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식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시도한 인문서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잡식동물로서 인간의 식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책이다. 인간을 포함한 잡식동물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필연적으로 음식과 관련된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먹을 것을 발견할 때마다 이것을 먹어도 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이다. 이 책은 오늘날
논란에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또한 그 논란을 촉발한 장본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마이클 폴란은 채식주의자이다. 나도 한 때 채식을 선언한 적이 있었다. 물론 1개월도 안되 그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것은 내가 타고난 육식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채식주의자들을 정치적으로 국가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지박약의 소치이기는 하나 채식으로만 살아가기란 사실 엄청나게 많은 제약이 따른다. 없이 산 세대를 부모로 두었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개건방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없어서 못 먹어 한이 박힌 세대들에게 그러한 의지의 표명은 체제전복적 반항에 불과하다고 생각되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세대에게조차도 튀는 것을 용서치 않는 세상과 비교해보면 더더욱 채식이 어려운 이유가 자명해진다.
사실 먹던대로, 살아오던 대로 살다가 다른 생활방식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대대로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도려내어 둥글게 만들어 나가는 것을 사회생활이라고들 가르친다. 그 사회생활은 어떤 방식으로든 룰이라는 게 정해져 있고 그 룰은 결국 낡은 것을 대표하게 된다. 식생활은 한마디로 낡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낡은 습관일 뿐이다. 낡음은 물론 먼저 살다간 사람들이 쌓아놓은 지혜의 소산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가치를 부여받는다. 인류가 문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이토록 거창하다. 숟가락 하나 드는 작은 행위조차도 사실 음식문화의 첨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채식은 사실 왼손잡이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만큼 번거롭다. 나 같은 시정잡배市井雜輩 따위가 그러한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채식을 시도했다는 것은 사실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다. 왜일까. 왜 주는대로 먹고자란 생각없는 내가 채식을 선언했었던 것일까. 그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자신만 먹이사슬에서 도망가기위한 비겁한 술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정상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반인륜적으로 짐승을 집단 사육해 집단 도축하는 작금의 시스템에 경악을 느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걷지도 못하는 소를 도축하고, 평생 씹어야 하는 풀을 주지 않고 잉여농산물인 옥수수를 사료화하여 배고픈 소들의 위장을 채워 평생 위산과다, 위궤양 따위를 지병으로 앓다가 그나마 투자한 잉여농산물의 공급시기가 끝나는 시점에 집단으로 도축을 감행하는 인간들의 야만성에 솔직히 제정신이 박힌 인간치고 어찌 채식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실패했던 호기에 불과했었지만 나는 아직도 채식을 꿈꾼다. 채식으로 나 하나만이라도 죄책감에서 벗어나겠다는 얄팍한 마음이 아직도 가슴 구석구석 진하게 베어있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던가. 인간이 고기를 편하게 먹을 수 잇는 것은 도축의 경험을 타인에게 떠 맡겨 두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이 고기를 사냥해 그것을 요리해 먹었던 원시인들이 대량으로 짐승들을 사냥하거나 도축하지 않았던 것은 사냥기술의 발달이 더뎠던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먹을 만큼만 잡아야 내년 또는 내 후년을 기약할 수 있었던 것. 그렇기에 인류는 끈기라는 소중한 음식문화의 한 단면을 스스로 배워나갔다.
작금의 음식문화엔 끈기가 없다. 페스트푸드점에 가서도 음식이 늦게 나오면 호통을 치고 소란을 피운다. 음식을 요리하는 행위는 싸구려 문화가 아니다.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유산인 것이다. 그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먹이사슬의 역류를 통해 돌아본 작가의 상상력과 발품에 박수를 보낸다.
5초에 1명씩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어도 우리 모두가 그것을 책임질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린다. 이럴 때 적어도 바른 먹거리 문화를 시대에 맞게 개조해 나갈 수 없다하더라도 우리가 대체 어떤 음식을 어떤 경로를 통해 섭취해 나가는 정도의 개념은 파악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콜라 하나에도 대체 얼마나 많은 옥수수가 들어가는지를 말이다.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