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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악명 높은 독점 자본가에서 경건한 농부로, 록펠러

2006.01.07 10:54 | 기본폴더 | 사랑이와행복이

http://kr.blog.yahoo.com/byongwankim/931068 주소복사

 요약

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 석유 회사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됐던 인물. 독실한 청교도 인으로 성실과 경건함을 삶의 지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비열하고 지독한 방법으로 경쟁사들을 고사 시켰으며, 미국 내 석유 자원을 독점해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 수많은 폐해를 끼쳤다. 결국 록펠러에 의해 미국엔 반독점 금지법이 발효됐고, 스탠더드 오일은 수많은 석유 회사로 쪼개진다.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그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으며, 은퇴 후 죽을 때까지 검소하고 성실하며 경건한 농부로 살았다.

 

 사실들

1839년 미국 뉴욕 주의 작은 도시 출생. 코흘리개 시절 이미 사탕을 킬로그램 단위로 구입한 뒤 형제들에게 팔아 이윤을 남긴 바 있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 청교도 가정에서 자라 지독한 기독교 근본주의와 칼뱅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돌팔이 의사에 약장수로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 약을 팔았다. 농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하며 종교를 가르쳤다. 집은 항상 가난했고, 학교에선 록펠러의 꼴이 너무 추하다는 이유로 학급 사진에서 빼 놓기도 했다.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다만 암산을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고.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경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그에게 일과 신앙은 삶의 기둥이었다. 그는 아무리 역하고 지루한 일이라도 성실하고 끈질기게 매달렸으며, 수입의 상당 부분을 교회에 헌금하며 경건하고 품위 있게 살려고 노력했다. 경건한 대신 그에겐 감정이 없었다. 그는 남을 동정하지도 욕하지도 않았으며 항상 모든 일을 기계처럼 냉혹하게 처리했다.

 

1859년 영국인 친구 모리스 클라크와 함께 판매회사 클라크 록펠러 설립. 당시 미국은 이민자들이 급증하고 있었고 거기에 남북전쟁까지 일어나 생필품과 음식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클라크 록펠러는 이 시기에 콩, 밀가루, 소금, 돼지고기 등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고, 나중엔 미국에서 생산된 석유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록펠러는 앞으로도 석유 사업이 지속될까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 조그만 정유소를 사들인다. 이 정유소에서 이익을 본 록펠러는 빚을 내 다른 정유소를 사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든다. 이때 정유소 사업이 갑자기 커지자 록펠러는 동업자와 결별,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큰 정유소를 매입한다.

 

록펠러는 새로운 동업자와 함께 미국 최초의 석유 회사 중 하나인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다. 스탠더드 오일의 성공 요인은 "규모의 경제"였다. 록펠러는 기가 막힐 정도로 돈을 잘 빌렸고 그렇게 빌린 돈으로 사업의 규모를 키우는데 전력을 다한다. 그는 사업 시작 1년 안에 대부분의 경쟁 업체를 매입했고, 경쟁사에 스파이를 파견해 정보를 빼내는 방식으로 무너뜨리거나 적대적 인수를 해 나갔다. 특히 그는 석유 생산량을 늘림으로써 생산가를 낮추고 이에 따라 판매가도 낮춰, "대량 생산 저가 판매"가 불가능한 경쟁사들을 고사 시켰다.

 

록펠러는 가격 변동이 심한 목재와 수송비를 통제하기 위해 아예 숲과 증기선을 사들여 직접 석유 운송을 관리했다. 그리고 철도 재벌과 계약을 체결해 철도 운송권까지 손에 넣는다. 이렇게 록펠러는 더욱 낮은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면서 그의 표현대로 경쟁사들이 "땀을 질질 흘리게" 만들었다.

 

록펠러는 미국 전역의 석유 사업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그는 유전이 발견되기가 무섭게 나타나 그 일대를 접수했으며, 석유 공급로의 땅까지 사들여 경쟁사들이 송유관을 설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국 전역에 90%의 정유소를 소유하게 된 록펠러는 그러나, 가장 많은 이윤을 내는 단 3곳의 정유소에서 거의 모든 양의 석유를 생산한다.)

 

이렇게 모든 경쟁사를 쓸어 버린 록펠러는 독점 자본가로써 악명을 드높인다. 그는 자기 회사의 노동 운동을 철저히 탄압했으며, 끊임없이 경쟁사들의 싹을 짓밟아 자본주의 시장환경을 저질화 시켰다. 록펠러는 양질의 석유를 생산하지도, 새로운 기술을 창출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경쟁자들을 몰락시키며 독점적으로 석유를 뽑고 팔아 막대한 부를 챙길 뿐이었다.

 

미국 사회는 이 무식하도록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잔혹한 석유 독재자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록펠러에 의해 결국 미국엔 독점 금지법이 생겨났으며, 1911년 미국 대법원은 마침내 스탠더드 오일의 해체를 명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이 석유 독점 기업은 34개의 회사로 해체됐으며, 오늘날 엑손, 셰브런, 모빌, 아모코 같은 거대 석유 기업의 탄생을 가져 온다.

 

그러나 록펠러는 이미 경영에서 물러나 여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20세기 초 세계 최고의 갑부였으며, 그리고 세계 제일의 자선 사업가였다. 그는 자신의 자선 사업을 하느님의 요청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시카고 대학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의학 연구소를 개설하고 수많은 학교, 박물관, 도서관 등을 세웠다. (오늘날 돈의 가치로 계산해 볼 때 그는 거의 60억 달러를 사회에 환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선 별 돈을 쓰지 않았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수도승처럼 살았다. 술 담배를 금했으며 파티나 극장에 가는 일도 없었다. 자식들 용돈도 또래 친구보다 적게 줬다. 1937년 그가 9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는 주변에 사는 다른 농부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해 떨어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고 일요일은 종일 교회에서 보냈다.

  

 

[스크랩] 집단사고: 피그만 침공과 탄핵 결의의 공통점

2005.07.13 18:15 | 기본폴더 | 사랑이와행복이

http://kr.blog.yahoo.com/byongwankim/931067 주소복사


카스트로와 케네디, 그리고 피그만 계획을 주도한 CIA 간부 하워드 헌트




보통 머리를 맏대고 생각을 모으면 더 좋은 생각이 나올 것이라고들 기대한다.
하지만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머리를 모으면 좋은 생각보다는 황당한 생각이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미국은 1961년 4월 초 미국에 망명해 있던 쿠바인들을 배후조종해서 그들로 하여금 피델 카스트로를 공격하게 만들자는 작전을 짰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7일 CIA가 과테말라에서 훈련시킨 1300여 명의 침공군이 쿠바 남부 코치노스만(피그만) 해안에 상륙, 침공을 개시했다.

미국의 예상에 의하면 이 침공직후 쿠바민중들이 봉기를 해서 카스트로 정권을 몰아내고 소위 자기들이 말하는 자본주의 민주정부가 수립될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쿠바민중은 구시대의 잔재였던 망명쿠바인들 보다는 카스트로의 혁명군 편을 들었고,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했던 쿠바혁명군 마저 신속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이 작전은 4일 만에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침공군은 100여명 이상이 죽고 12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쿠바 내부에서는 반혁명군이 기대한 국민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음은 물론 국민의 단결은 더욱 강화되고 이른바 <미제국주의>에 대한 자신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 카스트로는 남아있던 1179명의 포로들을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 상당의 식품과 의약품을 받고 교환했다.



쿠바에 기념물로 남겨져 있는 당시 침공군의 글라이더 잔해



이 사건은 미국이 저지른 가장 처절한 삽질 중의 하나로 아직까지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당시의 정황을 재조사한 역사가들에 의하면 미국정부의 수뇌부가 정말 무슨 생각으로 이 계획을 입안했는지, 그들에게 제정신이 남아있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울만큼 얼토당토 않은 계획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쿠바국민들의 민심을 오해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구체적인 작전계획부터 엉망진창이었다.
예를 들어, 침공지역인 피그만과 재집결장소인 에스캄프리 산악 사이에는 수백킬로의 늪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아무도 이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침공군은 결국 이 늪지에 빠져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서 포로가 되고 만 것이다.

왜 이런 멍청한 짓거리가 일어난 것일까?
그것도 작전깨나 세워봤다는 군수뇌부와 정보부 핵심인물들이 모여서 내놓은 계획이 말이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집단사고(group thinking)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계획을 짜기 시작하면,
이들의 생각은 현실성을 망각하며 반대의견을 무시하고 점차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계획팀에 참여했던 대통령 안보보좌관 아서 슐레진져는 이 작전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문제를 지적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왜냐하면 회의에 참석한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는데 괜히 자기가 나섰다가 미움만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사람들이 점점더 극단적인 낙관론, 극단적인 행동을 주장하게 되는 경향을 집단 극화현상(group polarization)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계획에 문제가 있다면 누군가는 지적하겠지라고 믿으며 문제제기를 포기하고 넘어가는 경향을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라고 한다.

그들이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이런 과정이 계속 축적되면서 결과적으로 그런 뻘짓거리가 나올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집단과정이 멍청한 짓거리만은 아니다.
가상현실에 관한 글에서 언급한 바 대로, 믿음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바로 이런 집단과정의 다른 면이다. 실제로 이 피그만 침공계획 입안자들도 새로운 가상현실을 만들어낸 셈이기도 하다.

그들이 공유한 믿음 속의 피그만은 (현실과는 전혀 다르게도) 미국의 침공을 환영하는 쿠바인민들이 가득찬, 탄탄대로였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이 옛날 이야기를 지금 쓰는 이유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이번에 저지른 짓거리 역시 이 집단사고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힘겨루기를 위한 탄핵 운운에서 시작해서 설마 설마하던 진짜 탄핵결의를 저지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들이 머리를 맏대고 믿음을 공유하면서 결국 자기들만의 가상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속에 빠져서 말도 안되는 멍청한 짓을 저질러 버렸음을 알수 있다.

자기들이 대통령 탄핵을 하면 전국민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줄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마치 자기들이 침공하면 전 쿠바인민들이 열렬히 환영할 것이라고 믿었던 피그만 침공조의 심리 상태와 똑같은 것이다.

그 이후에도 정신 못차리고 TV 토론 같은데에 멍청한(어쩌면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을지도 모른다만) 인간들을 내보내서 자기들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지를 만천하에 폭로하는 짓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들이 제대로 된 현실감각을 갖추고 있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들은 사이버 공간에 빠져서 사는 인터넷 폐인들을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을지 모르나, 자신들이야말로 국회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지들끼리 믿음을 공유하며 인터넷 폐인들보다 더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세계속에서 빠져 살았던, 국회 폐인들이었던 것이다.




여튼, 그런 면에서 나는 이 집단 사고과정이 정말로 고맙다.

그 덕분에 이 나라의 역사가 예기치 않게 한걸음 진보할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집단사고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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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는 이런거래요...


       
      부부는...
      항상 서로 마주보는 거울과 같은 거래요.
      그래서 상대방의 얼굴이 나의 또 다른 얼굴이래요.
      내가 웃고 있으면 상대방도 웃고 있고요.
      내가 찡그리면 상대방도 찡그린데요.
      그러니 예쁜 거울속의 나를 보려면,
      내가 예쁜 얼굴을 해야겠지요.
       
      부부는...
      평행선과 같아야 한데요.
      그래야 평생 같이갈수 있으니까요.
      조금만 각도가 좁혀져도 그것이 엇갈리어
      결국은 빗나가게 된데요. 부부의 도를 지키고
      평생을 반려자로 여기며 살아가야 한데요.
       
      부부는... 무촌이래요.
      너무 가까워서 촌수로 헤아릴 수 없어서 그렇데요.
      한몸이니까요. 그런데 또 반대래요.
      등돌리면 남이래요. 그래서 촌수가 없데요.
      이 지구상에 60억이 살고 있는데
      그중의 단 한 사람이래요.
      얼마나 소중한... 이 세상에 딱 한 사람...
      둘도 아니고 딱 한사람...
      나에게 가장 귀한 사람이래요.
       
      부부는...
      반쪽과 반쪽의 만남이래요.
      한쪽과 한쪽의 만남인 둘이 아니라.
      반쪽과 반쪽의 만남. 하나래요.
      그러니 외눈박이 물고기와 같이 항상
      같이 있어야 양쪽을 다 볼 수 있데요.
       
      부부는...
      마음에 들었다 안들었다 하는 사이래요.
      어찌 다 마음에 들겠어요.
      다른 것이 너무 많은데요.
      그래도 서로의 마음에 들도록 애써야 한데요.
      부부는 벽에 걸린 두 꽃장식과 같이,
      편안하게 각자의 색채와 모양을 하고
      조화롭게 걸려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데요.
       
      부부는...
      한쪽 발묶고 같이 걷는데요.
      같이 하나 둘. 하나 둘하며... 같이 걷는데요.
      아니면 넘어지고 자빠진데요.
      그래서, 부부는 발자국을 같이 찍어간데요.
      흔적을 같이 남긴데요. 자식이라는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기고 간데요.
      사랑스런 흔적을 남기고 간데요.
       
      부부는... 닮아간데요.
      같이 늘 바라보니 닮아간데요.
      그래서 결국... 까만머리가 하얗게 같이 된데요.
      그래서 서로서로 염색해 주면서
      부부는 늘 아쉬워 한데요.
      이 세상 떠날 때.....
      혼자 남을 반쪽을 보며 아쉬워한데요.
      같이 가지못해 아쉬워한데요.
      요단강 같이 건너지 못해서 아쉬워한데요.
      부부는 늘 감사한데요.

       
      =둘리스=



♥click♥시와사랑의샘터

크럽제목은
"삶의여백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생각 "       입니다
자주오셔셔 가족앨범위주로  많이 편집해 주세요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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