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표적인 재상,하면 누구나 황희(黃喜) 정승을 떠올리게 됩니다. 태종과 세종 시대 24년간 재상을 지냈으며 그 중 18년을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던 황희는 세종을 보필해 조선이 발전할 토대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지요.
분명 능력있는 정치인이자 관료였음에는 틀림없지만, 황희 정승을 '청백리의 표상'으로 보는 것은 후대의 포장 덕분입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다양한 비리 사건으로 탄핵을 받기도 했었지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뇌물수수, 관직알선으로 탄핵을 받았던 기록이 여러 건 남겨져 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 받았을 뿐이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賣官買職)하고, 형옥(刑獄)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는데요.
유명한 사건으로는 사위의 살인사건을 은폐, 조작하려 시도했다가 파직을 당했던 것(금방 복귀되었습니다만)과 친구였던 박포(제2차 왕자의 난의 주모자로 몰려 참형당함)의 아내와 간통한 사실이 적발된 것 등이 있었지요.
그럼에도 황희의 정치적 수완과 포용력을 높이 산 세종대왕은 매번 서슬 퍼런 사헌부에게서 황희를 구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인 흠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능력을 중시한 실용적인 판단이었지요. 황희 스스로도 워낙 처세에 능하여 비리 사건에도 불구하고 일 잘하는 관료로서의 이미지를 잃지 않았고요.
경기도 파주 황희 선생의 묘
이런 황희에게도 생각대로 되지 않아 속앓이를 해야 했던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말썽꾼 아들들이었습니다.
병진년(1436년)에 내탕고의 금잔과 광평대군의 금띠를 잃어버렸으나 훔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이때(1440년)에 이르러 또 동궁이 쓰던 이엄(일종의 방한구)을 잃어버렸다. 중생(仲生)이 한 짓으로 의심하여 삼군진무를 시켜 그 집을 수색하게 하매, 이엄을 잠자리 속에서 얻게 되어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였더니, 그전에 잃어버렸던 금잔과 금띠도 모두 중생이 훔친 것으로 자복하였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22년(1440) 10월 12일 기록 중
위 글에 등장하는 황중생(黃仲生)은 황희가 첩으로 삼은 내섬시(內贍寺)의 여종에게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서얼인데다 문무에 모두 소질이 없었던 중생이었지만, 아버지의 '백' 덕분에 동궁전 사환으로 취직할 수 있었지요. 머지않아 왕위에 오를 동궁의 시중을 드는 자리라 사환 중에서도 요직으로 꼽히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후광으로 어렵게 얻은 자리에서 중생이가 한 짓은 도둑질. 그것도 동궁전 내탕고에서 보관하던 금잔, 금띠, 동궁의 물품 등 왕실의 재산을 빼돌리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릅니다.
의금부의 조사로 모든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는데, 중생의 집에서 나온 금잔이 절반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절반을 어찌했느냐 문초하자, 중생은 '적형(嫡兄) 황보신(黃保身)에게 주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황희 정승의 영정
바로 여기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는데요. 보신은 황희의 본처 소생 3형제 중 둘째였습니다.
중생이까지는 서자여서 대충 넘어갈 수 있다 해도, 적자까지 왕실 재산 도둑질에 관여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야말로 가문에 먹칠을 하는 셈이었지요. 더군다나 이복동생이 빼돌린 금붙이를 나눠가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황보신 역시 떳떳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보신은 당연히 '그런 적 없노라' 딱 잡아떼었으나, 중생과 의금부에서 실랑이를 하던 과정에서 그만 이전에 보신이 저지른 다른 비리 사건들까지 줄줄이 발각됩니다. 보신이 의금부 지사로 있을 때 첩에게 주려고 상습적으로 관의 재산을 빼돌린 것이 드러난 것이지요.
워낙에 죄상이 명확했던 덕에 황희의 아들일지라도 벌을 면치는 못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었다면 유배를 당했을 중죄였건만 보신은 장 몇대 맞고 보석금 좀 내는 것에 그쳤습니다.
어쨌거나 사건이 여기서 마무리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적자 중 첫째, 치신(致身)이가 치워 나가는 밥상에 한술 걸치고 듭니다.
보신이 죄를 짓고 파직된 탓에 연봉으로 받았던 과전을 반납해야 했는데요, 당시 호조 참판의 자리에 있던 형 치신이 동생의 위치 좋은 땅 대신 자기 소유의 거친 땅을 대신 반납합니다.
즉, 나라에서 내린 땅을 간 크게도 멋대로 바꿔치기 해버린 것이지요. 중죄를 지은 동생이 아버지 덕분에 겨우 풀려났건만, 눈치를 보고 몸을 낮추기 보다는 이 때를 노려 또 한 건의 사기를 치려 했다니, 어이없음을 넘어 감탄이 나올 배포(?)랄까요.
결국 어찌해서건 황희의 이름을 세워주려 했던 세종도 포기하고, 황치신을 파직시켰다고 합니다.
분노한 황희는 형제들이 줄줄이 벌을 받게 된 원인을 제공한 중생을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내쳤고, 이후 중생은 황씨 성을 쓰지 못해 '조중생'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반면, 적자인 보신의 경우에는 이후 황희가 직접 문종에게 청해 직첩을 돌려받았습니다.
황수신의 글씨 <근묵>
한편, 위 사건에는 관련이 없었던 셋째 황수신(黃守身)은 이후 영의정에 올라 2대에 걸쳐 최고의 관료 자리를 지키는 영광을 누렸으나(황희의 세 아들은 모두 과거가 아닌 음서로 관직에 진출), 그 역시 형들을 닮은 구석(?)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친분이 있는 임원준을 의서찬집관(醫書撰集官)으로 부정 발탁했다가 삭직당하는가 하면, 아산의 전토를 멋대로 농장으로 만들었다가 여러 차례 탄핵당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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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의 살인 사건의 은폐, 조작외에도 사위가 세금포탈을 하는 것을 묵인하고 도와 주다 걸려서 탄핵을 받고 쫐겨났다가 오히려 영의정으로 승진된 걸로 압니다. 이를 지적하고 파면할걸을 세종에게 요청한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들을 전원 투옥시키기도 했죠.
대왕세종은 안봐서 잘 모르겠지만 황희 정승이 청백리가 아닌 것처럼
세종도 결코 성군이 아니었습니다. 세종이 잘못한 대표적인 사례가 지방관리에게 살인 또는 반역이 아닌한 어떠한 죄도 묻지 못하게 면책특권을 부여해서 평민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백성이 이를 세종에게 고소하자 백성을 반죽여서 유배를 보내고 이를 더욱 강화해서 반역이 아닌한 고소조차 못하게 했습니다. 이 법(정확이 생각이 안나네요)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또한 세종 사대주의자로 말 끝마다 명이 어떻고 저떻고 하거나 명에 보내는 조공과 공녀로 인해 백성들이 허리가 펼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양반들 같은 귀족들은 좋은 시대이었을지 모르나 백성들에게는 결코 살기 좋은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옳소! 이 나라 역사는, 자기네들은 왜곡이 전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우기는데.. 새빨간거짓말이지, 훗! 다 왜곡, 거짓말 투성이! 세종 역사도 그렇지만, 신라 역사도 그렇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여왕들이 남자 신하들과 대놓고 섹스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버젓이 있는데도, 어디 누구 하나 그런 것을 거론이나 하나? ㅋㅋ 위선자들! 훗
어렸을때만해도 조선시대의 황희정승,세종대왕을 존경했었고, 현대사에서는 이승만,박정희를 존경했었죠. 그동안 일방적 교육에 의해 쇄뇌당했던 것 같아요. 1988년 이후 서서히 그분들의 역사적 실체를 알게되었는데, 그동안 속은게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래서 언론조작이 참 무섭다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정권이바뀌면 전 정권을 폄하하느것 대체로 우리의 역사인데,특이나 심한것이 D J 정부였소.사람을 바꾸었고, 교과서를 바꾸어서 자라나는 아이들부터 자기가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세뇌 시킨것이요. 알맹이도 없는 민주화화란구호에 모두 속히고 있는것이요. 한 백년 후에나 군사정권,D J 정권, 고노.무현 정권,이 명박 정권에 대한 평가가 옳게 나올것이요.
당신의 필명만 봐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군요. 또 세월이 지나면 또속았다는걸 알게 될겁니다. 나도 젊은 시절 <전환시대의 논리. 드레퓌스 사건 등>을 읽고 속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까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이승만 박정희 보다 더 사람을 속이고 있다는 걸 꺠닫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존경할 만한 왕은 없었던 걸로 압니다. 노무현이 최초지 싶습니다. 이성계는 반역자고, 세종은 주색잡기에 빠졌었고, 영조는 지아들 죽이고, 정조는 그래도 좀 낫지만 암살당하고, 이승만은 친일에 장기집권, 박정희는 애국심은 있으나 역시 친일에 독재, 뒤로 권력에 눈먼 짐승들이 대통령 하다 노무현, 국민을 위해 혼자노력했으나 정적 쥐의 모함으로 자살...
사쿠라칸 아무리 당신이 노빠이기로서니.. 어찌 노무현이 최초란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노무현이 한민족 역사를 통틀어 제일가는 지도자라는 말인데.. 도대체 노무현이 무얼 했느냐? 노무현이 광개토대왕보다, 태종 이방원보다, 근초고왕보다, 고려 광종보다도 훌륭하다는 얘기인가? 이건 거의 종교수준이구만.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며, 배울 점이 무엇인가 먼저 생각해야 하지요. 욕이 먼저 나오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고인물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정치세계에서는 더 하죠? 대빵이 죽어야 최고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데, 살아 남는 방법은 대빵한테 잘 보여서 대빵 밑에 자리 하나 차지하는 것과 모함을 해서 쫓아 내거나 죽이는 방법 밖에 없는데.....
아무르 스스로 도덕적이고 싶어도 주변이나 아랫사람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수많은 청탁을 어찌 다 통제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도덕적 잣대로 옛날을 보려면 아예 안보는 것이 낫죠.
권력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대통령 5년 단임제 하고 있잖아요................ 이것이 역사로 부터 배운 것이죠.
황희는 두문동 70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버리지 않은 사람이지요.
하지만 마음을 꺽고 남은이들을 살리기위해 일종의 딜로서 조선조정에 출사 합니다.
이런 인간이 조선조정의 창립공신들 사이에서 미움받는것은 당연하지요.
세종실록에 몇가지 사건이 있긴합니다만 그중에 진실로 밝혀진것은 별로 없습니다.
나머지는 억측이죠. 왕권 출납(왕의 명령이나 신하의 장계등을 전하는 일)을 맡았던
사간원도 직필이었다고는 말할수 없었으니까요.........
홯희도 100%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50%인 인간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과전법에도 불구하고 지방에 광대한 농장을 소유한 공신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초라하죠.
황희,맹사성,허조,최만리등이 그 꼬장꼬장한 기를 간직할수 있었던것도 알고보면
그러한 청렴에서 나왔다고 보아야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종이 죽어라고 보호한 인물들 이니까요.
그리고 세종은 누가 뭐래도 성군입니다.
그 가장큰 이유가 그 균형잡힌 국정 운영 이니까요.
4대군주이자 수성1세대인 세종의 평생 염원은 왕권의 강화 입니다.
강한 왕권에서 그힘이 생처럼 흘러 다르리는 백성에게까지 미쳐야한다는 신념이 있었지요.
그래서 한글을 창제하고,공법을 실시하고,여론조사를 하고,집현전을 짓고,조운을 개혁하는
나라의 힘을 모으고 소통을 원활히하는 일을 실시한것입니다.
게다가 역대 어느임금보다도 생산력으로서의 땅을 소중히 한 임금으로
대마도나 북진개척과 전지정리를 통해 조선통틀어 최대의 농경지와 세수를 확보했습니다.
이렇듯이 치우치지않고 균형을 잡아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는
군주가 성군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왕권이 쇠미해지면 종국엔 백성이 괴롭다는것을 알기에
권력 분할로 신하에게 책임을 지우고 군주는 노력해서 신하에게 권위를 나타낼수 있었던
실력군주 이것이 바로 세종의 모습이죠.
태조는 반역의 역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 애썻으나 오래 못있었고 이방원은 형제를 무참히 죽이고, 세종이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기는 했으나, 유교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 하면서 일반 서민을 짓누르고, 고려시대의 기상을 다 죽인점은 별로 성군이라 하고 싶진 않네요. 바람기가 강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국권을 강화한건 인정 해야죠. 무엇보다 한글의 발명은 가장 큰 업적이죠.
황희정승이 일을 잘 했는지는 몰라도, 청백리의 표상으로 포장된건 분명 오류가 크다. 비 새는 초가집에 살았다는건 거짓이고, 자식이 왕실처럼 호사하는게 걱정이라 말했던 정승.. 수신제가를 못했으나 처세에 능하여 시대를 농락했던것은 틀림없는 일... 역사는 바르게 써야 한다. 황희는 재조명해서 발본색원해야 한다... 맹사성대감을 밝혀보아야 한다. .
이글을 보니 내가 알고 배웠던 황희정승과는 많이 다르고 또 뻔뻔하기도 한거 같아요. 한나라의 대통령을 지내신분이 부인과 아들 사위 형님의 허물을 안고 책임져 자살이라는 극한의 선택을 했는데 일국의 최고재상을 지내신분이 식솔들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그 책임도 권세를 이용해 면케하고 큰아들의 직책을 왕에게 청원해 돌려받고...
황희는 두문동72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숫자와 명단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습니다.)
실록에 기록된 사건은 모두 입증된 사건들 입니다. 진실이 밝여진것이 없다거나 억측은 아니고요 실록이 작성될 당시에도 황희가 고위관료였단 사실을 고려하면 더많은 비리가 있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한가지 비리는 숫자나 금액의 많고적음 보다 그 사람의 도덕 관념과 행동의 엄격함등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승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부정부패로 탄핵당해서 물러난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황희는 청렴결백함이나 학문적 깊이 보다는 행정관료로서 또는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이 특출했던것 같습니다.
황희와 맹사성은 전혀 다른 인물됨을 가졌습니다.
abgp123님의 다른 의견에는 대체로 동의.
박정희 정권때 만들어진 역사책은 신라를 너무 과대포장하엿다는것과 조선시대 신라계열 인물들을 너무 과장하였다는 것, 그리고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를 입맛대로 번역해 써먹었다는것 입니다. 신라는 당나라를 끌여들여 백제를 넘겨주고 고구려까지 팔아먹은 다음에 당나라세력이 약해지자 백제를 자기땅으로 복속시켯지만 고구려 영토에는 발해가 건국되었습니다 .그런데도 3 국통일을 햇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엄연히 말하면 남북조 시대지요. 또 난중일기에서 전라도 수군이 아니었으면 조선도 없었다 라는 구절이 있지만 단한번도 이런 문구는 발표한적이 없습니다.
부끄러워도 내 역사요 자랑스러워도 내 역사입니다. 진실된 역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국력이 나옵니다. 사회성도 일관성을 가지게 되죠. 일관성이 없는 사회성은 곧 이기심, 질투심, 공격적이고 배타적 성향을 보여주어 결국 사회가 내내 지저분해 보입니다. 지금이라도 객관적이고 올바른 역사 연구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 잘못된 역사는 아니겠지요...
말 않듣고 위화도 회군은 했고 조선은 막상 건국은 했고..막상 정치할려니 도져히 못하겠거든 칼이나 활다루는 법은 알아두 다른건 모르거든..그러니 두문동에 제발 똑똑한 넘.. 몇 보내달라구 하니 마지 못해서 보낸게 황희하고 맹고불(맹사성)이잖아요..72인중 젤 띨띨한게 2명이었데요..근데 나중에 조선 최고의 명제상..ㅋㅋ..두문동 자손들이 개성상인이 돼었다나 무어라나..(근데 난 언제 정치를 해볼려나...최소한 낭터러지에서 자유 낙하는 않할 자신은 있따..ㅋㅋ)
조선의 역사는 위화도회군에서 시작되는 비겁한 역사입니다. 나도 이씨지만 이씨조선의 무능함때문에 오늘날 일본과 이렇게 국민성이 차이가 난다. 교과서는 모두 자화자찬과 과장된 역사날조... 이성계와 세종도 아첨과 아부로 뒤덮힌 영웅만들기... 이뜰 때문에 죽고 고생한 민초들과 충신학자들만 서럽도다
황히정승에대한 많은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난 사람입니다 가족사가 그렇게 복잡한줄은 몰랐습니다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그가 오랜세월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세종을도와 많은업적을 남긴사실이 한없이부럽습니다 어릴때는 나도 커서 그정도는 되어야겠다는 야무진꿈도 꾸어보았습니다 하지만 60 이 다되어가는 지금 이런글을보면서 태클이없는인생은 아무도 없구나 역시 인생은 힘든 상황속에서도 오랜세월 많은 좋은업적을남긴자가 훌륭한자구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태국의 청백리 잠롱/ 이탈리아 수상의 부정부패파헤쳐 일약 스타가 되어 수상이되었던 정치검사 마니 폴리테/한국의 잠롱이라고 언론이 떠들어 대었던 성남시장 안**/서민적이고 청렴함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정부패하면 패가 망신시키겠다고 전국민앞에서 선언했던 노무현에 이르기 까지 .... 인간이 인간인 이상 재물 앞에 마음을 바로 세울 수가 없나 봅니다.(교훈1)
모두가 결국엔 부정한 일때문에 망했습니다. 한때 청렴해도 단 한번 부정과 부패한 일을 저지른 다면 그 한번으로 심판을 받고 말죠^^ 좋은 일은 계속해야 하지만 나쁜 일은 단 한번이라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교훈2)-명예를 얻기는 어려워도 실추하기는 쉽다는 얘기겠죠?
사람의 평가는 그사람의 공과 과를 함께인정하는데서 오는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한사람은 ,절대적으로 없습니다.
그러나 슬픈일은 절대적으로 악한넘은 꼭 있다는것입니다.
공자도 후손이있고,부처도 아내를 얻었으며,예수도 거짓말과 화를 냈으며,마호메트도 선교라는이름하에 사기를쳤습니다.
99%로 잘했던일을 1%의 허물로 매도하지마세요.
그러나 또 슬픈일은 대부분의 선한사람이 1%의 허물로 매도당하지만 일부의 악한넘은 1%의 잘한일로 99%의 악행을
숨긴다는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대중의 지적,판단의 수준 문제입니다.
한국민은 이런면에서 아직 선진국수준은 아님니다.
우와....매우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역사는 오직 진실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소설을 썼다는 인식이 되면 망쪼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지요. 나 역시 유신독재의 교육에서 황희가 청렴 정직 빈곤하여 달걀도 곤 달걀을 먹는 등....따위의 말도 않되는 교육을 받았지요...헐..간통에 축첩에 축재와 갖은 비리..으으으 간악한 처세자 함명회나 유자광이가 연상이 되는 악귀군요. 물론 세종놈에게는 유용한 필수의 노비가 황가놈이었고, 두 놈이 짝짜꿍으로 축첩 파티에 살판 난 세상이었겠군요. 물론 정치는 제놈들 안위를 위해 필요한 일이니 지들 위해 놀아났을거고요..
이글이 식민사관 같다는 제 글이 삭제됬군요. 당신은 쥐박이입니까? 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지워버리죠? 예의에 어긋나는 점도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아주 옛날 중고등학교 시간에 의식있는 국사선생님께 배운 식민사관이란, 우리 나라 역사의 치졸하고 어두운 면을 부곽시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부끄러움을 주고 기를 죽이려는 의도의 사실과 거짓으로 민족의 정기를 없애려는
교육이었습니다. 재해석이란 명목으로 우리가 영웅이나 성인으로 생각되는 인물들을 이렇게 굳이 망가트리지 마세요. 쥐박이 같습니다. 정말!!!
그런데 말이죠.. 예전에 읽은 글 중에, 황희 정승의 집에 갔던 두 관리가 좀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조정의 중요한 사안을 문서로 작성을 하는데, 그 집 종의 자식인 꼬마가 그 문서에 오줌을 누워서 두 관리가 당황하자. 황희 정승이 손으로 쓱 문질러 닦으면서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문서가 완성 될 때 쯤에는 종의 신분인 계집 아이가 황희 정승 어깨에 기대어 쳐다보더라는 글을 봤습니다. 아마 황희가 과가 있겠지만, 저 글을 100% 신뢰는 못하겠네요. 좀 상상을 초월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싶스니다. 단 자식 교육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형식을 띄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저 글은 좀 더 조사가 필요한 듯 하네요. 그래도 조선 시대에 그나마 하나 있는 명재상인데.. 언론 조작에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끝없이 나쁜 점만 찾아 보면 성한 사람이 누가 있으리요? 우리가 아는 성인들도 진실하게 깨끗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정치인은 국민을 잘 살게하고, 농부는 농사를 잘 지어 민생을 이롭게 했으면 훌륭하다고 하면 된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깨끗해도 백성의 삶이 어려우면 이는 잘못된 정치인이고, 사장이 영업능력이 없어서 회사가 망하면 종업원이 모두 거지가 되니 이는 나쁜 것이다. 작은 흠결을 찾아서 이를 토대로 모두를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長水黃氏 不孝孫 黃義晳이올시다.
님의 조상님이 얼마나 청렴하셨는지 몰라도 공과를 떠나 존경받을 인물이 없는 시대에 굳이 헐뜯는 이율 모르겠소.
정사와 야사를 통틀어 그만한 인물이 얼마나 되겠소?
맹사성??..걍팍하고 외골수라 타협을 모르고 남에게 모질게 행동하여 맹고불이라 불렸소.
최만리??.조선 政爭의 원흉이요.
이이??이황??..이들은 학문을 한단 핑계로 민초들의 어려움은 관심도 없었소.
일일이 열거 하면 끝도 없소.님은 본관이 어디신지??
세종이 성군이니 아니네 따질필요없다...세종의 업적은 당대에 한글을 완성 임금의 이름으로 반포한것이다..이순신이 임난에 나라를 지켜낸것과 세종의 한글 반포 이 두가지 외에 광개토대왕의 경계비....우리 역사에서 10손가락안에 들만한 일들은 그리 많지 않다. 참고로 역사는 승자의 것이지 패자의 것이 아니다.승패가 시대를 넘나들며 바뀌었듯이 그를 담은 역사 역시 그 승패에 따라 담겼다.세종이 만약 일개 정승이나 일개 왕실가족이나 일개 필부(있을수도없다)였다면 처죽임을 100번은 당했을것이다..그의 주변인을 이해할땐 이를 반듯이 정 반 으로 염두에 두고 역사서를 살펴야한다.
노무현의 값어치는 그가 이나라에 대통령으로 근무한것 만으로 충분히 그의 값어치는 있었다.노무현당시 내놓은 대부분의(거의 전부에 가까운) 정책들은 옳은 정책이었고 욕으로 막아섰던 한나라당까지 지금은 형태만 달리할뿐 그 정책,또는 그의 성격을 이어받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노무현은 조선일보 이하 일제잔재 권력자들에게 아부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일제시대로 부터 이어져오던 그림자 권력의 사슬을 잠깐이나마 끊어놓은 사람이다.방회장의 생일잔치에 모든 전현직대통령이 저녁7를 기하여 참석하였던것을 어린 찌질이인 젊은 세상모르는 너무도 늙은 귀막고 눈먼 주름살 들은 모른다.이땅에서 권력이란 어떤것인지..물론 역사는 현재가 아닌 과거이기에 이러한 판단은 미래 우리 자식들 그의 자식들이 판단할 문제이다.다만 내가 모르는 일반인이 모르는 진실이 얼마나 남겨져 어떤 잣대로 판단될지가 관건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