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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팡 (dooriecl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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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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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05/14
 

월요병은 현대인의 현대병?
월요일만 되면 머리가 찌뿌둥하게 무겁고 몸이 나른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근래 들어 이런 증상을 경험했었다. 예전 한국의 그 전쟁터 같았던 생활에서도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요즈음 와서야 이걸 느끼기 시작한 걸 보니 이것도 그저 상당부분 나이 탓인가보다 했었다.

월요병.. 우린 대개 이것을 현대병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현대생활을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그런 심신병, 흐트러진 생체리듬이 원래의 리듬으로 적응해 가는데 나타나는 신체 현상, 휴식에 대한 미련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한다는 긴장감으로 두통이나 무력감 우울증이 오는 것등이라고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머리만 아프고, 어떤 사람은 팔다리 힘이 없어 피곤해 하고, 어떤 사람은 설사를 하고, 어떤 사람은 하루종일 우울하다. 이렇게 증상의 발현은 제각각이지만 직장인의 80%가 월요병을 호소한다고 한다. % 많이 올랐다. 예전같으면 꾀병이라고 욕먹었을 것인데 세상이 바뀌어 월요병을 얘기해도 되는 분위기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 병의 기전에 대한 설명은 의사들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따라서 치료와 예방도 각양각색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병을 현대병이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원인을 잘 모르거나 복잡한 도시생활자에게 많이 나타나면 그게 현대병이니까.. 직장생활에서의 스트레스, 모자라는 잠, 쌓인 피로, 심적 부담감..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현대병.. 그런데 그게 아니다. 월요병은 현대인의 병이 아니다. 아니 현대인의 병이 아닌 게 아니라, 원래 사람의 병조차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월요병은 말(馬)의 병이다.


월요병은 말(馬)의 병
들에서 뛰어 노는 말에게는 이 병이 없다. 사람들이 기르는 使役馬 들에게서만 나타나는 병이다. 또 가축중에서도 정기적으로 일을 하는 말에게만 발생하는 병이다. 6일동안 일하다가 일요일 푹 쉰 말이 월요일 아침만 되면 근육에 쥐가 나고, 마비, 경련을 일으켜 도통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걸 말한다. Monday Morning Disease 혹은 Tying-up Syndrome 라고 하는데, 의학적 병명은 Azoturia 혹은 Equine Rhabdomyolosis이다.
 
말의 지능이 워낙 높아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월요일이 싫어서 그러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전까지 내가 이런 증상을 못 느꼈었던 것이 설마 말보다도 내가 지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일 리는 없다.

일반적으로 이 월요병은 하루 쉬며 평소와 똑같이 먹은 말에게 ‘근육 증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근육속의 글리코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병을 ‘말의 다당류 저장성 근질환(Equine Polysaccharide Storage Myopath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열심히 일하던 말이 갑자기 하루를 쉬고, 또 그러면서 먹는 것은 평소와 똑같이 혹은 더 먹으니 근육속의 글리코겐 저장이 넘쳐나 생기는 병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 증상이 나타나면 근이완제, 항염제, 진정제, 링거등으로 치료한다고 한다.


인간 월요병의 원인과 예방
단순 노동하는 말에게서 생기는 이 병이 현대인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물론 증상이 똑 같다는 것은 아니다. 원인기전의 흐름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토요일 일요일에 걸쳐 너무 쉬고, 또 그러면서도 평소보다 오히려 더 많이 쳐먹고, 그래서 리듬이 끊겨 생기는 병.. 이렇게 월요병이 말의 그것과 비슷한 거라는 걸 전제로 하면, 인간 월요병 치료의 해답이 나온다. 

월요병은 너무 쉬어서 생기는 병이다. 그래서 치료가 안되는 거였다. 뭘 먹거나 마셔도, 어딜 주물러도, 잠깐 잠을 자도 소용이 없다. 너무 퍼질러 쉬어 리듬이 깨져 생긴 병이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엔 리듬이 잠시 흐트러져도 그런대로 버텼었지만 나이가 들면 리듬이 잠시 흐트러지는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들 중에 긴 해외여행 이후 급작스럽게 죽는 분도 있다. 꺠진 리듬에 몸이 적응을 못했기 때문이다. 명심하자. 월요일날 맥을 못 추는 것은 피곤해서가 아니라 일요일 일할 시간에 잠을 너무 많이 잤거나 너무 쉬었기 때문이라는 것, 주말에 너무 쉬는 건 쉬는 게 아니라 리듬을 망가뜨리는 자해행위라는 걸 명심하자.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번 주말에 직접 테스트 해보면 안다. 잠이 절대적으로 모자란다며 토요일 일요일 죙일 잠을 쳐자고, 영양보충해야 한다며 기름진 음식 이것저것 쳐먹고, 밀린 숙제한다며 과격한 섹스를 하던 것을 한 주간만 중단하고.

이번 주말엔 많이 먹지 말고, 이일 저일 하면서 이틀 내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보자. 특히 일요일날엔 절대 퍼지지 말자. 물론 주중처럼 똑같이 일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루종일 누워서 앉아서 TV만 보지 말고 최소한 몸의 리듬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나가서 열심히 노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다. 그리고 월요일을 맞이해 보자. 월요병이 그래도 있는지.

확실히 없더라.

루게릭병, 46년째 살아있는 호킹박사..

2009.09.19 04:08 | 아메리카 | 요팡

http://kr.blog.yahoo.com/doorieclinic/3944 주소복사

호킹박사
유명한 과학자중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이라는 사람이 있다. 거의 모두가 이 사람을 안다. ‘아 그 사람.. 휠체어타고 있는 과학자’. 이 사람이 유명한 것은 물론 그의 과학적 업적 때문일 것이다. 근데 우리들은 그의 업적을 전혀 모른다. 우주에 관련된 이론 물리학자라니 우리 실생활과는 전혀 관련없는, 아주 골치아픈 분야 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를 안다. 그렇다. 우리가 이 사람을 아는 것은 그가 ‘천재물리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휠체어 위의 이상한 모습의 과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중증 장애인이 천재물리학자? 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의 병이라는 루게릭병이 뭔지 알아본다. 근육은 망가지지만 지적능력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이상한 병, 그래서 과학자를 할 수 있는 거였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다. 루게릭병은 발병후 1~5년 사이에 사망한다고 하는데 호킹박사 근황소식은 벌써 십년도 넘게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루게릭병으로 46년째 살아있다
알면 알수록 이 사람은 희한하다. 그가 유난히 유명할 수밖에 없는 건 그가 ‘일이년밖에 못 산다는 루게릭병에 걸렸으면서 무려 50년 가까이 살아있다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중간에 결혼도 두번이나 했었고 자식들까지 있다. 현재 67세(1942년생)인데 21세때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었다니 무려 46년간 생존해 있는 셈이다. 남들은 짧으면 일년, 길어야 오년을 넘기기 힘들다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46년 동안이나 살아있는 걸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오래 살아있을 수 있었는지는 의사는 물론 그 누구도 모른다. 부자라서 비싼 약을 많이 써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불굴의 의지와 낙천적인 성격으로,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가족들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사실은 루게릭병이 아니어서.. 그러나 아무것도 호킹박사의 생존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생존은 한마디로 ‘기적’이다. 아니 폐암 말기 환자가 자연치료법으로 살았다는 것이 기적이라면, 호킹의 생존은 기적중의 기적, 기적의 할아버지쯤 된다.


그래서 설교의 메뉴
호킹박사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가장 큰 업적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도 호킹이 위대한 까닭은 그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장애를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목사 스님 신부 교수 선생 시인 소설가.. 먹물이 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설교한다. 호킹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고,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우리 모두 본받아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그래, 저런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멀쩡한 나는 저 사람에 비하면..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약간 의아한 부분이 하나 있다. 일어날 확률이 없다시피한 기적의 케이스를 말하며 그걸 사람들에게 본보기 삼으라는 것이 과연 진정한 희망인가?


불가능한 희망은 떄론 무책임할 수 있다
일억불 로또의 주인공이 신문에 나온다. ‘저봐 누군가는 로또에 당첨되게 되어있다. 그게 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래서 그런 광고를 보고 수천만명이 매번 로또를 산다. 주식투자로 수십억 번 사람이 가물에 콩 나듯 소개된다. 그를 강사로 초빙해서 설명회를 열고.. ‘그래 나라고 저 새끼만큼 못할 이유 없지..’ 수천만 개미들은 피 같은 돈을 허망하게 날린다.

헛된 기대때문이다.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확률에 헛된 기대를 가졌다가 돈과 시간과 희망을 날린 것이다. 따라서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걸 기대하게 만드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호킹박사의 기적도 비슷하다. 그렇게 될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그걸 아무 '생각없이' 설교하는 먹물들. 그들이 꼭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호킹박사와 전혀 일반 루게릭병 환자
‘난치병’ 환자는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가 중요하다. 그것으로 삶과 죽음이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불치병’ 환자들이라면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불치병 환자들에게 희망이라는 것.. 이거 참 어려운 문제다. 이건 암과 싸우는 불굴의 의지, 내 신장을 떼어주니 마니하는 문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말하기가 이만 저만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잘못 말했다간 ‘희망을 버리고 빨리 죽어라’ 라고 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건 환자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루게릭병이 무서운 건, 정신은 말짱하지만 육체는 전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호킹은 바로 이 루게릭병 환자다. 발병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을 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그는 바로 죽는다. 한편 호킹은 천재 물리학자다. 아인슈타인을 능가할 정도의 사람이라고도 한다. 중증의 장애인이지만 그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것은 바로 그의 이런 천재성 때문이다.

호킹이 많은 먹물들에 의해 설교에 인용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46년을 연명하기만 했다거나, 그저 천재물리학자이기만 했다면 그는 설교에 인용되지 않았을 거다. 루게릭병에 걸렸으면서도 46년이나 살면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가 인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확률은.. 거의 제로다.

절대 다수의 루게릭 환자들은 소리소문도 없이 발병해서 이삼년 앓다가 스러진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생각보다는 많다고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관심 밖이다. 때로는 호킹에 대한 관심과 호킹에 대한 언급이 그들에겐 역겨운 일일 수 있다.


루게릭병 환자의 가족
몸을 못 가누는 환자의 병수발을 직접 해본 사람은 잘 안다. 환자의 가족이 얼마나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지를, 환자의 병수발 문제로 얼마나 쉽게 인간성이 파괴될 수 있고 가족이 깨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따르는지를.

영화의 내용은 모르지만 한 영화포스터를 보면 루게릭환자가 누워있고 아내인 듯한 여자가 옆에 같이 누워있는 게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루게릭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가슴 찡한 모습이다. 근데.. 저 아내는 몇 년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편의 병수발을 '사랑으로' 하는 것은 아무리 길어야 일이년이다. 그 이상은 '사랑으로'가 아니라 '불쌍해서'를 지나 '책임감으로' 혹은 '남의 눈으로'다. 이건 성모마리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럴 때 '하필' 사람들은 스티븐 호킹을 얘기한다. 기적은 언제나 있는 법이라고. 힘내라고. 하지만 힘든 아내에게 이 말이 과연 도움이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그녀는 지옥굴로 떠밀리는 심정이 될 것이다.


루게릭 환자가족에게 호킹의 기적은 아이러니
설사 기적이 일어난다 하더래도 그건 ‘연명’일뿐 ‘회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지 정상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게릭병은 회복은 없이 살아있는 내내 증상이 점점 악화되는 병이다. 이런데도 주변에서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를 해주는 것은.. 그 아내를 벼랑끝으로 몰아 그 아내를 죽이는 짓일 수도 있다. 도대체 무슨 희망을 가지라는 것인가? 평생 이 병수발을 하고 살라는 말이든가?

흔히 환자의 가족에게 우리들이 하는 말.. 나을 수 있을 거라고, 힘을 잃지 말라고.. 기도의 힘으로 오년을 넘게 살 수도 있다. 십년을 살 수도 있고 호킹처럼 46년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의 고통도 그만큼 이어진다.

그래서 기도를 하려해도 뭐라고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낫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오래살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은 사람을 위해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의사의 오진이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숨을 쉴 공간을
때가 되면 루게릭 환자의 가족이 숨을 쉴 공간을 줘야 한다. 진심으로 환자를 위해 같이 슬퍼하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준비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내가 '사랑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지나면.. 그 슬픈 시간이 오면.. 그녀가 숨을 쉴 공간을 줘야 한다. 설사 본인이 주저하더라도 숨을 쉬도록 우리가 만들어줘야 한다. 환자 본인과 그녀를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

물론 가슴 아픈 일이다. 환자 본인의 심정을 헤아리면 도저히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된다. 세상에 기댈 곳이라고는 오로지 아내밖에는 없는데, 그리고 내 마지막도 그리 먼것 같지 않은데, 지친 아내가 숨쉴 곳을 찾아 곁을 지키지 않는다면.. 정신이 멀쩡한 환자의 입장에서는 진단의 순간보다 더 큰 절망의 순간이 될 것이다. 죽음보다 더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쓸쓸히 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본인이 차마 하기 힘들다. 주변에서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당사자들의 이별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게 해주고, 계속 살아야 할 사람의 삶을 지켜주는 일이다.

그녀의 남편이 어려운 병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이제 겨우 오십대 초반. 청천벽력과 같은 그 소식에도 남편은 오늘 정상적으로 출근 했다고 한다.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거다.

... 가슴이 먹먹해졌다.


① 부정(Denial)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단을 잘못 내렸다는 생각에서 여러 의사와 병원을 찾아 다니게 된다.

② 분노(Anger)
사랑하는 사람과 의료진, 급기야 신에게까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 단계가 주변 사람들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이 된다.

③ 타협(Bargaining)
분노와 격정의 단계가 지나고 초연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착실하게 행동하고 헌신함으로써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보상은 생명 연장이나 통증없는 삶 같은 것들이다. 사후 장기기증이나 시신기증을 하기도 한다.

④ 우울(Depression)
증상이 뚜렷해지고 몸이 현저하게 쇠약해지면 환자는 극도의 상실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환자는 아주 조용해 지고 울기도 한다.

⑤ 수용(Acceptance)
고통이 지나가고 몸부림이 끝나면 감정의 공백기를 가진다. 비록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길을 떠나기 전 마지막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곤 떠난다.


어쩌면 그녀의 남편도 이 다섯 단계를 곧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도 그 못지않게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홀로 남겨질 지도 모른다. 

깜깜하고 막막한 터널 앞에 섰다.
부디.. 꿋꿋이 이겨 내길 기원한다.

그리고.. '기적'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1. 단골이던(돈 없는 날은 소주를 마셔도 되고, 밴드 대신 통기타를 치고 놀아도 되고, 아가씨들이 팁 없이 자발적으로 들어와 놀 정도로) 종로의 한 룸살롱에서 친구들끼리 모여 노는데.. 친구 한 명이 일이 있다며 먼저 일어섰다. 자기 계산 몫을 주면서 그 친구가 이랬다. ‘니네 아직도 이런 데가 재밌냐? 띠바 철 좀 들어라 철 좀’ 의외의 일격에 약간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했다. ‘넌 이런 데가 재미없냐? 니가 이상한 새끼지. 애늙은이 띠바넘아’ 당시 우린 이십대 후반 총각들이었다.

2. 칠팔년전 테니스를 열심히 치던 무렵 한 남자에게 테니스를 권했었는데 그 사람의 대답, ‘이 나이에 테니스를 하는 건 좀 방정맞아 보이지 않을까요? 공 따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띠바 그럼 우린 뭐야? 대학때엔 자기도 테니스를 쳤었지만 이젠 나이가 들었으니 테니스는 좀 그렇단다. 당시 그 남자의 나이는 40대 중반이었다.

3. 얼마전, 오랜만에 동창 모임에 나갔다 온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아직도 철이 안 들었어 들’ 옛날 얘기로 낄낄대는 친구들이 철 없어 보였단다. 그들의 나이 40대 후반이었다.

4. 가끔 블로그 댓글에 ‘이 개 %%$#^%&꺄. 보아하니 낫살 좀 쳐먹은 새끼 같은데, 븅신아 철 좀 들어라’ 같은 게 있다. 분명 새파란 것들일텐데.. 지우면서 나도 욕 한마디 꼭 한다.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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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잇값
‘나이깝 쫌 해라.. 철 좀 들어라..’ 대부분 친한 사이끼리 농담이겠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사실은 조롱의 뉘앙스다. 농담인줄 알고 들어도 기분 나쁘다. ‘나잇값을 하라’는 말은 아마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청년은 청년답게 발랄하고, 중년은 중년답게 중후하고.. 뭐 이런 거. 맞는 말이다. 매사에 ‘나이에 맞게 사는 것’이 보기에 좋다. 젊은 것이 너무 무겁거나, 늙은 것이 너무 가벼우면 보기에 안 좋은 건 맞다.

하지만 나잇값이나 철은 턱 봐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다.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지켜봐야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면 속으로부터 우러나온다는 ‘나잇값, 철’이란 게 과연 뭘까? 나잇값이란 원래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지혜’ 혹은 ‘그 또래에게 암묵적으로 부여된 기대’라는 좋은 의미이다. 또 ‘철’은 계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철이 든다’라는 말은 계절의 변화를 알아 봄철이 되면 봄에 맞게, 여름철이 되면 여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 다 분명히 좋은 의미, 한마디로 지혜롭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어 갊에 따른 지혜.. 듣기만 해도 향기롭다.


나쁜 나잇값
그러나 ‘나잇값’이나 ‘철’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경우에 따라선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에게 ‘이제 나잇값 좀 해라’ 라고 하는 것은 딴 게 아니라 이제 그만 ‘불의와 타협할 줄도 알라’는 의미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맞는 말이기도 하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사회구조상 사람은 반드시 철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밥 먹고 산다. 하지만 이 나잇값은 그리 향기롭지는 않고 오히려 씁쓸하다. 하지만 이것도 나잇값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건 나잇값이 아니다. 그냥 더럽고 부끄러운 때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 철 들라고 하는 것은 ‘이리와서 같이 더럽게 살자’라는 말밖에는 아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아무리 깨끗하던 사람도 때가 끼이게 마련이며 상당부분 불가항력이긴 하다. 그래서 대부분 서로 암묵적으로 이해해 주면서 살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자랑스러운 건 결코 아니다.


나잇값과 철의 본질
나잇값과 철의 본질은 대략 네가지다. ①경험으로 쌓인 지혜, ②노화에 따른 자연스런 행동양식의 변화 ③불의와 적당히 타협하기, ④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내가 억지로 만든 삶의 패턴이다. ①과 ②가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긍정적인 나잇값이고, ③과 ④는 세월에 지쳐 가식으로 휘감은 부정적인 나잇값이다.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우리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저절로 갖게 되는 것은 서로 같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큰 편차는 있다. 좋은 나잇값은 없이 나쁜의 나잇값만 넘치며 호의호식하며 산다든가, 좋은 나잇값은 넘쳐나지만 나쁜 나잇값이 없어서 힘들게 산다든가. 아니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렇고 그렇게 평범하게 산다든가.

자기 나잇값의 어디까지가 지혜이고 어디부터가 굴종인지는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자기 나잇값 못하는 건 모르고 남 철없다 욕하고, 때묻고 되바라진 자기를 철든 거라고 착각하기만 한다. 내가 젊은 감성을 누르고 불의와 타협하는 건 나잇값 하는 거고, 남이 그러면 돈에 굴복하고 똥가오잡는 늙은 속물이다. 내가 감성을 살리며 양심을 부르짖으면 젊은 정의의 사도이지만 남이 하면 철이 없는 거다. 다른 사람의 좋은 나잇값은 보지 못하고, 내 나쁜 나잇값은 못 본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다.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산다.


안 해도 되는 나쁜 나잇값
‘불의와 타협하기’. 아무리 정의의 사도였다 할지라도 부양가족이 생기면 이게 불가항력일 경우가 많다. 크든 적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건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남의 눈 의식해서 내가 치장한 나잇값, 이건 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자. 몸에 기운이 없어서 발랄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선 남의 눈 때문에 발랄할 수가 없다는 거, 그래서 ‘쟨 아직도 저리 철이 없니? vs 쟨 벌써 완전히 할머니야’가 되는 거 바로 이거다. 대표적인 게 옷차림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당연히 나이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하는 걸로 안다. 그래서 젊은 시절 입던 옷이나 유행하는 멋진 옷들을 외면하고 이모 삼촌, 부장님 이사님이 입던 옷들을 자기도 입는다. 설사 입고 싶은 젊은 옷이 있어도 못 입는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책 잡히고 나잇값 못하는 주책푼수로 여겨질까봐서이다. 그래서 멀리서 옷차림만 봐도 그 사람의 나이가 짐작된다. 나 아저씨 나 아줌마..광고를 하면서 옷을 입으니까.

그러나 이거 큰 착각이다. 옷이란 자리에 따라 맞춰 입는 거지, 나이에 따라 맞춰 입는 게 아니다. 정장을 포멀하게 맞춰 입어야 하는 자리엔 그렇게 입고, 그렇지 않은 자리엔 자기 입고 싶은대로 맘대로 입으면 된다. 체형이 허락하는 한 젊게 입어야 한다. 그러나 중년의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아저씨 아줌마로 옷을 입는다. 룰을 깬 또래를 보면 ‘저 미친년 주책이야’ 흉을 본다.

대화의 주제에서도 그렇다. 친구들끼리 만났는데도 수십년전 얘기로 낄낄대거나, 연예인이나 드라마 얘길 한다거나, 재밌게 놀면서 살 궁리 얘길 하거나, 사회의 변혁에 대한 얘기를 하면.. 이걸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 나이엔 우아하게 건강얘기, 가족 얘기, 사업 얘기, 돈과 부동산 얘기, 종교얘기 같은 걸 해야 하며, 세상의 비리 같은 건 이제 모른 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천만의 말씀이다. 대화의 주제도 자리에 따라 정해지는 거지, 나이에 따라 정해지는 게 아니다. 친구들끼리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그날 그날의 관심사에 따라 옛날 연애 이야기, 옛날 친구 이야기, 섹스 이야기,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아주 당연하다.


필요한 진짜 나잇값
물론 일반적으로 얘기해서 나이게 맞게 살아야 하는 건 맞다. 40대에 힙합에 빠지거나, 50대에 레게머리를 하거나, 60대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미친듯이 연애에 빠지는 건 분명히 보통사람들의 정서와는 멀다. 저년 미친년 아냐?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이에 맞게 옷을 입고, 나이에 맞게 대화주제를 잡고, 나이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건 ‘나잇값’이나 ‘철’을 잘못 이해한 바보다. 그건 나를 숨기고 억누르고 위장하는 거지 나잇값이 아니다.

속에서부터 우러나와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깊은 지혜와 단아함, 바름과 질서, 위트와 유머.. 이런 것들이 진정한 나잇값이며 철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 없다면, 아무리 멋지게 차려 입고 말투가 고매한 신사 숙녀라도 진정한 나잇값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것을 가졌다면.. 레게머리를 한 50대 남자에게서도 아름다운 나잇값을 느낄 수 있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연애에 빠진 60대 여자에게서도 아름다운 나잇값을 느낄 수 있다.


나잇값 할까 말까
40대쯤 된 사람들은 아예 섹스를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뭘 몰랐던 탓도 크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시 40대들의 모습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은 ‘남자’나 ‘여자’ 성별을 구분할 필요조차 없는 그냥 아저씨 아줌마, 감성이라고는 도무지 있어 보이질 않던 삭막한 중년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가슴 떨린 사랑타령을 하다면 그건 나잇값 못하는 짓이라고 여겼었다.

근데 내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40대들은 여전히 여자 남자, 아니 어찌 보면 어렸던 시절보다 감성적으로 훨씬 더 풍부한 여자 남자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앞선 세대들에게 함부로 편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겪어보니 나이가 든다고 철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스무살에 철없던 놈은 나이 오십이 되어도 여전히 철이 없었다.

50대에 연애에 빠지고, 60대에 섹스에 열정적인 사람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나이 때문에 생각이나 행동이나 옷차림에 ‘우리나이엔 이래야 한다’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기로 했다. 40대에도 하늘을 날고, 50대에도 딴따라이기로 했다. 다만 좋은 나잇값은 많이 하기로 했다.

분명하다. 좀 가벼워 보이는 겉모습이라도 지혜가 있어 좋은 나잇값을 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중후해 보여도 나쁜 나잇값만 하는 사람은..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더라는 거.

가을엔 따뜻한 생각만 하고 살랍니다

2009.09.15 02:54 | 아메리카 | 요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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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일요일이라 늦잠을 좀 자고, 일어나 반 바지를 입었다가 바로 긴 바지로 갈아입었다. ‘쌀쌀하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올 들어 처음이다. 고장난 에어컨 걱정이 순식간에 히터 걱정으로 바뀐다. '저거 빨리 갈라고 해야겠다..' 이렇게 9월중순이 되어서야 계절이 바뀌었음을 몸으로 알았다. 두달째 끊겨있는 TV 덕이다.

첨엔 답답해서 죽겠더니 시간이 좀 지나니까 토요일 일요일이 굉장히 길어져서 참 좋다. 주말의 이틀이 이렇게 긴 시간인줄 새삼 알았다. 부지런히 뭔가를 한동안 했는데도 아직 점심 전이고, 부지런히 일을 했는데도 아직 해가 중천이다. 덕분에 햇볕도 많이 쬐고 몸도 많이 움직이니 몸뚱아리에 좋겠다. TV가 다시 연결되어도, 주말엔 중요한 풋볼경기만 딱 보고 다른 건 아예 보지말아야겠다. TV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시간이 풍성하니 말이다.

가을입니다.
코스모스의 계절입니다. 


'친구'만큼이나 '적'도 생기는 민감한 얘기들은 안할랍니다. 가끔 야후가 제 그런 글을 홈페이지로 퍼가서 사람을 고달프게 하네요.. 심한 욕이라는 핑계로 나쁜 댓글을 골라서 지우는 거 사실 불공평하고 치사하다는 생각도 들고.. 띠바.

그런 얘길 아예 안해야 됩니다.
가을엔 따뜻한 생각만 하고 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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