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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과 서원
2008/01/31 오후 4:46 | 답사와관련한자료

향 약




1. 향약의 기원과 성립

조선시대에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마련하였던 향촌의 자치규약, 즉 향약은 풍속교화를 목적으로 한 일종의 도덕단체로서 성리학적 실천 윤리를 향촌사회에 보급하려는 사림들의 사적인 약속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향약은 상하 신분관계를 초월하여 향촌민 전체를 포함하며,효제 충신의 도를 행하고 예의 염치를 알도록 하는 것인 만큼 국가와 같은 공권력은 가질 수 없다. 그리고 향약이 위로부터 또는 사족중심의 규범적인 자치 규약이라 한다면 밑으로부터 지연적 혈연적 특수이익을 토대로 한 자연 발생적인 계와는 구별된다. 향약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길흉사 중심의 상부상조와 동정지인간의 환난상휼을 목적으로 하는 동계가 자생적으로조직되고 있었다.
이것이 유교문화의 성숙과 사림 세력이 진출 리 지상주의 실현을 위한 주자 숭배 사상이 점차 고조되면서 <鄕約 十契>의 형태로 발전되어 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우들끼리 또는 문중만의 친목을 도모하기위한 족계, 종계, 문중계, 등으로 조직 되던 것이 점차 확대 되어 내외손과 동일 지역 내의 타성 사족을 포함한 동약, 동약계로 발전하면서 향약의 4대 항목을 받아 들여 여기에 계의 향약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 향촌사회를 고찰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향약은 처음에는 주자증손 여씨향약이 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원래 藍田人 呂大防 형제가 친족과 동향리민 간의 친목과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시행한 私約이었으나 그뒤 주자가 이를 증손하여 향리 규찰,향풍진작,향촌 교화의 기능도 함께 가지는 일향의 규모로 확대 하였기 때문에 이를 주자 증손 여씨향약이라 한다. 그러나 소학에 실려 소개된 초기에는 성리학자들에 의해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것은 향약 전래 이전부터 상부상조를 내용으로 하는 우리 나라 전래의 자생적인 계가 시행되고 있었고 또 향읍 방리마다 백성들을 糾斂하는 향도회라는 민간인의 사적 조직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유향소,삼강행실,正俗,소학,鄕射禮,향음주례 등이 정부 또는 재지 사족에 의해 향촌사회의 교화책으로 적극 권장되고 있었고, 賑貸 救荒을 목적으로는 주자의 사창제가, 재지 사족 자체의 규제 조치로서는 향규가 일부지역에서 시행되고 있어 향약의 기능을 대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정책은 수령권과 재지 사족, 훈구세력과 사림세력간의 이해충돌로 그 시행은 지지부진하였고 그 성과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그 후 중종대 사림세력의 성장과 함께 성리학적 윤리 질서의 실천 방편으로 향약이 강조되면서 종래의 모든 교화책이 향약의 체제속에 흡수되어 보다 광범위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중종12년 함양인 김인범의 상소로 공식 건의되면서 사회 변혁을 추진하고 있던 신진 사류의 뜻에도 부합되어 전국적으로 확대 되었고 여기에 김안국에 의한 언해본의 출간은 산간 벽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시행과정에서 많은 폐단이 노출되자 훈구세력들은 정치적 차원에서 이의 중지를 요구했고 결국 기묘사화를 계기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시행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향약은 지방적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명종대가 되면서 교화적 기능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환난 상휼 중심의 구휼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때부터 여씨향약의 체제를 벗어난 조선 향약이 제정되기 시작하였다.
1556년(명종 11년)에는 이황이 여씨향약을 본떠서 <<예안 향약>>을 만들었고 영조때의 퇴계학파 최홍원은 이를 증보하여 달성군 부인동의 동약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1571년에 이이는 여씨향약 및 예안 향약을 근거로 <<서원향약>> 과 이를 자신이 수정증보하여 1577년에 <<해주향약>> 및 <<해주 일향 약속>>을 만들었는데 이들 향약은 조선 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우리 나라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여씨향약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그 후반부터는 현실 문제에 입각한 실제적인 면에 치중했고,조선향약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 조선 향약의 성숙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 향약의 조직과 기능

향약의 임원 조직은 주자 향약의 조직원인 都約正.副約正,直月을 근간으로 한 바탕위에 계약 조직과 면리 조직을 접목시킨 조선 향약이 제정되면서 약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대개 상부조직체를 형성하고 이에 대립되는 하부조직체로 有司, 色掌, 別檢, 里正들로서 대개 상민 중에서 선출하였다. 이들 하위직은 조선향약이 가지는 하나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도약정은 명실 공히 향약의 대표자로 도약장, 도계장, 도풍헌, 약장, 집강, 향헌 도감, 도정, 동약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명칭은 향약의 체제를 유지했을 경우에는 대개 도약장,약장을 계적 조직이 중심일때는 도계장, 도정을 동약형태일 경우는 洞約尊을 향규적 성격이 강할 때는 도풍헌, 향헌, 도감을 쓰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격은 우선 연장자에다 덕망 학업을 두루 갖춘 인물이여야 한다.
이러한 자격 기준은 관 주도로 시행되던 중종대 감사가 임명하거나 大臣之職에 있었던 인물이 맡았던데 비하여 명종대이후 자치 조직으로 변모하면서 향론을 집약시키고 향촌민이 승복할 수 있는 인물로 선정되었다.
임기는 특별한 이유나 과실이 없는 한 종신제를 원칙으로 하고, 질병,부모상,장기 출외 및 인망 불합한 자는 부득히 교체하는 것으로 한다. 부득히 교체할 시에는 約員 父老들의 의논으로 처리하였다.
임무는 부약정과 함께 일향의 공사, 즉 민간 쟁송, 향회주관 상벌의 시행 등 향촌사회의 실질적인 주관자였다.

부약정은 도약정의 유고시 그 직무를 대행하는 자로서 부약장, 부헌, 부정, 약직부계장, 부임등으로 불린다. 이들의 자격은 학행, 識行, 청렴하고 근검한자 등으로 행실면에 치우쳤고 모든 일을 청렴 결백, 공명정대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이라야 했다.
임기는 지역에 따라 종신 내지는 주년 교체직인데 <해주 일향약속>,<함흥부향약>,<경안면이리 향약>에서는 1년이고 나머지는 모두 종신직이다.
부약정의 직무도 도약정과 함께 공사를 주관하지만 주로 도약정을 보좌하고 도약정의 유고시 그 직무를 대신하며 향약 독약례나 향회시 유사 또는 직월이 약조를 읽고 난후 모든 사람이 알아 듣도록 각조목을 보충 설명하며 읽기도 한다.인원은 1인 또는 2인을 원칙으로 한다.

직월은 실무 담당자라 할 수 있다.주자 향약에서는 이들의 신분이나 자격에 대해 아무런 규정이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노복이 있어 명령을 할 수 있는자, 학행자, 재주와 학식을 겸비한 자 등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주임무는 入約籍, 善籍, 惡籍이라는 3적을 주관하고 약원의 행동을 살펴 선악적에 기입한 후 월말에 약정에게 보고하며 색장, 별검을 규찰하고 행례시에 향약 4조나 경고문을 읽고 취회의 회문을 취급하며 길흉사때의 부조물을 수합하여 보내는 일 등 조직내의 모든일을 주관하는 것이다. 직월대신 유사를 둔 지역에서는 맡은 임무를 감당할 수있는자,문자를 해득 할 수있는 자, 근실하고 진솔하게 일을 해결하는자 등으로 규정하여 약중사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모든일을 스스로 판별할 줄 아는 인물로 규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직월은 도.부약정과 함께 향약조직의 상층부를 형성하지만 유사는 실제 사무를 담당하는 계층으로서 직월보다는 하위직으로 나타난다. 그나마도 17세기에는 하인 중에서 선출되는 경향이 많아 향소원, 동내 품관 등으로 차임하던 16세기와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색장은 별검, 司貨, 庫直, 使令 등과 더불어 향약의 하부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데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들의 신분은 하인, 서민중 근실한 자, 중인 서인중 문자 해득자 등으로서 하인 중에서 문자를 알고 일을 민첩하게 처리할 수 있는 자로 했다. 이들의 임무는 주로 유사와 더불어 선악적을 관리하며 里중에 상사가 있으면 유사 동약지인에게 알리고 상사에 관한 모든 약중사무를 주관하였다. 임기는 대체로 종신제를 취하고 있다.

별검은 양천중 勤幹한자로 매리 매장내에 1인씩두어 색장과 함께 하민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주로 四孟 朔會의 회문을 동약자에게 전하고 리중 상사가 발생하면 계장, 동약 지인에게 알리는 일을 처리하였다.

고직은 재화 관리 掌守倉穀 곡물출납, 미의 보호와 출납을 관장하는 직이다. 이 직책이 향약내의 일원으로 등장한 것은 명종때 환난 상구의 강조, 이이의 양민 우선론 이후부터이다. 또 각종 계에서 기금을 중시하여 보상곡을 비치해두는 등 경제 활동이 활성화 되면서 향약 조직내에 사창법이 도입되어 창곡만을 전담할 필요에서 설치하였다.

掌務는 사령과 더불어 유사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로 造米를 수합하여 고직에게 전하기도하고 동약 문서를 취급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신분은 비록 庶賤이나 可任者로했고 公廉能文者로 선정하였다. 임기는 대개 1년으로 교체하였다.

사령도 장무와 마찬가지나 이들은 직접 심부름을 담당하는 자로 장무보다는 대개 연소자로 선정했다. 이때문에 인원도 장무1인에 비해 <사창 계약속>에서는 4인 이리 동약에서는 2인으로 하였다. 임기는 1년으로 교체하였다.

향약의 기능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실시 초기에는 성리학적 윤리질서를 확립하려는 사림파들의 노력에 의해 교화적 기능이 중심을 이루었다. 거듭되는 전란과 사회적 혼란으로 교화적 기능은 조선사회 전기간을 통해서 이어졌다.
다음은 자치적 기능을 들 수 있다. 향약의 본의가 향촌 사회에서 인리 화목과 상호 부조에 있었던 만큼 어디까지나 관권의 개입을 배제하고 있었다. 시행 초기에는 관찰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림파에 의한 개혁 의지에 불과한 것이었고 거듭된 사화로 낙향한 관인이 늘어나면서 재지 사족들에 의한 향권장악의 목표 아래 수령권과 대립되면서 점차 자치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자치적 기능은 향회의 운영, 처벌권의 시행, 원악 향리에 대한 통제로 요약 될 수 있다. 처벌권은 재판권 약법 재정권과 함께 조선향약이 가지는 대표적인 권한이다.
셋째는 환난 상휼 및 사회경제적 기능이다. 이것은 상부상조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지역민간의 유대를 강화하여 생활 안정 및 지역 협동을 강조한 것으로 계적 요소와 결부되고 있다. 조선향약에서는 대체로 길흉사 부조와 권농 조항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길사는 주로 혼인 부조를 말하는 것으로 유교윤리를 강조해온 조선사회에서 사상부조와 함께 중시되어온 문제이다. 死喪 부조는 조선향약의 환난상휼조에서 가장 강조되는 사항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부조 내용은 율곡 제정의 향약에서 나타나고 보다 정비된 것은 金圻의 향약이다. 이들의 내용을 보면 부조의 대상도 父母 己妻의 4상에 국한하고 물품부조와 조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상하민이 모두 적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편 향약의 조목 속에 권농 조항을 설정함으로써 경제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를 시행치 않을 경우에는 처벌 규정까지 마련하고 있다. 농민을 침탈하거나 농사를 게을리 하는 자는 중벌로 규제하고 일가가 질병으로 폐농할 지경에 이르면 경종 제초 수확에 이르기까지 서로 도와 폐농유리를 극력 방지하고 있다.


3. 향약과 향촌지배

조선사회는 왜란과 호란으로 극심한 경제 파탄을 가져 왔고 당쟁의 격화와 인조반정,이괄의 난 등으로 사회적 신분적으로도 상당한 혼란을 가져왔다. 특히 농촌사회에서는 전후 농토의 황폐화와 과중한 담세 부역으로 백성의 유리화를 촉진시키고 각종 군공으로 신분 상승한 신흥양반들의 진출은 전통양반과 향촌사회의 주도권 문제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유향소를 중심으로 해서는 향규가 문중과 동을 중심으로 해서는 족계,동계,향안 등이 제정되어 새로운 향촌 질서를 구축코져 하였다. 즉 재지사족의 입장에서는 위로부터 가해지는 관권의 간섭을 배제하고 아래로부터는 하층민의 저항에 대처하면서 그들의 신분적 우위성을 유지하기 위한 동중심의 규약을 선호하게 되고, 반면 수령은 왕권의 대행자로서 화민 성속과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고 일읍의 통치자로서 강력한 관권 행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군현 향약이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하층민과 서얼의 경우에는 전란을 통한 군공과 첨설직으로 인한 신분상승으로 양반계급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강력하게 전개되었으니 17세기에 각종 향약류가 활발히 제정된 소이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하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이글은 <<조선시대 향약 연구>> 신정희 영남대 박사학위 논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서 원



. 서원의 설립 목적

선초이래 정권을 장악해 온 훈구세력에 도전하기 위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그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사림에게는 선현을 奉祀하고 향촌사회의 교화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선현을 봉사하는 장소와 선현의 학을 추모하여 선현의 학을 닦고자하는 사림의 교학적 관심, 나아가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리학에 의한 사상적 무장화을 발판으로 정계에 복귀하려는 정치적 야심에서 서원이 건립되고 있다. 연산조 이래 여러 사화를 거치면서 수난을 겪어온 사림들은 비판적 자세의 내면적 성과로서 학문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러한 학문적 역량의 축적에 의한 숫적 확대는 그들의 교육기반 자체에도 변동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종래의 서재, 정사류의 이들 교육기반이 이제 한걸음 나아간 제도로서 서원으로 바뀌는 단초가 열리게 된다.


2.서원의 설립과 사회 문화적 배경

우리나라 서원은 여말 철학적인 유학으로서 성리학이 새로이 전래되면서 그를 바탕으로하여 성립한 사묘와 교육위주였던 私置 精舍적 서원과 융합하면서 조선 중기에 이르러 마침내 특유의 유학 교육기관으로 확립된 것이다. 여말선초에 이같이 서원설립의 여건을 보이면서도 곧 서원이 건립되지 못한 것은 초기의 군주들이 교육과 학문의 진흥을 위해 보여준 열렬한 장학 정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초에는 국가정책의 일환으로서 관학의 기운이 활발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교정치의 변칙적 발전과 과거에 치중한 관학체제의 운용 등 양반관료체제의 해이로 말미암은 사회 문화상의 변화는 사학 발달을 촉진하였다. 당시의 사회상은 서서히 나타난 관학의 부진, 연산군이후의 현실 도피사상, 그리고 모화사상의 만연으로 전개된다.

1) 관학의 부진
사학의 발전을 촉진한 하나의 큰 요인이 국가에 의해서 설립된 국학 향학의 부진에 있었다함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현상이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세종대에 대략 완비된 반면에 이미 이때부터 여러가지 원인에 의하여 부진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관학의 부진은 세조때에 이르러 더욱 격화된 듯하다. 그러면 이와 같은 관학의 부진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관리 등용의 길이 과거외에 충순위 등 무예를 통하여도 열려 있었기 때문에 학교는 과거 준비를 위한 독점적 기관이었던 그 본래의 권위를 잃고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교학의 수단은 새로운 체제를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교관의 질은 저하되었으며 세조의 집정 후 무예가 중시되고 이로 인해 학자들이 관계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히고자하는 경향이 크게 나타나 성균관 및 사학의 관학은 텅비게 되었다.

2) 학풍의 변화

선초 유학의 경향은 정치의 수단화하여 실제적인 면이 농후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와 달리 성리학의 근본정신을 추구하며,유학의 깊은 이해를 위하여 철학적 연구를 하고자 하는 무리도 있었으니 조선왕조의 건국사업에 비판적 비타협적인 계통이 그들이었다. 유학의 철학적 발전이 심화하게 된 가장 중요하게 된 계기로는 보통 사화가 지적되고 있다. 네번에 걸친 사화와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많은 선비들은 관계에 나서기를 두려워하여 혹은 칭병하며 혹은 기타의 구실을 붙여 향촌, 전야에 피신하고자 하였다. 고향산천에 묻힌 그들은 그후 심리적인 안정을 찾고 한가히 독서에 열중하며 특히 성리학의 연구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인근의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마침내 중앙 조정의 번거로운 정치문제나 부패한 관계와는 상관없이 학구적인 태도로 성리학의 근본정신을 탐구하는 사학 서원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3) 중종의 숭유정책

학문의 탄압을 일삼던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의 유학 장려는 사학의 발전을 더욱 조장하였다. 중종은 당시 사림의 영수인 조광조를 중용하고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전왕 때에 황폐하여진 학교를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관학은 여전히 부진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성장을 촉진한 사학 즉 서원은 관학을 보충하여 그 기능을 대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4) 주자 숭배 사상의 만연

조선 왕조의 문물 제도는 건국이념이 유학 특히 주자학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주자학적 바탕위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이미 국초부터 주자의 사상은 백성 지배 개념으로서 적용되어 왔으며 그경향은 시대를 거듭함에 따라 더욱 일반화되었다. 나아가 주자학에 대한 극심한 숭배의 결과로 주자서인 <<소학>>이란 수신 율신의 초보적 단계로서 필수과정으로 삼았고 주자숭배는 학문 그 자체를 떠나서 주자 자체를 숭상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학교 교육면에서도 구현되었으니 주자의 백록동학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답습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모두 열렬한 주자숭배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주자 백록동서원의 흠모는 그 실천 궁행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에서의 서원 성립을 이루는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이다.


3. 서원의 성립과 구조

1) 서원의 연원 기원

역사상 교육기관으로서 서원이라는 말이 처음 쓰여진 것은 조선 세종때의 일이다. 세종은 즉위 후 “其有儒士 私置書院 敎誨 生徒者 啓聞 褒賞”이라하여 儒士로서 사사로이 서원을 설치하여 생도를 교육하는 자는 포상하여 권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서원이라는 사학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의 서원들은 후세의 그것과는 다른 단순한 자제를 교육하는 장소로서 고려이래 발전한 서재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조 서원이 고려말 이래 발생한 祠廟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가 결합하여 성립 된 것이라 할때 서원의 연원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선원선사를 봉사하는 사묘가 서원의 중요한 반면의 구성요소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사묘가 고려 말에 발생했다는 것은 후기 서원의 맹아로서 주목할 만하다. 서원의 연원은 여말의 사제 뿐만 아니라 멀리 중국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조선 최초의 백운동서원이 송대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모범으로 삼았다는 사실로 보아 이를 잘 알 수 있다.
중국의 서원은 이미 당대에 발생하였으나 강학처로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송대에 이르러서이다. 이후 남송대에 이르러서는 여러가지 폐단을 낳게 되고 결국 명대에는 철훼론이 대두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철훼론이 대두 될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서원의 성립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일은 명조의 서원론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쳐 종래에 이지역에 없던 서원의 발생을 촉진시켰던 결과였을 것이다.

2) 서원의 성립 발달

서원의 연원은 이미 고려 초에 싹트기 시작하여 이것은 사학과 삼의 양면으로 개별적인 발전을 보이다가 조선조에 이르러 국가의 숭유정책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산군이후의 정세하에 양자가 결합하여 시대적 요구에 영합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지방에 분산 유전하던 유림이 통합적 기회를 제공하고 유림으로 하여금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 면학에 힘쓰도록한 것이 서원의 설립이었고 이는 풍기 군수 주세붕과 같은 수령의 개인적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되었다. 주세붕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지방 교육기관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은 것과 사화 발생 이후 유림의 유랑생활을 보고 유림에게 귀착할 곳을 마련해줌과 동시에 斯道의 究明, 사풍의 순화를 꾀하여 서원을 창설하게 되는데 당시 그가 부임한 풍기군이 고려 시대 주자학을 전래시킨 안향의 고향이었음을 알고 그를 모시는 서원을 세운 것이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을 창설하여 춘추 제향을 드리게 하는 한편 유생 강학처로 삼게하여 후세 서원 발전의 단서를 열게 한다. 조선에서 서원은 개인적인 노력에 의하여 창설되었고 이후 유림 사이에서 속속 모방되어 많은 서원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유림사회의 절실한 요구에 부합되는 것이다. 즉 당시의 문신 유사들은 관학의 부진에 실망하여 이를 대신할 어떤 새로운 교육기관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유림에 의해 연고 선인들의 서원을 각지에 세우는 일이 크게 일어나 서원 남설의 폐풍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의 정치 경제 사회사상 문화 등 막중한 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은 국가로 부터 면세의 토지와 노비를 급여하는 사액제도를 시행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서원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사액이란 즉 서원에 대해서 그 교화 사업을 효율적이고 영향력있게 추진하도록 하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서원의 명칭을 선정 액판에 모사한 편액을 선사함과 동시에 다액의 전토와 노비를 면세로 급여하고 다수의 서적을 頒賜하는 것을 말한다.
이외에 서원 발전의 모태로서 역할한 것은 국가로부터 받은 상당한 경제적 지원이었다.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는 서원전에 대해서는 속대전의 규정으로 알 수 있는데 사액서원에는 면세전 3결을 지급하고 미사액 서원에는 면세전을 지급 하지 못하도록 법제화 되어 있으나 실제 별 제한이 없었다. 각 서원은 국가에서 지급받는 서원전 외에도 유지들이 기증하는 원입전, 부역의 부자가 면역을 위해 바치는 면역전, 서원에서 매입하는 매득전 등 여러 형태를 취하여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였고 이들의 토지는 대체로 면세전이었다. 서원의 발달은 또한 사림의 집권과 시작된 붕당 정치와도 관계있다. 대체로 학연으로 맺어지는 성리학의 체계에서 붕당은 각지의 서원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여론을 형성하면서 그것을 중앙에 진출한 자파의 관료를 통해 반영시키는 것이다. 선조때에 본격적으로 진전되는 서원의 발전은 규모, 내용면에서 초창기의 서원과는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종대에는 당쟁이 성리학 차원의 붕당 경쟁이 아닌 정파 본연의 세력 경쟁으로 변질되었고 이 대립은 붕당정치의 기반인 서원의 변질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이후 숙종대에 서원의 남설이 사림의 부당정치의 파탄과 동시에 나타났다. 또 영조 이후에는 위정자의 서원 정리 문제가 대두하고 서원 설립을 극도로 제한하거나 정리하게 되어 영조때에는 3000여 개소의 서원의 정리를 보았고 이후 정조 철종때에는 효과가 없었으나 고종때 대원군에 의해서 전국 47개소의 서원으로 정리되었다.

3) 서원의 구조

서원의 구성은 서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인 것으로 선현 선사를 봉사하는 사묘가 있고 그 전면에 유생들의 기거와 독서하는 동서 양재, 그리고 강학하는 강당으로 되어 있으며 사묘의 제사는 보통 춘추 2회 거행되었다.
서원의 임원은 서원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그것으로 대개 원장, 원이장, 강장, 훈장, 제장, 도유사, 부유사, 집강, 직월, 장의, 색장 등을 두었다. 이중에 원장은 덕망이 높고 연장자로 원중 유림이 선정하는 것으로 원무를 총괄하였고 원이장은 부원장으로 원장을 보좌하고 원장 유고시에는 그 직을 대신하였다. 그 인원을 보면 원장, 원이장은 각 1인으로 되어있고 그 이외에 대체로 2인으로 되어 있으며 임원의 임기는 보통 1년으로 되어 있었다. 서원의 모입 유생수는 백운동서원의 경우 그 초기에는 원생의 정원을 10인으로 하였고 다른 서원들도 이를 본따서 1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한 것 같이 생각된다. 그후로 내려오면서 인원의 증가를 보여 30인 내외가 된 것 같고 숙종때에는 이를 제한하여 법제화하였으나 이와 상관없이 막대한 인원을 모집하였다.

4.서원의 기능

서원의 기능은 첫째 선현 숭덕의 사상에서 나온 선현에 대한 사묘적기능, 둘째 유생 자신의 유학적 기능과 향리 자제 유생들에 대한 교학적 기능, 세째 지식 전달을 위해 서적을 수집 또는 출판하고 문고를 두어 서책과 문헌을 보존관리 하는 도서관적 기능으로 나눌 수 있다.

1) 사묘적 기능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적기능이 서원의 기능에 있어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고 유교국가에서는 조상을 외경하는 조상숭배 관념이 그 은덕에 보답하려는 報本 思想이 특히 강조된다. 이러한 기운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특정한 위인, 선현을 숭배하는 숭현사상의 발생을 보여 마침내 사묘의 제도가 등장하게 된다.우리나라에 사묘의 발생은 여말 성리학의 전래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즉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하는 지배이념이 확립되면서 주자가례의 실행을 보았고 여기서 가묘제가 성립하게 되었다. 보통 사묘라하면 각개인의 조상을 제사하는 가묘를 비롯하여, 생존중 신격화되어 받들어지는 生祠와 그 사후 봉사되는 祠宇의 양자이다. 사묘는 그것이 점차 발전하여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교육적 시설과 결합, 서원으로 발전하였고 유교 사회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서원의 사묘적 기능은 더욱 강화되었다.

2) 교학적 기능

서원의 교학적 기능은 세종때부터 교학 기능을 활발히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서원의 교육적 기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종때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설립 할 때 서원의 좌우에 서를 두어 재향사림의 자제를 모아 교육과 학문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동기 등을 팔아 경사서를 중국으로 부터 사와 구독에 대비하게 한 사실이나 그후 소수 서원으로 사액될 때 사서육경, 성리 대전을 하사받은 일 특히 서원이 조선 성리학 발달의 기반이었고 다수의 성리학자를 배출한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3) 도서관적 기능

도서관적 기능이라 하면 문고를 두어 서적과 문헌을 보존 수집하고 지식의 전달을 위하여 서적의 출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서원의 본래적 기능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서원의 연원이라 볼 수 있는 당대의 집현전 서원과 소수원의 성격에서 분명해진다. 중국의 서원도 처음에는 서적의 수장에서 출발하여 교학기능으로서의 설립을 보았고 조선 중기이후의 우리나라 서원의 거개가 문고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볼때 서원의 형성과 도서관적 기능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 서원에 장서를 배치한 최초의 구체적 사례는 주세붕의 백운동서원이다.
주세붕은 서원을 세움과 동시에 그 유지에 필요한 전답 학전을 마련하고 원생들의 강학에 필요한 서적을 구입하여 서원에 비치하고 있다. 서원들은 처음부터 사서의 혜택을 받았건 아니건 향리의 자제 교육에 필요한 각종서적을 수집 보관하여 일종의 학교도서관으로서 서원 문고를 형성 발전시켜 나아갔다.


-------- << 참 고 문 헌 >>--------

1.최완기 < 조선 서원 일고 > 성립과 발달을 중심으로 <<역사교육>> 18 ,1975.
2.유홍렬 <조선사묘의 발생에 대한 일 고찰 >,<<진단학보>> 5,1936.
3.민병하 < 조선 서원의 경제 구조 > <<대동문화 연구>>,1968.
4.정만조 <17,8세기 서원 사우에 관한 시론 > <<한국사론>>2,1978.
5.이태진 <사림과 서원> <<한국사>> 12, 1978.
6.이수환 <서원의 정치 ,사회사적 고찰> <<교남사학>>,창간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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