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필자가 가끔 종종 잡지나 소설, 신문에 난 기사를 스크랩한 것으로 거의 15년 전(?)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아내 몰래 가슴에 묻어둔 슬픈 젊은 날의 사랑> 국군 장교 출신으로 빨치산 女捕虜(포로)와 나눈 7일간의 짧은 사랑을 잊지못해 40년뒤 글로 펴낸 김 재열씨 感動 手記이다. 女子 빨치산을 사랑한 國防軍 將校 김 재열씨, 40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이건만, 아직도 그는 지리산 격전지에서 나눈 7일간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가슴속에 다 담아두지 못한 추억追億을 최근 한편의 글속에 모아 내놓은 그의 至順(지순)한 사랑 이야기는, 겨울철 싸늘한 추위로 자꾸만 움츠러드는 가슴에 한줄기 훈풍을 불어 넣는다.

<정다운 조선의 사람들>
익으면 익을수록 진한 맛이 나는 ,, 것이 포도주라고 하지만, 오랜 세월을 가슴에 담아 놓은 사랑에서 느껴지는 감동과는 그 맛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40년간 가슴에 묻어놓은 사랑, 지난 73년 陸軍 中領으로 軍 生活을 마감한 김재열씨(64세) 1991년은, 젊은 시절 단 7일간 나눈 사랑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미 故人이 된 그녀를 그리며, 그는 최근 한편의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 작품이 신동아 논픽션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못다 핀 지리산 의 꽃’제목에서 얼핏 느껴지듯 그의 글은 비명에 죽은 여자 빨치산의 이야기이다.
 필자를 여러모로 아껴주던 Mrs. Betty Smith 이 분은 교회의 서기로 몇년동안 일했었다. 이 분도 5년 전에 돌아<Passed away> 가셨다. 당시 26연대선봉 중대장이었던, 그가 장안산 포위 공격 중에 만난 여자 빨치산과의 7일간의 사랑담,
그리고 방첩대에 잡힌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녀에 대한 추억담이 주된 내용이다. 우리 역사에서 비극의 한 장을 장식하는 김 재열씨의 이야기는,
1951년 겨울, 한창 전투가 벌어지던 지리산의 한 봉우리에서 시작된다. 한파가 몰아치던,12월의 어느 날 새벽, 김 재열씨는 꿈에서 깨어나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수염이 허연 山神靈이 그 앞에 홀연히 나타나더니, 커다란 알을 그의 손에 넘겨주던 차에, 잠이 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꿈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마냥, 한동안 그는 정신마저도 몽롱한 상태였다.
날이 밝자 김 대위는 곧 바로 激戰地(격전지)로 향했다.
장안산 포위 공격 이 한창이던 51년 12월말, 그는 장안산 남쪽 장수군 반암면 지지리로 향하던 중, 눈 속에서 여자 빨치산을 발견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美軍 야전 잠바 내피를 뒤집어 쓴 채, 눈 밑에 쓰러져 있던,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몰이에 지쳐 쓰러진,한 마리의 산 짐승을 닮아 있었다.
 다우니 목사님 따님. Mrs. Bobby Brooks 인랜드 어소시에이션 (협회)에서 일하심. 98년도부터 만났으니 벌써 12년째 알고 지내는 사이인 셈이네.
김 대위는 쓰러진 그녀를 끌어안으며,
강한 戰慄(전율)에 몸을 떨었다 지난 밤 꿈에, 그는 바로 이 자리에서 山神靈에게 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다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은, 그가 평소에 그려오던 여성상과 너무다 일치했다. "바로 이 여자로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첫 눈에 그녀는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어요"
24세의 젊은 軍人이었던 김 대위는 그 순간부터 극진한 간호를 자청했고, 그 사이 사랑도 움터왔다.

<6.25전쟁의 서울>
20세의 앳된 얼굴을 하고 있던,여자 빨치산의 이름은 오향수, 그녀는 명문 전북여고 출신으로 면장의 딸이었다.
戰爭이 나서 인공이 들어오자 그녀의 가족은 반동으로 몰렸는데, 全北여맹을 主導하던 그女의 동창들이 여맹에 加入해 家族들에게 씌어진, 反動의 굴레를 벗어라는 권유로 그녀는 전북여맹 부위원장 이라는 고위 직책을 맡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전세가 역전되어 국방군에 밀리면서, 운장산, 성수산, 장안산으로 밤낮없이 쫓기느라, 기진 맥진해져 결국 대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비록 온 몸이 동상으로 부어 오르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려, 더할 나위 없이 헝컬어진 모습이지만, 그녀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어요. 단아한 모습이 누추한 행색에서도 엿보이더군요" “激戰地 격전지에 있다는 것은, 바로 죽음 곁에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매일매일, 죽는 꿈을 꿀 정도이었으니까요,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에 처하면 사람들은 아마 세상에 未練(미련)이 더 생기나 봅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痕迹(흔적)이라도 남겨야지,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 온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오던 터에, 그녀를 만나자, 나는... 그녀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남길 흔적이라고 생각했지요.

<오산 미군 기지에서 위문공연하는 .... 갑자기 생각이...>
그는 조심스레 그녀를 중대장실에 옮겨놓고,
극진한看護(간호)로 기력을 되찾아 주었다. 部下들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는 지금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라고 公言 하면서 부하들의 協助(협조)를 구했다. 불완전하나마 기력을 되찾은, 오 여인도 그의 정성에 감복했고, 오랜만에 人間의 내음을 맡으며, 그녀 역시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一週日 동안 전장에서 계속된, 두 사람의 蜜語 밀어에는 이념의 틈바구니가 끼어 들 틈이 없었다. 오 여인이 완전히 氣運을 차리자, 김 대위는 군인 家族證을 만들어 주고, 木浦 목포인 본가로 그녀를 보냈다.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전장은, 여자가 있을 곳이 못된데다, 산 속의 추위는 통 혹독한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永遠한 이별(離別)길이 될 줄은, 그도 그녀도 알지 못했다. 영하20-30도를 오르내리는 지리산의 孤峰(고봉)에서, 힘겨운 作戰에 임하고 내려온,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방위대의 체포였다. 罪名은 빨치산 대원을 隱匿(은닉)해 빼돌린 嫌疑혐의였다. 미모에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곧고, 바른, 오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 들여, 기쁨에 젖었던 본가에도, <오향수> 의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오래전에 박성근 목사님과 함께>
"그녀를 安全한 곳으로 보내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不安 했어요.
그녀가 떠나가면서 마지막으로 한번 내려가다, 뒤를 되돌아 봤는데, 순간 눈에 눈물이 맺히더군요 .
후에, 그녀가 방첩대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차라리 그때 내가 왜 그녀를 죽이지 못했나 후회가 막심 했어요. 내 손으로 죽였더라면, 뼈라도 내가 가질 수 있었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오 향수는 방첩대의 반복되는 審問(심문)에 일체 침묵으로 응하다가, 심문병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벽에 세워 두었던 카빈 소총을 재빨리 낚아 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김 대위와 전부터 알고 지내지 않았느냐는 심문에, 불응 不應하면서 거듭 거듭 ‘그분은 무사하냐’는 물음만을 반복하던, 그녀의 죽음을 전해들은 김대위의 상심은 말할 나위없이 컸다.
 <50년대의 사진>
그에게도 사형이 내려졌다.
평소 平素 勇猛(용맹 )을 떨치다가도 저항력이 없는 적에 대해서도, 유난히 寬大(관대) 했던 態度(태도) 조차 問題삼아 그는 이상적 일탈의 죄명까지 씌운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중이었던지라,
그와 같은 군인을 하나 求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기에다가. 그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들기에는 그의 戰鬪力(전투력)과 指揮力이 너무 아까운 軍人이기도 했다.
그런 점을 감안한 당시 송 해찬 將軍은, 그를 특사로 원대복귀 시켜주는 혜택을 베풀었다. “저 때문에 죽음을 택한 그녀에게, 저는 한동안 罪責感(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어요.
군인으로서의 未來(미래)는 眼中(안중)에도 없었고, 그저 그녀의 痕迹(흔적)을 더듬는 데에만 血眼(혈안)이 되어 지냈습니다.” 復歸(복귀)되자,그는 곧바로 논산 訓練所(훈련소)를 自願(자원)했다.  <로스엔젤레스의 드림 센터에서 일행들과 함께한 차토니>
그녀 故鄕(고향)인 全州(전주) 가까운 곳에서 勤務(근무)하면서,
그녀의 遺骸(유해)라도 찿기 위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오랜 勞力(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遺骸(유해)를 찿을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家族(가족)들을 만나, 뒤늦은 인사를 드리고, 함께 눈물을 떨굴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 후, 4년 뒤, 그는 지금의 아내인 이한순(54)씨를 만나 결혼했다. 約婚(약혼) 前에, 미리 아내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마음의 (정리)를 약속한 그였지만, 정작 結婚(결혼)하고, 맞은 첫 날 밤에,
그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미련보다는 채 살아보지도 못하고,
微明(미명)에 죽은, 오 여인의 넋에 기우는 연민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된다는 아쉬움도 그를 눈물짓게 했다. “아내에게 모든 걸 정리하고, 당신과 결혼한다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어요.
아내 몰래 그녀 사진과 주고받은 便紙(편지)를, 벽에 걸어놓은 사진틀 뒤에 숨겨 놨을 만큼, 저는 결혼) 하고서도 그녀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으니까요. 결국, 아내에게 들통이 나서 한바탕 헤어지자 면서, 난리를 피우고 그 바람에 寫眞(사진)이며, 便紙(편지)를 모두 불태워 버렸지만, 그래도 잊기 어려운 여자였어요"
 조카 손녀 벨라와 함께 - 나에게 있어 모든 어린아이들은 걸어다니는 천사와 같다.
처음에는, 그런 男便(남편)때문에 自尊心(자존심)이 상하기도하고, 때론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던, 아내 이 한순씨! 그러나 지금 그녀는 新婚(신혼) 時節(시절)
男便(남편)과 싸워 오여인의 사진 이며 편지를 모두 불 태워 버린 일을 두고두고 後悔(후회)할 만큼 男便(남편)을 이해하고 산다. 나이 60줄에 들어서야, 人生(인생)을 整理(정리)하는 의미에서 옛날 일을 들춰 내게 됐지만, 사실 그가 理念(이념)에 짓밟힌 자신의 사랑을 글로 쓰게 되기까지에는, 아내의 힘입은바 크다.
비록 오 여인과의 關係(관계) 때문에, 무수한 전투경력에도 불구하고, 進級(진급)이 순조롭지 못해 결국 1973년 陸軍(육군) 中領(중령)으로 퇴역한 남편이지만, 군인사에 처음 있는 로맨스’를 지닌 군인이라며 남편을 부추켜 세우기까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