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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보고 판단하십시오! 절대 떡볶이집 망한다는 말을 한적이 없습니다! 걱정을 저주로 둔갑시키는 미디어악법 예고편.. 반드시 막아내겠습니다!!
어제 한나라당의 장광근 사무총장은 내가 남조선명함을 들고 방북을 했다고 말했다.
나의 떡볶이 쓴 소리를 왜곡하는 것으로 모자라 빨간 물을 들이려는 것 같다.
우선 그는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대통령이 간 떡볶이집은 망한다고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서민을 저주한 망언이라고 몰아부쳤다.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망한다고 한 적이 없다.
“근원적 처방을 한다더니 이미지 관리가 근원적 처방이냐! 10만원 들고 시장 가서 떡볶이 사먹고 아이들 들어 올리면 서민경제가 살아나나”하고 전제한 후에,
“대통령께 말씀드립니다. 떡볶이집에 가지 마십시오. 손님 안 옵니다. 아이들 들어 올리지 마십시오. (놀래서) 아이들 경기합니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대통령이 정책은 강부자 정책을 쓰면서 서민 위하는 척 70년대식 쑈를 하는 것을 힐난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심지어 떡볶이집 아들의 편지까지 동원하여 서민 가슴에 못박는 발언이라고 생떼를 썼다.
그러더니 장의원은 기자회견의 말미에 슬쩍 색깔론을 끼워 넣었다. 내가 과거 방북 당시 명함에 남조선 국회의원이라고 써서 물의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언론이 이것을 받아 보도했다. (국민·서울·세계일보 등)
그러나, 나는 북한에 가본 일이 전혀 없다.
남조선명함 얘기는 10여년 전에 내가 명함 한 장으로 색깔론에 휩싸여 보수언론의 뭇매를 맞아 본 일이 있다.
97년 대선을 불과 서너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 대변인이 야당인 김대중 후보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사상이 붉은 자가 있다면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는 내가 LA에서 사용한 해외용 명함을 치켜들었다. 그 명함은 내 칼라 사진과 함께 “한국 국회의원 이석현”이라는 말이 7개 국어로 표기되어 있는 명함이었다.
과거에 아랍이나 러시아 같은 비영어권 국가에 갔을 때 현지 대사관에서 내 영어명함 위에 아랍어나 키릴문자로 내 이름을 병기하여 달래서 사용했더니 그 나라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었다. 어느 나라에 가도 쓸 수 있도록 명함 한 장에 7개 국어로 인쇄를 했는데 그래서 그 중 말미에 중국을 위하여 한자로 새겼다.
그 이전 90년에 중국 각지를 여행하였는데, 그때 보니 “한궈어”(韓國)라고 하면 종합상사 사람들이나 알아듣고, 일반인들은 우리를 “난차오센”(南朝鮮)으로 통용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나서 영어, 불어, 독어, 러시아어, 아랍어, 일어 다음에 말미에 한자로 韓國이라고 먼저 쓰고 괄호 속에 (南朝鮮)이라고 부기하였다.
그런데 사무실 구석에 쳐박혀 있던 이 해외용 명함을 막상 사용한 것은 97년 대선정국에 LA의 어느 출판기념회에 갔을 때였다.
호텔에서 명함 10장 정도를 챙겼는데, 아! 여기는 중국이 아니니까 불필요하겠다 싶어 南朝鮮 세 글자는 볼펜으로 줄을 그어 삭제하고 주머니에 넣고 갔다. 행사장에서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나에게 명함을 주는 외국인들에게 나도 주었는데, LA총영사관 소속의 어떤 한국분도 내 명함을 달래서 주었다.
다음 날 귀국길에 한국의 공항에서 유독 내 가방만 한 시간이나 기다려서 받았는데 자물쇠가 풀려있었다. 그때는 국회의원 가방을 평소와 달리 왜 검색하나 의아했는데 다음날 아침 신한국당의 기자회견을 보고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는 그날부터 한 열흘 동안 보수신문들이 뭇매를 가했다. 국체를 부정한 정신 나간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아예 ‘남조선 국회의원’이라는 제목으로 사설까지 써서 나를 국회에서 제명하라고 했는데, 유심히 읽어보니 내 명함을 보지도 않고 쓴 글이었다. 지역구인 안양에서는 보수단체들이 피켓 들고 규탄대회를 하고, 김대중 후보의 자택과 중앙당에 항의전화가 빗발쳐 업무가 마비되었다.
나는 소동의 첫날에 우리당 기자실에 나가 그 명함을 기자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현지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외용 명함이라고 해명을 했었는데, 기자들이 별 관심 없는 태도였었다. 오히려 어떤 유력 신문의 K기자는 이걸 가지고 신한국당이 그렇게 호들갑을 떤 것이었냐면서 저쪽을 “조지는” 박스 기사를 써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해명이 되었거니 생각하고 그날 지역 시내 어느 모임을 태연히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 지하도에서 가판(다음날 아침의 신문이 밤에 미리 나온 것)을 사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우선 저쪽을 “조지는” 기사를 쓰겠다던 그 신문을 펼쳐보니 “석연찮은 이석현 명함”이라는 제목으로 대문짝만하게 냈는데 나의 사상과 행적이 석연치 않다면서 배후를 파봐야 한다고 썼는데 쓴 기자가 바로 그 K기자였다.
어이가 없어서 K기자에게 핸드폰을 걸었더니 배경음악에 싸여 한 잔 한 음성으로 그분이 말했다. “너무 속이 상해 혼자서 호프집에 왔습니다. 데스크에서 그런 기사를 썼는데 꼭 내 이름으로 내야 한다더군요.”
당시 나는 기자들에게 몇 차례나 해명을 거듭하였지만, 내 말은 한 면 가득한 비판 기사의 끝에 반줄만 냈다. 한겨레신문과 기자협회회보를 빼고는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적막강산에 고아가 된 느낌이었다. 한편, 그때나 지금이나 현지인을 위한 나의 친절이 다소 신중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러나, 명함이라는 손바닥 반도 안 되는 종이쪽 위에서의 단순한 일이 갑자기 붉은 사상으로 덮씌워지고, 야당 대통령 후보의 색깔론으로 비화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해방 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을까? 포악한 정권이 색깔의 멍애만 씌워놓으면 언론은 곧바로 좌경프락치니, 내란음모자니 하는 이름표를 달아주고, 세상은 친척조차도 면회를 가지 않았던 저주의 시대!
90년대 말 개명천지에 국회의원이라는 공개된 신분을 가진 내가 명함 한 장 때문에 이렇게 고립된다면, 기나긴 지난 시대 색깔로 인한 수많은 희생자들과 가족들의 답답함이 오죽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죽은 자들의 절절한 한이 허공을 타고 나의 심장에 내리 꽂히는 것처럼 나의 온몸이 전율했었다.
그 일로 나는 김대중 후보에게 더 이상 부담을 줄 수 없어서 스스로 관계를 차단하려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눈물을 펑펑 쏟으며 탈당했다.
그리고는 대선이 끝날 때까지 넉 달 간 산속에 칩거해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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