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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어느 샹하이 아침. 일찍 일어나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택시를 타고 번드bund로 향했다. 나는 그 무렵 중국에 자주 출몰했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비즈니스 트립이고 나쁘게 이야기하자면 허송세월이라고나 할까.
- 동방의 명주를 보고 싶어. 나는 기사에게 말했지만 기사는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는 중국인이잖은가. 한국말을 알아듣기 어려울테지. 나도 역시 너희나라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어찌보면 공평한거다. 현지 교포에게 부탁해 적어 둔 메모를 들이밀자, 환하게 웃으며 출발하는 왕기사.
둥팡밍주는 과연 높은 탑이었다. 눈부시다는 (나로선 무엇이 눈부신지 잘 알지 못하지만)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거대한 관제탑(?)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1층에서 입장료를 계산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귀가 먹먹해지자 빨간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멋진 영어로 둥팡밍주에 대해 지껄이기 시작한다. 샹하이에 온지 만 하루가 지나서 처음듣는 구수한 영어발음이었다. 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귀가 아픈 나는 잽싸게 박스안을 탈출했다.
날씨는 흐렸다. 멀리멀리 다 보일듯 보일듯. 흐렸지만 정말 다 보인다. 거짓말 안하고 멀리 지린성에서 빤쓰바람으로 체조를 하는 초등학생 아이까지 다 보일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게 다다. 회색의 하늘, 똥색의 강 (정말 똥물이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서울로 시선을 향해 보았지만 역시 그것은 무리였다. 남산탑처럼 산 위에 탑을 만들었으면 아마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만.
잔뜩 찌푸린 하늘, 금방이라도 비가 내리칠 것 같은 모습. 혼자서 몇 바퀴를 돌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이내 탈출하기로 마음먹는다. 중력의 힘을 저항하며 오랜시간을 버티기란 역시 여간 고단한게 아니니까.
나는 둥팡밍주 주변을 산책했다. 굉장히 높이 솟아 오른 게 특이한 고가도로 (나는 방금 이 도로를 타고 숙소인 홍챠오에서 이곳 와이탄으로 왔던 것이다.)를 바라보며 정처없이 걸었다. 적어도 이곳은 도쿄의 번화가보다는 사람의 숫자가 덜했다. 그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요컨대 낯선 곳 낯선 거리에 낯선 사람들까지 가득차버리면 방향을 잃기 쉽상인 것이다. 나는 번드의 뚝을 따라 반듯하게 걸어 보았다.
1월의 샹하이는 춥지 않았다. 하지만 꽤 습했다. 바다에 인접한 도시라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내 마음이 그렇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갑자기 대화를 하고 싶어졌다. 누구라도 좋다. 아무라도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 갑자기 내가 속한 나라에서 쓸 수 있는 번듯한 언어로 마구 지껄이고 싶었다. 정말 누구라도 좋았다. 3선의원으로 한 일이라곤 선거때마다 유세만 했던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개떡같은 동네 국회의원이라도 좋다. 자신이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핑계로 지출계를 올리면 번번히 딱지를 놓는 허수아비같은 사장이라도 좋다. 심지어 헤어지는 순간에 너 같은 놈과는 다시는 상종하기 싫다며 다시는 자신앞에 얼쩡거리지 말라던 스토커 김모양이라도 좋다. 요컨대 나는 한국말을 쓰고 싶었다. 내가 이 낯선 세계에 낙오되지 않은 멀쩡한 인간이라는 점을 이야기함으로써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주위엔 내 말 상대가 될 인간은 없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이방인일 뿐이고 아무리 지껄일 사람을 찾아보아도 이곳은 이국땅인 것이다. 나는 단념하고 길을 걸었다. 단념하고나니 극심하게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상점가를 거닐며 나는 끼니를 때우기 위한 가게를 찾아 보았다. 그런데.
- 야야, 그만! - 응? - 너 이 글의 주제가 뭐야. - 그리움. - 어떤? - 이은미! - 장난 치지말고 어떤 그리움이냐고! - 그녀가 없는 허전함에 관한 그리움. - 그녀는 지금 부재중? - 응. - 어째서? - 여름휴가중. - 넌 왜 안갔어. - 나는 이번주가 휴가. - 몇 밤 자면 오는데? - 두 밤. - 지랄, 난 또 뭐 멀리 이민이라도 간 줄 알았네. 암튼 조금만 아프면 아프다고 엄살. 조금만 외로우면 외롭다고 호들갑. 참 너란 놈도. - 그래도 그리운 것은 그리운거야. - 그나저나 이 글의 주제가 뭐냐니까? - 그리움. - 도대체가 말이 안돼. 작문시간이냐. 좀 짧게 써라. 요렇게 조렇게 해서 이렇게 나는 그립다. 뭐 이렇게 간명하고 알기쉽게. - 그렇게 쓰고 있는데 네가 끼어든거잖아. - 관 두자 관 둬. 계속 써. - 싫어. - 왜? - 어차피 주제는 그리움이지만 손이가는데로 쓰다 보니 자꾸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니 나역시 답답했거든. - 왜 아니겠냐. 하여튼.
* * *
그리움엔 이유가 없다. 사랑하는 이가 사라졌다고 내가 쓸 수 있는 문장이 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의심이 많은 인간인지라 아무 글이나 쓰고 싶었다. 아무 글이나 써봄으로써 내 안에 쌓이는 그리움을 한쪽으로 치우려고 했다. 그래서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샹하이에 대한 작은 글, 이를테면 수필따위를 쓰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의 편린이 어째서 지금의 그리움과 연결될지는 나역시 알지 못했다. 나는 끝이 없는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 글을 왜 쓰고 있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과 스스럼없이 자주 대화한다. 하지만 그녀가 있었을 때 또다른 나는 나를 잡아주는 중심추로 기능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속의 나는 그저 궁상일 뿐이다.
어쨌든 나는 그녀가 돌아올때까지 어떤 형식이든 그리움을 해소해야 한다. 글은 내게 좋은 기회를 준다. 아무거나, 아무 이야기나 마구 찌껄이다 보면 어쩐지 그리움이 옅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움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히 해소되지 않는다. 세상사 간단한 것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그녀가 도착하면 내 무의미한 글들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때문에 나는 닥치는 대로 글을 써야만 한다. 내 안에 쌓여만가는 그리움을 치워내야 한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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