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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지마닷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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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부터 철도노조가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나는 마침 철도공사 소속의 중앙선을 이용해 출근을 해야 하는 인간인지라
뉴스를 예의 주시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출근 시간대의 출근 노선 변경을 확립하는 게 중요했다.
중앙선을 타고 서울메트로로 갈아타는 것을 삼가하는 게 어떨까 신중하게 검토했다.
파업 시작날이니 딱히 바로 교통 불편이 초래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추운 겨울 플랫폼에서 마냥 오돌오돌 떨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알다시피 중앙선은 지상에 플랫폼이 있고 대부분의 역이 돔 형식이 아니라 계절에 민감하다!)

내 인생에 공공교통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버스를 이용했던 지겨운 경력의 소유자다.
그리고, 남들이 흔히 세컨카정도는 손쉽게 굴리는 고도시장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그 흔한 전동리어카 하나 장만 하지 못한 도시 빈민이기에
공공교통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는 다소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아침부터 하루키의 신작중 상권을 마저 읽고 산뜻하게 2권을 들고 출근하려다보니
본의 아니게 혼잡시간을 벗어났다.
일단 철도공사나 서울메트로를 제외하고나니
버스와 도시철도공사가 남았다.
기분좋은 출근 날이었다.
이번 주는 내내 포근해, 아침 출근이 더할나위없이 행복하다.
좁은 어깨를 활짝 펴고 걷는 행인들을 보면서 나는,
결국 인간이란 날씨를 뛰어넘을 수 없는 하찮은 존재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희미하게 부숴지는 입김을 내 뿜으며 버스 정류소로 향했다.

전날 잠들기 전에 정한 코스는 평소와 달랐다.
일단 버스를 이용할 것.
가까운 도시철도공사의 5호선 역을 찾을것. 이다.
나는 가까운 5호선 역에 나를 내려줄 수 있는 노선을 소유한 버스에 올랐다.
몇 분 달리니 금방 5호선 환승이 가능한 정류소가 나와 안심했다.
깊은 역사로 내려가서 몇 정거장을 지나치니 곧 트랜스퍼가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도시철도공사의 7호선.
이른 바, 평소에 전혀 이용하지 않던 빽 도어 라인으로 출근에 성공했다.
경쾌하게 내 딛는 발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드는 마르코 알바니의 스무쓰한 째즈 기타 연주 사이로 간간히 울려 퍼졌다.

오늘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다.
자주들리는 구청 사회복지관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가 조금 식기를 기다리며 랩탑의 전원을 켜고 수집된 뉴스를 클릭했다.
천천히 읽었다.
그 중에 철도파업에 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볼까.

철도파업, 물류대란!
여객수송 현재까지는 오케이!

흠, 그렇군 다른 헤드라인들은?

鄭총리 "철도노조 파업, 경제 발목 잡아"
"무리한 파업으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은 국민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

최근 4년간 철도노조 파업으로 인해 한국철도공사측이 입은 직접적인 손실이
170여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 테그라인처럼 철도노조에 가장 적대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신문은 급기야,
기자를 내세워 철도노조 죽이기에 나선다.

"그동안 철도공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측이 주인인지 노측이 주인인지 분간이 안 된다.
집행부가 개혁을 하려해도 노조의 강력한 대응에 손을 놓기 일쑤였다.
급기야 전직 경찰청장을 지낸 강력한 사장이 오고서야 잠시나마 조용한 듯 했으나
근성을 버리지 못한 노조가 국민의 불편을 담보로 한 위험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

아마도,
위의 글을 쓴 기자의 생각이
우리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소수인 시민은 다수가 주도하는(또는 다수를 호도하는) 여론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여성 대부분이 올 겨울 패딩 자켓에 안감이 기모처리된 레깅스를 입고
출근한다면 나 역시 그런 종류의 옷을 구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
뷔똥빽이 유행이면 짝퉁이라도 구비해야 된다고 믿는 것처럼.

여론을 주무르는 언론이 대 놓고 재수없다고 일갈하는 데,
그들이 쏟아내는 글들을 접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시민들은
그것이 마치 작금의 세태를 아우르는 적절한 가치관처럼 여겨질테다.
아쉽다.
학사 디그리가 있는 인간들도 파업을 바라보는 눈은 늘
이 신문의 기자의 눈을 쏙 닮았다.

1. 나보다 많은 임금을 받는 부자노조들의 배부른 파업.
2. 시민의 불편을 담보로 파업질을 하는 통에 늘 모든 불편을 선량한 시민들이 감수하는 점.
3. 노조가 파업을 승리로 이끈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 써비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을 대강 늘어 놓으면 위의 3가지가 아닐까.

나보다 많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파업을 하지 않아야 한다?
상대적인 박탈감은 열심히 일하는 다른 회사의 노조원들 때문일까?
사회 전반에 겨우 20% 안되는 노조만이 근근히 활동할 수 밖에 없는
지나친 자본가들의 간섭과 방해때문에 내 임금이 적은 것이고
때문에 내가 다니는 회사엔 노조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은 안드는가.
즉, 타 회사의 노동자때문에 내가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인지성정이지만 그것이 그들에 대한 막연한 분노로 바뀌어서는 안됨을 우리는 이미 안다.
그것은 단순한 질투이기 때문이다.
사돈이 땅을 산다고 배가 아플 필요는 없다.
그 땅이 서민 누구나 살 수 있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그 땅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자본가들에게 오히려 분노의 화살을 쏘아야 한다.

시민의 불편을 담보로 파업?
공공노조도 결국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단체다.
그들이 사측이라는 거대 자본가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볼모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사측이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볼모란, 알다시피 약속 이행의 담보로 상대편에 잡혀 두는 물건이나 사람등을 지칭한다.
여기서 철도노조는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기위해 부득이
자신들의 직장을 태업하는 수준부터 파업을 가동하는 것 뿐이다.
그래야 사측이 위기를 느낄 것이니까.
대개의 선진국에선 공공노조의 파업이라고 해서 딱히 지양해야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노조의 특수성은 사회 기간 사업을 쥐고 흔드는 주체들의 호들갑일 뿐.
노동자들의 권리행사에 절대 다수인 타노동자들인 시민들의 입장에선
파업의 원인과 해결책에 초점을 맞춰나간다.
그것이 부당한지 아닌지 균형있게 바라볼수 있는 시각을 확립한 시민들이 많다고 들었다.
추운 겨울, 뉴욕 철도가 파업했을 때,
허드슨 강을 도보로 건너 맨하탄으로 향하는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그래봐야 사실 방송국의 표본추출이겠지만)
교통은 불편하지만 파업은 지지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다를까?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선진국에 진입하지 않은 백성들은 파업을 정당화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일까?

언젠가,
프랑스 파리에서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며칠 두고봤지만 공공파업 특성상 쓰레기는 도저히 용서가 어려웠다.
마침 여름이라 악취가 엄청난데다가 아름다운 도시 파리가 쓰레기 도시가 되어간다는 것은
시민들의 자존심까지 상처를 입혔다.
드디어, 다수의 시민들이 화가났다.
그들은 자기 집앞에서 썩어가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저마다 그곳으로 향했다.

이쯤에서 한국 언론에 길들여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럼, 그렇지. 니들이 제 아무리 푸아그라를 잡숫고 비싼 와인을 들이킨다고 해도
공공노조의 파업엔 우리와 같은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게 분명해!
이제 미화원들 니들은 죽었다!
여론이 등을 돌렸다! 하하하.

악취나는 쓰레기 봉투들을 들고 시민들이 집결한 곳은
뜻밖에도 파리시장이 거주하는 사택이었다.
분노한 파리시민들은 그곳에 오래된 쓰레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딱 한마디들 했다나?
"시장은 빨리 노조와 협상을 마쳐라!"

어라?
이게 뭐지?
대체?
한국이라면, 분명
여론과 자본가의 시녀인 엘리트들을 총동원해
노조의 부당함과 시민의 불편을 내세워
노조본부를 압수수색하고
노조간부를 구속하고
저항하는 노조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곤봉을 휘두르는 전투경찰을 투입할텐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
노조와 협상에 무성의하다고 시장집에 시청앞에 쓰레기를 투척해?
에이, 정말?

끝으로 써비스는 노조가 행하지만 주체는 사측이다.
사측이 노동자들의 써비스를 이끌어 내야한다.
사측이 노동자를 쥐어짜거나, 압박하거나 하는 수준으로
노사협상이 끝나게 되면 그 불평등한 결과가 고스란히
공공수단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전가된다.
그것을 현명한 시민들이 모를 리 없다.
다만, 그들이 나보다 근사한 직장에
근사한 월급을 받는 게 속상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결국, 그들을 비난해봐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침은
내 얼굴을 향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론에 호도되기 쉬운 존재다.
그것은 언론 자체에 지나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치우치지 않는 시각을 균형있는 논조로 일관되게 서술하는
그러한 언론이 한국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도 충분히 고등교육을 받았다.
출퇴근의 긴 이동시간에 역 앞에서 나눠주는 무가지에 코를 박고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잡탕식 무가지엔 기업광고와 국정브리핑 그리고 만화 밖에 없다.
그렇기에 저 위의 어처구니 없는 기사와 그 기사를 양산하는 졸렬한 기자의 출현에
넋 놓고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철도파업이 나를 인질로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적어도 자본가들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최후의 수단임을 알고 있는 한
나는 그들의 주장과 외침을 적어도 같은 노동자로서 외면할 수 없다.
나는 정말 노동자들의 파업에 흥분할 기운을 한데 그러모아
그들을 이리저리 부리며 치졸한 수단으로 수채의 집을 사들여 운용하는
낙하산 간부나 그 떨거지들의 재산형성과 수법에 분노하련다.




어제 유시민의 mbc 人 인터뷰를 보고

2009.11.02 16:27 | 세상 | 버트

http://kr.blog.yahoo.com/dazizima/1490 주소복사

요즘 그의 집에서 가끔 자고 가곤 한다.
내가 묶게되는 게스트 룸에는 커다란 구형 프로젝션 TV가 있다.
잠자리가 바뀌면 쉬이 잠이 오지 않는 나다.
생긴 것과 달리 몹시 예민한 편인게다.
친구 집에서 질펀하게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녀석들이 죄다 곯아 떨어지면 기어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니까.
처음엔 외박자체가 싫어서인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타지에서 잠을 자면 쉬이 잠들지 못하는 꽤 귀찮은 인간이었다.

어제도 잠이 잘 오지 않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집에는 없는 텔레비젼의 주파수를 혼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은
그것 나름의 어떤 중요한 삶의 메씨지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잡생각도 하면서.

그런데 유시민이 떡 하니 나온거다.
무슨 친노정당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하신단다.
그런가 싶어 빨리 채널을 돌리려는데 문득 자신의 정당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게 들렸다.
자신이 참여할 이른 바 친노성향의 신 정당은 중도진보란다.
중도진보?
중도보수를 주창한 돌아이들의 대척점인가?
아님 그냥 신조어인가?
피곤한데 잠이 쉬이 오질 않고 있던 상태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대체 중도란 무엇인가?
한가위판 한겨례21에서 리서치한대로 중도란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사는 세상을 꿈꾸지만
자신과 자신의 자식을 포함한 가족의 삶은 반드시 잘 사는 세상에 편입되어야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리서치결과를 추출해 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능력없으면 다 같이 잘 살아야하고,
내가 비상한 능력을 가진 자라면 그와같은 비상한 능력을 소유한 인간들은 반드시 잘 살아야 한다.
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은 심적으로 민주당에 적을 두지만
땅값이 오르기를 원하는 마음이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는 것.
중도는 이렇게 엉뚱한 계층이다.
그리고 또한 솔직한 계층이다.
자신임 약자와 연대에 주저하지 않는 멋진 인간일 수도 있다고 믿지만 정작 속물인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또한 중도는 보수와 진보의 중간층도 아니다.
이성적으로는 진보지만 감성적으로는 보수인 계층이
스스로를 중도라고 여기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셈이다.
물론, 그것은 지탄받아야 하는 이중적 성향이 아니다.
그저 승자 독식의 차가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생산해 낸 돌연변이일 뿐이다.
개인이라는 테두리에서 이해하자면
이 나라에서 자신을 중도라고 여기는 인간들을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되었기에 고무되었다고할까.
더불어, 우리나라의 최고권력자가 펼치는 중도의 의미를 다시한번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마웠다.
그 중도는 결국 대세였고 곤두박질쳤던 권력자의 지지율을 어느정도 끌어올리는 효자 역할을 하였다.
그게 이른바 대한 민국의 중도다.

중도의 힘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만큼 위대하다.
자신이 진보논객임을 내세우다 이제 그 약빨이 다 되어 죽은 자에 기대어 정치복권을 노리는
한 명의 수다꾼이 이제는 자신이 내세우던 색깔에 중도를 어미로 채용했다.
그게 중도진보란다.
위에 내가 설명한 중도에 뜬금없이 진보라는 단어를 합쳐 놓은 셈이다.
진보를 꿈꾸지만 그것은 결국 꿈일 뿐이고,
내 아파트 값이 올라야 하지만 대박까지는 아니어도 좋다란 뜻인가?
즉, 대박은 중도보수고 소박은 중도진보인가?

야심한 밤에,
'어이'가 '없어' 라는 문패를 단 집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보다 가방끈이 적어도 1미터는 짧지만 자신은 진보를 꿈꾸고
그 진보가 이 땅에 뿌리내리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짚신벌레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변방의 촌부는 가슴이 저려왔다.
중도는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신종 접미사가 아니다.
중도는 자신이 결국 박쥐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중산층 프로젝트'일 뿐이다.
우리나라에 언제 진보가 제대로 된 취급을 받아온 적이 있었나.
우리나라에서 언제 진보정당이 지지를 받아 국정을 이끈적이 있었나.
제대로 된 단어의 뜻이 이 땅에 단 한번도 확립되거나 뿌리박힌 적없는
일천한 '진보제로지대'를 살면서
이제 진보가 국민들의 마음을 읽는데 부족하니
중도진보를 하겠다고?
공인의 지위를 얻었다고
티비에 나와 되는대로 지껄인다고
그 모든 뜬구름잡는 어설픈 허구성 정치발언들이
모두 말로 제대로 형상화되어 시청자의 머리 속에 하나씩 각인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체 삼팔육으로 대표되는 떨거지들은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시청자들이
어느정도로 하수로 비춰지는 것일까.
아마도 유시민은 무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걱정하거나 외면하는 집단은 아마도 한나라당과 민주당 지지층일테지.
그렇기에 이렇게 자신있게 자신의 무지를 들어내는 것일게다.

내가 이렇게 무지한 (또는 나를 무지한 인간으로 여기는)
3류 정치꾼가 지껄인 쓰레기같은 말들을 내 금쪽같은 블로그에 몇 자 휘갈기는 이유는
그가 이른 바 대한민국 피플들의 사랑받는 진보정당을 꿈꾸며 오늘도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소신있는 진보주의자들을 싸잡아 단 한마디로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다.
그가 밝힌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추구하는 진보란 그들만의 진보란다.
그래서 국민(나는 사실 나라국 백성민을 싫어하지만 유시민이 쓰는 표현대로 옮기다보니)들에게
외면 받는다고 그렇기에 중도진보를 할 계획이란다.
결국,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저희들끼리 박터지게 정치나 사상게임중일 때
자신들의 신당이 현재 진보정당들이 외면한 진보정치에 서민들이 좋아라 할 중도로 도금을 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땅에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진보를
인식하려고 노력하고 지지해 마지 않는 민초들이 분명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인기 없는 정당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해서
전부 마이너의 삶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언젠가 진보가 각광을 받는 시기가 오기를 진심으로 고대하며
오늘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신경쓰지 않고 기존 구태정당의 라이벌로 만족한다는 것 자체야 말로
진보를 논할 자격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유시민은
자신이 말한대로 민주당과 두 개의 소수 진보정당 사이에 이념을 두는
중도정당을 만든다고 속이지 말아달라.
그저 죽은 정치인의 인기를 등에업은
팬클럽을 만들겠다고 선언해라.
그것도 정당은 정당이다.
그리고 그 신당의 이념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 어느 중간쯤이라고 떳떳이 밝혀라.
또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그도 아니면 의원직을 잃어버려 꼴사나워진 전 기업총수가 이끄는 창조한국당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가진 허경영의 민주공화당
그 중간 어디 부근에서 살림을 시작할 거라고 솔직히 이야기는 하는 게 어떨까.

적어도 이 땅의 중도들은 그렇다.
자신은 솔직하지 않지만 공인들은 솔직하기를 바란다.
위선적인 정적들과 웃는 얼굴로 악수하기 싫다는 올곧은 정치인이 정말로 되고 싶다면
스스로가 위선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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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을 바라보는 마초들의 이중성

2009.07.03 12:00 | 세상 | 버트

http://kr.blog.yahoo.com/dazizima/1368 주소복사

  • 요즘 시국이 어수선하다보니 그 틈을 노려 정부를 씹어대는 인간들이 참 많다. 독선적인 위정자를 성토하고 소통을 주장하며 죽은 전임자를 애도하다 못해 추앙하기까지 한다. 이는 뭐 딱히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전정권말에도 택시만 타면 무수히 듣던 소리였다. 다만 이번엔 레임덕이 빨랐던 탓이 크다. 위정자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사실상의 레임덕이다. 그 돌파구를 4대강 살리기로 선택한 한심함은 대연정이 성사되지 않자 FTA를 들고 나온 전임자의 실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똥이 그 똥이란 이야기다. 자신이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듯하다. 문제는 지금의 위정자를 규탄하기 위해 전임자를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자들의 한심한 작태가 역겹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의 가정에서도 군림하려만들고 편하게만 생활하려는 남성(기혼자는 아내의 노력봉사를 요구하고 미혼자는 자신의 어머니의 노고를 갈취하며)들의 주장이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제가를 논하려면 수신은 기본이다. 수신은 곧 자신의 낮춤과 가정의 평등에서 출발한다. 그런 자세를 갖춘 인간들만이 비로소 제가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집에서는 마치 제왕적 대통령의 위상으로 식구들을 좌지우지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밖에서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는 점에 서운함을 넘어 분노하게되는 작금의 현실이 내게는 토악질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 비정규직에 대해 짧은 코멘트를 하기 전에 쓰잘데 없는 마초들을 다룬 이유는 포스트 노무현정국을 이용해 설레발을 떠는 꼬락서니들을 봐주기가 힘들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그들이 한데 묶에 현 정부를 규탄하는 비정규직을 적어도 마초가 아닌 우리들은 그들의 편협이 갖는 속성을 알아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비정규적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내게 그들이 정부나 여당을 비판하는 모습은 그저 뿔따구가 난 비주류의 볼멘소리나 앙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비정규직 폐해의 본질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아니다. 비정규직의 2/3를 넘게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 직업 선택의 평등권을 부여하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집에서 군림하는 가장이나 장남들은 이 점을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아 한다. 편하게 아내나 어머니가 다려준 양말을 신고 집 안의 유일한 자동차를 혼자만 유유히 몰고 출근하는 가부장적 시대의 가장들이 어찌 비정규직의 참뜻을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비정규직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결국 여성노동자들의 지위향상을 이야기 하는 자리가 되야한다. 그 '향상'은 순전히 여성노동자를 다루는 자체에 있으면 정규직 남성 노동자과 비교하게되면 향싱은 '평등' 또는 '남성 노동자에 준하는' 이라는 단어로 교체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비정규직이라는 문제가 가난한 여성노동자들의 지위와 복지 향상에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비로소 비정규직을 논할 수 있게 된다. 어째서냐고? 그런 의문을 갖는 순간 너는 비정규직에 담긴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다. 통계를 보여줄까?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 10명 가운데 7명이나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남성 정규직의 34.7%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현재의 경제위기 전 통계다. 지금 조사하면 더욱 비참해지면 비참해졌지 향상되거나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비정규직의 확산은 여성노동자의 승진과 복지 향상을 제어함으로서 남성노동자들의 기득권을 확보하는게 목적이다. 이 나라에서 비정규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토록 자명한 것이다. 남성사회에 남성을 가세한 정책을 펼쳐나가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미 자각하고 있다. 단지, 그렇게 남성과 여성을 이분화하는 게 무안할 뿐이다. 그래서 비정규직법이라는 법을 만들어 분리와 불평등을 강화하는 것이다.

  •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비정규직법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을 통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에 앞서 여성노동자들이 남성노동자들의 지위에 복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악법일 뿐이다. 집에서 다리미를 들고 서방의 양말이나 다려야 할 여편네가 밖으로 뛰쳐나가 돈을 벌겠다고 할 때부터 내 알아 뵜어. 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발의한 법이 바로 지금 한국의 비정직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야기다.

  •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어온 사람들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것이다. 아니 그럼 마초들이 지금 왜 벌떼처럼 일어나 비정규직법을 성토하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지금의 정국의 영향이다. 그들은 지금의 위정자나 그 떨거지들이 무조건 싫을 뿐이다. 그게 다다. 비정규직법안에 대해 설레발을 치는 지위 높으신 남성 노동자들에게 물어봐라. 수년을 투쟁한 KTX여승무원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는가를. 개수작이란 늘 그렇듯 머리에 아무것도 들어차지 않는 인간들의 작당을 가리킨다. 개수작은 늘 그렇듯이 마초들의 전유믈이다. 그들이 반대를 하는 이유는 비정규직에 대한 애증이나 애환에 근거하지 아니한다. 그저 반대일뿐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렇듯이 자신이 해고 통보서를 받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왜 전업주부를 부러워 하는가?

2009.06.03 16:00 | 세상 | 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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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임시적인 일이면서 절대적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기 싫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 수 없이 출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근자에 전업주부가 휘갈긴 주부한탄 포스팅을 보아하니 전업주부의 노동량이 무척 세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업주부를 때려치우지 못하는 것은 결국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이리라. 남편을 앵벌이 시켜 가계를 일으키는 것이 직업인 전업주부가 하루아침에 남편처럼 앵벌이를 하려면 엄두가 안나는 법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동업자다. 비겁하지만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없이 타인의 활약에 기대어 하루를 보낸다. 전업주부는 남편, 나는 사장의 바지 가랭이를 잡고 늘어진다.

한가지 다른 것은 내가 결단을 내리를 것이 전업주부들 보다 훨씬 쉽다는 거다. 나는 그만두면 당장 궁핍한 생활을 견딜수 없게 되므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전업주부가 가사를 때려치고 새 출발을 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쉬울 수 밖에 없다. 사표와 이혼청구소송의 간극은 비할 바가 못된다. 그렇기에 나는 전업주부들이 안타깝다. 일생을 타인의 (자식도 분명한 타인이다) 뒤치다꺼리로 소진하다가 끝내 절명해 가는 인생을 택하는 그들의 존재에 경이감마저 든다.

그런 의미에서보면 가난하지만 옥탑방이라도 마다 않고 경제 주체로 혼자 살아가는 소설가 황인숙 같은 이들을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오전시간에 스타 벅스에 모여 자식을 비롯한 가족과 같은 타인들의 삶에 대해 시시콜콜 잔소리를 늘어 놓지 않는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화거리는 바로 자기 자신일 수 밖에 없다. 개인이 자기 자신에 인생을 투자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 타인과 타인의 능력치를 마치 자신의 보살핌으로 일궈 놓은 것 같은 착각속에 하루 하루를 보내는 철 없는 전업주부들. 그들이 자신의 직업을 당당히 때려치우고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기가 이 나라에도 과연 자연스럽게 뿌리내릴 수 있을까 궁금하다.

나나 전업주부나 사실 엇비슷하다. 나는 주부이지만 전업을 하지 않을 뿐이다. 아니 못한다. 왜냐면 주부로서는 사회에 통용할 수 있는 가치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소비집단의 일원이기 전에 생산 집단의 일원이어야 한다. 그래서 전업이라는 꼬리를 때고 주부와 회사원을 병행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마도 내가 남자이거나 아님 혼자 살아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이 힘들다고 주부를 게을리하면 나는 출근할 수도 없는 상태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그 반대는 물론 명백하다. 굶어죽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만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싶다.

전업주부가 피곤한 것은 주부일을 전업으로 삼기 때문이다. 회사원이자 남편이 집에서 쉴 수 있음은 바로 그런 전업정신에 깔린 배우자의 절대적인 희생에 근거한다. 전업으로 주부일을 하는 여자가 집에서 부지런을 떨며 움직여야 전업으로 회사원이 된 남자는 숨통이 트인다. 같은 전업이지만 직업이 갖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다시말해 내가 전업 주부도 전업 회사원도 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어느 한 쪽만 하다간 삶이 붕괴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사회가 진화되어 왔다. 남자들은 보다 수월한 전업 사회인이 되기 위해 여자를 집에 들어 앉히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자 남성주의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남자인 내가 주부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전업주부를 데려다 집 안에 가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능력없음으로 단정지어 버린다. 능역이 없는 숫컷은 전업주부를 만들 수 없다는 점에 비난의 무게를 두고 맹비난한다. 그것은 이 사회가 전업주부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후진적인 사회임을 입증해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남자가 자신이 입은 팬티를 손으로 빨고 있는 모습이 추레하다는 인상으로 격하되어 더욱 결혼을 부추긴다는 점이 서럽다. 자신의 오물이 묻은 빨래를 스스로 해결하는 모습은 그 사람의 삶 그 자체일 뿐인데도 말이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자. 전업이 버거우면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그것을 당장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경제력에 대한 걱정일 뿐이다. (자식에 대한 걱정은 핑계일 뿐이다. 자식은 걱정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라, 그들도 어엿한 인격체다. 상황을 헤처나갈 수 있다 없다는 그들의 몫이다!) 경제의 궁핍함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업 주부를 때려치는 것 자체가 이혼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이혼은 그 이상이다. 전업주부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것을 선택해야 함은 물론이다. 많은 기혼여성들이 고맙게도 봉사활동과 같은 사회활동을 생각하는데 그것도 좋지만 나는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지급하는 직업을 가질 것을 권한다. 남편의 봉급을 공유하는 삶에서 자신이 스스로 봉급을 탈 수 있는 삶은 전혀 다르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다. 노동의 문제도 아니다. 의식의 문제다. 끌려다니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재단해 자신의 힘으로 조종하여 앞으로 이끌어 가는 삶으로 바뀐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아주 중요한 가치다.

하프 주부, 하프 봉급쟁이들 파이팅!




(뱀다리 : 내 이야기는 전업주부로써 한계를 느끼는 사람들(남 또는 녀)에 한정된 이야기다. 전업주부로서 만족하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오늘도 마트에서 유기농 채소를 고르거나 전세로 입주한 아파트에 애착을 갖는 - 남편의 돈으로 - 한결 같은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다. 전업주부로써 한계에 도달했거나 또는 나처럼 주부와 사회일을 동시에 하는 인간으로써 적잖이 힘에 부칠 때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역할을 해주기 위한 글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덕수궁 앞 분향소 가로막은 정부 ⓒ일다 /박희정의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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