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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8/10
 

[펌]과학전쟁'의 논쟁점들: '두 문화', 과학의 역사성, 그리고 과학의 민주화

2008.02.20 13:08 | 기본폴더 | 에삼

http://kr.blog.yahoo.com/buyer_kr/1231 주소복사

'과학전쟁'의 논쟁점들: '두 문화', 과학의 역사성, 그리고 과학의 민주화



'과학전쟁(Science Wars)'이란 1990년대 들어 과학 활동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이른바 '표준적' 과학관을 고수하는 과학자·과학철학자들과 (사회)구성주의적 입장에 동조적인 과학학자들간에 벌어진 논쟁을 가리키는 말이다. 과학전쟁의 기원을 과학혁명기 이후의 계몽사조와 낭만주의의 격돌까지 거슬러올라가 파악하는 사람도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가 본격적인 논쟁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과학전쟁은 1994년 폴 그로스와 노먼 레빗의 책 『고등미신』의 출간과 함께 본격 점화된 후, 1996년 앨런 소칼의 논문 날조 사건과 1997년 소칼과 브리크몽이 함께 지은 『지적 사기』의 출간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후 논쟁은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현재는 지나치게 과열되었던 당시의 감정적 대립을 반성하고 서로간의 화해와 '평화'를 모색하며 과학전쟁을 '넘어서기' 위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도 지난 5년간 소규모의 '과학전쟁'이라고 할 만한 논전이 수 차례 전개된 적이 있었다. 1998년에는 국민대 사회학과 김환석 교수와 서울대 물리학과 오세정 교수가 ≪교수신문≫의 지면에서 짧은 논쟁을 벌였고, 2001년 봄에는 한림대에서 '과학전쟁 대토론회'가 열려 참석자들간에 열띤 논쟁이 진행되기도 했다.

과학전쟁은 현대 과학기술의 이해를 놓고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인 쟁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중 필자에게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다음 세 가지 쟁점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주1) <1> 과학전쟁은 이른바 '두 문화(two cultures)'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가? <2> 과학전쟁에서 제시된 과학 활동의 성격에 관한 논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과학지식은 그 본성상 확실하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인가, 아니면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받아 '구성되는' 존재인가? <3> 과연 얼마만큼 알아야 과학기술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가? 과학기술과 관련된 세부쟁점을 '잘 모르는' 일반시민이 과학기술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정당한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과학전쟁이라는 사건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현대과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전쟁은 '두 문화' 갈등의 소산인가?


흔히 과학전쟁은 고질적인 '두 문화' 갈등이 1990년대 들어 폭발적인 형태로 분출된 결과물로 이해되고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두 문화'는 영국의 C. P. 스노우가 1959년에 행한 리드 강연 <두 문화와 과학혁명>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오늘날 인문문화와 과학문화 사이의 상호무지와 오해, 반목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스노우는 자신의 강연에서 특히 인문문화의 과학에 대한 무지를 개탄하고 과학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그의 입장은 고급 인문문화를 대변하는 F. R. 리비스 같은 이들의 반발을 초래해 유명한 스노우-리비스 논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면 '과학전쟁'은 3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어 나타난 스노우-리비스 논쟁의 재판(再版)인 것일까? 그렇게 간단히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우선 과학전쟁의 대립 양상은 과학자와 인문학자(과학학자)간의 일대 격돌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한 모양새를 띠고 나타났다. 자연과학자들 중에서도 과학학에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과학학자들 중에서도 구성주의적 흐름에 비판적인 이들(특히 과학철학자들)은 상대주의적 과학학을 비판하는 움직임에 동조했고, 이러한 양 극단이 아닌 제 3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를 '두 문화' 갈등의 산물로 환원하는 이해방식은 오히려 그런 갈등을 더욱 부추길 위험이 있다.

또한 과학전쟁의 대립구도는 지난 30여년 동안의 과학학의 발전에 힘입어 스노우-리비스 논쟁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게 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스노우는 인문문화와 과학문화를 구분하는 선명한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리비스 역시 이 점에서는 스노우와 생각을 같이했다. 따라서 이들간의 논쟁은 과학에 대한 동일한 정의를 바탕으로 한 인문문화와 과학문화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과학전쟁은 인문문화와 과학문화간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이 둘 사이의 선명한 구분이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고 보는 진영과 둘 사이의 '본질적인' 구분이 흐려졌다고 믿는 진영간의 논쟁에 더 가깝다. 또한 과학전쟁에서 인문학 진영을 대표했던 과학학 연구자들은 적어도 자신이 연구하는 과학 분야에 대해서는 결코 '무지'하지 않다는 점에서 스노우의 이분법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학전쟁에서 '두 문화' 갈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여기서의 두 문화 갈등은 과학자들과 인문학자(과학학자)들의 글쓰기와 독서 스타일의 차이로 인해 유발되었다. 과학자들은 개별 명제의 진위를 따지는 것을 중요시하며, 글을 쓸 때에는 오해를 유발한 수사적 표현을 절제하면서 사실을 과장 없이 쓰도록 훈련받는다. 그들은 어떤 글을 읽을 때에도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전체적인 맥락에 비추어 이해하기보다는 각각의 문장들이 옳은지 그른지에 더 관심이 많다. 과학자들에게 논문이란 마치 수학적 증명과정과도 같아서, 그 중에 '틀린' 부분이 하나라도 있으면 전체가 다 틀렸다고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다. 과학전쟁에서 과학자들이 과학학(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헌을 비판하면서 그 중 잘 이해되지 않거나 이른바 '과학을 오용'한 부분만을 떼내어 공격하는 일이 잦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반면 인문학자들의 글쓰기에서는 은유와 수사가 빼놓을 수 없는 일부분이다. 이런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따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글 전체의 맥락에서 그 뜻을 파악해내야 한다. 논문 전체에 대한 판단 역시 그 속에 담긴 개별 진술의 기술적 정확성보다는 글 전체가 지니는 설득력에 의해 좌우된다. 또한 상당수의 인문학자들은 글을 매우 난해하게 쓰기로 악명이 높다. 따라서 이런 식의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과학자들이 보기에 인문학자들이 쓴 글은 종종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한 것으로 비친다.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간의 이런 스타일 차이는 과학전쟁에서 양 진영간의 의사소통을 종종 쉽지 않게 만든 요인이었다. 인문학자들의 글이 엉터리임을 보이기 위한 의도로 이루어진 과학자들의 탈맥락적 인용이 인문학자들에게는 오히려 학문적 수준이 낮은 것으로 비추어져 무시되거나 반발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과학의 역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과학전쟁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었던 문제는 이른바 '표준적' 과학관과 상대주의적 과학관 사이의 대립이었다. 소칼과 같은 과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과학에 대한 견해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 외부에는 우리(그리고 우리가 가진 신념)와 무관하게 물리적 실재가 존재한다, (2) 과학의 목표는 물리적 실재에 대해 참(혹은 적어도 근사적 참)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3) 과학자들은 실재에 대한 설명을 만들어내기 위한 다양한 도구와 기법들(실험, 논리적 사고, 통계적 추론 등)을 갖고 있다, (4) 이런 방법들은 오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지금껏 놀라운 진보를 이뤄 왔고, 이는 앞으로도 가장 믿을만한 지식의 원천이 될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소칼 등은 이런 입장에 근거해 과학은 여타의 지식이나 인간 활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지닌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과학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과학학자들의 주장은 전혀 말도 안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며 일축했다. 스티븐 와인버그와 같은 물리학자는 이러한 소박한 실재론의 입장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 만약 지능을 가진 외계인이 있다면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과학을 갖고 있을 거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박한 실재론은 얼핏 보기에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따져보면 곳곳에서 허점이 노출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서 요약한 소박한 실재론의 내용 중 (1)에 대해서는 (일각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과학전쟁의 논쟁 양 진영간에 큰 이견은 없다고 판단되므로, 여기서는 (2)에 초점을 맞춰 얘기를 해보자. 과학 이론이 물리적 실재와 '조응'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지만, 일단 이를 접어두고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지식이 자연의 실재와 부합하는 '근사적 참'임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과학지식은 역사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에 참(혹은 근사적 참)이었던 것이 거짓으로 밝혀지는(혹은 그 반대의) 경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과거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었던 모든 과학지식이 근사적 참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으며, 이로부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에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 수 있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상대주의적 과학관을 받아들이는 과학학자들은 이런 과학의 역사성 문제에 깊게 천착하여, 우리가 현재 믿고 있는(혹은 한때 믿었던) 과학 이론, 과학 연구의 방향과 문제 설정, 과학을 하는 '올바른' 방법 같은 것들이 어떻게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었고 받아들여졌으며 또 거부되었는지를 보여 주려 한다. 여기서 과학 이론이나 과학의 방법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표현은 과학전쟁에서 흔히 제기되었던 오해처럼 과학자들이 모여서 실험을 하는 대신 투표로 이론 선택을 결정한다든지, 과학자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무언가에 관한 얘기를 마음대로 지어낸다든지 하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과학 활동이 이루어지고 과학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이 흔히 과학 '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개입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반드시 과학에 오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정당한 일부분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더라도 소칼과 같은 과학자들은 자신의 관점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 역시 과학의 역사성을 받아들인다. 예컨대 과거의 과학자들은 틀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과학에서 쓰일 수 있는 '정당한' 방법에 관해 오늘날과는 다른 견해를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과학의 역사성에 천착하는 것이 오늘날의 과학을 이해하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설사 과거에 많은 '틀린' 지식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 중 '올바른' 것들만 살아남고 '틀린' 것들은 경쟁에서 패해 사라졌기 때문에, 과거에 받아들여졌던 믿음들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쓸모도 없으며 심지어 과학에 대한 오도된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박한 실재론자들의 관심은 교과서나 책에 나오는 '종결된 과학'에 맞추어져 있다.

반면 구성주의적 과학학자들은 이와 같이 종결된 과학이 일종의 '블랙박스'라고 생각하며, 과학 활동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블랙박스를 해체해 과학 활동이 실제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을 이해하고 나면 그들이 과학을 연구함에 있어 과학자들간의 논쟁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아직 과학자들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쟁이 진행중인 시기에는 평상시에 가려져 있던 과학 내부의 동학(動學)이 분명히 드러나며 이를 통해 과학 활동이 특정한 사회적 조건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구성주의적 과학학자들의 관심은 '형성 중인 과학'에 있으며, 과학 활동이 인간의 여타 활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의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종결된 과학'과 '형성 중인 과학' 중 어느 쪽이 과학의 '진정한' 본모습인가, 혹은 이 둘 중 어느 쪽이 현대과학의 이해에 더 도움이 되는가 하는 취사선택이 되는 셈인데, 이는 간단히 풀리기 어려운 문제이다. 소박한 실재론과 구성주의적 과학학간의 대립의 근저에는 바로 이런 골치아픈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과학의 민주화는 정당한 것인가?


과학전쟁 과정에서 또 하나 크게 쟁점이 되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의 민주화를 둘러싼 문제였다. 이는 특히 『고등미신』을 지은 레빗과 그로스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제기한 문제였다. 그들은 "과학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과학 이론을 결정하는 것을 국민투표를 통해 할 수는 없"으므로 과학의 민주화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그들은 과학을 '잘 모르는' 일반시민이 과학과 관련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 이유는 과학과 관련된 쟁점들에 내포된 과학 이론이나 기술적 세부사항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정책결정에 수반되어야 하는 장기적 안목을 일반시민들이 결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과학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일반대중에게 맡기면 교실에서는 진화론이 아닌 창조과학만을 가르치게 될 것이고, 영구기관 개발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될 것이며, 검증되지 않은 '돌팔이' 의료행위들이 창궐하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다분히 협박조인 그들의 인식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두 가지 차원의 문제가 혼재되어 있다. 먼저 일반시민이 과학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과학관련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이 이론적으로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물론 일각의 주장처럼, 일반시민이 과학을 이해할 능력이 있다는 것과 이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나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얘기이며(따라서 일반시민들이 과학에 무지하다는 판단이 그들이 가진 지적 능력을 얕보는 것이라는 비판은 부당하며), 현실적으로 많은 일반시민들이 과학과 관련된 쟁점들에 관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관련 의사결정에 참여하기 위해 해당 과학에 관한 모든 사실과 쟁점들을 남김없이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당장 특정 과학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시민이라고 할지라도 적절한 기회가 주어지면 관련된 쟁점을 재빨리 이해하고 숙의를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도출해 낼 수 있음은 여러 차례의 시민참여 시도들을 통해 잘 드러난 바 있다.

그리고 둘째로, 과학의 민주화가 "과학 이론을 결정하는 것을 국민투표를 통해 하자"는 식의 주장이라는 레빗과 그로스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단언컨대 이는 터무니없는 오해이다. 필자가 아는 한, 과학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그 어떤 사람도 일반시민이 고에너지물리학이나 전파천문학 같은 전문적인 과학 연구를 직접 할 수 있다거나 이런 일에서 심지어 과학자들을 대체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바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실 판단은 과학자의 몫, 가치 판단은 일반시민의 몫'이라는 식으로 섣불리 일반시민의 역할을 제약하는 것 또한 불만족스럽다. 왜냐하면 대니얼 클레인맨이 이미 잘 보여준 바와 같이, 과학의 민주화를 이렇게 협소하게 이해할 때에는 '지식생산의 민주화'라는 그것의 중요한 한 차원을 간과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는 환경이나 보건과 같이 일반시민의 이해관계와 직접 맞닿아 있는 과학 분야에서는 시민들이 일상경험이나 나름대로의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이나 견해가 과학 연구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는 이러한 지식생산의 민주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 미국 매사추세츠주 우번(Woburn)의 주민들이 그 지역에 빈발하는 백혈병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 수행했던 대중 역학(popular epidemiology) 연구와 ? 1980년대 후반 AIDS 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에 기반해 AIDS 치료법의 조기 발견을 위해 분투했던 AIDS 치료 활동가들(AIDS treatment activists)의 노력,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과학관련 의사결정이나 과학 연구에서 이렇게 변화한 일반시민의 위상과 역할은 현대과학에서 불확실성과 위험의 문제에 주목한 라베츠와 펀토위츠의 연구와 서로 겹치는 측면이 있다. 그들의 논의에 따르면 영국의 광우병 파동에서 유전자조작식품, 지구온난화 문제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현대의 수많은 쟁점들에 대해 빠르고 확실한 해답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확실성과 보증을 제공하던 과학의 낡은 패러다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 과학은 탈정상 국면으로 이행했는데, 그들의 말을 빌면 이는 "사실은 불확실하고, 가치는 논쟁에 휩싸여 있으며, 위험부담은 크고, 결정은 시급한" 국면이다. 이러한 탈정상과학(post-normal science)에서는 과학 연구에 대한 질적 평가가 과학자들에게만 맡겨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극심한 불확실성과 위험 앞에서는 과학자들 역시 아마추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확장된 동료 공동체(extended peer community)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들은 공동체가 수집한 우연한 증거와 통계까지를 포함하는 확장된 사실들(extended facts)을 이용할 것이다. 과학적 실천과 사실 및 참여자라는 전통적 요소들을 확장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실천이라는 요소가 창출되는데, 이는 피할 길 없이 과학을 민주화로 이끈다고 라베츠와 펀토위츠는 주장하고 있다.


결어


지금까지 과학전쟁에서 제기되었던 세 가지 주요 쟁점들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 과학전쟁을 '두 문화' 갈등의 직접적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지만 논쟁 과정에서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간의 글쓰기 스타일의 차이가 의사소통을 가로막은 측면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고, ▲ 과학 활동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의 근저에는 '종결된 과학'과 '형성 중인 과학' 중 어느 쪽이 과학의 본질에 더 근접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으며, ▲ 일반시민의 과학 관련 의사결정 참여와 과학 연구 참여는 과학에 대한 무지를 개탄하는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정당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결국 과학전쟁은 단순히 두 문화간의 오해에서 빚어진 해프닝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과학지식과 과학 활동의 지위와 성격, 과학 전문가와 일반시민 사이의 관계에 관해 심오한 문제를 던진 사건이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 그런 문제들을 풀어나감에 있어 매우 소중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각주>

1) 과학전쟁의 상세한 전개과정은 그간 국내에 나온 여러 문헌들에 충실하게 다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따로 다루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참고문헌에 제시된 글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추가적인 읽을거리>

이 글은 과학전쟁을 통해 불거진 여러 쟁점들에 관한 '소개'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글 중간중간에 일일이 각주를 달지 않았다. 과학전쟁의 여러 주제들에 좀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아래의 문헌들을 더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과학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홍성욱이 쓴 여러 글들이 가장 좋은 개관을 제시한다(홍성욱, 1999; 2003). 이영희(2003)에서도 과학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한 짧은 기술을 볼 수 있다.

'두 문화'와 스노우-리비스 논쟁에 대해서는 김환석(2001)에서 흥미로운 설명을 볼 수 있으며, 스노우의 책 『두 문화』를 직접 읽어보는 것도 좋다. 특히 이 책 말미에 붙은 스테판 콜리니의 해제는 스노우의 논지를 역사화시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과학전쟁을 두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은 이영희(2003)에 나와 있으며, 1960년대의 스노우-리비스 논쟁과 1990년대의 과학전쟁을 서로 비교 고찰한 짧은 논의로는 Cohen(2001)이 있다. 인문학자와 과학자의 글쓰기와 독서 스타일의 차이가 낳은 문제에 대해서는 홍성욱(2003)에서 길게 논의하고 있다.

과학전쟁에 관한 논의 중 많은 수가 표준적 과학관과 상대주의적 과학관을 비교하는 식의 구성을 갖고 있는데 이 중 후자를 옹호하는 입장으로는 홍성욱(1999; 2000)과 송성수(1999)가 있으며 전자를 다소 세련된 형태로 지지하는 견해로는 Brown(2001)이 있다. 이상욱(2002)은 '종결된 과학'과 '형성 중인 과학' 중 어느 쪽이 과학의 본질인가 하는 문제가 과학전쟁의 기저에 깔려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상대주의적 과학학자들이 '논쟁' 연구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와 여기에 부여한 의미에 대해서는 김명진(2003)을 참조할 수 있으며, '형성 중인 과학'을 다룬 대중적 사례연구 모음으로는 Collins and Pinch(1993)이 있다.

과학전쟁에서 불거진 '과학의 민주화' 논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글은 이영희(2003)이다. 김명진(2001)에서는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둘러싼 여러 쟁점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Kleinman(2000)은 과학의 민주화를 과학정책의 민주화와 지식생산의 민주화라는 두 차원으로 나눠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탈정상과학에 대한 라베츠와 펀토위츠의 논의는 Sardar(2000)을 보면 된다.

이 글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 중 하나로 과학전쟁의 '기원'에 관한 논의는 홍성욱(1999), Sardar(2000) 등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특히 1990년대 들어 냉전의 종식으로 과학 활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이 줄어들자 위기감을 느낀 과학자들이 상대주의적 과학학을 뒤늦게 비판의 표적으로 삼았다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홍성욱(2000)에서는 1980년대 후반 미국의 '문화전쟁(Culture Wars)'의 맥락에서 과학전쟁의 배경을 조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명진. 2001., 「'과학기술 민주화'의 개념정립을 위한 시론」, 『대중과 과학기술』. 잉걸.

______. 2003. 「과학사회학에서 본 논쟁 연구」, ≪자연과학≫ 14호.

김환석. 2001. 「생명과학과 '두 문화' 문제」, ≪과학기술학연구≫ 1권 2호.

송성수. 1999. 「'과학전쟁'이 던지는 메시지」,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위한모임 편, 『진보의 패러독스』. 당대.

이상욱. 2002. 「과학연구의 역사성과 합리성 ― 소칼논쟁을 중심으로」, ≪과학철학≫ 5권 2호.

이영희. 2003. 「'과학전쟁'을 넘어서 ― 과학사회학의 발전방향 모색」, ≪경제와사회≫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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