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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hemian (bohemian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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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1/03
 

 

 너를 여는 방법


너는 문이다. 단 한 번도 내게 열린 적 없는 문이다. 열린 적이 없으므로 닫힌 적도 없다. 문손잡이도, 열쇠구멍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너는 그저 문 모양의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너는 너를 증명하기 위해 열려야 한다. 생애 한번쯤은 그래야 한다.


                                                                        2004년 인도 여행 메모 중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벽이라면 여행지에서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각각이 하나의 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와는 다른 존재 또는 이곳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라는 여행의 이유가 아예 헛소리는 아니다. 내게 다르게 보인다면 그들에게도 내가 달리 보일 수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쉽게 그들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때로 누군가에게는 내가 동양의 신기한 문이 되어서 자신이 아는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를 총 동원해 열어보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열릴 수가 없었다. 낯선 풍경과 허기진 웃음 앞에서 마음은 늘 허술해졌다. 그것은 더욱더 공고하게 나를 닫는 이유가 되었다.

뭄바이 포트에서 앨러펀트 아일랜드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으면서 나는 사소하게 흔들렸다. 긴 여행에서 한번쯤 찾아오는 향수병 때문이기도 했고 몸이 지친 탓도 있었다. 날이 흐렸고 바닷물에 젖어 약간 무거워진 바람이 불었다. 갑판 위의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열 명 정도였다. 모두 인도인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외향으로 국적을 구분하는 건 늘 50프로의 확률에 의지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갑판 위의 사람들은 둘, 셋씩 하나의 대륙이 되어 흩어졌다. 그들은 서 있거나 앉은 채로 웃거나 찡그리며 지구의 자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판 위에 마련된 2인용 의자에 자리를 잡고 최대한 멀리 시선을 두었다. 항구를 떠난 배는 잠깐씩 몸을 떨며 섬을 향해 나아갔다. 흔들림이 잦아들자 이번엔 갑판 위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고, 음식을 나눠먹고,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나는 혼자였으므로 멀리 내보냈던 시선을 조용히 거둬들였다. 정면에 나처럼 혼자인, 나처럼 시선을 거둬들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둘의 시선은 멀리서 돌아와 허공 위에서 잠깐 방황하던 중이었다.

배의 난간 모서리에 올라앉아 있던 그는 빈손이었다. 밝은 쥐색 남방과 검은 정장바지 차림은 여행자의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생김새는 인도인이라 할만 했지만 나는 어차피 파키스탄 사람이나 네팔 사람을 그들과 구별할 수 없었다. 나이를 추측하는 건 그보다 더 어려웠다. 저런 눈빛이라면 20대는 아니다, 라고 멋대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역시 내 옷차림과 작은 가방, 카메라 등을 재빨리 훑었다. 여행자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했을까? 그가 물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뭄바이항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도 따라 웃었다.

그의 뒤편으로 펼쳐진 회색빛 바다와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잔잔하고 흐릿했다.

“어디에서 왔어요?” 이번엔 내가 물었다.

“내가 살던 곳에서요.” 그리고 뭄바이항을 가리키며, “저긴 아니에요.” 하고 그는 또 웃었다. 만족스런 답변을 얻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배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앨러펀트 아일랜드가 거기 어딘가 있었다. 애초에 어디에서 왔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한 배를 타고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으니. 내 지난, 모든 사랑의 시작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하나의 문이었다. 한순간 서로를 향해 열려버린 문이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가 비밀번호였는지,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만들어낸 긴 침묵이 열쇠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마도 그 모든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섬을 향해 던진 적막한 시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구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길 위에서 허공을 향해 맥없이 던지곤 했던 내 시선도 그와 꼭 같았을지 모른다. 뒤로 물러선 길이 하염없이 멀어질수록 어깨에 멘 가방은 무거워지고 나는 텅 비어갔다. 빈집을 지키고 선 문이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건 맞은편 빈집의 문이었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다. 그와 나에게 유효했던 비밀번호.


                                                                                         『풋』가을호 원고

                                                         
'비밀번호'를 주제로 짧은 산문 청탁을 받았다. 내일이 마감인지라 좀 더 다듬어 보낼까 했는데 신경쓰이는 게 있어서 영 집중도 안 되고, 더 붙잡고 있는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아, 에라이~하는 심정으로 보내버렸다. 그래놓고 뒤늦게 슬쩍 후회가 된다.
2004년 인도 여행에서 얻은 짧은 경험을 모티브로 했다. 오랜 이웃들은 어디서 본 듯 할지도 모르겠다. 참 오래도 우려먹는다^^;; 아무튼. 이웃들에게 처음 보이고 싶어서 아직 잡지가 나오기도 전에 올리는 원고다(반칙이다. 고로 유출 절대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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