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의 바른 말 고운 말 회관에서 아프리카 밀림의 울부짖음과 중원 무림의 날뜀으로 문화방송의 제작진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은 어느 농부가 있었다. 얄미운 놈 물 먹이기 운동 덕분에 얼떨결에 언감생심 고상한 자리로 초대 받았는데, 뭐 알고 보니, 거기서 바른 말 고운 말이 입에 밴 양반 찾기는 경상남도 사천 앞바다에서 인어를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에라, 내가 한 번 타잔처럼 포효하고 달마처럼 공중부양하여 시대의 ‘진보’ 정신을 만천하에 알려 보자, 하고 문을 걷어차되 문을 부수지는 않고, 신문을 못 보게 하되 신문을 찢지는 않고, 위력(威力)을 보이되 공무를 방해하지는 않고, 뭐 ‘공무집행방해죄는 폭행, 협박에 이른 경우만을 그 구성요건으로 삼고 있을 뿐’이라고 우리법연구회 소속의 포청천이 판결을 내려 줄 테니까, 울부짖되 코끼리는 불러들이지 않아 ‘고통을 줄 의도로 음향을 이용하였다고 보이지는 않게’ 하고, 장풍을 날리되 사람들에게 상처는 입히지 않고, 질서를 유지한다며 감히 설치는 아랫것의 멱살은 잡되 실신시키지는 않아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한 감정의 표현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는 것이 사법부 독립의 핵심 근거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양심이다. 무엇이 양심일까. 양심은 누구나 타고나지만, 그것은 종교와 문화와 교육에 따라 가공된다. 오늘날 중동 사람들은 자살 폭탄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북한의 위정자들은 10대 원칙을 구약시대의 유태인이 10계명을 받들던 것보다 높이 받든다. 1980년대에 의식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한국의 법치는 조롱하고 북한의 인치(人治)는 경외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금처럼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양심은 존재할 수가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양심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다고 법관의 양심이 개인마다 다르다면, 3심 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법관마다 다를 테니까! 따라서 법관의 양심은 구체적 준거가 있어야 한다.
대학의 잔디밭과 대학가의 술집에서 한국의 현대사를 국정 교과서와 정반대로 새로 배운 사람들이 청와대에서 동사무소까지, 대법원에서 지방법원까지, 국회에서 반상회까지, 휴전선에서 제주도까지 사회 곳곳에 나라 곳곳에 진출하여 주류 또는 비토 세력으로 등장한 지도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정권교체는 빙산의 겉보기 현상일 뿐이다. 10분의 9는 그 아래에 있다. 그들이 촛불을 들거나 어깨띠를 두르거나 화염병을 던지면, 열흘이든 백일이든 지극히 높으신 양반은 아침이슬형 침묵을 지키며 경찰의 제지선이 막무가내로 뚫리는 걸 멀찍이서 바라보고 가여운 인간방패들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내버려둔다. 화염병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대로에 마구 던지는 자에게는 7억 원의 생명보험을 들어 주고, 화염병을 몸으로 막는 자에게는 1억 원의 생명보험을 들어 주며, 중도와 사회통합을 외친다.
한국의 현대사가 예전의 국정 교과서와 정반대로 기술된 지는 오래되었다. 일부 고쳤다고 득의만면하지만, 그것은 뿌리가 아니라 가지를 몇 개 치고 시든 잎을 몇 낱 떨어뜨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역사의 양심은 민중사관이고, 민주의 양심은 결과적 평등이고, 민족의 양심은 조건 없는 베풀기이다.
성직자의 양심이 마약 중독자의 양심과 같을 수 없듯이 법관의 양심이 떼법 신봉자의 양심과 같을 수는 없다. 한반도 외에는 자체 모순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낡은 이념이 대한민국 법관의 양심이 될 수는 없다. 우리법연구회의 게시판이 대한민국 법관의 양심이 될 수는 없다. 학창 시절의 혈기와 분노가 대한민국 법관의 양심과 판결이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법과 판례 그리고 자유민주적 법리와 관습과 상식이 대한민국 법관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
여의도의 바른 말 고운 말 회관에서는 동료와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논리와 토론과 표결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되어선 안 된다. 현수막도 안 되고 농성도 안 되고 부적절한 말도 안 된다. 시위대는 경찰 제지선 안에서만 무슨 말이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 방송은 9개의 진실은 감추고 1개의 진실만으로 선동하지 말아야 한다. 법의 최종 수호자들은 숲을 먼저 보고 나무를 보거나 잡초를 보아야 한다. 줌 렌즈를 들이대고 나무 한 그루, 나무 한 가지, 풀 한 포기, 잎 한 장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그러면 흑백은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양심이란 성(城)과 해자(垓字)에 뒤에 숨어, 낡은 이념의 잣대에 따라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법과 판례를 부끄러워하고 조롱하고 뒤집을 권리가 그들에겐 애시당초 없다. 위로 사법부의 수장은 고개를 깊숙이 숙여 자의적(恣意的) 민주독재 이분법에 따라 사과함으로써 판례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기회를 창출하고, 아래로 단독 판사들은 해박한 법률 지식으로 헌법과 법률과 판례가 아니라 떼법의 법리에 따라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우기는 판결을 내린 다음, 입을 조개처럼 굳게 다물고 시대의 선지자연해서는 안 된다.
일반 시민이나 경찰이나 군인이 법정에 서면, 한국의 법관은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게 만든다. 헛기침만 해도 눈을 부라리거나 불호령을 내린다. 그러나 민주, 통일, 민족, 자연보호, 여성주의 등 아름다운 명분을 내세우는 시위자나 자칭 양심수가 법정에 들어서면 이미 20여년 전부터 한국의 법관은 슬슬 기었다. 그들이 떼거리로 몰려 와서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고 야유하고 고함지르고 위협해도, 한국의 법관은 묵묵히 월급 타 먹을 일만 한다. 상전은 법관과 검사가 아니라 피고와 그 동지들이다. 그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무시로 쏟아져 나오는 게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법부 독립의 현실이고, 대한민국 법관이 헌법보다 우위에 두는 양심의 현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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