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회 동안 인상파 화가들만의 독창적 표현양식(창조적 기술), 제작양식(생산방식) 및 새로운 장르(신상품)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해 살펴봤다. 그리고 절대왕정시대 몰락으로 인한 주문자나 후원자의 실종, 다양한 목적이 있는 미술품 수집가와 애호가들의 등장 배경을 설명했다.
인상파 화가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던 1860년대 초반만 해도 미술 애호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어디서 전시, 판매되는지 관심이 없었다. 생산자와 소비자 간 상품을 매개하는 연결고리(유통망)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미술 애호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런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상업적 배경을 파리 전시문화와 미술 중개상 출현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미술품에 어떻게 시장경제의 특성(생산·소비·유통)이 나타나게 됐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이 될 것 같다.
지금까지는 회화의 시대적 특성을 형식적 관점, 정신(관념)적 관점, 사회적 관점이나 재료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편 필자는 경제적 관점에서 예술이 일반 재화와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살펴봤다.
필자의 이런 시도는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 ‘문화 소비자론’ 제1장에서 강조한바와 그 목적이 같다. ‘문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문화의 경제적 파급력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의도가 그것이다. 우리는 갤브레이스가 이야기한 ‘물질 풍요의 시대’를 이미 넘어선 것이 아닌가. 이제 학계는 물론 경제·경영 현장에서도 예술 및 인문학 지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파리의 전시문화와 미술 중개상의 등장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동하던 초창기(1860년대)만 해도 화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미술 애호가나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곳은 정부 후원을 받는 ‘살롱전’이 유일했다. 그러나 파리가 재정비되면서 시각적 전시문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파리는 산업 수도에서 상업 수도로 바뀌고 구경거리 문화가 탄생한다. 이 시기에 형성된 대표적 회랑(回廊)식 상가를 ‘파사주’라 한다. 천장이 설치돼 비를 피할 수 있으며, 유리 제조기술의 발달과 전기 발명으로 상품을 화려하게 전시할 수 있는 시각적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유명 화가의 미술품, 작곡가들의 악보, 골동품이나 장식품 등은 상류층을 위한 사치품과 함께 이곳에서 전시, 판매됐다. 역사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파리 중심가 대로변의 아케이드야말로 문화 전달 통로이자 자본주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도 당시 파리 전시문화를 보고 “모더니티 대도시는 귀보다 눈 사용에 훨씬 더 중점을 뒀다”고 평했다.
그러나 당시 아직도 미술 수집가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일반 그림(초상화나 역사 기록용 판화)들은 학교 근처의 문방구, 인형 판매점, 미술재료 상점 등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초창기 인상파 화가들은 미술재료 상점을 운영하던 탕기 영감에게 돈을 빌리기도, 그림 판매를 의뢰하기도 했다. 미술 재료상점을 운영하던 뒤랑뤼엘은 그림만 전시·판매하기 위한 갤러리를 파리 번화가인 라피트 거리에 열어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최초로 전시했다. 당시 이곳은 증권거래소, 은행 및 카페 등이 밀집해 그림 전시에 알맞았다. 1871년에는 모네, 이듬해에는 마네, 그리고 드가와 르누아르 및 시슬레 등의 작품을 연이어 전시한다.
한편 1874년 제1회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 비용을 일부 후원하기도 했으며, 화가들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기록도 있다. 피사로에게는 선급금을 주고 도시 풍경화 연작을 의뢰했다.
이와 같이 후원과 주문 과정을 거치면서 1883년 인상파 화가 최초로 모네 개인전이 열렸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886년 뉴욕에서 제1회 ‘파리 인상파 화가전’이 열렸다. 상업적으로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비평가 반응은 좋았다고 한다. 이에 용기를 얻은 뒤랑뤼엘은 이듬해 뉴욕에 지점을 열어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소개한다. 이로 인해 인상파 화가들 그림이 고가에 팔리는 전환기를 맞는다.
뒤랑뤼엘 이후 프티, 부소, 발라동, 볼라르 같은 미술상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뒤랑뤼엘에게만 의존하지 않게 됐다. 이와 같이 뒤랑뤼엘을 비롯한 미술 중개상들은 당시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수요자에게 소개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림도 사용 및 교환가치 지닌 상품
미술품 중개상으로 활동한 탕기 영감.
미술작품이 일반 재화 같은 상품적 특성을 갖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을 살펴보자. 우선 물리적으로 분리돼 이동과 개인 소유가 가능해야 한다. 르네상스시대 그림들은 교회나 시청 등의 건축 벽화이므로 분리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목판화를 제외한 르네상스시대 그림들은 상품이 되기 어렵다. 바로크시대에 들어서면서는 아마포를 이용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동과 개인 소유가 가능해지는 형태로 바뀐다.
다음으로는 일반 재화들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관점에서 미술작품 특성을 보자. 일반 재화가 사용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유용성이 있어야 한다. 미술작품도 사용가치가 있는 것일까. 예술품은 인간의 단순한 생리적 필요성 외에 다른 유용성을 제공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르네상스나 바로크시대에는 교회에서의 교회 의식, 성경 설명 및 교회 내부 장식과 일부 도시 귀족들의 건축물 내부 치장 및 개인 저택을 꾸미기 위한 목적으로 그림이 필요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격변기에는 미술의 문화적 파급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그 후 인상주의시대에 들어서면 단순히 상류 부르주아의 취미활동으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단계를 넘어 산업에 이용하기 위해 미술작품을 수집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제 공산품에 미적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미술작품이 필요해진다. 이 시점이 우리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체험하고 있는 대량생산 상품이 예술화되는 초기 단계다.
한편 미술작품은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도 의미를 지닌다. 즉, 미술작품이 투자 대상이 돼 값이 매겨진다. 미술시장에서 화폐를 매개로 교환될 수 있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르네상스시대만 해도 화가는 주문자나 후원자로부터 재료비와 임금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바로크시대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귀족이나 도시 상인들의 후원에 의존하지 않고, 대부분 주문을 받아 공방을 운영한다. 초상화나 풍속화 등의 장르에서 일부 상거래 형식이 발견되지만, 미리 그려진 그림을 판매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은 주문자에게 얽매이지 않고 나름대로 미리 그린 그림을 판매할 수 있는 시기에 활동한다. 이제는 미술품 경매가 정기적으로 일어날 정도로 미술품이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등장하게 된다. 드디어 미술작품도 시장에서 자유롭게 매매되는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이다.
특기할 만한 현상은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에서 나타난 상품 공급과잉 현상이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미술계에도 똑같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미술가 간 경쟁이 심해져 ‘예술의 상업화’ 현상이 심해진다.
자신의 공방을 ‘The Factory’라고 부르며 기업화시킨 대표적 상업주의 화가 앤디워홀은 ‘돈을 버는 것은 아트이고, 가치 있는 비즈니스가 최고의 아트’라며 상업 미술가의 성공을 오히려 극찬하고 있다.
■ 연재를 마치며 - 예술에도 경제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르네상스시대에서 바로크시대를 지나 인상파 화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1900년대 후반까지의 미술품시장을 살펴봤다. 500여년에 걸쳐, 상품(르네상스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과 예술이 ‘예술의 상업화’와 ‘상품의 예술화’라는 영역에서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조명했다.
현재 우리는 이렇게 형성된 문화적 자원(예술작품 및 미적가치를 지닌 공산품)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이미 경매, 갤러리, 전시회라는 상업화된 장소에서 미술품이 매매되고 있다(예술의 상업화 현상). 또 한편으로 자본주의 대량생산 방식에 우위를 점하고 있던 영국, 독일, 미국 등의 국가들은 대량생산되는 상품의 판매 촉진을 위해 상품에 미적가치를 불어넣는다. 이에 따라 회화 양식과 기법들이 산업디자인에 응용되면서 일상적 삶에서 상품의 예술화 현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자원은 하루아침에 형성될 수 없다. 이제 경제나 경영 영역에서 문화자원은 고가이면서 활용도가 가장 높은 중요한 자본이 될 것이다. 우리가 과학 기술만으로 신상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을 때, 문화자원이 풍부한 서방국가들은 문화·예술적 가치가 반영된 상품으로 대응하고 있다.
2009.11.25 매일경제 성제환 원광대 교수·경제학부 ※ 주요 경력:미국 코넬대 경제학 박사, 게임산업개발원장, 원광디지털대 총장
[대전=중도일보] 20년 동안 `지역에서 어렵다´는 통념을 깨고 오페라 외길 인생을 걸어온 양기철 충청오페라단 단장(현 신성대학 교수)은 어려웠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도 무언가 환희에 차 있다는 느낌을 줬다. 조촐한 소극장에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상시 공연하는 것이 소망이라는 그의 말에서 순수한 외길인생의 단면을 읽을 수 있었다. 다음은 그와의 1문1답.
-충청오페라단이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소감을 한 말씀 해 달라.
▲처음에는 오페라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막상 20년을 하고 보니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작업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를 흉내 내는 것에 그쳤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소재로 창작활동을 펼칠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지역오페라단 운영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오페라단 운영에 가장 큰 어려움이 있었다면.
▲아무래도 제작비 부담이다. 유명한 오페라의 경우 제작비가 3억~4억은 족히 들어가는데 보조금이 10% 수준 밖에 안 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지방이라는 한계는 티켓 판매 금액을 한 없이 낮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막대한 제작비만 들어가는 악순환이 반복돼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지역 오페라단이기 때문에 중앙에 비해 기업에나 단체의 지원과 후원이 전무한 것은 창작열을 가로막는 큰 벽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무대에 많은 작품을 올렸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아무래도 1990년 창단공연이었던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타카나´라는 단막 오페라다. 지역에서 오페라의 구색을 완벽하게 갖춘 첫 공연이었는데 관객들이 공연 후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당시 이봉학 시장님을 비롯한 시민들이 공연 후 무대 세트를 만져보며 감탄하던 기억, 그리고 호응에 힘입어 다음해에 무료공연이 마련됐던 것, 오케스트라 자리가 없어 앞쪽 좌석 세 줄을 뜯어냈던 일 등 여러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창단공연이 한 마디로 대박 났었다.(웃음)
-20년 동안 오페라단이 유지될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금도 창단공연을 다시 보고 싶다는 분들이 계신데, 창단공연을 통해 오페라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던 것이 큰 원동력이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가족의 힘이 컸는데, 오페라단 시작부터 사무국 9명의 직원이 모두 가족이었다. 인건비 부담이 적었던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나오는 팀워크가 큰 힘이 됐다.
-현재 준비 중인 작품과 향후 계획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12월에 예산지역의 실화인 `의좋은 형제´를 모델로 한 뮤지컬 `굿 브라더스´를 준비 중이고 내년에는 대백제전에서 태안 마애삼존불상을 소재로 한 `백제의 미소´라는 작품을 올릴 계획이다. 물론 오페라도 하겠지만 앞으로는 음악적 뮤지컬 창작에 비중을 둘 생각이다. 특히 충남 16개 시·군의 역사와 문화를 창작작품으로 하나하나 짚어갈 생각이다. 이미 당진의 김대건 신부나 태안의 별주부전, 예산의 의좋은 형제를 했고 내년에는 청양 지역의 `장승´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 생각이다.
앞으로 단 하나 소망이 있다면 300석 규모의 소극장을 지어서 16개 시·군의 작품을 상시 공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