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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휘소탕 혈염산하 一揮掃蕩 血染山河
‘강산을 물들이도다’에서 나는 색칠할 도(塗)를 버리고 물들일 염(染)자를 골랐다. 김수철이 한동안 글자를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 물들일 염자가 깊사옵니다. ― 그러하냐? 염은 공(工)이다. 옷감에 물을 들이듯이, 바다의 색을 바꾸는 것이다. ― 바다는 너무 넓습니다. ― 적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제가 즐겨읽는 소설, ‘칼의 노래’의 한 장면입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마다 물들일 염(染)자에 시선이 머무르곤 합니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왜적들의 피로 산하를 ‘물들이셨’습니다. 경망스럽게도,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그리고 무슨 색으로 산하를 ‘물들일’ 수 있을까? 나는 도대체 무슨 색을 가진 걸까...
언젠가 친구들에게 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대답이 ‘조용하다’ 혹은 ‘착하다’는 말. 그리고 그 뿐. 아, 친구들에게 비춰진 저의 색이 고작 이거였나요. “에이, 그것 밖에 없어?”라고 장난스럽게 되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에게 선명하게 기억될 만한 색을 지니지 못한 저를 질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뚜렷한 저의 색을 떠올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친구들이야. 생각해보면, 저야말로 어떤 의식도, 아무런 색깔도 없이 흐리멍텅하게 사는 그런 놈이었습니다. 그저 구시대의 색 바랜 물감에 저의 몸을 맡겼을 뿐, 그게 당연히 옳은 줄 알고...
당분간 저의 색을 찾는 나그네 길에 오르려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일 듯 합니다. 그리고 제가 찾은 저의 색이 시간이 지나도,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해도 절대 바래지 않도록 확실하게 저 자신을 ‘물들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제가 흠모하는 사람들의 색을 취(取)하는데서 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제가 찾는 저의 색의 바탕이 보일 듯 싶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힘겹지는 않을겁니다.
나는 나그네... 다시, 흘러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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