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예술세계의 만남을 한 폭의 작품으로 탄생시켰던 고암 이응노 화백. 그는 1958년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자크 라센느로부터 도불 초청을 받고, 동양의 정신과 화법을 가르치기 위해 안정된 삶이 보장된 한국을 과감히 떠났다. 그곳에서 이응노 화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의 대표작품이 되기도 한 ‘문자추상’을 탄생시켰고,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소식을 듣고 죽어간 시민의 넋을 달래기 위해 그 사람들의 외침을 그림에 담기 시작, ‘군상’시리즈를 일궈냈다.
한국에서는 점차 잊혔던 이 화백은 죽음이 임박한 1989년이 돼서야 서울 호암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었지만, 과거 동백림 사건 등에 연루되면서 귀국이 허락되지 않았다. 마침내 전시회가 열린 날, 그는 파리의 작업실에서 쓰러져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응노 화백의 서거 20주기 및 도불 50주년을 기념한 특별한 전시회가 열린다. 26일부터 내년 3월 31일까지 대전이응노미술관에서 ‘Non-Painting’이라는 주제로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콜라주와 타피스트리 등 서른다섯 점의 작품이 전시되는 것.
이 화백의 파리시기에 정립된 회화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는 그동안 국내·외에서 공개되지 않은 작품들이 대거 선보인다. 이는 고암의 작품을 연구하는 미술인에게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최근 프랑스 고블랭 타피스트리 국립제작소에서 제작한 문자추상 2점과 이 화백이 직접 제작한 타피스트리가 함께 전시돼 동·서 문화를 통한 다름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다.
또 전시회의 제목처럼 이번 특별전에서는 동양적 미감이나 서구적 미감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구체적인 장르와 재료적 형식의 경계도 고려치 않는, 그래서 가장 회화적이면서도 회화적 문법을 파괴하며 생성되고 있는 이 화백의 예술정신을 만날 수 있다.
제2전시실에서는 주로 이 화백이 도불 직후 제작한 몇 년간의 작업들이 선보인다. 초기 콜라주와 초기문자추상 작업들에서 일견되듯이 동양적 미감에 기초하는 서구적 조형성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종이를 통한 콜라주, 먹선으로 일필휘지하는 문자추상, 추상적 화면 분할 등에서 이 화백은 ‘상형’(常形)을 넘어 ‘상리’(常理)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제3·4전시실에서는 다시 고암의 새로운 작품세계가 시작된다. 공광식 대전이응노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 화백의 작업세계는 언제나 진행 중”이라며 “동양의 작가로서 머물지 않았듯이, 하나의 화법 안에 갇힐 수 없었듯이 자신의 확고한 예술세계를 어느 곳에도 두지 않고 고암은 다시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길을 나선다”고 설명했다.
한편 전시 기간에는 이 화백의 작품세계를 직접 체험하고 작품 감상의 이해를 돕는 어린이 강좌가 28일부터 이틀간 개최되며, 작은 음악회는 다음 달 11일 열린다.
또 국내 평론가와 미술인을 초빙, 이 화백의 작품세계를 심층·분석해 학술적 자료로 활용하기 위한 좌담회도 다음 달 중순쯤 개최된다. ☎042(602)3270
2009.11.26 대전일보 김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