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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자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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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의 진정한 의미
2008/02/11 오후 5:04 | 역사읽기자료1

소중화와 민족주의...

(내멋대로 한국사에서 퍼온 글입니다.)


간단한 상식문제 하나 내겠다. 부모가 돌아가면 누가 제사를 모실까?

당연히 큰아들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집안을 잇는 계승자. 설사 친아들이라 할지라도 집안을 잇지 못하면 제사를 모시지 못한다. 생판 남이라 해도 성을 물려받고 집안을 잇게 되면 부모는 물론 그 조상들의 제사도 받든다.

조선이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제사를 모셨다. 이미 명이 사라진 상태에서. 명의 명맥이 끊긴 가운데 조선이 명 황제의 제사를 모셨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의미일까?

흔히 소중화라 하면 사대주의의 상징인 양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소중화를 천명하던 시기 조선은 청에 대해 사대하면서도 마음속으로까지 승복하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대국이고 천자를 칭하고 있어도 여전히 청은 북쪽의 야인들이 세운 오랑캐의 나라일 뿐 중화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원래 중화라 하는 것은 중국의 높은 문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유교문화권에 있어 문명이란 유교 그 자체였고, 유학의 발상지이며 유학이 가장 고도로 발달한 중국은 동경의 대상이며 본받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가치였다. 근대 사상가들이 유럽과 미국 등 보다 일찍 근대를 연 나라들을 그들의 정신적 근본으로 삼았던 것처럼 유교라는 하나의 사상을 추구하는 이상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지식인의 본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화의 적통을 이은 명이 망해 버렸다. 명이 망한 건 좋은데 그를 대신해 들어선 것이 사람도 아닌 오랑캐에 불과한 야인 - 만주족의 청이었다. 여전히 중국은 청이라는 이름으로 지배자만 바뀐 채 남아 있지만, 오랑캐가 사람이 될 수 없으니 이미 중국에는 중화가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 중화를 본받아 중화에 버금가게 된 작은 중화 소중화가 남아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물론 큰 중화가 있을 때야 작은 중화는 스스로를 낮추어 복종하는 모습이 굴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이 스스로 소중화를 강조할 무렵에는 이미 중화가 남아 있지 않았다. 중화가 사라진 상태에서 오로지 조선의 소중화만이 남아 있으니 당연히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있어 조선만이 유일한 중화이고 문명국이 된다. 다시 말해 소중화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중국에 중화가 남아 있지 않으니 조선만이 중화이고 문명국이라고 하는 자부심에 찬 오만한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제껏 중국에 예속되어 있던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독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아니 중국만이 아니라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적개심이 높아져 있던 만주족, 일본과도 스스로를 완전히 분리하게 됨으로써 이때에 이르러 현대로 이어지는 어떠한 민족의식이 형성되었다 할 수 있다.

실제 서포 김만중만 하더라도 스스로 한글소설 "구운몽"을 쓰며 정철의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의 한글가사들을 조선의 이소라며 극찬했었다.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과 통할 수 있는 것은 중국만이 아니라고, 나무꾼이나 아낙네의 노랫소리를 학자들의 시부보다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었다. 비록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조선의 서민문화가 발전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글소설이 헤아릴 수 없이 쓰여지고 읽혀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변화는 미술에서도 나타났다. 정선과 같은 이는 중국의 그것이 아닌 조선의 산수를 직접 화폭에 담아 내었고, 신윤복과 김홍도도 이전까지 중국의 화풍을 베끼는 것에서 벗어나 조선의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정희는 왕희지니 구양수니 하는 중국의 글씨체를 받아 쓰던 것에서 나아가 추사체라고 하는 자신만의 서체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며 "발해"를 조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한 것도 또한 이 무렵이다. 역사에 있어서도 중국 중심의 사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가 발해를 통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유학에 있어서도 숙종 연간의 백호 윤휴와 같은 이는 "주자만 알고 나는 어찌 모른단 말인가?"라며 주자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유학의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었는데, 당시 사대부들 가운데 많은 수가 윤휴를 지지함으로써 종주국이랄 수 있는 중국으로부터 학문적으로도 독립하고자 하는 일련이 움직임이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하기야 이미 그 이전에 퇴계가 주리론으로써 중국의 성리학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고, 율곡에 이르러 완전히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니 새삼스런 일도 아닐 것이다.

송시열이 송자로 추증된 것도 사실 이러한 움직임과 관계가 있다. 자라고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그 성취가 높은 대종사에게나 붙여지는 칭호로서 공자와 맹자 이후 주희가 겨우 주자라 칭해졌다. 그런데 변방에 불과하던 조선의 유학자를 두고 송자라 높였으니, 아마 이전의 사대부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리라.

이게 그거와 무슨 상관이냐는 사람도 있겠다. 진경산수며 한글소설이며 그것이 소중화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그러나 사회의 변화라는 건 결국 의식의 변화를 따른다. 이제껏 중국을 따르고 베끼기만 하던 유학자들에게 있어 스스로를 돌아보고, 스스로의 안에서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혁명적인 의식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어떠한 계기, 그것이 바로 소중화였다고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19세기 개항기를 맞아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위정척사운동이란 조선이야 말로 중화를 받드는 문명국이고 서구 열강은 한낱 오랑캐에 불과하니 감히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소중화의 연장이었다 할 수 있었다. 개항을 하고 외세가 밀려들며 조선의 국체가 위기에 몰리고부터는 의병항쟁등의 저항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니, 경술국치 이후로도 일본에 의한 근대화라는 명분에 현혹된 많은 개화파 인사들과는 달리 끝까지 불타협의 입장을 견지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테면 한국 민족주의의 정통인 셈이다.

물론 한계는 있었다. 현실에 있어 청은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국이었고, 문물에 있어서도 한참 앞선 선진국이었다. 구한말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 역시 조선으로서는 감히 어쩔 수 없는 강국이며 선진국들이었다. 소중화만을 주장하고 그 알량한 자존심만을 끌어안고 있기에는 현실은 너무 가혹하고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스스로 바꾸어야만 하는 상황에 바꾸지 못한 그 오만과 집착이 조선을 끝내 멸망으로 몰아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고려시대 원형질이 형성된 우리 민족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 것도 사실이다. 중국으로부터도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만주족이나 일본인과도 구분지어 생각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배타적이고 자존적인 어떠한 자긍심을 갖게 되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오롯한 "민족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지금에 이어진 것이니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소중화는 스스로 낮추어 굴종하는 비굴함의 표현이 아니다. 세상에 문명국이란 중국과 조선밖에 없으며, 중국 - 명이 망해 사라진 이상 오로지 조선만이 문명국이라고 하는 어찌 보면 주제모른다 할 수 있는 자존의 표현이었다. 그것이 지금에 이르러 한국인의 민족의식으로 이어진 것이고. 차라리 사대주의라 한다면 조선의 모든 것은 하찮으니 중국을 배우자 하던 북학파이거나 이제까지의 조선을 모두 버리고 서구열강을 배우자던 구한말의 개화파를 두고 사대주의자라 하는 것이 옳으리라. 물론 조선 전기 조선의 발전에 고려를 부정하고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사대부들의 역할이 컸듯 북학파나 개화파 역시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요컨데 균형이라는 거다. 자존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개방적이고 조금은 자기부정적인 세계주의와. 전자는 자신을 지키고 후자는 자신을 발전시킨다. 발전이 필요할 때는 스스로를 열어 다른 이를 배우고, 지켜야 할 때는 스스로 높이고 닫아 스스로를 지키는. 어느 하나라도 부족할 때 역사는 왜곡되어 버린다. 이미 100년 전 그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소중화란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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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 아니 오만때문에
2008/02/11 오후 4:56 | 역사읽기자료1


과연 사대주의 때문이었을까?

( 내멋대로 한국사에서 퍼온 글입니다.)

흔히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을 부정하고 친명배금정책을 취했던 것을 두고 사대주의때문이라고들 한다. 성리학과 서인의 경직된 사대주의가 오히려 떠오르는 신흥강국이었던 후금을 무시하고 친명일변도의 정책을 취함으로써 정묘, 병자 양란을 불러일으켰다고. 그 사대주의 때문에 조선후기 정치와 사회가 경직되었고 결국에는 그로 인해 멸망했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마저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원래 사대라는 말은 <맹자(孟子)>의 양혜왕장구하梁惠王章句下편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대충 적어보면 이렇다.

齊宣王問曰 交隣國有度乎?
제 나라 선왕이 물었다. 이웃나라와 사귐에 도가 있는가?

孟子對曰 有. 惟仁者爲能以大事小, 是故湯事葛文王昆夷. 惟智者爲能以小事大, 故大王事훈육句踐事吳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天者理而已矣 大之字小 小之字大 皆理之當然也
맹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어진자만이 대국을 가지고서 소국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탕왕이 갈나라를 섬기고 문왕이 곤이를 섬겼습니다. 또 오직 지혜있는자만이 소국을 가지고 대국을 섬길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왕이 훈육을 섬기고,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대국으로서 소국을 섬기는 자는 천리를 좋아하는 것이요,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자는 천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천리를 좋아하는 자는 온 천하를 보전하고, 천리를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나라를 보전합니다. 天은 理일 뿐이니, 대국이 소국을 사랑함이나,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모두 理의 당연함이다.

혼란스럽기만 하던 전국시대 날이 새면 전쟁이고, 날이 지면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곡소리가 구슬프게 울려퍼지던 그 시대, 많은 지식인들은 이 전란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고민했다. 맹자의 이소사대 사상도 그렇게 나온 것이다. 왕도정치를 국가간에도 확대해 적용함으로써 대국은 소국을 어루만지고, 소국은 대국을 섬긴다고 하는, 현실적인 힘을 전제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제안한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사대주의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 말대로라면 조선은 당시 한창 일어나고 있던 후금을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임진왜란의 피해조차 다 복구하지 못한 조선에 있어 명까지 위협하고 있던 후금은 분명 대국이고 강국이었으니까. 아직까지는 명이 더 크고 강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어찌될 지 모르는 상황에 후금과 적대한다는 것은 사대라고 하는 원칙에 어긋난다. 그럼 왜? 왜 서인은 후금을 배척하고 오로지 친명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취한 것일까?

사실 친명배금은 서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광해군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북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신 이이첨이나 산당 정인홍이나, 심지어 광해군의 왕비조차 사석에서 광해군더러 재조지은을 지켜야지 어찌 후금과 가까이 할 수 있느냐며 광해군의 정책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주 소수, 광해군의 뜻에 동조하는 것은 정작 북인 가운데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광해군 스스로가 후금과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커밍아웃까지 해야 했을까.

다시 말해 당시 조선 사회에서 광해군과 그를 따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명의 재조지은을 잊어서는 안 되며, 명과 적대하는 후금과는 결코 화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정서였던 것이다. 그것은 북인 역시 마찬가지였고, 사실상 외교정책에 있어 광해군은 자신의 친위세력이랄 수 있는 북인에게서조차 고립된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면 왜 가장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집단이었다 북인조차, 자신들의 권력기반이랄 수 있는 광해군에 반대했던 것일까?


흔히 어른들이 하는 말 가운데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는 게 있다. 어른들이 지켜 온 어떠한 가치 - 즉 유교에서 온 - 를 스스로 지키거나 실천하지 못할 때 바로 나오는 말이다. 성현의 도리를 배우지 않고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성현의 도리를 배우지도 익히지도 않으면 금수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인물성론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당시 유교문화권에 있어 세계를 보는 기본적인 시각이라 할 수 있었다.

간단히 근세 이전 유럽의 종교를 떠올리면 된다. 기독교를 믿는 것은 사람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은 형제다. 이슬람을 믿지 않는 것은 단지 이교도일 뿐이다. 더 나아가 백인만이 인간이며 피부색이 노랗든 까맣든 그건 인간이 아닌 하등한 짐승에 불과하다. 지금도 그러지 않은가. 문명화되지 않은 세계, 혹은 우리와 같이 현대문명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 자체가 생경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전근대 유교문화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문명화"된 인간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문명이란 중국에서 나온 "유학"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유교문화권이다. 따라서 유학을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 다시 말해 유교화되지 못하고 중국화되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데 인간이 되지 못하는, 그래서 사람이 아닌 물物이 되어 인물성론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후금 - 여진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되 사람이 아닌 금수였다. 지금도 고양이나 개를 반려동물이라며 가족이라 하면 이상한 놈 보겠다는 듯 보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사람, 짐승은 짐승, 그것은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고, 따라서 후금 - 여진을 동등한 입장에서, 아니 보다 우월한 존재로서 인정하고 화친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불경 그 자체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정묘, 병자의 양란으로 철저히 당하고서도, 그리고 사대의 대상이던 명이 멸망하고서도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청이 강성하여 감히 어쩔 수 없는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청에 사대하기보다는 여전히 명에 사대했다. 고려로 돌아가 보자. 사대주의자라 욕먹던 김부식이 금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던가를. 금 이전 수없이 전쟁을 치렀던 요에 대해서는 어떠한 입장이었던가를. 그리고 정묘, 병자 양란 이후의 조선의 모습을.

그것은 말하자면 미국 남부의 인종주의자들더러 흑인과 친구가 되어 사귀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원리주의 기독교 신자와 친구가 되어 한 집에서 함께 살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후금 - 아니 청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러니 서인이나 남인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이론이나 명분보다는 실질을 더욱 추구했다고 하는 던 북인마저 후금과의 화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 성리학을 배운 유학자였고, 후금과 화친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딛고 있는 세계 그 자체를 뒤집어 엎는 폭거라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당시 조선이 후금에 대해 배척하고, 명에 대해서만 오로지 사대한 것은 사대주의 때문이 아니라 명 다음의 문명국가라는 오만함의 결과였다. 임진년과 정유년에 있었던 평소 사람으로도 생각지 않았던 왜에 의해 일어난 큰 전란은 조선 사대부들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려 놓았고, 그것이 거꾸로 후금에 대해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며 문명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명에 대한 사대를 강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명 다음의 유일한 문명국가라는 자부심 하나를 위해.

사실 사대주의라 한다면 19세기말 나타난 북학파가 진정한 사대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북학의든 열하일기이든 보면 청의 앞선 문물에 대한 동경과 존모가 고스란히 읽히고 있으니. 어찌나 청을 동경했던지 조선의 모든 것은 하찮고 바꾸어야 할 것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청을 본받아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혁명적인 주장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청은 금수이며 오랑캐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이들이야 말로 사대주의의 본질에 가깝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북학파만이 아니다. 그러한 전통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모습에서 조선의 미래를 보았던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들이나, 미국을 방문하고 그 발전한 모습에 감복하여 미국예찬자가 되어 버린 유길준, 서재필 등에게로 이어진다. 보다 강하고 보다 발전되고 보다 앞선 상대에 대해 스스로 굽히고 배워 따르는 것이야 말로 사대의 근본이라 할 때 이들이야 말로 사대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 후기 이들이 조선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한 것, 이미 이 시기에 이르러 사대라고 하는 것이 의미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이것은 조선이 스스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계관 - 민족주의의 원형을 형성하게 되는 데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겠다.)

아무튼 당시 조선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라면 성리학적 세계관에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중국을 제외한 다른 여러 민족과 나라들에 무시하던 "오만함"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이 18세기를 지나 19세기 말 개항을 하고 나서까지 이어짐으로써 조선으로 하여금 스스로 바뀌어야 할 때 스스로 바꾸지 못하고 끝내 근대화에 도태되어 일본에 병합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조선이 진정으로 혁파해야 했던 것은 바로 그 의미없는 "오만함"이었던 것이다. 이미 방향을 잃은 사대주의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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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정조의 한계
2008/02/11 오후 4:44 | 역사읽기자료1

내멋대로 한국사

정조가 끝내 노론을 축출하지 못한 이유는...?

2007/11/24 오후 11:55 | 내멋대로 한국사

정조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왕권의 강화였다. 노론에 의해 아버지인 장헌세자 - 사도세자 - 가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정조이기에, 노론의 나라가 되어 버리다시피 했던 당시 조선을 다시 왕에 의해 다스려지는 왕의 나라로 되돌려 놓고 싶었던 것이다. 개혁군주라고 하는 것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의 일련의 정책의 성과 때문이지, 정조의 모든 행위는 오로지 왕권의 강화 그 한 가지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왜 정조는 그리 왕권강화를 추구했으면서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노론과 끝내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정조가 원하는대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서도 노론을 축출하거나 배제하는 대신 노론의 일파인 김조순을 외척으로 끌어들여 그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결국 이미 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조선은 노론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정조에게는 그들을 어떻게 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노론은 일찌감치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기호지방에 뿌리를 내린 이른바 기호사림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기호사림은 상대적으로 일찍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훈구파들과 싸우고 갈등하고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선조 이후 이들 훈구파를 학연과 혈연등을 매개로 완전히 흡수하게 된다. 훈구파는 흔히 아는 것처럼 몰락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호사림 - 즉 서인과 결탁하여 사림으로서 그 모습을 바꾸었던 것이다.

여기서 역사상식 하나, 그럼 훈구파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넓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신전에, 권력을 이용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간척사업을 벌여 농지를 늘리는가 하면, 농민으로부터 땅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당시 조선 경제의 근간이랄 수 있는 농업경제를 장악한 것이 바로 훈구파였다. 그리고 그 재산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그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후손들은 다시 서인으로 흡수되었고.

거기다 이처럼 스스로가 기호의 광대한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던 그들을 다시 기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호남의 대지주들이 후원하고 있었다. 원래 호남은 영남과 마찬가지로 동인의 세력이 적지 않던 곳인데, 기축옥사로 호남 출신인 정철에 의해 호남의 동인들이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하면서 서인이 주도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소자영농이나 소작농에 유리하고 지주에 불리했던 대동법에 대해 서인이 반대하고 나선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기호와 호남의 농업생산을 장악한 위에 다시 시전의 상인들이 더해진다. 노론에 의해 주도되는 조정에 의해 금난전권이 제정되고 다시 노론을 견제하고자 했던 정조와 남인에 의해 금난전권이 폐지되는 과정은 시전상인과 노론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뿐일까? 만상도 있다. 원래 만상은 의주를 중심으로 청과의 국경지대에서 밀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아다시피 이런 밀무역에는 정치권력과의 결탁이 필수적이다. 노론계열의 북학파에 의해 저술된 북학의나 열하일기가 한결같이 무역과 상업의 발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실제 영조 30년 책문후시를 공인했던 것이 다시 정조11년 수출물량이 너무 많아 내수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폐지되게 되는데, 금난전권이나 책문후시나 모두 정조에 의해 폐지되는 것을 주목해 볼 만하다. 당연하게도 책문후시가 폐지된 이후에도 만상에 의한 밀무역은 송상과 내상과 연결된 일본과의 무역로로 계속 유지된다.

한 마디로 당시 서인은 기호와 호남의 농업생산은 물론, 경상과 만상 등의 상업자본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경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당장 장용영만 하더라도 오군영이 모두 노론의 수중에 들어갔기에 궁여직책으로 왕의 친위대로서 창설한 것인데, 이미 이때에 이르면 오군영의 수뇌부는 거의 노론계열의 인사가 독점하고 있었고, 노론이 아니더라도 노론으로부터 녹봉 이상의 용돈을 받아 쓰는 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군영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새로이 군영을 만드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군영 뿐일까? 장희빈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숙종에 대해 미인계를 쓰려 하던 남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정작 장희빈에 의해 인현왕후 민씨가 밀려나는 상황에 이르자 노론은 당시 무수리로 있던 화경숙빈 최씨로 하여금 숙종과 동침을 하게 함으로써 반격을 한다. 역사란 때로 우연이면서도 우연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은 법이라, 숙종이 무수리에 불과한 화경숙빈 최씨와 동침하고, 다시 숙빈의 첩지까지 내리기까지에는 미리 심어져 있던 노론 쪽 인맥이 움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노론에 의해 태어났다 할 수 있고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며 스스로 노론에 가까웠던 영조에 이르러서는 어떠했을까?

물론 돈만 있다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돈도 돈이려니와 노론의 세력기만이 기호지방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궁녀며 내시며 들일 때는 한양 인근에서 선발하여 들인다. 오군영 역시 대부분 근무지에서 가까운 한양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기호와 호남의 농지며, 만상과 경상의 상업자본이며 모두 노론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궁녀며 내시며 군사들이며 노론의 지역기반이랄 수 있는 기호지방에서 뽑혀 쓰인다. 돈과 지역기반이 만나게 되면 결국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밖에 없다. 즉 무수리에 불과했던 화경숙빈으로 하여금 임금과 동침하게 하고 숙빈으로서 내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할 수 있었던 바로 그 힘.

실제 정조가 즉위하고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정조를 암살하려 할 때 궁녀와 내시 가운데 동조자가 나타났다. 즉 궁녀와 내시 가운데 이미 외부와 내통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왕의 암살에까지 가담할 정도로 외부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사건을 앞두고 매수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왕을 암살한다고 하는 사건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그 이전부터 최소한 외부세력에 의해 심어졌거나 포섭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돈과 인맥,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남았다. 노론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추구했던 기본전략, "산림을 우대하고 국혼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 노론이 송시열을 송자로 추존한 것은 성리학이 지배하고 있는 조선사회에서 학문적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였다. 송시열을 높임으로써 송시열을 따르는 자신들이 조선 성리학의 헤게모니를 쥐고 유림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고, 실제 노론은 명분으로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유림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림에 더해 노론은 국혼을 통해 왕실의 안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국혼을 할 때 왕명에 의해 금혼령이 내려지는 것은 기호지방에 한정되어 있었다. 궁녀며 내시도 마찬가지지만 왕비든 왕자비든 간택할 때 그 대상은 기호지방에 머무는 사대부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후보감을 고르는 것도 원래 노론에서 나온 왕비며 왕대비며 대왕대비다. 당장 장헌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도 노론이었고, 영조의 계비로 정조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정순왕후도 노론출신이었다.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며,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말할 것도 없다. 순원왕후의 아비가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이었으니. 왕은 이씨의 왕이되 왕비는 노론의 왕비였던 것이다.

실제 정조가 즉위하고 바로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에 의해 일어난 암살사건의 경우 궁 내부에서 궁녀며 내시까지 가담한 동조자가 10여 명이나 나왔는데, 사건을 앞두고 매수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왕의 암살이라고 하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궁 내부에 그들의 동조자가 침투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 몇 차례 암살시도가 있은 끝에 정조가 소론의 대신을 모아 노론의 명분이 옳음을 설득하여 와해시킨 것은 그만큼 당시 노론의 위협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결국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아 특히 노론 시파를 외척으로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이러한 현실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힘이 없었던 것이다. 돈과 인맥, 명분, 더구나 왕실의 안방까지, 사실상 조선의 모든 것을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론을 축출하거나 제거한다고 하는 것은 조선사회 자체를 근본부터 뒤집어 엎는 혁명을 뜻하는데, 정조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란 현실적으로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당시 노론을 견제할만한 시민사회라도 형성되어 있었다면 친위쿠데타라도 일으켜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메이지 유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권력의 교체를 열망하는 새로운 흐름을 이용하여 스스로 세로의 시대의 중심에 서서 변화를 이끌어 다시금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왕권을 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인과 소론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열만한 의지도 역량도 없었고, 그들을 대신할만한 어떠한 세력도 성장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정조가 노론과 대립하여 그들을 제거하려 해도 그를 뒷받침할만한 어떠한 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였으니 정조의 선택이란 노론과의 타협 이외에는 달리 없었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러한 정조의 시도는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가 정조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세자의 보호자로서 외척으로 끌어들인 김조순이 세도정치를 시작함으로써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노론이라고 하는 것은 정조 한 사람의 뛰어남이나 강력함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의 절망과도 같은 현실의 벽이었다 할 수 있으니, 정조는 그 벽에 도전했다가 끝내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던 것이고 말이다.

흔히 조선의 정치라 하면 선비들이 공자왕맹자왈 헛된 소리나 늘어놓고 탁상공론이나 하는 것으로 알기 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