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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감춰진 빛, 낯선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식
본문: 요한계시록 3:17~20
영화 <밀양>은 밝은 햇빛으로 더욱 푸르게 보이는 하늘의 이미지에서 시작해 그 햇빛이 비추는 개숫물 흐르는 땅의 이미지로 끝납니다.
“밀양이라고 뭐가 다르겠어요?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지요”라는 남자 주인공 종찬의 대사는 이 영화가 함축하는 뜻을 한마디로 압축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 어떤 곳이나 다를 바 없는 단순한 하나의 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단순한 지명은 그렇기 때문에 무심하게 받아들여도 된다기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새삼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하나의 지명으로서 ‘밀양’을 내세우기보다는 Secret Sunshine이라는 영어제목으로 뭔가 보편적인 의미를 던지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감춰진 빛’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태양’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 하늘 높은 곳에서 그 스스로는 형체를 드러내지 않지만 땅의 모든 것을 드러내주는 빛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 <밀양>은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구성과 결말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소설은 비극적 결말을 내리고 있는 반면 영화는 그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은근히 그러나 강렬하게 희망을 시사합니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 이신애는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갑니다. 남편이 부재한 상황에서 남편의 고향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는 것 자체가 실제로 자신에게 결여된 어떤 것을 환상적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을 뜻합니다. 그 환상적 욕구가 충족되는 듯 남편의 분신과도 같은 아들 준과 함께 신애는 밀양에서 행복한 삶을 꾸려나갑니다. 그가 행복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탓이었을까요? 어느 날 사랑하는 아들 준이 유괴를 당합니다. 가진 돈을 다 털어줬지만 아들을 되찾지 못하고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아들을 맞이할 뿐입니다. 그 아들이 되살아 돌아오는 환상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환상일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었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게 되자 비로소 스스로의 비참함을 절감한 주인공은 이웃 전도자의 손길에 이끌립니다. 이웃 약국 김 집사의 끈질긴 전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체 없는 빛의 실재를 부인하던 그가 마침내 교회에 나가면서 그 빛의 실재를 실감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만난 것은 마치 연애를 하는 듯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에게 신앙은 무너진 환상을 보상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기쁨이 어떤 것인지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내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까지 이릅니다. 그것도 범인을 직접 찾아가 용서를 선언하겠다고 나섭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만나러 갑니다. 진정한 의미의 용서란 관계의 온전한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용서의식을 행함으로써 완전한 관계의 회복을 입증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범인을 직접 대면한 그의 용서의식은 관계의 회복으로 귀결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파탄을 뜻했습니다. 그가 범인에게 용서를 선언했을 때 너무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던 범인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노라 말합니다. 범인을 만나고 돌아 선 신애는 아연실색하며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마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정신적 착란의 상태에 빠집니다. 그는 절규합니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에요!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요.” 영화가 원작 소설의 모티브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1985년에 발표된 원작 소설을, 1988년쯤엔가 이창동 감독이 보면서 광주사태를 연상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바로 이 대목이 1980년 광주를 연상시켰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거나 스스로 몸이 망가진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데 그 고통을 안긴 당사자들은 그들이 쥔 권력을 향유하며 안락하게 살아가는 현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용서한 적이 없건만 그 가해자들은 마치 용서라도 받은 것처럼 편안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직감은 실제 현실에서 소설과 똑같이 재현되고 말았습니다. 훗날 국가가 나서 그 가해자들을 가볍게 벌하고 면책을 해줬을 뿐 아니라, 피해자들에게는 보상을 함으로써 사태를 일단락 지었습니다. 여기서 피해자들은 스스로 응징은 말할 것 없거니와 용서고 화해고 시도해볼 틈도 없이 국가권력의 모든 처분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신애가 절망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숭고한 용서의 행위마저도 스스로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존재는 도대체 뭐냐고 항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와 주변의 성도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앗아간 하나님의 섭리는, 자신에게 다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래도 납득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고, 그 감사에 응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죄인을 용서하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이 용서를 해버렸다니! 도대체 그 숭고한 용서행위마저도 스스로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당신은 누구냐고 항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은 그 항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소설은 주인공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어쩌면 그가 단 한번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인지도 모릅니다. 소설은 그렇게, 값싼 은혜와 용서를 남발하는 기독교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렇게 비극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림과 동시에 그 비극을 넘어서려는 현실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심각한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다른 방향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는 대안적인 기독교 신앙의 은밀한 빛을 살짝 내비춰 준다고 할까요? 그렇게 해석하면 너무 아전인수격 해석 또는 호교론적인 해석일까요? 소설이 완전한 ‘부정’으로 대안의 실마리를 스스로 찾도록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면, 영화는 새로운 ‘긍정’으로 대안의 실마리를 비밀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스스로 용서할 기회마저도 박탈해버린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주인공의 냉소와 항변으로 종반부를 그려 나갑니다. 정말 자살을 의도한 것인지, 그저 저 높이 계시며 내려다보는 분에 대한 항변의 표시인지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로 그칩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퇴원하여 새 기분으로 머리를 다듬으려는데, 하필 그의 머리를 손질하는 미용사는 아들 유괴범의 딸입니다. 담담한 듯 꾹 참고 자신의 머리를 맡기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뛰쳐나오고 맙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끝까지 자신을 방해하는 분입니다. 마음을 고쳐먹으려 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환상이 송두리째 무너진 그에게 모든 타인은 자신을 방해하는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결국 스스로 머리를 손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은 지나치면 그냥 결론 아닌 결론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은 그렇게 은밀하게 이 영화가 함축하는 뜻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게 혼자서 거울을 두고 머리를 손질하는 그 앞에, 시종일관 그의 주변에 붙어 다니던 종찬이 등장합니다. 밀양에 도착하는 순간 차 고장으로 만난 카센터 사장 종찬은 거의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주인공 신애의 주변을 맴돌며 돌봐줬지만, 신애에게 그 존재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애가 혼자서 머리를 손질할 때 종찬은 거울을 들어주고 신애는 그런 그의 행동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그가 들고 있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며 스스로 머리를 손질합니다. 그리고 나뒹구는 머리카락과 함께 밝은 태양빛으로 빛나는 마당의 개숫물 흘러가는 모습이 화면 한쪽을 장식합니다.
전혀 자기 타입이 아니었던 존재에 마침내 자신을 내맡기며 스스로의 머리를 손질하는 모습과, 결코 화사한 풍경이라 할 수 없는 그들이 자리한 바로 그 땅 그 자리가 저 높은 곳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으로 빛나는 장면은 역설의 진실을 말함과 동시에 진정한 주체의 탄생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형체가 없으나 맑고 푸른 하늘을 보여주던 영화의 첫 장면과 대조되는 개숫물이 흘러가는 누추한 땅의 장면은 마치 아름다운 꿈과 환상으로 가득한 세계와는 다른 보잘것없고 누추한 땅의 현실을 확인시켜 주는 듯합니다. 아니면 온 우주에 충만한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의 세계에서 그와 같은 감시자로서 신의 존재가 더 이상 아무런 의미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저 귀찮은 존재로만 여겨졌던 타인의 손에 들린 거울에 의존하여 비로소 스스로 자기 몸을 가다듬는 주인공의 모습과, 저 높은 곳에서 내리쬐는 빛으로 반짝이는 땅의 모습은 역설의 진실, 새로운 긍정을 시사합니다. 결여된 땅의 현실을 부정하며 애써 저 하늘만 바라보았던 환상이 무너진 자리에, 보이지 않는 낯선 타인에 불과했으나 그 타인의 존재로 나의 존재가 확인되는 구원의 희망이 자리합니다. 하늘이 내려와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구원의 이치라고 할까요? 이것은 그 어느 한편이 사라지면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 영화는 땅을 망각하고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땅을 비춤으로써 진정으로 하늘을 실감하게 만듭니다. 내 곁에 있지만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비로소 긍정하게 되는 구원의 희망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특정한 교회, 곧 초대교회 시절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고 있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애써 부정하고 환상 속에서 허구적인 자신을 그리며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들 모두를 향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17절) “보아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20절)
누추한 현실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고 구원의 실재, 새로운 삶의 현실로 다가설 수는 없습니다. 나의 현실을 환상으로 그려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내 곁의 낯선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내 곁에 바싹 다가선 낯선 존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삶의 진실을 실감합니다. 그 때 누추하게만 느꼈던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그렇게 누추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 때 구원의 빛은 우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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