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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8/10
 

카슈미르 분쟁: 지옥으로 변한 지상 천국

2006.07.03 13:15 | 분쟁지역 | 에삼

http://kr.blog.yahoo.com/buyer_kr/52 주소복사

이근수 (연구위원)

카슈미르(Kashmir) 지역은 인도의 북부와 파키스탄의 북동부, 그리고 중국의 서부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면적은 22만 여㎢로서 한반도 넓이와 비슷하다. 히말라야 산맥의 고산지대를 끼고 수려한 계곡이 많아 "지상 천국(Heaven on Earth)"이라는 별명처럼 세계적인 관광지로서 유명하며, 고급 양모 생산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상 천국이 지금은 불타는 '지옥'이 되었다. 카슈미르 분쟁으로 인해 주민, 역사, 문화,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에 분포되어 있는 1300만 카슈미르인들(Kashmiris)은 역사적으로도 회교, 힌두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세력의 경계지대에 위치하여 외침을 받기도 했으나, 종교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수세기 동안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왔다. 또한 1846년 이래 약 100년의 식민통치기간 중에도 종주국 영국은 상업주의에 입각하여 평화와 안정을 중시했기 때문에 폭력적 사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식민통치가 끝나면서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정치적 알력과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려 들어간 것이다. 카슈미르 지역은 1948년 7월 인도령(Jammu and Kashmir)와 파키스탄령(Azad Kashmir)으로 양분된 이래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벌어진 50여 년 동안의 크고 작은 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인도령 카슈미르의 일부는 인도-중국 국경분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1949년 1월부터 카슈미르 지역에서 유엔 인도-파키스탄 국경감시단(UNMOGIP)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한국군도 1994년 11월부터 정전감시요원을 파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7년 8월 영국이 인도 대륙에서 철수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은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귀속 여부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카슈미르는 지역 주민의 대부분(77%)이 회교도였던데 비해, 소수 힌두교계(22%)가 통치권을 행사하는 토후왕국(土侯王國)이었다. 동년 10월 회교세력간의 불화를 틈타 마하라자(Maharajah Harasingh) 토후왕이 인도 편입을 결정하면서, 카슈미르 전쟁(1차 인-파 전쟁)이 발생하였다.

  1947년 10월 파키스탄의 지원 아래 카슈미르 무장부족집단이 수도인 스리나가(Srinagar) 점령을 시도하자, 이에 대항하여 인도군이 즉각 공수되었다. 동년 11월 인도의 네루(J. Nehru, 1889-1964) 수상은 주민투표에 따라 카슈미르의 장래를 결정하기로 약속하였고, 1948년 1월에는 카슈미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1948년 3월 인도-파키스탄 간의 정규전으로 발전되기도 했으나, 양측은 직접적인 충돌은 가급적 회피하는 등 제한전 양상을 보였다. 1948년 8월 유엔의 중재로 정전 합의가 이루어졌고, 양측은 각각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낸 채 1949년 1월 정전협정이 발효되었다. 결국 카슈미르 지역은 동년 7월의 카라치(Karachi) 협정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에 의해 각각 63%와 37%씩 분할 점령되었고, 1963년 인도는 잠무-카슈미르 지역을 1개 주(州)로 편입하였다.

  명확한 국경선 획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양분된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싸고, 1964년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유엔의 정전감시활동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까지 양국은 정전 경계선을 따라 크고 작은 충돌을 벌여왔다. 1964년에 들어 인도령 카슈미르에 대한 파키스탄 측의 공격이 잦아졌고, 동년 12월 인도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에 대해 반격을 가함으로써 양국간 전면전이 촉발되었다. 1965년 4월에는 양국 남부 접경 쿠츠(Rann of Kutch) 지역을 둘러싸고 양국 정규군간의 일대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동년 5월 일시적인 정전이 성립되었으나, 8월에는 파키스탄의 비정규군이 인도령 카슈미르에 침투하였고, 인도군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어 파키스탄은 1949년에 설정된 정전 경계선을 넘어 반격하였고, 9월에는 인도군이 전 전선에 걸쳐 파키스탄을 공격하였다.

  1965년 9월 중국의 개입으로 인-파 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미 두 차례(1959년과 1962년) 인도와 국경충돌을 벌인 바 있는 중국이 파키스탄 측을 지지하면서, 중국-인도 접경지역에서 인도군의 철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인도 북동부의 시킴(Sikkim)과 중국의 티베트(Tibet) 접경에서 인도-중국간 교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5년 9월 유엔의 제의로 인-파 정전이 발효되면서 대규모 지상전은 종식되었다. 이에 따라 1948년부터 활동해온 유엔 인-파 국경감시단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유엔 인-파 감시임무단(UNIPOM, 1965. 9-1966. 3)이 창설되어 양국 병력 철수를 감독하였다. 인-파간의 산발적인 교전은 11월까지 지속되었고, 티베트-시킴 지역의 전투도 12월에 종료되었다. 소련의 중재로 1966년 1월 타슈켄트 선언(Tashkent Declaration)이 발표됨으로써 전쟁은 공식 종결되었는데, 이에 따라 양국은 1949년 설정된 정전경계선으로 복귀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전쟁으로 양측은 각각 2-3천 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슈미르 문제는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물론 양국의 국내 정치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이다. 동·서 파키스탄간의 정치적 내분에서 시작되어 동파키스탄이 독립국가 방글라데시로 분리되는 벵갈전쟁(3차 인-파 전쟁)이 1971년 12월에 발발되었다. 이 전쟁에서도 카슈미르 지역은 주요 전장이 되었다. 1972년 1월 시믈라(Simla) 협정으로 전쟁이 종료되었는데, 이 협정상의 카슈미르 정전경계선이 오늘날의 통제선(Line of Control)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카슈미르 분쟁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갈등을 배경으로 한 분쟁으로서, 인도-파키스탄 및 인도-중국 간의 국경분쟁 성격을 지녀왔다. 그리고 인도 측을 지원하는 러시아(소련), 파키스탄을 지원하는 미국과 중국 등 개입세력의 국제관계 역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분쟁이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는 내전의 성격이 가미되었다. 인도령 잠무-카슈미르 주에서 분리독립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88년 8월 회교세력이 중심이 되어 잠무-카슈미르해방전선(JKLF)이 결성된 이래 회교 무장세력(Holy Islamic Army)과 인도 정부군과의 무력 충돌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잠무-카슈미르는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에서 유일하게 회교도가 다수(64%)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1990년대 들어 카슈미르 분쟁은 주로 인도 정부군과 잠무-카슈미르 반군간의 대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유엔의 정전감시활동으로 인도-파키스탄 통제선이 비교적 평온한 데 비해, 잠무-카슈미르 주 안에서는 회교도와 힌두교도간의 반목과 대립을 배경으로 여전히 테러와 폭동,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인도군과 회교 반군간의 무차별적 투쟁과정은 민간인 피해를 가중시키고 있다. 회교 반군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군사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1989년 이래 7만 여명의 카슈미르인이 사망했는데, 비무장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4만 명이 옥고(獄苦)를 치렀고, 17만 5천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사회는 이러한 심각한 인권 유린사태에 주목하면서, 교전 양측에 대해 인권 존중과 인도주의 준수를 호소하고 있으나, 상호 보복의 악순환은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1999년 한해 동안에만 카슈미르 지역내 사망자는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카슈미르 분쟁 53년을 돌아볼 때 종교세력간의 갈등 성격만으로 참혹한 분쟁을 설명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오히려 카슈미르 주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인도-파키스탄 간의 지역 패권 투쟁, 인도의 강압통치, 인도령 카슈미르 회교도에 대한 파키스탄의 배후 조종 등에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도 정작 카슈미르 분쟁을 공정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유엔의 정전감시단이 상주하고 있는 것도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제4차 인-파 전쟁을 예방하는 의미가 크며, 지금까지 카슈미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탈냉전 이래 인권문제에 관한 세계적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가운데, 카슈미르 분리독립운동의 정당성에 대해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5년 10월 인도의 유력 잡지 『아웃룩(Outlook)』이 잠무-카슈미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대다수(70%)가 평화를 가져올 '독립'을 원하고 있으며, 인도군의 '인권침해' 사실을 거의 모두(90%) 인정하고 있는 가운데 회교근본주의자들에 대한 '혐오' 역시 높은 비중(66%)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국제사회가 카슈미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대화와 생산적인 외교 노력으로 인도-파키스탄 간의 적대관계 청산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카슈미르 분쟁은 인-파 양국의 저개발과 빈곤을 초래하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이다. 11억 5천만 명에 육박하는 양국의 주민들은 카슈미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써 심각한 피폐와 정체 속에 신음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 10억 인구중 절반이 절대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가운데, 인도군 총병력(117만 3천 명, 1999년 기준)의 25%인 30만 명이 카슈미르 지역에 파견되어 있으며, 1998년 이래 매년 100억불이 넘게 지출되는 군사비의 상당 부분이 카슈미르 분쟁과 직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적인 빈곤국으로 분류되고 있는 파키스탄 역시 매년 정부예산의 40%인 30억불 내외의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는데, 이는 300억불이 넘는 대외 채무 상환에 쓰이는 원리금에 해당하는 비용이다. 결국 양국은 자국 주민들의 복지 대신에 카슈미르 분쟁과 핵무기 개발을 통해 패권 경쟁에서의 우위 확보에 몰두하고 있는 셈이다.

  1994년 이래 인도와 파키스탄은 5차례의 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화해 분위기 조성에 노력해왔다. 최근 양국 수상은 1999년 2월 라호르 선언(Lahore Declaration)에서 지역 평화와 안보, 그리고 카슈미르 문제 해결 등을 최고 국익으로 재확인하였다. 양국이 평화공존 원칙에 입각하여 상호 신뢰구축과 협력방안을 모색하기로 한 것은 카슈미르 분쟁의 해결 전망을 한층 밝게 하는 계기로 평가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핵무장국 간의 긴장완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카슈미르인들의 소망인 인권 보장과 독립이 평화적으로 달성되어 '지상 천국'을 되찾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국방일보」 2000년 5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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