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사마가 빌려준 책을 이주만에 다 읽었다. 이름하여 센큐햐쿠하치주욘 또는 이치큐하치욘. 아라비아숫자와 영어로는 원큐에잇포 또는 웬큐에잇티포? 한국어로는 일큐팔사. 1Q84는 일어로 1984와 발음이 거의 같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가 생각하는 하루키 최고의 장편은 댄스댄스댄스다. 양을 쫒는 모험도 좋지만, 결국 완결편이 가장 근사했다. 양과 쥐가 등장하는 4부작중 3,4부가 좋다는 이야기. 1부인 데뷰작 '바람의 노래를 돌어라'. 는 장편이 아니라 탈락. 2부인 '1973년의 핀볼'은 너무 뒷 편들 보다 상대적으로 지루했다.
중간에 노르웨이의 숲을 출간해 '탈아입구적脫亞入歐的 킹 오부 노블(?)'의 칭호를 얻었지만 그가 보여주는 일관된 세계관과는 거리가 먼 로맨스 소설을 접하게 된 나같은 몇몇은 당황하기에 충분했기에 최고의 장편 노미네이트에서 탈락.
세기말에 출간해 의미가 남달랐던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아차상에 명한다. 양사나이와 쥐가 교차하는 4부작을 제외하고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쓰미레와 뮤 그리고 작중화자의 관계는 늘 하루키와 가장 근접해 보였다. (덕분에 나는 대관람차를 볼 때 마다 그 안에 갇혀버린 뮤가 떠오르고, 하룻밤새 하얗게 새어 버린 그녀의 머리를 기억하게끔 되었다)
단편으로 보면 렉싱턴의 유령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침묵'을 몹시 좋아한다.
1Q84를 보면 많은 노래가 나온다. 수년전에 화제가 되었던 해변의 카프카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책과 이 1Q84에 나온 클래식들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클래식과 관계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시 어떤 것을 접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남들보다 느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포니에타나 찰스 쥬르당의 하이힐. 클래식에서 정겨운 80년 소품까지. 나는 그런 것들의 등장에 적잖이 열광하지만, 그것들이 지적하는 올바른 작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책을 읽기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그가 아니고 똑같이 80년대를 관통했지만 그와 나는 코스트코와 동네마트 만큼 양과 질적인 차이가 벌어져버렸다. 그것은 하루키의 책임이 아니다. 엘리트 지식인과 그의 업적에 열광하는 이분법적인 세상이 작용을 도왔다. 나는 지식인의 찌꺼기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삶을 영위해 왔다. 그가 머리 아파마지않는 80년대 인스턴트 팝과 패스트푸드를 먹고 자랐다. 녹미채로 간단한 요리를 해서 먹을 줄 알고, 새로 산 글라스에 1센티미터 정도 버번 위스키인 포시즌을 부어 조금씩 음미할 줄 알지만 나는 야나체크가 누군지 모른다. 진구구장은 아니지만 잠실야구장에 나가 탁 틘 볼 파크를 바라보며 야쿠르트가 아닌 베어스를 응원하고 맥주를 들이켜보아도 그와 나는 다른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난 그 점이 즐겁다. 오히려.
1Q84는 혼란스럽지 않다. 딱 하루키스럽다. 깨끗한 움직임 적절한 음악 깔끔한 식사 절제된 음주 부지런한 습관 잘 빠진 보디 모든 게 그 답다. 그러나 내가 좋아했던 80년대의 소설과 비교해보면 어쩐지 맥이 풀린다. 새로 빤 리바이스 데님에 아이보리색 랄프로렌의 스웨터 그리고 깨끗하게 빤 하얀 테니스화를 신고 있는 하루키지만 20년 전과는 다르다. 그게 책을 보면 고스란히 나타난다. 시간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80년대를 살고 있지만 그것은 추억이되었다. 80년대에 80년대를 묘사했던 순간과는 모든 면에서 달라졌다. 그것은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댄스 댄스 댄스에서 보면 나와 배우가 된 친구가 고급 콜걸을 불러 집에서 뒹구는 씬이 등장한다. 아침까지 창녀와 시간을 보낸 나는 (작중화자) 문득 외친다. 헨리 퍼셀의 아침같아. 그러자, 염소 메이가 맞장구친다. 어쩜!
이를테면 그런 게 부족하다. 묘사도 세심하고 내용도 단단한데 예전처럼 상큼하고 발랄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개를 따며 강렬하게 솟구치던 탄산수가 마개를 따도 조용히 음미해야 하는 포도주로 바뀐 것일까. 나와 함께 반라로 누워 아침을 맞이하는 메이의 호들갑이 보이지 않았다. 그게 나를 슬프게 한다. 하루키도 환갑이다. 누구를 탓하랴. 나도 불혹에 가까워졌는데. 맙소사.
나는 책을 읽고난 후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찾지 않았다. 우연하게도 십수년전부터 읽어왔던 댄스 댄스 댄스에 아주 잠깐 등장한 헨리 퍼셀을 듣고 있었다. (1Q84에서 쓰인 중요한 의미의 신포니에타와는 거리가 먼) 올 해는 퍼셀이 죽은지 딱 350년째 되는 해다. 바로크 시대를 살아간 그가 약관 20세에 완성했다는 판타지아들을 말이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공연을 위해 만들었다는 Musuc for a while을 며칠째 듣는다. 그 때가 그립다. 딱히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다. 알다시피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사라져갔다.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시대는 1980년대가 아니다. 바로, 1Q80년대다. 폭력과 그것을 묵인하는 고딕시대가 아닌 평화와 그것을 작동케하는 평등이 살아 숨쉬기 시작하는. 1Q80년대 말이다.
다이어트 중간보고. 시작한지 두 달, 그러니까 60일이 지났다. 주로 따지면 8주가 지난셈이고, 3등분하면 2/3에 다다른 것. 감회가 새롭다. 오늘은 아침에 서두르느라고 몸무게를 재지못했다. 어제 아침에 저울 눈금을 보고하겠다. 76.9킬로. 76킬로대에 접어들었다. 원래 60일까지 목표가 77.5킬로였는데 무난하게 계체량을 통과한 것. 권투로보면 슈퍼헤비급에서 라이트헤비급으로 두 단계 내려간 셈이다. 목표대로 74킬로대로 접어들면 미들급도 달성가능한 셈. 초기목표로 따지면 라이트 헤비급이지만 사실 내년 여름까지 최종목표는 라이트미들급이다. 67㎏ 이상 71㎏미만의 체중에 도달하면 가능하다. 전문가들이 짜 놓은 그래프상의 정상치는 사실 라이트 미들급이다. 그 아래 웰터급까지 빼면 그야말로 권투시합에 나갈 수 있는 감량수준이 되는 것. 어쨌든, 첫 달에이어 두번째 달도 무사히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이제 마지막 달이다. 결실의 계절이 다가온다. 다이어트 시작전 막연한 목표로 석 달 16킬로 감량 목표 몸무게는 74킬로였다. 그렇다면 3킬로 남은셈이다. 한 달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그날그날의 식단대로 움직이다보면 어느새 목표를 무난히 달성하리라.
다가오는 12일 다이어트 이후 처음 모임에 나간다. 조촐한 블매송년회가 있을 예정이다. 다이어트 시작한 이래 처음 지인들을 만나게 된다. 가슴이 설렌다. 뭐랄까. 마치 의무복무병이 1박 휴가를 받아 서울에 잠깐 다녀가는 기분이랄까. 간만에 과식을 좀 해볼까나. 하하하하. 생각만해도 배가 차오른다. 세상에.
오래된 책의 개정판이다. 1999년즈음에 출판된 책이란다. 개정을 해도 상관이 없는 게 이 책은 여행정보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일본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중년의 남자가 그곳 유명직장인들과 어울리며 스스로 깨닫게 된 몇몇 이야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거다. 일본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그렇기에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결국, 그렇다. 우리가 사대하던 중국은 베이징 원인에서 비롯된 인간들이고, 우리가 비하하거나 말만 들어도 흥분해 마지않는 일본 또는 몽고는 같은 계열의 우랄알타이족이라는 것. 중국이 누리던 지위도 결국 앵글로 색슨족 따위의 등장에 시들해졌지만 어쨌든, 우리는 결국 한 핏줄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일본이 조상들의 오래된 왕릉을 발굴하지 않는 이유가 역사적 우월감을 고조시키지 못하는 것일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들의 조상이 고대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해도 그것이 어찌 수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그것으로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 그저 같은 뿌리를 가진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된다. 단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 옛날, 두 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밀접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다. 왜냐하면, 서로 섞여서 발전했으니까. 백제나 가야문화가 일본국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상대적인 문화적 우월성을 느낄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일본사람들이 같은 시각을 가지고 차분하게 역사를 짚어나가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면 구태여 임나본부설 따위를 퍼뜨려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할 필요도 없는 셈이다. 역사의 중요성은 누가 먼저냐가 아니다. 누가 어떻게 살았고, 앞으로는 어찌 살 것인가. 이다.
아마도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하할 때 조센징(조선인)이라 칭하는 이유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그들이 싫어하는 '왜'라는 한자어를 앞세워 왜인, 왜놈, 왜적이라고 비하하는 역사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없음을 우린 알고 있다. 존중을 받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낡은 것을 버려보면 어떨까. 나는 이 정신없이 널뛰는 두서없는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가이드로서가 아니라, 숨겨진 이야기를 씨니어에게 들어보는 시간으로 보면 나름 유익했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