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ynbee는 그의 < 역사의 연구 >의 방법론에서 인류 문명의 역사는 Spengler의 방법론 처럼 < 발생-성장-절정-쇠퇴-몰락 >의 필연적인 해체 과정을 걷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토인비는 한 문명이 절정에서 쇠퇴의 과정으로 이행하는 때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으로 홍수, 가뭄, 사막화, 인구 증가, 혹한, 지진, 등과 같은 자연 환경의 격변일 수도 있고, 빈부의 격차, 도덕적 타락, 지도 계층의 지도력 상실, 민족의 대이동 같은 사회 환경의 격변일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격변을 토인비는 < 도전 >이라고 하였습니다.
토인비는 하나의 문명이 이런 < 도전 >을 받았을 때 잘 < 응전 >하지 못하면 그 문명은 쇠퇴- 몰락의 과정을 걷게 되지만 훌륭하게 < 응전 >한다면 얼마든지 새롭게 비약 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 역사의 연구 >에서 입증함으로 슈펭글러의 자연법칙적이며 결정론적인 역사 해석을 비판하였습니다.
토인비의 < 도전과 응전 이론 >에서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 둘만한 개념이 창조적 소수자와 지배적 소수자입니다. 창조적 소수자( Creative Minority )란 한 문명을 쇠퇴케하는 그 도전의 기미를 예민하게 간파하고 그 도전에 올바로 응전 하도록 그 사회 구성원을 일깨우고 격려하며 극복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앗수르가 멸망하였다고 좋아하는 이스라엘에게 북방의 끓는 기름 가마의 환상으로 더 무서운 바벨론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 예레미야나 이스라엘의 죄가 이스라엘을 멸망 시킬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선취하여 알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정치, 경제, 예술, 탐험, 과학, 종교, 문학, 교육, 각 분야에 그런 창조적 소수자가 있는 사회는 비약이 가능합니다만 이런 창조적 소수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무시 당하고 조롱 받는 분위기의 사회는 멸망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배적 소수자( Dominant Minority )란, 쉽게 말해서 창조적 소수자가 타락한 모습입니다. 창조적 소수자로서의 사명감과 순수성과 뜨거운 열정 그리고 그 시원한 창조성은 말라붙고 스러진채, 빈껍데기 뿐이면서도 과거의 공로와 투쟁 경력을 밑천 삼아 이미 지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도자로 버텨보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자가 지배적 소수자로 전락 할 때 그 사회나 집단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종내는 몰락 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역사가 깊다고 하는 교회치고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신선한 다이나믹을 발휘하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한 때 창조적 소수자로 이 사회와 교회에 신선한 충격과 비젼을 제시하였던 사람들이 이제 그 창조성을 상실하고 과거의 경력과 과거의 공적을 자꾸 자꾸 울궈먹으면서 앞으로 나가려는 새로운 < 창조적 소수자 >들의 힘찬 발걸음에 딴죽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자도 모자라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미래의 무엇을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자기 것이 아니며 현재 있는 것만이 자기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고 적음에 개의치 않으시고 현재 있는 것을 기꺼이 바칠 때 기뻐 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셔서 다른 사람들을 부요케 할 수 있는 더 큰 기회를 주십니다.
바울은 구제헌금의 목적이 받는 사람은 편안하게 하고, 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균등하게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곧 지금 고린도교회가 넉넉한 것으로 예루살렘교회의 부족을 보충하는 것은, 훗날 예루살렘이 넉넉할 때 고린도의 부족을 보충케 함으로 두 교회 간에 진정한 하나 됨과 교제를 가능케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참된 교회와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과 지체의 각 부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에서 입이 영양분을 섭취하지만 순환작용을 통해 온몸의 영양상태가 균등한 것처럼, 교회가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서 함께 넉넉함과 부족함을 나눌 때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 균등함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탐욕과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 균등함의 진리를 체험하게 될 때 본향을 향한 거침없는 순례의 걸음을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제공: GTM, UPMA
크리스천의 삶과 사랑은 오늘 주신 말씀으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주님안에서 서로가 한형제 한자매로 인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서 자신의 욕심으로부터 벗어나 서로 나누며 사는 기쁨을 배울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웃에 대한 배려가 물질적인 것에 한정된다면 그것은 다른종교나 사회단체들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크리스천들은 물질을 나누어 균형을 이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영적인 부요를 나누는 일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균형을 이루며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라.
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라.
가던 길을 멈추고 노을진 석양을 바라보며 감탄하기에 가장 적당한 순간은,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때이다.
언제든 즉흥적으로 이삼일 동안 짧은 휴가를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는다.
지체하지 말고 미리 가방을 꾸려 놓아라.
자전거를 타고 동네나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아라.
아름드리 나무와 새들, 푸른 잔디 그리고 예쁜 꽃들과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즐겨라.
한 무명의 현자가 이런 말을 했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미스터리,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and today is a gift)
그래서 '오늘'을 영어로 프레즌트(present)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제를 기념하며 축하할 수도 없고,
내일을 기념하며 축하할 수도 없으니,
오늘을 기념하며 축하해야 하지 않을까?
석양뿐만 아니라, 이따금 일출도 보도록 한다.
그렇게 할 마음이 있다면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라.
하루중 가장 어두운 때는 해가 뜨기 직전이라고 한다.
몹시 힘들고 우울할 때는 이렇게 생각하자.
지금이 바로 해가 뜨기 직전이라고, 이제 곧 해가 떠올라
모든 것이 환하고 따사로워질 것이라고 말이다.
인생은 짧다.
그러니 자질구레한 일들로 삶을 채우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인생에는 중요한 일들도 많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일들도 있다.
따라서 그 차이를 포착해 낼 줄 알아야 한다.
그 차이를 구별해 내지 못한다면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온갖 환멸과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유머감각과 삶에 대한 열정을 발휘해
찌 뿌듯한 아침을 산뜻한 아침으로 바꾸어라.
주변환경을 바라보는 당신 자신의 눈을 바꾸면 인생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아무리 우울한 일이라 하더라도 긍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밑에 누워 한두 시간 정도 소설책을 읽을 수 있을 만한 나무를 찾아봐라.
건강 전문가들은 최적의 건강을 누리는 데는 깊은 심호흡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아침에 밖으로 나가 걸음을 멈추고 깊게 심호흡을 다섯 번 정도 해보아라.
뭉개 구름, 새털구름, 양털구름...
구름이 만들어 내는 각양각색의 형태들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어린 시절 이후로 팔베개를 하고 누워 구름을 올려다 본 일이 있었는가?
지금이라고 못 할 것도 없다.
잔디가 아니라면 벤치에라도 누워 지금 당장 한 번 해 보자.
어떻게 하면 삶을 더욱 잘 이끌 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효과적인 이야기가 있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의 가치를 계산하고 싶다면, 당신의 친구들을 세어 보라."
직장동료가 아닌 옛 친구나 일상의 친구들이야 말로
인생과 세계에 대해 더욱 폭 넓은 정보들을 주고받을 수 있다.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인 태도나 매사를 전적으로 일과 관련짓거나,
물질적인 성취만으로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루 해가 저물 무렵엔 하루를 얼마나 잘 보냈느냐는 것 만큼이나,
얼마나 많이 긴장을 풀고 웃고 즐겼는지도 판단하자.
세상과 더불어 행복하고 느긋하며 평온한 기분을 느끼려면,
팔짱 끼고 뒤로 물러 앉아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도록 관망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을 좀 더 배우자.
때로는 뭔가 일이 되도록 애쓰지 말고,
차라리 일이 되는 대로 일어나도록 놔둬 보는 것도 좋다..
하나님이 우리를 체휼하신다는 말씀과 서로 체휼하라는 말씀이 성경에 자주 나타납니다(벧전 3:8). ‘체휼’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다른 사람과 고난을 함께 받는다’ 또는 ‘다른 사람과 같이 느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불쌍히 여기며 위로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주일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서로 위로하고 평안을 빌어 주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중에 더 자주 모여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권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라고 말씀했고,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를 체휼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자료제공: 365 경건메세지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닮아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세상 사회에서는 능력과 실력으로 성공을 가늠하고 평가하지만, 성도들은 사람들을 차별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마음과 자세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가족들에게는 위로와 기쁨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느낄수 있는 참 신앙인으로 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여러분이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듣고서, 여러분을 기억하면서 기도를 올리며,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에베소1:15-16)
참된 교회의 특징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스도께 충성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랑이 있다. 그리스도께 충성하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살았던 수도승이나 은자들은 황야와 같은 곳에 홀로 살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을 포기해 살았으며, 많은 다른 시대의 이단 탄압자들도 그리스도께 충성하기 위해 자기들과 다른 사상을 가진 자들을 박해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동시에 이웃 사람도 사랑한다. 그들은 사람(이웃)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나타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교회가 아무리 정통적이며, 그 신학이 아무리 순수하며 그들의 예배와 제전이 아무리 고상하든지 간에, 사람(이웃)에 대한 사랑을 특징으로 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 윌리엄 바클레이 -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께 드리는 충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옆집 사람이나 길가다 만난 사람들만 이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식구, 성격이 까다로와 함께 하기 너무 힘든 교우나 형제는 물론 우리가 매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타나는 이웃 사랑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잠자고, 아이 낳고 함께 기르는 일, 저쪽의 일방적인 짜증도 참아주는 것이고 지하철에서 다리 벌려 앉지 않는 옆사람을 배려함이며, 힘들어 하는 입시생이나 자기 성질을 못참아 고생을 자초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함께 하는 것이다.
오늘 만나는 모든 이들이 나를 만나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게(기분 좋아지게)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사랑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