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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님 너무감사 제가 숙재..
정말 알고 싶었던 내용..
좋은 정보 잘 보고 갑..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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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울푸 독에서 퍼온 글입니다. 교육 목적으로만 사용하겠습니다>
무적 몽고에 맞선

     고려의 30년 위대 항전 (상)

       - 숨겨진 고려 영웅 낭장 (郎將)문대(文大)의 죽음

 

제목이 의미하는 이글의 취지가 무엇인지 독자 여러분들은

짐작이 갈 것이다.


오늘 한국 5000년역사에서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뭐 별로 틀리지 않을 고려 민군의 영웅적인 민족 보존 투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조상이 수나라나 당나라 그리고 일본등을 상대로
상상을
초월한 대 저항전을 전개해서 이들을 격퇴한 것은

역사에 길이 남겨져 있다.


그러나 다른 고구려와 조선의 적이 아시아 급 챔피언이라면

고려 민군이 대결한 몽골은 세계를 휩쓴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었다.


이미 아시아 챔피언 급인 대륙의 금나라를 박살냈고 중국인 남송도

쓸어버린 무서운 기세로 고려를 덮친 슈퍼 파워급 대군이었다.


그리고 이들 몽골군은 항복하지 않은 적은 몰살시키는 잔인한

야만성을 발휘했었다.

고려의 민과 관과 군은 이런 끔찍한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죽을힘을 다하여 저항했었다.


그리고 이들 고려 민과 관과 군이 이들 몽골군과 살을 깎이고

뼈를 잘려 가면서 혈투를 벌린 기간이 우리 민족사
어느
전쟁보다도 긴 장장 30년의 세월이었다.


대몽 전쟁은 (對蒙戰爭) 누가 보아도 한국 민족 항쟁사에

최고, 최장의 영웅적인 전쟁이었다.


나는 이 대몽 전쟁을 보면서 항상 왜 이 전쟁은 왜 우리 현대에

크게 평가 받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가져왔었다.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이나 강감찬 같은 영웅이 없어서인가?

그러나 대몽 전쟁에도 이 분들과 비교할 영웅들은 여럿 있었다.


먼저 이야기가 한참 동안이나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지만 시공을

훌쩍 건너뛰어 한참 뒤 1500년대 전국시대 일본으로 가보자.

------------------------------------------------------ 

1575년 가히의 영주 다케다 가쓰요리는 삼만 병력을 일으켜

인접 도쿠가와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도쿠카와 영내의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성의 성주는 도쿠가와의 사위 오쿠다히라 사다마사가  단지
500명의
부하만 데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나가시노 성- 아래 소개하는 스네에몬은 이 강을 타고 탈출하여
오다와 도쿠카와 연합군에게 갔다.
---------------------------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의 군세가 미약하게 보여

금방 함락 시킬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급한 지세에 지은 성은 공격하기에 워낙 안 좋았고

오쿠보 사다마사의 지휘가 출중해서 좀처럼 함락을 시킬 수가 없었다r


그렇다고 나가시노 성 부대의 형편도 느긋한 것도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원군(援軍)이 좀처럼

달려 와주지 않은 것이었다.


이 때 오다 노부나가는 차제에 다케다 군을 쓸어버릴

비책을 짜고 필요한 철포를 긁어모으고 부대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원군 파견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기진맥진한 성주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부하 중에 성실한

도리이 스네에몬(鳥居 强右衛門)을 밀사로 도쿠가와에게 파견했다.


도리이 스네에몬은 심야에 성에서 나와 강을 따라 헤엄쳐 올라가

다케다 군의 포위망을 뚫고 오다와 도쿠카와에게 가는

밀사 임무 완수에 성공했다.


오다와 도쿠카와는 시급한 출동을 약속한다.

스네에몬은 성으로 돌아오다가 다케다 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를 심문한 다케다의 중신 아나야마 겐바노가미는 그에게 제안한다.

살려 줄테니 성의 방어군에게 오다와 다케다의 부대가 구원군을

보내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지요.”

꽁꽁 묶인 스네에몬은 가까운 본성의 망루가

잘 보이는 앞 바위위로 끌려갔다.

스네에몬은 시키는대로 성을 향하여 외쳤다.


“성안에 있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바위위에 오른 스네에몬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도리이 스네에몬, 성으로 돌아가려다 이렇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오다 도쿠가와 두 대장님은---”


일단 말을 끊었다.


“이미 사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오카자키를 출발하셨습니다.

 이삼일 안으로 반드시 운이 트일 것입니다.

 성을 굳건히 지켜주십시오!"


“ 와아 !"

성안에서 함성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다케다 군 졸병 두 명이

바위에 뛰어 올라 스네에몬을 끌어내어 사정없이 구타했다.


그리고 중간은 생략 --


놀림을 당해서 분노 할대로 분노한 가쓰요리의 직접 지시로

내린 처형이 뒤따랐다..


스네에몬은 십자가에 묶이고 손에 못이 밖혀서 성을 바라보는

바위위에 높이 세워졌다.

구타로 정신을 잃은 스네에몬이 정신을 차리려 했을 때

두 겨드랑이 밑에서 창끝이 교차하여 양 어깨를 뚫고 나갔다.


“으으으-----”


스네에몬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귀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런 가운데서 누군가가 열심히 무언가를 말했다.


“ 도리이님! 도리이 님이야말로 참다운 무사,그 충성을 본받기

  위해 최후의 모습을 그려 기치로 삼으로 하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다케다 군의 가신 오치아이 사헤이치

 (落合 左平次), 스네에몬님,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스네에몬은 그 말에 웃음으로 답하려 했으나 더 이상

얼굴 표정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방 무사는 붓통을 꺼내 종이에 스네에몬의 최후를 그리고 있었다.

장소는 아루미가하라 , 사다마사 부대 야마가카 사부로베에의
진지 앞,
이미  석양이 시뻘겋게 물든 대지의 핏빛을 비추어
반사하기 시작했다.

--------------------------------------------------------

남자라면 가슴이 뭉클할 만큼  감동이 드는 전쟁의 로망이다.


스네에몬 말대로 며칠 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해서 나가시노 성은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다케다군은 밀어닥친 오다와 도쿠가와의 대군과
나가시노 전장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역사의 큰 기록으로 남는 대전투로서 오다의 철포 부대

3,000명의 연사로 다케다 군은 궤멸적인 대패를 한다.


나가시노 전투 - 오다군의 철포대에 의해서 다케다군은
거의 전멸,가쓰요리는 단지 댓명의 가신들과 함께 전장을 빠져 나갔다.
-----------------------------------------------

스네이몬의 주군과 동료을 위한 신의는 잊혀지지를 않아 그의
아들들은
대대로 오쿠다이라 가문의 중신이 되었다.


60년대 소설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대 히트 이전부터 이 일화는

일본에서 잘 알려진 역사의 감동 전쟁 스토리였다.


십자가에 묶여 죽은 스네에몬을 그린 오치아이 사헤이치는
그 그림을
자기 전투 깃발에 새겨 넣어 사용하였다.
이 기치는 지금도 일본
후쿠오카 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도쿠가와 막부시대 스네에몬의 죽음은 사무라이들이 즐겨하는

군담(軍談)의 주요 화제의 하나였었다.


그에 대한 사랑은 현대에 들어서도 식지를 않아

그의 전기도 출판되었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었다.

지금 일본 국영 철도 (JR)의 이이다선에는 도리이 스네에몬이라는

역이 있어 그의 충의가 어느정도 후세인들의 사랑을 받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위의 감동스러운 전쟁 로망의 이야기는 한국사에도 있다.

단지 이 영웅의 이야기는 일본과 달리 영웅 모시기가
게으른 후손 때문에 
고려사라는 책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묻혀있을 뿐이다.


1231년 일차로 고려를 침공한 몽고군은 압록강 아래
철주 산성을 공격했다.


기고만장했었던 침공 초반 몽고군은 앞으로 이 작은 반도에서
끔찍하게
힘든 전투를 겪게 될지는 모르고 철주 산성의
수비군이 자신들이 천하에
용맹을 드날린 몽고군이 아니라고 믿어서
저렇게 건방지게 저항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서 포로로 잡은 고려군 낭장 문대(文大)를 철주 산성으로

성문 앞으로 보내서 자신들이 진짜 몽고군이라는 사실을
말하라고 했다.

무시무시한 원조 몽고군이 왔으니 알아서 빨리 항복을
권고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성 앞으로 끌려간 문대는 큰 소리로 외쳤다.

“ 이 놈들은 가짜 몽고군이다! 절대로 항복하면 안 된다!”


기대치 않았던 돌발 상황에 기가 차게 놀란 앞의 일본군과는

달리 몽고군은 재차 한번 기회를 주었다.

그에게 그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달랬다.


그러나 문대는 성을 향하여 꼭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외쳤다.

“ 이놈들은 가짜 몽고군이다! 절대로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라!”

울화통이 터진 몽고군은 그를 즉석에서 베어 죽여 버렸다.


그의 죽음에 눈물로 감동한 철주 산성의 군과 민은 처절하게

저항하며 반달을 버티었다.

그러나 양식도 떨어지고 병력도 소모되어 8월29일 몽골군이

성내로 난입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상황이 막바지에 오르자 지휘자인 방어사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은

자신들을 따라서 성에 들어와 있던 어린 자식들과 부녀자들을
몽고군에게 도륙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창고에 넣고 불을 질러
죽이고 자신들은
쇄도한 몽골군에게 최후 돌격을 함으로서 스스로
호국 산화의 길로 갔다.


몽골군은 성의 군민들을 포로로 잡고 쓸 만한 사람들은

자기 부대의 노무자로 징발하고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남김없이 학살했다.


위의 밋밋하게 쓰여 있는 낭장 문대의 영웅적 산화는 앞에서 소개한

일본 전국시대 도리이 스네에몬의 죽음보다 덜 감동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 소개한 스네에몬의 일화는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작가 야마오카 쇼바지에 의해서 극적으로 윤색되고 문장적으로

미화 된 것이다.


자 -여기서 다시 여몽 전쟁의 배경으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초원의 푸른 늑대 - 징기스칸



징기스칸의 등장은 별빛같이 미약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태양 같은 존재로 세상을 뒤흔들다가
사라졌다.


몰락한 가문에서 몸을 일으켜 부족을 통일하고 국가를 세우고 그 기세를
몰아 들불처럼 유라시아 대륙을 짓밟았다.

 



그가 죽고 나서도 몽고족의 정복 사업은 그의 아들과
손자 대까지
계속되어 동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인도 북부까지의 넓디넓은 영토를
몽고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였다.

몽골의 소수정예 기병 군단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지 않은
군대와 국가는
거의 없었다.


아시아의 패자 중국은 물론 역시 광대한 러시아, 그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서 폴란드와 헝가리 등의 유럽 군대까지도 이 몽골 기병군단의
강습 앞에서는 추풍 앞의 낙엽이었다.


기병끼리 붙은 야전(野戰)은 물론이고 성의 공성전(攻城戰)에서 세계
제국(諸國)과 기라성 같은 국가의 군대로서 몽고군의 적수가 되는
군대가 없었다.


무적 몽고 기병군단-페르시아의 세밀화
-------------------------------
패전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동쪽을 보자.

아시아 최강국 중국(남송)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멸망했다.

그리고 여진족이 건국해서 한때 중국을 누르고 중원의
패자 노릇도
해본 금나라도 멸망했다.


더해서 티베트 계통의 민족이 세운 서하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금나라에게 망했지만 서쪽으로 가서 서요라는 신생 국가도 세웠던  

글안 족은 민족 자체가 완전히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 나중에 소규모로 토벌차원에서 정벌했다가 실패한 월남과 바다를

  건너 있던 일본은 제외)


그러나 그런 나라보다도 훨씬 작고 약한 고려만이 작은 반도에

끈질기게 매달려 몽고군의 거센 침략을 열 한번이나 맞받아치며

30년간 항복하지 않고 버티어내서 민족과 국체를 보존해냈다.


몽고는 결국 무력정복을 포기하고 회유와 외교술로 고려를 달랬고

국토가 결딴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고려는

결국 고개를 숙여 몽고와 강화했으나 민족의 정체성,

다시 말하면 국가와 민족은 물론 왕조까지도 유지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의 세계 정복 주요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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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쟁에서 패했더라면 고려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중국과

금나라 그리고 서하와 서요까지 멸망시킨 몽고가 고려를 예외적으로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고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몽고인이 통치하는 지배구조가

들어섰을 것이고 문화적인 동화 정책이 실시되어 것이다.


또는 그들이 지배하던 몽골 직할령이나 중국의 일개
부속 성으로 편입되어
연명하다가 나중에 들어선 명나라에 의해서
접수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던 중국의 한 변방 지역으로
흡수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티베트가 17세기에 내부에 분쟁이 일어나서 한쪽이
청나라에 원조를
청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가 청나라의
어이없는 속국이 되었고 그 정복 왕조인 청은 망했지만 공산 중국이
배턴을 이어받아 그대로 차지 해버린 것을 보면 짐작이 가리라 본다.


그 민족 말살정책의 가능성이 보이는 몽고의 야심이 들어나는

대목을 한번 보자.


1254년 고려에 침공한 몽고군 사령관 자랄타이는

철군을 요청하는 고려에게 아래와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 고려의 국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은 모두 육지로 나올 것이며

  두발 모두 몽골식으로 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왕을 몽고로 압송해 갈 것이다.

  두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라도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철수를  할 수 없다.”


비교적 외교적 수사라 하더라도 머리를 깎으라는 소리는
그들이
고려를 정복하면 고려민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시켜
버리겠다는
야욕을 들어낸 소리였다.

하여튼 그 무렵 어느 민족이나 국가도 맞서보지 못한 슈퍼 파워

몽고의 쇄도한 무력 앞에 그만큼 풍전등화인 운명에 있었던
고려의
악착같은 항전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했다.


몽고군이 간 곳 어디에서도 이런 치열하고 매서운 민족의
저항은 없었고
세계가 알아주던 몽고의 자랑스러운 기병 군단이
이렇게 볼품없는
전투를 한 적도 곳도 없었다.


고려는 어떻게 버티었을까?


알아보자--.


대몽 30년 전쟁에서 중국이나 유럽에서 많이 보이던 몇 만 명의

대 병력이 들판에 집결하여 격돌하는 그런 대규모 야전은
고려에서는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공성 전투와 야별초가 주도하는 게릴라 전투만이 있었다.


몽골이 주도한 여몽 연합군과 일본 가마쿠라 막부 무사의 전투
일본은 아무것도 모르고 몽골과 대규모 야전을 벌였다가 대패했다.
오로지 태풍이 이들을 구해주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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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공할 몽골의 침공을 고려가 방어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이 삼국시대부터 부지런히 고구려 때부터 전 국토에

구축해 놓았던 각지의 산성(山城)들 공로가 제일 컸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이 아닌 주변의 높고 가파른 산정에
힘들게
쌓아 놓은 산성은 몽골의 장기인 기병 전략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기병대는커녕 말도 올라가기 힘든 곳도 있었다.


몽고 기병단의 핵심  동력- 강인한 몽고말
고려의 산성은 이런 말들의 활동무대를 원천 봉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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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반도 국방에서 산성의 중요성을 대몽 전쟁에서 절감했던
조선
세종 때 장수 최윤덕은 자신의 경험으로도 산성을 중요성을
인식하고
산성의 건설을 항상 역설했기 때문에 주변 정승들로부터

축성(築城)대감이라고 불렸다.


성에 이어서 고려의 항전에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은 고려의
조정이
틀거 앉아 대몽 전투를 지휘했었던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안의 각 도서였다.
고려민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기회만 있으면 육지의
몽고군을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전개했었다.


여기서 한마디 부언한다.

알려지기를 몽고군이 수전(水戰)이 서툴러서

강화도를 침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리 수전이 서툴다 해도 강화해협은 육지의 강과 폭이 비슷하다.

모든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한강등의 강은 문제없이 도강하여

한반도를 휩쓴 몽고가 이런 좁은 해협은 30년을 넘어
못 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해서 막강한 해군을 만들었다.

해상 방어의 최대 유효 방어수단은 해군이라는 기본상 상식을

상기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강화도를 둘러싸다시피 초계하며 몽골군의
해상 내습을 경계했다.
더해서 서해안 지대를 계속 감시하며
몽고군이 강화도 침공을 위한  선박을 모으거나 건조하는 것을
계속 감시했다.


강화도의 고려군에게는 몽골군이 가지지 못한 이런
해상 방어력의 중추를
담당한 수군은 육지에 대한 통치와
육지로부터 물자 수송에 유효하게 
쓰이기도 했다.


강화도의 수군 크기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고려조정이 몽골과 타협하고 강화하자 반발한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인원과 물자를 싣고 진도로 간 배는
무려 일천척이나
되었다는 사실은 고려 수군이 만만치 않게
컸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고려군의 강함도 있었다.

이미 몽고 침공 10 년 전 글안과의 전투로 이미 상당한
국방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군의 야별초군이 고려 전역에서 지방민과 지방군을 조직해
만든 야별초 게릴라 부대는 몽골 침공군을 뱀처럼 휘감고 물고
늘어져 지쳐 나가 떨어지게 만들었다.

전쟁중 입지가 강화되고 확대된 삼별초군이 항전 계속을
주장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못하고 반발했다가 역사의
어두운 그늘로 사라진 것이 유감스럽다.



대몽 전쟁을 주도한 고려 무신정권이 세운 강화산성
---------------------------------------------------
삼별초군만이 아니었다.

공성전으로 치러진 대몽전쟁에서 승패는 항상 성을 지키다가도

틈만 나면 성 밖으로 쇄도해나가 몽골군을 공격한 고려 군민의

용감함이 결정지었었다.


이 세계 공성전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은 간단없는

성외 출격은 고려군민의 강함을 증명해준다.


다음으로 무신 정권의 실력자였던 최우, 최항 부자의 

항전의지가 대단히 강했던 것도 한몫했다.


그 강한 세계 슈퍼 파워 몽고에 뭣을 믿고 저렇게
항거했을까 했을 정도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끈질긴 저항과
외교전을 병행했었다.

무신 정권이 몽고에 벌인 외교전의 교묘함은 대단했다.


끈질기게 출륙(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입조(고려 왕의 몽고 왕 알현)를 요구하는 몽고를 우롱하다시피

응대하며 전쟁을 이끌어 가서 위기 때마다 이 두 조건을

들어 주는 척하는 외교술로 고비를 넘기기도 했었다.


왕의 입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태자의 입조로 대신했다.

더해서 왕조의 개경 환도도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지나서야 행해졌다.


외교전을 한마디로 평한다면 대몽 전쟁을 주도했던
무신정권은 요새말로
말하면 몽고를 데리고 놀았다는
말이 적절할듯하다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결국 피폐해진 백성의 사정을 보다 못한
조정이
몽고와 강화를 맺었지만 삼별초는 항전 의지를 이어받아
진도와 제주도로
전전하며 몽고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었다. 

<천존고에서 퍼온 글입니다>

발해의 운명을 건 천문령 전투
대조영 - 발해를 세우다.


고구려 부흥의 염원

 서기 668년  음력 10월 보장왕은 당나라 장수 이적에게 백기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당연합의 평양성 포위에 따른 것으로, 고구려가 완벽하게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670년 안시성이 무너짐으로 인해, 요동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던 고구려 부흥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672년까지 고구려 부흥운동은 대체적으로 실패하게 되고, 옛 고구려 장군과 부흥세력 그리고 백성들은 곳곳으로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모진 고난과 극복하기 힘든 역경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도저히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희망을 찾아내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바로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고구려인이라는 의견과 말갈인이란 의견이 각기 있지만, 유득공이 저서인 발해고에 다음과 같이 나왔다.

 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은 성이 대씨로 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던 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대씨가 대정씨에서 나왔고, 배달족에 대씨가 있게 된 것은 대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대조영의 발해부 출신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 대조영을 초기부터 도운 걸사비우(乞四比羽)역시 말갈인이었던 점으로 보아, 대조영의 출신지역과 활동무대는  말갈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갈인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고구려 와 전혀 다른민족이 아니라, 고구려내에 유목생활을 하면서 고구려인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부족이었다. 현대의 시점으로 보자면 같은나라 국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말갈인들과 고구려인들은 깊은 유대감과 애국심을 공유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점은 새나라 탄생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 연합전선의 주축세력이 대조영과 걸사비우였던 것이다. 

다시 옛 고구려 땅으로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걸걸중상은 대조영을 비롯한 집안 식솔과 함께, 영주 (營州)지방으로 옮겨가 '사리'라는 작은 벼슬을 하며 살았다.

 '사리'란 부락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거란말인데, 아마도 거란은 영주지방에서 유랑하던 고구려인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걸걸중상에게 이같은 벼슬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영주지방은 대체로 요하강 서쪽에서 북경 동쪽 사이의 땅을 말한다.


  서기 696년 영주지방을 중심으로 점점 세력을 키우던 거란족은,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그 사위 손만영(孫萬榮)을 중심으로 영주를 함락시키고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때까지 다소 소극적으로 고구려 부흥을 꿈꾸던 대조영 일행에게 이사건은 매우 큰 동기를 부여하였다. 더욱이 거란족이 영주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상, 당나라의 대규모 토벌군이 곧 올 것은 분명하였다.
 따라서 대조영일행은 당나라와 거란족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해 발해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고, 오루하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즉 걸걸중상은 당나라군의 대규모 침공에 준비해 옛 고구려의 유민과 무장출신들을 규합하여, 철저하게 수비태세를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 천문령 전투

 
 696년 이진충에 이어 손만영은 거란황제에 올랐지만, 당나라의 대규모 공세에 의외로 쉽사리 무너지고 말았다. 또  건란국 건설의 주동인물이었던 이해고 (李楷固)역시, 당나라에 포로로 잡힌 후 귀하하였다. 하지만 이미 요하강 상류지역에서 상당을 세력을 쌓은 대조영은 그리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상대였다. 특히 대조영이 이끈 주력군대가 여전히 당나라에 여전히 항쟁을 멈추지 않고 있던 고구려인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따라서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벼슬을 내려 회유하여  복속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조영은  이를 당당하게 거부 하였다.  고구려를 계승할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있었던 원대한 포부에 비해 당나라의 회유책은 너무도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이에 당나라는 무력으로 대조영의 세력을 진압할 것을 결정하고 (698~699)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 (李楷固)를  옥검위대장군으로 삼아  총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 쯤 걸걸중상은 이미 사망하였는데, 고령으로 인한 자연사였는지 아니면 전투로 인한 전사였는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인이 무엇이든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던 걸걸중상을 잃은 것은 대조영과 고구려인들에게 크나큰 손실이었다. 또한 걸사비우역시 말갈족을 이끌고 이해고의 부대와 일전을 벌였지만, 결국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초기 당나라의 대공세에 크게 위축되었던 대조영은 흩어진 고구려군과 말갈족 등을 다시 규합하여 나갔다.

 그리고 당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좀더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걸사바우에게 대승을 거둔 당나라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대조영의 유인책에 쉽사리 휘말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혼하(渾河)와 휘발하(輝發河)의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본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천문령(天門嶺)에 먼저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한 대조영은 더이상 물러서지 않고 총 반격을 하였다.  전쟁에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은 전술상 대단히 유리한 이점을 차지하는 것이다. 더구나 상대방은 오랜 추격으로 인해 상당히 지쳐 있는 상대였다. 
 이 전투에 대해 발해고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해고가 그를 뒤쫓아 천문령을 넘자,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병사를 이끌고 크게 격파하여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빼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삼으니,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다.

 대조영은 이 한번의 대승으로 인해, 고구려 땅 전체를 영토적으로 점령하려던 당나라의 야욕을 완벽하게 꺽었으며, 이후 대조영은 발해고에 의하면 사방 오천리에 달하는 광할한 영토를 개척하여 나갔다. 

 ****

 고구려의 멸망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원한 제국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일부에는 고구려의 역사를 너무 단정적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수천년간 이어 온 우리민족의 다른 역사를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 처럼 주장하는 관점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그냥 지나치거나 끊어 버려서는 우리역사가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질 못할 것이다 .

 누군가에 의해 그 역사가 계승되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역사는 그 자체의 단절이 아니라, 발해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발해는 고려에 의해 통합되었고 고려는 조선으로 조선은 현재 우리 대한민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즉 우리가 있는 한 역사는 이어져 갈 것이겠지만, 지나치게 과거의 영화에만 집착한다면 역사의 발전을 이루기는 힘들 것이다.

원제국의 1차 원정과 가미가제
2009/01/10 오후 3:43 | 일본역사

원제국의 침략과 가미가제

 12세기 아시아의 정세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북방의 작은 유목민족집단에 불과하던 몽골족은 칭기스칸의 등장과 함께 역사상 최대 판도를 개척해 나갔다. 이 몽고제국의 급성장으로 인해 세계중심을 자처하였던 중국의 송나라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동북아의 강국이었던 고려역시 무인정권이 성립하는등 국가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일본역시 미나모토가문의 요리토모가 안토쿠 천황을 지지하는 헤이시 정권을 종식시키고 고시라카 법황을 지지하는 가마쿠라 막부를 성립시키는 격변을 겪었다. 그러나 정권수립과정에서 요리토모가 동생 요시쓰네를 비롯한 친족세력까지 모조리 토벌하거나 숙청하고, 여기에 가문내의 복수극이 그 후대까지 전해져 스스로 문을 닫고 말았다. 이렇게 미나모토가문이 무너지자,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요리토모의 외가였던 호조씨였다.

특히 가마쿠라 막부의 창시자인 요리토모의 부인 호조 마사코는,  1221년 죠오쿠의 난(承久の亂)을 통해  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의 친정복귀를 저지하고 호조씨가 주도하는 가마쿠라 막부체제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호조씨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체제는 전성을 누리기 되었는데, 그들이 무사우대 정치를 펼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고려왕조는 유라시아대륙을 재패하고 원제국을 세운 몽고족과 40여 년의 항쟁끝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고려를 항복시킨 쿠릴라이칸은 남송을 보다 효율적으로 정복 할 방법을으로, 일본을 남송원정에 동원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에따라  1266년의 제1차 일본 초유(招諭-권고를 목적으로 파견)에 이어 1267년 제2차 초유, 1268년의 제3차 초유, 1269년의 제4차 초유를 거듭 시도했다.

1270년 제5차로 파견된 초유사는 일본이 조공하지 않으면 출병하겠다는 쿠빌라이칸의 의사를 통고했다. 사실상 최후통첩이었지만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권력자인 18세의 청년 호조 토키무네(北條時宗·1251~1284)는 조공을 거부하고 각지역의 담당자들에게 방위 준비를 명령했다.

쿠빌라이는 제5차 초유의 실패 이후 일본이 위협만으론 결코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병선 900척의 건조와 12000여 명의 병사를 징발하였다. 

 1272년 4월, 최후의 제6차의 초유사가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사실상 원정을 독촉하는 임무가 아니라  일본의 정세와 지리를 살피는 첩보수집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1273년 5월, 최후의 일본 초유사가 귀국함으로써 쿠빌라이는 일본의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제주도에서 최후로 항쟁하던 삼별초가 평정되자, 북경에서 장수들을 소집하고 회의를 열고 자국군 2만명을 포함 총 3만여 명의 병력으로 일본 정벌을 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1274년 10월 3일(날짜는 모두 음력) 합포항을 출항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은 시작되었다.


공포의 여몽연합군

여몽(고려 - 몽고)연합함대는 고려를 출발한지 이틀후인 1274년 10월5일 오후 4시경, 대마도(對馬島 )의 사스우라( 현재 코모다)에 상륙했다. 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대마도주 소오 스케쿠니에게 알렸다. 

 소식을 접한 대마도주는  무사단의 총력 80여 기를 이끌고 그날 밤중에 사스우라로 출발했다. 종씨족보에 따르면 소오스케쿠니는 부하들을 독전하며 7, 8척으로부터 상륙한 1000명의여몽연합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지만,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2시간에 걸친 전투끝에  전멸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사수우라뿐 아니라 대마도 곳곳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긴 하였지만 여몽군의 앞도적인 숫적우세와 전력으로 인해 상대가 되질 못하였다.

 이렇게 단숨에 대마도를 정복한 여몽연합군은 이즈하라항에서 약 열흘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 공격목표인 이키섬으로 출발하였다.

 대마도초토화하고 출항한 여몽연합군은 10월 14일 오후 4시경 이키도 북부 해안에 상륙하였다. 2척으로부터 약 400명의 몽골군이 이키도의 가쓰모토에 상륙하였다. 이에 이키도의 성주였던 다이라노 케이류우는  총 100기를 이끌고 서쪽의 가쓰모토를 향해 출진했다,

 비록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케이류우는 당황하지 않고 휘하장수중 최고의 사무라이로 하여금,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명적 (鳴鏑: 소리 내며 나는 화살)을 쏘아 개전 신호로 삼고 적진으로 돌격하도록 하였다.
 낭만적인 맞대결 방식이라면 적진에서도 누군가 한명이 나와줘야 한다.
 그러나 몽고군은 쇠북종과 징을 요란하게 치면서, 자신의 가계와 이름등을 길다랗게 외치며 돌격해오는 무사를 향해 여러명이서 에워싸고  때려 죽여버렸다. 

 이키군을 이끄는 케이류우는 당황하였지만, 400여 명의 몽골군은 여유를 주지않고 단궁에 독을 바른 화살을 쏘며  이키군을 향해 돌진하여 왔다. 그러나 이처럼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이키군은 후퇴하지 않고 몽골군의 이키섬 점령을 하루동안 저지하였다. 

드디어 해가 지고 여몽연합군은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이키군은 전력의 80%를 잃었으며 남은 병력은 겨우 20여 기에 불과했다.
  케이류우는 일단 전열을 정비하고 히츠성에 들어가 방어전략을 세웠지만. 히츠메성은 급하게 만든 성이었기 때문에 그리 견고하지 못하였다. 

 다음날인 10월15일, 여몽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히츠메성을 포위, 맹공을 가했다. 그러나 히즈메성의 병력은 정예 20기와 민병을 포함하더라도  백여명을 넘지 못하였다. 케이류우는 도저히 여몽연합의 공세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휘하 부하에게  패전을 다자이부(大宰府(대재부)]규슈(九州)를 통괄지휘하는 지휘부가 있는 소재지)에 알리도록 하고 할복자결했다.  

 이키도에 상륙한 몽골군은 남녀노소의 차이를 두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은 극도의 잔인한 방법으로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이키도를 초토화시킨 여몽연합군은 1274년 10월17일 히젠(현재 나가사키현)의  다카도(鷹島)를 습격했다.  다키도의 산성에서 농성하던 일본군역시 100여기의 병력으로 결사항전하였지만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이어 여몽연합군은 다자이부 공략을 위해 10월19일 하카타만으로 진격한다.

 다자이부의 총사령관 츠네쓰케(少貳經資)는 대마도및  이키도로부터 달려온 전령으로부터 여몽연합군의 내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가마쿠라(鎌倉)막부와 교토(京都)의 급전을 전하는 한편 무사들로 하여금 총 동원령을 내렸다. 특히 하카타 지구에는 츠네쓰케의 동생인 쇼니 케이쓰케(少貳景資)가 지휘하는 총 5300여기의 주력부대가 배속되었다.

 그러나 화약무기의 일종인 철포(鐵砲)및 일본활보다 2배의 사거리와 2~3배의 활시위 속도를 자랑하는 몽골단궁(短弓) 여기에 악명을 떨친 독화살과 숫적우세 그리고 대병력간의 전투경험까지 어느 것 하나 일본군이 앞서는 것이 없었다. 쇼니 케이쓰네는  무참하게 패하며 주요지점들을 차례로 내주고 말았다. 이로써 해안방위선 30km가 모두 붕괴되고 말았다.

일본역사에는 이날의 전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몽골은 큰북과 징을 두들겨 신호했는데, 그 소리가 엄청났다. 일본 말들은 모두 이에 놀라 미쳐 날뛰었는데, 그렇게 허둥대는 바람에 적의 화살을 맞았다.  몽골군은 수백인이 矢先(시선)을 정렬하여 화살을 비오듯 쏘는 데다 창이 길고, 갑옷도 빈틈이 없었다.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중앙을 열어 몰아넣은 다음에 兩端(양단)으로 포위하여 무찔렀다. 갑옷은 가볍고 말도 잘 탄다. 힘도 강하다. .......호세용맹자재)하기 짝이 없고, 임기응변의 진퇴에 능하다. 


몽고습래회사
(蒙古襲來繪詞)

'몽고습래회사'는, 여, 몽 연합군의 일본침략을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당시 일본군을 지휘하던 '다케자키 스에나가'

 하루밤사이에 결정된 역사.

 그러나 몽골은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우선 지형에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상태에서 해가 저무는 시간에 계속 추격하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0월20일의 전투에서 단궁의 화살이 다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은체 다자이부의 방어진지인 미즈키(水城)로 퇴각하였다.  일본서기에는 큰 둑을 쌓고 물을 저장해 두었다고 수성이라 이름하였는데, 수성은 그야말로 다자이부를 방어하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여몽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흔도와 홍다구(洪茶丘)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다. 상륙에 성공한 만큼 주요거점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야영한 후 날이 밝으면 일본군과 결전하자는 고려장수 김방경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하카타만에 정박중이던 900척의 병선으로 전원 재승선을 선택하였다.

 몽골 지휘부가  재승선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夜襲(야습)을 우려하였고, 또 수성을 돌파하여 다이자부를 점령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만약 장기전으로 치달을 경우, 병력충원과 병참부분에서 결정적인 취약점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마다 그때쯤이면 불어오는 해풍은, 여몽연합군이 전원 재승선 한 10월20일 심야로부터 21일 새벽 사이에도 어김없이 불어닥쳤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하룻밤 사이에 900여 척의 연합군 함대 중 200여 척이 침몰했으며,  10월21일 아침, 하카타만에는 연합군의 전함은 한 척도 보이질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히카타 만에 불어닥친 폭풍우로 인해 사망한 여몽연합군은 전체전력이 20%가 안되는 6000명 내외이다. 즉 잔여 2만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몽골지휘부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고, 강제로 군역에 동원된 고려인들의 사기역시 높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더구나 홍다구의 무리한 요구로 단 6개월만에 완성된 900척의 병선이 견고할리 없었고, 강제동원된 고려인들이 최선을 다해 건조했을리도 없었다.

  히카타만에서 상실한 함선은 20%정도였지만, 대한해협을 건너 오는 동안에도 풍랑의 여파로 50%에 가까운 손실을 입고만다. 고려사에는『이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의 총수가 무려 1만3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원제국의 사서에서도 패전을 시인하였다. 

 이것은 몽골연합 지휘부가, 풍부한 해상경험을 지닌 고려참모진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철군을 생각해 두었다면 태풍의 불어오는 시기가 지난 다음에 논의하여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또 대마도와 이키도를 점령한 이상, 무차별적인 살육이나 약탈만 벌일것이 아니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전에 대비하는 대책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또한 고려인이 만들고 탑승한 병선은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은 반면, 송나라출신 부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병선은 대부분 허술하게 만들어져 몽고병력의 피해를 키웠다. 따라서 일본인이 신풍으로 숭상하는 가미가제는,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몽골지휘부의 해상원정의 미숙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조선의 비밀병기 신기전


 최근 '신기전'이란 조선시대 화약무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앞서 말하자면, 그 무기의 정확한 명칭은 '화차'라고 불리는 총통(銃筒)무기의 일종이며,
신기전은 화살에 화약을 매달아 쏘는 무기를 말하는 것이다.

  신기전을 로켓으로 본다면 총통기는 일종의 로켓발사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형태는 현대의 다연장 로켓포와 상당부분 유사한 점이 있다.



*국조오례의 병기도설에 실려 있는 화차의 설계도

 14세기 말은 중국에서는 원왕조과 붕괴되고 명왕조가 성립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이 왕조교체를 하는 혼란기였다.  그리고 이 혼란기를 틈타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이 남쪽에서는 일본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그런데 조선은 일찍이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 개발된 화약무기로 인해 극에달하였던 왜구의 해상침입을 격퇴한 바 있었기에, 화약무기의 효용과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당시의 화약무기는 해상에 떠 있는 목조군선을 격침시키거나 화염으로 태울 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육상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1392년 왕조교체에 성공한 조선은 세종대왕대에 이르러 차츰 왕조가  안정을 찾아갔고, 그에따라  국방력강화및 육상에서 효율적인 전투를 목적으로 각종 화기를 개발하게 된다.

 세계최초의 로켓무기 대신기전



 신기전은 조선시대 화약 추진 화살로 고려 말기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주화(走火)를 1448년(세종 30)에 개량한 것이다.

처음만들어질 당시에는  일반나무로 대[幹]를 만들고 가죽으로 깃[翎]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무화살은 만들기도 쉽지 않고 가죽은 구하기 어려우므로, 대나무로 대를 만들고 깃[羽]으로 살깃을 만들어 재 시험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성능이 우수하여 시험자는 다음과 같이 세종대왕에게 아뢰었다.

 화살이 멀리 가고 단단하여 나무화살보다 훨씬 나으니,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갑절이나 됩니다. 또 깃털로 살깃을 만드는 것 역시 편하고 쉬우니, 이 뒤로는 이 예(例)에 의하여 만들고, 모름지기 어교(魚膠)로 살깃[翎]을 붙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나무역시 습기나 부패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옻칠을 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종류에는 크기에 따라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등이 있다. 그 밖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도 있긴 하지만 대신기전과 같은 규격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같은 화약무기를 최초의 로켓 발사포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하여 해석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 할 수 있다.

  우선 중국에서는 1232년 등장하는 비화창(날으는 불창)을 최초의 로켓무기로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비화창은 발사하면 200m정도 날아가 떨어져 사방 6∼7m 정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위력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금나라 군대가 몽고군에 저항하기 위해 사용한 신무기로 중국이 개발한 무기라고 볼 수 없다.
 더구나 이 비화창에 로켓 무기가 적용되었다고 확인할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리고 서양 최초의 로켓 발사포는, 인도군이 사용하던 것을 모방하여 영국의 W. 콩그레브가 1805년 제작한 것이다. 물론 콩그레브의 개발품은 살상력이나 효율성면에서 대신기전보다 앞서지만,시기적으로 상당히 늦은 19세기의 발명품이며 중량도 가벼운 편이다. 
 
평균 길이는 1m, 평균 지름은 10cm, 무게는 1∼2.8kg정도이며, 최대 사정 거리는 2천 7백m 였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신기전 경우  1474년 편찬된 「국조오례서례」병기도설에 그 설명및 설계도까지 정밀하게 나와있어, 로켓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선 대신기전은 1448년 제작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서양의 로켓무기보다 147년이나 앞설뿐더러,  길이는 무려 5m가 넘는 17자(521cm)이고 무게는 7~8kg이나 된다. 

  윗부분에 원통형의 종이통(로켓엔진)이 부착된 형태로 이 속에 화약을 채우며, 아래에는 연소가스 배출을 위해 지름 1치 2푼(36.8㎜)의 구멍을 내게 된다. 바로 신기전에 최초의 로켓원리가 적용되었다고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대신기전의 경우 사정거리역시  1천보(800~900m)가량 되어, 19세기 이전까지의 어떠한 로켓형 무기보다도 가장  무거운 중량을 가장 멀리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은 대신기전과 같은 규격이지만 발화통 내에 철편(鐵片)을 포함하고 있어 살상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대신기전의 사거리가 2km 이상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압록강이나 두만강 너머까지 적을 요격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사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중신기전은 길이 4자 5치(137.9cm)로 역시 휴대하기 어려웠지만 소신기전은 길이 3자 3치(101.1cm)로 병사개인 화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신기전의 경우 대·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부착되지 않았다. 중신기전은 150m, 소신기전은 100m쯤으로 추측된다.

 그림처럼 개인화기로서의 신기전은 발화통에 불인 붙인 후 병사가 직접 활을 쏘아야 했다. 물론 정면으로 맞으면 충분한 살상력을 가지겠지만,  지휘장교가 신호를 보내거나 적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렇게 개발된 무기를 최전방인 4군 6진에 배치시켰음은 물론이고, 보다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화기를 다루는 훈련까지 실시하였다. 다만 화약무기 제조가 어려워 원할하게 이루어 지진 못하였다. 따라서 총통및 신기전의 연습은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하게 실시되었는데, 중소 신기전의 경우 국경지대인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만 매년 1회씩 실시하였으며, 대신기전은 2년에 1회씩 실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신기전을 실전에 사용할 때가 왔다.  1451년 정월 김종서 장군이 지키던 압록강 방면에는, 북방유목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북방유목민들의 주력은 기마병으로, 조선의 단순한 보기병 보충만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없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이 결빙되어, 기마병으로도 자유자재로 넘어 올 수 있게되면, 조선으로써는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김종서 장군은 조정에 최대한 많은량의 신기전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도 사태의 긴박함을 인식하고 신기 3천과 소 신기전4천을 평안도 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렇게 김종서장군과 조정의 신속한 화기충원으로 인해 야인들의 적대적인 움직임을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징옥등의 변방무장역시 북방야인들을 견제할 무기로 신기전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유용한 무기였다. 다만 소신기전의 경우 실용성과 화력에 문제가 되어 생산이 1451년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후 신기전은 중신기전을 주축으로 하여 운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기전의 업레이드 화차


조선시대 실전에 사용했던 전차(戰車)로 수레 위에 발사장치를 부착하여, 이동이 순조롭고 단번에 여러 개의 활 또는 총을 쏠 수 있게 고안된 무기이다.

 조선시대에만 5가지 화차가 있었는데, 첫번째 화차는 1409년(태종 9) 군기감소속 이도(李韜)·최해산(崔海山) 등이 화약무기를 연구하던 끝에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장탄한 동통을 수레에 장치하여 달리면서 발사하였다.

  두번째 화차는 1451년(문종 1) 문종이 손수 창안한 문종화차이다.


 우리에게 흔히 신기전으로 알려진 무기가 바로 문종시대 때 고안된 화차이다. 이는 수레 위에 틀을 만들어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와 사전총통 50개를 설치하여 심지에 불을 붙이며 차례로 발사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공들여 만든 신기전및 총통무기는 과연 실전에 사용된 일이 있었으며 그 위력은 어느정도였을까?  재차 언급하자면 총통무기는 지자총통, 천자총통처럼 함포화기까지 포함하는 화포무기의 총칭이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는 오직 해전에서만은 화력의 우위를 보였는데,  그러한 우위가 총통무기의 우수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이다.

 반면 신기전은 개인화기로서는 별다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였지만, 신기전이 위력은 역시 화차에 장착하였을 때야 다연장 로켓포로서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화차는 임란당시 1차적으로 평양성등에 배치되어 일본군의 북진을 상당기간 저지하는데 활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진(朴晉)장군이 경주 탈환시 사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으며, 권율(權慄)장군이 행주산성 전투에도 사용하여 그 위력을 보여 주었다.



 
최대사거리 36km 현재 우리육군이 보유한
K-136 구룡 다연장 로켓포




조선시대 다연장 로켓포인 화차에서 신기전을 발사하는 모습


이처럼 우수한 화약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었지만, 끝내  국력 배양에 대한 적극적인 국방체재의 전환은 이루어 지지 못하였다. 더구나 임란이후 중국에서 청왕조가 성립하면서 극심한 내정간섭이 이루어 졌고, 이것은 열악하였던 조선의 화기개발및 도입을 더욱 제한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발명품이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뒤에 따르는 수많은 개선과 노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사회국가적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수난의 왕자들과 대무신왕(무휼)

2008.12.04 12:14 | 역사읽기자료1 | 빨갱이

http://kr.blog.yahoo.com/bchs9027/1419 주소복사

(히스토리어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요즘 바람의 나라 드라마도 나오고 해서 관심있는 분들이 필요할 것 같아 *^^* 교육목적으로만 사용하겠습니다)

고구려 왕자들의 수난과 대무신왕


역경을 딛고 왕위에 오른 유리명왕

지금으로부터 2030년 전인 기원전 38년  동명성왕 에 의해 세워진 고구려, 그러나 동명성왕은 부여(夫餘)에서 탈출할 당시, 부인인 왕후예씨와 아들인 유리를 두고 왔고 이때부터 고구려 왕자들의 불운은 시작된다.
 다만 광개토 태왕 비문에 의하면 동명성왕은 추모왕(鄒牟王)으로 유리왕은  유류왕(儒留王)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동부여에 있을 당시 유리는 아비없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많은 멸시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고구려 건국자인 동명성왕이라는 사실을 안 후, 그가 남긴 부러진 칼 한자루만을 가지고 왕후 예씨와 함께 고구려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동명성왕은 회복하기 힘든 병환을 앓고 있었던지, 왕위 계승을 서두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소서노와 두 아들(온조와 비류)은 사실상 국외추방당하게 된다. 온조와 비류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명성왕의 직계자손으로 보는 경향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소서노가 전남편인 우태와의 사이에서 나은 아들이라고 보는 견해가 다수의 의견이다.
 
  아무튼 유리왕의 태자로 임명된 지 겨우 1년만인 기원전 19년 40세의 나이로 동명성왕이 사망함에 따라, 유리왕의 왕권은 상당히 불안정 해 지게 되었다.

 유리왕은 이런 불안정한 왕권을 극복하기 위해, 재위 2년에 동명성왕이 처음으로 복속한 비류국의 왕이었다가 다물후(多勿侯)로 봉해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모 드라마에서는 비류부와 고구려 왕실의 관계를 매우 대립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드라마는 상상력의 산물일뿐, 역사적인 고증이나 해석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왕비 송씨가 다음해 10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복잡한 유리왕의 가계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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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도절의 죽음

 유리왕의 아들은 도절(都切), 해명(解明), 무휼(無恤), 여진(如津), 해색주(解色朱), 재사(再思) 총 6명이다.

 우선 재위 14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태자 도절이 있다. 당시 부여 왕 대소(帶素)는 유리왕에게 태자 도절을 볼모로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유리왕은 아직 부여와 정면대결하기엔 고구려의 힘이 부족하다가 판단하여, 이 요구에 응하기로 한다. 그런데 도절은 다소 심약한 성격이어서인지, 볼모로 잡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가기를 거부하였다. 
 
 물론 유리왕이 강제로 태자 도절을 부여로 보냈다면, 도절로써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기록에는 태자 도절이 거절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이것은 곧 유리왕의 입장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대소왕은  그해 겨울 11월에 5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범하였지만, 때마침 내린 폭설과 한파등으로 수많은 동사자를 낸체 전투한번 못해보고 부여로 물러가고 말았다.

 이렇듯 기후의 도움을 받아 첫번째 위기를 무사히 넘기는 듯 싶었지만, 재위 20년 태자 도절은 겨우 19세의 나이로 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 추측이긴 하지만 재위 19년 9월 유리왕도 병을 앓았던 것으로 봐서, 어떤 유행병이 있었지 않은가 싶다.  유리왕은 건장하였고 또 겨울이 시작되서 병세가 더이상 악화되지 않았지만, 도절은 어려서부터 유약하고 또 봄철이기 때문에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명태자의 자결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국내성터

 부여의 침공과 태자의 죽음으로 인해 고구려는 위협받고 왕실이 흔들리게 되지만, 유리명왕은 오히려 강력한 개혁작업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우선 유리왕은 재위 22년 수도를 졸본성에서 위나암성으로 옮기고, 다음 해 제 2왕자 해명을 태자로 세웠다


 해명은 도절과는 달리 매우 용맹하고 담대한 성품이어서, 그  용맹함은 고구려뿐 아니라 이웃나라에 까지 떨칠 정도였다. 이에 긴장감을 느낀 황룡국은 해명을 조롱하기 위해 왠만한 장사의 힘으로도 꿈적않는 강궁을 보내 주었다.
 그러자 해명은 사신이 보는 앞에서 활시위를 당겨 강궁을 꺽어 버렸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유리왕은 해명 사이는 멀어지고 말았다. 부여와 매우 심각한 대립관계에 있었던 상태에서 황룡국과 불필요한 외교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유리왕이 황룡국 왕에게 태자를 죽여달라고 부탁 하였다고까지 나온다.
 이 요청이 있은 지 얼마 후 황룡국은 사신을 보내 해명을 초청하였고, 이상한 낌세를 느낀 주위사람들은 만류하였지만 해명태자는 두려움없이 황룡국을 향하였다. 황룡국 왕 역시 처음에는 해명태자를 죽이려 하였지만, 그의 담대한 기세에 눌려 결국 해치지 못하고 예로써 대해 주었다.
  
이렇게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해명이었지만,  오히려 유리왕은 황룡국과 외교마찰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하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은 해명의 자결을 말렸지만, 해명은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여진땅의 동원(東原)에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창 끝에 찔려 죽고 말았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해명태자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 땅에서 장사를 지내고 사당도 세우고, 창으로 자결하였다 하여 창원으로 고쳐 불렀지만....그러나 비극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대무신왕의 등극, 왜 神王(신왕)이어야 했는가?


*이미지의 일부를 수정하였습니다.* 

 해명태자가 자결하자, 유리왕은 다소 후회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를 죽게만든 영조가 그일을 후회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을 각별하게 보살펴 훗날 정조로 만든 것과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을까.... 해명태자가 사망할 당시 6세였지만, 유리왕은 제 3자 무휼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각별한 애정과 노력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해명태자가 사망한지 5개월만인 재위 28년 8월, 부여는 고구려에게 신하의 예를 강요한다. 기록에는 신하들의 항복요구를 유리왕이 받아들이려 하지만, 여섯살의 무휼이 반대하여 독립을 지킬 수 있다고 나온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라도 풍부한 국제경험에서 나오는 외교술을 겨우 여섯살의 나이에 터득한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곧 도절 태자때와 마찬가지로 유리왕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며, 또 무휼을 태자로 책봉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인정할만한 업적을 만들어 준 것이다.

 즉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친 해명태자를 대신하여 태자에 올라야 했기 때문에, 그를 뛰어 넘을 위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재위 32년 부여의 대침공 때, 유리왕은 열살밖에 안된 무휼을 다시한번 앞세울 수 밖에 없었다. 기록에는 무휼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학반령에서 매복해 있다가, 기습 공격을 전개하여 전멸시켰다고 나온다.

 하지만 열살밖에 안된 아이가, 어떻게 수만의 병력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여 배가 넘는 부여군을 전멸시킬 수 있겠는가? 결국 그 이면에는 유리왕의 철저한 계획과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누구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업적을 만들어 줌으로써,  태자 책봉의 정당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재위 33년 정월 유리왕은제 3자 무휼을 태자로 책봉하고, 이제 막 11살이 된 그에게 국정을 위임하는 섭정체제를 단행한다.
 또  8월 오이마리에게 병력 2만을 주어 양맥국을 정복하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탈환하는등, 무휼의 입지를 굳혀갔다.

 그렇게 태자 무휼의 왕위계승은 순조로운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4년 후에 제 4 왕자인 여진이 그만 비류수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무휼의 4형제중 3명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만 것이다.

잘못된 판단과 선택, 비극을 자초하다

  대무신왕을 둘러싼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리왕이 재위 37년만에 사망함에 따라, 대무신왕은  서기 18년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소년왕의 탄생이다.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다물국의 왕 송양의 딸이라고만 나오는데, 아마도 유리왕 재위 3년만에 사망한 제1 왕후 송씨의 자매지간으로 보인다.

 아무튼 대무신왕은 그가 성인이 되는 재위 4년에 9척 장신의 검술에 능한 괴유와 창술에 능한 마로등과 함께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참살하는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게 된다. 또 11년에는한나라의 지원을 받은 요동태수(遼東太守)의 대 침공을 격퇴하는등 고구려에 닥쳐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여 나갔다.

 그런데 이 위대한 왕의 제 1왕자는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비운의  호동이다. 기록에 의하면 낙랑국에는 적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어 위기를 알린다는 자명고가 있었는데,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설득하여 이 자명고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자 호동왕자는 즉각 병력을 동원하여 낙랑왕을 항복시켰지만, 낙랑왕은 항복하기전 국가를 배신한 딸을 죽이고 만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켜가면서 까지 고구려에 충성하였던 호동왕자였지만, 대무신왕의 왕비와 뜻하지 않는 갈등을 빚게 된다.
 好童(호동)이란 이름은 아주 아름답고 어려 보인다는 뜻을 갖고 있다. 기록에도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 대무신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나온다. 이렇게 왕의 총애를 받던 왕자가 낙랑국왕을 굴복시키는 공까지 이루었으니, 적통인 해우의 왕위계승에 불안을 느낀 것은 당연하였으리라....

  왕비는 대무신왕에게 왕자 호동이  자신에게 음란한 짓을 하려 한다는 참소를 하고 말았다. 대무신왕도 처음에는 왕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 원비가 고하며, 무고의 사실이 밝혀지면 스스로 죄를 받겠다고까지 하자 대무신왕도 호동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왕자 호동, 무고를 밝히면 예법상 어머이인 제1 왕비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해명태자와 같은 길을 택하였다.  칼에 엎드려 자결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사서에는 결코 잘못된 부모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 죽는 것을 효라고 하지 않는다. 일단 화를 피해 달아나, 부모가 不義(불의)한 일을 저지르지 않게 하는 것을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호동왕자 역시 자신의 무고가 입증될 때 까지 일단  피신하여, 부모가 자식을 죽음으로 모는 참담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불운은 예정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 ...

 호동왕자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태자 책봉을 강행하였던 해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무신왕은 재위 27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해우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무신왕의 동생  해색주가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4대 민중왕이다. 하지만 민중왕은 재위 5년만에 사망하고 해우가 왕위를 계승하여 5대 모본왕이 된다.

 그러나 모본왕은 매우 성격이 포학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은 탓에 재위 초반부터 백성들에게 원성을  샀다. 심지어는 사람을 항상 깔고 앉고 베고 누우며, 혹시 움직이면 참수하였으며 간언하는 신하는 화살을 쏴서 죽였다.
 이런 폭정끝에 결국 두로라는 사람에게 재위 6년만에 시해당하고 만다.
  대무신왕의 가계는 겨우 2대만에 끊기고 만 것이다. 이후 고구려 왕조는 유리왕의 마지막 남은 왕자인 재사의 자손에 의해 이어졌다. 

  돌이켜 보면 고구려 왕실 초기에 반복된 비극은 결코 정해진 운명이 아니었다.  해명태자야 황룡국과 외교마찰을 빚었다는 죄가 있었지만 호동왕자에겐 무슨 죄가 있었단 말인가. 대무신왕이 조금만 더 신중하게 정황을 살펴 보았다면, 호동왕자는 억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 건국초기 왕자들의 수난을 돌이켜 보며....

광개토 태왕릉비에는 대무신왕에 대해 대주류왕(大朱留王* 주는 상서로운 붉은색, 곧 왕의 복색을 뜻하기도 함-따라서 주류는 붉은 빛이 감돌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왕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것을 뜻함)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대무신왕은 스스로 비극을 극복하지는 못하였지만, 고구려 3대왕으로써 국가의 기틀을 다짐은 물론이고,  나아가 대소왕을 참살하고 주변 여러 나라를 복속시킴은 물론 한라라의 공격을 격퇴한 업적은 높게 평가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재사의 아들 6대 태조대왕은 고구려역사상 최초로 요서지역을 회복하는등 찬란한 위업을 이어갔으니, 무리한 역사적 가정은 하지 말자.

 다만 해명태자에서 호동왕자로 이어지는 고구려 왕자들의 불행한 죽음을 통해, 위정자의 섣부른 판단이나 감정에 치우친 판단은 개인의 불행은 물론 물론 국가에 얼마나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되돌아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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