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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용어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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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해방이후현대
2007/06/07 오전 11:44 | 국사용어해설

1. 현대 사회의 성립

▨ 건국 준비 위원회의 조직
8.15광복 직전에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건국을 준비한 세력은 충칭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옌안의 조선 독립 동맹, 국내의 조선 건국 동맹 등이었다. 이 중에서 8.15 광복과 동시에 가장 먼저 건국을 준비한 세력은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 건국 동맹이었다. 이 단체는 1944년에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 결사였다. 여운형은 조선 건국 동맹을 중심으로하여 안재홍 등 신간회 계열의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구합하여 8.15 광복과 더불어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건국 준비 위원회의 중앙 조직은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 총무부장에 최근우, 재무부장에 이규갑, 조직부장에 정백, 선전부장에 조동우, 경무부장에 권태석 등이었다. 그러나 이 건국 준비 위원회에 송진우 등 민족주의 우파 세력은 참여하지 않았다.

▨ 카이로 회담의 한국 독립 결의
1943년 11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 제스의 3거두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 3거두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라고 선언하였다.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국의 독립이 결정되었으나, 그 시기가 문제였다. 원래 홉킨스가 루스벨트에게 제출한 정책 건의서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로 되어 있었는데, 루스벨트가 ’적당한 때에(at the proper moment)‘로 고쳤던 것을 처칠이 ’적절한 시기에 (in due corse)‘라는 영국 수상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으로 재차 교정하여 카이로 선언에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로 선언은 독립을 고대하던 한국인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으나, 그 후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 이유는, ① 트루먼 회고록에 의하면 루스벨트는 한국 독립의 적절한 시기를 ‘약 40년으로’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② 소련의 동의와 협조가 선결 조건이었던 점, ③ 극동의 주도 세력을 국민당 정권이 장악할 것이라는 가정, ④‘적절한 시기’까지의 한국 통치 기구의 형태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등이었다. 그리고 이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결의는 그 후 테헤란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 회담에서 스탈린의 원칙적 동의를 얻었다.
이 결의는 그 뒤 포츠담 선언에서도 재확인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은 이미 약속된 것이었다.

▨ 미국과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
1945년 8월 9일,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둔 시기에 소련은 대일전에 참전하여 150만의 병력으로 만주와 한반도 동북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한반도에 침입한 소련군은 8월11일에 웅기를 점령하고, 12일에는 나진, 14일에는 청진과 나남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한 후 소련군은 8월 21일에 함흥과 원산에 들어왔고, 23일에는 개성에, 24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한편, 미군은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하였고, 9월 9일에 일본 총독으로부터 서울에서 항복을 받았다. 미군은 9월 13일에 개성에 진주하였고, 16일에는 부산에, 27일에는 전주에, 그리고 10월 5일에는 광주에 진주하였다. 이리하여 북한에는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고, 남한에는 미국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민족이 열망하던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의 실현이 어렵게 되었고, 미․소의 군대가 실시하는 군정이 민족 분단을 점차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 독립 투사들의 귀국
1945년 8월 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은 후, 국외에서 독립 투쟁을 계속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들은 서둘러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활약하던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보다 먼저 귀국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10월 16일에 미군 비행기를 타고 유력한 독립 투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귀국하였다.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와 임정 요인들 제1진은 미국의 반대로 임시 정부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11월 23일에 미군 비행기로 귀국하였고, 김원봉 등 임정의 제 2진은 12월 1일 귀국하였다. 한편, 조선 독립 동맹의 김두봉, 최창익 등은 12월 1일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 모스크바 3상 회의와 신탁 통치 문제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미국 국무 장관 번즈는 소련 외상 몰로토프가 제안한 소련측의 수정안을 미국측의 제안과 절충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12월 27일에 한국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회의 결정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좃6을 민주주의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속히 일본의 조선 통치으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해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 인민의 민족 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취할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② 조선 임시 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안을 연구, 조정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 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 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 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의제 작성에 있어, 공동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들이 작성한 의제는 공동 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의 4국 정부에 그 참고에 공(供)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③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가치 발전과 독립 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 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 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 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 통치의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④ 남북 조선에 과련된 긴급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 남조선 미 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군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신탁 통치는 도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독립할힘을 기를 때까지 강대국이 일정 기간 통치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식민지 지배와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의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은 한국민에게는 모욕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을 논의하기 위하여 1946년 3월에 서울의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미․소 공동 위원회는 임시 정부 수립을 함께 협의할 정당, 사회 단체를 선정하는 문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리하여,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5개월에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고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 의 의견 대립으로 1947년 10월에 결렬되었다.

2. 대한 민국의 수립

▨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설치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소련은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이 모스크바 협정에 위반된다고 반대하였으나, 유엔 일반 위원회는 12 대 2로, 유엔 정치 위원회에 회부하였다. 유엔 정치 위원호에서 미국은 선 정부 수립, 후 외군 철수를, 소련은 선 외군 철수, 후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또, 소련은 남북한 대표의동시 초청을 우선적으로 주장하였고, 미국은 남북한 대표의 선정을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UNTCOK)의 설치를 오구하였다. 결국, 소련의 제의가 부결되고 미국의 제의가 가결되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설치되었다.

▨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
남북 협상은 1948년 2월에 김구와 김규식이 북쪽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협상을 제의하여 실현되었다. 당시,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자,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을 반대하고 북쪽에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던 것이다. 이 제의에 대하여 북쪽이 응하게 되자, 남북 협상이 1948년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까지 진행되었다.
남북 협상은 독립 운동 세력의 통일 전선론과 그 맥이 통하는 것으로서, 주체적 평화 통일론에 입각한 통일 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하여 이루어졌으나, 남한과 북한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 정부의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은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을 위한 노력이었고, 이것은 남북 분단을 회피하기 위한 주체적 평화 통일론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 반민족 행위 처벌법
1945년 8월 이전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1948년 9월 제정된 법률이다. 우리 민족은 20세기 초에 일제의 침입을 받아 1945년에야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났다. 이 일제 침략기 동안 각 독립 운동 단체는 일제에 협력한 자의 처벌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으며, 광복 후 각 정치 단체는 미 군정 당국에 이들의 제재를 요구하였으나 미 군정 당국은 이들의 상당수를 군정청에서 이용하였으므로 처벌에 반대하였으며, 1947년 7월 과도 정부 입법 의원은 ‘민족 만역자, 부일 협력자, 모리 상간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나, 미군정청의 반대로 공포되자 못하였다. 그러나 1948년 3월 군정 법평 제 175호 ‘국회 의원 선거법’에서 친일 분자의 국회 의원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제한하였으며, 이 법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 의원이 제정한 헌법 제 100조에서는 이들을 소급 입법에 의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이 헌법 조항을 근거로 제정된 법률이 바로 이 법률이다.다. 친일 행위를 한 자를 그 가담의 정도에 따라 최고 사형까지의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밖에 재산 몰수, 공민권 정지의 조처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를 두어 조사 보고서를 특별 검찰부에 제출하도록 하고, 대법원에 특별 재판부를 두어 재판을 담당하게 하며, 특별 재판부에 특별 검찰부를 설치하여 공소를 제기하도록 하였다. 재판은 단심제로 하고 공소 시효를 법률의 공포일로부터 2년이 되는 1950년 9월 22일까지로 하였다. 그러나 이 법률은 제정 당시부터 친일 분자의 견제를 받았으며, 특히 일제 강정기에 관직에 있던 자를 중용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949년 6월에는 특별 조사 위원회가 일제 강점기에 헌병 또는 경찰로 친일 행위를 한 경력이 있는 경찰 간부를 조사하자 경찰이 특별 조사 위원회 사무실에 난입하여 직원을 연행하고 서류를 압류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친일 분자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던 일부 의원이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러자 같은 해 7월 법률이 갱정되어 공소 시효가 1949년 8월로 앞당겨지고, 1949년 9월 다시 법률이 개정되어 특별 조사 위원회, 특별, 재판부, 특별 검찰부를 해체하고 그 기능은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이관되었으며, 이 업무는 1950년 3월까지 대법원 대검찰청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680여 명이 조사받았으나 결국 집행 유예 5인, 실형 7인, 공민권 정지 18인 등 30인만이 제재를 받았고, 실형의 선고를 받은 7인도 이듬해 봄까지 재심 청구 등의 방법으로 모두 풀려나 친일과의 처단은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의 구성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각 도에 인민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뒤이어, 시, 군, 면의 각급 지방 인민 위원회도 1945년 11월까지는 조직을 완료하였다.
한편, 소련군 사령부를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립하게 하고, 33세의 김일성(본명 김성주)을 내세워 공산당을 결성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12월에 열린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 3차 확대 집행 위원회에서 김일성이 당 책임 비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의 당권 장악과 함께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이란 명칭이 말소되고, 북조선 공산당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김일성이 당권을 장악한 후 2개월 이내에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수립되고, 김일성이 그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 기구는 소련 군정의 철저한 대행 기관이었고, 소련군 사령보의 명령과 엄격한 감독을 받았다. 그리고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1947년 2월에 북조선 인민 위원회로 변경되었고, 이것이 1948년에 인민 공화국으로 개칭되어 북한 단독 정권이 수립되었다.

▨ 6․25 전쟁의 기원
197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6․25 전쟁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연구의 경향은, 전통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견해로 대별할수 있다. 전통주의적 해석은 ① 스탈린 주도설, ②중국과 소련의 공모설 등이 대표적이다.
스탈린 주도설은 “6․25 전쟁은 스탈린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되고 주도되었다.”는 달린(DallinDavid)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학설은 1970년에 간행된 소련 공산당 제1서깅 겸 수상이 었던 흐루시초프
(Khrushchrov, S. Nikita)의 회고록의 내용에 따라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6․25 전쟁은 스탈린의 구상이 아니라 김일성의 구상이었다.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과 소련의 공모설은 중국의 소련의 주도 아래 6․25 전쟁의 계획과 추진에 적극 참여했다는 주장과 중국은 거의 참여하지 않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주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늘날 학계의 정설은 중국의 6․25 전쟁의 계획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북한의 승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의 준비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수정주의적 견해는 6․25 전쟁의 기원에 대한 책임을 공사권이 아니라 서방권에서 찾았다. 여기에는 ‘남침 유도설’등이 포함되는데, 북한의 남침에 의해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최근에는 수정주의 학파에서도 북한의 남침설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김학준 교수의 결론은, 6․25 전쟁은 소련이 지원한 북한주도의 남침이라는 것이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체결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되었고, 그 직후인 8월에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서울에서 가조인되었다. 그리고 10월1일에 미국의 워싱턴에서 한국의 변영태 외무 장관과 미국의 덜레스 국무 장관이 정식 조인하였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미국은 군사 동맹의 관계에 돌입하였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은 주한 미군의 존재에 의해 상징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방위 조약의 협상 과정에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 통제권이 휴전 후에도 유엔군 사령관에 귀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상호 방위를 위하여 타국과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동맹을 체결한 국가는 미국이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이다.
〔성격〕한․미 상호 방위 조약은 평화 애호와 방위에 바탕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의 정신을 준수함으로써 국제 평화 유지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특히,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평화를 희구하기 위하여 지역 집단 안보를 추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반공 이념의 대표 국가인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공산 침략 방위를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우호 관계나 동맹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소련의 세력 팽창을 저지하는 데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미국은 태평양 세력 국가로 등장하면서 제일 먼저 소련의 팽창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팽창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급속도로 증가되어 미국의 방위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공산 침략에 대한 공동 방위를 목적으로 한 양국 간의 전형적 집단 안전 보당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체결 경위 및 내용〕이 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위싱턴에서 변영태(卞榮泰) 외무 장관과 덜레스(Dulles,J,F.)국무 장관이 서명한 것을, 한국 국회와 미국 상원의 동의를 거쳐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아이젠하워(Eisenhower,D,D.) 대통령이 비준함으로써 1954년 11월 17일부터 발효되었다. 6․25 전쟁 당시 한국 정부가 휴전에 반대하여 국토 통일을 주장한 반면, 미국은 조속 한 휴전 전략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에 미국 정부가 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일련의 공약 중의 하나가 조약의 체결이다. 이 조약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공산주의자들의 오판에 의한 재침 방지이다. 둘째, 한구 정부나 국민들에게 외부로부터 침략이 있을 때 미국의 개입을 정식으로 확약하는 것이다.

▨ 발췌 개헌과 사서 오입 개헌
역사적인 5․10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된 후 2년 만에 5․30총선거가 1950년에 실시 되었다. 제2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30총선거에는 제헌 의원 선거 때 불참하였던 남북 협상과들이 참여하여 무소속으로 다수 진출하였다.
이에, 2대 국회에서는 이승만의지지 세력이 1/4에 불과하였고, 한민당도 24석밖에 얻지 못하였다. 전체 210석 중에서 야당 인사가 많은 무소속이 128석이나 차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헌법 규정에 따라 1952년에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면 이승만은 재선될 가능성이 없었다. 이에, 대통령 이승만은 6․25 전쟁의 와중에서 1952년 7월에 계어령을 선포하고,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무리하게 통과시켜 직선제에 의한 재선의 길을 마련하였다.
대통령에 재선된 이승만은 3대 국회가 1954년에 개원하자, 지지 세력인 자유당 의원들을 동원하여 그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1954년 12월 28일에 이른바 사사 오일 개헌안이 통과되었고, 이후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 정권이 1960년까지 계속 집권하였다.

3.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 내각제 개헌과 7․29 총선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을 계승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부정 선거를 감해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은 3․15부정 선거와 자유당 정권의 독재 및 부패에 항거하여 4․19혁명을 일으켰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어서, 허정 과도 내각이 수립되었고, 민주당이 주도하여 1960년 6월 15일에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새 헌법에 따라 7․29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233명 중 175석, 참의원58명 중 31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7․29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어 격심한 대립을 보였으며, 대통령은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되었고, 국무 총리는 신파의 장면이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으나, 민주당의 분열 때문에 정치적 안정을 기하지 못하였다.

▨ 4․19 혁명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배경] 민주적 교육이 비민주적으로 되어 가고 대규모의 부정 선거가 자행되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는 사람이 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을 만회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여러 문제로 관제대중 동원을 하였다. 관제 대중 동원은 초기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점차 효과도 없어지고,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도 사라져 그의 권력 유지는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원인] 4․19 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1960년 3월 부정 선거이다. 이 때, 실질적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승만의 강력한 대인 조병옥의 고령의 나이로 인하여, 실제 경쟁은 부통령 선거에서 벌어졌다. 당시 부통령 후보로는 현직 부통령이던 장면과 이승만이 밀어 주는 이기봉이 대립하였는데, 선거 과정에서 선거 결과 까지 공무원들에 의하여 완전히 날조되어 결국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때 마산에서 김주열의 시체가 발견되자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뛰어나오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전개] 4․19 혁명 전 수 주일 동안 주로 지방의 고등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으나 이승만은 상황을 이해하지 하지 않았으며, 마산 의거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 매도하였다. 이것은 학생들을 더욱 격분하게 했으며, 4월 18일 고대생 습격 사건이 발생하자 드디어 4월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수천 명이 경무대로 돌격하였다. 이에 경찰은 발포로 대응하였고 학생들의 시위는 혁명으로 변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서 발포한 직후 계엄령이 발표되었지만, 군대는 질서와 치안만을 신경 쓸뿐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다. 19일 이후 연일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21일 내각이 총사퇴하였으며, 그 다음 날 이승만은 허정을 정부 각료로 임명하고, 민주화를 약속하여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사태는 급변하여 25일 대학 교수단의 시위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다시 의원 내각제를 제시하였으나, 결국은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하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과도 정부의 수립과 전개〕4.19혁명 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학생과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허정 과도 정부는 이승만 정권의 계승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배후에 조직화된 정치 세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힘의 기반을 두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깨뜨려야 하는 모순 된 과업이 주어졌다. 따라서, 허정 과도 정부의 정책 및 혁명의 뒷마무리는 비혁명젹이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거 부정 행이자와 경찰에 대한 재판은 비혁명적이었으며, 이것은 학생과 시민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허정 과도 정부의 보수적이고 온건한 문제 접근 방법으로는 일반 국민들을 만족시켜 줄 수가 없었을뿐더러, 경찰의 권위주의적 성격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의의〕1960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이승만 정부의 권력 구조와 정치 의식과 학생들의 가치관과의 사이에 크고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었다. 4.19혁명은 이승만과 그의 지지 세력에 대항하는 학생과 시민 세력에 의한 혁명이었다.

▨ 5․16 군사 정변
장면 내각은 민주당의 분당으로 안정된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정국의 불안이 계속되었다. 또, 각종 시위 사태가 계속되어 사회 불안이 고조 되었다. 이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1961년 5월 16일에 군사 정변을 일으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정 기간 동안의 최고 권력 기구는 국가 재건 최고 회의였으며, 군사 정부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 등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5.16 군사 정변으로 성립된 군사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하고, 미국 등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구악을 일소하고 민생고를 해결하며, 양심적인 정치인에게로의 정권 이양 등을 내용으로 한 6대 공약을 내세웠다.

▨ 3선 개헌과 유신 체제
대통령 중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이제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소위 3선 개헌에 착수하였다. 당시 헌법이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1971년에 있을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69년 1월에 공화당이 3선 개헌을 검토하고 있음을 공식 발표하자 당시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 공화당 내에서는 박정희의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김종필이 이에 반발하였고, 신민당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항하였으며, 학생들의 시위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러한 반대 의사를 모두 무시하고 개헌을 강행하였다. 결국 개헌안은 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철야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국회 별관에서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전격적으로 통과되었고(1969. 9), 뒤이은 국민 투표에서 가결됨으로써 새 헌법으로 확정되었다.(1969. 10. 17).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3선 개헌에 따라 재출마가 가능해진 박정희가 공화당으로 입후보하였고, 신민당에서는 소위 40대 기수론에 의하여 김영삼․김대중․이철승이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갬대중이 입후보하였다.
이 선거의 결과 박정희가 53.2%의지지를 획득하여 45.3%를 얻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되어 제 7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한편,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역시 공화당이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신민당과의 의석 차는 상당히 좁혀진 것이었다.
3선 개헌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서 이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격심하게 일어났다. 게다가 닉슨 독트린과 미군 철수, 닉슨의 중국 방문 등 국제 상황의 변화도 박정희 정부가 짊어지게 된 커다란 불안 요인이었다. 더욱이,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의 발표에 따라 남북 조절 위원회가 설치되고 남북 대화가 시작되었지민 그것이 곧 난관에 부딪히자, 이에 박정희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장기 집권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내세워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과 정치 활동의 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비상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비상 국무 회의에서 의결․공포한 유신 헌법을 국민 투표에 부친 결과 90% 이상의 지지를 얻어 확정하였다.(1972. 11. 21). 이어서, 새 헌법에 따라 국민 투표를 거쳐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구성하, 여기서 단독 출마한 박정희가 임기6년의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10월 유신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노린 민주줒의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었으므로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긴급 조치를 잇따라 발표하여 유신 헌법에 대한 일체의 부정․비방과 개정․폐지의 주장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1978년 12월에는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박정희가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사건을 계기로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력한 시위가 일어났다.(釜馬事態, 1979. 10.16).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이 있을 때 박정희가 저격당하여 서거하는 10.26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유신 체제는 붕괴되고, 18년간에 걸친 장기간의 박정희 정부는 종말을 고하였다.

▨ 현대사의 바른 이해
한국 현대사의 이해에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사실은 다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한국 현대사의 대부분의 내용이 그러하듯이 사실에 대한 정확성의 문제이다. 사실의 실증적인 전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요구된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사를 논의할 경우 객관적인 사실의 인식보다는 일정한 선호나 취향에 따라 사실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했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정리하고 이를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둘째로, 다양한 해석에 대한 비교론적 시각을 가지는 일이다. 한 가지 사건이나 사실의 전개에 대한 수많은 평가와 해석에 다양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중 어느 하나만이 옳고 다른 것은 틀리다는 식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이러한 해석들에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스스로의 정신적인 물입이나 감정 이입에 대한 자세가 필요하다. 쉽게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은 대단히 비학문적인 태도이다. 더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위치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역사적 평가에 개입시키는 것은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학생들을 자신이 내리는 해석의 충실한 수용자로 교육시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현대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사실 전개의 연계성을 가지는 긴 시간적 흐름의 한 단면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만이 독자적으로 생겼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믈 전체 역사의 전개라는 구성체 속에서 그 사건이 차지하는 오늘의 의미가 논의되어야 한다. 역사는 아쉬움의 기록이지 결코 만족의 증거물은 될 수 없다. 학생들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을 비판하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훈의 역사로 받아들려 민족사의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새 결단의 장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점에서 현대사는 비판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넷째로, 현대사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결단으로 이어지게 하는 구체적인 논리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결단도 학생 스스로 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결단이 내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 스스로 상황을 인식하고 비판하게 하며 그 비판을 딛고 조국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결단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 현대사 교육의 의도하는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제로 한다면 현대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은 현대사에 대한 교사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방법으로 현대사를 가르치는 경우이다. 그리고 현대사를 마치 우국 지사의 양성을 위한 애극심의 고취로 밀고 가려는 것도, 또는 그와는 달리 지나치게 비난이 담긴 비판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깊은 조국애에 바탕을 둔 애정으로 잘 된 것도 잘못된 것도 받아들이면서 그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게 하는 길잡이로서의 역사 교육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현대사의 부분의 한층더 그러하다.
전두환 정부 유신 말기인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 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써 유신 체제가 붕괴되었고, 국민들은 민주화의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미 그 때는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군부가 또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억압 통치를 자행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현직 대통령의 피살이라고 하 정치적 공백 상태를 틈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불법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국민들은 군이 다시 일어날 경우, 국민들의 저항이 격렬해질 것이기 때문에 군부는 모험을 하지 않으리라고 관측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측과는 달리 신군부는 전방을 지키는 부대를 비롯하여 자신들의 휘하에 있는 군 부대를 동원하여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정병을 일으켰다.
신군부가 주도한 군사 정변은 군의 지휘 계통에 큰 혼란을 일으켜 정치 권력의 공백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신군부는 혼란 상태를 수습한다는 미명하에 1980년 5월 17일 전국 비상 계엄 조치를 내렸는데, 이는 정권 장악을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 음모는 전 국민적인 반대에 직면했는데, 이것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였다. 신군부의 불법적인 권력 탈취를 막기 위해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계엄 철폐와 민주 헌정으로의 복귀를 요구했던 것이다.
평화적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인명잉 살상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광주를 비롯하여 인근 각지로 파급되어 대대적인 민주화 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일련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정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고, 또 고통을 당했다.
12․12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5․17 계엄 확대 조치로 사실상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고 볼 수 잇다. 1차적으로 12․12를 통해 자신에 반대하는 군 내부의 세력을 제거했으며, 2차적으로는 5․17 조치를 통해 정치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인을 인위적으로 배제한 상탱를 만들었다.
신군부의 정치 권력 장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준 기관은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와 국가 보위 입법 회의였다. 현역 군인이 주축이 되었던 비상 대책 위원회는 안보 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나, 사실상 군부에 의한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해 만든 편의적 기구였다. 한편, 신군부는 입법 회의를 통해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이 때 제정된 법률의 대부분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반민주적인 것이었다.
신군부에 의한 공포 정치는 결국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켰으며, 통일 주체 국민 회의로 하여금 8월 27일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는 민주 헌정의 파괴였고, 독재 정권의 창출이었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하여 개정 헌법을 공포했고 강권 통치를 계속했다. 법치주의를 외면하고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법에 의한 통치보다는 힘에 의한 지배가 우선되었고, 권력의 사유화가 공공연히 추구되었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불법 구금, 연금, 가두검문, 연행, 고문 등이 공공연하게 자행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의 희생자뿐만 아니라, 삼청 교육대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상자, 그리고 수천 명에 달하는 공무원 및 언론인이 강제 해직은 전두환 정부 출법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보여주었다.
전두환 정부는 ‘복지 국가의 건설’을 국정 목표로 정하고 민주주의의 토착화, 정의 사회의 구현, 교육 혁신과 문화 창달을 지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의지의 표명은 다만 선언적이고 수사적인 구호에 불과했고, 실제적인 성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전두환 정부의 출법이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 최소한의 도덕성도 결여되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 노태우 정부는 여러 면에서 전두환 정부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점을 보인다. 그는 12․12를 주도했다는 궁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민정당 대표 시절 그가 발표한 6․25 선언의 핵심은 기존의 대통령 간접 선거 방식을 버리고 야당측이 요구하는 개헌, 즉 대통령 직접 선거 방식을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6․29 선언은 6월 민주 항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군부 세력이 이처럼 전략을 변경한 것은 물리적인 강압 통치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회 각 분야가 성숙했기 때문이었다. 즉, 더 이상 군사 정권으 통치를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국민적 역량이 증대된 것이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는 군사 독재의 와해 과정의 마지막을 장식한 정권임과 동시에 민주화 추진 과정의 서두를 장식한 정권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6․29 민주화 선언으로 실시된 1987년 12월의 제 13대 대통령 선거는 16년 만에 국민의 직접 투표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국민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야당에 의한 정권 교체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던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법적, 제도적 장치와 절차면에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민주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이 선출됨으로써 정치 권력이 어느 정도 정당성과 동의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직선제는 시민과 학생들이 주도한 6월 민주 항쟁으로 쟁추한 것이기는 하지만,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압적인 전두환 정부에 비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강화됨으로써 권력 균형의 원리라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노동 운동 또한 활성화됨으로써 정치 과정에의 참여와 폭이 확대되고, 국민들의 욕구 투입이 용이해졌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방 의회가 구성되어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지방 자치가 부활되었고, 언론의 자율성이 신장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노태우 정부에 대해서는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지만 이와 아울러 부정적인 평가도 빼놓을 수 없다.
우선 민주화 추세에 따른 국민들의 욕구를 적절하게 수렴하지 못함으로써 체제의 능률을 크게 저하시킨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노태우 대통령 자신이 신군부의 핵심으로 전두환 정부 출범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5공 청산에 댛나 국민적인 요구에 응하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어 우유 부단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체제의 효율성을 크게 저하시켰던 것이다.
또한 오랜 군사 통치의 권위주의적 체제에서 비롯된 부정과 비리로 인하여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하는 폐단을 빚었으며, 편의주의적 통치 행위로 인해 정책 수행의 일관성 유지가 어려워 사회의 안정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 김일성 독재 체제의 강화
북한 정권은 그 수립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법제의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줄곧 김일성 1인 체제 구축으로 일관된 과정이었다. 정권 초기의 권력 구조는 파벌 간의 연립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소련군을 따라 들어온 갑산파의 김일성이 당위원장이면서 내각 수상이었고,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연안파의 김두봉(金枓奉)이 국가 원수의 지위에 있었다. 또 남한에서 남로당(南勞黨)을 조직했다가 월북한 남로당파의 박헌영(朴櫶永)이 부수당 겸 외상이었다. 그리고 허가이(許可而)를 중심으로 한 소려파가 당과 정부 기관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전 북한 지역에서 지하 공산당 활동을 했던 국내파는 현준혁(玄俊赫)의 암살로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이들 세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존재는 김일성과 박헌영이었다. 1950년의 6․25 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권력 투쟁에서 김일성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김일성은 패전으로 인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남로당파를 속죄양으로 삼아 1952~1955년에 걸쳐 박헌영․이승엽(李承燁)․이강국(李강國) 등 남로당계 지도급 인물들을 ‘미 제국주의의 고용 간첩’으로 단죄하였다. 1956년에 집어들어 북한에서는 군수 공업을 위주로 한 중공업 우선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이 팽배하였다. 또, 흐루시초프의 스탈린겨가 운동과 개인 숭배 반대 연설에 고무받은 소련과․연안파로부터 김일성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는 등 김일성은 또 한 차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중․소 대립이란 상황을 이용하여 김두봉․최창익(崔昌益)․박창옥(朴昌玉) 등 연안파와 소련파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전 지역적으로 ‘중앙당 집중 지도 사업’이란 이름으로 주민 들에 대한 사상 검토 작업을 전개하여 1인 지배 체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김일성의 권력 강화는 1960년대 말 자기 파인 갑산파에 대한 숙청으로 보다 확고해졌다. 군사력강화보다 경제 건설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박금철(朴金喆)․이효순(李孝淳) 등이 숙청되었고, ‘김일성 사상’을 당의 유일 사상으로 규정할 것을 공식 선언하였다. 또, 대남 전략에서 이견을 나타낸 김창봉(金昌奉)․허봉학(許鳳學) 등 군부파를 숙청함으로써 1970년대에 들어와 명실 공히 유일 지배 체제를 확립하였다.
19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 헌법’은 이처럼 강화된 김일성의 역할과 지위, 그리고 통제 수단을 공식화하였다. 김일성은 ‘극가 주석’의 새 직위를 차지하였고 신설된 초내각격인 중앙 인민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4.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

▨ 광복 후의 경제 혼란
1945년 광복 당시 한반도 내의 민족 자본은 전체 기업 회사의 자본 중에서 11%를 차지할 정도로 미약하였다. 한국 내의 근대 공업은 일본 자본이 지배하였고, 기술 역시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8․15 광복 후 일본인이 철수하고 일본과의 경제 교류가 끊기자, 한국 내의 공장은 가동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광복 후 38도선을 경게로 남북이 분단되자, 두 지역의 경제적 혼란은 더욱 심회되었다. 식량 생산은 남한이 북한보다 우세하며 미곡의 74.6%, 맥류의 75.8%를 생산하였으나, 공업 원료가 되는 지하 자원은 북한 지역에서 다량으로 산출되었다.
주요 동력원인 전력은 거의 대부분이 북한에서 발전되었고, 남한은 겨우 8%를 차지하였다. 석탄도 남한의 생산량은 21%에 지나지 않았고, 주요 공업 원료가 되는 철광, 텅스텐, 흑연, 금, 은 등도 70% 이상이 북한에서 산출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북 분단으로 양 지역 간의 화물 유통이 단절됨으로써 광복 직후의 경제적 혼란은 매우 심하였고, 국민의 생활난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복 직후 수송 기관의 마비로 물자가 제대로 유통되지 못하여 식량과 연료의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물가는 폭발적으로 상승하였다. 물가의 폭등은 패전 직후 조선 총독부가 20여일의 공백기에 조선 은행권을 30여억 원이나 불법으로 발생하여 이룬인들에게 배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1945영 8월 15일 당시 49억 7500만원이었던 조선 은행권이 조선 총독부의 불법 발행으로 8월 31일에는 79억 8700만원으로 급증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통화의 급격한 증가, 물자의 부족, 경제 유통의 경색과 이에 대처하는 미 군정 당국의 신속한 정책의 부재 등으로 말미암아 공복 직후의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 농지 개혁법의 제정
1945년 9월에 미 군정이 실시되면서, 맨 먼저 취한 토지 정책은 미 군정 법령 제9호에 의한 소작료 1/3제 실시 및 소작 조건의 개선이었다. 이어서, 미 군정은 일본인이 소유하였던 농지를 신한공사(New Korean Company)에서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 관리 면적은 경지 면적의 13.4%를 차지하였다. 특히, 전라 남북도의 경우에는 신한 공사가 관리한 일본인 적산 농지는 각각 경지 면적의 24%, 28%나 되었다.
또, 미 군정은 1946년 12월에 과도 입법 의원의 개설을 강행하고, 1947년 초에 농지 개혁 법안을 우선적으로 제정하도록 촉구하였다. 미 군정 당국은 농지 개혁안을 입법 의원에 제시하였으나, 1948년 3월에 입법 위원이 해산될 때까지 농지 개혁안은 통과되지 못하였고, 결국 이 문제는 대한 민국 정부의 과제로 농지 개혁법을 마침내 제정, 공포하였고, 1950년 3월에 대통령령 제 295호로 실시하였다.
농지 개혁법의 내용은, 첫째, 3정보를 초과하는 농가의 토지나 부재 지주의 토지를 국가에서 유상으로 매수하고, 이들에게 지가 증권을 발급하여 농지의 연 수확량의 150%를 한도로 5년간에 보상하도록 하였으며, 둘째, 국가에서 매수한 농지는 영세 농민에게 3정보를 한도로 유상 분배하고, 그 대가를 5년간에 쳐 수확량의 30%씩 상환곡으로 수납하게 하였다.

▨ 새마을 운동
1970년부터 정부는 농어촌의 근대화와 소득 증대를 위하여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였다. 소득 증대를 위하여 새마을 운동은 자조, 자립, 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국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농어촌에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도시 새마을 운동과 공장 새마을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동남 아시아에서는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빈곤과 후진성을 극복한 성공 사례로 인정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이란 근면, 자조, 협동의 기본적인 정신과 실천을 범국민적 및 범국가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총체적인 현대적 국가 발전을 가속적으로 촉진시키려는 목적하에 행해지고 있는 지역 사회 개발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정의는 논자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여기서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정의를 해 보겠다.
첫째, 한국 고유의 농촌 종합 개발의 성공적인 유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 새마을 운동이 도시 지역에도 확대되어 이른바 도시 새마을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서 범국민 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 새마을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