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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멋진 새 韓國
A Brave New Korea
필자 약력:
1936년 서울 出生
1961년 서울文理大 哲學科 졸
1962 1971년 東亞日報 기자
1971년 美國이주
집필활동
번역·통역
저서:
'조국이여 하늘이여'
<1988년 간행>
'아, 멋진 새한국(A Brave New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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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엮으면서
지금 고국에선 '조국의 선진화!' 구호가 한창 요란하다, 이에 발 맞춰, 또한 사람들의 '잘 살아보자!' 는 욕구가 한층 드높다.
그런데 과연 '선진화'란 무엇이며, 또 사람이 '잘산다' 는 것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또 "선진화=잘 사는 것" 공식이 곧장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
민주주의+시장경제=곧 '선진화', 그 목표만 해도 그렇다. 서구에서 오랜 동안에 걸쳐 밑바닥 기초부터 다져지면서 이룩된 정치·경제 체제, 그런데 우리는 그만한 infrastructure 마련도 없이 바쁘게 그것을 시행하려다 보니 수 없는 시행 착오와 혼란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한다면서 정치가 '법치' 아닌 '인치'로 흐르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하면서 관료 자본주의 내지 통제 경제 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된 풀뿌리 민주주의, 페어 플레이 시장 경제 체제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인가?
책제목 '아, 멋진 새 한국!' 은 두 가지 뜻을 함축한다. 우선은, 우리의 조국이 하루 빨리 '선진국'이 되기를 바라는 열렬한 염원이다. 그 무엇을 해보려는 사람들의 불같은 열의와 의욕, 이를 한데 결집할 수 있는 올바른 리드(lead)만 있다면 제2, 제3의 '한강의 기적'도 불가능하지 만은 않겠다는 생각이다.
'아, 멋진 새 한국!' 의 그 다음 함의(含意)는 '선진' 구호가 그렇게 요란하면서 정작 그 실체(實 )가 선명치 않은데서 오는 안타까움이다. 어디를 향한 '선진'이며, 어떤 컨텐츠(contents)의 '선진'이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선진'인가? 그리고 또 그 '선진'이 사람들의 열화 같은 '잘 살아 보자!' 는 염원과 어떻게 연계(連繫)되는가?
그리해서 '아, 멋진 새 한국!' 제호에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곳곳에서 느끼는 "아니, 이것이 아닌데-" "아니, 이래선 안 되는 데" 하는 거부감과 안타까움이 짙게 깔려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의 한 나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 오랜기간 살면서 '그 시각'으로 한국의 제반 사태를 바라다 본 글들, '현장 체험'이 결여된 만치, 그 대신 나무 하나가 아닌 숲 전체를 보려 부단히 애를 쓴 글 들, '조국의 선진화'를 앞당길 수 있는 infrastructure를 구축하는데, 그리고 사람들의 '잘 살아보자!'는 염원을 이룩하는데, 어떤 암시(hint)라도 던질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1년 7월 4일
Hudson 강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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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정치·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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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대통령'의 멘탈리티 11
Oh, '주(株) 한국' 15
'고통분담'과 사회정의 19
빚준 상전·빚진 죄인 22
"낙하산 인사"를 막는 한 방법 25
'인수위' 너무 시끄럽다 28
경제위기와 재벌들 32
민주주의가 부끄럽다 35
후보들… 하나님의 검증 39
정치자금의 東과 西 42
민주화 엇가는 언어들 45
누구 돈 갖고 그렇게 노나 48
原罪人들의 청문회 51
부패공화국의 잇단 '빅뱅' 54
민심·천심·김심(들) 57
근로자들 왜 그럴까? 60
사정의 칼… 성역 있다 63
부정부패 뿌리 뽑는 길 66
대통령과 골프와 정치 71
데모학생 누가 키웠나 74
새내기 의원들에 보낸다 77
간디의 '노력 없는 富' 80
간디의 '原則없는 정치인' 82
'國民'이라는 말 84
Select와 Elect 86
이제 민초가 나설 때다 88
재벌과 '5공 비리' 92
땅은 '萬人의 것'이어야 (상) 97
땅은 '만인의 것'이어야 (하) 101
더불어 사는 사회 104
기막힌 이야기 세 가지 110
재벌과 재산상속 114
'지역감정'이라는 망령 117
멋있는 裁判 121
민주를 익힌 사람들 123
'메모쪽지'가 하는 재판 125
제 2 부: 사회·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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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 지식인' 129
정신적 공황이 더 두렵다 131
가치관도 구조 조정을… 135
자살하고 싶다…22% 138
'권력의 아들' '금력의 아들' 141
뇌물학 1장… 돈을 묶으라 144
어떤 통계가 주는 충격 147
'똑똑한 민족'이라는데… 150
법으로 막는 미풍양속 153
호화·사치의 이중 잣대 156
'정신적 정조'도 이혼사유? 159
이제 '촌티'를 좀 벗자 162
미운 정·고운 정 165
호화·사치를 보는 눈 168
'황제의 음식' '지옥의 음식' 171
'惡한 取錢' '善한 用錢' 174
知性의 순기능·역기능 177
"아무 생각도 없다" 181
사랑은 간데 없고… 184
낮은 소득도 서러운데… 186
'지옥 車' '지옥 鐵' 188
서울 단상(斷想) 190
네 자매 음독자살기도 195
우뚝 선 큰 씨울 199
퍼블릭 골프장 만들라 203
세 가지 웃기는 이야기 207
제 3 부 분단·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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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과 恨에 불꽃을 211
38선 누가 지키고 있나… 214
황장엽과 인본주의 217
'자본주의 하는 날' 220
황장엽 비서에게 띄우는 글 223
Wait to help? Go to help? 226
오, 탈북(脫北) 230
"북한 주민도 한국 국민" 233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236
분단국 젊은이들의 비극 239
"참 이상한 일이다" 242
홍수가 쓸어버린 철조망 245
"우리 나라 좋은 나라" 248
'林양 사법처리' 안 된다 251
'새 잣대'를 창출하자 256
판문점을 활짝 열라 260
통일은 왜 안되나 263
제 4 부 동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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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 정치인과 동포 사회 268
이민자의 신분상승 욕구 272
한국 대선과 동포가 할 일 275
시시한 이야기 세 가지 278
좀 더 알고 덤비자 282
고국 TV 드라마의 공해 285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288
'돈포' 'X포' '미국 거지들' 291
福…3代 평균론 294
Professional과 Layman 296
무안삼제(無顔三題) 298
'天國서울' '地獄뉴욕' 300
Downsizing 생활 302
현대판 '타향살이' 304
행복의 으뜸 조건? 306
이민… 상대적 빈곤감 308
美판사 '한국인 뇌물' 公認 312
서울의 K형에게 314
한국계 은행에 바란다 318
나그네의 자화상 323
어느 '이민 50대'의 독백 327
이민자의 五福타령 332
제 5 부 言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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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 거듭나야 한다 337
북한 보도에 이상 있다 340
무릎꿇은 言論社主 343
가상…신문發行人 청문회 347
제 6 부 '詩 아닌 詩'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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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괴 나와라, 뚝딱! 353
토끼 허리에 지뢰 100만 개 357
KAL 참사… 죽음 앞에서 361
두 '큰 죽음'의 엘레지 365
선거 別曲 368
제 7 부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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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正義… 그 理想과 現實 371
미국 家庭 어디로 가나 386
原子爐 과연 안전한가 406
X X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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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부: 정치/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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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대통령'의 멘탈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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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여 만에 고국을 방문, 체류 중 때마침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TV 방영이 있어 큰 관심을 갖고 유심히 '듣고 보았다'.
2시간 TV를 지켜보고, 다음날 활자 매체를 통해 다시 읽고, 이를 나름대로 분석해 보고… 결론은 한 마디로, 이 나라가 아직도 '법치의 나라'가 아닌 '인치의 나라' 라는 생각을 현장에서 더욱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됐을 뿐이었다.
'국민과의 대화' '어떤 내용'이 '어떻게 해서 ' 그렇게도 '법치'아닌 '인치의 나라' 라는 생각을 더욱 절감케 했는가?
대통령이 이번에 언급한 경제 교육 언론 의약분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그 대화 내용은 엄밀히 따져 거의가 3권 분립의 민주 국가에서는 결코 대통령의 소관 사항이 아니다. 따라서 행정수반이 이에 간여·개입할 대상이 못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곧 대통령의 권한을 한참 벗어나는 일종의 전횡(專橫)내지 월권(越權)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이 같은 전횡·월권 행위가 이번 '국민과의 대화' 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 구체적인 사례(증명)를 몇 가지 인용해 본다.
△"××법 ○○법 '반드시 통과'시키겠다."―
3권 분립 민주국가에서 입법권은 입법부 곧 국회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행정부 수반이 입법부 소관인 '법안 마련'여부에 대해 "반드시 (꼭) 통과시키겠다." 운운할 수가 있는가?
대통령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 용훼'가 아닌가? "반드시 통과"가 아니라 "통과토록 노력(또는 추진)" 하겠다고 말했어야 옳았다.
△"모든 언론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조사하지 않는가"―
신문·방송사의 기업경영에 대한 세무조사, 그 주체는 국세청, 그 피 조사 대상은 언론사 (들), 어디까지나 양 자 간에 징세 권리와 납세 의무의 관계다. 그런데 왜? 대통령이 나서서 "우린 '그런 식'으론 (조사) 안 한다"느니, 그래서 "우린 '이런 식'으로 한다" 느니 한 낱 세정 업무에 그렇게 간여를 하는가?
월권 행위가 아닌가?
△"언론사 기능이 위축되는 부작용 없도록 세무당국에 '철저히'전하겠다."―
세무조사로 인해 언론인들 기가 위축된다면 -그런 일도 없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일, 세정 당국이 아랑곳 할 바가 아니다. 탈세했으면 더 내고, 안 했으면 내고 말고 할 것도 없고…
너무나 simple한 관계, 그런데 대통령이 나서 "세무 당국에 '철저히' 전( )하겠다"니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의 '한 말씀'이 '법에 우선' 하는 나라 라는 외국 언론들의 평을 수 없이 들어오고 있는 터에…
△"의약 분업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 반드시 만들어 낼 것이다."―
어떠한 법(률)도 대통령 자신 '나의 생각'에 따라 법이 만들어 질 수도 있고, 안 만들어 질 수도 있다는 mentality의 발상이 아닌가?
"짐이 곧 법" 제왕적 군주 시대도 아닌데…
△"공공요금 올리지 않겠다."―
공공요금 산정·책정은 그 해당 기관이 연구·검토, 경제 원리에 따라 그 인상 여부가 결정되어 지는 것, 그런데 대통령이 그 타당성·불가피성 등 경제원리는 무시한 채 '정치 선심'을 위해 "안 올리겠다"고 호언 장담을 하니 이것이 '경제 논리'를 '정치 논리'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김우중씨 사법처리 '적당히'하지 않을 것이다."-
'사법처리', 글자 그대로 사법부 소관이자 사법부 영역. 그런데 소추권·징벌권을 가진 판검사도 아닌 대통령이 무슨 자격·무슨 권한으로 "사법 처리 적당히…"운운 할 수가 있는가?
입법부는 '거수기', 사법부는 '심부름꾼'이던 권위주의 시대도 아닌데…
△"미국 경기가 좋아지면 우리나라 경기도 좋아질 것이다"―
아무리 미국 경제에 목을 매고 있는 우리이지만 그래도 국리민복의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너무나 안이한 경제 인식, 너무나 무책임한 '국민과의 대화'가 아닌가?
△"법을 '안 지키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이 무슨 해괴한 어법인가? '국법준수'를 서약한 대통령이 상황에 따라 법을 지킬 수도, 안 지킬 수도 있다는 말인가?
'세무조사 결과' 공포 문제는 어디까지나 세정 당국과 언론사간에 문제, 국세청이 '공익을 위해' 발표하려면 하고, 또한 언론 역시 '공익이 최우선' 한다니 그 '결과'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캐내어 보도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안하고…
그런데 왜? 대통령이 나서 사람들의 법의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알쏭달쏭'한 어휘를 늘어놓는가?
민중을 너무나 우롱하는 언사가 아닌가?
<2001. 3. 13. 『東亞日報』>
X X
Oh, '주(株)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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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식회사'
애초에 어떻게 세워졌으며, 그 동안 어떻게 경영되어 왔으며, 또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우리에게는 도대체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없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일제 수탈, 6·25의 폐허, 빈약한 부존자원, 있는 것이라곤 오직 노동력과 "가난을 면해 보자!"는 한 맺힘이 있을 뿐이었다.
5∼60년대, 아직도 세계 무역환경이 어수룩하던 때 "수출만이 살길이다." 구호 아래 노동집약적인 일차 산 품을 싸구려 수출, 겨우 겨우 의식주를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조금씩 축적되는 자본으로 생산시설을 늘리고 사회간접 시설을 확충해 나갔다.
7∼80년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조금 씩 생기자 '주(株) 한국' 사람들 특유의 기업가적 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남의 돈은 공짜" "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는 가난근성, 아무 돈이고 무슨 돈이고 개의치 않고 마구 끌어다 썼다. 그리고 빚은 빚으로 갚아 나가면서 그 빚돈으로 재벌은 문어발 식 경영확장을 했고, 정부는 정부대로 거기서 거둬 지는 세수(稅收)로 각종 공공 프로젝트를 집행해 나갔다.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었다.
90년대, 엄청나게 불어난 빚돈이 돌고 돌면서 창업(創業)과 고용을 창출, 사람 사는 것이 풍성 풍성해 졌다.
'가난의 한(恨)'을 풀기라도 하듯 개인은 개인대로 호화 사치를 일삼았고 정부는 정부대로 외국 유수 대학에 몇 백만 달러씩 시혜(施惠)를 베푸는 등의 허장성세를 부렸다.
97년 말, 2∼30년에 걸쳐 눈덩이처럼 불어난 외국 빚, 정부·재계의 무계획으로 그 상환 일이 한꺼번에 폭주했다. 빚 얻어 빚 틀어막던 전략도 한계에 부딪쳤다.
'주(株) 한국'의 경제 실력에 비해 너무나 엄청난 빚, 빚쟁이(외국 채권자)들이 "더 이상 물릴 수 없다"고 나자빠졌다. 드디어 IMF·7국들이 자기네 나라 채권자 보호를 위해 할 수 없이 '주(株) 한국' 문제를 다루기에 이르렀다. 일컬어 'IMF시대'를 맞은 '주(株) 한국'의 오늘날 상황이다.
그러면 이제 '주(株)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주(株) 한국'의 빚 (총 외채)이 얼마나 되나 보자. 정부·IMF 공동 발표에 따르면 97년 11월 말 현재 미·일·영·독 등 세계 1백여 금융기관에서 빌어다 쓴 장·단기 총 대외부채가 자그마치 1천 5백 69억 달러에 이른다. 환율 1,500대 1로 계산해도 한화 2백 35조 3천 5백억 여 원, 우리나라 국가예산(98년도 약 72조) 3년 치를 훨씬 상회한다. 이를 인구 4천 5백54만 여 명 (96년 말 현재)으로 나누면 1인당 부담액이 약 5백 20만원, 3천 5백 여 달러 꼴이 된다.
빚 1천 5백 69억 달러, 그 이자 만도 1년에 1백억 달러 씩 물어야 하는데 4년 치 이자 4백억 달러면 요즘 시세로 우리나라 상장 기업들을 몽땅 살수 있다(ㅈ 일보 보도)고 하니 이 얼마나 가공할 숫자인가?
그런데 지금 '주(株) 한국'은 이 천문학적 규모의 빚을 줄이는 일은 감히 엄두도 못 내고 만기 도래한 빚을 갚기 위해 또 다시 새 빚을 얻는 일(신규 차관), 또는 빚 갚는 날짜를 연기하는 일(상환연기)에 급급한 형편이니 그러면 1천 5백 69억 달러 빚은 언제 어떻게 갚을 것인가?
애초에 빚으로 세워지고 그 동안 빚으로 경영되어 온 '주(株) 한국', 이제 그 빚쟁이들(외국 채권자)이 자기네들 빚을 받아내기 위해 '주(株) 한국' 경영에 직접 참여하려 하고, 또 우리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시장)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외국 자본 끌어들이기에 안간힘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 되었는데 앞으로 거대한 외국 자본이 적대적이든 우호적이든 '주(株) 한국'의 기업들을 하나 둘씩 인수·합병하게 된다면-불가피한 수순 아닌가?-과연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가?
이에 대해 한 동포는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지금보다 나아지리라고 봅니다. 우선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부패가 사라질 테니까요. 그리고 기업들은 합리적으로 서구식 경영을 할 테니 근로자 복지도 향상될 테고…또 그들이 버는 만치 세금으로 환수하면 되고…."
문제는 이를 매판자본이니, 경제예속이니 하는 등 우리의 고루한 민족 감정인데, 세계경제 질서가 하나의 마켓팅이 되어가고 국경의 개념이 없어지는 오늘날 민족자본이 없는 우리로서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선택 아닌가?
<98. 1. 9. 『미주朝鮮』>
X X
'고통 분담'과 사회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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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몸이 아플 때, 내가 정신적으로 괴로울 때, 그 누가 내 아픔·내 괴로움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IMF 경제위기를 맞은 고국에선 요즘 '고통분담'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어려워지는 경제사정, 사람들 모두가 이미 큰 고통을 받고 있는 터에 새삼 무슨 고통을 누가 누구와 같이 나누자는 것인가?
물론 '고통분담'이라는 이 말은 지금 나라가 처한 어려움을 민중 모두가 힘을 모아 함께 극복해 나가자는 뜻인 줄 아는데,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고통'을 민중 모두가 같이 나누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그 사회가 진실로 정의롭고 공평하고 그리해서 어떤 일에 있어서나 국민 모두가 동고동락할 수 있는 공동체(Gemeinschaft) 라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를 이같이 정의로운 사회·공평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고통을 더불어 나누자!"는 말은 일종의 사회정의의 호소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감된다"는 이웃사랑 정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회정의의 기틀이 무엇인가?
'최대다수의 최대복지를 도모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소수의 사용자 對 다수의 근로자, 지금 큰 진통을 겪고 있는 정리해고(제) 같은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자명하지 않은가?
진정 전 민중의 '고통'을 '분담' 하려면 '가진 것'에 비례해 그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 즉 많이 가진 사람은 그 가진 만큼 더 많은 몫의 고통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또 그 고통을 나누는 순위도 있는 사람·가진 사람들부터 먼저 고통을 받도록 그 순서가 매겨져야 한다. 이 점에서 근로자들의 "경영자부터 뼈를 깎는 아픔을 먼저 보여라!"는 요구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使)·정(政)은 노(勞)측에게 말한다.
"고통분담 차원에서 정리해고(제)를 수용하라"고.
돈 있는 사람들·권력 가진 사람들에겐 그저 하기 쉬운 이 말 한 마디, '해고' 라는 말이 그날그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근로자들에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곧 자신과 가족들의 밥줄이 끊기는 사망 선고에 가까운 절망을 안겨 주는 말이 아닌가?
비단 노·사 문제에만 국한 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참으로 무서운 말이 들린다. "전체가 살려고 하면 모두가 죽는다. 30%가 죽고 70%가 살아난 다음 다시 그 70%가 30%를 살려내는 길 밖에 없다" (김 당선자 측 말)
다른 묘책이 없는 극한 상황,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면 그 30%는 마땅히 한국의 가진 사람들·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고통' 보다는 '소수의 고통'이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진정한 '고통분담' 이기 때문이다.
'고통분담'이라는 명분 아래 당장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근로자들은 재벌들의 개인 재산 국고 환수를 요구한다. "민주·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정(政)·사(使)는 물론 일축한다. 그러나 진정 사회정의에 입각한 '고통분담' 이라면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그들이 그 재산을 어떻게 축적했는가?
정경유착 등 사회가 온통 부정부패로 돌아가던 시절, 회사·기업은 빚더미로 만들면서 갖은 편법과 변칙으로 빼돌린 개인(명의)의 부·개인(명의)의 재산이라면 그 부정한 돈·그 부패한 재산에 대해서는 '고통분담' 아닌 '고통전담'을 짐 지워야 한다. 그들의 그 돈·그 재산 축적을 가능케 했던 그 회사·그 기업의 빚을 갚기 위해 지금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고통'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98. 1. 17. 『미주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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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준 상전·빚진 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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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죄인--봐주십쇼. 도저히 빚 갚을 형편이 못됩니다. 날짜를 늦춰주셔야 하겠습니다.
빚준 상전--무슨 소리, 안되겠네. 한 두 번도 아니고… 이번엔 제때에 갚아야하네.
빚진 죄인--갚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갚습니까? 하는 수 없습니다. 모라토리엄(채무지불 거부)을 선언하는 수밖에…
빚준 상전--(떼 먹히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받아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 날짜를 늦춰 주겠네. 대신 이자를 훨씬 더 물어야 하네.
빚진 죄인--(물불을 가릴 여유가 없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구제 (구제금융이라고 하지 않는가) 해 주셔서…
빚준 상전--이자 올리는 것만으로는 안되겠네. (한국)정부가 보증을 서야겠네.
빚진 죄인-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 개인이 진 빚을 정부가 대신 갚아주는 나라이니)
빚준 상전--그 많은 빚 (1천 5백 40억 달러)을 도대체 어디에 썼단 말인가? 그 동안 근로자들은 땀 흘리며 열심히 일을 했는데....
빚진 죄인--우리도 모르겠습니다. (빚) 돈 들어온 건 분명한데 나간 데는 오리무중이니…
빚준 상전--안 되겠네. 남의 돈(빚돈)을 그렇게 관리해서는… 이번 새 정부의 경제각료는 실물 경제 통을 써야 하겠네. 그리고 빚돈(차관)을 관리할 전담 부서도 새로 만들고…
빚진 죄인--말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빚준 상전--이번 고비는 어떻게 넘긴다 해도 1천 6백억 달러나 되는 그 엄청난 빚을 언제 어떻게 갚을 작정인가? 매년 갚아야 할 빚이자 만도 1백 50억 달러나 되는데...
빚진 죄인--앞으로 벌어서 갚겠습니다. 6·25의 폐허에서 이만치 만들어 놓은 민족입니다. 지금 전 국민이 허리띠 졸라매고 빚 갚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일 열심히 해 수출 늘리고, 외국자본 끌어들여 금융·증시 활성화시키고…
빚준 상전--수출, 수출하네 만 물건 팔기가 그렇게 쉽지 않으니 문제이네. 그리고 또 지금 한국의 산업구조도 문제이고… 예를 들어 1만 달러 짜리 자동차 한 대 수출해 보아야 고작 외화 60 달러를 벌어들이는데 어느 세월에 그 엄청난 빚을 갚을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네. 지금 IMF 구제금융이니, 외자 증시 유입이니, 적지 않은 달러가 한국 내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데도 달러 값이 안 떨어지는 이유가 민간기업들이 해외에서 차입한 부채를 갚기 위해 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마구 사들이기 때문이라고 하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닌가?
빚진 죄인--"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철학으로 5천년을 살아온 우리 민족입니다.
빚준 상전--그 의욕은 갸륵 하네만 한국의 기업들이 금융권으로부터 빌어 쓰고 있는 (국내) 빚돈이 자그마치 3천억 달러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한국이라는 나라는 온통 (남의) 빚돈으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닌가?
빚진 죄인--없는 살림에 어찌합니까? 우선 아무 돈이나 돌려 쓰고 봐야지요.
빚준 상전--정신 똑똑히 차려야 할 걸세.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잘 보고 있지 않나?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라네.
<98. 3 16. 『미주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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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인사"를 막는 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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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의 큰 병폐 중의 하나가 정부 그리고 정부 산하 각종 기관 및 공기업 인사에 있어 소위 말하는 '낙하산 인사'문제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 말 그대로 이 '낙하산 인사'는 다른 만사를 그르치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인가? 물론 미국과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구조 그 밑바닥이 워낙 달라 '미국식'이 곧장 우리에게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미국에서는 어떻게 해서 이 같은 '낙하산 인사'가 제도적으로 불가능한가를 한 번 살펴본다.
미국에서는 공무원을 지칭할 때 연방공무원을 Federal Employee, 주 정부 직원은 State Employee, 시(市)산하는 City Employee라고 흔히 말한다. 국가조직을 능률을 최우선시하는 기업 조직에 비유, 그 하나 하나가 돈을 받고 각기 직책에 따른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야)한다는 뉘앙스가 짙은 표현이다. 그런데 미국의 공무원 인사제도는 그것이 고위직이든 하위직이든 그 직위에 따른 업무를 충실히 수행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아예 그 직위에 앉을 수가 없게끔 빈틈없이 짜여져 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한가?
미국의 모든 공무원 직(職)은 일반 상품에 붙어있는 Bar Code와 비슷한 일종의 'Job Code'(Grade Level)이 붙어있다. 예를 들면 법무부 산하 인사관리직은 'GS-0201-05/09'식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 상품의 바 코드를 풀이하면 그 상품의 성분 배합 조직 등을 알 수 있듯이 이 바 코드에는 그 직종 직급 보수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또 여기에는 그 직책이 하는 업무내용이 무엇인지,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학력 어떤 경력을 필요로 하는지 등이 무척이나 세밀하게 명문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 코드의 내용은 일종의 성문법 성격을 띠고 있어 이를 관장하는 사람들(인사위원회)이 임의 해석 또는 자의 적용하면 직무유기 내지 범법행위가 된다.
그리해서 이 코드에 명시된 모든 조건을 흡족히 충족시킬 수 없는 자격의 사람은 감히 그 직책에 이력서를 들이밀 엄두도 못 내게끔 되어 있다.
이리해서 어떤 권력자도 그 직책의 기준에 미달되는 무자격자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데 만일 한국에서와 같이 고위층에서 '낙하산 식'으로 내려보낸다면 미국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를 상상해 본다.
각 정부기구마다 인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모든 신규 채용 승진 승급은 이 위원회가 관장하는데 만일 어떤 외부 권력층이 그 직책에 무자격자를 추천 또는 강요한다면-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이들은 이 바 코드를 내보이며 말할거다.
"이 직책의 코드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소. 당신이 추천 강요하는 사람의 자격이 이 코드의 기준에 부합되는지 당신 스스로 판단해 보시오."
그리고 또 새로 당선된 대통령의 특권인 소위 '승자의 전리품'(spoils of victory)의 경우, 고위직은 다 알다시피 그 까다로운 상원 청문회를 거쳐야 하고, 기타직은 1차로 FBI·CIA 등의 엄격한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한다. 이 때 과거의 어떤 비리·부정·위법 행위가 적발되면 물론 '부적격' '불가'이고, 설혹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앉았다 해도 그것이 나중에라도 드러날 경우 즉각 사임해야 한다. 그리고 또 이 같은 신원 조사에 통과했다해도 그 자격이 앞서 말한 그 바 코드 기준에 부합돼야 함은 물론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오늘날 한국의 부정부패문제 등 모든 병폐는 전체적인 정치경제 사회구조 밑바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 밑바탕 즉, 인프라 스트럭쳐가 바로 잡혀질 때까지는 '부정부패척결' 등 구호는 십년이 가도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는 생각인데, 우선 이 '낙하산 인사' 문제 하나만이라도 바로잡기 위해 우리도 모든 정부직 및 산하 공기업 직책 하나 하나를 이렇게 바 코드화(化) 해보는 것이 어떨런지…
<01. 2. 16. 『미주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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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위' 너무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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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정권 출범 초기 국민 90% 이상이 지지·성원할 때 필자도 멀리서 나마 많은 박수 갈채를 보냈었다. 한국 병 치유, 역사 바로 세우기 등 국정 방향이 올바로 잡혀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DJ대통령 당선자에게도 그 때에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더 열렬한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다. 안팎으로 그 어려운 상황에서 당선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원만·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노련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삼스런 얘기지만 한국은 엄연히 민주·헌정 국가다. 따라서 모든 국사(國事)는 법(률)에 의한 민주절차에 따라 이행되고 수행되어야 한다. 비록 지금 정치적인 상황이 아무리 IMF경제위기에 따른 긴박한 시국이라 해도, 그리고 또 YS 정권이 그 실정(失政)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과 원망이 높아 그의 영(令)이 안먹힌다해도, 그렇다고 그것이 DJ가 헌정 질서를 등한시 하거나 민주 절차를 무시하는 것을 합리화 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이같은 관점에서 엄밀히 따져볼 때 지금 김 당선자의 처신 및 정권인수위, 정부조직개편위, 노사정위 같은 기구들이 하는 일과 방법이 과연 민주 절차에 100% 부합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김 당선자는 공식 취임하기까지는 대통령이 아니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은 그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는 엄연한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그런데 현직 대통령을 뒤로두고 당선자가 국정 전반을 도맡다 시피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이것이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만 해도 그렇다. 이 기구는 헌법기관도 아니고, 정부조직법상의 어떤 법적 뒷받침이 있는 기구도 아니다. 다만 대통령직 및 정권 인수·인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한시적인 편의 기구일 뿐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 기구를 두고 "(맥아더)점령군 같다" 느니 "(5공)국보위같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가?
이들에게는 어떤 정책을 결정하거나 집행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주어져 있지 않다. 이들이 할 일은 조용히 대통령직 및 정부 각 부처 업무를 사전 파악함으로써 정권 인수를 원활히 하고 그 후에 할 일을 준비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그들이 그동안 인수위 활동을 하면서 때때로 여기 저기서 보여준 본분에 어긋나는 비민주적인 행태는 너무나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본다.
당선자측 인수위원들과 현 정부측 위원들이 대좌한 자리. 인수위측 한 위원이 청와대 정무수석의 코를 손까락질 하며 하는 말, "코가 왜 그렇게 커?"
그 정무수석은 얼굴만 푸르락 붉으락 말을 못하고 있는데 또 다른 당선자측 위원이 하는말, "저렇게 큰 코는 생전에 처음 보네"(ㅈ 일보 보도)
이것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인가? 아니면 깡패들의 패싸움장이란 말인가?
전쟁이 아닌 정치에서 승자는 더욱 겸손해야 한다. 몸을 낮추어야 한다. 내무위에 가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느 경찰관에게 "곧 진급시켜 줄께 좀 기다려". 인수위 소속은 아니지만 실세로 부상한 한 여당의원은 검찰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로 "나 여당 XXX인데 그 사건 수사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또 다른 새 여당 실세는 "증권협회장에 이 사람을 앉혀야겠어."등등….
어렵게 당선된 새 대통령은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지금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정치란 혼자서 못하는 것, 그 측근 및 휘하 사람들의 일심동체가 절대요건인 줄 안다. YS가 지금 저렇게 '0점 대통령'이 된 것도 "인사는 만사"라고 하면서도 사람을 잘못 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숱한 난제를 안고 출범하는 새 정권, 새 대통령의 '의지와 방향'을 떠 받칠 수 있는 훌륭한 인물들이 집결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98. 2. 18. 『미주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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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와 재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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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큰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실업이 홍수를 이루고, 증권이 폭락하고, 물가·달러 값은 폭등하고… 가히 일대 경제공황 현상을 빚고 있다. 그리해서 사람들 입에서 국란(國亂)이니 대란(大亂)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가하면, 심지어 NYT 어느 칼럼은 "이제 우리는 북한에 앞서 남한이 먼저 붕괴될지 모른다고 까지 걱정하고 있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는다.
그동안 '유례를 볼 수 없는 고속성장'이니, '개발국의 경제모델'이니 하면서 한껏 자부하고 특히 작년 OECD 가입을 계기로 '곧 선진국 진입'을 외쳐대던 한국 경제가 어떻게 해서 불과 1년만에 이렇게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가?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다. 잘못된 국가경제 정책, 거기서 비롯된 잘못된 경제구조와 금융구조, 해외유동자금의 농락, 수출환경의 악화, 고비용·저효율의 생산성, 하이텍의 후진성, 그리고 국민들의 과소비 풍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유와 원인이 있다. 이 많은 '잘못된 요인'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이고 쌓여 오다가 이제 그 한계에 부딪쳐 오늘날과 같은 '거덜나는 현상'을 빚고 있는 줄 안다.
그런데 이 많은 요인 중 한국 경제를 지금 이같이, '이 꼴, 이 지경'으로 만든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일 것인가?
물론 가장 으뜸 되는 요인은 정부의 국가 경제정책의 실패다. 한 치 앞도 못 내다 본 근시안적 경제 정책, 여기에는 무능한 정치인들을 탓하기에 앞서 한국의 경제 테크노크라트들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한국의 그 많은 경제학 박사·경제학 교수들, 그리고 엘리트 경제관료들은 그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 다음은 경제활동의 주체인 기업 특히 재벌기업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과연 어떻게 기업을 운영하고 기업활동을 해왔기에 오늘날 나라 경제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자기 자본보다 부채가 몇 십배 몇 백배 씩 더 많은 재무구조, '대마불사(大馬不死)'를 뇌까리며 나라 돈 많이 물면 죽(이)지 않는다고 정치인들에게 뇌물·떡값·정치자금 바쳐가며 은행돈 맘대로 갖다가 부동산·증권에 투자해 놓고 가격조작을 획책하는 변태영업, 건전한 생산활동을 통한 이윤 획득으로 빚을 갚으려 하지 않고 빚은 빚을 얻어 갚으면서 그 자신들은 초 호화판의 개인 생활,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 이자 갚기에도 허덕이는 만년 적자경영….
언젠가는 망할 수밖에 없는 이 같은 '부실경영'을 해온 그 주인공들이 누구인가? 바로 한국 경제발전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노라고 자임(自任)하고 있는 재벌들이 아닌가?
이 같은 관점에서 오늘날 한국 경제가 '이 꼴, 이 지경'이 된데에는 정부의 경제정책 빈곤 못지 않게 경제활동의 주체인 기업·재벌들에게도 그 책임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기업 하나 하나의 그 같은 '개개 부실(個個不實)'이 모아져 총체적인 '국가부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도 말하리라. "한국적인 경제구조·금융체제 아래서는 이 같은 경영이 불가피했다"고. 비록 상황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제 3자의 강제가 아닌 자신들의 자율 결정인 이상 그 '개개 부실'의 궁극적인 책임은 그 기업을 직접 경영하고 있는 기업인·재벌들이 져야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지금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한다. 한마디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경제가 '잘 나갈 때' 그 성장의 열매를 민중들과 나누었던가?
오늘 실직 당하면 당장 내일부터 생계가 막막한 근로자들에게 '고통 분담'을 호소하기 전에 그들은 아들·손자 명의로 되어있는 천문학적 단위의 그 돈을, 그리고 현지 투자라는 명목으로 해외에 빼돌린 재산이 있다면 또한 그 돈을, 모두 털어 우선 은행 빚·외국 빚을 갚고 그럼으로써 기업을 '속 빈 강정'이 아닌 튼튼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다음, 그 때가서 '고통 분담'을 호소해도 늦지 않으리라 고 본다.
<97. 12. 3. 『미주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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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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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이 없는 스포츠를 생각할 수 있을까?
멋대로 치고 받고, 멋대로 던지고 때리고, 멋대로 깔아 뭉개고 걸어 넘기고… 그것은 이미 스포츠가 아닌 '개판 싸움' 일거다.
민주 선거의 원칙이 무엇인가?
공정한 룰이 있고 각 후보들이 지건 이기건 그 룰에 따라 페어플레이를 하는 것일 거다.
다시 민주주의의 요체(要諦)는 무엇인가? 링컨의 유명한 말,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치(정부)"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같은 민주주의 정신·민주 선거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작금 고국서 벌어지고 있는 대선 정국을 과연 민주주의 나라의 민주 선거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
마치 룰이 없는 스포츠처럼 '개판 싸움'의 모습을 보이는 그 선거 양상, "민주주의? 아직도 멀었구나…"하는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
무엇하나 민주 정신에 입각, 민주 절차에 따라 돌아가는 것이 없다. 온통 억지 논리와 무원칙, '비 민주'가 춤을 춘다. 그 대표적인 사례들를 몇 가지 골라본다.
빙탄(氷炭)의 두 정당이 단일 후보를 낸다. 당의 이념과 정강 정책이 맞아 떨어져서가 아니다. 오직 집권을 위해서다. 그러면서 "너는 2년 반 대통령", "나는 2년 반 총리", 권력을 나누겠단다.
집권을 위한 합종연횡, 그것은 있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 정당들이 그래도 명색이 민주 정당이라면 그 같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있어 형식적으로라도 민주적 절차를 밟았어야 옳았다.
민의의 수렴도 없이, 당의 결의도 없이, 보스끼리 멋대로 결정, 공표해 버리는 그 비민주적인 작태, '밀실야합'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단일후보 공식 발표 후 어떤 한 당의 부총재는 당직자 회의에서 "이것이 공당(公黨)이냐? 사당(私黨)이냐?"고 울분을 터뜨렸다는 후문이다.
그 동기가 상대방 헐뜯기·흠집내기에서 이건 아니건, 하여간 한 당이 한 후보를 상대로 막대한 불법 정치자금 조성·부정축재 및 조세포탈 혐의로 각종 증빙자료를 갖추어 사법 기관에 고발을 했다. 그런데 검찰은 이를 수사 않겠단다. 이유는 이를 수사하게 되면 "대선 정국·경제계에 미칠 큰 혼란"이 우려되기 때문이란다.
3권 분립의 민주 국가에서 사법기관의 기능이 무엇인가? 정치논리·경제논리에 밀려 법 집행을 포기하는 검찰, 이것이 민주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 논리를 확대하면 검찰은 선거가 끝날 때 까지, 또는 경제가 안정될 때 까지 일체의 사법활동을 중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인은 법 앞에 평등' , 크고 작고 간에 모든 민·형사 사건은 선거에, 또는 경제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당사자의 말이 또한 걸작(?)이다. "모든 정치인은 많건 적건 돈을 받았다. 그것은 관행이기 때문에 죄가 안 된다."
한때 '대쪽 이미지'로 민중의 기대를 모았던 한 후보는 요즘 인기도에서 지지부진, 왜 그런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민주적 처신'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가장 높이 치켜든 기치는 3김 청산, 그런데 그가 지금 어떤 당에 몸 담고 있으며 또 어떤 당의 대통령 후보인가? 청산의 대상이어야 할 3김 잔당의 후보가 아닌가? 자기모순·자가 당착이 아닐 수 없다.
그간 상황이 불가피하긴 했지만 민주주의가 곧 정당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비민주적 처신'(곧 정당선택)이 오늘날 그의 입지를 옭아매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번에 여야는 정치개혁 입법에 어렵사리 합의했다. 그런데 그 법의 가장 중요한 골자의 하나인 소위 '떡값' 범위에 있어 '8촌 이내 친족' '배우자의 4촌 이내 인척'은 제외시켰다고 한다.
'힘'과 '돈'의 정격유착을 넘어서 또한 '피'의 '정경혼착(婚着)'이 뿌리 내리고 있는 한국의 사회구조, '8·4촌 친·인척'을 제외시킨다면 그래도 그 법이 적용될 대상이 있을 것인가?
'눈 가리고 아옹'식의 그 비민주적 행태를 또한 개탄치 않을 수 없다.
경선에 불복·탈당, 제3당을 만들어 후보로 나선 것은 도덕적인 비난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법적인 하자는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허나, 정치적인 신념·철학이라곤 눈꼽 만치도 없이 오직 이(利)와 세(勢)를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는 나방이 정치꾼 들은 우리가 또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적 줄서기, 특히 정치인들의 유일한 생존·전략인 줄 알지만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을 또한 금할 수 없다.
또 하나 한국의 가장 비민주적인 고질이 있다. 소위 지연·학연·혈연에 따른 패거리 정치, 끼리끼리 해먹기….
어느 당 새 총재가 된 사람은 이번에 단일 후보가 된 정객과 담판 때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한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통·반장까지 ××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데 어쩔 셈이냐?" 고.
<97. 11. 14. 『미주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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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들… 하나님의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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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에서 각 후보들은 한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자격 검증(檢證)을 철저히 받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등 각 분야에 걸친 경륜·지식은 물론 그 자신과 가족의 윤리·도덕성까지 거론, 유권자들의 심판과 검증을 거치고 있다. 민주 발전을 위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이 다방면·다각도에서 여러 가지 검증을 받는 대선 후보들, 이들을 한 번 하나님 앞에 세워놓고 '하나님의 검증'을 받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비록 허구적이긴 하지만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기에 상상의 나래를 한 번 펼쳐 본다.
선거일을 몇 날 앞두고 제각기 하나님의 은총과 가호를 빌기 위해 교회를 찾은 후보들, 모두들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다. "저를 대통령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하사 그 중 어느 누구를 더 어여삐 여길 수 없는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 동안 너희들은 '인간의 잣대'로 각종 검증을 받은 줄 안다. 오늘은 '나의 잣대'로 너희들을 한 번 검증해 보겠노라."
하나님-우선 십계명의 하나,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자신 있는 후보는 손을 들어 보라.
누구하나 손을 들지 못한다. 모든 것을 훤히 알고 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또 다시 거짓말은 이중 삼중의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원수를 사랑하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고 가르쳤는데 그렇게 서로 물어뜯고, 흠집 내고, '상대방 죽이기'에 열을 올리니 어떻게 된 것이냐?
후보들-정치 판 특히 한국 같은 상황에선 상대방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데' 어찌하옵니까? 그래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악은 선으로 갚아라!"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까지 내밀라"고 누누이 일렀는데 그렇게 서로 치고, 받고, 이전투구를 벌이니 참으로 한심하구나.
후보Ⅰ-선거(전)도 일종의 전쟁인데 어찌 하옵니까?
후보Ⅱ-전쟁에선 이에는 이, 악에는 악으로 대항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왼손이 하는 것(善行)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겸양지덕을 가르쳤는데 그렇게 자기가 잘 났다고, 자기 아니면 안 된다고, 뽐내고 나서도 되는 것이냐?
후보Ⅲ-오늘날은 PR시대, 자기 PR을 하지 않으면 유권자들은 나를 몰라 줍니다. 따라서 표를 얻을 수 없으니 어찌 하옵니까?
하나님-이번 선거기간 중 너희들은 '민생의 현장'을 체험한답시고 시장바닥에 나가 짐도 나르고, 식당 접시도 닦는 쇼를 벌였는데 그래 그때 감상이 어떻드냐?
각 후보들이 제 각기 한 마디씩 한다.
서민들이 참 어렵게 산다는 것을 잘 보았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그들이 짐을 덜도록 하겠습니다. 사회복지·부의 평준화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하나님-그 같은 사탕발림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곳에 다시 오라!"
말문이 막힌 후보들, "내가 대통령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던 기도를 뚝 멈추고 모두들 쥐구멍을 찾는다.
<97. 10. 16. 『미주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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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자금의 東과 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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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출신으로선 유일한 미연방 하원의원인 Jay Kim(김창준)의원이 이번에 선거자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우리 2세들에게 "하면 된다"는 이민의 꿈 실현의 산 표본인 김 의원이 이 같은 일로 정치적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데 이번 김 의원의 경우를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수 십억, 수 백억 규모의 부정 정치자금이 '떡값'이라는 명목으로 횡행하는 한국 정치풍토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상(假想), 한국의 한 국회의원과 Jay Kim 의원과의 대화 형식을 빌어 정치자금의 동과 서를 비교·검토해 본다.
한국국회의원--참 안됐습니다. 그 동안 한국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한미 무 비자 협정 캠페인에 앞 장 서시고, 또 대만 핵폐기물 북한 반입에 적극 반대 운동을 펴시는 등… 그런데 도대체 이번에 말썽이 된 부정선거 자금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J. Kim 의원--도합 23만 달러 가량입니다. 이를 선거위에 보고치 않은 것을 이번에 연방 검찰에 시인했습니다. 지난 4년 동안의 악몽이 끝난 것 같아 홀가분한 심정입니다.
한국국회의원--23만 달러라면 한국 돈으로 불과 2억 여원 남짓, 겨우 조그마한 아파트 한 채 값밖에 안 되는데 미국에서는 그 정도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됩니까?
J. Kim 의원--미국의 정치자금법이 그러하니 어찌 합니까? 단1백 달러라도 불법은 불법이니….
한국국회의원--법이 그렇게 엄격해서야 그거 어디 미국에서 국회의원 해먹겠습니까? 정식 재판이 열리면 '대가성이 없는 순수 떡값'이었다고 주장해 보십시오. 한국에서는 1, 2억 현찰을 사과궤짝에 가득 가득 담아 한 번에 주고 받아도 '대가성 없는 떡값'이었다고 내세우면 벌을 받지 않는답니다.
J. Kim 의원--미국에는 '떡값'이라는 어휘가 없습니다. 판사에게 그 개념조차 없는 어휘를 구사해 보아야 미치광이 취급밖에 더 받겠습니까?
그리고 미국에서는 정치인들이 단 돈 몇 십 달러, 한화로 하면 단 돈 몇 만원 짜리 선물을 받아도 해당 기관에 보고를 해야되고 또 몇 십 달러 짜리 식사대접도 못 받게 되어 있지요.
한국국회의원--그런 것들이 미국에서는 정말 잘 지켜지고 있습니까?
J. Kim 의원--지키지 않으면 어쩔겁니까? 유사시에 정치생명과 직결되는데….
한국국회의원--미국엔 참 '웃기는 법' 도 많더군요. 이번 김의원 경우에 있어 한국 국회의원으로서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즉 김 의원 소유인 'Jay Kim Engineers, Inc'.의 돈 8만3천여 달러를 선거자금으로 쓴 것이 불법으로 지적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자기 돈 자기가 쓰는데 불법이 된단 말입니까? 한국에서는 없어서 못 쓰지 내 돈은 무한정 쓸 수 있답니다.
J. Kim 의원--아무리 내가 경영하는 회사라도 그 회사 돈은 내 개인 소유가 아닌 법인체 돈이니, 그것을 선거자금으로 썼으면 미연방 선거관리 위원회에 이를 보고했어야 옳았지요.
한국국회의원--그리고 또 하나, 김 의원이 94년 재선 때 미국에 있는 한국계 기업들, 즉 '현대모터 아메리카', 'KAL', '삼성 아메리카', '대우 인터내셔날' 등에서 불법 선거자금을 제공했다해서 그들 회사들이 도합 1백20만 달러의 벌금을 미국정부에 납부했는데 그 때 김 의원이 그들로부터 받은 기부금 액수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J. Kim 의원--'KAL' 1천 달러 등 모두 합쳐 보아야 몇 만 달러였습니다.
한국국회의원--기부금 고작 몇 만 달러에 벌금이 무려 1백20만 달러, 배보다 배꼽이 수 백 배나 되는군요.
만일 그 같은 쌍벌죄 잣대를 한국 정치 판에 갖다 댄다면 한국의 정치인은 물론 한국의 재벌 중 과연 몇이나 살아 남을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미국(법)은 무서운 나라이군요.
<97. 8. 6. 『미주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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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엇가는 언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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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세계화 구호도 요란한 고국 사회에서 요즘 흔히 쓰여지고 있는 말(언어)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 구호와는 너무나 상반되는 반(反)민주적, 반(反)세계적인 언어들이 숱하게 눈에 띈다.
언어란 인간 의식의 표현이어서 다시 거꾸로 사람들의 의식·사고를 구속·지배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 그 쓰이는 언어들을 보면 그 사람들의 의식상태·사고방식을 가늠할 수 있는데 요즘 한국의 매스컴들이 일상적으로 쓰고 있고, 또 일반 사람들이 이를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 들이는 이 같은 반민주적·반역사적 언어들을 몇 가지 모아 본다.
◇어떻게 해서 '대권'인가?
'대권후보', '대권도전', '대권야심' 등… 대통령(자리)을 가리켜 '대권(大權)'이라고 일컫는다. 도대체 민주국가에서 어떻게 해서 대통령 자리가 어마어마한 힘(全權)을 나타내는 '대권'이 된단 말인가?
'대권'이라고 하면 대통령의 권한(Power of President)이라는 뜻보다는 일종의 왕권(Sovereign Authority)의 뉘앙스가 짙은데 이 '대권'이라는 말은 일본의 명치헌법 때 행정·입법·사법 등 3권은 물론 육·해·공군의 통수권을 장악했던 일본 천황의 통치권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용(龍)'…도대체 무슨 뜻인가?
한국·중국 등 동양에서 '용'이라는 말은 임금 또는 제왕을 가리키는 뜻을 함축한다. 용안(龍顔), 용상(龍床), 용포(龍袍), 용루(龍淚) 등 모두가 임금의 그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민주사회에서 백성들이 뽑는 대통령을 왕권시대의 임금에 비유, 그렇게 '용(龍), 용(龍)'하는가?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지시'인가?
대통령이 각료회의·당정회의 등 공식석상에서 하는 '말씀'은 무조건 '지시'다. 그리고 그 '지시'는 만사를 젖혀놓고 최우선적으로 처리·이행된다.
대통령의 '지시'라면 그 타당성과 합목적성이 있겠는데, 그렇다면 그 '지시'를 받고서야 부랴 부랴 움직이는 각 정부 부서 및 하급 기관은 그때까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지시'라는 말의 사전 해석은 '가리켜 보임' '일러서 시킴'으로 되어 있는데,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이렇게 세상 만사 갈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고 사람들을 타일러서 일을 시키는 자리인가?
과문 탓인지는 몰라도 미국의 대통령이 "이래라" "저래라" 무엇을 '지시했다(direct or instruct)'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없다.
◇'지도자'(Leader)라는 말:
고국에서나 이곳 동포사회 에서나 좀 '난 사람들'을 흔히 지도자 또는 지도층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도대체 '난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학교를 조금 더 다녔거나, 돈을 조금 더 벌었거나. 사회적인 지위 또는 직장의 직급이 조금 나은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만인 평등 민주시대에 그들이 어떻게 해서 우리(민초)들에게 '지도자'가 되고 '지도층'이 된단 말인가?
우리는 그들로부터 결코 무엇을 지도 받고 가르침 받은 일이 없다.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들이 진정 우리들로부터 '지도자' 또는 '지도층'이라는 호칭을 들으려면 그들이 가진 지식과 학문, 그리고 돈과 권력을, 그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그들보다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쓸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리 라고 본다.
<97. 6. 5. 『미주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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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돈 갖고 그렇게 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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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이마에 땀 흘리며 일하면서 그 달 그 달 빠듯이 생계를 꾸려 가는 일반 민초(民草)들의 입장에서 이번 한보사태·현철 사건을 통해 그 모습의 일각을 드러내는 한국의 돈 가진 사람들(재벌)·권력 가진 사람들(정치인)들의 '세상살이'를 다시 한 번 되 살펴보자.
이번 두 '빅·뱅'에 있어 그 부정이 하나 하나 불거져 나올 때 마다 거기에 등장하는 가히 천문학적인 돈의 액수, 우리 민초들에겐 마치 별천지 사람들의 돈 방망이 놀음으로만 보이는데 도대체 그들은 누구의 돈, 무슨 돈을 갖고 그렇게 수 십억·수 백억 씩 서로 주고 받으면서 돈 잔치를 벌이는 것인가?
'능력 껏 벌어 맘대로 쓰라' 는 자본주의 원칙에도 일정한 룰이 있는 법, 돈을 버는 그 방법이 합법·타당해야 하고 또 그 돈을 쓰는 방법이 사회정의에 부합되어야 하거늘,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만든 돈을 그렇게 더럽게 쓰는 그들의 작태, 그것이 '도둑들의 돈 놀음'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여기서 '한보'라는 유령이 수 십억·수 백억 원을 사과 궤짝에, 수백·수 천만 원은 라면 상자 또는 골프 백에, 현찰로 가득 가득 채워 수많은 권력가진 자들에게 뿌린 돈, 그리고 또 '현대판 황태자'에게 돈 가진 자들이 보다 많은 리턴(return)을 위해 앞다투어 갖다 바친 수 십억·수 백억 원의 돈이 과연 어떤 돈, 누구의 돈인가를 한 번 냉철히 따져보자.
'한보'에는 5조원인가 6조원인가 하는 은행돈이 나갔다. 그리고 한국의 30대 재벌 거의가 자기 자본의 수십 배·수백 배의 은행 빚을 안고 있다. 심지어 이중 5, 6개 재벌은 은행 빚이 자기 자본의 수 천 배에 이른다.
한 마디로 한국의 재벌 거의가 은행돈, 곧 '민중의 돈'으로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민중의 돈'을 그들은 어떻게 쓰고 있는가?
'도둑들 돈놀음'의 두 주역(정태수·김현철)이 구속됐다. 그러나 이들의 구속은 우리 민초들에겐 한국의 돈 가진 자들·권력 가진 자들이 어떤 '세상살이'를 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인 예일 뿐 별 큰 의미가 없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민초들의 돈'을 마치 자기 사유 재산인 양 진탕만탕 쓰고 뿌리는 한국의 돈 가진 자들(재벌), 그리고 그 직위 임무 수행을 위해 '민초가 맡긴 권한'을 마치 자기들의 천부적인 권리인 양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인들, 그리고 다시 이 둘(政·經)이 한통속이 되어, 돈은 권력을 돕고 권력은 다시 돈(富)을 더 벌게 해주는, 이 밀착(密着) 구조를 어떻게 깨부수느냐다.
사회정의에 입각, 탈법·부정으로 조성·축적한 돈(富)은 원인 무효가 되어야 한다. '전·노'의 부정 재산을 환수하듯이 모두 거둬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명목이 떡값이건 정치자금이건 간에 그 부정·탈법의 돈을 받은 정치인 모두 그 돈을 뱉어내게 해야 하고 또한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배가 고픈 나머지 생명 유지를 위해 단 돈 몇 천 원·몇 만원 남의 돈 훔친 것을 절도죄로 처벌하는 법이, 돈 가진 자들과 권력 가진 자들 사이에 수 억 원·수 십억 원 씩 오간 것을 "정치자금이다" "대가성이 없다"는 식으로 그 죄를 묻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민초들을 우롱하는 '넌센스 법'인가?
<97. 5. 21. 『미주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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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罪人들의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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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적(五賊)'으로 60년대 고국의 세태를 신랄히 비판·고발했던 김지하 시인은 요즘 한국의 사회상을 한 마디로 '똥 천지'의 땅이라고 표현한다.
어느 구석하나 부정과 부패의 악취가 풍기지 않는 곳이 없다는 개탄이다.
'똥 천지'의 땅에서 요즘 열리고 있는 한보사태에 대한 국회 청문회, 그리고 검찰 수사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흡사 원죄인(原罪人)들이 한데 모여 네 죄 내 죄를 에워싼 싸움판을 벌이고, 네 허물 내 허물을 벗기기 위한 경연을 하는 코메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청문회 증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을 청문하는 국회의원들, 그리고 먼 발치서 내심 만면의 비웃음을 머금고 이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검찰(권), 어느 누구도 성경에 나오는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 정의를 위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청문회 풍경을 몇 장면 살펴보자.
'정태수 리스트'에 전전긍긍 하는 정치권, 특위 위원에 초선 의원들을 대거 투입했다. 이유는 '똥 묻은' 기성 정치인들은 제 발이 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찌된 일인가? 새내기 의원끼리 이전투구를 벌인다. 수뢰혐의를 받고 있는 '국민회의 4인방'의 하나, 이를 힐란하는 다른 초선들에게 대든다. "너는 김현철 빽으로 공천 받아 금 뱃지 달았으면서…"
민중이 선출(elect) 하기 전에 당 우두머리의 선택(select)을 받아야 하는 한국의 절름발이 민주주의, 그렇다면 2백96명 국회의원 전부가 당수의 빽으로 금뱃지를 단 원죄인들이 아닌가?
여야 정치인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간다. 그러면서 그들은 투덜거린다. "검찰권에도 '촌지문화'라는 것이 있을성 싶은데…"
'마피아의 잣대'로 수사를 하는 너희 검찰(권)은 과연 구린데가 없느냐? 는 항의다.
더욱 웃기는 일은 정태수 뇌물의 중간 착복--
모 야당 의원은 상임위 의원들에게 분배하라고 정씨로 부터 받은 뇌물 수 천만 원을 혼자서 꿀꺽했는가 하면, 한보그룹의 한 '머슴'은 정객들에게 갖다 주라고 받은 수 억 원을 자기 호주머니에 슬쩍, 그리해서 '정 리스트'엔 분명 올라 있는데 당사자들은 펄쩍뛰는 넌센스가 벌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원죄인 들의 개판싸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또 청문회에 앞서 있었던 검찰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 때의 일.
의원 : '정태수 리스트'에 국회의원들이 들어 있습니까?
검찰총장 : 있습니다.
의원 : 몇 명이나 됩니까?
총장 : 수사기밀이라 밝힐 수 없습니다.
의원 : 여당·야당 다 포함됩니까?
총장 : 네. 여당도 야당도 다 들어 있습니다.
검찰총장의 이 한 마디에 풀이 죽어버린 조사위 의원들. 국정조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끝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어느 교수는 주장한다.
지금 '한보 리스트'와 같은 잣대를 모든 정치인들에게 적용한다면 현역 국회 의원 중 50∼60% 는 검찰에 불려 가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한보 리스트'에는 정·재계 뿐 만 아니라 상당수의 학계인사 및 언론인들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다.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똥 천지'의 땅에서 '누가 누가 똥이 더 묻었나? ' 하는 '똥 싸움'의 모습인데 이 똥을 과연 누가 어떻게 클린(clean)할 수 있을 것인가?
<97. 4.16.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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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공화국의 잇단 '빅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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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국은 '부패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영영 씻어낼 수 없을 것인가?
무슨 일만 벌어졌다 하면, 심지어 토목학의 원리로 만들어진 교량이 무너져 내려도, 경제 논리로 당연한 기업의 도산이 발생해도, 그 배후를 캐보면 영락없이 부정부패라는 거대한 악마가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자본 고작 9백억 밖에 안되는 일개 기업에 국가 총 예산(97년도 71조 여 원)의 14분의 1에 달하는 5조원(약 60억 달러)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나간 이번 '한보사태', 심지어 "단군이래 최대의 금융 스캔달"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김 대통령은 그저께 청와대 긴급 비서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보사태는 지금 우리 나라에 풍토병처럼 퍼져있는 전반적인 부정부패의 전형적인 한 표본이야" 라고. 그리고 그는 이어 말했다고 한다.
"그 동안 부정부패 척결에 혼신의 힘을 쏟았는데도 지금 또 이 같은 일이 발생하는 데에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자본주의 경쟁 체제에서 기업이 망했다 흥했다 하는 것은 병가의 상사, 그런데 한 기업의 부침(浮沈)을 두고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스캔달"이니, "부정부패의 전형적인 표본"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부패 공화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참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데, 우리의 고국은 언제까지 이같은 부정부패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 거릴 것인가?
이번 한보의 '금융개혁 빅뱅' 아닌 '금융부정 빅뱅'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정치·경제·금융 체제의 후진성에 있다고 본다. 정(政)·경(經)이 제도적으로 완전 분리·독립, 경제현상은 어디까지나 경제논리로 다스리고, 거기에 정치 논리 또는 정치 권력의 간여·개입이 눈꼽 만치도 허용되지 않는 제도를 갖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한보사태 같은 '금융 스캔달 빅뱅'이 있을래야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번 한보 '5조원에 물린' 채권단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을 비롯해 수 십 개 국내은행들, 그런데 이중 외국계 은행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융자에 있어 그 회사 재무 구조를 본다. 그런데 재무 구조 조사에서 땅·건물·공장 시설물 등 부동산 담보물은 가장 마지막 고려 대상이다.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개인이면 신용(Credit), 기업체면 가동자금(Cash Flow)이다. 그런데 한보는 그 Cash Flow에 있어 도저히 돈이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제 현상을 어디까지나 경제 논리로 다스렸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또 한국 내 외국계 은행에는 한국 권력자들의 정치 논리를 앞세운 권력의 입김이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주의 철학자 룻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니까 논적 볼테르가 이에 응수, "이제 인간이 다시 네 발로 걷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국의 이 부정부패 문제, 사정의 칼을 아무리 휘둘러 보아야 별 무 효과가 드러난 이제, 인간 양심에의 호소 또는 의식의 개혁은 너무 늦었다. 오직 유일한 길은 인간의 흑심(黑心)이 발현될 수 없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완벽히 마련하는 수 밖에 없다. 더 이상의 '금융부정의 빅뱅'을 막기 위해 하루 빨리 '금융 개혁의 빅뱅'을 마련하라!
<97. 2.. 5.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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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心·天心·金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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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 했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민심을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나라 살림을 하는 사람들(정치인)에게 일러왔다.
지금 고국에서 근로자들의 대 파업을 통해 무섭게 표출되고 있는 그 '민심 (民草의 마음)', 곧 '천심'의 뜻은 무엇인가?
근로자에 이어 화이트컬러 넥타이 부대가 등장하고, 교수·성직자·지성인들이 대거 이에 합세하고, 심지어 가정 주부들까지 길거리에 나서는 작금의 이 '민심'을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세 김심'은 과연 어떻게 읽고 있을 것인가?
평소에는 한없이 약하고 또 보잘 것 없이 보이는 한국의 민초들, 그러나 그 민초들은 한국 역사의 구비 구비 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4·19때는 학생의거로, 6·29때는 시민혁명으로, 독재를 무너뜨렸고 또 군부통치를 종식시켰다.
그런데 이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또 경제적으로 선진국 문턱에 선 시점에서, 또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이 '민심'은 무엇을 위한, 어디를 향한 몸부림인가?
막강한 힘을 지닌 집권당 대표가 일개 근로자 대표를 만나러 갔다가 일거지하에 거절당하는가 하면, "우리 얘기 좀 해 보자."고 TV토론을 간청해도 (첫 번째 제의) 또한 거부를 당하는 그 모습에서 새삼 '민심'의 무서운 힘을 본다.
'분노한 민심'이 거리를, 작업장을 휩쓸자 평소에 그렇게도 "나라를 위하여…" "국민을 위하여…"를 외쳐대던 정치인들이 모두 고개를 떨군 채 입 한 번 뻥긋 못하는 그 모습에서 또한 한국 정치 권력자들의 너무나 초라함, 너무나 허약함을 본다.
"민초에 의한, 민초를 위한, 민초의 정부"라고 했다. 민초는 마치 들판에 깔려 있는 풀만치나 그 숫자가 절대 다수, 일체의 정부(국가)시책은 그 절대 다수를 최우선으로 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 새 노동법이 과연 이 절대 다수의 복리증진을 최우선으로 삼았는가? '최대다수의 최대복리'라는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그 어떤 시책도, 그 어떤 법률도, 그 절대다수의 저항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르몽드지는 이번 사태를 평하면서 제도와 법규의 세계화에 앞서 "한국정치 지도자들의 사고 방식의 세계화가 더 급선무"라고 충고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민심'의 충분한 의견 수렴도 없는 법률(새 노동법)을 자기 당 당원들을 시켜 꼭두새벽에 날치기 처리하는가? "민심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그 '김심'은 '문민'이 아닌 '군민(軍民) 대통령'이라는 비난·매도를 받아도 백 번 싸다.
그러면 다른 두 '김심'은 또 어떠한가? 과연 '민심'을 제대로 똑바로 읽고 있는가? 한참 잘못 읽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일이 있을 때 마다 이를 '최대다수의 최대복리' 차원 아닌, 오직 당리당략 특히 연말로 다가온 대선용으로만 이용하려 들지 않는가?
이제 길거리를 메운 '민심'은 '어설픈 민주주의' 아닌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열망한다. 그리고 그 '민심'은 또 소수만 잘 살고 다수가 못사는 경제 선진화 아닌, 잘못될 때는 고통 분담, 잘 될 때는 부의 균배(均配)가 이루어지는 정의로운 경제 선진화를 갈망한다.
이 같은 '민심·천심'을 꿰뚫어 보는 '김심들'이 되기를 간절히 빈다.
<97. 1. 22.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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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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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국은 총체적인 경제 위기설이 나도는 가운데 근로자들이 새 노동법에 반발, 대규모 파업을 벌임으로써 더 할 수 없이 어수선한 분위기라는 소식이다.
외채 1천억 여 달러, 무역 적자 2백3억 달러 (96년도)등 경제가 날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전 국민이 일치단결, 총력을 기울여도 어려운 때에 근로자들의 대파업까지 겹쳐 그야말로 일대 위기국면을 맞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번에 마련된 새 노동법이 노조가 주장하는 대로 정리해고제·변형 근무제·대체 근로제 등 사용자 이익 보호 일변도이고, 복수 노조 3년간 유예 등 근로자 권익은 전혀 무시한 악법이냐, 아니면 정부가 내세우는 대로 OECD가입 등 바야흐로 무한 경쟁 시대를 맞아 한국 경제구조 (특히 고비용 구조) 개편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느냐, 하는 등의 논의는 여기서는 덮어 두기로 한다. 필자의 관심은 표면에 나타난 현상이 아닌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로 이번 대파업은 새 노동법이 그 기폭제가 되었지만 필자로서는 그에 앞서 한국 근로자들의 평소에 쌓이고 쌓인 불평·불만 및 공분(公憤=Public indignation)이 이를 계기로 크게 분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싶은데, 선진국에 비해 별로 손색이 없는 시간당 임금을 받고 있는 그들이 이렇게 크게 분노하는 이유·동기는 무엇인가?
그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나름대로 한 번 분석해 본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나라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블루 컬러 쟙'보다 '화이트 칼러 쟙'이 대우를 받고 또한 존경을 받는다. 블루 컬러 쟙은 업신여김 받고 멸시 당한다. 언젠가 노동쟁의 때 "흰 "Y셔츠 입고 넥타이 맨 족속들 때려 죽이자!"라는 구호가 등장한 일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화이트 컬러에 대한 심한 열등감과 함께 적대감을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자기네들의 현위치(Status)를 좀처럼 받아 들이려(Accept)하지 않는다. 서구 기독교 국가의 근로자들 같이 "이것은 나의 천직"이라는 소명의식이 전혀 없다.
너도 사람, 나도 사람, 인간은 평등이라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편안하게 먹고 살고, 왜 우리는 뼈가 빠지게 죽어라 노동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느냐? 사회가, 체제가 불공평하고 부정의 하다고 생각한다. 불평·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들은 그 동안의 한국 경제 성장의 열매를 사용자·재벌들이 독식했다고 생각한다. 그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누구인가? 우리 근로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 과실의 분배에 있어서 자기네 들 에게는 터무니 없이 적게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그리해서 그들은 그들의 정당한 몫을 부당하게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 심한 피착취감과 박탈감을 느낀다.
그 다음 또 다른 문제는 근로자들의 철저한 계급의식이다. 한번 노동으로 인생을 출발하면 죽을 때까지 좀처럼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그런데 이에 반해 '한 번 재벌이면 영원한 재벌'로 이어지는 한국적 계급과 부의 계승, 이에 대해 근로자들은 큰 의분과 함께 심한 적대감을 느낀다.
한국 근로자들의 이 같은 욕구불만과 피착취감 그리고 좌절감과 피해의식이 평소에 쌓이고 쌓이다가 이번 새 노동법을 계기로 그들의 분노가 무섭게 표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어려운 과제를 과연 누가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97. 1. 15.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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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의 칼… 성역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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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는 '힘'을 쓰는 두 세력이 있다. 하나는 사법부고, 다른 하나는 언론계다. 그런데 그들은 그 '힘'을 잘못된 방향으로 쓰고 있다."
-고국 모 신문 '기자 칼럼'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 출범 이 후 기회 있을 때 마다 "부정부패 척결엔 '성역'없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하겠다"고 누누이 강조 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 실천의지가 얼마만큼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
야당과 재야 세력은 주장한다.
"조금도 나아진 것 없다. 부정 부패는 오히려 더욱 음성화 되고 악성화 되고 맘모스화 됐을 뿐이다." 라고.
물론 야당의 이 같은 주장은 다분히 정치적 공세를 위한, '비난을 위한 비난'의 성격이 짙지만 요즘 불과 한달 사이에 장관이 둘 씩 이나 부정 스캔들에 연루되어 목이 날아가는 현실을 보면 딱히 "그렇지 않다"고 이를 단호히 부정할 수 만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김 대통령이 "부정부패 척결엔 '성역'이 없다"고 강조할 때 '성역' 이란 도대체 무슨 뜻이며 또 어느 분야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성역'이란 영어로 Sanctuary, 곧 법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신성불가침의 지역(또는 장소)을 일컫는데 김 대통령이 그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그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부정부패 척결에 있어 지금까지 사정의 칼날이 먹혀 들지 않는 '성역'이 존재했거나 또는 지금도 그 '성역'이 존재한다는 반증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한국 상황에 있어 사정의 칼날이 먹혀 들지 않는 계층 또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이 과연 어느 누구일 것인가?
감히 말하고자 한다.
그 '성역'은, 아니면 최소한 성역 취급을 받는 곳은, 다른 데가 아닌 바로 한국의 사법분야와 한국의 언론계라고.
한국의 사법분야는 역대 정권 때마다 그 권력 유지를 위해 어느 분야보다도 충실한 충복 노릇을 해왔다. 그리고 문민정부 들어서는 사정·개혁의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칼 자루를 쥐고 흔드는 주체이다. 정치·경제·사회·교육 할 것 없이 어느 분야 건 칼날만 들이대면 고름이 쭉 쭉 흘러 나오는 한국의 총체적인 부정부패, 그런데 그 고름을 짜고 째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알고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그 누가 감히 사정하고 또 감시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한국의 언론계는 또 어떤가?
행정·입법·사법부에 이어 '제 4부' 또는 '무관의 제왕'을 자처하며 무소불위의 펜대를 휘두르는 한국의 언론들, '잘못된 역사'의 시기나 '바른 역사 세우기' 시대나 그 때 그 때 권력과 밀착, 권-언(權-言) 밀월을 만끽하는 한국 언론들, 그리해서 권력의 비호 아래 온갖 특혜를 받아 경영진은 재벌로 성장하고 일선 기자들은 특권 계층으로 부상되어 있는 그들을 지금 한국적인 상황에서 또한 그 누가 감히 사정하고 개혁할 수 있을 것인가?
사정의 칼자루를 쥐고 흔드는 한국의 사법부, 그리고 '칼 보다도 더 무서운' 펜대를 또한 쥐고 흔드는 한국의 언론들, 사정·개혁의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이 두 분야는 거의 무풍지대인데 한국의 부정부패 구조가 한 가닥을 잡아 당기면 그 끝 간데를 모를 만큼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는 속성을 감안할 때 온통 진흙탕 물의 늪속에서 유독 사법부와 언론계만은 독야청청할 수 있을 것인가?
<96. 11. 27.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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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 뿌리 뽑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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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는 자본주의 사회의 필요악인가? 그리해서 전 세계적인 현상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무역기구(WTO)가 각각 국제 간 뇌물공여 등 부정·부패를 방지키 위한 '부패 라운드'를 마련 중이라는 소식이고, 또 UN에서도 각국 공직자들의 올바른 복무 자세를 가이드하는 '공직자 복무·윤리강령'(가칭)을 준비중이라는 뉴스다.
그런데 이 부정·부패 문제에 있어 한국은 과연 어느 수준인가?
'지상의 별'을 돈으로 따고, 상아탑의 교수직을 돈으로 흥정하고, 그리고 또 시민의 혈세를 세리가 뭉텅 뭉텅 짤라 먹는 일이 항 다반사로 일어나는 나라, 이 분야 역시 가히 선진급에 낀다고 볼 수 밖에 없겠는데, 한국의 이 뿌리깊은 고질병인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할 묘책은 영영 없는 것일까?
감히 몇 가지 구체적 방안을 제언한다.
모든 부정·부패를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돈'으로 귀착하는 것, 이 '돈'의 기능·관리에 있어 제도적으로 어떤 '특단(特斷)조치'가 없는 한 그 근원적인 해결은 백년하청이라는 생각에서다.
1) 일정액 이상 현금(현찰) 사용을 불법화 하라!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불편케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떤 기준을 책정 (예컨데 50만원, 또는 1백만원), 그 이상 현금 사용을 법으로 일체 금지시킨다. 검은 돈·부정한 돈은 대부분 그 증거가 안 남는 현찰로 거래되는 법, 이렇게 되면 떳떳치 못한 돈을 주고 받는 사람들은 이중 삼중으로 죄의식을 느끼게될 것이 아닌가?
이 같은 '특단의 법'이 시행되면 수 십억 원의 현찰을 사과 박스에 넣어 지하 창고에 보관하는 따위 범죄는 어려우리라고 본다.
2) 일체의 지불 수단은 수표로 하도록 하라!
위에 책정한 일정액 이상의 거래는 모두 그 사용자와 수취인의 이름이 적힌 수표를 사용케 한다. 필요시 언제든지 그 돈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은행 자기앞 수표에 수취인 이름을 명기하라!
한국의 은행 보증수표(자기앞 수표·미국의 Bank Check 또는 Cashier's check)는 그 액수의 다과를 불문하고 수취인 이름이 명기 안 된다. 현찰과 똑 같다. 따라서 추적이 어렵다. 미국 같이 수표 발행 때 반드시 수취인을 명기하면 필요시 또한 그 추적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다.
4) 은행구좌 한도를 책정하라!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은행구좌를 보면 한 사람이 제1·제2 금융권 여기 저기에 수 십개 구좌는 보통, 어떤 경우엔 70∼80개의 은행구좌를 보유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은행구좌가 필요하단 말인가?
부정·부패 사건 때 마다 수사당국이 그 검은 돈의 행방 추적에 무척 애를 먹는데 "1인 1구좌" 또는 2구좌로 제한한다면 또한 그 추적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 아닌가?
5) 개인 평생 고유 번호를 만들라!
한국서 신분증으로 사용되는 주민등록증은 거주지를 옮기면 바뀐다. 그래서 요령만 있으면 몇 개고 소유할 수가 있다. 이를 폐지하거나 아니면 이 외 미국의 S.S 번호 같은, 그 사람이 낳아서 죽을 때 까지 따라 다니는 고유번호를 만들라. 그리고 또 미국 같이 어떤 거래에서건 이 고유번호 기재를 의무화 하라.
이제 한국도 컴퓨터 시스템이 그만큼 발전되어 있으니 그 고유번호 하나만 뽑아 보면 그 사람의 모든 신상명세·재산 상태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6) 은행 예금 때 돈의 출처를 밝히게 하라!
일정액 이상의 현금(현찰) 거래가 불법화 되면 금융기관에 들어오는 것은 거의가 수표, 그런데 이 수표도 일정액 이상은 반드시 그 출처 명세서를 첨부토록 의무화하라. 그리고 또 미국 같이 거액수표는 은행이 이를 즉각 국세청에 보고케 하라.
7) 고가품 매입자 신원 확인하라!
그 무엇이 되었건 일정액 이상의 고가 상품을 사고 팔 때, 파는 사람은 사는 사람의 신원을 확인·비치케 하라. 또 그 지불하는 대금의 출처 명세서를 아울러 요구할 수 있도록 법제화 하라.
8) 부동산 거래 돈 출처 보고케 하라!
모든 부동산 거래에 있어 액수에 상관없이 그 돈의 출처를 매매가 이루어 질 때 또는 소유권 등기 때 보고케 하는 강제 규정을 만들라.
9) 미성년자 재산소유는 불법화 하라!
조실부모 등 특수한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부모가 있는 17세 이하 어린이 명의의 일체의 은행예금·증권·부동산 소유는 불법화 하라.
10) 국세청은 정액 봉급자건 자영사업자건 소득이 갑자기 상향곡선을 긋는 대상자를 예의 주시, 지체없이 세무사찰 하라
그 어느 경우이건 검은 돈·부정한 돈이 아닌 한 수입이 갑자기 껑충 뛸 수는 없기 때문이다.
<96. 11. 14.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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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골프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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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웃기는 일이다.
정치인 두 명(이수성 총리·김종필 총재)이 골프 한 번 같이 친 것이 매스컴엔 큰 뉴스가 되고, 정가엔 큰 이슈가 되고, 또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큰 화제가 되니 말이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는 있다. 한국 공직자들에게는 불문율처럼 되어있는 '골프장 금족령'을 국무총리가 앞장서 어겼으니 그렇고, 더욱이 그 상대가 요즘의 미묘한 정치기류를 타고 알쏭 당쏭한 곡예를 부리는 한 야당총재였으니 뉴스의 초점이 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같은 정치적인 상황·배경을 다 감안한다 해도 단 돈 2, 30달러만 들고 나가면 맘껏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이 땅의 범인(凡人)'으로서는 골프를 둘러싼 그 한국적인 희화(戱畵)가 너무나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웃기는 것은 이번 둘의 골프회동을 두고 대통령의 내락을 받았느니, 안 받았을 거라니, 하는 무성한 논의다.
도대체 일국의 국무총리가 골프 한 번 치는데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나라가 지금 이 지구상에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민주화·세계화를 요란히 떠드는 마당에 아직도 이같이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그 내력을 한 번 살펴보자.
김대통령은 취임 초기 "골프가 재미는 있지만 내 임기 중에는 절대로 안 치겠다"고 공언을 했다. 그런데 왜 안치겠다는 것인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개혁 대통령'으로서 한가히 골프나 즐기는 이미지가 안 어울렸을 거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무언의 명령·지시가 되고 또 그의 의중(意中)을 헤아려 알아서 기는 한국 관료사회, 그의 "나는 골프 안 치겠다"는 말은 곧장 "공직자는 골프 치지 말라"는 지시로 둔갑되어 지금까지 공직자들은 속으로는 치고 싶어도, 또 칠 수 있는 돈과 시간이 있어도, '눈'이 무서워 몸들을 사리고 있는 형세인데 이번에 총리가 용감(?)하게 그 불문율을 깼으니 큰 기사 거리가 되고 화제가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인 줄 안다.
대통령과 골프, 50세 까지는 핸디 8을 꼭 이루겠다는 결심을 실현했다고 좋아하는 미국 대통령, 재미는 있지만 안 치겠다고 공언해야 하는 한국 대통령, 기껏해야 가십거리 밖에 안 되는 이 같은 하찮은 뉴스에서 우리는 그것들이 상징·내포하는 두 나라의 너무나 대조적인 정치·사회 풍토를 읽을 수 있는데, 한국의 '골프장 금족령'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
'개혁 대통령'으로서 "골프 안치겠다"고 공언까지 할 때는 골프가 사람들이 공감치 못하는 부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다. 곧 사회계층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더욱이 한국 같은 좁은 국토에서는 효율적인 토지 이용을 저해하는 등 너무나 폐해가 큰 스포츠에 '개혁 대통령'이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을 거다.
그렇다면 감히 말하고저 한다. 김 대통령은 '일인수범'의 소선(小善)은 이루었어도 '만인개혁'의 대선(大善)은 등한시 하고 있다고….
잘못된 것, 옳지 않은 것으로부터 자기 몸 하나 빠져 나오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시민이 할 바이지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더욱이나 '개혁 대통령'이라면 그 '잘못된 것' '옳지 않은 것' 또한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자신만 골프를 안 칠 뿐이지 한국의 사회 여건으로 보아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골프(장) 그 자체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같은 사회 풍토에서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그리고 일반 공직자들도, 사람들 눈총 안 받고 마음 편히 골프를 치려면 그것이 일부 특수 계층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돈 많은 사람, 권력 가진 사람, 지위 있는 사람들만이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창공에 나르는 백구를 즐기는 '귀족놀음'으로 남아 있는 한, 한국에서의 골프는 영영 사회계층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슬라이스 아니면 훅' 공만을 날리게 될 것이다.
<96. 10. 30.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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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학생 누가 키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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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폭풍의 데모'가 지나간 후 정부당국은 그 주동 학생들을 북의 사주를 받은 '좌경 폭력 혁명세력' 으로 낙인, 대대적인 색출·검거·와해 작전에 나서고 있고, 언론 또한 모두 한결 같이 "이 번 기회에 불온 분자들을 발본색원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강경 대책과 단호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는데, 이에 반해 몇몇 외국 언론들의 이에 대한 논평이 국내 언론과는 사뭇 다른 시각을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즉,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라프'지는 "연대사태 더 좋은 해법 없었을까…"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정부가 처음부터 학생들의 집회를 막지 않았다면 이번과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렇게 했더라면 아무런 정치적 위험 없이 학생들은 제풀에 기가 꺾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 독일의 '프랑크프르트 알게마이네'지는 또 이렇게 충고를 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생들이 빈곤에 허덕이는 공산주의 북한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들 모두가 좌익세력이라는 주장만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다. 한국은 운동권 학생들의 대북 호기심을 막기보다는 그들이 직접 북한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국의 정부당국·언론들이 그 격양된 충격과 흥분을 좀 차분히 가라앉히고 이 같은 해외 논평·충고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데, 필자로서 몹시 안타까운 것은 모두가 '나타난 현실'에만 집착, 이를 성토·규탄·매도 할 뿐 그 현상의 밑바닥에 깔린 보다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못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당국이 말하는 '좌경화'되어 '체제전복'을 위해 '무력혁명'을 꿈꾸는 그들이 과연 누구인가? 민주 자유 체제의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인가? "원인 없는 결과 없다."는 인과율(因果律)로 볼 때 거기에는 그 만한 이유·원인이 있을 것이 아닌가?
정부·언론은 그들을 처벌·매도하기 전에 이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하고 또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해야 한다. 이 같은 근원적인 원인에 대한 접근 없이 나타난 현상만을 아무리 단속·처벌해 보아야 그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 우리 사회(나라)가 건강치 못하고, 튼튼하지 못하고, 숱한 허약점을 지니고 있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국내 어느 신문은 북의 주체사상을 일종의 사이비 종교 내지 사교(邪敎)로 보고, 데모 주동 학생들을 이 같은 사교에 심취한 광신도로 까지 몰아가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떤 사회, 어떤 토양에서 사이비 종교·사교가 생성·발호하고 또 어떤 사람들이 이 같은 광신에 휩쓸리게 되는 것인가?
병든 사회, 불안정한 사회,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회, 이 같은 사회, 이 같은 토양에서 사교가 날뛰고 광신이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허약한 체질의 신체에 병균이 쉽게 침입할 수 있듯이 건강치 못한 사회, 그래서 허약점이 많은 사회에 "불온사상"이 쉽게 침투, 발호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렇게 보면 '데모학생' 또는 '학생데모'를 키운 것은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북의 주체사상의 사회주의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 우리 사회(나라)라는 생각이다.
<96. 9. 4.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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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의원들에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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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병정들"
역사의 전환기를 맞아 뜻 있는 민중들의 큰 성원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국회에 진출한 새내기(初選)의원들이 지난 두 달여 의회 안팎에서 보여준 정치 행태에 대해 어느 대학 교수가 흡사 나치 치하의 "독일병정들" 같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을 보고 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악이 좀 누그러진 후에는 "결국 그들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구나…"하는 긴 한숨과 함께 무서운 분노가 치밀어 오는 것을 또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름도 신선한 '새내기'의원 여러분들, 임기는 시작됐다지만 국회가 정상 운영도 되기 전에, 그리해서 가슴에 금뱃지는 성급히 달았겠지만 민중들 앞에 정식 의원 선서도 채 못한 처지에 어떻게 해서 벌써부터 "독일 병정 같다"는 혹평이 나오고, 또 "싹수가 노랗다"느니, "누런 금뱃지는 X뱃지"니 하는 실망과 비난의 소리가 많은 사람들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
여기서 한 번 되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민중들이 왜?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하라고? 하필이면 당신네들을 의회에 진출 시켰는가를…. 결코, 당의 나팔수 장단에 맞춰 돌격조니 저지조니 하는 패싸움이나 벌이고 신성한 의사당 안에서 시장 바닥 잡배들도 입에 담기 어려운 "X같은 놈들…"하는 욕설·고함이나 앞장서 외쳐 대라고 그 많은 후보자들을 다 따돌리고 굳이 여러분들을 국회에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3류 4류도 못되는 기존 국회 판(版)을 한 번 깨 보아라. 그래서 "코메디 만도 못한 한국 정치판" (코메디안 출신 전 국회의원의 말)에 한 번 새바람(新風)을 불어 넣어 보아라, 이것이 젊고 순수한 새내기 의원들을 137명 (45.8%) 이나 탄생 시킨 민중들의 뜻이자 바램인 줄 압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여러분들이 민중들로부터 "정치 신인들에게 희망을 걸기에는 싹수가 노란 것 같다" (서강대 S교수)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름도 어여쁜 새내기 의원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지금 처한 입지가 얼마나 어려운 줄을 잘 압니다. 풀뿌리 민주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먼 3김 구도의 정치현실에서 당수의 공천을 받고 또 그 당의 지원에 힘입어 어렵사리 달게 된 금뱃지, 그 운신의 폭이 얼마나 좁은 지도 잘 압니다. 그리고 또 막상 제도정치권 안에 들어가 보니 학창시절 또는 재야·원외에 있을 때 품고 있던 이상과 포부를 펼친다는 것이 얼마나 지란(至難)한 일인가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거기에 손발이 묶여 옴짝달싹도 못하고 기성 정치인 모습 그대로 거수기 노릇이나 하면서 앞으로 4년을 어정버정 보낸다면 여러분 자신들을 위해서나 굳이 여러분들을 뽑아 국회로 보낸 뜻 있는 민중들을 위해서나 너무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외에 사는 한 민중으로서 간절히 바랍니다. '새내기 의원들이 과연 기성정치인들과는 다르구나'하는 모습을 민중들 앞에 보여 주십시오. 그리해서 4년 후 그 때에는 당수 아닌 풀뿌리 민권들이 쌍수를 들고 "아냐, 그 의원을 다시 국호에 보내야 돼" 하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96. 7. 10.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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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노력 없는 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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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옹이 "7대 사회악"의 두 번째로 손꼽은 "노력없는 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선 얼핏 생각되는 것이 '불로소득(不勞所得)'이라는 한자다. 그것이 정신적 노동이었건, 육체적 노동이었건 자기 이마에 땀 흘리지 않고 얻는 부, 그 같은 부는 모두 사회악이라는 뜻 일거다.
그렇다면 불로소득의 가장 으뜸 되는 것은 무엇인가? 상속으로 받는 재산이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재산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 나자 마자 자기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얻어지는 부이기 때문이다.
이 재산 상속이 얼마나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큰 사회악 인가를 좀 더 분석해 보자.
오늘날은 "만인 평등"의 민주시대라고 한다. 이 때 평등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삶의 기회에 있어서 평등을 말한다. 삶의 기회의 평등, 그것을 어떻게 이룩할 수 있는가? 가장 첫 번째 룰은 스타트가 같아야 한다. 마치 육상경기에 있어서 모든 선수들의 출발 지점이 똑 같듯이….
그런데 부의 상속은 이 '스타트 룰'에 정면 배치된다. 배치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 '스타트 룰'이 존재하지를 않는다. 인생이라는 경주에 있어 누구는 큰 애드벤티지(Advantage)를 갖는 반면 대다수 사람들은 너무나 큰 디스애드벤티지(Disadvantage)를 안고 출발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사회정의니 기회균등을 운위할 수 있을 것인가?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보자.
재벌 2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그 부모들로부터 수 십, 수 백, 수 천억의 부가 저절로 주어진다. 그 부는 눈꼽 만치도 자기의 '노력 없는 부'다. 분명 간디 옹이 말하는 불로소득이다. 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서 죽을 때 까지 피땀을 흘려도 그만한 돈을 구경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너무나 큰 불평등이 운명적으로 야기된다. "만인은 평등"이라는 시대에 이 얼마나 불평등하고 불공평한 일인가?
봉건시대에 있었던 계급의 세습도, 직위의 양위도 다 없어진 민주 시대, 오직 하나 남아있는 봉건시대의 잔재인 이 재산상속 제도도 하루 빨리 인류의 역사에서 사라질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 한 이상주의자의 한결 같은 꿈이다.
<96. 5. 8.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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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原則 없는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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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김영삼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간디의 어록이 쓰인 두루마리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그 어록에는 '7대 사회악'을 나열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원칙 없는 정치', '노력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특성없는 지식', '도덕 없는 상거래', '인간성 없는 학문', '자기희생 없는 신앙' 등을 들었다고 한다.
이 중 일부에 대해 설명을 들은 김 대통령의 감회가 어떠했는지 자못 궁금한데, 간디옹이 사회악의 첫 번째로 손꼽은 '원칙 없는 정치'에 대해서 김씨에게 그 의견을 묻는다면 과연 어떤 말이 나올 것인가?
"원칙 없는 정치"는 곧 "원칙 없는 정치인"으로부터 비롯되느니 만치 아직도 건재한 세 김 정치 시대의 상황에서 그들이 과연 원칙 있는 정치인들인지, 아닌지 이에 비추어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YS --세칭 민주 야당총재로서 군사 독재 정권의 계승인 6공때 그들과 합당, 그 여당의 후보로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두고두고 아킬레스 건이 되고 있는 YS, 그래서 원칙 없는 정치인, 소신 없는 정치인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는 그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당시 상황에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유일한 "구국의 길"이었다. 다른 길이 없는 한 '선'을 창출하기 위해 '악'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남은 임기 중에 정말로 역사를 바로 세운다면 먼 훗날 민중들이 이를 이해하고 용납할 것이다.
DJ -- 몇 번인가 민중 앞에 "이제 정치 않겠다"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해 놓고 이제 다시 내년 대선의 꿈을 꾸고 있는 DJ, 정치인으로서 이같이 원칙 없는 행위에 대해 그는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으로 상상된다.
정치란 것이 무엇인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정치인의 말이란 항상 복선이 깔려 있는 법, 나 만한 정치 거물이 "정치 않겠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또한 의미심장한 다목적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제 민중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또 원하니, 그 뜻에 따라 대선에 나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JP--5·16 군사 구테타 주역의 하나, 저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의 창시자, 그래서 한국 현대사에 군사 구테타라는 악의 씨를 첫 번째로 뿌린 장본인, 그가 원칙 있는 정치인인지 아닌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95. 5. 1.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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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 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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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부터 고국에서는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일제 잔재라고 해서 이를 '초등학교'라는 말로 바꿔 쓰고 있다.
당시 당국에서는 '국민학교'라는 말이 왜 일제 잔재인지 충분한 설명이 없었는데 짐작컨데 이 말이 일제가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 해서 이를 바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교육부는 그 때에 학교 명칭만을 바꿀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國民)'이라는 말 자체가 과연 민주화 시대에 적절한 용어인지 한 번쯤 연구·검토를 했어야 옳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국민'이라는 말은 다분히 전 근대적·비민주적 용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영어에는 우리말 '국민'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 링컨의 유명한 말, "by the people,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할 때에 'people'은 우리말 '국민'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그 개념에 있어 'people'은 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천부적 인권을 지닌 '뭇 사람들'을 뜻한다.
반면 우리말 '국민'을 분석해 보면 글자 순서 그대로 '나라(國)'가 앞에 오고 '백성(民)'이 뒤에 온다. 곧 국가가 상위 개념이고 사람들(people)은 하위 개념이다. 다시 말해 '국민'은 국가에 예속 내지 종속되어 있는 존재라는 뉘앙스를 강력히 내비친다.
이는 곧 먼 옛날 봉건왕국 시대 "왕이 곧 국가"이고 '백성'을 포함, 나라의 모든 것이 왕 또는 왕국에 예속 내지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의 표현 아닌가?
그런데 오늘날은 나라의 주권을 '만백성'이 갖고 있는 민주시대다. 결코 '백성'이 국가에 예속 또는 종속되는 존재일 수가 없다.
하루 빨리 민주화·세계화 정신에 발맞추어 비민주적·전근대적 용어인 '국민'이라는 말을 개조하거나 새로운 말로 바꾸어야 될 줄 안다. 한편 우리 씨알(民草)들이 스스로를 '국민'이라고 자칭하는 한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국가, 그리고 그 때 그 때마다 국가의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위정자·집권자들이 "국민은 국가를 위하여!"라는 구호, 즉 "애국"이라는 이름을 빌어 우리 people들을 그들 자의대로 좌지우지하려 할 것이다.
<96. 3. 27.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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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 와 El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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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 땅에 풀뿌리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한 것인가?
요즘 고국서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정치풍토를 바라다 보면서 나오는 한숨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각 당의 후보 공천 뒷 이야기-.
대의민주정치의 기본이 무엇인가?
그 대표자를 사람들이 직접 뽑는 것 일거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대의 민주주의 정치를 표방하면서도 사람들의 이 기본권이 제도적으로 봉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왜 그런가?
도대체 민중의 대표가 될 후보를 결정하는데 있어 민중의 의사와는 하등 관계없이, 당에서 그것도 당수(총재) 한 사람의 전권이 좌지우지 하니 국민들의 선거권 ( 및 피선거권) 영역이 그 만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미국은 연방의원에 나설 후보 단계에서 부터 주권자인 국민이 간여한다. 즉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물론 일정한 자격요건은 갖추어야 하지만-후보로 나설 수 있고, 또 많은 후보들 중 누구를 당 후보로 내세울 것인가도 민초들(지역구 당원)이 결정한다. 다시 말해 국회의원을 뽑는 election 권리와 함께 그 후보를 가리는 selection 권리도 또한 국민들이 행사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한가?
정강·정책의 구심체가 아닌 일인보스 중심의 붕당에 가까운 허울만 좋은 정당들, 주권재민을 표방하면서 대표(국회의원) 선출권과 함께 국민의 기본권리인 후보 결정권(공천권)을 국민들로부터 빼앗아 마치 자기 것인 양 한 손아귀에 틀어쥐고 공천권을 행사는 정당의 보스들, 그리해서 각 후보들은 공천을 따내기 위해서 자기들의 주인인 민중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공천권을 거머쥐고 있는 당 보스에게 절대 복종과 절대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 좌표인데, 언제나 되어야 우리 고국도 민초들이 자기 대표 election 권리와 함께 selection 권리까지 향유할 수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것인가?
<96. 3. 13.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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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民草가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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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갖은 우여곡절·진통 끝에 마침내 노태우씨가 구속·수감됐다.
재임 5년 동안 겉으로는 보통사람들을 위한 '보통 대통령'이라는 가면을 쓰고 뒷 구멍으로는 단군 이래 최대의 부정축재를 한 대도(大盜)에게 지금의 감옥도, 더욱이나 수세식 변기와 세면대가 딸린 독방도 너무나 과한 대접이라는 생각인데 우리 (동포)들은 이 노씨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또 어떻게 매듭지어 지도록 기원해야 할 것인가?
역설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면 노태우씨는 우리 나라 역사 발전에 두 가지 점에서 크게 공헌을 하고 있다.
공헌의 첫 번째는 우리 나라 사회구조에서 그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권력 계층과 재벌들의 세계가 얼마나 부정하고, 부패하고, 더럽고, 흑막 속에서 돌아가는지, 그 실례를 극적으로 민초에게 보여준 것이 그 하나이고, 두 번째는 부정 부패한 권력의 말로가 끝내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만인에게 산 증인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층부의 한 모습-
여기서 잠깐 한국의 권력을 가진 자와 돈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놀았는가를 다시 한번 상상해 보자.
이름도 거룩한 청와대, 대형 금고가 숨겨진 후비진 밀실,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와 대재벌의 총수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돈을 더 벌게 해주마" "그러면 그 절반을 내놓죠" 이렇게 해서 오간 검은 돈 -떡값? 성금? 정치자금? 한국의 권력자는 언어까지 멋대로 만들어 내는 힘이 있다-이, 그 기간으로 따져 기네스 북에 오를 수 있는 액수의 천문학적인 단위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은 숱하게 들어 왔지만 돈과 권력의 야합 행태가 이렇게 범죄 조직으로 저 악명 높은 마피아 집단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니 선량한 백성들이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런데 아무리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힘을 손 안에 쥐고 있었다지만 이렇게 천인 공노할 극악 무도의 범죄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필자의 견해로는 노씨의 부정 축재는 노 씨의 도심(盜心)과 한국이라는 나라의 총체적인 부정부패가 딱 맞아 떨어진 합작품이다. 한국사회의 모든 분야, 정치·경제·사회가 원칙대로, 법대로 공명정대하게 돌아간다면 노씨가 그런 흑심(黑心)을 감히 품을 수 있었을까?
설혹 그런 마음을 가졌다 해도 그 도심의 실현이 과연 가능했을 것인가? 불가능 했으리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상층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뼈아픈 자기 반성과 응징이 있어야 될 줄 안다.
어떻게 마무리 할까?-
그러면 이제 이 '역사적인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 것인가?
이를 계기로 철저한 과거의 청산이자 과거와의 단절이다. 과거의 청산은 곧 지난 날의 부정·부패·비리를 샅샅이 파헤쳐 가차없이 처단하는 일이다. 그리고 과거 와의 단절은 구시대 구악의 인물들 특히 정치인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추방하는 작업이다.
이중 첫 번째 작업은 현 정부의 몫이다. 그런데 「태생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YS 정부가 과연 이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법 앞에 만인은 평등"을 다짐했으니 두고 볼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과업은 민초의 몫이다. 4천억 비자금을 최초로 폭로한 박계동 의원은 호소한다. "깨끗한 정치인 50명만 국회에 들어와도 우리 나라 정치풍토가 많이 달라질텐데…"라고.
그런데 민중 하나 하나는 깨끗한 정치인 50명을 국회에 보낼 수 있는 투표권 하나 하나 씩을 갖고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이 번 기회에 과거의 부정·부패·비리를 뿌리 뽑지 못하고 또한 거기에 물든 구시대 인물들을 숙정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가?
일제시대 친일파 일족들의 후손들이 지금, 독립 지사 자손들보다 훨씬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 자유당 일인 독재, 그 후 군사 정권의 탄생 및 유지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회 각 분야 상층부에서 내노라 건재하고 있다. 그리고 또 5공의 우두머리 전(全)의 친인척들이 지금 엄청난 재산을 굴리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철저한 과거청산을-
만일 이번에도 과거 청산을 철저히 하지 못한다면 이 같은 부정의(不正義) 불합리 모순이 대대 손손 역사적으로 이어질 것이 아닌가?
2차 대전 후 불란서는 나치에 협조한 부역자 2만 여 명을 처형·투옥·처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태리에서는 지난번 「깨끗한 손」작전 때 부정·부패한 공무원·기업가 2백 여명을 투옥시키고 그 중 20여명은 자살, 또는 처단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철저한 과거청산 구악 일소인가?
우리도 이 번 기회에 흐트러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깨끗한 사회 건설을 위해 이와 같은 철저한 과거청산, 구악 일소가 뒤따라야 될 줄 아는데 과연 이 역사적인 과업을 누가 해낼 것인가?
지금 한국의 집권세력도, 여야 정치인도, 사법부도 아닌 민중의 결집된 파워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95. 11. 22.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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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미주朝鮮』)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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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그래서 한국의 '부패의 역사'도
'계속 반복'되는 것인가?
다음의 글은 위의 시론(時論) '이제 민초가 나설 때다'의 필자 장동만씨가 7년 전(1988년 11월 2일자) 본지에 쓴 '재벌과 5공 비리' 제목의 글 전문이다.
이 글에서 '5공'을 '6공'으로 '全씨'를 '盧씨'로만 바꾸면, 곧 바로 오늘 이 시간에 쓴 글과도 같이 모든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진다.
독자들에게 '역사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 위해 7년 전 글을 여기에 다시 한 번 게재한다.
독자 여러분들의 필독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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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래 최대 부정사건이라는 소위 '5공 비리'가 하나씩 터져 나올 때마다 우리는 너무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남녀 '주인공'을 비롯한 사돈의 팔촌까지 친·인척 일가들이, 국제무기 거래에서부터 지방도시 시장에 이르기 까지 이권이 개입될만한 것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샅샅이 파고 들었는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였고, 둘째는 그 돈의 액수가 너무나 엄청난 데에 대해 또한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중 '새마을 운동'이다, '일해재단'이다, '새세대육영회'다, '심장재단'이다 하는 명분(?)있는 기관에 재벌들이 성금, 의연금, 기부금, 찬조금 등 허울좋은 명분으로 바친 돈의 액수를 보면 몇 백억 원을 오르내리는데 '5공 비리'를 단죄하는데 있어 나로서는 총칼을 무소불위로 휘두른 그 '주인공'과 함께 자의건 타의건 이에 협조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재벌들을 또한 규탄치 않을 수가 없다.
독재정권의 하수-
감히 이 같은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는 이렇다.
첫째. '5공 비리'가 곧 독재권력의 무법·탈법적인 정치 행위 및 거기서 야기되는 온갖 부정·부패를 총칭하는 것이라면 돈이 얽힌 부정·부패에는 항상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있는 법. 그런데 이 경우 바로 재벌들이 '주는 자'로서의 역할을 다 했기 때문이다.
하루 1, 2천 원 임금을 받는 여공들이 봉급 몇 푼 더 올려 달란다고 폐업·휴업을 서슴치 않는 재벌들이 '높으신 분' 말씀 한 마디에 마치 고양이 앞에 쥐 꼴이 되어 수 억, 수 십억, 수 백 억 원을 부랴부랴 갖다 바친 그들의 행태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당시 상황에서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 했다" (모재벌 총수의 말)는 것이 그들의 변명이지만 이제 역사가 바뀌어 그 '절대 권력'을 응징하는 마당에 자의였건 타의였건 이에 협조 내지 도움을 준 재벌들에게도 그 일단의 책임을 물어야 옳을 줄 안다.
정·경 유착의 표본-
둘째로, 그들이 그렇게 갖다바친 수 억, 수 십억, 수 백억 원의 돈이 과연 어떤 돈이었던가? 누구의 돈이었던가? 민중의 입장에서 이를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돈은 재벌의 돈도, 다른 누구의 돈도 아닌, 분명 '우리의 돈' '나라의 돈' 이었다. 왜 그런가?
한국의 재벌들은 하나 에서 열 까지 모두가 엄청난 은행 빚(융자) 및 외국 빚(차관)을 짊어지고 있다.
현대그룹은 자기자본 1조 4천억 여 원에 부채가 총 7조 5천억 여 원으로 부채비율이 546%, 삼성그룹은 총자본 8천 6백 억여 원에 총 부채가 약 6조 억 원 (부채 비율 7백%), 럭키 금성그룹은 총자본 1조 2천억 여 원에 빚이 5조 5천 억 여 원(부채비율 455%), 대우그룹이 총자본 1조 2천 여 억 원에 빚이 7조 8천억 여 원 (부채비율 663%), 선경그룹이 총자본 4천 7백 억 여 원에 빚이 2조 4천 억 여 원 (부채비율 509%), 심지어 한보그룹 같은 기업은 자기 자본 23억 원에 부채 총계가 4천 6백 억 여 원으로 부채 비율이 자그만치 1백 9십 9배나 된다.
성금도 국민의 세금-
다시 말해 그들은 기업을 자기 돈 아닌 '민중의 돈' '나라의 돈'으로 운영하고 있다. 만일을 가상해서 그들이 이 빚을 일시에 갚아야 한다면…아마도 한국의 재벌 대부분이 그 존립이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기업활동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일체의 돈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의 사유 재산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민중의 돈' '나라의 돈'을 갖고 개인적으로 초 호화판 생활을 누리면서 어느 때 권력의 하명만 있으면 득달같이 수억, 수 십억, 수 백 억의 돈을 즐거이 갖다 바친 것이다.
셋째, 재벌들은 이 엄청난 돈을 그렇게 바치고 난 후 회사장부상 이를 어떻게 처리했을 것인가?
사회악의 근저(根底)-
명분이 성금·의연금·기부금·찬조금 기금으로 되어 있으니 공익기관에 대한 '도네이션'으로 처리, 그에 상응한 세금감면을 받았을 것이다 즉 그들로서는 성금으로 내나 세금으로 내나 마찬가지, 같은 값이면 권력에게 어여쁘게 보이기 위해 도리어 성금 쪽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세금을 안 냄으로써 그 만큼 국고를 축낸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때 '5공 비리'는 절대권력과 대재벌이 한통속이 되어 엄청난 '나라의 돈' '민중의 돈'을 멋대로 유용한 정경유착의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단군 역사이래 최대 최악의 부정·부패 사건이라는 '5공 비리'를 다스리는데 있어 그 주역인 '절대 권력'의 하수인 내지 파트너 구실을 한 재벌들에게도 마땅히 그 일단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88. 11. 3. 『미주朝鮮』·95. 11. 22. 재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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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萬人의 것'이어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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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재산공개에 붙여-
전국민에게 '고통의 분담'을 호소하면서 '안정 속에 개혁'을 통해 '한국병'을 치유, 사람들 모두가 '신바람 나게' 일을 하는 '신한국'을 창조하겠다는 기치를 높이 내걸고 출범한 새 정부가 '깨끗한 정치'를 위한 첫 단계로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을 공개케 하자 그 파문이 예상외로 번져 큰 사회적인 파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고국 소식이다.
이번에 공개된 그들의 재산 내용을 보면 청와대 수석비서관 및 각부 장관들의 평균 재산이 10억 7천만 원, 여당 국회의원들이 25억 5천만 원, 그 엄청난 재산을 보고 보통 사람들이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이 땅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면서 근근히 한 푼 두 푼 씩 저축을 하는 우리들로서도 그들 재산 액수를 달러로 한산해 보고 그 천문학적 숫자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데 이 번에 그들이 공개한 재산은 갖은 머리를 짜내어 '빼고 줄이고 감추고' 한 후에 액수, 실제 재산은 아무리 줄여 잡아도 그 곱절은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거기다가 또 한국 사회풍조로 보아 그 개연성이 극히 농후한 무기명 구좌 재산, 해외 도피 재산, 집에 감춰둔 현찰, 그리고 고화·골동품·보석 류 등은 밝히지 않았으니 그것들을 모두 합치면 그들의 총 재산은 엄청나게 더 불어날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덧붙여 또 그들의 재산목록 중 가장 으뜸을 차지하는 부동산의 경우, 그들은 아들·며느리·손자·손녀의 이름까지 빌려 휴전선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전국 방방곡곡 노른자위 땅마다 투자를 해놓고 있어 더욱 일반 민초들의 울분을 자아내고 있는데 '부정부패 척결' '깨끗한 정치'를 국정의 제일 목표로 삼고있는 김영삼 정부는 과연 이번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들리는 바로는, 정부는 이번 재산공개 파동이 더욱 확대됨으로써 몰고 올 더욱 큰 소용돌이를 우려, 지금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몇 몇 국회의원을 의원직 사퇴·출당·제명 등 중징계 하는 선에서 이를 매듭지을 방침이라는데 개혁을 부르짖는 새 정부가 이 번 사태를 이 정도에서 끝내버려도 과연 옳을 것인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번 그들의 재산공개에 따른 사태의 문제성이 너무나 심각하고 또 그 심각한 문제의 해결 없이는 개혁·쇄신이라는 새 정부의 구호가 한갓 공염불에 그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어떤 국회의원은 이렇게 항변했다고 한다.
"너도 똥이 묻고 나도 똥이 묻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냐?"고. 그리고 또 어떤 검찰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말 깨끗한 사람을 찾자면 승려·목사밖에 더 있겠느냐"고.
지금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각종 부정부패, 비리, 불합리가 너무나 뿌리깊이 박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고리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 가닥을 잡아 당기면 더욱 더 큰 부정 부패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 남으려면 너 나 할 것 없이, 적건 많건, 타의건 자의건 내 몸에 때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볼 때 이번에 재산을 공개한 그들만이 돌팔매질을 맞아야 할 대상이 아닌 줄 안다 국정감사의 칼날도 안 들어간다는 한국의 사법부, 권력과 유착되지 않고서는 부의 축적이 불가능했던 한국의 재벌들, 그리고 5·6공의 실세였던 군 고위장성들, 그리고 또 요즘 정치권 일각에서 "언론계 너희들은 과연 문제가 없느냐?" 는 말이 나온다는 한국의 언론 재벌들, 그들이 모두 차례 차례로 그 재산을 공개한다면 과연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가?
얼마 전 AP통신은 한국의 부정부패에 대해 "이를 통제하는 것이 이미 어렵게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새 정부가 아무리 이를 없애려 해도 실제로 뿌리 뽑히기 까지는 1, 2백년은 걸릴 것이다"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과연 새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번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계기로 새삼 크게 부각된 한국 사회의 부정부패와 땅의 문제, 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새 정부의 개혁 의지 및 개혁능력을 가늠할 수 있겠는데 여기서 필자는 감히 주장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을 도모하는 사회정의의 입장에서 그리고 지금 어떻게도 손을 쓸 수조차 없을 만큼 고질화 된 부정부패를 근원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서, 땅 사유권 제도를 아예 폐지, 이를 공유화·국유화하는 길을 적극 검토하라고. <계속> <93. 4. 7. 『미주 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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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萬人의 것' 이어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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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재산 공개에 붙여-
이번 그들의 재산공개에서 보듯이 재산목록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부동산, 특히 토지다. 지금 한국서 돈 가진 사람, 권력 가진 사람 치고 부동산에 투자 안한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떵떵거리려면 땅, 땅,…"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땅이 치부의 수단, 투기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리해서 사람들이 그 땅을 한 뼘이라도 가져보려, 이미 가진 자는 한 치라도 더 늘리려, 아귀다툼을 벌이게 되니 그 과정에서 온갖 부정부패가 생성케 되는데 과연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필자의 신념으로는, 땅은 '만인의 것'이 되어야 한다. 신의 섭리가 그렇고, 또한 인간 양심에 바탕한 사회정의가 그렇다.
인간을 비롯한 지구 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그 생명을 존속키 위해 필요 불가결한 기본적인 요소는 거의가 모두 공유(共有)다. 즉 햇볕·공기·물 모두가 '만인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땅'이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런가? 잘못된 인류문명, 특히 잘못된 자본주의 제도의 가장 큰 결함이자 죄악이다.
'땅'의 사유권 제도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자. 힘과 완력이 지배하던 원시시대, 힘 센 자들이 아무 곳이나 멋대로 울타리를 쳐 놓고, "이 안은 내 땅이니 침범치 말라" 한 것이 토지 사유화 제도의 시초라고 하지 않는가?
한국의 경우 이조 말엽 까지 땅의 사유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적인 장치 즉 등기제도 조차 없었다고 하다.
그 와중에서, 특히 한일합방, 8·15, 6·25 등 역사 변혁기에 그 혼란을 틈타 역시 힘세고 약삭빠른 자들이 아무 땅이나 멋대로 연고권·점유권을 주장, 나라의 땅, 곧 '만인의 땅'을 자기 개인 소유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본래 햇볕, 공기, 물과 마찬가지로 '만인의 공유'로 창조해 주신 땅, 그것이 잘못된 제도로 인해 오늘날 '힘 센 자'들의 사유물이 되어버린 땅,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경우 극렬한 투기의 대상이 되어 온갖 부정부패를 자아내고 있는 땅, 새 정부가 진정 멋진 새 한국'(A Brave New Korea)을 창조하려는 결의가 단호하다면, 이 땅 문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지 근본적인 개혁이 있어야 될 줄 아는데 과연 그들의 개혁의지가 여기까지 미칠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말하리라. 자본주의 체제 국가에서 토지의 공유화라니, 될 법이나 한 소리냐고. 더욱이 '가진 '」들은 펄쩍 뛰리라.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공산주의를 우리가 다시 하겠다는 거냐? 고.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자본주의 체제가 결코 인류의 이상은 아니지 않느냐, 많은 장점·잇점이 있는 반면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숱한 결점·단점을 지니고 있지 않느냐, 사람이 만들어 놓은 체제,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것을 뜯어 고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이번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계기로 한국의 가진 자, 힘 센 자들이 그 금력과 권력을 이용, 마치 '땅 말아먹기' 경쟁이라도 하듯 전 국토를 듬뿍 듬뿍 나눠 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 같은 '꿈'을 그려 보았는데, 끝으로 어느 철학자의 말과 아울러 우리 나라의 선각자 정 다산의 글을 인용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는 천부적으로 그가 딛고 설 땅, 누워 잠잘 수 있는 면적의 땅을 소유할 권리를 받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은 마치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이 그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면적의 땅, 그 가지를 뻗을 수 있는 면적의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치는 正이요, 백성을 고르게(均)하는 것이다. 어찌 땅을 일부가 독차지하여 부후토록 하며, 어찌 땅의 혜택을 막아 빈박하도록 할 것이냐. 토지를 헤아려 백성에게 주되 균분되게 해야 한다. 이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 백성을 정균(正均)하는 것이다. ('原政')"
<93. 4. 14. 『미주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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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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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자!"
"같이서 살자!"
요즘 고국의 몇 개 신문사가 펼치고 있는 새해 캠페인 표어다. 표어를 곰곰이 씹어보니 많은 생각을 자아내기에 이를 적어본다.
우선 "더불어 살자" "같이서 살자"는 말이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있는 자 가진 자가, 없는 자 못 가진자에게 하는 말이라면 이는 오만이요, 횡포다. 배부른 사람들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그 상태를 그냥 놓아두고 "우리 더불어 의좋게 함께 살자"며 손을 내민다고 악수가 오갈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불어 살자!" "함께 살자!"는 이 말이 없는 자, 못 가진 자가 있는 자, 가진 자들에게 하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는 지금 한국 상황으로는 극히 위험한 사고다. 자칫하면 '빨갱이' 낙인이 찍히기 안성맞춤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이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민중 전체 각계 각층에게 하는 말인 줄 안다.
가진 자, 못 가진 자, 있는 자, 없는 자, 모두에게 호소, 지금 한국사회의 큰 불안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계층간의 갈등을 완화시켜 보려는 캠페인 인줄 안다. 그런데 이 같은 캠페인이 사회제도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 과연 어느 만치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우선 돈을 많이 가진 자. 적게 가진자, 못 가진 자가 있다. 그리고 또 인간 욕구의 대상인 권력·명예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있다. 이렇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가 상호 질투 없이, 알력 없이 의좋게 사는 사회를 '더불어 사는 사회' '함께 사는 사회'라고 한다면 과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제도의 혁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치관 재정립이 있어야 한다. 돈·권력·명예에 있어 불평등이 존재하면서도 사람들이 그 불평등에 대해 불평·불만을 품지 않도록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한 필자의 평소 신념을 하나씩 서술해 보기로 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에고의 존재, 특히나 오늘날 같이 사람들이 철두철미 에고의 화신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이기심'을 깰 것인가?
이상을 얘기하자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경말씀이 최상이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그러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인가?
사람이 자의식이 생기기 전, 예컨데 유치원시절부터 인간이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남과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생의 의미는 남을 도우면서 사는데 있다는 것, 이런 의식, 이런 교육을 우리의 2세들에게 뿌리깊이 심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린이들을 무서운 에고의 생존 경쟁장인 기존 사회로부터 격리·수용, 특수 집단교욱을 실시해야 될 줄 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돈이 만사의 기본'이 되는 자본주의, '사람 잘 산다'는 것이 곧 물질의 풍요라고 생각, 너 나 모두가 끊임없이 물질을 추구한다. 그러나 물질(부)의 양은 한정이 있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제 각기 더 많은 몫을 차지하려 하니 무서운 싸움(생존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싸움판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 '함께 사는 사회'를 아무리 외쳐보아야 그것이 한갓 구두선 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이 물질만능주의, 그것의 획득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생을 살아온 우리 기성세대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다. 희망이 있다면 이것 역시 우리 2세 들에게 그들이 철들기 전 어린 시절부터 인생의 의미가 결코 물질의 풍요에 있지 않다는 교육을 철저히 실시, 그들이 우리와 다른 인생관을 갖고 자라나는 길 밖에 없을 것 같다.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사람들, 그 상태를 그냥 놔두고 우리 '의좋게 더불어 살자!'는 것은 넌센스다. 사회공동체 전원이 '더불어 함께 살자'면 최소한 구성원 중에 추위에 떨고 배고픈 사람은 없어야 한다. 만일 물질의 절대량이 부족하다면 콩 한 알이라도 쪼개서 반쪽씩 나누어 먹어야 한다. 다시 말해 국가가 민중 전체의 최소한 의식주는 보장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경우 민중의 의식주 보장에 있어 가장 으뜸되는 것은 주거보장이다. 1인당 GNP 3천 7백 달러, 이제 배를 곯는 절대 빈곤은 벗어났다. 옛날 같은 절량민 아사자는 없다. 가진 자 잘 먹어 봐야 얼마나 먹어댈 것인가? 그리고 또 옷치장을 해봐야 남의 눈치례 밖에 더 되는가?
문제는 사람마다 두 다리 뻗고 누워 잠잘 수 있는 면적의 자기 땅, 자기 집이다. 전국적으로 가구 50%가, 서울의 경우는 60%가 무주택자라는 통계다
그러면 그 좁은 땅 덩어리에 그 많은 인총, 어떻게 민중 모두에게 주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필자의 의견으로는 토지의 공유화·국유화 밖에는 딴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다.
근래에 와서 한국에서 토지의 공개념 문제가 자주 거론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땅은 자본주의 체제, 그 안에서 생존을 위해 개개인의 경쟁이 불가피하다면 그 경쟁에는 공평한 룰이 있어야 한다. 그 룰이 공평치 못하다면 '만인은 평등'이라는 말은 헛 구호다. 그리고 또 그 룰은 육상선수가 경기를 할 때 그 스타트 선이 공평한 것과 같이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공평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감히 또한 재산 상속제도의 폐지를 주창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더할 수없이 공평하게 창조하신다. 즉 인간은 모두가 빈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야말로 공평한 스타트다.
그런데 다 같이 빈손인 인간이 이 세상에 삶을 받자마자 인위적인 불평등이 야기된다. 즉 부모를 우연히 잘 만나면 수 십억, 수 백억의 재산이 불로소득으로 주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모든 것', 따라서 자기의 능력과는 아랑곳없이 한 인간의 운명이 결정지어 진다. '만인은 평등'이라는 민주정신에 비추어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계급세습도, 지위양위도 모두 없어진 오늘날 민주시대에 이 재산 상속 제도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봉건잔재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돈을 추구한다. 그리고 또 본성적으로 권력을 지향하고 명예를 선망한다.
그런데 인간본성의 추구 대상인 이 세 가지는 모두가 한정되어있다. 모든 사람에게 바라는 대로 충족시킬 수는 없게시리 되어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세 가지를 각각 떼어 나누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중 하나라도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이것이 곧 사회정의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체제는 돈·권력·명예 이 세 가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즉 권력을 잡으면 명예가 저절로 뒤따르고, 또 돈벌기가 수월하고… 다시, 돈이 있으면 권력 잡기가 쉽고 권력을 잡으면 명예가 따라 붙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세 가지 중 그 어느 하나도 못 가진 반면에 몇 몇 소수는 이 세 가지를 몽땅 누린다.
'너도 사람 나도 사람' 이라는 평등시대에 걸맞지 않는 불평등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진정 '더불어 사는 사회'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려면 이 세 가지를 제도적으로 분리해야 한다. 즉 권력과 명예가 있는 사람은 돈을 적게 벌게, 권력과 명예가 없는 사람은 돈이라도 많이 벌 수 있도록 제도화 해야 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대통령, 장·차관, 사법부 요원, 국회의원 등은 그만한 권력과 명예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보상을 받고 있으니 봉급을 대폭 낮추어야 한다.
반면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은 권력도 명예도 없으니 돈이라도 많이 벌 수 있도록 임금체계가 바뀌어야 한다.
이리해서 사람마다 제각기 자기 직업에 만족하고 자기 삶에 보람을 느낄 때에 참다운 '더불어 사는 사회' '함께 사는 사회'가 이룩될 것이다.
<89. 1. 24. 『미주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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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이야기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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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빽 없고 반박할 힘이 없어"
얼마 전 전직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는 '5공 비리'의 하나로 말썽이 되고 있는 '새세대 육영회' 회원 1백 30여명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괴롭고 우울해 잠도 잘 못 이루고 있다"고 심경을 토로한 뒤, "대통령직에서 물러 난지 보름만에 여론재판에 몰리기 시작했다. 빽이 없고 반박할 힘이 없어 몰리고 있다."
그리고 또 회장직 사퇴여부에 대한 한 회원의 질문에 대해,
"나에 대한 의혹을 씻고 불명예를 회복할 때까지는 결코 회장직을 물러나지 않겠다"고.
이 글을 보면서 필자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이 터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제까지 하늘에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흔들던 대통령의 영부인이 이제 "괴롭고 우울해 잠도 제대로 못 잔다"는 말에 한 가닥 인간적인 측은함이 안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다음 대목, "빽이 없고 반박할 힘이 없어 몰리고 있다"는 망발만 일삼고 있으니 도대체 그들은 어떤 멘탈리티의 사람들인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 말라 지만 이번 '미세스 전'의 발언을 보고 자꾸만 그 사람까지 미워지는 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제2화-"테러군인은 양심법"
'청산돼야 할 군사문화' 라는 글을 쓴 '중앙경제' 오 부장에 대한 군인테러 사건을 두고 군 출신 모 민정당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이번 사건이 사회의 모든 악행과 부조리의 근원을 군으로 보는데 대해 분개한 젊은 군인들의 행위라고 한다면 그들은 양심범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최근에 양심범 운운하는 풍조가 오늘날 실정법을 무시하고 이처럼 군인들의 범법을 불러온 것이 아니냐?"고.
이 말을 보고 필자는 너무나 심한 가치의식의 전도와 어휘의 왜곡에 일종의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백주 대로상에서 군인들이 떼지어 민간인을 칼로 찌른 행위가 양심범의 소행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범죄 모든 죄악은 양심범의 행위 아닌 것이 없게 되니 말이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사전의 정의는 이렇다.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하여 정·선을 명령하고, 사·악을 물리치는 통일된 의식". 따라서 양심범이란 이 같은 통일된 의식에 철두철미한 사람을 일컫는 줄 안다.
그렇다면 이번 테러 군인들은 그들의 도덕적 판단 끝에 군을 비난하는 민간인을 해치는 것이 정의이고 선이라고 확신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 방식인가?
한 때 대학에서 법철학을 강의했다는 그의 이 양심범 논리를 좀 더 확대 해석해 보면 우리는 더욱 더 놀라운 결론에 부딪히게 된다.
즉 광주사태 같은 것도 '질서 유지' '구국일념'에서 울어나온 '양심범'의 행위가 되고, 다시 만일 제2의 광주사태를 가상할 경우 똑같은 논리에서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소름 끼치는 무서운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제3화-"완력에는 완력으로"
어느 교수 (양동안) 가 저술, 한국 내무부가 10만 부를 인쇄, 산하기관에 배포한 '이 땅에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책자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좌익세력이 대학가와 노동자 사회는 물론 문화, 예술, 언론, 출판, 교육, 종교계 등 사회 전 분야에 침투, 세력을 확대하고 있고 심지어 야당 여당, 관계 법조계에도 침투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될 경우 좌익 세력과 제휴한 정권이 들어서고, 마침내 완전한 공산 정권이 수립될 것이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군부나 정부의 공권력이 아닌 민간 중심의 우익이 총 궐기, 이론에는 이론으로, 조직에는 조직으로, 재력에는 재력으로, '완력에는 완력으로', 좌익에 맞서 싸워야 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어떻게 해서 갑자기 이런 책자가 쓰여지고 또 이를 정부관서가 주도해 대량 배포하고 있는 것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좌경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인줄 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지금 한국의 각계 각층 각 분야에 좌경세력이 그렇게 침투해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더욱 이를 막는 데 있어 '완력 (곧 폭력) 에는 완력으로'하는 선동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고 방식이라고 규탄치 않을 수 없다.
우익 체제의 땅에서 어떻게 좌익세력이 등장 할 수 있는가? 우익에게 그만한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좌익세력이 이용 내지 악용할 수 있는 약점 단점 결정이 우익에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좌경세력의 등장 내지 확산을 막는 길은 우익이 지닌 이 같은 약점 단점 결점을 하루 빨리 스스로 시정·보완하는 길이지, 결코 '완력에는 완력으로' 하는 식의 보복 대결 투쟁의 방법이 아니다.
체제가 전혀 다른 이북과도 화해 평화공존을 모색하는 이 마당에 같은 체제 안에서 사는 사람들 끼리 이렇게 좌·우익을 가르고 관이 앞장서 이를 부채질 한다면 그 얻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너무나 근시안적인 안목을 개탄치 않을 수 없다.
<88. 9. 23. 『미주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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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과 재산 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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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도 없는 주제에 한국 최고 재벌의 천문학적 단위 재산에 대해 왈가왈부 한다는 것이 무엄하기 짝이 없는 짓 인줄 안다.
그러나 이번 삼성재벌 총수(고 이병철 회장)의 상속세를 에워싸고 벌어지는 시비를 보면서 하고픈 말이 있기에 분수를 넘는 용훼를 아니할 수가 없다.
우선 논란의 초점을 간추려 본다
첫 번째 시비는 이 번에 재벌 측이 신고한 상속세 1백 50억 원 (방위세포함) 이 과연 어느 정도 정직한 것이냐? 하는 점이다.
한국 최고의 재벌, 총 자산이 11조 원에 달하는 대기업, 그런데 그 총수가 남긴 재산이 고작 2백 37억 원.
과연 그(들)의 재산이 그것 밖에 안 되겠느냐?"고 국민들의 눈총이 따갑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재벌 측은 "탈세(evade)는 없다. 최대한 절세(avoid)를 했을 뿐이다."라는 주장이라는데 비록 현행 세법상 모든 것을 합법 처리했다손 치더라도 한국 최고의 재벌로서는 그 상속 재산, 따라서 상속 세액이 너무나 적은 것에 대해 민중들이 납득치 않는다는 이야기다.
둘째로, 재벌 측은 사전에 세무 당국과 접촉, 상속세 규모를 협의했다는 이야기다. 즉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좋다, 받아주겠다"하는 식으로 처리가 되었다고 한다.
셋째로, 또한 재벌 측은 국민 여론을 의식, 상속세의 어느 정도 어느 규모가 적절한가를 다각도로 연구하고 여론을 수집, 액수를 조정했다고 한다.
넷째, 비단 이번 삼성재벌의 경우만은 아니지만 한국 재벌들의 상속 재산을 내용 별로 보면 86년도의 경우 토지 등 부동산이 전체의 86.2%를 차지하고, 예금·증권·생명보험 등 금융자산은 불과 7.9%밖에 안 된다고 한다.
더욱이나 이같이 상속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지의 평가에 있어 특정 지역이 아닌 한 시가의 30% 밖에 안 되는 내무부 시가 표준액으로 세금을 낸다고 한다.
다섯째, 이번 삼성재벌의 상속세 규모를 보고 다른 재벌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즉 "너희가 그렇게 많이 내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란 이야기냐?"고…
이상의 시비를 보고 있으려니 재벌들의 하는 짓거리가 하도 어이가 없어 긴 한숨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나라는 그래도 명색이 법치국가, 법치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법에 의해 운영되는 것인 줄 안다. 그렇다면 납세·징세도 세법에 따라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즉 세법에 따라 내야 할 세금이 있으면 내야하고, 없으면 안 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번 삼성재벌의 상속세는 엄존하는 세법 같은 것은 아랑곳 않고 민중여론에 따라 그 납세액이 조정되고, 또 그것을 세무당국과 사전절충, "받아주겠다, 못 받아주겠다"하는 식으로 처리되었다니 민중을 너무나 우롱하는 처사가 아닌가? 이번 삼성재벌의 상속세 시비를 보면서 필자는 평소의 생각, 즉 "재산의 상속은 사회정의에 어긋난다"는 신념을 새삼 더욱 굳히게 된다.
<88. 6. 3. 『미주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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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감정'이라는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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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적잖이 놀란 일이 있다.
즉 맨하탄 어느 교포경영 상점에서는 한국인 종업원은 반드시 「XX도」출신만을 채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미쳐 모르고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 갔다가, 낭패한 어느 청년이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울분을 토로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지금 고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바야흐로 새 역사가 펼쳐지려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이 '지역감정' 이라는 망령이 큰 이슈로 등장, 민주화 추진에 적잖이 반작용을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두 김' 후보가 민중의 절대 여망인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로 이 '지역감정'을 손꼽을 수 있겠는데 도대체 '지역감정'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한번 그 현상을 벗기고 대책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선 나 한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내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태어난 것은 나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우연이다.
다시 말해 나의 자유의사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의사를 가진 성숙된 인격체, 그리고 또 20세기를 사는 현대인, 그러한 우리가 나의 의사 아닌 '우연한 일'에 그렇게 얽매이고, 그 영향을 받고 또 지나치게 그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하나의 넌센스가 아닌가?
다음으로 시야를 넓혀 태평양을 너머 한반도를 바라다 본다. 그 조그마한 땅, 그것도 두 동강이가 난 반쪽, 그런데 그 반쪽 안에서 또 'XX도'니, 'XX도'니, 하고 갈라져 서로 반목 질시를 한다면 세계인들이 보기에 얼마나 웃으운 일인가?
그렇게 닫힌 다음, 좁은 소견을 갖고 앞으로 민족의 대과업인 남북통일은 어떻게 해낸단 말인가?
지구가 하나의 촌락이 되어 가는 이 시대에 같은 언어를 쓰는 동일민족으로서 우리의 이 '지역감정'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슬픈 민족적 유산인데 과연 이를 근절까지는 못 가더라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영영 없는 것일까?
이 '지역감정'에 대해 혹자는 우리의 먼 역사를 들먹이고 어떤 사람은 군사정권 이래 지역편중의 경제개발 및 인물등용의 정책을 성토하지만 나로서는 그에 앞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옹졸한 국민성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은데 이를 시정 완화할 수 있는 몇 가지 제도적인 방법을 생각해 본다.
첫째, 한국의 관공서에서 사람들에게 일절 출생지를 묻지 않기로 한다. 즉 각종 관공서 서류에 본적지 기재를 없애거나 아니면 의무화하지 말고 사람들의 임의재량에 맡기기로 한다.
둘째, 일반 사기업에서도 이력서 등에서 본적지 기입란을 없앤다. 면접시에도 "고향이 어디냐?" 따위 질문은 않기로 한다.
셋째, 신문·방송 등 매스컴에서 공인의 출생지 언급을 가급적 피한다. 즉 현 각료 중 'XX도 출신 X명' 'OO도 출신 O명' 하는 따위 보도로 사람들의 '지역감정'을 더욱 부채질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넷째, 일반 사회 생활에서 사람들이 본적지를 묻는 것을 실례로 여기기로 한다.
이 땅에서 잘 알지 못하는 미국사람이 "Where are you from?"하고 물을 때 우리는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지 않은가? 더욱이나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동일민족 끼리 무슨 필요에서 본적지를 따진단 말인가?
다섯째, 2세 어린이들에게 가능한 한 출생지역을 일깨워 주지 않기로 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언급치 말고 언급을 할 때에도 고향이라는 정서적인 측면에서만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다.
이렇게 공직생활이고 사생활에서 '출생지'를 쓸 일이 없어진다면, 그리해서 사람들의 의식에서 이것이 점점 멀어져 간다면 민족적 수치인 이 '지역감정'이라는 망령이 언젠가는 사라질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고 끝으로 이 땅에 와서 사는 우리로서 이 '지역감정'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본다.
우리는 지금 세계 각 민족이 모여 사는 복합사회에 살고 있다. 이 가운데서 우리가 'XX도 출신'까지 내세운다면 너무나 우습지 않은가? 이 점에서 그 많은 각종 도민회·향우회 같은 단체의 그 취지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대외적인 행사 같은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요즘 고국의 대통령 선거를 맞아 '두 김'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각기 따로 후원회의 밤 등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 또한 필자로서는 고개가 갸우뚱해 진다. 이유는 선거의 현장에 있지 않은 우리로서는 어느 특정인을 위한 선거운동에 앞서 조국의 민주화라는 대 명제가 우선되어야 하는데 '두 김'씨 지지 세력간에 이 같은 개별적인 활동은 민중의 절대 여망이자 민주화의 가장 확실한 길인 후보 단일화를 위해 플러스 보다는 마이너스 역할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87. 11. 20. 『미주 朝鮮』
P.S.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이 글이 나간 1주일 후인 87년 11월 28일 당시 대선 유세 중이던 金大中 후보가 난데없이 "본적지 제도 폐지하겠다"는 선거공약을 내세웠고, 노 대통령 당선 후 5공 때 "지역 감정 해소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공문서 2천여 가지에서 본적 난 기재가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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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裁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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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定罪하지 말라. 네가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그 때는 이미 그 사람은 변해 딴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말이다.
그리고 또 기독교는 가르친다.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그러나 이것은 모두 理想의 세계, 막상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산다. 그리고 이 일을 도맡아 관장하는 정부 기관이 곧 사법부-.
요즘 고국에서 데모학생 등 소위 정치범 재판 때마다 아수라장이 벌어지는 사법부 풍경을 보면서 나는 이곳 미국의 법정을 생각해 본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방법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우리 나라엔 없고 미국에 있는 배심원 제도-.
법 지식의 유무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들로부터 많은 사람-그 수는 사건 규모 성격에 따른다-을 무작위 추출 방식으로 뽑아 공판에 입회시킨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 및 검사)와 피고( 및 변호인)의 열띤 공방을 지켜본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의견을 재판관에게 제시한다. 재판관의 판결은 이 배심원들의 의견-전원 일치 원칙에 따른다-에 따라 거의 결정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죄·무죄의 판단을 판·검사에게만 맡기지 않고, 일반 민중들에게 묻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람에 대한 판단을 '육법전서'에만 의존치 않고, 많은 사람들의 상식과 도덕성에 묻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어떻게 보면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양심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리해서 눈물이 있고, 유머가 있고, 인간미가 흠씬 풍기는 미국 법정, 너무나도 재미있고 묘한 판결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 미국의 이 같은 법 정신( 및 법 운영)에 비추어 한국의 데모 학생들에 대한 판결을 내 나름대로 한 번 공상해 본다.
"학생들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학업이다. X년 징역형에 처하되 학업을 마칠 때까지 집행유예로 한다. 그 동안 학원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되 취득한 학점(의 우열)"에 따라 減刑 또는 增刑키로 한다."
한국의 법정에서 이 같은 멋진 판결이 한 번 나올 수는 없는 것일까?
실정법이니 판례법이니 하는 법 이론을 떠나서 말이다.
<87. 9. 7. 『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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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를 익힌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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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권력층 주변에는 미국 등 외국에 유학, 학위를 받고 귀국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을 크게 분류해 보면 고위 정치·행정가들, 경제 테크노크라트들, 그리고 과학두뇌들로 불 수 있겠는데 이중 특히 정치·행정 엘리트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그들이 가진 학위보다 그들이 외국서 학업을 연마하는 동안 실제생활에서 몸에 익힌 경험 내지 체험을 더 높게 평가한다. 그 이유는 지도층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 지식이나 학문보다 그들이 지닌 의식 및 사고방식이 더 중요한데 그것을 결정하는 요인은 바로 우리의 실제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유와 민주가 만개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한 사람들, 따라서 인간의 자유가 어떤 것이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일상생활에서 직접 보고, 듣고, 또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유의 소중함, 민주주의의 값어치를 잘 알고 있고, 또 그 절대적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사람들인 줄로 안다.
그런데 이렇게 학위에 덧붙여 자유와 민주 의식이 몸에 밴 사람들이 귀국한 후에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성장 그리고 과학의 발달,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지상 과제라면 경제 테크노크라트들 그리고 과학두뇌 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기 자기 분야에서 훌륭히 자기 몫을 해냈고 또 하고 있다고 본다. 놀라운 경제의 성장, 눈부신 과학의 발달,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 이 만큼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들 분야에 비해 정치·행정의 경우는 어떠한가? 과연 그들이 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무슨 역할을 했다고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너무나 실망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경제·과학 분야에 비해 너무나 제 몫을 하지 못했다.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그들은 현 체제를 유지·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오직 개인의 영달과 감투를 위해 갖은 기묘한 이론과 학설로 현 체제를 옹호하고 비호한 사람들이 누구였던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이제 그들은 일대 방향전환이 있어야 될 줄 안다. 그들이 가진 탁월한 지식과 값진 경험을 개인의 영달과 감투만이 아닌 민족과 역사를 위해 한번 멋지게 써야될 줄 안다. 경제발전에 맞먹는 정치발전이 이룩되어야 한다는 외국 지성인들과 매스컴의 한결같은 촉구가 다른 누구에게보다 바로 그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가?
<87. 8. 12. 『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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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쪽지'가 하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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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판사,
이곳 해외 언론매체를 통해 그 동안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김근태 고문 수기, 문익환 목사의 법정진술, 권인숙 양의 성 고문 사건 내막, 그리고 이 번에 다시 이돈명 변호사의 법정변론 등을 접하고 한국 사법부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D판사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D판사,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왜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 중 사법부의 기능이 무엇인지, 하는 것 등의 정치원론은 펴고 싶지도 않고 또 펼 필요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정치가 실종된 땅의 정치를 왈가왈부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 것과 같이 총칼의 명령이 곧 법이 되는 상황에서 법의 정신이니, 법의 기능이니, 운운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D판사,
상황이 비록 그렇게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또 그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소위 '인권의 보루'라고 일컬어지는 사법부가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지, 언제까지나 그럴 것인지, 한 번쯤 좌표를 점검하고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주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것은 국가 민족을 위한다는 거창한 이야기에 앞서 법조인 개개인의 신상과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D판사,
언제인가 D판사는 저에게 이런 비밀(?)을 들려준 일이 있습니다.
"판결을 어디 우리 판사가 하나."
"그럼 누가 한단 말인가?"
"사건 때마다 3년, 5년, 7년 '메모쪽지'가 날아온다네. 이상하게도 나에게 오는 것은 모두 홀수이네. 그러면 우리 법복을 입은 사람들은 그것을 앵무새처럼 외울 뿐이라네."
"그러고도 법관으로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할까, 직업인으로서의 직무포기라고 할까, 하는 가책을 안 느낀단 말인가?"
"어쩌겠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다른 선택이 없는데…"
D판사,
언젠가 어떤 큰 시국사범 사건을 담당, 법관으로서의 자기 소신과는 아랑곳없이 이 같은 외부의 '메모쪽지'에 따라 판결을 했던 X판사는 미국에 왔을 때 저에게 그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은 일이 있습니다.
"심히 괴롭다. 내가 왜 그렇게 판결할 수밖에 없었는지, '양심 선언'을 써 놓고 있다. 때가 오면 이를 세상에 공표할 생각이다."라고.
D판사,
옛날 학생 시절 S대 도서관에서 삼복 더위에 웃통을 벗은 채 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던 D판사는 휴식시간이면 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아직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이상주의자로서 우리는 사회정의에 대해 많은 토론을 벌였고, 특히 D판사는 법학도로서 이제 고시에 패스해 법복을 입게 되면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열을 올려가며 그 포부를 피력하기도 했었지요. 그러던 D판사가 오늘날 법복을 입고,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서 외부에서 날아오는 '메모쪽지'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니… 그저 슬퍼질 뿐입니다.
D판사,
D판사의 인간적인 고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세차게 불어오는 '외풍', 그것을 혼자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섣불리 막으려 하다가는 너무나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 등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그렇게 어렵다고 해도 행정부가 총칼의 명령 일변도가 되고, 입법부가 그 총칼의 한갓 거수기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래도 '인권의 보루'라고 하는 사법부마저 그렇게 돌아간다면 도대체 그 나라가 갈 길이 어디입니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나마 D판사와 같은 정의감 있는 이상주의 법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D판사,
최소한 총칼이 하는 일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주는 일만은 어떻게든 피해야겠습니다. 총칼이 하는 무지와 억지 그리고 부정과 과오, 여기에 법을 원용(援用), 이를 법적으로 정당화하고 합리화시켜주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곧 '법(法)'이 총칼에 협조·공모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에 법적 뒷받침을 해 줌으로써 국민의 판단을 오도하고 정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D판사,
그러면 이를 위해 지금 그 어려운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메모쪽지' 대로 판결은 하되 판결문(내용)을 건성건성 작성하십시오. '메모쪽지'의 형량을 뒷받침하기 위해, 즉 정당화시키기 위해 열심히 육법전서들 뒤적이는 행위는 마지못한 피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인 협조로 민중들 눈에 비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메모쪽지' 사건 즉 시국사범 아닌 일반 사건 판결에 있어 그 형량을 법관의 재량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가볍게 판결하십시오. 이는 한쪽에서의 '잃어버린 양심'을 다른 한 쪽에서 만회함과 동시에 '양심의 상실'을 총칼로 강요하는 그 그릇된 체제에 저항한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셋째, X판사와 같이 '메모쪽지' 판결 때마다 '양심선언'을 작성해 두십시오. 이것은 후에 새 역사가 펼쳐질 때 D판사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자구책이고 역사에 대해서는 '산 증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영어 격언 즉 "A Good Lawyer is a Bad Neighbour"라는 말을 나름대로 한 번 고쳐 쓰면서 이 글을 끝맺습니다.
"A Good Lawyer of the People Should be a Bad Lawyer to Them."
<1987. 4.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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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부 사회/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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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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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요즘 재미있는 말이 하나 등장했다. '신지식인' 이라는 용어다. 소위 '제 2 건국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새 낱말이다. '신지식인'? 무슨 뜻일까? '사회 모든 분야가 큰 변혁을 겪고 있는 이 때에, 지식인들도 이대로는 안 된다. 의식을 개혁,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정도로 지레 짐작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신지식인'상(像)인즉 이렇다.
"최신 마케팅 기법을 동 원한 번개표 짜장면 배달원, 인터넷을 이용해 소비자와 직거래를 개척한 상황버섯 재배원, 정보망을 구축한 컴퓨터 집배원, 온라인 상담을 개설한 카운슬러, 사양(斜陽) 산업으로 거들떠 보지 않던 신발과 잡화를 신상품으로 키워낸 기업들…",
한마디로 그 하는 일이 무엇이 되었건 즉 정신노동이건 육체노동이건 각자 자기 분야에서 새 아이디어와 새 기법으로 능률의 극대화, 성과의 최대화를 이룩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지식인'의 범주에 속한다는 이야기다.
'신지식인'이라는 말에 이어 그들은 또 '지식국가' '지식정부' '지식경영' 심지어는 '지식 근로자' '지식주부'라는 새 낱말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는 것(Knowledge)이 곧 힘(Power)", 치열한 글로벌 경쟁시대에 '앎의 힘'을 기르자는 뜻인 줄 아는데, '지식' '지식인'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실용주의, 성과주의 안목으로만 해석, 이용해도 좋을 것인가?
'제2건국'의 주역이 될 '신지식인', 그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평소 필자의 희망을 한 번 그려본다.
배우고, 아는 것이 많고, 교양이 있는 지식인(지성인)일수록 그 두드러진 특성의 하나가 철저한 에고(ego)다. 자신에게 이(利)와 득(得)이 안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않는다. 이들에게서 에고의 요소를 완전히 거세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를 약화시킬 수 있는 어떤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앎의 힘'을 오직 자기자신, 기껏해야 자기 동류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사하려는 지식인들, 돈 가진 사람들의 부(富)의 사회환원과 같은 논리로 그들은 그들의 '앎의 힘'을, 그들 만치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어, 삶의 조건에 있어 온갖 불이익(disadvantages)을 당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위해 쓰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지식인 이야말로 '참 지식인'·'신지식인'이라 불리어야 마땅하겠는데, 한국 최고의 지성을 자부하는 서울대인들이 앞장서 '참 지식인'·'신지식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누구에게 이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99. 1. 15.'서울大 동창회보' 및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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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공황이 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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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고국 신문이 전한 한 에피소드(?)가 온 몸을 오싹하게 한다.
화성군에 있는 닭 2만여 마리를 사육하는 어느 양계장, 사료 값이 폭등한데다 그나마 구할 수조차 없어 하루 세 번씩 주던 닭 모이를 한 끼 또는 두 끼로 줄였단다. 그랬더니 "배고픈 닭들이 저희 들 끼리 싸워 죽은 닭의 내장을 쪼아먹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는 이야기다.
다음은 또 요즘 고국서 크게 히트하고 있는 어느 무명 가수가 부르는 "세상이 왜 이래"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 일부이다.
"세상이 왜 이래
세상이 왜 이렇게 비틀거리나
세상이 왜 이렇게 쿵쿵거릴까
오늘은 이곳 꽝!
내일은 저곳 꽝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18일은 드디어 한국 대통령 선거의 날, 이에 맞춘 어느 대학생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선거야?
나느 관심도 없어야
경제가 이 지경인데
선거는 해서 뭐 한다냐?
누가 돼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을 텐데…
차라리 나는 기권이나 할란다
남의 나라에 손이나 벌리는
'거지 왕' 뽑아서 뭐 한다냐?"
다음은 또 어느 대학교수가 보는 앞으로의 사태 전망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경제침체와 실업의 증가가 일으킬 사회적 불안과 동요다.…성장을 못하는 경제에서는 분배 문제가 첨예한 대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문제의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제도적 장치도, 경험도 결여되어 있다"
요즘 도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끔 아슬아슬하게 돌아가고 있는 한국의 경제위기, 이에 잇따르는 사람들의 이 같은 좌절과 절망과 자포자기, 참으로 두렵고 어떤 불길한 예감마저 느껴지는 것을 떨칠 수가 없다.
도대체 지금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먼 장래는 접어두고 내일 당장 또 무슨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질 것인가? 불확실성의 시대에 불확실성의 나라, 그 누구도 이렇다 저렇다 단정할 수 없는 반면에, 또 그 누구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지금 이 경제위기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정부·재계·근로자·전 민중이 다시 한 번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그 과정에 너무나 큰 고통과 희생을 강요당하는 계층인 노동자 등 근로계층이 만일 사태가 악화되어 하루 밥 세끼를 위협받게 된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가?
그 다음 우려되는 것은 소위 경제성장 혜택을 받고 자라난 젊은 세대다.
그들은 기성 세대들이 살아온 8·15, 6·25의 배고픔과 가난을 모른다. 그리해서 자신의 불편·불이익은 조금도 못 견디는가 하면 또한 기성 권위에 극히 도전적이다. 이 젊은이들, 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의 꿈인 취직·결혼·성공에의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에 또 어떤 현상이 나타날 것인가?
당장 밥 세끼를 위협받게 될 근로자들, 그리고 그 꿈이 깨어지는 젊은 세대들의 그 좌절감과 욕구불만이 어떤 연대를 이루어 동시에 폭발하는 경우, 너무나 가공할 사태를 우려치 않을 수 없는데, 이에 덧붙여 더욱 큰 문제는 경제위기 경제공황에 잇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의 황폐화' '정신적인 공황' 현상이다.
경제가 잘 나아갈 때에도 각박해만 가던 사람들의 인심, 나만 살면 된다는 그 무서운 이기주의, 그 각박한 마음, 그 무서운 에고이즘이 살기가 점점 어려워질 때에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 것인가?
'세상이 왜 이래' 노래를 다시 한 번 읖조려 보게된다.
"세상이 왜 이래
세상이 왜 이렇게 비틀거리나
세상이 왜 이렇게 쿵쿵거릴까
오늘은 이곳 꽝!
내일은 저곳 꽝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97. 12. 17.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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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도 구조 조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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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는 안 된다!"
"변해야 산다!"
"변하지 않으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그 동안 잘 나가는 듯 하던 경제가 졸지에 일대 파탄, '경제 식민화'라고 일컬어지는 'IMF 경제시대'에 돌입하자 요즘 고국의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쏟아내는 한 목소리다.
모든 것이 지금까지 '해온 대로', 또는 지금 '하고 있는 대로'는 '안되고', 모든 것이 '바뀌고' '변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너도 나도 죽는 공멸' 뿐이라는 위기의식이 사회전반을 휩쓸고 있다고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규가 나올 정도로 지금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한국,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또 무엇이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
물론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경제 회생이다. 경제가 지금까지 '해온 대로' 또는 지금 '하고 있는 대로'는 더 이상 살아 남을 수 없기에 일대 '메스'를 가해 혁신적인 구조 조정이 한창인 줄 안다.
그런데 한국이 '이대로는 안되고', '변해야 할 것'이 비단 이 경제 분야만 일 것인가?
어떻게 보면 이번의 경제위기는 우리 자신을 한 번 냉철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계기다. 그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 왔으며, 또한 그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이었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어, 또는 극복한 후 우리는 역시 똑 같은 길을 계속 추구해도 좋을 것인가?
그 동안 우리는 '가난을 벗자'는 구호 아래 경제 제일주의를 국가의 지상목표로 삼아왔다. 그리고 '가난의 한'이 맺힌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을 했다. 그 결과 30여 년 만에 1인당 GNP를 거의 100배로 끌어 올리는 기적(?)을 일구어 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눈을 돌려 생각해 보자.
모든 사물에는 득과 실이 있는 법, 우리는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대가를 지불했는가를….
근 반세기 동안 국가의 목표로 삼아온 경제 제일주의는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 준 반면에, 사람들을 온통 물질만능·배금사상·이기주의의 도가니로 몰아 놓지 않았던가?
그리고 글자 그대로 '돈이 근본'이 되는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은 우리 사회를 돈이 모든 가치 척도의 기준이 되는 '돈 사회'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의 인간성이 이같이 파괴되어가고 사회 전체가 계속 이같이 돌아간다면 경제가 아무리 성장한들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물론 이 같은 물질 만능 자본주의 풍조는 세계적인 흐름인 줄 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그 정도가 너무나 지나치고, 그 방향이 너무나 비뚤어져 가는 것이 문제다.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거기에 앞질러 높아만 가는 사람들의 물질적인 욕구, 소득이 늘면 늘수록 빠져드는 사치·호화·퇴폐, 그리해서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계층간의 갈등과 사회적인 불안,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이 같은 '소돔과 고모라'의 사회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이 난국을 극복하려면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인생관이 ,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
요즘 대선에 나선 후보들에게 한국 국민들이 색다른 주문(?)을 한다고 한다. 즉 "경제는 이왕 결단이 났소. 허나, 먹고 사는 것은 5, 60년대로 되돌아가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졸라매면 되오. 이제는 제발 나라의 방향을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지, 우리 민중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비전을 보여 주시오" 라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지금 한창 진행중인 경제구조·금웅구조 재조정에 발맞춰 '이대로는 안되고' '변해야 하는' 사람들의 인생관·가치관 구조를 또한 재조정 할 수 있는 원대한 비전을 지닌 새 대통령, 새 정부(각료)가 탄생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97. 12. 11.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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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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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한 때 자살을 골돌히 생각해 본 경험이 있는 필자에게는 며칠 전 전파를 타고 들려온 '고향 소식'이 전한 한 통계가 너무나 큰 충격을 안겨 준다.
통계의 내용인 즉, 가정을 거느린 가장(家長)들을 상대로 실시한 어떤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22%가 "자살하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요즘 고국서 들려오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별로 고무적인 것이 못 되긴 하지만 사회 구성의 주춧돌인 가정의 기둥들이 이렇게도 많이, 그리고 그렇게도 심각하게, 삶을 비관 절망하고 있다는 소식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어떻게 해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 많은 가장들이 절망을 지나쳐 죽음까지를 생각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인가?
그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 그리고 개개인이 처한 특수 상황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겠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다 해도 가장 5명중 1명 꼴로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어 버리고 싶다는 심정을 갖고 있다면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잠깐,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가를 상상해 본다.
어떤 종교·철학적인 신념 또는 병적인 의식과잉 등 특수한 경우를 빼 놓고 일반론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우리는 인간 욕구가 충족·성취되지 못할 때에 우선 좌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같은 좌절이 반복·지속될 때에 또한 비관하고 절망한다. 물론 이때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에 따라, 즉 낙천적인 기질 또는 비관적인 성격에 따라, 그 비관·절망의 강도(强度)는 달리 한다.
따라서 그 천성·기질이 다분히 비관적인 사람들(pessimist)들에게는 현재의 좌절(감)이 참으로 견디기 어렵고 앞을 내다봐도 그것이 나아질 희망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현재가 고통스럽고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지금 그만…"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는 줄 안다.
가장의 22%가 이렇게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자살해 버리고 싶다"는 사회, 이제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에게 좌절·비관·절망을 안겨다 주는 인간욕구의 대상에는 크게 나누어 세 가지가 있다. 즉 돈과 권력과 명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수와 양이 한정되어 있는 것, 만인의 욕구를 모두 흡족히 충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면 어찌 할 것인가?
가능한 한 이 셋을 분리, 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제도화 되어야 한다. 돈과 권력과 명예, 이 셋 중 어느 하나라도 있으면 사람들은 그렇게 좌절하거나 비관·절망하지 않는다. 그런 대로 "살 맛"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나는 돈도 권력도 명예도 없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셋을 한꺼번에 거뭐지고 떵떵거리면서 삶을 구가하니 그들에게 어떻게 인생이 '살 맛'이 날 것인가?
끝으로 사담(私談) 한 마디를 덧붙이면 필자의 경우 자살을 골돌히 생각했을 때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일본작가 創田百三)이 많은 것을 암시해 주었다.
"네가 지금 의식(생명)이 있으니까 자살을 생각한다. 의식이 없다면 자살이고 뭐고 없다. 그러니까 우선은 의식을 유지·존속 시키면서 볼 일이다."
<97. 6. 18.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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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아들' '금력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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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똑같이 비록 그 양상은 다르지만 '권력의 아들'들이 큰 문제아로 등장, 뉴스의 각광을 받고 있다.
북쪽은 아버지가 수령이라는 절대 권좌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물려받았다고 해서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고, 또 남쪽은 아버지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것을 기화(奇貨)로 그 아들이 권력·권세를 마구 휘둘렀다고 해서 여론이 들끓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한쪽은 세계인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다른 한쪽은 민중의 무서운 지탄을 받게 되는가?
먼저 북쪽의 경우, 지금 인류 역사의 시계 바늘이 어디에 와 있는가? 봉건시대에 있었던 왕위(王位)의 세습도, 직위·신분의 계승도, 다 사라진 만인 평등의 민주시대에, 이 같은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좌를 물려주니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남쪽의 경우는 또 어떤가?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갖는 그 권한·권력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민중들이 대통령이라는 직위의 직무수행을 위해 그에게 한시적으로 부여한 것. 그런데 그 아들이 이를 잠차(暫借), 호가호위(狐假虎威)행세를 했으니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엄밀히 따지면 곧 공직사칭 및 공무집행 방해죄에 해당될 것 같은데, 민중들은 결코 자연인인 대통령 아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위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남북 두 '권력의 아들'들의 이 같은 행태(行態)에서 우리는 새삼 무엇을 확인케 되는가?
'만인 평등'의 민주정신이다. 곧 권력은 결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승계 될 수 없으며, 또한 아버지가 가진 권한·권력에 아들이 눈꼽 만치라도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민주주의 원칙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같은 민주정신 그리고 민주주의 원칙에 비추어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자.
오늘날 민주·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데에 정치권력에 못지 않은, 어떻게 보면 그 권력보다 더 큰 파워를 갖고 있는 금력(金力), 곧 재벌들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물론 권력과 금력은 그 속성이 다르다. 권력은 민중이 위임 또는 위탁한 것, 그런데 금력은 자기가 일구고 쟁취한 것, 그리해서 권력의 세습은 불가(不可)이면서 부의 세습은 법적으로 보장되고 또 당연시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논리가 한국적인 상황에서도 무한정 통용되어도 좋을 것인가?
'재벌의 아들' 들은 '권력의 아들들' 과는 달리 자신의 피땀의 결실 아닌 거대한 부(富)를 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다. 간디가 '7대 사회악'의 두 번째로 손꼽은 '불로소득'이다. 그리고 이 '불로소득'은 자자손손 이어진다. 간디의 눈으로 보면 사회악의 대물림이다.
그들은 주장하리라. '능력 껏 벌어 맘대로 쓰라'는 자본주의 체제, 내가 쌓은 부, 내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사회악이냐? 고. 그런데 미국의 어느 재벌 1세는 일찍이 말했다. "이 부는 하나님이 나에게 일시적으로 맡긴 것일 뿐 영구히 나의 것이 아니다" 라고.
'권력의 아들' 들이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금력의 아들' 들 또한 사회정의의 입장에서 그 문제점을 한 번쯤 새로이 조명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거의 치외 법권 적인 온갖 특혜·특권을 맘껏 누리며 사는 재벌 가문들을 보면서 하는 생각이다.
<97. 3. 12.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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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학 1장… 돈을 묶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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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절 : 정·경이 야합하면--
이번 한보의 '금융부정 빅뱅'은 정치권력(자)과 금력(재벌)이 야합하면 얼마나 가공할 만한 '악의 공룡'이 탄생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인데 한국의 이 부정부패 문제, 도저히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배내병'일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절망한다. 이미 사람들 몸에 너무나 깊숙이 배어 체질화되어 있고, 일상 생활에서 관습화 되어있고, 또 사회 구조적으로 널리 미만(彌滿)되어 있는 한국의 이 부정부패 증후군을 이제 그 누군들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고.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절망만 하고 또 이에 대해 냉소적일 수만은 없다. 비록 그 발본색원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최소한 그 정도를 완화시킬 수 있는 어떤 방안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 제2절 : 부패의 매체--뇌물
부정부패의 주체는 물론 사람이다. 그러나 그 주체를 연결시키는 매개체는 '뇌물' 이라는 악마다.
권력이 금융계에 (대부) 압력을 가하는 것도, 금권 (재벌)을 뒤에서 돌봐주는 것도, 모두 그 반대 급부로 뇌물이 오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뇌물은 곧 '돈'이다. 그 '돈'은 가능하면 증거가 안 남는 현찰, 부득불 한 경우에는 고액 수표다. 보석같은 고가품의 뇌물은 새 발의 피, 치지도외(置之度外)하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부정부패의 주체는 사람, 그런데 그 주체들을 연결시키는 중간 매체는 '돈'이라는 뇌물, 그렇다면 그 '검은 돈'의 오감을 법적·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안은 없을 것인가?
■ 제3절 : 거액현찰 불법화하라--
한국의 뿌리 깊은 부정부패, 어떤 '특단의 조치'가 없이는 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감히 제안한다. 일정액 이상의 현찰 사용을 일체 불법화시키라고. '현금 안 쓰는 사회 (Cashless Society)'인 미국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모든 지불 수단이 거의 수표 아니면 크레딧 카드다. 단 돈 1, 2백 불만 넘어도 캐쉬를 쓰는 일은 좀처럼 없다.
서민들의 일상 생활에 불편이 안가는 한도 내에서 상한선을 설정, 그 이상 현찰 거래를 불법화 시킨다면 몇 억, 몇 십억씩 현찰이 사과 궤짝에 담겨져 뇌물로 오가는 따위 부정을 저지르기는 좀 어려워지리라 고 본다.
■ 제4절 : 수표엔 "꼬리표"를…
다음은 종이 한 장이 수 십억, 수 백억 으로 둔갑될 수 있는 수표가 문제다. 이 수표 문제는 일정액 이상 짜리는 그것을 쓸 때 마다 그 출처를 밝히는 진술서(?)를 첨부케 하면 어떨까?
즉 일반 상거래 때나 은행 입금 때나 그 수표를 누구로부터 무슨 대가(또는 명목)로 받았다는 설명서 첨부를 법적으로 강제화 한다. 그리고 수표의 최종 결재 기관인 은행 등 금융기관은 이 같은 진술서가 첨부되지 않은 고액수표는 그 발행인이 누구이건 일체 그 결재를 거부하고 이를 즉각 국세청에 통보케 한다. 이렇게 되면 정치인 등 권력자들이 그 권력 행사의 대가로 받은 천문학적 숫자의 수표·어음 등은 그 처리가 극히 어렵게 될 거다.
이같이 현찰은 일정액 이상 사용을 일체 금지, 그 거래 자체를 불법화하고, 또 일정액 이상 고액 수표·어음 등은 그것을 사용할 때마다 그 출처를 밝히도록 입법화·제도화한다면 한국의 부정부패는 그 기세가 좀 수그러들지 않을까….
<97. 2. 12.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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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통계가 주는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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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권위지 뉴욕타임스지가 한반도의 골치 덩이는 북쪽이 아닌 남쪽이라느니, 한국 남성들이 아직도 여자들을 북어 패듯 두들겨 팬다느니, 민주화가 후퇴하고 다시 독재로 회귀한다느니, 요즘 잇따라 우리의 고국을 '헐뜯는'(고국 매스컴들의 표현)기사를 내보내고 있는 마당에 나 까지 덩달아 그 '헐뜯는' 일에 가세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남'은 몰라도 '나'까지 그러는 것은 곧 '누워서 침 뱉기'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주 고국신문이 전한 '어떤 통계' 하나는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기에, 그리고 그 통계가 함축한 의미가 너무나 심각하기에, '헐뜯는' 의도 아닌 '같이 걱정하는' 차원에서 그 통계를 분석해 본다.
그 통계의 내용은 이렇다.
즉, 우리 나라 전체 가임 여성(19∼28세)수는 약 6백 20만 명, 그런데 이중 30%에 육박하는 2백 여만 명이 '퇴폐·향락' 업소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좀 더 분석해 보면 전체 가임 여성 중 그 절반인 약 3백만 가량이 근로여성이라고 볼 때 근로여성의 '셋 중 둘'은 곧 '퇴폐·향락' 업소에 종사한다는 이야기이니 이 얼마나 놀랍고 한심스러운 통계인가?
이 통계에서 '퇴폐·향락' 업소라는 것이 어떤 곳인지, 그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한국서 일컫는 소위 술집, 룸 싸롱, 카바레, 러브 호텔 등 같은 곳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근로여성의 3분의 2가 이 같은 '퇴폐·향락'업에 종사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 세계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한다는 '양키문화'의 본고장 미국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미국 어디에 한국에서와 같은 술집, 룸싸롱, 카바레, 러브 호텔이 있으며, 설혹 있다해도 미국 근로여성의 과연 몇 %가 그 같은 업종에 종사할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현상은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하는 법, 이 같은 여성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곧 '퇴폐·향락'업소가 번성한다는 이야기고, 다시 이 같은 업소가 번창하는 것은 그 사회가 이를 그만큼 필요(demand)로 하기 때문인데, 근로여성 '셋의 둘'이 이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나라인가?
또 하나 놀라운 통계는 영국의 고급 위스키와 브렌디, 그리고 불란서의 고급 꼬냑과 포도주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는데 지금 한국의 모든 상황이 과연 그렇게 진탕만탕 놀고 먹고 마시기만 해도 좋을 때인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고국 근로여성의 3분의 2가 이 같은 '퇴폐·향락'업에 종사한다는 이 놀라운 통계는 한국의 정치적인 혼란, 경제적인 위기설, 그리고 매일 같이 듣고 보게 되는 온갖 윤리·도덕의 타락상 못지 않게 심각한 사회 문제라는 생각인데, 이 같은 병리 현상이 계속된다면 과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97. 1. 8.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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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민족' 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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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대 이래 고국의 발전 과정과 이곳 우리 동포사회의 성장 과정을 대비, 유추(類推)해 보면 너무나 흡사한 점이 많아 재미있다는 생각이다.
59년도 한국의 1인당 GNP가 90여 달러, 그야말로 XX이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리고 그 당시 그 가난한 땅을 떠나 이 땅에 온 사람들, 호주머니 속에 단 돈 2, 3천 달러를 간직한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을 것인가?
그런 어려움 속에서 모두들 열심히 일을 했다. 고국에서는 "수출만이 살길이다" 라는 구호 아래 근로자들이 세계 최장 노동시간 기록을 세우면서 일을 했고, 한편 적수공권으로 이 땅을 밟은 우리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뛰었다. 자본도 기술도 없는 상황, 이쪽이나, 저쪽이나, 자기 몸과 뼈를 깎는 노동 집약적 근로에 매달리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양쪽 모두 세상이 놀라는 '기적'을 일구어 냈다. 95년도 한국의 1인당 GNP가 1만 2천여 달러. 영국의 국민소득이 곱절로 되기까지 60여 년이 걸렸고 일본이 20여 년 걸린 것을 우리는 불과 10년만에 해냈다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이었다.
한편 이 땅의 우리들도 거기에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미국 이민 역사상 그 어느 다른 민족보다도 빠르게 성장, 생활의 기반을 이룩하고 또 2세들을 잘 교육시켜 메인 스트림에 진출시키는 등 극히 성공적인 이민집단으로 평가받고 있고 또 우리도 그렇게 자부한다.
그런데 고국의 '한강의 기적'이나 이곳 우리들의 '당대의 급성장'이 과연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 것인가?
이제 고국은 소위 선진국 진입을 위한 '무한 경쟁' 시대를 맞고 있고, 이곳 우리 또한 많은 동포들이 제2의 도약을 모색하는 시점에서, 이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이 정말 다른 나라, 다른 민족보다 더 똑똑하고, 더 부지런하고, 더 총명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저곳이나, 이곳 우리나, 그 때 그 때 시대적인 상황이 안겨다 준 우연의 행운이었던 것인가?
필자의 의견으로는 고국이 그리고 이곳의 우리가 한쪽은 세계 역사상, 또 한쪽은 미국 이민 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급성장을 한 것은 그때그때 시대적 상황이 안겨다 준 '행운의 여신' 역할이 더 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인데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 고국에서는 총체적인 경제 위기설이 나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외국 언론들의 충고를 새삼 되씹게 하는 경제 난국이란다.
그리고 이곳 우리들은 많은 동포들의 생계인 영세상 들이 너무나 장사가 안 된다고 울쌍이다. 경제 도약은 커녕 현상 유지도 어렵다는 한숨 소리 뿐이다.
이 원인이 어디 있는가?
시대 상황의 변화다. 고국은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하이텍 싸움을 해야되고, 이곳 우리는 미국의 전반적이 불경기-통계지수로는 결코 불경기가 아니란다-에 겹쳐 메가 스토어로 상징되는 유통구조 파괴·가격 파괴라는 시대 흐름에 대처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말은 쉽지만 얼마나 어려운 과제들인가?
고국이나 이곳 우리나 모두 큰 기로에 서 있다는 생각인데 '똑똑한 민족' '부지런한 민족'이라는 평을 받는 우리, 과연 우리가 또 한번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97. 1. 2.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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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막는 미풍 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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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사 때 친척·친지들이 '기쁨을 함께, 슬픔도 함께' 하는 성의의 표시인 축하금·조의금을 일체 불법화 하는 법안이 고국 복지부에 의해 마련 중이라는 소식이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이같은 법(규)은 '법 만능의 나라' 미국에도 없지 않나 싶은데, 어떻게 해서 우리의 이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법으로 까지 막으려 하게 된 것일까?
한 마디로 그 같은 풍습이 이제 한국사회에 있어서 더 이상의 미풍양속이 아닌 오히려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악습·악행으로 변질, 긍정적인 측면 보다 부정적인 영향이 더 커 이를 법(법규)으로 라도 막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당국의 판단인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제 우리 고국 사회에서 그같은 발상까지 나오게 되었는가?
많은 서울 사람들이 경·조사, 축·부의금 때문에 너무나 골치가 아프다는 푸념을 하는 것을 자주 본다. 어느 한 친지는 서울 생활비를 계산하면서 이 축·부의금을 그 으뜸 순위로 꼽기조차 한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사람들과 일체 접촉을 끊고 숨어 산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한 필요악이지요. 그런데 그 회수가 너무나 잦고 그 부담이 너무나 커 가계부에 주는 타격이 말할 수 없지요."
체면을 더 할 수 없이 중시하는 한국 사람들, 사돈의 팔촌으로부터 까지 날아오는 숱한 '고지서'-결혼청첩장·죽음 알림을 서울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를 받고서는 시침떼고 있을 수 없어 여기저기 챙기다 보면 그 총계가 적잖은 부담이 된다는 하소연인데, 요즘은 아예 이 '고지서'를 FAX로 전송하고, 또 거기엔 반드시 '돈은 어디로 보내라'는 온라인 구좌 번호를 아울러 적어 놓는 것이 흔한 관례라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공공기관에서는 경·조사 때마다 직원끼리 서로 눈치를 보며 가슴앓이 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불문율로 직급에 따라 국장은 얼마, 과장은 얼마, 하는 식으로 아예 일정액을 책정·시행한다는 이야기다.
이상 몇 가지 사례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경·조사, 축·부의금 문제가 얼마나 사람들의 두통거리이고 또한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인데, 이를 복지부 발상대로 꼭 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인가?
경·조사는 한 사람에게 있어 그야말로 일생 일대의 대사(大事),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또 호화롭게 치르려는 것은 인지상정이겠는데 자유주의 나라에서 이를 법으로 규제한다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이 같은 인륜대사(人倫大事)에 있어 사람들이 그 기쁨·슬픔의 표시로 십시일반(十匙一飯)하는 우리의 미풍양속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다만 문제는 일반 서민층이 아닌 권력층·부유층·특권 계층의 사람들이 이 기회를 그들의 권력 과시, 돈 과시, 신분 과시의 호기회로 삼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그러면 어떠한 대안이 있을 것인가?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를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강제 법규보다 일정액 이상의 경·조사 때의 축하금·조의금-미국선 주로 화환과 카드가 고작이다-도 이를 일종의 수입(소득)으로 간주,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렇게 되면 축·조의금이 많이 들어올수록 세금을 더 많이 내야하니 사돈의 팔촌까지 '고지서'를 발부하는 병폐도 줄어들고, 아울러 '고지서'를 받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두통도 좀 완화되지 않을까?
한국 복지부의 일고가 있기를 바란다.
<96. 12. 4.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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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사치의 이중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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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도덕의 기준에도 이중적인 잣대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조그만 악'은 언론의 비난·매도의 대상이 되면서 '보다 큰 악'은 사람들이 못 본체 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과연 공평한 일인가?
요즘 고국에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호화·사치·과소비'를 보면서 하는 생각이다.
'호화·사치·과소비'란 과연 무엇인가?
'돈이 있다' '돈이 많다'는 표현 이외 다름 아닌 줄 안다. 왜냐하면 돈이 없다면 그럴래야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번 가상해 보자.
천 차 만 층의 자본주의 사회, 연소득 1만 달러 사람과 10만 달러 사람들이 있다고 치자. 그들이 각각 소득의 똑같은 10%씩을 오락·여행비로 쓴다고 할 때, 한쪽은 다른 한쪽에 비해 열 배의 호화·사치·과소비가 된다.
그리고 또 가정해 보자.
돈을 어떻게 벌었건 의식주를 해결하고, 자녀 교육시키고, 그리고 노후에 대비한 넉넉한 저축이 되어 있다고 하자. 만일 그리고도 남아도는 돈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를 어디에 쓸 것인가?
남 보다 더 좋은 큰 집, 더 좋은 옷, 더 맛있는 음식 먹고 또 남이 흔히 안 가진 보석·장신구 등에 그 돈을 쓰고 싶은 것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이같이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매스컴의 비난·지탄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법으로까지 이를 다스리려고 하니 우리는 이를 어떻게 보아야 좋을 것인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면서도 사람들의 의식이 철저히 자본주의화 되지 못하고 있고, 또 한국의 상황으로 보아 그 쌓은 부(富)의 공정성에 대한 사람들의 깊은 불신 그리고 특히 우리의 유교적인 윤리·도덕관이 '내 돈 내 맘대로' 라는 것에 대해 어떤 거부감 내지 저항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만일 '호화·사치·과소비'를 이 같은 윤리·도덕적인 잣대로 문제 삼는다면 한국의 정말 돈 많은 사람들, 상위 계층 5%가 나라 전체 부의 90%를 거머쥐고 있는 재벌 및 준 재벌에 속하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우리는 또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의식주 일상 생활이 우리와는 전혀 '딴판인 세상'의 사람들, 4, 5살 어린애가 수 억, 수 십억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몸이 좀 아프다고 외국의 저명하다는 의사를 비행기로 모셔다 왕진을 받는 그들, 국내에서는 헬리콥터로 골프를 치러 다니고, 외국에서는 어린 자녀들에게 벤츠, BMW같은 고급 차를 몰게 하고, 월 3, 4천 달러 짜리 아파트에서 살게 하는 그들, 그들의 이 같은 일상 생활은 조금도 문제가 안 되고, 또 우리도 이를 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법 앞에 불평등' 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윤리·도덕 앞에 불평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면, 한국의 언론들은 기껏 크레딧카드 해외 사용한도 (5천 달러)를 좀 초과한 '새 발의 피'를 그렇게 목청 높여 '호화·사치·과소비' 라고 비난·매도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일상 생활이 이보다 수 십배 수 백배의 '초호화·초사치·초과소비'를 하는 사람들을 아울러 규탄·매도하고, 그 실태를 파헤쳐 세상에 고발하는 용기를 가져야 될 줄 안다. 윤리·도덕의 문제에 있어서까지 강자와 약자를 이중 잣대로 가늠한다면 너무나 비겁하지 않은가?
<96. 11. 6.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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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정조'도 이혼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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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것만을 법이 보호한다."
고국의 50년대 후반, 사회를 떠들석 하게 했던 '박인수 스캔들'사건 때 법이 내린 판결이다.
그로부터 40여 년, 이번에는 다시 "정신적 정조 의무도 이혼 사유가 된다"는 판결이 서울 가정법원에서 나와 지금 한창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인간 행위를 응징하는 법의 심판도 그때그때 시대 조류 및 세태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 한다고 볼 때, 오늘날 같은 사회 풍조에서 어떻게 해서 "정신적 정조 의무도 이혼 사유가 된다"는 판결이 나온 것일까?
고국 신문이 전하는 사건의 개요는 대충 이렇다.
A녀(26)가 남편 B남(28) 그리고 그와 '교제하는' C녀를 상대로 이혼 및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다. 이유인 즉, B남이 A녀에게 충실하지 않은 채 C녀와 교제를 일삼았다는 것. 이에 대해 법원은 이렇게 판결했다.
"부부간 정조 의무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도 포함한다" "비록 B남이 C녀와 육체적 관계인 간통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B남은 배우자인 A녀에게 충실하지 않는 등 부부간 정조 의무를 위배한 사실이 명백하게 인정됨으로, A녀와 B남은 이혼하고 B남과 C녀는 A녀에게 위자료 3천만 원을 지급하라."
부부간 델리케이트한 관계는 제 3자가 도저히 짚어 볼 수 없는 둘 만의 비밀스러운 데가 있는 법, 위의 단편적인 보도 내용만 갖고는 우리가 그 실상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려운데, 이 판결에서 말하는 '정신적 정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인간 행위를 규제하는 규범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래야 된다(sollen)'는 적극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법과 법규가 규정한 '하면 안된다(Must Not)'는 소극적인 규제다. 그런데 적극적인 'sollen'은 우리가 그것을 이행 안 해도 윤리·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지 모르지만 법적 처벌은 받지 않는다. 반면에 "하면 안 된다"는 소극적인 규제는 그것을 어길 경우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보면 이번 판결에서 법이 정한 처벌 대상(간통)이 아닌 윤리·도덕적 규범인 '정신적 정조'를 내세워 이를 처벌(이혼 허용 및 위자료 지불)한 것은 순수한 법리 해석에 근거했다기 보다 오늘날 너무나 문란한 남녀관계에 경고를 주기 위한 사회적 고려가 더 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인데, 이 같은 케이스가 미국 법정에서라면 혹시 다음과 같은 판결이 나오지 않았을까?
"B남은 직장에서 퇴근하는 대로 곧장 귀가하라. 아내를 사랑하는 나머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끝난 후엔 설거지를 도와 주라. 그리고 C녀 와는 더 이상 만나지 말라. 만일 계속 만날 경우 한 번 만날 때 마다 100만 원씩 벌금을 부과한다. 이렇게 X월을 지내 보라. 그러고도 정 안되겠다고 생각되면 그때 다시 법정에 나오라."
법은 물론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어긴 범법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그 주 기능이겠지만, 보다 이상적인 법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래야 한다'는 적극적인 규범 즉 윤리·도덕심을 일깨우고 부추기는 역할도 함께 해야되기 때문이다.
<96. 10. 16.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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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촌티'를 좀 벗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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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행 비행기를 한 번 타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 만치나 어려웠던 시절, 그 주인공을 배웅·마중하려 만사를 제치고 공항엘 나가 법석을 떨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는 그 당사자는 물론 환송·환영객들도 자기들이 무슨 VIP나 된 듯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공항엘 나가겠다면 좀 생각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촌스럽게 공항엘 왜 나와?"
한국의 고위 관리들, 그리고 대통령이 해외 방문을 오갈 때 마다 공항에서 벌어지는 "법석 장면"을 보고 있을라 치면 필자는 항상 "촌스럽게 공항엔…"하는 이 말이 연상되는데 지난번 김 대통령의 남미순방 때 모습을 한번 보자.
붉은 카펫이 펼쳐진 공항 귀빈실, 의장대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3부 요인들이 양편에 도열, 박수 갈채를 보내고… 그리고 신문·방송 등 매스컴은 또 이를 클로즈업 시켜 요란하게 보도를 하고… 그 모습은 군사독재 권위주의 시대라면 몰라도 오늘날 민주화 시대, 민주 대통령으로서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데, 서구 민주국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이 같은 행사가 이제는 '촌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편견일 것인가?
구호도 요란한 국제화·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비단 대통령 뿐만 아니라 3부 요인들, 재벌 총수들, '귀하신 몸'들이 공항을 드나들 때 마다 비서관 등 수 십 명씩 떼지어 나와 비슷한 '야단법석'을 떠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에게 외국 관리들의 민주화된 '세련된 모습'을 몇 가지 보여주고 싶다.
얼마 전 서울에서 있었던 어떤 국제회의에 참석 차 방한한 전 캐나다 총리 브라이언 멀로니씨는 전관예우 차원에서 항공사가 입·출국 수속을 대행해 주겠다는 데도 이를 굳이 사양, 일반 승객들 틈에 끼어 줄을 서서 입·출국하고, 출국할 때는 짐 가방 3개도 손수 들고 비행기를 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WHO회의 참석 차 서울 공항에 내린 패트릭 타이아타 오웰 프랑스 수석대표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 영접 나간 회의 관계자들이 동행인을 수석대표로 혼동했는가 하면, 하디 프라노우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는 귀국하면서 항공권 1등 석을 이용하는 관례를 깨고 3등 석 표를 구입, 공항에서 항공사 직원들이 본인 여부를 확인하느라 소동을 벌였다는 이야기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촌스러운 모습'의 또 하나는 국경일등 행사 때 의례 행해지는 '만세삼창'이다.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면서 '만세! 만세!'를 부르는 모습, 꼭 '반자이!'를 외쳐대는 일본 군국주의, 또는 'Heil! Heil!'을 연호하면서 미친 듯 열광하는 나치스트의 모습을 연상시켜 민주시대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한국 TV가 자주 보여주는 국무회의 모습 또한 필자에게는 영 촌스럽게만 보인다. 직사각형 테이블 머리 편에 대통령, 그리고 양편에 나란히 앉아 있는 각료들, 모두가 한결같이 딱딱히 굳은 표정과 엄숙한 태도들, 좀 더 부드럽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국사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일까? 권위주의 시대도 아닌 민주시대인데 말이다.
(곁 이야기지만, 그 딱딱한 국무회의에선 좀처럼 'NO!'라는 발언을 들을 수가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이 이미 예정·결정된 사안이기 때문에…)
<96. 10. 2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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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정·고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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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정 고운 정'
음미할수록 묘한 뉘앙스를 지닌 우리 민족 특유의 감정·정서를 나타내는 말인 것 같다. 이 중 특히 "미운 정" (Love in Hatred) 이라는 말은 그 표현도 재미 있으려니와 그것이 함축한 뜻이 무척이나 복잡 다단한 감정의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곱고,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마음씀이 서로 오감으로써 생기는 "고운 정"은 인지상정, 당연지사 이겠는데, 미우면서도 생기는 정은 어떤 감정의 작용을 일컫는 것일까?
부모들이 못된 자식들의 행동거지를 싫어하고 미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품을 수밖에 없는 부모의 정, 성격이 딴판인 부부가 옥신각신 하면서도 오랜 동안 같이 살다보면 자연히 생기는 정, 이 같은 것이 "미운 정"이겠는데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참 우정·참 친구가 되려면 "고운 정"만으로는 부족하고 이 같은 "미운 정"이 필수불가결 하다는 생각이다.
"고운 정"은 어떻게 보면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다. 고운 마음이 가니까 고운 마음이 온다. 그 사이에 정이 생긴다.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미운 정"은 부모·자식 사이 또는 부부 사이에서와 같이 미워하고 싫어하면서도 그 대상에 대해 품을 수밖에 없는 정, 그렇다면 남남 사이에는 이 "미운 정"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일까? "밉다"는 말은 곧 "싫다"는 뜻, 다시 "싫다"는 말은 "나와는 안 맞는다"는 뜻, 그런데 어떻게 나와 안 맞는 것 사이에 정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들려면 우선 그 대상을 속속들이 다 알아야 될 것 같다. 그리해서 그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이해하고 포용, 설혹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나에게 섭섭한 언행을 일삼아도, "그 사람 뭐 그럴 수도 있지…" "그 성격에 능히 그럴 사람이야…"하고 이를 감싸는 너그러운 마음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어느 한 때 어떤 한 경우의 언행만을 갖고 시시비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역정에 비추어 그 불가피성 또는 당연성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따뜻한 마음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고운 정"은 쉽게 싹틀 수 있지만 그것이 열매를 맺어 "미운 정"에 이르려면 오랜 시간을 요한다. "미운 것" "싫은 것" "나와 안 맞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성인이 다 된 후에 만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어린 시절·학창시절 등 인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제 각기 다른 환경, 다른 교육, 다른 생활을 하던 사람들, 그들 사이에 이 같이 오랜 시간을 요하는 "미운 정"이 깃들기는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다.
"고운 정"은 쉽게 오갈 수 있되 "미운 정" 깃들기는 참 어려운 이민의 삶, 사람 사는데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을 또 하나 결여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96. 9. 18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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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사치를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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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맛있는 음식 먹고, 볼품 좋은 옷 입고, 잘 꾸민 큰 집에서 사는 것일 거다.
그러면 다시, 호화·사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같은 의식주 생활에 있어 남 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이외 다름 아닐 거다.
이것이 오늘날 물질문명·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들 대부분의 가치관이자 인생관인 줄 안다.
그런데 요즘 고국에선 사람들의 이 같은 의식주 생활의 고급화가 '호화·사치'라고 해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능력껏 벌어 맘대로 쓰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가진 사람들이 자기 돈 자기 좋은 대로 쓰는 것을 시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이 윤리·도덕적으론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법적·제도적으로는 조금의 잘못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미국 같은 나라에선 너무나 당연시되는 사실이 어떻게 해서 우리 고국에선 큰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인가?
호화·사치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여러 사회적인 여건,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호화·사치 풍조가 계속될 경우 초래될 수 있는 사태가 크게 우려되기 때문인 줄 아는데 이를 나름대로 분석해 본다.
첫째는 사람들이 국내외에서 그렇게 "펑펑" 쓸 수 있는 돈의 출처다. 국내에선 수 백만 원 짜리 속옷·수 억 원 대의 외제 가구가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이곳 (미국) 에선 나이 어린 유학생들이 월 2, 3천 달러 짜리 호화 아파트에 살면서 벤츠·BMW 같은 고급 차를 몰고 다닐 수 있는 그 돈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 재벌 기업들의 친·인척은 그렇다 치고 한국의 일반 공무원·회사원들의 공식적인 봉급이 얼마인가?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둘째는 사람들의 이 같은 호화·사치풍조를 누가 더욱 부채질 하는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그리고도 돈이 남아도는 '있는 사람들'이 앞장서지 않는가?
정부 당국은 "분수에 맞지 않는 호화, 사치를 삼가라"고 일반 서민들을 윽박지르지만, 그들이 분수에 맞지 않게, 무리를 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그 장본인은 누구인가? 있는 사람들의 과시벽(誇示癖), 여기에 초연하지 못하는 국민성, 이 둘의 상승작용으로 더욱 더 과(過)호화·과(過)사치로 치닿는 것이 아닌가?
셋째는 사람들의 이 같은 호화·사치 풍조로 야기되는 총체적인 국가 경제위기다. 올해 여행수지 적자가 25억 달러(재경원 추계), 유학·연수목적의 달러 지출이 9억 달러(95년도), 그리고 외국기업에 지불하는 각종 로얄티 28억 달러, 통틀어 금년에 무역외 수지 적자가 70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라는데 이것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수출을 해서 벌어들인다지만 올해 무역적자 또한 40억 달러에 달해 총 경상수지 적자가 1백10억 달러를 넘을 것이라는 추산이니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고국 사람들의 호화·사치는 외화내빈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내일은 생각 않고, 오늘 버는 돈 또는 있는 돈을 흥청망청 쓴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96. 7. 31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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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음식' '지옥의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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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쓸개(웅담)·곰발바닥을 한국인들은 '황제의 음식'이라고 부르지만 우리(태국인)들은 이를 '지옥의 음식'이라고 부른다."
얼마 전 태국에서 있었던 한국 관광객들의 곰 밀도살 사건 때 그 나라 야생동물 보호단체들이 한국 정부에 보낸 공개 서한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서한은 또 한국정부에 대해 이렇게 촉구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 같은 분별없는 믿음을 불식시키기 위한 홍보 캠페인을 벌여줄 것을 바란다"고.
이 사건은 몸에 좋다면 까마귀를 잡아먹고, 지렁이·굼벵이를 삶아 먹고, 심지어 산 사슴 심장에 호스를 꽂아 곧장 피를 빨아대는 상당수 한국인들의 '몬도가네 먹성(食性)'이 외국에서 빚어낸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한데 이 항의 서한 중 '분별없는 믿음'이란 무슨 뜻인가?
곧 이런 것들이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정말 몸(특히 정력)에 좋으냐, 또 그것이 잘못된 지식 아니냐, 그렇다면 정부 차원에서 사람들의 이 같은 잘못된 맹신을 계몽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충고인데 우리의 이 뿌리깊은 '잘못된 믿음'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동양(중국)의학은 그 기본 원리가 인간의 모든 질병은 조물주가 이 세상에 만들어 낸 온갖 동물·식물·광석 등으로 그 치유가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리해서 중국의 '중약(中藥) 대사전'같은 약전에는 이 같은 원리에 근거해 5천 7백 67종의 동·식·광물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 중 기이한 것들을 몇 가지 뽑아보면, 동물성으로는 벌집·매미껍질·박쥐똥·노루배꼽·물개음경, 그리고 사람 머리카락·태반·월경·오줌 따위가 있고, 광물성으로는 금·석탄·석고·수은·운모·사람 이빨 같은 것들이 열거되어 있다고 한다.
동양의학이 서양의학계로부터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한방 원리를 절대 신뢰, 뱀·녹용·웅담·해구신등을 찾고 또 그것들의 희귀성으로 인해 가짜가 많으니 진품을 먹겠다고 현지를 찾아 도살 장면을 직접 확인, 생것을 마구 먹어대는 그 극성을 꼭 비난만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인데 문제는 그것을 찾아 먹는 방법이 너무나 잔인하고 또 그것을 구하는 과정이 각 나라의 국내법 내지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동물보호법을 어김으로써 '추악한 한국인' '몬도가네 코리안'이라는 비난을 받는 데에 있을 것 같다.
서양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개고기를 보신탕으로 먹어대고 또 그들이 애지중지 하는 애완 동물인 고양이를 삶아 먹고-86년 미국의 한 주간지가 "한국인들은 고양이 고기를 상식(常食)한다"는 기사를 보도한 일이 있다-. 곧 그들에게는 혐오 식품 정도가 아니라 '악마의 음식'이랄 수밖에 없는 것을 우리는 정력제니 장수식품이니 하고 호식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나라마다 다른 식성의 차이라고 치부한다손 치더라도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을 것 같다.
즉 사람들의 먹는 식성(食性)과 성품(性品)간의 상호관계다. 육식 동물은 그 성품이 사납고 포악하다. 반면 채식동물은 유순하고 온건하다. 인간도 그 치아구조로 보아 본래는 채식동물이었다는 학설도 있는데, 이제 몸에 좋다면 산 사슴 심장에 호스를 박고 생피를 빨아먹는 그 잔인한 식성과 지금 한국에서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전대미문의 각종 성폭력·살인 사건등 사이에 과연 아무 연관성이 없을 것인가?
영어에 이런 말이 있다.
You are what you eat.
<96. 7. 24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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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한 取錢' '善한 用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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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의 토막 뉴스 하나가 많은 생각을 자아낸다.
5공 때 빠징꼬 부정사건의 대부 ㅈ씨에 대해 불교계 일각에서 사면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즉 그가 많은 돈을 시주(施主), 불교에 공헌이 크니 특별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를 요로에 제출했다는 이야기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생각해 본다. 과연 돈이라는 것은 어떻게 벌었건 선(善)하게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하고….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는 몰몬교 본부 큰 교회가 있다. 그런데 이 건물은 중국 아편전쟁 때 떼돈을 번 한 교인의 헌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 각종 공익사업을 벌이고 있는 카네기 재단의 모체가 미국 동서횡단 철도 건설 때 수많은 흑인과 중국 쿠울리(cooly)들을 혹사·착취해서 번 돈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이 같은 이야기들은 모두가 '악한 취전(取錢)'과 '선한 용전(用箋)'의 상관관계가 어떠해야 되는 것인가를 생각게 하는데, 또 우리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사전 해석은 '천하게 벌어 생광 있게 쓴다' 또는 '돈은 더럽게 벌어도 깨끗하게 쓰면 된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돈은 아무리 악하게 벌었더라도 선하게만 쓰면 된다는 것일까?
필자의 개인 의견으로는 '악한 취전'은 결코 '선한 용전'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악하게 돈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 주었고 또 그들의 몫을 악랄하게 착취, 제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빠징꼬 부정 사건의 대부에 대한 불교계의 사면 운동은 그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정신, 또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 말라'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것이라면 몰라도, 그가 오직 시주를 많이 했다는 이유 만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인데, 이 '악한 취전'과 '선한 용전'의 관계에 있어 또 하나 생각되는 것이 요즘 고국의 재벌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펼치는 각종 공익사업 문화사업 장학사업이다.
재벌들의 이 같은 부의 사회환원 사업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줄 아는데,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나왔는가? 어떤 내용의 돈인가를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만의 하나라도 그 돈이 근로자의 몫으로 돌아갈 것을 착취함으로써, 또는 국고로 들어갈 세금을 포탈 내지 편법 절세 함으로써, 또는 정경유착 등 각종 부정을 저지름으로써, 조성된 것이라면 그래도 우리는 그들에게 쌍수를 들어 박수갈채를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 돈이 어떤 것이든 그렇게 라도 쓰는 것이 전·노씨 같이 '악한 취전'을 그저 움켜만 쥐고 있는 것 보다는 백 번 나은 일이긴 하지만…
<96. 6. 19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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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性의 순기능·역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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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성의 상아탑을 자부하는 서울대 출신들의 자화상을 객관적 입장에서 심도있게 분석한 孔영재 동문의 '서울대인論' (본지 美洲版 96년 2월 15일자)을 감명 깊게 읽었다. 우선 孔동문의 사물을 새롭게 보는 예리한 안목 그리고 자신(서울대인)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는 비판의식에 경의를 표한다.
한국의 엘리트를 자처하는 서울대인들, 그들의 국가적·사회적 역할에 있어서 긍정적인 순기능보다는 부정적인 역기능에 주로 초점을 맞춘 孔동문의 글을 보면서 과연 지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지성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랑케스터에는 화란 계통의 Amish 사람들이 한 곳에 집단으로 모여 살고 있다. 그들은 종교적 신념으로 전기·자동차 등 현대 문명의 이기를 거부,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자녀들을 초등학교 이상 상급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그 이유인 즉,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남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문자 해독만으로 족하다. 그 이상 지식의 습득은 결국 남을 이용·착취하는 지혜를 키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종교적인 신념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오늘날 같이 사회 각 분야가 전문화된, 고도의 하이테크 정보화 시대에 이 같은 인생관과 생활태도는 한낱 아나크론이즘(Anachronism)에 지나지 않겠지만, 과연 지식·지성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데 있어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Amish 사람들이 이렇게 '남을 이용·착취하는 지혜'에 불과하다고 보는, 지식과 지성을 갖춘 소위 지식인·지성인의 자세가 또한 권력 앞에선 어떠한가?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진주했을 때 세기의 문호 괴테는 'Geist der Welt (세계의 정신)' 라고 환호하고, 세기의 악성 베토벤은 교향곡 '영웅'을 작곡, 헌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상 두 가지 실례는 소위 지성의 속성과 지성인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제 눈을 우리 주변, 우리 사회로 돌려보자.
우리 서울대인들은 한국의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라는 자부심(내지 우월감)을 갖는다. 그런데 명문대·엘리트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한국의 치열한 입시경쟁은 결국 IQ싸움, 그 IQ싸움에서 어느 한 때 영어문법 하나, 수학방정식 하나, 더 잘 외운 것이 뭐 그렇게 대견할 것인가? 그리고 4년 또는 6년 동안 부지런히 쌓은 지식과 학문, 그 지식과 학문이 많고 깊을수록 Amish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결국 '남을 이용·착취하는 지혜'가 그만큼 더 발달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본지 같은 날짜 또 다른 동문(서울 李年憲)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육사 출신 장교의 눈으로는 국가의 요직에 많이 있는 서울대 출신 엘리트들이라는 게 모조리 부패구조를 이루고 있더라…"
어찌해서 서울대인들이 이들로부터 이 같은 비난과 지탄을 받는가?
높은 IQ로 획득한 남보다 많은 지식과 학문을 오직 자기 ego만을 위해 쓰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지식과 학문을 사용하는데 있어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는 도외시하고, 오로지 이(利)와 해(害), 득(得)과 실(失)만을 저울질, 자기에게 이와 득이 되는 길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서울대 출신 엘리트 (해외 유학파 포함) 들이 3, 5, 6공 군사 독재 시절 '잘못된 역사'의 창조 및 그 유지·발전에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 기여를 하고 또 그 두뇌를 바쳤던가?
어차피 어느 시대나 역사는 강자의 편, 그런데 지성·지성인은 최강자는 못되면서 항상 강자의 편에 빌붙을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제 역사의 전환기를 맞아 우리 서울대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들이 정말로 참다운 지성인, 참다운 엘리트가 되려면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학문을 나 개인의 이득과 출세를 위해 쓰기에 앞서, 그만한 지식과 학문을 못 갖춘 사람들 그리해서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억압받고, 빼앗기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바칠 때에 그 지식과 학문이 진정 참 빛이 나리라고 보는데 이 또한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끝으로 지금 미국에서 발붙이고 사는 우리 서울대인들을 생각해 본다. 과연 한국의 명문대를 나온 최고의 엘리트라는 자긍심에 걸 맞는 일을 하고 있는가? 설혹 어떤 의욕이 있다 해도 과연 그것을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여건을 갖춘 동문이 몇이나 될 것인가?
스스로 돌이켜 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96. 6. 1 『서울大동창회보』 및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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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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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도 없다"
요즘 고국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유행되는 말이라고 한다.
유행어란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집단 구성원의 공통된 의식과 행동양식을 티피칼(typical)하게 상징하는 언어인데, 어떻게 해서 요즘 젊은 세대들 간에 이 같은 말이 유행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도 없다"라는 말의 구체적인 경우를 나름대로 한 번 상상해 본다. 어느 젊은이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거나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다. 그는 빙그레 웃거나 아니면 아무 표정 없이 한 마디 짧게 대답한다. "아무 생각도 없어!" 그러면 이쪽에서는 더 할 말이 없지 않은가?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존재 가치는 사유의 능력, 쉽게 얘기해서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마치 생각(사고)하기를 아예 포기한 듯한 "아무 생각도 없다" 라는 말이 유행하는 그 의식의 배경은 무엇인가?
우선 요즘 사이버(cyber)세대들의 이지-고잉(easy-going)의 사고 방식이다. 인간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곤경에 처했을 때, 또는 어떤 문제에 부닥쳤을 때, 그 곤경을 극복하려, 또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 자꾸 생각을 하게 되는 법인데 요즘 젊은이들은 춥고 배고픈 것을 모르는 세대, 무엇이 아쉬워 골치 아프게 깊은 생각을 하려 할 것인가?
둘째는 오늘날 정보의 홍수에서 오는 사고의 혼란 및 가치판단 기준의 상실이다. 신문·잡지·라디오·TV·컴퓨터 등 각종 정보매체가 매일 쏟아내는 엄청난 양의 정보, 그리고 오늘의 참(眞)이 내일이면 거짓(僞)으로 뒤바뀌는 너무나 템포 빠른 변화의 속도, 어느 여가에 독자적인 생각을 하고 사색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셋째는 요즘 젊은이들의 현실 및 사물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주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해도 어떤 판단을 내려도 세상은 나의 생각, 나의 판단과는 하등 관계없이 저대로 돌아가는 것, 무엇 때문에 비싼 밥 먹고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할 것인가?
지난 총선 때 기권율 약 35%, 거의가 2, 30대라는 통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 요인이 되어 요즘 고국 젊은이들 사이에 "아무 생각도 없다"는 말이 유행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각기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96. 5. 15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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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간데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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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며칠 전 고국 신문에 실린 시사만화 한 토막.
결혼식장에 신랑·신부가 나란히 서있다. 단상에 주례자는 없고 대형 스크린에 비친 화면 하나, 그런데 그 화면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일금 30,000,000원 고액 수표.
잘 먹고 잘 살아라!"
◇두 번째 이야기-
얼만 전 있었던 일. 갓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 첫날 밤에 신부가 투신자살했다. 이유인즉 함진아비에게 주는 함값 액수를 에워싸고 심하게 말다툼, 감정이 격앙된 신부가 신혼여행차 들었던 호텔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
◇세 번째 이야기-
요즘 서울에서 남한테 흉(?) 안 잡히고 체면을 좀 세우려면 결혼식을 올리는 당일 비용이 적어도 3천만 원이 소요된다고 한다. 구체적인 내역을 보면, 신부 드레스 대여료 3백만 원(약 3천 7백 50달러), 애프터 드레스 복 2백만 원 (약 2천 5백 달러), 폐백 및 이바지 음식 비 2백만 원, 사진·비디오 촬영 비 3백50만원, 식장 장식 꽃 값 2백만 원, 피로연 1인당 3만원 짜리 스테이크 5백 명 분 등….
3천만 원이면 달러로 얼마인가? 대략 3만 7천 5백 달러.
◇네 번째 이야기-
혼사 말이 오가면 항상 '조건'이란 것이 따라 붙는다고 한다. 키(Key)를 몇 개나 지참할 것이냐, 심지어 TV·냉장고 등 가전제품 크기는 얼마나 큰 것으로 할 것이냐 등을 신랑·신부 측이 서로 요구, 옥신각신, 팽팽히 줄 달이기를 벌인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키'는 아파트 키, 자동차 키 등을 일컫는데, 이 '흥정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신랑·신부 당사자는 물론 양가 사이에 두고두고 불화의 씨앗이 된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고국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소위 '혼례 문화'의 흔한 모습인데, 아무리 모든 것이 돈으로 돌아가는 요즘 세태 라지만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남녀 관계, 특히 결혼에 있어 핵심요소인 '사랑'은 실종되고 오직 돈과 물질과 허식만을 쫓는 이 인간성의 황폐화, 너무나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96. 4. 3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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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소득도 서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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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예를 들어보자. 한달 수입이 2만원인 사람과 5천원인 사람에게 있어 그 먹고(食) 입는 것(衣)의 물건값이 똑 같다면, 또는 후자가 더 비싼 값을 지불한다면, 수입 5천 원인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2만원인 사람들의 4분의 1일 수밖에 없다.
서울 방문 동안 나는 그 물건값을 달러로 환산해 보고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88년도 경제 기획원 발표에 따르면 미국 일본 영국 서독 프랑스 싱가포르 등 6개국과 92개 생필품 값을 비교 조사한 결과 이 중 55개 품목이 한국이 가장 비싼 것으로 나타났고, 다시 89년도 '스위스 비즈니스 인터내셔널' 조사로는 세계 81개 주요 도시 가운데 물가가 비싼 순위로 서울이 20번째, 미국에서 가장 물가가 높은 뉴욕보다도 더 비싸다.
내가 서울을 떠나 올 때에도 각종 공공 요금을 비롯 생필품 값이 계속 오르고 있었는데 여기서 한국의 이렇게 비싼 물가와 국민소득을 연계, 미국과 한번 비교해 보자.
미국의 89년도 1인당 GNP는 2만 1천 달러, 같은 해 한국이 5천여 달러, 즉 한국의 1인당 GNP는 미국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런데 물가는 미국보다 더 비싸다. 여기에 덧붙여 집 땅값은 서울이 미국에 비교가 안될 만큼 또 엄청나게 비싸다.
즉 의식주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보다 그 소득이 4배나 되는 사람들과 똑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비싼 값을 내면서 먹고, 입고, 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GNP 단순대비, 생활수준이 4분의 1이 아니라, 그 5분의 1, 6분의 1 수준인 셈이다.
서울의 물가가 얼마나 비싼가? 구체적인 예를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선물 받은 티셔츠 값이 6만 5천 원 (약 90달러), 집사람이 받은 여름용 원피스는 35만 원(약 5백 달러). 집사람 말로는 그 정도의 품질과 디자인이라면 뉴욕에서 기껏해야 각각 20여 달러, 1백 달러면 손쉽게 살 수 있다고 한다.
<91. 4. 25 『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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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車' '지옥 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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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온 종일이 줄곧 러시아워.
서울 전체가 차로 꽉 덮인 주차장.
서울의 교통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나로서는 이 이상으로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이야기를 하니 서울 친구들은 또 반박한다.
"일본 동경을 보아라. 서울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지 않느냐? 그리고 뉴욕 맨하튼도 서울 못지 않더라"
물론 하루 1백만 대 이상의 차량이 드나드는 맨하튼의 교통도 서울 못지 않게 복잡하긴 하다. 그러나 서울의 교통과 뉴욕의 교통은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 뉴욕의 교통은 복잡하긴 해도 질서가 있다. 사람들이 서두르지 않는다. 또 가능하면 양보를 한다. 그리고 또 좀처럼 새치기가 없다. 심지어 그 바쁜 출퇴근 시간에 버스가 휠췌어를 탄 불구자 한 명을 태우기 위해 몇 십분 씩 지체를 해도 승객들이 아무 불평을 않는다. 버스가 서야할 정류장을 그냥 지나쳤다고 운전기사와 승객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서울의 교통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둘째, 뉴욕의 교통은 러시아워 대(帶)가 뚜렷하다. 맨하튼으로 연결되는 다리 터널은 모두가 러시아워만 지나면 극히 한산하다. 지하철도 텅텅 비어 다닌다. 그런데 서울의 교통은 지상이고 지하이고 러시아워가 따로 없다. 하루 종일 '교통지옥'이다. 사람들이 모두 일을 해야할 근무시간·작업시간에 거리를 메우는 이 이동 인파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한 통계에 따르면 서울의 출퇴근 시간대 평균 주행 속도가 지난 80년에 시속 30.8km이던 것이 90년대엔 16.5km, 절반으로 떨어졌으며, 경부 고속도로 화물차 왕복 소요 시간은 80년의 14시간에서 89년에는 28시간, 두 곱으로 늘어났다는 이야기인데 지금도 서울에만 하루에 새 차가 5백여 대씩 굴러 나온다니 그 앞날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91. 3 『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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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단상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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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누구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인지는 몰라도 김포공항에 내리는 미국 동포들을 보고 서울 사람들이 "미국거지 왔다"며 손가락질하더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번에 서울 땅을 다시 밟으면서 필자는 이것이 한갓 우스개가 아닌 엄연한 현실임을 곳곳에서 절감해야 했다.
우선 서울의 집 값, 땅 값 앞에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서 중산층을 자처하는 필자가 살고있는 아파트 값은 현 시가로 20여만 달러, 한화로 약 1억 4천여 만원.
하지만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한테 그 이야기를 할라치면 "어디 저 변두리 시영 아파트에 살고 있구만…"하고 코웃음 당하기가 일쑤다. 지금 입고 있는 1백여 달러 (한화 7만여 원)짜리 양복만 해도 그렇다. 친지 친구들은 모두 4, 50만 원 짜리 양복을 입고 있으니….
서울의 중산층은 거의가 자가용차 한 대씩은 갖고 있고 자녀들 용까지 있으니, 대체로 '블루 컬러' 직종으로 어렵게 생계를 마련해 온 동포들을 보고 '미국거지'라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에 덧붙여 동포들을 아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데는 큰 실망과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어느 신문엔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다.
"재미 동포들이 이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작년(89년)에는 5천여 명이 되돌아 왔다. 그들은 돌아와서 부동산과 증권에 투기를 일삼으면서 놀고 먹으며 지낸다. 미국에 이민간 동포의 절반 이상이 국내에서 사기 횡령 폭력 등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거의가 한국서 살 수 없어 살 길 찾아 간 사람들 아니냐? "
이 기사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필자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았다.
"도대체, 좋다고 이민 갈 때는 언제고, 왜들 이렇게 기어 들어오나?"
"인간에겐 귀소본능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이민 생활 특히 나이든 사람들이 이국 땅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그 정경을 한 번 상상해 보게나"
"…"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먹고 살만한 달러를 갖고 들어오지 않는가? 국익에도 큰 보탬이 될 터이고…."
"달러고 뭐고 다 필요 없네. 이 좁은 땅에 가뜩이나 모자라는 주택난을 가중시킬 뿐… 교통난은 더욱 악화될 테고, 제발 더 들 들어오지 말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라고 이야기해 주게나"
하루 온 종일이 러시 아워. 서울 전체가 차로 꽉 덮인 주차장. 서울의 교통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그야말로 '생지옥'이라는 표현이 가장 걸맞지 않을까 싶다.
서울에 한 달여 머무는 동안 택시를 이용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해야 했다.
"행선지를 말하지 말고 무조건 집어타라."
"요금을 두 배로 준다는 표시로 두 손가락을 들어 보여라."
사람들이 택시 잡는 갖은 요령을 들려주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한번도 성공(?)할 수 없었다.
대중 교통 수단으로 그래도 사정이 좀 나은 것이 지하철. 그러나 그 지하철도 '교통지옥'이기는 지상과 다를 바 없었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 때는 말할 나위도 없고 하루종일이 그대로 러시 아워. 오죽했으면 사람들을 짐짝처럼 차안으로 힘껏 떠밀어 집어넣는 소위 '푸시맨 (push man)' 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을까?
서울에 머무는 동안 한 여인이 사람들에 떠밀려 차창 밖으로 떨어지는 사고조차 있었는데, 하루 종일이 러시 아워 이기는 자가용 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서울 시내에서 출퇴근에 편도 2시간씩 하루 4시간 운전을 해야하는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날이 갈수록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한번은 주말에 고속도로에 나섰다가 하루를 완전히 길에서 보내고 말았다. 차가 안 밀리면 1시간 여에 거뜬히 갈 수 있는 거리를 가는 데에 3시간, 저녁 돌아올 때에는 무려 5시간 반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서울∼부산 왕복에 소요되는 평균 주행 시간이 80년도에 14시간이던 것이 89년도에는 28시간 곱절로 늘어났고, 서울의 출퇴근 시간대 평균 주행 속도는 80년에 시속 30.5 킬로미터이던 것이 90년도에는 15.5킬로미터, 절반 속도로 떨어졌다고 한다. 또한 경인 고속 도로를 이용하는 수송 차량들도 86년에는 하루 평균 4번 왕래하던 것이 지금은 차량에 막혀 겨우 두 번밖에 못 뛴다는 이야기다.
택시 잡기도, 지하철 타기도 너무나 힘이 들고 자가용차를 타도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내는 서울의 교통,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 짜증나는 것은 큰 도로만 벗어나면 차도와 인도가 따로 없는 것이었다. 무심코 길을 걷다 보면 경적 소리에 깜짝 깜짝 놀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좁은 골목길, 일방 통행 표시조차 없어 차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네가 먼저 양보하라고 삿대질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차도·인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아 걷는 사람과 달리는 차가 한데 어울려 사람은 사람대로 고함을 치고, 차는 차대로 크랙숀을 울려대는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지금 서울 시민이 보유한 차량 수는 1백 30여만 대, 하루에 새차가 5백여 대씩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하루에 5백여 대면 한 달에 1만 5천대, 1년에 18만여 대 씩 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전국 국토 넓이에 비례한 도로 면적, 도로 면적에 비례한 차량 대수, 차량 대수에 비례한 사고율과 사망률, 이 같은 비율이 이미 '세계 최고'라는 통계 같은 것은 지금 서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 같은 교통난으로 인한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 낭비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정책 당국자들이 알아서 할 일, 우선 차 없는 사람은 차 한 대 갖는 것이 소원이고 갖고 있는 사람들은 더 큰 차, 더 좋은 외제차를 타보는 것이 모두의 한결같은 염원이다.
이리해서 오늘날 '한국경제의 총아'라고 불리우는 자동차가 해외시장에서는 그 매출이 격감되고 있는 반면, 내수는 폭발적으로 늘어 지금 서울의 그 비싼 땅을 한 뼘 한 뼘 덮어가고 있는 것이다.
텃세가 유별나게 심한 그 땅, 그래서 '뙤놈' 이라는 별명을 가진 중국인들 조차 발을 못 붙이고 거의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땅, 그리고 돈 좀 모은 해외 동포들이 조국이 그리워 들어갔다가 열의 일곱은 재산을 몽땅 날렸다고 하는 그 땅. 그런 땅을 조국으로 가진 우리들이 앞으로 갈 길은 과연 어디일 것인가?
<91. 3. 『女性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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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매 음독 자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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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가 남아돌아 주체할 수 없다고 해외여행을 가라! 해외투자를 하라! 고 장려하는 나라.
고기와 달걀은 콜레스테롤이 많아 건강에 해롭다고 사람들이 생선과 야채를 부쩍 찾는다는 나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씀을 쫓는 인구가 네 사람 중 한 사람 꼴인 나라.
그리고 또 우리 모두 '함께 살자!''더불어 살자!' (두 신문사의 금년 캠페인)는 구호를 외치는 나라.
다음은 그런 나라의 어느 한 구석에서 며칠 전 일어난 비극이다.
한 달 수입 25만 원 (약 3백50달러)의 아버지, 파출부 일을 하는 어머니를 둔 13, 11, 9, 7살의 네 자매, "우리들이 죽어 없어지면 집안 입을 덜 것 같아서…" 하는 내용의 '유서'를 써 놓고 음독자살을 기도, 7살 짜리는 죽고 셋은 위독하다는 소식이다.
'비극적, 너무나 비극적'인 모습에 우리는 눈시울이 적셔오는 것을 어쩔 수 없는데 어린 동생들에게 연탄집게로 겁을 주면서 사이다에 섞은 쥐약을 마시도록 강요한 큰 딸이 의식이 깨어난 후에 하는 말은 우리들의 가슴을 다시 한번 에이게 하다.
"집이 가난한데다 올해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셋째 동생도 학교에 가게 되어 부모님 학비 부담이 너무 무거워지는 것이 걱정 됐어요. 우리들 넷만 없어지면 부모님이 남동생과 함께 고생 안하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또 이들이 써놓은 일기장을 들여다 보는 우리의 눈은 더욱 흥건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 선생님께서 육성회비 안 낸 사람 이름을 부르셨는데 내 이름이 들어 있어 창피했다. 엄마한테 말하니까 돈이 없어 못 낸다고 하셨다."
"오늘 친구와 비행장에 놀러갔다. 명자는 돈 1천 3백 원을 갖고 왔으나 나는 돈이 없었다. 배가 고파 명자가 컵 라면을 사주었다"
"졸업식에서 미영이는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못 찍었다. 엄마가 밉기도 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하다. 오늘 밥을 먹을 때 반찬이 김치와 찌게 뿐이었다."
"반찬이 없어 도시락을 못 쌌다. 점심시간에 언니 동생과 함께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고 다시 학교로 갔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월수입 25만원으로 일곱 식구가 살아가야 하는 그 생활 정경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이들이 동네 구멍 가게에 써놓은 외상값 메모에는 또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10일-식빵 1, 달걀 3. 12일-두부 2모, 콩나물 5백원. 22일 -국수 7백원. 25일- 사이다 2백 50원』
눈물 없이는 읽어 내려갈 수 없는 이 글들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아직 철도 안든 이 어린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과연 누구인가?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그 부모에게 있다. 그러나 죽어라 하고 일해 보아야 한 달 수입 겨우 25만원, 그 부모인들 어찌하랴?
혹자는 이들을 '당돌한 효도''맹랑한 효심'이라고 어린이 답지 않은 면을 개탄하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이들의 행동에서 어떤 무서운 '분노와 반항'의 흔적을 본다.
언젠가 과일을 먹으면서 좀 더 먹고 싶다는 큰 딸에게 "이만한 것도 다행인줄 알라"는 어머니 말에 그녀가 한 대꾸, '그러면 내가 죽어 없어질 터이니 남은 식구 끼리나 더 오붓하게 잡수세요." 했다는 말에서 나는 그 어린 나이에 크게 응어리진 그 무엇에 대한 '분노와 반항'의 절규를 읽는다.
그 '분노와 반항'은 비단 그 부모에게 대한 것만이 아니다. 집에서는 먹고 싶은 과일 하나 실컷 먹을 수 없고, 학교에서는 육성회비를 안 낸다고 시달림을 받고, 놀러가서는 친구한테서 라면 한 컵을 얻어 먹음으로써 허기를 채울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분노와 반항, 자기를 그런 처지에 처하게 한 부모에 대한 분노와 반항,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일기장)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반항, 그 분노와 반항심이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도 바꿀 수 없는 어린 몸으로서 종내에는 자기 자신에게로 그리고 만만한 동생에게로 그 화살을 겨눈 것이 아닌가?
티 없는 동심에게 이같이 무서운 분노와 반항심을 깃들게 한 것이 과연 누구인가? 작고하신 함석헌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시다. 자, 네 모습을 한 번 보아라. 네 이웃이 이렇게 죽어가도 과연 네 마음이 편하느냐?" 고.
나는 이 말을, 지금 한국에서 권력이 있는 사람들,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어진다.
"자!, 동족이 그것도 열 살 안팎의 어린이들이 이렇게 죽어가도 당신네들 마음이 과연 편하느냐?" 고.
<89. 3. 9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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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 선 큰 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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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에 우뚝 선 종교인이자 사상가이며, 문필가이자 민권운동가 이셨던 함석헌 선생님이 씨 들의 슬픔 속에 돌아가셨다.
다정다감하던 소년 시절 나에게 많은 '말씀'을 들려주셨고, 그 '말씀'이 곧장 나의 인생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에,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는 선생님의 그 값진 '말씀들', 선생님 생전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몇 가지를 모아 본다.
◇"과일은 익으면 떨어져야…"-
우리는 흔히 말한다. 저 사람은 '착실한 사람' '착실한 교인'이라고.
그런데 이 '착실(着實)'이란 뜻이 과연 무엇인가? 함 선생님은 풀이하신다. 열매(과일)가 아직 덜 익었을 때 나무 가지에 찰딱 붙어있는 상태라고.
그러나 과일은 무르익으면 나뭇가지에서 떨어진다. 사람도 마찬가지, 어린 아기가 때가 되면 어머니 젖꼭지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또 때가 되면 혼자서 걷고 혼자 선다(自立). 즉 그 어떤 것에도 더 이상 의존(dependent on)치 않고 홀로 독립(independent)한다.
함 선생님은 말씀을 이으신다. 신앙도 종교도 마찬가지, 신앙이 무르익으면 교회라는 건물에서, 기도·예배라는 형식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고.
◇"눈은 보지 말라고, 귀는 듣지 말라고 있다."-
사람에게 눈은 왜 있나? 물론 보라고 있다. 사람에게 귀는 왜 있나? 물론 들으라고 있다.
그런데 함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눈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말라고, 귀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은 듣지 말라고 있는 것이니라."
무슨 뜻인가? 인간은 한갓 짐승이 아니다. 먹고픈 대로 하고픈 대로 멋대로 구는 동물이 아니다. 인간은 도덕적·윤리적 존재다.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려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다운 연유다.
함 선생님은 이렇게 모든 자연 현상에게 조차 윤리성·도덕성을 부여, 향락주의·쾌락주의에 젖은 현대인들을 엄하게 꾸짖고 자제를 촉구하셨던 것이다.
◇"양심에 화살을 꽂으라!"-
함 선생님은 철저한 비폭력 무저항 평화주의, 어떤 부정 어떤 사악의 대상에게도 '눈에는 눈으로'의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만 초래한다는 신념을 갖고 계셨다.
어느 땐가 목회자 모임에서 반독재 투쟁의 방법론을 에워싸고 중론이 오갈 때 선생님은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적의 양심에 화살을 꽂으라! 그 이상의, 그 이하의 방법도 없다."
◇"하나님과 직교하라"-
흔히 세상 사람들이 함 선생님을 '무교회'주의라고 한다. 다분히 잘못 인식된 지칭인데 '무교회'의 참 뜻은 무엇인가?
함 선생님은 하나님을 '인격신'으로 파악하신다. 또한 나(自我)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로 보신다.
그런데 그 존귀한 나는 하나의 성숙된 인격체, 그렇다면 그 인격체가 '인격신'인 하나님과 교류하는데 왜 중간 매체 또는 중간 역할자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 같은 중간 매(개)체 없이 나와 하나님과 직접 교류(直交)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신학적으로는 많은 논쟁이 되겠지만, 함 선생님의 이 '말씀'이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교회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사람은 끝에서 끝까지 뚫려야…"-
함 선생님은 항상 말씀하셨다. "사람은 뚫려야 한다"고.
사람의 몸은 식도로부터 항문까지 뚫려 있다. 그 중간 어디가 막히면 몸에 이상이 생겨 신체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인 면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확 뚫려 있어야 한다. 어디가 막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꼭 막힌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 선생님은 이렇게 속이 확 뚫린 사람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퉁소에 비유하신다.
◇"위 나쁘면 위만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유별나게 정치에 관심이 많다. 왜 그런가? 함 선생님의 대답은 "정치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신체를 볼 때 아무 이상이 없으면 우리는 위가 있는지,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 의식 없이 지낸다. 그러다가 어디에 이상이 생기면 온 신경·온 관심이 거기로 쏠린다. 위가 나쁜 사람은 뱃속에 위만 있는 것 같이 느낀다.
마찬가지로 정치가 제대로 잘 되어 간다면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요·순 시대에는 백성들이 임금 이름조차 모르고 살지 않았던가?
◇"제 정신이면 '돌기'는 왜 돌아?"-
50년 대 춤바람이 한창 퍼질 때다. 어느 날 연단에 서신 함 선생님, 불호령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가.
"정신들이 돌았나? 정신이 돌지 않고서야 제 정신들이라면 돌기는 왜 돌아?"
<89. 2. 24. 『미주 中央』 및 『미주 平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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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릭 골프장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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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 회원권이 하나의 투기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서울 컨트리클럽'의 경우 요즘 회원권 한 매 값이 1억 5천만 원을 오르내린다…" 얼마 전 고국 신문이 전하는 토막뉴스다.
1억 5천만 원, 달러로 얼마나 되는가 싶어 환산을 한 번 해보았다. 요즘 환률 약 7백 대 1로 잡고 무려 20만달러,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골프 좀 치는 사람 치고 Honma 골프채를 안 가진 사람이 없지요. 혼마 골프채라면 미국에서도 한 세트가 4, 5천 달러, 한국에서는 6백만 원 가량 하는 최고급품이지요." 요즘 한국을 다녀온 어떤 사람의 말이다.
골프 회원권 하나에 1억5천만 원, 골프채 한 벌에 6백 만원.
그 뉴스 그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조용히 생각해본다.
지금 한국적인 상황에서 과연 이래도 좋을 것인가? 하고…
한국의 골프 계 사정을 잘 아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구 4천만, 그 중 골프인구가 그 100분의 1인 약 40만(추산), 그런데 전국에 골프장이 모두 44개,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회원권 값이 올라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고 일본의 경우는 언젠가 뉴욕 타임즈가 보도한 대로 그야말로 백만 장자라야 골프를 칠 수 있을 정도로, 한국보다 몇 십 배 더 심하지요"
그러나 나로서는 이 같은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 '당연'이 당연으로 받아 들여 지지를 않고 "아니,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60년대 골프장이 한국에 처음 생길 때 이야기다. 당시 매스컴들은 골프에 대해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좁은 땅덩어리 나라에서 농사 지을 땅도 부족한데 골프장이 웬 말이냐고. 어느 날 D일보에 이 같은 부정적인 기사가 나가자 그 회사 간부인 K모 인사가 편집국에 나타나 일선기자들에게 일장훈시를 하는 것이었다.
"국민 건강을 위해 골프가 얼마나 좋은 스포츠냐? 기사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다루지 말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 K인사의 말에 일응 수긍이 난가는 바도 아니지만 요즘 골프 회원권이 투기대상이 되고 있다, 회원권 하나에 1억 5천만 원을 훗가 한다는 말을 듣게되니 국민건강에 좋은 스포츠가 너무나 많은 사회적인 부작용을 빚고 있는 것을 개탄치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 다 함께 한 번 상상해 보자.
삼복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들, 그 한 편에선 무거운 골프채를 가냘픈 여자 캐디 등에 짊어지우고 자기는 시원한 맥주를 마셔 가며 유유히 골프채를 휘두르는 사람들, 이 농부들 눈에 이 골프 족들이 과연 어떻게 비추일 것인가?
그리고 자기네들이 일평생을 죽어라고 일을 해 보아야 1억5천만 원을 훗가 하는 골프회원 권 하나를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 농부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내가 보기엔 지금 한국은 모든 것이 무섭게 변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농민, 노동자, 근로자들의 드높은 함성 즉 "너만 사람이냐? 나도 사람이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야 겠다."는 일치된 절규다. 그런 그들에게 '골프 회원권 하나에 1억 5천만원'운운 하는 이야기는 그들로 하여금 무서운 분노와 함께 큰 의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6공화국은 '보통사람들의 시대' 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건강을 위한 골프도 특권층만의 스포츠가 아닌 '보통사람들의 스포츠'가 되어야 한다. 미국 같이 돈 있는 사람이건 돈 없는 사람이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 스포츠가 되어야 한다.
그 한 방법으로 필자는 감히 주장한다. 한국의 골프장을 모두 국가가 인수 운영하라고.
미국에는 프라이빗 골프장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퍼블릭 골프장이 숱하게 많다. 프라이빗은 상당한 회비를 내야 하지만 퍼블릭은 단 돈 10달러, 20달려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곳,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한국적인 상황으로 보아 그 우선 순위가 어느 쪽이어야 할 것인가? 당연히 '최대다수의 최대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퍼블릭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혹자는 말하리라.
그 많은 골프인구, 몇 개 안 되는 골프장, 몰려오는 골퍼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고.
필자의 생각으로 그것은 그다지 중요치가 않다. 중요한 것은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모든 기회의 균등 즉 미국에서와 같이 돈 있는 사람이건 돈 없는 사람이건 누구나 그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의 균등이다. 하물며 그것이 집 짓고 농사 지을 땅도 모자라는 나라에서 '국민건강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도입된 것이라면 더욱 그래야 할 줄 안다. 그리고 수요·공급의 갭은 운영의 묘를 살려 권력이 있건 없건, 돈이 많건 적건, 불문하고 First Come, First service를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골프장 하나만이라도 정부가 이 같은 단안을 내린다면, 지금 한국사회의 큰 불안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계층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한 방법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88. 11. 26 『미주朝鮮』 및 『골프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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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웃기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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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일이다.
웃겨도 너무나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며칠 동안 고국신문이 전하는 몇 가지 이야기는 자다가 생각을 해도 웃음이 나오니 말이다.
친구가 많다고 종업원을 강제 해고시키고, 학비만을 위해 아르바이트(과외지도)한 여대생을 구속하고, 그리고 또 학교에서는 성적이 올라가는 학생 또는 성적이 내려가는 학생을 '요주의 대상 학생' 으로 감시하고…모두가 너무나 웃긴다.
그러나 뜻 있는 사람들에겐 결코 웃어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기에 이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 가운데 비단 이것만이 우리를 웃기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친구 많다고 해고-
E여대 사범대를 작년에 졸업한 K양 (25세) 은 여대 졸업생 취직률 5%인 상황에서, 직장을 구 하다 구 하다 못해 하는 수 없이 지난 2월 서울 구로 공단 내 봉제업체인 D사에 미싱공으로 취직을 했다.
대학시절 소위 말하는 운동권내에 속해본 일도 없고 데모 등으로 경찰서 신세를 져본 적도 없는 K양은 오직 취직이 되어야겠다는 일념에서, 혹 회사측에서 학력이 높다고 또는 나이가 많다고 안 써줄 것 같아 이력서에 동생의 이름과 나이를 적어 넣었다고 한다.
입사 후 이것이 늘 마음에 걸리던 K양은 회사 사장을 만나 사실을 고백, 사장도 일단 이를 불문에 붙이기로 약속, 그래서 마음 놓고 열심히 일을 했단다.
그런데 취직 3개월 만인 지난 5월 갑자기 회사측에서 이유도 없이 K양에게 자진 사퇴를 종용, K양이 이에 불응하자 일방적으로 강제 해고를 했다.
기자의 문의에 그 회사 사장 가로되, "보통 근로자의 경우 입사 2,3개월이면 친구가 2,3명 정도인데 K양은 입사한지도 얼마 안 되어 친구가 7,8명이 되는 등 취업 동기를 순수하게 볼 수 없다"고 말하더라고.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과외하다 구속된 여대생-
언제인가 한국서 과외가 한창 말썽일 때 "사촌까지는 무방하다" "아니다, 사촌도 안 된다" 하는 공방전을 보고 고소를 금치 못한 일이 있다.
적극 장려되어 마땅할 학문의 수수(관계)가 핏줄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합법이 되기도 하고 불법이 되기도 한다는 사고방식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고대 영어 교육학과 3년 한혜숙 양 (23세) 이 어느 중학생에게 과외지도를 하다가 "저 집도 과외를 하는데요"하는 이웃의 고발로 적발되어 한 동안 구속까지 되었다.
가냘픈 여대생의 몸으로 학비 보조금 한 달 8만원(약 90달러)을 위해 한 학생을 붙잡고 밤잠을 못 잔 것이 죄의 전부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아니 얼마나 서글픈 이야기인가.
△성적 좋은 학생 단속-
한 양의 구속을 계기로 요즘 국내에서는 과외가 또 다시 사회 문제화, 각급 학교마다 과외 단속이 한창이라는 이야기다.
어느 일류 고등학교의 경우 "불법과외 뿌리뽑아 밝은 사회 이룩하자!" "꿈나무의 불법과외 백년대계 그르친다" 는 등의 묘한 표어까지 내 걸고 과외의 예방과 단속에 부산하다는데 그 단속 지침이라는 것을 읽어 내려 가다가 코웃음이 터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즉 '요주의!' 대상 학생 중엔 '갑자기 성적이 좋아진 학생'이 끼어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라는 것인가,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런데 더욱 웃기는 것은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도 또 '요주의!' 대상이란다.
그런 학생은 떨어지는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과외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
그래서 이런 학생들에겐 "절대로 과외를 않겠다"는 양심선언을 받으라는 상부의 지시란다.
이 모두가 웃겨도 너무나 웃기기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86. 7. 27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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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부: 분단/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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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과 恨에 불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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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과 회한과 감격으로 서울·평양을 뒤덮었던 남북 이산가족 '핏줄의 큰 만남'이 마치 영화 속의 한 극적인 파노라마 같이 잠깐 펼쳐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모든 빅 이벤트가 다 그렇듯이 클라이맥스 뒤에 오는 이 아쉬움, 이 공허함, 이 허전함. 이제 우리는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 정(情)이 많은 민족, 한(恨)이 쌓인 민족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민족성을 양철 냄비 같이 쉽게 달아 올랐다가 금새 식어 버리는 건망증 심한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 장면 장면에서 보여준 그 정(情)의 넘쳐흐름, 쌓인 한(恨)의 분출 모습은, 당사자는 물론 태평양 건너 멀리서 바라다보는 사람들조차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감격과 흥분을 안겨 주었는데, 건망증 심한 우리는 이제 또 이를 일과성 해프닝으로 치부, 망각 속으로 묻어 버려도 좋을 것인가?
'감격의 대 향연'이 끝난 후에 고요와 정적 속에서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 이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해 본다. 앞으로의 보다 큰 발전과 비약을 위해….
이산 가족 상봉에서 보여준 그 눈물의 넘쳐흐름, 간장을 애는 울부짖음과 몸부림 속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독특한 다정다한(多情多恨)의 모습을 본다. 그렇게 정도 많고 그렇게 쌓인 한도 많고….
다정다감한 감성의 민족이 오랜 역사의 고난 속에서 쌍이고 쌓인 이 피맺힌 한, 그 정과 한이 이번 이산 가족 상봉을 계기로 한껏 표출되어 삼천리 강토를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었는데 이제 우리는 이 정과 한을 한 단계 승화시켜, 보다 이성적·이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민족의 슬기를 발휘해야 할 때가 됐다고 본다.
어떤 계기가 마련되면 그렇게도 무섭게 표출되는 그 '정과 한', 그것을 반세기 동안 그 누가 그렇게 억누르고 짓밟아 왔던가? 아니,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처절한 인간 욕구를 왜 그렇게 억눌림 당한 채, 봉쇄 당한 채, 그냥 살아 왔단 말인가?
"반세기 동안 그렇게 그리워하는 혈육들을 못 만나고 살아왔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어느 외국 기자의 말, 물론 한반도의 특수 상황을 잘 모르는 '인권국가'의 시각이긴 하지만 이제 이 말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너무나 큰 뜻을 지닌다. 만일 미국 같은 나라에서 어떤 ethnic group이 우리 이산가족처럼 그 만남을 그렇게 열망하고 간원 하면서도 50여 년 동안 그 것이 철저히 억눌림 당하고 봉쇄 당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 것인가?
이제 역사의 변화에 발 맞춰 이번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우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이 '정과 한'의 심성(心性)에 불을 붙여야 한다. 정부와 국가는 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링컨의 말을 빌 필요도 없이 오늘날은 정부·국가의 존립 의의가 오직 "for the people"에 있는 시대다. 북쪽 또한 비록 그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국가 목표가 이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남과 북이 어떤 정부 어떤 국가 체제이건, 인간의 기본 욕구를 그렇게 억눌림 당하고 그렇게 봉쇄 당한 채, 더 이상 살수는 없다. 아니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 남과 북 7천만 겨레의 그 넘쳐흐르는 '정'과 쌓이고 맺친 '한'이 한 곳으로 결집, 거기에 불이 붙여진다면 3·8선 따위 장벽 같은 것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이산가족 상봉이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2000. 8. 30 『미주 中央』 및 『서울大 동창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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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누가 지키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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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한(恨)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한'이 많기에 어떤 일을 당하면 평소에 쌍이고 쌓인 '한'이 일시에 폭발, 그렇게 격정(激情)적이 되고 비이성적이 되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이 '한'을 표출하는 모습 중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아리는 것은 6·25때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일선 병사들이 "빽! 빽!" 하면서 울부짖었다는 일화이다. 즉 그들이 '빽'이 없어 일선에 배치 당해 "이렇게 죽어간다"는 한(恨)과 원(怨)이 뼈에 사무쳐 숨을 거두면서 "빽! 빽!"을 연발했다는 이야기다.
전장에서 죽어 가는 그들의 입에서 어떻게 해서 "빽! 빽!"하는 울부짖음이 나오게 되었는가?
그 배경 설명을 위해 40여 년 전 필자의 군 복무 경험을 한 번 되돌아본다.
휴전 4년 후인 57년 말, 필자는 대학 재학 때 자원 입대했다. 이유는 재학 중 학보병으로 입대하면 복무기간을 1년 6개월로 단축해 주는 특전이 있었기 때문. 단, 한가지 조건이 있었다. 학보병은 모두 최 전방부대 말단 전투 소대에 배치한다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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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훈련소, 멀쩡한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앰블런스에 실려 군 병원으로 이송되어 갔다. 불문가지, '빽'있는 친구들이 꾀병으로 입원을 했다. 또 '빽'있는 친구들은 훈련장에 나가서도 고된 훈련은 받지 않고 가만히 앉아 놀면서 하루 일과를 끝내기도 했다.
8사단 최전방 말단 소대. 소대원 거의가 시골 농촌 출신, 국졸, 고졸도 드물었다. 한 번은 사소한 일로 하사관 한테서 진탕 얻어맞았다. "뭐, 네가 대학생이야? 어디 군대 맛 좀 봐!"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역시 그 무엇에 대해 쌓이고 쌓인 '한'을 복무기간 단축 등 여러 가지 특전을 받는 대학생이라는 대상에게 한껏 한풀이를 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받은 휴가. 학교엘 들르니 분명히 같이 입대한 많은 친구들이 버젓이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도서관에서 고시공부에 땀을 흘리고 있고… 그리고 또 어떤 친구들은 일선 부대 아닌 후방 부대에 파견근무, 편안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빽'으로 장기 휴가 등 편법을 동원, 학기 등록을 하거나 학보병 조건인 일선 부대를 탈출한 것이었다.
군복무·학업을 마치고 입사한 모 신문사. 공채(公採)로 먼저 입사한 선배동료 중 군복무를 마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이·학교 입학 연도는 엇비슷한데 기자 경력-곧 사회진출-은 1년, 2년, 3년씩 앞서 있었다.
지금 소록도에 가 있는 모 대선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가 한창 말썽이었을 때 고국에서는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어둠의 자식'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즉 병역의무를 면제받은 젊은이는 조화(造化)를 부린 '신의 아들', 방위나 보충역으로 빠진 젊은이는 힘께나 있는 '장군의 아들', "헐 수 할 수 없어" 군에 끌려간 젊은이는 '어둠의 자식'.
비록 전시는 아니지만 가장 고생되고 힘들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지뢰만도 100만개가 깔려 있다고 하지 않는가-그 누구도 가기 싫어하고 기피하는 최 일선 전방부대, 지금 그곳에 어떤 젊은이들이 배치되어 있을까? 혹시나 '어둠의 자식들' 중에서도 정말 힘없고 '빽' 없는 '컴컴한 자식들'만이 38선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병역 문제가 대선의 큰 이슈가 되어 있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38선은 과연 누가 지키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집중 조명·분석이 한 번쯤 있어야 될 줄 안다.
<97. 9. 24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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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과 인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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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비중·상황의 특수성이 상승 작용, 황장엽씨의 증언(기자 회견)이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연 그의 증언 내용이 100% 그의 진심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따른 자의 반 타의 반이었는지, 그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으니 오늘 여기서는 그냥 덮어두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그의 기자회견이 이렇게 늦어진 것은 그가 진술 내용에 그 동안 서명을 거부해 왔기 때문이라는 소문인데, 하여간 그의 진술 내용을 본인의 진심으로 일단 간주하고 이에 대한 필자의 소견을 몇 가지 적어 본다
그가 한 많은 이야기 중 그 골자를 간추려 보면…
① 북은 언제고 또 한 번 전쟁을 일으킨다. 전시체제를 완벽히 갖추고 있다.
② 북은 한 마디로 '김정일 국가'다. 모든 것이 그의 명령 일하로 움직인다.
③ 북의 남침을 막고 평화통일에 기여하기 위해 남행(南行)을 결행했다.
④ 지금도 사상 전향 중이다. 그러나 인본주의(人本主義) 철학은 확고히 신봉하고 있다.
⑤ 남북한 사람 사는 것이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의 여러 증언 중 특히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맑시즘과는 벌써 60년대 후반 결별했다. 남쪽에 온 지금도 사상 전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철학에 대한 신념은 확고하다"는 대목인데 그가 신봉하는 인본주의 철학이란 무엇일 것인가?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 없어 그 온전한 개념을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인본주의(Humanism)를 일반 상식으로 해석해서 '사람이 중심 되는 사상', '인간이 으뜸 되는 철학'이라고 정의를 한다면 그 인본주의 철학자 황장엽 씨에게, '돈이 근본이 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남한 사회상이 어떻게 비추어 졌어야 옳을 것인가?
그런데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짧은 기간에 역사의 기적을 창조한 남녘…" "남과 북은 사람 사는 것이 하늘과 땅의 차이다" 라고.
'돈이 근본'인 자본주의 시각으로 보면 이 말은 백 번 옳다. 그러나 '사람이 근본'인 인본주의 철학의 입장에서도 이 말이 타당성을 지닐 것인가? 자본주의의 꽃과 열매만 보았지, 그 꽃이 피고 열매가 맺기까지 얼마나 인간성이 파괴되고, 또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가를 간과하지나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그는 또 남한 근로자들의 파업투쟁·학생 데모 등을 강력히 비난했다. 물론 그의 이 같은 발언은 평생 획일적인 사회에서 살아 온 단세포적인 시각 그리고 다원화된 복합사회의 무경험에서 비롯된 것인 줄 이해되지만, 이 역시 '사람이 으뜸되는' 인본주의 철학자로서는 무엇인가 간과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돈이 근본'이 되는 자본주의 체제, 그 '돈의 횡포'를 돈을 못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특히 그 '돈의 횡포'가 사회 정의를 벗어날 때, 못 가진 다수는 하나 하나의 허약한 힘을 한데 결집, 단체 교섭·집단 행동으로 이에 대항하고 자기네들 권익을 옹호하는 방법 이외 그 어떤 다른 수단이 있을 것인가?
학생 운동도 그렇다. 오늘날 상황에서는 그 평가가 달라져야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항일 운동·반 독재 운동에 앞장 선 원동력이 누구인가? 그들을 비난·매도하기 전에 '한보' 같은, '현철' 같은, 요즘 대선 진흙탕 싸움 같은, 남한 사회의 부정·부패·불합리·모순을 지적, "자본주의 사회란 이런 것이나?"고 개탄을 앞세웠어야 옳지 않았을까?
'내 생명의 모체'인 민족을 위해 '내 핏줄인 가족'의 희생을 무릅쓴 인본주의 철학자 황장엽씨의 굽힘 없는 건투를 빈다.
<97. 7. 17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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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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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남행(南行)으로 남북 문제가 새로이 크로즈 업, 좀 더 가까이 우리들 가슴에 와 닿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분야 등 그 풀어야 할 과제가 너무나도 많은 통일 문제, '북의 인민들'은 과연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가상(假想) 남남북녀(南男北女)의 대화를 한 번 엮어 본다.
▲남남(南男)-북에서는 인민들이 망년회 등 명절 때를 '자본주의 하는 날'이라고 부른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북녀(北女)-평소에는 잘 못 먹고 일만 죽어라 하다가, 그런 날만은 이밥에 고기 국 먹고 주패장(카드)놀이 등 신나게 놀 수 있기 때문이죠.
▲남남(南男)-남쪽에서는 흰밥은 영양가 없다고 잘 안 먹고, 고기는 살이 찐다고 잘 안 먹습니다. 고스톱 등 카드놀이는 언제 어디서나 칠 수 있고….
▲북녀(北女)-남쪽 사람들은 그렇게 잘 먹고 잘 놉니까? 참 부럽군요.
▲남남(南男)-그러니 자본주의가 얼마나 좋습니까?
▲북녀(北女)-그렇지만 자본주의는 싫소이다.
▲남남(南男)-잘 먹고 잘 노는 것을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한데 어쩔겁니까?
▲북녀(北女)-우리식대로 살아야죠. 비록 배가 고프고 추위에 떨더라도…사람 사는 것이 뭐, 잘 먹고 잘 노는 것만이 어디 전부인가요?
▲남남(南男)-무슨 뜻이죠?
▲북녀(北女)-자본주의란 글자 그대로 '돈(資)이 만사의 근본(本)'이 되는 사회, 그리해서 돈을 위해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회,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은 거죠. 한편으론 무섭기도 하고….
▲남남(南男)-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차피 남과의 경쟁, 그런 인센티브(Incentive)가 없으면 발전이 없고 진보가 있을 수 없지요. 해방 후 똑 같이 50여 년의 세월, 그런데 지금 북은 그렇게 못 살고, 남은 이렇게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녀(北女)-남쪽이 아무리 잘 살아도, 그래서 우리가 1년에 몇 번 모처럼 잘 먹고 잘 놀 수 있는 날을 '자본주의 하는 날'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되는 날'은 바라지 않지요.
▲남남(南男)-앞뒤가 안 맞는 얘긴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요?
▲북녀(北女)-자본주의 체제는 경쟁 사회라고 하셨는데 이미 반 백년 동안 그 체제 속에서 산 남쪽 사람들하고 '전체는 나(我)' '나는 전체' 라는 주체사상 속에서 살아온 우리가 어떻게 경쟁을 할 수 있나요? 그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약삭빠른 사람들과 어누룩한 사람들의 경쟁, '자본주의 되는 날' 우리들은 2등 국민으로 전락, 남쪽 사람들의 뒤치닥거리나 도맡는 처지가 될텐데 그것보다는 비록 배가 좀 고프더라도 지금 이대로가 더 낫다는 것이죠.
▲남남(南男)-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렇게 배를 곯고 추위에 떨고 있을 겁니까? 지금 남쪽에선 남쪽 사람 두 명이 북쪽 사람 한 명만 먹여 살리면 된다는 결의로 통일을 열망하고 있는데 한 번 눈 딱 감고 그것을 믿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북녀(北女)-우리 세대만을 생각하면 혹시 그럴 수 있을는지 몰라도 우리 2세들을 위해서 그럴 수가 없어요. 남쪽의 그 무서운 입시지옥, 몇 백대 일의 취직 경쟁, 그 똘똘하고 영악한 남쪽 어린이들하고 '우리 수령님' 밖에 모르는 천진난만한 북쪽 어린이들하고 도저히 경쟁을 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 세대 뿐만 아니라 우리 2세들까지 3등 국민의 신세가 되어 남쪽 사람들의 시중이나 드는 꼴이 될텐데 우리는 그것을 결코 원치 않는 것이죠.
<97. 2. 26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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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비서에게 띄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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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 미묘한 남북 관계에 지금 너무나 큰 회오리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황장엽 비서에게 이 글을 띄웁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황 비서의 남행결행(南行決行), 고국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곳 해외 동포들에게도 너무나 큰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이곳 동포들은 황 비서의 이번 결행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일대 전기가 되리라고 보고, 또한 큰 흥분과 기대 속에서 가슴을 설레이고 있습니다.
북의 체제를 유지·발전시키는 데 그 이념적 기반이 된 소위 주체 사상을 다듬고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으로 알려진 황 비서님은 이번 결행에 앞서 "남(南)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번 결행의 평가는 후세 역사의 심판에 맡기겠다. 이제 내 나이 74세, 조국(통일)을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이 길 뿐이라고 판단, 모든 개인적인 희생을 각오하고 남행을 결행하게 되었다."
황 비서님, 그 '비장한 결행'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한 없는 경탄과 존경을 표해 마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 '마지막 봉사의 길'이 과연 어떤 것이며, 또 그 길이 앞으로 어떤 길이 될 것인가에 대해 적잖은 의구심과 염려가 뒤따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지금 주중 한국 대표부 안에서 겪고 계시듯 황 비서님의 일거수 일투족은 이미 비서 님 개인의 자의가 아닌 복잡한 국내·국제 역학 관계에 의해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게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역사를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해방 직후 김구 선생은 "통일(정부) 아니면 죽음"이라는 각오로 몇 번인가 북행을 감행했습니다. 근래에는 문익환 목사님 같은 분이 "민족과 사랑"이라는 순수한 열정으로 또한 죽음을 각오,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남북을 오갔습니다. 이 두 경우, 물론 그 시기·그 상황에서 북행을 감행한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의미는 크겠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우리가 얻은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냉혹한 역사적 현실 앞에, 같은 피를 앞세우는 민족애, 또는 사랑을 내세우는 인류애라는 순수한 열정이 얼마나 힘없이 산산조각이 되는가? 하는 좌절 뿐이었습니다.
황 비서님은 그 '편지'에서 또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북에서는 나로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남에 내려가 남쪽 당국자들과 흉금을 터놓고 하나의 조국을 위해 의논해 보고 싶다"고.
여기서 우리는 비서님의 학자로서의 순수한 양심, 그리고 민족주의자로서의 정렬에 감복해 마지 않으면서도, 그 같은 생각과 기대가 막상 남한 땅 현실에 부닥쳤을 때, 과연 그 결과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해 궁금증 보다는 두려움이 더 앞서는 것을 또한 어쩔 수가 없습니다.
황 비서님. 그러나 지금 비서님의 결행은 남북 한반도에는 너무나 큰 쇼크를 안겨주고 있고, 또 전 세계적으로 적잖은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자체 만으로도 이미 이번 결행은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문제는 이제부터 입니다.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려는 비서님의 이번 거사가 그 순수한 의도와는 정반대로 북은 북대로 더욱 호전적·적대적이 되어 가고, 남은 남 대로 지금 한창 어려운 정국의 국면 전환용, 아니면 공안 정국 조성을 부채질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러해서 남북 관계가 더욱더 어렵게 꼬여 간다면, 이는 결코 비서님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 바라는 것은 이번 비서님의 결행이 북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 되어 체제 변화의 계기가 되고, 또한 남에게는 체제 우위에 대한 자만 아닌, 민족 공동체 각성의 계기가 되어 한국 역사에 길이 남는 '큰 이벤트'로 기록되기를 간절히 염원할 뿐입니다.
<97. 2. 19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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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 to help? Go to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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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잘 사는 형'으로서 동생이 그렇게 헐벗고 굶주린다는데 좀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먹다 먹다 못해 쓰레기로 나가는 음식 찌꺼기가 1년에 수 조원 어치에 이른다면서….
한국인-말도 마십시오. 이제 진이 빠졌습니다. 그 동안 그만큼 도와 줬고, 또 지금도 도와 줄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너무나 못돼 먹었습니다. 주는 것을 고마워 하기는 커녕 주는 손을 물어뜯으려고만 하니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인-이해는 하겠습니다만, '잘 사는 형'으로서 '못 사는 동생'을 돕는 태도랄까, 자세에 어떤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마치 2차 대전 후 미국이 전 세계 굶주리는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도와 주었으면서도 종내에는 "Yankee Go Home!" 소리 밖에 못들은 것 같이 말입니다.
한국인-당장 굶어 죽게된 놈이 무슨 얼어빠진 자존심입니까? "형님, 좀 살려 주시오" 하면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어도 모자랄텐데….
미국인-거기서 당신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란 아무리 배가 고파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 법 아닙니까?
한국인-아닙니다. 오직 시간 문제 입니다. 그들이 정 배가 고프면 어쩔겁니까? 그래도 "살려 달라!"고 달라붙을 데가 우리 밖에 없는데….
미국인-그런데 그 전에, 배고픔을 참다 참다 못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무슨 큰 행패(전쟁)라도 부리면 어찌 할 겁니까?
한국인-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경제력·군사력이 비교가 안되고, 또 우리 뒤에는 막강한 미군이 있지 않습니까? 저네들 뒤에는 이제 아무도 없고….
미국인-그래도 누가 압니까? 핵 폭탄을 개발한다.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한다 하고, 또 현대전에서 가장 무섭다는 화생방 기술이 그 어느 나라에 못지 않다는 정보인데….
한국인-그렇게 되면 피차 피해가 막심하겠지요.
미국인-설혹 그 '못된 동생'이 거기 까진 안 간다 해도 문제는 또 있습니다. "배가 고파 못 살겠다"고 그 집을 뛰쳐나오는 사람들이 앞으로 봇물을 이룬다면 그들을 모두 어떻게 할 겁니까?
한국인-거기에 대비,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특별 예산도 책정해 놓았고, 곧 집단 수용소도 착공할 예정이고….
미국인-그것을 영어로 표현한다면 "Wait to Help" (기다렸다가 도와준다)가 되겠는데, 그럴 것 없이 지금 당장 배고파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Go to Help"(가서 도와준다)하면 어떻겠습니까?
한국인-불가합니다. 동생 놈이 그 동안 저지른 온갖 못된 행패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또 개과 천선하지 않는 한 굶어 죽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미국인-같은 혈육으로서 그렇게 눈물이 메마른 강경 자세를 취하는 것은 혹시, 꼴도 보기 싫은 너희들을 왜 내가 도와 그 체제를 하루라도 더 지탱케 할 것이냐, 하는 속셈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인-그런 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미국인-그렇다면 '큰 형' '잘 사는 형'으로서 '못된 동생' '못 사는 동생' 문제를 어찌할 겁니까?
굶어 죽어 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도와주지도 않겠다. 배곯는 사람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저지를 수도 있는 이판사판의 행패도 원치 않는다, 그러면서 하루 빨리 그들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면서, "형님, 살려 주십시오" 하기만을 바라는데 그것이 과연 조만간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인-솔직히 말해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도 어떤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생 문제에 대해 갈팡질팡 한다고 집안 식구들로부터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요.
미국인-모든 것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 그 고충을 이해는 합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일에는 '그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동생' 문제에 있어 자칫 실기(失機)를 하면 양편 모두 너무나 큰 비극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이 때' 가, 당장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앞으로 도와 줄 날을 기다릴 '때'냐?" 아니면 "당장 가서 도와 줄 '때'냐?" 하는 큰 기로에 선 시점인 줄 압니다.
제발 바라 건데, 그 어느 쪽이 되었건 '그 때'를 놓침으로써 한국의 역사에 '천추의 한'을 남기는 우를 범치 않기를 진정으로 빕니다.
<96. 12. 26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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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탈북(脫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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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너무나 비극적…"
이번 17인 일가족 북한 탈출 과정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회다.
노인·임신부·어린이 등 한 가족 일행이 북한의 그 삼엄한 경비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고, 다시 중국에서 2천여 km를 헤맨 끝에 44일만에 홍콩에 도착해 한국에 망명을 신청, 그것이 받아 들여져 '자유의 땅'을 밟았다는 소식이다.
한국은 이 '17인 일가 대탈북'을 더 할 수 없이 좋은 체제 선전 기회로 이용, 매스컴들은 '자유의 대장정(大長征)'이니 '위대한 인간 승리'니 하면서 연일 대서 특필하고 또 당국은 이들이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듯 진수성찬 향응에 호화 관광을 시키는 등 대접이 극진하데, 필자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비극적 너무나 비극적"인 모습으로만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그 땅에서는 "너무나 배가 고파"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 "살 길을 찾아" 사생 결단하고 나섰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가슴을 저미게 한다. 만일 이 같은 말들이 누가 시키지 않은 사실 그대로라면, 지금 그 땅에 있는 2천여만 북녘 동포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 것인가? 분단의 비극·체제의 비극을 절감치 않을 수가 없다.
지금 중국·러시아에는 2∼3천여 명으로 추산되는 탈북 동포가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는 보도다. 이 중 한국 공관에 공식적으로 망명 신청을 해 놓고 있는 사람만도 중국에 5백여 명, 러시아에 2백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번에 '자유의 땅'을 밟은 17인 일가족은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운 좋게 뽑힌' 행운아들이라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이야기인가?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탈북 17인 가족이 꽃다발을 받으며 '자유의 땅'을 밟고 남산 타워에 올라가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보며 "야, 황홀하다"고 감탄해 마지않던 날, 그리고 푸짐한 식탁에 않아 "불고기, 이런 것 처음 먹어본다" 면서 생전 못 먹어 보던 음식들을 호식하던 날, 그 시점을 전후 해 이들보다 앞서 북한을 탈출(88년), '자유의 땅'을 밟은 한 귀순자(김용화)가 정부 당국에 제출했다는 호소문이 우리를 너무나 슬프게 한다.
"…현재의 고통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 중국 추방이나 북한 송환도 달게 받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수많은 탈북자들, 그리고 중국동포들이 그렇게도 오고 싶어 하는 '자유의 땅' '풍요의 땅'에서 그의 삶이 어떠하기에 그 천신만고 끝에 밟은 땅을 이제 다시 벗어나려 하는 것일까?
비록 '탈북'의 범주에 들지는 않지만 또 다른 우리의 동포, 중국 조선족간에 요즘 공공연히 떠돈다는 다음과 같은 말들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 큰 비극감을 안겨 준다.
"우리의 조국은 이제 한국이 아니다. 우리들을 지금까지 살 게 해 준 중국이다."
"전쟁이 나면 먼저 달려가 한국 사람들을 모조리 쏴 죽이겠다."
어떻게 해서 그들의 입에서 이렇게 무서운 말들이 나오게 되었는가?
고국 TV 화면에 비추이는 '자유의 대장정' '위대한 인간승리' 장면마다 나에게는 중국 동포들의 이 같은 섬찟한 말들, 그리고 한 귀순자의 '탈남(脫南)' 호소가 오버랩 되어 '탈북의 비극성'을 더욱 절감케 한다.
<96. 12. 18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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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도 한국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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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조국은 하나인가? 둘인가? 물론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국은 북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가? 남의 '대한민국'인가? 물론 남의 '대한민국'이다.
다시, 그렇다면 북의 '인민공화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의 이 같은 정신적 혼란스러움에 어떤 해답을 주는 판결이 이번에 고국의 대법원에서 나왔다.
즉 대법원 특별 1부(주심 : 이돈희 대법관)는 지난주 북한 공민증을 소지한 중국 거주 동포에게 "북한 역시 대한민국 영토에 속하는 한반도의 일부로서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는 곳"이라며 "따라서 북한 해외공민증을 발급 받는 등 북한 주민이 명백한 만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유지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다.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은 이렇다.
북한 해외공민증을 갖고 중국에서 살던 이영순씨(여·59)가 지난 92년 중국 여권으로 국내에 들어와 그간 식당 등에서 일을 하다가 체류 허가 기간(30일)을 넘겨 강제 출국 명령을 받았다. 이에 이씨는 법무부 산하 서울 외국인 보호소 소장을 상대로 강제출국명령 처분 무효소송을 냈다. 이씨는 1·2심에서 승소, 이번에 대법원 상고심에서 "대한민국 국민인 이씨에 대한 강제퇴거 및 보호명령은 취소해야 한다."는 원심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이다. 이 같은 판결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는가?
이를 좀 더 분석해 보면 "대한민국 주권은 한반도 전체에 미친다"는 헌법조문에 근거, 따라서 대한민국 영토인 북한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법률적 해석인데, 이를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적잖은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우선 북한에 거주하는 일반 주민은 그렇다 치고 그 주민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정권 및 그 정권 담당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남쪽에서는 그 정체성을 인정치 않고-양편이 똑 같다-일개 '불법 집단'으로 간주하는 북한 정권, 그러나 하나의 독립 국가로 떳떳이 UN회원국이 되어 있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 그 나라의 정권 담당자들도 또한 대한민국 국민일 것인가?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이번 판결이 다른 법령과 상충되는 점이다.
다 알다시피 남한에는 국가보안법이란 것이 있다. 이 법은 북한을 '적성 국가'로 못 박고 있다. 그리해서 그 '적성국가' 및 그 '적성국가' 사람들과 일체의 접촉·교류를 금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지난번 애틀란타 올림픽 때 남북한 선수들이 같은 식탁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한 일이 있는데, 이것도 보안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적성국 사람들과의 접촉'에 해당, 처벌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그 적성국 주민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의했으니,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 '북한 사람들'을 맘대로 접촉하고, 교류하고, 방문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인가?
그리고 또 국가보안법에는 '적성국 잠입죄' 조항이 있다. 북한 땅을 당국의 허가·양해 없이는 드나들지 못한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북한 역시 대한민국 영토에 속하는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는 곳"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영토'인 '북한 땅'을 자유자재로 드나들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북한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
'북한 땅도 대한민국 영토'
이번 대법원 판결은 해외에 사는 우리에게 조국이 하나냐? 둘이냐? 북한 사람들이 적이냐? 아니냐? 하는 정신적 혼돈을 더욱 가중시킨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향 제시를 한 것인가?
<96. 11. 20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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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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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소한 오해·사소한 다툼으로 서로 얼굴을 안 보고, 말을 건네지 않고, 지내는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한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조금만 관용을 베풀면, 오해가 풀리고 감정이 누그러지겠는데 모두가 공연한 자존심, 괜한 체면에 얽매어 모르는 남남 같이 지내니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주 7일, 하루 15∼20시간 씩 잠을 설치면서 일을 하겠다는 우리의 '억척의지'가 이곳 미국사람들의 생활 정서에 맞지 않아 그리고 이상야릇한 법규에 얽매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 땅에서 마이노리티의 숱한 핸디캡을 '악착과 억셈' 아닌 그 무엇으로 극복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것이 웬 일인가? 그 같은 슬픔들을 훨씬 뛰어 넘는 너무나 애통한 소식이 고국에서 들려오니….
동서 냉전이 끝장나고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역사의 고물(古物)이 되어버린 오늘날, 아직도 세계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단국인 조국에서 같은 동족끼리 "간첩 침투"다 "공비 출현"이다 하면서 온 나라가 법석을 떠는 그 비극적인 상황이 우리를 너무나 슬프게 한다. 남들은 모두 '잘 살기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 민족은 어떻게 해서 아직도 구 시대의 유물인 이데올로기에 얽매어 이 같은 비극이 벌어지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국의 산야 숲 속에 이리 저리 뒹굴어 숨진 열 한 명의 북한 병사들의 주검, 그 처절한 모습은 슬픔을 넘어 우리의 몸을 전율케 한다. 그들이 자살이건 타살이건,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이 같은 개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간첩? 공비? 상반된 체제가 만들어 낸 헛껍데기 용어들, 우리민족이 이같은 허상(虛像)에서 깨어날 날이 어제일 것인가?
그 비극적인 주검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무서운 분노가 솟구친다. 그들을 그렇게 죽게 함으로써 누가 과연 무엇을 얻을 것인가? 역사의 흐름을 외면하는 그 무지몽매, 또한 슬픔을 넘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30년이래 최대의 군 병력과 군장비가 동원된 '철통같은 방위'가 '독 안에 든 쥐'에 대처하는 그 과정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죽은 열 한 명을 빼고 나면 겨우 여남은 남짓한 '공비·간첩', 무기도 먹을 것도 변변히 못 갖춘 그들에게 그렇게 총부리를 겨누어 사살(7명)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과잉방어, 과잉 위기의식이 또한 나를 슬프게 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솟두껑 보고 놀란다"는 심리, 그리고 만의 하나라도 작전상 미스를 용인치 않는 군의 생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대처 과정에 있어 동족 의식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이, 오직 무서운 대적(對敵)의식만이 작용·발동된 모습이 더 할 수 없이 나를 슬프게 한다.
이데올로기라는 역사의 망령이여, 하루 빨리 그 땅에서 사라지라! 그리고 남과 북 모두 '잘 살기 전쟁'에 나서라! 이 길 만이 분단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닌가?
스산히 불어오는 초가을 바람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고국에서 날아온 이 분단 비극의 소식들이 이 땅에서 아직도 나그네 심정을 못 벗고 살고 있는 백의민족의 한 씨알을 너무나 슬프게 한다.
<96. 9. 25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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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 젊은이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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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무서운 태풍과도 같이, 한참 잠잠하던 고국의 학생 데모가 이번 8·15 광복절을 계기로 또 한번 세차게 서울을 휩쓸고 지나갔다.
데모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최루액을 쏟아 붓고 지상에서는 최루탄이 발사되는 가운데 학생들은 이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열흘동안 연세대 주변은 흡사 전장(戰場)을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전쟁 아닌 전쟁으로 경찰·학생 수 백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끝내 경찰 한 명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제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민주 체제가 뿌리를 내리고 있고, 또 경제적으로도 1인당 GNP 1만 달러를 넘어서 '한국적인 풍요'를 구가하는 고국에서 어떻게 해서 또 학생들의 이 같은 과격폭력 시위가 벌어지는 것인지, 그저 답답하고 슬플 뿐인데 그 근본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한반도의 남북이 안고 있는 그 숱한 문제의 깊은 뿌리를 캐보면 모두가 그렇듯이, 이번 같은 학생 데모의 근본 뿌리도 '국토의 분단' 상황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 현상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아야겠는데, 그렇다면 우리 나라 젊은이들은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 이렇게 몸부림을 치고, 젊음을 희생해야 되는 것인지, 또한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나이 또래, 같은 젊은이들이 한쪽은 전경·의경이 되어 최루액·최루탄을 쏘아 대고, 다른 한 쪽은 데모 대원이 되어 화염병을 투척하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이 비극, 그 이유·원인이 어디에 있건, 크게 보면 '분단국 젊은이들의 비극'이랄 수 밖에 없겠는데 데모가 끝나 갈 무렵 학생들이 내건 현수막에 적힌 글 한 토막이 또한 필자에게는 이 같은 비극감을 더 해준다. "엄마 배고파, 집에 가고 싶어!"
이렇게 철부지 어린이들이 어떻게 해서 때론 그같이 무서운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인지, 그리고 경찰 심문에서 "친구 따라 놀러 갔었어요" "그냥 호기심에서 가 보았어요"라고 태연스럽게 말하는 그들이 과연 당국이 보는 대로 북측 조종을 받는 폭력 혁명의 전위대들인지, 그리고 일부 언론이 주장하는 대로 데모 학생들의 이 같은 태도가 정말로 상황에 따라 표변하는 '게릴라전의 위장전술'인지, 이해가 잘 안되고 판단이 혼미스러운데, 이번 사태를 보는 정부 당국 그리고 국내 언론들의 '일치된 시각'을 십분 수용하면서도 필자로서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들이 왜 그러는가? 왜 그렇게 되는 것인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되었고, 그 위성국이었던 동구권이 와해되었고, 또 그 반려자였던 중국이 지금 저렇게 변해가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모를 리 없는 대학생들, 그리고 또 소위 주체사상의 사회주의 북한이 지금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어떠한 처지에 봉착해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그들이 어떻게 해서 현실적인 숱한 불이익을 무릅쓰고 그 같은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것인가?
필자가 보기엔 꿈을 잃어버린 세대, 가치관을 상실한 젊은이들의 방향 감각 없는 방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는데, 어떻게 해야 이들에게 그들의 젊음을 불태울 수 있는 "보다 가치 있는 꿈"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인가?
<96. 8. 28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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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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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애틀랜타 올림픽때 남북한 선수들이 식당에서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면서 정답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라는 말을 전해들은 클린턴 대통령이 어떤 회의석상에서 이에 언급, "참 이상한 일이다. 남북한 선수들은 그러는데 나는 지난 3년 반 동안 남북한이 대화를 하도록 노력했으나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다.
'세계의 대통령'으로서 그의 일언 일구는 다분히 국제 정치·외교적 의미를 함축하겠지만, 이번에 이 말만은 그의 솔직한 심정을 가감 없이 토로한 것으로 보고 싶은데, 그의 이 같은 시각으로 본다면 "이상한 일"이 어디 이것뿐일 것인가?
이번 8·15 광복절 행사에 이곳 뉴욕지구 한인단체가 유엔주재 북한 대표를 초청했다고 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의견을 구한다면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혹시 이런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의 상상으로 그의 대답을 한번 가상(假想)해 본다.
그 같은 일이 논란거리가 된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광복절이 남한 또는 북한만의 경축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한민족 공동의 경축에 남(南)따로 북(北)따로가 있을 수 없지 않느냐?
세계 각 민족이 모여 사는 이 땅에서 그 수가 몇 명 안 되는 마이노리티, 그리고 어느 민족보다도 유난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내세우는 민족, 그 배달민족 사람들이 이 넓은 땅에 와서 까지 너는 북, 나는 남, 서로 외면을 하고 적대시 한다면 다른 민족 보기에도 부끄럽지 않느냐?
비록 고국의 냉전사고의 영향권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너희들 (당신들)이야말로 이 땅에서 그래도 무슨 보람있는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고국의 그 같은 구시대 유물인 냉전적 사고 방식의 틀을 깨는 것이 아니겠느냐? 행사장에서 절차·의전 같은 것은 지극히 말단 지엽적인 문제, 유엔 광장에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걸려 펄럭이는데 어떻게 그런 것들이 말썽거리가 된단 말이냐?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이상한 일' 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왕 내친 김에 가상 '클린턴의 말'을 계속 엮어보자.
요즘 고국에선 실향민들이 주축이 되어 북쪽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부 당국에선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이를 허락치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해 클린턴은 또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한 핏줄 자기 부모 형제들에게 당장의 생존을 위한 생활비를 보내겠다는데 그것을 못하게 가로막는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냉전이 절정일 때도 미국은 적대국이자 타민족인 소련에게 식량을 원조했고-꼭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또 동·서독도 분열 당시 서독 사람들은 동독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자유롭게 보내지 않았느냐?
그런데 한국은 한 핏줄 동족간에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 가는 자기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는데 그것을 못하게 한다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참 이상한 일이다." 비록 한반도의 모든 특수 상황, 즉 정치·군사·외교적 측면을 고려해도 그렇다. 그렇게 좁은 소견·닫힌 마음을 갖고 앞으로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대과업을 어떻게 해내겠다는 것이냐? "참 이상한 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96. 8. 14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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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쓸어버린 철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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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한반도에 또 큰 홍수가 져 남북 모두 너무나 큰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이 있었다는 우울한 소식이다.
자연재해야 세계 도처에서 거의 매일 같이 일어나다 시피하고 최근에는 이곳 뉴욕지역 등 미국 내 여러 곳에서도 큰 홍수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먼 남의 나라 일같이 생각되고, 태평양 건너 저 멀리 있는 땅에서 일어난 일은 곧 나(우리)의 일같이 느껴지니 참 아이러닉 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
이번에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고국의 소식과 현장 모습을 듣고 보면서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남북 모두 큰 인명피해이지만, 특히 지금 그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북쪽에 또 홍수가 졌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년 수해 복구도 못하고 있는 터에 또 왕 물난리를 당해 남쪽보다도 더 큰 인명·재산 피해가 있을 것이라니 이 무슨 업보(業報)인가?
남북 모두에게 너무나 큰 희생과 고통을 안겨준 이번의 홍수, 그야 말할 것도 없이 한낱 자연 현상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뜻'을 읽을 수 없을 것인가? 이번 물난리의 와중에서 부산물(?)로 나타난 '어떤 현상'이 필자에게는 너무나 큰 함축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이번 홍수·산사태로 전방 각 군부대에 비치해 두었던 각종 탄약·지뢰 등 폭발물 8백64톤 가량이 매몰 또는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 중에는 특히 6·25때 것을 포함, 상당수의 지뢰가 떠내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지상의 무기는 그렇다 치고 그 많은 지뢰가 왜 지금까지 그 땅, 그곳에, 무엇을 위해, 매설되어 있었던가?
남북 똑같이 "적의 기습 공격"에 대비한 것일 터인데, 이번에 휴전선 북쪽 남쪽 할 것 없이 이의 상당수가 유실되었을 것이라니 우리는 이것을 "이젠 이 땅에서 이 같은 '악마의 무기'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지난 5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인류 평화를 위해 세계 도처 각 지역 땅 속에 매몰·잠복해 있는 각종 지뢰(1억 1천만 개로 추산)중 특히 '벙어리 지뢰'(외부 압력이 있으면 터지는 지뢰)를 제거할 것을 각국에 호소하고 그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 때 유독 한국 등 몇 개 나라는 "특수 상황"을 내세워 여기에서 제외시켰었다. 그런데 이번에 홍수가 이의 상당수를 제거시켜 주었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그리고 둘째는 이번 홍수로 인해 휴전선에 쳐졌던 철조망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그 가시 철조망 또한 왜? 그 땅, 그곳에, 무엇을 위해, 설치되어 있었던가?
강대국들의 '장난기'에 가까운 안이한 전후 처리의 산물이 아닌가? 여기에 덩달아 놀아난 남북 집권자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게 더 튼튼하게 이중 삼중으로 다져 놓은 그 철조망, 그리해서 국토를 반 동강이 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고, 동족을 이민족 같이 만들고, 그것도 부족해 서로를 불구 대천의 원수로 여기게끔 만든 가시 철조망, 그 '한(恨)의 철조망'을 이번 홍수가 상당 부분 휩쓸어 없애 버렸다니 이 또한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96. 8. 7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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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좋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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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좋은 나라"
어렸을 때 부르던 동요가사의 한 토막이다.
그런데 한번 상상해 보자.
그 '좋은 나라'를 '우리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나라 입국 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치나 어렵다고… 그리해서 비자를 받아 준다는 사기꾼에 속아 많은 사람들이 가산을 탕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밀선(密船)을 타고 사생결단 밀입국을 기도하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바다에 익사하는 경우까지 생기는 상황을….
이 같은 상황이 현재 중국 거주 동포들의 처지인데 얼마 전 고국 TV 화면이 보여준 그들의 해상을 통한 '우리 나라' 밀입국 기도 장면은 같은 해외 동포로서 너무나 가슴을 뭉클케 하는 것이었다.
서해 공해 상에서 소형 어선으로 바꿔 탄 후 비좁은 밀실에 7, 8명이 잠복, 10여 시간을 항해, 육지 접근을 시도하다 경비정에 발각, 세 명이 붙잡히고 나머지는 도주하는 그 모습은 흡사 언젠가 뉴욕 항에 밀입국을 기도하던 중국인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미 국경을 넘어 오려는 멕시코인 들의 처절한 정경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 나라'라고 부르는 "그 나라'와, '그 나라' 또한 그들을 '해외 동포' 라고 부르는, 같은 민족간에 이 같은 비극이 야기되는 것일까?
너무나 많은 중국 동포들이 한국 방문비자를 신청한단다. 그런데 그들의 목적은 단순 방문이 아닌 돈벌이란다. 한국서 2, 3년 아무 일이라도 해서 모은 돈이면 중국에 가서는 떵떵거리고 살수가 있단다. 그래서 정부는 이들의 불법 체류·불법 근로를 막기 위해 이들의 입국을 적극 견제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좋은 나라 우리 나라'가 일제 식민지일 때 그 땅에서는 초근목피의 연명도 할 수 없어 남부여대하고 무작정 살길을 찾아 고국을 떠난 한민족의 후손들이 아닌가? 세월이 흘러도 한국말·한글을 쓰고 읽고, 또 지금 한국 정부의 해외 동포 정책대로 "뿌리를 잊지 말고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고 있는 동포들이 아닌가?
그리해서 그들도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와 똑같이 그 '좋은 나라'를 '우리 나라'라 생각하며 살고 있는 한민족임에 틀림없는데 이들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한국정부는 중국 동포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봐야 될 줄 안다. 즉 일본이 정신대 문제 등 과거 군국주의가 낳은 원죄를 지금도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도 과거 파란 많은 우리 나라 역사의 산물인 이들을 '역사의 원죄'로 받아들이고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정부에 몇 가지를 제안한다.
1. 지금 국내에는 동남아 출신 등 10여만 명의 외국 근로자가 있는데 이들을 점차적으로 중국 동포들로 대체하라. 같은 값이면 같은 동족을 돕는 것이 피의 정이 아닌가.
2. 한국 기업들이 세계 곳곳에 현지 투자, 생산 공장 등을 세우는데 중국 동포들이 밀집해 있는 연변 같은 곳에도 투자하라. 설혹 딴 나라 딴 지역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진다 해도 이를 국가 정책으로 보조하라.
그 사는 땅이 어디가 되었건 해외에 사는 동포들 모두에겐 그 '좋은 나라'가 분명 '우리 나라'인데, 좀 못산다고 해서 빗장을 걸어 잠그고 문전박대 한다면 너무 심하지 않은가?
<96. 7. 3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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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양 사법처리'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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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 양이 드디어 국가보안법상 사형이 법정 최고형인 '반국가 단체의 지령·목적수행을 위한 특수 잠입·탈출, 고무·찬양·동조, 회합·통신, 및 이적단체 가입죄' 로 안기부에 의해 구속됐다.
"나는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한사회에서 감옥은 결코 죄를 지은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라고 공언할 정도로 모든 것을 각오한 그녀인지라 지금 그녀의 심정은 담담하겠지만 이를 멀리서 바라다 보는 우리로서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임 양의 이번 방북 사건에 대해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줄로 안다.
"북의 장단에 놀아난 어릿광대"라는 남한정부의 시각, "조선이 낳은 잔다크" "통일의 꽃"이라는 북한당국의 시각. 이중 많은 사람들이 남쪽 시각에 치우쳐 있고 그리해서 그녀의 구속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다 같이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 그리고 아들·딸을 둔 어버이의 따뜻한 심정으로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보자. 과연 그 누가 그녀를 그토록 '의식화'시켰으며 또 그 무엇이 그 가녀린 몸으로 하여금 몰래 몰래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반국가 단체 지역으로 잠입·탈출'하게 했는가를…
그리고 또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남북의 총부리가 서로 겨누고 있는 그 '무서운 사지'를 걸어서 넘게 했는가를…
문 신부와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분단 반세기 만에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휴전선을 걸어서 넘어오는 그녀의 긴장과 피로가 쌓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 민족 분단의 비극을 되새기게 되는데 정부는 임 양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과연 실정법에 의한 사법 처리만이 최선의 방법일 것인가?
여기서 임 양이 그 동안 북쪽에서 취한 언행·행적을 다시 한번 면밀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하 '평화신문' 연재, 안동일 기자의 '평양 임수경 밀착 취재기'에서 인용)
"임 양은 평양에 도착한 첫 날부터 자신은 '조국인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떳떳이 말했으며 자신의 북행이 '북한 체제에 대한 동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평양 소년 궁전 방문 때 임 양은 그곳 소년이 목에 걸어준 붉은 스카프를 즉석에서 풀어 차곡차곡 접어 탁자에 놓고 자리를 뜨는 바람에 스카프를 걸어준 어린이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을 크게 당황케 했다."
"입북하던 날 고려호텔에서 있었던 기자회견 벽두에 임 양은 '대한민국을 사랑하며 북한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을 해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말을 해도 되는가 하고 오히려 기자가 뜨끔했을 정도였다."
"만경대 김일성 생가 방문 때 임 양은 '다른 행사를 모두 제쳐놓고 이토록 시급하게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냐'며 안내원들에게 썩 내키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인민문화 궁전에서 가진 공식 기자 회견에서 임 양은 '북녘형제들의 어느 얼굴에 대남 적화 야욕이 있으며, 나의 어떤 모습에 반국가적 반역 행위가 있느냐? 전대협은 결코 남한의 체제 전복 세력이 아니며 이적 단체도 아니다' 라고 강조했다."
"보도에 따르면 임 양은 남쪽으로 가기 위해 27일 판문점에 도착했을 때 태극기를 몸에 감고 있었다고 한다."
"감옥에 갈 것을 뻔히 알면서 무엇 때문에 남한으로 돌아가려 하느냐? 는 어느 기자 질문에 임 양은 '남한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주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곳은 내가 태어났고 공부를 하면서 자라난 사랑하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문규현 신부는 뉴욕에 왔을 때 김영진 신부에게 임 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임 양이 북한 주장에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고 북한이 듣기 싫은 말도 많이 했다. 이 때문에 북한측도 임 양을 껄끄러워 했었다"
물론 임 양은 한국의 실정법을 위반했다. 그녀를 구속시킨 그 법(보안법)이 악법이냐 아니냐, 통일 지향적이냐, 반 통일 지향적이냐 그리고 또 "민족 공동체로서 인적·물적 교류를 적극 추진" 운운한 '7·7선언'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등의 부질없는 질문은 지금 이 마당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줄 안다. 그것이 악법이건 아니건 간에 법을 어겼으니 법대로 처리하겠다는 당국의 태도에 나로서도 일단은 수긍한다.
그러나 민족 분단의 비극이 낳은 이번 임 양의 방북사건은 일반 사범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그 처리도 단순히 실정법 차원 아닌 보다 대국적 견지에서 매듭 지어져야 될 줄 안다.
그리고 또 정부가 진정 통일을 추진할 결의가 되어 있다면 모든 예기치 않은 돌발 사태를 다루는데 있어 그 방향 설정이 통일 지향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같은 대국적 견지, 그리고 통일 지향적 안목에서 볼 때 과연 이번 임 양의 방북 사건을 현행법 위반만을 내세워 사법 처리하는 것이 능사일 것인가?
여기서 나는 하나의 '가정(假定)' 을 꿈꾸어 본다. 정부가 일대 용단을 내려 임양 어머니가 호소한 대로 "철없는 어린아이의 무분별한 행동"이라고 이를 일소(?)에 붙이고, 임양을 불기소 처분과 함께 구속을 해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확신컨데 정부로서는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정부가 지금과 같이 임양에 대해 구속·수감·공판·언도 등 사법처리 강경 일변도로 나갈 때에는 이에 대한 운동권 학생 및 재야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또 남북 관계가 냉각될 것이 불 보듯 뻔한 반면에, 정부가 이렇게 관용을 베풀 때에는 학생·재야 세력들로부터는 저항의 명분을, 그리고 북으로부터는 남북 관계 경색의 구실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 과연 누구인가?"
<89. 8. 31 『미주東亞』 및 『미주平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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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잣대'를 창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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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남북 관계가 급진전 되면서 국내외에서 '잣대론'이 잔잔한 파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편향된 시각
"북을 남의 잣대로 재지 말라. 북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을 남의 시각에서 보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체제는 그 가치 기준이 전혀 다른 것.
따라서 그 가치를 재는 눈금이 서로 다른 자를 갖고 상대방을 이렇쿵 저렇쿵 할 수 없지 않느냐?" 고.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보편 타당한 가치, 예컨대 자유·인권 같은 문제에 있어서 까지 그 가치 기준이 다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북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우리가 절대적인 가치라고 믿는 자유·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에 대해 전자는 또 반박한다.
'南의 시각에서 보는 자유·인권이 어떻게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北은 인간의 자유 개인의 인권을 남과는 다른 개념으로 파악한다. 북의 개념으로서의 자유 인권은 분명히 그 땅에도 존재한다."고.
사람들의 화제 그리고 고국의 매스컴에서 요즘 자주 듣고 보게 되는 이 같은 '남의 잣대' '북의 잣대' 논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위치를 생각치 않을 수 없다. 즉 우리는 지금 남의 땅도 북의 땅도 아닌 제 3의 땅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남과 북을 보는데 있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눈을 가질 수가 있다. 비록 지금 까지는 우리가 태어나고 교육을 받은 땅이 남쪽이기에 '남의 잣대'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하나의 조국이 되어 가는 역사적인 시점에서 우리의 보는 눈 또한 새로워져야 될 줄 안다. 이것이 곧 외국에 나와 사는 우리로서 큰 보람이자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공평한 눈으로 태평양을 너머 남과 북을 한 번 바라다 보자.
두 체제의 접근화
자본주의에도 장단점이 있고 공산주의에도 장단점이 있다.
'남의 잣대'로 북에는 자유·인권이 없다지만, 대신 그 땅에는 민중 전체 의식주의 최소한 기본 보장이 있다. '북의 잣대'로 노동자, 농민 착취 라지만, 대신 그 땅에는 물량적인 경제 발전이 있다. 개인의 우상화 신격화를 비웃는 그 땅엔, 오랫동안 그에 못지 않은 군사독재가 있어 왔다.
한 쪽은 가져도 가져도 만족을 모르고 '좀더 좀더'를 갈망하는 무서운 경쟁 사회인가 하면, 다른 한 쪽은 비록 모든 것이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이 그 나름대로 안분지족(?). "이대로 좋습니다." 하는 사회다.
그리고 한 쪽은 사람들이 철저한 에고의 화신이 되어 모래알 같은 생활을 하는 이익 사회라면. 다른 한 쪽은 '자존의 나'는 없지만 '나는 전체' '전체는 나' 하는 공동체로서 상부 상조하는 사회다.
그리고 또 실업 퇴폐 매춘을 개탄하는 그 땅엔, 그 대신 사람들이 활짝 웃는 밝은 웃음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말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역사를 움직이는 두 수레바퀴와 같다"고.
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립·적대 관계가 아닌 선의의 경쟁·상호보완의 관계로 본다. 두 체제가 모두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같다고 한다. 이 목표를 향해 어느 한쪽이 한 발을 내딛으면 다른 한 쪽도 또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선의의 경쟁
한반도의 경우 한쪽이 컬러 TV를 시작하니 다른 한쪽이 부랴부랴 이를 뒤따른다. 남쪽이 올림픽을 개최하니 북쪽이 청년학생축제를 연다. 서울에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으로 서니 우리가 질세라 평양에 105층 호텔이 서고 맘모스 체육관을 짓는다.
군비 경쟁만 빼놓는다면 이 얼마나 신나는 경쟁인가?
이렇게 두 체제는 각자의 약점·단점을 서로가 비판·시정케 함으로써 인간의 보다나은 삶을 위한 역사가 한 발자국씩 전진되어 간다는 주장인데 그 결과는 어떤 현상이 나타날 것인가?
두 체제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비슷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남한이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경제적 민주화를 이룩할 때에 사회주의 색채를 띄우지 않을 수 없고, 북한이 또한 조심스럽게나마 문호를 개방, 서방과 교류를 틀 때에 그 땅에도 불가피하게 자유화 바람이 일어 자유·인권의 개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두 체제의 이 같은 유사화 /근접화야 말로 통일로 가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이 아닌가?
'새로운 잣대'를
외국에 나와 사는 우리는 '남의 잣대'로 북쪽을 비난치도 말고, '북의 잣대'로 남쪽을 헐뜯지도 말자.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일이 있다면 남북간 이 선의의 경쟁을 최대한 부채질하자. 그리해서 남과 북이 각각 지니고 있는 약점 단점 취약점을 스스로 고쳐 나가지 않을 수 없도록 압력을 가하는 데 힘과 지혜를 모으자.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남의 잣대'도 '북의 잣대'도 아닌 제 삼의'새로운 잣대'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다.
<89. 2. 23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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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을 활짝 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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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총수의 북행-
남한 최고의 재벌총수가 이번에 북한을 방문한 것은 여러모로 많은 감회를 자아낸다. 우선 북한이 "노동자, 인민을 착취하는 매판자본"이라고 그렇게 매도하는 자본주의의 심볼인 재벌총수를 초청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 나타난 명분은 '고향 방문' 이라 하지만 그 대상이 대상인 만큼 그 속셈이 무엇일까 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번 정 회장의 북한 방문이 우리에게 또 다른 감회를 자아내는 것은 이 같은 정치적인 의미를 떠난 한 개인으로서 인간적인 측면이다. 어렸을 때 산 두메 가난한 집을 뛰쳐 나와 천신만고 끝에 자수성가,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의 총수로서 40여 년만에 자기가 태어난 고향 땅을 밟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향 친지들에게 갖다준다고 커다란 선물꾸러미를 20여 개나 싸들고 가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새삼 민족분단의 비극을 되새기게 된다.
이렇게 많은 감회를 자아내는 이번 정회장의 북한 방문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나로서는 한가지 너무나 아쉬운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즉 그의 고향 강원도 통천은 서울서 지척지간, 걸어서도 갈만한 가까운 거리, 그런데 그가 비행기를 타고 동경으로 날아가 거기서 다시 비행기를 바꿔 타고 북경을 거쳐 북한으로 가는 모습이다.
목적지는 지호의 거리에 있는데 왜 그는 이렇게 수 천 마일을 돌아서 그것도 남의 나라 국경을 넘나들면서 내 고향을 가야 한단 말인가?
'남'은 7·7선언으로 제한적이나마 남북 왕래를 허용했고 '북'도 해외 동포의 방문을 환영하고 또 비록 선별적이긴 하지만 남한의 인사들을 초청하기도 한다. 이는 곧 이제 남과 북이 서로 왕래를 허용·환영한다는 뜻인데 왜 그 오가는 방법에 있어서 가장 쉽고, 돈 안 들고, 시간 안 걸리는 판문점을 거치지 못하고 이렇게 남의 나라 제 3국의 국경선을 거쳐 빙빙 돌아서야 오갈 수 있단 말인가?
지름길을 터라!
고위 정치·군사회담 개최가 논의되고 있고, 물자교역 경제인 방문은 이미 이루어졌고 또 학생교류, 합작투자가 불원간 실현될 것으로 보이는 지금 남북 지도자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이유 목적이야 어찌 되었건 남과 북 상호 양해와 협의 하에 남북을 오갈 수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제 3국으로 멀리 돌아서 다닐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땅을 통해서 내 나라 흙을 밟고 지름길로 오갈 수 있게 하라고.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3·8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분명 두 민족 두 국가를 가르는 국경선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또 그것은 누가 만들었나?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아랑곳 없이 강대국들의 안이한 전후처리의 산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민족자주 민족자존의 백의민족으로서 남이 씌워준 굴레를 근 반세기 동안이나 그냥 뒤집어 쓴 채 고통만을 당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억울한 일이 아닌가?
특히 여기서 우리가 크게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6·25를 마무리 지은 휴전협정이다. 그 협정에는 어디를 보아도 "휴전선을 넘나들 수 없다" 또는 "휴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는 조항이 없다. 이는 곧 누구나 휴전선을 넘나들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용단을 기대하며--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남과 북 6천만 겨레의 열화 같은 함성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이제 늦게나마 서로 대화를 하려 하고 교류를 트려 하는 남북 지도자들에게 여기서 다시 한 번 간곡히 호소한다.
이제 내친 걸음, 용단을 내어 한 발자국 더 내딛어 '판문점 문을 활짝 열라'고. 그리하여 남북을 오가는 사람들이 제 3국을 빙빙 돌아 다님으로써 '마음의 거리'를 느끼게 하지 말고 판문점 지름길로 오감으로써 "북행길이 결코 외국행 같이 서툴거나 먼 길이 아닙니다." (3총재 초청 허담 편지)라는 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라고.
남북 지도자들의 또 한번의 용단을 빌어 마지 않는다.
<89. 2. 8 『미주朝鮮』 및 『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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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왜 안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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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염원인 통일을 생각할 때면 나로서는 하나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즉 사리를 따져 보거나 논리적인 유추를 해보면 통일은 벌써 오래 전에 이루어 졌어야 했을 터인데, 아직도 이것이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논지는 이렇다.
가령 여기 열 사람, 아니 백 사람이 있다고 치자. '어떤 일'을 두고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찬반을 물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열 사람, 백 사람이 모두 그 '어떤 일'에 대찬성을 했다면 그 '어떤 일'은 당연히 추진되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으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통일 문제만 해도 그렇다.
남한 4천만, 북한 2천만 그리고 해외교포 7백만, 그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 보라.
"조국의 통일을 원하느냐?"고.
단군의 피를 이어 받은 배달민족이라면 아마 삼척동자라도 대답할 것이다.
"물론 원하지요"
이렇게 온 겨레가 열화 같이 바라는 통일이 40여 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우리 민족의 이 간절한 염원을 가로막는가?
많은 원인이 있고, 이유가 있고, 사정이 얽혀 있다.
우선 이데올로기의 상충을 손꼽는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물과 기름같이 융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강대국들의 한반도 현상고착 정책이 일컬어진다. 미·소·일·중 주변 4국이 한반도 통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단다. 그 이유는 물론 그들의 이해 관계가 통일된 한반도 보다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얻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6·25를 경험한 세대들의 철천의 원한과 불신을 든다. 같은 동족끼리 수백만을 살상한 피의 싸움, 못된 형제는 차라리 남만도 못하다는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우리의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로서 그 무엇보다도 남북 각각 기득권자들의 통일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를 쉽게 해 보자.
사람이란 어떤 환경에서 살만하면 또는 살만하다고 생각되면 어떠한 변화도 원치 않는다. 어떤 변화가 왔을 때 자기네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지금 남과 북에는 각기 다른 체제 속에서 그 나름대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 지위와 명예를 누리는 계층들이 있다. 그들은 비록 조국의 땅이 두 동강이가 나 있지만 그 반쪽 안에서 그런대로 살만 하다. 따라서 그들은 조국이 어떤 형태로건 하나가 되었을 때에, 지금 그들이 갖고 있는 권력·돈·명예와 지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상황이 남북 각각 통일을 이야기 할 수 있고, 또 통일 문제를 거머쥐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같은 기득권자들이니 어떻게 통일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들도 입으로는 통일을 바라는 양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통일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기득권이 유지·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그들에겐 이 같은 이기심이 민족 전체의 사활이나 복지에 앞선다.
그런데 통일이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일대 변혁, 그들은 이 같은 대변혁 뒤에 올 자기네들 위치에 대해 극히 불안을 느낀다. 따라서 통일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민중이 앞장을 서야 한다. 어떠한 상황 변동이 온다 해도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남과 북의 민중이 통일 주체 세력으로 나서야 한다. 이 점에서 아무 사심 없는 대학생들의 조국 국토 종단 순례 대 행진 같은 통일 운동의 이니시아티브를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배달 민족의 한 자손으로서 남과 북 각각 지도자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그대들이 진정 조국애와 민족애가 있다면, 그리고 지금 그대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통일을 진정 원한다면,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남과 북이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만나라!
이데올로기라는 것-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구물이 아닌가? 미소 냉전의 시대가 가고, 우리만 해도 어제까지 적성국이라고 매도하던 동구권 및 중·소와 교역을 트고 합자를 하는 등 같이 어울리지 않는가? 하물며 한 핏줄, 한 언어를 가진 동족간에 한물 간 이데올로기가 핏줄을 끊는 구실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강대국의 한반도 현상고착 정책-그대들이 일심단결, 민족주체 자주외교를 적극 펴 나간다면 그만한 외세의 입장은 능히 물리칠 수 있는 역량이 우리 민족에게 있다고 본다.
동족상잔의 원한-벌써 근 반세기 전 이야기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을 경험 못한 민족이 남북 각각 이미 70퍼센트를 상회하지 않는가? 그리고 또 민족의 내일을 위해 어제의 악몽은 잊어버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형식 절차 명분-진정 통일을 염원한다면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 것이 없지 않은가? 통일할 마음이 없으니까 쓸데없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트집잡아 이 핑계 저 핑계로 40여년을 허송 세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과 북에서 각각 권력·돈·명예·지위를 갖고 또한 통일문제를 그들 손에 거머쥐고 있는 남북의 기득권자들이여,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6천만 민중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비록 지금 그대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어서 어서 만나고 이야기하라! 그리고 형식·절차·체면 같은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통일에의 대담한 발걸음을 재촉하라!
만일 그대들이 개인의 안위에 얽매여 전 민족의 이 함성을 못 들은 척 하고 앞으로도 계속 이 핑계 저 핑계로 통일을 질질 끈다면, 일제 때 민족 반역자에 못지 않은 역사의 반역자라는 오명을 후세에 남길 것이니…
<88. 7. 29 『미주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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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부: 동포 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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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 정치인과 동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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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의 정치인들이 이런 저런 일로 이곳을 방문할 때면 일부 동포들은 환영회다. 강연회다. 연설회다. 하면서 법석을 떤다. 그리고 그 대상 인물에 따라서는, 또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자리에 한 번 참석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기도 한다.
정이 많은 민족, 그 대상이 정치인이건 경제인이건 서로 잘 아는 친지·친우끼리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같이 하면서 정을 나누고 회포를 푸는 기회를 갖는 것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 모임의 성격 및 규모가 가까운 사람들 몇몇이 모이는 사적이 아닌, 동포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공개적인 환영 또는 연설회가 될 경우,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몇 가지 문제점이 있을 것 같다.
첫째 : 한국의 정치인이 지금 이 땅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그 땅(한국)에서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는 이 땅의 미국 시민 아니면 영주권자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 사람들이 선출한 대의원 (representative)들이다. 다시 말해 그들과 우리는 정치적 또는 법적으로 하등 연관이 없는 사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미국 시민(또는 영주권자)들은 모아 놓고 한국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이 권위주의 독재 시절 국내 사람들 입에 재갈이 물렸던 시대엔 그런 것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한국 국내에서 할 수 없었던 말들을 이곳 자유의 땅에서 자유로이 말하고 발표하고 규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웬만한 말은 한국 국내에서도 다 말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신문, TV, 인터넷 등을 통해 이곳에 앉아서도 매일 매일 듣고 보고 접할 수 있는 시대에, 그들이 이곳에서 굳이 많은 동포들을 모아 놓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큰 의미를 지닐 것인가?
둘째 : 한국 정치인들을 맞아 이곳에서 환영회다, 연설회다, 하는 모임을 앞장서 주선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거의가 학연, 지연 또는 혈연으로 얽힌 관계다. 열의 아홉은 동문 사이 또는 동향 관계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어떤 '앞 날'을 기대하는 고국의 '해바라기성' 인물들이 가장 열을 올린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한국의 가장 큰 병폐, 즉 지연·학연·혈연의 병폐가 고스란히 이 땅에 옮겨와 재현되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데 이것이 나만의 안타까움일 것인가?
이제 이곳 동포 사회도 여러 면에서 안정·성숙 단계에 들어서 있다. 따라서 이제는 고국 정치인을 맞는 우리의 자세도 달라져야 된다고 본다.
중국·인도·필리핀 그리고 남미계 등 이 땅의 어느 소수민족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유독 우리만의 이 열띤 고국 정치인에 대한 과잉 의식, 이에 대한 관심 표현 또는 의식의 표출 방식을 한 단계 끌어 올려야 될 줄 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두가 잘 알다시피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은 풀뿌리 민주주의 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국을 위해 그래도 보람된 무엇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땅에 하루 빨리 참된 민주정치가 뿌리 내리도록 돕는 일이다.
우리가 이 땅에 오랫동안 살면서 터득한, 또는 몸에 밴, 인권, 자유 등 민주체질을 고국의 정치인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해 그들에게 이를 한껏 보여 주자. 그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인권과 자유가 어떤 것인지, 몸으로 듣고,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만들어 주자.
이것이 그들에게 호화 만찬을 베푸는 것 보다, '한 표 권리'도 없는 청중을 동원해 주는 것 보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나 조국의 참된 민주 발전을 위해서나 훨씬 값지고 보람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우리가 한국 정치인에 대해 갖는 관심도(度)에 있어 그 이름이나 현 위치보다는 그의 정치 철학 그리고 신념이나 행적에 더 비중을 두자.
오늘날 한국 정치 상황은 한마디로 말해 '개판 정치',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바르게 해보려' '고쳐보려'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안다. 지연·학연·혈연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이 같은 인물을 고르고 찾아내 이들을 우리 힘 닿는대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적극 돕자. 이것이 진정 조국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01. 1. 26 『뉴욕中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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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신분 상승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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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경우-
서울에 나가면 쉽게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직 '현역'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나이면 그 어느 분야에 있건 꽤 '높은 자리',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 받고, 식사라도 한 번 같이 할라치면 괜시리 어깨가 으쓱해 진다. 마치 나 자신이 그들의 '높은 자리'와 동열(同列)에 서 있기나 한 듯…
인간에겐 신분상승 욕구라는 것이 있다 한다. 현재 자기의 위치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계층'에 귀속해 보려는 간절한 욕구다. 그런데 인간의 이 기본 욕구가 보통의 경우 어떻게 표출되는가? 한 마디로 말해, '있는 사람' '높은 사람'들 앞에서 이유 없는 저자세다.
권력 가진 사람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굴종과 아첨, 돈 가진 사람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구애(求愛)와 겸손,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라고 또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기회를 간절히 염원하기도 한다.
오늘날은 봉건시대와 같은 계급은 없다. 그러나 돈의 많고 적음, 권력 명예의 있음 없음에 따른 계층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해서 사람 사는 것이 천 층 만 층, 계층에 따라서는 전혀 '딴판 세상' 살이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인간의 또 다른 기본욕구인 권력 명예의 기회가 거의 봉쇄된 상황에서 살고있는 우리 이민자들은 이 신분상승 욕구를 어떤 형태로 표출하고 있는가?
이 땅의 메인 스트림엔 참여치 못하고 그 가장자리를 맴도는 우리들, 많은 사람들이 기껏해야 동포 커뮤니티 또는 고국 사람들과의 어떤 연계에서 그 기회를 찾으려 한다. 동포 사회에 그 많은 각종 단체 조직 모임들, 이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일 것인가?
그 다음 많은 사람들은 고국 사람들과의 어떤 연계에서 이런 기회를 찾으려 한다. 고국의 어떤 '지체 높은 분'이 이곳에 오면 그들에 대한 동포들의 극진한 대우, 그 모임에 한 번 참석하는 것을 무슨 큰 영광이나 되는 듯 우쭐해 하는 일부 동포들, 이 같은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필자가 보기엔 이 모두가 명예욕 신분상승의 발로로 보이는데, 이 땅에서 우리가 비록 정신적으로 사방이 꽉 막혀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어떤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오늘날 사회는 수직적으로는 '있고 없음'에 따른 계층 사회이지만 다른 한편 수평적으로는 '각자 다른' 분야에서 일을 하는 다원화(多元化) 사회다. 그리고 최소한의 의식주는 정부가 보장한다. 그렇다면 계층을 뛰어 넘으려는 신분상승 욕구에 집착하기 보다, 이곳 미국 사람들의 사고 방식 즉, 남 사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부러워하지도 않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산다는 인생관에서 무엇을 배울 점이 없을 것인가?
# 사족 한 마디-
세상은 나 생긴 만큼 나를 대(접)해 주는 법, 나의 위치 나의 분수를 망각하고, 권력 돈 가진 사람들을 허겁지겁 쫓아가려 또는 떠받들려 하지 말자. 그것은 곧 앞서 말한 필자의 경우와 같이 나 자신을 하나의 허상화 (虛像化) 시키는 몰골밖에 안되니…
<01. 1. 9 『미주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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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선과 동포가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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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국에선 대선 열기가 한창 뜨겁다. 그 열풍이 이곳까지 불어와 우리를 덩달아 설레이게 하고, 또한 동포사회 일각에선 '후원회'라는 이름아래 특정 후보를 지지·성원하는 활동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고국 선거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도 없고 또한 그 몸이 정치 현장에 있지도 않은 우리들, 그리해서 어찌보면 한갓 '구경꾼' 입장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그 선거에 왜 그렇게도 큰 관심을 기울이는가? 그리고 그 선거에 참정권도 투표권도 없는 동포들을 상대로 펼쳐지는 특정 후보 후원 활동을 우리는 또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 것인가?
우리가 고국의 현실, 특히 정치 문제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을 갖는 그 밑바탕에는 하나의 염원이 깔려 있다. 조국이 잘 되기를 비는 마음, 즉 정치가 하루 빨리 '참 민주화'가 되고, 경제가 계속 번영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면 그 무엇에 앞서 우선 우리의 이 같은 염원을 최대한 담아내는 (수렴)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어떤 개인의 이익 또는 명예 추구 따위가 그 이유·동기가 된 행위라면 우리는 동포의 이름으로 이를 배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부 사람들이 펼치고 있는 특정 후보 지지·성원 활동이 과연 우리들의 이 같은 염원을 수렴하고 있을 것인가?
어느 특정 후보를 지지·성원하는 것은, 물론 그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 그러나 그 이유·동기가 우리의 염원인 조국의 '참 민주화'라는 대의(大義)에 입각하지 않는 한, 동포들의 호응이나 협조를 얻기는 극히 어려우리라고 본다. 더욱이나 만의 하나 그 이유·동기가 극히 사적인 관계, 즉 지연이나 학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한국의 그 고질적인 병폐, 즉 '지연정치' '학연정치''-이번 대선 과정에서 새로 등장한 말이다-의 추한 양상이 이 땅에서까지 재연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 지연에 얽힌 특정 후보 지지·성원은 다른 지역(출신)사람들의 반발을 산다. 학연에 얽매인 특정 후보 지지·성원은 다른 학교 출신들의 소외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 결과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동포사회의 불화와 반목 그리고 알력과 분열뿐이 아닌가?
그들은 또 동포들 앞에 각종 공약을 내 보인다. 이중 국적을 허용하겠다느니, 교민청을 신설하겠다느니, 동포들의 고국 내 재산을 보호하겠다느니, 동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선심성 공약들을 PR한다. 물론 이 같은 공약들이 이런 저런 채널을 통한 몇 몇 연줄 닿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약속 또는 언질인지, 정당의 공식적인 공약인지도 불투명하지만, 만일 그 같은 공약(公約)들이 한낱 '헛된 공약(空約)'이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그 궁극적인 책임의 주체는 각 당의 후보들이겠지만, 그에 앞서 이 같은 공약들을 이 땅에서 동포들 앞에 그렇게 열나게 PR한 사람들은 그 어떤 책임도 없다고 말할 것인가?
후원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를 지지·성원하는 활동은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정치 행위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미국 시민 아니면 영주권자다. 따라서 한국은 정서적으로 '우리나라'일 뿐 법적으로는 엄연히 타국이다. 미국 시민이 미국 영토 안에서 타국의 정치 활동을 해도 (미국)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인가? 한 번 검토가 있기를 바란다. (역으로 생각해서 우리 미국 시민권자는 한국에서 일체의 정치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지금 고국은 여러 면으로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조국을 위해서' 라는 명분으로 어느 특정 후보 지원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두 글자를 고친 케네디의 말을 보낸다.
"조국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먼저 생각하라."
<96. 9. 18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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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이야기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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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의 '평통'에 대하여-
그간 이곳 동포 사회 일각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한국 (해외동포) 평화통일자문회의'가 캐나다의 경우 드디어 캐나다 법정의 법적 심판을 받게 됐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코리아 뉴스'를 발행하는 김원동씨등 그곳 동포 6명은 '캐나다 '평통' 강제해산 명령신청' 소송을 준비 중 이라는데, 그들의 주장인 즉 이렇다.
첫째, '평통'은 제 3국의 헌법기관이다. 제 3국의 헌법기관이 캐나다 영토 내에 존재하는 것은 캐나다 국법에 어긋난다. 따라서 엄연한 불법단체다.
둘째, 제 3국의 정보담당 영사 지휘하에 움직이는 이 단체의 대 동포사회 사찰행위(협조)등으로 캐나다 국민으로서의 주권 및 사생활을 침해받는다. 따라서 캐나다 국민 주권 및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이는 해산되어야 한다.
세째, '평통' 인선이 있을 때마다 일어나는 불협화음 등이 동포사회 내에 큰 위화감과 알력을 자아낸다. ('코리안 저널' 6월호 보도)
이런 이유를 들어 그들은 재판을 요청할 것이라는데 캐나다에 있어서나 미국에 있어서나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한국의 '평화통일자문회의'의 존재 이유 및 그 존재 의미가 과연 무엇일 것인가?
이번 소송을 계기로 한국 정부 당국은 물론 이것도 '감투'라고 이에 관여하고 싶어하는 우리 모두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 한국 정치인 후원회에 대하여-
한국의 연말 대선을 앞두고 이곳에서 각 후보 또는 '후보의 후보'를 지지·성원하는 자칭 '정치인 후원회'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국정치 현장을 떠나 이 땅에 사는 우리, 한국 정치에 참정권도, 선거권·피선거권도 없는 우리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이 땅에서 한국 정치에 관심이 있고, 또 할 일이 있다면 그 땅에 참다운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도록 불심 양면으로 돕는 일이다. 따라서 어느 특정인을 지지·성원하는 일도 어디까지나 이 같은 대의(大義)에 입각해야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 정치의 참다운 민주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병폐가 무엇인가 ?
지연·학연·혈연으로 얽히고 설킨 패거리 정치다. 그리고 자기의 정치적인 신념이나 철학도 없이 그저 대세에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는 줄서기 정치 행태다. 우리가 한국 정치를 위해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들의 이 같은 행태를 깨는 일이다.
만일 각 후보 지지 모임 또는 후원 모임 등이 이 같은 대의에 입각하지 않고, 오늘날 한국의 정치 판을 저 모양 저 꼴로 만든 병폐, 즉 지연·학연·혈연 등 사적관계로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라면 우리들은 이들을 결코 지지·성원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적인 그 같은 병폐가 이 땅에서까지 재현되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앓기 때문이다.
△'대통령 만찬'에 대하여-
지난번 한국 대통령이 뉴욕에 왔을 때 동포 기십명과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초청 받지 못한 모 지역 한인회 측에서 "어떤 기준으로 인선을 했느냐?"는 항의 서한을 총영사관 등에 보냈다는 후문이다.
이 땅에서 동포들과 한국 대통령의 회식,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일까?
다른 나라의 경우 그러한 예가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 대통령의 경우 이곳 동포들을 '극진히 생각'해서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할 말이 있다. 앞의 항의 서한이 잘 보여 주듯이 이곳을 잠깐 들러가는 한국의 대통령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 가야할 동포들의 화합과 용기를 북돋아 주지는 못할 망정 '쓸데없는 일'로 동포들에게 위화감과 불화를 자아내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고….
<97. 7. 3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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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좀 더 알고 덤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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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한마디로 '무서운 나라'다.
무엇이 그리 무서운가?
만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자.
우선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어항 속의 금붕어'와 같다. 사회 보장 번호, 납세번호, 은행구좌, 병원기록, 보험내용 등 온갖 정보가 우리를 거미줄 같이 에워싸고 있다. 이 중 어느 하나만 빼보면 그것이 줄줄이 연결되어 있어 우리의 알몸이 그대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가?
또 세제(稅制)는 '키워서 잡아먹는 식'의 가렴주구(?)다. 납세자의 양심을 일단 믿어 주는 자진 신고제, 기본적인 의식주 마련 때까지는 소소한 것들은 눈감고 그대로 믿어 준다. 우선 먹고 일을 할 수 있어야 세금을 계속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단계를 넘어서면 국세청은 가차없이 세금을 받아낸다. 세금 안 낸 돈으로는 큰 사업도 할 수 없고, 큰 집도 살 수 없고, 고급차도 굴릴 수 없게 시리 사회구조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 다음은 '눈물 없는 법'의 행사 및 그 법의 심판이다. 우리 같으면 그냥 웃어 넘길 일, 또는 인간적(?)으로 화해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소송사건이 되어 경제적·심리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시달리게 하는가? 오죽해야 "You will hear from my lawyer."라는 말이 공갈·협박의 표현이 되었을 것인가?
이 땅에 살면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느낌을 안 가질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물론 아무 일이 없을 때는 더할 수 없이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나라다. 그러나 일단 어떤 일(사고)이 생기면 한치의 거짓(말)도 안 통하는 무서운 나라다.
한 가지 비근한 실례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장거리 드라이브하다 하루 머문 모텔에서 담배 재떨이 하나를 기념으로 들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 후 시민권 인터뷰 때 이 사실이 불거져 나오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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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많은 동포들이 이민 초기의 간난을 극복, 의식주 생활이 안정되면서 제2의 도약, 즉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메인 스트림 진출을 꿈꾼다.
그런데 이번 뉴욕 지역 몇몇 정치인과 Jay Kim하원의원에 대한 정치 헌금 사건, 그리고 이민국 고위 관리에 대한 골프·사우나 등 향응 제공사건 등이 잘 보여 주듯이, 그 접근 방법에 있어 우리의 한국적인 사고방식·한국적인 관행 때문에 적잖은 말썽을 빚고 있고 또한 미국 매스컴의 비난을 받고 있음을 본다.
왜 이 같은 일이 생기는가?
'무서운 나라' '무서운 사회'를 우리가 너무나 얕잡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통용되는 '미국식'이 아닌 '우리 식'으로 일을 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면 '미국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거짓과 허위가 눈꼽만치도 안 통하는 원리원칙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한 우리는 하루 빨리 한국적인 사고방식·한국적인 관행을 털어 버리고 미국식 원리원칙을 우리 몸에 익혀야될 줄 안다.
우리가 한국어를 영어로 옮길 때도 우리의 어법·우리의 문장구조에 얽매어 그대로 옮기려 하면 우스꽝스러운 영어가 되어 버리지 않는가?
미국, 좀 더 알고 덤비자!
<96. 12. 11.『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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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 TV 드라마의 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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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땅에서 고국 사람들의 얼굴과 말씨가 그리워, 그리고 고향의 정취가 아쉬워, 매일 저녁 식사 후면 대하게 되는 고국의 TV드라마들이 드디어 지난번 국정감사 때 도마 위에 올랐다.
문체공위에서 한 의원은 요즘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모 드라마를 지칭, "지금 우리사회에는 '애인 신드롬'이 일고 있다. 이 같은 '불륜상품'이 번져 나가고 있는 현상은 페놀보다 더 심각한 공해라는 것이 의사들의 지적이다." 라고 주장, 이에 대한 당국의 대책을 촉구했다고 한다.
연기자들의 진실감 있는 연기, 깔끔한 영상 처리 등 기술적으로는 상당 수준에 올라 있는 고국의 TV 드라마들이 어떻게 해서 심지어 국정 감사장에서 까지 말썽이 되는 것일까?
한 마디로 그 테마의 비윤리성·부도덕성이 문제인 줄 안다. 어느 거라 할 것 없이 요즘 고국 TV에서 방영되는 연속극들은 거의 모두가 남녀 관계를 그 소재로 삼고 있는데, 그 구성이 한결같이 기존윤리·도덕관으로 볼 때 불륜·퇴폐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이니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상야릇하게 설정하는 3각, 4각의 남녀 관계 그리고 그것이 무슨 새로운 성 모랄이나 되는 듯 온갖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언어로 각색하고 미화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가치관과 윤리·도덕 기준에 큰 혼란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이 그 태반이니 "페놀보다 더 해로운 정신적인 공해"라고 비난받아도 마땅하지 않은가?
필자로서는 고국의 TV드라마들이 너무나 시류에 편승, 인기영합에만 급급한 나머지 그 도(度)를 지나쳐도 너무나 지나쳐 차라리 노골적인 XX영화 같은 것들 보다도 더 큰 사회적인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인데, 공공 매체가 이 같은 저질의 '에로물(物), 성(性) 상품'을 마구 쏘아대는 고국의 사회상이 지금 어떠한 가를 한번 살펴보자.
언젠가 여중생이 학교 화장실에서 어린애를 낳았는가 하면, 이번엔 또 한 여중생이 등교 길에 해산을 했다. 심지어 요즘 중·고 여학생들 사이에는 유사시에 대비한 '낙태계'라는 것까지 유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가정 주부의 58%가 '나는 Ms.'라는 대답이고, 또 71%가 "남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응답이었다고 한다. 이리해서 30·40대 가정 주부들 사이에서는 "너 애인 있니?" 하는 것이 인사말이 되다시피 하고, 또 그 어린이들은 "엄마 애인 있어?" 하고 묻는 일이 항다반사 라는 이야기다,
저질의 '에로물 성 상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즉 극본을 쓰는 원작자, 제작진, 연기자들은 말할지 모른다. 요즘 세태가, 사회풍조가 이러니까 그 같은 작품(?)들이 큰 반향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냐, 그것이 무엇이 나쁘고 어째서 잘못된 것이냐고.
첫째는 TV드라마의 공공성의 문제다. 비록 요즘 사회풍조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순화·정화하는 구실은 못할 망정 이에 영합,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고 더욱 충동질 해서야 되겠는가?
둘째는 TV드라마의 소재가 거의 가정 파괴적이라는 점이다. 인간 심리로 볼 때 '가정 밖 사랑'을 꿈꿀 수 있고, 동경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를 그같이 미화하고, 당연시 하고, 또 그 불가피성에 액센트를 둔다면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할 가정은 어디로 갈 것인가?
셋째는 예술성의 문제다. 비록 남녀 관계를 이상야릇하게 설정한다 해도 거기에 어프로치 하는 방법·과정에 있어 보다 깊은 인간(성)탐구 및 사회 현상 분석이 깃들여야될 줄 안다.
이 땅에 와서 그렇지 않아도 이중적인 가치관 속에서 정신적 혼돈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제발 고국의 이 같은 '성상품 TV드라마' 까지 몰려와 우리를 더욱 혼란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96. 10. 23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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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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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온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국 기밀 정보를 빼내 한국에 제공했다."
요즘 한미간에 말썽이 되고 있는 '첩보사건'의 주인공인 미 해군 정보 분석가 Robert C. Kim(김채곤)씨가 사건 초기에 한 말이다. 수사가 진척됨에 따라 그 순수성과 정직성이 점차 퇴색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 모두에게 가슴에 와 닿는 호소력이 있는데,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의 이번 행위를 두고 고국의 많은 사람들은 "한민족으로서 조국을 위해 장한 일을 했다"는 심정적인 동감과 찬사를 보내는가 하면, 이곳 일부 동포 특히 미 공공 기관에 근무하는 많은 동포들은 "그의 (미국 법) 위법 행위가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라는 이유만으로 합리화 될 수는 없다"는 비난과 눈총을 주고 있다고 한다.
김씨와 더불어 한국을 조국으로 갖고 있고 또 김씨와 똑같이 이 땅에서 미 국적을 지닌 미국 시민으로서, 양편 모두 그 타당성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이 땅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 땅에서 법적으로 분명히 미국 국적을 가진 미국 시민이다. 시민권 받을 때 "…옛 국적을 포기하고… 선량한 미국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고 서약을 했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정서는 어떠한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나라는 한국"이다. 한글·한국말을 주로 쓰고, 한국음식을 먹고, 한국 풍습과 한국 전통 속에서 산다.
법과 제도상으로는 미 국민, 감정·정서적으로는 한국인, 이같은 '하이프네이티드 아이덴티티(Hyphenated Identity)'가 일상 생활에서는 물론 이번 김씨 사건과 같은 '조국 한국'과 '사는 미국' 간에 미묘한 일이 있을 때 그 가치 판단을 어렵게 하고, 또한 적잖은 심리적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한국서 태어났지만 태평양을 건너 이 땅에 와서 지금 미국 시민으로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아이덴티티가 다분히 코스모폴리탄적 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사물을 보는 안목, 그리고 그 사고 방식도 이에 걸맞게 세계인으로서 범(汎) 인류적이어야 될 줄 안다.
그런데 코스모폴리탄적인 안목·사고방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가치척도가 국가·민족이라는 개념을 초월, 범 세계적 전인류적 가치 기준에 그 바탕을 둔다. 즉 나와 어떤 행위가 어느 특정 국가, 특정 민족에게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생각하기에 앞서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즉 사랑·평화·자유 향상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김씨의 행위를 보면 오직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 법을 크게 어겼다는 것은 호소력이 약하다. 미국 법을 어긴 그의 행위가 설득력을 지니려면 그가 다루는 그 정보의 확산(proliferation)이 특정 국가, 특정 민족이 아닌 전 세계 전 인류의 평화-이번 경우는 특히 남북한 관계가 되겠지만-에 이바지한다는 신념에서 우러나왔어야 한다.
우리의 이상과 의무는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의 이익만도 아닌, 우리가 그 땅에서 '살고 있는 미국'의 이익만도 아닌, 전 세계 온 인류의 평화·자유의 증진과 향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96. 10. 9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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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포' 'X포' '미국 거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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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양식있는 고국 정치인이 어느 사석에서 북한을 호칭할 때 마다 '게네들, 제네들' 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라고 실망한 일이 있다. 그가 무심코 내 뱉는 '게네들, 제네들' 하는 말이 곧 오늘날 한국 정치인들의 대북의식 및 대(對) 북한관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에 고국 사람들이 재일 동포 또는 재중동포를 가리켜 '돈포' 또는 '똥포'라고 부르는 일이 있다고 한다. '돈포?' '똥포?' 도대체 이 무슨 말이며 또 무슨 뜻인가?
이곳 미국에 사는 우리들이 요즘 고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게 보이는지, 서울에 가면 "미국 거지 왔다"는 우스개 놀림을 받는 일이 있다는 것은 흔히 듣는 일.
그런데 영국에 사는 한 동포 말로는 그들 역시 고국 사람들로부터 또한 '영국거지' 라는 소리를 듣는 일이 있다고 한다.
물론 몇몇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 시키는 것은 억지(논리)일수도 있지만 이상 몇 가지 예화(例話)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결코 유쾌한 것일 수 없는데, 도대체 고국 사람들이 북한을 이야기 할 때는 '게네들, 제네들' 하고 해외동포를 일컬을 때는 '돈포' '똥포' 또는 '미국 거지'니 '영국거지'니 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 뱉는 그 맨탈리티가 어떻게 된 것인가?
우리 민족은 옛부터 남 달리 남을 깔보고 얕잡아 보는 습성이 있었던 것 같다. 힘 없고 못 나서 나라를 빼앗기면서도 일본인들을 '왜놈' '쪽발이'라 부르고, 대국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면서도 중국인들을 '뙈놈' '짱꼴라'라 일컫고, 그리고 한말에는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서양 사람들을 '양이(洋夷)'니 '양놈'이니 하고, 그리고 또 해방 후에는 '흰둥이' '껌둥이'하고 불렀으니 말이다.
물론 어느 민족이고 타 민족·타 인종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그럼으로써 자기들의 우월감에 자만(self-conceit)하려는 습성은 있다.
백인들(특히 WASP)이 흑인들을 'Nigger'라 부르고, 멕시칸을 'Chicano'라 칭하고, 또 중국인들을 'Ching', 일본인들을 'Jap'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이 같은 별칭(別稱)을 쓰는 것과 한국인들이 이민족은 물론 동족에게 까지 그 같은 '업신 말' '놀림 말'을 마구 내 뱉는 것을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민족성의 큰 결함 즉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고, 강자 앞에선 한없이 약하면서 약자에겐 강하고, 냉수를 마시고도 잇새를 쑤시는 그 허세가 이제 좀 살만하게 되었다고 이상하게 발전, 어쭙잖은 우월감에서 이민족·동족을 불문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 같은 모욕적인 말들을 마구 뇌까리는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
그 일차적인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다. 우리들이 그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밖에 안 비추이니까 그들이 그런 표현을 쓰고 그렇게 일컫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고국의 그 같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흔히 쓰는 말, "주제 파악을 좀 해라 !" 이 말이 우리 해외 동포들에게 더 적용될 것인가, 아니면 이상한 우월 의식에 빠져 '돈포'니 '똥포'니 '미국 거지'니 '영국거지'니 하는 말들을 마구 남발하는 그 사람들에게 더 적용될 것인가?
<96. 9. 11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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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3代 평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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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위 복(福)이라는 것을 이야기 할 때 보통 나 자신만의 경우를 생각한다. 즉 나만을 위주로 복이 있느니 없느니, 행복하니 불행하니, 즐거워 하기도 하고 비관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 간에는 이 '복타령'을 할 때에 그 자신만의 경우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나, 자손 등 3대(代)에 걸친 그들 각각의 삶을 종합(?), 그 평균치를 나의 복으로 생각하는 인생관이 있다고 한다. 이를 좀 더 부연하면 부모대가 잘 살았으면 지금 내가 비록 못살더라도 불행한 것이 아니고, 또 내가 지금 잘 살더라도 2세들이 잘못되면 내가 결코 복 받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인생관은 오늘날 같이 철저한 개인주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대륙인 다운 그 거시적(巨視的) 안목이 재미있어 이에 비추어 우리들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 부모(代), 우리(代), 그리고 우리 자손(代)들은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았고, 또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우선 우리 부모(代)들을 생각해본다. 한일 합방, 해방과 동란 등 격변기, 해마다 춘궁기를 겪는 가난의 시기, 냉·난방이 무엇인지, 컬러 TV·전기오븐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살다간 부모 세대들, 그들의 삶을 지금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우리들 세대 (5,60대)를 생각해 본다. 인생의 절반을 한국서 낳고 자라고 교육받고, 그리고 청장년기에 삶의 터전을 이 땅으로 옮겨와 지금 이곳에서 인생의 다른 절반을 살고 있는 우리들, 기본적인 의식주는 그런 대로 충족되고 또 각종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분명 우리 부모들 세대보다는 복 받은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딱 부러지게 그렇다고 단정하기에는 무엇인가 망설여지는 우리, 과연 우리 세대의 복은 얼마만큼이나 될 것인가?
그 다음 우리의 1.5세대 2세대들을 생각해 본다. 우리 부모세대와는 전혀 다른 별천지, 그리고 우리 세대와도 딴판 다른 환경에서 낳고 자라고 교육받은 그들, 그래서 우리와는 사뭇 다른 사고 방식과 가치관을 갖고 우리가 채 살아 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갈 그들, 그들의 인생을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서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볼 때 우리의 3대(代)는 각각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았고 또 살아갈 것인데 어떤 기준으로 그들의 삶을 평가, 이에 비추어 나의 다복·박복, 행·불행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인가?
<96. 6. 12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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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essional과 Lay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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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사전' ( Devil's Dictionary) 이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치과의사는 입안에 쇠붙이를 조금 넣어 주고 당신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는 요술쟁이(A prostidigitator Who, putting metal into your mouth, pulls coins out of your pocket)"
그리고 우리나라 속담에는 또 이런 말이 있다. "의사와 변호사는 나라에서 내놓은 도둑"
그 유래에 대해 '속담사전' (이기문 편)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의사와 변호사는 국가의 허가를 얻어 영업하고 있으면서 일의 보수로 많은 돈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다른 장사치 에게서 처럼 돈을 깎을 수가 없다. 아무리 많이 요구하더라도 고스란히 낼 수밖에 없는데서 생긴 말이다."
하나는 그야말로 악마의 독설이고, 다른 하나는 시대착오적인 옛 속담이긴 하지만 이 같은 말속에 어떤 진리가 담겨 있지는 않을까?
얼마 전 이규태 기자의 칼럼은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국의 명의(名醫)계보인 주행림(朱杏林)에 속한 의사들은 지키지 않으면 파문 당하는 헌장이 있었다. 환자를 접하면 남녀노소를 따져 그 나이에 비슷한 자신의 부모 형제의 누군가와 그 환자를 동일시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를테면 환자가 어머니 또래면 그 환자를 어머니 같이 다루되 추호라도 어머니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파문해 버렸다. …이렇듯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기술일수록 그 기술의 우열보다 그 기술을 다루는 인성(人性)이 더욱 중요한 법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성은 곧 그 사람의 품성·인격 및 인정(人情) 등이 종합된 사람 됨됨올 뜻하는데, 이것이 비단 우리 몸을 다루는 의약 분야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법률문제를 다루는 변호사, 세금 문제를 다루는 CPA등,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분야 전반에 걸쳐 이 인성의 요소는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지금의 사회 구조 즉 일체의 관계가 서비스를 받고 거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상거래 내지 비즈니스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메카니즘 구조에서 우리 일반 문외한(Layman)들이 그들 전문인(Professional)들에게 어느 만치의 인성을 기대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 것인가?
<96. 6. 5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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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삼제(無顔三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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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서 있었던 일-
좌석이 다 차면 곧장 떠나게 되어 있는 통근 버스, 빈 자리가 없는데도 운전사가 떠날 기색을 안 보인다. 승객 모두가 마음이 바쁜 퇴근길,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이 없다. 그 만이 더 참지를 못하고 무엇이라고 한 마디 할까 속으로 궁리를 한다. 기껏 생각하는 것이 "Driver, hurry up! Let's Go!."
이때 한 백인 여자가 상냥히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Now, We can go home. driver, right?"
한국식으로 "운전기사, 그만 빨리 갑시다!"라고 소리 치려던 그, 무안한 나머지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식당에서 있었던 일-
친구 아들의 약혼식 파티, 바쁘게 일을 하던 웨이트레스가 그만 실수, 글라스 잔을 떨어트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손님 모두가 깜짝 놀라 그 쪽을 주시, 그러나 누구하나 아무 말이 없다. 유독 깐깐한 성격의 그 만이 한 마디 해야겠다 싶어 속으로 벼른다. "You should be more careful."
그런데 그 웨이트레스가 우리 식탁에 왔을 때 신랑 아버지가 점잖게 말하는 것이었다. "Nobody is perfect. Right?"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녀, 더 재빠른 걸음으로 더 친절한 서비스를 하는 젓이 아닌가.
"좀 더 조심해야겠어!" 라고 훈계(?)를 벼르던 그, 무안한 나머지 또한 홍당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길에서 있었던 일-
길을 걷다가 그가 무심코 방귀(放氣)를 크게 뀌었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마주 오던 한 사람이 들었다. 서로 얼굴이 스치게 되자 상대방이 웃는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It's good for your health."
무안한 나머지 그는 그저
"Sorry, Thank you!"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이상 '세 가지 무안'을 당하고 난 후 영어도 짧고 유머나 위트 감각도 무딘 그는 더 이상 무안을 안 당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나름대로 한 가지 룰을 만들었다.
즉 상대방이 누구이든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남과 이야기 할 때 그 첫 머리를 반드시 "Would you like to…" 또는 "I would like to…"로 시작한다. "Would like…"이 두 마디를 더 붙인다고 해서 뭐 손해 될 것은 없지 않은가?.
<96. 5. 22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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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國 서울' '地獄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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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요? '지옥 같은 천국' 이지요."
미국서 오랫만에 고국을 방문했던 사람의 말이다.
"미국요? '천국 같은 지옥' 이지요"
이곳 이민 생활 3년 남짓 되는 어떤 사람의 말이다.
무슨 뜻을 지닌 말일까?
종교적인 의미의 '천당·지옥'개념을 떠나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뜻, '사람 살만한 곳' '사람 못 살 곳'차원에서 이 두 말을 나름대로 풀이해 본다.
'지옥 같은 천국'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곳서 오랜 산 사람들에게는 그 부정적인 측면이 크로즈 업 되어 보일 수밖에 없는 한국, 좁은 땅에 너무 많은 인구, 교통지옥, 입시지옥, 물가고, 물·공기의 공해, 연잇는 대형사고 그리고 이번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잘 보았듯이 죽기살기 식 생존경쟁 등… 모두 정내미가 뚝 떨어지는 모습인데 그 어디에 천국적인 요소가 있는 것일까?
혹자는 고국 땅에는 아직도 '정(情)'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는 법, 사람들과 더불어 살 때에 그 삶의 의미가 있는 법인데 그곳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정'이 있단다. 훈훈한 정이 오가는 사회, 분명 살맛 나는 천국일거다. 그런데 한국이 과연 그런 땅일까?
한편 '천국 같은 지옥'이란 말은 어떻게 해서 나온 말일까?
넓은 땅, 아름다운 자연환경, 시원히 뻗은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 시설, 저렴한 물가, 그리고 돈 없고 빽 없는 일반 서민들도 일상 생활을 하는데 도무지 관(官)이 거치적거리지 않는 각종 제도 등…
모든 것이 처음 이 땅을 밟는 사람들에겐 '천국'으로 보였을 거다. 그러나 몇 년 살다보면 이땅의 삶이 얼마나 메마르고, 박정(薄情)하고, 기계적이고, 그리고 또 눈에 안 보이는 인종차별을 받는 데에 정이 뚝 떨어졌을 거다. 그래서 겉보기엔 '천국', 속을 겪어보니 '지옥'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이리해서 요즘 들어 '천국 같은 지옥' 보다는 '지옥 같은 천국'이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주 귀국하고 있다. 며칠 전 한 신문엔 이 땅에 이민 온 것이 "생애 최대의 실수" 였다 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96. 4. 17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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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sizing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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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미국에선 '소박한 삶(Simple Living)'을 찬양·격려하는 각종 책자가 큰 인기를 끌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외형적 풍요보다는 내적 삶에 충실하려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소박한 삶'이란 곧 의식주 생활을 최대한 간소화(Downsizing), 검소하고 수수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데 물질의 풍요가 절대가치로 간주되는 사회, 그리해서 '풍요로운 생활'이 곧 '최대행복'이라는 등식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관·가치관이 이렇게 바뀌고 있는 것인가?
93년에 출판, 그 동안 50여만 권이 팔렸다는 'Your Money or Your Life'의 저자 조 도밍게즈는 이렇게 주장한다.
"당신이 평생 번 돈과 현재 남은 재산을 비교해 보라. 그동안 정력을 다 쏟아 부은 결과에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씀씀이를 줄이더라도 시간적 여유를 갖는 것이 훨씬 보람있는 인생이라는 결론이 설 것이다"
그리해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8%나 되는 사람들이 지난 5년 동안에 스스로 돈벌이(일)를 줄였거나, 삶의 가치 순위를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는데, 이에 비추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한 번 조용히 자문 자답해 본다.
우리는 왜 이 땅에 왔는가?
고국이 여러 가지로 어려울 때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 왔다. 그것을 위해 오늘도 너·나 모두가 밤잠을 설치며 뛰고 있다.
그렇다면 '생활의 풍요'가 최고 가치인가?
이 땅에서 다른 선택(Choice)이 없지 않은가? 권세욕도 명예욕도 봉쇄 당한 상황, '풍요로운 생활'만이 이 땅에서 사는 유일한 삶의 보람이자 목표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 얼마나 달성했는가?
지금 우리가 각자 어떤 위치·처지에 있건, 스스로 즐거이 생활의 Downsizing을 추구하는 그들로부터 무엇인가 삶의 지혜를 배울 것이 있을 것 같다.
오직 '풍요로운 생활'만이 아닌, 보다 '보람있는 삶'을 위해서….
끝으로 함석헌 선생님 생전의 말씀 한 마디를 인용한다.
"…사람이란 '속 살림'(정신적 생활)에 충실해야지 '겉 살림'(외면적 생활)에 치중하면 인생을 헛 사는 것이야…"
<96. 4. 10.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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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타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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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의 '살이'는 '사는 것' 곧 living을 말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접미어가 붙는 말은 거의 모두가 고생되고, 처량하고, 불쌍한 삶을 뜻한다. '징역살이', '머슴살이', '귀향살이', '더부살이', '타향살이'…등.
이 중에서도 '타향살이'라는 말은 심정적으로 너무나 애처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유행가의 한 토막 "타향살이 몇 해던가…(고향에)가고파도 못 가는 이 신세…"를 구슬프게 부를 때면 타향살이 아닌 고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조차 눈물을 찔금 거리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이 같은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고향뿐만 아니라 아예 내 나라를 떠나 남의 땅에서 '타국살이'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이 '타국살이'도 우리의 조상들이 그렇게도 애처롭게 본 '타향살이'와 같은 범주에 드는 것일까?
영어에는 고향이라는 말에 딱 맞는 말이 없다. Home Town? 우리 말의 고향은 이들 같이,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어에는 '타향살이'라는 말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아니 애당초 이들에게는 '타향살이'라는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고향을 찾고, '타향살이' 타령을 하게 되는 것일까?
어떻게 생각해 보면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교통·통신의 발달로 전 지구가 하나의 촌락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 전 세계적으로 수천 만의 인구가 이리저리 이동하는 시대, 이런 격동의 시대에 도대체 고향이니 '타향살이'니 하는 생각부터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의로 선택한 땅,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2세 교육 등 어느 정도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땅, 우리 모두에게 이곳에서의 삶이 서글픈 '타향살이'가 아닌 포근한 '고향살이' (Home Life)가 되기를, 그리해서 언젠가는 맞아야 할 이 땅에서의 죽음이 우리 조상들이 한 개인의 최대 불행이자 비극으로 본 한낱 객사(客死)가 되지 않기를, 다시 한 번 조용히 기원해 본다.
<96. 3. 20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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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으뜸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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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 행복의 가장 기본요건은 나와 같은 배경의 역사와 풍습을 지닌 같은 민족끼리 같은 언어를 쓰면서 같은 문화를 향유하며 사는 것이다" 라고.
사람에 따라 또는 보기에 따라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필자의 경우 이 땅에 사는 연륜이 길어질수록 이 말의 절실함이 점점 더 몸에 와 닿는다.
나를 포함 주위에 있는 많은 동포(이민 1세)들의 일상생활 패턴을 유심히 살펴본다. 상당 수가 고국 신문을 구독한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한국어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기가 일쑤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 재미있고 유익한 미국 TV프로를 젖혀놓고 한국 연속극 비디오에 매달려 밤을 지새기도 한다. 그리고 또 일요일이면 교인들은 나와 같은 말을 쓰고 나와 같이 생긴 사람들만이 모이는 한국(어) 교회를 찾는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신문학에서 뉴스의 척도는, 첫째 나와의 이해관계 여부, 둘째 발생 시간·발생 장소와 나와의 원근 여부가 그 척도가 된다. 그런데 이 땅에 살면서 태평양 건너 저 멀리 있는 땅에서 일어나는, 나와 별 이해관계가 없는 일들이, 어떻게 해서 내가 사는 땅,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나의 일상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일 보다도 더 나에게 뉴스가 되고 더 관심거리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언어의 장벽, 감정과 정서의 '안 통함' 이 그 주된 이유겠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한국 TV 연속극에 그렇게도 매달리는 것이 단순히 향수 때문일 것인가?
그리고 또 순수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독실한 신앙인 이라면 주변에 있는 그 많은 미국인 교회를 외면하고 한 두 시간씩 드라이브를 해가며 굳이 한국교회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 것인가?
이 모두가 "같은 민족, 같은 문화, 같은 언어 속에서의 행복"이라는 말을 재삼 확인시켜 주는 현상들인데,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인간 행복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을 결여하고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의식주는 미국적 생활, 정신적 삶은 한국적 생활, 두 마리 토끼를 다 쫓으며 차원 높은 세계인(Cosmopolitan)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96. 3. 6.『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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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상대적 빈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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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절대적 빈곤도 견디기 어렵지만 그에 못지 않게 상대적 빈곤감도 참아 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상대적 빈곤감이란 곧 나를 남과 비교, 남이 가진 것이 나에겐 별로 없거나 남은 많이 가졌는데 나는 별로 가진 것이 없다고 느끼는데서 오는 빈곤감을 말하는데 그 정도가 심해지면 자기 열등감 내지 자기 연민의 감정에 빠지게 되어 정신적으로 수습하기가 참 어려워진다. 필자는 요즘 서울을 갈 때마다 또는 이곳서 서울 손님을 맞을 때마다 이 같은 상대적 빈곤감을 절감, 때론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냉철히 생각해 보면 도대체 나를 남과 비교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요, 더욱이나 삶의 조건·환경이 딴판 다른 태평양 건너에 있는 땅에서 사는 사람들을 그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겠는데 그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아직도 이를 극복치 못하고 심한 자기 갈등을 겪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이민 1세대로서 때때로 이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유독 나만 일 것인가? 그렇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서울 사람들로부터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우선 필자의 경험 몇 토막을 이야기 해본다.
서울을 나가 보면 우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숫자의 액수가 흔하게 억(億) 단위다.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나 집 값을 물어 보면 보통 4.5억 원. 달러로 환산해 보곤 입이 딱 벌어진다. 일반 샐러리맨의 경우 그들이 받는 봉급도 본봉·수당·보너스·의료보험·퇴직금 등을 모두 합치면 미국의 봉급 수준 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다. 차는 거의 집집마다 한두 대씩은 다 갖고 있다. 또 잘 먹고 잘 입는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한국의 중산층이면 미국의 중산층 생활 수준을 향유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곳 동포들 중 미국의 중산층 생활 수준을 영위하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 것인가?
다시 이곳서 서울 손님을 맞는다. 식사 대접을 할라치면 고기류는 안 먹겠단다. 게, 조개 같은 것도 콜레스테롤이 많아서 싫단다. 쇼핑? 한국에 다 있는데 살만한 것이 없단다. 관광? 미국은 물론 유럽·동남아 등을 다 돌아보아 더 볼 것이 없단다. 골프장을 나가서도 시설, 대우가 엉망이라고 불평을 한다.
이리해서 서울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고 주눅이 들어 심한 상대적 빈곤감을 맛보곤 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흰소리'를 치고 '도도하게' 굴 수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첫째, 한국 경제 곧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짧은 기간 동안에 너무나 급속히 발전했다. 단순 비교를 해 보면 필자가 한국을 떠나던 70년대 한국의 1인당 GNP는 5백여 달러, 당시 미국은 1만여 달러, 그러던 것이 작년(92년)도에 한국은 6천여 달러, 미국은 2만여 달러, 즉 20여 년 동안에 고국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12배로 향상된 반면 미국은 겨우 2배 남짓 나아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같은 여건 하에서 이곳 동포들이 갖은 악전고투·천신만고를 해본들 그들보다 뒤쳐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둘째, 우리가 듣고 보고 만나는 한국의 친지, 동료들의 직업은 대부분이 이른바 펜대를 굴리는 화이트 칼라 잡(White Collar Job), 그런데 아직도 한국 풍토에서는 화이트 칼라 라면 어느 정도 명예와 권력이 따른다. 그만큼 살맛이 난다. 그런데 이곳에 사는 동포 대부분의 생계는 노동 계층의 블루칼라 잡 (Blue Collar Job), 그리고 또 돈에 못지 않게 인간 욕망의 큰 대상인 권력과 명예욕의 추구는 아예 봉쇄 당한 채 살고 있지 않은가?
셋째, 각도가 좀 다른 이야기지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행복이란 같은 인종끼리 같은 언어를 쓰면서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대에서 온다"고. 물론 사람에 따라 이에 대한 시시비비가 다르겠지만 이 말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 인정할 때 여기서 사는 우리들은 인간의 소중한 것을 너무나 많이 잃고 사는 것이 아닌가?
이리해서 필자는 이민생활에 대한 회의와 함께 서울 사람들로부터 심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데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도 같은 감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 나름대로' 살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그런데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우리 나름대로' 사는 것일까?
<94. 1. 27. 『미주中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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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판사 '한국인 뇌물'公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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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의원 외유 사건, 대학 입시 부정 사건, 수서 사건 등 대형 부정 부패 사건이 연달아 터져 국내가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이곳을 방문한 어느 금융계 간부에게 말을 건넸다.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렇게 권력과 금력이 유착, 무소불위로 해먹는다면 힘없고 돈 없는 일반 서민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말도 말게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누가 누구를 겨 묻었다 뭐 묻었다고 돌팔매질을 할 수가 있겠나. 좀 심하게 말해서 사회 구조가 온통 부정 부패의 연결 고리로 묶어져 있는 상황인데 말을 해서 뭣하겠나"
그런데 한국서 성행하는 이 같은 부정부패가 요즘 이곳 미국판사님들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중형을 받아야할 한 동포가 가벼운 형을 받은 일이 있어 이곳 동포들은 이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다.
즉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어느 동포가 탈세, 이를 '잘 봐달라'고 미 국세청 직원에게 1만여 달러를 제공, 이것이 수사 당국에 걸려, 탈세 및 공무원 대한 뇌물공여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얼마 전 담당 판사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린 것이다.
"미국에서는 공무원에 대한 뇌물공여죄가 중 범죄임으로 마땅히 징역형 등 중형을 선고해야 하나, 한국에서는 국세청 관리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 같은 '문화적 차이' 를 참작, 4개 월 보호 감호와 5년 집행 유예를 선고한다."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91. 5. 2. 『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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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K형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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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지난번 뉴욕에 들렀을 때 비록 사담이긴 하지만 이곳 동포들에게 매우 뼈아픈 말을 몇 가지 남기고 떠났소.
그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대략 이럴 것 같소.
첫째,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은 그 이유, 동기가 어찌 되었건 거의가 국가, 민족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개인의 이와 득을 찾아 온 사람들이다.
둘째, 이곳 동포들 중 상당수가 고국의 경제 발전과 이에 따른 고국 사람들의 생활향상에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고국이 잘 되기 보다는 잘못 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조국이 못살아야 그 땅을 떠나온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재미 동포들은 재일 동포에 비해 너무나 에고이스틱 하다. 조국애도 훨씬 미온적이다. 한 예로 88 올림픽 때 재일 동포들이 갹출한 성금이 무려 6백억 원, 그런데 숫자가 훨씬 많은 재미 동포들은 과연 얼마를 냈는가?
넷째, 그리고 형은 비록 표현은 안 했지만 이곳에 이민 온 사람들 대부분이 고국에서 '별볼일 없었던 사람들' 이었지 않으냐? 하는 표정을 나는 읽을 수 있었소.
K형.
형이 남기고 간 이 말이 그 후 계속 내 마음을 껄끄럽게 하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야기를 끄집어 내 보았소. 어떤 고국사람이 보는 동포관이 이러한 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로서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단은 형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이었소. 이민의 동기가 국가, 민족보다는 개인의 안락 추구였다는 것, 고국에 있는 옛 동료·친구들이 경제적으로 자신들 보다 더욱 윤택해지고 또 더러는 '높은 한자리' 를 할 적마다 좌절과 질투가 뒤얽힌 착잡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 그리고 재미 동포들이 극히 이기적이고 조국애가 재일 동포들 같이 뜨겁지 않다는 것 등.
그러나 이들은 형의 말에 수긍은 하면서도 이에 몇 가지 전제와 단서를 붙이는 것이었소. 그 전제와 단서가 무엇인가를 좀 이야기해 볼까 하오.
개인의 안락 추구-
이민의 목적이 내 개인의 보다 나은 삶을 추구했던 것만은 사실이오. 이민을 떠나올 때 이를 민족·국가와 연계시켜 생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는지 모르겠소. 이것을 갖고 국가·민족 의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비난한다면 우리는 더 할 말이 없소.
그런데 도대체 국가의식 민족 의식 다시 말해 애국애족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어떤 사람은 말하오.
"좁은 땅에 그 많은 사람,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그것을 덜어준 것만도 얼마나 큰 애국이냐?"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화를 벌컥 내기도 하오. '건방진 소리 마라! 그래 그 땅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애국 애족을 했다더냐?' 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오.
"동포들이 이곳서 그 고생을 하면서도 매년 고국에 보내는 송금 액수를 보라! 뉴욕 일원만 해도 연간 수천만 달러에 이르지 않느냐? 그것이 애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K형.
사람들의 분분한 의견은 그만 접어두고 나로서 결론을 내린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소. 비록 개인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진 이민이지만 이곳 동포들은 결과적으로 고국에 대해 음으로 양으로 많은 기여를 하고 있소. 그리고 좀 시야를 넓혀 생각한다면 이민이 곧 현대적인 국토확장, 문화확장 그리고 노동 시장 확장이라는 의미에서 동포들은 그 누구에 못지 않은 크나 큰 애국애족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소.
고국발전과 질투-
서울사람들이 이제는 고기 달걀을 싫어하고 야채 생선을 찾는다, 금년도 외국에 나오는 관광객이 1백만 명이 넘을 거다, 강남 아파트 한 채(50평 규모) 값이 미화로 30만 달러를 훗가 한다, 하는 등등의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나던 50년대 60년대의 가난을 생각하고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요, 그리고 또 옛날의 동료· 친구가 권력·명예가 따르는 '한자리'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곳 일부 사람들이 때로 좌절과 질투가 뒤범벅이 된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오.
그런데 형은 이를 두고 이곳 동포들이 고국의 경제 발전과 사람들의 생활 향상을 질투하고 배 아파하는 것 같다고 했소. 이에 대해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소.
한국이 정말로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면 무엇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할 여지가 없소. 비록 우리가 떠나온 땅이지만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되기를 우리인들 왜 빌지를 않겠소?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모든 것이 너무나 잘못 돌아가는 데에 있는 것 같소.
우리가 보기에는 그만한 부를 누릴 자격도, 그만한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부를 소유하고, 자리에 앉아 '나노라' 하는 것이 너무나 못 마땅한 것이오. 이것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오.
여기서 한국 정치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형에게 한가지 부탁이 있소. 한국의 모든 것 즉 정치, 경제, 사회가 정말로 올바르게 돌아가도록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달라는 것이요. 그리해서 사람들의 성실과 근면이 보답되고 더욱 성실·근면한 사람은 더 많은 부, 더 높은 자리를 소유하게 되는 정의로운 사회가 그 땅에 이루어질 때에, 형이 지적한 이곳 사람들의 질투심 또는 배아파하는 것 같은 비뚤어진 심리가 발붙일 근거를 잃게 되기 때문이오.
기타 재미 동포와 재일 동포와의 비교, '별 볼일 없었던' 사람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은 지면이 없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오.
<89. 3. 21.『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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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은행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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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나 이 곳에서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호소력을 갖는 한 가지 명언(?)이 있다.
"남의 돈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라!"
그런데 이곳 동포들 간에는 언제부터인가 또 이런 유행어가 나돈다.
"한국계 은행돈을 못 떼어먹는 사람은 바보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미국에 나와 있는 한국계 은행들이 동포 상대 부실대출이 말썽이 된 모양이다. 그 현황을 좀 살펴보면….
외환·상업·제일·조흥·한일·신탁은행 등 6개 한국계 은행의 미국 내 지점에서 지난 81년부터 금년 6월 사이에 총 3억2천 8백만 달러의 연체 대출이 발생, 이중 52.7%는 강제 회수 또는 대손 상각으로 처리되었으나 그 절반인 1억 5천 4백 66만여 달러가 현재 회수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중 뉴욕 지역 6개 은행의 경우 동포 대출금 가운데 10만 달러가 넘으면서 6개월 이상 연체되고 있는 부실대출이 55명에 61건, 총 5천 7백 50만여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뉴욕한국」 「뉴욕중앙」보도 참조)
한편 은행가에서는 이 숫자는 빙산의 일각, 실제로 회수 불가능한 부실 대출 액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데 우리들은 과연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이것이 미국계 커머셜 은행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우리는 그야말로 '돈 케어'다. 돈 빌려주고 이자 따먹는 장사, 그 누구에게 돈을 꾸어 주었건, 어떻게 빌려주었건, 잘못 꾸어 줘 몇 억 달러를 떼어 먹혔건, 그것이 뉴스는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큰 관심사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계 은행의 일인 이상 우리는 이를 그렇게 무관심하게 바라다 볼 수만은 없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의 은행들은 순수 민간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반관반민이지만 실제로는 국영기업, 국영기업이라면 거기에는 그 운영 전반이 국민 및 동포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당위와 의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곳에 나와 있는 한국계 은행의 지점들은 이같은 일반적인 의무와 당위에 덧붙여 보다 특수한 임무가 주어져 있다고 보고 싶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대출업무는 돈 빌려주고 이자 따먹는 한갓 돈놀이 차원을 넘어 가능한 한 많은 동포들에게 금융 지원 내지 금융 편리를 보아주어야 한다는 도덕적·윤리적 책무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에 드러난 1억 5천 4백 66만여 달러에 달하는 부실 대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우선 이 대출을 어떤 사람들이 받았을까 하는 점이다.
남의 나라에서 이민 정착에 갖은 고초를 겪고 있는 수많은 동포들, 그들 중에서 정말 은행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갖다 썼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줄 안다. 그런 사람들은 은행이 요구하는 신용 및 담보가 어렵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0만 달러 이상 씩 융자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 것인가?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즉 융자시 은행이 요구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신용(Credit)내지 담보(Security)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만한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곳 미국계 어느 은행에서고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제발 우리 돈 좀 갖다 써달라고 애걸을 하는 많은 미국계 은행을 젖혀놓고 그 콧대 높은 한국계 은행의 문을 두드렸을까?
둘째, 이 대출과정에서 과연 본국 어느 권력자의 입김이 작용한 일이 없었을까? 권력 있고 돈 가진 자들만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한국에서의 은행대출, 그 같은 모국 은행의 모세혈관에 불과한 이곳 지점들이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필자가 알기로는 일정액 이상은 이곳 책임자 (지점장) 에게 그 권한이 없고 본국(본점)의 결제 사항으로 알고 있는데 일 개인에게 9백98만 달러라는 거액 대출이 가능했던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을까?
셋째, 이곳 실무자 및 그 상급자와 피대출자 간에 과연 어떤 흥정이 없었을까? 한국식의 코미숀 떼는 일 같은 것이 과연 없었을까? 그리고 이 땅의 법규를 악용, 회사 명의로 오늘 거액 대부를 받고 내일 파산(bankrupt)을 선고, 합법적으로 상환의무 면제를 받는 지능적인 전략에 이를 뻔히 알면서도 말려든 일은 없었을까?
필자로서는 이 같은 의구심이 꼬리를 잇는 것을 어쩔 수 없는데 여기서 이곳 한국계 은행에 묻고저 한다. 그들이 그 막대한 운영비를 지출하면서 미국 땅에 나와있는 그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물론 은행이 동포 생활지원 기관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그리고 은행돈이 동포들의 이민정착을 돕기 위한 지원자금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 땅에 와서 본국에서와 같이 돈 있고 힘있는 동포들만을 상대로 하는 역할에 그친다면….
나는 감히 말하고저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런(정부)기관은 필요 없으니 보따리를 싸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라! 고. 돈 없고 힘없는 대다수 동포들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 그리고 또 돈 있고 힘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미국계 은행이 이 땅에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간곡히 부탁한다.
남의 나라 땅에서 근면·성실을 생활 신조로 삼고 자기 이마에 땅을 흘리면서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곳 동포들에게 그들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는 한국적인 부정·비리·부조리를 새삼 일깨우는 일일랑 제발 말아 달라고.
그것이 권력의 입김이었건, 담당자들의 부정이었건, 그것도 아니면 실무자들의 과오였건, 하여간 그 같은 부실대출이 발생, 결과적으로 몇몇 사람에게 이곳 동포 기준으로서는 엄청난 특혜(내지 부당 이익)를 안겨 줌으로써 동포간에 위화감을 조성, 선량한 그들의 입에서 "한국계 은행 돈을 못 떼어 먹는 사람은 바보다" 하는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88. 11. 19. 『미주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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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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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잘 살아 보자!"
너 나, 이 땅에 온 우리 모두가 김포공항을 떠날 때에 굳게 다짐한 피맺힌 결심이었다.
1인당 GNP가 1만2천 달러가 넘는 나라, 그리해서 개와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의 팔자가 못 사는 나라 사람 팔자보다도 낫다는 나라, 그런 나라에 가서 "보다 잘 살아보자!"고 다짐한 우리들이 아니던가.
"새 인생을 설계해 보자!"
이것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태평양을 건너 올 때에 한결같은 꿈이었을 줄 안다.
그러나 막상 밟은 땅은 생각한 대로 그렇게 쉬운 땅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 나라에선 정부가 시키는 대로 일만 하면 먹여 주고 입혀 주는데, 이곳에서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내가 알아서 해야 하니 너무 힘이 들어요."
얼마 전 같은 서구 계통인 소련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이민생활을 청산하고, 무더기로 다시 자기네 고국으로 되돌아 가면서 내뱉었다는 말이다.
이 말 그대로, 이 땅은 결코 우리에게도 "물질이 풍요하고 기회가 풍부하며, 자유와 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그런 땅은 아니었다.
보다 잘 살기 위해, 내가 태어난 땅 정든 사람들을 떠나, 이 땅에 와서 살아온 지 사람 따라 5년, 10년, 15년,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갖은 역경 끝에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민 정착의 뿌리를 내리고 있고, 또 내리려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과연 우리는 그 동안 이 땅에서 어떠한 정신적인 과정을 거쳤으며 또 지금 어떠한 정신적인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가?
내일을 위하여 어제를 반추해 보기로 한다.
어떤 심리학설에 따르면 '충격의 모형'이라는 것이 있다 한다.
즉 사람은 어떤 충격을 받으면 우선 당황(confusion)하게 되고, 이어 그 충격을 준 대상을 부정(denial)하게 되고, 그 다음 그 충격의 대상에 분노(anger)를 느끼고, 그러다가 할 수 없다는 체념과 함께 자기를 고백(own up)한 후, 이를 받아들이고(acceptance), 그 다음에 정신을 차려 다시 자기회복(rehabilitation)의 단계에 들어선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보다 잘 살기 위해" 찾아 온 이 땅을 처음 밟았을 때, 사람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풍습·사회구조가 다른 데서 오는 소위 '문화의 충격', 한동안 어리둥절(confusion)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우선 밤낮을 가리게 되고 동서남북을 분별하게 되었을 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모두가 나에게는 낯설고 생소하고 서툴기만 했다. 한낮 대로에서 남녀가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볼 때면 "X놈들" "X놈의 나라"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고, 초등학교 어린이가 50대 어른을 보고 "미스터 XX"라고 부를 때는 아연실색치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나에게는 안 맞았고, 따라서 정이 들지 않았다. "내가 찾아 온 것은 이것이 아닌데…" 실망과 좌절, 처한 현실을 부정(deny)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예 거부반응(rejection)을 일으켜 이민생활 2, 3년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땅을 옮겨 심은 나무 한 그루가 풍토에 맞지 않는 데서 오는 몸부림이자 고뇌였다.
이민 생활 첫 2, 3년, 이 땅에 정이 안 들고 또 일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 풀려 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이민 온 것을 후회도 하고 또 회의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이란 인생 여정에 있어 너무나 큰 방향 전환, 쉽사리 되돌이킬 수 없는 엎지러진 물, 이번에는 다시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분노(anger)를 느끼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밥을 먹으러 이곳엘 오지 않았는데…" 하는 자탄, 그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데서 오는 무서운 고독, 손톱도 들어가지 않는 이 땅의 꽉 짜여진 시스템, 환멸과 스트레스의 축적 속에서 짜증만 나고 화만 치밀었다. 그러다가 새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디 한번 해보자!"고 마음을 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어 보아야, 마치 맨하튼의 철근과 콘크리트로 다져진 건물과도 같이 어수룩한 데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미국 사회, 새삼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너가 이 땅에서 뭐냐?" 하는 자문과 함께 "이 땅에서 이렇게나마 밥 먹고 사는 것도 다행이지…" 하고 겸손히 자기를 고백(own up)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해서 이 땅에서 4, 5년을 살다보면 이민 초기 "가야지, 돌아가야지…"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말이 쑥 들어가고, "이제는 할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이 땅에서 살 수 밖에 없다"고 체념 단계에 들어가고, 이민 초기에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acceptance)된다.
이렇게 해서 이민초기에 받았던 충격을 벗어나 이제는 "인생이 별것인가? 다 그런 거지…" 하는 담담한 심정으로 자기를 회복(rehabilitation)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땅에서 이렇게 정신적으로 혼돈과 거부와 분노 그리고 자기 고백과 순응의 단계를 거쳐 다시 회복된 '나'는 과연 어떤 '나'일 것인가? 성경의 뜻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거듭난 이 '미국의 나'가 과연 옛날 '한국의 나'와 같은 '나'일까?
때때로 자화상을 그려보게 되는 요즘이다.
<87. 10. 9. 『뉴욕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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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민 50대'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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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라는 숫자가 유난히도 눈에 크게 뜨이는 요즘이다.
나이 50이 되니 시력은 점점 약해지는데 유독 이 '50'이라는 숫자만은 자꾸 크게만 돋보이니 어떻게 된 일인가?
집에 날아오는 생명보험·건강보험 광고지를 훑어보다가도 눈은 영락없이 'Age 50' 난에서 멈추게 된다. 보험 불입금이 49세와는 천양지차다. 곱절은 안 되어도 50% 이상이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우울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백화점엘 가도, 식당엘 들러도, 스키장·골프장엘 가 보아도 그리고 아침 저녁 러시 아워에 지하철을 타 보아도 나이 50 됨직한 얼굴을 보기가 좀처럼 힘들다. 역시 우울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고국의 인구통계를 보면 8.15 이후 태어난 세대가 전체 인구의 73%를 차지한다. 그러니까 우리 50대 연령층은 그 나머지 27%에 속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국에 가도 이제 연령적으로 '마이노리티'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또한 우울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이 땅에서 50대를 맞는 사람들은 시대적으로 볼 때 너무나 불행한 세대인 것 같다.
일제 말 그 어려운 때에 가난한 땅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8.15 혼란, 중학 때에 6.25전란, 그리고 대학 때에 5.16쿠데타의 소용돌이를 겪는 등 도무지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모르고 자랐고 또 경제적 여유나 풍요라는 것을 모르고 자란 세대다.
그리고 또 이들은 이 땅에 건너 와서도 이민 1세대로서 갖은 고초를 겪었고, 또 많은 고생을 했다. 60년대 온 유학생들은 학비 벌랴, 공부하랴, 그들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고, 70년 대 곧장 이민 온 사람들은 거의 적수공권-돈 보따리를 싸 갖고 온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으로 이 땅에 건너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고통과 뼈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이민 1세대는 결국 2세를 위한 자기희생 일 수밖에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녀들을 훌륭히 키우는 것을 보람이자 큰 낙으로 삼고 한국 내 사람들 못지 않게 2세 교육에 열을 올리는 줄 안다.
그런데 이민 1대의 이 자기 희생적인 보람이 과연 어떻게 보답되고 있는가?
"그것은 아버지 세대의 인생이었어요. 왜 우리에게까지 그 아버지 세대의 인생을 강요하지요?"
일상생활에서 도무지 절약이라는 것을 모르는 대학 다니는 아들에게 50대 아버지가 근검절약의 미덕을 강조하니 그 아들녀석이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1년 365일, 하루 12시간 이상씩 가게 일을 하는 50대 아버지를 보고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한다는 말,
"우리 아버지는 '더미(dummy)'예요. 왜 저렇게 일을 하지요?" 했다는 이야기고.
이곳서 연로한 양친을 모시고 있는 어떤 친구는 말한다.
"참으로 불행한 세대이지요. 우리는 부모에게 대한 효도도, 자식에게 대한 도리도 다 해야 하고… 그런데 자식들로 부터는 그것을 기대할 수가 없으니…"
공자는 '30대 입지', '40대 불혹', '50대 지천명'을 가르쳤다.
30대에 이 땅에 온 사람들, 모두가 세운 뜻이 있었을 것이다. 유학생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이 공부가 목적이었겠고… 그런데 곧장 이민 온 사람들은 어떤 뜻이었을까?
물론 사람마다 그 생각이 달랐겠지만 결국은 철두철미 '달러'로 돌아가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 뛰어들었으니 '달러' 추구가 그 뜻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모두들 부지런히 뛰었다. 어떤 사람은 밤잠을 못 자면서, 어떤 사람은 물불을 안 가리고 '달러벌이'에 뼈를 깎았다.
그 결과 지금 50대에 들어선 동포의 많은 수가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얻었고 또 좀 더 많은 달러를 모은 사람들은 큰 집도 장만하고, 좋은 차를 굴리면서, 주말이면 골프다, 스키다, 여행이다, 생활을 즐기는 줄 안다.
그러나 큰 집을 쓰고 있건, '렌탈 아파트'에 살건, 고급 차를 굴리건, 아니면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이건, 지금 이 땅에서 50대를 맞는 사람들로서 "이만하면 되었다" "이대로 좋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혹시 많은 사람들이 지난 나날을 되 돌이켜 보고 실망과 좌절, 그리고 하루하루 다가오는 내일의 자기, 즉 이 땅에서 '마이노리티'로서의 노년기를 생각하고 우울과 고독을 씹고 있지나 않을까?
'40대 불혹'의 나이 때도 이 연령층은 이 땅에서 유혹을 받을래야 받을 대상조차 없었다. 권세욕의 기회도, 명예욕의 기회도, 완전히 봉쇄 당한 상황에서 그 무엇에 정열을 쏟을 수 있었을 것인가?
"가만히 집에 있으면 무엇합니까? 쓸데없는 잡념이나 생기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그저 일을 는 수밖에 없지요."
어느 친구의 이 말대로 정신적인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워크훨릭'(workholic)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나이가 50이 넘었거나 50을 바라보게 되었다.
30, 40대 인생의 황금기를 이렇게 다 보내고, 그 동안 애지중지하던 아들 딸들이 하나 둘씩 모두 제 갈 데로 떠나간 후 텅빈 집(empty-nest)을 우두커니 지키게 된 초로의 부부들, 이제 이들이 이 땅에서 갈 곳이 어디이며 또 할 일이 무엇인가?
'50대 知天命'이라고 한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의 소명의식을 갖고 산다고 할까, 30대에 세운 뜻 그리고 그 뜻에 따라 살아온 40대의 지난 인생을 후회치 말고, 또 그 결과로 빚어진 지금의 자기 (및 그 상황)에 불평·불만치 말고 이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유유히 살라는 뜻인 줄 안다.
그런데 '지천명'의 나이에 눈만 뜨면 하루같이 "이 땅에서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 하는 자책과 후회, 그리고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와 절망, 그리고 또 "이 땅에서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는 한 줌의 흙이 되어 버릴 것인가?" 하는 공허와 허무감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이같은 인생이 구원(?)받을 날은 언제일 것인가?
<86. 11. 14. 『뉴욕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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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五福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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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복이 있느냐 없느냐, 따라서 행복하냐 불행하냐를 가름하는 객관적인 척도로 소위 '五福'을 일컬어 왔다. 즉 壽, 富, 康寧, 攸好德 그리고 考終命. 요즘 말로 바꾸어 보면 장수, 돈, 건강, 덕망 그리고 안락사(?) 쯤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五福'론이 오늘날에는 얼마나 타당한가? 특히나 남의 땅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어필하는가.
온고지신 그리고 심심풀이를 위해 그 하나 하나를 현대의 상황에 비추어 재조명해 본다.
□ 壽(장수)…누군들 오래 살고 싶지 않을 것인가? 장수를 '오복'의 으뜸으로 손꼽은 데에 대해 조금의 이의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그런 생각을 했던 그 시대와 환경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한 번 비교 검토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그때는 대가족 제도 그리고 유교에 바탕을 둔 경노 사상이 철저했던 시대다. 그래서 노인들은 아무 하는 일 없이 방 아랫목에 앉아만 있어도 아들 손자 며느리의 공양이 지극했고, 또 마을 사람들로부터는 '늙었다'는 사실만 갖고도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집안 일이고 마을 일이고 모든 일을 젊은 사람들이 의논을 해오는 정신적인 구심점이기도 했다. 그리해서 나이가 들수록 인생을 사는 보람을 더욱 느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특히 쓸모 없는 것은 헌신짝 같이 내버리는 이 땅에서 노인들의 위치가 어떠한가?
아들 딸 모두 저희들 갈 데로 다 가버린 후 외로이 사는 노부부의 모습, 그리고 이들 속담대로 "한발을 무덤 속에 걸치고" 하는 일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 양로원의 정경을 볼 때마다 과연 오래 산다는 것이 福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우울해지는 것이 필자만의 느낌일 것인가?
오래 사는 것이 福이 되려면 그를 보완하는 여러 가지 여건이 모두 갖추어져야 될 것 같다.
□ 富(돈)…다다익선, 그야말로 많을수록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이 땅에 이민 온 우리에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돈福'이라는 말을 한다. 돈이 사람을 따라야지 사람이 돈을 쫓아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과연 '돈福'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오늘날 같이 꽉 짜인 사회 그리고 너와 나 모두가 생존경쟁을 위해 아우성을 치는 시대에 '돈福'이 있으면, 입만 벌리고 있어도 사과가 저절로 내 입에 굴러 떨어질 것인가? 우연의 행운도 끊임없이 찾는 사람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 같다.
그런데 또 하나 富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성경의 한 구절이다.
즉, 성경은 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이 말을 냉철히 분석해보면 이는 富에 대한 타기, 그리고 富를 가진 자에 대한 저주다. 왜냐하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자는 천당을 갈 수 없다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자가 갈 곳은 지옥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 조상들이 五福의 하나로 손꼽은 富, 그리고 오늘날 그 누구나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富를 기독교는 이렇게 저주의 대상으로 간주하니 어려운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富가 과연 福이냐, 아니면 저주의 대상이냐, 하는 판가름은 소위 취전(取錢), 관전(管錢) 다음에 오는 용전(用錢), 즉 그 富(돈)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을 것 같다.
□ 康寧(건강)…사람이 일생을 건강하게 사는 것보다 더 큰 福은 없을 것 같다. 건강을 잃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그 의미와 가치를 잃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五福 중에서 가장 으뜸되는 福이 '강령'이 아닐까 한다.
□ 攸好德(덕망)…德이 있는 사람이라야 德을 사랑할 수가 있다. 그러면 德이란 무엇인가?
상식적인 해석을 해보면 고결한 인격, 건전한 상식 그리고 따뜻한 품성의 종합이 아닐까 한다. 이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오랜 기간에 걸친 수련의 결과로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五福의 하나로 손꼽히는가? 사람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德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가 않다 (德不孤)" 고 한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人德을 얘기 하지만 자기가 정말 德이 있으면 人德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가 德이 있어' '사람들의 人德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 考終命(안락사)…사람이 자기 명대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편안하게 죽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다섯 번째의 福으로 손꼽았다.
사람이 편안히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우선 심적으로 회한이 없어야 될 것이고, 또 육체적으로 고통이 따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중 육체적인 고통은 불가항력적인 것, 우리가 어쩔 수 없겠지만, 마음의 회한은 우리가 일생을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느니 만치,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하기 나름일 것이다.
칸트는 임종할 때에 "Das ist gut."하는 한 마디를 남겼다는 일화가 있다.
이상 五福을 종합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 조상들이 이 五福을 이야기 할 때에 그 뜻은 다분히 후천적 이라기 보다는 선천적인, 즉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타고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長壽가 그렇고, 健康이 그렇고, '고종명'이 그러하다. 그리고 또한 부자 집 집안에 태어나면 불로소득의 유산을 물려 받으니 富가 그렇고, 德만 해도 그 사람의 천성적인 성품이 큰 요소가 되니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사람의 운명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이미 거의 다 결정되어지는 것으로 본 것일까?
<84. 11. 9 『日刊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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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부: 한국 언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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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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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언론(들)이 한갓 Journalism 또는 Mass-Communication의 기능을 넘어 Message 전달자로서의 역할까지 해주기를 바란다면 너무나 지나친 요구일 것인가?
그러나 지금 한국의 모든 상황으로 볼 때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또 무슨 일을 하려면 할 수 있는 곳이, 오직 언론(분야) 뿐이니 이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의 언론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때 그때마다 어떤 시대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 좀 멀리는 민중 계몽을 선도했고, 독립운동을 고무했고, 좀 가까이는 독재타도에 미지근 하나마 한 몫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언론(들)이 해야 할 시대적인 사명은 무엇일 것인가?
다 알다시피 언론의 기능은 첫째는 사실의 보도, 둘째는 그 사실에 대한 시시비비다. 여기서 그 사실은 '진실'이어야 하고, 또 그 시시비비는 '최대다수의 최대복리'를 위한 비판이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언론들이 이 두 가지 기능을 얼마 만치나 제대로 해내고 있는가?
우선 사실 보도에 있어 그 '사실'은 '일어난(발생)사건' 드러난(노출)사실' 만을 다루는 사후(事後)보도 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언론의 필수 요건이지 충분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참된 언론이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사실' '숨겨진 사실'을 파헤쳐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사전(事前)보도'를 해야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지금 온통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한보 사태' '현철 사건'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둘 다 어느 날 갑자기 성수대교 무너지듯 돌발한 사건이 아니다. 오랜 기간을 두고 '그 사실'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익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냥개 같이 뉴스를 쫓는 신문(기자)들은 이를 파헤쳐 세상에 드러내 보이려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둘 중의 하나다.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과 금력(金力)앞에 용기가 없었거나 ,아니면 그 권력과 금력과의 밀착이다. 일컬어 '권·언(權·言)의 야합' '금·언(金·言)의 밀월'이다.
그들은 변명할 거다.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는 '숨겨진 사실'을 미쳐 몰랐다고. 또는 주장하리라. '그 사실'이 그렇게 나라를 뒤흔들만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기사거리'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노라고….
그 어느 쪽이 되었건 그 '엄청난 뉴스'를 사전에는 입 한번 뻥긋 안 하거나 못하다가 드디어 일이 터지니까, 그리고 현 권력층이 그 끝판에 다가오니까 이제서야 '죽은 시체에 벌떼 같이 몰려들어 마구 뜯는'--한국 언론 행태에 대한 어느 외국언론의 평--것은 너무나 비겁하지 않는가?
그 다음 언론의 두 번째 기능인 시시비비 논조를 살펴보자.
한마디로 너무나 비난·매도·개탄 일변도다. 기껏해야 "그러면 안 된다" "이래야 한다"는 그 당위성만 강조할 뿐,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대안 제시가 없다.
"이래야 한다"는 그 당위성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뻔한 일, 그것을 열 올려 강조해 보아야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자아내거나 아니면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린다.
한국의 언론이 '제 4부'의 기능을 다 하려면, 그리고 '무관의 제왕' '사회의 목탁'이라는 영광의 구실을 하려면 이제 대오각성, 새롭게 거듭 나야한다.
<97. 3. 5.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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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보도에 이상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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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마구 물어뜯는 한국의 언론들…"
전·노씨를 구속·수감할 무렵 한국언론에 대한 어느 외국 신문의 논평이다.
이 같은 혹평의 근저에는 '죽은 자'가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곧 그들의 무소불위의 권세가 온갖 부정·부패를 자행할 때에 한국의 언론은 과연 무엇을 했느냐, 입 한번 뻥긋 못하고 마치 고양이 앞에 죽은 쥐 꼴이 되어 있지 않았느냐, 그러다가 그들이 막상 '죽은 자'가 되니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그렇게 난도질을 하는 것은 너무 비겁하지 않느냐, 과연 그것이 언론의 정도이냐, 하는 비판의 뜻이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언론의 북한 보도를 보면서 그 너무나 근시안적 안목, 냉전적 사고, 전투적 자세, 그리고 심지어 일종의 새디즘(sadism)의 흔적 같은 것을 발견하고 큰 실망을 느끼는데 한국 매스컴들의 북한 보도자세가 꼭 이래야 되는 것인지, 몇 가지 문제점들을 생각해 본다.
'북'이 이제 '남'보다 못사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 그런데 한국의 신문·방송들은 툭하면 이를 대서특필, '초근목피로 연명' '아사자 속출' '굶주림 끝에 탈출' '곧 체제붕괴', 대문짝 만한 제목을 달고 전면 특집을 꾸민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 이상 그 보도 자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사실을 보도하는데 있어 민족애랄까, 같은 혈육의 정이랄까, 따뜻한 마음이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다는 접이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한 핏줄, 형제지간 되었건 먼 친척이었건, 그들은 못 살고 나는 잘 산다고 치자. 이 경우 남한테 이야기 할 때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못사는 것을 고소해 하고, 흉을 보고, 업신여기고, 그리고 내가 그들보다 잘 산다고 거드름을 피는 자세다. 그리고 또 이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못사는 것을 계속 크게 클로즈업 시킴으로써 일종의 새디즘의 쾌락을 즐기는 태도다.
한편 다른 태도는 나는 잘 사는데 그들이 못사는 것을 안쓰러워하고, 측은해 하고, 가슴아파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들도 우리같이 잘 살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 태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나만 호의호식하는 것을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하고, 송구해 하는 태도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어른스럽고, 따뜻한 정이 느껴지고, 착한 인간성이 풍길 것인가? 남을 "못산다, 못산다"고 윽박 지르고 몰아침으로써 내가 얻는 것이 과연 무엇일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유의할 것은 현 시점에선 한국 매스컴들의 북한 보도는 모두가 간접 취재라는 점이다. 어느 하나도 '발로 뛰는', 곧 현장을 직접 보고 확인한 기사나 보도가 아니다. 기껏해야 외신종합, 안기부 정보, 또는 '북'을 갔다온 외국인들의 말, 또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그 취재원이다. 그런데 신문학에 있어서 현장을 직접 목격·확인 안한 간접 취재는 절대 금물이다. 오보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같이 위험한 간접 취재의 데이터를 갖고 "아사자 속출"이니 "체제 곧 붕괴"니 하고 단정적인 보도를 해도 좋을 것인가?
요즘 흔히 말하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한국 언론도 북한 보도에 있어 보다 거시적인 안목, 민족적인 애정, 그리고 승자의 관용적인 태도로 접근해 주기를 바란다.
<96. 7. 17.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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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은 言論 社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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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공 비리 국회청문회 때 증언대에 서서 "과거는 잘못 되었다. 앞으로는 새 시대 정신에 발맞추어 우리 언론도 거듭 태어날 것을 다짐한다"고 민중 앞에 맹세한 한국의 4대 일간지 사주들이 얼마 전 청와대 회식 석상에서 대통령에게 "각하!"를 연발하며, 무릎을 끓고 앉아 두 손으로 술잔을 바치는가 하면, 종내에는 두 사주간에 시비가 붙어 서로 멱살을 잡는 등 추태를 부려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겨레신문」(미주판 11월 29일자)이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의 기관지 「언론노보」에 실린 글을 인용,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노태우 대통령과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 이건희 중앙일보 사주, 장강재 한국일보 사장 등의 청와대 회식과 관련한 (지난 주)「언론노보」36호의 '선소리'에 대해 말들이 많다… 그 현장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때 : 10월26일 저녁
△곳 : 청와대
△등장인물 : 대통령,ㄱ.ㄴ(이상 주연), ㄷ.ㄹ(이하 조연), 기타 엑스트라
(술자리 무르익어 가면서 골프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간다.)
▲대통령 : 골프들은 자주 치십니까? 나이든 사람들 운동에는 골프가 제일이죠.
▲ㄱ : 그런데 서울 근교에 골프장이 부족해서 많은 애호가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고양 군에 땅이 좀 있는데 골프장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 소득이 높아지면 골프장도 늘여야겠지요.
▲ㄱ : (이때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으며)각하, 제 술 한잔 받으시죠.(동동주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따른다.)
▲대통령:(당황하며) 아니, 편안하게 앉으시죠.
▲ㄱ : 아닙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ㄴ : (보다 못하여 ㄱ에게) '각하, 각하' 하는 것은 옛날 호칭 아닙니까? (ㄱ·ㄴ·ㄷ·ㄹ 사이에는 술자리에 가기 전에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지 말자는 약속이 있었다 함)
나는 여기서 「노보」인용을 중단하지만 이 이야기의 뒤에는 ㄱ과 ㄴ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져 대통령이 슬며시 자리를 떠나는 장면, 그리고 마침내는 ㄱ과 ㄴ이 멱살을 잡아 다른 사람들이 말려서 파장이 되는 장면이 계속된다…."
이 글의 필자 신홍범「한겨레신문」논설주간의 말대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정확하게 재구성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또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일 이 이야기가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깝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나는 한국 4대 신문사 사장·사주 님들의 이 같은 '청와대 코미디'를 보면서 한없는 실소에 이어 무서운 분노를 가눌 수 없는데 그 이유를 하나씩 분석해 보기로 한다.
첫째 : 청와대에서 왜 4대 일간지 사장들을 불러 향응을 베풀었을까? 그 동기·이유가 과연 무엇일 것인가? 한국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의례적인 것"인지 모르지만 미국대통령이 국내 유수 신문사 사주들만을 백악관으로 불러 회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그 이유·동기에 대해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둘째 : 대통령과 「제 4부」의 우두머리들, 산해진미의 술상을 차려놓고 화제는 한가한 골프 이야기, 지금 시국이 과연 그들이 그 같은 '신선놀음'을 즐길 때 일 것인가? 5공 청산이다, 수출부진이다, 경제위기다, 하는 국가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고 또 한편으로는 5공 때보다 더 많은 양심수가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에서 '사회의 목탁''정의의 기수'를 자처하는 언론사의 사주들이 모처럼 대통령을 만나 그 대화가 고작 골프 이야기였다니 한 '보통사람'으로서 무서운 분노와 함께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셋째 : "저도 고양 군에 땅이 좀 있는데 골프장을 하면 어떨까요?" 했다는 ㄱ의 말, 이권 청탁을 하려면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그 많은 기자·사원들을 시켜 관할 담당자에게 부탁을 하든지 압력을 가할 것이지 그래도 신분이 대 신문사의 사장으로서 너무나 치사하지 않은가?
'최고·직통'이라고 판단, "이때다" 싶어 그런 부탁을 한 모양인데 우리는 여기서 '사회의 목탁' 아닌 한갓 이권 모리배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된다.
넷째 : "각하! 각하!" 를 연발하며 대통령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바치는 ㄱ의 모습, 그야말로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오늘 날 한국 언론을 극적으로 상징하는데 더욱 가소로운 것은 대통령이 크게 당황, "편안하게 앉으라"하니 "아닙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했다는 대답이다.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쓰라면 쓰고, 쓰지 말라면 안 쓰고, 그래도 신문장사는 잘되어 준재벌이 되어가니 얼마나 즐겁고 편안할 것인가?
다섯째 : 분위기가 이상해져 대통령이 슬며시 자리를 뜨자 ㄱ과 ㄴ이 서로 멱살을 잡는 시비를 벌였다는데 이 또한 무슨 추태인가? 아무리 술좌석이라고 하지만 그 장소가 청와대, 대통령과의 회동, 그런데 한 나라의 최고 지성과 양식을 표방하는 대 신문사의 사장·사주들이 술에 만취되어 멱살을 잡고 시비를 벌이다니…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아닌가?
한국 언론인들이 살아있다면, 그리고「언론노보]의 이 보도가 허위가 아니라면, 이번 '4대 언론사주' 들의 '청와대 회식' 사건은 유야 무야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줄 안다.
<89. 12. 10. 『미주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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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신문發行人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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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언론특위는 오는 13일 한국의 4대 일간지 「동아」「조선」「한국」「중앙」의 발행인에 대한 청문회를 열 계획으로 있다.
다음은 이를 앞두고 의원들과 신문발행인들 간에 오가는, 아니 꼭 오가야 할 이야기들을 필자가 임의로 가상, 청문회 문답식으로 정리해 본 글이다.
-의원 : 5공 7년 동안을 일컬어 많은 사람들이 암혹기라고 합니다. 이 암흑기에 '제4의 권부' 라고 일컬어지는 언론이 과연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발행인 : 글쎄, 하느라고 했습니다만…
-의원 : 언론의 생명은 사실의 전달 그리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과연 5공 동안 언론이 사실을 사실대로 민중에게 전달하고 시와 비를 가리는데 언론이 자기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발행인 : 모든 것이 철저한 장막 속에 가리워져 이루어졌고 또 워낙 공포 분위기라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의원 :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신문, 방송, 통신 통폐합 때 증인들은 아무 저항 없이 이를 순순히 복종, 서약서에 직접 도장을 찍었다는데 사실입니까?
▲발행인 : …
-의원 : 대답을 재촉합니다.
▲발행인 : 그 분위기에서 당신이라면 저항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의원 : 당시 통폐합 때 증인들 4개 사는 모두 살아 남았는데, 더러 뺏긴 것도 있습니다만, 혹시 내심으로 이를 환영했다고 할까, 즐거워하지는 않았습니까?
▲발행인 : 의원, 인격을 모독하는 어불성설을 취소하십시오.
-의원 : 당시는 그렇지 않았을 줄 모르지만 언론 통폐합은 결과적으로 중인들 4개 사에 엄청난 특혜를 안겨주었기에 하는 말입니다.
▲발행인 : 무슨 궤변을 농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의원 : 물론 그 일은 군인들로서는 자기네 정권안보를 위해 한 짓이지만 언론계 입장에서 보면 언론사간에 경쟁을 없애줌으로써 살아남은 몇 개 사가 카르텔을 형성, 신문시장을 독점케 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발행인 :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의원 : 그럼 한가지 묻겠습니다. 증인 신문사의 80년도 순수익이 얼마였습니까?
▲발행인 : 자료를 갖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원 : 그러면 작년 87년에는 순수익이 얼마였습니까?
▲발행인 : 역시 자료가 지금 손에 없습니다.
-의원 : 내가 가진 정보로는 80년도 수익이 XX억, 작년도 수익이 XXX억, 즉 7,8년 동안에 순수익이 몇 십 배로 늘었습니다. 그 암흑기에 언론이 언론구실을 제대로 못하면서, 돈벌이 기업으로서는 이렇게 비대해진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행인 :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전반적인 경제 발전에 따른 성장이라고 봅니다.
-의원 : 질문 내용을 바꾸어 묻겠습니다. 기자 해직 당시 증인의 신문사는 당국이 보내온 명단에 들어 있는 기자들을 모두 해직시켰습니까?
▲발행인 : 해직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원 : 신문사는 정부기관 아닌 민간기업, 그런데 정부에서 그렇게 인사에까지 간여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른 일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발행인 :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알만하지 않습니까?
-의원 : 그런데 어떻게 그 옳지 않은 지시를 조금의 항의나 반발도 없이 그렇게 순순히 받아 들였습니까?
▲발행인 : 어느 재벌총수가 말했듯이 신문사도 그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딴 도리가 없었습니다.
-의원 : 그때 해직 사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발행인 : '의원면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원 : '의원면직'은 자기가 원해서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을 말하는데 자기의 의사에 반해 쫓겨나는 것을 어떻게 '의원면직'이라고 했습니까?
▲발행인 : …
-의원 : 그 당시 당국이 넘겨 준 명단의 숫자는 2, 3백여명, 그런데 실제로 해직된 기자 수는 7백 명이 넘는데 왜 숫자가 그렇게 많이 불어났습니까?
▲발행일 : 아는 바 없습니다.
-의원 : 당국의 명단을 받아 쥐고 옳다 꾸나, 잘 됐다 하고 그 기회를 이용, 평소 탐탁치 않던 기자들 목을 마구 자른 것이 아닙니까?
▲발행인 : …
-의원 : 요즘 해직 공무원 보상에 발맞춰 해직 기자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각 신문사 경영주들에게 적극 권고하겠다고 문공부장관이 발표한 일이 있는데…
▲발행인 : 적극 고려하고 있는 중입니다.
-의원 : 그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회의 목탁' 이라고 불리워지는 언론이 "아,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것이라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보상을 해야겠다." 이렇게 스스로 깨닫고 이를 실천, 사회에 귀감을 보일 것이지 어떻게 지금까지 8년 동안 "내가 한일이 아니다" 라고 시치미를 떼다가 이제 당국에서 적극 권고하니까 마지못해 고려한다는 말이 나온단 말입니까?
▲발행인 : …
-의원 : 또 질문내용을 바꾸겠습니다. 증인 신문사 일선기자들의 처우가 어느 정도입니까?
▲발행인 : 견습기자 초봉 6,70만원 부터 시작 각양 각색 입니다.
-의원 : 제가 알기로는 지금 한국의 신문기자 봉급이 다른 어느 직장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발행인 : 그야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일선기자들의 생활 안정을 보장시켜 줌으로써 임무에 충실케 하고, 부정한 짓을 못하게 방지하고 …
-의원 : 설명은 요구치 않습니다. 묻는 말에 대답만 하십시오. 그리고 또 세제상으로 신문사 종업원들은 10여가지 이상의 특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부가 언론인들에게 왜 이 같은 세제상의 특혜를 베풀고 있다고 보십니까?
▲발행인 : ….
-의원 : 그리고 또 「언론기금」이다 뭐다 해서 언론인들의 자녀들은 대학까지 각종 장학금이 정부에서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발행인 : 사실입니다.
-의원 : '사회의 목탁' 이라는 언론사 사장님들, 시대가 바뀐 이제 언론인에 대한 정부의 이 같은 각종 특혜를 한번 스스로 거부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정부의 그 같은 특혜를 받으면서 어떻게 붓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발행인 : 야단납니다.
-의원 : 무슨 야단이 난단 말입니까? 야단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받아오던 그 같은 특혜가 없어지면 일선기자들의 반발이 우려된다는 뜻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 신문사의 이익금으로 자체 충당하면 될 것 아닙니까?
▲발행인 : ….
-의원 : 끝으로, 이제 달라지고 있는 시대에 발맞추어 언론도 환골탈태, 대오각상해서 새 출발을 해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발행인들의 포부를 한 말씀씩….
▲발행인 : 이제 새 신문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니 언론계 풍토도 많이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의원 : 새 신문들이 그렇게 많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환영합니다. 아니면 못 마땅합니까?
▲발행인 : ….
-의원 : 민중의 입장에서 두 손을 들고 환영합니다. 당신네들은 자의건 타의건 군사정권과 유착, 그 권력의 비호와 특혜 속에서 오늘날 준재벌로 컸습니다. 이제 좋은 새 신문들이 많이 나옴으로써 어쩔 수 없이, 씨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민중을 돕는 길이 어떤 길이냐, 하는 선의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신문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가 일층의 분발을 부탁드립니다.
<88. 12. 10. 『미주 世界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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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부 詩차닌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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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괴 나와라, 뚝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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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현대판 도깨비
IMF 방망이
삼천리 두드리네
돌 반지 결혼 반지
할머니 금비녀
할아버지 금단추
천사표 민초들
눈물겨운 보국운동
IMF 도깨비
무서운 방망이
금괴 나와라, 뚝딱!
은괴 나와라, 뚝딱!
두들겨도 두들겨도
꿈쩍않는 금괴들
금가락지 금노리개
새발의 피
천 개 만 개 모아야
금괴 하나 될까 말까
꽁꽁 숨은 금괴
"60억 달러 어치"
무거워 못 나오나
덩치 커 못 나오나
거품경제 잘 나갈 때
대량 수입한 금괴들
어디에 숨었나
불가사리 다 먹었나
고통 나누어 지자!
여린 마음 울리는 구호
금괴는 꿈쩍 않네
철심장의 금괴들
달러 나와라, 뚝딱!
큰 달러 나와라, 뚝딱!
페니 니클 다임
잔돈푼만 수북하네
큰 손 큰 뭉치 큰 달러
모두 어디로 갔나
증시 찾는 외국돈
"외자 들어왔다!"
좋아 마소
'검은머리 외국인 돈'
해외 숨겨논 내국인 돈
'세상에 드러내기
어려운 것들 너무 많아..."
산더미 재산 움켜주고
재벌들 전전긍긍
무엇이 그리도
떳떳치 못한가?
무엇이 그리도
깨끗지 못한가?
금괴 너무 무거워
못 나온다면
달러뭉치 세상 무서워
못 나온다면
IMF방망이
더 쎄게 두들겨 주소
'금괴' 나와라, 뚝딱!
'빅달러' 나와라, 뚝딱!
<참고 : 한국민 각 가정에 보유하고 있는 금 총계는 대략 2천7백여 톤, 3백억 달러로 추산된다고. 이중 금괴가 5백40여 톤, 60억 달러 어치.
이번 금 모으기 운동으로 수집될 금은 1백 ∼ 2백여 톤, 10억 ∼ 12억 달러 어치로 전망.
한편 외국에 떠도는 '검은머리 외국인 돈' (한국 국적 달러)은 1백억 ∼ 2백억 달러로 추정된다고 한다.>
<98. 1. 23. 『미주朝鮮』>
X X
토끼 허리에 지뢰 100만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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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모양새로 생긴 한반도
토끼가 허리가 아파 웁니다
너무나 너무나 아파
울고 또 웁니다
토끼 허리 한 복판에 박혀있는
지뢰 1백여 만 개,
핏줄이 터져 상처 투성이
너무 아파 눈물을 흘립니다
보다 보다 못해
세계평화 옹호가들이 나섰습니다
토끼 허리에 박혀있는 그 지뢰들을
어떻게든 빼내어 주자고…
한 데, 우리 주인은 결사 반대
남침저지·전쟁억제 위해
제 몸에 박혀있는 이 지뢰
1백여만 개 필수 불가결이라고…
미국 코큰 아저씨 또한 말합니다
한국에 나가있는 그네 젊은이들
그 귀한 생명들 보호위해
한반도만은 지뢰가 필요하다고
참으로 야속하고 또 야속합니다
이 아픔 몰라주는 주인의 냉혹함
그리고 또 원망스럽습니다
이에 맞장구치는 미국 코큰 아저씨
주인은 저를 달랩니다
5, 6년만 더 참으라고…
미국 코큰 아저씨 또 이를 거듭니다
그 때 가서 빼내어 주겠다고…
허나, 지금 너무나 허리가 아픕니다
그래서 전 세계 인도·평화주의에게
간절히 간절히 호소합니다
이 참에 어떻게든 빼내어 달라고
하루에도 전 세계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수십 수백명씩 생명 앗아가는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살인마
우리 주인은 주장합니다
한반도 지뢰밭엔 민간인 접근 어려워
외국 같은 사상(死傷) 우려 없다고…
평화운동가들을 웃기는 망발
이 살인마 하나 없애는데
몇 달 몇 년씩 소요(所要)
1백만개를 완전 제거하려면
몇 백년이 걸릴찌도 모른다는데…
5, 6년 후 그때 가선 늦습니다
그 안에 어떤 방식이든 통일되면
국토 한 복판에 즐펀히 깔려있는
그 무진장의 지뢰 어쩔겁니까?
우리 주인의 근시안 안타깝습니다
세계평화운동에서 이탈
혼자 외톨뱅이 되어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정치·군사·외교 모든 측면 고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세게지뢰제거협약'에 가입
그것만이 최선의 길인데…
12월 '오타와 협약' 비준함으로써
세계 만방엔 평화의지를 과시
북에는 무거운 심리적 압박감
일석이조인 것을…
작년 큰 홍수 때 휴전선 일대
지뢰밭에서 수 없는 지뢰가
물결에 쓸려 내려가
남쪽서 큰 야단법석을 떨었지요
땅 속에 박힌 쇠파이프 하나
민족정기를 끓는다는 풍수지리설
국토 심장부에 꽂힌 지뢰 1백만개
민족얼 민족혼 다 끓고 있지요
토끼가 허리가 아파 웁니다
너무나 너무나 아파
울고 또 웁니다
울면서 울면서 피눈물을 흘립니다
<97. 10. 22. 『미주朝鮮』>
X X
KAL참사… 죽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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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
그 귀한 생명들을 가득 싣고
꿈과 낭만의 날들은
김포공항을 사뿐히 떳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원시림의 섬
오직 하나 뿐인 값진 생명들은
가슴 설레임과 흥분 속에
웃으며 속사이며 마냥 즐거웠다
그러나…
칠흑같은 暗夜 억수같은 폭우
꽝!하는 굉음에 치솟는 불기둥
그 생명들은 찰나에 잿덩이가 됐다
그 어처구니 없는 죽음 앞에
산 자들 옷깃을 여미고 숙연해진다.
그리고 오열한다
"오 주여, 이것이 무슨 뜻이옵니까?"
비극적 너무나 비극적인 죽음들
산 자들은 무상 허무를 되씹으며
그 언젠가는 자신들에게도 닥칠
「그 날」을 생각하고 우울해진다
너도 나도
있는 자도 없는 자도
언젠간 모두 가야 하는 길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도 경험해볼 수 없는 세계
산 자들 사유의 영역을 넘어선 세계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숱한 언어들
생각하면 할수록 회의만 깊어진다
일순에 잿더미가 된 이백여 생명
그 허무 그 무상을 보면서
산 자들은 앙탈한다 거부하려 든다
나(我)가 저렇게 될 수는 없지…
영혼 불멸설 생명 윤회설
종교가 산 자들에게 복음을 준다
육체는 썩어 한 줌 흙이 될 망정
영혼은 영생 또는 새 생명이 된다고
그러나 인간 理性은 묻는다
지금 「나」의 이 얼굴이 없고
이 두 팔이 없고 이 두 다리가 없는
그같은 「나」를 상상할 수 있느냐고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사는 날까지 살다가
가는 날 되면 가는 거죠"
생사를 초월한 듯한 어느 여인의 말
"사람이 죽은 후엔 어떻게 됩니까?"
제자의 죽음에 공자는 대답한다
"이놈아, 생전의 일도 다 모르고
다 못하는데 왜 죽은 후를 걱정하느냐"
죽음을 일컬어 "돌아갔다'고 한다.
영어권에선 "Passed Away'
생명이 이승을 「통과」, 멀리
어디로 "되돌아간다"는 것일까
「살아 있다」는 자체가
「죽음에 이르는 병」 앓는 과정
앙탈하지 말고 거부하려 들지 말고
겸손히 「그 날」을 맞을 수밖에…
지구상에 인류 출현 이래
억겁에 걸쳐 태어났다 사라지는
그 무한수의 생명들
나도 그 중의 하나 물방울인 것을…
"아, 좋다 (Das ist gut)!"
칸트가 임종때 남겼다는 말
언젠가 「그 날」 나도 말할 수 있을까
"It is good!"이라고
산 자들의 바램은 「그 날」이 오면
하루 일 끝내고 잠들 때 같이
한(恨) 없는 편안함 속에
「영원한 잠」이르는 것이련만…
<97. 8. 20. 『미주朝鮮』 및 『서울大동창회보』>
X X
두 '큰 죽음'의 엘레지
-------------------
두 '큰 죽음'을 맞아
온 세상이 슬퍼한다
생명·죽음에 크고 작음이 있으련만
산 사람들이 그렇게 가늠한다
대영제국의 세자빈 다이애나
한창 나이에 비극적인 생의 마감
'빈자의 어머니' 테레사
천수·소임을 다하고 이승을 떠났다
이 세상 부귀영화 한 몸에 지니고
호화사치 한껏 누리면서도
한 여인으로서 인간적인 고뇌에
몸부림리면서 '톡톡 튀던' 다이애나
부유한 가정을 저버리고
세속의 행복과는 아예 담 쌓은채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위해
여든 일곱의 평생을 바친 테레사
애처로운 한 죽음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거룩한 또 다른 죽음은
우리의 영혼을 애이게 한다
새장같은 가정을 뒤쳐나간 노라처럼
'지옥같은 왕실'을 뛰쳐 나와
숱한 남성편력 한편으로 자선봉사활동
밉고 고운 두 얼굴을 가졌던 '백설공주'
"가난한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기쁨"을
그렇게도 간절히 호소하면서
온 몸으로 이를 실천한 세기의 성녀
어찌 보면 성(聖)과 속(俗)의
차원 다른 두 삶과 죽음
허나,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두 '큰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할렘을 찾은 텔레사를 뒤쫒아가
"힘을 내세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격려하던 아릿따운 다이애나
암환자 손을 덥썩 쥐고 눈물짓던 그녀
"여성의 본분은 가정을 사랑이
넘치도록 하는 일이다"라고 말해온
텔레사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으리라
"좀더 참고 순종했어야 옳았는데…"라고
'백설공주'의 그 자유분방했던 남성편력
단순한 애정 행각을 넘어 선
낡은 권위·허위·가식에 가득찬
왕실에 대한 반발·도전이 아니었을까
여권론자들은 그녀에게 박수를 친다
왕세자는 남자이기에 외도가 용인되고
세자빈은 여자이기에 외도가 매도되고
'시대착오적인 넌센스'를 그녀가 깼다고
87세 천수를 다하고 선종한 테레사
"그동안 그만큼 수고 했으니
이제 그만 편히 쉬어라"는
하늘의 부름을 받고 간 거룩한 죽음
잇딴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다
불의의 사고로 36세 짧은 삶을 마친
'대중의 우상'의 비극적인 죽음
그 죽음에도 무슨 뜻이 있을까
자유주의론자들은 말하리라
인간에게 굴레를 씌우는 '역사의 유물'이
그녀의 '삶과 죽음'으로
이제 크게 흔들리고 있지 않느냐고
세자빈도 가고 성녀도 가고…
두 '큰 죽음'을 보면서
살아있는 범인(凡人)들은 눈물지며
인생의 무상 허무를 또 되씹는다
<97. 9. 11. 『미주朝鮮』>
X X
선거 別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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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판났네 살판났네 / 우리씨알 살판났네
비누 치약 수건 신발 / 선거철엔 모두 공짜
중국요리 서양요리 / 내 돈 없이 실컷 먹네
살맛나네 살맛나네 / 우리씨알 살맛나네
내일이면 우리 상전 / 구십도로 허리굽혀
"잘 부탁 합니다" / "불편한 것 없습니까"
신명나네 신명나네 / 우리씨알 신명나네
내몫 앗아 가진 자들 / 움켜쥔 돈 절로 풀고
콧대 높은 힘센 자들 / 내 한표에 꿈뻑 죽네
비나이다 비나이다 / 우리씨알 비나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 일년 열두달이 선거철
내일도 그들 오늘 같게 / 신령님께 비나이다
뿌린다네 뿌린다네 / 선거자금 흥청망청
금뺏지에 눈먼자들 / 일천 삼백 오십명
머리당 육억 칠억 / 줄잡아 일조원
묻지마소 묻지마소 / 우리씨알 묻지마소
꿈도 못꿀 엄청난 돈 / 어디서 나왔느냐?고
재벌·정치 한통속 / 정경유착 잘 해먹네
즐거우네 즐거우네 / 우리씨알 즐거우네
일조원 일조오천억 / 종이같이 뿌리는 돈
부의 분배 구실하네 / 사회정의 한몫하네
올은 말씀 바른 말씀 / 씹을수록 단맛나네
여당간부 내밭은 말 / "돈 없인 정치못해
"그런 시댄 지났다" / 빈손 씨알 기막히네
모르겠네 모르겠네 / 수수께끼 못 풀겠네
금뺏지 세비 백만원 / 열두곱에 네곱해야
'일당'엔 턱도 없네 / 그런데도 아귀다툼
판을 치네 판을 치네 / 봉건시대 매관매직
민의 등진 「전국구」 / 십당 이십당 불러대도
어중이에 떠중이 / 구름같이 모여드네
우롱마소 우롱마소 / 우리씨알 우롱마소
「보통사람」 웃기더니 / 「나는 바보」 구호 등장
십만선량 바보라면 / 바보뽑는 「바보」런가
멀었구나 멀었구나 / 민주주의 멀었구나
관권·금권·탈법선거 / 되고보자 먹고보자
주먹싸움 각목싸움 / 긴 한숨 절로 나네
눈을 뜨세 눈을 뜨세 / 우리씨알 눈을 뜨세
우리 살길 민주주의 / 우리 손에 달렸다네
팔린 한표 빗간 한표 / 민주주의 멀어지네
<주 : 1조 5천억은 대통령 선거 때 뿌려진 돈>
<88. 4. 22. 『미주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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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부: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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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正義… 그 理想과 現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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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假想 토론) : 金泰吉 교수와의 대담
# 문제의 뿌리는 하나-
▲장 : 교수님의 역저 '한국인의 가치관 연구'를 잘 읽었습니다. 학교를 떠난 후 줄곧 상식의 세계, 아니면 기껏해야 매스컴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고 생각하다가 오랜만에 학술 논문, 그것도 현재 우리 나라의 여러 가지 현실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글을 읽게 되니 여러 모로 새삼 깨닫는 바가 많았습니다.
△ 김 교수 : 그 책 서문에서 말했듯이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기 마련이지만, 특히 오늘날 우리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어려운 문제들에 부닥치고 있지요. 그런데 이 여러 가지 문제들의 근본을 따져보면 같은 뿌리에 연유하는 여러 갈래의 문제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문제들 하나 하나가 갖는 특수성에 따르는 개별적인 처방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공통의 뿌리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 해결이지요.
이 기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내지 행동양식, 즉 가치관이 바로 잡혀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낡고 혼란된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어 지금 이 심각한 난국을 극복하기에 적합한 정신의 자세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장 : 교수님의 그 말씀은 곧 지금 우리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고 있는 숱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정신 자세 내지 행동양식을 바로 잡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으로 해석되는데, 오늘은 교수님이 저서에서 주로 다룬 이 가치관 문제와 사회 정의 문제를 좀더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김 교수 : 너무 광범위한 이야기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는지…
# 삶의 보람, 자아 실현-
▲장 : 우선 교수님은 저서에서 인생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개개인의 삶의 보람을 각자의 '자아실현'에 두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공동체가 만드는 모든 제도 또는 체제는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이 자아 실현을 돕는 수단 내지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고 강조하셨는데, 자아실현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 좀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 김 교수 : 인간 누구에게나 가장 절실한 것은 자기 자신이지요. 따라서 나의 육체를 건강히 잘 관리 보유하고 또 타고난 소질을 한껏 발휘하면서 정신적으로 개성 있는 인격으로 성장하는 일, 이것이 곧 삶의 보람이자 '자아실현'이 되는 것이지요.
개인의 이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우선 그 개인이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식주를 위한 물질이 필요한 것이고, 또 소질의 발휘와 인격의 성장을 위해서는 인간이 자유의 존재이니 만큼 자유가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요.
따라서 개인들이 그들의 공동이익을 위해 만들어낸 정치제도, 경제 체제, 사회조직은 모두 그 구성원 개개인의 이 '자아실현'을 돕고 보조하는 수단으로서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개인의 자아실현을 이야기할 때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인간의 삶의 의미는 꼭 성취된 업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성한 설계를 따라서 목표를 향해 살아가는 그날 그날의 생활 과정, 그 자체 안에서 삶의 보람과 가치는 매일 매일 실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 이민자의 정신 방황 -
▲장 : 교수님의 그 말씀은 한 개인의 이상, 나아가서 인류의 이상이라는 점에서는 논의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막상 현실로 눈을 돌려 구체적인 개개인의 경우를 살펴보면 너무나 막연한 이야기가 아닌지 우려됩니다.
당장 밥 세 끼가 어려운 사람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오늘날 한국 실정으로 볼 때 최소한 의식주 해결에 온 시간과 온 정력을 쏟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사람들, 그래서 정신적인 면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수님의 그 말씀이 어느 만큼이나 어필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특히나 생소한 남의 나라 땅에 이민 와서 사는 많은 동포들의 경우, 우선 이 땅에서 의식주 해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어느 정도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 막혀 '외곽지대'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삶의 보람 또는 자아 실현을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는지 몰라 방황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김 교수 : 그런 사람들에게 나로서 하고 싶은 한 마디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건, 태어난 자국 땅이 아닌 남의 나라에 나가 살건 간에 그들이 인생의 궁극 목표로 추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아니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일상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의 행위가 추구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대개의 경우, 그 자체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보다 높은 다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의를 가졌을 뿐이다" 라고.
이렇게 볼 때에 빈부와 관계없이, 그리고 그 사는 땅이 어디가 되었건, 어떤 사람이 인생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또 이것이 곧 그 사람의 행동과 사람됨을 좌우하는 기본 요소이자 그 사람의 삶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지요.
▲장 : 교수님은 인생의 목적과 과정에 관하여 말씀을 하셨는데 각 개인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또는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설정은 참 어려운 일이고,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을 사는 인간으로서 오늘의 생존을 위해 그날그날 눈만 뜨면 부닥치게 되는 숱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처리하다 보면 삶의 궁극목표가 무엇인지, 좀더 쉬운 말로 하면 '왜 사는지' 모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 아닌가 합니다.
# 내면적 가치와 외면적 가치-
다음으로 교수님은 저서에서 개인의 행복 또는 '자아실현'과 관련,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가치관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로 보시고 저서에서 이를 중점적으로 다루셨는데 그 이야기를 좀…
△김 교수 : 가치의 본질이 무엇이냐, 심리학적 가치설(Psychological Value Theories)이냐, 아니면 실재론적 가치설( Realistic Value Theories)이냐, 하는 등의 학술적인 논의는 오늘은 피하기로 하지요. 쉽게 이야기해서 가치란 우리 인간욕구의 대상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돈, 명예, 권력 그리고 건강, 사랑, 지식 등 이런 것들이지요.
▲장 : 교수님은 이 가치들을 '내면적 가치' (또는 인간적 가치)와 '외면적 가치' (또는 물질적 가치) 두 가지로 구별하시고 '내면적 가치'의 우월성을 매우 강조하셨는데…
△김 교수 : 인간은 육체와 정신 혼성으로 되어 있어 어디까지가 육체적인 것이고 또 어디까지가 정신적인 것이냐 하는 분리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요. 다만 여기서는 편의상 돈, 명예, 권력, 관능의 쾌락 같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 또는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되는 것을 '외면적 가치'라 부르고 생명, 건강, 인격, 지식, 예술, 우애 같은 우리 인간 내부에 있는 것의 보존 내지 구현 같은 것들을 '내면적 가치'라고 부르기로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내면적 가치'보다도 '외면적 가치'로 달리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사실에 있지요.
# 경쟁성 강한 가치
▲장 : 무슨 말씀인지 좀더 설명을…
△김 교수 : 첫째, 돈, 권력, 명예 같은 '외면적 가치'는 그 수가 한정되어 있어 강한 경쟁성이 있는 가치들이지요. 이의 획득을 위해서 치열한 경쟁에 열중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타인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수단으로서 간주하게 되지요. 특히나 오늘날 우리 나라 같이 도의심의 바탕이 허약한 풍토에서 전개되는 경쟁은,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폐단을 동반하기 쉬우며 경쟁이 과열하면 할수록 자기가 세운 삶의 궁극 목적까지도 망각하고 눈앞의 승리에만 급급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같은 치열한 경쟁은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서 극히 중요한 사회적 협동을 크게 저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로 '외면적 가치'는 페리(R. B. Perry)가 말한 대로 포괄성이 적은 가치들이어서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반면 학문, 예술, 스포츠, 우정, 평화 등 '내면적 가치'는 경쟁성이 없거나 매우 미약하고, 또 이런 가치들은 타인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파트너로서, 더불어 같이 향유할 수 있는 포괄성이 넓은 가치들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소수의 욕구 충족보다는 다수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 같은 포괄성이 넓은 가치를 가치 체계의 우위에 놓아야 하는데 오늘날은 이것이 전도되어 있는 상태이지요.
그리고 셋째로, 이 '외면적 가치'들은 '내면적 가치'에 비해 지속성이 짧은 가치인데, 오늘날은 지속성이 짧은 가치가 지속성이 긴 가치 보다 우위에 있는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지요.
이상과 같은 이론적인 분석으로 볼 때 사람들을 무자비한 경쟁의 도구로 만들지 않고, 또 소수보다는 다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그리고 또 지속성이 긴 '내면적 가치'가 '외면적 가치'보다 우위에 놓여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지요.
▲장 : 이론적으로 너무나 옳은 말씀입니다만 교수님께서 이 분석에서 한 가지 등한시하신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 말입니다.
교수님은 돈, 권력, 명예 같은 것은 그 수가 한정되어 있어 경쟁성이 강한 가치라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의 본성으로 보아 남이 안 가진 것을 갖고 싶고, 희귀한 것을 추구하게 되고, 또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합니다.
# 가치관의 전도
인간의 본성이 이러한데 어떻게 오늘날 사람들의 '전도된 가치관'을 바로 잡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 하니까 論敵 볼테르가 "이제 인간이 다시 네 발로 기기엔 너무 늦었다"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만, 오늘날 사람들의 물질만능, 배금주의 풍조는 이제 좀처럼 극복하기가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김 교수 : 참 어려운 문제이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 듀이(Dewey)같은 민주주의 논자들은 교육을 통해서 개발된 도덕심 내지 지성의 힘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반면 니버 (Reinhold Niebuhr)같은 사회철학자들은 우리가 인간의 도덕성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 인간관계에 국한되며 단체의 이기심에 대해서는 도덕이나 지성은 극히 무력하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따라서 내 생각으론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제도의 개혁과, 가정교육 및 사회교육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인간교육, 이 두 길을 아울러 추구해야 하겠지요.
▲장 : 교육만 해도 그렇습니다. 백지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이 곧장 부딪치는 주위 환경이 온통 물질 만능, 배금주의 풍조 일색인데, 인간을 그런 사회와 완전히 격리시켜 교육하지 않는 한 곧바로 그 같은 풍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론 교육과 더불어 어떤 강제적인 제도장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만인의 '자아 실현'
다음으로 교수님은 개인의 행복 및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어느 특수층 소수만의 것이 아니고 만인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정의, 곧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는데 좀 더 설명을 해주시기를…
△김 교수 : 사회 정의를 이야기할 때에 그 토대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신념에서 출발합니다. 이를 좀 더 부연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같이 존귀한 존재이며, 그 존귀한 인간들이 모두 그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 가면서 안녕과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가졌으며. 국가와 사회는 그 모든 성원들의 안녕과 행복을 최대 한도로 실현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는 신념입니다.
그러면 사회정의의 내용이 무엇이냐, 아니 어떤 내용이어야 하느냐, 또는 어떤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이냐 하는 정의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프랭케나(William K. Frankena)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사회정의의 탐구의 과정이다" 라고 말했듯이 인류는 지금까지 이를 탐구하고, 또 어느 정도 실현도 됐습니다만, 아직도 그 정의가 애매하고 또 그 실현이 요원한 것이 이 사회정의 문제인 줄 압니다.
▲장 : 저 역시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전개, 보다 범위를 좁혀 우리 나라의 문제로 보아도 오늘날 젊은 대학생들이 5천여 년 역사 동안 버림받아오던 밑바닥 계층 사람들, 소위 민중들의 인권 또는 민중의식을 부르짖고 나오는 이 시점에서, '인간 모두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이 사회정의의 문제는 이제 우리가 피해서는 안될 절박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말씀을 계속해 주십시오.
# 존 라울즈의 사회 정의론
△김 교수 :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 어떠한 사회가 사회정의를 이룩한 공정한 사회이냐를 말하기 전에, 어떠한 사회가 공정치 못한 사회이냐를 설명해 보기로 하지요.
철학자 존 라울즈(John Rowls)는 사회 정의의 두 가지 원리로서 자유와 평등을 손꼽았지요. 우선 자유의 문제부터 이야기해보기로 하지요. 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에 있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를 좀더 부연하면 첫째로, 모든 사람은 자유를 누리는 정도에 있어서 어떠한 차별대우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즉 일반 민중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자유를 특정인에게 허용하거나, 일반인에게 허용된 자유를 특정인에게 제한하는 것은 불공정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로, 보다 큰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떠한 자유의 제한도, 비록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적용되는 제한이라 할지라도 이는 공정한 일이 못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지요.
존 라울즈가 말하는 자유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자유인 정치적 자유, 언론과 집회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말하는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자유를 문서상으로만 보장하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누릴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는 주장이지요.
# 문서로만 보장된 자유
▲장 :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지금 한국 사회가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이냐, 아니면 불공정한 사회이냐, 하는 것이 자명하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김 교수 : 그 다음 존 라울즈는 사회정의의 두 번째 원리로서 평등의 원칙을 말했지요. 그에 의하면 사회적 경제적 불균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있어 왔지만 사회정의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었을 경우에만 국한된다는 주장이지요.
첫째로 그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그 사회의 모든 성원이 이로운 결과를 얻으리라는 것이 사리를 따라 예견될 수 있어야 하고, 둘째로 그 불평등한 분배에 있어서 보다 큰 몫을 차지할 수 있는 지위나 직무는 항상 모든 성원에게 공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존 라울즈는 사회 정의의 세 번째 원칙으로서 모든 지위와 직무에 대한 기회의 균등을 손꼽았지요. 즉 유리한 지위 또는 직무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주어지지 않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위나 직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주어져야 하며, 능력 이외의 다른 요인이 지위나 직무를 결정함에 있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교육의 기회도 역시 그 사람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서 주어져야지 그 밖의 다른 요인, 즉 경제력 등에 의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결정되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지요.
# 토지 개혁 단행해야
▲장 : 교수님의 설명으로 '공정한 사회' 또는 '정의로운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사회 정의의 개념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정의 문제에 대해 저로서는 깊은 연구는 없습니다만, 50여 평생 살아오는 동안 터득한 한 가지 신념이 있습니다.
즉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자칫하면 오해를 살 여지가 있습니다만 저의 소신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 나라같이 땅은 좁고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사회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토지의 공유화 내지 국유화가 필수적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그가 딛고 설 땅, 다리를 뻗고 누워 잠잘 수 있는 면적의 땅을 소유할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같이 인구의 절대 다수에게 그들이 설 땅, 누워 잠잘 수 있는 면적의 땅이 주어지지 않는 반면 몇몇 소수들은 수 십만 수 백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정의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전 국토를 국유화 또는 공유화 한 후에 그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가들이 연구해야 할 과제이겠지만, 저로서 지금 언뜻 생각나는 것은 토지의 소유권 아닌 점유권 내지 사용권만을 인정, 점유면적의 크기, 또는 사용 용도에 따라 그 점유료 또는 사용료를 세금 형식으로 거둬 들이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사회정의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재산의 상속 제도를 폐지해야 합니다. 꼭 '빨갱이'이어서가 아니라 이 재산의 상속은 '만인은 평등하다'는 민주원칙에 너무나 어긋나는 구시대의 잔재이기 때문입니다.
# 재산 상속제 없애야
이를 좀더 부연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모두가 적수 공권입니다. 아무 것도 갖고 오는 것이 없는 빈 손 입니다. 그야말로 평등한 출발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부모를 잘 만나게 되면 수 억, 수 십 억의 재산이 불로소득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자기의 노력, 재능과는 아무 관계없이 전혀 우연적으로 인간의 불평등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모순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역사적으로 볼 때, 계급 제도가 없어지고 따라서 신분계승도 지위양위도 다 없어진 오늘날, 오직 한 가지 구시대의 유물로 남아있는 것이 이 재산의 상속인 것입니다.
따라서 상속제도를 폐지, 부는 당대에 그치게 함으로써 인간 누구나 이 세상에 삶을 받는 그 날부터 동등한 조건하에서 인생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사회정의 정신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지금 우리 나라같이 민중 절대다수가 생존을 위한 의식주 문제가 불확실한 나라에서는, 인간생존에 직접적으로 필요치 않은 일체의 사치품, 예를 들면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 류, 밍크 같은 모피 류, 이런 사치성 물품들은 전체 민중의 생활이 어느 정도 확고히 안정될 때까지, 그 판매 및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했으면 어떨까 합니다.
한 쪽에서 민중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의식주가 충족되지 않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인간생존에 그다지 필요치 않은 이 같은 사치품에 수 백만 원, 수 천만 원씩 쓴다는 것은 또한 사회정의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 : 조만간 그런 방향으로 가야하고 또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되겠지요. 다만 성급하게 모든 것을 일시에 고치려고 하면 부작용의 문제가 너무 커지지요.
▲장 : 그러면 화제를 다시 교수님 저서로 돌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는 과연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 특히 지금 한국의 상황으로 이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떠한 방법이 있겠는지, 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균형 잃으면 불안정
△김 교수 : 우선 정치의 민주화가 선행해야 되겠지요. 정치의 민주화를 정치인들이 솔선해서 해준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기대하기가 어렵지요. 따라서 민중의 민주의식이 높아짐으로써 정치인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외면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하는 일은 어느 나라에서나 필요할 겁니다. 결국은 民度의 문제, 교육의 문제로 귀착한다고 할까요.
▲장 : 오늘날은 정치 만능의 시대이니 만큼 저로서는 정치하는 사람들, 권력 잡은 사람들의 멸사봉공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싶은데 오늘날 한국의 정치상황으로 보아 그 같은 기대는 연목구어 격의 헛수고밖에 되지 않나 싶습니다.
△김 교수 : 나로서도 오늘날 한국의 지배계층이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희생하면서까지 사회정의 실현에 헌신할 것으로는 기대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즉 균형을 잃은 사회는 불안정한 사회라는 것, 안정을 잃은 사회는 폭동, 정변, 전쟁 따위의 큰 변동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니스 굴렛(Danis Goulet)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군중은 새 질서를 마련 할 자신이 없다 하더라도 묵은 질서를 산산이 파괴할 것이다" 라고.
따라서 지배계층이 그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상의 권력, 그 이상의 축재, 그 이상의 사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것을 지금 당장은 어느 정도 희생하더라도 균형된 사회발전을 이룩함으로써 사회적 격변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들이 깊이 고려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장 : 끝으로 교수님은 지난 번 정년 퇴직 기념 강연에서 '현실로부터의 윤리학'이란 말씀을 하셨는데…
△김 교수 : 이제 정년을 맞는 마당에서 지난 40여 년의 학구생활을 돌이켜 볼 때에 모든 것이 책에서 시작해 책에서 끝났다는 생각이 깊습니다. 윤리학이 인간의 현실적인 행동규범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윤리학을 전공한 나로서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래서 이제 남은 시간, 남은 여생을 우리의 '현실로부터의 윤리학'에 쏟겠다는 마음을 새삼 굳히고 있습니다.
▲장 : 오랫동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87. 6. 3. 『뉴욕日報』>
X X
미국 家庭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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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의 사회진출
# 노동력의 49%가 여성
오늘날 미국 여성들은 일하기를 즐긴다.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가정 바깥에서 직업을 갖고 일을 하고 있다.
73년 말 현재 직업을 갖고 있는 미국 여성의 수는 3천 650여만 명에 달하는데 이 숫자는 16세 이상 전 여성의 49%를 차지한다. <통계①)>즉 16세 이상 여성 두 명중 한 명은 「풀 타임」(42%) 또는 「파트 타임」직업을 갖고 있다.
이 같이 많은 미국 여성들이 직업을 갖고 있는 첫째 이유는 물론 경제적 자립 내지 협조를 위해서다. 미국의 많은 여성들은 남편의 수입만으로 생활이 쪼들릴 때 「바가지」를 긁기보다 가급적이면 자기가 돈벌이에 나선다. 또 나서기만 하면 쉽게 직업을 구할 수 있게끔 그 사회구조가 되어 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큰 이유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여성의 재래적(在來的)인 본분 즉 집에서 어린애를 키우고 가사를 돌보는 주부의 역할만으로 만족치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어머니가 되고 가정 주부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여성은 지적(知的) 낙오자로 간주될 정도이다" 라고 주장하는 어느 여권(女權) 운동자의 말이 미국의 전체 여성은 아니지만 많은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것 같이 보인다. 즉 그들은 이제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정에 보다 사회 활동에서 더 찾으려 하며 또 발견하는 것 같다.
# 직업에 남녀가 없다
이 같이 거의 남성의 숫자와 맞먹는 많은 미국 여성의 사회 진출은 남자가 바깥에 나가 돈벌이를 하고 여자는 집에서 어린애를 키우며 가사를 돌보는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을 여러 면으로 바꾸어 가고 있는데, 이들은 또한 이제 각종 직업에 있어서 남녀의 구별을 점차 없애가고 있다. 즉 지금까지 남성만의 직업 또는 여성이 가져야 할 직업이 따로 있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거의 사라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남자들만의 직업으로 인식되어온 여러 직종에 여성들이 크게 침투하고 있다.
이제 미국선 여자가 대부분의 스쿨 버스를 운전하는 것이나 거대한 트럭 또는 트랙터를 많은 여자가 모는 것 같은 것은 별로 신기한 모습이 아니다. 여자가 전주에 올라가 전화를 가설하는가 하면 (AT&T에 수천 명) 탄광 갱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마다 않는다.
또한 남성만의 직업으로 알려진 FBI에 27명의 여자 수사관이 있는가 하면, 남자 교도소에 여자 경비원이 있고, (「마사추세츠州」) 미국 전역적으로 감리교 등 각 교파에 730명의 여자 목사가 있으며 여자 열차 기관사, 여자 소방서원에 여자 해군 파일로트도 있다.
특히 미 정치사상 「여성의 해」로 불려진 74년 11월 중간선거 때는 각종 연방, 주, 시 등 정부 직에 무려 1천 300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출마했었다. 주지사에 13명(1명 당선) 상/하 연방 의원에 120명, 주정부직에 823명이 나섰었다. <통계②>
한편 미 연방정부 기관에는 사무직원 140여만 명 중 그 41%가 여성들인데 (73년 말 집계), 이같이 여성의 능력이 남성보다 못한 것이 없으니 남자가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여자들도 할 수 있다 (<도표1>참조)는 미국 여성의 대거 사회 진출은 이제 또한 지금까지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오던 근무상의 우대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한 예로「워싱턴 D·C」와 「뉴욕」시경 산하 1천여 명의 여자 경찰들은 남자 경찰과 똑같이 권총을 휴대, 가두 순찰에 나서는가 하면 야간 경비를 담당하며 또한 여자 소방서원들은 화재 현장에 출동, 남자와 똑같이 진화 작업에 나선다.
◇ 남자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수
<도표 1>
미국 여성의 이 같은 사회 진출은 남녀 고용 평등권을 법으로 규정한 미 27차 개정 헌법(71년 하원통과·현재 상원계류 중)과 이에 근거, 보건성·교육성·사회복지청이 마련한 그 시행령에 크게 힘입고 있는데 그 규정을 대충 살펴보면-
① 고용에 있어 남녀를 차별 못한다.(일부 주(州)에선 이력서나 구직 신청서에 성별 표시를 못하도록 되어 있다)
② 동일한 직종엔 남자와 동일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회사에 따라선 예산의 일정액을 여자 종업원을 위해 별도 책정한다.)
③ 동일한 경력엔 남자와 동일한 승진을 부여해야 한다는 등으로 되어 있다.
# 여성범죄 또한 급증
미국 여성의 이 같은 대거 사회 진출과 더불어 최근 수년동안 미국선 또한 여성 범죄가 부쩍 늘어나고 있어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74년 9월 FBI 통계에 의하면 73년도의 경우 FBI가 횡령, 방화, 불법무기 소지 등 중범(重犯)으로 체포한 범인 총 650여만 명 중 그 15.3%가 여자로서 범인 6명 중 한 명 꼴인데, 특히 절도·사기범은 세 명 중 한 명이 여자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여자에 의한 강도 사건이 무려 2만4천여 건이나 발생했으며 (<도표 2> 참조) 지난 70년도에는 FBI가 최고 흉악범으로 현상 수배한 범인 10명 중 4명이 여자였다.
이 같은 여성 범죄 증가에 대해 「시카고大」「로렌스 Z. 프리드만」교수는,
"오늘 날 여성의 범죄는 「핸드백」날치기나 백화점에서 상품 들치기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 그들은 여기에 폭력을 가미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작년 「심비온이스 아미」(Symbionese Army)사건 때도 「패트리샤 허스트」양 등 여자가 다수 관련되고 있어, 더욱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었다. 미국 여성들에 의한 이 같은 범죄 증가는 지금까지 여성이기 때문에 때로 받아오던 「법의 관용>이 없어져 남녀의 구별 없이 판결이 내려지고 있는데, 한 통계에 의하면 지난 5년 동안에 여자 수형자(受刑者)가 81%나 증가, 현재 여자 교도소가 모자라 남자 교도소를 이용할 형편이라 한다.
◇ 여성범죄 증가율(체포자수)
<도표 2>
◇ 남녀 비 범죄 증가율(1960∼73)
# 이혼「러시」
세 정상(頂上)이 모두-
다 알다시피 미국 「포드」대통령 부인「베티」여사는 「포드」와 재혼한 여인이고, 부통령「록펠러」부부는 안팎이 다 같이 본남편과 부인은 물론 어린애까지 두고 각각 이혼한 후 재혼한 부부이며, 또한 국무장관「키신저」 역시 어린애를 둔 전부인과 이혼, 현재 「낸시」여사와 재혼한 사이다. 그러니까 미국의 최고 정상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 부통령, 국무장관이 모두 사생활에 있어선 초혼(初婚)으로 원만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다.
또한 몇 년 전 「프랑스」여대생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성'으로 미국남성들이 뽑힌 일이 있다. 그 이유는 "이혼을 요구할 때 가장 잘 받아 준다'는 대답이었다.
# 세 쌍에 한 쌍 꼴
위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이 수년 래 미국에선 이혼이 너무나 격증하고 있다. 지난 73년도의 경우 1년 동안에 227만 7천명이 결혼한 반면 91만 3천명이 이혼을 했다. 그러니까 결혼 2.5쌍에 한 쌍이 파경한 셈이다. 작년(9월말 현재)엔 다시 73년에 비해 6%가 증가한 95만 6천명이 이혼한 것으로 집계 되었는데,결혼은 73년에 비해 오히려 5만 1천명이 줄어 이혼율은 결혼의 42.5%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최근 수년래 미국의 이혼율을 보면 70년도에 71만5천명, <도표 3> 71년도에 76만8천명, 72년도에 83만9천명으로 해마다 크게 늘어나고 있는데<통계③> 전문가들은 금년에도 1백만 명 이상이 이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으며 이 같은 추세에 어떤 획기적인 제어책이 없는 한 불원간 미국 전 결혼가정의 40%가 이혼으로 <'유에스 앤드 월드 리포트' 지에서>
해체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평균 결혼 연령은 남자가 23세, 여자가 21세로 되어 있는데, 이를 좀 더 통계적으로 분석하면 여자 27∼32세 사이의 부부 중 30%가 파경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결혼 20년이 넘는 부부의 38%가 이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이혼으로 해서 73년 말 현재 미국의 성인(18세 이상)중 결혼을 했다가 이혼 또는 이혼한 경력(재혼을 의미함)이 있는 숫자는 1천 5백만 명, 미국 전 결혼부부의 21%에 달하고 있으며, 이혼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재혼을 하지만 재혼의 경우 5쌍 중 한 쌍은 또다시 이혼으로 끝나고 있다고 한다.(통계④·재혼의 경우 어떤 사회학자는 많은 재혼남성이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성과 결합함으로써 젊은 남자들은 그들에 알맞은 나이의 여자를 구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최근 수년래 결혼 및 이혼
<도표 4> <단위 천, 74년은 9월 현재>
<「세계연감」에서>
이같이 성행하는 이혼이 오늘날 미국에서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데 왜 이같이 이혼이 급증하는가?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앞으로의 전망은 무엇인가?
사회학자들, 정신의학자들, 가정문제상담 전문가들간에 여러 가지로 분석이 되고 많은 논의가 있다. 이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 현재 미국의 많은 고등학교(90%)에서는 학생들에게 결혼생활에 대한 예비지식 및 그 훈련을 쌓게 하기 위해 남녀 학생을 짝지워 가계부를 적게 하는 등 소위 '가상(假想) 결혼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위스콘신」대학 등 많은 대학에서는 이혼 또는 이혼 후에 따르는 정서적, 재정적, 법적 문제를 다루는 강의를 정규 '커리큘럼'에 넣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마사추세츠」주의회(州議會)에서는 결혼 서약서에 앞으로 몇 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할 것인가, 그 기간을 명시하도록 하는 한 법안을 토의한 일이 있으며, 심지어 정부당국과 보험업자들은 이혼남녀의 생활안정을 위해「이혼보험」제도까지 추진하고 있을 정도인데 다음에 이렇게 성행하는 이혼의 원인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을 종합해 보기로 한다.
# 이혼의 원인
첫째는 의식의 변화다. 결혼·이혼에 별로 윤리의식을 개입시키지 않는 관념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결혼은 남녀가 각기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계약, 그 계약은 또한 어떤 필요에 의해서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어떤 가정문제 상담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개탄하고 있다.
"오늘날은 누구나 행복을 주장한다. 직업이 불행하면 직업을 바꿀 수 있다. 얼굴이 불행하면 「플라스틱」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꿀 수 있다. 그리해서 배우자와 행복치 못하면 딴 사람을 찾을 수 있다"
둘째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다.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여성이 자기의 힘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생활능력이 이혼을 용이하게 한다. 이혼 후 여자가 활동을 못하면 딸린 어린이들 포함, 정부에서 최소한의 생활비는 지급한다.
셋째는 성(性)의 자유개방 내지 성「모랄」의 붕괴다. 남녀 다 같이 인간본능의 하나인 성적욕구를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니더라도 큰 불편 없이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 풍토, 또 그러한 행위에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성 윤리, 이러한 환경에서 이혼이 성행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넷째는 여성의 「아이덴티티」를 가정 바깥에서 찾자는 여권(女權)운동의 물결이다. 그들은 "가정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것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를 찬양하며 또 이를 부채질한다.
다섯째는 이혼법의 간소화다. 현재 미국 23개 주에서는 상대방에 법적 제재를 받을만한 이유 없이도 이혼을 가능케 하는 소위 「무과실 이혼」(No-Fault Divorce)법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이혼을 원하는 사람들은 종종 국내의 까다로운 이혼법과 비싼 변호사 비용을 피해 해외로 나가는데 단 5분간의 진술로써 이혼이 법적으로 성립되는 남미「하이티」섬엔 요즘 1년에 몇 십만 명 씩 미국 남녀가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자가 보기엔 현대인의 「에고이즘」을 또한 들지 않을 수 없다. 남편도 아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이도 「나」아닌 별개의 생명체, 「그」를 위해서 「나」를 조금도 희생할 수 없다는 개인주의 사고가 또한 이혼을 쉽게 생각게 하는 것 같다. 불만스러운 결혼이지만 '어린이 때문에 참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는 동양의 희생 정신(?)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 「싱글」의 문제
오늘날 미국에선 이같이 급증하는 이혼으로 남녀가 각각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한편, 이와 아울러 처음부터 아예 독신주의를 고수하는 남녀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어 또한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한 통계<통계⑤>에 의하면 현재 미국 전 성인(18세 이상)남녀 중 혼자 살고 있는 「싱글」의 수는 4천 300여만 명으로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독신으로 되어 있다. 이 중 2천 200여만 명은 미혼(25세∼65세 사이 4백만 명)이고 2천 100여만 명은 이혼, 별거, 사별(死別)한 사람들인데 이를 다시 연령별로 보면 25세∼54세 사이의 「싱글」이 1천 400만, 55세 이상 「싱글」이 1천 500만, 18세∼24세 사이가 1천 400만 명이다.
이렇게 많은 미혼 또는 이혼으로 생긴 「싱글」들이 또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여자가장(家長)의 급격한 증가다. 미 상무성 조사에 의하면 73년 말 현재 미국에서 독신 여자가 가족을 부양하는 여자 가장의 수는 무려 660여만 가구, 8 가정 중 하나 꼴에 이른다. <도표 5> 전통적인 가부장적(家父長的) 가족제도의 입장에서 볼 때 이상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부모들의 이혼으로 또는 결혼 전 출산으로 너무나 많은 미국 어린이들이 그들을 낳아준 부모 밑에서 자라
<「유에스&월드리포트」지에서>
나고 있지 못한 사실이다. 즉 74년도 미 인구조사에 의하면 18세 이하 어린이 중 900여만 명이 아버지(父) 또는 어머니(母) 어느 한쪽 밑에서 자라고 있다. 800여만 명이 홀어머니 밑에서, 그리고 다른 80여만 명이 홀 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있다. 이를 또 다른 각도에서 분석하면 미국에는 어린이를 가진 남녀 독신가정이 420만, --60년이래 양친 가정 증가율에 비해 7배에 달한다--어린이가 있는 가정 7중 한 가정은 어느 한쪽 부모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미국의 '고아 아닌 고아'의 수는 증가 일로에 있는 이혼의 추세로 보아 앞으로 더욱 그 수가 불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코넬」대학교 사회심리학 「유리 브론펜 브래너」교수는,
"아마도 미국은 어린이 양육「패턴」에 있어 불원간 중대한 변화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를 「비(非)어린이 양육」(Nonchild Rearing)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위와 같은 문제 이외에 이 「싱글」들의 많은 수가 변태적인 「호모」행위를 하며 또한 실직·자살율이 높고 또 이들의 상당수가 교도소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등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링」없이 동거
오늘날 미국 주로 학원 도시의 중산층 출신 20∼30대 젊은 남녀들 간에는 소위 「링」없이 동거 생활을 하는 것이 널리 유행되고 있다. 이들은 약혼도 않고 결혼도 않고, 그냥 동거 생활을 한다. 약혼·결혼을 함으로써 뒤따르는 여러 가지 가정적, 사회적, 도덕적 구속을 기피 내지 거부하려는 것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남녀 공동기숙사 제도를 실시하는 「코넬」대학교와 「펜실바니아」대학교의 경우 기숙사 학생의 약 30%가 이같이 「링」없는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70%가 남녀 공동 기숙사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 전 대학엔 이같이 「링」없이 동거하는 학생들이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특히 최근 수년래 그 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어 또한 문제가 되고 있다.
즉 이같이 「링」없이 동거하는 사람들의 수효가 지난 60년에 공식 보고된 것은 불과 1만 7,000여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70년엔 14만 3천명으로 늘어났다. <통계⑥)> 즉 10년 동안에 이들의 수효는 700%가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 동안에 결혼증가율은 겨우 10%였다. 젊은이들의 이 같은 풍조는 "죽을 때까지 우리를 갈라놓지 말도록" 하는 결혼 선서를 한 후에만 남녀가 동거 생활을 할 수 있는 전통적인 윤리에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는데 이런 생활을 하는 어느 젊은이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사물이 영구적이라는 것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있습니다. 지금 나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그녀를 영구히 사랑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누구도 자신의 영구적인 감정을 모르는데 말입니다" 한편 이 같은 젊은 세대의 풍조에 대해 그 부모들은,
"우리는 그것을 찬성치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결혼을 했으면 훨씬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우리와 다르게 사물을 본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지요" 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부모는 "인간은 일정한 법규와 규칙 그리고 전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세상은 큰 혼란이 온다. 앞으로 언제인가 그들은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 같은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원인에 대해 학자들과 정신의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고 있다.
① 전통적인 윤리 특히 성 윤리에 대한 큰 회의
② 결혼의 필요성을 의심케 하는 이혼의 격증
③ 여권(女權)운동의 영향
④ 임신 중절 및 단산 수술의 보급.
# 어린애를 원치 않아
오늘날 미국은 이민(연 40만 명)등 외부로부터의 유입(流入)을 빼면, 그리고 사망(73년 200여만 명)과 출생 (73년 310만명)의 괴리에서 오는 인구 증가를 고려치 않는다면 인구 성장은 당국이 목표로 하는 「제로 인구증가」(Zero Population Growth)를 달성하고 있다.
최근 인구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산아율(15세∼44세 사이 가임 <도표6> 여성의 평균 산아 수)는 72년도에 인구 균형유지선인 2.25, 73년도엔 1.902, 74년도 전반기 6개월엔 1.870으로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현재 미국의 4세 어린이는 5세 어린이 보다 50여만 명이 적으며 다시 3세 어린이는 4세 어린이 수 보다 50여 만 명이 또 적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산아율이 이같이 인구 균형유지선 이하로 떨어지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데 <「타임」지에서> 이 같은 미국의 산아 감소는 오늘날 많은 병원의 경우 산과(産科)가 적자로 허덕이며, 교육계에서는 아동부족으로 시설과 교사(敎師)가 남아돌고, 산업계에서는 장난감 등 대(對) 어린이 산업이 타격을 받는 등, 또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왜 어린이들이 이렇게 줄어가는가?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 하나 또는 둘만을 낳고 피임 또는 단산수술 등 가족계획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인데, 한 조사에 의하면 70년 말 현재 영구 단산수술을 <통계⑦>
이 단산수술에 있어 젊은 부부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요즘 미국의 젊은이들 중에는 또한 아예 어린이를 원치 않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패시픽'대학생을 상대로 한 조사에 따르면 결혼후 무자녀를 원하는 학생은 65년도에 제로였던 것이 70년엔 6%로 증가하고 있으며, 또다른 조사에 의하면 18세∼24세 사이 부부 중 무자녀를 원하는 비율은 67년도에 1.3%에서 72년엔 3.69%로 증가했고, 25세∼29세 사이 부부는 2.2%에서 4%로 증가하고 있다.
# 性解放의 현실
얼마전 제2의「킨제이」보고라고 불리는 한 조사보고가 발표되었다. 「죤 홉킨스」대 연구「팀」이 「랜덤」방식에 의한 전국 240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 의하면 -
미국의 19세 이하 미혼녀 30%가 성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연령별로 보면 15세 소녀의 14%가 성 경험을 했고, 16세 소녀의 21%, 17세 소녀의 27%, 18세 소녀의 37%, 19세 소녀의 46%가 결혼 전 성 경험을 하고 3천400명의 기혼부부를 상대로 한 「템플」대 조사에 의하면 조사 대상 4명 중 1명이 혼외정사(婚外情事)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젊은 26세∼30세 사이 부부 등은 3명중 1명이 혼외 정사의 경험이 있었으며, 20명 중 한 명은「스와핑」(Swapping) 즉 남편 또는 아내를 서로 바꾸어 가면서 성을 즐긴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최근 「커넷티커트」대 조사에 의하면 결혼 문제상담자 470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남편 또는 아내를 바꾸면서 성 경험을 한 1천 200명의 기혼부부를 목격했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상의 여러 통계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미국의 성 해방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데, 또한 미국 전역에는 몇 백명 씩의 회원을 갖고 있는 수 십 개의「누드」촌이 있으며, 어떤 곳엔 「섹스클럽」이라고 해서 부부를 서로 바꾸면서 성을 즐기는 곳이 합법적으로 영업 행위를 하고 있다. 또한 성 문제 치료 병원에선 의사들이 도색영화는 물론 「그룹 섹스」, 배우자 바꾸기, 매춘부 소개 등의 방법을 이용하고 있으며, 작년 여름에는 「캘리포니아」 서해안 해수욕장에 나체 수영객들이 부쩍 늘어나 시 당국서 이의 단속법을 마련하기까지 했다.
또한 미국에선 성교 회수가 얼마나 잦은가를 알아보는 여론조사가 공공연히 실시되는데「프린스톤」대 인구문제연구소가 4천 600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 의하면, 65년도 평균 월 6.8회에서 70년도엔 8.2회로 증가했으며, 연령별로는 19세 이하가 월 11.6회, 44세는 월 5.2회로 나타났다. 또한 「플레이보이」지가 미국의 남녀 대학생을 상대로 한 조사에 의하면 여학생들의 순결이 급속히 사라지는데 반해, 오히려 남학생들의 동정(童貞)은 늘어 결혼전 성경험이 남녀가 비슷한 비율로 되어 가고있다.
이 같은 미국의 성의 개방은 어디에 원인 하는가?
복잡한 역사적 사회적 요인이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엔 성에 대한 관념의 변화 즉 윤리 의식의 퇴조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은 인간의 본능, 그 본능 충족에 연령의 제한을 가하는 것은 인간성의 억압이라는 쾌락주의의 만연과 결혼의 관계에서만 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재래의 윤리가 이제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그 구속력을 잃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미국의 성 윤리의 타락에 대해 「발가벗은 유랑인」의 저자「죠지 F. 길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질서의 붕괴는 금력이나 권력의 불평등보다 훨씬 더 비참한 사회적 병폐와 부정의를 초래하게 될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성질서의 붕괴가 이미 미국사회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성 윤리의 붕괴는 그 부작용으로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또한 너무나 많은 난행 사건을 야기하고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73년도의 경우 미국 전역에서 공식 보고된 난행사건은 5만 1천여 건이 발생, 68년에 비해 60%가 증가했다. 당국은 이 숫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 희생자들이 신고치 않는 경우가 많아 10명 중 1명이 보고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캘리포니아」주 경우엔 매 20분마다 한 건의 난행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한다.
# 미국가정 어디로 가나?
일부일처(一夫一妻)를 기본단위로 하는 오늘의 핵(核)가족제도는 인류가 지금까지 시험해 온 것 중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확립된 가족제도임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남녀가 일정한 연령이 되면 일정한 의식을 거쳐 결혼, 남자는 사회에서 돈벌이를 하고 여자는 가정에서 어린애를 키우며 가사를 돌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가족제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에선 이 같은 가족제도가 여러 면에서 큰 시련 내지 변화를 겪고 있다.
최근 어느 신문사가 시행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미국의 가정이 크게 변화했다고 보는가?" 하는 설문에 응답자의 86%가 "그렇다" 고 긍정하고 있는가 하면, 「로퍼」기구(Roper Organization)에서 실시한 "미국의 가정이 10년 전 보다 더 견고해졌는가? 아니면 더 약화되었는가?" 하는 조사에서는 "더 견고해 졌다"가 6%인 반면 "더 약화되었다"가 70%를 차지하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미국 여성들의 태반이 가정바깥에서 직업을 갖고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여성의 본분, 즉 집에서 어린애를 키우며 가사를 돌보는 주부로서의 역할을 등한시하게 되거나 경우에 따라선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이혼이 결혼 세 쌍에 한 쌍 꼴로 격증하고 있다. 이혼은 곧 가정의 파탄을 의미하며 많은 가정의 파탄은 다시 그 사회 체제의 변화를 뜻한다.
또한 많은 성인 남녀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으며, 또한 많은 어린이들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 밑에서 자라나고 있지 못하다. '현대문명의 고아' 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그들 자신의 정서적인 변화는 물론 여러 가지로 사회체제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이 전통적인 의식을 거친 결혼을 않고 동거생활을 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종족유지 본능인 어린애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가고 있다.
이상의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학자들, 종교학자들, 정신의학자들, 가정상담 전문가들간에 많은 논의가 되고 그 원인과 앞으로의 전망이 분석되고 있다. 이 중 일부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크게 우려, "미국의 가정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시카고」대학교 신학교수 「마틴 E. 마티」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은 재래적인 결혼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 문화의 중절(中絶) 기간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깊숙히 문화적인 혁명 속에 놓여 있어 재래적인 형태의 가정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진실로 만족스러운 그 대체물도 아직 발견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
<통계 ①> The World Almanac 75년판
<통계 ②>「National Women's Political Caucus」발표
<통계 ③)>The World Almanac 75년판
<통계 ④> George F. Gilder 저 「Naked Nomad」참조
<통계 ⑤>「Parade」誌 74년 8월 25일자
<통계 ⑥> U.S. Census
<통계 ⑦> National Fertitility Study
<75. 5. 『女性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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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子爐 과연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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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에너지 不足으로 허덕이는 오늘날 인류는 현 단계로선 부득불 核에너지 개발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人類 歷史이래 「제3의 불」로 등장한 原子爐는 불과 15년 남짓한 짧은 역사(註 1)에도 불구하고 현재 많은 問題點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의 근원은 말할 것도 없이 가공할 위험을 지닌 우라늄을 그 연료로 쓰기 때문인데 요즘 美國에서는 원자로의 安全性 여부가 크게 문제화, 학자들간에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가 하면 원자로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거기서 부산물로 나오는 核廢棄物이 급증, 그 安全管理가 또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73년 1월말 현재 美國에서 가동중인 원자로는 모두 29개 (總發電量 1천 4백 68만 3천 kw), 건설중인 것이 57개 (總 發電量 5천 12만 5천 kw), 계획중인 것이 76개 (總 發電量 7천 9백 54만 9천 kw)인데 그 建設 計劃이 발표될 때마다 또는 그 하나가 착공될 때마다 贊反학자들, 環境保護論者들, 사회학자들, 그리고 인근 주민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논쟁의 골자는 간단하다.
"이 원자로는 과연 안전한가?"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들 -美原子力委員會(AEC)-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밀한 과학적인 데이터 分析, 그리고 그 종합으로 나온 결론으로 원자로는 안전하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추리할 수 있는 모든 사고에 대비해서 완벽한 설계, 완벽한 재료, 완벽한 工程을 거쳐 원자로를 건설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과학기술을 신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 원자로를 반대 내지 비평하는 많은 사람들- 「스턴그라스」박사, 「랄프 네이다」등--은 AEC의 이 같은 주장을 반박한다.
"원자로가 절대 안전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자들의 先驗적인 假定이다. 과학적 분석으로 아폴로 13호, 오하이오 鐵橋, 일렉트라 飛行機는 모두 100% 안전했다. 과학자들은 과학적으로 있을 수 있는 모든 사고에 대비, 조금의 오류도 없이 그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1970년 4월13일 아폴로 13호는 酸素탱크가 폭발, 세 우주인의 생명을 빼앗았고, 1967년 러시아워에 오하이오鐵橋가 무너져 수많은 차량들을 강물 속에 쓸어 넣었다. 그리고 일렉트라 비행기는 시험비행 때부터 3대나 날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냈다. 과학적 결론으로서는 「不可能」한 것이 현실로서는 「可能」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떻게 원자로가 100%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원자로 자체의 안전 문제에 잇따라 또한 그 연료로 쓰이는 우라늄의 생산·가공·수송 단계서부터 이를 연료로 쓰고 난 후에 나오는 核 廢棄 物質의 처리 등이 또한 문제가 되고 있다. 많은 열과 放射能을 계속 방출하는 이 핵폐기물질의 영구적인 안전한 처리법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AEC는 이를 美國 全域 이곳 저곳 지상에 저장 해두고 있는데 그 양이 증가됨에 따라 또한 위험도가 높아 가고 있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 같은 원자로 자체의 안전여부, 核廢棄物의 안전처리 등 많은 문제를 지닌 가운데, 美國에서는 계속 원자로가 하나씩 건설되어 가고 있는데 73년 5월 美國의 消費者 保護 챔피온인 「랄프 네이다」가 AEC를 상대로 현재 가동중인 원자로 20개에 대해 "옛날 잠정적인 안전기준에 의해 가동허가가 났다. 따라서 현재 기준에 의하면 많은 위험성이 존재한다" 는 이유를 들어 가동 중지를 건의하자 AEC는 요즘 "현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그만한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고 이를 묵살했다.
宇宙船의 사고는 불과 세 명의 생명을 빼앗아 갔지만 오늘날의 원자로는 점점 그 규모가 커지고 있어 자칫 잘못으로 너무나 가공할 위험(註 2)을 가져올 수도 있는데, 오늘날 인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과연 그만한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는가? 國內 최초의 原子力 發電所(蔚山) 준공을 75년으로 앞두고 있는 우리로서 '만의 하나' 대비책을 위해 요즘 美國서 벌어지고 있는 이 같은 원자로의 많은 문제점들을 하나씩 다루어 보기로 한다.
(註 1) 1957년 펜실바니아州에 건설된 쉬핑포트 1호기가 美國 産業用 原子力 發電所의 효시다.
(註 2) 1957년 AEC의 한 報告書에 의하면 원자로의 큰 사고가 나면 卽死 3천 4백 명, 부상 4만 3천명, 재산피해 70억 달러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또한 최근 한 末完成 報告에 따르면 현재 뉴보올드 아이슬란드에 건설중인 원자로의 2배 규모의 原子爐가 큰 사고를 일으키면 死亡 4만 5천명, 재산피해 1백70억 달러에 이르고 펜실바니아州만한 전지역이 放射能에 오염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 우라늄
우라늄은 은백색의 結晶性 금속 원소로 天然으로 존재하는 원소 중 그 무게가 가장 무거운데 14 종의 同位元素를 갖고 있다. 이 중 질량수 235는 中性子를 흡수하여 原子 核分裂을 일으켜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한다. 원자로는 이 우라늄 235를 그 원료로 쓰는데 원자탄에 쓰이는 것도 이 우라늄 235이다.
원자로에서 이 우라늄은 許容誤差(tolerance)까지 분말로 된 圓柱형의 작은 알맹이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조금의 흠도 없는 合金 로드에 넣는다. 이 우라늄이 든 로드는 길이가 보통 12피트 가량 되는데 「보통물을 冷却劑로 쓰는 원자로」(輕水爐=light water reactor)에는 약 4만 개의 로드, 1천여의 우라늄 二酸化物을 포용할 수 있다.
이만한 양의 우라늄이라면 原子彈 1백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지만, 원자탄에 쓰이는 것은 순수우라늄 235이나 원자로에는 우라늄 235를 약 3% 밖에 포함하고 있지 않은 天然 우라늄을 쓰므로 원자탄 같은 규모의 폭발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우라늄은 분열되면서 9백여 가지의 放射性 同位元素를 방출하는데 그 대부분은 곧 그 방사성이 없어지지만 어떤 것들은 人體에 안전한 수준이 되려면 수 백년이 지나야 한다.
방사능은 大量이 아니면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되지 않으나 그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오랫동안 체내에 축적되면 生殖細胞를 파괴하는 등 피해를 일으킨다.
한편 원자로에서 우라늄을 분열, 그것을 연료로 쓰고 난 후에 남는 소위 核廢棄物도 방사능이 있는데, 이 핵폐기물은 베타微粒子와 감마線을 방사한다. 특히 핵폐기물은 테크네티움, 루테니움, 세리움 같은 치명적인 방사성 동위원소를 갖고 있어 수년간 특수 탱크에 저장했다가 응고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데 스트론티움과 세시움 같은 同位元素를 지닌 핵폐기물은 응고시킨 후 적어도 6백여 년 동안을 안전히 저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원자로의 기본 문제는 그 연료로 쓰이는 우라늄이 이상과 같이 방대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고, 또한 人體에 해로운 방사능을 방사하는가 하면, 그것이 단시일 내에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야기되는데, 다음에 현대 원자로에 있어 가장 위험한 부분이 어디인가를 살펴본다.
# 冷却劑 喪失 事故
원자로를 간단히 살펴보면 두 가지 중요한 요소로 구성된다. 방대한 열을 내는 燃料(즉 우라늄)와 다시 그 열을 식히는 冷却劑다. 현재 美國에서 가동중인 원자로는 거의가 그 냉각제로 보통 물(産業用語로는 light water라고 함)을 사용한다.(註 3).
보통 물을 냉각제로 쓰는 원자로에는 두 가지 型이 있다. 하나는 '웨스팅하우스', '바브코크 윌콕스', 그리고 '컴비숀 엔지니어링會社'가 만든 것으로 「壓縮水 原子爐」(PWR=Pressurized Water Reactor)이고, 다른 하나는 '제너럴 일렉트릭會社'가 만든 「熱水 原子爐」(BWR=Boiling Water Reactor)이다.
「壓縮水 原子爐」나 「熱水 原子爐」나 둘 다 그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즉 우라늄을 분열시킴으로써 나오는 열이 물을 스팀으로 변화시키고, 그 스팀이 터빈을 돌림으로써 發電을 한다.
그런데 「壓縮水 原子爐」에서는 이 과정이 두 단계를 거친다. 즉 원자로의 核心部는 수 많은 우라늄이 든 燃料 로드가 있는데 물은 위에서 흘러 내려와 이 로드 사이를 U字形으로 돌아 올라간다. 이 물은 1평방 인치당 2천 2백 50 파운드 까지 압축되는데 이 壓縮度는 곧 물이 스팀 이전 상태에서 화씨 6백도, 로드 내부의 온도는 溶液 狀態인 화씨 4천 1백 도나 된다.
이같이 압축된 물은 파이프를 통해 스팀 제너레이터로 흘러가 물의 열이 제 2단계의 후프에 전달되면서 물은 증기가 되고 이 증기가 발전기를 돌린다.
한편 「熱水 原子爐」는 오직 한 단계만 거친다. 즉 1평방 인치 당 1천 파운드로 압축된 물이 核燃料 로드가 밀집된 원자로 핵심부로 흘러 들어간다. 이 물은 화씨 5백 54도로 까지 덥혀져 곧장 증기가 되고 이 증기가 터빈을 돌린다.
「壓縮水 原子爐」나 「熱水 原子爐」의 안전문제에 있어 학자들간에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은 이 같은 물의 상반된 두 가지 기능 때문이다. 즉 물이 高溫으로 되어 증기가 되는가 하면 또한 그 물은 核燃料 로드가 있는 高溫의 원자로 핵심부를 일정한 온도로 식히는 냉각제 역할을 또한 동시에 해야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원자로에 있어 어떤 잘못으로 파이프가 파열, 高溫의 물 또는 증기가 외부로 마구 쏟아져 나오는 이른바 「冷却劑 喪失事故」(LOCA=Loss of Coolant Accident)가 발생한다면 원자로 핵심부는 일순간에 물이 마름과 동시에 가공할 정도로 온도가 올라가고 高溫化된 원자로는 예기할 수 없는 위험을 가져오게 된다.
전문가들은 이 「冷却劑 喪失事故」를 흔히 「양날 斷頭臺 破裂」(Double-Ended Guillotine Break)이라고 부르는데 이 같은 사고의 가능성에 대해 AEC는 "그런 사고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많은 과학자들은 "그런 사고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AEC는 주장하기를 이 같은 사고가 나면 「非常 核心部 冷却裝置」(Emergency Core Cooling System)가 즉각 작용, 원자로 핵심부에 非常 冷却劑가 충분히 모여들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반대자들은 이 같은 사고가 날 경우, 이 「非常 核心部 冷却裝置」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리라고 주장한다. 즉 이 비상 냉각제가 원자로 핵심부에 도달하기 전에 핵심부는 그 온도가 화씨 2천 7백도까지 올라가고 핵연료 로드와 스팀 장치에 化學反應을 일으켜 많은 水素를 방출하면서 점점 高熱化, 다시 수분 내에 핵심부는 화씨 4천도까지 올라간다. 이렇게 겉잡을 수 없이 온도가 고열화 되면 드디어 원자로 핵심부가 녹아 내리면서 1백t 가까운 放射能 불덩이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이 같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궁극적인 피해가 어느 정도까지 이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 할 수 없는데 現代 原子爐에 있어 과연 이 같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原子爐 비평가들은 불행한 일이지만 이 같은 사고의 可能性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AEC는 이 같은 사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대단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이를 반박한다.
첫째, 지금까지 그러한 사고가 없었다.
둘째, 非常 核心部 冷却장치가 성공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AEC가 다짐하는 것은 원자로의 品質保證 즉 재료 하나, 설계 하나에 조금의 오류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규제하는 한 AEC 책임자에 의하면 "지금까지 재래적인 發電所는 원자로 安全 基準에 의하면 그 어느 하나도 건설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원자로의 접속 하나, 그것을 만드는 재료 하나 하나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한다. 장치 하나하나는 超音波 및 뢴트겐으로 검사한다. 「양날斷頭臺破裂」이 일어날 확률은 原子爐 年度 (reactor year=註 4) 2만년에 한 번 밖에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AEC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회의를 표시한다.
첫째, 지금 건설중 이거나 앞으로 건설될 原子爐는 종전 것 보다 그 규모가 훨씬 커지고 있다. 규모의 尨大化는 새로운 예기치 않은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둘째, 현재 原子爐 建設業者 (産業用語로 vendor) 및 그 시설이 AEC의 고도의 品質 保證 基準에 부합되고 있지 못하다. 즉 AEC의 기준대로 원자로가 건설되고 있지 않다.
원자로는 워낙 큰 위험성을 간직한 우라늄을 그 연료로 사용하느니 만치 그 설계 하나, 재료하나, 장치 하나에 빈틈없는 만전을 요하는데 이에 대해 AEC의 다른 한 관계자도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원자로의 品質 保證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계속 기술자의 質, 설계와 재료의 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지금 대부분의 産業用 原子爐의 운영자들은 이 같은 원자로의 複雜 多端性에 대해 만능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원자로의 이 「양날 斷頭臺 破裂」에 대한 과학자들의 논쟁은 지금까지 실제로 그러한 사고가 발생한 경험이 없으니 만치 어디까지나 학자들의 이론 투쟁인데 그렇다고 어느 쪽이 옳은가를 실험하기 위해 건설한 원자로를 파괴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한편 AEC는 이렇게 원자로 안전 장치의 안전 문제가 크로즈 업 되자 지난 70년 美國 굴지의 安全裝置 契約會社인 '에로제트 뉴클리어會社'로 하여금 조그마한 模型 原子爐로 이 非常 核心部 冷却 장치에 대한 실험을 실시케 했는데 당시 그 보고서는 "根本적으로 ECCS 냉각제는 원자로 핵심부에 도달하지 못한다" 고 되어있는가 하면, 또한 71년 12월 '오크리지 國立實驗硏究所'에서 실시한 컴퓨터 분석으로도 ECCS에 몇 가지 결함이 발견 됐다고 보고되어 있다.
현대 원자로에 있어 가장 위험한 부분은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이 원자로 핵심부의 냉각장치인데 그 다음 위험한 요소 중의 또 하나는 安全 발브이다.
원자로 하나에는 보통 6백 개 내지 1천 개의 안전 발브가 쓰이는데 AEC 報告에 따르면 지난 72년 도에 두 원자로 중 하나는 이 안전 발브가 고장을 일으켜 크지는 않지만 냉각제 流出事故를 일으켰다고 한다.(註 5).
(註 3) 高溫의 개스 冷却劑를 쓰는 원자로도 있으나 美國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다.
(註 4) 原子爐 年度란 원자로 1개가 1년 동안 쉬지 않고 가동된 것을 原子爐 年度 1년으로 본다. 따라서 원자로 2백 개가 1백년 동안 계속 가동해야 原子爐 年度 2만년이 된다.
(註 5) 이렇게 安全 발브 事故가 갖자 AEC는 현재 원자로 발전소로 하여금 이 安全 발브의 질을 증명할 수 있는 증빙서류를 제출케 하고 있다.
# 無限暴彈…核廢棄物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이 원자로 자체의 안전문제에 이어 현대 원자로에 있어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여기서 부산물로 나오는 核廢棄物의 처리문제다.
원자로는 보통 2년마다 그 연료인 우라늄의 일부를 갈아넣어야 하는데 이 우라늄 代替 作業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주의를 요하는 난작업이다.
우선 高熱化된 우라늄이 든 핵연료 로드를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원자로 핵심부를 냉각시키기 위해 약 3주전에 가동을 중지한 후 충분한 물이 핵심부에 고이게 한다. 제거된 核燃料로드는 다시 열과 방사능을 감소시키기 위해 6개월 동안 물 속에 넣었다가 강철과 콘크리트로 만든 특수통(보통 무게가 10t 내지 1백t 가량)에 담는다. 이렇게 처리된 核廢棄物을 우선 안전히 수송하는 것이 큰 문제인데 현재 美國은 이를 트럭, 열차 및 거룻배 등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그런데 그 輸送量이 점차 증대됨에 따라 또한 사고의 기회가 증가되고 있어 AEC의 줄기찬 다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핵폐기물의 安全 輸送문제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즉 이 핵폐기물을 아무리 特殊 物質로 만든 통 속에 담는다 해도 그 성능이 많이 남아 있는 우라늄 廢棄物은 계속 높은 열과 적거나 많거나 방사능을 방출하고 있어 아무리 안전 수송에 만전을 기한다 해도 언제 어디서 어떠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핵폐기물 통의 어떤 것은 表面 溫度가 화씨 1백 8십 도나 되어 사람의 몸이 닿거니 引火物質이 근접하면 불이 붙을 수 있는 高溫의 것을 그대로 수송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같은 수송 방법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 같은 우려는 지난 72년 8월 10일 核廢棄物을 실어 나르던 열차가 아이다호州 블랙포트에서 탈선하는 사고(註 6)가 발생하자 더욱 높아져 그 후 美國 이곳 저곳 지방에서는 핵폐기물을 실어 나르는 열차 또는 트럭의 통과를 적극 반대하고 나서는가 하면 AEC는 이 수송 문제를 철도국에 인계하려 하지만 철도국은 인원 예산 부족을 핑계로 이를 거부하고 있다.
한편 AEC는 原子爐의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오는 75년까지는 8백 21t , 80년까지는 2천 4백 11t, 2천년 대 까지는 3만 2천7백 77t의 核物質을 美國 內 여기 저기로 수송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데 AEC 수송 담당 책임자도 이 같은 많은 핵물질의 安全 輸送 問題에 대해 "문제는 수송 도중 용기에서 방사능 유출을 포함한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겠느냐가 아니라, 그런 사고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수송 문제에 잇따라 우라늄 폐기물의 더욱 큰 문제는 이의 안전한 貯藏 내지 처리 방법인데 아직까지 이의 영구적인 安全 處理法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AEC는 이를 지상 이곳 저곳에 쌓아놓고 있어 그 양이 점점 증가함에 따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가 또한 커가고 있다.
73년 9월말 현재 美國에서는 36 개의 상업 발전용 원자로 이외에 많은 원자력 발전선, 1백 1개의 핵 잠수함, 5개의 핵 군함, 그리고 AEC와 각 대학 및 개인 연구소가 운영하는 99개의 小型 原子爐에서 많은 핵폐기물이 나오고 있는데 AEC가 직접 관리하는 아이다호州 등 세 곳의 貯藏 탱크에만도 약 8천 4백 50만 갤론의 高性能 核廢棄物이 쌓여있다(註 7).
그런데 이중 어떤 것은 앞으로 5백년 내지 1천년 동안 사람을 죽일 수 있거나 또는 人體에 해로운 방사능을 계속 발산하고 있어 이의 안전 처리 방법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AEC는 현재 이의 영구적인 안전한 처리방법으로
㈎ 우라늄 廢棄物이 담긴 특수 물질로 만든 통을 물이 스미지 않는 鹽田 밑에 묻는다.
㈏ 이것을 태양 또는 태양계 밖으로 쏘아 버린다.
㈐ 地下 10m 깊이에 특수한 방법으로 구멍을 뚫어 매장한다.
㈑ 위험한 同位元素를 보다 안전한 元素로 변환시킨다(註 8).
㈒ 江 三角州 또는 북극 등 해저 깊숙이 버린다는 등 여러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확실성 내지 실현성 여부에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이리해서 AEC는 현재 핵폐기물을 酸性溶液(acid solution)에 섞어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통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데,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이 핵폐기물은 계속 放射能과 고도의 열을 발산하고 있어 아주 정교한 熱交換裝置로 이를 계속 냉각시키지 않는 한, 점차 用器를 녹이면서 방사능이 외부로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註 9).
한 예로 73년 6월 AEC 관장 하에 있는 워싱톤州 핸포드의 우라늄 廢棄物 貯藏탱크에서 11만 5천갤론의 液體 核廢棄物이 탱크 밖으로 유출된 사고가 있었는데 당시 美科學發展協會 기관지 「사이언스」는 이 사고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저장탱크 106-T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많은 양의 액체우라늄 廢棄物이 땅 속으로 스며들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기술자들은 대략 지난 4월 20일 경부터 유출되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그 후 51일 동안 계속 매일 약 2천5백 갤론의 액체 核廢棄物이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저장탱크에서 새어 나왔다. 그 동안 사우스 캘로라이나, 아이다호 등 다른 고성능의 核廢棄物 저장탱크에서도 유출 사고가 있었지만 이번 106-T탱크의 경우는 전의 사고와 다른 심각성을 지닌다. 이번 사고는 美 原子爐 역사상 단일 규모로선 가장 큰 유출사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美國 전역 이곳 저곳에는 많은 放射能을 계속 방출하는 핵폐기물이 지상에 쌓여있고, 이중 어떤 것은 용기를 점차 녹이면서 외부로 방사능을 유출시키는 것도 있어, 美國의 일부 사람들은 이를 앞으로 수 백년 동안에 걸쳐 눈에 안 보이게 서서히 사람을 죽여 가는 「無限爆彈」이라고 부르기까지 하는데 이에 덧붙여 外國에 원자로를 건설하는 美國회사들은 1954년 제정된 美原子爐法에 따라 그 우라늄 폐기물을 다시 美 國內로 가져오기로 계약을 맺고 있어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반대, "美國이 방사성 물질의 처리소가 될 수 없다."고 항의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註 6) 다행히 우라늄이 든 통이 큰 충격을 받지 않아 큰 피해는 없었다.
(註 7) 기타 개인소유 貯藏所가 6군데나 있다.
(註 8) AEC는 앞으로 우라늄 폐기물을 再生, 核燃料로 재사용할 계획인데 뉴욕州 웨스트 벨리에 있는 再生工場은 개조를 위해 현재 運休중이고 일리노이州 모리스에 있는 새 공장은 年內 가동 예정이며 사우스 캐롤라이나州 바안웰에는 새 再生工場을 건립중이다.
(註 9) 현재 방식으로 방사능이 安全 基準이 될 때까지 보관하려면 核廢棄物 1갤론 당 1백 달러 이상이 소요된다고 한다.
#「스턴글라스」博士의 硏究報告
피츠버그대학교 의과대학 放射線物理學 연구실장 「어니스트 스턴글라스」박사는 원자로가 인근 주민에 미치는 영향을 오랫동안에 걸쳐 연구·분석, 지난 72년 12월 그 결과를 발표한 바 있는데 이 報告에 따르면 원자로의 피해가 엄청나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고 있다.
「스턴글라스」박사는 AEC가 美國에서 지금 까지 건설된 원자로 중 그 安全度에 있어 "가장 안전하다"고 査定한 바 있는 '쉬핑포트原子爐'가 핵분열 때 나오는 核落塵이 인근 주민들의 건강·생명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사실들을 들고 있다.
㈎ 원자로 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兒 死亡率이 70년도의 경우 1천 명 중 43.9명 꼴로 펜실베니아州 내에서 가장 높다(其他地域은 평균 20.2명).
㈏ 영아의 肺虛脫症 등 각종 질병률이 64년도에 10만 명 중 20.3명이던 것이 70년도엔 53.9명으로 증가했다.
㈐ 早死兒率은 64년도에 州내에서 51위이던 것이 70년도엔 제 4위가 되었다.
㈑ 白血病 환자가 64년도에 주내에서 34위이던 것이 70년도엔 3위가 되었다.
㈒ 72년 2월 조사에 의하면 核發電 때 부산물인 沃素 131이 이 지역에서 판매되는 우유에 있어 1 당 1백 21 피코큐리가 검출되었다 (AEC규정에 의하면 최고 許容限度가 1백피코큐리).
㈓ 수개월에 걸친 토양 검사 결과 발전소에서 가까운 지역일수록 방사능 함유량이 높고 먼 지역일수록 함유량이 적다.
「스턴글라스」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核分裂 때 나오는 '스트론티움 90'이 포함된 核塵이 발전소 인근 지역에 떨어져 각종 植物을 오염시킨다. 그 후 젖소가 이 방사능에 오염된 채소를 먹으면 젖소의 우유가 이에 오염되고 다시 방사능은 사람들의 체내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스턴글라스」박사의 주장에 대해 AEC와 발전소 측은 스턴글라스 박사가 잘못된 가정 하에 데이터를 왜곡·수집함으로써 그러한 결과가 나왔다고 반박하고 있으나, 카네기 멜론대학교 모리스 드그루트 교수 등 일부 학자들과 피츠버그시장 등은 스턴글라스 박사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스턴글라스」박사는 피츠버그에 있는 '왈츠 밀즈 核物質實驗用' 원자로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통계를 발표한 바 있는데 '왈츠 밀즈'의 경우 지난 60년 4월 원자로가 과열되는 사고가 있었을 때 공기와 하천에 적어도 5천 큐리의 방사능이 발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近來에 있었던 事故들
㈎ 엔리코 페르미 原子爐 (미사간州 소재 70년 준공)
1억 2천 4백만 달러를 들여 건설된 이 원자로는 준공 후부터 核燃料로드가 녹아 내리는 등 사고가 연발, 간헐적으로 가동하다가 현재는 運休중인데 그 처리를 에워싸고 AEC와 投資會社들이 큰 골치를 앓고 있다. 4년째 운휴 중인 이 원자로를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다 하여 이를 해체키로 하고 그 경비로 4백만 달러의 예산까지 책정해 놓고 있으나 AEC는 지금까지 원자로를 해체해 본 경험이 없어 과연 안전하게 이를 해체할 수 있을런지에 대해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이 원자로는 核分裂로써 물을 덥혀 물이 증기가 되고 그 증기가 터빈을 돌리는 「熱水式」(Boiling Water Reactor)이 아니라 플루토늄을 만든 후 이 플루토늄을 연료로 해서 물대신 液體 나트륨을 덥히는 「增殖式」(Breeder Reactor)인데, 이 원자로에서 나오는 수 천 갤론의 나트륨은 강한 휘발성뿐만 아니라 방사능이 있어 앞으로 20년 동안 이 방사능이 지속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 이 방대한 양의 나트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 우라늄 235가 든 3천여 개나 되는 核燃料 로드를 어떻게 할 것인가?
㉢ 핵분열에 쓰인 高溫의 원자로 핵심부 기관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에 중지를 모으고 있으나 지금까지 안전한 처리방법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못 보아 解體 作業에 착수지 못하고 있다.
㈏ 오이스터 크리크 原子爐(뉴저지州 소재·69년 준공)
72년 12월 오퍼레이터가 自動 計器를 잘못 판단, 안전 발브가 열려 물 5만여 t이 고도의 毒性 크로메이트 (chromate=원자로기관 腐蝕 防止劑로 쓰임)에 오염이 되었다. 이 사고로 열흘 동안 원자로 가동을 중단 (註 10) 했었는데 그 후 오랫동안 이 오염된 물을 그대로 강이나 하천에 방수할 수 없고 크로메이트와 방사능을 제거, 물을 淨化해야 하는데 AEC는 99.9%의 정화를 지시, 발전소 측은 그 정도까지 세밀히 측정할 수 있는 계기조차 없는 현 단계에선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 팽팽히 맞섰었다.
그 후 또한 인근 강에서 수 천 마리의 물고기가 갑자기 즉은 사고가 있었는데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이 原子爐事故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 安全발브 터져 死亡
72년 말 '버지니아 전기회사' 소속 '서레이 원자로 發電所'에서 안전 발브가 터져 기사 2명이 사망했다.
또한 지난 71년 뉴욕州 온타리오에 있는 '지나 원자로'에서는 우라늄덩이가 燃料 로드 안에서 내려앉아 로드 안에 갭이 생기는가 하면 많은 로드가 구부러지거나 찌그러지는 사고가 있었는데 이를 즉각 발견, 위기를 모면했다.
㈑ 칼스바드 核廢棄物 處理場
AEC는 현재 지상에 쌓아놓고 있는 핵폐기물을 뉴멕시코州 칼스바드 지방 鹽田밑에 매립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중인데 '사우스 웨스트 硏究情報센터' 등 環境保護團體들이 "우리는 美國의 방사물 쓰레기장이 될 수 없다"고 반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반대이유는,
㉠ 핵폐기물의 鹽田 埋立이 지진 때 균열이 안 생기고 보통때는 물이 안 스며 안전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직 學說이지 실제의 경우가 아직 없다.
㉡ 현재 지상에 보관하고 있는 핵폐기물이 날이 감에 따라 危險性이 높아가고 있다. 용기에서 방사능이 새어나오고 있는데 이의 安全性을 보장할 수 있는 시설이 아직 마련되고 있지 않다.
이 같은 反對 輿論에 대해 AEC는,
㉠ 염전 밑을 1천 5백 내지 2천 피트까지 파고 들어가 공간을 만들고 ㉡ 그 밑바닥에 15 피트 간격으로 다시 구멍을 판다. ㉢ 그 구멍에 核廢棄物이 담긴 두꺼운 특수 실린더를 박는다. ㉣ 그 후 방사능 유출을 탐지하는 自動計器를 장치한다. 이렇게 해서 절대 안전하다고 무마작전을 벌이고 있다.
㈒ 가입 안되는 原子爐 被害保險
한여름 해수욕장 호텔에 들었다가 비가 오면 그 비용을 보상해 주는 이른바 「바캉스保險」까지 받아 주는 美 保險會社들이 원자로에 대해서는 보험을 거부하고 있어 원자로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가 더욱 짙어지고 있다.
「엘머 앤더슨」씨는 지난 3월부터 原子爐 사고 시 방사능 발산으로 그의 집, 사무실 등 재산과 인체에 미치게 될 피해를 보상해 주는 보험을 가입하려 美國의 큰 보험회사 마다 이를 타진해 보았지만 모두 거부당하고 있다. 보험회사들이 原子爐被害 保險을 거부하는 이유는 "事故 保險은 그 발생빈도, 피해규모에 따라 불입금 내지 보상 금액이 책정되는데 지금까지 原子爐 事故 保險을 지급한 前例가 없어 그 기준을 세울 수가 없다. 원자로가 파멸적인 피해를 가져올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으니 만큼 보험회사로서는 그 기준을 세울 수 없어 보험을 받아줄 수 없다" 는 것이다.
보험회사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앤더슨」씨는 그러면 한 원자로가 큰 사고를 일으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후에 라야 보험을 받아줄 것이냐고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美國 商業用 원자로들은 '프라이스 앤더슨법'에 따라 원자로 1개 당 5억 6천 만 달러의 公衆保護 保險에 가입되어 있는데 이 중 9천 5백만 달러는 발전소 측이 부담하고 나머지 4억 6천 5백만 달러는 聯邦政府가 부담하고 있다.
(註 10) 열흘동안 稼動 中止로 발전소 측은 1천 4백만 달러의 손해를 본 외에 AEC는 이 사고에 대한 책임으로 6천 달러의 벌과금을 부과했다.
<74. 4. 『新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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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 Man 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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