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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웅 이순신. 23전 23승의 무장. 사람들은 그의 가시적인 성과밖에 모르는 것 같은데, 좀 더 피부에 와 닿게 써보면, 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 죽은 병사의 수 많아봐야 300명 이하. 부상당한 병사의 수 대략 1500명. 전선 피해 협선(15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작은 배) 2척이 교전중이 아닌 서로의 과실로 인해 뒤집혀 파손. 직충으로 인해 나무가 어긋난 배는 수리하거나 해체하여 협선으로 만들어 씀. 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적군이 입은 피해 죽은 병사의 수 대략 50000명 이상. 부상당한 병사의 수 정확한 수치(기록이 별로 없음)는 알 수 없지만 12만 이상일 듯. 전선 피해 대선,중선 도합 700여척 이상. 대선을 호위하는 소선들은 셀 수도 없이 파손(역시 큰 전투에서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내용을 살펴보면 내가 생각하는 이순신은, 15세기의 전투에서 16세기의 무기로, 20세기의 해전술을 구사한 무장.(표현이 촌스럽네 -_-) 개전 3개월만에 전세를 180도 역전시킴. 새재를 지나 한양과 평양을 치며 서북상하던 고니시군과 강원도 쪽으로 북상하던 가토군은 보급로가 차단됨에 따라 점령한 곳을 모두 내어주고 동래로 후퇴. 명은 사실 압록을 경계로 일본과 대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 한산도에 통제영을 둠으로써 함대보존전략(러일전쟁, 1차 대전, 2차 대전 당시에 보편화되었던 전략)을 이용. 상대의 보급로 차단, 압박 및 농성을 통한 적군의 지속적 사기저하. 거북선을 도입, 직충의 방식을 채택. 최근의 서해교전 당시 직충전으로 함선과 아군의 피해를 극소화시킴. 충돌함으로써 상대의 공격 명중률을 제로로 만들어 유효타격을 무로 돌리고 자신의 공격을 유효로 만드는, 그야말로 공격이 최상에 방어라는 말에 가장 잘 부합하는 전술. 해전에서의 진과 지형을 가장 잘 활용함. 대표적인 것으로 학익진과 명량해전. 견내량에서 학익진은 도 아니면 모의 위험한 전략이었음. 대표적인 예로 트라팔가 해전이 있음. 학익진 모양의 진형을 짠 프랑스군의 대패, 단 한 명의 프랑스군도 돌아가지 못하고 죽거나 포로. 거북선으로 적의 접근을 차단, 화포의 일시집중타를 이용한 적의 심장부를 전투 초기에 말살시켜 초장부터 적의 전의를 꺾어버리는 그의 전략이 빛을 발함. 견내량파왜병장은 견내량해전과 안골포해전을 합쳐놓았기 때문에 견내량해전만에서의 피해는 알 수 없지만 거북선에 승선한 몇 명의 부상을 제외하면 피해가 없었을 것으로 예상됨. 그에 비해 학익진에 걸린 전선 50여척은 모두 파손.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파손 전에 물에 뛰어들어 생존했지만 그의 부장들(대략 15명) 중에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음. 명량에서는 말 할 것도 없이 지형. 그리고 그의 위기관리능력과 용병술, 고도의 심리전이 빛을 발함. 명량대첩과 노량해전은 사학자들과 군사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해야할듯 함. 의문점이 많음. 명량대첩은 시간상으로는 이순신 함대가 기습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음. 게다가 기습을 받지 않더라도 몇시간 정도는 조수가 불리한 상태에서 싸웠는데 어떻게 도선을 허용하지 않았는지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음. 미친 사학자들 쇠사슬 같은 소리 하지마라 ㅡㅡ 그게 가능했음 이순신 함대는 야음을 틈타 먼저 기습한 뒤에 유인하는 그의 견내량 해전 이후의 스타일의 작전을 구사했을 것이다. 새벽시간에 물살이 바뀌는 시간대를 알고있었을테니. 게다가 노량해전 역시 전사자가 100명이 넘지 않는데 그 중 10명이 전부 조선 장수라는게 너무 의문스럽다..;; 해전에서의 진법 역시 트라팔가 해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 - 역시 1달 전에 썼던 글, 좀 더 자료 조사도 하고.. 이번 겨울 방학때 10 편 정도의 글로 정리해볼 예정 참고자료는 : 충무공 리순신, 대한민국에 고함 이순신과 임진왜란, 충무공 이순신전서, 충무공유사(정부에서 펴낸 책이 있더라구) 등등 때에 따라 일본에서 쓴 책(이순신과 히데요시)과 징비록, 실록 참고도 고려하기 방학 끝나기 전에 시간 있으면 아산 현충사 방문 후 탐방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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