘어서고 봄기운이 돌면서 조금은 갑자기 "세계꽃식물원"을
구경 가기로 한것이다. 장소는 충남 아산.... 아침 7시 겨우 일어나 "아름여행사" 관광버스를
탔다.

가는길에 부수적으로 들린곳이 "유명하면서도 물어보며는 아무도 모른다"는 우수운 부제목이
붙은 "추사 김정희선생의 고택"이였다.

김정희 선생(1786년 - 1856년)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 났다.
1836년 이조 참관 역임하였으며 윤상도의 옥사로 연루되어 제주도에 귀향되었다가 1848년 풀려 났다고 한다. 그가 더욱 유명한것은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글씨체를 남겼다는 점 때문이다.

그림에 또한 능하여 죽란과 산수를 즐겼며 그림,사실보다 품격을 위주로 하며 선미가 풍기는 남종화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집의 사랑체에는 사한도(?)라고하는 유명한 그림의 影印本이 걸려 있었다.
그진본은 수억원대에 이른다고 한다(사진참고).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북한산비가 신라 진흥와 순수비임을 증명하는 데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 금석과안록, 시사구시설 등이 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서예가이었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선생의 유적지로 추사고택과 정려문이 있으며 추사선생의 묘와 우리나라에 다섯 그루 밖에 없다는 천연기념물 제 106호인 「예산의 백송」이 500 미터 떨어진곳에 있었는데 시간관계로 직접가서 촬영하지는 못한것이 참 아쉬었다.

이 천연기념물 제 106호인 白松은 秋史가 아버지를 따라 明나라에 갔다가,
1. 씨를 갖어와 심었다는 說과,
2. 묘목을 갖어와서 심었다는 說이 있는데,
오늘 그곳의 문화유산 해설자 "박승해" 선생의 설명으로는 후자의 설을 강력히 믿고 있었다.

그 백송은 촬영하지 못했지만, 해설자는 그와 약간 유사한 30년된 백송을 소개해 주어서 그대신 촬영해 보았다(맨아래 사진 2장을 클릭해보면 백송임을 알수있다).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께서 건립한 18세기 중엽의 건축물로써 당시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후손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1월 9일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賣收)하였고,

그후 故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로 유적정화사업을 1976년 9월 4일 착공하여 1977년 6월 27일 준공을 보았으며 1977년 9월 22일부터 충청남도 추사고택관리사무소를 설치하여 관리하여 오다가 1980년 1월 1일부터 예산군 추사고택관리사무소로 설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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