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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돌려진 역사의 수레바퀴, 위화도회군

2007.12.05 18:29 | 역사읽기자료 | 빨갱이

http://kr.blog.yahoo.com/bchs9027/1389 주소복사

■돌려진 역사의 수레바퀴, 위화도회군

1. 혁명의 서막, 위화도 회군

1384년(우왕 9)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농민 생활의 참담한 실상을 목격한 정도전은 함주막사로 들어가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장군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고려말 거듭되는 외침 속에서 홍건족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는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신흥 무인세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1380년 소년장수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한 황산대첩은 이성계의 명성을 보다 높이게 했다.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에 가장 적극적인 비판을 하면서 혁명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정도전의 정치적 야심과 이성계의 군사력이 결합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고려말의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차지하고 있던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세력의 득세로 말미암아 지방의 중소지주와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여기에 더하여 남방의 왜구와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국가의 위기도 한층 커졌다. 이러한 시기 권문세족의 특권의식과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이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고려후기 새로운 사상으로 수용된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기득권층의 특권을 견제하고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 왕도정치의 회복을 추구하고 나선 이들이 바로 신흥사대부로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신분적으로는 지방의 향리 출신,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신흥사대부의 주류를 이루었다. 정도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열혈남아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국제정세에도 큰 변화가 닥쳐왔다. 전통의 강국인 몽고족의 원나라가 쇠퇴하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점차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철령 이북의 요동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고 원나라를 압박하자 고려 조정의 외교 노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친원파와 친명파의 정치적 노선 대립이 그것으로서 당시의 실권자 최영은 친원파의 입장에 서서 이 기회에 잃어버린 요동 땅을 되찾고, 이성계를 그곳으로 내보내 군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평소 이성계를 견제하던 장군 최영은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의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조정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키우고자 하였다.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인 우왕은 8도에서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1388년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통사에 조민수, 우군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는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최영은 개경에서 군사를 총지휘하게 하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요동으로 출병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는 요동 정벌 대신 말머리를 돌려 개성을 공격했다. 압록강을 건넌다는 것은 자신의 영원한 정치적 몰락임을
깨달은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켜 개경을 급습하였다(위화도 회군). 요동을 공격할 수 없는 4대 불가론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최영을 비롯한 구세력들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다. 위화도 회군 성공 후 후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한 단계 한 단계 새 왕조 건설을 준비해 나갔다.

2. 마지널맨에서 혁명의 중심에 선 정도전

신흥사대부내에서도 고려말기의 대내외적 위기를 맞아 시국관에 따라 온건파와 혁명파로 분기되었다. 온건파 사대부는 고려왕조의 테두리 내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 반면, 혁명파 사대부는 왕조의 교체만이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정몽주, 이색, 길재, 이숭인 등이 온건파였다면,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은 혁명파의 대열에 섰다. 1392년 4월 온건파의 정신적 지주이자 고려왕조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후의 태종)의 지휘로 개성의 선죽교 근처에서 피습됨으로써 권력은 완전히 이성계 일파와 혁명파 사대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때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 받았던 시조인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는 이후에도 널리 회자되면서 정몽주를 고려 충신의 대명사로 널리 인식되게 하였다.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정몽주와 길재의 사상이 조선시대 사림파의 뿌리가 된 것도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학자들이 재야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혁명파 사대부의 중심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정도전은 봉화의 향리 출신으로서 아버지 정운경대에 관직에 올라 개경으로 진출했으나 외할머니가 노비의 딸로서 그에게는 늘상 천민의 피가 섞였다는 신분적 콤플렉스가 따라 다녔다. 정도전이 급진적 성향을 띤 이면에는 이러한 신분적 성향도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정도전은 1362년 문과에 합격한 후 공민왕대에 관직에 진출하였다. 개혁정치를 계획했던 공민왕은 기존의 권문세족에 맞설 수 있는 ‘젊은 피’ 신흥사대부를 중용하였고 이 때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본격적인 개혁정책을 구상해 나갔다. 그러나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한 후 권문세족 이인임 일파를 비판하다가 1375년 나주의 거평부곡으로 유배를 갔다. 그러나 유배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보다 더 혁명 의지를 불태웠다. 유배에서 풀린 후 본가인 영주, 외가인 단양, 서울 등지를 왕래하던 정도전은 1384년 마침내 혁명을 위한 파트너 이성계를 함주막사로 찾아갔다. 이성계의 명망과 그의 휘하에 있는 군사력이라면 혁명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의 ‘문(文)’과 이성계의 ‘무(武)’가 조화되면서 역사는 새로운 혁명의 길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3. 마지막 민심잡기, 과전법의 단행

신흥무장 이성계와 결합한 정도전은 위화도회군 후 이성계 일파가 완전히 권력을 잡자 신속히 전제개혁(과전법)에 착수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고 새로운 왕조에 협조할 관리와 백성들에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였다.(1392년 5월). 이성계 일파가 새 왕조의 개창을 민심과 천심에 순응하는 ‘역성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대규모 경제개혁 조처였다.
이제 고려왕조의 멸망은 시간 문제였다. 우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창왕을 폐위시킨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옹립된 공양왕은 권력의 실세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절차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성계는 1392년 7월 여러 신하의 추대를 받아 선위(禪位:왕위를 능력있는 자에게 물려 줌)를 받는 형식으로 고려의 왕궁인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1979년 12월 12일, 쿠테타를 성공시킨 전두환 세력은 국무총리로 있다가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취임한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했고 1980년 8월 16일 최규하는 하야(下野) 성명을 발표하고 짧은 대통력직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대로 국보위 위원장이었던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전두환에 대해 난국을 수습할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극찬했던 신문 사설들은 태조의 신이한 능력을 널리 홍보했던 신흥사대부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조선의 건국 과정과 정권 교체 방식은 1980년 쿠테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모습과도 흡사한 점이 있다. 얼마 전 사망한 최규하 대통령이 퇴임 이후 아무런 정치적 활동이나 증언도 하지 못한 채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 것처럼 이성계 일파에 의해 밀려난 공양왕의 마지막도 거의 잊혀졌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이성계가 주장한 요동정벌 4불가론이란 무엇일까?

원.명 교체기의 중국 정세 속에서 북진의 기회를 노리는 고려에 대해 새로 들어선 명(明)은 과중한 세금을 요구하기도 하고 강원․함경의 경계에 있는 안변의 철령 지역 회수를 통고해 온다. 옛 원의 쌍성 총관부가 있던 지역이기에 명의 소유임을 주장하고 나선 것인데, 이는 실제로는 고려의 북진 기도를 저지하면서 고려 세력 하에 있던 강계(만포진) 일대를 확보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나라의 요구가 도리어 고려의 북진파를 자극하여 철령 이북을 잃을 바에는 요동을 공격하자는 국론을 낳게 하였다. 당시 명은 몽고 방면에 치중하고 있어 만주 지역은 군사상 공백 상태로 있었기에 최영 등은 철령위 문제를 북진의 호기로 파악하여 5만의 군사를 출동시킨다. 한편, 이성계는 왜구가 사방에서 창궐하는 시기에 명과 싸운다는 것은 큰 모험으로 보고 다음과 같은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한다.
1. 以小逆大 一不可(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
2. 夏月發兵 二不可(여름에 군사를 출병하는 것은 불가하다)
3.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명과 싸우는 사이에 왜구가 침략할 것이다)
4. 時方署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四不可(지금은 장마철로 활이 약해지고, 병사는 병든다)
결국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 등을 제거하고 군권을 장악하는데, 출정에 앞서 이 같은 주장을 한 이성계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최남선의 주장에 의하면 여진족 사이에서 성장하여 성공한 이성계가 남만주 각처에 있는 여진족을 정복시키는데 적임자였기에 다소 거리끼는 점이 있어도 부득이 임명한 것이라 한다.

▶신진 사대부는 어떤 사람들일까?

[ 자 료 ]
1. 최우는 일찍이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서 문학에 능하고 행정 실무에도 능한 사람을 첫째로, 문학에는 능하나 행정 실무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을 그 다음으로, 행정 실무에는 능하나 문학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을 또 그 다음으로, 문학에도 행정 실무에도 능하지 못한 사람을 최하로 하여 인사 관리의 기준으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
2. 세종 13년 5월에 상정소에서 계하여 4품 이상은 대부(大夫)라 칭하고, 5품 이하는 사(士)라 칭할 것을 청하니 왕이 따랐다.[ 세종 실록 ]

[ 분석 및 개요 ]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사회를 이끄는 정치 세력의 변화는 당연하다 할 수 있는데 고려 말에 사회 변혁을 주도한 신진 사대부의 기원은 12세기 후반 무신 정권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신 귀족의 몰락 속에 능문 능리(能文能吏)형의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등장한 신진 사대부는 재지 중소 지주층 및 향리층이 기반이었으며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토대로 경제적 지위가 점차 향상되었다. 14세기 후반 공민왕대에 이르면 신돈의 개혁 정치에 실무적으로 참여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였는데 이색을 비롯한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종오, 박의종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의 지배층이 귀족이라면 조선의 지배층은 양반 관료라 하겠는데, 바로 양반 관료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 신진 사대부이다. 신진은 새롭게 일어났다는 의미이고 박지원이 연암집에서 정의하길 󰡐사󰡑는 독서하는 계층, 󰡐대부󰡑는 정치를 수행하는 계층이라 한 것으로 보아 사대부란 독서하면서 정치를 하는 계층, 즉 학문적 소양을 갖춘 󰡐학자적 관료󰡑를 의미한다.
이들은 새로 도입된 주자학을 연구, 보급시키면서 사상적 일체감을 갖고 있었고, 권문 세족의 토지 겸병과 수조지 수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일반 농민들과 이해 관계를 같이하여 전면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외 관계에서도 적극적인 친명 정책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친원적인 권문 세족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 이성계를 대표로 하는 신흥 무인과 손잡고 새로운 사회 건설에 앞장섰던 것이다.

6백년을 이어오는 끈질긴 역사 현장
`경복궁(景福宮)`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경복궁은 사적 제 117호. 우리나라의 정궁(正宮)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 4년(1395년)에 창건했다. 그러니까 2000년인 올해로부터는 정확히 605년 전의 일이고 경복궁을 찾는 순간부터 우리는 600년 전의 조선시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경복궁은 선조 25년(1592년)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 후 273년 간이나 재건되지 못했다. 고종 5년(1868년)이 되어서야 창건 당시의 규모로 복원하고 같은 해 7월에 고종이 창덕궁에서 이곳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이 일은 대원군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경복궁 중건'이란 이름 하에 당백전을 발행했으며, 국고를 많이 쓴다는 백성들의 비난도 받으며 어렵게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건청궁(乾淸宮)에서 시해 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1896년)을 단행하고 1년만에야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경복궁은 또 다시 주인을 잃고 만다.

**우리모습 복귀로의 끊임없는 노력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고 경복궁내의 200여 동의 전각이 파괴되고, 지금의 경회루(慶會樓)와 근정전(勤政殿)등 10여 동만 남았다. 게다가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를 지음으로써 경복궁(景福宮)의 수치는 극에 달했다. 원래 경복궁은 9만평이 넘고 모양은 거의 장방형으로 남쪽에는 광화문(光化門), 동쪽에는 건춘문(建春文),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을 갖춘 멋진 모습이었다. 이 모습은 경복궁 내에있는 '북궐도'를 보면 더 자세히 알수 있다. 다행히 지금은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경복궁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1996년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그 자리에 흥례문(興禮門)을 복원하며 근정전도 복원 중이다. 경복궁을 하나하나 복원해 가는 것은 우리의 뼈대를 다시금 짜 맞추는 듯한 느낌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 문화유산
`창덕궁(昌德宮)`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5년(1405)에 경복궁의 이궁(離宮, 궁성밖에 마련된 임금의 거처)으로 건립한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건축으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특히 왕궁의 정원인 후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으로 손꼽힌다." 1997년 12월 6일, 창덕궁이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비문에 적힌 글이다. 유네스코는 세계적으로 뛰어나고 보편적 가치가 있어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하여야 할 문화유산을 지정해 보호토록 하는데 창덕궁이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럼 유네스코에서 높이 평가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창덕궁의 건축과 조경'을 알아보자. 우선 우리나라의 정궁인 경복궁을 본 사람이라면 창덕궁의 배치가 경복궁과는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즉, 경복궁은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놓이고 정문과 정전은 남북직선축상에 나란히 놓여 질서정연한 대칭적 구성을 하고 있는데, 창덕궁(昌德宮)은 대칭적 구성이나 직선축상에 건물배치를 하지 않고 지형 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의 구분을 하면 인정전(仁政殿)의 동쪽에 외청과 선원전(璿源殿)이 있고 중앙부는 인정전(仁政殿) 일곽의 외전이 되며, 동쪽에는 대조전(大造殿) 일곽의 내전이 배치되고 북쪽으로는 후원(後苑)의 경관이 펼쳐진다. 창덕궁(昌德宮)은 그 지형이 넓게 탁 트인 곳이 아니고 후면에 낮은 언덕이 있고 좌우로 평지가 펼쳐지는 곳이다. 따라서 건물의 구성은 이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배치한 것이다. 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동남쪽 모서리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지형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예부터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배치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꺾여 금천교(錦川橋)를 건너게 되는데 이런 다리는 어느 궁에나 있는 것이지만, 이 금천교(錦川橋)는 문에서 주 진행방향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직각으로 꺾여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변의 배치를 살피면 창덕궁(昌德宮)의 동쪽에는 창경궁(昌慶宮)이 있고 북쪽으로는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에서 공동으로 사용된 후원이 있다. 남동쪽으로는 왕실에서 매우 중요시했던 종묘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이 있다. 사실 창덕궁은 광해군 이후 고종까지 13대에 걸쳐 약 270년 간 정사를 본 궁으로 정궁인 경복궁보다도 오랫동안 왕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지금의 총 면적은 135.212평에 궁전 건물이 13동, 후원에 28동의 정자와 누각이 남아있다.

놓칠 수 없는 볼거리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
‘덕수궁 (德壽宮)’

덕수궁은 사적 124호
서울의 중심인 시청 곁에는 아름다운 덕수궁(德壽宮)이 자리하고 있다. 높은 빌딩과 노선버스, 지하철이 복잡한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덕수궁은 '빌딩 숲 사이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현대인의 숨통을 틔게 해준다. 고풍스런 한국 전통양식의 궁전이 멋스러우며, 탁 트인 공간과 나무들 그리고 시기에 맞춰 펼쳐지는 전시회는 바쁜 현대인의 생활에 청량제 역할을 한다.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왔다가 시간의 여유가 있어 들러보는 넥타이 차림의 직장인, 관광 안내책자를 든 외국인, 웨딩 드레스에 턱시도 차림의 예비 신랑 신부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의 노부부까지 덕수궁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근한 공간이다.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큰손자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0월 다른 궁궐들이 화재로 소실되어 의주의 피난길에서 돌아온 선조가 행궁으로 삼아 머물게 되면서 궁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이때는 이곳을 서궁이라고 불렀다. 그 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궁명을 경운궁(慶運宮)이라 하였으며, 창덕궁이 완공되어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떠난 뒤에는 인목대비의 거처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1647년 창덕궁으로 갈 때까지 궁전으로 사용했다. 그 후 고종에 의해 정식 궁궐로 사용되기까지 270여 년 간 왕가의 별궁 또는 사고로 사용되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다음해 2월 고종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였다가 8개월만에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 해 10월, 함녕전(咸寧殿)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연호를 광무라 했다. 1904년에는 경운궁에 대 화재가 있었고, 다음해에는 여기서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었다. 1907년 7월에는 고종황제가 황태자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 양위식을 거행했고 순종은 8월에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같은 해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갈 때 고종의 만수무강을 비는 뜻으로 '덕수궁(德壽宮)'이라 이름을 고쳤는데 고종은 1919년 독살 당할 때까지 엄비와 같이 이 곳에서 세월을 보냈다.
어찌보면 우리 역사의 슬프고 안타까운 순간들로 채워진 덕수궁이다. 고종의 애달픈 사연을 지켜보며 같이 아파했을 덕수궁이 경술국치 이후에는 한 때 폐궁으로 방치되었으나 현재는 일반인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도심 속, 문화재와 자연이 어우러진 휴식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신랑신부는 이곳에서 미래를 약속하고, 꼬마와 손잡고 온 가족은 아름다운 단청과 새소리에 즐거워하고, 외국인들은 열심히 안내 책자를 들여다본다. 400년 전부터 선조, 광해군, 인조, 고종을 지켜본 눈길로 지금은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덕수궁, 부드러운 바람과 아름다운 단청, 의젓하게 서 있는 대들보가 한결같은 눈길로 오늘의 우리를 안아준다.

==경복궁==
태조 4년(1395)에 창건된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이다.임진왜란(1592) 당시 왜군에 의해 완전 소실된 뒤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였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재건을 시작해 고종 5년(1868)에 가장 큰 규모로 복원, 다시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당하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면서 마침내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한다. 그뒤 일제에 의해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는 등 조직적으로 훼손되어 현재는 원래 규모의 약 15%만 남게 되었다.
☞ 궁 궐 개 요
○ 사적 117호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56
○ 창건시기 : 1395년 (태조 4년)
○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근정전(223호), 경회루(224호)
- 보물 : 자경전(809호), 자경전 십장생굴뚝 (810호), 교태전 아미산굴뚝(811호)
근정문과 행각(812호), 풍기대(847호)
○ 현 면 적 : 126,337 평 (416,990㎡)

==창덕궁==
태종 5년(1405)에 이궁(離宮)으로 짓고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광해군 2년(1610)에 중건하여 사용하다가, 인조반정(1623)으로 다시 불에 탔고, 인조 25년(1647) 다시 중건이 시작된 이후 크고 작은 화재와 재건축이 이어졌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부터 경복궁 재건 전까지 약 270여년간 법궁의 역할을 대신 해 왔다.
1910년 소위 '한일합방'이 인정전에서 체결되었으며, 1917년 내전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모두 헐어다 이곳으로 옮겨 짓게 된다. 또한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을 후미진 곳으로 이전하는 등 일제는 의도적으로 창덕궁의 모습을 왜곡했다. 그후 1926년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전각을 헐어 전시장과 각종 편의시설을 마련하여 일반인에게 관람을 허락하였다. 한때 '비원(秘苑)'으로 축소․왜곡되어 불려지기도 했으나, 1990년대 대대적인 복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궁궐로 남아있다.
☞ 창덕궁 개요
○ 사적 122호 ※ UNESCO 세계문화유산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1번지
○ 창건시기 : 1405년 (태종 5년)
○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인정전(225호)
- 보물 : 돈화문(383호), 인정문(813호)
선정전(814호), 희정당(815호)
대조전(816호), 구선원전(817호)
○ 현 면 적 : 135,212.1평(446,983㎡)

==창경궁==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세종이 지었던 수강궁 터에 세워진 창경궁은 임진왜란 후 창덕궁과 함께 중건되어 그 쓰임새가 더욱 커진 이궁(離宮)이다.
창경궁은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4년 후 복구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이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창경궁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숙종 때 장희빈과 그 일족을 처형한 사건이, 영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 등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
창경궁은 순종 3년(1909) 일제가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전각을 헐어 박물관 등을 세운 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면서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가, 1983년 창경궁으로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 궁 궐 개 요
○ 사적 123호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1
○ 창건시기 : 1484년 (성종 15년)
○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명정전(226호)
- 보물 : 홍화문(384호), 명정문과 행각(385호) 옥천교(386호), 통명전(818)호
풍기대(846호), 관천대(851호)
○ 현 면 적 : 6만5천평 (222,657.9㎡)


==덕수궁==
임진왜란(1592) 이듬해 선조의 시어소(時御所)로 처음 쓰기 시작, 광해군이 즉위한 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뒤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그뒤 274년간 별궁으로 사용되다가 아관파천(1896) 이후, 이듬해 고종의 환어로 다시 궁궐로 쓰인다. 1904년 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없어지고, 1905년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한다.
1907년 순종의 즉위와 더불어 궁궐로써 기능을 상실하고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한 뒤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분할, 매각되어 현재는 대한제국 당시의 30% 정도의 규모만 남아 있다.
☞ 궁 궐 개 요
○ 사적 124호
○ 소 재 지 : 서울시 중구 정동 5-1
○ 임어시기 : 1593년 (선조 26년)
※ 궁호 변경 : 경운궁(1611), 덕수궁(1907)
○ 지정 문화재 현황
- 보물 : 중화전과 중화문(819호),
함녕전(820호), 앙부일구(845호)
○ 현 면 적 : 18,635 평 (61,603㎡)

==종묘(宗廟)==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공간이다.
태조의 한양 천도(1394) 후 이듬해 종묘를 지었으며, 세종 3년(1421) 모실 신위가 늘어나자 별묘인 영녕전을 지었다.
현재 정전에는 서측 1실 태조의 신위를 포함, 총 19실 49위의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또한 영녕전에는 중앙에 태조의 4대조 신위를 포함, 총 16실, 34위의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역대 왕 가운데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제외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태워진 뒤 광해군 원년(1608) 재건되어 1836년까지 몇 차례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오고 있다.
☞ 종 묘 개 요
○ 사적 125호 ※ UNESCO 세계문화유산
○ 소 재 지 :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
○ 창건시기 : 1395년 (태조 4년)
○ 지정 문화재 현황
- 국보 : 정전(227호)
- 보물 : 영녕전(821호)
- 중요무형문화재 : 종묘제례악(1호)
종묘제례(56호)
○ 현 면 적 : 56,570 평 (약 186,000㎡)

★일반적인 최고신에 대한 덕이라는 도덕적 대응과, 조상신에 대한 효라는 도덕적 대응을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바로 사직(社稷)과 종묘(宗廟)라는 제사 제도이다.
사직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땅의 신 사(社)와 곡물의 신 직(稷)이 결합된 형태이다. 요컨대 농경의 성공을 비는 제사였던 셈이다. 종묘는 조상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그에 제사지내는 것, 즉 특정 왕조의 조상신들을 모시는 의례였다. 사직과 종묘라는 제사 체제는 그 자체가 국가 운영 체제이기도 하다. 때문에 '종묘사직'이라는 말이 국가 자체를 뜻하는 말로 사용.

◈근정전과 용

한미수교조약을 맺게 되면서 국기의 필요성이 절박해지자 중국에서 보낸 사신인 마건충(馬建忠)이 그 국기 도안을 이렇게 제안했다.

흰 바탕에 푸른 구름을 아래로 깔고 그 구름 위에 붉은 용을 그려 조선 국기로 삼자는 것이었다. 흰 바탕은 백성을, 푸른 구름은 관원(官員)을, 용은 임금을 나타냄으로써 군․관․민(君官民) 일체의 조화를 표방한 것이라 했다.

이 제안에 조건이 붙었다. 당시 중국 국기에도 용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 용과 구별하기 위해 용발톱을 하나 줄여 네 개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굳이 나라의 상징인 국기에 용을 도입하려 한 것이며 용발톱에 차등을 두려 했음은 중국의 속국임을 표방하려는 저의가 드러나 있음을 알겠다.

이에 당시 총리였던 김홍집(金弘集)은 그리기 번잡하다는 핑계로 홍룡(紅龍) 청운(靑雲)을 홍청 태극(太極)으로 수용한 척하고 팔도를 상징하는 팔괘를 더하는 수정을 한다.

용은 천자만이 쓸수 있는 상징물이요 그 아래 왕후(王侯)는 봉황을 상징물로 쓰게 하여 종속관계를 표방해온 지배철학이었다. 임금이 정사를 볼 때 입는 옷을 용포(龍袍)라 하는데 용의 수가 놓여 있게 마련이다.

태종5년 명나라 임금이 태종에게 내린 용포가 그 후대 임금의 격식이 되어 내렸는데 어깨에 용이 걸쳐 있긴 하나 그 용포 등 양편으로 봉황을 세 마리씩 수놓음으로써 속국표시를 소홀하지 않았다. 조선조의 임금들이 입었던 용포에 수놓인 용의 발톱수를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다섯개 아닌 네개일 확률이 높다.

새로 단장한 경복궁 근정전 용상이 있는 천장에는 두마리 용이 그려져 있다. 중국 사대(事大)시절에 천자의 독점물인 용을 그려두게 할 턱이 없다. 알아보니 우리나라가 청일전쟁 후 약화된 중국의 기반에서 독립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후 당시 집무처이던 경복궁 근정전 천장의 봉황 그림을 용 그림으로 바꿔 대한 제국을 표방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시 집무를 보지 않던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용상 천장그림은 두 마리 봉황으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근정전의 용과 인정전의 봉황은 한국사의 야누스적 단면을 상징으로 웅변하는 것이 된다. 다만 그 사대 상징인 봉황을 아직도 대통령 상징문양으로 널리 쓰고 있다는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역사 해프닝이다.

■왕실 여인들의 명칭과 지위

왕실 여인이나 특수층 여인․사대부 여인들의 지위에 관련된 것으로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가 있었다.
내명부 여인의 지위는 왕과 관련되어 그 높고 낮음이 정해졌으며, 외명부 여인도 남편의 지위에 따라 그 지위 고하가 정해졌다.
-왕의 부인-
정궁(正宮)은 왕의 본부인〔정비(正妃)〕를 지칭하는 말로, 왕비(王妃), 왕후(王后), 국모(國母) 등으로 불리었으며, 품계는 따로 없이 내명부를 총괄하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후궁(後宮)은 왕의 후처에 해당하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왕의 본처에 대한 호칭은 고려시대 후(后)에서 비(妃)로 격하되었다. 중국 천자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조선시대 후궁은 내명부에 따라 정1품 빈에서 종4품 숙원까지 그 호칭과 품계가 각각 정해져 비교적 엄격히 시행되었다. 즉 빈(嬪)-귀인(貴人)-소의(昭儀)-숙의(淑儀)-소용(昭容)-숙용(淑容)-소원(昭媛)-숙원(淑媛)까지가 내관(內官)으로 직무는 따로 없었다. 이들 빈 이하 숙원까지가 사실상 임금의 첩으로서 임금의 총애에 따라 그 품계가 오를 수 있었다.
빈은 조선시대 내명부의 정1품 여관으로서 후궁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에 해당하였다. 즉, 비 아래 가장 높은 여인의 지위였다. 만약 빈이 다시 비로 책봉되면 품계는 없어졌다. 또한 빈은 왕세자의 정부인(正夫人)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빈이 거처하는 곳을 빈궁이라 하였는데, 빈궁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이 경우, 직접 부를 때는 빈궁 마마라 하였다.
-왕의 어머니-
왕의 부인을 왕비라 칭하는데, 왕의 어머니는 대비(大妃), 왕의 할머니는 대왕대비(大王大妃)라 칭하였다. 다만 선왕의 부인이 세명이 동시에 살아 있을 경우, 이를 구분하기 위해 왕위를 계승한 서열에 따라 대왕대비․왕대비(王大妃)․대비로 구분하여 불렀다.
왕의 장모, 즉 왕비의 어머니는 부부인(府夫人)이라고 칭하였으며, 정1품의 품계가 주어졌다. 또 대군(大君)의 처도 부부인 이라고 칭하였다.
-왕의 딸-
왕의 딸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공주(公主)와 옹주(翁主)가 있다. 조선 초만 해도 제도가 미비하여 왕녀(王女)․궁주(宮主)․옹주(翁主) 등 여러 가지 명칭이 함께 사용되었으며, 왕의 후궁도 공주라 칭하였다. 그 뒤 성종 때에 문물 제도가 정리되면서 공주라는 명칭도 통일되었다. 즉, 『경국대전』「외명부」조(條)에 의하면, 왕의 정실부인이 낳은 딸을 공주라 하고,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 하였다고 한다.
공주는 품계상 무계(無階)이며, 외명부의 가장 상위에 해당되었다. 왕비나 대비등과 마찬가지로 품계를 초월한 존재였던 것이다. 옹주는 조선시대 왕의 후궁이 낳은 딸로, 공주와 마찬가지로 품계를 초월하여 외명부에 속하였다.
또 고려시대 내명부나 외명부에게 정1품의 품계와 함께 주던 봉작의 하나이기도 하다.
-궁녀-
궁녀(宮女)는 나인(內人)․궁인(宮人)․궁첩(宮妾)․시녀(侍女)․궁빈(宮嬪)․궁아(宮娥)․여관(女官)․홍수(紅袖) 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궁녀는 궁궐에 거처하는 모든 여인을 뜻하는 말이지만, 역사적 측면에서 말하는 궁녀는 고려․조선시대 궁궐 안에서 대전(大殿:임금의 거처) 및 내전(內殿:왕비의 거처)을 가까이 모시던 여관을 총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조선시대 내명부의 경우, 정5품인 상궁 이하의 궁인직(宮人職) 여인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상궁 이하의 궁녀는 4품 이상의 품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궁녀는 그 직책에 따라 계급이 나눠졌는데, 그 호칭은 직책과 관련이 있었다. 계급상 상궁․나인․애기 나인의 3종류로 크게 구분되는데, 7세 무렵에 입궁한 궁녀는 애기나인, 즉 새앙각시라 하였다. 새앙각시가 궁궐 안의 법도를 익혀 계례( 禮)를 치르면 나인이 되었다. 나인은 직책에 따라 지밀(至密)나인․침방(針房)나인․소주방(燒酒房)나인․세답방(洗踏房)나인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기 독립된 처소에서 안살림을 맡아보았다.
상궁(尙宮)은 조선시대 내명부에 속한 정5품 여관을 지칭하는 말이다. 상궁에는 제조(提調)상궁․부(副)제조상궁․대령(待令)상궁․보모(保姆)상궁․시녀(侍女)상궁 등이 있는데, 각기 그 직책에 따른 일을 맡아보았다. 그 가운데, 제조 상궁은 가장 지체가 높고 가장 고참의 상궁으로 '큰방상궁'이라고도 하였다. 제조상궁은 내전의 어명을 받들거나, 내전의 크고 작은 살림살이를 맡아서 주관하였으며, 나인들을 총괄하였다. 왕의 은총을 받는 것 이외에 궁녀로서 가장 출세할 수 있는 게 바로 제조상궁이었다.
무수리는 고려․조선시대 궁중에서 나인들의 세숫물 시중을 들던 계집종을 가리키는 말로 수사(水賜)라고도 부른다. 무수리와 관련된 인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이다. 숙빈최씨는 무수리로 궁중에서 지내다가 숙종의 은총을 입어 숙빈의 지위에까지 오른 여인이다.
궁녀는 민가(民家)의 처녀들 가운데서 엄격한 규정에 따라 뽑았는데, 궁녀로 뽑혀 궁에 들어오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또한 내명부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는데, 그 규칙에 따라 궁녀는 왕과 환관 이외의 남자와는 접촉할 수 없었다. 즉 궁녀의 팔자는 임금에게 달렸었다. 다행이 임금의 눈에 들어 은총을 입게 되면, 본인은 물론 집안까지도 부귀와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궁녀는 임금의 은총을 한번도 입지 못하고, 처녀의 몸으로 그냥 늙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궁녀로 뽑히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다에서 발췌-

■조선의 궁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시대에도 과연 여자의 직업이 있었을까? 철저한 유교중심의 사회에서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는 궁녀, 의녀, 기녀, 무녀가 있었다.
궁녀는 궁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여성들과 무수리, 각심이, 방자 등 품계 없이 일하는 여인들 모두를 말하는데, 종 9품에서 정5품까지의 품계를 가질 수 있어 당시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보통 궁녀는 상궁이나 나인이라고 불리며 왕실의 의식주와 관계된 일을 맡았다. 가장 지위가 높은 궁녀는 '지밀'로 왕실과 왕비의 신변 보호 및 일체의 시중과 내전의 물품관리, 궁중 안 여러 기관과의 교섭을 담당했다. 이 외에 궁녀들은 왕궁에서 소요되는 의복을 만들고 수를 놓은 '침방'과 '수방' 식사를 담당하는 '소주방' 음료 및 과자를 만드는 '생과방' 빨래와 옷의 뒷손질을 하는 '세답방'등에서 일했다.
보통 궁녀는 10년만에 한 번씩 뽑았는데 양반도 평민도 아닌 중인 계급의 여자아이 중에 4~10세 사이의 아이로, 상궁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이렇듯 궁녀는 아무나 될 수 없었기에 집안의 영광으로 삼았지만 철부지 아이를 보내는 부모들은 며칠씩 앓아 눕고 평생 맘 고생을 했다. 어린아이를 뽑은 것은 일찍 데려가 궁녀로서의 교양을 쌓게 하려 함이었다. 처음 입궐한 견습나인을 '애기 항아님'이라고 불렀으며 정식 나인이 되려면 15년이나 걸렸다. 견습나인은 몸가짐이나 말하기 등 궁중 법도를 빠짐없이 배우고 언문과 천자문, 대학, 소학까지 두루 익혀야 했다. 입궁한 지 15년이 지났을 때는 일종의 성년식을 치르는데 사실상 신랑 없는 혼례의 의미를 겸해 이날 집에서 바지, 버선, 속치마 등과 음식을 장만하여 부모로서의 마지막 도리를 다했다.
한편 처녀만 궁녀가 될 수 있다는 법도 때문에 '금사미단(金絲未斷)의 판정을 받아야 비로소 입궁이 허락됐는데, 앵무새의 피를 팔목에 떨어뜨려 피가 맺히지 않고 그냥 흐르면 처녀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일단 궁에 들어오면 늙고 병들기 전까지는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예외적인 경우는 모시던 상전이 승하할 경우 3년 상을 치르고 신주를 종묘나 사당에 모신 뒤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온다 해도 평생 수절해야 했다. 한번 궁녀가 된 여인의 삶은 온전히 궁궐 안에서 묻혀 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궁녀는 자신의 심정을 연못 속 물고기에 이렇게 비유하기도 했다.
"앞 연못에 사는 고기들아 누가 너희를 몰아넣었기에 살고 있느냐
넓은 바다, 맑은 연못을 어디 두고 이 연못에 살고 있느냐
들어오고 못 나가는 마음은 너와 내가 다르겠느냐"

■왕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불렀을까?

왕이 자기 자신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로 짐(朕:나 짐), 고(孤:홀로 고), 과인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 짐은 중국에서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였고, 고는 왕후 장상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였다. 그리고 과인이라는 말은 왕이 자기 자신을 낮출 때 사용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황제는 아니지만 중국과 대등하다는 입장에서 고(孤) 대신에 짐(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사실 고려시대에 몽고 침입 후 몽고(원)는 고려의 왕실 용어와 관제를 낮추어 충성을 표시하도록 하면서, 왕을 지칭하는 말인 짐(朕)은 고(孤)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각각 격하되었다.
왕의 묘호 역시 종래의 조(祖)나 종(宗)대신 왕(王)이라 하고 원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충(忠)자를 붙이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형식적으로는 중국(명)과 주종(主從)관계는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등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에서 주로 사용한 용어에 짐, 조, 종 등은 중국과 대등함을 보인 용어 사용이고, 전하, 세자, 왕비(비), 왕후 등은 주종관계를 인정한 용어사용으로 보인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자칭)-스스로 부를 때
황제 - 짐
왕 - 고
과인 - 자기 자신을 낮추어 부를 때
(타칭)-남이 부를 때
황제 - 폐하
왕 - 전하
(기타)
태자 -황태자를 의미(황위를 이을 황제의 적장자)
세자 -왕세자를 의미(왕위를 이을 왕의 적장자)

황후 - 황제의 본처(황비)
왕후 - 왕의 본처(왕비)

■왕을 부르는 호칭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1. 태어나면
왕은 태어날 때는 이름을 갖지 않고,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면 원자(왕의 장자로서 아직 왕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사람)가 된다.

2. 자 字
관례를 행하면서 받는 호칭. 일생동안 명심해야 할 훈계 또는 축복의 내용을 담은 두 글자

3. 휘 諱(이름)
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잘못하여 글로 쓰거나 하면 큰 벌을 받았다. 금기의 글자였던만큼 조선시대 사람들은 역대 조선왕의 이름을 죽 외우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상소문, 과거시험, 문장 등을 쓸 때 그 글자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잘 쓰지 않는 특이한 글자나 새로 글자를 만들어 썼다.

4. 호 號
자신이 스스로를 표시하기 위해 붙이거나 스승 또는 친구들이 붙여주는 일종의 별명.

5. 존호 尊號
왕이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경우, 신료들이 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올리는 호칭.

6. 시호 諡號
○ 왕이 죽었을 때 그의 일생을 평가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짓는 호칭.
- 고관 또는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 사후에 주는 존칭.
조선의 왕은 중국에서 두 글자의 시호를 받고, 미진한 경우 신료들이 네 글자의 시호를 더 올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왕후 앞에 붙는 명칭도 '시호'이다.

▷ 시호의 기원은 중국에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법흥왕 원년(514년)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이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기록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호제도가 정비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시호를 정하는 절차와 방법은 매우 엄숙하고 까다롭게 진행되었다. 특히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을 설치하고 시책을 올리도록 했다.
시호에 쓰는 글자는 정해져 있었다. 조선 초기 사용하던 글자는 모두 194자였으나 글자수의 부족으로 시호를 정하기 어려워 세종의 명에 의해 집현전에서 107자를 첨가, 그후 모두 301자를 사용했다. 그러나 자주 쓴 글자는 문 文, 정 貞, 공 恭, 정 靖, 양 良, 효 孝, 충 忠 등 120자 정도에 불과했다. 이 글자들은 모두 몇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 문 文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 /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 /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 / 충심으로 남을 사랑한다 / 널리 듣고 많이 본다 / 등 15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 가운데 돌아가신 분의 행적에 맞는 글자를 선택, 시호를 올리는 것이다.

7. 묘호 廟:사당 묘 號:부르짖을 호
○ 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부르는 호칭.

신료들이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공이 많다고 여기면 '조'를 붙이고, 덕이 많다고 여기면 '종'을 붙여서 두 글자로 지었다.(이것은「예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조'와 '종'에는 어떤 정해진 규칙이 없고, 신료들의 평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로 내려가면 '종'이고, 아니면 '조'다 라든가, 적자이면 '종', 아니면 '조' 등등의 말은 옳은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증명 I > 선조(중종의 서손, 덕흥대원군의 아들)
처음의 묘호 = 선종 -> 공보다 덕이 앞선다고 평가함.
바뀐 묘호 = 선조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공이 있다는 근거로 허균과 이이첨이 주장.

<증명 II> 중종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사이의 아들)
묘호가 바뀌진 않았으나, 연산군을 몰아낸 큰 공을 인정하여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음.
∴ 정해진 원칙은 없으며, 공이 있으면 '조', 덕이 있으면 '종'이라는 신료들의 평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8. 능호 陵號
○ 왕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
왕의 무덤을 '능'이라하여 존중했다. 능은 구릉이란 의미인데, 왕의 무덤이 구릉처럼 크고 웅장하다는 의미다.

이렇게 많은 호칭을 어떻게 표기할까? 왕의 칭호는 보통 붙여서 쓰는데, 그 순서는 보통

① 묘호 ② 중국에서 내려준 시호 ③ 존호 ④ 신료들이 올린 시호 순이다.

<예> 세조의 정식 호칭

" 세조 혜장 승천체도열문영무 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
① ② ③ ④

우리가 보통 태조, 세종, 성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길고도 긴 호칭의 맨 앞에 위치한 '묘호' 두 글자만 부르는 것이다.

그외의 호칭으로는 -

▷ 대원군
○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어 방계 친족이 대통을 이어받을 때,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 즉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때에 그 왕의 생부에게 주는 칭호.
▷ 대군, 군
○ 대군 : 왕비에게서 난 아들 / 왕의 적자
○ 군 : 후궁에게서 난 아들, 그리고 대군에게서 난 아들
▷ 비, 빈
○ 비 : 왕비, 왕후, 국모 등과 같이 사용하며 왕의 본처
○ 빈 : 후궁과 같이 사용하며 왕의 후처
▷ 공주, 옹주
○ 공주 : 왕비에게서 난 딸 / 왕의 적녀(嫡女)
○ 옹주 : 후궁에게서 난 딸 / 왕의 서녀(庶女)

시호(諡號)란 무엇이며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2007.12.05 17:24 | 역사읽기자료 |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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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란 무엇이며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중국 봉건제도의 특징은 엄격한 신분구별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 양반과 평민,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부부는 물론이고 남자와 여자, 심지어는 적서(嫡庶)까지 분명하게 구별해 놓고는 복종을 강요했다. 우리의 양반계층이나 상민계층도 이로부터 영향받은 바 크다.

자연히 생활양식은 물론 심지어는 계층간에 사용되는 언어나 용어에도 차별이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다같은󰡐죽음󰡑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었다. 즉 천자는 붕(崩:무너질 붕), 제후(諸侯)는 훙(薨:죽을, 무너질 훙), 고관이나 선비는 졸(卒)이 되나 평민들은 사(死)라고 표현했다. 물론 역적(逆賊)이 죽는 것은 폐(斃:넘어질 폐)라고 했다. 일종의 󰡐개죽음󰡑을 뜻한다.

또한 칭호에서도 특이한 제도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름은 태어나면서 짓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 봉건시대에는 일부 계층에 한해 죽어서도 이름이 붙는 경우가 있었다. 이른바 諡(시호시)號(부르짖을 호)라는 것이다. 대체로 왕이나 왕비, 왕족, 고관대작(高官大爵)이 죽으면 생전의 업적(業績)을 가려 일정한 칭호를 내렸다. 그것을 증시(贈諡), 죽고 나서 한참 뒤에 내리면 추시(追諡), 諡號를 바꾸는 것을 개시(改諡)라고 했다.

이 밖에도 명망있는 학자의 경우, 친구나 가족들이 諡號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사시(私諡)라고 했다. 帝王의 경우에는 禮官의 품주(稟:줄 품. 奏:아뢸 주)에 따라 계위한 제왕이 윤허(允許)함으로써 결정되는데 크게 표양(表揚 文과 武)과 비판(批判 靈,煬,悼 등), 동정(同情 哀,愍)의 경우가 있었다.

또 高官은 朝廷에서 결정해 내렸다. 조선시대의 경우,정2품 이상으로 국한했는데 후손들이 선정한 고인의 행장(行狀)을 예조(禮曹)에 제출하면 봉상시(奉常寺)와 弘文館에 보내 결정했다. 대체로 생전의 업적에 따라 文, 武, 貞, 正, 恭, 忠, 良, 익(翼), 정(靖)과 같은 좋은 의미의 글자 2~3자를 사용했다. 참고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忠武, 을사조약에 반대해 자결한 민영환(閔泳煥)선생은 忠正, 퇴계(退溪)선생의 諡號는 문순(文純)이다.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시행된 본 제도는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法興王 1년(514)에 智證 사후󰡐智證󰡑이라는 諡號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최초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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