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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미국 뉴욕 주의 작은 도시 출생. 코흘리개 시절 이미 사탕을 킬로그램 단위로 구입한 뒤 형제들에게 팔아 이윤을 남긴 바 있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 청교도 가정에서 자라 지독한 기독교 근본주의와 칼뱅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돌팔이 의사에 약장수로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 약을 팔았다. 농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폭력까지 행사하며 종교를 가르쳤다. 집은 항상 가난했고, 학교에선 록펠러의 꼴이 너무 추하다는 이유로 학급 사진에서 빼 놓기도 했다.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다만 암산을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고.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경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그에게 일과 신앙은 삶의 기둥이었다. 그는 아무리 역하고 지루한 일이라도 성실하고 끈질기게 매달렸으며, 수입의 상당 부분을 교회에 헌금하며 경건하고 품위 있게 살려고 노력했다. 경건한 대신 그에겐 감정이 없었다. 그는 남을 동정하지도 욕하지도 않았으며 항상 모든 일을 기계처럼 냉혹하게 처리했다.
1859년 영국인 친구 모리스 클라크와 함께 판매회사 클라크 록펠러 설립. 당시 미국은 이민자들이 급증하고 있었고 거기에 남북전쟁까지 일어나 생필품과 음식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클라크 록펠러는 이 시기에 콩, 밀가루, 소금, 돼지고기 등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고, 나중엔 미국에서 생산된 석유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록펠러는 앞으로도 석유 사업이 지속될까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 조그만 정유소를 사들인다. 이 정유소에서 이익을 본 록펠러는 빚을 내 다른 정유소를 사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든다. 이때 정유소 사업이 갑자기 커지자 록펠러는 동업자와 결별, 클리블랜드에서 가장 큰 정유소를 매입한다.
록펠러는 새로운 동업자와 함께 미국 최초의 석유 회사 중 하나인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다. 스탠더드 오일의 성공 요인은 "규모의 경제"였다. 록펠러는 기가 막힐 정도로 돈을 잘 빌렸고 그렇게 빌린 돈으로 사업의 규모를 키우는데 전력을 다한다. 그는 사업 시작 1년 안에 대부분의 경쟁 업체를 매입했고, 경쟁사에 스파이를 파견해 정보를 빼내는 방식으로 무너뜨리거나 적대적 인수를 해 나갔다. 특히 그는 석유 생산량을 늘림으로써 생산가를 낮추고 이에 따라 판매가도 낮춰, "대량 생산 저가 판매"가 불가능한 경쟁사들을 고사 시켰다.
록펠러는 가격 변동이 심한 목재와 수송비를 통제하기 위해 아예 숲과 증기선을 사들여 직접 석유 운송을 관리했다. 그리고 철도 재벌과 계약을 체결해 철도 운송권까지 손에 넣는다. 이렇게 록펠러는 더욱 낮은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면서 그의 표현대로 경쟁사들이 "땀을 질질 흘리게" 만들었다.
록펠러는 미국 전역의 석유 사업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그는 유전이 발견되기가 무섭게 나타나 그 일대를 접수했으며, 석유 공급로의 땅까지 사들여 경쟁사들이 송유관을 설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국 전역에 90%의 정유소를 소유하게 된 록펠러는 그러나, 가장 많은 이윤을 내는 단 3곳의 정유소에서 거의 모든 양의 석유를 생산한다.)
이렇게 모든 경쟁사를 쓸어 버린 록펠러는 독점 자본가로써 악명을 드높인다. 그는 자기 회사의 노동 운동을 철저히 탄압했으며, 끊임없이 경쟁사들의 싹을 짓밟아 자본주의 시장환경을 저질화 시켰다. 록펠러는 양질의 석유를 생산하지도, 새로운 기술을 창출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경쟁자들을 몰락시키며 독점적으로 석유를 뽑고 팔아 막대한 부를 챙길 뿐이었다.
미국 사회는 이 무식하도록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잔혹한 석유 독재자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록펠러에 의해 결국 미국엔 독점 금지법이 생겨났으며, 1911년 미국 대법원은 마침내 스탠더드 오일의 해체를 명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이 석유 독점 기업은 34개의 회사로 해체됐으며, 오늘날 엑손, 셰브런, 모빌, 아모코 같은 거대 석유 기업의 탄생을 가져 온다.
그러나 록펠러는 이미 경영에서 물러나 여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20세기 초 세계 최고의 갑부였으며, 그리고 세계 제일의 자선 사업가였다. 그는 자신의 자선 사업을 하느님의 요청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시카고 대학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의학 연구소를 개설하고 수많은 학교, 박물관, 도서관 등을 세웠다. (오늘날 돈의 가치로 계산해 볼 때 그는 거의 60억 달러를 사회에 환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선 별 돈을 쓰지 않았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수도승처럼 살았다. 술 담배를 금했으며 파티나 극장에 가는 일도 없었다. 자식들 용돈도 또래 친구보다 적게 줬다. 1937년 그가 9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는 주변에 사는 다른 농부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해 떨어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고 일요일은 종일 교회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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