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을 사귄다는 것은 참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다. 일생일대 이다지도 중요한 이슈를, 이토록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상태를 유지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를 바라는 무모한 짓거리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 출근 잘 했어? - 응. - 식사는 했어? - 아니. - 저런저런 왜 안드시고? 그 많은 수업은 다 어쩌려고? - 말도 마. 아침부터 한 바탕하느라고 힘이 쪽 빠져서.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 점을 내가 알아채고 그 점을 좀 부각시켜주기를 내심 기대하는 눈치가 전화기 속으로 빨려들어와 내 귓가를 강하게 때린다. 나는 목소리에 단호함을 담아 강력하게 외쳐준다.
- 아니 대체 어떤 인간이 귀하디 귀한 마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거야!
내 아부성 짙은 응원에 약간이나마 기운이 난 듯. 아침의 부당한 시츄에이션을 강한 어조로 설명하며 자신을 화나게 한 상대를 질타한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그녀가 계속 화를 삭이도록 부축였다.
- 나쁜녀석들이네. - 그렇잖구! - 암튼, 저만 안다니까.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잘 새겨 듣고 행동하는 인간이 이렇게 드물어서야. 어디 원. - 말도 마. 생각하면 머리털이 죄다 곤두 서.
물론, 이런 식의 대화는 버전 업 된 것이다. 나는 그 전에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냉정한 제 3자의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었으며 나는 다시 기분이 급전직하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연애를 잘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구태여 상황을 잘 모르는 나에게 모든 정황을 다시 설명하는 번거로움을 감내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 하는 이유는 그것의 잘잘못을 따져 객관적인 판단을 제시하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옆에서서 같이 피켓을 들고 자신이 구호를 외칠 때 거침없이 맞장구를 쳐달라는 의미, 즉 아군의 확보를 목표로 했던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 같이 흥분을 해주고 난 후 간신히 분이 가라앉으면 따스한 커피라도 건네며,
- 어느면에서 보나 분명하고 냉정하게 행동한 분별있는 당신에게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안타깝지만 좀 쉬었다가 2회전을 치룹시다.
라고 말해줬어야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깨닫는다. 어리석은 버트야, 그녀가 원하는 것은 3류 재판관 따위가 아니야. 그저 자신의 부당함을 이해하고 - 또는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 그 부당함에 지친 어깨를 감싸안으며 목소리 높여 응원해 줄 수 있는 편안한 애인이었던 것이다.
그 치열했던 여름. 나는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접는 의자와 책 한 권을 가지고. 도로로 향했던 것이다. 사무실은 답답해. 짤려도 좋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가로수가 울창했고, 나무마다 수십, 수백마리의 매미가 달라 붙어서 여름이 가는 것을 소리 높혀 합창하고 있었다. 나는 의자를 펴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동안 매미소리를 들었다. 문득 하루키의 책이 생각났다. 태엽감는 새의 연대기. 이곳에선 따따따따따아아아아. 소리를 내며 매미가 태엽을 힘차게 감고 있었다. 눈을 뜨면 감았던 시간만큼 앞으로 나아가 있을지도 모를정도였다. 참으로 우렁찬 소리였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눈을 뜨고 가져 온 책을 읽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스팔트 바닥에 무엇인가 툭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일까. 그것은 매미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엽을 감던 매미는 재 수명이 다해감에 따라 점점 힘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는 매미를 관찰했다. 그리고 녀석의 보금자리임에 틀림 없는 나무로 보내줬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 나무 위로 매미는 힘겹게 올랐다. 녀석이 오르는 중간중간에 죽어서 화석이 되어버린 매미의 전해들이 간간히 눈에 띄였다. 매미들의 보금자리는 또한 매미들의 무덤이기도 했다.
길상사 방문 계기로 집에서 가까운 축에 속하는 (삼청동이나 평창동에 비해서 말이다) 성북동을 공략하기로 하고 교본을 입수 연구에 돌입하여 엄선해 둔 곳이다. 두에 꼬제 성북점. 원래는 한남점이 유명한가 보다. 한남동보다는 성북동을 어감상 좋아하는 나는 틸사마를 꼬득여 이곳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차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좀 헤맸지만 그래도 어렵사리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두 배다. 하지만 가게의 포스는 평범! 오른편 윈도우에 Boun appetito! 라고 쓴 네온싸인이 이체롭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로선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늘 터. 이따다키맘모쓰! (이른바 일본풍 아저씨 개그!)
살아온 세월보다 훨씬 강력한 맛을 선사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주방의 젊은 여성 3인방! 그리고 웨이트리스.
떨리는 마음으로 대기중인 나
괜히 분위기 타는 너
엷디 얇은 삼각 포카치아로 양치질. 치약으론 올리브속 비네거.
샐러드 귀신이 다소 흥분하는 통에 주문을 잊었다. 부랴부랴 메뉴 리콜 후 추가 주문 한 로마노 샐러드. 시져 샐러드의 이 집 風.
맛있다! 더 이상의 코멘트는 입방정일뿐!
샐러드 접시 바닥까지 혀로 핥던 우리 테이블에 드디어 납셔준 핏자. 마르게리따 에 루꼴로 하프, 프로슈토 에 갈릭 하프 등장! 짜잔. 처음 온 핏자집, 종류도 많다만 과감히 두 가지를 골라 반반씩 주문한 것. 루꼴라가 맛있겠다고 손을 비비는 나를 보자 틸사마가 한 마디 하신다.
- 버트, 루꼴라가 뭐야?
아, 틸사마도 모르는 게 있구나. 나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하게 댓구해주었다.
- 응, 짱꼴라 동생.
프로슈토가 좀 적게 들어가 감질이 났지만 루꼴라 하프쪽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인즉 몹시 맛있었다!
가장 늦게 도착한 오늘의 라스트는 역시 파스타. 새우 브로콜리. 정식 명칭은 가만있자 뭐였더라?
이거 정말 소스가 대박이다. 감칠맛이 난다. 나는 여태껏 김치비지찌개에만 감칠맛이 나는 줄 알고 이 기름진 세상을 살아온 게다. 빌어먹을, 이렇게나 즐거운 맛을 선사하는 파스타를 무라카미 하루키이외의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니 놀랍다!
앞으로 핏자가 땡기면 서슴없이 이곳을 재방문 할 것임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쵝오! (한남점에 대한 평은 딴 블로그를 참조할 것, 내 의견은 어디까지나 요 성북점 02-747-1405에 국한 한 것임을!)
내 인생 결혼식이라는 곳에서 사회를 본 것이 총 2번이다. 스스로가 비혼주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을 비웃듯이 세레모니의 사회를 봐달라는 청탁이 꽤 있었다. 고사를 하기엔 결혼에 목숨건 젊은 청춘들의 눈망울이에 몹시도 애달았다. 까칠한 인간이지만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에 승복해 결국은 두 건의 인륜지대사를 진행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 오늘 점심 같이하자. - 머? 농담이지? 나 서울 아냐. 알잖아? - 알아, 임마. 내가 그리로 간다고. - 서울에서 족히 2시간은 밟아야 오는 거린데. - 강원도라 해봐야 엎어지면 코 닿는 땅덩어리에서 얼마나 떨어졌다고 엄살이야. - 출장이야? - 뭐, 그런셈. - 비워둘게. - 도착하면 전화하마.
사회만 봐주었을 뿐이지 신접살림에 두부 한 모 보태지 못한게 아쉬웠던 터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서 자신의 2세를 보고 가라는 녀석을 앞세웠다.
- 불문곡직하고 근처의 수퍼를 알려다오. - 가까운 곳에 있긴 한데 왜? - 왜는 니미 일본의 옛이름을 왜 들먹여. 불문곡직의 의미부정이냐? 까불지말고 어서 불어. - 그냥 가도 된다니까. - 아 그 새끼 계속 말 섞네. 니가 그러면 아 그러세요. 그럼 집으로 갈까요? 하고 내가 물러설까봐? 어서 위치를 대. 잔말 말구. - 조 앞에서 언덕 지나자마자 오른쪽 건물. 그 앞 주차장에 차를 대면 되겠다. - 진즉 그럴것이지. 말 늘어지게시리.
농협이 운영하는 무슨 마트였다. 오후 한가한 시간이라 장바구니 든 여성들의 수가 드믄드믄 보였다.
24롤이 박혀있는 비닐박스를 들어 녀석에게 건네고나니 이것으론 뭔가 허전하다. 명색이 첫 방문 아닌가. 비단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 나를 초대한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림집 방문은 분명하니 하나론 어쩐지 성이 차지 않았다.
- 와이프 포도 좋아하나? - 포도? - 여기 무슨 행사하나봐. 주욱 늘어 놓고 팔고 있네. - 됐어. - 돼긴 씹새. 이 것도 하나 더 사자.
계산대. 미소를 머금은 중년의 캐셔가 합산된 금액을 부른다. 나는 카드로 금액을 지불하기 위해 지갑을 열고 별로 반갑지 않은 내 인생의 원수인 단골카드를 내민다. 그러자 캐셔가 기계적으로 반문한다.
- 적립카드는요?
에? 순간 당황한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고민 한다. 강원도에 있는 친구 집에 왔는데 적립카드를 꺼내는 것은 부적절한 것이 분명하리라. 너무 쫀쫀해 보일까 두렵기도 했고. 그냥 호기있게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면 된다. 하고 오무린 입을 여는 순간.
- 4536요.
앗. 뒤를 돌아보니 뭘 이런걸 다 사려고 하는 미안함에 쩌든 10분 전의 친구는 온데간데 없고 새침한 표정에 계면쩍게 고개를 4도쯤 왼편으로 젖히고 있는 결혼한 아저씨가 서 있었다. 아마도 핸드폰 번호의 뒷번호만 대면 카드없이도 적입이 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 마트였나 보다.
나는 주차장으로 걸어와 트렁크를 열고 거대한 휴지박스를 실었다. 그리고 담배를 한 데 피워 물었다. 포도박스를 들고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거침없이 뿜어 낸 친구는 아직이다. 느려터진 놈. 물이라도 버리러 간 모양인게지. 결혼식에서 주인공은 역시 결혼하는 인간들이라는 게 실감난다. 결혼을 진행해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나같은 변두리적 인간따위는 그들의 현실감 있는 미래적 행보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멀리 마트 앞 정문에 녀석이 나타났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재빨리 밟아 껐다. 이제 녀석을 태우고 녀석의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녀석의 집 같은 곳 따위에는 결단코 가고 싶지 않다. 는 마음이 나를 괴롭혔다. 대체 나는 서울에서 100킬로가 넘게 떨어진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도 사회적으로 사회적인 범주에 맞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중임을 되뇌인다. 미소를 짓는다. 녀석이 차 앞으로 다가오고나니 포도박스 이 외에 손에 플라스틱 바가지 비슷한 무엇인가가 들려져 있는 게 보였다.
- 일정액을 구매한 손님들에게 이것을 나눠준다길래 받아가지고 오느라고.
녀석은 내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주섬주섬 답을 늘어 놓고 있었다. 늦여름의 시골 하늘은 다른 때 보다 더 없이 높아만 보였다.
만약, 분열된 자아가 존재한다면 하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실재로 분열된 자아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상대는 나와 똑 같이 생겼지만 나와 다른 곳에서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을 도플갱어라고들 일컫는다.
하지만, 사실 그리 먼 곳에서 나를 찾고자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변엔 나와 같은 인간이 얼마든지 있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크게는 사회, 작게는 가족이 원하는 인간이 되어가는 우리들에게 사실 자아는 희미하다. 그렇기에 상대를 보며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내 자아가 아닌가 고민하곤 한다.
그것이 내 자아라면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또한 상대의 자아는 누구일까.
만분의 일일지도 모르지만 서로의 자아가 뒤바뀐 케이스도 존재한다. 이 소설은 물론 자아의 익스체인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증오하는 두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는 미고이고 다른 하나는 재경이다. 이름부터가 자아의 분열이다. 우리의 이름은 사실 재경 또는 윤정이다. 하지만, 내 자아에선 미고 또는 효리 따위가 꿈틀거린다. 나는 너무 평범하다. 요컨대 지금 내 삶은 순리대로지만 사실 내가 원하는 삶은 사회의 암묵적인 강요나 필요성을 내포한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내 삶을 요동치게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일탈하지 못한다. 그리고 일탈을 선택한 상대를 무척 부러워하지만 겉으론 끊임없이 질타한다. 질타의 근거는 불확실한 미래다. 결혼을 강요하고, 성공을 기원한다. 삶의 본질은 결혼도, 기원도 어찌보면 사랑도 아니다. 내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채우고 있는 상대를 질시하는 전반기와 자아의 실현을 통해 자유를 획득한 미고가 철저히 괴멸하는 것에 삶의 지리멸렬함을 실감하는 후반기로 나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고가 소멸한다면 재경도 결국은 껍데기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지옥일 터. 삶, 하루하루가 덧 없는 전업주부들에게 이 책은 어쩌면 지옥과도 같은 공감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본다.
물론, 현명한 여성들이 절대 그럴리 없겠지만서도.
뱀다리
임미경. 원래 번역가인가 보다. 번역서가 참 많다. (그러나 히트작은 별로 없는 듯?) 이 책은 그녀의 첫 장편인듯 한데 내용보다 기교에 신경 쓴 흔적이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