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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님 너무감사 제가 숙재..
정말 알고 싶었던 내용..
좋은 정보 잘 보고 갑..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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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1. 현대 사회의 성립

▨ 건국 준비 위원회의 조직
8.15광복 직전에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건국을 준비한 세력은 충칭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옌안의 조선 독립 동맹, 국내의 조선 건국 동맹 등이었다. 이 중에서 8.15 광복과 동시에 가장 먼저 건국을 준비한 세력은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 건국 동맹이었다. 이 단체는 1944년에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 결사였다. 여운형은 조선 건국 동맹을 중심으로하여 안재홍 등 신간회 계열의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구합하여 8.15 광복과 더불어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건국 준비 위원회의 중앙 조직은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 총무부장에 최근우, 재무부장에 이규갑, 조직부장에 정백, 선전부장에 조동우, 경무부장에 권태석 등이었다. 그러나 이 건국 준비 위원회에 송진우 등 민족주의 우파 세력은 참여하지 않았다.

▨ 카이로 회담의 한국 독립 결의
1943년 11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 제스의 3거두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 3거두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라고 선언하였다.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국의 독립이 결정되었으나, 그 시기가 문제였다. 원래 홉킨스가 루스벨트에게 제출한 정책 건의서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로 되어 있었는데, 루스벨트가 ’적당한 때에(at the proper moment)‘로 고쳤던 것을 처칠이 ’적절한 시기에 (in due corse)‘라는 영국 수상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으로 재차 교정하여 카이로 선언에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로 선언은 독립을 고대하던 한국인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으나, 그 후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 이유는, ① 트루먼 회고록에 의하면 루스벨트는 한국 독립의 적절한 시기를 ‘약 40년으로’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② 소련의 동의와 협조가 선결 조건이었던 점, ③ 극동의 주도 세력을 국민당 정권이 장악할 것이라는 가정, ④‘적절한 시기’까지의 한국 통치 기구의 형태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등이었다. 그리고 이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결의는 그 후 테헤란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 회담에서 스탈린의 원칙적 동의를 얻었다.
이 결의는 그 뒤 포츠담 선언에서도 재확인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은 이미 약속된 것이었다.

▨ 미국과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
1945년 8월 9일,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둔 시기에 소련은 대일전에 참전하여 150만의 병력으로 만주와 한반도 동북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한반도에 침입한 소련군은 8월11일에 웅기를 점령하고, 12일에는 나진, 14일에는 청진과 나남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한 후 소련군은 8월 21일에 함흥과 원산에 들어왔고, 23일에는 개성에, 24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한편, 미군은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하였고, 9월 9일에 일본 총독으로부터 서울에서 항복을 받았다. 미군은 9월 13일에 개성에 진주하였고, 16일에는 부산에, 27일에는 전주에, 그리고 10월 5일에는 광주에 진주하였다. 이리하여 북한에는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고, 남한에는 미국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민족이 열망하던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의 실현이 어렵게 되었고, 미․소의 군대가 실시하는 군정이 민족 분단을 점차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 독립 투사들의 귀국
1945년 8월 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은 후, 국외에서 독립 투쟁을 계속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들은 서둘러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활약하던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보다 먼저 귀국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10월 16일에 미군 비행기를 타고 유력한 독립 투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귀국하였다.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와 임정 요인들 제1진은 미국의 반대로 임시 정부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11월 23일에 미군 비행기로 귀국하였고, 김원봉 등 임정의 제 2진은 12월 1일 귀국하였다. 한편, 조선 독립 동맹의 김두봉, 최창익 등은 12월 1일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 모스크바 3상 회의와 신탁 통치 문제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미국 국무 장관 번즈는 소련 외상 몰로토프가 제안한 소련측의 수정안을 미국측의 제안과 절충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12월 27일에 한국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회의 결정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좃6을 민주주의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속히 일본의 조선 통치으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해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 인민의 민족 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취할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② 조선 임시 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안을 연구, 조정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 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 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 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의제 작성에 있어, 공동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들이 작성한 의제는 공동 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의 4국 정부에 그 참고에 공(供)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③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가치 발전과 독립 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 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 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 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 통치의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④ 남북 조선에 과련된 긴급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 남조선 미 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군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신탁 통치는 도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독립할힘을 기를 때까지 강대국이 일정 기간 통치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식민지 지배와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의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은 한국민에게는 모욕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을 논의하기 위하여 1946년 3월에 서울의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미․소 공동 위원회는 임시 정부 수립을 함께 협의할 정당, 사회 단체를 선정하는 문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리하여,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5개월에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고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 의 의견 대립으로 1947년 10월에 결렬되었다.

2. 대한 민국의 수립

▨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설치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소련은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이 모스크바 협정에 위반된다고 반대하였으나, 유엔 일반 위원회는 12 대 2로, 유엔 정치 위원회에 회부하였다. 유엔 정치 위원호에서 미국은 선 정부 수립, 후 외군 철수를, 소련은 선 외군 철수, 후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또, 소련은 남북한 대표의동시 초청을 우선적으로 주장하였고, 미국은 남북한 대표의 선정을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UNTCOK)의 설치를 오구하였다. 결국, 소련의 제의가 부결되고 미국의 제의가 가결되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설치되었다.

▨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
남북 협상은 1948년 2월에 김구와 김규식이 북쪽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협상을 제의하여 실현되었다. 당시,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자,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을 반대하고 북쪽에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던 것이다. 이 제의에 대하여 북쪽이 응하게 되자, 남북 협상이 1948년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까지 진행되었다.
남북 협상은 독립 운동 세력의 통일 전선론과 그 맥이 통하는 것으로서, 주체적 평화 통일론에 입각한 통일 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하여 이루어졌으나, 남한과 북한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 정부의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은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을 위한 노력이었고, 이것은 남북 분단을 회피하기 위한 주체적 평화 통일론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 반민족 행위 처벌법
1945년 8월 이전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1948년 9월 제정된 법률이다. 우리 민족은 20세기 초에 일제의 침입을 받아 1945년에야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났다. 이 일제 침략기 동안 각 독립 운동 단체는 일제에 협력한 자의 처벌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으며, 광복 후 각 정치 단체는 미 군정 당국에 이들의 제재를 요구하였으나 미 군정 당국은 이들의 상당수를 군정청에서 이용하였으므로 처벌에 반대하였으며, 1947년 7월 과도 정부 입법 의원은 ‘민족 만역자, 부일 협력자, 모리 상간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나, 미군정청의 반대로 공포되자 못하였다. 그러나 1948년 3월 군정 법평 제 175호 ‘국회 의원 선거법’에서 친일 분자의 국회 의원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제한하였으며, 이 법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 의원이 제정한 헌법 제 100조에서는 이들을 소급 입법에 의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이 헌법 조항을 근거로 제정된 법률이 바로 이 법률이다.다. 친일 행위를 한 자를 그 가담의 정도에 따라 최고 사형까지의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밖에 재산 몰수, 공민권 정지의 조처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를 두어 조사 보고서를 특별 검찰부에 제출하도록 하고, 대법원에 특별 재판부를 두어 재판을 담당하게 하며, 특별 재판부에 특별 검찰부를 설치하여 공소를 제기하도록 하였다. 재판은 단심제로 하고 공소 시효를 법률의 공포일로부터 2년이 되는 1950년 9월 22일까지로 하였다. 그러나 이 법률은 제정 당시부터 친일 분자의 견제를 받았으며, 특히 일제 강정기에 관직에 있던 자를 중용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949년 6월에는 특별 조사 위원회가 일제 강점기에 헌병 또는 경찰로 친일 행위를 한 경력이 있는 경찰 간부를 조사하자 경찰이 특별 조사 위원회 사무실에 난입하여 직원을 연행하고 서류를 압류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친일 분자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던 일부 의원이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러자 같은 해 7월 법률이 갱정되어 공소 시효가 1949년 8월로 앞당겨지고, 1949년 9월 다시 법률이 개정되어 특별 조사 위원회, 특별, 재판부, 특별 검찰부를 해체하고 그 기능은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이관되었으며, 이 업무는 1950년 3월까지 대법원 대검찰청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680여 명이 조사받았으나 결국 집행 유예 5인, 실형 7인, 공민권 정지 18인 등 30인만이 제재를 받았고, 실형의 선고를 받은 7인도 이듬해 봄까지 재심 청구 등의 방법으로 모두 풀려나 친일과의 처단은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의 구성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각 도에 인민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뒤이어, 시, 군, 면의 각급 지방 인민 위원회도 1945년 11월까지는 조직을 완료하였다.
한편, 소련군 사령부를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립하게 하고, 33세의 김일성(본명 김성주)을 내세워 공산당을 결성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12월에 열린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 3차 확대 집행 위원회에서 김일성이 당 책임 비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의 당권 장악과 함께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이란 명칭이 말소되고, 북조선 공산당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김일성이 당권을 장악한 후 2개월 이내에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수립되고, 김일성이 그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 기구는 소련 군정의 철저한 대행 기관이었고, 소련군 사령보의 명령과 엄격한 감독을 받았다. 그리고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1947년 2월에 북조선 인민 위원회로 변경되었고, 이것이 1948년에 인민 공화국으로 개칭되어 북한 단독 정권이 수립되었다.

▨ 6․25 전쟁의 기원
197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6․25 전쟁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연구의 경향은, 전통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견해로 대별할수 있다. 전통주의적 해석은 ① 스탈린 주도설, ②중국과 소련의 공모설 등이 대표적이다.
스탈린 주도설은 “6․25 전쟁은 스탈린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되고 주도되었다.”는 달린(DallinDavid)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학설은 1970년에 간행된 소련 공산당 제1서깅 겸 수상이 었던 흐루시초프
(Khrushchrov, S. Nikita)의 회고록의 내용에 따라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6․25 전쟁은 스탈린의 구상이 아니라 김일성의 구상이었다.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과 소련의 공모설은 중국의 소련의 주도 아래 6․25 전쟁의 계획과 추진에 적극 참여했다는 주장과 중국은 거의 참여하지 않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주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늘날 학계의 정설은 중국의 6․25 전쟁의 계획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북한의 승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의 준비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수정주의적 견해는 6․25 전쟁의 기원에 대한 책임을 공사권이 아니라 서방권에서 찾았다. 여기에는 ‘남침 유도설’등이 포함되는데, 북한의 남침에 의해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최근에는 수정주의 학파에서도 북한의 남침설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김학준 교수의 결론은, 6․25 전쟁은 소련이 지원한 북한주도의 남침이라는 것이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체결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되었고, 그 직후인 8월에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서울에서 가조인되었다. 그리고 10월1일에 미국의 워싱턴에서 한국의 변영태 외무 장관과 미국의 덜레스 국무 장관이 정식 조인하였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미국은 군사 동맹의 관계에 돌입하였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은 주한 미군의 존재에 의해 상징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방위 조약의 협상 과정에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 통제권이 휴전 후에도 유엔군 사령관에 귀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상호 방위를 위하여 타국과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동맹을 체결한 국가는 미국이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이다.
〔성격〕한․미 상호 방위 조약은 평화 애호와 방위에 바탕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의 정신을 준수함으로써 국제 평화 유지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특히,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평화를 희구하기 위하여 지역 집단 안보를 추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반공 이념의 대표 국가인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공산 침략 방위를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우호 관계나 동맹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소련의 세력 팽창을 저지하는 데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미국은 태평양 세력 국가로 등장하면서 제일 먼저 소련의 팽창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팽창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급속도로 증가되어 미국의 방위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공산 침략에 대한 공동 방위를 목적으로 한 양국 간의 전형적 집단 안전 보당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체결 경위 및 내용〕이 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위싱턴에서 변영태(卞榮泰) 외무 장관과 덜레스(Dulles,J,F.)국무 장관이 서명한 것을, 한국 국회와 미국 상원의 동의를 거쳐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아이젠하워(Eisenhower,D,D.) 대통령이 비준함으로써 1954년 11월 17일부터 발효되었다. 6․25 전쟁 당시 한국 정부가 휴전에 반대하여 국토 통일을 주장한 반면, 미국은 조속 한 휴전 전략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에 미국 정부가 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일련의 공약 중의 하나가 조약의 체결이다. 이 조약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공산주의자들의 오판에 의한 재침 방지이다. 둘째, 한구 정부나 국민들에게 외부로부터 침략이 있을 때 미국의 개입을 정식으로 확약하는 것이다.

▨ 발췌 개헌과 사서 오입 개헌
역사적인 5․10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된 후 2년 만에 5․30총선거가 1950년에 실시 되었다. 제2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30총선거에는 제헌 의원 선거 때 불참하였던 남북 협상과들이 참여하여 무소속으로 다수 진출하였다.
이에, 2대 국회에서는 이승만의지지 세력이 1/4에 불과하였고, 한민당도 24석밖에 얻지 못하였다. 전체 210석 중에서 야당 인사가 많은 무소속이 128석이나 차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헌법 규정에 따라 1952년에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면 이승만은 재선될 가능성이 없었다. 이에, 대통령 이승만은 6․25 전쟁의 와중에서 1952년 7월에 계어령을 선포하고,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무리하게 통과시켜 직선제에 의한 재선의 길을 마련하였다.
대통령에 재선된 이승만은 3대 국회가 1954년에 개원하자, 지지 세력인 자유당 의원들을 동원하여 그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1954년 12월 28일에 이른바 사사 오일 개헌안이 통과되었고, 이후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 정권이 1960년까지 계속 집권하였다.

3.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 내각제 개헌과 7․29 총선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을 계승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부정 선거를 감해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은 3․15부정 선거와 자유당 정권의 독재 및 부패에 항거하여 4․19혁명을 일으켰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어서, 허정 과도 내각이 수립되었고, 민주당이 주도하여 1960년 6월 15일에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새 헌법에 따라 7․29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233명 중 175석, 참의원58명 중 31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7․29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어 격심한 대립을 보였으며, 대통령은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되었고, 국무 총리는 신파의 장면이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으나, 민주당의 분열 때문에 정치적 안정을 기하지 못하였다.

▨ 4․19 혁명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배경] 민주적 교육이 비민주적으로 되어 가고 대규모의 부정 선거가 자행되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는 사람이 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을 만회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여러 문제로 관제대중 동원을 하였다. 관제 대중 동원은 초기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점차 효과도 없어지고,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도 사라져 그의 권력 유지는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원인] 4․19 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1960년 3월 부정 선거이다. 이 때, 실질적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승만의 강력한 대인 조병옥의 고령의 나이로 인하여, 실제 경쟁은 부통령 선거에서 벌어졌다. 당시 부통령 후보로는 현직 부통령이던 장면과 이승만이 밀어 주는 이기봉이 대립하였는데, 선거 과정에서 선거 결과 까지 공무원들에 의하여 완전히 날조되어 결국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때 마산에서 김주열의 시체가 발견되자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뛰어나오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전개] 4․19 혁명 전 수 주일 동안 주로 지방의 고등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으나 이승만은 상황을 이해하지 하지 않았으며, 마산 의거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 매도하였다. 이것은 학생들을 더욱 격분하게 했으며, 4월 18일 고대생 습격 사건이 발생하자 드디어 4월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수천 명이 경무대로 돌격하였다. 이에 경찰은 발포로 대응하였고 학생들의 시위는 혁명으로 변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서 발포한 직후 계엄령이 발표되었지만, 군대는 질서와 치안만을 신경 쓸뿐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다. 19일 이후 연일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21일 내각이 총사퇴하였으며, 그 다음 날 이승만은 허정을 정부 각료로 임명하고, 민주화를 약속하여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사태는 급변하여 25일 대학 교수단의 시위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다시 의원 내각제를 제시하였으나, 결국은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하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과도 정부의 수립과 전개〕4.19혁명 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학생과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허정 과도 정부는 이승만 정권의 계승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배후에 조직화된 정치 세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힘의 기반을 두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깨뜨려야 하는 모순 된 과업이 주어졌다. 따라서, 허정 과도 정부의 정책 및 혁명의 뒷마무리는 비혁명젹이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거 부정 행이자와 경찰에 대한 재판은 비혁명적이었으며, 이것은 학생과 시민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허정 과도 정부의 보수적이고 온건한 문제 접근 방법으로는 일반 국민들을 만족시켜 줄 수가 없었을뿐더러, 경찰의 권위주의적 성격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의의〕1960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이승만 정부의 권력 구조와 정치 의식과 학생들의 가치관과의 사이에 크고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었다. 4.19혁명은 이승만과 그의 지지 세력에 대항하는 학생과 시민 세력에 의한 혁명이었다.

▨ 5․16 군사 정변
장면 내각은 민주당의 분당으로 안정된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정국의 불안이 계속되었다. 또, 각종 시위 사태가 계속되어 사회 불안이 고조 되었다. 이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1961년 5월 16일에 군사 정변을 일으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정 기간 동안의 최고 권력 기구는 국가 재건 최고 회의였으며, 군사 정부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 등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5.16 군사 정변으로 성립된 군사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하고, 미국 등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구악을 일소하고 민생고를 해결하며, 양심적인 정치인에게로의 정권 이양 등을 내용으로 한 6대 공약을 내세웠다.

▨ 3선 개헌과 유신 체제
대통령 중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이제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소위 3선 개헌에 착수하였다. 당시 헌법이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1971년에 있을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69년 1월에 공화당이 3선 개헌을 검토하고 있음을 공식 발표하자 당시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 공화당 내에서는 박정희의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김종필이 이에 반발하였고, 신민당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항하였으며, 학생들의 시위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러한 반대 의사를 모두 무시하고 개헌을 강행하였다. 결국 개헌안은 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철야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국회 별관에서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전격적으로 통과되었고(1969. 9), 뒤이은 국민 투표에서 가결됨으로써 새 헌법으로 확정되었다.(1969. 10. 17).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3선 개헌에 따라 재출마가 가능해진 박정희가 공화당으로 입후보하였고, 신민당에서는 소위 40대 기수론에 의하여 김영삼․김대중․이철승이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갬대중이 입후보하였다.
이 선거의 결과 박정희가 53.2%의지지를 획득하여 45.3%를 얻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되어 제 7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한편,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역시 공화당이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신민당과의 의석 차는 상당히 좁혀진 것이었다.
3선 개헌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서 이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격심하게 일어났다. 게다가 닉슨 독트린과 미군 철수, 닉슨의 중국 방문 등 국제 상황의 변화도 박정희 정부가 짊어지게 된 커다란 불안 요인이었다. 더욱이,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의 발표에 따라 남북 조절 위원회가 설치되고 남북 대화가 시작되었지민 그것이 곧 난관에 부딪히자, 이에 박정희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장기 집권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내세워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과 정치 활동의 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비상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비상 국무 회의에서 의결․공포한 유신 헌법을 국민 투표에 부친 결과 90% 이상의 지지를 얻어 확정하였다.(1972. 11. 21). 이어서, 새 헌법에 따라 국민 투표를 거쳐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구성하, 여기서 단독 출마한 박정희가 임기6년의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10월 유신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노린 민주줒의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었으므로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긴급 조치를 잇따라 발표하여 유신 헌법에 대한 일체의 부정․비방과 개정․폐지의 주장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1978년 12월에는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박정희가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사건을 계기로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력한 시위가 일어났다.(釜馬事態, 1979. 10.16).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이 있을 때 박정희가 저격당하여 서거하는 10.26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유신 체제는 붕괴되고, 18년간에 걸친 장기간의 박정희 정부는 종말을 고하였다.

▨ 현대사의 바른 이해
한국 현대사의 이해에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사실은 다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한국 현대사의 대부분의 내용이 그러하듯이 사실에 대한 정확성의 문제이다. 사실의 실증적인 전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요구된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사를 논의할 경우 객관적인 사실의 인식보다는 일정한 선호나 취향에 따라 사실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했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정리하고 이를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둘째로, 다양한 해석에 대한 비교론적 시각을 가지는 일이다. 한 가지 사건이나 사실의 전개에 대한 수많은 평가와 해석에 다양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중 어느 하나만이 옳고 다른 것은 틀리다는 식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이러한 해석들에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스스로의 정신적인 물입이나 감정 이입에 대한 자세가 필요하다. 쉽게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은 대단히 비학문적인 태도이다. 더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위치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역사적 평가에 개입시키는 것은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학생들을 자신이 내리는 해석의 충실한 수용자로 교육시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현대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사실 전개의 연계성을 가지는 긴 시간적 흐름의 한 단면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만이 독자적으로 생겼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믈 전체 역사의 전개라는 구성체 속에서 그 사건이 차지하는 오늘의 의미가 논의되어야 한다. 역사는 아쉬움의 기록이지 결코 만족의 증거물은 될 수 없다. 학생들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을 비판하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훈의 역사로 받아들려 민족사의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새 결단의 장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점에서 현대사는 비판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넷째로, 현대사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결단으로 이어지게 하는 구체적인 논리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결단도 학생 스스로 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결단이 내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 스스로 상황을 인식하고 비판하게 하며 그 비판을 딛고 조국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결단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 현대사 교육의 의도하는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제로 한다면 현대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은 현대사에 대한 교사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방법으로 현대사를 가르치는 경우이다. 그리고 현대사를 마치 우국 지사의 양성을 위한 애극심의 고취로 밀고 가려는 것도, 또는 그와는 달리 지나치게 비난이 담긴 비판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깊은 조국애에 바탕을 둔 애정으로 잘 된 것도 잘못된 것도 받아들이면서 그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게 하는 길잡이로서의 역사 교육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현대사의 부분의 한층더 그러하다.
전두환 정부 유신 말기인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 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써 유신 체제가 붕괴되었고, 국민들은 민주화의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미 그 때는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군부가 또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억압 통치를 자행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현직 대통령의 피살이라고 하 정치적 공백 상태를 틈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불법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국민들은 군이 다시 일어날 경우, 국민들의 저항이 격렬해질 것이기 때문에 군부는 모험을 하지 않으리라고 관측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측과는 달리 신군부는 전방을 지키는 부대를 비롯하여 자신들의 휘하에 있는 군 부대를 동원하여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정병을 일으켰다.
신군부가 주도한 군사 정변은 군의 지휘 계통에 큰 혼란을 일으켜 정치 권력의 공백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신군부는 혼란 상태를 수습한다는 미명하에 1980년 5월 17일 전국 비상 계엄 조치를 내렸는데, 이는 정권 장악을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 음모는 전 국민적인 반대에 직면했는데, 이것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였다. 신군부의 불법적인 권력 탈취를 막기 위해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계엄 철폐와 민주 헌정으로의 복귀를 요구했던 것이다.
평화적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인명잉 살상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광주를 비롯하여 인근 각지로 파급되어 대대적인 민주화 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일련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정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고, 또 고통을 당했다.
12․12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5․17 계엄 확대 조치로 사실상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고 볼 수 잇다. 1차적으로 12․12를 통해 자신에 반대하는 군 내부의 세력을 제거했으며, 2차적으로는 5․17 조치를 통해 정치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인을 인위적으로 배제한 상탱를 만들었다.
신군부의 정치 권력 장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준 기관은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와 국가 보위 입법 회의였다. 현역 군인이 주축이 되었던 비상 대책 위원회는 안보 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나, 사실상 군부에 의한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해 만든 편의적 기구였다. 한편, 신군부는 입법 회의를 통해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이 때 제정된 법률의 대부분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반민주적인 것이었다.
신군부에 의한 공포 정치는 결국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켰으며, 통일 주체 국민 회의로 하여금 8월 27일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는 민주 헌정의 파괴였고, 독재 정권의 창출이었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하여 개정 헌법을 공포했고 강권 통치를 계속했다. 법치주의를 외면하고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법에 의한 통치보다는 힘에 의한 지배가 우선되었고, 권력의 사유화가 공공연히 추구되었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불법 구금, 연금, 가두검문, 연행, 고문 등이 공공연하게 자행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의 희생자뿐만 아니라, 삼청 교육대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상자, 그리고 수천 명에 달하는 공무원 및 언론인이 강제 해직은 전두환 정부 출법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보여주었다.
전두환 정부는 ‘복지 국가의 건설’을 국정 목표로 정하고 민주주의의 토착화, 정의 사회의 구현, 교육 혁신과 문화 창달을 지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의지의 표명은 다만 선언적이고 수사적인 구호에 불과했고, 실제적인 성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전두환 정부의 출법이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 최소한의 도덕성도 결여되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 노태우 정부는 여러 면에서 전두환 정부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점을 보인다. 그는 12․12를 주도했다는 궁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민정당 대표 시절 그가 발표한 6․25 선언의 핵심은 기존의 대통령 간접 선거 방식을 버리고 야당측이 요구하는 개헌, 즉 대통령 직접 선거 방식을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6․29 선언은 6월 민주 항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군부 세력이 이처럼 전략을 변경한 것은 물리적인 강압 통치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회 각 분야가 성숙했기 때문이었다. 즉, 더 이상 군사 정권으 통치를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국민적 역량이 증대된 것이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는 군사 독재의 와해 과정의 마지막을 장식한 정권임과 동시에 민주화 추진 과정의 서두를 장식한 정권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6․29 민주화 선언으로 실시된 1987년 12월의 제 13대 대통령 선거는 16년 만에 국민의 직접 투표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국민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야당에 의한 정권 교체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던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법적, 제도적 장치와 절차면에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민주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이 선출됨으로써 정치 권력이 어느 정도 정당성과 동의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직선제는 시민과 학생들이 주도한 6월 민주 항쟁으로 쟁추한 것이기는 하지만,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압적인 전두환 정부에 비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강화됨으로써 권력 균형의 원리라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노동 운동 또한 활성화됨으로써 정치 과정에의 참여와 폭이 확대되고, 국민들의 욕구 투입이 용이해졌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방 의회가 구성되어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지방 자치가 부활되었고, 언론의 자율성이 신장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노태우 정부에 대해서는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지만 이와 아울러 부정적인 평가도 빼놓을 수 없다.
우선 민주화 추세에 따른 국민들의 욕구를 적절하게 수렴하지 못함으로써 체제의 능률을 크게 저하시킨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노태우 대통령 자신이 신군부의 핵심으로 전두환 정부 출범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5공 청산에 댛나 국민적인 요구에 응하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어 우유 부단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체제의 효율성을 크게 저하시켰던 것이다.
또한 오랜 군사 통치의 권위주의적 체제에서 비롯된 부정과 비리로 인하여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하는 폐단을 빚었으며, 편의주의적 통치 행위로 인해 정책 수행의 일관성 유지가 어려워 사회의 안정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 김일성 독재 체제의 강화
북한 정권은 그 수립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법제의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줄곧 김일성 1인 체제 구축으로 일관된 과정이었다. 정권 초기의 권력 구조는 파벌 간의 연립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소련군을 따라 들어온 갑산파의 김일성이 당위원장이면서 내각 수상이었고,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연안파의 김두봉(金枓奉)이 국가 원수의 지위에 있었다. 또 남한에서 남로당(南勞黨)을 조직했다가 월북한 남로당파의 박헌영(朴櫶永)이 부수당 겸 외상이었다. 그리고 허가이(許可而)를 중심으로 한 소려파가 당과 정부 기관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전 북한 지역에서 지하 공산당 활동을 했던 국내파는 현준혁(玄俊赫)의 암살로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이들 세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존재는 김일성과 박헌영이었다. 1950년의 6․25 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권력 투쟁에서 김일성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김일성은 패전으로 인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남로당파를 속죄양으로 삼아 1952~1955년에 걸쳐 박헌영․이승엽(李承燁)․이강국(李강國) 등 남로당계 지도급 인물들을 ‘미 제국주의의 고용 간첩’으로 단죄하였다. 1956년에 집어들어 북한에서는 군수 공업을 위주로 한 중공업 우선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이 팽배하였다. 또, 흐루시초프의 스탈린겨가 운동과 개인 숭배 반대 연설에 고무받은 소련과․연안파로부터 김일성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는 등 김일성은 또 한 차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중․소 대립이란 상황을 이용하여 김두봉․최창익(崔昌益)․박창옥(朴昌玉) 등 연안파와 소련파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전 지역적으로 ‘중앙당 집중 지도 사업’이란 이름으로 주민 들에 대한 사상 검토 작업을 전개하여 1인 지배 체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김일성의 권력 강화는 1960년대 말 자기 파인 갑산파에 대한 숙청으로 보다 확고해졌다. 군사력강화보다 경제 건설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박금철(朴金喆)․이효순(李孝淳) 등이 숙청되었고, ‘김일성 사상’을 당의 유일 사상으로 규정할 것을 공식 선언하였다. 또, 대남 전략에서 이견을 나타낸 김창봉(金昌奉)․허봉학(許鳳學) 등 군부파를 숙청함으로써 1970년대에 들어와 명실 공히 유일 지배 체제를 확립하였다.
19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 헌법’은 이처럼 강화된 김일성의 역할과 지위, 그리고 통제 수단을 공식화하였다. 김일성은 ‘극가 주석’의 새 직위를 차지하였고 신설된 초내각격인 중앙 인민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4.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

▨ 광복 후의 경제 혼란
1945년 광복 당시 한반도 내의 민족 자본은 전체 기업 회사의 자본 중에서 11%를 차지할 정도로 미약하였다. 한국 내의 근대 공업은 일본 자본이 지배하였고, 기술 역시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8․15 광복 후 일본인이 철수하고 일본과의 경제 교류가 끊기자, 한국 내의 공장은 가동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광복 후 38도선을 경게로 남북이 분단되자, 두 지역의 경제적 혼란은 더욱 심회되었다. 식량 생산은 남한이 북한보다 우세하며 미곡의 74.6%, 맥류의 75.8%를 생산하였으나, 공업 원료가 되는 지하 자원은 북한 지역에서 다량으로 산출되었다.
주요 동력원인 전력은 거의 대부분이 북한에서 발전되었고, 남한은 겨우 8%를 차지하였다. 석탄도 남한의 생산량은 21%에 지나지 않았고, 주요 공업 원료가 되는 철광, 텅스텐, 흑연, 금, 은 등도 70% 이상이 북한에서 산출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북 분단으로 양 지역 간의 화물 유통이 단절됨으로써 광복 직후의 경제적 혼란은 매우 심하였고, 국민의 생활난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복 직후 수송 기관의 마비로 물자가 제대로 유통되지 못하여 식량과 연료의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물가는 폭발적으로 상승하였다. 물가의 폭등은 패전 직후 조선 총독부가 20여일의 공백기에 조선 은행권을 30여억 원이나 불법으로 발생하여 이룬인들에게 배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1945영 8월 15일 당시 49억 7500만원이었던 조선 은행권이 조선 총독부의 불법 발행으로 8월 31일에는 79억 8700만원으로 급증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통화의 급격한 증가, 물자의 부족, 경제 유통의 경색과 이에 대처하는 미 군정 당국의 신속한 정책의 부재 등으로 말미암아 공복 직후의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 농지 개혁법의 제정
1945년 9월에 미 군정이 실시되면서, 맨 먼저 취한 토지 정책은 미 군정 법령 제9호에 의한 소작료 1/3제 실시 및 소작 조건의 개선이었다. 이어서, 미 군정은 일본인이 소유하였던 농지를 신한공사(New Korean Company)에서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 관리 면적은 경지 면적의 13.4%를 차지하였다. 특히, 전라 남북도의 경우에는 신한 공사가 관리한 일본인 적산 농지는 각각 경지 면적의 24%, 28%나 되었다.
또, 미 군정은 1946년 12월에 과도 입법 의원의 개설을 강행하고, 1947년 초에 농지 개혁 법안을 우선적으로 제정하도록 촉구하였다. 미 군정 당국은 농지 개혁안을 입법 의원에 제시하였으나, 1948년 3월에 입법 위원이 해산될 때까지 농지 개혁안은 통과되지 못하였고, 결국 이 문제는 대한 민국 정부의 과제로 농지 개혁법을 마침내 제정, 공포하였고, 1950년 3월에 대통령령 제 295호로 실시하였다.
농지 개혁법의 내용은, 첫째, 3정보를 초과하는 농가의 토지나 부재 지주의 토지를 국가에서 유상으로 매수하고, 이들에게 지가 증권을 발급하여 농지의 연 수확량의 150%를 한도로 5년간에 보상하도록 하였으며, 둘째, 국가에서 매수한 농지는 영세 농민에게 3정보를 한도로 유상 분배하고, 그 대가를 5년간에 쳐 수확량의 30%씩 상환곡으로 수납하게 하였다.

▨ 새마을 운동
1970년부터 정부는 농어촌의 근대화와 소득 증대를 위하여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였다. 소득 증대를 위하여 새마을 운동은 자조, 자립, 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국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농어촌에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도시 새마을 운동과 공장 새마을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동남 아시아에서는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빈곤과 후진성을 극복한 성공 사례로 인정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이란 근면, 자조, 협동의 기본적인 정신과 실천을 범국민적 및 범국가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총체적인 현대적 국가 발전을 가속적으로 촉진시키려는 목적하에 행해지고 있는 지역 사회 개발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정의는 논자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여기서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정의를 해 보겠다.
첫째, 한국 고유의 농촌 종합 개발의 성공적인 유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 새마을 운동이 도시 지역에도 확대되어 이른바 도시 새마을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서 범국민 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 새마을 운동이 지역 사회 개발의 본질을 지닌다고 보는 시각이다.
〔배경〕1970년 초의 전국 지방장관 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농민, 관계 기관, 지도자 간의 협조를 전제로 한 농촌 자조 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는데, 이것이 새마을 운동을 기획, 집행한 역사적 발단이 되었다.
〔결과와 문제점〕애당초 농촌은 겨냥한 새마을 운동의 발의, 전개는 적지 않은 도전도 겪었지만, 전통적 체제하의 농촌을 현대적인 것으로 전환하도록 충격을 가하는 데 있어서 크게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그러나 농촌을 겨냥한 이래 공식적인 성과와 사업 대상자인 국민의 평가 사이에는 적지 않은 괴리가 생기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현대 문화의 동향

▨ 7․4 공동 성명
1972년 7월 4일에 남북한은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공동 성명의 주요 내용은 평화적․자주적 통일, 민족의 대단결, 긴장완화와 신뢰 분위기의 조성, 서울․평양 간의 직통 전화 가설, 남북 조절 위원호의 설치 등이었다. 이 7․4 공동 성명은 민족 통일 문제의 원칙에 남북한이 합의했다는 점에서, 분단 이후 남북한 정부에 합외된 최초의 공동 성명 발표라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다.

▨ 남북 조절 위원회의 성립
7․4공동 성명에 따라 남북 위원회가 성립되었다. 남북 조절 위원회에 제1차 공동 위원장회의가 1972년 10월에 판문점에서 개최되었고, 제2차 공동 위원장 회의는 11월에 평양에서 개최되었으며, 제3차 공동 위원장 회의는 1973년 6월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북한측은 1973년 8월에 대화 중단의 성명을 발표하고 직통 전화도 단절하였다. 이리하여 1년간 계속되던 남북 회담은 중단되었으며, 남북한 사이의 통로는 막히고 말았다.

▨ 1949년의 교육법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정부는 1949년 12월에 교육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 교육법의 제1조는 교육의 근본 이념을 ‘홍익 인간’으로 규정하였다. 미군정 시기에도 교육 심의회를 통해서 홍익 인간의 이념은 결코 편협하고 고루한 민족주의 이념의 표현이 아니라. 인류 공영의 뜻으로서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과 완전히 부합되는 이념이며, 우리 나라의 건국 이념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 정신의 정수라고 구명하였다. 또, 이념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심과도 상통하는 전 인류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교육법 제8조에는 모든 국민이 6년간의 의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고, 국가와 지방 공동 단체는 의무 교육을 위하여 필요한 학교를 설치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 교황의 방한과 103위 순교자의 시성
한국 천주 교회는 1969년 11월부터 우리말 미사경문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서울 대주교인 김수환이 1969년 3월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것과 함께 한국 천주 교회의 발전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 후, 1984년 5월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였고, 100만의 신도가 운집한 여의도 광장의 집회에서 교황이 직접 참석하여 103위 순교자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들 순교자는 대부분의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순교한 신자, 신부, 주교 들이 었으며, 그 가운데는 한국 땅에서 순교한 프랑스신부와 주교 10명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상재전서를 쓰고 천주교 조선 교구의 독립에 힘썼던 정하상 등도 시성되었다.

▨ 광복 직후 문단의 양분
8․15광복 직후에는 문학인들이 각종 문학 단체를 결성하였다. 광복의 다음 날인 8월 16일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 2세대의 주역이었던 임화가 중심이 되어 조선 문학 건설 본부가 조직되었고, 9월 17일에는 이기영 문학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2월 23일에는 위의 두 단체가 통합하여 조선 문학가 동맹이 조직되었고, 좌파 문인들이 여기에 집결하였다.
한편, 우파 문인들은 9월18일에 변영로, 박종화, 김영랑 등을 중심으로 중앙 문학 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좌익측에서 1946년 2월에 조선 문학자 대회를 개최하자, 우익측도 3월에 전 조선 문필자 협회를 결성하였다. 이데, 광복 후의 문학계는 전 조선 문필가 협회 내의 문인들이 다시 결성한 우익측의 조선 청년 문학가 협회와 좌익측의 조선 문학가 동맹으로 양분되어 그 대립이 날로 심해졌다.

▨ 식민 사관의 극복
일제 관학자들이 일제의 식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주장하였던 이른바 식민 사관 또는 식민주의 사관으로 1960년대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비판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기백 교수는 ‘국사신론’의 서론에서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 사관을 비판하고 한국사의 올바른 인식에 장애가 되는 그릇된 모든 선입관과 이론을 속히 청산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김용섭 교수는 ‘일제 관학자들의 한국 사관’과 ‘일본․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사 서술’을 써서 식민 사관의 핵심적 기본 요소인 한국사의 타율성 이론과 정체성 이론을 설명하고 이를 비판하였다. 또, 김용덕 교수도 ‘일인의 한국 사관 비판’을 써서 일본인 학자들의 왜곡된 한국 사관, 특히 사대주위와 당쟁이 한국인의 민족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그들이 주자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1969년에는 잡지 ‘아세아’의 3월호에 ‘새로운 한국 사상의 극복’, 이기백 교수의 ‘사대주의론의 문제점’, 김영요 교수의 ‘한국사 정체성론의 극복의 방향’ 등이 실렸다. 이와 같이, 일제 관학자, 어용 학자들의 식민 사관은 1960년대에 크게 비판을 받았고, 또한 극복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제국주의 시대

15세기 이래로 전개되었던 식민지 쟁탈 경쟁은 18세기 말 이후에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각국은 국내의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되어 식민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 혁명의 진전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본국의 공업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확보와 상품의 시장 또는 이민 대상지로서의 식민지가 개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달이 독점 자본주의 또는 금융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잉여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자본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특히, 1870년대 말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극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이 격렬해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19세기 말의 식민지 경쟁은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대외적 위신과 관련되어 각국은 식민지 확보를 가장 중요한 우선 정책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대상 지역도 전세계의 후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각국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보 정책과 이와 관련되어 경쟁 국가에 대항하는 정책을 세계 정책이라고 하고, 이러한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라고 하며,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1870년대 말부터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진출은 경제적 종속과 함께 정치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후진 지역의 전통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변화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각국이 근대화 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적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이는 무력 충돌로 확대되어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19세기 말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 홍선 대원군의 집권

1863년 말 철종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후계자를 둘러싸고 조야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오랫동안의 세도 정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해 오던 안동 김씨 세력이 후계자 문제에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 동안 안동 김씨 세도가에게 억눌려 불우한 생활을 해 오면서도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던 흥선군 이하응과, 역시 안동 김씨의 세력에 반발을 하고 있던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익종으로 추존됨.)의 비인 신정 왕후 조씨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세력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되어, 궁중의 제일 어른의 자격으로 12세 된 흥선군의 둘째 아들에게 후계를 명하니 이가 고종이었다.
그리하여 홍선군 이하응은 왕의 생부로서 홍선 대원군이 되어 국왕이 아직 어린 이유로 자신이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선 대원군의 왕실 제보를 보면 도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정조의 이모제(異母第)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한 사람이 16대 인종의 왕자 인평 대군의 6세손인 남연군이었다. 이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흥선군은 익종(즉, 효명 세자)과 정조의 이모제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과 같은 항렬이 된다. 그러므로 신정 왕후 조 대비는 흥선 군의 아들에게 익종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나아가 안동 김씨에 대해 풍양 조씨의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국왕을 낳은 생부에게 주어진 명칭으로서, 선조가 즉위하자 그의 생부 덕흥군이 덕흥 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이 즉위하여서는 전계군이 전계 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망 후에 대원군의 추존을 받았으나 홍선 대원군은 살아 잇는 대원군으로서 조선 역사상 유일한 경우였으며, 왕이 아직 나이 어리니 국가의 전권을 잡고 야심찬 정치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 19세기 중엽 국내외 정세

1860년대 전후의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커다란 변화와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년 간 계속된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지방 양반과 관리들에 의해 수취 체제 특히 삼정이 그 상궤를 벗어나 운영됨으로써 민생이 파탄에 빠지자 조선 후기 이후 경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성장하고 있던 농민 의식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1862년 진주에서 비롯된 임술 농민 봉기(壬戌農民蜂起)는 삼남 각지에 삽시간에 파급되어 갔다. 이는 당시의 농민들이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와 이를 운영하는 양반 세력에 대항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농민 의식을 대변하여 농민들이 추구하는 변화를 지향하며 전통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현실 사회에 비판적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동학은 조선 왕조의 정치적, 사회적 지배 체제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왕조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확보를 목표로 하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진행되는 시기로서, 일본이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중국은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굴복한 후에 1856년 애로호 사건의 결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굴복하였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연해에는 서양 선박들이 표착하거나 접근하여 와 한국인들의 두려움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함락 소식은 동일한 문화권인 우리 나라에도 서양인들이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안으로 전통 체제를 위협하는 농민들의 봉기, 밖으로 식민지 침략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접근은 국가의 자주권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대내외로 위기에 당면한 당시 조선 왕조로서는 이에 대처하는 정치 개혁이 필수적인 시대 상황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 통상 수교 거부 정책

1863년 말 집권한 홍선 대원군은 서양과 일본의 통상 수교 요청을 반대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천주교를 박해하여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를 다수 처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며, 통상을 요구하는 제너럴 셔먼 호의 침몰에 대한 책임 문제를 들어 강화도에 침입하여 수교를 강요하면 미국을 격퇴하였다. 일본의 수교 요구를 서계(書契) 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일반적으로 쇄국 정책으로 표현하여 왔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추진된 것이다. 천주교의 박해도 천주교도들이 그 신앙 문제와 관련시켜 외세와 연결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실제로 1860년 이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월경하여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하여 베이징을 함락시킨 것도 1860년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침략의 시작이 통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당시에 열강의 통상 및 수교 요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는 침략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홍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외세, 즉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이었으며, 이는 민족의 이익과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 윤리와 체제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타협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보수성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였다. 종래 쇄국 정책에 대한 설명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이고 고루한 정책으로서, 이로 인해 한국의 서양 문물 수용이 늦어졌으며 근대화에 지각하게 되었다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 통상이나 수교를 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으며, 이를 거부하는 조선 왕조의 정책이 그들에게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쇄국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은 동양 3국(중국, 일본, 조선)이었으며, 이들 3국은 그들의 침략 대상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해 쇄국 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들의 이익이 수반된 수교 요구를 조선이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쇄국 정책은 침략자가 그들의 국가 이익의 차원에서 상대방을 폄하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홍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강요로 맺어진 강화도 조약과 이로 인해 이루어진 개항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공헌이라는 것을 보다 과장하기 위해서도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비판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쇄국이라는 의미가 국가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침략 세력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음이 역사적 진실이라면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 수호를 위한 정책을 비판하는 결과이다. 쇄국 정책이라는 표현은 주체적인 역사 이해의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과거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일본이나 서양의 침략적 성격에 대응하여 자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 호포법(戶布法)의 실시

조선 왕조의 재정 수입은 농민들이 부담하는 조세 징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조선 왕조의 수취 체제(收取體制)의 대표적인 내용은 삼정(三政)으로 표현된다. 이 가운데 군정(軍政)에 해당하는 군포의 수납은 영조 때 균역법에 의해 농민의 부담이 감소되었으나, 양반들은 면제되었으며, 이전부터 관행으로 내려온 각종의 부정이 자행되어 농민들의 부담은 많아지고, 이에 대한 불만이 높아 갔다. 1862년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安劾使) 박규수(朴奎壽)는 민란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이의 개혁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삼정이정청(三政嫠正廳)을 설치하고 삼정의 개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동포제(洞布制)로서 일부 양반에게도 군포의 부담을 의무화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정이 정청의 개혁안은 철종이 곧 죽어 시행되지 못하고 홍선 대원군에 의해 시행될 수 있었다. 홍선 대원군은 재정 수입의 증대와 농민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양반들은 그들이 평민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양반의 반발을 막고 그들의 위신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양반의 이름 대신에 하인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매호당 2냥씩 징수하는 균등 과세의 원칙을 세웠다.

▨ 서원의 정리

조선 후기에 양반들의 세력 기반의 확충을 위한 서원의 남설이 계속되어 18세기 말 정조 때에는 전국적으로 65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국가 재정의 낭비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농민들에게 많은 폐단을 주었다. 서원을 통한 지방 양반들의 횡포는 민심을 이반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경우에도 세도가에 눌려 불우한 생활을 할 때 이들 서원의 비행과 횡포를 직접 경험하면서 그 폐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집권을 하자 곧 전국의 서원과 향사(鄕祠)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명령한 후, 곧이어 서원의 사설 및 남설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1865년 3월 횡포가 극심하여 백성의 원성이 가장 높았던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유생들은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홍선 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이를 벌할 것이다.”라고 하며 강경하게 그의 의지를 실현시키며 아울러 전국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을 남겨 두고 모두 철폐하도록 하였다. 서원 정리 작업은 경복궁의 중건 사업,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는 동안일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871년 신미년에 이를 마무리지었다. 서원 정리 결과 막대한 토지가 국가에 환수되었으며, 농민들의 불법적 부담이 감소되어 크게 환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반 세력은 홍선 대원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홍선 대원군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사창제(社倉制)의 실시

홍선 대원군의 재정 확보책과 민심의 안정을 위한 개혁에서 수취 체제의 개혁은 중요한 비중을 가진다. 1867년(고종 4년) 삼정의 하나인 환곡(還穀)제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환곡의 폐단은 삼정 가운데서 가장 피해가 컸었떤 것으로, 지방에서 관리와 토호들이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는 것으로 환곡이 많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환곡은 농민 구휼책의 하나로 정부에서 면을 단위로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1/10의 이자를 받아들여 국가 세수에도 이바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곡의 배정과 운영에 있어 양반 지주와 토호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고, 각종의 불법이 저질러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이에 따른 원성이 높았다. 홍선 대원군이 실시한 사창제의 내용은 면을 단위로 하던 것을 리(里)를 단위로 하여 사창을 설치하고, 마을 안에서 덕망이 있으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사수(社首)라고 하여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사창제의 실시로 환곡의 폐단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농민의 생활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환곡제 실시에 수반되었던 각종 비리가 줄어들고 국가의 원곡(元穀)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이자 수입이 늘어나 재정 수입이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홍선 대원군의 국방 강화책

홍선 대원군은 집권 직후 서양 세력의 침략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관계를 개혁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종래에는 비변사에서 정치와 군사를 총괄하여 상대적으로 국왕의 군사에 대한 통제권이 취약하였으나, 비변사를 철폐하여 정무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삼군부에서 전담하도록 한 것이다. 군사 체제의 개편에서는 우선 수준 통제사의 지위를 격상시켜 수군을 우대하여 연안의 방비에 관심을 기울였고, 오가작통법을 부활시켜 일종의 민병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강화도를 중심으로 연안에 포대를 확충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수도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우수한 군인을 뽑아 군사 기술을 연마시키고, 특히 서북 지방의 포수를 따로 뽑아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신무기 개발에도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수뢰포와 선박 등의 제조와 실험, 방탄복의 제작 등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력 침략에 대비하여 우수한 서양 기술을 수용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 병인양요(프랑스의 강화도 침략)

병인박해를 계기로 하여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한 것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 1차는 1866년 8월 12일(양력 ; 9월 20일)에서 8월 22일(양력 ; 9월 30일)까지, 제 2차는 9월 5일(양력 ; 10월 13일)에서 10월 12일(양력 ; 11월 18일)까지이다. 12명의 선교사 가운데 3명만이 살아 남았다는 리델 신부의 소식을 들은 톈진 주재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se) 제독은 본국과 연락을 취하면서 3척의 군함으로 남양만을 거쳐 강화 수로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염창, 양화진, 서강까지 왔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7척의 군함에 6백 명의 병력으로 재차 침입해 와서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은 그들이 강화도를 점령하면 조선 정부가 쉽게 항복 하리라고 기대하였으며, 강화성을 공격, 점령하고 나서는 통진을 공격하였으며 문수산성까지 정찰하였다. 대원군을 필두로 조선 정부에서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정부는 강력하게 양이보국(洋夷保國)을 내세우면서 항전을 준비하였으며,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비밀리에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10월 3일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에 도착하자 잠복하였던 선방 포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큰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방화, 약탈하고 다수의 서적을 약탈하고 패주하였다. 프랑스군이 격퇴된 후에 조선에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며, 홍선 대원군의 서양 배척 정책은 강화되었다.

▨ 신미양요(미국의 강화도 침략)

1871년 3월 미국의 주청 특명 전권 공사인 로우(Low, F.F)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아시아 함대의 로저스(Rodgers, J.)사령관으로 5척의 군함과 대포 85문, 123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는 5년 전인 1866년 1척의 미국 상선이 행방 불명되었는데 그 소식을 알길이 없더니, 병인박해 당시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를 통해 대동강에서 서양 선박 1척이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미국 정부에서는 이를 계기로 조선에 무력적 위협을 가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정책이 결정된 결과인 것이다. 미국 군함은 남양만을 지나 강화 해협에 이르러 4월 29일 우세한 화력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병인양요 이후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고, 더욱이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을 계기로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여서 연안의 방비를 엄히 하고 있었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여기는 어재연이 경군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며, 미군의 공격에 백병전으로 저항하여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일시 광성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미군도 조선군의 저항이 의의로 완강하였으며,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미군은 광성진을 방화한 후 퇴각하였다. 광성진의 함락과 어재연의 전사는 조선의 조야에 커다란 공포가 되었으나, 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척양 정책을 표방하면서 척화비를 각 지역에 설치하여 양이 격퇴의 의지를 보였다. 앞서 프랑스군의 침입에 뒤이은 미군의 침입 사건은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지게 하였으며, 보다 강경한 양이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서양과의 수교가 더욱 시간이 지연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제너럴 셔먼 호 사건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략하기 직전인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이르렀다. 이 배에는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 W.B.)이 조선과의 교역을 트기 위해 서양인 5명과 중국인 13명을 포함한 19명과 통역으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Thomas, R.J.)가 타고 있었다. 당시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는 중군 이현익을 보내 조선이 외국인과 교역하지 않는 국법이 있으므로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그를 잡아 가두는 횡포를 저질로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으나, 물이 점차 원래의 수위로 돌아옴에 따라 셔먼 호는 강바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잡힌 중군을 구해 낸 후 박규수는 셔먼 호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려 화공과 포격을 가하여 결국 셔먼 호가 침몰하고, 승무원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 척 화 비

1871년 신미양요에서 강화도에 침략해 온 미국과 싸우는 과정에서 한동안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일시 광성진이 함락당하고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크자 이를 격퇴하는 것은 지구전으로 대항하면서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한 흥선 대원군은 국왕의 교서를 통해 “양이가 화(和)를 하고자 함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수천 년의 예의 국가가 어찌 견양(犬羊)과 상화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몇 년을 지낸다 하여도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배척할 것이며, 만약 화(和)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는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洋夷侵 非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 통상 개화론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후 척양(斥洋)․척왜(斥倭) 정책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에 일부 선각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외국과 통상을 하며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생각은 이미 실학자들, 특히 북학파들이 제기하고 있었는데 박제가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규경, 최한기 등 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에 의해 상당히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경석의 경우는 역관으로 중국에 자주 왕래하면서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 서양을 소개하는 서적을 가지고 와서 이를 서로 읽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에 관심을 가졌으며,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통상 개화론은 뒤에 개화 사상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서계(書契) 문제

1868년 일본에 새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그들의 왕정 복고 사실을 대마도주(主)를 통해 조선에 알리는 외교 문서, 즉 서계를 동래 부사에게 전하였다. 이 때, 초량(草梁)왜관에 왜학 훈도 안동준이 이 서계를 받아 보니 그 내용 속에 ‘皇上’, ‘ ’, ‘ ’ 등 중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문구가 있으며, 종래 대마도주 종씨(宗氏)가 사용하던 조선 정부에서 보내 준 도서(圖書, 즉 도장)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0년에는 일본 정부가 직접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과 교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서계의 내용을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불평 세력이 등장하였고, 이들 세력을 나라 밖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정한론이 제기되었으며, 대만 출병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일본과의 분쟁을 피하고 관계를 개선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74년 다시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서계 수용 문제가 논의되어 일본은 다시 서계를 가지고 왔으나, 그 내용에 ‘大日本’, ‘皇上’등의 문구가 여전히 들어 있어 실제로 교섭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 운요 호 사건

1875년 일본과 서계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정한론이나 대만 출병 사실과 관련하여 일본과 수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박규수, 이최응, 양헌수 등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다수 의견은 서계의 내용과 그 절차 문제 등을 내세워 수교할 수 없다는 의견이어서 협의가 결렬되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일각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의견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무력을 수반한 교섭을 강요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그리하여 1875년 4월 세척의 군함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였고 그 중에 운요 호는 부산에 입항하였다가 다시 동해에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갔다가 나가시키로 돌아갔다. 8월에는 조선의 해안에서 중국에 가는 항로를 조사한다고 하면서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다. 항로 조사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조선과의 무력 충동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하여 수교 교섭을 강요하려는 술책이었던 것이다. 운요호에서는 먹을 물을 구한다고 보트를 내려 강화도의 초지진 포대로 접근하는 외국 선박을 응징하기 위해 포격을 가하였다. 운요호에서는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와 초지진이 파괴되었으며, 돌아가던 운요호는 영종진에 대해서도 포격을 가하고 상륙하여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수교를 강요하기 위한 정략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일본의 대 한국 침략의 시발이었던 것이다.

▨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

1875년 12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구로다를 특명 전권 대신으로 하여 8척의 군함과 6백여 명의 병력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가 강화도로 향하였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대의 추가 파병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수반하여 조선을 굴복시키겠다는 계획적인 침략 행위였다. 1876년 1월 조선 신헌(申憲)을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강화도 연무당에서 담판이 벌어졌다. 회담이 시작되기에 앞서 일본은 함포를 발사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대를 상륙시키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세 차례나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례한 태도로 회담이 결렬되다시피 하였다. 고종이 정부 고관들의 대책 회의를 소집하였을 대 당시 조선 조정의 다수 의견은 일본의 침략 도전 행위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 때, 박규수는 일본과 수교를 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본이 수호를 청하면서 병선을 대기하였으니, 그 실정은 예측할 수 없으나, 수호 사절(修好使節)이라고 말하니 우리가 먼저 공격할 수 없으며, 만일 의외의 일이 일어날 경우 용병(用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천리 강토가 내수외양(內修外攘)의 방책을 다했던들 조그만 섬나라가 이처럼 우리를 감히 엿보고 공격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군대로써는 일본의 군대 힘을 막을 수 없으니 그들의 청을 들어 수호를 맺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박규수의 의견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이홍장이 조선에 대하여 일본과의 수교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내 왔다. 국내의 수교 허용론의 대두, 청국의 권고,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강압적 위협 등이 일본과의 수교 조약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접견 대신 신헌에게 “우리 나라는 일본과 3백 년 동안 통신사를 보내고 왜관을 설치, 호시(互市)하여 왔다. 비록 수 년 이래에 서계 문제로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자는 처지에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 등이 서로 편리하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신헌은 즉시 일본측과 교섭을 진행시켜 일본이 제안한 12개조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 강화도 조약의 내용

〈제1관〉 조선국은 자주지방이며 일본과의 평등지권을 보유한다. 이후 양국이 화친의 성실을 표하려 할 때에는 피차 동등한 예의로써 서로 대우하며 추호도 침월(侵越) 시혐(猜嫌)하여서는 안 된다. 우선 종전에 교정(交情)을 저해하는 환이었던 여러 예규를 일체 혁파하고 관유홍통(寬裕弘通)의 법을 개확(開擴)하여 서로 영원한 안녕을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경성에 파견하여 예조 판서와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의 장단은 모두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조선 정부 또한 수시로 사신을 일본국 동경에 파견하여 외무경과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제3관〉 이후 양국 왕래 공문은 일본의 그 국문을 사용하되 10년간은 따로 한문 역본 1통을 첨가하고 조선은 진문을 사용한다.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진에는 일본 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 구역이 되어 있다. 이제 마땅히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을 혁파하고 새로 만든 조약에 의거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또한, 조선국 정부는 따로 제 5관에 기재된 2개 항구를 열어 일본국 인민의 왕래 통상함을 들어 주어야 한다. 이 곳에 대지를 임차하고 가옥을 지으며, 혹 이 곳에 거주하는 조선 인민의 가옥을 임차함에 있어서도 각기 그 편의에 맡긴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처를 택하여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선박이 조선국 연해에서 혹 대풍을 만나거나 혹 땔감과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에 도달하기가 불능할 때에는 연안의 어떠한 항구에라도 기항하여 위험을 피하고 선구를 보충, 수선하며 땔감 등을 구입하도록 한다. 그 지방에서 공급한 비용은 선주가 배상하여야 되지만 무릇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는 지방 관민은 특별히 인휼을 가하고 구원을 다하도록 하고 보급에도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양국의 선박이 대양 중에서 파괴되어 선원이 표착하는 경우에는 그 지방 인민이 즉시 그들을 구휼, 생명을 보전하게 하고 지방관에게 보고하여 해당 지방관은 본국으로 호송하고나 그 근방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인도한다.
〈제7관〉조선국 연해의 도서 암초는 종전에 조사를 거치지 않아 극히 위험함에 일본국 항해자로 하여금 때에 따라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하고 그곳의 깊고 얕음을 살펴 도지를 편제하게 하여 양국 선객에게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도모하게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 지정 항구에 시의에 따라 일본국 상민을 관리하는 관원을 설치할 수 있다. 만약 양국이 교섭할 안건이 있을 때에는 그 곳 지방 장관과 만나 협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니 피차의 인민은 각자 임의에 따라 무역을 하며, 양국의 관리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지 못하며 제한 금지도 못한다. 만약 양국의 상민이 서로 속이거나 임차한 것을 보상하지 아니할 시는 양국 관리는 포탈한 상민을 나포하여 보상하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보상하지는 않는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항구에 재류 중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 인민과의 교섭에서 일어난 것이면 공평하게 조선국의 사판(査辦)에 돌아간다.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되 조금이라도 범죄를 비호해서는 안 되며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제11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므로 따로이 통상 장정을 만들어 양국 상민의 편의를 도모함이 마당하며, 또한 현금 의립한 각 조관 중에 다시 세목을 보완 첨가하여 조건에 준조(遵照)함에 편리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6개월 내에 양국이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 또는 강화부에 파견하여 정하게 한다.
〈제12관〉 위에서 의정된 11관의 조약은 이 날부터 준수한다. 양국 정부는 이를 변혁할 수 없으며, 영원히 신의를 가지고 준수하여 화의를 돈독히 한다. 이를 위해 약서 2통을 작성하여 양국이 위임한 대신이 각각 조인하고 상호 교부하여 빙신(憑信)으로 삼는다.
이 조약은 일본의 무력에 강요된 타율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이 미국과 체결하였던 미․일 조약의 내용의 불평등 내용을 그대로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며, 또한 조약의 내용이 쌍무적이 아니라 조선의 일방적인 의무만을 강요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근대적인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조선이 포함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근대 자본주의의 침략의 물결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의 출발이 된 것이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 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 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따.

▨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역점을 두었던 것이 개항장의 확보였다. 이를 통해 그들의 한 국 침략의 기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 조약에는 제 4, 5 관에 이에 관련된 조항으로 부산과 다른 두 개의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였는데, 두 개의 항구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에서 택하되 조약 체결 후 20개월 후에 개항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원래부터 동해안의 원산과 서해안의 인천을 지목하고 있었으나, 조선측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원산은 부근 함흥이 태조 이성계의 탄생지이며 인근에 그 조상들의 무덤이 남아 있어 이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며, 인천은 바로 서울의 인후이므로 수도의 방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 반대하였다. 그 대안으로 조선측은 동해안은 청진이나 나남, 서해안은 군산이나 목포 또는 진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원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으로서, 인천은 서울과 가까워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원산은 일본의 요구로 1879년 7월에 개항하였으나, 인천의 경우는 조선측이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1880년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할 때, 이 문제를 일본 정부 당국과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일본의 압력으로 1881년 2월 인천을 개항할 것을 결정하여 20개월 뒤인 18882년 8월에 개항하게 되었다.

▨ 조선 책략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1879년 서울에 공사를 상주시키고, 원산에 이은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곡물 수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일본 정부와 직접 협의하기 위하여 제 2차 수신사로 김홍집을 파견하였다. 1880년 5월에 일본으로 간 수신사 일행은 일본측의 회담기피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김홍집이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 청국 공사 하 여장(何如章)과 참찬관 황 쭌셴과 만나 필담을 통하여 당시의 국제 정세를 논하였다. 황 쭌셴은 청국에서는 유럽의 소식에 밝은 인물로 서양 여러 나라의 정세를 김홍집에게 알려 주었다. 특히, 그가 저술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김홍집이 가지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이 책은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기본적인 내용은 방아론(防俄論)으로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조선의 외교 방향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방으로 추진해야 될 것을 제시한 것이다. 또, 조선 책략에는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조선에서의 부정적인 생각을 해소시키려는 내용도 들어 있었으며,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서양의 다른 나라와도 수교하는 것이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정부가 미국과의 수교와 개화 정책의 추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에 반하여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1876년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과 수교를 하게 되자 구미 국가 가운데 미국이 특히 조선과의 수교를 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는 1866년 제너럴 셔먼 호의 불행한 사건과 함께 1871년 신미양요로 두 나라의 수교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조선과 수교에 성공한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 교섭을 하려 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의 독점적 활동을 위하여 다른 나라가 조선과 수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중재하기를 꺼리자 미국은 청의 이홍장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조선과의 수교가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조선과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다. 조선과의 교섭을 책임 맡은 슈펠트 제독은 1880년 7월 이홍장의 초청으로 톈진으로 가서 회담하였으며, 1881년 7월 두 번째의 회담을 하였다. 이 때,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간 어윤중이 톈진에 가서 미국과의 수교 문제로 이홍장과 협의하였으며, 1882년 영선사 김윤식이 톈진에 오자 그도 이홍장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여 미국과의 수교 윤곽이 잡혀 나갔다. 이홍장이 조선과 미국꽈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외국과의 수교를 중재함으로써 조선에 청의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것과, 외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청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알려 그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조선에서 독점적인 일본의 지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미국과의 조약문은 조선 대표들이 참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청과 미국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1882년 5월 조선 대표인 신헌은 도장만 찍었을 뿐이었다. 조․미 통상 조약은 전문 14개조로 되었으며, 그 내용은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과 큰 차이가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다만, 제 1 관에 양국은 서로 거중 조정(居中調整 ;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뒤에 조선과 미국이 각각 그 해석에 있어 견해를 달리하였는바, 조선에서는 동맹 조항으로서 공수 동맹 또는 군사 동맹으로, 미국에서는 외교적인 우호의 표시로 해석하였다.
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 수신사 김기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측이 사신을 파견해 주기를 요청하자 의례적인 형식으로 조선 정부에서는 예조참의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3개월 만인 1876 4월 29일 일본측이 주선한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가서 20여일 동안 도쿄에 체류하였다. 수신사 일행은 75명으로 일본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전신, 철도, 군함, 대포 제조, 군사, 기계, 학술, 교육 등 각분야를 시찰하면서 일본의 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하였다. 일본은 수신사를 통하여 일본의 발전 모습을 조선에 보임으로써 그들의 힘을 과시할 필요에서 수신사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김기수는 귀국 후에 국왕에게 복명하면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국왕에게 소개하였으며, 국왕의 개화 의욕을 북돋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귀국 후에 지은 일동기유(日東記遊)는 일본의 개화된 모습을 알려 주고 있다.

▨ 수신사 김홍집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해결해야 될 현안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측에서는 현안 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실정을 보다 상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제 2차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현안 문제는 일본이 1879년 원산의 개항을 요구하면서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자 이에 대처하는 문제와 미곡의 유출을 줄이는 것과 관세 배상 문제 등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김홍집을 수신사로 임명하였는데, 그 일행 가운데 주요 인사들은 윤웅렬, 이조연, 강위, 지석영 등이 포함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수신사 일행에 대한 접대는 후하게 하였으나, 수신사의 방일 목적이 일본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었으므로 일본 정부의 고관들은 김홍집과의 면담을 의도적으로 기피하여 수신사는 방일의 목적을 달



성할 수 없었다. 이에 김홍집은 주일 청국 공사관에 자주 들렀으며, 황 쭌셴이 지은 조선 책략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강화도 조약 이후 새로운 외국 문물의 수용과 외국과의 교섭 및 통상 등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의 개편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청국의 총리기무아문을 모방하여 1880년 12월(음) 종래의 의정부와 6조와는 별도로 정 1 품 아문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군국의 모든 일을 총령하여 그 권한이 방대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설치된 지 2년 후에 군국기무 등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과 외교 통상을 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나누어졌다.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당시의 12사와 그 업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대사 ; 중국과의 외교
교린사 ; 일본 및 각국과의 외교
군무사 ; 경향의 군사 사무
변정사 ; 국경 사무, 인근 국가의 동정 및 정탐
통상사 ; 외국과의 통상
군물사 ; 병기 제조
기계사 ; 각종 기계 제조
함선사 ; 각종 선박 제조
기연사 ; 연안 포구 왕래 선박 검사
어학사 ;각국 언어, 문학의 번역
전선사 ; 관리 선발과 관용품 조달
이용사 ; 재정 사무
통리기무아문 총리 대신에 영의정 이최응을 임명하였으며, 당상관으로는 김보현, 민겸호, 김병덕, 윤자헌, 조영하, 정범조, 신정희, 민영익, 이재긍, 김홍집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보수적 경향을 띤 인물이었으며, 개화파에 해당하는 인물은 김홍집 등 극소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은 1884년 의정부에 통합되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남아 있었다.

▨ 군제 개편과 별기군의 설치

개화 정책의 추진과 함께 부국 강병의 일환으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군제의 개편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군제의 개편과 동시에 신식 군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기존 군제는 5영으로 나뉘었던 것을 무위영과 장어영 2영으로 통합하여 이경하와 신정희를 각각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별기군이란 신식 군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별기군은 1880년 김홍집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윤웅렬이 중심이 되어, 기존 군대에서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1881년 4월 무위영 소속으로 출발하였다. 별기군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대로 소총으로 무장하여 신식 훈련을 받았다. 교련소 당상에는 민영익, 정령관에 한성근, 좌부령관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원, 참령관에 우범선이었으며, 교관으로 일본군 소위 호리모도를 초빙하여 서대문 밖 모화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후에 하도감으로 옮겼다.

▨ 신사 유람단의 파견

강화도 조약 이후 김기수와 김홍집 등 두 차례의 수신사가 일본에 다녀온 뒤 일본이 발전한 모습이 소개되자 나라의 개혁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던 고종과 개화파 관료들은 개혁을 위한 자료의 수집과 일본의 실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대규모의 시찰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국내 사정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대하여 경계하면서, 특히 김홍집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을 둘러싸고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시찰단을 공개리에 파견하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동래부 암행 어사로 발령하여 비밀리에 부산에 집결하도록 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람단으로 소개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시찰단은 12개 반으로 총 인원 60명으로서 각 반의 책임자는 전직 관리로 하고 수행원과 통역 및 하인들로 구성되었다. 각 반의 책임자는 개인적으로 국왕으로부터 시찰 대상에 대한 지시를 받고 귀국 후에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었다. 이들은 1881년 4월 10일(음력)에 부산을 출발하여 약 3개월 뒤에 귀국하였다.
12개 반의 책임자와 수행원, 그리고 시찰 대상은 다음과 같다.
책임자수행원시찰부서조준영
박정양
엄세영
강문형
조 병
민종묵
이헌영
심상학
홍영식
어윤중

이원희
김용원이봉식, 서상직
왕제응, 이상재
엄석주, 최성대
강진형, 변택호
안종수, 유기환
민재후, 박회식
이필영, 민건호
유진태, 이종빈
고영희, 성낙기, 김낙운
유길준, 유정수,
김량한, 윤치호
송헌빈, 심의영
손붕구문부성
내무성, 농무성
사법성
공무성
세관
외무성
세관
조폐
군부
대장성


군부
이들 책임자와 수행원들은 그 후 정부 내의 근대적 전문가로 발전하여 개화 정책의 추진에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수행원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유학생으로 남아 있도록 하였으니, 어윤중의 수행원이던 유길준과 유정수는 경응 의숙, 윤치호는 동인사(同人社), 김량한은 조선소에서 공부하였다. 또, 이원희는 특별히 일본에서 총포와 군함을 구입할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참모로 임명된 이동인이 급작스럽게 암살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 영선사의 파견

1881년 9월 정부에서는 개화 정책의 구체적인 표현의 하나로 무비 자강의 계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청의 부국 강병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톈진의 군사 공업 기지로 가서 근대식 병기 기술을 학습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직예총독 이홍장의 건의가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유학생 38명을 포함한 70여 명의 일행이 청국의 톈진에 있는 기기국으로 떠났다. 당시 유학생들은 주로 공장들이었다. 이들은 9월 26일에 떠나 11월 17일에 북경에 도착하고, 관리들과 협의하여 1882년 1월 38명의 유학생은 기기국의 동․남국 및 수사(水師) 학당과 수뢰(水雷)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무기 제조법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 각 분야와 외국어도 습득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1882년 10월 학습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중에 귀국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먼저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영향도 있었으며, 학도 중에는 각종의 사유로 도중에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재정의 어려움으로 유학 경비의 조달이 어려워졌으며, 서울에 기기창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유학생들의 귀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영선사의 파견은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학도들의 비교적 체계적인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학습에 따라 과학 기술의 수용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귀국한 다량의 과학 기술서적과 기계류는 이후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유학생들이 귀국한 후 그들이 중심이 되어 기기창(機器廠)이 설립되었다. 한편, 영선사로 청국에 가 있던 김윤식은 이홍장과 교류하면서 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는 데 활약하였다.

▨ 척화 주전론

19 세기 중반 이후 서양 열강의 침략 세력의 접근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권과 민족 문화 전통을 수호한다는 사상적 기반으로 전개된 것이 척화 주전론이다. 1866년 프랑스의 침입 사건은 서양의 침략 위협이 직접 현실화되는 것으로서,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즉, 병인양요는 군사적인 침략일 뿐 아니라 서양 자본주의의 경제적 침략이었으므로, 군사상, 경제상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시대 상황에서 제기된 사상이었다. 이는 병인양요 당시 사직소를 제출한 이항로의 상소 내용에 가장 대표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그는 서양의 침략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보고, 이를 막아 싸워 물리쳐야만 국가의 보존과 민족의 생존이 유지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안으로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주장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 왜양 일체론

1876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화도 조약의 체결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일본과의 조약 체결은 서구의 자본주의 침략 세력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 나라에 침략하는 것으로 보고 일본과의 수교와 개항을 반대하는 논리로 제기된 척사론이다. 이 주장은, 강화도 조약을 반대한 최익현의 상소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최익현은 조약 체결의 불가함을 오불가소(五不可疎)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첫째,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자주의 위기, 둘째,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 산업의 파괴, 셋째 일본은 서양의 적과 같으며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 예의의 위기, 넷째,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자에 대한 약탈의 위기, 다섯째, 일본은 금수와 같으므로 문화 민족인 우리가 그들과 교류할 때에 도래할 문화의 위기 등이다. 이는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우리에게 닥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의 위기를 통찰한 주장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의 우월한 문화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최익현의 왜양 일체론은 단순히 일본과 서양이 동일하다는 각도에서 나타난 배타적인 척사론이 아니라, 일본이 서양의 침략 세력과 동일하게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므로 이에 대해 그들보다 우수한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함께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신사 척사 운동

1880년 후반부터 시작되어 1881년에 격렬하게 전개된 척사 운동이다.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은 고종과 개화 세력의 적극적인 개화 정책의 추진에 자극제가 된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통을 고수하면서 밖으로부터 침투하는 이질 문화 내지 이와 결부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침략 세력을 막아야 된다는 척사론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척사론자들은 적극적 개화 정책의 계기가 된 조선 책략을 비판하고 이를 들여 온 김홍집을 비난하면서 나아가 정부의 개화 정책을 비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고종을 비난하기에까지 이르러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척사론의 주장자들인 유생들은 집단적인 상소 운동을 전개하여, 영남 유생 이만손의 만인소, 강원도 홍재학의 만인소는 그 대표적이다. 신사 척사 운동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개화 세력과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는 위정 척사 세력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개화와 보수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19세기 말 근대화의 추진과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자주권을 수호해야 하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서 민족의 대응 과정이 내부적 분열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나타낸 결과를 초래하였다.

▨ 제물포 조약

1882년 임오군란으로 서울의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으로 별기군의 교관인 호리모도 소위와 육군 어학생 2명과 외무성 순사 1인이 살해되었다. 청군의 개입으로 난이 끝나고 홍선 대원군이 납치되자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의 사과와 배상 요구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한 군대 출동 등을 결의하고 조선에 압력을 가하였다. 일본으로 쫓겨갔던 하나부사 공사가 서울로 돌아오자 조선의 전권 대신 이유원과 부관 김홍집은 그를 상대로 협상을 시작하여 1882년 7월 6개조로 된 제물포 조약과 수호조규속약을 체결하였다.

<제물포 조약>
제 1 조.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범인을 체포하여 엄징할 것.
제 2 조. 일본국 피해자를 후례로 장사 지낼 것.
제 3 조. 5만 원을 지불하여 피해자 유족 및 부상자에게 급여할 것.
제 4 조. 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
제 5 조. 일본 공사관에 군대를 주둔시켜 경비에 임하는 것을 허용할 것.
제 6 조. 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여 일본국에게 사죄할 것.
<수호조규속약>
제 1 조. 부산, 원산, 인천 각 항에 일본인 이정을 사방 각 50리로 하고 2년 후에는 다시 100리로 할 것.
제 2 조. 일본 공사와 영사 및 그 수행원이 조선 내지 각처를 여행할 수 있게 할 것.
이로 인해 일본인의 한국 내 왕래가 활발해져서 경제적 침투가 더욱 유리해졌으며, 특히 제물포 조약에 의해 서울에 공사관 호위라는 명목으로 일본 군대가 상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일본국에 사죄 사절을 파견한다는 조약에 따라 박영효를 정사, 김만식을 부사, 서광범을 종사관으로 하는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이 때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

임오군란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을 하게 된 청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에 뒤진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청국측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선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조선측에서도 조선 책략에 제시된 친중국론을 실행하고 조선을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선 내의 일본 상인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청 상인들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882년 8월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간섭을 증대하고 일본에 대항하는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청은 조선과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전문 8조로 된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며, 청국 상인들의 특혜를 인정하고, 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 상무 위원을 파견하는 한편, 그의 치외 법권을 인정하며, 종래 실시하던 국경 무역을 개방할 것 등이다. 이 조약은 결과적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강화한다는 데 있었으며, 청 정부의 보호 밑에서 청 상인들이 각지에서 활동하여 일본 상인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농촌의 경제적 파탄이 가속화되었다.

▨ 개화 사상에 영향을 준 서적

19 세기 중엽 이후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무물에 대한 정보는 주로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이었다. 이들 서적에는 중국인이 저술한 것도 있으며, 많은 분량이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조선 후기에도 같은 현상으로 천주교에 관련된 서적은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얻게 해 주는 정보원이 되었던 것이다. 개화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도 이는 같은 상황이었다. 1880년대 이후에는 일본이 신지식의 통로로 활용되었지만 아직도 중국은 중요한 통로였다. 이는 당시의 지식인의 지적 바탕이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와 개화파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요 서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역사․지리>
해국도지(海國圖志 ; , 1844년), 영환지략(瀛環志略 ; , 1850), 지구설략(地球說略 ; 미국 선교사 Richard Q. Way, 1856), 보법전기(譜法戰記, 王 , 1872)
<정치․법률>
조선 책략(朝鮮策略, , 1880), 만국공법(萬國公法, 미국 선교사 William Alexander Par - sons Martin, 1864), 흥아회잡사시(興亞會雜事詩 ; 1880년 일본에서 설립한 친목회 흥아회 회원들이 지은시), 이언(易言 ; , 1880)
<자연 과학>
격물입문(格物人門 ; 1866), 박물신편(博物新編 ; 영국 의사 Benjamin Hobson, 1855)
<신문․잡지>
신보(申報 ; 영국 상인 Ernest Major, 1872), 만국공보(萬國公報 ; 미국 선교사 Yong J. Allen, 1868),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 미국 선교사들, 1872), 격치휘편(格致彙編 ; 미국 선교사 John Fryer, 1876)
<한국인 저술 및 번역>
기화근사(箕和近事, 김옥균), 지구도경(地球圖經, 박영교), 농정신편(農政新編, 안종수)

▨ 한성 순보(漢城旬報)의 발행

한성 순보는 1833년 10월에 창간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이다. 일간이 아니고 관보의 의미도 있어 신문이라고 하기에 미비한 점도 있으나, 새로운 소식을 게재하며 정기적으로 발행되었으며, 그 체제가 신문의 형태를 따랐기 때문이다. 1882년 말 임오군란의 결과 일본에 수신사로 간 박영효는 신문이 개화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귀국하면서 일본의 신문 기자와 인쇄 기술공을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한성 판윤으로 임명되자 신문 제작의 실무를 유길준에게 위촉하였다. 유길준은 신문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창간사를 작성해 놓았으나,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물러남에 따라 일시 그 일이 중지되었다가 1883년 8월 박문국이 설치되고 10월 30일에 창간호를 간행하게 되었다. 순보는 10일에 한 번씩 14개월 간 빠짐없이 간행되어 모두 40호 정도 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간행이 중단 되었다. 순보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 과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어 국민에게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하였으며, 한국의 개화 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86년 1월 1일부터 1주일에 한 번씩 한성 주보로 속간되었으나, 재정이 어려워 1888년 7월 폐간되었다. 특히, 주보는 국한문을 혼용하여 그 독자층이 확대되었으며, 그 영향도 사회 전반에 미쳤을 것이다.

▨ 유학생의 파견

새로운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은 유학생 파견으로 나타났다. 유학생의 파견은 개화파 인사들, 그 중에서도 김옥균이 앞장 서서 추진하였는데 대부분 일본에 치중되었다. 1881년 신사 유람단이 일본에 갔을 때, 수행원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서 유길준과 유정수가 경응 의숙에, 김양한이 조선소에, 윤치호가 동인사에 각각 유학하였으며, 1882년 김옥균이 국왕의 특명으로 일본에 가면서 수행원인 변수와 김용원이 화학과 양잠 학을 공부하였으며, 또다른 사람들은 육군 학교와 가죽 공장에 유학하였다. 임오군란 후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역시 그 일행 중에 경응 의숙과 동인사에 유학하였으며, 1883년 김옥균이 차관 교섭차 일본에 갈 때도 다수의 유학생을 인솔하였다. 박영효가 신문 제작 기술자로 데리고 온 일본 기술자가 귀국할 때 김옥균의 주선으로 17명이 도야마 육군 유년 학교에 유학하였는데, 서재필이 여기에 끼여 있었다. 그리하여 1883년 말에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은 약 50명이 되었으나, 개화당이 추진하고 있던 차관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비가 부족해져 1884년 봄에는 대부분 귀국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거의 개화당에 가담하였으며, 갑신정변에 참여하였고, 그 후 한국 근대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1881년 청국 톈진에 영선사를 따라 무기 공장에 공부하러 간 학도들도 유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학생의 필요성은 그 후에도 정부에서 잘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895년 초(양력)에 발표된 홍범 14조에서도 ‘ ’라고 하여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 개화당의 차관 도입 교섭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지출이 증대하여 재정난이 계속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는 개화당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대하는 데도 필요한 일이었다. 김옥균은 이 일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이본을 왕래하였으며, 고종도 이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1882년 3월에 1차로 이본에 갔으나 차관을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882년 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김옥균이 동행하여 2차 일본 방문을 하여 17만 원의 차관을 얻었다. 이 돈은 임오군란에 대한 배상금으로 일부 지불하고, 나머지는 신문 제작비와 유학생 경비로 충당하였다. 박영효가 귀국한 뒤에도 김옥균은 계속 남아 차관 교섭을 하여, 국왕의 위임장이 있으면 차관을 하겠다는 일본측의 약속을 받고 일시 귀국하여 국왕의 위임장을 받아 1883년 5월 일본에 갔다. 그러나 일본은 김옥균이 조선의 정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지 못한 현실을 들어 차관 교섭을 기피하고 있는 사이 조선 정부의 보수 세력이 차관 교섭을 방해하여 결국 김옥균의 차관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차관을 통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감에 비상 수단으로 정변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 갑신정변 실패 후의 개화당 인사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변에 참가하였던 개화당의 주요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었다. 이들은 쫓겨가는 일본의 공사 일행과 함께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선박 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미국에 갈 계획이었으나 여비를 구하지 못해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김옥균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본국에서 계속 건너오고, 일본 정부가 그의 존재를 거북하게 받아들여 멀리 외딴섬으로 보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자객으로 온 홍종우의 꼬임에 빠져 1894년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나, 상하이에서 머물고 있던 차에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세 사람은 1885년 함께 미국으로 갔으나, 곧 헤어져서 박영효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왔고, 1894년 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사면을 받아 귀국하였다가, 1895년에 내무 대신과에 있다가 돌아와 1895년 법무 대신과 학부 대신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공사가 되기도 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고 의학 공부를 하여 병원을 경영하는 등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1896년 귀국하여 독립 신문을 간행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그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 한성 조약

189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 공사관 일행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탔으며, 일본인이 살해당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 공사가 정변에 개입되었다고 일본을 비난하면서 양국사이에 외교적 접촉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로 맺어진 것이 한성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조선 정부는 일본에 망명한 개화당 인사들의 송환요구와 정변 개입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정부에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새 공사관을 지을 땅과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였다.

<한성 조약>
제 1. 조선국은 국서를 일본에 보내 사의(謝意)를 표명할 것.
제 2. 일본국의 해를 입은 유족 및 부상자를 휼급하고 상민의 화물이 훼손 약탈된 것을 전보(塡補)하기 위하여 조선국에서 십만원을 지불할 것.
제 3. 일본인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사문 나포하여 엄벌에 처할 것.
제 4. 일본 공사관은 신기지로 이축함을 요하는바 조선국은 마땅히 기지 방옥을 교부하여 공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하도록 할 것이며, 그 신축, 중건에 있어서는 조선국이 다시 2만원을 지불하여 공사비에 충용하도록 할 것.
제 5. 일본 호위병의 영사는 공관 부지를 택하여 정하고, 임오속약(즉, 제물포 조약) 제 5관에 비추어 시행할 것.
(부칙)
1. 제 2, 제4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계산할 것이며 3개월 기하여 인천에서 완불할 것.
2. 제 3의 흉도를 처단함은 입약 이후 20일을 기한으로 할 것.

▨ 톈진 조약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울에서 개화당 정부를 지원한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과 조선 정부를 지원한 청국군의 교전이 일어난 사건은 정변 이후 두 나라 사이에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정변이 끝난 후 한성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공사가 거느리고 온 일본군이 다시 서울에 주둔하게 됨으로써 청․일 양국의 군대가 제 3국에서 대치하게 된 상황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화된 그들의 세력을 회복하여 청과 균형된 상황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청국과의 외교적 담판이 필요하였다. 당시 청국은 프랑스와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 중 이어서 조선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한 상황임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2월 18일부터 3월 4일사이에 6차에 걸친 회담을 거쳐 이토 히로부미와 이 홍장 사이에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과 청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조선과 관련된 문제였으나, 조선의 의사는 일체 고려됨이 없이 두 나라 사이에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첫째,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는 것이고, 둘째,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출동할 필요가 있을 때는 서로 사전에 통보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의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조선에 출병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일본의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톈진 조약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은 더욱 심해졌으며,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면서 앞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위해서 청국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청․일 양 국의 경쟁적인 경제 침투로 인하여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고 농촌 사회에 현실 문제를 극복하려는 농민들의 의식이 고조되면서 동학 사상이 파급되며, 현실을 적절하게 이끌어 가지 못하는 정부와 양반 계층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으며, 이에 따라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전통 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고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톈진 조약>
1.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공사관을 호위하기 위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 날인한 날로부터 기산하여 4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그 이내에 각기 전체를 철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분쟁 야기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다. 중국군은 마산포로부터, 일본군은 인천항으로부터 철수한다.
1. 양국이 함께 승낙한 것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치안을 스스로 지키도록 조선 국왕에게 권하며, 또 조선 국왕에 의하여 다른 외국의 무관 1인이나 혹은 수인을 선발하여 교련의 일을 위임케 하되 이후 청․일 양국은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교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1.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청․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을 요할 때에는 마땅히 우선 상대방 국가에게 문서로 알릴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회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 방 곡 령

일본 상인들에 의한 한국의 곡식이 일본에 유출되어 한국 농촌의 곡식은 부족해지며, 곡식값이 폭등하여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져 갔다. 더욱이 흉작이 계속되어 농민의 참상이 더하였다. 정부에서는 한․일 간에 체결된 통상 장정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수정하여 한국에서 병란이나 흉작 등으로 국내에 식량이 부족할 경우 지방 장관의 방곡 망령으로 미곡 수출을 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방곡령을 발하기 1개월 전에 해당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통보하기로 하였다. 방곡의 문제는 그 이전에도 일정 지역 안의 미곡을 그 지방의 납세나 주민의 자금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방관의 이름으로 타 지방으로 미곡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880년대에는 일본 상인들의 횡포로 미곡이 유출되자 곳곳에서 방곡이 시행되어 서울에 반입되는 쌀의 양이 줄어들어 쌀값이 폭등하고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1889년 함경도 감사의 콩수출 금지와 1889년 황해도 감사의 쌀 수출 금지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쌀 유출이 금지되게 되자 이익을 못 내게 된 일본 상인들은 일본 공사관과 결탁하여 방곡 시행 1개월 전에 사전 통보한다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 상인들이 입은 손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하라고 강요해 왔다. 그 후 경상도 지역에서도 방곡령이 발표되었는데, 방곡령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는 농촌 사회에는 반일 감정이 팽배해져 갔다.

▧ 보은 집회

1882년 삼례 집회와 1893년 복합 상소 운동을 통하여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과 지방관의 동학 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동학의 지도층은 본격적으로 저항 또는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문을 보내 보은에 교도를 집합시켜, 모인 교도의 숫자가 2만여에 달하였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동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수많은 인원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의 농촌 사회가 정부에 대해 불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정부의 국민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보은 집회는 동학의 움직임이 단순히 종교적인 활동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교도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표방하고 지방관의 횡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보은 관아의 삼문 앞에 게시된 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왜양의 적이 나라의 중심부에까지 침입함으로써 문란이 극도에 달하고 있고, 이에 따라 국도는 필경 이적의 소혈이 될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들은 동력서사(同力誓死)하여 왜양을 소탕하여 대의를 이루고자 한다.” 하였으니, 교조의 신원을 말하는 내용은 이미 자취가 없으니 이제는 단지 종교적 자유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왜양을 쳐부수겠다는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 동학의 조직

동학은 크게 충청도 지역의 북접과 전라도 지역의 남접으로 두 개의 계열이 있었다. 최제우가 처형되기 전에 최시형을 북접 도주로 임명하였으며, 또다른 사람이 남접 도주로 임명된 사람은 명확하지 않지만 뒤에 남접의 지도자로 서장옥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였다. 처음에 동학 농민군이 봉기할 때 그 시작은 남접에서였으며, 북접에서는 그 후 에 참여하였다. 동학의 포교는 제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그의 포교 활동은 1878년경 이후에 크게 활발해졌으며, 그 교세는 충청, 경상,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 강원도까지 파급되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더욱 번성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교단 조직이 갖추어졌다. 각처에 접소(接所)를 두고 여기에 대접주, 도접주, 수접주, 접주 등의 직책을 두었다. 즉, 큰 지역에 대접주를 두고 그 밑에 몇 명의 접주를 두어 소지역을 나누어 포교를 분담하였으며, 면에는 면접주가 있는 곳도 있었다. 한편 포(包)는 교구제도와 같은 것으로 대접주로 포주를 삼아 그 밑의 접주를 통솔하였다. 각기의 포에는 여섯 가지의 사무를 분장하여 이를 육임제(六任制)라 하였다. 접과 포는 동학 조직의 기본이었으며 이는 교단 조직이면서 동시에 교도를 동원하는 조직이기도 하였다.

▨ 군국기무처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중심 기관으로 설립된 일종의 국정 최고 기구의 성격을 가진 특설 기구로서 김홍집이 영의정으로서 총재로 임명되었으며, 기타 구성원으로는 부총재 1명과 20명 미만의 의원이 있었다. 운영은 합의제이며 공개적이고 다수결로 의결하여, 흥선 대원군에게 보고하고 최종적으로 국왕의 재가를 받는 절차를 거쳤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적 절차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왕과 왕비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정권 대행자의 위치에 있었던 흥선 대원군의 간섭도 배제하여 초정부적인 입법부의 성격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대체로 당시 일본의 원로원과 추밀원의 관제를 모방한 것으로 조직상으로는 의정부에 속하였지만 영의정 이하 정부 대신과 군사 지휘관 및 경찰 지휘자도 의원의 구성원으로서 이 기구 자체를 구속할 수가 없었다. 고려 말의 도평의사사 또는 조선 후기의 비변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7월 27일 설치되어 12월 17일 폐지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205건(혹은 208건)의 개혁안을 처리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1차 개혁

1894년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내용의 개혁이 실시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의정부 관제와 궁내부 관제, 경무청의 신설, 최고법원인 의금사의 설치, 관등의 축소(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관리의 월봉제 실시, 과거 제도 폐지와 새 관리 임용 제도 실시, 은본위제의 화폐 제도 실시, 문무관의 차별 폐지, 죄인 연좌법의 폐지, 공사 노비 제도의 혁파, 양자 제도의 개선, 조혼의 금지, 과부의 재혼 허용, 조세의 금납제, 도량형 통일 등이다. 이 기간에는 일본이 제2차 동학 농민 봉기로 교전 중이며 동시에 청․일 전쟁이 진행 중이어서 일본의 간섭이 비교적 미치지 못하여 혁신 관료의 독자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제1차 개혁은 정치 제도의 개혁이며, 국민의 개혁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며, 친일 세력의 개혁이라는 반발이 따르기도 하였으며, 국민의 오랜 관습으로 내려온 조혼 금지나 양자 제조 또는 과부 재가 허용 등은 실시되지도 못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2차 개혁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이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었으며, 동학 농민군도 그 저항이 약화된 상황이어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려는 의도에서 그 동안 개혁의 추진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반일적인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박영효를 사면하도록 하여 개혁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군국기무처가 해체되고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박영효는 내무 대신을 맡아 실권을 잡고 실제로 개혁을 주도하였다. 1895년 1월 9일 국왕이 직접 개혁에 앞장 선다는 의미로 조종(祖宗)에게 서고하고 개혁 정치의 내용을 내외에 선포하는 홍범14조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한 개혁으로는 의정부를 내각으로, 정부 기관의 명칭을 아문에서 부(部)로, 지방 제도를 23부(府)로, 신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한성 사범 학교와 외국어 학교의 설립, 사법부의 독립, 군사 제도의 일원화와 훈련대 사관 양성소 설치 등이다. 제2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개입되었으나, 청․일 전쟁 후에 일어난 삼국 간섭의 와중에서 일본의 적극 개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박영효 중심의 독자적 개혁의 성격이 있다.

▨ 갑오개혁기의 제3차 개혁

제2차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김홍집이 물러나고 박영효가 일시 총리 서리를 맡았으며, 박정양이 총리가 되었다. 박영효가 반역 음모 사건으로 실각되고 김홍집이 다시 총리가 되었으나 삼국 간섭 이후 내각에 친러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때, 일본은 친러 세력의 배후가 명성 황후라는 사실을 알고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부랑배를 동원, 궁중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하였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3차 개혁은 박정양 다음에 김홍집이 다시 총리 대신이 되는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옮겨가는 때까지이다. 이 개혁을 보통 을미개혁이라고도 한다. 중요한 개혁 내용으로는 서울에 관립 소학교 설립, 건양 연호 사용, 태양력 사용, 우편업무의 재개, 군제 개혁으로 친위대와 진위대 편성, 단발령의 발표 등이다. 명성 황후 시해에 대한 반감에 더하여 단발령에 따른 반발이 결국 항일 의병 항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활빈당(活貧黨)

1898~1904년 기간 동안에 농촌에서는 활빈당이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활빈당은 본래 화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집단`이라는 의미의 활빈(活貧)당이라는 이름을 내건 다음에는 의적(義賊)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898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반침략, 반봉건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평소 40~50명 적으면 10~30명 단위로 총과 칼로 무장하고 말을 타고 다니며 양반 부호가의 재물을 빼앗아 이를 빈민이나 영세 소상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그들은 외국 상인이나 외국 자본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활빈당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민중의 경제 안정과 제국주의의 이권 침탈에 대한 반대를 나타내었다.
“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을 채용할 것”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금할 것”
“행상인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금할 것”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타국에게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보안회(保安會)의 활동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 의정서를 강요한 직후 이른바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및 세목’ 등의 대한경영안(對韓經營案)을 만들어 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진행하면서 내하(內河) 및 연해 어업권을 비롯하여 철도 부설권과 관리권, 통신 기관 권리권, 삼림 벌채권,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강점하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도 강탈하려 하였다. 일제는 주한 공사를 통하여 50년간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일본인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 속에는 황무지의 개간, 정리, 척식 등 모든 경영권과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권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일제는 황무지를 개척하고 그곳을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요구가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반대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04년 7월 13일 전의관(前議官) 송수만, 심상운 등이 중심이 되어 보안회를 조직하였다. 보안회는 종로 백목전(白木廛) 도가(都家)에 본부를 두고, 공개적으로 성토 대회를 열어 일제의 황무지 요구에 결사 반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정부 고관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확산되었으며, 지방의 진위대가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는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보안회 지도 인사들을 납치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이 계속 되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정부는 일본 경찰의 철수를 요구하는 동시에 촌토의 땅도 외국인에게 내어 주지 않을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고 보안회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보안회 운동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선두에서 전개한 대중적 항일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에 해당된다.

▨ 헌정 연구회

보안회가 해산한 뒤에 협동회, 공진회, 진명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었으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고, 1905년 5월에 독립 협회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헌정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헌정 연구회는 이준, 양한묵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과 정부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야 되며, 국민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자유롭게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입헌 의회제도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특히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나 대한 제국 정부에서 민간인이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으며, 더욱이 을사조약이 강요된 이후에는 한국인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였으므로, 합법적인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한 자강회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지식인들과 민족 운동가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산업의 진흥과 교육 보급 등 사회 문화운동으로 그 활동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4월에 창립된 단체가 대한 자강회였다. 대한 자강회는 헌정 연구회를 계승하여 윤치호를 회장으로 하고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임진수, 김상범 등 발기인 5명을 포함한 10명의 평의원, 최재학, 정운복 등 10명을 간사원으로 하는 지도부를 구성하여,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에 27개소의 지부를 두었다. 대한 자강회의 목적은 자강회 규칙 제 2조에 ‘교육의 확장과 산업의 발달을 연구, 실시하는 것으로 자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후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에서 보이듯이 국권 회복의 기초가 되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애국주의적 신지식을 교육하고 근대 산업을 일으켜 국민의 자강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 목적은 당시 국권회복을 위해 직접적이고 무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의병 활동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자강회에서는 무력 대결은 시기와 역량을 고려하지 못한 무모한 행위라고 하여 비판하였다. 대한 자강회는 국민의 계몽을 위해 정기적으로 연설회를 개최하고 ‘월보’를 발행하였다. 월보의 창간호는 1906년 7월호부터인데 자강회가 해산당하는 1907년 7월까지 13호가 나왔다. 월보의 내용은 학교 교육 운동, 사회 교육 운동, 사상 확대 계몽 운동, 정치․경제에 관한 논설 등 다양하였으나, 주로 교육에 관한 것이 많아 학교 설립과 의무 교육의 주장, 학계의 소식, 여러 가지의 교육 내용 등을 다루었다. 대한 자강회는 통감부의 감시 하에서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의 활동이었으므로 그 활동의 폭이 좁아 보다 대중적이고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지식인 중심의 계몽운동이었다는 한계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대원장부(大垣丈夫)를 택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또 월보의 문체가 토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자로 되어 있어 일반 대중이 읽기에는 너무 어려웠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더욱이, 통감부의 일본인들은 자강회의 배후에서 그 조직을 조정하고, 전국의 항일 지식인들을 파악하여 이들을 조정하고 항일 의식을 둔화 마비시키고자 하였다. 통감부에서 관찰사나 군수 등의 관리에 자강회 회원을 발탁한 것도 통감부의 교활한 민족 분열책이었던 것이다.

▨ 신민회(新民會)

대한 자강회의 해산 이후 국권 회복을 전제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비밀 결사로서 그 이전의 합법적인 단체와는 성격과 활동 내용에서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미국에서 동포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다가1907년 2월 귀국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연회 등을 통해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신민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 애국적 선구자들이 자기 수양에 힘써 역량을 키우고 민중의 모범이 될 것.
○ 그러한 동지들이 굳게 단결하여 힘을 더욱 크 게 할 것.
○ 그 힘으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전력하여 민족 적 역량을 준비할 것.
○ 그리하여 앞으로는 오는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주적 역량으로 민족 재생의 큰 사업을 이룩할 것.
신민회는 양기탁을 총감독으로 하고, 안창호,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등이 창건위원이 되었으며, 중심 인물로는 최광옥,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조성환, 김구, 신채호, 이강,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등이었다. 신민회의 조직 체계와 규정은 신민회가 비밀주의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회원은 전국적으로 약 8백 명에 달하여 당시 주요계몽 운동가는 거의 망라되었으며, 특히 서북 지방의 교사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종적인 연락에 의해 비밀을 고수하면서 회원 각자가 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업으로 는 1908년 평양 대성 학교의 설립과 운영이며, 평양의 마산동에 설립한 자기 회사와 서울, 평양, 대구에 설치한 태극 서관이었다. 태극 서관은 손님으로 가장한 신민회 회원들의 연락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자체 내에 인쇄 시설을 갖추어 각종 도서를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일제가 조작한 총독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된 105인이 사건을 계기로 그 지도부가 체포되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한편, 신민회는 청년 운동의 일환으로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주로 서북 지방에 분회를 두고 청년의 인격 수양과 단체 생활의 연마, 일인 일기 교육으로서 직업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안창호는 청년 학우회의 4대 정신으로 무실, 역행, 충의 , 용감을 내세웠다. 청년 학우회는 청년 수양단체로서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1910년 국권 침탈과 함께 모든 단체가 해산될 때 함께 해산당하였다. 청년 학우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에 의해 흥사단이 설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수양 동우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의 활동 중에 해외에 독립 운동 기지를 만들어 국권 침탈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공헌하였다.

▨ 서북 학회

1908년 1월 이미 활동하고 있던 지역 학회인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통합되어 설립되었다. 1907년에 강제 체결된 정미 7조약으로 보안법과 신문지법이 만들어져 국권 회복 운동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상황에서 기존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여 현실적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신민회의 창립으로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의 회원들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서북 학회로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그 설립 취지와 목적이 동일하여 양 단체의. 통합은 예견된 일이었다. 1907년 3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서울 유학생들이 친목 단체로 서북 학생 친목회를 결성하여 친목 활동과 더불어 애국심 고취와 애국의길 을 도모하는 데 목적을 두었는데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이를 후원하였다. 1908년 1월 2일 임시 회장 이동휘의 지도하에 양 학회의 인사 149명이 참가하여 창립 총회를 열었는데 선출된 임원은 회장에 정운복, 부회장에 강윤희, 총무에 김달하, 부총무에 김주병, 평의원에 이종호, 태명식, 이갑, 정진흥, 김명준, 최재학, 주혁, 현승규, 윤익선, 오주혁, 주동한 등이었다. 서북 학회의 설립 취지와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하여 근대 문명 국가를 건설 한다. 둘째, 지식과 세력을 양성하여 사회 발달과 문명 증진을 꽤한다. 셋째, 실력 양성으로 민력을 증진한다. 넷째, 단체들이 하나로 되어 민력을 결집시킨다.

▨ 기호 흥학회

1908년 1월 19일에 정영택 등의 발기로 경기도 및 충청 남북도의 학문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기호 지방이 옛날부터 정치와 문화 및 학문의 중심지였으므로 이 전통을 지킬 것을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전국 청년의 교육에 힘써야 할 것은 늦출 수 없는 급무‘라고 하였다. 각지에 지회 설립에 착수하여1909년 7월까지의 지회 상황을 보면 경기도에 광주, 수원, 양근, 장단, 교하, 강화 등 6개소, 충청 남도에 서산, 공주, 연산, 당진, 해미, 목천, 홍주 등 7개소, 충청북도에 청주, 충주, 청양, 풍덕 등 4개소로 모두 17개소였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기호 학교 등 학교 설립과 운영, 월보의 발간, 강연회 등을 통한 계몽 활동 등이었다.
3. 근대의 경제와 사회


▨ 일본 상인의 쌀 유출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상인들이 한국에서 수입 한 것은 쌀, 쇠가죽, 콩, 생사, 인삼 등 주로 1차 생산품으로서 그들의 국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원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쌀은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1887년부터 1882년 5개년 동안에 부산과 원산을 통해 한국에서 유출된 쌀은 전체 수출량의 30%에 이르렀으며, 콩은 10%였다. 1882년 이후에는 콩 유출량이 점점 늘어나더니, 1980년대에 들어 다시 쌀의 유출량이 증가되었다.
당시 한국의 쌀값이 일본의 ⅓에 해당되었으므로 일본 상인들은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상인들은 많은 쌀을 경쟁적으로 유출시켰고, 상대적으로 한국 내의 쌀이 부족해져 쌀값이 폭등하여, 당시 흉작이 겹친 농촌 경제와 일반 서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상인들은 전라도 곡창 지대에서 입도 선매 등의 방법으로 싼값으로 쌀을 유출하였다.

▨ 열강의 이권 침탈

자본 수출을 통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 정책은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서 후진 지역의 광산, 철도, 농장, 공장 등의 개발과 경영에 투가하며, 후진 지역의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손쉽게 확보하여 막대한 이윤을 보장받으려는 것이 식민지 침략의 목적이었다. 1984년 이전에는 주로 상품 수출의 형태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 침략이 진행되었으며, 주로 일본과 청국의 상인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또, 해관 세수권, 연안 어부 채취권, 전신 부설권, 저탄소 설치권 등이 역시 일보노가 처국에 의해 독점되었다.
청․ 일 전쟁 이후에는 광산이나 철도 등 보다 중요한 자원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침략당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남북을 종단하는 철도 기본 간선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삼국 간섭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1896년 아관 파천을 전후하여 주요한 이권들이 러시아와 미국에 넘어갔다. 이는 당시의 조선 정계에 친러파와 친미파 세력이 증대되고 있었던 것과도 연결된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 쟁탈 대상은 철도, 광산, 전기, 수도, 전신 등 국가의 기간 산업부분이었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값싼 한국의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약탈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는 그들에게 예속되어 민족 자본의 성장이 억제되었고, 자주적 근대화의 진전에 장애를 받게 되어싿. 이들은 광산의 개발권과 철도의 부설권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경영권까지 장악했으며, 인근의 토지와 산림까지 장악하였다.
열강의 이권에서 나오는 이윤은 막대한 것으로서 미국의 운산 금광의 경우 1902년의 국내의 금생산의 ¼을 차지하였고 연간 순수익률의 증가는 300%에 달하였다. 1897년~1915년 사이의 금 생산고는 4천 9백 50만 원이었는데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될 당시 일본에 진 국채가 1천 3백만 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권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만한 일이다.
1895~1904년의 제국주의 열강의 한국에 대한 주요 이권 침략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일 본>
경부 철도 부설권 1898
평양 탄광 석탄 전매권 1898
경인 철도 부설권(미국으로부터매입 1898
충남 직산 금광 채굴권 1900
경기도 연해 어업권 1901
인삼의 수출 독점권 1901
충청, 황해,평안도 연해 어업권 1904

<미 국>
평북 운산 금광 채굴권 1895
경인 철도 부설권(1898 일본에 백만달러에 매도함.) 1986
서울 전기,수도 시설권 1897
서울 전차 부설권 1898
<러시아>
함북 경원 종성 금광 채굴권 1896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1896
압록강 유역, 울릉도 삼림 채벌권 1896
부산 절영도 저탄소 설치권 1987
동해안 포경권 1899

<프랑스>
경의 철도 부설권(일본에넘김) 1896
평북 창성 금광 채굴권 1901
평양 무연탄 광산 채굴권 1903

<영 국>
평남 은산 금광 채굴권 1898

<독 일>
강원도 금성 당현 금광 채굴권 1898


▨ 메가다의 화폐 정책

1904년 8월 러․일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침략하기 위한 소위 ‘ 대한 시설 강령 (對韓施設綱領)’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제 1차 한․일 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대한 제국 정부는 일본이 추천하는 외교와 재정 고문을 채용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이 때, 외교 고문으로 온 사람이 미국인 스티븐스이고, 재정 고문은 일본인 메가다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를 정리하여 일본의 금융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가 문란하고 재정이 고갈되었으니 화폐를 급속히 정리하고 국가 재정의 원천인 세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1905년 9월 18일 화폐 조례를 만들어 일본의 화폐 제도에 따른 금본위제로 하고, 한국에서 그 동안 통용되고 있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여 일본 제일 은행권을 본위 화페로 하였다.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일본 상인들의 농간에 의해 많은 손해를 보았다.
메가다의 화폐 정책은 한국 상인의 자산과 화폐를 일본 상인들에게 넘겨 주어 한국의 경제를 일본이 장악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극심한 금융 공황이 일어나 한국 상인들은 도산하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농촌 경제를 분해시켜 농민을 농촌에서 유리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메가다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것을 강요하여 일본 정부와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재정적 예속을 강화하시켜 나갔다.

▨ 국채 보상 운동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재정 고문 메가다의 강요에 의해 대한 제국 정부는 190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2백만 원의 공채를 모집하고,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3백만 원과 12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오십만 원의 차관을 들여 왔다. 또, 통감으로 온 이토는 ‘한국의 시정 개선’을 위해 세관 수입을 담보로 하여 일본 흥업 은행으로부터 일천만원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다.
통감부는 차관으로 들여 온 자금으로 식민지 통치 기구를 유지, 확대하며 침략과 약탈을 강화하고, 대한 제국 정부를 재정적으로 일본에 예속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매년 6.5%의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되는 이 차관으로 통감부는 한국에서 일본인의 생활 조건을 만들고 일제의 침략을 위한 시설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즉, 남포와 평양간의 도로와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영일만에 이르는 도로를 확장하고, 인천과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거류민을 위한 상수도 시설, 일본인의 관청 보수와 봉급 지불에 주로 소비하였다
통감부는 한국을 침략하면서 일본인의 한국 친투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의 형식으로 조달하여 이를 한국 정부에 떠넘기는 것이었다. 1907년 대한 제국 정부가 짊어진 외채 총액은 1천 3백만 원으로 이는 1년 세출 예산에 맞먹는 막대한 것으로서 당시 8백만 원 가까운 재정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대한 제국으로서는 외채 상환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국적 지식인들은 차관이 국권을 유린하고 식민지적 예속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보고 외채의 상환이 국권 회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이를 대중적인 참여에 의해 해결하도록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1907년 2월 16일 대구의 서상돈이 금연한 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뜻으로 단연회를 조직하고 이에 대한 취지서를 만들어 전국에 호소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본회는 일본에 대한 국채 1천 3백만 원을 보상하기로 목적함.
․보상 방법은 일반 국민의 의금을 모집함. 단,금액은 다소를 불구함.
․본회에 의금을 납부한 인원은 본회 회원 으로 인정하고 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공 포함.
․의금으로 모은 돈은 위의 액수에 달하기까 지 신용이 있는 우리 나라 은행에 일치함. 단,수합된 금액은 매월 말에 신문에 포고 함.
․본회는 목적을 달한 후에 해산함.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된 후 뒤에 국채 보상 단연 의무회, 국채 보상 일심회, 국채 보상 동정회, 국채 보상 의무소, 국채 보상부인되 등 전국적으로 20여 개의 단체가 경성되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3월 말에는 이종일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와 4월 초에는 이준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연합 회의소가 조직되어 각각 수금액의 촹괄과 국민 지도의 업무를 분담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이어졌다.
국채 보상 운동의 전국적 확대에는 황성 시문, 대한 매일 신보, 제국 신문 등 민족 신문들의 홍보 활동이 크게 작용하였다. 농민들은 식량을 판 돈의 일부를, 노동자는 어렵게 번 한 푼의 돈을, 남자들은 단연회에 가입하여 금연한 돈을, 여자들은 찬값을 절약하여. 또는 가락지와 비녀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각종 패물 등을 기생들까지도 돈을 거두었다.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단체들을 해산시키며, 지도급 인사들을 회유하여 친일 활동으로 변절시키고, 보상금 횡령 사건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일으키는 등 갖은 모략을 다하였다. 특히, 보상 운동에 앞장섰던 대한 매일 신보를 탄압하여 영국인 방행자 베델을 추방하려 하였으며, 국채 보상금 소비 사건을 날조하여 양기탁에게 혐의를 씌웠다. 결국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한민족의 순수한 애국심이 국채를 보상해서 나라를 지킨다는 소박한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국채 보상으로 국권이 수호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라를 지켜 보려는 민중의 의식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인 것이다.

▨ 증기선의 운행과 해운업의 발달

서양 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타고 온 증기선은 서양 문명의 우수함을 보여 준 대표적인 것이며, 이러한 배를 마련하는 것은 부국 강병의 중요한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1881년 개화 정책이 추진될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에서 군함을 구입하려 계획하였고, 1994년 이후에는 중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증기선을 구입하거나 임차하여 사용하였다. 해안을 따라 세미를 운반하는 데 증기선은 크게 편리하였으나 일본 증기선 회사가 이를 독점하여 이익을 챙겼다. 이에 대하여 경강 상인들이 종래 세미 운반을 맡아오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증기선을 구입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884년 정부에서 세 척의 증기선을 구입하여 세미 운반에 사용하였으며, 1889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 한국에서 증기선을 소유했던 실태는 144척에 38,403톤이었다. 189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운수업도 크게 발전하여 종래 일본 자본가에게 독점되어 오던 것을 민족 해운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대한 협동 우선회사, 인척 우선 회사, 인척 윤선 주식회사 등 해운 기업이 출현하였다.

▨ 농광 회사

러․일 전쟁을 일으킨 직후 일본은 한국 전 국토의 ¼에 해당하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해 오자, 이에 대항하여 일부 애국적인 관료와 실업인들이 한국인이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농광 회사를 설립하고 정부에 개간 특허를 요청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를 1904년 7월 11일 허가하였다.
이 회사는 황무지 개간 사업과 함께 당시 외국인이 이권으로 노리고 있던 광산 개발까지 포함시켜 모든 이권을 확보하여 외국인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이 항의하고 그들이 요구한 황무지 개척권을 강요하자 애국 지사들이 보안회를 조직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농광 회사의 해체를 요구하여 황무지 개척권 문제는 일본의 요구를 일단 막는 것으로 해결 되었다.

▨ 근대적 상회사(商會社)의 활동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 등 개항장으로 들어오는 외국 상인들로부터 외국 상품을 모아 이를 국내 각 지역에 팔고 국내의 농촌으로부터 직접 곡물을 사서 외국 상인들과 거래를 하면서 개항장과 농촌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개항장에 자리잡은 객주와 여각 및 보부상 등 전통 상인들이었다. 이들 상인들은 외국 상인들의 침투에 대항해서 상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체제의 확립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1880년대 초부터 근대적인 상업 체제로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회사릐 설립은 일본이나 청국 또는 영국 상인들의 활동에서 영향을 받은 바도 있지만 일찍이 개화 사상가들도 상사 또는 회사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한 적도 있어 이러한 내외의 분위기로 회사설립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회사들은 그 이름이 회(會), 사(社), 상회, 상사, 상회사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대부분 한자 회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설립 과정은 정부에 상회 장정을 통리아문에 보내면 아문이 허가서를 보내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결국 관허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 상회사들은 1883년경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여 갑오개혁 이전까지 전국에 약 40여 개가 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평양에 설립된 대동 상회와 서울에 설립된 장통회사(또는 장통사)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서 전국 각지에 상회 직원이 파송되었다.

▨ 근대적 섬유 공업의 발달

1880년대에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부국 강병의 방안을 강구하던 일부 개화파 중에서 근대적 산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근대적인 공업의 일환으로 면재춤 생산 기계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특히, 지석영은 1882년 근대적 직조기를 구입할 것을 상소하고 있었으며, 정부에서는 1884년 농상, 직조 등의 관영을 위해 설국치관(設局置官)을 명하여, 1885년 정부 내에 직조국(織造局)이 설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1884년에 고ㅛ종의 명으로 중국인 공장들을 모집하였으며, 1885년부터는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중국인 기술자를 더 모집하였고, 사기(紗機) 4개를 중국에서 구입하였으며, 곧이어 직금 기계(織錦機械) 32건을 구입하였다. 이외에도 중국에서 면사와 직조 기계를 몇 번에 걸쳐 구입하였다. 그러다가 1891년 이후 경영난에 따라 생산이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이후 광무개혁이 진행되면서 산업의 발전을 위한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897년 년경에 대조선 저포 제사(大朝鮮苧布製絲) 회사의 설립, 1899년에 한상 방적 고본(漢上紡績股本) 회사, 1898년에 직조 권업장이 설립되었으며, 1990년에는 한성 직조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일반인들 가운데서도 지방에 직조 회사를 설립하여 직물을 생산하였다. 1902년 2월 김덕창 이라는 사람이 서울의 중부 장통방 중곡동에 김덕창 염직 공업소를 설립하여, 외국에서 수입한 면제사를 원료로 하여 면포를 염색 직조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김덕창은 일본에서 제작한 개량식 족답직기(足踏織機) 8대화 S직조기 9대를 설치하고 40명의 직공을 고용하면서 연간 6천 4백 단의 면포를 생산하였다. 그 당시 수입 면포가 70만 단이라는 수량과 비교할 때 그 생산량은 미미한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덕창 염직 공소의 설립을 계기로 하여 서울에 38개소의 직조 공장이 설립되어 근대적인 민족 섬유 공업의 발달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영세하여 전체로 S직조기는 208대였고 한 공장당 직조기는 평균 6대에 불과한 소규모의 것이었다.


4. 근대 문화의 발달

▨ 동도 서기론(東道西器論)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에서 전해진 서양의 문물을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갔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의 우수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서양을 오랑캐로 인식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서학을 배척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이 형성되고 서양의 무력 침략에 접하면서, 특히 무기를 중심으로 한 기술의 위력을 알게 되었으며, 개항 이후 서양의 기술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의 수용은 전통적인 기술 문화를 유지하면서 부국 강병의 수단으로 기술만을 수용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다.
동도 서기론은 그 성격상 중국에서 일어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과 동일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일면으로는 전통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으나,서양의 과학 기술 문화의 근본 배경인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적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 및 과학 정신의 전통을 충분ㅁ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서양 문화 수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 박문국(博文局)

1883년 8월 통리아문의 한 기구로 설립된 박문국은 외국어를 학습하던 동문학에 부속된 기관이었다. 원래 동문학에서는 서적의 편찬과 신문 간행을 계획하였었는데 , 이 안에 박문국을 설치한 것이다.
박영효가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일본에 사절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일본으로부터 신문 제작 기술자를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유길준에게 신문 간행의 일을 맡겼다. 1883년 2월경 당시 통리아문 주사로 근무 중이던 유길준이 신문국 장정을 만들었는데, 이 때 신문을 간행하는 사무처리를 박문국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 직후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유길준도 신문 간행의 일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 후에 정부에서 신문을 간행하기 위하여 유길준이 만들어 놓은 이름을 그대로 살려 1883년 8월 17일 박문국을 설치하고 0월 30일 한성 순보가 창간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885년 6월 박문국이 중건되고 1886년 1월 25일 한성 주보로 다시 간행되어 1888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 교육 입국 조서

1895년 2월 2일에 ‘교육에 관한 조칙’으로 발표 된 교육 입국 조서는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극명하게 밝혀 주는 것이며, 1895년에 진행된 교육 개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교육 입국 조서의 내용은 교육이 국가 발전의 기반이 됨을 밝히고, 세게의 부강한 국가들이 교육을 통하여 이를 이룩하였으니 교육은 국가 보존의 긴요한 방법이라고 교육의 중요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종래 일부 계층에 제한되어 관리 등용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또는 특수 계층의 신분적 유지를 위한 성격이 강했던 교육이 국가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이룩하는 근본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으로서, 교육관의 일대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또, 교육의 기본 정신도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여, 과거에 실시되었던 교육을 허명 교육으로 비판하였다.
교육의 삼대 강령으로 덕양(德養), 체양(體樣), 지양(智養)을 제시햐여 교육이 지, 덕, 체가 조화된 전인 교육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학교를 널리 세워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국가 발전과 왕실의 안전에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박영효의 교육 이념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1888년 국왕에게 나라의 근대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개화 상소’를 올렸다. 이는 개화 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표현시킨 대표적인 내용으로서 이를 통해 개화 사상의 사상적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상소한 개혁의 방안으로 7개항을 제시하였으며, 그 가운데 교육에 관한 내용을 통해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내용을 ‘교민재덕문예이치본(敎民才德文藝以治本)이라 하여 교육을 정치의 군본이라 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구체적 방안으로 모두 열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앞서 교육의 성격을 논하면서 교육은 인간 생활의 지침이라며, 학교 설립은 국가의 급무라고 하였다. 또, 실용을 앞세운 교육을 강조하여 종래의 교육의 폐단을 비판하고 있다.
교육 개혁의 방안에는 의무 교육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소․중학교의 설립과 고등 교육의 실시, 국사와 국어 국문의 교육, 외국인 고빙을 통한 근대 학술 교육, 서적의 출판과 박물관 설치, 강연회 등 개최로 국민 계몽, 외국어 학습과 신문의 발행 및 종교의 자유 등이 있다. 그 가운데서 박영효는 특히 국사와 국문을 먼저 국민에게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고, 이를 통한 민족의 자각과 부국 강병의 정신적 기반을 이룩할 것을 제시하였다. 자국의 역사를 먼저 교육시킬 것을 강조한 것은 다른 방안에서도 제시하고 있어 그가 내세운 근대 교육이 국민 정신을 고취하여 나라를 지키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박영효의 교육애 대한 생각은 1895년 그가 내부 대신으로 직접 개혁의 실천을 담당하면서 지방관에게 개혁의 세부 항목으로 지시한 내용에서도 '먼저 그 지방의 인민에게 국사와 국문을 교육시킬 것'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교육관이 1895년 근대 교육을 추진한는 기본 이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한국의 근대 교육

한국의 근대 교육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국권을 수호하며, 동시에 자주적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한민족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한국 근대 교육은 전통 시대를 벗어나서 근대에 들어와 실시되었다는 시간적 의마가 아닌 역사적 의마가 큰 것이다. 한국 근대 교육은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적 개혁이 추진되는 내용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자주적인 개혁으로 이루어졌으며, 민족의 의자가 표현된 개혁이었다.
한국의 그낻적 개혁 과정에서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전통 체제를 탈피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이 침략이 수반되는 모순이 나타났으나, 교육 개혁은 전통 교육에서 탈피하면서 동시에 침투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적 논리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 교육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 교육 내용이 민족적 전통을 확인하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국사와 국문이 중요시되었다. 때문에 한국 근대 교육은 어느 때 어떤 상황보다도 민족적 성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근대 민족 교육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 근대적 교과서의 간행

근대 교육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1895년에 근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이라는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갑오개혁이 시작될 당시 관제 개혁에서 학무아문에는 교과서 편찬을 전담하는 부서가 설치되었으며, 그 후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학무아문으로 하여금 소학교 교과서의 편찬을 조속히 실시할 것을 논의하였다. 1895년 5월에 주일본 공사관에 훈령을 보내 교과서 편찬에 참고할 것이니 일본 교과서를 구입하여 보내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교과서 편찬이 1895년 전반에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 교과서가 참고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5년에 학부에서 발행한 교과서는 모두 17종이었으며, 주로 소학교용이었다. 처음에는 학부에서만 교과서가 간행되더니 1900년을 전후하여 민간에서도 간행되었으며, 점차 학부 간행보다도 그 수가 늘어났다. 이는 구가 재정이 교과서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만큼 넉넉하지 못한 이유이며, 국민의 교육열이 증대되면서 부족한 교과서를 민간에서 편찬하였던 것이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는 교육 침략 정책이 실시되고, 사립 학교를 억압하면서 그 교육 내용을 통제하기 위해 1908년 교과용 도서 검정 제도가 실시되어 한국의 교과서는 커다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즉, 통감부는 엄격한 검정 규정을 만들어 일제의 침략을 나타내거나 민족의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담긴 교과서는 이의 사용이나 발행을 금지하면서, 1906년 이전에 발행된 애국적이고 민족전인 교과서도 모두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부터는 검정에 통과된 검정 교과서나 사용이 인정되는 인정 교과서만 학교에서 사용되었다.

▨ 북간도 공립 소학교
연변 지방에서 한국인의 근대적인 교육 기관으로 그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있는 것이 대한 제국 정부에서 설립한 북간도 공립 소학교(北間島公立小學校)이다. 1895년부터 각지에 설립된 공립 소학교에는 한성 사범 학교 졸업생을 교원으로 임명하였으며, 지방 현지에서 부교원을 임용하여 부족한 교사를 보충하였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에는 1905년 3월 17일자로 학부에서 오재영, 김용흡, 김성진, 최정현, 박병휘, 노승룡, 이남섭, 김중경 등 8명이 부교원으로 임용되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규모나 교육 내용에 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공립 소학교의 설립과 경비의 지출이 지방관의 관할 사항이었으나, 부교원의 임용이 학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대한 제국 정부에서는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이주민의 보호와 한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1903년에 간도 지방의 한국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 양성을 제의하기도 하였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정부와 관련 있는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개교는 한국의 행정권 내지 통치권이 이 지역에 행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지고 있는 사실을 1906년 초 한국에 설치된 통감부에서 1907년 간도 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였으며, 간도 파출소의 일본인이 1906년에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서숙을 방해하다가 서전서숙이 자진 페쇄하자 그 터를 사서 그 곳에 1908년 간도 보통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간도 보통 학교는 일제 통감부의 식민지 준비 교육 기관으로서 한민족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인을 만들기 위한 곳이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는 한국의 공립 소학교와 같이 외세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족 교육 기관으로서, 간도 지역에 설립된 한민족 최초의 공적인 교육 기관인 것이다.

▨ 독사신론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신채호가 1908년 대한 매일 신보에 연재한 사론이다.
이는 신채호의 국사관이 형성되는 내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1910년 봄에 최남선이 발행하는 ‘소년’지 제 3 권 제 8 호에 국사신론(國史新論)이라는 제목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게재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족을 단위로 한 민족 국가의 역사를 재구성하자는 것이 그 주지로서, 민족을 역사 전개의 주체로 파악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서론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의 역사는 민족 소장 성쇠의 상태를 열서할 자라.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무할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그 역시 중하다.… 즉, 고대의 불완전한 역사라도 이를 상구하면 동국주족, 단군 후에의 발달한 실적이 밝거늘 어찌하여 우리 조상을 거짓으로 말함이 이에 이르렀느뇨….”

▨ 국사의 연구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민족 운동의 정신적 바탕인 국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국사 연구는 민족 정신의 앙양과 교양을 높이는 데에 주력하였으나, 아직 근대 역사학으로서 학문적 기반은 갖추지 못하였다. 국사연구의 경향은 국민 교양적인 성격을 띠면서 애국계몽 운동으로 연결된 경향과, 국사 교과서로 편찬되어 학교 교육에 연결된 경향으로 구분될 수 있다. 국사 연구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신문이나 학회에서 발행하는 월보에 논설이나 인물 전기 또는 國朝故事등을 연재하여 역사 지식4을 넓히고 민족 정신의 함양에 이바지하였다. 국사 교과서는 국문 교과서와 함께 국민 정신 교육에 기여하였는데, 국사 교과서 편찬에 활약이 컸던 사람은 현채와 김택영이었다. 교과서의 내용은 종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면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군 조선의 강조, 안정복의 삼한정통론 계승, 외침에서 공을 세운 위인이나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의 활동상이 강조되었다. 이 밖에도, 외국인의 건국가와 망국사 또는 피침사와 함께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의 전기가 많았는데 이태리 건국 삼걸전, 월남 망국사, 파란 멸망사, 미국 독립사, 애급 식민사, 비사맥전, 워싱톤전 등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학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읽던 책이었다.

▨ 서유견문

유길준이 지은 서유견문은 그 문체가 전통적인 문체에서 벗어나 국․한문을 혼용하고 새로운 문체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국어학상으로도 귀중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19세기말 외세가 침투하는 상황에서 나라의 자주 독립유지와 근대 국가로 발전하려는 개화 운동의 사상적 측면과 서양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가는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서유견문이 쓰여진 시기는 대략적으로 1885년 12월 그가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길에 정부가 연금되었다가 1892년 11월 자유를 찾게 되는 기간이다. 그는 일본과 미국 유학 중의 자료와 귀국하는 도중에 유럽 각국을 둘러보면서 견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타고 후에 그 원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갑오개혁이 진해오디면서 등용되어 일본에 가는 길에 일본에 원고를 가지고 가서 1895년에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크게 여행기, 서양 문물에 대한 소개, 개화 사상, 애국심의 표현 등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가장 많은 분향은 서양을 소개하는 애뇬으로서, 이에는 국가의 권리, 국민의 교육, 국민의 권리, 정부의 종류 및 정치 제도, 정부의 기능, 조세, 화폐, 법률 등 서양의 정치, 학문과 각종 풍속, 신앙,산업, 문명의 이기 등에 관해 소개와 해설을 함께 싣고 있다.
개화 사상에는 유길준의 개화에 대한 인식, 개화의 개념, 개화의 방법, 개화의 등급 등으로 서술되었으며, 개화를 하는 데 있어 외국 문화를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국의 우수한 문화도 계승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곳곳에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각국의 권리는 논하면서, 아무리 약소국의 군주라 하더라도 강대국의 군주와 동등한 에를 주고받고 있으며, 강대국에서 파견되 ㄴ사신이 약소국의 국왕과 대등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서술한 것은 일반 국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 근대 문학의 경향
190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은 창가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3․조 혹은 4․4조로 된 초기의 형태, 즉 애국가 같은 것은 전통적인 시가에서 연속된 양식이다. 창가의 내용은 개화 사살을 노래한 것과 ‘社會燈(대한 매일 신보)’에서 나타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최남선은 1908년 소년지에 ‘海에게서 少年에게’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신체시라고 불리는 이러한 양식은 일본의 신체시와 비슷하지만 최남선은 그대로 시라고 하였다.
소설은 신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인직의 ‘열의 누(1906)’와 ‘귀의 성 (1908)’, 이해조의 ‘花의 血 (1911), 최찬식의 ’추월색(1912), 안국선의 ‘금수 회의록(19080’등이 대표적이다. 흔히 신소설이라고 하지만 작품 구조상에서는 새로운 것은 없고, 오히려 이전의 소설보다 가부장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여 후퇴한 면도 보이고 있다. 이광수의 ‘무정(1910)’은 일상어의 문체 확립, 작품 구조의 확립2, 장편 소설의 가능성 등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도덕과 구도덕의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삼각 연애 관계의 구조가 민족주의라는 초개인적인 이념으로 결말짓게 되는 이 소설은 당시 한국 지식층이 열렬한 독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한민족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이광수의 소설은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할수 있었다.

▨ 근대 예술의 발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서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국민적 예술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문화와 예술은 양반과 상민의 뚜렷한 구분이 지어져 내려 왔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 양반은 아악을 교양으로 하고 가끔 기악(妓樂)과 광대의 판소리를 그들의 연회 석상에서 연주하도록 하였으며, 평민들은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꼭두각시 놀음 등을 즐겼다. 근대에 와서도 지식인들은 시조나 가곡을 상식으로 알았고, 서민들은 춘향가, 심청전, 토기 타령 등 판소리가 유행하였다.
미술도 양반들의 여가로 즐겼으며, 도화원의 전문 화가도 있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천시되었다. 개항 이후에 미술가들은 직업인으로 위치를 굳혀 갔으며, 1906년을 전후로 하여서는 서양 화풍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반 사회에서는 재래식 미술, 즉 동양화풍이 견지되었으며, 서민층에서는 이른바 민화가 유행되었다. 서양식 유화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진 않으나 1905년 프랑스 공사관에서 개최되었던 외국인 전시회에 한국인이 그린 유화가 출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극은 양반 사회에서는 천시의 대상이 되어 주로 서민들 사이에서 이른바 민속 가면극이 성행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양반이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익살이 대부분이었다. 양주 별산대 놀이가 궁중에서 외국 사신의 영접용으로 공연된 적이 있었지만 연극은 서민들의 독점물이었다.

▨ 근대 과학 기술의 수용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이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 서양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으나, 이는 서양 과학의 정밀성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체계적인 이해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이양선의 빈번한 출몰과 중국의 정세 변화를 통해서 서양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이 천주교의 포교 활동을 위한 수단이라고 이해하면서 이를 배척하였으나, 점자 천주교와 외세의 침략을 과학 기술과는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기술(西器)은 수용하되 서교(西敎)는 배척하는 동도 서기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특히, 부국 강병을 위해 서양 기술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개화 사상과 연결되었으며, 과학 기술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부가 앞장서서 과학 기술을 수용하였다.
농상 공사에서는 독일인을 초빙하여 기술 지도를 받았으며, 일본 유학생 중에는 양잠법을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직조국은 1888년 다량의 방직 기계를 구입하고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였으며, 지조국(紙造局)은 1891년 일본 상인으로부터 각종 제지 기계를 구입하였다. 또, 광산 개발을 위해 1888년 미국에서 채광기를 구입학도 미국인 광산 기술자를 초빙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에 고취되어 민간인들도 서양 과학 기술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각종 기계를 수입하여 근대 공업을 발달시켜 갔으며, 점차 자체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전기와 통신 사업도 확대되어 갔으니, 1887년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되었으며, 1884년에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 사이에 해저 전선의 부설, 1885년 전보국의 설치, 1887년 서울, 공주, 대구, 부산을 연결하는 전선의 부설, 1898년 궁중과 정부 각 아문 사이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가설, 경인 철도의 부설에 이어 경부, 경의 철도 부설되었다. 이 가운데는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에 의한 것이 많이 있으나, 이로 인해 한국에 과학 기술의 보급이 이루어진 면도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 학교가 설립되면서 기술 교육도 실시되었다. 특히, 대한 제국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과학 기술 교육을 위한 학교가 다수 설립되었으니, 기예학교, 경성 의학교, 상공 학교, 철도 학교, 광업 학교, 공업 전습소, 전무 학당, 우무 학당 등이 그것이다.
과학 기술 수용에도 시기적인 특징이 있는데 흥선대원군 때에는 무기를 수용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무기와 각종 기계를 수용하더니, 1895년 이후에는 과학 기술 자체를 수용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기술 교육 정책은 재정 부족으로 곤란을 받았다. 외국인 기술 교사를 초빙하였으나 봉급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국내의 기술 교사는 봉급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또,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경비를 보내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기술 교육 정책은 꾸준히 실시되었다

▨ 제국주의 시대

15세기 이래로 전개되었던 식민지 쟁탈 경쟁은 18세기 말 이후에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각국은 국내의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되어 식민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 혁명의 진전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본국의 공업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확보와 상품의 시장 또는 이민 대상지로서의 식민지가 개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달이 독점 자본주의 또는 금융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잉여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자본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특히, 1870년대 말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극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이 격렬해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19세기 말의 식민지 경쟁은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대외적 위신과 관련되어 각국은 식민지 확보를 가장 중요한 우선 정책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대상 지역도 전세계의 후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각국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보 정책과 이와 관련되어 경쟁 국가에 대항하는 정책을 세계 정책이라고 하고, 이러한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라고 하며,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1870년대 말부터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
지 진출은 경제적 종속과 함께 정치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후진 지역의 전통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변화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각국이 근대화 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적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이는 무력 충돌로 확대되어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19세기 말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 홍선 대원군의 집권

1863년 말 철종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후계자를 둘러싸고 조야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오랫동안의 세도 정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해 오던 안동 김씨 세력이 후계자 문제에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 동안 안동 김씨 세도가에게 억눌려 불우한 생활을 해 오면서도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던 흥선군 이하응과, 역시 안동 김씨의 세력에 반발을 하고 있던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익종으로 추존됨.)의 비인 신정 왕후 조씨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세력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되어, 궁중의 제일 어른의 자격으로 12세 된 흥선군의 둘째 아들에게 후계를 명하니 이가 고종이었다.
그리하여 홍선군 이하응은 왕의 생부로서 홍선 대원군이 되어 국왕이 아직 어린 이유로 자신이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선 대원군의 왕실 제보를 보면 도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정조의 이모제(異母第)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한 사람이 16대 인종의 왕자 인평 대군의 6세손인 남연군이었다. 이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흥선군은 익종(즉, 효명 세자)과 정조의 이모제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과 같은 항렬이 된다. 그러므로 신정 왕후 조 대비는 흥선 군의 아들에게 익종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나아가 안동 김씨에 대해 풍양 조씨의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국왕을 낳은 생부에게 주어진 명칭으로서, 선조가 즉위하자 그의 생부 덕흥군이 덕흥 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이 즉위하여서는 전계군이 전계 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망 후에 대원군의 추존을 받았으나 홍선 대원군은 살아 잇는 대원군으로서 조선 역사상 유일한 경우였으며, 왕이 아직 나이 어리니 국가의 전권을 잡고 야심찬 정치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 19세기 중엽 국내외 정세

1860년대 전후의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커다란 변화와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년 간 계속된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지방 양반과 관리들에 의해 수취 체제 특히 삼정이 그 상궤를 벗어나 운영됨으로써 민생이 파탄에 빠지자 조선 후기 이후 경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성장하고 있던 농민 의식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1862년 진주에서 비롯된 임술 농민 봉기(壬戌農民蜂起)는 삼남 각지에 삽시간에 파급되어 갔다. 이는 당시의 농민들이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와 이를 운영하는 양반 세력에 대항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농민 의식을 대변하여 농민들이 추구하는 변화를 지향하며 전통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현실 사회에 비판적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동학은 조선 왕조의 정치적, 사회적 지배 체제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왕조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확보를 목표로 하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진행되는 시기로서, 일본이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중국은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굴복한 후에 1856년 애로호 사건의 결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굴복하였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연해에는 서양 선박들이 표착하거나 접근하여 와 한국인들의 두려움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함락 소식은 동일한 문화권인 우리 나라에도 서양인들이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안으로 전통 체제를 위협하는 농민들의 봉기, 밖으로 식민지 침략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접근은 국가의 자주권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대내외로 위기에 당면한 당시 조선 왕조로서는 이에 대처하는 정치 개혁이 필수적인 시대 상황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 통상 수교 거부 정책

1863년 말 집권한 홍선 대원군은 서양과 일본의 통상 수교 요청을 반대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천주교를 박해하여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를 다수 처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며, 통상을 요구하는 제너럴 셔먼 호의 침몰에 대한 책임 문제를 들어 강화도에 침입하여 수교를 강요하면 미국을 격퇴하였다. 일본의 수교 요구를 서계(書契) 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일반적으로 쇄국 정책으로 표현하여 왔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추진된 것이다. 천주교의 박해도 천주교도들이 그 신앙 문제와 관련시켜 외세와 연결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실제로 1860년 이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월경하여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하여 베이징을 함락시킨 것도 1860년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침략의 시작이 통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당시에 열강의 통상 및 수교 요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는 침략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홍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외세, 즉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이었으며, 이는 민족의 이익과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 윤리와 체제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타협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보수성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였다. 종래 쇄국 정책에 대한 설명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이고 고루한 정책으로서, 이로 인해 한국의 서양 문물 수용이 늦어졌으며 근대화에 지각하게 되었다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 통상이나 수교를 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으며, 이를 거부하는 조선 왕조의 정책이 그들에게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쇄국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은 동양 3국(중국, 일본, 조선)이었으며, 이들 3국은 그들의 침략 대상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해 쇄국 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들의 이익이 수반된 수교 요구를 조선이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쇄국 정책은 침략자가 그들의 국가 이익의 차원에서 상대방을 폄하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홍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강요로 맺어진 강화도 조약과 이로 인해 이루어진 개항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공헌이라는 것을 보다 과장하기 위해서도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비판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쇄국이라는 의미가 국가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침략 세력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음이 역사적 진실이라면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 수호를 위한 정책을 비판하는 결과이다. 쇄국 정책이라는 표현은 주체적인 역사 이해의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과거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일본이나 서양의 침략적 성격에 대응하여 자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 호포법(戶布法)의 실시

조선 왕조의 재정 수입은 농민들이 부담하는 조세 징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조선 왕조의 수취 체제(收取體制)의 대표적인 내용은 삼정(三政)으로 표현된다. 이 가운데 군정(軍政)에 해당하는 군포의 수납은 영조 때 균역법에 의해 농민의 부담이 감소되었으나, 양반들은 면제되었으며, 이전부터 관행으로 내려온 각종의 부정이 자행되어 농민들의 부담은 많아지고, 이에 대한 불만이 높아 갔다. 1862년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安劾使) 박규수(朴奎壽)는 민란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이의 개혁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삼정이정청(三政嫠正廳)을 설치하고 삼정의 개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동포제(洞布制)로서 일부 양반에게도 군포의 부담을 의무화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정이 정청의 개혁안은 철종이 곧 죽어 시행되지 못하고 홍선 대원군에 의해 시행될 수 있었다. 홍선 대원군은 재정 수입의 증대와 농민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양반들은 그들이 평민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양반의 반발을 막고 그들의 위신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양반의 이름 대신에 하인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매호당 2냥씩 징수하는 균등 과세의 원칙을 세웠다.

▨ 서원의 정리

조선 후기에 양반들의 세력 기반의 확충을 위한 서원의 남설이 계속되어 18세기 말 정조 때에는 전국적으로 65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국가 재정의 낭비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농민들에게 많은 폐단을 주었다. 서원을 통한 지방 양반들의 횡포는 민심을 이반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경우에도 세도가에 눌려 불우한 생활을 할 때 이들 서원의 비행과 횡포를 직접 경험하면서 그 폐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집권을 하자 곧 전국의 서원과 향사(鄕祠)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명령한 후, 곧이어 서원의 사설 및 남설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1865년 3월 횡포가 극심하여 백성의 원성이 가장 높았던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유생들은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홍선 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이를 벌할 것이다.”라고 하며 강경하게 그의 의지를 실현시키며 아울러 전국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을 남겨 두고 모두 철폐하도록 하였다. 서원 정리 작업은 경복궁의 중건 사업,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는 동안일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871년 신미년에 이를 마무리지었다. 서원 정리 결과 막대한 토지가 국가에 환수되었으며, 농민들의 불법적 부담이 감소되어 크게 환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반 세력은 홍선 대원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홍선 대원군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사창제(社倉制)의 실시

홍선 대원군의 재정 확보책과 민심의 안정을 위한 개혁에서 수취 체제의 개혁은 중요한 비중을 가진다. 1867년(고종 4년) 삼정의 하나인 환곡(還穀)제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환곡의 폐단은 삼정 가운데서 가장 피해가 컸었떤 것으로, 지방에서 관리와 토호들이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는 것으로 환곡이 많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환곡은 농민 구휼책의 하나로 정부에서 면을 단위로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1/10의 이자를 받아들여 국가 세수에도 이바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곡의 배정과 운영에 있어 양반 지주와 토호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고, 각종의 불법이 저질러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이에 따른 원성이 높았다. 홍선 대원군이 실시한 사창제의 내용은 면을 단위로 하던 것을 리(里)를 단위로 하여 사창을 설치하고, 마을 안에서 덕망이 있으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사수(社首)라고 하여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사창제의 실시로 환곡의 폐단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농민의 생활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환곡제 실시에 수반되었던 각종 비리가 줄어들고 국가의 원곡(元穀)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이자 수입이 늘어나 재정 수입이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홍선 대원군의 국방 강화책

홍선 대원군은 집권 직후 서양 세력의 침략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관계를 개혁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종래에는 비변사에서 정치와 군사를 총괄하여 상대적으로 국왕의 군사에 대한 통제권이 취약하였으나, 비변사를 철폐하여 정무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삼군부에서 전담하도록 한 것이다. 군사 체제의 개편에서는 우선 수준 통제사의 지위를 격상시켜 수군을 우대하여 연안의 방비에 관심을 기울였고, 오가작통법을 부활시켜 일종의 민병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강화도를 중심으로 연안에 포대를 확충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수도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우수한 군인을 뽑아 군사 기술을 연마시키고, 특히 서북 지방의 포수를 따로 뽑아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신무기 개발에도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수뢰포와 선박 등의 제조와 실험, 방탄복의 제작 등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력 침략에 대비하여 우수한 서양 기술을 수용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 병인양요(프랑스의 강화도 침략)

병인박해를 계기로 하여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한 것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 1차는 1866년 8월 12일(양력 ; 9월 20일)에서 8월 22일(양력 ; 9월 30일)까지, 제 2차는 9월 5일(양력 ; 10월 13일)에서 10월 12일(양력 ; 11월 18일)까지이다. 12명의 선교사 가운데 3명만이 살아 남았다는 리델 신부의 소식을 들은 톈진 주재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se) 제독은 본국과 연락을 취하면서 3척의 군함으로 남양만을 거쳐 강화 수로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염창, 양화진, 서강까지 왔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7척의 군함에 6백 명의 병력으로 재차 침입해 와서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은 그들이 강화도를 점령하면 조선 정부가 쉽게 항복 하리라고 기대하였으며, 강화성을 공격, 점령하고 나서는 통진을 공격하였으며 문수산성까지 정찰하였다. 대원군을 필두로 조선 정부에서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정부는 강력하게 양이보국(洋夷保國)을 내세우면서 항전을 준비하였으며,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비밀리에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10월 3일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에 도착하자 잠복하였던 선방 포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큰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방화, 약탈하고 다수의 서적을 약탈하고 패주하였다. 프랑스군이 격퇴된 후에 조선에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며, 홍선 대원군의 서양 배척 정책은 강화되었다.

▨ 신미양요(미국의 강화도 침략)

1871년 3월 미국의 주청 특명 전권 공사인 로우(Low, F.F)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아시아 함대의 로저스(Rodgers, J.)사령관으로 5척의 군함과 대포 85문, 123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는 5년 전인 1866년 1척의 미국 상선이 행방 불명되었는데 그 소식을 알길이 없더니, 병인박해 당시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를 통해 대동강에서 서양 선박 1척이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미국 정부에서는 이를 계기로 조선에 무력적 위협을 가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정책이 결정된 결과인 것이다. 미국 군함은 남양만을 지나 강화 해협에 이르러 4월 29일 우세한 화력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병인양요 이후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고, 더욱이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을 계기로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여서 연안의 방비를 엄히 하고 있었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여기는 어재연이 경군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며, 미군의 공격에 백병전으로 저항하여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일시 광성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미군도 조선군의 저항이 의의로 완강하였으며,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미군은 광성진을 방화한 후 퇴각하였다. 광성진의 함락과 어재연의 전사는 조선의 조야에 커다란 공포가 되었으나, 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척양 정책을 표방하면서 척화비를 각 지역에 설치하여 양이 격퇴의 의지를 보였다. 앞서 프랑스군의 침입에 뒤이은 미군의 침입 사건은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지게 하였으며, 보다 강경한 양이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서양과의 수교가 더욱 시간이 지연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제너럴 셔먼 호 사건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략하기 직전인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이르렀다. 이 배에는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 W.B.)이 조선과의 교역을 트기 위해 서양인 5명과 중국인 13명을 포함한 19명과 통역으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Thomas, R.J.)가 타고 있었다. 당시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는 중군 이현익을 보내 조선이 외국인과 교역하지 않는 국법이 있으므로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그를 잡아 가두는 횡포를 저질로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으나, 물이 점차 원래의 수위로 돌아옴에 따라 셔먼 호는 강바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잡힌 중군을 구해 낸 후 박규수는 셔먼 호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려 화공과 포격을 가하여 결국 셔먼 호가 침몰하고, 승무원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 척 화 비

1871년 신미양요에서 강화도에 침략해 온 미국과 싸우는 과정에서 한동안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일시 광성진이 함락당하고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크자 이를 격퇴하는 것은 지구전으로 대항하면서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한 흥선 대원군은 국왕의 교서를 통해 “양이가 화(和)를 하고자 함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수천 년의 예의 국가가 어찌 견양(犬羊)과 상화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몇 년을 지낸다 하여도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배척할 것이며, 만약 화(和)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는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洋夷侵 非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 통상 개화론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후 척양(斥洋)․척왜(斥倭) 정책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에 일부 선각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외국과 통상을 하며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생각은 이미 실학자들, 특히 북학파들이 제기하고 있었는데 박제가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규경, 최한기 등 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에 의해 상당히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경석의 경우는 역관으로 중국에 자주 왕래하면서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 서양을 소개하는 서적을 가지고 와서 이를 서로 읽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에 관심을 가졌으며,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통상 개화론은 뒤에 개화 사상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서계(書契) 문제

1868년 일본에 새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그들의 왕정 복고 사실을 대마도주(主)를 통해 조선에 알리는 외교 문서, 즉 서계를 동래 부사에게 전하였다. 이 때, 초량(草梁)왜관에 왜학 훈도 안동준이 이 서계를 받아 보니 그 내용 속에 ‘皇上’, ‘ ’, ‘ ’ 등 중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문구가 있으며, 종래 대마도주 종씨(宗氏)가 사용하던 조선 정부에서 보내 준 도서(圖書, 즉 도장)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0년에는 일본 정부가 직접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과 교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서계의 내용을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불평 세력이 등장하였고, 이들 세력을 나라 밖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정한론이 제기되었으며, 대만 출병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일본과의 분쟁을 피하고 관계를 개선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74년 다시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서계 수용 문제가 논의되어 일본은 다시 서계를 가지고 왔으나, 그 내용에 ‘大日本’, ‘皇上’등의 문구가 여전히 들어 있어 실제로 교섭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 운요 호 사건

1875년 일본과 서계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정한론이나 대만 출병 사실과 관련하여 일본과 수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박규수, 이최응, 양헌수 등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다수 의견은 서계의 내용과 그 절차 문제 등을 내세워 수교할 수 없다는 의견이어서 협의가 결렬되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일각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의견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무력을 수반한 교섭을 강요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그리하여 1875년 4월 세척의 군함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였고 그 중에 운요 호는 부산에 입항하였다가 다시 동해에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갔다가 나가시키로 돌아갔다. 8월에는 조선의 해안에서 중국에 가는 항로를 조사한다고 하면서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다. 항로 조사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조선과의 무력 충동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하여 수교 교섭을 강요하려는 술책이었던 것이다. 운요호에서는 먹을 물을 구한다고 보트를 내려 강화도의 초지진 포대로 접근하는 외국 선박을 응징하기 위해 포격을 가하였다. 운요호에서는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와 초지진이 파괴되었으며, 돌아가던 운요호는 영종진에 대해서도 포격을 가하고 상륙하여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수교를 강요하기 위한 정략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일본의 대 한국 침략의 시발이었던 것이다.

▨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

1875년 12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구로다를 특명 전권 대신으로 하여 8척의 군함과 6백여 명의 병력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가 강화도로 향하였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대의 추가 파병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수반하여 조선을 굴복시키겠다는 계획적인 침략 행위였다. 1876년 1월 조선 신헌(申憲)을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강화도 연무당에서 담판이 벌어졌다. 회담이 시작되기에 앞서 일본은 함포를 발사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대를 상륙시키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세 차례나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례한 태도로 회담이 결렬되다시피 하였다. 고종이 정부 고관들의 대책 회의를 소집하였을 대 당시 조선 조정의 다수 의견은 일본의 침략 도전 행위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 때, 박규수는 일본과 수교를 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본이 수호를 청하면서 병선을 대기하였으니, 그 실정은 예측할 수 없으나, 수호 사절(修好使節)이라고 말하니 우리가 먼저 공격할 수 없으며, 만일 의외의 일이 일어날 경우 용병(用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천리 강토가 내수외양(內修外攘)의 방책을 다했던들 조그만 섬나라가 이처럼 우리를 감히 엿보고 공격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군대로써는 일본의 군대 힘을 막을 수 없으니 그들의 청을 들어 수호를 맺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박규수의 의견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이홍장이 조선에 대하여 일본과의 수교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내 왔다. 국내의 수교 허용론의 대두, 청국의 권고,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강압적 위협 등이 일본과의 수교 조약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접견 대신 신헌에게 “우리 나라는 일본과 3백 년 동안 통신사를 보내고 왜관을 설치, 호시(互市)하여 왔다. 비록 수 년 이래에 서계 문제로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자는 처지에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 등이 서로 편리하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신헌은 즉시 일본측과 교섭을 진행시켜 일본이 제안한 12개조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 강화도 조약의 내용

〈제1관〉 조선국은 자주지방이며 일본과의 평등지권을 보유한다. 이후 양국이 화친의 성실을 표하려 할 때에는 피차 동등한 예의로써 서로 대우하며 추호도 침월(侵越) 시혐(猜嫌)하여서는 안 된다. 우선 종전에 교정(交情)을 저해하는 환이었던 여러 예규를 일체 혁파하고 관유홍통(寬裕弘通)의 법을 개확(開擴)하여 서로 영원한 안녕을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경성에 파견하여 예조 판서와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의 장단은 모두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조선 정부 또한 수시로 사신을 일본국 동경에 파견하여 외무경과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제3관〉 이후 양국 왕래 공문은 일본의 그 국문을 사용하되 10년간은 따로 한문 역본 1통을 첨가하고 조선은 진문을 사용한다.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진에는 일본 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 구역이 되어 있다. 이제 마땅히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을 혁파하고 새로 만든 조약에 의거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또한, 조선국 정부는 따로 제 5관에 기재된 2개 항구를 열어 일본국 인민의 왕래 통상함을 들어 주어야 한다. 이 곳에 대지를 임차하고 가옥을 지으며, 혹 이 곳에 거주하는 조선 인민의 가옥을 임차함에 있어서도 각기 그 편의에 맡긴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처를 택하여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선박이 조선국 연해에서 혹 대풍을 만나거나 혹 땔감과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에 도달하기가 불능할 때에는 연안의 어떠한 항구에라도 기항하여 위험을 피하고 선구를 보충, 수선하며 땔감 등을 구입하도록 한다. 그 지방에서 공급한 비용은 선주가 배상하여야 되지만 무릇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는 지방 관민은 특별히 인휼을 가하고 구원을 다하도록 하고 보급에도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양국의 선박이 대양 중에서 파괴되어 선원이 표착하는 경우에는 그 지방 인민이 즉시 그들을 구휼, 생명을 보전하게 하고 지방관에게 보고하여 해당 지방관은 본국으로 호송하고나 그 근방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인도한다.
〈제7관〉조선국 연해의 도서 암초는 종전에 조사를 거치지 않아 극히 위험함에 일본국 항해자로 하여금 때에 따라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하고 그곳의 깊고 얕음을 살펴 도지를 편제하게 하여 양국 선객에게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도모하게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 지정 항구에 시의에 따라 일본국 상민을 관리하는 관원을 설치할 수 있다. 만약 양국이 교섭할 안건이 있을 때에는 그 곳 지방 장관과 만나 협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니 피차의 인민은 각자 임의에 따라 무역을 하며, 양국의 관리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지 못하며 제한 금지도 못한다. 만약 양국의 상민이 서로 속이거나 임차한 것을 보상하지 아니할 시는 양국 관리는 포탈한 상민을 나포하여 보상하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보상하지는 않는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항구에 재류 중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 인민과의 교섭에서 일어난 것이면 공평하게 조선국의 사판(査辦)에 돌아간다.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되 조금이라도 범죄를 비호해서는 안 되며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제11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므로 따로이 통상 장정을 만들어 양국 상민의 편의를 도모함이 마당하며, 또한 현금 의립한 각 조관 중에 다시 세목을 보완 첨가하여 조건에 준조(遵照)함에 편리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6개월 내에 양국이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 또는 강화부에 파견하여 정하게 한다.
〈제12관〉 위에서 의정된 11관의 조약은 이 날부터 준수한다. 양국 정부는 이를 변혁할 수 없으며, 영원히 신의를 가지고 준수하여 화의를 돈독히 한다. 이를 위해 약서 2통을 작성하여 양국이 위임한 대신이 각각 조인하고 상호 교부하여 빙신(憑信)으로 삼는다.
이 조약은 일본의 무력에 강요된 타율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이 미국과 체결하였던 미․일 조약의 내용의 불평등 내용을 그대로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며, 또한 조약의 내용이 쌍무적이 아니라 조선의 일방적인 의무만을 강요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근대적인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조선이 포함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근대 자본주의의 침략의 물결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의 출발이 된 것이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 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 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따.

▨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역점을 두었던 것이 개항장의 확보였다. 이를 통해 그들의 한 국 침략의 기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 조약에는 제 4, 5 관에 이에 관련된 조항으로 부산과 다른 두 개의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였는데, 두 개의 항구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에서 택하되 조약 체결 후 20개월 후에 개항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원래부터 동해안의 원산과 서해안의 인천을 지목하고 있었으나, 조선측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원산은 부근 함흥이 태조 이성계의 탄생지이며 인근에 그 조상들의 무덤이 남아 있어 이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며, 인천은 바로 서울의 인후이므로 수도의 방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 반대하였다. 그 대안으로 조선측은 동해안은 청진이나 나남, 서해안은 군산이나 목포 또는 진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원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으로서, 인천은 서울과 가까워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원산은 일본의 요구로 1879년 7월에 개항하였으나, 인천의 경우는 조선측이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1880년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할 때, 이 문제를 일본 정부 당국과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일본의 압력으로 1881년 2월 인천을 개항할 것을 결정하여 20개월 뒤인 18882년 8월에 개항하게 되었다.

▨ 조선 책략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1879년 서울에 공사를 상주시키고, 원산에 이은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곡물 수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일본 정부와 직접 협의하기 위하여 제 2차 수신사로 김홍집을 파견하였다. 1880년 5월에 일본으로 간 수신사 일행은 일본측의 회담기피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김홍집이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 청국 공사 하 여장(何如章)과 참찬관 황 쭌셴과 만나 필담을 통하여 당시의 국제 정세를 논하였다. 황 쭌셴은 청국에서는 유럽의 소식에 밝은 인물로 서양 여러 나라의 정세를 김홍집에게 알려 주었다. 특히, 그가 저술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김홍집이 가지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이 책은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기본적인 내용은 방아론(防俄論)으로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조선의 외교 방향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방으로 추진해야 될 것을 제시한 것이다. 또, 조선 책략에는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조선에서의 부정적인 생각을 해소시키려는 내용도 들어 있었으며,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서양의 다른 나라와도 수교하는 것이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정부가 미국과의 수교와 개화 정책의 추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에 반하여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1876년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과 수교를 하게 되자 구미 국가 가운데 미국이 특히 조선과의 수교를 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는 1866년 제너럴 셔먼 호의 불행한 사건과 함께 1871년 신미양요로 두 나라의 수교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조선과 수교에 성공한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 교섭을 하려 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의 독점적 활동을 위하여 다른 나라가 조선과 수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중재하기를 꺼리자 미국은 청의 이홍장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조선과의 수교가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조선과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다. 조선과의 교섭을 책임 맡은 슈펠트 제독은 1880년 7월 이홍장의 초청으로 톈진으로 가서 회담하였으며, 1881년 7월 두 번째의 회담을 하였다. 이 때,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간 어윤중이 톈진에 가서 미국과의 수교 문제로 이홍장과 협의하였으며, 1882년 영선사 김윤식이 톈진에 오자 그도 이홍장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여 미국과의 수교 윤곽이 잡혀 나갔다. 이홍장이 조선과 미국꽈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외국과의 수교를 중재함으로써 조선에 청의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것과, 외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청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알려 그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조선에서 독점적인 일본의 지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미국과의 조약문은 조선 대표들이 참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청과 미국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1882년 5월 조선 대표인 신헌은 도장만 찍었을 뿐이었다. 조․미 통상 조약은 전문 14개조로 되었으며, 그 내용은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과 큰 차이가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다만, 제 1 관에 양국은 서로 거중 조정(居中調整 ;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뒤에 조선과 미국이 각각 그 해석에 있어 견해를 달리하였는바, 조선에서는 동맹 조항으로서 공수 동맹 또는 군사 동맹으로, 미국에서는 외교적인 우호의 표시로 해석하였다.
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 수신사 김기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측이 사신을 파견해 주기를 요청하자 의례적인 형식으로 조선 정부에서는 예조참의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3개월 만인 1876 4월 29일 일본측이 주선한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가서 20여일 동안 도쿄에 체류하였다. 수신사 일행은 75명으로 일본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전신, 철도, 군함, 대포 제조, 군사, 기계, 학술, 교육 등 각분야를 시찰하면서 일본의 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하였다. 일본은 수신사를 통하여 일본의 발전 모습을 조선에 보임으로써 그들의 힘을 과시할 필요에서 수신사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김기수는 귀국 후에 국왕에게 복명하면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국왕에게 소개하였으며, 국왕의 개화 의욕을 북돋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귀국 후에 지은 일동기유(日東記遊)는 일본의 개화된 모습을 알려 주고 있다.

▨ 수신사 김홍집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해결해야 될 현안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측에서는 현안 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실정을 보다 상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제 2차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현안 문제는 일본이 1879년 원산의 개항을 요구하면서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자 이에 대처하는 문제와 미곡의 유출을 줄이는 것과 관세 배상 문제 등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김홍집을 수신사로 임명하였는데, 그 일행 가운데 주요 인사들은 윤웅렬, 이조연, 강위, 지석영 등이 포함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수신사 일행에 대한 접대는 후하게 하였으나, 수신사의 방일 목적이 일본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었으므로 일본 정부의 고관들은 김홍집과의 면담을 의도적으로 기피하여 수신사는 방일의 목적을 달



성할 수 없었다. 이에 김홍집은 주일 청국 공사관에 자주 들렀으며, 황 쭌셴이 지은 조선 책략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강화도 조약 이후 새로운 외국 문물의 수용과 외국과의 교섭 및 통상 등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의 개편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청국의 총리기무아문을 모방하여 1880년 12월(음) 종래의 의정부와 6조와는 별도로 정 1 품 아문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군국의 모든 일을 총령하여 그 권한이 방대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설치된 지 2년 후에 군국기무 등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과 외교 통상을 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나누어졌다.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당시의 12사와 그 업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대사 ; 중국과의 외교
교린사 ; 일본 및 각국과의 외교
군무사 ; 경향의 군사 사무
변정사 ; 국경 사무, 인근 국가의 동정 및 정탐
통상사 ; 외국과의 통상
군물사 ; 병기 제조
기계사 ; 각종 기계 제조
함선사 ; 각종 선박 제조
기연사 ; 연안 포구 왕래 선박 검사
어학사 ;각국 언어, 문학의 번역
전선사 ; 관리 선발과 관용품 조달
이용사 ; 재정 사무
통리기무아문 총리 대신에 영의정 이최응을 임명하였으며, 당상관으로는 김보현, 민겸호, 김병덕, 윤자헌, 조영하, 정범조, 신정희, 민영익, 이재긍, 김홍집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보수적 경향을 띤 인물이었으며, 개화파에 해당하는 인물은 김홍집 등 극소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은 1884년 의정부에 통합되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남아 있었다.

▨ 군제 개편과 별기군의 설치

개화 정책의 추진과 함께 부국 강병의 일환으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군제의 개편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군제의 개편과 동시에 신식 군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기존 군제는 5영으로 나뉘었던 것을 무위영과 장어영 2영으로 통합하여 이경하와 신정희를 각각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별기군이란 신식 군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별기군은 1880년 김홍집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윤웅렬이 중심이 되어, 기존 군대에서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1881년 4월 무위영 소속으로 출발하였다. 별기군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대로 소총으로 무장하여 신식 훈련을 받았다. 교련소 당상에는 민영익, 정령관에 한성근, 좌부령관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원, 참령관에 우범선이었으며, 교관으로 일본군 소위 호리모도를 초빙하여 서대문 밖 모화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후에 하도감으로 옮겼다.

▨ 신사 유람단의 파견

강화도 조약 이후 김기수와 김홍집 등 두 차례의 수신사가 일본에 다녀온 뒤 일본이 발전한 모습이 소개되자 나라의 개혁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던 고종과 개화파 관료들은 개혁을 위한 자료의 수집과 일본의 실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대규모의 시찰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국내 사정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대하여 경계하면서, 특히 김홍집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을 둘러싸고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시찰단을 공개리에 파견하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동래부 암행 어사로 발령하여 비밀리에 부산에 집결하도록 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람단으로 소개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시찰단은 12개 반으로 총 인원 60명으로서 각 반의 책임자는 전직 관리로 하고 수행원과 통역 및 하인들로 구성되었다. 각 반의 책임자는 개인적으로 국왕으로부터 시찰 대상에 대한 지시를 받고 귀국 후에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었다. 이들은 1881년 4월 10일(음력)에 부산을 출발하여 약 3개월 뒤에 귀국하였다.
12개 반의 책임자와 수행원, 그리고 시찰 대상은 다음과 같다.
책임자수행원시찰부서조준영
박정양
엄세영
강문형
조 병
민종묵
이헌영
심상학
홍영식
어윤중

이원희
김용원이봉식, 서상직
왕제응, 이상재
엄석주, 최성대
강진형, 변택호
안종수, 유기환
민재후, 박회식
이필영, 민건호
유진태, 이종빈
고영희, 성낙기, 김낙운
유길준, 유정수,
김량한, 윤치호
송헌빈, 심의영
손붕구문부성
내무성, 농무성
사법성
공무성
세관
외무성
세관
조폐
군부
대장성


군부
이들 책임자와 수행원들은 그 후 정부 내의 근대적 전문가로 발전하여 개화 정책의 추진에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수행원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유학생으로 남아 있도록 하였으니, 어윤중의 수행원이던 유길준과 유정수는 경응 의숙, 윤치호는 동인사(同人社), 김량한은 조선소에서 공부하였다. 또, 이원희는 특별히 일본에서 총포와 군함을 구입할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참모로 임명된 이동인이 급작스럽게 암살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 영선사의 파견

1881년 9월 정부에서는 개화 정책의 구체적인 표현의 하나로 무비 자강의 계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청의 부국 강병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톈진의 군사 공업 기지로 가서 근대식 병기 기술을 학습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직예총독 이홍장의 건의가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유학생 38명을 포함한 70여 명의 일행이 청국의 톈진에 있는 기기국으로 떠났다. 당시 유학생들은 주로 공장들이었다. 이들은 9월 26일에 떠나 11월 17일에 북경에 도착하고, 관리들과 협의하여 1882년 1월 38명의 유학생은 기기국의 동․남국 및 수사(水師) 학당과 수뢰(水雷)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무기 제조법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 각 분야와 외국어도 습득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1882년 10월 학습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중에 귀국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먼저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영향도 있었으며, 학도 중에는 각종의 사유로 도중에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재정의 어려움으로 유학 경비의 조달이 어려워졌으며, 서울에 기기창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유학생들의 귀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영선사의 파견은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학도들의 비교적 체계적인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학습에 따라 과학 기술의 수용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귀국한 다량의 과학 기술서적과 기계류는 이후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유학생들이 귀국한 후 그들이 중심이 되어 기기창(機器廠)이 설립되었다. 한편, 영선사로 청국에 가 있던 김윤식은 이홍장과 교류하면서 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는 데 활약하였다.

▨ 척화 주전론

19 세기 중반 이후 서양 열강의 침략 세력의 접근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권과 민족 문화 전통을 수호한다는 사상적 기반으로 전개된 것이 척화 주전론이다. 1866년 프랑스의 침입 사건은 서양의 침략 위협이 직접 현실화되는 것으로서,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즉, 병인양요는 군사적인 침략일 뿐 아니라 서양 자본주의의 경제적 침략이었으므로, 군사상, 경제상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시대 상황에서 제기된 사상이었다. 이는 병인양요 당시 사직소를 제출한 이항로의 상소 내용에 가장 대표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그는 서양의 침략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보고, 이를 막아 싸워 물리쳐야만 국가의 보존과 민족의 생존이 유지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안으로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주장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 왜양 일체론

1876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화도 조약의 체결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일본과의 조약 체결은 서구의 자본주의 침략 세력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 나라에 침략하는 것으로 보고 일본과의 수교와 개항을 반대하는 논리로 제기된 척사론이다. 이 주장은, 강화도 조약을 반대한 최익현의 상소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최익현은 조약 체결의 불가함을 오불가소(五不可疎)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첫째,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자주의 위기, 둘째,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 산업의 파괴, 셋째 일본은 서양의 적과 같으며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 예의의 위기, 넷째,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자에 대한 약탈의 위기, 다섯째, 일본은 금수와 같으므로 문화 민족인 우리가 그들과 교류할 때에 도래할 문화의 위기 등이다. 이는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우리에게 닥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의 위기를 통찰한 주장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의 우월한 문화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최익현의 왜양 일체론은 단순히 일본과 서양이 동일하다는 각도에서 나타난 배타적인 척사론이 아니라, 일본이 서양의 침략 세력과 동일하게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므로 이에 대해 그들보다 우수한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함께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신사 척사 운동

1880년 후반부터 시작되어 1881년에 격렬하게 전개된 척사 운동이다.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은 고종과 개화 세력의 적극적인 개화 정책의 추진에 자극제가 된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통을 고수하면서 밖으로부터 침투하는 이질 문화 내지 이와 결부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침략 세력을 막아야 된다는 척사론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척사론자들은 적극적 개화 정책의 계기가 된 조선 책략을 비판하고 이를 들여 온 김홍집을 비난하면서 나아가 정부의 개화 정책을 비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고종을 비난하기에까지 이르러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척사론의 주장자들인 유생들은 집단적인 상소 운동을 전개하여, 영남 유생 이만손의 만인소, 강원도 홍재학의 만인소는 그 대표적이다. 신사 척사 운동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개화 세력과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는 위정 척사 세력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개화와 보수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19세기 말 근대화의 추진과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자주권을 수호해야 하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서 민족의 대응 과정이 내부적 분열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나타낸 결과를 초래하였다.

▨ 제물포 조약

1882년 임오군란으로 서울의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으로 별기군의 교관인 호리모도 소위와 육군 어학생 2명과 외무성 순사 1인이 살해되었다. 청군의 개입으로 난이 끝나고 홍선 대원군이 납치되자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의 사과와 배상 요구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한 군대 출동 등을 결의하고 조선에 압력을 가하였다. 일본으로 쫓겨갔던 하나부사 공사가 서울로 돌아오자 조선의 전권 대신 이유원과 부관 김홍집은 그를 상대로 협상을 시작하여 1882년 7월 6개조로 된 제물포 조약과 수호조규속약을 체결하였다.

<제물포 조약>
제 1 조.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범인을 체포하여 엄징할 것.
제 2 조. 일본국 피해자를 후례로 장사 지낼 것.
제 3 조. 5만 원을 지불하여 피해자 유족 및 부상자에게 급여할 것.
제 4 조. 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
제 5 조. 일본 공사관에 군대를 주둔시켜 경비에 임하는 것을 허용할 것.
제 6 조. 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여 일본국에게 사죄할 것.
<수호조규속약>
제 1 조. 부산, 원산, 인천 각 항에 일본인 이정을 사방 각 50리로 하고 2년 후에는 다시 100리로 할 것.
제 2 조. 일본 공사와 영사 및 그 수행원이 조선 내지 각처를 여행할 수 있게 할 것.
이로 인해 일본인의 한국 내 왕래가 활발해져서 경제적 침투가 더욱 유리해졌으며, 특히 제물포 조약에 의해 서울에 공사관 호위라는 명목으로 일본 군대가 상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일본국에 사죄 사절을 파견한다는 조약에 따라 박영효를 정사, 김만식을 부사, 서광범을 종사관으로 하는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이 때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

임오군란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을 하게 된 청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에 뒤진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청국측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선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조선측에서도 조선 책략에 제시된 친중국론을 실행하고 조선을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선 내의 일본 상인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청 상인들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882년 8월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간섭을 증대하고 일본에 대항하는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청은 조선과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전문 8조로 된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며, 청국 상인들의 특혜를 인정하고, 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 상무 위원을 파견하는 한편, 그의 치외 법권을 인정하며, 종래 실시하던 국경 무역을 개방할 것 등이다. 이 조약은 결과적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강화한다는 데 있었으며, 청 정부의 보호 밑에서 청 상인들이 각지에서 활동하여 일본 상인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농촌의 경제적 파탄이 가속화되었다.

▨ 개화 사상에 영향을 준 서적

19 세기 중엽 이후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무물에 대한 정보는 주로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이었다. 이들 서적에는 중국인이 저술한 것도 있으며, 많은 분량이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조선 후기에도 같은 현상으로 천주교에 관련된 서적은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얻게 해 주는 정보원이 되었던 것이다. 개화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도 이는 같은 상황이었다. 1880년대 이후에는 일본이 신지식의 통로로 활용되었지만 아직도 중국은 중요한 통로였다. 이는 당시의 지식인의 지적 바탕이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와 개화파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요 서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역사․지리>
해국도지(海國圖志 ; , 1844년), 영환지략(瀛環志略 ; , 1850), 지구설략(地球說略 ; 미국 선교사 Richard Q. Way, 1856), 보법전기(譜法戰記, 王 , 1872)
<정치․법률>
조선 책략(朝鮮策略, , 1880), 만국공법(萬國公法, 미국 선교사 William Alexander Par - sons Martin, 1864), 흥아회잡사시(興亞會雜事詩 ; 1880년 일본에서 설립한 친목회 흥아회 회원들이 지은시), 이언(易言 ; , 1880)
<자연 과학>
격물입문(格物人門 ; 1866), 박물신편(博物新編 ; 영국 의사 Benjamin Hobson, 1855)
<신문․잡지>
신보(申報 ; 영국 상인 Ernest Major, 1872), 만국공보(萬國公報 ; 미국 선교사 Yong J. Allen, 1868),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 미국 선교사들, 1872), 격치휘편(格致彙編 ; 미국 선교사 John Fryer, 1876)
<한국인 저술 및 번역>
기화근사(箕和近事, 김옥균), 지구도경(地球圖經, 박영교), 농정신편(農政新編, 안종수)

▨ 한성 순보(漢城旬報)의 발행

한성 순보는 1833년 10월에 창간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이다. 일간이 아니고 관보의 의미도 있어 신문이라고 하기에 미비한 점도 있으나, 새로운 소식을 게재하며 정기적으로 발행되었으며, 그 체제가 신문의 형태를 따랐기 때문이다. 1882년 말 임오군란의 결과 일본에 수신사로 간 박영효는 신문이 개화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귀국하면서 일본의 신문 기자와 인쇄 기술공을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한성 판윤으로 임명되자 신문 제작의 실무를 유길준에게 위촉하였다. 유길준은 신문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창간사를 작성해 놓았으나,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물러남에 따라 일시 그 일이 중지되었다가 1883년 8월 박문국이 설치되고 10월 30일에 창간호를 간행하게 되었다. 순보는 10일에 한 번씩 14개월 간 빠짐없이 간행되어 모두 40호 정도 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간행이 중단 되었다. 순보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 과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어 국민에게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하였으며, 한국의 개화 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86년 1월 1일부터 1주일에 한 번씩 한성 주보로 속간되었으나, 재정이 어려워 1888년 7월 폐간되었다. 특히, 주보는 국한문을 혼용하여 그 독자층이 확대되었으며, 그 영향도 사회 전반에 미쳤을 것이다.

▨ 유학생의 파견

새로운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은 유학생 파견으로 나타났다. 유학생의 파견은 개화파 인사들, 그 중에서도 김옥균이 앞장 서서 추진하였는데 대부분 일본에 치중되었다. 1881년 신사 유람단이 일본에 갔을 때, 수행원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서 유길준과 유정수가 경응 의숙에, 김양한이 조선소에, 윤치호가 동인사에 각각 유학하였으며, 1882년 김옥균이 국왕의 특명으로 일본에 가면서 수행원인 변수와 김용원이 화학과 양잠 학을 공부하였으며, 또다른 사람들은 육군 학교와 가죽 공장에 유학하였다. 임오군란 후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역시 그 일행 중에 경응 의숙과 동인사에 유학하였으며, 1883년 김옥균이 차관 교섭차 일본에 갈 때도 다수의 유학생을 인솔하였다. 박영효가 신문 제작 기술자로 데리고 온 일본 기술자가 귀국할 때 김옥균의 주선으로 17명이 도야마 육군 유년 학교에 유학하였는데, 서재필이 여기에 끼여 있었다. 그리하여 1883년 말에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은 약 50명이 되었으나, 개화당이 추진하고 있던 차관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비가 부족해져 1884년 봄에는 대부분 귀국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거의 개화당에 가담하였으며, 갑신정변에 참여하였고, 그 후 한국 근대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1881년 청국 톈진에 영선사를 따라 무기 공장에 공부하러 간 학도들도 유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학생의 필요성은 그 후에도 정부에서 잘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895년 초(양력)에 발표된 홍범 14조에서도 ‘ ’라고 하여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 개화당의 차관 도입 교섭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지출이 증대하여 재정난이 계속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는 개화당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대하는 데도 필요한 일이었다. 김옥균은 이 일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이본을 왕래하였으며, 고종도 이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1882년 3월에 1차로 이본에 갔으나 차관을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882년 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김옥균이 동행하여 2차 일본 방문을 하여 17만 원의 차관을 얻었다. 이 돈은 임오군란에 대한 배상금으로 일부 지불하고, 나머지는 신문 제작비와 유학생 경비로 충당하였다. 박영효가 귀국한 뒤에도 김옥균은 계속 남아 차관 교섭을 하여, 국왕의 위임장이 있으면 차관을 하겠다는 일본측의 약속을 받고 일시 귀국하여 국왕의 위임장을 받아 1883년 5월 일본에 갔다. 그러나 일본은 김옥균이 조선의 정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지 못한 현실을 들어 차관 교섭을 기피하고 있는 사이 조선 정부의 보수 세력이 차관 교섭을 방해하여 결국 김옥균의 차관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차관을 통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감에 비상 수단으로 정변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 갑신정변 실패 후의 개화당 인사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변에 참가하였던 개화당의 주요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었다. 이들은 쫓겨가는 일본의 공사 일행과 함께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선박 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미국에 갈 계획이었으나 여비를 구하지 못해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김옥균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본국에서 계속 건너오고, 일본 정부가 그의 존재를 거북하게 받아들여 멀리 외딴섬으로 보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자객으로 온 홍종우의 꼬임에 빠져 1894년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나, 상하이에서 머물고 있던 차에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세 사람은 1885년 함께 미국으로 갔으나, 곧 헤어져서 박영효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왔고, 1894년 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사면을 받아 귀국하였다가, 1895년에 내무 대신과에 있다가 돌아와 1895년 법무 대신과 학부 대신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공사가 되기도 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고 의학 공부를 하여 병원을 경영하는 등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1896년 귀국하여 독립 신문을 간행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그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 한성 조약

189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 공사관 일행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탔으며, 일본인이 살해당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 공사가 정변에 개입되었다고 일본을 비난하면서 양국사이에 외교적 접촉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로 맺어진 것이 한성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조선 정부는 일본에 망명한 개화당 인사들의 송환요구와 정변 개입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정부에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새 공사관을 지을 땅과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였다.

<한성 조약>
제 1. 조선국은 국서를 일본에 보내 사의(謝意)를 표명할 것.
제 2. 일본국의 해를 입은 유족 및 부상자를 휼급하고 상민의 화물이 훼손 약탈된 것을 전보(塡補)하기 위하여 조선국에서 십만원을 지불할 것.
제 3. 일본인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사문 나포하여 엄벌에 처할 것.
제 4. 일본 공사관은 신기지로 이축함을 요하는바 조선국은 마땅히 기지 방옥을 교부하여 공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하도록 할 것이며, 그 신축, 중건에 있어서는 조선국이 다시 2만원을 지불하여 공사비에 충용하도록 할 것.
제 5. 일본 호위병의 영사는 공관 부지를 택하여 정하고, 임오속약(즉, 제물포 조약) 제 5관에 비추어 시행할 것.
(부칙)
1. 제 2, 제4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계산할 것이며 3개월 기하여 인천에서 완불할 것.
2. 제 3의 흉도를 처단함은 입약 이후 20일을 기한으로 할 것.

▨ 톈진 조약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울에서 개화당 정부를 지원한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과 조선 정부를 지원한 청국군의 교전이 일어난 사건은 정변 이후 두 나라 사이에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정변이 끝난 후 한성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공사가 거느리고 온 일본군이 다시 서울에 주둔하게 됨으로써 청․일 양국의 군대가 제 3국에서 대치하게 된 상황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화된 그들의 세력을 회복하여 청과 균형된 상황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청국과의 외교적 담판이 필요하였다. 당시 청국은 프랑스와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 중 이어서 조선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한 상황임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2월 18일부터 3월 4일사이에 6차에 걸친 회담을 거쳐 이토 히로부미와 이 홍장 사이에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과 청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조선과 관련된 문제였으나, 조선의 의사는 일체 고려됨이 없이 두 나라 사이에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첫째,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는 것이고, 둘째,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출동할 필요가 있을 때는 서로 사전에 통보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의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조선에 출병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일본의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톈진 조약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은 더욱 심해졌으며,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면서 앞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위해서 청국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청․일 양 국의 경쟁적인 경제 침투로 인하여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고 농촌 사회에 현실 문제를 극복하려는 농민들의 의식이 고조되면서 동학 사상이 파급되며, 현실을 적절하게 이끌어 가지 못하는 정부와 양반 계층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으며, 이에 따라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전통 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고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톈진 조약>
1.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공사관을 호위하기 위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 날인한 날로부터 기산하여 4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그 이내에 각기 전체를 철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분쟁 야기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다. 중국군은 마산포로부터, 일본군은 인천항으로부터 철수한다.
1. 양국이 함께 승낙한 것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치안을 스스로 지키도록 조선 국왕에게 권하며, 또 조선 국왕에 의하여 다른 외국의 무관 1인이나 혹은 수인을 선발하여 교련의 일을 위임케 하되 이후 청․일 양국은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교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1.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청․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을 요할 때에는 마땅히 우선 상대방 국가에게 문서로 알릴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회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 방 곡 령

일본 상인들에 의한 한국의 곡식이 일본에 유출되어 한국 농촌의 곡식은 부족해지며, 곡식값이 폭등하여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져 갔다. 더욱이 흉작이 계속되어 농민의 참상이 더하였다. 정부에서는 한․일 간에 체결된 통상 장정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수정하여 한국에서 병란이나 흉작 등으로 국내에 식량이 부족할 경우 지방 장관의 방곡 망령으로 미곡 수출을 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방곡령을 발하기 1개월 전에 해당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통보하기로 하였다. 방곡의 문제는 그 이전에도 일정 지역 안의 미곡을 그 지방의 납세나 주민의 자금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방관의 이름으로 타 지방으로 미곡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880년대에는 일본 상인들의 횡포로 미곡이 유출되자 곳곳에서 방곡이 시행되어 서울에 반입되는 쌀의 양이 줄어들어 쌀값이 폭등하고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1889년 함경도 감사의 콩수출 금지와 1889년 황해도 감사의 쌀 수출 금지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쌀 유출이 금지되게 되자 이익을 못 내게 된 일본 상인들은 일본 공사관과 결탁하여 방곡 시행 1개월 전에 사전 통보한다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 상인들이 입은 손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하라고 강요해 왔다. 그 후 경상도 지역에서도 방곡령이 발표되었는데, 방곡령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는 농촌 사회에는 반일 감정이 팽배해져 갔다.

▧ 보은 집회

1882년 삼례 집회와 1893년 복합 상소 운동을 통하여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과 지방관의 동학 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동학의 지도층은 본격적으로 저항 또는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문을 보내 보은에 교도를 집합시켜, 모인 교도의 숫자가 2만여에 달하였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동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수많은 인원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의 농촌 사회가 정부에 대해 불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정부의 국민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보은 집회는 동학의 움직임이 단순히 종교적인 활동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교도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표방하고 지방관의 횡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보은 관아의 삼문 앞에 게시된 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왜양의 적이 나라의 중심부에까지 침입함으로써 문란이 극도에 달하고 있고, 이에 따라 국도는 필경 이적의 소혈이 될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들은 동력서사(同力誓死)하여 왜양을 소탕하여 대의를 이루고자 한다.” 하였으니, 교조의 신원을 말하는 내용은 이미 자취가 없으니 이제는 단지 종교적 자유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왜양을 쳐부수겠다는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 동학의 조직

동학은 크게 충청도 지역의 북접과 전라도 지역의 남접으로 두 개의 계열이 있었다. 최제우가 처형되기 전에 최시형을 북접 도주로 임명하였으며, 또다른 사람이 남접 도주로 임명된 사람은 명확하지 않지만 뒤에 남접의 지도자로 서장옥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였다. 처음에 동학 농민군이 봉기할 때 그 시작은 남접에서였으며, 북접에서는 그 후 에 참여하였다. 동학의 포교는 제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그의 포교 활동은 1878년경 이후에 크게 활발해졌으며, 그 교세는 충청, 경상,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 강원도까지 파급되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더욱 번성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교단 조직이 갖추어졌다. 각처에 접소(接所)를 두고 여기에 대접주, 도접주, 수접주, 접주 등의 직책을 두었다. 즉, 큰 지역에 대접주를 두고 그 밑에 몇 명의 접주를 두어 소지역을 나누어 포교를 분담하였으며, 면에는 면접주가 있는 곳도 있었다. 한편 포(包)는 교구제도와 같은 것으로 대접주로 포주를 삼아 그 밑의 접주를 통솔하였다. 각기의 포에는 여섯 가지의 사무를 분장하여 이를 육임제(六任制)라 하였다. 접과 포는 동학 조직의 기본이었으며 이는 교단 조직이면서 동시에 교도를 동원하는 조직이기도 하였다.

▨ 군국기무처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중심 기관으로 설립된 일종의 국정 최고 기구의 성격을 가진 특설 기구로서 김홍집이 영의정으로서 총재로 임명되었으며, 기타 구성원으로는 부총재 1명과 20명 미만의 의원이 있었다. 운영은 합의제이며 공개적이고 다수결로 의결하여, 흥선 대원군에게 보고하고 최종적으로 국왕의 재가를 받는 절차를 거쳤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적 절차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왕과 왕비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정권 대행자의 위치에 있었던 흥선 대원군의 간섭도 배제하여 초정부적인 입법부의 성격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대체로 당시 일본의 원로원과 추밀원의 관제를 모방한 것으로 조직상으로는 의정부에 속하였지만 영의정 이하 정부 대신과 군사 지휘관 및 경찰 지휘자도 의원의 구성원으로서 이 기구 자체를 구속할 수가 없었다. 고려 말의 도평의사사 또는 조선 후기의 비변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7월 27일 설치되어 12월 17일 폐지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205건(혹은 208건)의 개혁안을 처리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1차 개혁

1894년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내용의 개혁이 실시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의정부 관제와 궁내부 관제, 경무청의 신설, 최고법원인 의금사의 설치, 관등의 축소(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관리의 월봉제 실시, 과거 제도 폐지와 새 관리 임용 제도 실시, 은본위제의 화폐 제도 실시, 문무관의 차별 폐지, 죄인 연좌법의 폐지, 공사 노비 제도의 혁파, 양자 제도의 개선, 조혼의 금지, 과부의 재혼 허용, 조세의 금납제, 도량형 통일 등이다. 이 기간에는 일본이 제2차 동학 농민 봉기로 교전 중이며 동시에 청․일 전쟁이 진행 중이어서 일본의 간섭이 비교적 미치지 못하여 혁신 관료의 독자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제1차 개혁은 정치 제도의 개혁이며, 국민의 개혁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며, 친일 세력의 개혁이라는 반발이 따르기도 하였으며, 국민의 오랜 관습으로 내려온 조혼 금지나 양자 제조 또는 과부 재가 허용 등은 실시되지도 못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2차 개혁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이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었으며, 동학 농민군도 그 저항이 약화된 상황이어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려는 의도에서 그 동안 개혁의 추진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반일적인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박영효를 사면하도록 하여 개혁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군국기무처가 해체되고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박영효는 내무 대신을 맡아 실권을 잡고 실제로 개혁을 주도하였다. 1895년 1월 9일 국왕이 직접 개혁에 앞장 선다는 의미로 조종(祖宗)에게 서고하고 개혁 정치의 내용을 내외에 선포하는 홍범14조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한 개혁으로는 의정부를 내각으로, 정부 기관의 명칭을 아문에서 부(部)로, 지방 제도를 23부(府)로, 신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한성 사범 학교와 외국어 학교의 설립, 사법부의 독립, 군사 제도의 일원화와 훈련대 사관 양성소 설치 등이다. 제2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개입되었으나, 청․일 전쟁 후에 일어난 삼국 간섭의 와중에서 일본의 적극 개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박영효 중심의 독자적 개혁의 성격이 있다.

▨ 갑오개혁기의 제3차 개혁

제2차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김홍집이 물러나고 박영효가 일시 총리 서리를 맡았으며, 박정양이 총리가 되었다. 박영효가 반역 음모 사건으로 실각되고 김홍집이 다시 총리가 되었으나 삼국 간섭 이후 내각에 친러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때, 일본은 친러 세력의 배후가 명성 황후라는 사실을 알고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부랑배를 동원, 궁중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하였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3차 개혁은 박정양 다음에 김홍집이 다시 총리 대신이 되는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옮겨가는 때까지이다. 이 개혁을 보통 을미개혁이라고도 한다. 중요한 개혁 내용으로는 서울에 관립 소학교 설립, 건양 연호 사용, 태양력 사용, 우편업무의 재개, 군제 개혁으로 친위대와 진위대 편성, 단발령의 발표 등이다. 명성 황후 시해에 대한 반감에 더하여 단발령에 따른 반발이 결국 항일 의병 항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활빈당(活貧黨)

1898~1904년 기간 동안에 농촌에서는 활빈당이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활빈당은 본래 화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집단`이라는 의미의 활빈(活貧)당이라는 이름을 내건 다음에는 의적(義賊)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898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반침략, 반봉건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평소 40~50명 적으면 10~30명 단위로 총과 칼로 무장하고 말을 타고 다니며 양반 부호가의 재물을 빼앗아 이를 빈민이나 영세 소상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그들은 외국 상인이나 외국 자본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활빈당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민중의 경제 안정과 제국주의의 이권 침탈에 대한 반대를 나타내었다.
“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을 채용할 것”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금할 것”
“행상인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금할 것”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타국에게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보안회(保安會)의 활동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 의정서를 강요한 직후 이른바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및 세목’ 등의 대한경영안(對韓經營案)을 만들어 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진행하면서 내하(內河) 및 연해 어업권을 비롯하여 철도 부설권과 관리권, 통신 기관 권리권, 삼림 벌채권,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강점하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도 강탈하려 하였다. 일제는 주한 공사를 통하여 50년간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일본인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 속에는 황무지의 개간, 정리, 척식 등 모든 경영권과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권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일제는 황무지를 개척하고 그곳을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요구가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반대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04년 7월 13일 전의관(前議官) 송수만, 심상운 등이 중심이 되어 보안회를 조직하였다. 보안회는 종로 백목전(白木廛) 도가(都家)에 본부를 두고, 공개적으로 성토 대회를 열어 일제의 황무지 요구에 결사 반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정부 고관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확산되었으며, 지방의 진위대가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는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보안회 지도 인사들을 납치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이 계속 되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정부는 일본 경찰의 철수를 요구하는 동시에 촌토의 땅도 외국인에게 내어 주지 않을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고 보안회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보안회 운동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선두에서 전개한 대중적 항일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에 해당된다.

▨ 헌정 연구회

보안회가 해산한 뒤에 협동회, 공진회, 진명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었으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고, 1905년 5월에 독립 협회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헌정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헌정 연구회는 이준, 양한묵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과 정부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야 되며, 국민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자유롭게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입헌 의회제도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특히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나 대한 제국 정부에서 민간인이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으며, 더욱이 을사조약이 강요된 이후에는 한국인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였으므로, 합법적인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한 자강회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지식인들과 민족 운동가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산업의 진흥과 교육 보급 등 사회 문화운동으로 그 활동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4월에 창립된 단체가 대한 자강회였다. 대한 자강회는 헌정 연구회를 계승하여 윤치호를 회장으로 하고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임진수, 김상범 등 발기인 5명을 포함한 10명의 평의원, 최재학, 정운복 등 10명을 간사원으로 하는 지도부를 구성하여,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에 27개소의 지부를 두었다. 대한 자강회의 목적은 자강회 규칙 제 2조에 ‘교육의 확장과 산업의 발달을 연구, 실시하는 것으로 자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후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에서 보이듯이 국권 회복의 기초가 되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애국주의적 신지식을 교육하고 근대 산업을 일으켜 국민의 자강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 목적은 당시 국권회복을 위해 직접적이고 무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의병 활동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자강회에서는 무력 대결은 시기와 역량을 고려하지 못한 무모한 행위라고 하여 비판하였다. 대한 자강회는 국민의 계몽을 위해 정기적으로 연설회를 개최하고 ‘월보’를 발행하였다. 월보의 창간호는 1906년 7월호부터인데 자강회가 해산당하는 1907년 7월까지 13호가 나왔다. 월보의 내용은 학교 교육 운동, 사회 교육 운동, 사상 확대 계몽 운동, 정치․경제에 관한 논설 등 다양하였으나, 주로 교육에 관한 것이 많아 학교 설립과 의무 교육의 주장, 학계의 소식, 여러 가지의 교육 내용 등을 다루었다. 대한 자강회는 통감부의 감시 하에서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의 활동이었으므로 그 활동의 폭이 좁아 보다 대중적이고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지식인 중심의 계몽운동이었다는 한계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대원장부(大垣丈夫)를 택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또 월보의 문체가 토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자로 되어 있어 일반 대중이 읽기에는 너무 어려웠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더욱이, 통감부의 일본인들은 자강회의 배후에서 그 조직을 조정하고, 전국의 항일 지식인들을 파악하여 이들을 조정하고 항일 의식을 둔화 마비시키고자 하였다. 통감부에서 관찰사나 군수 등의 관리에 자강회 회원을 발탁한 것도 통감부의 교활한 민족 분열책이었던 것이다.

▨ 신민회(新民會)

대한 자강회의 해산 이후 국권 회복을 전제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비밀 결사로서 그 이전의 합법적인 단체와는 성격과 활동 내용에서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미국에서 동포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다가1907년 2월 귀국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연회 등을 통해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신민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 애국적 선구자들이 자기 수양에 힘써 역량을 키우고 민중의 모범이 될 것.
○ 그러한 동지들이 굳게 단결하여 힘을 더욱 크 게 할 것.
○ 그 힘으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전력하여 민족 적 역량을 준비할 것.
○ 그리하여 앞으로는 오는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주적 역량으로 민족 재생의 큰 사업을 이룩할 것.
신민회는 양기탁을 총감독으로 하고, 안창호,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등이 창건위원이 되었으며, 중심 인물로는 최광옥,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조성환, 김구, 신채호, 이강,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등이었다. 신민회의 조직 체계와 규정은 신민회가 비밀주의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회원은 전국적으로 약 8백 명에 달하여 당시 주요계몽 운동가는 거의 망라되었으며, 특히 서북 지방의 교사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종적인 연락에 의해 비밀을 고수하면서 회원 각자가 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업으로 는 1908년 평양 대성 학교의 설립과 운영이며, 평양의 마산동에 설립한 자기 회사와 서울, 평양, 대구에 설치한 태극 서관이었다. 태극 서관은 손님으로 가장한 신민회 회원들의 연락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자체 내에 인쇄 시설을 갖추어 각종 도서를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일제가 조작한 총독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된 105인이 사건을 계기로 그 지도부가 체포되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한편, 신민회는 청년 운동의 일환으로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주로 서북 지방에 분회를 두고 청년의 인격 수양과 단체 생활의 연마, 일인 일기 교육으로서 직업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안창호는 청년 학우회의 4대 정신으로 무실, 역행, 충의 , 용감을 내세웠다. 청년 학우회는 청년 수양단체로서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1910년 국권 침탈과 함께 모든 단체가 해산될 때 함께 해산당하였다. 청년 학우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에 의해 흥사단이 설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수양 동우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의 활동 중에 해외에 독립 운동 기지를 만들어 국권 침탈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공헌하였다.

▨ 서북 학회

1908년 1월 이미 활동하고 있던 지역 학회인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통합되어 설립되었다. 1907년에 강제 체결된 정미 7조약으로 보안법과 신문지법이 만들어져 국권 회복 운동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상황에서 기존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여 현실적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신민회의 창립으로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의 회원들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서북 학회로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그 설립 취지와 목적이 동일하여 양 단체의. 통합은 예견된 일이었다. 1907년 3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서울 유학생들이 친목 단체로 서북 학생 친목회를 결성하여 친목 활동과 더불어 애국심 고취와 애국의길 을 도모하는 데 목적을 두었는데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이를 후원하였다. 1908년 1월 2일 임시 회장 이동휘의 지도하에 양 학회의 인사 149명이 참가하여 창립 총회를 열었는데 선출된 임원은 회장에 정운복, 부회장에 강윤희, 총무에 김달하, 부총무에 김주병, 평의원에 이종호, 태명식, 이갑, 정진흥, 김명준, 최재학, 주혁, 현승규, 윤익선, 오주혁, 주동한 등이었다. 서북 학회의 설립 취지와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하여 근대 문명 국가를 건설 한다. 둘째, 지식과 세력을 양성하여 사회 발달과 문명 증진을 꽤한다. 셋째, 실력 양성으로 민력을 증진한다. 넷째, 단체들이 하나로 되어 민력을 결집시킨다.

▨ 기호 흥학회

1908년 1월 19일에 정영택 등의 발기로 경기도 및 충청 남북도의 학문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기호 지방이 옛날부터 정치와 문화 및 학문의 중심지였으므로 이 전통을 지킬 것을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전국 청년의 교육에 힘써야 할 것은 늦출 수 없는 급무‘라고 하였다. 각지에 지회 설립에 착수하여1909년 7월까지의 지회 상황을 보면 경기도에 광주, 수원, 양근, 장단, 교하, 강화 등 6개소, 충청 남도에 서산, 공주, 연산, 당진, 해미, 목천, 홍주 등 7개소, 충청북도에 청주, 충주, 청양, 풍덕 등 4개소로 모두 17개소였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기호 학교 등 학교 설립과 운영, 월보의 발간, 강연회 등을 통한 계몽 활동 등이었다.
3. 근대의 경제와 사회


▨ 일본 상인의 쌀 유출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상인들이 한국에서 수입 한 것은 쌀, 쇠가죽, 콩, 생사, 인삼 등 주로 1차 생산품으로서 그들의 국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원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쌀은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1887년부터 1882년 5개년 동안에 부산과 원산을 통해 한국에서 유출된 쌀은 전체 수출량의 30%에 이르렀으며, 콩은 10%였다. 1882년 이후에는 콩 유출량이 점점 늘어나더니, 1980년대에 들어 다시 쌀의 유출량이 증가되었다.
당시 한국의 쌀값이 일본의 ⅓에 해당되었으므로 일본 상인들은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상인들은 많은 쌀을 경쟁적으로 유출시켰고, 상대적으로 한국 내의 쌀이 부족해져 쌀값이 폭등하여, 당시 흉작이 겹친 농촌 경제와 일반 서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상인들은 전라도 곡창 지대에서 입도 선매 등의 방법으로 싼값으로 쌀을 유출하였다.

▨ 열강의 이권 침탈

자본 수출을 통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 정책은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서 후진 지역의 광산, 철도, 농장, 공장 등의 개발과 경영에 투가하며, 후진 지역의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손쉽게 확보하여 막대한 이윤을 보장받으려는 것이 식민지 침략의 목적이었다. 1984년 이전에는 주로 상품 수출의 형태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 침략이 진행되었으며, 주로 일본과 청국의 상인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또, 해관 세수권, 연안 어부 채취권, 전신 부설권, 저탄소 설치권 등이 역시 일보노가 처국에 의해 독점되었다.
청․ 일 전쟁 이후에는 광산이나 철도 등 보다 중요한 자원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침략당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남북을 종단하는 철도 기본 간선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삼국 간섭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1896년 아관 파천을 전후하여 주요한 이권들이 러시아와 미국에 넘어갔다. 이는 당시의 조선 정계에 친러파와 친미파 세력이 증대되고 있었던 것과도 연결된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 쟁탈 대상은 철도, 광산, 전기, 수도, 전신 등 국가의 기간 산업부분이었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값싼 한국의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약탈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는 그들에게 예속되어 민족 자본의 성장이 억제되었고, 자주적 근대화의 진전에 장애를 받게 되어싿. 이들은 광산의 개발권과 철도의 부설권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경영권까지 장악했으며, 인근의 토지와 산림까지 장악하였다.
열강의 이권에서 나오는 이윤은 막대한 것으로서 미국의 운산 금광의 경우 1902년의 국내의 금생산의 ¼을 차지하였고 연간 순수익률의 증가는 300%에 달하였다. 1897년~1915년 사이의 금 생산고는 4천 9백 50만 원이었는데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될 당시 일본에 진 국채가 1천 3백만 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권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만한 일이다.
1895~1904년의 제국주의 열강의 한국에 대한 주요 이권 침략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일 본>
경부 철도 부설권 1898
평양 탄광 석탄 전매권 1898
경인 철도 부설권(미국으로부터매입 1898
충남 직산 금광 채굴권 1900
경기도 연해 어업권 1901
인삼의 수출 독점권 1901
충청, 황해,평안도 연해 어업권 1904

<미 국>
평북 운산 금광 채굴권 1895
경인 철도 부설권(1898 일본에 백만달러에 매도함.) 1986
서울 전기,수도 시설권 1897
서울 전차 부설권 1898
<러시아>
함북 경원 종성 금광 채굴권 1896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1896
압록강 유역, 울릉도 삼림 채벌권 1896
부산 절영도 저탄소 설치권 1987
동해안 포경권 1899

<프랑스>
경의 철도 부설권(일본에넘김) 1896
평북 창성 금광 채굴권 1901
평양 무연탄 광산 채굴권 1903

<영 국>
평남 은산 금광 채굴권 1898

<독 일>
강원도 금성 당현 금광 채굴권 1898


▨ 메가다의 화폐 정책

1904년 8월 러․일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침략하기 위한 소위 ‘ 대한 시설 강령 (對韓施設綱領)’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제 1차 한․일 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대한 제국 정부는 일본이 추천하는 외교와 재정 고문을 채용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이 때, 외교 고문으로 온 사람이 미국인 스티븐스이고, 재정 고문은 일본인 메가다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를 정리하여 일본의 금융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가 문란하고 재정이 고갈되었으니 화폐를 급속히 정리하고 국가 재정의 원천인 세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1905년 9월 18일 화폐 조례를 만들어 일본의 화폐 제도에 따른 금본위제로 하고, 한국에서 그 동안 통용되고 있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여 일본 제일 은행권을 본위 화페로 하였다.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일본 상인들의 농간에 의해 많은 손해를 보았다.
메가다의 화폐 정책은 한국 상인의 자산과 화폐를 일본 상인들에게 넘겨 주어 한국의 경제를 일본이 장악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극심한 금융 공황이 일어나 한국 상인들은 도산하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농촌 경제를 분해시켜 농민을 농촌에서 유리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메가다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것을 강요하여 일본 정부와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재정적 예속을 강화하시켜 나갔다.

▨ 국채 보상 운동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재정 고문 메가다의 강요에 의해 대한 제국 정부는 190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2백만 원의 공채를 모집하고,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3백만 원과 12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오십만 원의 차관을 들여 왔다. 또, 통감으로 온 이토는 ‘한국의 시정 개선’을 위해 세관 수입을 담보로 하여 일본 흥업 은행으로부터 일천만원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다.
통감부는 차관으로 들여 온 자금으로 식민지 통치 기구를 유지, 확대하며 침략과 약탈을 강화하고, 대한 제국 정부를 재정적으로 일본에 예속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매년 6.5%의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되는 이 차관으로 통감부는 한국에서 일본인의 생활 조건을 만들고 일제의 침략을 위한 시설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즉, 남포와 평양간의 도로와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영일만에 이르는 도로를 확장하고, 인천과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거류민을 위한 상수도 시설, 일본인의 관청 보수와 봉급 지불에 주로 소비하였다
통감부는 한국을 침략하면서 일본인의 한국 친투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의 형식으로 조달하여 이를 한국 정부에 떠넘기는 것이었다. 1907년 대한 제국 정부가 짊어진 외채 총액은 1천 3백만 원으로 이는 1년 세출 예산에 맞먹는 막대한 것으로서 당시 8백만 원 가까운 재정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대한 제국으로서는 외채 상환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국적 지식인들은 차관이 국권을 유린하고 식민지적 예속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보고 외채의 상환이 국권 회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이를 대중적인 참여에 의해 해결하도록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1907년 2월 16일 대구의 서상돈이 금연한 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뜻으로 단연회를 조직하고 이에 대한 취지서를 만들어 전국에 호소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본회는 일본에 대한 국채 1천 3백만 원을 보상하기로 목적함.
․보상 방법은 일반 국민의 의금을 모집함. 단,금액은 다소를 불구함.
․본회에 의금을 납부한 인원은 본회 회원 으로 인정하고 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공 포함.
․의금으로 모은 돈은 위의 액수에 달하기까 지 신용이 있는 우리 나라 은행에 일치함. 단,수합된 금액은 매월 말에 신문에 포고 함.
․본회는 목적을 달한 후에 해산함.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된 후 뒤에 국채 보상 단연 의무회, 국채 보상 일심회, 국채 보상 동정회, 국채 보상 의무소, 국채 보상부인되 등 전국적으로 20여 개의 단체가 경성되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3월 말에는 이종일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와 4월 초에는 이준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연합 회의소가 조직되어 각각 수금액의 촹괄과 국민 지도의 업무를 분담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이어졌다.
국채 보상 운동의 전국적 확대에는 황성 시문, 대한 매일 신보, 제국 신문 등 민족 신문들의 홍보 활동이 크게 작용하였다. 농민들은 식량을 판 돈의 일부를, 노동자는 어렵게 번 한 푼의 돈을, 남자들은 단연회에 가입하여 금연한 돈을, 여자들은 찬값을 절약하여. 또는 가락지와 비녀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각종 패물 등을 기생들까지도 돈을 거두었다.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단체들을 해산시키며, 지도급 인사들을 회유하여 친일 활동으로 변절시키고, 보상금 횡령 사건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일으키는 등 갖은 모략을 다하였다. 특히, 보상 운동에 앞장섰던 대한 매일 신보를 탄압하여 영국인 방행자 베델을 추방하려 하였으며, 국채 보상금 소비 사건을 날조하여 양기탁에게 혐의를 씌웠다. 결국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한민족의 순수한 애국심이 국채를 보상해서 나라를 지킨다는 소박한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국채 보상으로 국권이 수호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라를 지켜 보려는 민중의 의식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인 것이다.

▨ 증기선의 운행과 해운업의 발달

서양 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타고 온 증기선은 서양 문명의 우수함을 보여 준 대표적인 것이며, 이러한 배를 마련하는 것은 부국 강병의 중요한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1881년 개화 정책이 추진될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에서 군함을 구입하려 계획하였고, 1994년 이후에는 중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증기선을 구입하거나 임차하여 사용하였다. 해안을 따라 세미를 운반하는 데 증기선은 크게 편리하였으나 일본 증기선 회사가 이를 독점하여 이익을 챙겼다. 이에 대하여 경강 상인들이 종래 세미 운반을 맡아오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증기선을 구입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884년 정부에서 세 척의 증기선을 구입하여 세미 운반에 사용하였으며, 1889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 한국에서 증기선을 소유했던 실태는 144척에 38,403톤이었다. 189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운수업도 크게 발전하여 종래 일본 자본가에게 독점되어 오던 것을 민족 해운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대한 협동 우선회사, 인척 우선 회사, 인척 윤선 주식회사 등 해운 기업이 출현하였다.

▨ 농광 회사

러․일 전쟁을 일으킨 직후 일본은 한국 전 국토의 ¼에 해당하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해 오자, 이에 대항하여 일부 애국적인 관료와 실업인들이 한국인이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농광 회사를 설립하고 정부에 개간 특허를 요청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를 1904년 7월 11일 허가하였다.
이 회사는 황무지 개간 사업과 함께 당시 외국인이 이권으로 노리고 있던 광산 개발까지 포함시켜 모든 이권을 확보하여 외국인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이 항의하고 그들이 요구한 황무지 개척권을 강요하자 애국 지사들이 보안회를 조직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농광 회사의 해체를 요구하여 황무지 개척권 문제는 일본의 요구를 일단 막는 것으로 해결 되었다.

▨ 근대적 상회사(商會社)의 활동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 등 개항장으로 들어오는 외국 상인들로부터 외국 상품을 모아 이를 국내 각 지역에 팔고 국내의 농촌으로부터 직접 곡물을 사서 외국 상인들과 거래를 하면서 개항장과 농촌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개항장에 자리잡은 객주와 여각 및 보부상 등 전통 상인들이었다. 이들 상인들은 외국 상인들의 침투에 대항해서 상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체제의 확립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1880년대 초부터 근대적인 상업 체제로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회사릐 설립은 일본이나 청국 또는 영국 상인들의 활동에서 영향을 받은 바도 있지만 일찍이 개화 사상가들도 상사 또는 회사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한 적도 있어 이러한 내외의 분위기로 회사설립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회사들은 그 이름이 회(會), 사(社), 상회, 상사, 상회사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대부분 한자 회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설립 과정은 정부에 상회 장정을 통리아문에 보내면 아문이 허가서를 보내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결국 관허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 상회사들은 1883년경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여 갑오개혁 이전까지 전국에 약 40여 개가 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평양에 설립된 대동 상회와 서울에 설립된 장통회사(또는 장통사)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서 전국 각지에 상회 직원이 파송되었다.

▨ 근대적 섬유 공업의 발달

1880년대에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부국 강병의 방안을 강구하던 일부 개화파 중에서 근대적 산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근대적인 공업의 일환으로 면재춤 생산 기계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특히, 지석영은 1882년 근대적 직조기를 구입할 것을 상소하고 있었으며, 정부에서는 1884년 농상, 직조 등의 관영을 위해 설국치관(設局置官)을 명하여, 1885년 정부 내에 직조국(織造局)이 설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1884년에 고ㅛ종의 명으로 중국인 공장들을 모집하였으며, 1885년부터는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중국인 기술자를 더 모집하였고, 사기(紗機) 4개를 중국에서 구입하였으며, 곧이어 직금 기계(織錦機械) 32건을 구입하였다. 이외에도 중국에서 면사와 직조 기계를 몇 번에 걸쳐 구입하였다. 그러다가 1891년 이후 경영난에 따라 생산이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이후 광무개혁이 진행되면서 산업의 발전을 위한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897년 년경에 대조선 저포 제사(大朝鮮苧布製絲) 회사의 설립, 1899년에 한상 방적 고본(漢上紡績股本) 회사, 1898년에 직조 권업장이 설립되었으며, 1990년에는 한성 직조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일반인들 가운데서도 지방에 직조 회사를 설립하여 직물을 생산하였다. 1902년 2월 김덕창 이라는 사람이 서울의 중부 장통방 중곡동에 김덕창 염직 공업소를 설립하여, 외국에서 수입한 면제사를 원료로 하여 면포를 염색 직조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김덕창은 일본에서 제작한 개량식 족답직기(足踏織機) 8대화 S직조기 9대를 설치하고 40명의 직공을 고용하면서 연간 6천 4백 단의 면포를 생산하였다. 그 당시 수입 면포가 70만 단이라는 수량과 비교할 때 그 생산량은 미미한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덕창 염직 공소의 설립을 계기로 하여 서울에 38개소의 직조 공장이 설립되어 근대적인 민족 섬유 공업의 발달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영세하여 전체로 S직조기는 208대였고 한 공장당 직조기는 평균 6대에 불과한 소규모의 것이었다.


4. 근대 문화의 발달

▨ 동도 서기론(東道西器論)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에서 전해진 서양의 문물을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갔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의 우수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서양을 오랑캐로 인식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서학을 배척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이 형성되고 서양의 무력 침략에 접하면서, 특히 무기를 중심으로 한 기술의 위력을 알게 되었으며, 개항 이후 서양의 기술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의 수용은 전통적인 기술 문화를 유지하면서 부국 강병의 수단으로 기술만을 수용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다.
동도 서기론은 그 성격상 중국에서 일어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과 동일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일면으로는 전통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으나,서양의 과학 기술 문화의 근본 배경인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적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 및 과학 정신의 전통을 충분ㅁ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서양 문화 수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 박문국(博文局)

1883년 8월 통리아문의 한 기구로 설립된 박문국은 외국어를 학습하던 동문학에 부속된 기관이었다. 원래 동문학에서는 서적의 편찬과 신문 간행을 계획하였었는데 , 이 안에 박문국을 설치한 것이다.
박영효가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일본에 사절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일본으로부터 신문 제작 기술자를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유길준에게 신문 간행의 일을 맡겼다. 1883년 2월경 당시 통리아문 주사로 근무 중이던 유길준이 신문국 장정을 만들었는데, 이 때 신문을 간행하는 사무처리를 박문국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 직후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유길준도 신문 간행의 일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 후에 정부에서 신문을 간행하기 위하여 유길준이 만들어 놓은 이름을 그대로 살려 1883년 8월 17일 박문국을 설치하고 0월 30일 한성 순보가 창간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885년 6월 박문국이 중건되고 1886년 1월 25일 한성 주보로 다시 간행되어 1888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 교육 입국 조서

1895년 2월 2일에 ‘교육에 관한 조칙’으로 발표 된 교육 입국 조서는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극명하게 밝혀 주는 것이며, 1895년에 진행된 교육 개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교육 입국 조서의 내용은 교육이 국가 발전의 기반이 됨을 밝히고, 세게의 부강한 국가들이 교육을 통하여 이를 이룩하였으니 교육은 국가 보존의 긴요한 방법이라고 교육의 중요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종래 일부 계층에 제한되어 관리 등용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또는 특수 계층의 신분적 유지를 위한 성격이 강했던 교육이 국가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이룩하는 근본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으로서, 교육관의 일대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또, 교육의 기본 정신도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여, 과거에 실시되었던 교육을 허명 교육으로 비판하였다.
교육의 삼대 강령으로 덕양(德養), 체양(體樣), 지양(智養)을 제시햐여 교육이 지, 덕, 체가 조화된 전인 교육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학교를 널리 세워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국가 발전과 왕실의 안전에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박영효의 교육 이념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1888년 국왕에게 나라의 근대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개화 상소’를 올렸다. 이는 개화 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표현시킨 대표적인 내용으로서 이를 통해 개화 사상의 사상적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상소한 개혁의 방안으로 7개항을 제시하였으며, 그 가운데 교육에 관한 내용을 통해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내용을 ‘교민재덕문예이치본(敎民才德文藝以治本)이라 하여 교육을 정치의 군본이라 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구체적 방안으로 모두 열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앞서 교육의 성격을 논하면서 교육은 인간 생활의 지침이라며, 학교 설립은 국가의 급무라고 하였다. 또, 실용을 앞세운 교육을 강조하여 종래의 교육의 폐단을 비판하고 있다.
교육 개혁의 방안에는 의무 교육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소․중학교의 설립과 고등 교육의 실시, 국사와 국어 국문의 교육, 외국인 고빙을 통한 근대 학술 교육, 서적의 출판과 박물관 설치, 강연회 등 개최로 국민 계몽, 외국어 학습과 신문의 발행 및 종교의 자유 등이 있다. 그 가운데서 박영효는 특히 국사와 국문을 먼저 국민에게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고, 이를 통한 민족의 자각과 부국 강병의 정신적 기반을 이룩할 것을 제시하였다. 자국의 역사를 먼저 교육시킬 것을 강조한 것은 다른 방안에서도 제시하고 있어 그가 내세운 근대 교육이 국민 정신을 고취하여 나라를 지키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박영효의 교육애 대한 생각은 1895년 그가 내부 대신으로 직접 개혁의 실천을 담당하면서 지방관에게 개혁의 세부 항목으로 지시한 내용에서도 '먼저 그 지방의 인민에게 국사와 국문을 교육시킬 것'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교육관이 1895년 근대 교육을 추진한는 기본 이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한국의 근대 교육

한국의 근대 교육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국권을 수호하며, 동시에 자주적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한민족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한국 근대 교육은 전통 시대를 벗어나서 근대에 들어와 실시되었다는 시간적 의마가 아닌 역사적 의마가 큰 것이다. 한국 근대 교육은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적 개혁이 추진되는 내용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자주적인 개혁으로 이루어졌으며, 민족의 의자가 표현된 개혁이었다.
한국의 그낻적 개혁 과정에서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전통 체제를 탈피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이 침략이 수반되는 모순이 나타났으나, 교육 개혁은 전통 교육에서 탈피하면서 동시에 침투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적 논리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 교육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 교육 내용이 민족적 전통을 확인하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국사와 국문이 중요시되었다. 때문에 한국 근대 교육은 어느 때 어떤 상황보다도 민족적 성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근대 민족 교육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 근대적 교과서의 간행

근대 교육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1895년에 근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이라는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갑오개혁이 시작될 당시 관제 개혁에서 학무아문에는 교과서 편찬을 전담하는 부서가 설치되었으며, 그 후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학무아문으로 하여금 소학교 교과서의 편찬을 조속히 실시할 것을 논의하였다. 1895년 5월에 주일본 공사관에 훈령을 보내 교과서 편찬에 참고할 것이니 일본 교과서를 구입하여 보내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교과서 편찬이 1895년 전반에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 교과서가 참고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5년에 학부에서 발행한 교과서는 모두 17종이었으며, 주로 소학교용이었다. 처음에는 학부에서만 교과서가 간행되더니 1900년을 전후하여 민간에서도 간행되었으며, 점차 학부 간행보다도 그 수가 늘어났다. 이는 구가 재정이 교과서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만큼 넉넉하지 못한 이유이며, 국민의 교육열이 증대되면서 부족한 교과서를 민간에서 편찬하였던 것이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는 교육 침략 정책이 실시되고, 사립 학교를 억압하면서 그 교육 내용을 통제하기 위해 1908년 교과용 도서 검정 제도가 실시되어 한국의 교과서는 커다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즉, 통감부는 엄격한 검정 규정을 만들어 일제의 침략을 나타내거나 민족의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담긴 교과서는 이의 사용이나 발행을 금지하면서, 1906년 이전에 발행된 애국적이고 민족전인 교과서도 모두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부터는 검정에 통과된 검정 교과서나 사용이 인정되는 인정 교과서만 학교에서 사용되었다.

▨ 북간도 공립 소학교
연변 지방에서 한국인의 근대적인 교육 기관으로 그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있는 것이 대한 제국 정부에서 설립한 북간도 공립 소학교(北間島公立小學校)이다. 1895년부터 각지에 설립된 공립 소학교에는 한성 사범 학교 졸업생을 교원으로 임명하였으며, 지방 현지에서 부교원을 임용하여 부족한 교사를 보충하였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에는 1905년 3월 17일자로 학부에서 오재영, 김용흡, 김성진, 최정현, 박병휘, 노승룡, 이남섭, 김중경 등 8명이 부교원으로 임용되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규모나 교육 내용에 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공립 소학교의 설립과 경비의 지출이 지방관의 관할 사항이었으나, 부교원의 임용이 학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대한 제국 정부에서는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이주민의 보호와 한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1903년에 간도 지방의 한국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 양성을 제의하기도 하였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정부와 관련 있는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개교는 한국의 행정권 내지 통치권이 이 지역에 행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지고 있는 사실을 1906년 초 한국에 설치된 통감부에서 1907년 간도 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였으며, 간도 파출소의 일본인이 1906년에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서숙을 방해하다가 서전서숙이 자진 페쇄하자 그 터를 사서 그 곳에 1908년 간도 보통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간도 보통 학교는 일제 통감부의 식민지 준비 교육 기관으로서 한민족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인을 만들기 위한 곳이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는 한국의 공립 소학교와 같이 외세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족 교육 기관으로서, 간도 지역에 설립된 한민족 최초의 공적인 교육 기관인 것이다.

▨ 독사신론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신채호가 1908년 대한 매일 신보에 연재한 사론이다.
이는 신채호의 국사관이 형성되는 내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1910년 봄에 최남선이 발행하는 ‘소년’지 제 3 권 제 8 호에 국사신론(國史新論)이라는 제목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게재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족을 단위로 한 민족 국가의 역사를 재구성하자는 것이 그 주지로서, 민족을 역사 전개의 주체로 파악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서론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의 역사는 민족 소장 성쇠의 상태를 열서할 자라.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무할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그 역시 중하다.… 즉, 고대의 불완전한 역사라도 이를 상구하면 동국주족, 단군 후에의 발달한 실적이 밝거늘 어찌하여 우리 조상을 거짓으로 말함이 이에 이르렀느뇨….”

▨ 국사의 연구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민족 운동의 정신적 바탕인 국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국사 연구는 민족 정신의 앙양과 교양을 높이는 데에 주력하였으나, 아직 근대 역사학으로서 학문적 기반은 갖추지 못하였다. 국사연구의 경향은 국민 교양적인 성격을 띠면서 애국계몽 운동으로 연결된 경향과, 국사 교과서로 편찬되어 학교 교육에 연결된 경향으로 구분될 수 있다. 국사 연구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신문이나 학회에서 발행하는 월보에 논설이나 인물 전기 또는 國朝故事등을 연재하여 역사 지식4을 넓히고 민족 정신의 함양에 이바지하였다. 국사 교과서는 국문 교과서와 함께 국민 정신 교육에 기여하였는데, 국사 교과서 편찬에 활약이 컸던 사람은 현채와 김택영이었다. 교과서의 내용은 종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면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군 조선의 강조, 안정복의 삼한정통론 계승, 외침에서 공을 세운 위인이나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의 활동상이 강조되었다. 이 밖에도, 외국인의 건국가와 망국사 또는 피침사와 함께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의 전기가 많았는데 이태리 건국 삼걸전, 월남 망국사, 파란 멸망사, 미국 독립사, 애급 식민사, 비사맥전, 워싱톤전 등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학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읽던 책이었다.

▨ 서유견문

유길준이 지은 서유견문은 그 문체가 전통적인 문체에서 벗어나 국․한문을 혼용하고 새로운 문체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국어학상으로도 귀중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19세기말 외세가 침투하는 상황에서 나라의 자주 독립유지와 근대 국가로 발전하려는 개화 운동의 사상적 측면과 서양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가는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서유견문이 쓰여진 시기는 대략적으로 1885년 12월 그가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길에 정부가 연금되었다가 1892년 11월 자유를 찾게 되는 기간이다. 그는 일본과 미국 유학 중의 자료와 귀국하는 도중에 유럽 각국을 둘러보면서 견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타고 후에 그 원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갑오개혁이 진해오디면서 등용되어 일본에 가는 길에 일본에 원고를 가지고 가서 1895년에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크게 여행기, 서양 문물에 대한 소개, 개화 사상, 애국심의 표현 등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가장 많은 분향은 서양을 소개하는 애뇬으로서, 이에는 국가의 권리, 국민의 교육, 국민의 권리, 정부의 종류 및 정치 제도, 정부의 기능, 조세, 화폐, 법률 등 서양의 정치, 학문과 각종 풍속, 신앙,산업, 문명의 이기 등에 관해 소개와 해설을 함께 싣고 있다.
개화 사상에는 유길준의 개화에 대한 인식, 개화의 개념, 개화의 방법, 개화의 등급 등으로 서술되었으며, 개화를 하는 데 있어 외국 문화를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국의 우수한 문화도 계승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곳곳에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각국의 권리는 논하면서, 아무리 약소국의 군주라 하더라도 강대국의 군주와 동등한 에를 주고받고 있으며, 강대국에서 파견되 ㄴ사신이 약소국의 국왕과 대등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서술한 것은 일반 국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 근대 문학의 경향
190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은 창가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3․조 혹은 4․4조로 된 초기의 형태, 즉 애국가 같은 것은 전통적인 시가에서 연속된 양식이다. 창가의 내용은 개화 사살을 노래한 것과 ‘社會燈(대한 매일 신보)’에서 나타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최남선은 1908년 소년지에 ‘海에게서 少年에게’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신체시라고 불리는 이러한 양식은 일본의 신체시와 비슷하지만 최남선은 그대로 시라고 하였다.
소설은 신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인직의 ‘열의 누(1906)’와 ‘귀의 성 (1908)’, 이해조의 ‘花의 血 (1911), 최찬식의 ’추월색(1912), 안국선의 ‘금수 회의록(19080’등이 대표적이다. 흔히 신소설이라고 하지만 작품 구조상에서는 새로운 것은 없고, 오히려 이전의 소설보다 가부장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여 후퇴한 면도 보이고 있다. 이광수의 ‘무정(1910)’은 일상어의 문체 확립, 작품 구조의 확립2, 장편 소설의 가능성 등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도덕과 구도덕의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삼각 연애 관계의 구조가 민족주의라는 초개인적인 이념으로 결말짓게 되는 이 소설은 당시 한국 지식층이 열렬한 독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한민족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이광수의 소설은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할수 있었다.

▨ 근대 예술의 발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서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국민적 예술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문화와 예술은 양반과 상민의 뚜렷한 구분이 지어져 내려 왔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 양반은 아악을 교양으로 하고 가끔 기악(妓樂)과 광대의 판소리를 그들의 연회 석상에서 연주하도록 하였으며, 평민들은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꼭두각시 놀음 등을 즐겼다. 근대에 와서도 지식인들은 시조나 가곡을 상식으로 알았고, 서민들은 춘향가, 심청전, 토기 타령 등 판소리가 유행하였다.
미술도 양반들의 여가로 즐겼으며, 도화원의 전문 화가도 있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천시되었다. 개항 이후에 미술가들은 직업인으로 위치를 굳혀 갔으며, 1906년을 전후로 하여서는 서양 화풍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반 사회에서는 재래식 미술, 즉 동양화풍이 견지되었으며, 서민층에서는 이른바 민화가 유행되었다. 서양식 유화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진 않으나 1905년 프랑스 공사관에서 개최되었던 외국인 전시회에 한국인이 그린 유화가 출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극은 양반 사회에서는 천시의 대상이 되어 주로 서민들 사이에서 이른바 민속 가면극이 성행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양반이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익살이 대부분이었다. 양주 별산대 놀이가 궁중에서 외국 사신의 영접용으로 공연된 적이 있었지만 연극은 서민들의 독점물이었다.

▨ 근대 과학 기술의 수용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이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 서양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으나, 이는 서양 과학의 정밀성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체계적인 이해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이양선의 빈번한 출몰과 중국의 정세 변화를 통해서 서양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이 천주교의 포교 활동을 위한 수단이라고 이해하면서 이를 배척하였으나, 점자 천주교와 외세의 침략을 과학 기술과는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기술(西器)은 수용하되 서교(西敎)는 배척하는 동도 서기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특히, 부국 강병을 위해 서양 기술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개화 사상과 연결되었으며, 과학 기술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부가 앞장서서 과학 기술을 수용하였다.
농상 공사에서는 독일인을 초빙하여 기술 지도를 받았으며, 일본 유학생 중에는 양잠법을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직조국은 1888년 다량의 방직 기계를 구입하고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였으며, 지조국(紙造局)은 1891년 일본 상인으로부터 각종 제지 기계를 구입하였다. 또, 광산 개발을 위해 1888년 미국에서 채광기를 구입학도 미국인 광산 기술자를 초빙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에 고취되어 민간인들도 서양 과학 기술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각종 기계를 수입하여 근대 공업을 발달시켜 갔으며, 점차 자체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전기와 통신 사업도 확대되어 갔으니, 1887년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되었으며, 1884년에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 사이에 해저 전선의 부설, 1885년 전보국의 설치, 1887년 서울, 공주, 대구, 부산을 연결하는 전선의 부설, 1898년 궁중과 정부 각 아문 사이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가설, 경인 철도의 부설에 이어 경부, 경의 철도 부설되었다. 이 가운데는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에 의한 것이 많이 있으나, 이로 인해 한국에 과학 기술의 보급이 이루어진 면도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 학교가 설립되면서 기술 교육도 실시되었다. 특히, 대한 제국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과학 기술 교육을 위한 학교가 다수 설립되었으니, 기예학교, 경성 의학교, 상공 학교, 철도 학교, 광업 학교, 공업 전습소, 전무 학당, 우무 학당 등이 그것이다.
과학 기술 수용에도 시기적인 특징이 있는데 흥선대원군 때에는 무기를 수용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무기와 각종 기계를 수용하더니, 1895년 이후에는 과학 기술 자체를 수용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기술 교육 정책은 재정 부족으로 곤란을 받았다. 외국인 기술 교사를 초빙하였으나 봉급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국내의 기술 교사는 봉급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또,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경비를 보내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기술 교육 정책은 꾸준히 실시되었다

▨ 제국주의 시대

15세기 이래로 전개되었던 식민지 쟁탈 경쟁은 18세기 말 이후에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각국은 국내의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되어 식민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 혁명의 진전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본국의 공업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확보와 상품의 시장 또는 이민 대상지로서의 식민지가 개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달이 독점 자본주의 또는 금융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잉여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자본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특히, 1870년대 말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극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이 격렬해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19세기 말의 식민지 경쟁은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대외적 위신과 관련되어 각국은 식민지 확보를 가장 중요한 우선 정책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대상 지역도 전세계의 후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각국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보 정책과 이와 관련되어 경쟁 국가에 대항하는 정책을 세계 정책이라고 하고, 이러한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라고 하며,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1870년대 말부터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
지 진출은 경제적 종속과 함께 정치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후진 지역의 전통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변화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각국이 근대화 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적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이는 무력 충돌로 확대되어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19세기 말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 홍선 대원군의 집권

1863년 말 철종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후계자를 둘러싸고 조야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오랫동안의 세도 정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해 오던 안동 김씨 세력이 후계자 문제에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 동안 안동 김씨 세도가에게 억눌려 불우한 생활을 해 오면서도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던 흥선군 이하응과, 역시 안동 김씨의 세력에 반발을 하고 있던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익종으로 추존됨.)의 비인 신정 왕후 조씨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세력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되어, 궁중의 제일 어른의 자격으로 12세 된 흥선군의 둘째 아들에게 후계를 명하니 이가 고종이었다.
그리하여 홍선군 이하응은 왕의 생부로서 홍선 대원군이 되어 국왕이 아직 어린 이유로 자신이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선 대원군의 왕실 제보를 보면 도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정조의 이모제(異母第)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한 사람이 16대 인종의 왕자 인평 대군의 6세손인 남연군이었다. 이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흥선군은 익종(즉, 효명 세자)과 정조의 이모제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과 같은 항렬이 된다. 그러므로 신정 왕후 조 대비는 흥선 군의 아들에게 익종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나아가 안동 김씨에 대해 풍양 조씨의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국왕을 낳은 생부에게 주어진 명칭으로서, 선조가 즉위하자 그의 생부 덕흥군이 덕흥 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이 즉위하여서는 전계군이 전계 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망 후에 대원군의 추존을 받았으나 홍선 대원군은 살아 잇는 대원군으로서 조선 역사상 유일한 경우였으며, 왕이 아직 나이 어리니 국가의 전권을 잡고 야심찬 정치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 19세기 중엽 국내외 정세

1860년대 전후의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커다란 변화와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년 간 계속된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지방 양반과 관리들에 의해 수취 체제 특히 삼정이 그 상궤를 벗어나 운영됨으로써 민생이 파탄에 빠지자 조선 후기 이후 경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성장하고 있던 농민 의식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1862년 진주에서 비롯된 임술 농민 봉기(壬戌農民蜂起)는 삼남 각지에 삽시간에 파급되어 갔다. 이는 당시의 농민들이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와 이를 운영하는 양반 세력에 대항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농민 의식을 대변하여 농민들이 추구하는 변화를 지향하며 전통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현실 사회에 비판적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동학은 조선 왕조의 정치적, 사회적 지배 체제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왕조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확보를 목표로 하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진행되는 시기로서, 일본이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중국은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굴복한 후에 1856년 애로호 사건의 결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굴복하였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연해에는 서양 선박들이 표착하거나 접근하여 와 한국인들의 두려움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함락 소식은 동일한 문화권인 우리 나라에도 서양인들이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안으로 전통 체제를 위협하는 농민들의 봉기, 밖으로 식민지 침략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접근은 국가의 자주권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대내외로 위기에 당면한 당시 조선 왕조로서는 이에 대처하는 정치 개혁이 필수적인 시대 상황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 통상 수교 거부 정책

1863년 말 집권한 홍선 대원군은 서양과 일본의 통상 수교 요청을 반대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천주교를 박해하여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를 다수 처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며, 통상을 요구하는 제너럴 셔먼 호의 침몰에 대한 책임 문제를 들어 강화도에 침입하여 수교를 강요하면 미국을 격퇴하였다. 일본의 수교 요구를 서계(書契) 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일반적으로 쇄국 정책으로 표현하여 왔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추진된 것이다. 천주교의 박해도 천주교도들이 그 신앙 문제와 관련시켜 외세와 연결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실제로 1860년 이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월경하여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하여 베이징을 함락시킨 것도 1860년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침략의 시작이 통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당시에 열강의 통상 및 수교 요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는 침략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홍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외세, 즉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이었으며, 이는 민족의 이익과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 윤리와 체제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타협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보수성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였다. 종래 쇄국 정책에 대한 설명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이고 고루한 정책으로서, 이로 인해 한국의 서양 문물 수용이 늦어졌으며 근대화에 지각하게 되었다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 통상이나 수교를 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으며, 이를 거부하는 조선 왕조의 정책이 그들에게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쇄국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은 동양 3국(중국, 일본, 조선)이었으며, 이들 3국은 그들의 침략 대상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해 쇄국 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들의 이익이 수반된 수교 요구를 조선이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쇄국 정책은 침략자가 그들의 국가 이익의 차원에서 상대방을 폄하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홍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강요로 맺어진 강화도 조약과 이로 인해 이루어진 개항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공헌이라는 것을 보다 과장하기 위해서도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비판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쇄국이라는 의미가 국가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침략 세력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음이 역사적 진실이라면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 수호를 위한 정책을 비판하는 결과이다. 쇄국 정책이라는 표현은 주체적인 역사 이해의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과거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일본이나 서양의 침략적 성격에 대응하여 자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 호포법(戶布法)의 실시

조선 왕조의 재정 수입은 농민들이 부담하는 조세 징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조선 왕조의 수취 체제(收取體制)의 대표적인 내용은 삼정(三政)으로 표현된다. 이 가운데 군정(軍政)에 해당하는 군포의 수납은 영조 때 균역법에 의해 농민의 부담이 감소되었으나, 양반들은 면제되었으며, 이전부터 관행으로 내려온 각종의 부정이 자행되어 농민들의 부담은 많아지고, 이에 대한 불만이 높아 갔다. 1862년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安劾使) 박규수(朴奎壽)는 민란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이의 개혁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삼정이정청(三政嫠正廳)을 설치하고 삼정의 개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동포제(洞布制)로서 일부 양반에게도 군포의 부담을 의무화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정이 정청의 개혁안은 철종이 곧 죽어 시행되지 못하고 홍선 대원군에 의해 시행될 수 있었다. 홍선 대원군은 재정 수입의 증대와 농민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양반들은 그들이 평민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양반의 반발을 막고 그들의 위신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양반의 이름 대신에 하인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매호당 2냥씩 징수하는 균등 과세의 원칙을 세웠다.

▨ 서원의 정리

조선 후기에 양반들의 세력 기반의 확충을 위한 서원의 남설이 계속되어 18세기 말 정조 때에는 전국적으로 65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국가 재정의 낭비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농민들에게 많은 폐단을 주었다. 서원을 통한 지방 양반들의 횡포는 민심을 이반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경우에도 세도가에 눌려 불우한 생활을 할 때 이들 서원의 비행과 횡포를 직접 경험하면서 그 폐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집권을 하자 곧 전국의 서원과 향사(鄕祠)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명령한 후, 곧이어 서원의 사설 및 남설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1865년 3월 횡포가 극심하여 백성의 원성이 가장 높았던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유생들은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홍선 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이를 벌할 것이다.”라고 하며 강경하게 그의 의지를 실현시키며 아울러 전국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을 남겨 두고 모두 철폐하도록 하였다. 서원 정리 작업은 경복궁의 중건 사업,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는 동안일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871년 신미년에 이를 마무리지었다. 서원 정리 결과 막대한 토지가 국가에 환수되었으며, 농민들의 불법적 부담이 감소되어 크게 환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반 세력은 홍선 대원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홍선 대원군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사창제(社倉制)의 실시

홍선 대원군의 재정 확보책과 민심의 안정을 위한 개혁에서 수취 체제의 개혁은 중요한 비중을 가진다. 1867년(고종 4년) 삼정의 하나인 환곡(還穀)제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환곡의 폐단은 삼정 가운데서 가장 피해가 컸었떤 것으로, 지방에서 관리와 토호들이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는 것으로 환곡이 많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환곡은 농민 구휼책의 하나로 정부에서 면을 단위로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1/10의 이자를 받아들여 국가 세수에도 이바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곡의 배정과 운영에 있어 양반 지주와 토호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고, 각종의 불법이 저질러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이에 따른 원성이 높았다. 홍선 대원군이 실시한 사창제의 내용은 면을 단위로 하던 것을 리(里)를 단위로 하여 사창을 설치하고, 마을 안에서 덕망이 있으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사수(社首)라고 하여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사창제의 실시로 환곡의 폐단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농민의 생활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환곡제 실시에 수반되었던 각종 비리가 줄어들고 국가의 원곡(元穀)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이자 수입이 늘어나 재정 수입이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홍선 대원군의 국방 강화책

홍선 대원군은 집권 직후 서양 세력의 침략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관계를 개혁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종래에는 비변사에서 정치와 군사를 총괄하여 상대적으로 국왕의 군사에 대한 통제권이 취약하였으나, 비변사를 철폐하여 정무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삼군부에서 전담하도록 한 것이다. 군사 체제의 개편에서는 우선 수준 통제사의 지위를 격상시켜 수군을 우대하여 연안의 방비에 관심을 기울였고, 오가작통법을 부활시켜 일종의 민병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강화도를 중심으로 연안에 포대를 확충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수도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우수한 군인을 뽑아 군사 기술을 연마시키고, 특히 서북 지방의 포수를 따로 뽑아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신무기 개발에도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수뢰포와 선박 등의 제조와 실험, 방탄복의 제작 등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력 침략에 대비하여 우수한 서양 기술을 수용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 병인양요(프랑스의 강화도 침략)

병인박해를 계기로 하여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한 것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 1차는 1866년 8월 12일(양력 ; 9월 20일)에서 8월 22일(양력 ; 9월 30일)까지, 제 2차는 9월 5일(양력 ; 10월 13일)에서 10월 12일(양력 ; 11월 18일)까지이다. 12명의 선교사 가운데 3명만이 살아 남았다는 리델 신부의 소식을 들은 톈진 주재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se) 제독은 본국과 연락을 취하면서 3척의 군함으로 남양만을 거쳐 강화 수로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염창, 양화진, 서강까지 왔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7척의 군함에 6백 명의 병력으로 재차 침입해 와서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은 그들이 강화도를 점령하면 조선 정부가 쉽게 항복 하리라고 기대하였으며, 강화성을 공격, 점령하고 나서는 통진을 공격하였으며 문수산성까지 정찰하였다. 대원군을 필두로 조선 정부에서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정부는 강력하게 양이보국(洋夷保國)을 내세우면서 항전을 준비하였으며,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비밀리에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10월 3일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에 도착하자 잠복하였던 선방 포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큰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방화, 약탈하고 다수의 서적을 약탈하고 패주하였다. 프랑스군이 격퇴된 후에 조선에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며, 홍선 대원군의 서양 배척 정책은 강화되었다.

▨ 신미양요(미국의 강화도 침략)

1871년 3월 미국의 주청 특명 전권 공사인 로우(Low, F.F)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아시아 함대의 로저스(Rodgers, J.)사령관으로 5척의 군함과 대포 85문, 123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는 5년 전인 1866년 1척의 미국 상선이 행방 불명되었는데 그 소식을 알길이 없더니, 병인박해 당시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를 통해 대동강에서 서양 선박 1척이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미국 정부에서는 이를 계기로 조선에 무력적 위협을 가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정책이 결정된 결과인 것이다. 미국 군함은 남양만을 지나 강화 해협에 이르러 4월 29일 우세한 화력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병인양요 이후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고, 더욱이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을 계기로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여서 연안의 방비를 엄히 하고 있었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여기는 어재연이 경군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며, 미군의 공격에 백병전으로 저항하여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일시 광성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미군도 조선군의 저항이 의의로 완강하였으며,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미군은 광성진을 방화한 후 퇴각하였다. 광성진의 함락과 어재연의 전사는 조선의 조야에 커다란 공포가 되었으나, 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척양 정책을 표방하면서 척화비를 각 지역에 설치하여 양이 격퇴의 의지를 보였다. 앞서 프랑스군의 침입에 뒤이은 미군의 침입 사건은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지게 하였으며, 보다 강경한 양이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서양과의 수교가 더욱 시간이 지연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제너럴 셔먼 호 사건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략하기 직전인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이르렀다. 이 배에는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 W.B.)이 조선과의 교역을 트기 위해 서양인 5명과 중국인 13명을 포함한 19명과 통역으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Thomas, R.J.)가 타고 있었다. 당시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는 중군 이현익을 보내 조선이 외국인과 교역하지 않는 국법이 있으므로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그를 잡아 가두는 횡포를 저질로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으나, 물이 점차 원래의 수위로 돌아옴에 따라 셔먼 호는 강바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잡힌 중군을 구해 낸 후 박규수는 셔먼 호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려 화공과 포격을 가하여 결국 셔먼 호가 침몰하고, 승무원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 척 화 비

1871년 신미양요에서 강화도에 침략해 온 미국과 싸우는 과정에서 한동안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일시 광성진이 함락당하고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크자 이를 격퇴하는 것은 지구전으로 대항하면서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한 흥선 대원군은 국왕의 교서를 통해 “양이가 화(和)를 하고자 함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수천 년의 예의 국가가 어찌 견양(犬羊)과 상화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몇 년을 지낸다 하여도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배척할 것이며, 만약 화(和)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는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洋夷侵 非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 통상 개화론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후 척양(斥洋)․척왜(斥倭) 정책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에 일부 선각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외국과 통상을 하며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생각은 이미 실학자들, 특히 북학파들이 제기하고 있었는데 박제가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규경, 최한기 등 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에 의해 상당히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경석의 경우는 역관으로 중국에 자주 왕래하면서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 서양을 소개하는 서적을 가지고 와서 이를 서로 읽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에 관심을 가졌으며,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통상 개화론은 뒤에 개화 사상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서계(書契) 문제

1868년 일본에 새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그들의 왕정 복고 사실을 대마도주(主)를 통해 조선에 알리는 외교 문서, 즉 서계를 동래 부사에게 전하였다. 이 때, 초량(草梁)왜관에 왜학 훈도 안동준이 이 서계를 받아 보니 그 내용 속에 ‘皇上’, ‘ ’, ‘ ’ 등 중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문구가 있으며, 종래 대마도주 종씨(宗氏)가 사용하던 조선 정부에서 보내 준 도서(圖書, 즉 도장)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0년에는 일본 정부가 직접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과 교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서계의 내용을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불평 세력이 등장하였고, 이들 세력을 나라 밖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정한론이 제기되었으며, 대만 출병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일본과의 분쟁을 피하고 관계를 개선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74년 다시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서계 수용 문제가 논의되어 일본은 다시 서계를 가지고 왔으나, 그 내용에 ‘大日本’, ‘皇上’등의 문구가 여전히 들어 있어 실제로 교섭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 운요 호 사건

1875년 일본과 서계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정한론이나 대만 출병 사실과 관련하여 일본과 수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박규수, 이최응, 양헌수 등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다수 의견은 서계의 내용과 그 절차 문제 등을 내세워 수교할 수 없다는 의견이어서 협의가 결렬되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일각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의견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무력을 수반한 교섭을 강요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그리하여 1875년 4월 세척의 군함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였고 그 중에 운요 호는 부산에 입항하였다가 다시 동해에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갔다가 나가시키로 돌아갔다. 8월에는 조선의 해안에서 중국에 가는 항로를 조사한다고 하면서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다. 항로 조사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조선과의 무력 충동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하여 수교 교섭을 강요하려는 술책이었던 것이다. 운요호에서는 먹을 물을 구한다고 보트를 내려 강화도의 초지진 포대로 접근하는 외국 선박을 응징하기 위해 포격을 가하였다. 운요호에서는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와 초지진이 파괴되었으며, 돌아가던 운요호는 영종진에 대해서도 포격을 가하고 상륙하여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수교를 강요하기 위한 정략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일본의 대 한국 침략의 시발이었던 것이다.

▨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

1875년 12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구로다를 특명 전권 대신으로 하여 8척의 군함과 6백여 명의 병력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가 강화도로 향하였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대의 추가 파병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수반하여 조선을 굴복시키겠다는 계획적인 침략 행위였다. 1876년 1월 조선 신헌(申憲)을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강화도 연무당에서 담판이 벌어졌다. 회담이 시작되기에 앞서 일본은 함포를 발사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대를 상륙시키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세 차례나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례한 태도로 회담이 결렬되다시피 하였다. 고종이 정부 고관들의 대책 회의를 소집하였을 대 당시 조선 조정의 다수 의견은 일본의 침략 도전 행위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 때, 박규수는 일본과 수교를 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본이 수호를 청하면서 병선을 대기하였으니, 그 실정은 예측할 수 없으나, 수호 사절(修好使節)이라고 말하니 우리가 먼저 공격할 수 없으며, 만일 의외의 일이 일어날 경우 용병(用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천리 강토가 내수외양(內修外攘)의 방책을 다했던들 조그만 섬나라가 이처럼 우리를 감히 엿보고 공격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군대로써는 일본의 군대 힘을 막을 수 없으니 그들의 청을 들어 수호를 맺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박규수의 의견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이홍장이 조선에 대하여 일본과의 수교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내 왔다. 국내의 수교 허용론의 대두, 청국의 권고,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강압적 위협 등이 일본과의 수교 조약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접견 대신 신헌에게 “우리 나라는 일본과 3백 년 동안 통신사를 보내고 왜관을 설치, 호시(互市)하여 왔다. 비록 수 년 이래에 서계 문제로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자는 처지에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 등이 서로 편리하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신헌은 즉시 일본측과 교섭을 진행시켜 일본이 제안한 12개조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 강화도 조약의 내용

〈제1관〉 조선국은 자주지방이며 일본과의 평등지권을 보유한다. 이후 양국이 화친의 성실을 표하려 할 때에는 피차 동등한 예의로써 서로 대우하며 추호도 침월(侵越) 시혐(猜嫌)하여서는 안 된다. 우선 종전에 교정(交情)을 저해하는 환이었던 여러 예규를 일체 혁파하고 관유홍통(寬裕弘通)의 법을 개확(開擴)하여 서로 영원한 안녕을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경성에 파견하여 예조 판서와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의 장단은 모두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조선 정부 또한 수시로 사신을 일본국 동경에 파견하여 외무경과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제3관〉 이후 양국 왕래 공문은 일본의 그 국문을 사용하되 10년간은 따로 한문 역본 1통을 첨가하고 조선은 진문을 사용한다.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진에는 일본 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 구역이 되어 있다. 이제 마땅히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을 혁파하고 새로 만든 조약에 의거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또한, 조선국 정부는 따로 제 5관에 기재된 2개 항구를 열어 일본국 인민의 왕래 통상함을 들어 주어야 한다. 이 곳에 대지를 임차하고 가옥을 지으며, 혹 이 곳에 거주하는 조선 인민의 가옥을 임차함에 있어서도 각기 그 편의에 맡긴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처를 택하여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선박이 조선국 연해에서 혹 대풍을 만나거나 혹 땔감과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에 도달하기가 불능할 때에는 연안의 어떠한 항구에라도 기항하여 위험을 피하고 선구를 보충, 수선하며 땔감 등을 구입하도록 한다. 그 지방에서 공급한 비용은 선주가 배상하여야 되지만 무릇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는 지방 관민은 특별히 인휼을 가하고 구원을 다하도록 하고 보급에도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양국의 선박이 대양 중에서 파괴되어 선원이 표착하는 경우에는 그 지방 인민이 즉시 그들을 구휼, 생명을 보전하게 하고 지방관에게 보고하여 해당 지방관은 본국으로 호송하고나 그 근방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인도한다.
〈제7관〉조선국 연해의 도서 암초는 종전에 조사를 거치지 않아 극히 위험함에 일본국 항해자로 하여금 때에 따라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하고 그곳의 깊고 얕음을 살펴 도지를 편제하게 하여 양국 선객에게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도모하게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 지정 항구에 시의에 따라 일본국 상민을 관리하는 관원을 설치할 수 있다. 만약 양국이 교섭할 안건이 있을 때에는 그 곳 지방 장관과 만나 협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니 피차의 인민은 각자 임의에 따라 무역을 하며, 양국의 관리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지 못하며 제한 금지도 못한다. 만약 양국의 상민이 서로 속이거나 임차한 것을 보상하지 아니할 시는 양국 관리는 포탈한 상민을 나포하여 보상하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보상하지는 않는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항구에 재류 중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 인민과의 교섭에서 일어난 것이면 공평하게 조선국의 사판(査辦)에 돌아간다.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되 조금이라도 범죄를 비호해서는 안 되며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제11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므로 따로이 통상 장정을 만들어 양국 상민의 편의를 도모함이 마당하며, 또한 현금 의립한 각 조관 중에 다시 세목을 보완 첨가하여 조건에 준조(遵照)함에 편리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6개월 내에 양국이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 또는 강화부에 파견하여 정하게 한다.
〈제12관〉 위에서 의정된 11관의 조약은 이 날부터 준수한다. 양국 정부는 이를 변혁할 수 없으며, 영원히 신의를 가지고 준수하여 화의를 돈독히 한다. 이를 위해 약서 2통을 작성하여 양국이 위임한 대신이 각각 조인하고 상호 교부하여 빙신(憑信)으로 삼는다.
이 조약은 일본의 무력에 강요된 타율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이 미국과 체결하였던 미․일 조약의 내용의 불평등 내용을 그대로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며, 또한 조약의 내용이 쌍무적이 아니라 조선의 일방적인 의무만을 강요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근대적인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조선이 포함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근대 자본주의의 침략의 물결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의 출발이 된 것이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 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 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따.

▨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역점을 두었던 것이 개항장의 확보였다. 이를 통해 그들의 한 국 침략의 기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 조약에는 제 4, 5 관에 이에 관련된 조항으로 부산과 다른 두 개의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였는데, 두 개의 항구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에서 택하되 조약 체결 후 20개월 후에 개항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원래부터 동해안의 원산과 서해안의 인천을 지목하고 있었으나, 조선측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원산은 부근 함흥이 태조 이성계의 탄생지이며 인근에 그 조상들의 무덤이 남아 있어 이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며, 인천은 바로 서울의 인후이므로 수도의 방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 반대하였다. 그 대안으로 조선측은 동해안은 청진이나 나남, 서해안은 군산이나 목포 또는 진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원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으로서, 인천은 서울과 가까워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원산은 일본의 요구로 1879년 7월에 개항하였으나, 인천의 경우는 조선측이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1880년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할 때, 이 문제를 일본 정부 당국과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일본의 압력으로 1881년 2월 인천을 개항할 것을 결정하여 20개월 뒤인 18882년 8월에 개항하게 되었다.

▨ 조선 책략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1879년 서울에 공사를 상주시키고, 원산에 이은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곡물 수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일본 정부와 직접 협의하기 위하여 제 2차 수신사로 김홍집을 파견하였다. 1880년 5월에 일본으로 간 수신사 일행은 일본측의 회담기피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김홍집이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 청국 공사 하 여장(何如章)과 참찬관 황 쭌셴과 만나 필담을 통하여 당시의 국제 정세를 논하였다. 황 쭌셴은 청국에서는 유럽의 소식에 밝은 인물로 서양 여러 나라의 정세를 김홍집에게 알려 주었다. 특히, 그가 저술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김홍집이 가지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이 책은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기본적인 내용은 방아론(防俄論)으로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조선의 외교 방향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방으로 추진해야 될 것을 제시한 것이다. 또, 조선 책략에는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조선에서의 부정적인 생각을 해소시키려는 내용도 들어 있었으며,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서양의 다른 나라와도 수교하는 것이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정부가 미국과의 수교와 개화 정책의 추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에 반하여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1876년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과 수교를 하게 되자 구미 국가 가운데 미국이 특히 조선과의 수교를 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는 1866년 제너럴 셔먼 호의 불행한 사건과 함께 1871년 신미양요로 두 나라의 수교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조선과 수교에 성공한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 교섭을 하려 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의 독점적 활동을 위하여 다른 나라가 조선과 수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중재하기를 꺼리자 미국은 청의 이홍장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조선과의 수교가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조선과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다. 조선과의 교섭을 책임 맡은 슈펠트 제독은 1880년 7월 이홍장의 초청으로 톈진으로 가서 회담하였으며, 1881년 7월 두 번째의 회담을 하였다. 이 때,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간 어윤중이 톈진에 가서 미국과의 수교 문제로 이홍장과 협의하였으며, 1882년 영선사 김윤식이 톈진에 오자 그도 이홍장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여 미국과의 수교 윤곽이 잡혀 나갔다. 이홍장이 조선과 미국꽈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외국과의 수교를 중재함으로써 조선에 청의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것과, 외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청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알려 그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조선에서 독점적인 일본의 지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미국과의 조약문은 조선 대표들이 참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청과 미국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1882년 5월 조선 대표인 신헌은 도장만 찍었을 뿐이었다. 조․미 통상 조약은 전문 14개조로 되었으며, 그 내용은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과 큰 차이가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다만, 제 1 관에 양국은 서로 거중 조정(居中調整 ;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뒤에 조선과 미국이 각각 그 해석에 있어 견해를 달리하였는바, 조선에서는 동맹 조항으로서 공수 동맹 또는 군사 동맹으로, 미국에서는 외교적인 우호의 표시로 해석하였다.
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 수신사 김기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측이 사신을 파견해 주기를 요청하자 의례적인 형식으로 조선 정부에서는 예조참의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3개월 만인 1876 4월 29일 일본측이 주선한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가서 20여일 동안 도쿄에 체류하였다. 수신사 일행은 75명으로 일본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전신, 철도, 군함, 대포 제조, 군사, 기계, 학술, 교육 등 각분야를 시찰하면서 일본의 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하였다. 일본은 수신사를 통하여 일본의 발전 모습을 조선에 보임으로써 그들의 힘을 과시할 필요에서 수신사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김기수는 귀국 후에 국왕에게 복명하면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국왕에게 소개하였으며, 국왕의 개화 의욕을 북돋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귀국 후에 지은 일동기유(日東記遊)는 일본의 개화된 모습을 알려 주고 있다.

▨ 수신사 김홍집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해결해야 될 현안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측에서는 현안 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실정을 보다 상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제 2차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현안 문제는 일본이 1879년 원산의 개항을 요구하면서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자 이에 대처하는 문제와 미곡의 유출을 줄이는 것과 관세 배상 문제 등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김홍집을 수신사로 임명하였는데, 그 일행 가운데 주요 인사들은 윤웅렬, 이조연, 강위, 지석영 등이 포함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수신사 일행에 대한 접대는 후하게 하였으나, 수신사의 방일 목적이 일본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었으므로 일본 정부의 고관들은 김홍집과의 면담을 의도적으로 기피하여 수신사는 방일의 목적을 달



성할 수 없었다. 이에 김홍집은 주일 청국 공사관에 자주 들렀으며, 황 쭌셴이 지은 조선 책략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강화도 조약 이후 새로운 외국 문물의 수용과 외국과의 교섭 및 통상 등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의 개편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청국의 총리기무아문을 모방하여 1880년 12월(음) 종래의 의정부와 6조와는 별도로 정 1 품 아문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군국의 모든 일을 총령하여 그 권한이 방대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설치된 지 2년 후에 군국기무 등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과 외교 통상을 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나누어졌다.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당시의 12사와 그 업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대사 ; 중국과의 외교
교린사 ; 일본 및 각국과의 외교
군무사 ; 경향의 군사 사무
변정사 ; 국경 사무, 인근 국가의 동정 및 정탐
통상사 ; 외국과의 통상
군물사 ; 병기 제조
기계사 ; 각종 기계 제조
함선사 ; 각종 선박 제조
기연사 ; 연안 포구 왕래 선박 검사
어학사 ;각국 언어, 문학의 번역
전선사 ; 관리 선발과 관용품 조달
이용사 ; 재정 사무
통리기무아문 총리 대신에 영의정 이최응을 임명하였으며, 당상관으로는 김보현, 민겸호, 김병덕, 윤자헌, 조영하, 정범조, 신정희, 민영익, 이재긍, 김홍집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보수적 경향을 띤 인물이었으며, 개화파에 해당하는 인물은 김홍집 등 극소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은 1884년 의정부에 통합되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남아 있었다.

▨ 군제 개편과 별기군의 설치

개화 정책의 추진과 함께 부국 강병의 일환으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군제의 개편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군제의 개편과 동시에 신식 군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기존 군제는 5영으로 나뉘었던 것을 무위영과 장어영 2영으로 통합하여 이경하와 신정희를 각각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별기군이란 신식 군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별기군은 1880년 김홍집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윤웅렬이 중심이 되어, 기존 군대에서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1881년 4월 무위영 소속으로 출발하였다. 별기군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대로 소총으로 무장하여 신식 훈련을 받았다. 교련소 당상에는 민영익, 정령관에 한성근, 좌부령관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원, 참령관에 우범선이었으며, 교관으로 일본군 소위 호리모도를 초빙하여 서대문 밖 모화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후에 하도감으로 옮겼다.

▨ 신사 유람단의 파견

강화도 조약 이후 김기수와 김홍집 등 두 차례의 수신사가 일본에 다녀온 뒤 일본이 발전한 모습이 소개되자 나라의 개혁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던 고종과 개화파 관료들은 개혁을 위한 자료의 수집과 일본의 실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대규모의 시찰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국내 사정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대하여 경계하면서, 특히 김홍집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을 둘러싸고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시찰단을 공개리에 파견하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동래부 암행 어사로 발령하여 비밀리에 부산에 집결하도록 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람단으로 소개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시찰단은 12개 반으로 총 인원 60명으로서 각 반의 책임자는 전직 관리로 하고 수행원과 통역 및 하인들로 구성되었다. 각 반의 책임자는 개인적으로 국왕으로부터 시찰 대상에 대한 지시를 받고 귀국 후에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었다. 이들은 1881년 4월 10일(음력)에 부산을 출발하여 약 3개월 뒤에 귀국하였다.
12개 반의 책임자와 수행원, 그리고 시찰 대상은 다음과 같다.
책임자수행원시찰부서조준영
박정양
엄세영
강문형
조 병
민종묵
이헌영
심상학
홍영식
어윤중

이원희
김용원이봉식, 서상직
왕제응, 이상재
엄석주, 최성대
강진형, 변택호
안종수, 유기환
민재후, 박회식
이필영, 민건호
유진태, 이종빈
고영희, 성낙기, 김낙운
유길준, 유정수,
김량한, 윤치호
송헌빈, 심의영
손붕구문부성
내무성, 농무성
사법성
공무성
세관
외무성
세관
조폐
군부
대장성


군부
이들 책임자와 수행원들은 그 후 정부 내의 근대적 전문가로 발전하여 개화 정책의 추진에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수행원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유학생으로 남아 있도록 하였으니, 어윤중의 수행원이던 유길준과 유정수는 경응 의숙, 윤치호는 동인사(同人社), 김량한은 조선소에서 공부하였다. 또, 이원희는 특별히 일본에서 총포와 군함을 구입할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참모로 임명된 이동인이 급작스럽게 암살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 영선사의 파견

1881년 9월 정부에서는 개화 정책의 구체적인 표현의 하나로 무비 자강의 계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청의 부국 강병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톈진의 군사 공업 기지로 가서 근대식 병기 기술을 학습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직예총독 이홍장의 건의가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유학생 38명을 포함한 70여 명의 일행이 청국의 톈진에 있는 기기국으로 떠났다. 당시 유학생들은 주로 공장들이었다. 이들은 9월 26일에 떠나 11월 17일에 북경에 도착하고, 관리들과 협의하여 1882년 1월 38명의 유학생은 기기국의 동․남국 및 수사(水師) 학당과 수뢰(水雷)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무기 제조법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 각 분야와 외국어도 습득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1882년 10월 학습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중에 귀국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먼저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영향도 있었으며, 학도 중에는 각종의 사유로 도중에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재정의 어려움으로 유학 경비의 조달이 어려워졌으며, 서울에 기기창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유학생들의 귀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영선사의 파견은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학도들의 비교적 체계적인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학습에 따라 과학 기술의 수용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귀국한 다량의 과학 기술서적과 기계류는 이후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유학생들이 귀국한 후 그들이 중심이 되어 기기창(機器廠)이 설립되었다. 한편, 영선사로 청국에 가 있던 김윤식은 이홍장과 교류하면서 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는 데 활약하였다.

▨ 척화 주전론

19 세기 중반 이후 서양 열강의 침략 세력의 접근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권과 민족 문화 전통을 수호한다는 사상적 기반으로 전개된 것이 척화 주전론이다. 1866년 프랑스의 침입 사건은 서양의 침략 위협이 직접 현실화되는 것으로서,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즉, 병인양요는 군사적인 침략일 뿐 아니라 서양 자본주의의 경제적 침략이었으므로, 군사상, 경제상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시대 상황에서 제기된 사상이었다. 이는 병인양요 당시 사직소를 제출한 이항로의 상소 내용에 가장 대표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그는 서양의 침략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보고, 이를 막아 싸워 물리쳐야만 국가의 보존과 민족의 생존이 유지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안으로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주장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 왜양 일체론

1876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화도 조약의 체결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일본과의 조약 체결은 서구의 자본주의 침략 세력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 나라에 침략하는 것으로 보고 일본과의 수교와 개항을 반대하는 논리로 제기된 척사론이다. 이 주장은, 강화도 조약을 반대한 최익현의 상소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최익현은 조약 체결의 불가함을 오불가소(五不可疎)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첫째,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자주의 위기, 둘째,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 산업의 파괴, 셋째 일본은 서양의 적과 같으며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 예의의 위기, 넷째,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자에 대한 약탈의 위기, 다섯째, 일본은 금수와 같으므로 문화 민족인 우리가 그들과 교류할 때에 도래할 문화의 위기 등이다. 이는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우리에게 닥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의 위기를 통찰한 주장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의 우월한 문화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최익현의 왜양 일체론은 단순히 일본과 서양이 동일하다는 각도에서 나타난 배타적인 척사론이 아니라, 일본이 서양의 침략 세력과 동일하게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므로 이에 대해 그들보다 우수한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함께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신사 척사 운동

1880년 후반부터 시작되어 1881년에 격렬하게 전개된 척사 운동이다.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은 고종과 개화 세력의 적극적인 개화 정책의 추진에 자극제가 된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통을 고수하면서 밖으로부터 침투하는 이질 문화 내지 이와 결부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침략 세력을 막아야 된다는 척사론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척사론자들은 적극적 개화 정책의 계기가 된 조선 책략을 비판하고 이를 들여 온 김홍집을 비난하면서 나아가 정부의 개화 정책을 비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고종을 비난하기에까지 이르러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척사론의 주장자들인 유생들은 집단적인 상소 운동을 전개하여, 영남 유생 이만손의 만인소, 강원도 홍재학의 만인소는 그 대표적이다. 신사 척사 운동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개화 세력과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는 위정 척사 세력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개화와 보수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19세기 말 근대화의 추진과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자주권을 수호해야 하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서 민족의 대응 과정이 내부적 분열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나타낸 결과를 초래하였다.

▨ 제물포 조약

1882년 임오군란으로 서울의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으로 별기군의 교관인 호리모도 소위와 육군 어학생 2명과 외무성 순사 1인이 살해되었다. 청군의 개입으로 난이 끝나고 홍선 대원군이 납치되자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의 사과와 배상 요구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한 군대 출동 등을 결의하고 조선에 압력을 가하였다. 일본으로 쫓겨갔던 하나부사 공사가 서울로 돌아오자 조선의 전권 대신 이유원과 부관 김홍집은 그를 상대로 협상을 시작하여 1882년 7월 6개조로 된 제물포 조약과 수호조규속약을 체결하였다.

<제물포 조약>
제 1 조.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범인을 체포하여 엄징할 것.
제 2 조. 일본국 피해자를 후례로 장사 지낼 것.
제 3 조. 5만 원을 지불하여 피해자 유족 및 부상자에게 급여할 것.
제 4 조. 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
제 5 조. 일본 공사관에 군대를 주둔시켜 경비에 임하는 것을 허용할 것.
제 6 조. 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여 일본국에게 사죄할 것.
<수호조규속약>
제 1 조. 부산, 원산, 인천 각 항에 일본인 이정을 사방 각 50리로 하고 2년 후에는 다시 100리로 할 것.
제 2 조. 일본 공사와 영사 및 그 수행원이 조선 내지 각처를 여행할 수 있게 할 것.
이로 인해 일본인의 한국 내 왕래가 활발해져서 경제적 침투가 더욱 유리해졌으며, 특히 제물포 조약에 의해 서울에 공사관 호위라는 명목으로 일본 군대가 상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일본국에 사죄 사절을 파견한다는 조약에 따라 박영효를 정사, 김만식을 부사, 서광범을 종사관으로 하는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이 때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

임오군란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을 하게 된 청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에 뒤진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청국측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선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조선측에서도 조선 책략에 제시된 친중국론을 실행하고 조선을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선 내의 일본 상인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청 상인들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882년 8월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간섭을 증대하고 일본에 대항하는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청은 조선과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전문 8조로 된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며, 청국 상인들의 특혜를 인정하고, 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 상무 위원을 파견하는 한편, 그의 치외 법권을 인정하며, 종래 실시하던 국경 무역을 개방할 것 등이다. 이 조약은 결과적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강화한다는 데 있었으며, 청 정부의 보호 밑에서 청 상인들이 각지에서 활동하여 일본 상인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농촌의 경제적 파탄이 가속화되었다.

▨ 개화 사상에 영향을 준 서적

19 세기 중엽 이후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무물에 대한 정보는 주로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이었다. 이들 서적에는 중국인이 저술한 것도 있으며, 많은 분량이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조선 후기에도 같은 현상으로 천주교에 관련된 서적은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얻게 해 주는 정보원이 되었던 것이다. 개화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도 이는 같은 상황이었다. 1880년대 이후에는 일본이 신지식의 통로로 활용되었지만 아직도 중국은 중요한 통로였다. 이는 당시의 지식인의 지적 바탕이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와 개화파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요 서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역사․지리>
해국도지(海國圖志 ; , 1844년), 영환지략(瀛環志略 ; , 1850), 지구설략(地球說略 ; 미국 선교사 Richard Q. Way, 1856), 보법전기(譜法戰記, 王 , 1872)
<정치․법률>
조선 책략(朝鮮策略, , 1880), 만국공법(萬國公法, 미국 선교사 William Alexander Par - sons Martin, 1864), 흥아회잡사시(興亞會雜事詩 ; 1880년 일본에서 설립한 친목회 흥아회 회원들이 지은시), 이언(易言 ; , 1880)
<자연 과학>
격물입문(格物人門 ; 1866), 박물신편(博物新編 ; 영국 의사 Benjamin Hobson, 1855)
<신문․잡지>
신보(申報 ; 영국 상인 Ernest Major, 1872), 만국공보(萬國公報 ; 미국 선교사 Yong J. Allen, 1868),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 미국 선교사들, 1872), 격치휘편(格致彙編 ; 미국 선교사 John Fryer, 1876)
<한국인 저술 및 번역>
기화근사(箕和近事, 김옥균), 지구도경(地球圖經, 박영교), 농정신편(農政新編, 안종수)

▨ 한성 순보(漢城旬報)의 발행

한성 순보는 1833년 10월에 창간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이다. 일간이 아니고 관보의 의미도 있어 신문이라고 하기에 미비한 점도 있으나, 새로운 소식을 게재하며 정기적으로 발행되었으며, 그 체제가 신문의 형태를 따랐기 때문이다. 1882년 말 임오군란의 결과 일본에 수신사로 간 박영효는 신문이 개화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귀국하면서 일본의 신문 기자와 인쇄 기술공을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한성 판윤으로 임명되자 신문 제작의 실무를 유길준에게 위촉하였다. 유길준은 신문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창간사를 작성해 놓았으나,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물러남에 따라 일시 그 일이 중지되었다가 1883년 8월 박문국이 설치되고 10월 30일에 창간호를 간행하게 되었다. 순보는 10일에 한 번씩 14개월 간 빠짐없이 간행되어 모두 40호 정도 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간행이 중단 되었다. 순보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 과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어 국민에게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하였으며, 한국의 개화 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86년 1월 1일부터 1주일에 한 번씩 한성 주보로 속간되었으나, 재정이 어려워 1888년 7월 폐간되었다. 특히, 주보는 국한문을 혼용하여 그 독자층이 확대되었으며, 그 영향도 사회 전반에 미쳤을 것이다.

▨ 유학생의 파견

새로운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은 유학생 파견으로 나타났다. 유학생의 파견은 개화파 인사들, 그 중에서도 김옥균이 앞장 서서 추진하였는데 대부분 일본에 치중되었다. 1881년 신사 유람단이 일본에 갔을 때, 수행원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서 유길준과 유정수가 경응 의숙에, 김양한이 조선소에, 윤치호가 동인사에 각각 유학하였으며, 1882년 김옥균이 국왕의 특명으로 일본에 가면서 수행원인 변수와 김용원이 화학과 양잠 학을 공부하였으며, 또다른 사람들은 육군 학교와 가죽 공장에 유학하였다. 임오군란 후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역시 그 일행 중에 경응 의숙과 동인사에 유학하였으며, 1883년 김옥균이 차관 교섭차 일본에 갈 때도 다수의 유학생을 인솔하였다. 박영효가 신문 제작 기술자로 데리고 온 일본 기술자가 귀국할 때 김옥균의 주선으로 17명이 도야마 육군 유년 학교에 유학하였는데, 서재필이 여기에 끼여 있었다. 그리하여 1883년 말에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은 약 50명이 되었으나, 개화당이 추진하고 있던 차관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비가 부족해져 1884년 봄에는 대부분 귀국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거의 개화당에 가담하였으며, 갑신정변에 참여하였고, 그 후 한국 근대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1881년 청국 톈진에 영선사를 따라 무기 공장에 공부하러 간 학도들도 유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학생의 필요성은 그 후에도 정부에서 잘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895년 초(양력)에 발표된 홍범 14조에서도 ‘ ’라고 하여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 개화당의 차관 도입 교섭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지출이 증대하여 재정난이 계속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는 개화당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대하는 데도 필요한 일이었다. 김옥균은 이 일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이본을 왕래하였으며, 고종도 이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1882년 3월에 1차로 이본에 갔으나 차관을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882년 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김옥균이 동행하여 2차 일본 방문을 하여 17만 원의 차관을 얻었다. 이 돈은 임오군란에 대한 배상금으로 일부 지불하고, 나머지는 신문 제작비와 유학생 경비로 충당하였다. 박영효가 귀국한 뒤에도 김옥균은 계속 남아 차관 교섭을 하여, 국왕의 위임장이 있으면 차관을 하겠다는 일본측의 약속을 받고 일시 귀국하여 국왕의 위임장을 받아 1883년 5월 일본에 갔다. 그러나 일본은 김옥균이 조선의 정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지 못한 현실을 들어 차관 교섭을 기피하고 있는 사이 조선 정부의 보수 세력이 차관 교섭을 방해하여 결국 김옥균의 차관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차관을 통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감에 비상 수단으로 정변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 갑신정변 실패 후의 개화당 인사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변에 참가하였던 개화당의 주요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었다. 이들은 쫓겨가는 일본의 공사 일행과 함께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선박 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미국에 갈 계획이었으나 여비를 구하지 못해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김옥균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본국에서 계속 건너오고, 일본 정부가 그의 존재를 거북하게 받아들여 멀리 외딴섬으로 보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자객으로 온 홍종우의 꼬임에 빠져 1894년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나, 상하이에서 머물고 있던 차에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세 사람은 1885년 함께 미국으로 갔으나, 곧 헤어져서 박영효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왔고, 1894년 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사면을 받아 귀국하였다가, 1895년에 내무 대신과에 있다가 돌아와 1895년 법무 대신과 학부 대신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공사가 되기도 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고 의학 공부를 하여 병원을 경영하는 등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1896년 귀국하여 독립 신문을 간행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그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 한성 조약

189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 공사관 일행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탔으며, 일본인이 살해당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 공사가 정변에 개입되었다고 일본을 비난하면서 양국사이에 외교적 접촉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로 맺어진 것이 한성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조선 정부는 일본에 망명한 개화당 인사들의 송환요구와 정변 개입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정부에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새 공사관을 지을 땅과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였다.

<한성 조약>
제 1. 조선국은 국서를 일본에 보내 사의(謝意)를 표명할 것.
제 2. 일본국의 해를 입은 유족 및 부상자를 휼급하고 상민의 화물이 훼손 약탈된 것을 전보(塡補)하기 위하여 조선국에서 십만원을 지불할 것.
제 3. 일본인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사문 나포하여 엄벌에 처할 것.
제 4. 일본 공사관은 신기지로 이축함을 요하는바 조선국은 마땅히 기지 방옥을 교부하여 공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하도록 할 것이며, 그 신축, 중건에 있어서는 조선국이 다시 2만원을 지불하여 공사비에 충용하도록 할 것.
제 5. 일본 호위병의 영사는 공관 부지를 택하여 정하고, 임오속약(즉, 제물포 조약) 제 5관에 비추어 시행할 것.
(부칙)
1. 제 2, 제4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계산할 것이며 3개월 기하여 인천에서 완불할 것.
2. 제 3의 흉도를 처단함은 입약 이후 20일을 기한으로 할 것.

▨ 톈진 조약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울에서 개화당 정부를 지원한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과 조선 정부를 지원한 청국군의 교전이 일어난 사건은 정변 이후 두 나라 사이에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정변이 끝난 후 한성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공사가 거느리고 온 일본군이 다시 서울에 주둔하게 됨으로써 청․일 양국의 군대가 제 3국에서 대치하게 된 상황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화된 그들의 세력을 회복하여 청과 균형된 상황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청국과의 외교적 담판이 필요하였다. 당시 청국은 프랑스와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 중 이어서 조선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한 상황임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2월 18일부터 3월 4일사이에 6차에 걸친 회담을 거쳐 이토 히로부미와 이 홍장 사이에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과 청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조선과 관련된 문제였으나, 조선의 의사는 일체 고려됨이 없이 두 나라 사이에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첫째,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는 것이고, 둘째,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출동할 필요가 있을 때는 서로 사전에 통보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의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조선에 출병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일본의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톈진 조약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은 더욱 심해졌으며,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면서 앞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위해서 청국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청․일 양 국의 경쟁적인 경제 침투로 인하여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고 농촌 사회에 현실 문제를 극복하려는 농민들의 의식이 고조되면서 동학 사상이 파급되며, 현실을 적절하게 이끌어 가지 못하는 정부와 양반 계층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으며, 이에 따라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전통 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고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톈진 조약>
1.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공사관을 호위하기 위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 날인한 날로부터 기산하여 4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그 이내에 각기 전체를 철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분쟁 야기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다. 중국군은 마산포로부터, 일본군은 인천항으로부터 철수한다.
1. 양국이 함께 승낙한 것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치안을 스스로 지키도록 조선 국왕에게 권하며, 또 조선 국왕에 의하여 다른 외국의 무관 1인이나 혹은 수인을 선발하여 교련의 일을 위임케 하되 이후 청․일 양국은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교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1.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청․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을 요할 때에는 마땅히 우선 상대방 국가에게 문서로 알릴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회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 방 곡 령

일본 상인들에 의한 한국의 곡식이 일본에 유출되어 한국 농촌의 곡식은 부족해지며, 곡식값이 폭등하여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져 갔다. 더욱이 흉작이 계속되어 농민의 참상이 더하였다. 정부에서는 한․일 간에 체결된 통상 장정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수정하여 한국에서 병란이나 흉작 등으로 국내에 식량이 부족할 경우 지방 장관의 방곡 망령으로 미곡 수출을 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방곡령을 발하기 1개월 전에 해당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통보하기로 하였다. 방곡의 문제는 그 이전에도 일정 지역 안의 미곡을 그 지방의 납세나 주민의 자금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방관의 이름으로 타 지방으로 미곡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880년대에는 일본 상인들의 횡포로 미곡이 유출되자 곳곳에서 방곡이 시행되어 서울에 반입되는 쌀의 양이 줄어들어 쌀값이 폭등하고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1889년 함경도 감사의 콩수출 금지와 1889년 황해도 감사의 쌀 수출 금지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쌀 유출이 금지되게 되자 이익을 못 내게 된 일본 상인들은 일본 공사관과 결탁하여 방곡 시행 1개월 전에 사전 통보한다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 상인들이 입은 손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하라고 강요해 왔다. 그 후 경상도 지역에서도 방곡령이 발표되었는데, 방곡령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는 농촌 사회에는 반일 감정이 팽배해져 갔다.

▧ 보은 집회

1882년 삼례 집회와 1893년 복합 상소 운동을 통하여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과 지방관의 동학 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동학의 지도층은 본격적으로 저항 또는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문을 보내 보은에 교도를 집합시켜, 모인 교도의 숫자가 2만여에 달하였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동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수많은 인원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의 농촌 사회가 정부에 대해 불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정부의 국민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보은 집회는 동학의 움직임이 단순히 종교적인 활동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교도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표방하고 지방관의 횡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보은 관아의 삼문 앞에 게시된 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왜양의 적이 나라의 중심부에까지 침입함으로써 문란이 극도에 달하고 있고, 이에 따라 국도는 필경 이적의 소혈이 될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들은 동력서사(同力誓死)하여 왜양을 소탕하여 대의를 이루고자 한다.” 하였으니, 교조의 신원을 말하는 내용은 이미 자취가 없으니 이제는 단지 종교적 자유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왜양을 쳐부수겠다는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 동학의 조직

동학은 크게 충청도 지역의 북접과 전라도 지역의 남접으로 두 개의 계열이 있었다. 최제우가 처형되기 전에 최시형을 북접 도주로 임명하였으며, 또다른 사람이 남접 도주로 임명된 사람은 명확하지 않지만 뒤에 남접의 지도자로 서장옥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였다. 처음에 동학 농민군이 봉기할 때 그 시작은 남접에서였으며, 북접에서는 그 후 에 참여하였다. 동학의 포교는 제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그의 포교 활동은 1878년경 이후에 크게 활발해졌으며, 그 교세는 충청, 경상,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 강원도까지 파급되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더욱 번성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교단 조직이 갖추어졌다. 각처에 접소(接所)를 두고 여기에 대접주, 도접주, 수접주, 접주 등의 직책을 두었다. 즉, 큰 지역에 대접주를 두고 그 밑에 몇 명의 접주를 두어 소지역을 나누어 포교를 분담하였으며, 면에는 면접주가 있는 곳도 있었다. 한편 포(包)는 교구제도와 같은 것으로 대접주로 포주를 삼아 그 밑의 접주를 통솔하였다. 각기의 포에는 여섯 가지의 사무를 분장하여 이를 육임제(六任制)라 하였다. 접과 포는 동학 조직의 기본이었으며 이는 교단 조직이면서 동시에 교도를 동원하는 조직이기도 하였다.

▨ 군국기무처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중심 기관으로 설립된 일종의 국정 최고 기구의 성격을 가진 특설 기구로서 김홍집이 영의정으로서 총재로 임명되었으며, 기타 구성원으로는 부총재 1명과 20명 미만의 의원이 있었다. 운영은 합의제이며 공개적이고 다수결로 의결하여, 흥선 대원군에게 보고하고 최종적으로 국왕의 재가를 받는 절차를 거쳤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적 절차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왕과 왕비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정권 대행자의 위치에 있었던 흥선 대원군의 간섭도 배제하여 초정부적인 입법부의 성격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대체로 당시 일본의 원로원과 추밀원의 관제를 모방한 것으로 조직상으로는 의정부에 속하였지만 영의정 이하 정부 대신과 군사 지휘관 및 경찰 지휘자도 의원의 구성원으로서 이 기구 자체를 구속할 수가 없었다. 고려 말의 도평의사사 또는 조선 후기의 비변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7월 27일 설치되어 12월 17일 폐지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205건(혹은 208건)의 개혁안을 처리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1차 개혁

1894년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내용의 개혁이 실시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의정부 관제와 궁내부 관제, 경무청의 신설, 최고법원인 의금사의 설치, 관등의 축소(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관리의 월봉제 실시, 과거 제도 폐지와 새 관리 임용 제도 실시, 은본위제의 화폐 제도 실시, 문무관의 차별 폐지, 죄인 연좌법의 폐지, 공사 노비 제도의 혁파, 양자 제도의 개선, 조혼의 금지, 과부의 재혼 허용, 조세의 금납제, 도량형 통일 등이다. 이 기간에는 일본이 제2차 동학 농민 봉기로 교전 중이며 동시에 청․일 전쟁이 진행 중이어서 일본의 간섭이 비교적 미치지 못하여 혁신 관료의 독자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제1차 개혁은 정치 제도의 개혁이며, 국민의 개혁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며, 친일 세력의 개혁이라는 반발이 따르기도 하였으며, 국민의 오랜 관습으로 내려온 조혼 금지나 양자 제조 또는 과부 재가 허용 등은 실시되지도 못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2차 개혁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이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었으며, 동학 농민군도 그 저항이 약화된 상황이어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려는 의도에서 그 동안 개혁의 추진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반일적인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박영효를 사면하도록 하여 개혁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군국기무처가 해체되고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박영효는 내무 대신을 맡아 실권을 잡고 실제로 개혁을 주도하였다. 1895년 1월 9일 국왕이 직접 개혁에 앞장 선다는 의미로 조종(祖宗)에게 서고하고 개혁 정치의 내용을 내외에 선포하는 홍범14조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한 개혁으로는 의정부를 내각으로, 정부 기관의 명칭을 아문에서 부(部)로, 지방 제도를 23부(府)로, 신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한성 사범 학교와 외국어 학교의 설립, 사법부의 독립, 군사 제도의 일원화와 훈련대 사관 양성소 설치 등이다. 제2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개입되었으나, 청․일 전쟁 후에 일어난 삼국 간섭의 와중에서 일본의 적극 개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박영효 중심의 독자적 개혁의 성격이 있다.

▨ 갑오개혁기의 제3차 개혁

제2차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김홍집이 물러나고 박영효가 일시 총리 서리를 맡았으며, 박정양이 총리가 되었다. 박영효가 반역 음모 사건으로 실각되고 김홍집이 다시 총리가 되었으나 삼국 간섭 이후 내각에 친러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때, 일본은 친러 세력의 배후가 명성 황후라는 사실을 알고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부랑배를 동원, 궁중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하였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3차 개혁은 박정양 다음에 김홍집이 다시 총리 대신이 되는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옮겨가는 때까지이다. 이 개혁을 보통 을미개혁이라고도 한다. 중요한 개혁 내용으로는 서울에 관립 소학교 설립, 건양 연호 사용, 태양력 사용, 우편업무의 재개, 군제 개혁으로 친위대와 진위대 편성, 단발령의 발표 등이다. 명성 황후 시해에 대한 반감에 더하여 단발령에 따른 반발이 결국 항일 의병 항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활빈당(活貧黨)

1898~1904년 기간 동안에 농촌에서는 활빈당이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활빈당은 본래 화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집단`이라는 의미의 활빈(活貧)당이라는 이름을 내건 다음에는 의적(義賊)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898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반침략, 반봉건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평소 40~50명 적으면 10~30명 단위로 총과 칼로 무장하고 말을 타고 다니며 양반 부호가의 재물을 빼앗아 이를 빈민이나 영세 소상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그들은 외국 상인이나 외국 자본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활빈당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민중의 경제 안정과 제국주의의 이권 침탈에 대한 반대를 나타내었다.
“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을 채용할 것”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금할 것”
“행상인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금할 것”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타국에게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보안회(保安會)의 활동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 의정서를 강요한 직후 이른바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및 세목’ 등의 대한경영안(對韓經營案)을 만들어 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진행하면서 내하(內河) 및 연해 어업권을 비롯하여 철도 부설권과 관리권, 통신 기관 권리권, 삼림 벌채권,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강점하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도 강탈하려 하였다. 일제는 주한 공사를 통하여 50년간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일본인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 속에는 황무지의 개간, 정리, 척식 등 모든 경영권과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권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일제는 황무지를 개척하고 그곳을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요구가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반대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04년 7월 13일 전의관(前議官) 송수만, 심상운 등이 중심이 되어 보안회를 조직하였다. 보안회는 종로 백목전(白木廛) 도가(都家)에 본부를 두고, 공개적으로 성토 대회를 열어 일제의 황무지 요구에 결사 반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정부 고관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확산되었으며, 지방의 진위대가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는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보안회 지도 인사들을 납치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이 계속 되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정부는 일본 경찰의 철수를 요구하는 동시에 촌토의 땅도 외국인에게 내어 주지 않을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고 보안회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보안회 운동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선두에서 전개한 대중적 항일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에 해당된다.

▨ 헌정 연구회

보안회가 해산한 뒤에 협동회, 공진회, 진명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었으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고, 1905년 5월에 독립 협회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헌정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헌정 연구회는 이준, 양한묵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과 정부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야 되며, 국민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자유롭게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입헌 의회제도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특히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나 대한 제국 정부에서 민간인이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으며, 더욱이 을사조약이 강요된 이후에는 한국인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였으므로, 합법적인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한 자강회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지식인들과 민족 운동가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산업의 진흥과 교육 보급 등 사회 문화운동으로 그 활동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4월에 창립된 단체가 대한 자강회였다. 대한 자강회는 헌정 연구회를 계승하여 윤치호를 회장으로 하고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임진수, 김상범 등 발기인 5명을 포함한 10명의 평의원, 최재학, 정운복 등 10명을 간사원으로 하는 지도부를 구성하여,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에 27개소의 지부를 두었다. 대한 자강회의 목적은 자강회 규칙 제 2조에 ‘교육의 확장과 산업의 발달을 연구, 실시하는 것으로 자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후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에서 보이듯이 국권 회복의 기초가 되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애국주의적 신지식을 교육하고 근대 산업을 일으켜 국민의 자강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 목적은 당시 국권회복을 위해 직접적이고 무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의병 활동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자강회에서는 무력 대결은 시기와 역량을 고려하지 못한 무모한 행위라고 하여 비판하였다. 대한 자강회는 국민의 계몽을 위해 정기적으로 연설회를 개최하고 ‘월보’를 발행하였다. 월보의 창간호는 1906년 7월호부터인데 자강회가 해산당하는 1907년 7월까지 13호가 나왔다. 월보의 내용은 학교 교육 운동, 사회 교육 운동, 사상 확대 계몽 운동, 정치․경제에 관한 논설 등 다양하였으나, 주로 교육에 관한 것이 많아 학교 설립과 의무 교육의 주장, 학계의 소식, 여러 가지의 교육 내용 등을 다루었다. 대한 자강회는 통감부의 감시 하에서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의 활동이었으므로 그 활동의 폭이 좁아 보다 대중적이고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지식인 중심의 계몽운동이었다는 한계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대원장부(大垣丈夫)를 택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또 월보의 문체가 토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자로 되어 있어 일반 대중이 읽기에는 너무 어려웠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더욱이, 통감부의 일본인들은 자강회의 배후에서 그 조직을 조정하고, 전국의 항일 지식인들을 파악하여 이들을 조정하고 항일 의식을 둔화 마비시키고자 하였다. 통감부에서 관찰사나 군수 등의 관리에 자강회 회원을 발탁한 것도 통감부의 교활한 민족 분열책이었던 것이다.

▨ 신민회(新民會)

대한 자강회의 해산 이후 국권 회복을 전제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비밀 결사로서 그 이전의 합법적인 단체와는 성격과 활동 내용에서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미국에서 동포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다가1907년 2월 귀국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연회 등을 통해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신민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 애국적 선구자들이 자기 수양에 힘써 역량을 키우고 민중의 모범이 될 것.
○ 그러한 동지들이 굳게 단결하여 힘을 더욱 크 게 할 것.
○ 그 힘으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전력하여 민족 적 역량을 준비할 것.
○ 그리하여 앞으로는 오는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주적 역량으로 민족 재생의 큰 사업을 이룩할 것.
신민회는 양기탁을 총감독으로 하고, 안창호,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등이 창건위원이 되었으며, 중심 인물로는 최광옥,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조성환, 김구, 신채호, 이강,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등이었다. 신민회의 조직 체계와 규정은 신민회가 비밀주의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회원은 전국적으로 약 8백 명에 달하여 당시 주요계몽 운동가는 거의 망라되었으며, 특히 서북 지방의 교사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종적인 연락에 의해 비밀을 고수하면서 회원 각자가 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업으로 는 1908년 평양 대성 학교의 설립과 운영이며, 평양의 마산동에 설립한 자기 회사와 서울, 평양, 대구에 설치한 태극 서관이었다. 태극 서관은 손님으로 가장한 신민회 회원들의 연락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자체 내에 인쇄 시설을 갖추어 각종 도서를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일제가 조작한 총독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된 105인이 사건을 계기로 그 지도부가 체포되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한편, 신민회는 청년 운동의 일환으로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주로 서북 지방에 분회를 두고 청년의 인격 수양과 단체 생활의 연마, 일인 일기 교육으로서 직업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안창호는 청년 학우회의 4대 정신으로 무실, 역행, 충의 , 용감을 내세웠다. 청년 학우회는 청년 수양단체로서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1910년 국권 침탈과 함께 모든 단체가 해산될 때 함께 해산당하였다. 청년 학우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에 의해 흥사단이 설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수양 동우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의 활동 중에 해외에 독립 운동 기지를 만들어 국권 침탈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공헌하였다.

▨ 서북 학회

1908년 1월 이미 활동하고 있던 지역 학회인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통합되어 설립되었다. 1907년에 강제 체결된 정미 7조약으로 보안법과 신문지법이 만들어져 국권 회복 운동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상황에서 기존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여 현실적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신민회의 창립으로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의 회원들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서북 학회로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그 설립 취지와 목적이 동일하여 양 단체의. 통합은 예견된 일이었다. 1907년 3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서울 유학생들이 친목 단체로 서북 학생 친목회를 결성하여 친목 활동과 더불어 애국심 고취와 애국의길 을 도모하는 데 목적을 두었는데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이를 후원하였다. 1908년 1월 2일 임시 회장 이동휘의 지도하에 양 학회의 인사 149명이 참가하여 창립 총회를 열었는데 선출된 임원은 회장에 정운복, 부회장에 강윤희, 총무에 김달하, 부총무에 김주병, 평의원에 이종호, 태명식, 이갑, 정진흥, 김명준, 최재학, 주혁, 현승규, 윤익선, 오주혁, 주동한 등이었다. 서북 학회의 설립 취지와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하여 근대 문명 국가를 건설 한다. 둘째, 지식과 세력을 양성하여 사회 발달과 문명 증진을 꽤한다. 셋째, 실력 양성으로 민력을 증진한다. 넷째, 단체들이 하나로 되어 민력을 결집시킨다.

▨ 기호 흥학회

1908년 1월 19일에 정영택 등의 발기로 경기도 및 충청 남북도의 학문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기호 지방이 옛날부터 정치와 문화 및 학문의 중심지였으므로 이 전통을 지킬 것을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전국 청년의 교육에 힘써야 할 것은 늦출 수 없는 급무‘라고 하였다. 각지에 지회 설립에 착수하여1909년 7월까지의 지회 상황을 보면 경기도에 광주, 수원, 양근, 장단, 교하, 강화 등 6개소, 충청 남도에 서산, 공주, 연산, 당진, 해미, 목천, 홍주 등 7개소, 충청북도에 청주, 충주, 청양, 풍덕 등 4개소로 모두 17개소였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기호 학교 등 학교 설립과 운영, 월보의 발간, 강연회 등을 통한 계몽 활동 등이었다.
3. 근대의 경제와 사회


▨ 일본 상인의 쌀 유출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상인들이 한국에서 수입 한 것은 쌀, 쇠가죽, 콩, 생사, 인삼 등 주로 1차 생산품으로서 그들의 국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원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쌀은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1887년부터 1882년 5개년 동안에 부산과 원산을 통해 한국에서 유출된 쌀은 전체 수출량의 30%에 이르렀으며, 콩은 10%였다. 1882년 이후에는 콩 유출량이 점점 늘어나더니, 1980년대에 들어 다시 쌀의 유출량이 증가되었다.
당시 한국의 쌀값이 일본의 ⅓에 해당되었으므로 일본 상인들은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상인들은 많은 쌀을 경쟁적으로 유출시켰고, 상대적으로 한국 내의 쌀이 부족해져 쌀값이 폭등하여, 당시 흉작이 겹친 농촌 경제와 일반 서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상인들은 전라도 곡창 지대에서 입도 선매 등의 방법으로 싼값으로 쌀을 유출하였다.

▨ 열강의 이권 침탈

자본 수출을 통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 정책은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서 후진 지역의 광산, 철도, 농장, 공장 등의 개발과 경영에 투가하며, 후진 지역의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손쉽게 확보하여 막대한 이윤을 보장받으려는 것이 식민지 침략의 목적이었다. 1984년 이전에는 주로 상품 수출의 형태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 침략이 진행되었으며, 주로 일본과 청국의 상인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또, 해관 세수권, 연안 어부 채취권, 전신 부설권, 저탄소 설치권 등이 역시 일보노가 처국에 의해 독점되었다.
청․ 일 전쟁 이후에는 광산이나 철도 등 보다 중요한 자원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침략당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남북을 종단하는 철도 기본 간선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삼국 간섭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1896년 아관 파천을 전후하여 주요한 이권들이 러시아와 미국에 넘어갔다. 이는 당시의 조선 정계에 친러파와 친미파 세력이 증대되고 있었던 것과도 연결된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 쟁탈 대상은 철도, 광산, 전기, 수도, 전신 등 국가의 기간 산업부분이었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값싼 한국의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약탈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는 그들에게 예속되어 민족 자본의 성장이 억제되었고, 자주적 근대화의 진전에 장애를 받게 되어싿. 이들은 광산의 개발권과 철도의 부설권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경영권까지 장악했으며, 인근의 토지와 산림까지 장악하였다.
열강의 이권에서 나오는 이윤은 막대한 것으로서 미국의 운산 금광의 경우 1902년의 국내의 금생산의 ¼을 차지하였고 연간 순수익률의 증가는 300%에 달하였다. 1897년~1915년 사이의 금 생산고는 4천 9백 50만 원이었는데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될 당시 일본에 진 국채가 1천 3백만 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권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만한 일이다.
1895~1904년의 제국주의 열강의 한국에 대한 주요 이권 침략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일 본>
경부 철도 부설권 1898
평양 탄광 석탄 전매권 1898
경인 철도 부설권(미국으로부터매입 1898
충남 직산 금광 채굴권 1900
경기도 연해 어업권 1901
인삼의 수출 독점권 1901
충청, 황해,평안도 연해 어업권 1904

<미 국>
평북 운산 금광 채굴권 1895
경인 철도 부설권(1898 일본에 백만달러에 매도함.) 1986
서울 전기,수도 시설권 1897
서울 전차 부설권 1898
<러시아>
함북 경원 종성 금광 채굴권 1896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1896
압록강 유역, 울릉도 삼림 채벌권 1896
부산 절영도 저탄소 설치권 1987
동해안 포경권 1899

<프랑스>
경의 철도 부설권(일본에넘김) 1896
평북 창성 금광 채굴권 1901
평양 무연탄 광산 채굴권 1903

<영 국>
평남 은산 금광 채굴권 1898

<독 일>
강원도 금성 당현 금광 채굴권 1898


▨ 메가다의 화폐 정책

1904년 8월 러․일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침략하기 위한 소위 ‘ 대한 시설 강령 (對韓施設綱領)’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제 1차 한․일 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대한 제국 정부는 일본이 추천하는 외교와 재정 고문을 채용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이 때, 외교 고문으로 온 사람이 미국인 스티븐스이고, 재정 고문은 일본인 메가다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를 정리하여 일본의 금융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가 문란하고 재정이 고갈되었으니 화폐를 급속히 정리하고 국가 재정의 원천인 세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1905년 9월 18일 화폐 조례를 만들어 일본의 화폐 제도에 따른 금본위제로 하고, 한국에서 그 동안 통용되고 있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여 일본 제일 은행권을 본위 화페로 하였다.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일본 상인들의 농간에 의해 많은 손해를 보았다.
메가다의 화폐 정책은 한국 상인의 자산과 화폐를 일본 상인들에게 넘겨 주어 한국의 경제를 일본이 장악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극심한 금융 공황이 일어나 한국 상인들은 도산하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농촌 경제를 분해시켜 농민을 농촌에서 유리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메가다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것을 강요하여 일본 정부와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재정적 예속을 강화하시켜 나갔다.

▨ 국채 보상 운동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재정 고문 메가다의 강요에 의해 대한 제국 정부는 190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2백만 원의 공채를 모집하고,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3백만 원과 12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오십만 원의 차관을 들여 왔다. 또, 통감으로 온 이토는 ‘한국의 시정 개선’을 위해 세관 수입을 담보로 하여 일본 흥업 은행으로부터 일천만원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다.
통감부는 차관으로 들여 온 자금으로 식민지 통치 기구를 유지, 확대하며 침략과 약탈을 강화하고, 대한 제국 정부를 재정적으로 일본에 예속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매년 6.5%의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되는 이 차관으로 통감부는 한국에서 일본인의 생활 조건을 만들고 일제의 침략을 위한 시설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즉, 남포와 평양간의 도로와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영일만에 이르는 도로를 확장하고, 인천과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거류민을 위한 상수도 시설, 일본인의 관청 보수와 봉급 지불에 주로 소비하였다
통감부는 한국을 침략하면서 일본인의 한국 친투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의 형식으로 조달하여 이를 한국 정부에 떠넘기는 것이었다. 1907년 대한 제국 정부가 짊어진 외채 총액은 1천 3백만 원으로 이는 1년 세출 예산에 맞먹는 막대한 것으로서 당시 8백만 원 가까운 재정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대한 제국으로서는 외채 상환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국적 지식인들은 차관이 국권을 유린하고 식민지적 예속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보고 외채의 상환이 국권 회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이를 대중적인 참여에 의해 해결하도록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1907년 2월 16일 대구의 서상돈이 금연한 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뜻으로 단연회를 조직하고 이에 대한 취지서를 만들어 전국에 호소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본회는 일본에 대한 국채 1천 3백만 원을 보상하기로 목적함.
․보상 방법은 일반 국민의 의금을 모집함. 단,금액은 다소를 불구함.
․본회에 의금을 납부한 인원은 본회 회원 으로 인정하고 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공 포함.
․의금으로 모은 돈은 위의 액수에 달하기까 지 신용이 있는 우리 나라 은행에 일치함. 단,수합된 금액은 매월 말에 신문에 포고 함.
․본회는 목적을 달한 후에 해산함.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된 후 뒤에 국채 보상 단연 의무회, 국채 보상 일심회, 국채 보상 동정회, 국채 보상 의무소, 국채 보상부인되 등 전국적으로 20여 개의 단체가 경성되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3월 말에는 이종일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와 4월 초에는 이준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연합 회의소가 조직되어 각각 수금액의 촹괄과 국민 지도의 업무를 분담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이어졌다.
국채 보상 운동의 전국적 확대에는 황성 시문, 대한 매일 신보, 제국 신문 등 민족 신문들의 홍보 활동이 크게 작용하였다. 농민들은 식량을 판 돈의 일부를, 노동자는 어렵게 번 한 푼의 돈을, 남자들은 단연회에 가입하여 금연한 돈을, 여자들은 찬값을 절약하여. 또는 가락지와 비녀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각종 패물 등을 기생들까지도 돈을 거두었다.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단체들을 해산시키며, 지도급 인사들을 회유하여 친일 활동으로 변절시키고, 보상금 횡령 사건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일으키는 등 갖은 모략을 다하였다. 특히, 보상 운동에 앞장섰던 대한 매일 신보를 탄압하여 영국인 방행자 베델을 추방하려 하였으며, 국채 보상금 소비 사건을 날조하여 양기탁에게 혐의를 씌웠다. 결국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한민족의 순수한 애국심이 국채를 보상해서 나라를 지킨다는 소박한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국채 보상으로 국권이 수호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라를 지켜 보려는 민중의 의식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인 것이다.

▨ 증기선의 운행과 해운업의 발달

서양 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타고 온 증기선은 서양 문명의 우수함을 보여 준 대표적인 것이며, 이러한 배를 마련하는 것은 부국 강병의 중요한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1881년 개화 정책이 추진될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에서 군함을 구입하려 계획하였고, 1994년 이후에는 중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증기선을 구입하거나 임차하여 사용하였다. 해안을 따라 세미를 운반하는 데 증기선은 크게 편리하였으나 일본 증기선 회사가 이를 독점하여 이익을 챙겼다. 이에 대하여 경강 상인들이 종래 세미 운반을 맡아오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증기선을 구입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884년 정부에서 세 척의 증기선을 구입하여 세미 운반에 사용하였으며, 1889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 한국에서 증기선을 소유했던 실태는 144척에 38,403톤이었다. 189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운수업도 크게 발전하여 종래 일본 자본가에게 독점되어 오던 것을 민족 해운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대한 협동 우선회사, 인척 우선 회사, 인척 윤선 주식회사 등 해운 기업이 출현하였다.

▨ 농광 회사

러․일 전쟁을 일으킨 직후 일본은 한국 전 국토의 ¼에 해당하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해 오자, 이에 대항하여 일부 애국적인 관료와 실업인들이 한국인이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농광 회사를 설립하고 정부에 개간 특허를 요청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를 1904년 7월 11일 허가하였다.
이 회사는 황무지 개간 사업과 함께 당시 외국인이 이권으로 노리고 있던 광산 개발까지 포함시켜 모든 이권을 확보하여 외국인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이 항의하고 그들이 요구한 황무지 개척권을 강요하자 애국 지사들이 보안회를 조직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농광 회사의 해체를 요구하여 황무지 개척권 문제는 일본의 요구를 일단 막는 것으로 해결 되었다.

▨ 근대적 상회사(商會社)의 활동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 등 개항장으로 들어오는 외국 상인들로부터 외국 상품을 모아 이를 국내 각 지역에 팔고 국내의 농촌으로부터 직접 곡물을 사서 외국 상인들과 거래를 하면서 개항장과 농촌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개항장에 자리잡은 객주와 여각 및 보부상 등 전통 상인들이었다. 이들 상인들은 외국 상인들의 침투에 대항해서 상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체제의 확립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1880년대 초부터 근대적인 상업 체제로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회사릐 설립은 일본이나 청국 또는 영국 상인들의 활동에서 영향을 받은 바도 있지만 일찍이 개화 사상가들도 상사 또는 회사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한 적도 있어 이러한 내외의 분위기로 회사설립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회사들은 그 이름이 회(會), 사(社), 상회, 상사, 상회사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대부분 한자 회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설립 과정은 정부에 상회 장정을 통리아문에 보내면 아문이 허가서를 보내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결국 관허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 상회사들은 1883년경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여 갑오개혁 이전까지 전국에 약 40여 개가 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평양에 설립된 대동 상회와 서울에 설립된 장통회사(또는 장통사)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서 전국 각지에 상회 직원이 파송되었다.

▨ 근대적 섬유 공업의 발달

1880년대에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부국 강병의 방안을 강구하던 일부 개화파 중에서 근대적 산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근대적인 공업의 일환으로 면재춤 생산 기계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특히, 지석영은 1882년 근대적 직조기를 구입할 것을 상소하고 있었으며, 정부에서는 1884년 농상, 직조 등의 관영을 위해 설국치관(設局置官)을 명하여, 1885년 정부 내에 직조국(織造局)이 설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1884년에 고ㅛ종의 명으로 중국인 공장들을 모집하였으며, 1885년부터는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중국인 기술자를 더 모집하였고, 사기(紗機) 4개를 중국에서 구입하였으며, 곧이어 직금 기계(織錦機械) 32건을 구입하였다. 이외에도 중국에서 면사와 직조 기계를 몇 번에 걸쳐 구입하였다. 그러다가 1891년 이후 경영난에 따라 생산이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이후 광무개혁이 진행되면서 산업의 발전을 위한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897년 년경에 대조선 저포 제사(大朝鮮苧布製絲) 회사의 설립, 1899년에 한상 방적 고본(漢上紡績股本) 회사, 1898년에 직조 권업장이 설립되었으며, 1990년에는 한성 직조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일반인들 가운데서도 지방에 직조 회사를 설립하여 직물을 생산하였다. 1902년 2월 김덕창 이라는 사람이 서울의 중부 장통방 중곡동에 김덕창 염직 공업소를 설립하여, 외국에서 수입한 면제사를 원료로 하여 면포를 염색 직조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김덕창은 일본에서 제작한 개량식 족답직기(足踏織機) 8대화 S직조기 9대를 설치하고 40명의 직공을 고용하면서 연간 6천 4백 단의 면포를 생산하였다. 그 당시 수입 면포가 70만 단이라는 수량과 비교할 때 그 생산량은 미미한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덕창 염직 공소의 설립을 계기로 하여 서울에 38개소의 직조 공장이 설립되어 근대적인 민족 섬유 공업의 발달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영세하여 전체로 S직조기는 208대였고 한 공장당 직조기는 평균 6대에 불과한 소규모의 것이었다.


4. 근대 문화의 발달

▨ 동도 서기론(東道西器論)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에서 전해진 서양의 문물을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갔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의 우수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서양을 오랑캐로 인식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서학을 배척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이 형성되고 서양의 무력 침략에 접하면서, 특히 무기를 중심으로 한 기술의 위력을 알게 되었으며, 개항 이후 서양의 기술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의 수용은 전통적인 기술 문화를 유지하면서 부국 강병의 수단으로 기술만을 수용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다.
동도 서기론은 그 성격상 중국에서 일어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과 동일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일면으로는 전통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으나,서양의 과학 기술 문화의 근본 배경인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적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 및 과학 정신의 전통을 충분ㅁ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서양 문화 수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 박문국(博文局)

1883년 8월 통리아문의 한 기구로 설립된 박문국은 외국어를 학습하던 동문학에 부속된 기관이었다. 원래 동문학에서는 서적의 편찬과 신문 간행을 계획하였었는데 , 이 안에 박문국을 설치한 것이다.
박영효가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일본에 사절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일본으로부터 신문 제작 기술자를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유길준에게 신문 간행의 일을 맡겼다. 1883년 2월경 당시 통리아문 주사로 근무 중이던 유길준이 신문국 장정을 만들었는데, 이 때 신문을 간행하는 사무처리를 박문국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 직후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유길준도 신문 간행의 일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 후에 정부에서 신문을 간행하기 위하여 유길준이 만들어 놓은 이름을 그대로 살려 1883년 8월 17일 박문국을 설치하고 0월 30일 한성 순보가 창간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885년 6월 박문국이 중건되고 1886년 1월 25일 한성 주보로 다시 간행되어 1888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 교육 입국 조서

1895년 2월 2일에 ‘교육에 관한 조칙’으로 발표 된 교육 입국 조서는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극명하게 밝혀 주는 것이며, 1895년에 진행된 교육 개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교육 입국 조서의 내용은 교육이 국가 발전의 기반이 됨을 밝히고, 세게의 부강한 국가들이 교육을 통하여 이를 이룩하였으니 교육은 국가 보존의 긴요한 방법이라고 교육의 중요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종래 일부 계층에 제한되어 관리 등용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또는 특수 계층의 신분적 유지를 위한 성격이 강했던 교육이 국가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이룩하는 근본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으로서, 교육관의 일대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또, 교육의 기본 정신도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여, 과거에 실시되었던 교육을 허명 교육으로 비판하였다.
교육의 삼대 강령으로 덕양(德養), 체양(體樣), 지양(智養)을 제시햐여 교육이 지, 덕, 체가 조화된 전인 교육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학교를 널리 세워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국가 발전과 왕실의 안전에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박영효의 교육 이념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1888년 국왕에게 나라의 근대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개화 상소’를 올렸다. 이는 개화 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표현시킨 대표적인 내용으로서 이를 통해 개화 사상의 사상적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상소한 개혁의 방안으로 7개항을 제시하였으며, 그 가운데 교육에 관한 내용을 통해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내용을 ‘교민재덕문예이치본(敎民才德文藝以治本)이라 하여 교육을 정치의 군본이라 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구체적 방안으로 모두 열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앞서 교육의 성격을 논하면서 교육은 인간 생활의 지침이라며, 학교 설립은 국가의 급무라고 하였다. 또, 실용을 앞세운 교육을 강조하여 종래의 교육의 폐단을 비판하고 있다.
교육 개혁의 방안에는 의무 교육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소․중학교의 설립과 고등 교육의 실시, 국사와 국어 국문의 교육, 외국인 고빙을 통한 근대 학술 교육, 서적의 출판과 박물관 설치, 강연회 등 개최로 국민 계몽, 외국어 학습과 신문의 발행 및 종교의 자유 등이 있다. 그 가운데서 박영효는 특히 국사와 국문을 먼저 국민에게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고, 이를 통한 민족의 자각과 부국 강병의 정신적 기반을 이룩할 것을 제시하였다. 자국의 역사를 먼저 교육시킬 것을 강조한 것은 다른 방안에서도 제시하고 있어 그가 내세운 근대 교육이 국민 정신을 고취하여 나라를 지키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박영효의 교육애 대한 생각은 1895년 그가 내부 대신으로 직접 개혁의 실천을 담당하면서 지방관에게 개혁의 세부 항목으로 지시한 내용에서도 '먼저 그 지방의 인민에게 국사와 국문을 교육시킬 것'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교육관이 1895년 근대 교육을 추진한는 기본 이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한국의 근대 교육

한국의 근대 교육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국권을 수호하며, 동시에 자주적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한민족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한국 근대 교육은 전통 시대를 벗어나서 근대에 들어와 실시되었다는 시간적 의마가 아닌 역사적 의마가 큰 것이다. 한국 근대 교육은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적 개혁이 추진되는 내용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자주적인 개혁으로 이루어졌으며, 민족의 의자가 표현된 개혁이었다.
한국의 그낻적 개혁 과정에서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전통 체제를 탈피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이 침략이 수반되는 모순이 나타났으나, 교육 개혁은 전통 교육에서 탈피하면서 동시에 침투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적 논리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 교육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 교육 내용이 민족적 전통을 확인하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국사와 국문이 중요시되었다. 때문에 한국 근대 교육은 어느 때 어떤 상황보다도 민족적 성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근대 민족 교육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 근대적 교과서의 간행

근대 교육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1895년에 근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이라는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갑오개혁이 시작될 당시 관제 개혁에서 학무아문에는 교과서 편찬을 전담하는 부서가 설치되었으며, 그 후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학무아문으로 하여금 소학교 교과서의 편찬을 조속히 실시할 것을 논의하였다. 1895년 5월에 주일본 공사관에 훈령을 보내 교과서 편찬에 참고할 것이니 일본 교과서를 구입하여 보내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교과서 편찬이 1895년 전반에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 교과서가 참고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5년에 학부에서 발행한 교과서는 모두 17종이었으며, 주로 소학교용이었다. 처음에는 학부에서만 교과서가 간행되더니 1900년을 전후하여 민간에서도 간행되었으며, 점차 학부 간행보다도 그 수가 늘어났다. 이는 구가 재정이 교과서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만큼 넉넉하지 못한 이유이며, 국민의 교육열이 증대되면서 부족한 교과서를 민간에서 편찬하였던 것이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는 교육 침략 정책이 실시되고, 사립 학교를 억압하면서 그 교육 내용을 통제하기 위해 1908년 교과용 도서 검정 제도가 실시되어 한국의 교과서는 커다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즉, 통감부는 엄격한 검정 규정을 만들어 일제의 침략을 나타내거나 민족의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담긴 교과서는 이의 사용이나 발행을 금지하면서, 1906년 이전에 발행된 애국적이고 민족전인 교과서도 모두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부터는 검정에 통과된 검정 교과서나 사용이 인정되는 인정 교과서만 학교에서 사용되었다.

▨ 북간도 공립 소학교
연변 지방에서 한국인의 근대적인 교육 기관으로 그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있는 것이 대한 제국 정부에서 설립한 북간도 공립 소학교(北間島公立小學校)이다. 1895년부터 각지에 설립된 공립 소학교에는 한성 사범 학교 졸업생을 교원으로 임명하였으며, 지방 현지에서 부교원을 임용하여 부족한 교사를 보충하였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에는 1905년 3월 17일자로 학부에서 오재영, 김용흡, 김성진, 최정현, 박병휘, 노승룡, 이남섭, 김중경 등 8명이 부교원으로 임용되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규모나 교육 내용에 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공립 소학교의 설립과 경비의 지출이 지방관의 관할 사항이었으나, 부교원의 임용이 학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대한 제국 정부에서는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이주민의 보호와 한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1903년에 간도 지방의 한국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 양성을 제의하기도 하였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정부와 관련 있는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개교는 한국의 행정권 내지 통치권이 이 지역에 행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지고 있는 사실을 1906년 초 한국에 설치된 통감부에서 1907년 간도 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였으며, 간도 파출소의 일본인이 1906년에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서숙을 방해하다가 서전서숙이 자진 페쇄하자 그 터를 사서 그 곳에 1908년 간도 보통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간도 보통 학교는 일제 통감부의 식민지 준비 교육 기관으로서 한민족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인을 만들기 위한 곳이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는 한국의 공립 소학교와 같이 외세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족 교육 기관으로서, 간도 지역에 설립된 한민족 최초의 공적인 교육 기관인 것이다.

▨ 독사신론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신채호가 1908년 대한 매일 신보에 연재한 사론이다.
이는 신채호의 국사관이 형성되는 내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1910년 봄에 최남선이 발행하는 ‘소년’지 제 3 권 제 8 호에 국사신론(國史新論)이라는 제목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게재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족을 단위로 한 민족 국가의 역사를 재구성하자는 것이 그 주지로서, 민족을 역사 전개의 주체로 파악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서론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의 역사는 민족 소장 성쇠의 상태를 열서할 자라.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무할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그 역시 중하다.… 즉, 고대의 불완전한 역사라도 이를 상구하면 동국주족, 단군 후에의 발달한 실적이 밝거늘 어찌하여 우리 조상을 거짓으로 말함이 이에 이르렀느뇨….”

▨ 국사의 연구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민족 운동의 정신적 바탕인 국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국사 연구는 민족 정신의 앙양과 교양을 높이는 데에 주력하였으나, 아직 근대 역사학으로서 학문적 기반은 갖추지 못하였다. 국사연구의 경향은 국민 교양적인 성격을 띠면서 애국계몽 운동으로 연결된 경향과, 국사 교과서로 편찬되어 학교 교육에 연결된 경향으로 구분될 수 있다. 국사 연구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신문이나 학회에서 발행하는 월보에 논설이나 인물 전기 또는 國朝故事등을 연재하여 역사 지식4을 넓히고 민족 정신의 함양에 이바지하였다. 국사 교과서는 국문 교과서와 함께 국민 정신 교육에 기여하였는데, 국사 교과서 편찬에 활약이 컸던 사람은 현채와 김택영이었다. 교과서의 내용은 종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면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군 조선의 강조, 안정복의 삼한정통론 계승, 외침에서 공을 세운 위인이나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의 활동상이 강조되었다. 이 밖에도, 외국인의 건국가와 망국사 또는 피침사와 함께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의 전기가 많았는데 이태리 건국 삼걸전, 월남 망국사, 파란 멸망사, 미국 독립사, 애급 식민사, 비사맥전, 워싱톤전 등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학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읽던 책이었다.

▨ 서유견문

유길준이 지은 서유견문은 그 문체가 전통적인 문체에서 벗어나 국․한문을 혼용하고 새로운 문체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국어학상으로도 귀중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19세기말 외세가 침투하는 상황에서 나라의 자주 독립유지와 근대 국가로 발전하려는 개화 운동의 사상적 측면과 서양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가는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서유견문이 쓰여진 시기는 대략적으로 1885년 12월 그가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길에 정부가 연금되었다가 1892년 11월 자유를 찾게 되는 기간이다. 그는 일본과 미국 유학 중의 자료와 귀국하는 도중에 유럽 각국을 둘러보면서 견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타고 후에 그 원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갑오개혁이 진해오디면서 등용되어 일본에 가는 길에 일본에 원고를 가지고 가서 1895년에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크게 여행기, 서양 문물에 대한 소개, 개화 사상, 애국심의 표현 등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가장 많은 분향은 서양을 소개하는 애뇬으로서, 이에는 국가의 권리, 국민의 교육, 국민의 권리, 정부의 종류 및 정치 제도, 정부의 기능, 조세, 화폐, 법률 등 서양의 정치, 학문과 각종 풍속, 신앙,산업, 문명의 이기 등에 관해 소개와 해설을 함께 싣고 있다.
개화 사상에는 유길준의 개화에 대한 인식, 개화의 개념, 개화의 방법, 개화의 등급 등으로 서술되었으며, 개화를 하는 데 있어 외국 문화를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국의 우수한 문화도 계승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곳곳에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각국의 권리는 논하면서, 아무리 약소국의 군주라 하더라도 강대국의 군주와 동등한 에를 주고받고 있으며, 강대국에서 파견되 ㄴ사신이 약소국의 국왕과 대등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서술한 것은 일반 국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 근대 문학의 경향
190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은 창가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3․조 혹은 4․4조로 된 초기의 형태, 즉 애국가 같은 것은 전통적인 시가에서 연속된 양식이다. 창가의 내용은 개화 사살을 노래한 것과 ‘社會燈(대한 매일 신보)’에서 나타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최남선은 1908년 소년지에 ‘海에게서 少年에게’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신체시라고 불리는 이러한 양식은 일본의 신체시와 비슷하지만 최남선은 그대로 시라고 하였다.
소설은 신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인직의 ‘열의 누(1906)’와 ‘귀의 성 (1908)’, 이해조의 ‘花의 血 (1911), 최찬식의 ’추월색(1912), 안국선의 ‘금수 회의록(19080’등이 대표적이다. 흔히 신소설이라고 하지만 작품 구조상에서는 새로운 것은 없고, 오히려 이전의 소설보다 가부장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여 후퇴한 면도 보이고 있다. 이광수의 ‘무정(1910)’은 일상어의 문체 확립, 작품 구조의 확립2, 장편 소설의 가능성 등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도덕과 구도덕의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삼각 연애 관계의 구조가 민족주의라는 초개인적인 이념으로 결말짓게 되는 이 소설은 당시 한국 지식층이 열렬한 독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한민족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이광수의 소설은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할수 있었다.

▨ 근대 예술의 발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서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국민적 예술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문화와 예술은 양반과 상민의 뚜렷한 구분이 지어져 내려 왔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 양반은 아악을 교양으로 하고 가끔 기악(妓樂)과 광대의 판소리를 그들의 연회 석상에서 연주하도록 하였으며, 평민들은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꼭두각시 놀음 등을 즐겼다. 근대에 와서도 지식인들은 시조나 가곡을 상식으로 알았고, 서민들은 춘향가, 심청전, 토기 타령 등 판소리가 유행하였다.
미술도 양반들의 여가로 즐겼으며, 도화원의 전문 화가도 있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천시되었다. 개항 이후에 미술가들은 직업인으로 위치를 굳혀 갔으며, 1906년을 전후로 하여서는 서양 화풍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반 사회에서는 재래식 미술, 즉 동양화풍이 견지되었으며, 서민층에서는 이른바 민화가 유행되었다. 서양식 유화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진 않으나 1905년 프랑스 공사관에서 개최되었던 외국인 전시회에 한국인이 그린 유화가 출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극은 양반 사회에서는 천시의 대상이 되어 주로 서민들 사이에서 이른바 민속 가면극이 성행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양반이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익살이 대부분이었다. 양주 별산대 놀이가 궁중에서 외국 사신의 영접용으로 공연된 적이 있었지만 연극은 서민들의 독점물이었다.

▨ 근대 과학 기술의 수용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이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 서양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으나, 이는 서양 과학의 정밀성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체계적인 이해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이양선의 빈번한 출몰과 중국의 정세 변화를 통해서 서양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이 천주교의 포교 활동을 위한 수단이라고 이해하면서 이를 배척하였으나, 점자 천주교와 외세의 침략을 과학 기술과는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기술(西器)은 수용하되 서교(西敎)는 배척하는 동도 서기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특히, 부국 강병을 위해 서양 기술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개화 사상과 연결되었으며, 과학 기술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부가 앞장서서 과학 기술을 수용하였다.
농상 공사에서는 독일인을 초빙하여 기술 지도를 받았으며, 일본 유학생 중에는 양잠법을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직조국은 1888년 다량의 방직 기계를 구입하고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였으며, 지조국(紙造局)은 1891년 일본 상인으로부터 각종 제지 기계를 구입하였다. 또, 광산 개발을 위해 1888년 미국에서 채광기를 구입학도 미국인 광산 기술자를 초빙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에 고취되어 민간인들도 서양 과학 기술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각종 기계를 수입하여 근대 공업을 발달시켜 갔으며, 점차 자체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전기와 통신 사업도 확대되어 갔으니, 1887년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되었으며, 1884년에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 사이에 해저 전선의 부설, 1885년 전보국의 설치, 1887년 서울, 공주, 대구, 부산을 연결하는 전선의 부설, 1898년 궁중과 정부 각 아문 사이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가설, 경인 철도의 부설에 이어 경부, 경의 철도 부설되었다. 이 가운데는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에 의한 것이 많이 있으나, 이로 인해 한국에 과학 기술의 보급이 이루어진 면도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 학교가 설립되면서 기술 교육도 실시되었다. 특히, 대한 제국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과학 기술 교육을 위한 학교가 다수 설립되었으니, 기예학교, 경성 의학교, 상공 학교, 철도 학교, 광업 학교, 공업 전습소, 전무 학당, 우무 학당 등이 그것이다.
과학 기술 수용에도 시기적인 특징이 있는데 흥선대원군 때에는 무기를 수용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무기와 각종 기계를 수용하더니, 1895년 이후에는 과학 기술 자체를 수용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기술 교육 정책은 재정 부족으로 곤란을 받았다. 외국인 기술 교사를 초빙하였으나 봉급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국내의 기술 교사는 봉급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또,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경비를 보내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기술 교육 정책은 꾸준히 실시되었다

1. 근대 사회로의 지향

▨ 자본주의 맹아론

자본주의 맹아를 찾고자 하는 연구는 기본적으로는 민족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새대 구분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일제의 시민 사학에서 의도하였던 정체성론(停滯性論)에 대한 비판에서 제기되었다. 정체성론에서는 한국 민족사의 내적 발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무기력하고 퇴영적인 민족성으로 인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여 일제의 침략 과정을 은폐하고자 하였다. 이에 선각자들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한국사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체계적 발전 과정을 치밀하게 고증하였다. 특히 일제가, 정체되었다고 본 조선 후기 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을 주목, 실학으로 나타난 근대 지향적 사상과 사회․경제면에서 보인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싹을 찾아냈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싹은 농업에서는 이앙법(移秧法), 견종법(畎種法), 광작(廣作) 등을 통하여 성장한 부농, 그리고 상업에서는 정부의 특혜 또는 대규모의 자본을 통해 거상으로 성장한 도고(都賈)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농업 생산력의 증대, 산업의 분화로 인한 상품 생산의 진전, 그에 따른 시장권의 확대 등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상이었다. 한편, 이 같은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하여 주체적, 자생적 발전이 너무 앞세워짐으로써 그 싹이 과장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 농촌 사회의 황폐화

전란이 거듭되고 관료 기강이 문란해진 속에서 도적의 창궐과 기근이 계속되니, 농촌 사회는 문자 그대로 황폐해져 갔다. 즉, 전란으로 농토는 황무지로 변해 버려 잡초만이 무성해졌고, 농사지을 장정들은 전쟁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였으니, 농가의 굴뚝에서는 연기를 볼 수 없다는 기로고 있다.
거기에 겹쳐서, 탐관 오리와 토호 지주의 수탈로 농민들의 생활은 빈곤과 처참 그 자체였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타향으로 전전해야 했다.

▨ 지배층의 횡포

관료의 기강은 왕권이 강화되고 제도가 정비될 때에 있어서도 쉽게 확립되기 어려운 것이다. 임지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무질서가 만연하게 되면서 관료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졌다.
이는 지배 체제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 봉건 사회 체제의 모순이 크게 노출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적 위기는 도적이 창궐하여 지방의 수령들이 관아를 버리고 산 속에 숨었기 때문에 , 업무가 집행되지 않았다는 사회 정세에서도 엿볼 수 있다.


▨ 민란의 개념

이른바 민란(民亂)이란 용어는 관아의 입장에서 민중들이 난동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른바 민란이 일어났다고 하는 당시의 정부 기록에서는 그 용례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당시에는 작변(作變), 사변(事變), 민뇨 (民尿), 민요(民擾)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 의미도 관아의 입장에서 백성들이 변을 일으켰다는 것이라 할 때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움직임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표현이었다고 할 때, 부정적으로만 인식하고자 함에도 문제가 있다. 근래의 역사 이해가 민중 사회의 주체적 움직임을 토대로 내재적 발전을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한다면, 용어의 사용은 주의를 요한다.

▨ 민중(民衆)

국어 사전에 의하면, 민중이란 ‘다수의 국민’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 같은 뜻으로는 대중, 공중, 서민, 백성, 인민 등도 서로 비슷하다고 하겠다. 종래에는 서민, 백성이라는 용어가 역사 개설서에 많이 쓰였고, 근래에 이르러 사회에서의 민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민중이란 용례가 주목되고 있다. 민중에 대한 재인식은,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상황을 극복하고, 진정한 주인의 위치를 찾아야 하겠다는 자각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한 시각에서의 민중은 자의식이 형성되어 깨어 있는 민중을 뜻한다.
조선 후기의 민중 세계가 주목되고, 그 의미가 부각되는 것은 민중이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깨우치면서 사회 변동의 주체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은 역사적 존재이고 사회적 실체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의식을 가지지 못한 잠자는 민중을 제외한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 보이는 민(民), 농민(農民), 인민(人民), 노복(奴僕), 노비(奴婢), 천민(賤民) 등 피지배 계층 모두가 민중이다. 그들 역시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깨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농민의 의식화

조선 후기에 이르러 봉건 지주와 양반 관료들에 의한 토지 겸병과 농장의 확대는 더욱 심해져서 국가 재정을 위축시켰고, 농촌 경제를 악화시켜 농민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련되었던 환곡제는 오히려 농민의 궁핍화를 초래하였다.
농민들은 나름대로 살길을 강구해야만 했다. 농토를 빼앗기고 힘겨운 군역을 부담해야만 했던 농민들은 도저히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일정한 거주지를 가지지 못한 채 유랑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남의 노비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도시나 포구, 광산 등으로 몰려 임노동을 하기도 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기도 했다. 이부는 도적 떼에 들어가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 계층 내부의 정쟁은 더욱 치열해져 갔는데, 정쟁의 내용은 대부분 백성들의 생활 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부의 정책적 혜택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농민들의 일부는, 농촌에서는 영농 기술을 개발하면서 경영을 합리화하고, 도시에서는 상공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해 나가기도 하였다.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일부의 농민들은 신장된 경제력에 의해 생활의 안정과 정신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비록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서당 교육을 통해 교양을 쌓아 갔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그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 줄 한글 소설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한글 소설은 양반을 풍자하거나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 냄으로써 민중의 의식 수준을 높여 주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각지에 장시가 발달하였는데, 장시는 교역의 장소일 뿐 아니라, 농촌 사회에서는 정보 교환과 오락 장소의 구실도 하였다. 장시에 나온 사람들은 대화와 주연 가운데서 사회의식을 키웠고, 판소리, 타령, 잡가 등을 통해 양반 중심 사회의 모순과 지배 질서의 문란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다.

▨ 벽서(壁書) 운동

농촌 사회가 피폐해지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오히려 보다 강해져 갔다. 이제 농민들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고자 했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학정의 금지를 요청하는 소청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보다 적극적으로 부정과 비리가 심한 탐관 오리의 비행을 폭로하였다. 이를 벽서라 하는데, 방서, 괘서라고도 한다. 물론 이것이 발각되면 처벌되었기 때문에 은밀히 익명으로 하였다. 익명은 신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농민들은 작당을 하여 이른바 민란을 일으켰다.

2. 제도의 개편과 정치

▨ 성리학적 가치 규범

조선 사회의 가치 규범은 성리학에 의해 규제되었다. 성리학은 사림파의 성장과 더불어 조선 사회에 정착하였다. 일찍이, 고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편성하는 데 기여했던 성리학은, 본래 이기론(理氣論)에 토대한 명분론을 내세워 현실의 인간 관계를 설명한 봉건적 가치관이었다.
즉, 인간은 이(理)를 본래 지니고 있어 자율성과 주체성을 행사할 수 있지만, 또한 인간의 형체를 이루는 기(氣)의 작용으로 선악(善惡), 성우(聖愚)의 차가 나타나는데, 이를 조화롭게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명분이 바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군(君)과 신(臣), 부(父)와 자(子), 부(夫)와 부(婦), 주(主)와 노(奴), 반(班)과 상(常)은 각자가 지니는 명분에 따라 상명 하복(上命下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에서는 반상(班常)과 양천(良賤)이 엄격히 구분되고, 신분에 따른 직역이 법제화되었다. 가부장(家父長)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제도가 보편화되고, 충효의 이념이 절대시되었다.
즉, 성리학은 봉건적 사회의 기반으로서 불가결한 신분적 지배 질서를 관철시킴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자 한 것이다. 16, 7세기에 이기론이 중시되고 예론이 강조된 것은 봉건적 이데롤로기로서의 성리학이 다시금 그 기능을 강화하고자 한 예 등이었다.

▨ 왕도 정치론

왕도 정치(王道政治)란, 임금이 솔선 수범하여 윤리 도덕을 지킴으로써 정치를 공명 정대하게 이끌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맹자에 의해 제시되었다. 왕도 정치론 에서는 왕권의 지나친 비대화를 경계하였다. 성리학을 정치 철학으로 내세운 조선의 사대부들은 왕도 정치의 구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왕도 정치를 이해하고 있던 세종에 의해 어느 정도 수용되었다. 그리하여 의정부의 기능이 다시 강화되고, 여론이 국정에 최대로 반영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사간원 등에 의해 왕권이 견제되기도 하였다. 왕도 정치에서는 민심을 이반하거나 천리(天理), 천도(天都)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나가는 국왕은 혁명에 의해 추방되는 것이 정치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었다.
의정부의 재상권이 강화되고 실제로도 문종, 단종과 같이 국왕이 병약하거나 나이어림을 인해서 15세기 중엽에는 한때 국왕권은 유명 무실하였다.
이에 왕실측에서는 신하의 권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움직임을 전개하였는데, 그것은 세조의 집권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자신의 집권을 반대하는 세력을 강압적으로 처단하고 모든 권한을 국왕에 집중시켰다. 이는 전제 왕권의 형성으로서, 왕도 정치와 대립되는 패도 정치(霸道政治)의 한 모습이었다.
왕도 정치가 다시금 강조되고 추구된 것은 16세기 후반 사림이 정계를 주도하면서였다. 특히, 조광조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사림들은 누누이 왕도 정치를 표방하였으나,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 지변사 재상(知邊事宰相)

지변사 재상이란, 변방에 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재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지변사 재상은 변경 지방의 근무를 역임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들은 변방에 일이 있으면 바드시 대책 회의에 참여하였다.
지변사 재상이라는 이름이 관용되기 시작한 것은 왜인과 야인의 침입이 빈번해진 성종 때부터이다. 비변사가 설치되면서, 이에 흡수되어 국방을 논의하였다.

▨ 속오법(束伍法)

속오군을 편제하던 방식이다. 속오군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직, 편제된 지방군으로서, 위로는 양반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왜란으로 종래의 지방 군사 체제의 기능이 거의 마비되자, 이를 복구시키고자 명의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제시된 절강병법(浙江兵法)에 의해 군제를 개편하였는데, 그 편제는 영(營) ― 사(司) ― 초(哨) ― 기(旗) ― 대(隊) ― 오(伍)로 되어 있었다. 이는 초를 단위로 운영되었는데, 종래의 군제가 횡적 연결이 잘 되지 않았던 폐단을 보완하고자 한 것이다. 18세기의 1초는 정원이 123명으로서, 전국의 속오군의 총 수는 21만이었다.

▨ 양반 지주의 토지 집적

조선 전기의 봉건적 토지 제도는 사실상의 토지 소유권에 의거한 지주, 전호제와 수조권의 분급을 기준으로 한 전주, 전객제가 병존하였다. 특히, 후자는 봉건 국가가 그들의 전제 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그 관료층과 군인에게 봉사와 충성의 대가로서 일정 지역에 대한 수조권을 분급하는 제도였다. 이는 균전제 붕괴 후의 신라의 녹읍제나 고려의 전시과․녹과전, 그리고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는 과전법․직전법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과전법과 직전법의 해체와 함께 사실상의 토지 소유권에 의거한 지주, 전호제만이 지배적인 생산 관계로 남게 되고 그러한 토지 소유는 법률적인 뒷받침 위에서 비록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매매․상속․증여․저당까지도 가능하였다.
그러한 흐름은 17세기에 이르자 황폐한 농지를 개간함으로써 경작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국가적 요청에서 보다 합법적․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대의 농지 개간은 봉건 관료나 재지 지주층, 그리고 부민들에 의하여 그들 토지 집중의 수단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물론 일반 농민층에 의한 개간도 상당히 활발하였지만, 그것은 역시 그들 자가 노동의 범위 내에서 조금씩 진행된 것이어서 그 규모 및 진행 속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비록 제한된 의미일망정 사실상의 토지 소유권은 이미 기본 원칙이 되었으므로 농지 개간은 양반 지주들이 대토지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다.


▨ 토지 소유의 변화

지주, 전호제가 발달하면서 양반, 토호들의 토지 소유 집중의 현상이 나타났으니, 16세기에는 고리대를 이용한 토지 매득에 의해서, 17세기에는 전후 복구에 따른 정부의 토지 개간 정책에 의해 개간 사업을 통해 대토지를 집적하고 합법적인 지주로 등장하였으며, 궁방이나 관아에서는 절수를 통하여 궁방전이나 관둔전을 확대하여 갔다.
한편, 농법의 개량을 통해 재산을 모은 일부 농민도 토지를 구입하여 지주로 성장해 갔다. 토지 소유가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대다수의 농민은 몰락하여 토지를 잃고 마침내는 임노동자로 전락해 갔다. 즉, 조선 후기의 농촌 사회는 궁방, 아문, 양반, 토호, 부농 등 일부 계층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대다수의 농민은 무전 농민(無田農民)으로 전락하여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 양전 사업(量田事業)

양전이라, 전답을 측량하여 그 소유 관계를 정확하게 하고, 이를 토대로 과세(課稅)의 기본 자료를 마련하기 위해 시행된 사업이다. 토지 조사에 있어서는 경작지의 사정이나 자연의 조건 등으로 말미암아 정전(正田), 속전(續田), 강등전(降等田), 강속전(降續田), 가경전(加耕田), 화전(火田) 등으로 구분하였고, 이렇게 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量案)에 기재된 전결를 원장부(元帳簿)라 하였는데, 이는 다시 조세 납부에 따라 시기전〔(時起田) ; 실결(實結)〕, 급재전(給災田), 면세전(免稅田)으로 분류되었다. 토지 대장에는 전답 하나하나에 대하여 지번(地番), 등급지목(等級地目), 지형(地形), 척수(尺數), 결수(結數), 사표(四標), 기주(起主) 등을 확인하여 기입하였다.
양전 사업은 원칙적으로 20년마다 행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경비가 과다하게 소요되고, 그에 따라 민폐가 심했으며, 작업 과정에서 부정과 협잡이 많아서 그 결과가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양전이 잘 행해지지 않음으로써 경계(境界)가 불확실하게 되어 토지 제도가 크게 문란해지기도 했다. 특기할 것은 1653년(효종 4)에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수등이척(隨等異尺)의 양전척(量田尺)을 폐기하고, 1등 전척(一等田尺) 하나로 통일하여 측량하였는데, 각 등전(等田)의 차는 결부

(結負)의 실적에 따라서 체감하도록 했다.
임진왜란 후의 양전 사업은 20여 회 시행되었으나, 전국적인 양전은 1604년(선조 37), 1612년(광해 4), 1634년(인조 12), 1719년(숙종 45)의 4회뿐이었다.

▨ 은결(隱結)

은결은 은여결(隱餘結)이라고도 하는데, 구체적으로 양전을 실시할 때 지방 관리들이 비옥한 전토의 일부를 원장부에서 누락시켜, 그 조세를 사취하는 것을 은결이라 하고, 전토의 면적을 실제보다 감소시켜 토지 대장에 올려놓고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횡령하는 것을 여결(餘結)이라 한다. 양자를 합칭하여 흔히 은결이라 한다. 궁방전, 둔전이 면세전인 데 반하여, 은결은 탈세전으로서, 조선 후기 전제 문란의 대표적인 양태이었다.

▨ 면세지의 실태

양 난 후, 정부는 경제 생활을 재건하고자 양전 사업을 거듭 추진하면서 농지 개간에 힘썼다. 그리하여 광해군 때 54만 결이던 것이 숙종 때에는 140만 결에 이르렀다.
그러나 토지 결 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세수입은 비례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궁방전(宮房田), 관둔전(官屯田), 진황전(陳荒田) 등 면세지가 광대하였고, 불법적인 은폐로 탈세지도 많았기 때문이다.
궁방전은 왕실의 일부인 궁실(宮室)과 왕실에서 분가 독립한 궁가(宮家)에 지급되던 전토로서, 임진왜란 후 각 궁방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기 위해 급여되었다. 대표적인 궁방으로는 내수사(內需司),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용동궁(龍洞宮) 등이 있었는데, 탁지지(度支志)에는 57궁방의 26,760결이,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68궁방의 37,927결이 면세되고 있었다. 둔전은 영문둔전(營門屯田)과 아문둔전(衙門屯田)으로 구분되는데, 전란으로 이산된 농민을 불러 모아 황페화된 전토를 다시 경작시키고, 그 생산물의 일부를 군자 혹은 각 관아의 자체 경비로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전체 면세전의 3분의 2정도를 차지하는 것이 진황전이다. 진황전은 이전에 경작하던 토지였지만, 오랫동안 황폐되어 내려온 것으로, 진황전이 날로 늘어났다는 것은 지배 계층의 수탈로 생존 의욕을 상실한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하고 유망, 도산하는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 부가세의 종류

부가세는 본래 전세의 수납으로부터 상납까지 소요되는 각종 수수료, 하역료, 운송료, 등 잡다한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부과한 세이다. 속대전에는 가승미(加升米),곡상미(穀上米), 창역가미(倉役價米), 이가미(二價米), 창작지미(倉作紙米), 호조작지미(戶曹作紙米), 공인역가미(貢人役價米)의 7종을 법적으로 규제하였다.
가승미와 곡상미는 세곡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며, 창역가미는 창고에 출입할 때의 수수료이고, 이가미는 선박에 싣고 내릴 때 인부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작지미는 경창(京倉)에 입고시킬 때의 수수료이고, 호조작지미는 납세때 호조에 상납하는 수수료이고, 공인역가미는 호조 및 경창에 전속된 공인의 품삯을 지급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 부가세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그 종류와 세액이 증가하여, 원래의 전세보다 몇 배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지방 관아에서는 자체로 여러 가지 명목의 부가세를 징수하기도 하였는데, 그 세목에서는 협잡과 횡령이 성행하여 큰 폐해로 지적되었다.

▨ 방납(防納)의 폐단

방납이란, 공물을 납부함에 있어서 현물 수납이 운송, 저장에 불편하고, 또 생산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납하게 하는 것인데, 이를 기화로 상인 혹은 하급 관리들이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였다. 상인 혹은 하급관리들은 이득을 위해 불법적인 수단으로 농민들의 상납을 방해까지 하였으므로 방납이란 명칭까지 생겨났다.
공물의 수요자로 보면,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 얻기 때문에 편리하였으나, 방납자들은 관청과 농민의 중간에서 엄청난 모리 행위를 하여 10배 이상의 부담을 농민에게 지우기도 하였다.

▨ 공물 부담 능력의 문제

공물의 납부는 농민의 가장 큰 부담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 농민들이 부담하고 있었던 공물의 대가는 1결에 미곡 20두에서 100두 이상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평년 1결의 생산량이 2, 30석에서 전세가 대체로 1결당 4두를 징수하고 있었는데, 공물의 대가가 100두에 이르렀다면 공물의 부담이 얼마나 무겁고, 또 농민의 공물 부담 능력도 짐작하게 한다(浦渚梟, 潛谷梟, 磻溪隨錄). 뿐만 아니라, 공물에는 경중(輕重), 고헐(苦歇)의 차이가 있는데, 부호들은 가볍고 헐한 것을 부담하였는데 비하여, 빈민들은 무겁고 힘든 것을 부담하였다. 게다가, 부호들은 그 세력을 구사하여, 자기의 것을 빈민에게 전가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을의 호구 구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중앙에서 획일적으로 각 고을에 공물을 부과하였기 때문에, 큰 고을과 작은 고을의 부담에 차이가 많았다. 또, 전세는 흉년이 들면 감면의 조치가 있었지만, 공물은 감면의 조치가 없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점차 곤궁해졌고, 가혹한 공물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되자, 가족을 거느리고 사방으로 도산하기에 이르러, 고을마다 유민이 넘쳐났다.

▨ 공납제(貢納制) 개혁 논의

공물 납부제도는 이미 16세기에 여러 가지 폐단을 자아내 개혁의 논의가 제기되었다. 예컨대, 중종 때에 조광조가 공안(貢案)의 개정을 제의히였고, 선조 때의 이이는 공물의 대납, 방납 등의 폐단을 제거하여 국고의 수입을 증대시키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는 수미법(收米法)을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토산물 대신 미곡으로 수납하자는 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성룡(柳成龍)이 민폐를 시정하고, 또 전란으로 인하여 탕진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도 수미법이 매우 이로움을 강조하였다.
그의 논의는, 모든 전토에 1결당 미곡 2두씩 거두고, 대신 모든 공물을 혁파하자는 것인데, 그 운송 문제로 인하여 산간이나 수변에서 먼 고을 백성들이 불편하다고 하여 1년 동안 시행되고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한백겸(韓百謙)에 의해 대동법으로 구체화되었다.

▨ 공인(貢人)의 활동

공인은 대동법 실시 이후에 나타난 어용적 조달 상인이다. 즉, 각종의 공물을 쌀로 대납하는 대동법이 실시되자, 정부에서는 필요한 물품을 공인을 지정해 조달하게 하고는 그 값을 대동미(大同米)로 지급하였다.
공인에는 대부분 종래 공납과 관계를 맺고 있던 시전 상인, 경주인, 공장(工匠) 들이 많았다. 이들이 조달 물품의 구입을 위해 서울의 시전 및 각 지방의 여각, 객주와 거래하면서 상업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리하여 시장권이 확대되고, 아울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사상들의 활동을 자극하기도 했다. 나아가,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생산에도 참여하여 공장 수공업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 대동법 시행의 찬반 양론

대동법은 호 단위로 부과하던 공납을 전결에 토대하여 징수한 것으로서, 관련된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다르면서 순조롭게 시행되지 못하였다. 즉, 공납은 호를 부과의 일차적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토지가 없는 사람에게도 부과되었지만,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토지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많은 부담을 져야 했다.
대동법이 1608년 경기도에 시행되고서도 전국적 보급이 1708년에야 완성된 것은, 그 동안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토호와 공물을 대납하면서 이들을 취하던 방납인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제도였던 것으로, 당시 사회에서 큰 영향력으로 행사하고 있던 그들은 대동법의 시행을 완강히 반대하고 방해하였던 것이다.
대동법은 당시 공납 부과의 불균등, 방납의 폐해 등으로 농민들이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유민이 증가하면서 농촌 사회가 불안하자, 국가 재정의 타개를 아울러 염려한 위정자들이 내세운 현실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원익, 김육, 조익 등은 강력히 대동법의 실시, 보급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양반, 토호, 방납인들은 김상헌, 송시열 등을 움직여 대동미를 운송하기 위한 대책과 남방의 산물을 경중에서 구입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 대동미의 부과

대동미는 대체로 1결당 미곡 12두를 징수하였지만, 지역과 시기에 따라 각기 달리 부과되었다. 이는, 대동법이 1세기에 걸쳐 도별로 시행되었고, 또 각 도가 종전에 부담하였던 공물 부담의 차이와 각 도의 경비 차이에 따른 것이다.
이 밖에도, 양전이 균일하게 행해지지 못한 까닭이 있다.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초기16두10두13두13두16두17두후기12두12두12두12두12두12두

한편, 대동세는 백미(白米)를 원칙적인 부과 대상으로 하였으나, 지역에 따라 미가(米價)에 차이가 있고 운송 문제가 있어서 목면(木棉), 마포(麻布), 전화(錢貨)로 바꿔 내기도 하였는데, 이를 환봉(煥捧)이라 하였다. 이와 아울러, 납세자의 요구에 따

라 소미(小米), 대두(大豆), 소두(小豆) 등의 잡곡으로도 대납하였는데, 이를 대봉(代捧)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납부 시기는 봄과 가을에 반씩 분할하여 상납하였다.

▨ 대동미의 용도

대동미의 용도는 중앙의 궁실이나 관아에서 소용되는 공물값을 마련하기 위한 경납분(京納分)과 각 고을의 수요 및 잡역의 충당을 위한 저치분(儲置分)으로 크게 나뉘었는데, 전자를 상납미(上納米), 후자를 유치미(留置米)라고도 하였다. 선혜청절목(宣惠廳節目)에 의하면, 대동미의 경납분과 저치분의 양과 비율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대동법 실시 초기인 17세기에는 중앙과 지방의 재정이 모두 수입 초과로서, 건전한 재정 상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18세기 중엽이래 상납분이 격증함에 따라 유치분이 격감되어 지방 재정이 궁핍해져 갔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대동미의 전량이 중앙으로 상납되는 경우도 있었다.
도 별부과 총액(석)경 납 분저 치 분양(석)%양(석)%충청(효종 3)
전라(현종 3)
경상(숙종 4) 83,164
147,134
137,45248,280
61,218
53,50758.1
41.6
38.934,884
85,916
83,945341.9
58.4
61.1

▨ 진상(進上)과 별공(別貢)

진상은 국왕에게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것으로, 공물이 세납의 일종인 데 대하여, 진상은 지방관들이 국왕에게 예물을 바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각 도 단위로 관찰사, 병사, 수사가 한달에 한 번씩 바쳤다. 대동법 시행 후에도 진상은 여전히 현물도 받아들였다. 주로 식료품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별공은 진헌(進獻)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 대한 의례적인 공납 형태로서 필요한 물품이 농민에 부과되었다. 대동법으로 정기적인 사행 방물은 감해졌지만, 사은사, 진하사, 주청사 등 비정기적 사행시 부족한 방물은 계속 현물로 징수되었다.

▨ 납포군(納布軍)

현역 복무에 대신하여 일정한 값을 내고 군역을 이행하는 장정을 납포군이라 한다. 조선 왕조의 군역제는 정병과 보인으로 나누어, 정병에게 현역복무의 의무를 지게하고, 보인으로 하여금 이를 경제적으로 돕게 하였다.
그런데 정군과 보인을 막론하고, 경제적 기반없이 고된 군역만 부과되어 농민들은 가급적 기피하고자하였다. 이를 기화로, 변경의 군 지휘관들은 군역 의무자에게서 포를 받아 착복하고, 대신 현역 복무를 자의로 면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같은 방군수포(放軍收布) 현상은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갔고, 그 값도 높아져 민폐가 심해지자, 마침내 정부는 1541년 이를 공정화(公定化)하여 군적 수포제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현역 복무에 응하고 싶지 않은 병역 의무자들은 일정한 군포만을 바치고 현역 복무를 면하는 납포군이 되었다. 번상가(番上價)로서의 군포는 매 장정당 2필이었다.


▨ 양역(良役)의 폐단

양인들의 군역 의무인 양역이 현역 복무에서 군포 납부로 바뀌자, 군포 수입은 국가 재정에서 중요한 몫을 하였다.
그러나 양정으로부터의 군포 징수가 단일 관청에 의해 이루어져서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5군영과 중앙 관아는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함으로써 한 사람의 장정이 이중 삼중으로 수탈당하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 역시 소속에 따라서 2필 혹은 3필 등 일률적이지 못하였다(1792년 경상도 영천에서는 500명의 양정이 2783명분의 부담을, 1793년 경상도 비안에서는 400호가 1886명의 부담을 져야 했다.).
더구나, 정부는 전국의 양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재정 사정이 곤란해짐에 따라 각 군현에 군포 징수량을 증액 배정하였다. 당시 장수된 군포의 양은 1670년대에 30만 필이던 것이 1700년대에는 50만 필로, 다시 1732년에는 70여만 필로, 1750년에는 100만 필로 늘어났다. 이것은 실제의 군정 수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문서상으로 군정 수를 늘려 배정한 결과였다. 여기에 수령과 아전의 농간과 착취까지 겹쳐 어린아이, 노인, 죽은 사람까지 군적에 올려놓고 군포를 수탈하는 등 폐단이 극심하였다.

▨ 유망(流亡)과 피역(避役)

고역(苦役)을 불가피하게 하는 군역제의 제도적 불합리성에 더하여, 탐관 오리의 불법적 수탈 마저 가중되어, 조선 후기 양정들의 생존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군포의 부담은 특히 가난한 농민에 집중되었다. 왜냐 하면, 조금 형세가 나은 사람들은 공명첩을 사서 양반 신분을 얻거나, 뇌물을 바쳐 향교나 서원의 교생, 원생으로 등록하여 양역의 부담을 벗었기 때문이다.
양민들이 역을 벗어나기 위한 피역 형태는 누호(漏戶), 누적(漏籍), 모칭(冒稱), 투속(投屬), 가탁(假託), 모속(冒屬)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이러한 연유로, 가난한 농민들은 2, 3명분의 군포 부담을 지게 되어 더욱더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농민들은 파산하거나 유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민의 증가는 양 난 직후에 특히 심했지만,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된 18세기 초에 있어서도 자기 고장에 머물러 있는 군포 대상자는 3분의 1로 줄고 있었다. 그런데도 봉건 지배층은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유망자의 부담을 동네 사람과 일가 친척에게까지 지우는 인징(隣徵), 동징(洞徵), 족징(族徵)의 폐를 자아내니, 이는 또한 유민의 증가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 양역 변통론(良役變通論)

양역의 폐단이 심화되면서, 견딜 수 없게 된 농민들은 유망하거나 피역으로 저항하였다. 농민의 유망과 피역은 봉건 국가로서는 국가의 기반을 잃게 하는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봉건 국가는 농민을 토지에 얽매여 그들에게서 전세(田稅), 대동(大同), 군포(軍布)를 수취하여 국가 재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지배층은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그 기반 확보를 위한 대책을 모색하여, 농민의 유망을 법제적으로 억제하기 위하여 호패법(戶牌法)이나 오가작통법

을 실시하는가 하면, 양역의 폐단을 다소 조정하고자 하였다. 양역의 폐단을 변통하고자 하는 논의는 현종이 즉위하면서 비롯되었다. 즉, 정태화(鄭太和), 이단하(李端夏) 등은 늘어난 군액을 대폭 감축하자고 제의하였다.
양역 변통 논의는 숙종 때 본격화되었다. 먼저, 양반에서 천민까지 모두 포를 내게 하는 호포론(戶布論)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봉건적 양반층은, 양반은 상민과 같을 수 없다고 하여 맹렬히 반대하여 폐기되었다. 이어서, 군액을 감축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훈련도감, 금위영 등의 군영 자체를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시행되지 못하였다. 다음, 소속에 따라 차이가 있던 군포의 액수를 2필로 획일화하여 균포(均布)의 뜻을 살리고자 하였으나,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었다.
한편, 호포론을 수정하여 모든 정남에게 포를 부가하자는 정포론(丁布論)이 제시되었으나, 이 역시 양반들의 이해와 엇갈려 폐기되었다. 정포론은 사대부, 유생 등 역(役)이 없이 한가롭게 노는 자에게 부과한다고 하여 유포론(遊布論)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논의는 영조 때에 이르러 구체화되기 시작하여 양정의 정확한 수가 조사되었으며,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하는 감포론(減布論)으로 정리되어 1750년(영조 28) 균역법으로 시행되었다.

▨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균역법의 시행으로 군포 2필이 1필로 감축되어 농민들의 부담은 줄어들었으나, 국가 재정은 보다 약화도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궁방, 아문에서 수취하던 어세, 염세, 선세를 국가의 수입으로 잡고, 결작이라 하여 토지 1결에 미곡 2두를 받아들이도록 하며, 나아가 부유한 양민으로 교생, 원생을 칭탁하여 군포를부담하지 않고 있던 자를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 하여 합법적으로 지위를 인정해 주고, 대신 포를 징수하여 재정 수입을 보충하려 하였다. 이들 선무군관에게는 매년 무과를 통해 합격자는 당년의 선무군관포 부담을 감해 주었다.

▨ 결작(結作)의 징수

군포를 전결(田結)에 기준하여 징수하는 것이 결작으로서, 미곡으로 징수하면 결미(結米)요, 전화로 징수하면 결전(結錢)이었다.
이는 일찍이 양역 변통 논의에서 그 방안으로 제기된 바 있었다. 신분의 구별에 관계없이 군포를 부담시키자는 군포론이 양반들의 반대로 실패하자, 재산에 비례하여 부과시키자는 결포론이 나왔으나, 이 역시 부유한 양반, 토호의 반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다가, 영조의 적극적 의도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즉, 평안, 함경 양 도를 제외한 6도의 전결에서 매결에 미곡 2두 또는 전화 5전씩 징수하였다. 징수 총액은 대략 30만 냥에 해당되어,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였다.

▨ 붕당과 병권(兵權)

붕당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그 기능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는 세력 기반이 있어야 했다. 세력 기반은 이념적 측면에서는 정통성과 도덕성이 확보되어야 당시 사회에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불리적 측면에서는 정권 또는 병권을 바탕으로 힘을 발휘할 때 가능하였다.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측은 정치 권력의 중요한 배경으로서 병권을 중


요시하여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을 설치, 강화하여 자신들의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들 군영의 통솔권은 거의 서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서인과 대립하고 있던 남인은 훈련별대(訓練別隊)를 신설하고,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기능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병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 정권 쟁탈전과 붕당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학연, 지연, 문벌 등의 차이로 인해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17세기에는 인사권, 예송 논쟁을 둘러싸고 번번히 대립하면서도 상호 비판과 공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권력의 독점적 추구와 외척 세력의 개입으로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붕당 간의 다툼은 권력의 장악에만 집착하였고, 적대적인 관계로 변해 갔다. 즉,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집권한 서인은 윤휴, 허적 등 다수의 남인을 주살하였고, 이에 다시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송시열, 김수항 등을 제거하여 보복하였다. 이어서, 갑술환국으로 다시 등장한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숙청하였다.

▨ 서인과 남인의 공존 관계

인조 반정 후, 사림들이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붕당 정치를 추구하였다면, 그것은 붕당의 상호 비판과 공존에 토대한 정치 형태였다. 실제로, 17세기에는 서인과 남인이, 18세기에는 노론과 소론이 대체로 공존하면서 붕당 사이의 역학 관계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다. 예컨데, 인조 반정 후 정권을 장악한 서인이었지만, 남인이 협력을 구하여 남인이 대폭 등용되었고, 숙종 즉위 후 남인 정권이 성립되었으나, 다수의 서인이 기용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자 사이에는 혼인 관계도 이루어져,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권시는 사돈 관계였다.

▨ 예론(禮論)

예론이란, 예법에 대한 송사와 논쟁으로서, 예송 논쟁(禮訟論爭)이라고도 한다. 당시,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하는 사림 사회에 있어서 예(禮)의 문제는 곧 모든 사회 질서의 기본적인 규범이었으므로, 예론을 중시한 붕당 사이의 대립은 정통성에 관련하여 필연적이었다.
예론은 효종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효종의 상에 인조의 후비인 조대비(趙大妃)가 갖출 복제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효종이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때문이다. 이 때, 실권을 잡고 있던 서인은 효종이 비록 왕위에 오른 임금이라도 차남이기 때문에 1년 기한의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남인은 현제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성리학을 탄력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효종이 차남이어도 대통을 이었기 때문에 종통(宗統)으로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서인의 집권으로 남인의 주장은 일출되었다.
그 후, 현종 때 효종비의 상을 당하여 또다시 조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때, 서인은 전날과 같은 논리로 9개월의 대공복(大功服)을 내세웠는데, 이에 대하여 남인은 기년복(朞年服)을 내세워 서인을 적극 공격하였다. 결과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 정권이 몰락하였다.


▨ 경신환국(庚申換局)

제 2차 예송 논쟁의 결과로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하였는데, 이와 같은 형세는 현종에 이어서 숙종이 즉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집권한 남인은 대 서인 처단 과정에서 분열을 일으키니, 허목 등은 원론에 입각하여 강경한 견해를 보였고, 이에 대하여 허적 등은 현실을 참작하여 온건한 입장을 내세웠다. 전자를 청남(淸南)이라 하고, 후자를 탁남(濁南)이라 하는데, 양자는 서로 대립하다가 청남이 몰려나고 탁남이 중용되었다. 탁남은 이후 정권을 독점하면서 횡포를 보이니, 이에 그 동안 세력을 잃었던 서인은 모역을 시도하였다고 하여 남인을 공박,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고, 남인의 다수를 숙청하였다. 이를 경신환국 또는 경신대출척(更新大黜陟)이라고 한다.
서인은 남인에 대하여 철저히 탄압하여, 이후 남인 세력은 크게 약화되고, 또한 붕당간의 대립은 보복과 살육으로 전개되어 갔다.

▨ 외척의 정치 간여

붕당 간의 대립이 권력의 장악에만 집착하게 되면서 공권력의 위축과 사익(私益)의 확대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 같은 현상은, 학연에 토대한 정통성의 유자보다는 외척의 개입으로 정치의 실권 장악이 주요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붕당 간의 대립이 심해지는 속에서 국왕은 외척에 의지하고자 하였다.
현종 때 김우명(金佑明)이 국구(國舅)로서 실권을 장악한 바 있지만, 외척의 본격적인 정치 간여는 김석주(金錫冑) 때부터였다. 김우명의 조카인 김석주는 경신환국을 주도하면서 병권을 손아귀에 넣고 정국을 자의로 조정하였다. 그 후, 숙종의 외척으로서 광산 김씨의 김만기(金萬基)와 김만중(金萬重), 그리고 여흥 민씨의 민유중(閔維重)과 민정중(閔鼎重)이 중요 요직을 차지한 바 있으며,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閔鎭遠)은 영조 때 노론의 거두로 활약하였다.

▨ 왕위 계승 문제

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 전개될 때에 있어서, 정쟁의 문제는 대체로 국방, 외교, 재정, 민생 등 다양하였으나, 붕당들이 권력의 장악에만 집착하면서 정쟁의 초점은 왕위 계승 문제에 귀착되었다. 왕위 계승 문제는 곧 자신들의 실권과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왕위 계승 문제는 숙종의 후사 문제였다.
숙종은 일찍이 김만기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나 20세로 단명하고, 이어서 민유중의 딸을 계비로 삼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이 때, 장희빈에게서 왕자 연령군을 얻으니, 남인은 이를 후사로 삼고자 하였는데, 세력을 잃게 된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은 숙종의 동의를 얻어 이를 성사시키고 정치의 실권도 장악하였다. 아울러 민비도 폐출하였다. 그러던 중 남인과 장희빈이 횡포로 남인이 제거되고, 다시 서인이 집권하고 민비가 복위되었으며, 숙종은 다시 숙빈 최씨에게서 연잉군을 얻었다. 이 때부터 붕당 간의 대립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는데, 소론은 연령군을, 노론은 연잉군을 후사로 내세우고자 하였다. 연령군이 경종으로 즉위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죽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은 격렬한 대립과 반목을 보이니, 이로 인하여 붕당 정치는 크게 변질되어 갔다.


▨ 벌열 가문(閥閱家門)

벌열이란,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여 오랜 동안 세력을 누리며 지체를 유지해 온 가문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벌열은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속에서 정권을 오로지하며, 특히 왕실과의 통혼 관계 속에서 세도를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벌열 가문은 학벌, 인맥, 지연 등에 의해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였는데, 정쟁이 치열해지고, 마침내 노론 중심으로 일당 전제화가 추구되면서 그 모습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벌열 가문으로는 숙종 때의 청풍 김씨, 광산 김씨, 여흥 민씨, 영조 때의 남양 홍씨, 경주 김씨, 세도 정치기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그리고 고종 때의 여흥 민씨 등의 가문이 대표적이었다.

▨ 붕당과 학연, 지연

붕당의 정통성은 학문적 맥락과 깊이 연관되었다. 붕당을 조성한 사림들은 성리학자들이었고, 그들이 진붕(眞朋)을 자처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성리학 자체가 이(理)와 기(氣), 보편과 특수, 원론과 현실,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인하여 다양한 해석이 불가피하였고, 학문적 분파가 불가피하였다. 학문적 분파는 붕당의 성립과 더불어 나타났다. 즉, 인간의 도덕적 측면에 보다 관심을 두는 이황과 조식이 주리파와, 경험적 현실 세계를 존중하는 이이와 성혼의 주기파가 그것이다.
주리파는 영남 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동인들이 여기에 속하였고, 주기파는 기호 학파하고도 하는데, 주로 서인들이 여기에 속하였다. 동인은 다시 분파하여, 이황을 따르는 퇴계 학파와 조식을 쫓는 남명 학파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남인을, 후자는 북인을 형성하였다. 지역적으로 전자는 낙동강 동쪽, 후자는 낙동강 서쪽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서인도 이이를 추종하는 율곡학파와 성혼을 따르는 우계 학파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주로 노론, 후자는 주로 소론을 구성하였다.

▨ 양반들의 향촌 지배

조선 시대의 향촌 사회는 양반, 즉 사족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였다. 특히, 16세기에 시행된 유향소(留鄕所)나 경재소(京在所), 향약(鄕約)과 사창제(社創制)등은 이러한 재지사족들의 지위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재지사족들에 의한 향권(鄕權)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16세기의 향촌 지배 체제는 일단 그 자율성을 지녔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로 급속하게 진전된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적 분업의 진전, 그리고 이와 병행된 신분 체제의 혼요(混擾)는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향촌 사회 구조가 전면적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직면하게 하였다. 종래 경제적 기반 및 신분적 특권을 토대로 하층민을 지배했던 양반 지주 중심의 조선 전기의 향촌 지배 질서는 이 같은 변화를 완충시킬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앙 정부는 이 같은 근본적인 사회 모순을 해소시키기보다 신분제나 공동체적 규제를 재강화함으로써 기존의 봉건적인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재지시족들이 과거 일정하게나마 소유하고 있던 하층민에 대한 지배력을 잠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향촌 사회의 운영 원리가 재지시족층으로부터 점차 유리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인 동시에 그들의 향촌 지배력이 점차 위축․붕괴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에 재지사족들은 과거의 향안(鄕案)․향규(鄕規)․향약 등과 같은 일향(一鄕)의 지배 구조보다는 혈연적이 족계(族契)나 동계(洞契)․동약(洞約) 혹은 촌락 기반을 매개로 하는 하층민과의 유대속에 자기 방어를 모색하고자 하는 상하 합계(上下合契) 형태의 동계(동약)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 두레와 황두

조선 후기 농촌 사회에 새로이 나타난 노동 조직으로 두레와 황두가 있었다. 두레는 농법의 변화에 따라 생겨났다. 즉, 남쪽 지방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이앙법을 하게 되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앙법은 집단적 모내기 노동력을 요구하였으므로 물을 댈 수 있는 일정한 시기에 한꺼번에 모를 내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집중적인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김매기도 더운 철에 집중되기 때문에 뙤약볕 밑에서 한꺼번에 많은 논을 매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집중적이 노동력 투입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이 같은 이앙법은 단기가 내에 모내기와 김매기를 연이어 끝내야 했으므로 시간적인 긴박성 때문에도 품앗이류의 공동 노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 조직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자소작 농민들은 노동력 투입이 고도로 집약화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두레를 강화, 발전시켜 나갔다. 대지주도 두레의 노동을 빌리지 않고는 일시에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농민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건갈이〔乾播〕는 남쪽의 이앙법에 대칭되는 북쪽 서북 지방 특히 청천강 일대의 농법인데, 이 곳에는 공동 조직으로 황두 조직이 있었다.
황두 조직이란 마을당 김매기에 능숙한 장정 20~30명이 작업 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만 수행하는 공동 조직인데, 이 중에서 신망 있고 경험 많은 황두꾼이 계수(좌장)․부계수 등의 임원이 되어 황두꾼과 함께 노동하였다.

▨ 숙종의 편당적 조처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어 반목과 대립이 격화되자 정국은 혼미해졌다. 이에, 숙종은 탕평론(蕩平論)을 제기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양자 사이의 균형과 공존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한 붕당을 일거에 내몰고 다른 붕당에게 대권을 위임시키는 환국(換局)에 불과하였다. 즉,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을 집정하게 하고, 윤휴, 허적 등 남인을 축출하였다.
이어서,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에게 대권을 주고, 송시열, 김수항 등 서인의주요 인물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 후,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에게 정권을 위임하고, 민암, 권대운 등 남인 모두를 처단하였다. 이후, 남인이 거의 재기 불능에 빠지자, 처음에는 소론에게 정권을 맡기더니 숙종 42년 병신 처분으로 소론을 제거하고 노론을 중용하였다.
이 같은 편파적 조처는 탕평의 근본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명목상의 탕평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영조의 편당적 조처

영조는 즉위하면서 곧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지만, 일찍이 자신을 지지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자 했던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련을 겪었던 노론의 충정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소론 정국을 쇄신하여 노론에 정치를 위임하였다.
그러나 노론이 소론에게 대살륙을 시도하자, 영조 3년에 다시금 탕평의 명분을 내세워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성립시켰다. 그러던 중, 영조 4년 청주에서 소론의 강경파들이 난을 일으키자, 다시금 노론에 정권을 맡기고 소론을 내몰았다.
이와 같이, 영조 초년의 탕평 시도 역시 편당적 조처로서 환국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아, 이 역시 숙종의 탕평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 탕평의 원리

탕평이란 용어는, ‘서경’ 홍범조(洪範條)의 ‘王道蕩蕩 王道平平’에서 따온 합성어로서, 임금의 법도요, 정치의 기본 준칙이었다. 즉, 임금은 항상 치우침이 없이 공평 무사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여서 감싸도 안 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서 물리쳐도 안 되니, 그것이 임금의 도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의 바탕은 임금이 도(道)와 의(義)를 솔선 수범하는 왕도 정치(王道政治)이어야 하며, 그 왕도 정치의 요체는 ‘母偏母黨 母黨母偏’에 있으니, 그렇게 되면 왕도는 탕탕평평해진다는 것이다.

▨ 탕평파(蕩平派)의 대두

17세기 말 이래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붕당 간의 정치적 갈등은 마침내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극단적인 대립상을 보였고, 왕권마저 여기에 휩쓸려 약화되고 동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격동을 직접 체험하고 즉위한 영조는 왕권 및 정국의 안정을 선결 문제로 여기기 않을 수 없었고, 이에 파붕당(破朋黨)을 내세워 탕평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붕당을 파헤친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붕당 자체의 뿌리가 깊고 거셀 뿐 아니라, 붕당 사이의 원한은 끝이 없어 타협이 어려웠다.
게다가, 왕권이 약해서 이들을 힘으로 조정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강경론자를 멀리하고 온건론자를 중요하여 자신들의 영조에 협조, 당화(黨禍)를 예방하며 자신들의 지위를 구축하고자 하니, 여기에 이른바 탕평파가 형성되었다. 탕평파는 조현명, 조문명, 송인명 등 소론의 온건론자들이 중심이었는데, 그들은 영조의 즉위로 노론의 세력이 비대해지는 속에서 이를 견제하고자 국왕과 밀착하였던 것이다.

▨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죽음

사도 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큰 아들 경의군이 영조 4년에 10세로 사망하자, 세자로 책봉되었다. 15세 때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맡기도 하였다.
사도 세자는 조숙하고 총명한데다가, 영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언행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호기심이 많아 지난날의 정쟁에 갚은 관심을 보였고, 기존 질서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영조의 후궁 문숙의와 노론의 강경파들은 질투심과 두려움으로 견제하던 중, 비행을 내세워 모함하였다.
마침내, 1761년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순행하고 돌아오자, 반대파들은 왕세자의 체통을 잃게 했다고 하여 논박, 서인(庶人)으로 폐하게 하고, 드디어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게 하였다. 종래 사도 세자의 죽음을 악질(惡疾)과 광행(狂行)으로 인해 비

롯되었다고 보아 왔으나,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관계된 내용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閑中錄)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 장용영(壯勇營)

1791년(정조 15) 수원에 설치하였던 군영으로, 1802(순조 2)년에 총리영(總理營)으로 개칭하였다. 아버지 사도 세자가 참화를 당한 뒤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신변의 위협 속에서 즉위한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하려 하였다. 그것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강화된 기반 위에서 나름대로의 정치를 펴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이에 남인 시파를 중용하고 진보적 지식인 및 서얼 계층을 기용하여 자신의 정치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정책 자문 기구로 삼고, 수원성을 새로이 수축하여 자신의 세력 근거지로 삼는 한편, 이 곳에 친위군의 성격을 가지는 장용영을 설치하여 붕당들의 세력 기반이었던 기존의 군영에 대항하여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구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측근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을 수원 유수로 삼아 장용영 도제조로서 지휘관을 가지도록 하였다. 구성은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나누어, 내영은 병참을, 외영은 군사 지휘를 맡도록 하였는데, 지휘관으로는 대장, 영장 등이 있었다. 군병 총 수는 1만 2천여 명이었다.

▨ 규장각의 설치

정조가 즉위한 직후(1776) 궁중에 설치하였던 왕립 문서고로서, 역대 국왕의 시문, 서화, 선보 등을 보관, 관리하였으며, 내각이라고도 하였다. 규장각은 단순히 학문 연구와 도서 편찬의 일만이 아니라, 국왕의 정책 자문 기구로서의 역할이 컸다.
초기에는 홍국영(洪國榮)의 지휘 아래 정조의 적대 세력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으며, 정세가 안정되자 문물 정비에 힘썼다. 규장각의 제학, 직각, 시교 등의 관원은 승정원, 홍문관의 관원보다 중시되었고, 사관(史官), 시관(試官)도 겸하여 당시의 문화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국왕과 더불어 정치를 논의하고 기획하면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검서관은 유능한 서얼 출신을 기용하였다.

▨ 세도 정치의 개념

정치가 전개되는 속에서 일당 전제적인 붕당 세력의 비대화는 왕권의 상대적인 약화를 초래한다. 이와 같은 정세 아래에서 정국을 조정하지 못하는 국왕은 특수한 인물을 두터이 신임하여, 그에게 왕권의 대행을 위임함으로써 그가 정권을 독차지할 때 이를 세도 정치(勢道政治)라 한다.
이에 대하여 세도 정치(勢道政治)로 표현하기도 한다. 즉, 일찍이 중종의 신임을 얻어 대사헌이면서도 정권을 장악, 도학 정치를 폈던 조광조(趙光祖)에 의하면, 하늘과 인간은 본래 하나이지만, 하늘은 인간에 대하여 반드시 그 도(道)가 있어야 하고, 임금과 신하는 본래 하나이지만, 임금은 신하에 대하여 반드시 그 이(理)가 있어야 한다면서, 도학 정치의 요체는 세상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도(道)로서 세도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선 후기의 세도는 정권을 전단하여 자기와 자기 가문의 이익만을 추구한 변태적인 세도로서, 외척에 의한 정권의 독차지였기 때문에 외척 세도 정치라 함이 타당하겠다. 그리하여 척리 정치(戚里政治), 문벌 정치(門閥政治), 벌열 정치(閥閱政治)라고도 한다. 요컨대, 붕당 정치의 파행적 형태, 나아가 경국대전에 규정된 봉건적 통치 질서의 변질이 세도 정치인 것이다.

▨ 일당 전제화의 추세

16세기 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림의 붕당은 동인과 서인으로 모습을 보였는데, 그 후 이합 집산을 거쳐 17세기에는 동인계의 남인과 북인, 서인계의 노론과 소론으로 정비되었다. 처음에는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인조 반정으로 정계에서 몰려나고 서인이 집권하였다.
서인은 남인과의 공존 관계를 잠시 유지였으나, 1680년의 경신환국,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더니, 자체 분열을 일으켜 노론과 소론으로 대립하였다. 경종의 즉위로 노론이 제거되고 소론이 집권하였으나, 곧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이 중용되었다. 영조는 처음에는 탕평책을 써서 양 자의 공존을 꾀하였으나, 1728년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점차 노론으로 기울어지고, 사도 세자 사건 이후에는 노론이 정치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정조가 즉위하여 탕평을 내세워 소론과 남인이 기용되기도 했으나, 순조 이후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노론 일당의 전제화가 가속화되었다.

▨ 안동 김씨의 세도

안동 김씨는 김상헌(金尙憲)이 조정에 나아간 이래, 김수항(金壽恒), 김수흥(金壽興),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 등이 정계와 학계에서 크게 이름을 드러낸 조선 후기의 명문 거족이다. 1801년 순조가 15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 왕후(貞純王后)가 정치를 후견하고, 김조순(金祖淳)이 선왕의 유지로 이를 보좌하였다. 그 후, 김조순은 자기 딸을 순조에게 결혼시켜 외척으로서의 정권을 장악하고, 김달순, 김명순, 김희순 등 안동 김씨 일파를 요직에 앉혔다.
그 후, 한때 풍양 조씨가 세도를 부렸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김조순의 딸 순원 왕후(純元王后)가 정치를 후견하게 되어 안동 김씨는 다시금 정권을 독차지하여 김문근, 김좌근, 김병국, 김병학 등이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세도를 부렸다.

▨ 풍양 조씨의 세도

풍양 조씨느 조지겸(趙持謙) 이래 소론의 가문이었으나, 영조의 탕평책을 계기로 조문명(趙文命), 조현명(趙顯命) 등이 중용되고, 이어서 조엄(趙嚴), 조진관(趙鎭寬) 등이 여직에 올랐던 조선 후기 명문 거족의 하나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극성하던 중, 조만영(趙萬永)이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에게 딸을 결혼시켜 외척이 되었다. 효명 세자가 일찍 죽고, 그 아들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풍원 부원군이 되어 세도를 부리면서 조인영 등 그의 일족을 요직에 앉혔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에게 세도를 빼았겼다.


▨ 매관 매직이 실태

정치가 바르게 되려면 공정한 인사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도리가 지켜지지 않고 관리 기강이 무너지면서, 인사권을 하나의 특권으로 간주하게 되고, 이를 구실로 축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관직을 사고 파는 것은 광해군 때 재정 위기를 구실로 심하게 나타났고, 그 후 정치의 도덕성을 내세워 이를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도덕성을 포기한 새도 정권은 갖은 방법으로 관직을 매매하여 축재에 열을 올렸다. 매매의 대상은 중앙의 관직뿐 아니라, 지방의 벼슬자리 등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감사 자리는 보통 5~6만 냥, 수령 자리는 2~3만 냥 안팎으로 거래되었고, 그 밖의 관직도 그 값이 정해져 있을 정도로 매관 매직이 성행하였다. 매관 매직은 관리들을 극도로 부패, 타락시켜 봉건 통치 질서를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 과거제의 폐단

과거는 관료로 진출하는 기본적 통로로서, 정치가 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과거제가 공정하게 시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과거 제도도 문란해졌고, 많은 폐단이 생겨났다. 즉, 세도 가문에서 시관(試官)과 과장(科場)을 장악하고, 시험 문제를 미리 빼내어 알려 주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신 시험을 보게 하고, 또는 다른 사람의 시험지와 바꿔 내게 하는 등 온갖 부정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재물을 모으는 데 힘썼다. 특정 가문 출신이 아니면 과거에 합격할 수 없었다. 학식이 뛰어나도 특정 가문과 줄을 대지 않으면 합격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양반들은 과거에 실패하거나 아예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종류와 횟수는 더욱 늘어나 다수의 합격자를 냈는데, 그만큼 과거제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 세도 정치의 미봉책

뇌물 수수와 관직 매매로 도덕성을 상실한 특정 가문의 세도 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 질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행정 기강이 크게 문란해져, 수령은 물론 아전들까지 민중을 수탈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온갖 방법으로 착취하였다.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가혹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관부에 시정을 요구하고, 나아가 무리를 지어 항거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가자, 봉건 지배층은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조정에서는 현지의 사정을 조사하고, 부정을 막기 위하여 우선 암행 어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암행 어사 자신이 수령과 결탁하여 부정을 자행하는가 하면, 세도 정권과 연계된 수령의 횡포로 인해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유리 걸식하는 민중 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진제장(䀼濟場)을 설치, 음식을 제공하였으나, 역시 한계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삼정이정청(三政氂正廳)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삼정이정청은 삼정 주에서도 특히 문제가 많았던 환정에서의 모곡(耗穀) 징수를 없앴다.
모곡은 빈민에게 곡식을 빌려 줄 때 자연적으로 소모되는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원곡의 10분의 1을 징수하게 하였던 것인데, 정치가 부패하면서 모곡이 원곡보다 많은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비록 부분적으로 조정에서 시정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근본적인 대책일 수는 없었다.


▨ 부연사행(赴燕使行)

1636년 병자호란 이후 대 중국 외교의 상대를 명에서 청으로 바꾼 조선은, 청에 대해 사대의 예로서 매년 사절을 청나라의 서울 연경(燕京)에 보내야 했다. 이들 사절을 부연사행이라 한다.
부연사행에는 정기적으로 성절자, 정조사, 동지사, 천추사 등이, 수시로는 사은사, 진주사, 진하사, 진위자, 문안사 등이 있었다. 이들 사행에는 대개 정사, 부사, 서장관, 역관 등 수백 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조공 무역과 아울러 사무역이 행해졌다. 특히, 사절이 왕래하는 의주의 중강(中江), 만주의 책문(柵門), 심양(審陽) 등지는 중요한 무역 기지로서, 조선과 청 상인의 무역 거래가 활발하였다.

▨ 백두산 경계 확정 문제

백두산 일대의 만주 지방은 예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는데, 청나라가 이 곳을 중심으로 건국하여 봉금 지대(封禁地帶)로 설정하여 주민의 거주를 금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우리 조상은 지형상 가까운 지역을 개척, 거주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졌다. 이에 청은 조선에 경계를 분명히 하자고 하여, 1712년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니, 조선에서도 박권(朴權), 이의복(李義復) 등을 보내어 함께 답사하고 결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두산 기슭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후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문의 해석 차이로 인해 후에 간도 귀속 문제가 제기되었다.

▨ 도쿠가와 막부

16세기 말, 분열되어 있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하였으나, 그가 죽자 일분 동부 지방의 군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실권을 장악하고, 현재의 도쿄인 에도에 막부를 개설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봉건 제도를 강화하여, 장군을 정점으로 하는 막번 체제(幕蕃體制)를 확립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를 엄히 하였다. 크리스트교를 엄금하고, 쇄국을 단행하였으나, 조선과는 국교를 재개하여 사절은 보냈고, 조선에서도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 때까지 260년 계속되었다.












3.경제 구조의 변화와 사회 변동



▨ 봉건제적 사회

조선 시대의 사회적 성격을 말할 때 흔히 봉건제적 사회라 한다. 조선 시대를 봉건제적 사회라고 인식할 경우 그것은 역사 발전의 단계론에 의한성격 규정의 한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발전의 단계론적 인식은 주로 사회 발전을 특정의 역사적 요인, 즉 생산 양식이나 생산 수단과 같은 것이나 또는 이념과 종교적 가치와 같은 특정의 요인들에 의해서 역사의 전체적인 전개를 단계화한 것으로서, 봉건제적 사회라는 것도 이러한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봉건제도와 봉건제적이라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조선 시대의 정치 사회를 봉건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봉건 제도하에서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지 바로 봉건 제도라는 것은 아니다. 지주와 소작인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생각할 때 조선 시대는 중세 봉건 제도적인 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봉건재적이라는 표현은 농민들의 토지 소유 관계나 생활 양식, 그리고 지배․피지배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것이지, 기본적인 정치사회의 제도적인 성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봉건 제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정치학적인 개념이다. 지방 분권적인 봉토와 영주와 가신의 개념 위에서 있는 제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는 정치 체계적인 면에서는 봉건 제도가 지배했던 사회는 아니고 오히려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계를 보여 주었다.

▨ 조선 후기의 신분별 인구 구성

산업 활동의 다변화와 경제 생활의 진전은 필연적으로 신분 구조의 변화를 유발하였다. 조손 후기에 있어서, 신분 구조의 변화는 계층간의 신분이동과 계층 내의 신분 분화의 두 가지 현상이 혼용되면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신분제의 동요는 농민층의 성장과 양반층의 몰락이라는 두 기반 위에서 전개되었다. 구체적으로, 평민층이나 천민층이 호적상 양반 신분으로 상승함으로써, 종래 1할 내외였던 양반층이 19세기 중엽에는 6, 7할이 되고, 전 국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평민층은 3할 내외, 천민층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되었다. 양반 신분으로 상승하는 농민이 늘어나고, 대신평민층이나 천민층이 그만큼 감소하면서 봉건적 신분제는 전면적으로 무너져 갔다. ▨ 항조(抗租)와 거세(拒稅)

18, 9세기 변혁 주체 세력의 형성 과정으로서의 농민 항쟁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먼저, 지주 전호제라는 봉건적 생산 관계하에서 경제 외적 강제에 의해 소작료를 수탈당하고 있던 소작농적 강제에 의해 소작료를 수탈당하고 있던 소작농들은 그 소작료(지대)를 인하시키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농민적 토지 소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항조 운동을 폈다.
항조 운동은 지주층의 고율 소작료가 그 주원인이 되고 있었는데, 18, 9세기에 특히 격화되고 있었다. 소작농은 소극적 또는 적극적으로 지대(地代)의 납부를 거부하기도 하고,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이를 체납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여러 마을과 면민이 집단화하여 폭력으로써 이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도지제가 성립되고, 지대의 금납호가 이루어져 갔으며, 소작료율이 인하되었다.
한편, 농민들의 거세 운동은 봉건 국가의 수취체제가 가혹하고 불합리함을 인식하고, 이를 피하고자 함에서 일찍부터 유망(流亡)의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에 삼정 문란이 가속화되면서 농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조세의 납부를 거부하였으니, 민중의 저항 투쟁은 전국적인 민란을 야기시켰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조정에서는 삼정이정청이라는 세제 개혁 위원회까지 설치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으나, 보수적 위정자들에게 근원적 대책을 기대할 수 없었다. 온갖 잡세의 조정과 중간 수탈의 제거를 모색하였지만, 그 역시 실효를 보지는 못하였다.

▨ 농촌의 임노동

조선 후기 농촌에서는 개간, 매점 등에 의해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가 있는가 하면, 합리적 경영에 의해 경작지를 확장한 경영형 부농층이 생겨났다. 이들은, 그 경영을 소작인이나 가족의 노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임노동자의 고용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이앙법으로 농법이 바뀌면서, 모내기철에는 단시일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됨으로써 임노동자의 고용이 요청되었다.
18세기의 유명한 암행 어사였던 박문수(朴文秀)에 의하면, 불과 열 마지기의 농토를 경영하는 데도 세 번 김매고 벼베고 타작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력이 연 50명이나 되

며, 이들은 모두 임노동으로 충당되는데, 한 사람의 품삯이 쌀 다섯 되와 돈 5푼이라 고 하였다. 농촌의 임노동자로는 머슴이라 불리는 고공(雇工)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장기적으로 고용되는 고공보다는 단기적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아 자유 노동자, 계약 노동자적인 성격이 높아 갔다. 대개 1년을 계약 기간으로 하는 품팔이 노동력이 많았던 것 같다.

▨ 영농 기술의 개발

양 난 후, 조선 사회가 당면한 과거제는 농업 생산력의 회복과 증대에 있었다. 그것을 위하여는 농지의 개간과 농법의 개량이 우선적으로 추진되어야했다.
그런데 농지의 개간은 봉건 지배층의 토지 겸병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이 생산력을 늘리기 위하여는 영농 기술의 개발에 주로 힘써야 했다. 농법의 개량 문제는 농지의 개간과는 달리, 직접 생산자의 기술적 문제에 속하는 것이었다. 농법의 개량은 수전 농업이나 한전 농업에서 모두 일어나고 있었다.
수전 농업에서는 종래 직파법이 일반적이었으나 이앙법이 점차 보급되어 갔고, 한전 농업에서는 농종법이 견종법으로 바뀌어 갔다. 이앙법이나 견종법은 모두가 종전의 농법에 비하여 노동력을 절반 이상 절감시키고, 반면에 수익은 2배 이상 증대시켰다.
더구나, 노동력의 절감은 양 난 이후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 인력의 부족을 보충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이앙법의 보급은 논에서 보리를 다시 심을 수 있어서 이모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밖에, 농민들은 시비법을 개발하고, 농기구를 다양하게 개량하였으며, 감자, 고구마, 담배, 고추 등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여 생산의 전문화와 다각화가 촉진되었다.

▨ 농종법(壟種法)과 견종법

영종 기술의 발달은 벼농사뿐만 아니라, 보리 농사에도 나타났다. 종래에는 농종법에 의해 밭이랑의 두둑에 씨를 뿌렸으나, 조선 후기에는 밭이랑의 고랑에 씨를 뿌리는 견종법이 보급되어 갔다.
견종법은 이앙법과 마찬가지로 김매기에서 노동력을 덜 수 있고, 종자가 바람이나 빗물에 쓸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어 소출이 늘어났다.

▨ 시비법의 개발

시비, 즉 작물이 잘 자라도록 거름을 주는 것은 단위 면적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하다.
조선 후기의 농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영농 방법을 개선함과 아울러, 시비법도 개발하였다. 즉, 비료의 양과 질을 높였으니, 인분의 이용이 다양화되었고, 비료의 종류도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드는가 하면, 가축의 분뇨를 이용하고, 벼나 보리의 짚을 태워서 토양의 유기질 집적과 질소 성분을 증가시켰다. 시비 방식도 기비법(基肥法)에서 추비법(追肥法)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생산력이 훨씬 높아졌다.

▨ 농기구의 개량

농기구의 개량도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작업 과정에 따라 농기구의 종류가 다양해지

고 정밀하게 분화되어 갔다. 가는 연장으로서 가래, 따비, 삽, 써레, 쇠스랑 등이, 김매는 연장으로서 호미가, 수확할 때에는 낫, 도리깨 등이, 도정 작업에서는 밀돌, 방아, 매 등이 쓰였다. 특히, 땅을 깊이 파는 쟁기가 소의 힘을 통해 이용되면서 토양의 배양력을 높였다.
한편, 종자를 흙으로 덮어 보호하고, 땅의 면을 평평하게 하는 번지 또는 밀개가 놀리 쓰여 이앙법의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 상업 작물의 지배

상업 작물은 작물 재배의 목적이 판매에 있었고, 따라서 농민층의 소득을 높여 주었다. 당시 널리 인기 있고 높은 이윤을 보장해 주는 작물은 담배, 목화, 약재, 채소 등이었는데, 논이나 밭농사보다 수 배의 이익이 있었다고 한다. 16세기에 전래된 담배는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지방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채소는 주로 도시 주변에서 재배, 판매되었는데, 주요 작물은 배추, 파, 마늘, 오이, 미나리 등이었다.
약재 역시 수익성이 높았는데, 전주의 생강, 황주의 지황, 개성의 인삼 등이 유명하였다.

▨ 농민의 1인당 경작 면적

농법의 개량은 생산성을 높이기도 하였지만, 노동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이앙법이나 견종법 모두 김매기, 추수 등에서 노동력을 훨씬 덜어 주었다. 단위 면적당 경작 노동을 8할 정도 감소시켰다.
그리하여 부지런한 농민은 남는 노동력을 다시 활용할 수 있어, 1인당 경작 면적이 더 넓어졌고, 그리하여 광작(廣作)이 나타났다. 기록에 의하면, 직파법으로 10두락도 못 짓던 농가에서 이앙법으로 20두락 내지 40두락까지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광작은 대개 부농층에 의해 전개되었으나, 자작농, 소작농 등에서도 나타났다. 지주는 토지 자체의 확대를 통해, 자작농이나 소작농은 소작지 경영의 확대를 통해 경작 면적을 늘려 갔다.

▨ 농업 경영의 합리화

농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영농 기술을 개발함과 아울러, 경영을 합리화하여 소득을 높이기도 하였다. 농민들이 의도한 방안에는 많은 농지를 적은 노동력으로 일구어 소득을 늘리는 법과, 적은 토지에 소득이 높은 작물을 재배하여 수익을 늘이는 방법이 있었다. 전자의 방안을 흔히 광적이라 하는데, 이앙법이나 견종법으로 노동력을 덜게 되자 농민들의 1인당 경작 면적이 더 넓어질 수 있었고, 이에 따라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방식이다. 더구나, 이 때 지주들은 임노당자를 고용하여 보다 생산성을 높였다.
한편, 후자의 방안으로 농민들은 고소득을 보장하는 인삼, 담배, 목화, 채소, 과일, 약재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였는데, 특히 인삼과 담배는 인기 있는 작물이었다. 성루 근교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하여 농민들의 소득을 높여 주었다.


▨ 경영형 부농

농법의 개량과 전환은 노동력을 절감하고서도 소득의 증대를 가능하게 하였으므로, 농민층 가운데서 활동적이고 영리적인 농민은 경영 확대를 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부를 축적해 갔다. 이들을 경영형 부농 또는 서민 지주라 한다.
경영형 부농은 경작지를 확장하여 잉여 노동력으로 생산성을 높였으니, 그것은 자경지(自耕地)에서도 일어났고 차경지(借耕地)에서도 일어났다. 또, 그들은 유통 경제가 발달함을 이용하여 영리 목적의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상업적 농업에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보다 많은 이득을 올렸다. 이들은 지주형 부농 또는 봉건 지주들이 토지의 집적, 집중을 통해 지대(地代)의 수익을 증대시켜 부를 축적한 데 대신하여, 이 시기의 경제 변동을 배경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촉진하면서 성장한 계층들로서, 봉건 사회 해체기의 새로운 변혁 세력으로서 역할하였다. 즉, 이들은 지주 전호제에 있어서 신분제의 예속성을 한층 약화시켜 갔고, 경제적 관계에 의거한 지주제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 전호권(佃戶權)

전호란, 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에 있어서의 남의 농토를 빌려서 농사짓는 소작농을 말하며, 전객(佃客), 장객(莊客)이라고도 하였다. 전호는 고려, 조선 사회에서 있었지만, 과전법 체제가 무너지고 토지의 사유화가 진전되면서 소작 관행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되어 갔다. 그런데 종래의 전호는 일종의 경제적 계약 관계로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지만, 엄격한 신분적 차별과 과중한 공납의 부담, 그 밖에 여러 경제 외적 강제를 받아 실제에 있어서는 농노적 성격의 계층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전호는 이 시기의 사회 변동과 결부되어 의식의 각성을 보여 경제 외적 관계를 해소시키면서 이익 분배의 합리성을 주장하여 갔다. 먼저, 민전에서 지주, 소작 관계가 순수한 경제 관계로 전환되어 갔고, 이어서 궁방전, 둔전 등 지주권이 강대한 곳에서도 전호들의 항조 운동이 거세게 전개되면서 소작 조건에 개선되어 갔다.
개선된 전호의 소작권은, 첫째, 차경(借耕)이 자유로워졌으니, 특정 지주의 농지를 차경하거나 차경하지 않는 것은 전호의 자유 권리였다.
둘째, 전호는 그의 차경지에 대해 일정한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니, 도지권(賭地權)이라 하여 전호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지주는 전호를 임의로 교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토대로 소작료의 납부 형태는 종래의 분반 타작제〔分半打作制(타조법)〕에서 도조법(賭租法)으로, 이어서 금납제(金納制)로 전환되어 갔다. 전호권의 성장은 봉건적 지주에 대한 치열한 항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 봉건적 지주

봉건적 지주란, 경제적 사적 지배에 정치적 공적 지배가 아울러 가해지는 봉건적 사회에 토대하여 지배 계층이 정치력을 이용, 막대한 토지를 점유하면서 형성된 지주를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토지를 차경하는 전호에 대하여 경제적 지배 관계를 넘어서서 독자적인 정치적 지배력까지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이 시기의 전호는 농노와 같은 예농적 농민으로서, 봉건 지주는 이들을 인격적으로 예속하고 있었으며, 신분적 예

속에 의해 지대(地代)를 일방적으로 수탈하고 있었다.
지주는 전호를 살리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예속, 보호하였으며, 전호는 토지에 부속된 하나의 자연물처럼 토지 그 자체에 긴박되어 있었다. 봉건적 지주의 실체로서는 나말 여초의 호족(豪族), 고려 시대의 문벌 귀족과 권문 세가, 조선 시대의 양반 사대부가 대표적이었다.

▨ 도지권(賭地權)

조선 후기 소작 전호의 권리가 성장하면서 성립한 농토 경작권을 도지권이라 하는데, 17세기 이후에 발달하였다. 즉, 소작농은 도지권에 의해 그 소작지를 영구히 경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주의 승낙을 받지 않고도 임의로 타인에게 자유로이 매매, 양도, 저당, 상속할 수 있었다. 나아가, 도지권이 성립된 토지의 소작료율은 매우 저렴하여, 보통 타조법에서는 생산물의 약 50%였는데 비하여, 도지권 소작지에서는 약 25~33%로 저율이었다.
따라서, 도지권을 가진 소작농은 이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대(轉貸)하여 차액을 취득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중도지(中賭地)라고 하였다. 도지권은 매우 강대하여, 만일 지주가 이를 소멸시키고자 할 때에는 먼저 소작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상당한 대가를 지급하여 이를 매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 하면, 도지권은 본래 소작농이 지주가 농토를 개간, 매수할 때 특정의 노동이나 자본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며, 그 위에 이 시기에는 신분 제도의 붕괴 과정에서 소작농의 신분적,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고 있었으며, 화폐 경제의 발달 속에서 합리적 계산 관계가 성립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 장인의 등록제

봉건 사회에 있어서의 생산 활동은 상품의 판매보다는 관부의 수요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엄격한 구제 속에서 수요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엄격한 규제 속에서 관장제(官匠制)에 의해 이루어 졌다. 따라서, 생산자인 장인은 국가에 등록해야 했고, 그 생산 과정과 생산물의 처분도 국가가 통제하였다.
조선 시대의 장인은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으로 크게 나뉘는데, 경공장은 한성부, 외공장은 각 도의 공장안(工匠案)에 등록해야 했다. 이를 장적 제도(匠籍制度) 또는 성적 제도(成績制度)라 하였다. 이들은 각 관아에 소속되어 전업적으로 제작 활동을 하였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경공장은 30개 관아에 130개 부문에서 2841명이, 외공장은 27개 부문에서 3764명이 종사하고 있었다.

▨ 납포장(納布匠)

관장제하에서 관아에 등록된 장인이지만, 부역에 동원되지 않고 그 대가로서 장포(匠布)만 바치고 나름대로 생산 활동에 종사한 장인을 일컫는다. 관장제하에서 장인은 원칙적으로 공장안에 등록되어 일정 기간동안 부역 동원되어 생산에 종사해야 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장인 등록제가 서서히 무너져 갔으니, 장인들은 생산 활동에 대한 통제와 그들에 대한 불충분한 처우로 인해 관장제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이를 전후하여 민간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관부에서도 수요품을 시장에서 구입하는 편이 유리해지면서 장인의 등록제는 그 의미를 잃어 갔다.


그리하여 18세기 중엽에는 장인의 등록제를 폐기하고, 장인에게서 장포를 받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이로써 납포장은 부역 동원에서 풀려나 자유로이 생산 활동에 종사하며, 생산품을 판매, 처분함으로써 영리를 취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무기나 사기 제조 등에서는 여전히 관청 수공업장이 존속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장인들이 노임을 받고 고용되었다. 관청 수공업장에 고용된 장인의 노임은 납포장이 바치는 장포로 충당되었다.

▨ 상업 자본의 수공업자 지배

수공업자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들은 주문 생산하여 나아가 상품 생산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수공업자들은 독자적으로 도자전(刀子廛), 이엄전(耳俺廛), 신철전(薪鐵廛) 시전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이는 시전 상인에게는 하나의 위협이었다.
이에,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이용하여 장인의 시전 개설을 방해하였고, 통공 정책(通共政策)으로 인해 그것이 뜻대로 안 될 때에는 우세한 자본력으로 장인들의 원료를 매점하거나, 그 제품을 매점하여 장인의 판매 활동을 소비자에게 격리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을 지배해 갔다.

▨ 사채(私採)와 잠채(潛採)

사채란, 민간인의 사적인 광산 경영을 뜻하는데, 합법적이다. 이에 대하여, 잠채란 비합법적인 채광 행위를 말한다. 본래 광산 경영은 사적인 경영이 통제되고, 농민을 부역 동원하여 국가가 직접 경영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피역 저항으로 광산의 개발이 부진하였다. 이에, 이와 같은 문제점을 타결하고 광산 개발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1651년 설점수세법(設店收稅法)을 실시하여 사채를 허용하였다. 설점수세제 아래에서의 광산의 경영은 물주가 채광 시설과 자금을 투자하고, 혈주(穴主)나 덕대(德大)들이 광군(鑛軍)을 고용하여 직접 채광 작업을 지휘하였다. 광군들은 대개 농촌에서 유리된 농민들로서, 농업을 겸한 계절 노동자도 있지만, 또 전업적인 광산 노동자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 같은 사채가 널리 보급되어 갔으나, 설점수세를 명목으로 수령과 아전들의 착취가 심해지자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심산 궁곡 등 관부의 감시가 덜한 곳에서 잠채가 성행하였다. 지방의 토호나 부상 대고들이 수령과 결탁하여 잠채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 시전(市廛)의 특권 폐지

시전 상인들은 정부가 지은 건물에서 관청 수요품을 조달하면서 상거래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은 16세기 이후 상업 인구가 늘어나면서 거리마다 난전이 생겨, 그들의 상업 활동에 제약을 가하자 독점 매매권을 강화하여 금난전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속에서 금난전권을 내세운 시전 상인들의 횡포가 심해짐에 따라, 도시에서의 경제 질서가 경화되는 한편, 물가가 계속 상승하여 도시 빈민층과 영세 상인 및 소생산자층의 생활을 크게 압박하였다.
그러나 사상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시전 상인과 대결하면서 경제력을 강화시켜 갔다. 이에, 정부도 더 이상 시전 상인을 보호할 수 없어 1791년(정조 15) 육의전 이외

의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이로써 도시에서의 사상의 활동이 한층 더 활발해졌다.

▨ 도고의 출현

도고(都賈)란, 조선 후기에 있어서 상품을 매매하거나 독점하는 상행위 또는 상인을 말한다. 도고는 ‘都鳸, 都庫, 都家 ’라고도 하는데, 대동법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개념이다. 도고 상업은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상업 형태로서, 당시의 경제계의 변화, 즉 대동법 실시에 따른 공인 자본의 발달, 상업 인구의 현저한 증가, 금속 화폐의 전국적 유통, 그리고 외국 무역의 발달 등으로 인하여 대두되었다.
시전 상인, 경강 상인, 개성 상인(송상), 의주 상인(만상), 동래 상인(내상) 등은 정부와의 관계 및 그들의 우세한 자본력을 이용하여, 조직적이고 대규모적 도고 상업을 영위하여 막대한 자본을 집적해 갔다.

▨ 객주(客主)와 여각(旅閣)

객주와 여각은 조선 후기 교통의 중심지 또는 사업 도시에서 활동하던 상업 금융 기관으로,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특별히 구분한다면, 객주는 모든 상품을 취급하고, 여각은 소금과 어물을 취급했다고 하며, 또한 객주는 자본 규모가 작고, 여각은 자본 규모가 컸다고 한다. 객주는 다시 보행 객주와 물상 객주로 나뉘는데, 보행 객주는 숙박업을 주로 하였고, 물상 객주는 상업 금융 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컸다. 그들은 위탁 판매업을 하며, 구전을 받았고, 상품의 흥정 매매에는 거간을 내세웠다. 상품을 담보로 자금을 융통해 주며, 어음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 포구(浦口)의 상품 유통

17세기 이후로 서울이 상공업 도시로 변모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전국 각지의 포구도 지역적 유통권의 거점이 되어 갔다.
특히, 선박을 통한 상품 유통은 포구를 상업 중심지로 변화시켰다. 예컨데, 한강의 여러 포구, 낙동강 하구의 칠성포(七星浦), 영산강 하구의 법성포(法聖浦)․사진포(沙津浦), 전주의 사탄(沙灘), 금강의 강경포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한강 포구, 칠성포, 강경포가 가장 발달한 포구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는 이 같은 대포구와 아울러 소포구도 상품 유통의 거점으로 변해 갔다. 19세기에 신설된 포구는 상업 이윤 추구를 위하여 포구주인층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설치되었다. 상품 유통의 기생적 존재인 포구주인층은 점차 상품 유통을 직접 장악하고 도고 상인으로까지 활약하게 되었다.
포구에는 강상과 객주(客主), 여객주인, 포구주인, 강주인 등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강상(선상)과 여객주인의 상업 활동은 경강의 두모포․노량진․용산․마포․서강․뚝섬․양화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였다. 이들 경강 상인은 세곡 및 지대 운송업에 진출하여 성장하였다. 외방읍에서는 역개 주인이 선상 거래를 담당하며 활동하였다.

▨ 송도 사개 부기(松都四介簿記)

개성의 송상(松商)들이 조선 후기에 사용하던 상거래 장부 기입 방식이다. 조선 왕

조의 성립으로 권력권에서 배제된 개성에서는, 일찍부터 지식층까지 상업에 종사함으로써 상거래의 합리적 경영 방식을 개발하였고, 그리하여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복식 부기(複式簿記)를 사용하였다. 이것을 사개 송도 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이라고도 한다.
장부의 조직, 기입 방법, 결산 처리 등이 오늘의 복식 부기와 흡사하며, 그 특징은 대차(貸借)의 관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의인법(擬人法)을 사용한 점이다. 즉, 모든 물건 또는 사실을 사람과 같이 인격을 주어 처리하였다.

▨ 조선 후기의 대외 무역

조선 왕조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 활동은 정책적으로 제한하였다. 대외 무역 역시 엄격히 제한되어, 중국에 대해서는 조공 무역, 일본에 대해서는 왜관 무역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국내의 상공업이 활기를 띠고, 국제적으로도 여건이 바뀌어 무역이 활기를 띠었다. 즉, 조공 무역에 부수하여 왕래하는 사신 행렬들에 의해 사적인 무역이 번성하여 갔다. 특히, 역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한 번의 사행에는 20명 내지 30명의 역관들이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무역에 종사하였다.
사행의 무역 자금은 8포(八包)의 인삼, 즉 80근의 인삼이었다. 후에는 인삼에 대신하여 은(銀)을 휴대할 수 있었다. 8포는 사행원에게 합법적으로 허용한 무역량의 한계였는데,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그 이상의 거래도 흔히 이루어졌다. 또, 사행에게 주어진 무역권이 사상인에게 넘어가면서 무역에의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를 전후하여 민간 무역도 합법화되어 개시(開市)가 열렸는데, 중강, 경원, 회령 등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개시 무역은 정부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차차 사무역이 생겨나 후시(後市)가 발달하였다. 즉, 중강 후시, 책문 후시, 단련사 후시에서는 교역량이 많아, 책문 후시에서는 한 번에 대개 10냥 값어치의 상품이 교환되었다. 무역에서의 결재 수단은 인삼과 은이 주로 쓰였는데, 그로 인하여 국내의 약용 인삼이 부족하고, 국가 재정 기반이 약화되는 문제점을 낳기도 하였다.

▨ 양반 관료의 보수화

양반이란 용어는 본래 문반(동인)과 무반(서반)을 합하여 부른 것이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무의 관료뿐만 아니라, 이들의 가족, 친족까지도 양반으로 지칭되었다. 즉, 신분의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부조(父祖), 증조(曾祖), 외조(外祖) 등 4대 조상 이내에 벼슬한 적이 있으므로 양반으로 인정되었다.
양반들은 신분을 지키기 위하여 관직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양반들은 과거 시험 준비에 일생을 걸고 씨름하였다. 더구나, 16세기 이후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자체적으로 도태 현상이 나타나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특권을 바탕으로 양반 관료 체제를 보다 강화시켰다. 즉, 양반은 토지, 노비, 관직, 군역에 있어서 특권을 누리면서,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명분론이나 중세적 사회법제를 강화하여 폐쇄적 신분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양반 관료의 보수화는 당시 변화하고 있는 기층 사회와의 갈등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 정쟁(政爭)

사림들이 붕당 정치를 희구하여 전전한 정치 풍토를 모색하였지만, 그것은 조선 사

회의 여건상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즉, 조선 사회에서는 벼슬길이 양반의 지위를 유지시켜 주는 길인데, 벼슬길은 좁았으므로, 벼슬길은 자연히 권력과 밀착되어야 했고, 따라서 당파의 분열과 붕당 간의 대립은 자연적이었다.
사림들은 1670년대 신구 세력의 대립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고, 그 후 동인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왕세자의 책봉 문제로 죄를 입은 정철의 문제로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 대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북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가 광해군 때는 대북이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인조 반정 후 서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서인은 건전한 붕당 정치를 추구하여 남인과의 공존을 꾀하였다. 그러던 중 복제(服制)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이 남인과 예송 논쟁을 일으켜, 처음에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집권한 남인은 서인의 숙청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여 청남과 탁남으로 분열되었으나, 다시금 서인이 집권하면서 내몰렸다. 집권한 서인 역시 노장파와 소장파가 대립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갈등을 자아내다가, 영조의 즉위로 노론이 정권을 주도하였다. 붕당 간의 대립은, 처음에는 상호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하였으나, 정쟁이 가열되면서 숙청과 탄압이 심화되고, 보복이 계속되었다.

▨ 향반(鄕班)과 잔반(殘班)

양반 관료들의 대립과 분열로 인해 집권세력이 성립하는가 하면, 정계에서 탈락, 소외되는 양반도 생겨났는데, 이들이 향반과 잔반이었다. 양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대개 생계 유지조차 어렵게 되고, 더 이상 서울에 머무를 수 없어 조상의 사패지(賜牌地)나 연고지를 찾아 낙향하게 되었다. 그래도 향반은 향촌에서 토호적인 기반을 가지고서 어느 정도 행세를 하였지만, 몰락 양반의 대부분은 잔반이 되어 양반의 체통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빈궁한 생활이나마 일하지 아니하고는 생계를 영위하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자연히 현시에 비판적이었고, 그리하여 새로이 보급된 서학, 동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실학이나 양명학을 연구하였고, 민중의 항거에 호응하였다.

▨ 규장각 검서관(檢書官)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 후 궁궐 내에 설치하였던 왕립 문서고의 성격을 지녔던 관청이다. 역대 국왕의 시문, 서화, 고명, 선보 등을 보관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으로 하여금 학문 연구와 도서 편찬의 기능도 맡아보게 하면서 관원으로 제학(提學), 직각(直閣), 시교(侍敎) 각 1명과 검서관 4명을 배치하였다.
특히, 검서관에는 유능한 서얼 출신이 임명되었는데, 이에는 당시 비대해진 지존 벌열 세력을 제어하고, 자신의 심복 세력을 키우기 위한 정조의 특별한 의도로 작용하였다. 여하튼, 서얼의 검서관 임용으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임명되었다. 그 동안 꾸준히 신분 상승을 도모하던 서얼 출신이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중인의 신분 상승 운동

신분 계층으로서, 중인은 역관, 의관, 산관, 율관, 등의 기술관과 서리, 향리, 군교, 서얼 등을 일컫는다.


양반이 상급 지배 신분층이라면, 중인은 하급지배 신분층으로서, 양반이 입안한 정책을 실제로 수행하는 행정 실무자이다. 이들 중인층은 조선 후기의 봉건적 질서가 동요하는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려고 보수화되는 양반 사회에 점차 불만을 가지면서 나름대로 신분 상승의 길을 모색하였다.
영조 때 98인의 호장(戶長)들이 상소를 올렸고, 서얼들은 차별 폐지 운동을 펴 차별 을 다소 완화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일부 중인들은 농민들의 저항 운동이 있을 때마다 정보를 제공하는 등 협력을 아끼지 않으면서 사회 변혁을 시도하였다.

▨ 공노비(公奴婢)의 해방

조선 후기에는 사회 경제 변동으로 봉건적 신분제 점차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피지배층은 신분적 분화를 계속하면서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높여 갔다. 가자 앉은 신분에 있었던 노비도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 실천해 갔다. 노비 분서의 소각, 피역과 도망으로 신분을 해방시켜 갔는가 하면, 법제적으로도 종모법에 의해 지위가 향상되었다.
한편, 정부로서도 노비의 추쇄가 거의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노비에게서 받는 신공(身貢)도 점차 줄어들어 노비제 자체가 의미가 없자, 1801년 궁노비 36,974명, 각사 노비 29,093명 등 합계 66,067명을 해방시켜 양인으로 만들었다.

▨ 향회(鄕會)와 촌계(村契)

향회는 보래 유향과 같은 지배층들이 참여하여 결속을 다지고 유교 윤리에 의해 계서화된 중세적 질서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할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경우 향회는 비록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고는 하나, 교화를 통하여 민과 향촌 사회를 유교 이념하에 통제하고 이를 전제로 수령이나 이서들의 횡포를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 유향, 즉 향회의 구성원 명단을 향안(鄕案)이라고 하였다.
향회는 조선 사회의 성장과 정치적 영역의 확대, 그리고 피지배층의 성장에 따라 그 기능과 성격이 다양해졌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종래 교화 위주의 향촌 자치 체계에 변화가 요구되었으며 나아가 오로지 양반 중심이었던 구성원에도 변화가 야기되었다. 향회에 담세자인 일반 농민을 대표하는 향임들이 참가하여 조세의 합리적인 배분과 징수, 면리 내의 복잡한 부역 징수 기구의 총괄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일부 구성원의 변화가 있다하더라도 향회의 성격이 질적으로 일시에 달라질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기존의 향회를 이끌어 간 것은 신분적으로 대부분 양반에 속하는 지배층이었고, 계급적 속성상 일반 농민의 이해보다는 관의 입장 내지 지주․부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향회는 봉건 권력의 조세 수탈을 정당화하고 공론을 빙자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호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들은 관(양반) 주도의 향회가 더 이상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의 모임을 만들었다. 상주․익산․진주 등 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촌계(村契)․ 민회(民會)․이회(里會)․도회(都會)라 불렸던 민 주도의 향회를 개최하였다.

▨ 향전(鄕戰)의 전개

사족의 향촌 지배를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동기를 만든 것은 신․구 세력 간의 갈

등, 곧 향전(鄕戰)을 통한 향촌 사회 내부의 갈등이었다. 향전은 사족과 사족 간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족 지배 체제의 이완에 크게 작용한 것은 역시 기존의 향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족에 대한 새로운 성장 계층(신향 세력)의 도전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이른바 신향(新鄕) 세력은 기존의 사족 지배 체제에서 소외되었던 양반층이나 서얼, 그리고 사회 경제적적인 발전을 기초로 성장한 요효부민층, 중인등이 포함된 새로운 세력이었다.
향전의 내용과 양상은 각 향촌 사회의 구조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어 지역적으로 매우 다양한 형태였다. 그렇지만 이들 향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이 성장한 세력들이 기존의 사족 지배 체제속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관주도 향촌 지배와 운영 기구였던 향청(鄕廳)․향회(鄕會)․작청(作廳)․장청(將廳) 등이 지배권, 즉 향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향전은 봉건적인 체제 내의 대립이었고 현실적인 힘의 우위를 장악한 신향 세력을 지원, 묵인하는 수령의 입장에 따라 점차 신향 세력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발전되어 갔다.

▨ 부농층의 향권 장악

조선 후기에 상공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농업 경영 방법이 크게 개선되면서 일부 농민들은 농지를 확대하고, 영농 방법을 개선하며, 상품 작물을 재배하며 부를 축적해 갔다. 부를 축적한 경영형 부농층은 그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사서 양반의 신분을 얻어 갔다.
그들은 더 나아가 향안(鄕案)에 들고, 향직을 얻음으로써 향권(鄕權)을 쥐고 농민을 다스리는 실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움직임을 주목한 일반 실학자들은, 이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열어 주고자 권농관(勸農官)을 설치, 역전과(力田科)의 설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심화된 봉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였던 것이다.

▨ 공동납제의 강화

조선 후기 부세 체계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부세가 토지를 중심으로 집중 일원화되는 추이와 총액제, 즉 공동납제(共同納制)를 채택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7세기 이후 부분적인 시행을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실시된 대동법과 18세기 중엽의 균역법, 그리고 전세에서의 비총제(比總制)와 균역에서의 군총제(軍總制, 里定制), 환곡에서의 이환제(里還制) 등이 그 구체적인 내용이다.
각종 부세의 조지 집중 현상은 바로 중세적인 부세 체계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유지시켰던 중세 지배 체제가 해체되어 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같은 조치들은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속에서 최소한의 재정 수입을 보장받기 위한 방책이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당시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 경제의 발달이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부세의 금납화가 가능했던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도결(都結)의 실시

도결은 모든 조세가 금납화(金納化)되고 토지로 집중되면서 전세와 대동세 외의 각종 결역분(結役分)을 따로 거두지 않고 한꺼번에 결수로 묶어서 관에서 직접 거두어들이는 조세 수납 체제를 일컫는다. 이 과정에서 지방 관청은 빈농의 담세 능력상실에

따른 조세의 부족분을 손쉽게 토지에 전가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관으로서는 매우 편리한 조세 수취 방식이었다.
도결의 운영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폐단과 계급 간의 상충된 이해 관계가 발생했다. 우선 지방수령과 이서들은 읍권 장악과 사경제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재지 토호층과 돈독히 결탁한 다음, 부족한 조세분과 관청 재정 명목으로 끊임없이 결가를 높이고 있었다. 이 때, 향회(鄕會)의 추인을 내세워 공론을 빙자한 관의 자의적인 수탈이 행해졌 던 것이다. 일반 농민의 경우 자신들이 주로 담당했던 군역․환곡․자역의 부담이 전결세 부담자 일반에게 골고루 배분된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향촌의 일부 양반들은 차별적인 중세 신분제의 원리로 인해 자신들이 누렸던 전결세의 차등 부과 혜택을 잃게 되었고 종전 자신들과 상관없던 군역세 및 환포(還逋)의 부담을 더불어 지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해당 양반들은 수령에게 불만을 제기하고 그 해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도결 자체가 근본적으로 관의 자의적인 조세 부과에 대응하기 위한 응급적인 조치였고, 수령과 이서들이 부정이 늘어가는 한편, 민이 알지 못하는 상황하에서 도결에 포함되는 계정이 결정되어 결가가 계속 높아졌기 때문에 일반 농민도 그 피해를 크게 입게 되었다.

▨ 재난과 질병의 실태

사회 불안 속에서 농민을 더욱 곤경에 빠지게 한 것은 홍수, 한발과 같은 자연 재해와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 등 전염병의 유행이었다. 홍수 피해 중 큰 것은 1729년 함경도에서 1천여 명이 사망했고, 1832년 전국적으로 8천여 호의 민가가 유실되었으며, 1845년 청천강 이북에서만 4천여 호가 유실되고, 500여 명이 사망하였다.
한편, 한발에 의한 피해는 1733년 40만여 명, 1729년 46만여 명, 1809년 840만여 명의 기민을 낳았다. 한편, 전염병으로 1699년 25만여 명, 1749년 50만여 명, 1829년 수십만 명이 사망하였다.

▨ 화적(火賊)과 수적(水賊)

지배층의 무능과 비리에 직면한 민증들은 비밀결사적 저항을 시도하든가 도적이 되어 갔다. 대표적인 비밀 결사로는 검계(劍契), 살주계(殺主契)가 유명하였고, 일부 유민은 명화적(明火賊), 수적(水賊)으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각 지방에서는 단(團)이란 이름을 가지 비교적 규모가 큰 범죄 조직도 횡행하였다.
서울의 마포 일대에서 활동한 서강단(西江團), 평양 일대에서 활동한 폐사군단(廢四郡團), 유민으로 형성된 유단(流團), 광대, 재인 등이 형성한 채단(彩團) 등이 그것이다.

▨ 이양선(異樣船)의 출몰

이양선이란, 우리 나라 연해에 나타난 외국 선박으로, 모양이 종래 우리 나라의 배와 다르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단선(異團船), 황당선(荒唐船)이라고도 하였다. 우리 나라 기록에 의하면, 1735년(영조 11) 황해도 초도에, 1780년(정조 4) 전라도 흑산도에, 1797년 (정조 21) 경상도 동래에 이양선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후, 1832년 영국의 로드 암허스트 호가 비로서 공공연히 무역을 요구해 왔고, 1845년(현종 11)에는 사마찰 호가 연해를 측량하고 돌아갔다. 이를 전후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이양선이 연해안에 나타났는데, 이 같은 움직임은 천주교의 유포와 더불어 불안해 하고 있던 당시의 민심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 정감록(鄭鑑錄)의 유포

정감록은 조선 중기에 민간에 성행한 예언서이다. 조선 이후의 흥망 대세를 예언했는데, 이씨의 한양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이, 그 다음 조씨의 가야산이 흥성할 것이라 하였으며, 그 중간에 재난과 화변, 세태, 민심 등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서는 사회가 변동하고, 기조의 가치 질서가 무너지는 속에서 민심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 미륵 신앙 운동

불교 신앙의 한 형태로서, 먼 장래에 미륵불이 나타날 것이며, 그 때에 이 세상은 낙토(樂土)로 변할 것이고, 미륵불은 부처님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모두 구제해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가 혼란하고 민심이 불안할 때 주로 세력을 폈다.
조선 후기의 현실은 흉년, 질병, 재해 등으로 절망적이었고, 그리하여 민중들은 불안과 초조와 고통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들은 자연히 이상 사회의 도래를 약속하는 미륵 신앙에 쉽게 귀의하였다. 심지어(1688년 일부 무리들은) 살아 있는 미륵불을 자처하고, 광제 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우며 민심을 현혹하기에 이르렀다.

▨ 신유박해(辛酉迫害)

진보적 지식인들을 수용하여 새로운 권력 구조를 시도하였던 정조 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온건한 편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자, 새로이 정권을 잡은 보수 세력은 정조가 불안해했던 정치 현상을 일신하고, 보수적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자, 1801년 진보적 정치 세력과 그들과 연계된 천주교도에 대하여 대규모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하는데,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가 처형 혹은 유배되었다. 천주교와 직접적 관계가 없었던 실학자 박지원, 박제가 등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은 지 15년 만에 강행된 신유박해에서 500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천주교가 급속히 전파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유박해가 종교적 탄압일 뿐 아니라 정치적 탄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대규모의 박해가 가해졌는데, 부패, 타락한 양반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단행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교세는 하층민의 호응을 받아 가며 계속 확대되어 갔다.

▨ 서학의 과학성과 종교성

서학이란 용어는, 16세기 이래 중국과 조선에 전래된 서양의 과학 기술과 사상 체계를 뜻한다. 당시, 동양에 전파된 서양의 과학 기술은 천문학, 지리학, 수학, 의학 등의 분야를 포괄하고 있었고, 사사의 측면에서는 스콜라 철학과 카톨릭 신학을 기초로 한 기독교 사상이었다. 서학은 중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한 서학서(西學書)에 의해 소개되었다.
서학의 과학성은 기술 관료들의 천문, 역산에 대한 효용성으로 주목을 받았고, 실제 만국 지도, 천리경, 자명종 등은 의식의 전환에 기여하였다. 한편,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재야 지식인들은 학문적 호기심으로 서학의 종교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새로운 가치 체제에 동의하여 신앙 운동으로 이끌었는데, 그것이 전통적 가치 체계와 대립하면서 탄압을 받자, 동일한 범주 안에서 이해되던 서학의 과학성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784년 이후에는 서학이라 하면 천주교 신앙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 동학의 혁명성과 민족적 성격

동학은 잔반 출신 최제우가 세도 정치하에 사회 추세를 통찰하고, 만연하는 천주교에 대항할 민족적 원리를 찾는 구도 활동(求道活動)을 편 끝에 창도한 종교이다. 동학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현세 구복(現世求福) 사상, 그리고 후천 개벽(後天開闢) 사상을 논리 구조로 하고 있었다.
즉, 동학 사상의 내용은 봉건적 세계의 종결을 확인하며, 봉건적 질서와 서양 세계의 도전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세계의 등장을 주장하며, 그 새로운 세계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동학은 봉건 사회 말기의 전환 시대를 이끈 사상으로서, 민족적, 민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동학의 교단 조직

동학의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교리 자체의 특성과 국내외적 위기 상황이 작용하였지만, 교단 조직에 힘입은 바도 컸다.
일찍이 최제우는 경주, 영덕, 영해, 울산 등지에 접(接)을 둔 바 있었는데, 최시형은 보다 조직을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교구인 포(包)제를 행하고, 각 포에 접주(接主)를 두어 통솔하게 하였다. 접주 중에서 세력이 있는 자를 대접주(大接主) 또는 도접주(都接主)라 하였다.
그리고 사무 처리를 위해 교장(校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의 6임(六任)제를 설정하였고, 총집회 기관으로 도접주에 속하는 도소(都所)를 두었다. 이와같이, 교단 조직이 유기적으로 질서 정연하여, 후에 교조 신원 운동과 동학 농민 운동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 임술 농민 봉기(壬戌農民蜂起)

세도 정권의 부패와 비리에 항거한 농민의 불만은 1862년 전국적으로 폭발하였다. 그리하여 임술년(壬戌年)에 일어났다고 하여 임술민란이라 하는데, 진주에서 처음으로 폭발하였다고 하여 진주민란이라고도 한다. 한편, 민란이란 용어는 지배층의 입장에어 볼 때 백성들이 난동을 저질렀다는 뜻에서 쓴 것이라고 하여, 농민 운동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임술 농민 봉기하고도 한다. 이른바 민란은 대체로 농토에서 쫓겨난 농촌 임노동자, 지주의 지대 수탈에 신음하던 영세 소작농, 높아지기만 하는 조세 부담 때문에 생활고에 허덕이던 영세 자작농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항쟁이었다.
주로 충청, 경상, 전라 등 삼남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멀리는 함경도 함흥, 제주도의 제주 등에서 많을 때에는 수만 명, 수천 명의 농민들이 참가하였다.

4. 문화의 새 기운



▨ 삼강 오륜(三綱五倫)

삼강 오륜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규제하는 유교의 기본적 가치 체계로서, 문벌 양반 중심의 봉건적 신분제를 고정화하고,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확립함에 기여하였다. 특히,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라 하여,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제시하였다. 오륜은 삼강에 나타난 덕목을 구체적으로 발휘함에 있어서의 실천 지침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 영남 학파(嶺南學派)의 성립

영남 학파는 지역적으로 영남 지방, 즉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리학의 학파를 말한다. 주로 퇴계(退溪)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문도로 구성되었다. 이황은 정치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많아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정구 등 많은 제자를 키웠다. 그 중에서 김성일, 유성룡, 정구 등은 다시 여러 제자를 두어 퇴계 학맥을 이었다. 김성일의 계통을 호파(虎派), 유성룡의 계열을 병파(屛派)라 하는데, 후에 정구의 제자 허목(許穆)이 기호에 자리잡으면서 이익, 안정복으로 학통을 수립하여 기파(畿派)를 형성하자, 이에 대립하여 호파와 병파를 아울러 영파(嶺派)라고 하였다.
한편, 남명 조식의 제자로는 오건(吳健),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이 유명하였는데, 이황의 문도를 퇴계 학파라 함에 대하여 남명 학파라 하였다. 또는 지역적으로 낙동강 동쪽에 거주한 퇴계 학파를 강좌 학파(江左學派), 그 서쪽에 거주한 남명 학파를 강우 학파(江右學派)라고도 하였다.

▨ 기호 학파(畿湖學派)의 성립

기호 학파란, 지역적으로 기호, 즉 경기,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리학의 학파를 말한다. 주로 율곡(栗谷) 이이와 우계(牛溪) 성혼의 문도로 구성되었다. 이이는 정치에 혁혁한 공을 남겼지만, 제자 양성에도 기울여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정엽(鄭曄), 이귀(李貴) 등을 키워 냈다. 김장생은 다시 송시열, 권상하로 학통을 잇게 하여 조선 후기 학계, 정계에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를 율곡 학파라 하였다.
한편, 성혼은 평생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이와 가까이하면서 제자를 많이 키웠으니, 황신(黃愼), 윤황(尹煌), 이항복(李恒福) 등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을 우계 학파라 하였다. 우계 학파는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으로 이어지면서 윤씨의 가학(家學)을 성립, 소론 계열로 분류되었다. 율곡 학파가 권력 기반을 바탕으로 정통 성리학의 명분을 교조화하자, 우계 학파에서는 양명학(陽明學)에 관심을 두기도 하였다.


▨ 유기론(唯氣論)과 유리론(唯理論)

체제 이데올로기로서 봉건적 조선 사회의 운영에 기여한 성리학은 17세기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교조주의적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보여, 일부 진보적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에, 18세기 성리학계에서는 성리학의 새로운 도약으로서 호락 논쟁(湖落論爭)이 전개되어, 탐구의 대상이 인간에서 자연에까지 확산되었으며, 마침내 유기론(唯氣論)과 유리론(唯理論)까지 제기하여 그 철학적 깊이를 더했다. 유기론은 우주 만물의 구성 요소로 기(氣)의 절대성을 내세운 기일원론(氣一元論)이며, 유리론은 이에 대하여 이(理)의 절대성을 내세운 이일원론(理一元論)이다.
유기론의 대표적 학자인 임성주(任聖周)에 의히면, 자연의 본질은 물리적인 기(氣)로서, 자연계의 형성과 운동 변화는 모두 기(氣)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성품 역시 기(氣)의 작용이며, 그것이 곧 기질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최한기(崔漢綺)는 유기론에 토대하여 독특한 운기화(運氣化)의 경험 철학을 내세웠는데, 그의 철학은 개화파 사상가들이 문명 개화를 주장함에 있어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한편, 유리론은 이(理)의 절대성을 내세운 이일원론으로서 기(氣)는 이(理) 앞에서만 활동하고, 이(理)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기(氣)의 독자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리론의 대표적 학자는 기정진(奇正鎭)으로서, 이(理)의 입장에서 호락 논쟁을 종합해 보고자 하였는데, 이는 위정 척사 운동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 성리학의 교조성(敎條性)

봉건적 지배 질서 편성에 우선적으로 활용된 성리학은, 16세기 이래 사림 세력이 집권하여 정치의 주체 세력이 되면서 그들 중심의 봉건적 신문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그런데 당시 역사의 전개는 체제의 변질을 불가피하게끔 기존 질서의 모순을 노출하고, 기층 사회에서는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은 이 같은 역사적 상황에 신축성있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그 한계와 문제가 지적되기에 이르렀다. 오히려, 정통 성리학자들은 그와 같은 비판을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일체의 비판을 배타적으로 일축하고, 주자(朱子)―율곡(栗谷)―우암(尤庵)으로 이어지는 주기적(主氣的) 이기 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절대적으로 지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성리학은 그 해석에 있어서 획일적, 폐쇄적인 성향을 보였고, 특정 이론만이 존재하는 교조성(敎條性)이 강화되어 갔다.

▨ 유학의 반역자

정통 성리학이 보수화되고, 교조화 되면서, 유학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비판 세력은 유학을 어지럽히는 무리하고 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 즉 유학의 반역자라 하였다.
예컨데, 숙종 때의 윤휴, 박세당(朴世堂)등은 교조화된 주자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였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양명학, 서학, 동학 등도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어 철저히 배척되었다.


▨ 지행 합일 사상(知行合一思想)

양명학의 기본 사상으로서, 알았다고 하여도 행하지 못하였다고 하면 그 알았음은 참앎이 아니니, 앎이 있다면 곧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知)와 행(行)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먼저 알고 이어서 행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며, 알고서 행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면서 알고서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앎이 아니라는 것이다.

▨ 양명학의 수용과 강화 학파(江華學派)의 형성

양명학의 전래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6세기 말 이미 양명학의 저술인 전습록(傳習錄)이 전해졌고, 이황이 이에 대한 비판을 한 바 있었다. 성리학의 열기로 그 연구가 뚜렷하지 못하였으나, 성리학의 교조성에 반발한 일부 학자들은 이에 관심을 보였으니, 남언경(南彦經), 이요(李徭), 이항복(李恒福),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드러내 놓고 양명학을 논하지는 못하고 은밀히 전승하였는데, 그것은 양병학이 정통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양명학이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고, 하나의 학파를 이룬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의 소론출신 정제두(鄭劑斗)에 의해서였다. 그는 맹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양명학적 심학관(心學觀)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는 대립된 입장에서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제시하고, 일체의 학문이 양지(良知)를 파악하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학설의 체계화와 아울러 후진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강화를 근거지로 하여 이광사(李匡師), 정순일(鄭盾一), 신위(申緯) 등 많은 제자를 두어 강화 학파를 형성하게 하였다. 이광사는 이영익, 이충익으로, 다시 이시원을 거쳐 19세기 말에는 이건창, 김택영, 박은식 등으로 그 학맥이 이어졌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론과 달리 그 실천성이 약했다.

▨ 실사구사(實事求是)의 개념

사실에 토대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으로 한서(漢書)에서 인용되었다. 성리학과 양명학이 공리 공론(空理空論)과 독단 해석(獨斷解釋)에 치우쳐 유학 본래의 사명을 이탈하자, 그 반동으로 청나라 고증학파(考證學派)가 내세운 표어이다.
문헌학적 고증의 정확성을 존중하는 과학적 및 객관적 학문 태도를 말하는데, 그 대상은 주로 경학(經學), 사학(史學), 지리학(地理學), 금석학(金石學), 음운학(音韻學). 문자학(文字學) 등으로서 17, 8세기에 우리 나라에도 전해져서 실학파의 학자들이 학문의 태도로서 이를 표방하였다. 특히, 경전, 고서, 금석문에 대한 철저한 고증에 힘쓴 김정희(金正喜) 등의 국학 연구자들을 실사구시 학파라고도 한다.

▨ 신분제 비판론

실학자들은 신분제를 부정하고 그에 입각한 통치 원리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사회 신분의 구성이 변동하고 있는 현실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17,18세기에 사회․경제상의 변동은 양반층, 농민층의 분해를 촉진시켜 신분의 이동과 혼란을 자아내었다. 몰락하는 양반이 속출함에 따라 이들은 신분은 양반이면서도

생계의 유지를 위해서는 농사를 직접 짓거나 아니면 타인의 토지를 빌려 소작하는 경제적으로는 일반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농민들 가운데서는 몰락하는 농민이 절대적이었으나, 그런 속에서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상승하는 농민들도 있게 되었다. 부유한 농민들은 납속(納粟)․ 군공(軍功) 등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신분을 상승하거나 아니면 족보의 위조, 호적의 위조 등의 방법을 통해서 상급 신분으로 진출하였다. 경제력에 의해 신분이 좌우되게 된 샘이었다.
실학자들의 신분관이 신분제의 부정과 그 논리를 같이하고 있음은 그러한 역사 전개의 추세를 긍정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이론화시킨 데에서 진보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유형원은 신분제 유지의 초석인 노비제의 폐지를 조심스럽게 강조하고 이익도 그와 같은 사상을 가졌다. 노비는 양반 계급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양반제가 무의미한 속에서 노비도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실세한 양반들의 횡포와 사회 문제를 양반 제도에 대한 비판을 가하여 그들의 특권이나 체면유지의 비합리적인, 비인간적인 면을 매도하였다.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은 그것을 토대로한 지배 예속 관계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왕과 양반에 의한 대민 텅치는 하늘의 도에 따른 것으로 설명되고 그에 의해 군사, 소인이 구별되어 전자가 후자를 다스린다는 논리로 무장된 통치 이론․신분 이론이 부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민의 구분이 단순히 직업의 차이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상이 나오고, 이런 분위기에서 통치자의 권력이 사실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합의에 위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근대적인 주권 재민(主權在民)의 구상이 나오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제창한 권력론(權力論)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다.

▨ 유형원의 균전론(均田論)

유형원은 양반 토호들의 토지 겸병 현상이 심해지고 농민이 농토에서 점차 유리되어 가자, 토지 국유를 전제로 국가가 완전한 소유권을 발동하여 모든 농민에게 균일하게 토지를 주자고 하였다. 즉, 농민 장정 1인당 1경(頃)의 토지를 분급한다는 것이니, 16경은 40두락 정도로 공부(公賦)를 내고 가계(家計)를 꾸리는 데 최소한의 면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분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어서, 사대부에게는 보다 특별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 이익의 한전론(限田論)

이익은 빈부의 차이가 날로 확대되는 속에서, 토지 국유의 원칙을 내세워 토지의 사유(私有)를 원칙적으로 배격하고, 토지에 대한 절대적 처분, 관리권은 어디까지나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한 가호의 토지 면적을 제한하여, 제한된 영업전 외의 농토는 무제한 자유로이 매매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농과 빈농, 대토지 소유자와 전호의 토지 보유가 점차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점진적인 개혁안이었다.

▨ 정약용의 여전론(閭田論)

정약용은 농가 30가호를 1여로 하고, 여장(閭長)의 지휘하에 공동 경작하고, 세납을 공제한 수확을 여민(閭民)들의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

(士)이 경우, 농업 개선에 기여하는 경우에만 농민의 10배 정도의 토지를 주고, 그렇지 않으면 농․공․상 등 생업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전제가 보급되면 전국 농민의 자산이 비슷해져서 토지 겸병이 일어나지 않으며, 노동량에 의해 그 보수가 책정되므로 근로의 습관도 양성된다고 보았다.

▨ 성호 학파(星湖學派)의 형성

실학자들은 그들의 사상적 경향에 따라 몇 개의 유파로 분류되는데, 제도 개혁에 관심이 크다고 하여 경세 치용 학파(經世致用學派), 부국 강병에 힘을 쏟았던 이용 후생 학파(利用厚生學派), 그리고 사실 확인에 노력하던 실사구시 학파(實事求是學派)등이 그것이다. 한편, 농업에 관심이 크다고 하여 중농 학파, 상공업에 관심이 크다고 하여 중상 학파라고도 한다. 또, 그들의 한문적 맥락에 따라서 성호 학파, 연암 학파로 구분하기도 한다. 성호 학파는 농촌 문제에 관심이 컸던 성호 이익의 후진들로 구성되는데, 역사의 안정복, 지리의 윤동규, 수학의 신후담, 경학의 이병휴 등이 직접문인이고, 그 밖에 이중환, 이벽, 권철신, 정약용 등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연암 학파에는 연암 박지원(朴趾源)을 따르는 학자들로 구성되었는데,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이 뜻을 같이하였다. 연암 학파는 이영 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에 속하기도 하였다.

▨ 북학파의 활동

청나라의 서울 북경(北京)을 내왕하면서 그 곳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고자 주장한 실학자들을 북학파라 하는데, 북학(北學)이란 북경을 중심으로 발달한 이용 후생의 실용적 학문을 뜻하며, 기술의 혁신, 생산과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북학파들은 대부분 북학을 찬양하고, 그 실천에 힘썼다.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담험집,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등은 대표적인 북한 서적이었다.

▨ 상업 진흥론

실학자들은 상공업의 진흥론도 제기하고 있었다. 본래 상공업은 말업이라 하여 중세 사회에서는 동서를 막론하고 천시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그러한 중세 경제 체제가 변동하는 속에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이러한 변화에 수반하여 토지 없는 양반들의 숫자도 증가하고 있었다. 이들 지식층의 몰락은 놀고 지내는 사람의 양적 증거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에 토지 개혁론을 구상하고 있던 실학파들 가운데서는 유식인들 특히 그 중에서도 양반들의 전업을 주장하였고, 이와 아울러 상업을 일으키고 생산 도구나 유통 수단을 개발하고 나아가서는 수공업의 발전을 꾀하고 기술의 개발 내지 도입에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다.
영조 때의 학자인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에서 상업의 진흥, 화폐 유통책을 특별히 강조하고 이를 신분제와 관련시켜 사․농․공․상의 4민은 직업에 따른 구분이 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또, 상정의 개설, 우마차의 이용, 공업․수산업․과수업․목축업 등을 통한 증산, 소상인의 합자에 의한 자본 확대 방안도 거론하였다.
유수원은 특히 놀고먹는 양반을 비판하고 장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지금 양반이 명분상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부꾸러워 하지만 그들의 비루한 행동은 상공업자보다 심한 자가 많다. 학문이 없어도 세력만 있으면 부정하게 과거에 합격하고, 그렇지 않으면 음직을 바라거나 혹은 공물의 방납과 고리대를 하거나 노비를 빼앗기 위한 소송이나 벌임으로써 생활을 영위하거나 또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수령자리를 얻어 토색질을 하고 전지와 노비를 많이 가짐으로써만 가계를 이룰 수 있으니 이것이 모두 비리가 아닐 수 없다. …… 상공업은 말업이라 하지만 본래 부정하거나 비루한 일은 아니다. 상인 스스로 재간 없고 덕망 없음을 알고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물품의 교역에 종사하며, 남에게서 얻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먹고사는데 그것이 어찌 천하거나 더러운 일이겠는가? ”

▨ 유교적 이상 국가론(理想國家論)

유교 사회의 기본 경제 사상은 중농주의(重農主義)와 균산주의(均産主義)로서, 이를 맹자는 농자지 천하지 대본(農者之天下之大本)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봉건 국가의 집권을 강화하고, 그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는 토지에의 농민의 긴박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유교 사회에서는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해 농민 보호책을 강구하는 동시에, 여타의 산업은 적당히 규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유교사회에서는 농민이 열심히 일하면서 태평 성가를 부르는 경우를 가장 안정되고 이상적이 사회라고 여겼다.

▨ 국학(國學)의 형성

국학이란, 한국학(韓國學)을 뜻한다. 이 같은 개념이 사용된 것은 한국적인 것이 말살되어 갈 때, 한국적인 것을 새삼 찾아서 살려 나가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20세기 초에 나라를 앓은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당시는 조선학(朝鮮學)이라 하였다.
한국의 역사, 언어, 지리, 풍토, 정치, 사회, 경제 등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였다. 국학의 형성은 조선 후기에 두드러졌는데, 당시 모화적인 중국 의존에서 탈피하여 자주적 움직임을 펴고자 한데서 형성되었다. 한족(韓族)의 중국이 그 영향력을 강력히 행사할 때에는 국학의 움직임은 대체로 둔화되나, 조선 후기에 정치적으로 한족에 대해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였고, 사상적으로 성리학이 비판을 받으면서 모화 사상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면서 국학은 위세를 부였다.

▨ 고증 사학(考證史學)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객관적, 실증적 입장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종래의 허구와 오류에 싸여 있던 한국사의 이해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고자 조선 후기에 발달하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치윤의 해동역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은 대표적인 고증 사학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증빙되지 아니한 것은 믿을수 없다고 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에 토대하여 내외의 여러 문헌을 섭렵, 귀납적인 역사 서술을 시도하였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야사, 일기, 문집 등 400여 종의 문헌을 인용하여 증거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 위항인의 문학 활동

위항이란, 조선 시대에 있어서 중인(中人), 서얼(庶孼), 서리(胥吏) 등의 중서(中庶) 신분층을 통칭한다.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의 움직임과 더불어, 이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의식의 확대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의식에서 중서층의 유래를 밝히고, 자신들의 사적을 기록하면서 문학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 나갔다.
특히, 정조가 규장각이나 숭문원에 이들을 중용하면서 그 재능을 발휘하였고, 영․정조의 문화 진흥 정책은 위항인들에게까지도 문인의 배출을 촉진하였던 것이다. 외국과의 교류 속에서 역관들의 문학 활동도 돋보였다.
대표적인 위항 문학 작품으로는 홍태세의 해동유주, 소대풍요가 유명하다. 이들 위항인들은 동호인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으니, 천수경, 조수삼 등은 ‘松石園詩社’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 사설시조의 발달

사설시조란, 시조 유형의 하나로서, 평시조, 엇시조와는 달리 그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초장, 중장, 종장이 무제한으로 긴 시조이다.
특히, 중장이 길어서 대화체나 이야기체로 된것도 있다. 시조는 본래 단가(短歌)의 현실을 띠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장가 형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뿐만 아나라, 그 내용도 사실적 기법으로 중서층이나 평민들의 소박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 판소리의 의미

조선 후기 서민 문학 중 변화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거기서 삶의 지표를 나름대로 형성하고자 한 가장 두드러진 예가 판소리이다. 판소리의 형성 시기는 대체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로 잡을 수 있다. 판소리 광대는 고기잡이철이면 어촌으로, 추수기면 농촌으로 돌며, 구전 설화나 사실들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이 직접 사서화한 판소리 사설을 창과 아니리, 발림 등을 통하여 연희했다. 이 때, 판소리 광대는 그들 계층의 현실의식뿐만 아니라 중심 관객이었던 서민 계급들의 현실적 문제 의식을 수용하여 사건을 이끌어 가고 인물들을 형상화함으로써 판소리의 현실 수용의 폭을 넓혔다.
예컨데 ‘흥부전’은 흥부와 놀부의 대조적 성격과 처지를 드러내었다가 마침내 화해하게 함으로써 현제간의 우애를 주제로 정립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 당대 현실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어 소설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 준다. 먼저 온갖 품팔이를 하다가 마침내 매품까지 팔게 되는 흥부의 형상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무토(無土)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 준다.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놀부의 형상을 통하여 돈에 눈뜨기 시작한 당대 사회와 그 속의 이해 타산적인 인간 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흥부전’은 이러한 현실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 사이에는 차마 저버릴 수 없는 윤리인 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이 있고 또 있어야 함을 역설했다. 다시 말해, 윤리를 강경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구체적 일상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보여 준 것이다.


▨ 진경 산수화

실경 산수화라고도 하는데, 산수의 모습을 실제의 경치 그대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종래의 산수화는, 작가에 의해 주관적으로 추상화되고 이념화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자의식이 성장하면서 한국 고유의 산수를 개성 있게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사람은 18세기 초의 정선이었다. 그는 각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한국의 산이 주로 중량감 있는 바위산임을 알고, 이를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 민화의 성격

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널리 유행한 그림으로, 정통 회화의 조류를 모방하여 생활 공간의 장식 및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되었다. 속화(俗畵)하고도 하는데, 여염집의 병풍, 족자 또는 벽에 붙여졌다. 대부분이 그림 공부를 제대로 받지 못한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창의성보다는 되풀이하여 그려짐으로써 형식화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되었다.
민화는 조선 후기 민중 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경제적 부를 축적한 새로운 계층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운데서 널리 보급되었는데, 민중 사회의 자유 분방한 형식미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말하자면, 민화는 조선 후기 사회 변동과 더불어 의식이 성장한 민중 스스로의 건강한 생활 공간을 창출하려는 자주적 문화 정신의 결실이다. 민요, 민담, 탈놀이, 장승 등과 같이 민중의 생활 감정이 민화에도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다. 민화의 매력은 건강하고 솔직한 삶의 전서와 자유 분방한 아름다움을 전해 줌에 있는데, 그것은 민중들이 독자적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는 청구도, 대동지지와 더불어 김정호가 펴낸 지리학의 3대 역작이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앞서 제작한 청구도의 자료가 부정확한 점을 발견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27년 동안 현지 조사를 철저히 하여 1861년 매우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로서 제작된 것이었다. 우리 나라 전역을 위도선에 따라 2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16만 분의 1축척으로 그렸는데, 지도에 제시된 기초 체계를 정리하고, 실측에 토대하여 정밀히 제작하여 지도의 내용 구성과 묘사 수법, 도면 편성에 있어서 당시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지도였다. 대동여지도의 정밀성은 오늘의 지도와 비교하여 볼 때,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한편, 대동여지도는 당시 유통 경제의 발전에 부응하여 정확하고 풍부한 공간 지식을 제공하고 있으니, 상인들이 실제 이용하기에도 적합하였다.
즉, 대동여지도는 과학성, 정밀성, 실용성에 있어서 그 차이가 높이 인정되는 근대적 지도였다. 그리고 지도를 판목에 새겼기 때문에 많은 부수를 인쇄할 수도 있었다.

▨ 실학자(實學者)들의 기술관

실학은 실증(實證), 실용(實用), 실리(實利)의 현실 기여 의식을 담은 학문이었으므로, 실학자들은 기술을 천시하던 전통적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기술관을 가졌다. 특히, 북학론자들은 선진적 기술이 인간 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음을 청나라 북경에 가서

직접 보았고, 그 결과 이를 취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오랑캐의 것이라도 이것이 나라와 민족에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여 개방 의식을 보여 주었다.
▨ 제국주의 시대

15세기 이래로 전개되었던 식민지 쟁탈 경쟁은 18세기 말 이후에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각국은 국내의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되어 식민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 혁명의 진전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본국의 공업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확보와 상품의 시장 또는 이민 대상지로서의 식민지가 개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달이 독점 자본주의 또는 금융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잉여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자본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특히, 1870년대 말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극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이 격렬해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19세기 말의 식민지 경쟁은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대외적 위신과 관련되어 각국은 식민지 확보를 가장 중요한 우선 정책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대상 지역도 전세계의 후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각국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보 정책과 이와 관련되어 경쟁 국가에 대항하는 정책을 세계 정책이라고 하고, 이러한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라고 하며,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1870년대 말부터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
지 진출은 경제적 종속과 함께 정치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후진 지역의 전통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변화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각국이 근대화 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적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이는 무력 충돌로 확대되어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19세기 말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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