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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님 너무감사 제가 숙재..
정말 알고 싶었던 내용..
좋은 정보 잘 보고 갑..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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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1. 현대 사회의 성립

▨ 건국 준비 위원회의 조직
8.15광복 직전에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건국을 준비한 세력은 충칭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옌안의 조선 독립 동맹, 국내의 조선 건국 동맹 등이었다. 이 중에서 8.15 광복과 동시에 가장 먼저 건국을 준비한 세력은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 건국 동맹이었다. 이 단체는 1944년에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 결사였다. 여운형은 조선 건국 동맹을 중심으로하여 안재홍 등 신간회 계열의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구합하여 8.15 광복과 더불어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건국 준비 위원회의 중앙 조직은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 총무부장에 최근우, 재무부장에 이규갑, 조직부장에 정백, 선전부장에 조동우, 경무부장에 권태석 등이었다. 그러나 이 건국 준비 위원회에 송진우 등 민족주의 우파 세력은 참여하지 않았다.

▨ 카이로 회담의 한국 독립 결의
1943년 11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 제스의 3거두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 3거두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라고 선언하였다.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국의 독립이 결정되었으나, 그 시기가 문제였다. 원래 홉킨스가 루스벨트에게 제출한 정책 건의서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로 되어 있었는데, 루스벨트가 ’적당한 때에(at the proper moment)‘로 고쳤던 것을 처칠이 ’적절한 시기에 (in due corse)‘라는 영국 수상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으로 재차 교정하여 카이로 선언에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로 선언은 독립을 고대하던 한국인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으나, 그 후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 이유는, ① 트루먼 회고록에 의하면 루스벨트는 한국 독립의 적절한 시기를 ‘약 40년으로’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② 소련의 동의와 협조가 선결 조건이었던 점, ③ 극동의 주도 세력을 국민당 정권이 장악할 것이라는 가정, ④‘적절한 시기’까지의 한국 통치 기구의 형태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등이었다. 그리고 이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결의는 그 후 테헤란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 회담에서 스탈린의 원칙적 동의를 얻었다.
이 결의는 그 뒤 포츠담 선언에서도 재확인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은 이미 약속된 것이었다.

▨ 미국과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
1945년 8월 9일,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둔 시기에 소련은 대일전에 참전하여 150만의 병력으로 만주와 한반도 동북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한반도에 침입한 소련군은 8월11일에 웅기를 점령하고, 12일에는 나진, 14일에는 청진과 나남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한 후 소련군은 8월 21일에 함흥과 원산에 들어왔고, 23일에는 개성에, 24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한편, 미군은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하였고, 9월 9일에 일본 총독으로부터 서울에서 항복을 받았다. 미군은 9월 13일에 개성에 진주하였고, 16일에는 부산에, 27일에는 전주에, 그리고 10월 5일에는 광주에 진주하였다. 이리하여 북한에는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고, 남한에는 미국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민족이 열망하던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의 실현이 어렵게 되었고, 미․소의 군대가 실시하는 군정이 민족 분단을 점차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 독립 투사들의 귀국
1945년 8월 15일에 민족의 광복을 맞은 후, 국외에서 독립 투쟁을 계속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들은 서둘러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활약하던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보다 먼저 귀국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10월 16일에 미군 비행기를 타고 유력한 독립 투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귀국하였다.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와 임정 요인들 제1진은 미국의 반대로 임시 정부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11월 23일에 미군 비행기로 귀국하였고, 김원봉 등 임정의 제 2진은 12월 1일 귀국하였다. 한편, 조선 독립 동맹의 김두봉, 최창익 등은 12월 1일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 모스크바 3상 회의와 신탁 통치 문제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미국 국무 장관 번즈는 소련 외상 몰로토프가 제안한 소련측의 수정안을 미국측의 제안과 절충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12월 27일에 한국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회의 결정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좃6을 민주주의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가급적 속히 일본의 조선 통치으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해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 인민의 민족 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취할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② 조선 임시 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안을 연구, 조정하기 위하여 남조선 미 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 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 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의제 작성에 있어, 공동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들이 작성한 의제는 공동 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의 4국 정부에 그 참고에 공(供)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③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가치 발전과 독립 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 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 위원회가 수행하되, 공동 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 통치의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④ 남북 조선에 과련된 긴급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 남조선 미 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 관구의 행정, 경제면의 항구적 군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신탁 통치는 도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독립할힘을 기를 때까지 강대국이 일정 기간 통치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식민지 지배와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의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은 한국민에게는 모욕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을 논의하기 위하여 1946년 3월에 서울의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미․소 공동 위원회는 임시 정부 수립을 함께 협의할 정당, 사회 단체를 선정하는 문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리하여,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5개월에 결렬되고 말았다. 그리고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 의 의견 대립으로 1947년 10월에 결렬되었다.

2. 대한 민국의 수립

▨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설치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소련은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이 모스크바 협정에 위반된다고 반대하였으나, 유엔 일반 위원회는 12 대 2로, 유엔 정치 위원회에 회부하였다. 유엔 정치 위원호에서 미국은 선 정부 수립, 후 외군 철수를, 소련은 선 외군 철수, 후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또, 소련은 남북한 대표의동시 초청을 우선적으로 주장하였고, 미국은 남북한 대표의 선정을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UNTCOK)의 설치를 오구하였다. 결국, 소련의 제의가 부결되고 미국의 제의가 가결되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설치되었다.

▨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
남북 협상은 1948년 2월에 김구와 김규식이 북쪽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협상을 제의하여 실현되었다. 당시,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자,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을 반대하고 북쪽에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던 것이다. 이 제의에 대하여 북쪽이 응하게 되자, 남북 협상이 1948년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까지 진행되었다.
남북 협상은 독립 운동 세력의 통일 전선론과 그 맥이 통하는 것으로서, 주체적 평화 통일론에 입각한 통일 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하여 이루어졌으나, 남한과 북한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 정부의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은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을 위한 노력이었고, 이것은 남북 분단을 회피하기 위한 주체적 평화 통일론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 반민족 행위 처벌법
1945년 8월 이전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1948년 9월 제정된 법률이다. 우리 민족은 20세기 초에 일제의 침입을 받아 1945년에야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났다. 이 일제 침략기 동안 각 독립 운동 단체는 일제에 협력한 자의 처벌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으며, 광복 후 각 정치 단체는 미 군정 당국에 이들의 제재를 요구하였으나 미 군정 당국은 이들의 상당수를 군정청에서 이용하였으므로 처벌에 반대하였으며, 1947년 7월 과도 정부 입법 의원은 ‘민족 만역자, 부일 협력자, 모리 상간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나, 미군정청의 반대로 공포되자 못하였다. 그러나 1948년 3월 군정 법평 제 175호 ‘국회 의원 선거법’에서 친일 분자의 국회 의원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제한하였으며, 이 법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 의원이 제정한 헌법 제 100조에서는 이들을 소급 입법에 의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으므로 이 헌법 조항을 근거로 제정된 법률이 바로 이 법률이다.다. 친일 행위를 한 자를 그 가담의 정도에 따라 최고 사형까지의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밖에 재산 몰수, 공민권 정지의 조처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를 두어 조사 보고서를 특별 검찰부에 제출하도록 하고, 대법원에 특별 재판부를 두어 재판을 담당하게 하며, 특별 재판부에 특별 검찰부를 설치하여 공소를 제기하도록 하였다. 재판은 단심제로 하고 공소 시효를 법률의 공포일로부터 2년이 되는 1950년 9월 22일까지로 하였다. 그러나 이 법률은 제정 당시부터 친일 분자의 견제를 받았으며, 특히 일제 강정기에 관직에 있던 자를 중용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949년 6월에는 특별 조사 위원회가 일제 강점기에 헌병 또는 경찰로 친일 행위를 한 경력이 있는 경찰 간부를 조사하자 경찰이 특별 조사 위원회 사무실에 난입하여 직원을 연행하고 서류를 압류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친일 분자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던 일부 의원이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러자 같은 해 7월 법률이 갱정되어 공소 시효가 1949년 8월로 앞당겨지고, 1949년 9월 다시 법률이 개정되어 특별 조사 위원회, 특별, 재판부, 특별 검찰부를 해체하고 그 기능은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이관되었으며, 이 업무는 1950년 3월까지 대법원 대검찰청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680여 명이 조사받았으나 결국 집행 유예 5인, 실형 7인, 공민권 정지 18인 등 30인만이 제재를 받았고, 실형의 선고를 받은 7인도 이듬해 봄까지 재심 청구 등의 방법으로 모두 풀려나 친일과의 처단은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의 구성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각 도에 인민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뒤이어, 시, 군, 면의 각급 지방 인민 위원회도 1945년 11월까지는 조직을 완료하였다.
한편, 소련군 사령부를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립하게 하고, 33세의 김일성(본명 김성주)을 내세워 공산당을 결성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12월에 열린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 3차 확대 집행 위원회에서 김일성이 당 책임 비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의 당권 장악과 함께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이란 명칭이 말소되고, 북조선 공산당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김일성이 당권을 장악한 후 2개월 이내에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수립되고, 김일성이 그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 기구는 소련 군정의 철저한 대행 기관이었고, 소련군 사령보의 명령과 엄격한 감독을 받았다. 그리고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1947년 2월에 북조선 인민 위원회로 변경되었고, 이것이 1948년에 인민 공화국으로 개칭되어 북한 단독 정권이 수립되었다.

▨ 6․25 전쟁의 기원
197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6․25 전쟁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연구의 경향은, 전통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견해로 대별할수 있다. 전통주의적 해석은 ① 스탈린 주도설, ②중국과 소련의 공모설 등이 대표적이다.
스탈린 주도설은 “6․25 전쟁은 스탈린에 의해 계획되고 준비되고 주도되었다.”는 달린(DallinDavid)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학설은 1970년에 간행된 소련 공산당 제1서깅 겸 수상이 었던 흐루시초프
(Khrushchrov, S. Nikita)의 회고록의 내용에 따라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6․25 전쟁은 스탈린의 구상이 아니라 김일성의 구상이었다.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과 소련의 공모설은 중국의 소련의 주도 아래 6․25 전쟁의 계획과 추진에 적극 참여했다는 주장과 중국은 거의 참여하지 않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주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늘날 학계의 정설은 중국의 6․25 전쟁의 계획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북한의 승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의 준비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수정주의적 견해는 6․25 전쟁의 기원에 대한 책임을 공사권이 아니라 서방권에서 찾았다. 여기에는 ‘남침 유도설’등이 포함되는데, 북한의 남침에 의해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최근에는 수정주의 학파에서도 북한의 남침설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김학준 교수의 결론은, 6․25 전쟁은 소련이 지원한 북한주도의 남침이라는 것이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체결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되었고, 그 직후인 8월에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서울에서 가조인되었다. 그리고 10월1일에 미국의 워싱턴에서 한국의 변영태 외무 장관과 미국의 덜레스 국무 장관이 정식 조인하였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미국은 군사 동맹의 관계에 돌입하였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은 주한 미군의 존재에 의해 상징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방위 조약의 협상 과정에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 통제권이 휴전 후에도 유엔군 사령관에 귀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상호 방위를 위하여 타국과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동맹을 체결한 국가는 미국이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이다.
〔성격〕한․미 상호 방위 조약은 평화 애호와 방위에 바탕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의 정신을 준수함으로써 국제 평화 유지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특히,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평화를 희구하기 위하여 지역 집단 안보를 추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반공 이념의 대표 국가인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공산 침략 방위를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우호 관계나 동맹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소련의 세력 팽창을 저지하는 데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미국은 태평양 세력 국가로 등장하면서 제일 먼저 소련의 팽창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팽창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급속도로 증가되어 미국의 방위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공산 침략에 대한 공동 방위를 목적으로 한 양국 간의 전형적 집단 안전 보당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체결 경위 및 내용〕이 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위싱턴에서 변영태(卞榮泰) 외무 장관과 덜레스(Dulles,J,F.)국무 장관이 서명한 것을, 한국 국회와 미국 상원의 동의를 거쳐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아이젠하워(Eisenhower,D,D.) 대통령이 비준함으로써 1954년 11월 17일부터 발효되었다. 6․25 전쟁 당시 한국 정부가 휴전에 반대하여 국토 통일을 주장한 반면, 미국은 조속 한 휴전 전략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에 미국 정부가 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일련의 공약 중의 하나가 조약의 체결이다. 이 조약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공산주의자들의 오판에 의한 재침 방지이다. 둘째, 한구 정부나 국민들에게 외부로부터 침략이 있을 때 미국의 개입을 정식으로 확약하는 것이다.

▨ 발췌 개헌과 사서 오입 개헌
역사적인 5․10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된 후 2년 만에 5․30총선거가 1950년에 실시 되었다. 제2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30총선거에는 제헌 의원 선거 때 불참하였던 남북 협상과들이 참여하여 무소속으로 다수 진출하였다.
이에, 2대 국회에서는 이승만의지지 세력이 1/4에 불과하였고, 한민당도 24석밖에 얻지 못하였다. 전체 210석 중에서 야당 인사가 많은 무소속이 128석이나 차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헌법 규정에 따라 1952년에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면 이승만은 재선될 가능성이 없었다. 이에, 대통령 이승만은 6․25 전쟁의 와중에서 1952년 7월에 계어령을 선포하고,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무리하게 통과시켜 직선제에 의한 재선의 길을 마련하였다.
대통령에 재선된 이승만은 3대 국회가 1954년에 개원하자, 지지 세력인 자유당 의원들을 동원하여 그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1954년 12월 28일에 이른바 사사 오일 개헌안이 통과되었고, 이후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 정권이 1960년까지 계속 집권하였다.

3.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 내각제 개헌과 7․29 총선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을 계승할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부정 선거를 감해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은 3․15부정 선거와 자유당 정권의 독재 및 부패에 항거하여 4․19혁명을 일으켰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어서, 허정 과도 내각이 수립되었고, 민주당이 주도하여 1960년 6월 15일에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새 헌법에 따라 7․29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233명 중 175석, 참의원58명 중 31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7․29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어 격심한 대립을 보였으며, 대통령은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되었고, 국무 총리는 신파의 장면이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장면 내각이 출범하였으나, 민주당의 분열 때문에 정치적 안정을 기하지 못하였다.

▨ 4․19 혁명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
[배경] 민주적 교육이 비민주적으로 되어 가고 대규모의 부정 선거가 자행되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는 사람이 늘어 갔다. 이러한 현상을 만회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여러 문제로 관제대중 동원을 하였다. 관제 대중 동원은 초기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점차 효과도 없어지고,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도 사라져 그의 권력 유지는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원인] 4․19 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1960년 3월 부정 선거이다. 이 때, 실질적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승만의 강력한 대인 조병옥의 고령의 나이로 인하여, 실제 경쟁은 부통령 선거에서 벌어졌다. 당시 부통령 후보로는 현직 부통령이던 장면과 이승만이 밀어 주는 이기봉이 대립하였는데, 선거 과정에서 선거 결과 까지 공무원들에 의하여 완전히 날조되어 결국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때 마산에서 김주열의 시체가 발견되자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뛰어나오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전개] 4․19 혁명 전 수 주일 동안 주로 지방의 고등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으나 이승만은 상황을 이해하지 하지 않았으며, 마산 의거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 매도하였다. 이것은 학생들을 더욱 격분하게 했으며, 4월 18일 고대생 습격 사건이 발생하자 드디어 4월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수천 명이 경무대로 돌격하였다. 이에 경찰은 발포로 대응하였고 학생들의 시위는 혁명으로 변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서 발포한 직후 계엄령이 발표되었지만, 군대는 질서와 치안만을 신경 쓸뿐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다. 19일 이후 연일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21일 내각이 총사퇴하였으며, 그 다음 날 이승만은 허정을 정부 각료로 임명하고, 민주화를 약속하여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사태는 급변하여 25일 대학 교수단의 시위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다시 의원 내각제를 제시하였으나, 결국은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하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과도 정부의 수립과 전개〕4.19혁명 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학생과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허정 과도 정부는 이승만 정권의 계승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배후에 조직화된 정치 세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힘의 기반을 두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깨뜨려야 하는 모순 된 과업이 주어졌다. 따라서, 허정 과도 정부의 정책 및 혁명의 뒷마무리는 비혁명젹이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거 부정 행이자와 경찰에 대한 재판은 비혁명적이었으며, 이것은 학생과 시민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허정 과도 정부의 보수적이고 온건한 문제 접근 방법으로는 일반 국민들을 만족시켜 줄 수가 없었을뿐더러, 경찰의 권위주의적 성격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의의〕1960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이승만 정부의 권력 구조와 정치 의식과 학생들의 가치관과의 사이에 크고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었다. 4.19혁명은 이승만과 그의 지지 세력에 대항하는 학생과 시민 세력에 의한 혁명이었다.

▨ 5․16 군사 정변
장면 내각은 민주당의 분당으로 안정된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정국의 불안이 계속되었다. 또, 각종 시위 사태가 계속되어 사회 불안이 고조 되었다. 이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1961년 5월 16일에 군사 정변을 일으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정 기간 동안의 최고 권력 기구는 국가 재건 최고 회의였으며, 군사 정부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 등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5.16 군사 정변으로 성립된 군사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하고, 미국 등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구악을 일소하고 민생고를 해결하며, 양심적인 정치인에게로의 정권 이양 등을 내용으로 한 6대 공약을 내세웠다.

▨ 3선 개헌과 유신 체제
대통령 중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이제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소위 3선 개헌에 착수하였다. 당시 헌법이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1971년에 있을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69년 1월에 공화당이 3선 개헌을 검토하고 있음을 공식 발표하자 당시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 공화당 내에서는 박정희의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김종필이 이에 반발하였고, 신민당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항하였으며, 학생들의 시위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러한 반대 의사를 모두 무시하고 개헌을 강행하였다. 결국 개헌안은 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철야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국회 별관에서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전격적으로 통과되었고(1969. 9), 뒤이은 국민 투표에서 가결됨으로써 새 헌법으로 확정되었다.(1969. 10. 17).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3선 개헌에 따라 재출마가 가능해진 박정희가 공화당으로 입후보하였고, 신민당에서는 소위 40대 기수론에 의하여 김영삼․김대중․이철승이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갬대중이 입후보하였다.
이 선거의 결과 박정희가 53.2%의지지를 획득하여 45.3%를 얻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되어 제 7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한편,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역시 공화당이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신민당과의 의석 차는 상당히 좁혀진 것이었다.
3선 개헌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서 이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격심하게 일어났다. 게다가 닉슨 독트린과 미군 철수, 닉슨의 중국 방문 등 국제 상황의 변화도 박정희 정부가 짊어지게 된 커다란 불안 요인이었다. 더욱이,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의 발표에 따라 남북 조절 위원회가 설치되고 남북 대화가 시작되었지민 그것이 곧 난관에 부딪히자, 이에 박정희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장기 집권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내세워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해산과 정치 활동의 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비상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비상 국무 회의에서 의결․공포한 유신 헌법을 국민 투표에 부친 결과 90% 이상의 지지를 얻어 확정하였다.(1972. 11. 21). 이어서, 새 헌법에 따라 국민 투표를 거쳐 통일 주체 국민 회의를 구성하, 여기서 단독 출마한 박정희가 임기6년의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10월 유신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노린 민주줒의 발전에 역행하는 것이었으므로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긴급 조치를 잇따라 발표하여 유신 헌법에 대한 일체의 부정․비방과 개정․폐지의 주장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1978년 12월에는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박정희가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사건을 계기로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력한 시위가 일어났다.(釜馬事態, 1979. 10.16).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이 있을 때 박정희가 저격당하여 서거하는 10.26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유신 체제는 붕괴되고, 18년간에 걸친 장기간의 박정희 정부는 종말을 고하였다.

▨ 현대사의 바른 이해
한국 현대사의 이해에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사실은 다음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한국 현대사의 대부분의 내용이 그러하듯이 사실에 대한 정확성의 문제이다. 사실의 실증적인 전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요구된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사를 논의할 경우 객관적인 사실의 인식보다는 일정한 선호나 취향에 따라 사실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했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정리하고 이를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둘째로, 다양한 해석에 대한 비교론적 시각을 가지는 일이다. 한 가지 사건이나 사실의 전개에 대한 수많은 평가와 해석에 다양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중 어느 하나만이 옳고 다른 것은 틀리다는 식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이러한 해석들에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스스로의 정신적인 물입이나 감정 이입에 대한 자세가 필요하다. 쉽게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은 대단히 비학문적인 태도이다. 더구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위치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역사적 평가에 개입시키는 것은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학생들을 자신이 내리는 해석의 충실한 수용자로 교육시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현대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사실 전개의 연계성을 가지는 긴 시간적 흐름의 한 단면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만이 독자적으로 생겼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믈 전체 역사의 전개라는 구성체 속에서 그 사건이 차지하는 오늘의 의미가 논의되어야 한다. 역사는 아쉬움의 기록이지 결코 만족의 증거물은 될 수 없다. 학생들로 하여금 역사적 사실을 비판하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훈의 역사로 받아들려 민족사의 반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새 결단의 장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점에서 현대사는 비판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넷째로, 현대사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결단으로 이어지게 하는 구체적인 논리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결단도 학생 스스로 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결단이 내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 스스로 상황을 인식하고 비판하게 하며 그 비판을 딛고 조국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결단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 현대사 교육의 의도하는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제로 한다면 현대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은 현대사에 대한 교사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방법으로 현대사를 가르치는 경우이다. 그리고 현대사를 마치 우국 지사의 양성을 위한 애극심의 고취로 밀고 가려는 것도, 또는 그와는 달리 지나치게 비난이 담긴 비판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깊은 조국애에 바탕을 둔 애정으로 잘 된 것도 잘못된 것도 받아들이면서 그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게 하는 길잡이로서의 역사 교육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현대사의 부분의 한층더 그러하다.
전두환 정부 유신 말기인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 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써 유신 체제가 붕괴되었고, 국민들은 민주화의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미 그 때는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군부가 또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억압 통치를 자행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현직 대통령의 피살이라고 하 정치적 공백 상태를 틈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불법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국민들은 군이 다시 일어날 경우, 국민들의 저항이 격렬해질 것이기 때문에 군부는 모험을 하지 않으리라고 관측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측과는 달리 신군부는 전방을 지키는 부대를 비롯하여 자신들의 휘하에 있는 군 부대를 동원하여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정병을 일으켰다.
신군부가 주도한 군사 정변은 군의 지휘 계통에 큰 혼란을 일으켜 정치 권력의 공백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신군부는 혼란 상태를 수습한다는 미명하에 1980년 5월 17일 전국 비상 계엄 조치를 내렸는데, 이는 정권 장악을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 음모는 전 국민적인 반대에 직면했는데, 이것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였다. 신군부의 불법적인 권력 탈취를 막기 위해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계엄 철폐와 민주 헌정으로의 복귀를 요구했던 것이다.
평화적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인명잉 살상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광주를 비롯하여 인근 각지로 파급되어 대대적인 민주화 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일련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정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고, 또 고통을 당했다.
12․12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5․17 계엄 확대 조치로 사실상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고 볼 수 잇다. 1차적으로 12․12를 통해 자신에 반대하는 군 내부의 세력을 제거했으며, 2차적으로는 5․17 조치를 통해 정치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인을 인위적으로 배제한 상탱를 만들었다.
신군부의 정치 권력 장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준 기관은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와 국가 보위 입법 회의였다. 현역 군인이 주축이 되었던 비상 대책 위원회는 안보 태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나, 사실상 군부에 의한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해 만든 편의적 기구였다. 한편, 신군부는 입법 회의를 통해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이 때 제정된 법률의 대부분은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반민주적인 것이었다.
신군부에 의한 공포 정치는 결국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켰으며, 통일 주체 국민 회의로 하여금 8월 27일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는 민주 헌정의 파괴였고, 독재 정권의 창출이었다.
이후 신군부가 주도하여 개정 헌법을 공포했고 강권 통치를 계속했다. 법치주의를 외면하고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법에 의한 통치보다는 힘에 의한 지배가 우선되었고, 권력의 사유화가 공공연히 추구되었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불법 구금, 연금, 가두검문, 연행, 고문 등이 공공연하게 자행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의 희생자뿐만 아니라, 삼청 교육대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상자, 그리고 수천 명에 달하는 공무원 및 언론인이 강제 해직은 전두환 정부 출법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보여주었다.
전두환 정부는 ‘복지 국가의 건설’을 국정 목표로 정하고 민주주의의 토착화, 정의 사회의 구현, 교육 혁신과 문화 창달을 지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의지의 표명은 다만 선언적이고 수사적인 구호에 불과했고, 실제적인 성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전두환 정부의 출법이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 최소한의 도덕성도 결여되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노태우 정부 노태우 정부는 여러 면에서 전두환 정부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점을 보인다. 그는 12․12를 주도했다는 궁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민정당 대표 시절 그가 발표한 6․25 선언의 핵심은 기존의 대통령 간접 선거 방식을 버리고 야당측이 요구하는 개헌, 즉 대통령 직접 선거 방식을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6․29 선언은 6월 민주 항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군부 세력이 이처럼 전략을 변경한 것은 물리적인 강압 통치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회 각 분야가 성숙했기 때문이었다. 즉, 더 이상 군사 정권으 통치를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국민적 역량이 증대된 것이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는 군사 독재의 와해 과정의 마지막을 장식한 정권임과 동시에 민주화 추진 과정의 서두를 장식한 정권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6․29 민주화 선언으로 실시된 1987년 12월의 제 13대 대통령 선거는 16년 만에 국민의 직접 투표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국민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야당에 의한 정권 교체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던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법적, 제도적 장치와 절차면에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민주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이 선출됨으로써 정치 권력이 어느 정도 정당성과 동의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직선제는 시민과 학생들이 주도한 6월 민주 항쟁으로 쟁추한 것이기는 하지만,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압적인 전두환 정부에 비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강화됨으로써 권력 균형의 원리라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노동 운동 또한 활성화됨으로써 정치 과정에의 참여와 폭이 확대되고, 국민들의 욕구 투입이 용이해졌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방 의회가 구성되어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지방 자치가 부활되었고, 언론의 자율성이 신장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노태우 정부에 대해서는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지만 이와 아울러 부정적인 평가도 빼놓을 수 없다.
우선 민주화 추세에 따른 국민들의 욕구를 적절하게 수렴하지 못함으로써 체제의 능률을 크게 저하시킨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노태우 대통령 자신이 신군부의 핵심으로 전두환 정부 출범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5공 청산에 댛나 국민적인 요구에 응하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어 우유 부단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체제의 효율성을 크게 저하시켰던 것이다.
또한 오랜 군사 통치의 권위주의적 체제에서 비롯된 부정과 비리로 인하여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하는 폐단을 빚었으며, 편의주의적 통치 행위로 인해 정책 수행의 일관성 유지가 어려워 사회의 안정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 김일성 독재 체제의 강화
북한 정권은 그 수립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법제의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줄곧 김일성 1인 체제 구축으로 일관된 과정이었다. 정권 초기의 권력 구조는 파벌 간의 연립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소련군을 따라 들어온 갑산파의 김일성이 당위원장이면서 내각 수상이었고,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연안파의 김두봉(金枓奉)이 국가 원수의 지위에 있었다. 또 남한에서 남로당(南勞黨)을 조직했다가 월북한 남로당파의 박헌영(朴櫶永)이 부수당 겸 외상이었다. 그리고 허가이(許可而)를 중심으로 한 소려파가 당과 정부 기관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전 북한 지역에서 지하 공산당 활동을 했던 국내파는 현준혁(玄俊赫)의 암살로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이들 세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존재는 김일성과 박헌영이었다. 1950년의 6․25 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권력 투쟁에서 김일성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김일성은 패전으로 인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남로당파를 속죄양으로 삼아 1952~1955년에 걸쳐 박헌영․이승엽(李承燁)․이강국(李강國) 등 남로당계 지도급 인물들을 ‘미 제국주의의 고용 간첩’으로 단죄하였다. 1956년에 집어들어 북한에서는 군수 공업을 위주로 한 중공업 우선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이 팽배하였다. 또, 흐루시초프의 스탈린겨가 운동과 개인 숭배 반대 연설에 고무받은 소련과․연안파로부터 김일성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는 등 김일성은 또 한 차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중․소 대립이란 상황을 이용하여 김두봉․최창익(崔昌益)․박창옥(朴昌玉) 등 연안파와 소련파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전 지역적으로 ‘중앙당 집중 지도 사업’이란 이름으로 주민 들에 대한 사상 검토 작업을 전개하여 1인 지배 체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김일성의 권력 강화는 1960년대 말 자기 파인 갑산파에 대한 숙청으로 보다 확고해졌다. 군사력강화보다 경제 건설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박금철(朴金喆)․이효순(李孝淳) 등이 숙청되었고, ‘김일성 사상’을 당의 유일 사상으로 규정할 것을 공식 선언하였다. 또, 대남 전략에서 이견을 나타낸 김창봉(金昌奉)․허봉학(許鳳學) 등 군부파를 숙청함으로써 1970년대에 들어와 명실 공히 유일 지배 체제를 확립하였다.
19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 헌법’은 이처럼 강화된 김일성의 역할과 지위, 그리고 통제 수단을 공식화하였다. 김일성은 ‘극가 주석’의 새 직위를 차지하였고 신설된 초내각격인 중앙 인민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4.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

▨ 광복 후의 경제 혼란
1945년 광복 당시 한반도 내의 민족 자본은 전체 기업 회사의 자본 중에서 11%를 차지할 정도로 미약하였다. 한국 내의 근대 공업은 일본 자본이 지배하였고, 기술 역시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8․15 광복 후 일본인이 철수하고 일본과의 경제 교류가 끊기자, 한국 내의 공장은 가동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광복 후 38도선을 경게로 남북이 분단되자, 두 지역의 경제적 혼란은 더욱 심회되었다. 식량 생산은 남한이 북한보다 우세하며 미곡의 74.6%, 맥류의 75.8%를 생산하였으나, 공업 원료가 되는 지하 자원은 북한 지역에서 다량으로 산출되었다.
주요 동력원인 전력은 거의 대부분이 북한에서 발전되었고, 남한은 겨우 8%를 차지하였다. 석탄도 남한의 생산량은 21%에 지나지 않았고, 주요 공업 원료가 되는 철광, 텅스텐, 흑연, 금, 은 등도 70% 이상이 북한에서 산출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북 분단으로 양 지역 간의 화물 유통이 단절됨으로써 광복 직후의 경제적 혼란은 매우 심하였고, 국민의 생활난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복 직후 수송 기관의 마비로 물자가 제대로 유통되지 못하여 식량과 연료의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물가는 폭발적으로 상승하였다. 물가의 폭등은 패전 직후 조선 총독부가 20여일의 공백기에 조선 은행권을 30여억 원이나 불법으로 발생하여 이룬인들에게 배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1945영 8월 15일 당시 49억 7500만원이었던 조선 은행권이 조선 총독부의 불법 발행으로 8월 31일에는 79억 8700만원으로 급증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통화의 급격한 증가, 물자의 부족, 경제 유통의 경색과 이에 대처하는 미 군정 당국의 신속한 정책의 부재 등으로 말미암아 공복 직후의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 농지 개혁법의 제정
1945년 9월에 미 군정이 실시되면서, 맨 먼저 취한 토지 정책은 미 군정 법령 제9호에 의한 소작료 1/3제 실시 및 소작 조건의 개선이었다. 이어서, 미 군정은 일본인이 소유하였던 농지를 신한공사(New Korean Company)에서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 관리 면적은 경지 면적의 13.4%를 차지하였다. 특히, 전라 남북도의 경우에는 신한 공사가 관리한 일본인 적산 농지는 각각 경지 면적의 24%, 28%나 되었다.
또, 미 군정은 1946년 12월에 과도 입법 의원의 개설을 강행하고, 1947년 초에 농지 개혁 법안을 우선적으로 제정하도록 촉구하였다. 미 군정 당국은 농지 개혁안을 입법 의원에 제시하였으나, 1948년 3월에 입법 위원이 해산될 때까지 농지 개혁안은 통과되지 못하였고, 결국 이 문제는 대한 민국 정부의 과제로 농지 개혁법을 마침내 제정, 공포하였고, 1950년 3월에 대통령령 제 295호로 실시하였다.
농지 개혁법의 내용은, 첫째, 3정보를 초과하는 농가의 토지나 부재 지주의 토지를 국가에서 유상으로 매수하고, 이들에게 지가 증권을 발급하여 농지의 연 수확량의 150%를 한도로 5년간에 보상하도록 하였으며, 둘째, 국가에서 매수한 농지는 영세 농민에게 3정보를 한도로 유상 분배하고, 그 대가를 5년간에 쳐 수확량의 30%씩 상환곡으로 수납하게 하였다.

▨ 새마을 운동
1970년부터 정부는 농어촌의 근대화와 소득 증대를 위하여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였다. 소득 증대를 위하여 새마을 운동은 자조, 자립, 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국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농어촌에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도시 새마을 운동과 공장 새마을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동남 아시아에서는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빈곤과 후진성을 극복한 성공 사례로 인정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이란 근면, 자조, 협동의 기본적인 정신과 실천을 범국민적 및 범국가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총체적인 현대적 국가 발전을 가속적으로 촉진시키려는 목적하에 행해지고 있는 지역 사회 개발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정의는 논자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여기서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정의를 해 보겠다.
첫째, 한국 고유의 농촌 종합 개발의 성공적인 유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 새마을 운동이 도시 지역에도 확대되어 이른바 도시 새마을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서 범국민 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 새마을 운동이 지역 사회 개발의 본질을 지닌다고 보는 시각이다.
〔배경〕1970년 초의 전국 지방장관 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농민, 관계 기관, 지도자 간의 협조를 전제로 한 농촌 자조 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는데, 이것이 새마을 운동을 기획, 집행한 역사적 발단이 되었다.
〔결과와 문제점〕애당초 농촌은 겨냥한 새마을 운동의 발의, 전개는 적지 않은 도전도 겪었지만, 전통적 체제하의 농촌을 현대적인 것으로 전환하도록 충격을 가하는 데 있어서 크게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그러나 농촌을 겨냥한 이래 공식적인 성과와 사업 대상자인 국민의 평가 사이에는 적지 않은 괴리가 생기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현대 문화의 동향

▨ 7․4 공동 성명
1972년 7월 4일에 남북한은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공동 성명의 주요 내용은 평화적․자주적 통일, 민족의 대단결, 긴장완화와 신뢰 분위기의 조성, 서울․평양 간의 직통 전화 가설, 남북 조절 위원호의 설치 등이었다. 이 7․4 공동 성명은 민족 통일 문제의 원칙에 남북한이 합의했다는 점에서, 분단 이후 남북한 정부에 합외된 최초의 공동 성명 발표라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다.

▨ 남북 조절 위원회의 성립
7․4공동 성명에 따라 남북 위원회가 성립되었다. 남북 조절 위원회에 제1차 공동 위원장회의가 1972년 10월에 판문점에서 개최되었고, 제2차 공동 위원장 회의는 11월에 평양에서 개최되었으며, 제3차 공동 위원장 회의는 1973년 6월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북한측은 1973년 8월에 대화 중단의 성명을 발표하고 직통 전화도 단절하였다. 이리하여 1년간 계속되던 남북 회담은 중단되었으며, 남북한 사이의 통로는 막히고 말았다.

▨ 1949년의 교육법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정부는 1949년 12월에 교육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 교육법의 제1조는 교육의 근본 이념을 ‘홍익 인간’으로 규정하였다. 미군정 시기에도 교육 심의회를 통해서 홍익 인간의 이념은 결코 편협하고 고루한 민족주의 이념의 표현이 아니라. 인류 공영의 뜻으로서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과 완전히 부합되는 이념이며, 우리 나라의 건국 이념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 정신의 정수라고 구명하였다. 또, 이념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심과도 상통하는 전 인류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교육법 제8조에는 모든 국민이 6년간의 의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고, 국가와 지방 공동 단체는 의무 교육을 위하여 필요한 학교를 설치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 교황의 방한과 103위 순교자의 시성
한국 천주 교회는 1969년 11월부터 우리말 미사경문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서울 대주교인 김수환이 1969년 3월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것과 함께 한국 천주 교회의 발전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 후, 1984년 5월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였고, 100만의 신도가 운집한 여의도 광장의 집회에서 교황이 직접 참석하여 103위 순교자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들 순교자는 대부분의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순교한 신자, 신부, 주교 들이 었으며, 그 가운데는 한국 땅에서 순교한 프랑스신부와 주교 10명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상재전서를 쓰고 천주교 조선 교구의 독립에 힘썼던 정하상 등도 시성되었다.

▨ 광복 직후 문단의 양분
8․15광복 직후에는 문학인들이 각종 문학 단체를 결성하였다. 광복의 다음 날인 8월 16일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 2세대의 주역이었던 임화가 중심이 되어 조선 문학 건설 본부가 조직되었고, 9월 17일에는 이기영 문학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2월 23일에는 위의 두 단체가 통합하여 조선 문학가 동맹이 조직되었고, 좌파 문인들이 여기에 집결하였다.
한편, 우파 문인들은 9월18일에 변영로, 박종화, 김영랑 등을 중심으로 중앙 문학 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좌익측에서 1946년 2월에 조선 문학자 대회를 개최하자, 우익측도 3월에 전 조선 문필자 협회를 결성하였다. 이데, 광복 후의 문학계는 전 조선 문필가 협회 내의 문인들이 다시 결성한 우익측의 조선 청년 문학가 협회와 좌익측의 조선 문학가 동맹으로 양분되어 그 대립이 날로 심해졌다.

▨ 식민 사관의 극복
일제 관학자들이 일제의 식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주장하였던 이른바 식민 사관 또는 식민주의 사관으로 1960년대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비판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기백 교수는 ‘국사신론’의 서론에서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 사관을 비판하고 한국사의 올바른 인식에 장애가 되는 그릇된 모든 선입관과 이론을 속히 청산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김용섭 교수는 ‘일제 관학자들의 한국 사관’과 ‘일본․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사 서술’을 써서 식민 사관의 핵심적 기본 요소인 한국사의 타율성 이론과 정체성 이론을 설명하고 이를 비판하였다. 또, 김용덕 교수도 ‘일인의 한국 사관 비판’을 써서 일본인 학자들의 왜곡된 한국 사관, 특히 사대주위와 당쟁이 한국인의 민족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그들이 주자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1969년에는 잡지 ‘아세아’의 3월호에 ‘새로운 한국 사상의 극복’, 이기백 교수의 ‘사대주의론의 문제점’, 김영요 교수의 ‘한국사 정체성론의 극복의 방향’ 등이 실렸다. 이와 같이, 일제 관학자, 어용 학자들의 식민 사관은 1960년대에 크게 비판을 받았고, 또한 극복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제국주의 시대

15세기 이래로 전개되었던 식민지 쟁탈 경쟁은 18세기 말 이후에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각국은 국내의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되어 식민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 혁명의 진전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본국의 공업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확보와 상품의 시장 또는 이민 대상지로서의 식민지가 개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달이 독점 자본주의 또는 금융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잉여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자본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특히, 1870년대 말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극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이 격렬해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19세기 말의 식민지 경쟁은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대외적 위신과 관련되어 각국은 식민지 확보를 가장 중요한 우선 정책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대상 지역도 전세계의 후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각국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보 정책과 이와 관련되어 경쟁 국가에 대항하는 정책을 세계 정책이라고 하고, 이러한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라고 하며,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1870년대 말부터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진출은 경제적 종속과 함께 정치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후진 지역의 전통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변화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각국이 근대화 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적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이는 무력 충돌로 확대되어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19세기 말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 홍선 대원군의 집권

1863년 말 철종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후계자를 둘러싸고 조야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오랫동안의 세도 정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해 오던 안동 김씨 세력이 후계자 문제에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 동안 안동 김씨 세도가에게 억눌려 불우한 생활을 해 오면서도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던 흥선군 이하응과, 역시 안동 김씨의 세력에 반발을 하고 있던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익종으로 추존됨.)의 비인 신정 왕후 조씨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세력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되어, 궁중의 제일 어른의 자격으로 12세 된 흥선군의 둘째 아들에게 후계를 명하니 이가 고종이었다.
그리하여 홍선군 이하응은 왕의 생부로서 홍선 대원군이 되어 국왕이 아직 어린 이유로 자신이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선 대원군의 왕실 제보를 보면 도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정조의 이모제(異母第)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한 사람이 16대 인종의 왕자 인평 대군의 6세손인 남연군이었다. 이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흥선군은 익종(즉, 효명 세자)과 정조의 이모제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과 같은 항렬이 된다. 그러므로 신정 왕후 조 대비는 흥선 군의 아들에게 익종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나아가 안동 김씨에 대해 풍양 조씨의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국왕을 낳은 생부에게 주어진 명칭으로서, 선조가 즉위하자 그의 생부 덕흥군이 덕흥 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이 즉위하여서는 전계군이 전계 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망 후에 대원군의 추존을 받았으나 홍선 대원군은 살아 잇는 대원군으로서 조선 역사상 유일한 경우였으며, 왕이 아직 나이 어리니 국가의 전권을 잡고 야심찬 정치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 19세기 중엽 국내외 정세

1860년대 전후의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커다란 변화와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년 간 계속된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지방 양반과 관리들에 의해 수취 체제 특히 삼정이 그 상궤를 벗어나 운영됨으로써 민생이 파탄에 빠지자 조선 후기 이후 경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성장하고 있던 농민 의식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1862년 진주에서 비롯된 임술 농민 봉기(壬戌農民蜂起)는 삼남 각지에 삽시간에 파급되어 갔다. 이는 당시의 농민들이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와 이를 운영하는 양반 세력에 대항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농민 의식을 대변하여 농민들이 추구하는 변화를 지향하며 전통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현실 사회에 비판적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동학은 조선 왕조의 정치적, 사회적 지배 체제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왕조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확보를 목표로 하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진행되는 시기로서, 일본이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중국은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굴복한 후에 1856년 애로호 사건의 결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굴복하였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연해에는 서양 선박들이 표착하거나 접근하여 와 한국인들의 두려움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함락 소식은 동일한 문화권인 우리 나라에도 서양인들이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안으로 전통 체제를 위협하는 농민들의 봉기, 밖으로 식민지 침략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접근은 국가의 자주권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대내외로 위기에 당면한 당시 조선 왕조로서는 이에 대처하는 정치 개혁이 필수적인 시대 상황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 통상 수교 거부 정책

1863년 말 집권한 홍선 대원군은 서양과 일본의 통상 수교 요청을 반대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천주교를 박해하여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를 다수 처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며, 통상을 요구하는 제너럴 셔먼 호의 침몰에 대한 책임 문제를 들어 강화도에 침입하여 수교를 강요하면 미국을 격퇴하였다. 일본의 수교 요구를 서계(書契) 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일반적으로 쇄국 정책으로 표현하여 왔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추진된 것이다. 천주교의 박해도 천주교도들이 그 신앙 문제와 관련시켜 외세와 연결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실제로 1860년 이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월경하여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하여 베이징을 함락시킨 것도 1860년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침략의 시작이 통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당시에 열강의 통상 및 수교 요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는 침략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홍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외세, 즉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이었으며, 이는 민족의 이익과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 윤리와 체제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타협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보수성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였다. 종래 쇄국 정책에 대한 설명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이고 고루한 정책으로서, 이로 인해 한국의 서양 문물 수용이 늦어졌으며 근대화에 지각하게 되었다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 통상이나 수교를 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으며, 이를 거부하는 조선 왕조의 정책이 그들에게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쇄국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은 동양 3국(중국, 일본, 조선)이었으며, 이들 3국은 그들의 침략 대상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해 쇄국 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들의 이익이 수반된 수교 요구를 조선이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쇄국 정책은 침략자가 그들의 국가 이익의 차원에서 상대방을 폄하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홍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강요로 맺어진 강화도 조약과 이로 인해 이루어진 개항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공헌이라는 것을 보다 과장하기 위해서도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비판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쇄국이라는 의미가 국가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침략 세력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음이 역사적 진실이라면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 수호를 위한 정책을 비판하는 결과이다. 쇄국 정책이라는 표현은 주체적인 역사 이해의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과거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일본이나 서양의 침략적 성격에 대응하여 자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 호포법(戶布法)의 실시

조선 왕조의 재정 수입은 농민들이 부담하는 조세 징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조선 왕조의 수취 체제(收取體制)의 대표적인 내용은 삼정(三政)으로 표현된다. 이 가운데 군정(軍政)에 해당하는 군포의 수납은 영조 때 균역법에 의해 농민의 부담이 감소되었으나, 양반들은 면제되었으며, 이전부터 관행으로 내려온 각종의 부정이 자행되어 농민들의 부담은 많아지고, 이에 대한 불만이 높아 갔다. 1862년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安劾使) 박규수(朴奎壽)는 민란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이의 개혁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삼정이정청(三政嫠正廳)을 설치하고 삼정의 개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동포제(洞布制)로서 일부 양반에게도 군포의 부담을 의무화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정이 정청의 개혁안은 철종이 곧 죽어 시행되지 못하고 홍선 대원군에 의해 시행될 수 있었다. 홍선 대원군은 재정 수입의 증대와 농민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양반들은 그들이 평민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양반의 반발을 막고 그들의 위신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양반의 이름 대신에 하인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매호당 2냥씩 징수하는 균등 과세의 원칙을 세웠다.

▨ 서원의 정리

조선 후기에 양반들의 세력 기반의 확충을 위한 서원의 남설이 계속되어 18세기 말 정조 때에는 전국적으로 65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국가 재정의 낭비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농민들에게 많은 폐단을 주었다. 서원을 통한 지방 양반들의 횡포는 민심을 이반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경우에도 세도가에 눌려 불우한 생활을 할 때 이들 서원의 비행과 횡포를 직접 경험하면서 그 폐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집권을 하자 곧 전국의 서원과 향사(鄕祠)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명령한 후, 곧이어 서원의 사설 및 남설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1865년 3월 횡포가 극심하여 백성의 원성이 가장 높았던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유생들은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홍선 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이를 벌할 것이다.”라고 하며 강경하게 그의 의지를 실현시키며 아울러 전국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을 남겨 두고 모두 철폐하도록 하였다. 서원 정리 작업은 경복궁의 중건 사업,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는 동안일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871년 신미년에 이를 마무리지었다. 서원 정리 결과 막대한 토지가 국가에 환수되었으며, 농민들의 불법적 부담이 감소되어 크게 환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반 세력은 홍선 대원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홍선 대원군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사창제(社倉制)의 실시

홍선 대원군의 재정 확보책과 민심의 안정을 위한 개혁에서 수취 체제의 개혁은 중요한 비중을 가진다. 1867년(고종 4년) 삼정의 하나인 환곡(還穀)제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환곡의 폐단은 삼정 가운데서 가장 피해가 컸었떤 것으로, 지방에서 관리와 토호들이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는 것으로 환곡이 많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환곡은 농민 구휼책의 하나로 정부에서 면을 단위로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1/10의 이자를 받아들여 국가 세수에도 이바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곡의 배정과 운영에 있어 양반 지주와 토호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고, 각종의 불법이 저질러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이에 따른 원성이 높았다. 홍선 대원군이 실시한 사창제의 내용은 면을 단위로 하던 것을 리(里)를 단위로 하여 사창을 설치하고, 마을 안에서 덕망이 있으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사수(社首)라고 하여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사창제의 실시로 환곡의 폐단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농민의 생활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환곡제 실시에 수반되었던 각종 비리가 줄어들고 국가의 원곡(元穀)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이자 수입이 늘어나 재정 수입이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홍선 대원군의 국방 강화책

홍선 대원군은 집권 직후 서양 세력의 침략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관계를 개혁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종래에는 비변사에서 정치와 군사를 총괄하여 상대적으로 국왕의 군사에 대한 통제권이 취약하였으나, 비변사를 철폐하여 정무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삼군부에서 전담하도록 한 것이다. 군사 체제의 개편에서는 우선 수준 통제사의 지위를 격상시켜 수군을 우대하여 연안의 방비에 관심을 기울였고, 오가작통법을 부활시켜 일종의 민병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강화도를 중심으로 연안에 포대를 확충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수도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우수한 군인을 뽑아 군사 기술을 연마시키고, 특히 서북 지방의 포수를 따로 뽑아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신무기 개발에도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수뢰포와 선박 등의 제조와 실험, 방탄복의 제작 등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력 침략에 대비하여 우수한 서양 기술을 수용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 병인양요(프랑스의 강화도 침략)

병인박해를 계기로 하여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한 것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 1차는 1866년 8월 12일(양력 ; 9월 20일)에서 8월 22일(양력 ; 9월 30일)까지, 제 2차는 9월 5일(양력 ; 10월 13일)에서 10월 12일(양력 ; 11월 18일)까지이다. 12명의 선교사 가운데 3명만이 살아 남았다는 리델 신부의 소식을 들은 톈진 주재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se) 제독은 본국과 연락을 취하면서 3척의 군함으로 남양만을 거쳐 강화 수로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염창, 양화진, 서강까지 왔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7척의 군함에 6백 명의 병력으로 재차 침입해 와서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은 그들이 강화도를 점령하면 조선 정부가 쉽게 항복 하리라고 기대하였으며, 강화성을 공격, 점령하고 나서는 통진을 공격하였으며 문수산성까지 정찰하였다. 대원군을 필두로 조선 정부에서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정부는 강력하게 양이보국(洋夷保國)을 내세우면서 항전을 준비하였으며,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비밀리에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10월 3일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에 도착하자 잠복하였던 선방 포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큰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방화, 약탈하고 다수의 서적을 약탈하고 패주하였다. 프랑스군이 격퇴된 후에 조선에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며, 홍선 대원군의 서양 배척 정책은 강화되었다.

▨ 신미양요(미국의 강화도 침략)

1871년 3월 미국의 주청 특명 전권 공사인 로우(Low, F.F)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아시아 함대의 로저스(Rodgers, J.)사령관으로 5척의 군함과 대포 85문, 123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는 5년 전인 1866년 1척의 미국 상선이 행방 불명되었는데 그 소식을 알길이 없더니, 병인박해 당시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를 통해 대동강에서 서양 선박 1척이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미국 정부에서는 이를 계기로 조선에 무력적 위협을 가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정책이 결정된 결과인 것이다. 미국 군함은 남양만을 지나 강화 해협에 이르러 4월 29일 우세한 화력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병인양요 이후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고, 더욱이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을 계기로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여서 연안의 방비를 엄히 하고 있었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여기는 어재연이 경군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며, 미군의 공격에 백병전으로 저항하여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일시 광성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미군도 조선군의 저항이 의의로 완강하였으며,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미군은 광성진을 방화한 후 퇴각하였다. 광성진의 함락과 어재연의 전사는 조선의 조야에 커다란 공포가 되었으나, 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척양 정책을 표방하면서 척화비를 각 지역에 설치하여 양이 격퇴의 의지를 보였다. 앞서 프랑스군의 침입에 뒤이은 미군의 침입 사건은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지게 하였으며, 보다 강경한 양이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서양과의 수교가 더욱 시간이 지연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제너럴 셔먼 호 사건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략하기 직전인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이르렀다. 이 배에는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 W.B.)이 조선과의 교역을 트기 위해 서양인 5명과 중국인 13명을 포함한 19명과 통역으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Thomas, R.J.)가 타고 있었다. 당시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는 중군 이현익을 보내 조선이 외국인과 교역하지 않는 국법이 있으므로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그를 잡아 가두는 횡포를 저질로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으나, 물이 점차 원래의 수위로 돌아옴에 따라 셔먼 호는 강바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잡힌 중군을 구해 낸 후 박규수는 셔먼 호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려 화공과 포격을 가하여 결국 셔먼 호가 침몰하고, 승무원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 척 화 비

1871년 신미양요에서 강화도에 침략해 온 미국과 싸우는 과정에서 한동안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일시 광성진이 함락당하고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크자 이를 격퇴하는 것은 지구전으로 대항하면서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한 흥선 대원군은 국왕의 교서를 통해 “양이가 화(和)를 하고자 함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수천 년의 예의 국가가 어찌 견양(犬羊)과 상화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몇 년을 지낸다 하여도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배척할 것이며, 만약 화(和)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는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洋夷侵 非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 통상 개화론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후 척양(斥洋)․척왜(斥倭) 정책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에 일부 선각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외국과 통상을 하며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생각은 이미 실학자들, 특히 북학파들이 제기하고 있었는데 박제가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규경, 최한기 등 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에 의해 상당히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경석의 경우는 역관으로 중국에 자주 왕래하면서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 서양을 소개하는 서적을 가지고 와서 이를 서로 읽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에 관심을 가졌으며,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통상 개화론은 뒤에 개화 사상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서계(書契) 문제

1868년 일본에 새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그들의 왕정 복고 사실을 대마도주(主)를 통해 조선에 알리는 외교 문서, 즉 서계를 동래 부사에게 전하였다. 이 때, 초량(草梁)왜관에 왜학 훈도 안동준이 이 서계를 받아 보니 그 내용 속에 ‘皇上’, ‘ ’, ‘ ’ 등 중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문구가 있으며, 종래 대마도주 종씨(宗氏)가 사용하던 조선 정부에서 보내 준 도서(圖書, 즉 도장)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0년에는 일본 정부가 직접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과 교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서계의 내용을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불평 세력이 등장하였고, 이들 세력을 나라 밖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정한론이 제기되었으며, 대만 출병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일본과의 분쟁을 피하고 관계를 개선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74년 다시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서계 수용 문제가 논의되어 일본은 다시 서계를 가지고 왔으나, 그 내용에 ‘大日本’, ‘皇上’등의 문구가 여전히 들어 있어 실제로 교섭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 운요 호 사건

1875년 일본과 서계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정한론이나 대만 출병 사실과 관련하여 일본과 수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박규수, 이최응, 양헌수 등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다수 의견은 서계의 내용과 그 절차 문제 등을 내세워 수교할 수 없다는 의견이어서 협의가 결렬되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일각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의견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무력을 수반한 교섭을 강요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그리하여 1875년 4월 세척의 군함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였고 그 중에 운요 호는 부산에 입항하였다가 다시 동해에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갔다가 나가시키로 돌아갔다. 8월에는 조선의 해안에서 중국에 가는 항로를 조사한다고 하면서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다. 항로 조사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조선과의 무력 충동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하여 수교 교섭을 강요하려는 술책이었던 것이다. 운요호에서는 먹을 물을 구한다고 보트를 내려 강화도의 초지진 포대로 접근하는 외국 선박을 응징하기 위해 포격을 가하였다. 운요호에서는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와 초지진이 파괴되었으며, 돌아가던 운요호는 영종진에 대해서도 포격을 가하고 상륙하여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수교를 강요하기 위한 정략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일본의 대 한국 침략의 시발이었던 것이다.

▨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

1875년 12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구로다를 특명 전권 대신으로 하여 8척의 군함과 6백여 명의 병력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가 강화도로 향하였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대의 추가 파병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수반하여 조선을 굴복시키겠다는 계획적인 침략 행위였다. 1876년 1월 조선 신헌(申憲)을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강화도 연무당에서 담판이 벌어졌다. 회담이 시작되기에 앞서 일본은 함포를 발사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대를 상륙시키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세 차례나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례한 태도로 회담이 결렬되다시피 하였다. 고종이 정부 고관들의 대책 회의를 소집하였을 대 당시 조선 조정의 다수 의견은 일본의 침략 도전 행위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 때, 박규수는 일본과 수교를 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본이 수호를 청하면서 병선을 대기하였으니, 그 실정은 예측할 수 없으나, 수호 사절(修好使節)이라고 말하니 우리가 먼저 공격할 수 없으며, 만일 의외의 일이 일어날 경우 용병(用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천리 강토가 내수외양(內修外攘)의 방책을 다했던들 조그만 섬나라가 이처럼 우리를 감히 엿보고 공격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군대로써는 일본의 군대 힘을 막을 수 없으니 그들의 청을 들어 수호를 맺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박규수의 의견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이홍장이 조선에 대하여 일본과의 수교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내 왔다. 국내의 수교 허용론의 대두, 청국의 권고,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강압적 위협 등이 일본과의 수교 조약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접견 대신 신헌에게 “우리 나라는 일본과 3백 년 동안 통신사를 보내고 왜관을 설치, 호시(互市)하여 왔다. 비록 수 년 이래에 서계 문제로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자는 처지에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 등이 서로 편리하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신헌은 즉시 일본측과 교섭을 진행시켜 일본이 제안한 12개조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 강화도 조약의 내용

〈제1관〉 조선국은 자주지방이며 일본과의 평등지권을 보유한다. 이후 양국이 화친의 성실을 표하려 할 때에는 피차 동등한 예의로써 서로 대우하며 추호도 침월(侵越) 시혐(猜嫌)하여서는 안 된다. 우선 종전에 교정(交情)을 저해하는 환이었던 여러 예규를 일체 혁파하고 관유홍통(寬裕弘通)의 법을 개확(開擴)하여 서로 영원한 안녕을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경성에 파견하여 예조 판서와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의 장단은 모두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조선 정부 또한 수시로 사신을 일본국 동경에 파견하여 외무경과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제3관〉 이후 양국 왕래 공문은 일본의 그 국문을 사용하되 10년간은 따로 한문 역본 1통을 첨가하고 조선은 진문을 사용한다.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진에는 일본 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 구역이 되어 있다. 이제 마땅히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을 혁파하고 새로 만든 조약에 의거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또한, 조선국 정부는 따로 제 5관에 기재된 2개 항구를 열어 일본국 인민의 왕래 통상함을 들어 주어야 한다. 이 곳에 대지를 임차하고 가옥을 지으며, 혹 이 곳에 거주하는 조선 인민의 가옥을 임차함에 있어서도 각기 그 편의에 맡긴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처를 택하여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선박이 조선국 연해에서 혹 대풍을 만나거나 혹 땔감과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에 도달하기가 불능할 때에는 연안의 어떠한 항구에라도 기항하여 위험을 피하고 선구를 보충, 수선하며 땔감 등을 구입하도록 한다. 그 지방에서 공급한 비용은 선주가 배상하여야 되지만 무릇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는 지방 관민은 특별히 인휼을 가하고 구원을 다하도록 하고 보급에도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양국의 선박이 대양 중에서 파괴되어 선원이 표착하는 경우에는 그 지방 인민이 즉시 그들을 구휼, 생명을 보전하게 하고 지방관에게 보고하여 해당 지방관은 본국으로 호송하고나 그 근방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인도한다.
〈제7관〉조선국 연해의 도서 암초는 종전에 조사를 거치지 않아 극히 위험함에 일본국 항해자로 하여금 때에 따라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하고 그곳의 깊고 얕음을 살펴 도지를 편제하게 하여 양국 선객에게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도모하게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 지정 항구에 시의에 따라 일본국 상민을 관리하는 관원을 설치할 수 있다. 만약 양국이 교섭할 안건이 있을 때에는 그 곳 지방 장관과 만나 협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니 피차의 인민은 각자 임의에 따라 무역을 하며, 양국의 관리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지 못하며 제한 금지도 못한다. 만약 양국의 상민이 서로 속이거나 임차한 것을 보상하지 아니할 시는 양국 관리는 포탈한 상민을 나포하여 보상하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보상하지는 않는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항구에 재류 중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 인민과의 교섭에서 일어난 것이면 공평하게 조선국의 사판(査辦)에 돌아간다.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되 조금이라도 범죄를 비호해서는 안 되며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제11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므로 따로이 통상 장정을 만들어 양국 상민의 편의를 도모함이 마당하며, 또한 현금 의립한 각 조관 중에 다시 세목을 보완 첨가하여 조건에 준조(遵照)함에 편리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6개월 내에 양국이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 또는 강화부에 파견하여 정하게 한다.
〈제12관〉 위에서 의정된 11관의 조약은 이 날부터 준수한다. 양국 정부는 이를 변혁할 수 없으며, 영원히 신의를 가지고 준수하여 화의를 돈독히 한다. 이를 위해 약서 2통을 작성하여 양국이 위임한 대신이 각각 조인하고 상호 교부하여 빙신(憑信)으로 삼는다.
이 조약은 일본의 무력에 강요된 타율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이 미국과 체결하였던 미․일 조약의 내용의 불평등 내용을 그대로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며, 또한 조약의 내용이 쌍무적이 아니라 조선의 일방적인 의무만을 강요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근대적인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조선이 포함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근대 자본주의의 침략의 물결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의 출발이 된 것이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 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 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따.

▨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역점을 두었던 것이 개항장의 확보였다. 이를 통해 그들의 한 국 침략의 기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 조약에는 제 4, 5 관에 이에 관련된 조항으로 부산과 다른 두 개의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였는데, 두 개의 항구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에서 택하되 조약 체결 후 20개월 후에 개항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원래부터 동해안의 원산과 서해안의 인천을 지목하고 있었으나, 조선측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원산은 부근 함흥이 태조 이성계의 탄생지이며 인근에 그 조상들의 무덤이 남아 있어 이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며, 인천은 바로 서울의 인후이므로 수도의 방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 반대하였다. 그 대안으로 조선측은 동해안은 청진이나 나남, 서해안은 군산이나 목포 또는 진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원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으로서, 인천은 서울과 가까워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원산은 일본의 요구로 1879년 7월에 개항하였으나, 인천의 경우는 조선측이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1880년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할 때, 이 문제를 일본 정부 당국과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일본의 압력으로 1881년 2월 인천을 개항할 것을 결정하여 20개월 뒤인 18882년 8월에 개항하게 되었다.

▨ 조선 책략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1879년 서울에 공사를 상주시키고, 원산에 이은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곡물 수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일본 정부와 직접 협의하기 위하여 제 2차 수신사로 김홍집을 파견하였다. 1880년 5월에 일본으로 간 수신사 일행은 일본측의 회담기피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김홍집이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 청국 공사 하 여장(何如章)과 참찬관 황 쭌셴과 만나 필담을 통하여 당시의 국제 정세를 논하였다. 황 쭌셴은 청국에서는 유럽의 소식에 밝은 인물로 서양 여러 나라의 정세를 김홍집에게 알려 주었다. 특히, 그가 저술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김홍집이 가지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이 책은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기본적인 내용은 방아론(防俄論)으로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조선의 외교 방향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방으로 추진해야 될 것을 제시한 것이다. 또, 조선 책략에는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조선에서의 부정적인 생각을 해소시키려는 내용도 들어 있었으며,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서양의 다른 나라와도 수교하는 것이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정부가 미국과의 수교와 개화 정책의 추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에 반하여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1876년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과 수교를 하게 되자 구미 국가 가운데 미국이 특히 조선과의 수교를 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는 1866년 제너럴 셔먼 호의 불행한 사건과 함께 1871년 신미양요로 두 나라의 수교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조선과 수교에 성공한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 교섭을 하려 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의 독점적 활동을 위하여 다른 나라가 조선과 수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중재하기를 꺼리자 미국은 청의 이홍장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조선과의 수교가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조선과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다. 조선과의 교섭을 책임 맡은 슈펠트 제독은 1880년 7월 이홍장의 초청으로 톈진으로 가서 회담하였으며, 1881년 7월 두 번째의 회담을 하였다. 이 때,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간 어윤중이 톈진에 가서 미국과의 수교 문제로 이홍장과 협의하였으며, 1882년 영선사 김윤식이 톈진에 오자 그도 이홍장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여 미국과의 수교 윤곽이 잡혀 나갔다. 이홍장이 조선과 미국꽈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외국과의 수교를 중재함으로써 조선에 청의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것과, 외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청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알려 그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조선에서 독점적인 일본의 지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미국과의 조약문은 조선 대표들이 참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청과 미국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1882년 5월 조선 대표인 신헌은 도장만 찍었을 뿐이었다. 조․미 통상 조약은 전문 14개조로 되었으며, 그 내용은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과 큰 차이가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다만, 제 1 관에 양국은 서로 거중 조정(居中調整 ;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뒤에 조선과 미국이 각각 그 해석에 있어 견해를 달리하였는바, 조선에서는 동맹 조항으로서 공수 동맹 또는 군사 동맹으로, 미국에서는 외교적인 우호의 표시로 해석하였다.
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 수신사 김기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측이 사신을 파견해 주기를 요청하자 의례적인 형식으로 조선 정부에서는 예조참의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3개월 만인 1876 4월 29일 일본측이 주선한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가서 20여일 동안 도쿄에 체류하였다. 수신사 일행은 75명으로 일본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전신, 철도, 군함, 대포 제조, 군사, 기계, 학술, 교육 등 각분야를 시찰하면서 일본의 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하였다. 일본은 수신사를 통하여 일본의 발전 모습을 조선에 보임으로써 그들의 힘을 과시할 필요에서 수신사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김기수는 귀국 후에 국왕에게 복명하면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국왕에게 소개하였으며, 국왕의 개화 의욕을 북돋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귀국 후에 지은 일동기유(日東記遊)는 일본의 개화된 모습을 알려 주고 있다.

▨ 수신사 김홍집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해결해야 될 현안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측에서는 현안 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실정을 보다 상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제 2차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현안 문제는 일본이 1879년 원산의 개항을 요구하면서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자 이에 대처하는 문제와 미곡의 유출을 줄이는 것과 관세 배상 문제 등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김홍집을 수신사로 임명하였는데, 그 일행 가운데 주요 인사들은 윤웅렬, 이조연, 강위, 지석영 등이 포함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수신사 일행에 대한 접대는 후하게 하였으나, 수신사의 방일 목적이 일본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었으므로 일본 정부의 고관들은 김홍집과의 면담을 의도적으로 기피하여 수신사는 방일의 목적을 달



성할 수 없었다. 이에 김홍집은 주일 청국 공사관에 자주 들렀으며, 황 쭌셴이 지은 조선 책략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강화도 조약 이후 새로운 외국 문물의 수용과 외국과의 교섭 및 통상 등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의 개편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청국의 총리기무아문을 모방하여 1880년 12월(음) 종래의 의정부와 6조와는 별도로 정 1 품 아문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군국의 모든 일을 총령하여 그 권한이 방대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설치된 지 2년 후에 군국기무 등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과 외교 통상을 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나누어졌다.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당시의 12사와 그 업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대사 ; 중국과의 외교
교린사 ; 일본 및 각국과의 외교
군무사 ; 경향의 군사 사무
변정사 ; 국경 사무, 인근 국가의 동정 및 정탐
통상사 ; 외국과의 통상
군물사 ; 병기 제조
기계사 ; 각종 기계 제조
함선사 ; 각종 선박 제조
기연사 ; 연안 포구 왕래 선박 검사
어학사 ;각국 언어, 문학의 번역
전선사 ; 관리 선발과 관용품 조달
이용사 ; 재정 사무
통리기무아문 총리 대신에 영의정 이최응을 임명하였으며, 당상관으로는 김보현, 민겸호, 김병덕, 윤자헌, 조영하, 정범조, 신정희, 민영익, 이재긍, 김홍집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보수적 경향을 띤 인물이었으며, 개화파에 해당하는 인물은 김홍집 등 극소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은 1884년 의정부에 통합되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남아 있었다.

▨ 군제 개편과 별기군의 설치

개화 정책의 추진과 함께 부국 강병의 일환으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군제의 개편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군제의 개편과 동시에 신식 군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기존 군제는 5영으로 나뉘었던 것을 무위영과 장어영 2영으로 통합하여 이경하와 신정희를 각각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별기군이란 신식 군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별기군은 1880년 김홍집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윤웅렬이 중심이 되어, 기존 군대에서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1881년 4월 무위영 소속으로 출발하였다. 별기군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대로 소총으로 무장하여 신식 훈련을 받았다. 교련소 당상에는 민영익, 정령관에 한성근, 좌부령관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원, 참령관에 우범선이었으며, 교관으로 일본군 소위 호리모도를 초빙하여 서대문 밖 모화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후에 하도감으로 옮겼다.

▨ 신사 유람단의 파견

강화도 조약 이후 김기수와 김홍집 등 두 차례의 수신사가 일본에 다녀온 뒤 일본이 발전한 모습이 소개되자 나라의 개혁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던 고종과 개화파 관료들은 개혁을 위한 자료의 수집과 일본의 실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대규모의 시찰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국내 사정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대하여 경계하면서, 특히 김홍집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을 둘러싸고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시찰단을 공개리에 파견하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동래부 암행 어사로 발령하여 비밀리에 부산에 집결하도록 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람단으로 소개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시찰단은 12개 반으로 총 인원 60명으로서 각 반의 책임자는 전직 관리로 하고 수행원과 통역 및 하인들로 구성되었다. 각 반의 책임자는 개인적으로 국왕으로부터 시찰 대상에 대한 지시를 받고 귀국 후에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었다. 이들은 1881년 4월 10일(음력)에 부산을 출발하여 약 3개월 뒤에 귀국하였다.
12개 반의 책임자와 수행원, 그리고 시찰 대상은 다음과 같다.
책임자수행원시찰부서조준영
박정양
엄세영
강문형
조 병
민종묵
이헌영
심상학
홍영식
어윤중

이원희
김용원이봉식, 서상직
왕제응, 이상재
엄석주, 최성대
강진형, 변택호
안종수, 유기환
민재후, 박회식
이필영, 민건호
유진태, 이종빈
고영희, 성낙기, 김낙운
유길준, 유정수,
김량한, 윤치호
송헌빈, 심의영
손붕구문부성
내무성, 농무성
사법성
공무성
세관
외무성
세관
조폐
군부
대장성


군부
이들 책임자와 수행원들은 그 후 정부 내의 근대적 전문가로 발전하여 개화 정책의 추진에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수행원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유학생으로 남아 있도록 하였으니, 어윤중의 수행원이던 유길준과 유정수는 경응 의숙, 윤치호는 동인사(同人社), 김량한은 조선소에서 공부하였다. 또, 이원희는 특별히 일본에서 총포와 군함을 구입할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참모로 임명된 이동인이 급작스럽게 암살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 영선사의 파견

1881년 9월 정부에서는 개화 정책의 구체적인 표현의 하나로 무비 자강의 계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청의 부국 강병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톈진의 군사 공업 기지로 가서 근대식 병기 기술을 학습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직예총독 이홍장의 건의가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유학생 38명을 포함한 70여 명의 일행이 청국의 톈진에 있는 기기국으로 떠났다. 당시 유학생들은 주로 공장들이었다. 이들은 9월 26일에 떠나 11월 17일에 북경에 도착하고, 관리들과 협의하여 1882년 1월 38명의 유학생은 기기국의 동․남국 및 수사(水師) 학당과 수뢰(水雷)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무기 제조법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 각 분야와 외국어도 습득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1882년 10월 학습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중에 귀국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먼저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영향도 있었으며, 학도 중에는 각종의 사유로 도중에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재정의 어려움으로 유학 경비의 조달이 어려워졌으며, 서울에 기기창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유학생들의 귀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영선사의 파견은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학도들의 비교적 체계적인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학습에 따라 과학 기술의 수용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귀국한 다량의 과학 기술서적과 기계류는 이후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유학생들이 귀국한 후 그들이 중심이 되어 기기창(機器廠)이 설립되었다. 한편, 영선사로 청국에 가 있던 김윤식은 이홍장과 교류하면서 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는 데 활약하였다.

▨ 척화 주전론

19 세기 중반 이후 서양 열강의 침략 세력의 접근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권과 민족 문화 전통을 수호한다는 사상적 기반으로 전개된 것이 척화 주전론이다. 1866년 프랑스의 침입 사건은 서양의 침략 위협이 직접 현실화되는 것으로서,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즉, 병인양요는 군사적인 침략일 뿐 아니라 서양 자본주의의 경제적 침략이었으므로, 군사상, 경제상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시대 상황에서 제기된 사상이었다. 이는 병인양요 당시 사직소를 제출한 이항로의 상소 내용에 가장 대표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그는 서양의 침략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보고, 이를 막아 싸워 물리쳐야만 국가의 보존과 민족의 생존이 유지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안으로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주장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 왜양 일체론

1876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화도 조약의 체결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일본과의 조약 체결은 서구의 자본주의 침략 세력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 나라에 침략하는 것으로 보고 일본과의 수교와 개항을 반대하는 논리로 제기된 척사론이다. 이 주장은, 강화도 조약을 반대한 최익현의 상소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최익현은 조약 체결의 불가함을 오불가소(五不可疎)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첫째,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자주의 위기, 둘째,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 산업의 파괴, 셋째 일본은 서양의 적과 같으며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 예의의 위기, 넷째,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자에 대한 약탈의 위기, 다섯째, 일본은 금수와 같으므로 문화 민족인 우리가 그들과 교류할 때에 도래할 문화의 위기 등이다. 이는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우리에게 닥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의 위기를 통찰한 주장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의 우월한 문화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최익현의 왜양 일체론은 단순히 일본과 서양이 동일하다는 각도에서 나타난 배타적인 척사론이 아니라, 일본이 서양의 침략 세력과 동일하게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므로 이에 대해 그들보다 우수한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함께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신사 척사 운동

1880년 후반부터 시작되어 1881년에 격렬하게 전개된 척사 운동이다.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은 고종과 개화 세력의 적극적인 개화 정책의 추진에 자극제가 된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통을 고수하면서 밖으로부터 침투하는 이질 문화 내지 이와 결부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침략 세력을 막아야 된다는 척사론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척사론자들은 적극적 개화 정책의 계기가 된 조선 책략을 비판하고 이를 들여 온 김홍집을 비난하면서 나아가 정부의 개화 정책을 비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고종을 비난하기에까지 이르러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척사론의 주장자들인 유생들은 집단적인 상소 운동을 전개하여, 영남 유생 이만손의 만인소, 강원도 홍재학의 만인소는 그 대표적이다. 신사 척사 운동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개화 세력과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는 위정 척사 세력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개화와 보수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19세기 말 근대화의 추진과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자주권을 수호해야 하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서 민족의 대응 과정이 내부적 분열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나타낸 결과를 초래하였다.

▨ 제물포 조약

1882년 임오군란으로 서울의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으로 별기군의 교관인 호리모도 소위와 육군 어학생 2명과 외무성 순사 1인이 살해되었다. 청군의 개입으로 난이 끝나고 홍선 대원군이 납치되자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의 사과와 배상 요구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한 군대 출동 등을 결의하고 조선에 압력을 가하였다. 일본으로 쫓겨갔던 하나부사 공사가 서울로 돌아오자 조선의 전권 대신 이유원과 부관 김홍집은 그를 상대로 협상을 시작하여 1882년 7월 6개조로 된 제물포 조약과 수호조규속약을 체결하였다.

<제물포 조약>
제 1 조.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범인을 체포하여 엄징할 것.
제 2 조. 일본국 피해자를 후례로 장사 지낼 것.
제 3 조. 5만 원을 지불하여 피해자 유족 및 부상자에게 급여할 것.
제 4 조. 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
제 5 조. 일본 공사관에 군대를 주둔시켜 경비에 임하는 것을 허용할 것.
제 6 조. 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여 일본국에게 사죄할 것.
<수호조규속약>
제 1 조. 부산, 원산, 인천 각 항에 일본인 이정을 사방 각 50리로 하고 2년 후에는 다시 100리로 할 것.
제 2 조. 일본 공사와 영사 및 그 수행원이 조선 내지 각처를 여행할 수 있게 할 것.
이로 인해 일본인의 한국 내 왕래가 활발해져서 경제적 침투가 더욱 유리해졌으며, 특히 제물포 조약에 의해 서울에 공사관 호위라는 명목으로 일본 군대가 상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일본국에 사죄 사절을 파견한다는 조약에 따라 박영효를 정사, 김만식을 부사, 서광범을 종사관으로 하는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이 때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

임오군란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을 하게 된 청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에 뒤진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청국측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선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조선측에서도 조선 책략에 제시된 친중국론을 실행하고 조선을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선 내의 일본 상인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청 상인들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882년 8월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간섭을 증대하고 일본에 대항하는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청은 조선과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전문 8조로 된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며, 청국 상인들의 특혜를 인정하고, 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 상무 위원을 파견하는 한편, 그의 치외 법권을 인정하며, 종래 실시하던 국경 무역을 개방할 것 등이다. 이 조약은 결과적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강화한다는 데 있었으며, 청 정부의 보호 밑에서 청 상인들이 각지에서 활동하여 일본 상인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농촌의 경제적 파탄이 가속화되었다.

▨ 개화 사상에 영향을 준 서적

19 세기 중엽 이후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무물에 대한 정보는 주로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이었다. 이들 서적에는 중국인이 저술한 것도 있으며, 많은 분량이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조선 후기에도 같은 현상으로 천주교에 관련된 서적은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얻게 해 주는 정보원이 되었던 것이다. 개화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도 이는 같은 상황이었다. 1880년대 이후에는 일본이 신지식의 통로로 활용되었지만 아직도 중국은 중요한 통로였다. 이는 당시의 지식인의 지적 바탕이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와 개화파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요 서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역사․지리>
해국도지(海國圖志 ; , 1844년), 영환지략(瀛環志略 ; , 1850), 지구설략(地球說略 ; 미국 선교사 Richard Q. Way, 1856), 보법전기(譜法戰記, 王 , 1872)
<정치․법률>
조선 책략(朝鮮策略, , 1880), 만국공법(萬國公法, 미국 선교사 William Alexander Par - sons Martin, 1864), 흥아회잡사시(興亞會雜事詩 ; 1880년 일본에서 설립한 친목회 흥아회 회원들이 지은시), 이언(易言 ; , 1880)
<자연 과학>
격물입문(格物人門 ; 1866), 박물신편(博物新編 ; 영국 의사 Benjamin Hobson, 1855)
<신문․잡지>
신보(申報 ; 영국 상인 Ernest Major, 1872), 만국공보(萬國公報 ; 미국 선교사 Yong J. Allen, 1868),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 미국 선교사들, 1872), 격치휘편(格致彙編 ; 미국 선교사 John Fryer, 1876)
<한국인 저술 및 번역>
기화근사(箕和近事, 김옥균), 지구도경(地球圖經, 박영교), 농정신편(農政新編, 안종수)

▨ 한성 순보(漢城旬報)의 발행

한성 순보는 1833년 10월에 창간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이다. 일간이 아니고 관보의 의미도 있어 신문이라고 하기에 미비한 점도 있으나, 새로운 소식을 게재하며 정기적으로 발행되었으며, 그 체제가 신문의 형태를 따랐기 때문이다. 1882년 말 임오군란의 결과 일본에 수신사로 간 박영효는 신문이 개화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귀국하면서 일본의 신문 기자와 인쇄 기술공을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한성 판윤으로 임명되자 신문 제작의 실무를 유길준에게 위촉하였다. 유길준은 신문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창간사를 작성해 놓았으나,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물러남에 따라 일시 그 일이 중지되었다가 1883년 8월 박문국이 설치되고 10월 30일에 창간호를 간행하게 되었다. 순보는 10일에 한 번씩 14개월 간 빠짐없이 간행되어 모두 40호 정도 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간행이 중단 되었다. 순보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 과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어 국민에게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하였으며, 한국의 개화 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86년 1월 1일부터 1주일에 한 번씩 한성 주보로 속간되었으나, 재정이 어려워 1888년 7월 폐간되었다. 특히, 주보는 국한문을 혼용하여 그 독자층이 확대되었으며, 그 영향도 사회 전반에 미쳤을 것이다.

▨ 유학생의 파견

새로운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은 유학생 파견으로 나타났다. 유학생의 파견은 개화파 인사들, 그 중에서도 김옥균이 앞장 서서 추진하였는데 대부분 일본에 치중되었다. 1881년 신사 유람단이 일본에 갔을 때, 수행원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서 유길준과 유정수가 경응 의숙에, 김양한이 조선소에, 윤치호가 동인사에 각각 유학하였으며, 1882년 김옥균이 국왕의 특명으로 일본에 가면서 수행원인 변수와 김용원이 화학과 양잠 학을 공부하였으며, 또다른 사람들은 육군 학교와 가죽 공장에 유학하였다. 임오군란 후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역시 그 일행 중에 경응 의숙과 동인사에 유학하였으며, 1883년 김옥균이 차관 교섭차 일본에 갈 때도 다수의 유학생을 인솔하였다. 박영효가 신문 제작 기술자로 데리고 온 일본 기술자가 귀국할 때 김옥균의 주선으로 17명이 도야마 육군 유년 학교에 유학하였는데, 서재필이 여기에 끼여 있었다. 그리하여 1883년 말에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은 약 50명이 되었으나, 개화당이 추진하고 있던 차관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비가 부족해져 1884년 봄에는 대부분 귀국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거의 개화당에 가담하였으며, 갑신정변에 참여하였고, 그 후 한국 근대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1881년 청국 톈진에 영선사를 따라 무기 공장에 공부하러 간 학도들도 유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학생의 필요성은 그 후에도 정부에서 잘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895년 초(양력)에 발표된 홍범 14조에서도 ‘ ’라고 하여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 개화당의 차관 도입 교섭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지출이 증대하여 재정난이 계속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는 개화당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대하는 데도 필요한 일이었다. 김옥균은 이 일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이본을 왕래하였으며, 고종도 이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1882년 3월에 1차로 이본에 갔으나 차관을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882년 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김옥균이 동행하여 2차 일본 방문을 하여 17만 원의 차관을 얻었다. 이 돈은 임오군란에 대한 배상금으로 일부 지불하고, 나머지는 신문 제작비와 유학생 경비로 충당하였다. 박영효가 귀국한 뒤에도 김옥균은 계속 남아 차관 교섭을 하여, 국왕의 위임장이 있으면 차관을 하겠다는 일본측의 약속을 받고 일시 귀국하여 국왕의 위임장을 받아 1883년 5월 일본에 갔다. 그러나 일본은 김옥균이 조선의 정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지 못한 현실을 들어 차관 교섭을 기피하고 있는 사이 조선 정부의 보수 세력이 차관 교섭을 방해하여 결국 김옥균의 차관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차관을 통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감에 비상 수단으로 정변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 갑신정변 실패 후의 개화당 인사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변에 참가하였던 개화당의 주요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었다. 이들은 쫓겨가는 일본의 공사 일행과 함께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선박 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미국에 갈 계획이었으나 여비를 구하지 못해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김옥균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본국에서 계속 건너오고, 일본 정부가 그의 존재를 거북하게 받아들여 멀리 외딴섬으로 보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자객으로 온 홍종우의 꼬임에 빠져 1894년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나, 상하이에서 머물고 있던 차에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세 사람은 1885년 함께 미국으로 갔으나, 곧 헤어져서 박영효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왔고, 1894년 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사면을 받아 귀국하였다가, 1895년에 내무 대신과에 있다가 돌아와 1895년 법무 대신과 학부 대신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공사가 되기도 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고 의학 공부를 하여 병원을 경영하는 등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1896년 귀국하여 독립 신문을 간행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그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 한성 조약

189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 공사관 일행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탔으며, 일본인이 살해당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 공사가 정변에 개입되었다고 일본을 비난하면서 양국사이에 외교적 접촉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로 맺어진 것이 한성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조선 정부는 일본에 망명한 개화당 인사들의 송환요구와 정변 개입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정부에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새 공사관을 지을 땅과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였다.

<한성 조약>
제 1. 조선국은 국서를 일본에 보내 사의(謝意)를 표명할 것.
제 2. 일본국의 해를 입은 유족 및 부상자를 휼급하고 상민의 화물이 훼손 약탈된 것을 전보(塡補)하기 위하여 조선국에서 십만원을 지불할 것.
제 3. 일본인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사문 나포하여 엄벌에 처할 것.
제 4. 일본 공사관은 신기지로 이축함을 요하는바 조선국은 마땅히 기지 방옥을 교부하여 공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하도록 할 것이며, 그 신축, 중건에 있어서는 조선국이 다시 2만원을 지불하여 공사비에 충용하도록 할 것.
제 5. 일본 호위병의 영사는 공관 부지를 택하여 정하고, 임오속약(즉, 제물포 조약) 제 5관에 비추어 시행할 것.
(부칙)
1. 제 2, 제4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계산할 것이며 3개월 기하여 인천에서 완불할 것.
2. 제 3의 흉도를 처단함은 입약 이후 20일을 기한으로 할 것.

▨ 톈진 조약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울에서 개화당 정부를 지원한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과 조선 정부를 지원한 청국군의 교전이 일어난 사건은 정변 이후 두 나라 사이에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정변이 끝난 후 한성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공사가 거느리고 온 일본군이 다시 서울에 주둔하게 됨으로써 청․일 양국의 군대가 제 3국에서 대치하게 된 상황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화된 그들의 세력을 회복하여 청과 균형된 상황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청국과의 외교적 담판이 필요하였다. 당시 청국은 프랑스와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 중 이어서 조선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한 상황임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2월 18일부터 3월 4일사이에 6차에 걸친 회담을 거쳐 이토 히로부미와 이 홍장 사이에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과 청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조선과 관련된 문제였으나, 조선의 의사는 일체 고려됨이 없이 두 나라 사이에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첫째,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는 것이고, 둘째,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출동할 필요가 있을 때는 서로 사전에 통보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의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조선에 출병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일본의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톈진 조약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은 더욱 심해졌으며,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면서 앞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위해서 청국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청․일 양 국의 경쟁적인 경제 침투로 인하여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고 농촌 사회에 현실 문제를 극복하려는 농민들의 의식이 고조되면서 동학 사상이 파급되며, 현실을 적절하게 이끌어 가지 못하는 정부와 양반 계층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으며, 이에 따라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전통 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고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톈진 조약>
1.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공사관을 호위하기 위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 날인한 날로부터 기산하여 4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그 이내에 각기 전체를 철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분쟁 야기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다. 중국군은 마산포로부터, 일본군은 인천항으로부터 철수한다.
1. 양국이 함께 승낙한 것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치안을 스스로 지키도록 조선 국왕에게 권하며, 또 조선 국왕에 의하여 다른 외국의 무관 1인이나 혹은 수인을 선발하여 교련의 일을 위임케 하되 이후 청․일 양국은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교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1.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청․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을 요할 때에는 마땅히 우선 상대방 국가에게 문서로 알릴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회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 방 곡 령

일본 상인들에 의한 한국의 곡식이 일본에 유출되어 한국 농촌의 곡식은 부족해지며, 곡식값이 폭등하여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져 갔다. 더욱이 흉작이 계속되어 농민의 참상이 더하였다. 정부에서는 한․일 간에 체결된 통상 장정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수정하여 한국에서 병란이나 흉작 등으로 국내에 식량이 부족할 경우 지방 장관의 방곡 망령으로 미곡 수출을 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방곡령을 발하기 1개월 전에 해당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통보하기로 하였다. 방곡의 문제는 그 이전에도 일정 지역 안의 미곡을 그 지방의 납세나 주민의 자금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방관의 이름으로 타 지방으로 미곡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880년대에는 일본 상인들의 횡포로 미곡이 유출되자 곳곳에서 방곡이 시행되어 서울에 반입되는 쌀의 양이 줄어들어 쌀값이 폭등하고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1889년 함경도 감사의 콩수출 금지와 1889년 황해도 감사의 쌀 수출 금지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쌀 유출이 금지되게 되자 이익을 못 내게 된 일본 상인들은 일본 공사관과 결탁하여 방곡 시행 1개월 전에 사전 통보한다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 상인들이 입은 손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하라고 강요해 왔다. 그 후 경상도 지역에서도 방곡령이 발표되었는데, 방곡령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는 농촌 사회에는 반일 감정이 팽배해져 갔다.

▧ 보은 집회

1882년 삼례 집회와 1893년 복합 상소 운동을 통하여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과 지방관의 동학 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동학의 지도층은 본격적으로 저항 또는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문을 보내 보은에 교도를 집합시켜, 모인 교도의 숫자가 2만여에 달하였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동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수많은 인원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의 농촌 사회가 정부에 대해 불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정부의 국민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보은 집회는 동학의 움직임이 단순히 종교적인 활동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교도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표방하고 지방관의 횡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보은 관아의 삼문 앞에 게시된 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왜양의 적이 나라의 중심부에까지 침입함으로써 문란이 극도에 달하고 있고, 이에 따라 국도는 필경 이적의 소혈이 될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들은 동력서사(同力誓死)하여 왜양을 소탕하여 대의를 이루고자 한다.” 하였으니, 교조의 신원을 말하는 내용은 이미 자취가 없으니 이제는 단지 종교적 자유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왜양을 쳐부수겠다는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 동학의 조직

동학은 크게 충청도 지역의 북접과 전라도 지역의 남접으로 두 개의 계열이 있었다. 최제우가 처형되기 전에 최시형을 북접 도주로 임명하였으며, 또다른 사람이 남접 도주로 임명된 사람은 명확하지 않지만 뒤에 남접의 지도자로 서장옥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였다. 처음에 동학 농민군이 봉기할 때 그 시작은 남접에서였으며, 북접에서는 그 후 에 참여하였다. 동학의 포교는 제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그의 포교 활동은 1878년경 이후에 크게 활발해졌으며, 그 교세는 충청, 경상,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 강원도까지 파급되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더욱 번성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교단 조직이 갖추어졌다. 각처에 접소(接所)를 두고 여기에 대접주, 도접주, 수접주, 접주 등의 직책을 두었다. 즉, 큰 지역에 대접주를 두고 그 밑에 몇 명의 접주를 두어 소지역을 나누어 포교를 분담하였으며, 면에는 면접주가 있는 곳도 있었다. 한편 포(包)는 교구제도와 같은 것으로 대접주로 포주를 삼아 그 밑의 접주를 통솔하였다. 각기의 포에는 여섯 가지의 사무를 분장하여 이를 육임제(六任制)라 하였다. 접과 포는 동학 조직의 기본이었으며 이는 교단 조직이면서 동시에 교도를 동원하는 조직이기도 하였다.

▨ 군국기무처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중심 기관으로 설립된 일종의 국정 최고 기구의 성격을 가진 특설 기구로서 김홍집이 영의정으로서 총재로 임명되었으며, 기타 구성원으로는 부총재 1명과 20명 미만의 의원이 있었다. 운영은 합의제이며 공개적이고 다수결로 의결하여, 흥선 대원군에게 보고하고 최종적으로 국왕의 재가를 받는 절차를 거쳤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적 절차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왕과 왕비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정권 대행자의 위치에 있었던 흥선 대원군의 간섭도 배제하여 초정부적인 입법부의 성격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대체로 당시 일본의 원로원과 추밀원의 관제를 모방한 것으로 조직상으로는 의정부에 속하였지만 영의정 이하 정부 대신과 군사 지휘관 및 경찰 지휘자도 의원의 구성원으로서 이 기구 자체를 구속할 수가 없었다. 고려 말의 도평의사사 또는 조선 후기의 비변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7월 27일 설치되어 12월 17일 폐지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205건(혹은 208건)의 개혁안을 처리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1차 개혁

1894년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내용의 개혁이 실시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의정부 관제와 궁내부 관제, 경무청의 신설, 최고법원인 의금사의 설치, 관등의 축소(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관리의 월봉제 실시, 과거 제도 폐지와 새 관리 임용 제도 실시, 은본위제의 화폐 제도 실시, 문무관의 차별 폐지, 죄인 연좌법의 폐지, 공사 노비 제도의 혁파, 양자 제도의 개선, 조혼의 금지, 과부의 재혼 허용, 조세의 금납제, 도량형 통일 등이다. 이 기간에는 일본이 제2차 동학 농민 봉기로 교전 중이며 동시에 청․일 전쟁이 진행 중이어서 일본의 간섭이 비교적 미치지 못하여 혁신 관료의 독자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제1차 개혁은 정치 제도의 개혁이며, 국민의 개혁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며, 친일 세력의 개혁이라는 반발이 따르기도 하였으며, 국민의 오랜 관습으로 내려온 조혼 금지나 양자 제조 또는 과부 재가 허용 등은 실시되지도 못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2차 개혁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이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었으며, 동학 농민군도 그 저항이 약화된 상황이어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려는 의도에서 그 동안 개혁의 추진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반일적인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박영효를 사면하도록 하여 개혁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군국기무처가 해체되고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박영효는 내무 대신을 맡아 실권을 잡고 실제로 개혁을 주도하였다. 1895년 1월 9일 국왕이 직접 개혁에 앞장 선다는 의미로 조종(祖宗)에게 서고하고 개혁 정치의 내용을 내외에 선포하는 홍범14조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한 개혁으로는 의정부를 내각으로, 정부 기관의 명칭을 아문에서 부(部)로, 지방 제도를 23부(府)로, 신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한성 사범 학교와 외국어 학교의 설립, 사법부의 독립, 군사 제도의 일원화와 훈련대 사관 양성소 설치 등이다. 제2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개입되었으나, 청․일 전쟁 후에 일어난 삼국 간섭의 와중에서 일본의 적극 개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박영효 중심의 독자적 개혁의 성격이 있다.

▨ 갑오개혁기의 제3차 개혁

제2차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김홍집이 물러나고 박영효가 일시 총리 서리를 맡았으며, 박정양이 총리가 되었다. 박영효가 반역 음모 사건으로 실각되고 김홍집이 다시 총리가 되었으나 삼국 간섭 이후 내각에 친러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때, 일본은 친러 세력의 배후가 명성 황후라는 사실을 알고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부랑배를 동원, 궁중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하였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3차 개혁은 박정양 다음에 김홍집이 다시 총리 대신이 되는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옮겨가는 때까지이다. 이 개혁을 보통 을미개혁이라고도 한다. 중요한 개혁 내용으로는 서울에 관립 소학교 설립, 건양 연호 사용, 태양력 사용, 우편업무의 재개, 군제 개혁으로 친위대와 진위대 편성, 단발령의 발표 등이다. 명성 황후 시해에 대한 반감에 더하여 단발령에 따른 반발이 결국 항일 의병 항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활빈당(活貧黨)

1898~1904년 기간 동안에 농촌에서는 활빈당이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활빈당은 본래 화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집단`이라는 의미의 활빈(活貧)당이라는 이름을 내건 다음에는 의적(義賊)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898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반침략, 반봉건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평소 40~50명 적으면 10~30명 단위로 총과 칼로 무장하고 말을 타고 다니며 양반 부호가의 재물을 빼앗아 이를 빈민이나 영세 소상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그들은 외국 상인이나 외국 자본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활빈당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민중의 경제 안정과 제국주의의 이권 침탈에 대한 반대를 나타내었다.
“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을 채용할 것”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금할 것”
“행상인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금할 것”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타국에게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보안회(保安會)의 활동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 의정서를 강요한 직후 이른바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및 세목’ 등의 대한경영안(對韓經營案)을 만들어 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진행하면서 내하(內河) 및 연해 어업권을 비롯하여 철도 부설권과 관리권, 통신 기관 권리권, 삼림 벌채권,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강점하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도 강탈하려 하였다. 일제는 주한 공사를 통하여 50년간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일본인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 속에는 황무지의 개간, 정리, 척식 등 모든 경영권과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권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일제는 황무지를 개척하고 그곳을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요구가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반대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04년 7월 13일 전의관(前議官) 송수만, 심상운 등이 중심이 되어 보안회를 조직하였다. 보안회는 종로 백목전(白木廛) 도가(都家)에 본부를 두고, 공개적으로 성토 대회를 열어 일제의 황무지 요구에 결사 반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정부 고관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확산되었으며, 지방의 진위대가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는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보안회 지도 인사들을 납치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이 계속 되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정부는 일본 경찰의 철수를 요구하는 동시에 촌토의 땅도 외국인에게 내어 주지 않을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고 보안회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보안회 운동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선두에서 전개한 대중적 항일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에 해당된다.

▨ 헌정 연구회

보안회가 해산한 뒤에 협동회, 공진회, 진명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었으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고, 1905년 5월에 독립 협회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헌정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헌정 연구회는 이준, 양한묵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과 정부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야 되며, 국민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자유롭게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입헌 의회제도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특히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나 대한 제국 정부에서 민간인이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으며, 더욱이 을사조약이 강요된 이후에는 한국인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였으므로, 합법적인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한 자강회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지식인들과 민족 운동가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산업의 진흥과 교육 보급 등 사회 문화운동으로 그 활동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4월에 창립된 단체가 대한 자강회였다. 대한 자강회는 헌정 연구회를 계승하여 윤치호를 회장으로 하고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임진수, 김상범 등 발기인 5명을 포함한 10명의 평의원, 최재학, 정운복 등 10명을 간사원으로 하는 지도부를 구성하여,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에 27개소의 지부를 두었다. 대한 자강회의 목적은 자강회 규칙 제 2조에 ‘교육의 확장과 산업의 발달을 연구, 실시하는 것으로 자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후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에서 보이듯이 국권 회복의 기초가 되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애국주의적 신지식을 교육하고 근대 산업을 일으켜 국민의 자강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 목적은 당시 국권회복을 위해 직접적이고 무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의병 활동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자강회에서는 무력 대결은 시기와 역량을 고려하지 못한 무모한 행위라고 하여 비판하였다. 대한 자강회는 국민의 계몽을 위해 정기적으로 연설회를 개최하고 ‘월보’를 발행하였다. 월보의 창간호는 1906년 7월호부터인데 자강회가 해산당하는 1907년 7월까지 13호가 나왔다. 월보의 내용은 학교 교육 운동, 사회 교육 운동, 사상 확대 계몽 운동, 정치․경제에 관한 논설 등 다양하였으나, 주로 교육에 관한 것이 많아 학교 설립과 의무 교육의 주장, 학계의 소식, 여러 가지의 교육 내용 등을 다루었다. 대한 자강회는 통감부의 감시 하에서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의 활동이었으므로 그 활동의 폭이 좁아 보다 대중적이고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지식인 중심의 계몽운동이었다는 한계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대원장부(大垣丈夫)를 택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또 월보의 문체가 토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자로 되어 있어 일반 대중이 읽기에는 너무 어려웠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더욱이, 통감부의 일본인들은 자강회의 배후에서 그 조직을 조정하고, 전국의 항일 지식인들을 파악하여 이들을 조정하고 항일 의식을 둔화 마비시키고자 하였다. 통감부에서 관찰사나 군수 등의 관리에 자강회 회원을 발탁한 것도 통감부의 교활한 민족 분열책이었던 것이다.

▨ 신민회(新民會)

대한 자강회의 해산 이후 국권 회복을 전제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비밀 결사로서 그 이전의 합법적인 단체와는 성격과 활동 내용에서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미국에서 동포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다가1907년 2월 귀국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연회 등을 통해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신민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 애국적 선구자들이 자기 수양에 힘써 역량을 키우고 민중의 모범이 될 것.
○ 그러한 동지들이 굳게 단결하여 힘을 더욱 크 게 할 것.
○ 그 힘으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전력하여 민족 적 역량을 준비할 것.
○ 그리하여 앞으로는 오는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주적 역량으로 민족 재생의 큰 사업을 이룩할 것.
신민회는 양기탁을 총감독으로 하고, 안창호,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등이 창건위원이 되었으며, 중심 인물로는 최광옥,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조성환, 김구, 신채호, 이강,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등이었다. 신민회의 조직 체계와 규정은 신민회가 비밀주의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회원은 전국적으로 약 8백 명에 달하여 당시 주요계몽 운동가는 거의 망라되었으며, 특히 서북 지방의 교사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종적인 연락에 의해 비밀을 고수하면서 회원 각자가 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업으로 는 1908년 평양 대성 학교의 설립과 운영이며, 평양의 마산동에 설립한 자기 회사와 서울, 평양, 대구에 설치한 태극 서관이었다. 태극 서관은 손님으로 가장한 신민회 회원들의 연락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자체 내에 인쇄 시설을 갖추어 각종 도서를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일제가 조작한 총독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된 105인이 사건을 계기로 그 지도부가 체포되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한편, 신민회는 청년 운동의 일환으로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주로 서북 지방에 분회를 두고 청년의 인격 수양과 단체 생활의 연마, 일인 일기 교육으로서 직업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안창호는 청년 학우회의 4대 정신으로 무실, 역행, 충의 , 용감을 내세웠다. 청년 학우회는 청년 수양단체로서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1910년 국권 침탈과 함께 모든 단체가 해산될 때 함께 해산당하였다. 청년 학우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에 의해 흥사단이 설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수양 동우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의 활동 중에 해외에 독립 운동 기지를 만들어 국권 침탈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공헌하였다.

▨ 서북 학회

1908년 1월 이미 활동하고 있던 지역 학회인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통합되어 설립되었다. 1907년에 강제 체결된 정미 7조약으로 보안법과 신문지법이 만들어져 국권 회복 운동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상황에서 기존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여 현실적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신민회의 창립으로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의 회원들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서북 학회로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그 설립 취지와 목적이 동일하여 양 단체의. 통합은 예견된 일이었다. 1907년 3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서울 유학생들이 친목 단체로 서북 학생 친목회를 결성하여 친목 활동과 더불어 애국심 고취와 애국의길 을 도모하는 데 목적을 두었는데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이를 후원하였다. 1908년 1월 2일 임시 회장 이동휘의 지도하에 양 학회의 인사 149명이 참가하여 창립 총회를 열었는데 선출된 임원은 회장에 정운복, 부회장에 강윤희, 총무에 김달하, 부총무에 김주병, 평의원에 이종호, 태명식, 이갑, 정진흥, 김명준, 최재학, 주혁, 현승규, 윤익선, 오주혁, 주동한 등이었다. 서북 학회의 설립 취지와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하여 근대 문명 국가를 건설 한다. 둘째, 지식과 세력을 양성하여 사회 발달과 문명 증진을 꽤한다. 셋째, 실력 양성으로 민력을 증진한다. 넷째, 단체들이 하나로 되어 민력을 결집시킨다.

▨ 기호 흥학회

1908년 1월 19일에 정영택 등의 발기로 경기도 및 충청 남북도의 학문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기호 지방이 옛날부터 정치와 문화 및 학문의 중심지였으므로 이 전통을 지킬 것을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전국 청년의 교육에 힘써야 할 것은 늦출 수 없는 급무‘라고 하였다. 각지에 지회 설립에 착수하여1909년 7월까지의 지회 상황을 보면 경기도에 광주, 수원, 양근, 장단, 교하, 강화 등 6개소, 충청 남도에 서산, 공주, 연산, 당진, 해미, 목천, 홍주 등 7개소, 충청북도에 청주, 충주, 청양, 풍덕 등 4개소로 모두 17개소였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기호 학교 등 학교 설립과 운영, 월보의 발간, 강연회 등을 통한 계몽 활동 등이었다.
3. 근대의 경제와 사회


▨ 일본 상인의 쌀 유출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상인들이 한국에서 수입 한 것은 쌀, 쇠가죽, 콩, 생사, 인삼 등 주로 1차 생산품으로서 그들의 국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원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쌀은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1887년부터 1882년 5개년 동안에 부산과 원산을 통해 한국에서 유출된 쌀은 전체 수출량의 30%에 이르렀으며, 콩은 10%였다. 1882년 이후에는 콩 유출량이 점점 늘어나더니, 1980년대에 들어 다시 쌀의 유출량이 증가되었다.
당시 한국의 쌀값이 일본의 ⅓에 해당되었으므로 일본 상인들은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상인들은 많은 쌀을 경쟁적으로 유출시켰고, 상대적으로 한국 내의 쌀이 부족해져 쌀값이 폭등하여, 당시 흉작이 겹친 농촌 경제와 일반 서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상인들은 전라도 곡창 지대에서 입도 선매 등의 방법으로 싼값으로 쌀을 유출하였다.

▨ 열강의 이권 침탈

자본 수출을 통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 정책은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서 후진 지역의 광산, 철도, 농장, 공장 등의 개발과 경영에 투가하며, 후진 지역의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손쉽게 확보하여 막대한 이윤을 보장받으려는 것이 식민지 침략의 목적이었다. 1984년 이전에는 주로 상품 수출의 형태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 침략이 진행되었으며, 주로 일본과 청국의 상인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또, 해관 세수권, 연안 어부 채취권, 전신 부설권, 저탄소 설치권 등이 역시 일보노가 처국에 의해 독점되었다.
청․ 일 전쟁 이후에는 광산이나 철도 등 보다 중요한 자원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침략당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남북을 종단하는 철도 기본 간선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삼국 간섭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1896년 아관 파천을 전후하여 주요한 이권들이 러시아와 미국에 넘어갔다. 이는 당시의 조선 정계에 친러파와 친미파 세력이 증대되고 있었던 것과도 연결된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 쟁탈 대상은 철도, 광산, 전기, 수도, 전신 등 국가의 기간 산업부분이었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값싼 한국의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약탈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는 그들에게 예속되어 민족 자본의 성장이 억제되었고, 자주적 근대화의 진전에 장애를 받게 되어싿. 이들은 광산의 개발권과 철도의 부설권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경영권까지 장악했으며, 인근의 토지와 산림까지 장악하였다.
열강의 이권에서 나오는 이윤은 막대한 것으로서 미국의 운산 금광의 경우 1902년의 국내의 금생산의 ¼을 차지하였고 연간 순수익률의 증가는 300%에 달하였다. 1897년~1915년 사이의 금 생산고는 4천 9백 50만 원이었는데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될 당시 일본에 진 국채가 1천 3백만 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권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만한 일이다.
1895~1904년의 제국주의 열강의 한국에 대한 주요 이권 침략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일 본>
경부 철도 부설권 1898
평양 탄광 석탄 전매권 1898
경인 철도 부설권(미국으로부터매입 1898
충남 직산 금광 채굴권 1900
경기도 연해 어업권 1901
인삼의 수출 독점권 1901
충청, 황해,평안도 연해 어업권 1904

<미 국>
평북 운산 금광 채굴권 1895
경인 철도 부설권(1898 일본에 백만달러에 매도함.) 1986
서울 전기,수도 시설권 1897
서울 전차 부설권 1898
<러시아>
함북 경원 종성 금광 채굴권 1896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1896
압록강 유역, 울릉도 삼림 채벌권 1896
부산 절영도 저탄소 설치권 1987
동해안 포경권 1899

<프랑스>
경의 철도 부설권(일본에넘김) 1896
평북 창성 금광 채굴권 1901
평양 무연탄 광산 채굴권 1903

<영 국>
평남 은산 금광 채굴권 1898

<독 일>
강원도 금성 당현 금광 채굴권 1898


▨ 메가다의 화폐 정책

1904년 8월 러․일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침략하기 위한 소위 ‘ 대한 시설 강령 (對韓施設綱領)’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제 1차 한․일 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대한 제국 정부는 일본이 추천하는 외교와 재정 고문을 채용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이 때, 외교 고문으로 온 사람이 미국인 스티븐스이고, 재정 고문은 일본인 메가다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를 정리하여 일본의 금융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가 문란하고 재정이 고갈되었으니 화폐를 급속히 정리하고 국가 재정의 원천인 세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1905년 9월 18일 화폐 조례를 만들어 일본의 화폐 제도에 따른 금본위제로 하고, 한국에서 그 동안 통용되고 있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여 일본 제일 은행권을 본위 화페로 하였다.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일본 상인들의 농간에 의해 많은 손해를 보았다.
메가다의 화폐 정책은 한국 상인의 자산과 화폐를 일본 상인들에게 넘겨 주어 한국의 경제를 일본이 장악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극심한 금융 공황이 일어나 한국 상인들은 도산하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농촌 경제를 분해시켜 농민을 농촌에서 유리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메가다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것을 강요하여 일본 정부와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재정적 예속을 강화하시켜 나갔다.

▨ 국채 보상 운동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재정 고문 메가다의 강요에 의해 대한 제국 정부는 190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2백만 원의 공채를 모집하고,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3백만 원과 12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오십만 원의 차관을 들여 왔다. 또, 통감으로 온 이토는 ‘한국의 시정 개선’을 위해 세관 수입을 담보로 하여 일본 흥업 은행으로부터 일천만원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다.
통감부는 차관으로 들여 온 자금으로 식민지 통치 기구를 유지, 확대하며 침략과 약탈을 강화하고, 대한 제국 정부를 재정적으로 일본에 예속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매년 6.5%의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되는 이 차관으로 통감부는 한국에서 일본인의 생활 조건을 만들고 일제의 침략을 위한 시설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즉, 남포와 평양간의 도로와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영일만에 이르는 도로를 확장하고, 인천과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거류민을 위한 상수도 시설, 일본인의 관청 보수와 봉급 지불에 주로 소비하였다
통감부는 한국을 침략하면서 일본인의 한국 친투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의 형식으로 조달하여 이를 한국 정부에 떠넘기는 것이었다. 1907년 대한 제국 정부가 짊어진 외채 총액은 1천 3백만 원으로 이는 1년 세출 예산에 맞먹는 막대한 것으로서 당시 8백만 원 가까운 재정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대한 제국으로서는 외채 상환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국적 지식인들은 차관이 국권을 유린하고 식민지적 예속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보고 외채의 상환이 국권 회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이를 대중적인 참여에 의해 해결하도록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1907년 2월 16일 대구의 서상돈이 금연한 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뜻으로 단연회를 조직하고 이에 대한 취지서를 만들어 전국에 호소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본회는 일본에 대한 국채 1천 3백만 원을 보상하기로 목적함.
․보상 방법은 일반 국민의 의금을 모집함. 단,금액은 다소를 불구함.
․본회에 의금을 납부한 인원은 본회 회원 으로 인정하고 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공 포함.
․의금으로 모은 돈은 위의 액수에 달하기까 지 신용이 있는 우리 나라 은행에 일치함. 단,수합된 금액은 매월 말에 신문에 포고 함.
․본회는 목적을 달한 후에 해산함.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된 후 뒤에 국채 보상 단연 의무회, 국채 보상 일심회, 국채 보상 동정회, 국채 보상 의무소, 국채 보상부인되 등 전국적으로 20여 개의 단체가 경성되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3월 말에는 이종일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와 4월 초에는 이준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연합 회의소가 조직되어 각각 수금액의 촹괄과 국민 지도의 업무를 분담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이어졌다.
국채 보상 운동의 전국적 확대에는 황성 시문, 대한 매일 신보, 제국 신문 등 민족 신문들의 홍보 활동이 크게 작용하였다. 농민들은 식량을 판 돈의 일부를, 노동자는 어렵게 번 한 푼의 돈을, 남자들은 단연회에 가입하여 금연한 돈을, 여자들은 찬값을 절약하여. 또는 가락지와 비녀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각종 패물 등을 기생들까지도 돈을 거두었다.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단체들을 해산시키며, 지도급 인사들을 회유하여 친일 활동으로 변절시키고, 보상금 횡령 사건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일으키는 등 갖은 모략을 다하였다. 특히, 보상 운동에 앞장섰던 대한 매일 신보를 탄압하여 영국인 방행자 베델을 추방하려 하였으며, 국채 보상금 소비 사건을 날조하여 양기탁에게 혐의를 씌웠다. 결국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한민족의 순수한 애국심이 국채를 보상해서 나라를 지킨다는 소박한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국채 보상으로 국권이 수호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라를 지켜 보려는 민중의 의식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인 것이다.

▨ 증기선의 운행과 해운업의 발달

서양 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타고 온 증기선은 서양 문명의 우수함을 보여 준 대표적인 것이며, 이러한 배를 마련하는 것은 부국 강병의 중요한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1881년 개화 정책이 추진될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에서 군함을 구입하려 계획하였고, 1994년 이후에는 중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증기선을 구입하거나 임차하여 사용하였다. 해안을 따라 세미를 운반하는 데 증기선은 크게 편리하였으나 일본 증기선 회사가 이를 독점하여 이익을 챙겼다. 이에 대하여 경강 상인들이 종래 세미 운반을 맡아오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증기선을 구입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884년 정부에서 세 척의 증기선을 구입하여 세미 운반에 사용하였으며, 1889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 한국에서 증기선을 소유했던 실태는 144척에 38,403톤이었다. 189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운수업도 크게 발전하여 종래 일본 자본가에게 독점되어 오던 것을 민족 해운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대한 협동 우선회사, 인척 우선 회사, 인척 윤선 주식회사 등 해운 기업이 출현하였다.

▨ 농광 회사

러․일 전쟁을 일으킨 직후 일본은 한국 전 국토의 ¼에 해당하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해 오자, 이에 대항하여 일부 애국적인 관료와 실업인들이 한국인이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농광 회사를 설립하고 정부에 개간 특허를 요청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를 1904년 7월 11일 허가하였다.
이 회사는 황무지 개간 사업과 함께 당시 외국인이 이권으로 노리고 있던 광산 개발까지 포함시켜 모든 이권을 확보하여 외국인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이 항의하고 그들이 요구한 황무지 개척권을 강요하자 애국 지사들이 보안회를 조직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농광 회사의 해체를 요구하여 황무지 개척권 문제는 일본의 요구를 일단 막는 것으로 해결 되었다.

▨ 근대적 상회사(商會社)의 활동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 등 개항장으로 들어오는 외국 상인들로부터 외국 상품을 모아 이를 국내 각 지역에 팔고 국내의 농촌으로부터 직접 곡물을 사서 외국 상인들과 거래를 하면서 개항장과 농촌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개항장에 자리잡은 객주와 여각 및 보부상 등 전통 상인들이었다. 이들 상인들은 외국 상인들의 침투에 대항해서 상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체제의 확립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1880년대 초부터 근대적인 상업 체제로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회사릐 설립은 일본이나 청국 또는 영국 상인들의 활동에서 영향을 받은 바도 있지만 일찍이 개화 사상가들도 상사 또는 회사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한 적도 있어 이러한 내외의 분위기로 회사설립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회사들은 그 이름이 회(會), 사(社), 상회, 상사, 상회사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대부분 한자 회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설립 과정은 정부에 상회 장정을 통리아문에 보내면 아문이 허가서를 보내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결국 관허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 상회사들은 1883년경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여 갑오개혁 이전까지 전국에 약 40여 개가 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평양에 설립된 대동 상회와 서울에 설립된 장통회사(또는 장통사)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서 전국 각지에 상회 직원이 파송되었다.

▨ 근대적 섬유 공업의 발달

1880년대에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부국 강병의 방안을 강구하던 일부 개화파 중에서 근대적 산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근대적인 공업의 일환으로 면재춤 생산 기계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특히, 지석영은 1882년 근대적 직조기를 구입할 것을 상소하고 있었으며, 정부에서는 1884년 농상, 직조 등의 관영을 위해 설국치관(設局置官)을 명하여, 1885년 정부 내에 직조국(織造局)이 설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1884년에 고ㅛ종의 명으로 중국인 공장들을 모집하였으며, 1885년부터는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중국인 기술자를 더 모집하였고, 사기(紗機) 4개를 중국에서 구입하였으며, 곧이어 직금 기계(織錦機械) 32건을 구입하였다. 이외에도 중국에서 면사와 직조 기계를 몇 번에 걸쳐 구입하였다. 그러다가 1891년 이후 경영난에 따라 생산이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이후 광무개혁이 진행되면서 산업의 발전을 위한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897년 년경에 대조선 저포 제사(大朝鮮苧布製絲) 회사의 설립, 1899년에 한상 방적 고본(漢上紡績股本) 회사, 1898년에 직조 권업장이 설립되었으며, 1990년에는 한성 직조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일반인들 가운데서도 지방에 직조 회사를 설립하여 직물을 생산하였다. 1902년 2월 김덕창 이라는 사람이 서울의 중부 장통방 중곡동에 김덕창 염직 공업소를 설립하여, 외국에서 수입한 면제사를 원료로 하여 면포를 염색 직조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김덕창은 일본에서 제작한 개량식 족답직기(足踏織機) 8대화 S직조기 9대를 설치하고 40명의 직공을 고용하면서 연간 6천 4백 단의 면포를 생산하였다. 그 당시 수입 면포가 70만 단이라는 수량과 비교할 때 그 생산량은 미미한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덕창 염직 공소의 설립을 계기로 하여 서울에 38개소의 직조 공장이 설립되어 근대적인 민족 섬유 공업의 발달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영세하여 전체로 S직조기는 208대였고 한 공장당 직조기는 평균 6대에 불과한 소규모의 것이었다.


4. 근대 문화의 발달

▨ 동도 서기론(東道西器論)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에서 전해진 서양의 문물을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갔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의 우수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서양을 오랑캐로 인식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서학을 배척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이 형성되고 서양의 무력 침략에 접하면서, 특히 무기를 중심으로 한 기술의 위력을 알게 되었으며, 개항 이후 서양의 기술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의 수용은 전통적인 기술 문화를 유지하면서 부국 강병의 수단으로 기술만을 수용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다.
동도 서기론은 그 성격상 중국에서 일어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과 동일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일면으로는 전통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으나,서양의 과학 기술 문화의 근본 배경인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적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 및 과학 정신의 전통을 충분ㅁ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서양 문화 수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 박문국(博文局)

1883년 8월 통리아문의 한 기구로 설립된 박문국은 외국어를 학습하던 동문학에 부속된 기관이었다. 원래 동문학에서는 서적의 편찬과 신문 간행을 계획하였었는데 , 이 안에 박문국을 설치한 것이다.
박영효가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일본에 사절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일본으로부터 신문 제작 기술자를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유길준에게 신문 간행의 일을 맡겼다. 1883년 2월경 당시 통리아문 주사로 근무 중이던 유길준이 신문국 장정을 만들었는데, 이 때 신문을 간행하는 사무처리를 박문국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 직후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유길준도 신문 간행의 일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 후에 정부에서 신문을 간행하기 위하여 유길준이 만들어 놓은 이름을 그대로 살려 1883년 8월 17일 박문국을 설치하고 0월 30일 한성 순보가 창간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885년 6월 박문국이 중건되고 1886년 1월 25일 한성 주보로 다시 간행되어 1888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 교육 입국 조서

1895년 2월 2일에 ‘교육에 관한 조칙’으로 발표 된 교육 입국 조서는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극명하게 밝혀 주는 것이며, 1895년에 진행된 교육 개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교육 입국 조서의 내용은 교육이 국가 발전의 기반이 됨을 밝히고, 세게의 부강한 국가들이 교육을 통하여 이를 이룩하였으니 교육은 국가 보존의 긴요한 방법이라고 교육의 중요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종래 일부 계층에 제한되어 관리 등용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또는 특수 계층의 신분적 유지를 위한 성격이 강했던 교육이 국가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이룩하는 근본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으로서, 교육관의 일대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또, 교육의 기본 정신도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여, 과거에 실시되었던 교육을 허명 교육으로 비판하였다.
교육의 삼대 강령으로 덕양(德養), 체양(體樣), 지양(智養)을 제시햐여 교육이 지, 덕, 체가 조화된 전인 교육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학교를 널리 세워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국가 발전과 왕실의 안전에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박영효의 교육 이념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1888년 국왕에게 나라의 근대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개화 상소’를 올렸다. 이는 개화 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표현시킨 대표적인 내용으로서 이를 통해 개화 사상의 사상적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상소한 개혁의 방안으로 7개항을 제시하였으며, 그 가운데 교육에 관한 내용을 통해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내용을 ‘교민재덕문예이치본(敎民才德文藝以治本)이라 하여 교육을 정치의 군본이라 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구체적 방안으로 모두 열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앞서 교육의 성격을 논하면서 교육은 인간 생활의 지침이라며, 학교 설립은 국가의 급무라고 하였다. 또, 실용을 앞세운 교육을 강조하여 종래의 교육의 폐단을 비판하고 있다.
교육 개혁의 방안에는 의무 교육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소․중학교의 설립과 고등 교육의 실시, 국사와 국어 국문의 교육, 외국인 고빙을 통한 근대 학술 교육, 서적의 출판과 박물관 설치, 강연회 등 개최로 국민 계몽, 외국어 학습과 신문의 발행 및 종교의 자유 등이 있다. 그 가운데서 박영효는 특히 국사와 국문을 먼저 국민에게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고, 이를 통한 민족의 자각과 부국 강병의 정신적 기반을 이룩할 것을 제시하였다. 자국의 역사를 먼저 교육시킬 것을 강조한 것은 다른 방안에서도 제시하고 있어 그가 내세운 근대 교육이 국민 정신을 고취하여 나라를 지키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박영효의 교육애 대한 생각은 1895년 그가 내부 대신으로 직접 개혁의 실천을 담당하면서 지방관에게 개혁의 세부 항목으로 지시한 내용에서도 '먼저 그 지방의 인민에게 국사와 국문을 교육시킬 것'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교육관이 1895년 근대 교육을 추진한는 기본 이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한국의 근대 교육

한국의 근대 교육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국권을 수호하며, 동시에 자주적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한민족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한국 근대 교육은 전통 시대를 벗어나서 근대에 들어와 실시되었다는 시간적 의마가 아닌 역사적 의마가 큰 것이다. 한국 근대 교육은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적 개혁이 추진되는 내용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자주적인 개혁으로 이루어졌으며, 민족의 의자가 표현된 개혁이었다.
한국의 그낻적 개혁 과정에서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전통 체제를 탈피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이 침략이 수반되는 모순이 나타났으나, 교육 개혁은 전통 교육에서 탈피하면서 동시에 침투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적 논리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 교육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 교육 내용이 민족적 전통을 확인하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국사와 국문이 중요시되었다. 때문에 한국 근대 교육은 어느 때 어떤 상황보다도 민족적 성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근대 민족 교육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 근대적 교과서의 간행

근대 교육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1895년에 근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이라는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갑오개혁이 시작될 당시 관제 개혁에서 학무아문에는 교과서 편찬을 전담하는 부서가 설치되었으며, 그 후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학무아문으로 하여금 소학교 교과서의 편찬을 조속히 실시할 것을 논의하였다. 1895년 5월에 주일본 공사관에 훈령을 보내 교과서 편찬에 참고할 것이니 일본 교과서를 구입하여 보내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교과서 편찬이 1895년 전반에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 교과서가 참고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5년에 학부에서 발행한 교과서는 모두 17종이었으며, 주로 소학교용이었다. 처음에는 학부에서만 교과서가 간행되더니 1900년을 전후하여 민간에서도 간행되었으며, 점차 학부 간행보다도 그 수가 늘어났다. 이는 구가 재정이 교과서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만큼 넉넉하지 못한 이유이며, 국민의 교육열이 증대되면서 부족한 교과서를 민간에서 편찬하였던 것이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는 교육 침략 정책이 실시되고, 사립 학교를 억압하면서 그 교육 내용을 통제하기 위해 1908년 교과용 도서 검정 제도가 실시되어 한국의 교과서는 커다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즉, 통감부는 엄격한 검정 규정을 만들어 일제의 침략을 나타내거나 민족의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담긴 교과서는 이의 사용이나 발행을 금지하면서, 1906년 이전에 발행된 애국적이고 민족전인 교과서도 모두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부터는 검정에 통과된 검정 교과서나 사용이 인정되는 인정 교과서만 학교에서 사용되었다.

▨ 북간도 공립 소학교
연변 지방에서 한국인의 근대적인 교육 기관으로 그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있는 것이 대한 제국 정부에서 설립한 북간도 공립 소학교(北間島公立小學校)이다. 1895년부터 각지에 설립된 공립 소학교에는 한성 사범 학교 졸업생을 교원으로 임명하였으며, 지방 현지에서 부교원을 임용하여 부족한 교사를 보충하였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에는 1905년 3월 17일자로 학부에서 오재영, 김용흡, 김성진, 최정현, 박병휘, 노승룡, 이남섭, 김중경 등 8명이 부교원으로 임용되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규모나 교육 내용에 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공립 소학교의 설립과 경비의 지출이 지방관의 관할 사항이었으나, 부교원의 임용이 학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대한 제국 정부에서는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이주민의 보호와 한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1903년에 간도 지방의 한국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 양성을 제의하기도 하였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정부와 관련 있는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개교는 한국의 행정권 내지 통치권이 이 지역에 행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지고 있는 사실을 1906년 초 한국에 설치된 통감부에서 1907년 간도 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였으며, 간도 파출소의 일본인이 1906년에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서숙을 방해하다가 서전서숙이 자진 페쇄하자 그 터를 사서 그 곳에 1908년 간도 보통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간도 보통 학교는 일제 통감부의 식민지 준비 교육 기관으로서 한민족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인을 만들기 위한 곳이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는 한국의 공립 소학교와 같이 외세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족 교육 기관으로서, 간도 지역에 설립된 한민족 최초의 공적인 교육 기관인 것이다.

▨ 독사신론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신채호가 1908년 대한 매일 신보에 연재한 사론이다.
이는 신채호의 국사관이 형성되는 내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1910년 봄에 최남선이 발행하는 ‘소년’지 제 3 권 제 8 호에 국사신론(國史新論)이라는 제목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게재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족을 단위로 한 민족 국가의 역사를 재구성하자는 것이 그 주지로서, 민족을 역사 전개의 주체로 파악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서론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의 역사는 민족 소장 성쇠의 상태를 열서할 자라.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무할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그 역시 중하다.… 즉, 고대의 불완전한 역사라도 이를 상구하면 동국주족, 단군 후에의 발달한 실적이 밝거늘 어찌하여 우리 조상을 거짓으로 말함이 이에 이르렀느뇨….”

▨ 국사의 연구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민족 운동의 정신적 바탕인 국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국사 연구는 민족 정신의 앙양과 교양을 높이는 데에 주력하였으나, 아직 근대 역사학으로서 학문적 기반은 갖추지 못하였다. 국사연구의 경향은 국민 교양적인 성격을 띠면서 애국계몽 운동으로 연결된 경향과, 국사 교과서로 편찬되어 학교 교육에 연결된 경향으로 구분될 수 있다. 국사 연구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신문이나 학회에서 발행하는 월보에 논설이나 인물 전기 또는 國朝故事등을 연재하여 역사 지식4을 넓히고 민족 정신의 함양에 이바지하였다. 국사 교과서는 국문 교과서와 함께 국민 정신 교육에 기여하였는데, 국사 교과서 편찬에 활약이 컸던 사람은 현채와 김택영이었다. 교과서의 내용은 종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면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군 조선의 강조, 안정복의 삼한정통론 계승, 외침에서 공을 세운 위인이나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의 활동상이 강조되었다. 이 밖에도, 외국인의 건국가와 망국사 또는 피침사와 함께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의 전기가 많았는데 이태리 건국 삼걸전, 월남 망국사, 파란 멸망사, 미국 독립사, 애급 식민사, 비사맥전, 워싱톤전 등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학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읽던 책이었다.

▨ 서유견문

유길준이 지은 서유견문은 그 문체가 전통적인 문체에서 벗어나 국․한문을 혼용하고 새로운 문체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국어학상으로도 귀중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19세기말 외세가 침투하는 상황에서 나라의 자주 독립유지와 근대 국가로 발전하려는 개화 운동의 사상적 측면과 서양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가는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서유견문이 쓰여진 시기는 대략적으로 1885년 12월 그가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길에 정부가 연금되었다가 1892년 11월 자유를 찾게 되는 기간이다. 그는 일본과 미국 유학 중의 자료와 귀국하는 도중에 유럽 각국을 둘러보면서 견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타고 후에 그 원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갑오개혁이 진해오디면서 등용되어 일본에 가는 길에 일본에 원고를 가지고 가서 1895년에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크게 여행기, 서양 문물에 대한 소개, 개화 사상, 애국심의 표현 등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가장 많은 분향은 서양을 소개하는 애뇬으로서, 이에는 국가의 권리, 국민의 교육, 국민의 권리, 정부의 종류 및 정치 제도, 정부의 기능, 조세, 화폐, 법률 등 서양의 정치, 학문과 각종 풍속, 신앙,산업, 문명의 이기 등에 관해 소개와 해설을 함께 싣고 있다.
개화 사상에는 유길준의 개화에 대한 인식, 개화의 개념, 개화의 방법, 개화의 등급 등으로 서술되었으며, 개화를 하는 데 있어 외국 문화를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국의 우수한 문화도 계승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곳곳에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각국의 권리는 논하면서, 아무리 약소국의 군주라 하더라도 강대국의 군주와 동등한 에를 주고받고 있으며, 강대국에서 파견되 ㄴ사신이 약소국의 국왕과 대등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서술한 것은 일반 국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 근대 문학의 경향
190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은 창가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3․조 혹은 4․4조로 된 초기의 형태, 즉 애국가 같은 것은 전통적인 시가에서 연속된 양식이다. 창가의 내용은 개화 사살을 노래한 것과 ‘社會燈(대한 매일 신보)’에서 나타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최남선은 1908년 소년지에 ‘海에게서 少年에게’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신체시라고 불리는 이러한 양식은 일본의 신체시와 비슷하지만 최남선은 그대로 시라고 하였다.
소설은 신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인직의 ‘열의 누(1906)’와 ‘귀의 성 (1908)’, 이해조의 ‘花의 血 (1911), 최찬식의 ’추월색(1912), 안국선의 ‘금수 회의록(19080’등이 대표적이다. 흔히 신소설이라고 하지만 작품 구조상에서는 새로운 것은 없고, 오히려 이전의 소설보다 가부장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여 후퇴한 면도 보이고 있다. 이광수의 ‘무정(1910)’은 일상어의 문체 확립, 작품 구조의 확립2, 장편 소설의 가능성 등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도덕과 구도덕의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삼각 연애 관계의 구조가 민족주의라는 초개인적인 이념으로 결말짓게 되는 이 소설은 당시 한국 지식층이 열렬한 독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한민족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이광수의 소설은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할수 있었다.

▨ 근대 예술의 발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서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국민적 예술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문화와 예술은 양반과 상민의 뚜렷한 구분이 지어져 내려 왔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 양반은 아악을 교양으로 하고 가끔 기악(妓樂)과 광대의 판소리를 그들의 연회 석상에서 연주하도록 하였으며, 평민들은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꼭두각시 놀음 등을 즐겼다. 근대에 와서도 지식인들은 시조나 가곡을 상식으로 알았고, 서민들은 춘향가, 심청전, 토기 타령 등 판소리가 유행하였다.
미술도 양반들의 여가로 즐겼으며, 도화원의 전문 화가도 있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천시되었다. 개항 이후에 미술가들은 직업인으로 위치를 굳혀 갔으며, 1906년을 전후로 하여서는 서양 화풍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반 사회에서는 재래식 미술, 즉 동양화풍이 견지되었으며, 서민층에서는 이른바 민화가 유행되었다. 서양식 유화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진 않으나 1905년 프랑스 공사관에서 개최되었던 외국인 전시회에 한국인이 그린 유화가 출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극은 양반 사회에서는 천시의 대상이 되어 주로 서민들 사이에서 이른바 민속 가면극이 성행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양반이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익살이 대부분이었다. 양주 별산대 놀이가 궁중에서 외국 사신의 영접용으로 공연된 적이 있었지만 연극은 서민들의 독점물이었다.

▨ 근대 과학 기술의 수용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이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 서양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으나, 이는 서양 과학의 정밀성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체계적인 이해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이양선의 빈번한 출몰과 중국의 정세 변화를 통해서 서양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이 천주교의 포교 활동을 위한 수단이라고 이해하면서 이를 배척하였으나, 점자 천주교와 외세의 침략을 과학 기술과는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기술(西器)은 수용하되 서교(西敎)는 배척하는 동도 서기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특히, 부국 강병을 위해 서양 기술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개화 사상과 연결되었으며, 과학 기술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부가 앞장서서 과학 기술을 수용하였다.
농상 공사에서는 독일인을 초빙하여 기술 지도를 받았으며, 일본 유학생 중에는 양잠법을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직조국은 1888년 다량의 방직 기계를 구입하고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였으며, 지조국(紙造局)은 1891년 일본 상인으로부터 각종 제지 기계를 구입하였다. 또, 광산 개발을 위해 1888년 미국에서 채광기를 구입학도 미국인 광산 기술자를 초빙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에 고취되어 민간인들도 서양 과학 기술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각종 기계를 수입하여 근대 공업을 발달시켜 갔으며, 점차 자체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전기와 통신 사업도 확대되어 갔으니, 1887년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되었으며, 1884년에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 사이에 해저 전선의 부설, 1885년 전보국의 설치, 1887년 서울, 공주, 대구, 부산을 연결하는 전선의 부설, 1898년 궁중과 정부 각 아문 사이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가설, 경인 철도의 부설에 이어 경부, 경의 철도 부설되었다. 이 가운데는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에 의한 것이 많이 있으나, 이로 인해 한국에 과학 기술의 보급이 이루어진 면도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 학교가 설립되면서 기술 교육도 실시되었다. 특히, 대한 제국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과학 기술 교육을 위한 학교가 다수 설립되었으니, 기예학교, 경성 의학교, 상공 학교, 철도 학교, 광업 학교, 공업 전습소, 전무 학당, 우무 학당 등이 그것이다.
과학 기술 수용에도 시기적인 특징이 있는데 흥선대원군 때에는 무기를 수용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무기와 각종 기계를 수용하더니, 1895년 이후에는 과학 기술 자체를 수용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기술 교육 정책은 재정 부족으로 곤란을 받았다. 외국인 기술 교사를 초빙하였으나 봉급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국내의 기술 교사는 봉급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또,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경비를 보내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기술 교육 정책은 꾸준히 실시되었다

▨ 제국주의 시대

15세기 이래로 전개되었던 식민지 쟁탈 경쟁은 18세기 말 이후에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각국은 국내의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되어 식민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 혁명의 진전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본국의 공업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확보와 상품의 시장 또는 이민 대상지로서의 식민지가 개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달이 독점 자본주의 또는 금융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잉여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자본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특히, 1870년대 말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극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이 격렬해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19세기 말의 식민지 경쟁은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대외적 위신과 관련되어 각국은 식민지 확보를 가장 중요한 우선 정책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대상 지역도 전세계의 후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각국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보 정책과 이와 관련되어 경쟁 국가에 대항하는 정책을 세계 정책이라고 하고, 이러한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라고 하며,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1870년대 말부터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
지 진출은 경제적 종속과 함께 정치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후진 지역의 전통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변화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각국이 근대화 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적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이는 무력 충돌로 확대되어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19세기 말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 홍선 대원군의 집권

1863년 말 철종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후계자를 둘러싸고 조야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오랫동안의 세도 정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해 오던 안동 김씨 세력이 후계자 문제에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 동안 안동 김씨 세도가에게 억눌려 불우한 생활을 해 오면서도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던 흥선군 이하응과, 역시 안동 김씨의 세력에 반발을 하고 있던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익종으로 추존됨.)의 비인 신정 왕후 조씨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세력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되어, 궁중의 제일 어른의 자격으로 12세 된 흥선군의 둘째 아들에게 후계를 명하니 이가 고종이었다.
그리하여 홍선군 이하응은 왕의 생부로서 홍선 대원군이 되어 국왕이 아직 어린 이유로 자신이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선 대원군의 왕실 제보를 보면 도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정조의 이모제(異母第)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한 사람이 16대 인종의 왕자 인평 대군의 6세손인 남연군이었다. 이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흥선군은 익종(즉, 효명 세자)과 정조의 이모제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과 같은 항렬이 된다. 그러므로 신정 왕후 조 대비는 흥선 군의 아들에게 익종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나아가 안동 김씨에 대해 풍양 조씨의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국왕을 낳은 생부에게 주어진 명칭으로서, 선조가 즉위하자 그의 생부 덕흥군이 덕흥 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이 즉위하여서는 전계군이 전계 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망 후에 대원군의 추존을 받았으나 홍선 대원군은 살아 잇는 대원군으로서 조선 역사상 유일한 경우였으며, 왕이 아직 나이 어리니 국가의 전권을 잡고 야심찬 정치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 19세기 중엽 국내외 정세

1860년대 전후의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커다란 변화와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년 간 계속된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지방 양반과 관리들에 의해 수취 체제 특히 삼정이 그 상궤를 벗어나 운영됨으로써 민생이 파탄에 빠지자 조선 후기 이후 경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성장하고 있던 농민 의식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1862년 진주에서 비롯된 임술 농민 봉기(壬戌農民蜂起)는 삼남 각지에 삽시간에 파급되어 갔다. 이는 당시의 농민들이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와 이를 운영하는 양반 세력에 대항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농민 의식을 대변하여 농민들이 추구하는 변화를 지향하며 전통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현실 사회에 비판적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동학은 조선 왕조의 정치적, 사회적 지배 체제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왕조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확보를 목표로 하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진행되는 시기로서, 일본이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중국은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굴복한 후에 1856년 애로호 사건의 결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굴복하였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연해에는 서양 선박들이 표착하거나 접근하여 와 한국인들의 두려움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함락 소식은 동일한 문화권인 우리 나라에도 서양인들이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안으로 전통 체제를 위협하는 농민들의 봉기, 밖으로 식민지 침략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접근은 국가의 자주권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대내외로 위기에 당면한 당시 조선 왕조로서는 이에 대처하는 정치 개혁이 필수적인 시대 상황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 통상 수교 거부 정책

1863년 말 집권한 홍선 대원군은 서양과 일본의 통상 수교 요청을 반대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천주교를 박해하여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를 다수 처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며, 통상을 요구하는 제너럴 셔먼 호의 침몰에 대한 책임 문제를 들어 강화도에 침입하여 수교를 강요하면 미국을 격퇴하였다. 일본의 수교 요구를 서계(書契) 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일반적으로 쇄국 정책으로 표현하여 왔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추진된 것이다. 천주교의 박해도 천주교도들이 그 신앙 문제와 관련시켜 외세와 연결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실제로 1860년 이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월경하여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하여 베이징을 함락시킨 것도 1860년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침략의 시작이 통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당시에 열강의 통상 및 수교 요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는 침략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홍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외세, 즉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이었으며, 이는 민족의 이익과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 윤리와 체제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타협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보수성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였다. 종래 쇄국 정책에 대한 설명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이고 고루한 정책으로서, 이로 인해 한국의 서양 문물 수용이 늦어졌으며 근대화에 지각하게 되었다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 통상이나 수교를 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으며, 이를 거부하는 조선 왕조의 정책이 그들에게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쇄국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은 동양 3국(중국, 일본, 조선)이었으며, 이들 3국은 그들의 침략 대상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해 쇄국 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들의 이익이 수반된 수교 요구를 조선이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쇄국 정책은 침략자가 그들의 국가 이익의 차원에서 상대방을 폄하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홍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강요로 맺어진 강화도 조약과 이로 인해 이루어진 개항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공헌이라는 것을 보다 과장하기 위해서도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비판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쇄국이라는 의미가 국가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침략 세력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음이 역사적 진실이라면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 수호를 위한 정책을 비판하는 결과이다. 쇄국 정책이라는 표현은 주체적인 역사 이해의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과거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일본이나 서양의 침략적 성격에 대응하여 자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 호포법(戶布法)의 실시

조선 왕조의 재정 수입은 농민들이 부담하는 조세 징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조선 왕조의 수취 체제(收取體制)의 대표적인 내용은 삼정(三政)으로 표현된다. 이 가운데 군정(軍政)에 해당하는 군포의 수납은 영조 때 균역법에 의해 농민의 부담이 감소되었으나, 양반들은 면제되었으며, 이전부터 관행으로 내려온 각종의 부정이 자행되어 농민들의 부담은 많아지고, 이에 대한 불만이 높아 갔다. 1862년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安劾使) 박규수(朴奎壽)는 민란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이의 개혁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삼정이정청(三政嫠正廳)을 설치하고 삼정의 개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동포제(洞布制)로서 일부 양반에게도 군포의 부담을 의무화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정이 정청의 개혁안은 철종이 곧 죽어 시행되지 못하고 홍선 대원군에 의해 시행될 수 있었다. 홍선 대원군은 재정 수입의 증대와 농민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양반들은 그들이 평민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양반의 반발을 막고 그들의 위신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양반의 이름 대신에 하인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매호당 2냥씩 징수하는 균등 과세의 원칙을 세웠다.

▨ 서원의 정리

조선 후기에 양반들의 세력 기반의 확충을 위한 서원의 남설이 계속되어 18세기 말 정조 때에는 전국적으로 65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국가 재정의 낭비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농민들에게 많은 폐단을 주었다. 서원을 통한 지방 양반들의 횡포는 민심을 이반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경우에도 세도가에 눌려 불우한 생활을 할 때 이들 서원의 비행과 횡포를 직접 경험하면서 그 폐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집권을 하자 곧 전국의 서원과 향사(鄕祠)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명령한 후, 곧이어 서원의 사설 및 남설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1865년 3월 횡포가 극심하여 백성의 원성이 가장 높았던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유생들은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홍선 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이를 벌할 것이다.”라고 하며 강경하게 그의 의지를 실현시키며 아울러 전국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을 남겨 두고 모두 철폐하도록 하였다. 서원 정리 작업은 경복궁의 중건 사업,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는 동안일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871년 신미년에 이를 마무리지었다. 서원 정리 결과 막대한 토지가 국가에 환수되었으며, 농민들의 불법적 부담이 감소되어 크게 환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반 세력은 홍선 대원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홍선 대원군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사창제(社倉制)의 실시

홍선 대원군의 재정 확보책과 민심의 안정을 위한 개혁에서 수취 체제의 개혁은 중요한 비중을 가진다. 1867년(고종 4년) 삼정의 하나인 환곡(還穀)제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환곡의 폐단은 삼정 가운데서 가장 피해가 컸었떤 것으로, 지방에서 관리와 토호들이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는 것으로 환곡이 많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환곡은 농민 구휼책의 하나로 정부에서 면을 단위로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1/10의 이자를 받아들여 국가 세수에도 이바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곡의 배정과 운영에 있어 양반 지주와 토호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고, 각종의 불법이 저질러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이에 따른 원성이 높았다. 홍선 대원군이 실시한 사창제의 내용은 면을 단위로 하던 것을 리(里)를 단위로 하여 사창을 설치하고, 마을 안에서 덕망이 있으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사수(社首)라고 하여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사창제의 실시로 환곡의 폐단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농민의 생활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환곡제 실시에 수반되었던 각종 비리가 줄어들고 국가의 원곡(元穀)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이자 수입이 늘어나 재정 수입이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홍선 대원군의 국방 강화책

홍선 대원군은 집권 직후 서양 세력의 침략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관계를 개혁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종래에는 비변사에서 정치와 군사를 총괄하여 상대적으로 국왕의 군사에 대한 통제권이 취약하였으나, 비변사를 철폐하여 정무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삼군부에서 전담하도록 한 것이다. 군사 체제의 개편에서는 우선 수준 통제사의 지위를 격상시켜 수군을 우대하여 연안의 방비에 관심을 기울였고, 오가작통법을 부활시켜 일종의 민병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강화도를 중심으로 연안에 포대를 확충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수도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우수한 군인을 뽑아 군사 기술을 연마시키고, 특히 서북 지방의 포수를 따로 뽑아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신무기 개발에도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수뢰포와 선박 등의 제조와 실험, 방탄복의 제작 등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력 침략에 대비하여 우수한 서양 기술을 수용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 병인양요(프랑스의 강화도 침략)

병인박해를 계기로 하여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한 것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 1차는 1866년 8월 12일(양력 ; 9월 20일)에서 8월 22일(양력 ; 9월 30일)까지, 제 2차는 9월 5일(양력 ; 10월 13일)에서 10월 12일(양력 ; 11월 18일)까지이다. 12명의 선교사 가운데 3명만이 살아 남았다는 리델 신부의 소식을 들은 톈진 주재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se) 제독은 본국과 연락을 취하면서 3척의 군함으로 남양만을 거쳐 강화 수로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염창, 양화진, 서강까지 왔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7척의 군함에 6백 명의 병력으로 재차 침입해 와서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은 그들이 강화도를 점령하면 조선 정부가 쉽게 항복 하리라고 기대하였으며, 강화성을 공격, 점령하고 나서는 통진을 공격하였으며 문수산성까지 정찰하였다. 대원군을 필두로 조선 정부에서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정부는 강력하게 양이보국(洋夷保國)을 내세우면서 항전을 준비하였으며,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비밀리에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10월 3일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에 도착하자 잠복하였던 선방 포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큰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방화, 약탈하고 다수의 서적을 약탈하고 패주하였다. 프랑스군이 격퇴된 후에 조선에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며, 홍선 대원군의 서양 배척 정책은 강화되었다.

▨ 신미양요(미국의 강화도 침략)

1871년 3월 미국의 주청 특명 전권 공사인 로우(Low, F.F)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아시아 함대의 로저스(Rodgers, J.)사령관으로 5척의 군함과 대포 85문, 123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는 5년 전인 1866년 1척의 미국 상선이 행방 불명되었는데 그 소식을 알길이 없더니, 병인박해 당시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를 통해 대동강에서 서양 선박 1척이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미국 정부에서는 이를 계기로 조선에 무력적 위협을 가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정책이 결정된 결과인 것이다. 미국 군함은 남양만을 지나 강화 해협에 이르러 4월 29일 우세한 화력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병인양요 이후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고, 더욱이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을 계기로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여서 연안의 방비를 엄히 하고 있었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여기는 어재연이 경군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며, 미군의 공격에 백병전으로 저항하여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일시 광성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미군도 조선군의 저항이 의의로 완강하였으며,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미군은 광성진을 방화한 후 퇴각하였다. 광성진의 함락과 어재연의 전사는 조선의 조야에 커다란 공포가 되었으나, 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척양 정책을 표방하면서 척화비를 각 지역에 설치하여 양이 격퇴의 의지를 보였다. 앞서 프랑스군의 침입에 뒤이은 미군의 침입 사건은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지게 하였으며, 보다 강경한 양이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서양과의 수교가 더욱 시간이 지연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제너럴 셔먼 호 사건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략하기 직전인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이르렀다. 이 배에는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 W.B.)이 조선과의 교역을 트기 위해 서양인 5명과 중국인 13명을 포함한 19명과 통역으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Thomas, R.J.)가 타고 있었다. 당시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는 중군 이현익을 보내 조선이 외국인과 교역하지 않는 국법이 있으므로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그를 잡아 가두는 횡포를 저질로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으나, 물이 점차 원래의 수위로 돌아옴에 따라 셔먼 호는 강바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잡힌 중군을 구해 낸 후 박규수는 셔먼 호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려 화공과 포격을 가하여 결국 셔먼 호가 침몰하고, 승무원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 척 화 비

1871년 신미양요에서 강화도에 침략해 온 미국과 싸우는 과정에서 한동안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일시 광성진이 함락당하고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크자 이를 격퇴하는 것은 지구전으로 대항하면서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한 흥선 대원군은 국왕의 교서를 통해 “양이가 화(和)를 하고자 함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수천 년의 예의 국가가 어찌 견양(犬羊)과 상화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몇 년을 지낸다 하여도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배척할 것이며, 만약 화(和)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는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洋夷侵 非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 통상 개화론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후 척양(斥洋)․척왜(斥倭) 정책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에 일부 선각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외국과 통상을 하며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생각은 이미 실학자들, 특히 북학파들이 제기하고 있었는데 박제가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규경, 최한기 등 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에 의해 상당히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경석의 경우는 역관으로 중국에 자주 왕래하면서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 서양을 소개하는 서적을 가지고 와서 이를 서로 읽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에 관심을 가졌으며,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통상 개화론은 뒤에 개화 사상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서계(書契) 문제

1868년 일본에 새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그들의 왕정 복고 사실을 대마도주(主)를 통해 조선에 알리는 외교 문서, 즉 서계를 동래 부사에게 전하였다. 이 때, 초량(草梁)왜관에 왜학 훈도 안동준이 이 서계를 받아 보니 그 내용 속에 ‘皇上’, ‘ ’, ‘ ’ 등 중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문구가 있으며, 종래 대마도주 종씨(宗氏)가 사용하던 조선 정부에서 보내 준 도서(圖書, 즉 도장)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0년에는 일본 정부가 직접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과 교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서계의 내용을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불평 세력이 등장하였고, 이들 세력을 나라 밖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정한론이 제기되었으며, 대만 출병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일본과의 분쟁을 피하고 관계를 개선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74년 다시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서계 수용 문제가 논의되어 일본은 다시 서계를 가지고 왔으나, 그 내용에 ‘大日本’, ‘皇上’등의 문구가 여전히 들어 있어 실제로 교섭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 운요 호 사건

1875년 일본과 서계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정한론이나 대만 출병 사실과 관련하여 일본과 수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박규수, 이최응, 양헌수 등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다수 의견은 서계의 내용과 그 절차 문제 등을 내세워 수교할 수 없다는 의견이어서 협의가 결렬되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일각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의견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무력을 수반한 교섭을 강요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그리하여 1875년 4월 세척의 군함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였고 그 중에 운요 호는 부산에 입항하였다가 다시 동해에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갔다가 나가시키로 돌아갔다. 8월에는 조선의 해안에서 중국에 가는 항로를 조사한다고 하면서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다. 항로 조사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조선과의 무력 충동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하여 수교 교섭을 강요하려는 술책이었던 것이다. 운요호에서는 먹을 물을 구한다고 보트를 내려 강화도의 초지진 포대로 접근하는 외국 선박을 응징하기 위해 포격을 가하였다. 운요호에서는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와 초지진이 파괴되었으며, 돌아가던 운요호는 영종진에 대해서도 포격을 가하고 상륙하여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수교를 강요하기 위한 정략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일본의 대 한국 침략의 시발이었던 것이다.

▨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

1875년 12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구로다를 특명 전권 대신으로 하여 8척의 군함과 6백여 명의 병력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가 강화도로 향하였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대의 추가 파병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수반하여 조선을 굴복시키겠다는 계획적인 침략 행위였다. 1876년 1월 조선 신헌(申憲)을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강화도 연무당에서 담판이 벌어졌다. 회담이 시작되기에 앞서 일본은 함포를 발사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대를 상륙시키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세 차례나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례한 태도로 회담이 결렬되다시피 하였다. 고종이 정부 고관들의 대책 회의를 소집하였을 대 당시 조선 조정의 다수 의견은 일본의 침략 도전 행위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 때, 박규수는 일본과 수교를 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본이 수호를 청하면서 병선을 대기하였으니, 그 실정은 예측할 수 없으나, 수호 사절(修好使節)이라고 말하니 우리가 먼저 공격할 수 없으며, 만일 의외의 일이 일어날 경우 용병(用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천리 강토가 내수외양(內修外攘)의 방책을 다했던들 조그만 섬나라가 이처럼 우리를 감히 엿보고 공격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군대로써는 일본의 군대 힘을 막을 수 없으니 그들의 청을 들어 수호를 맺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박규수의 의견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이홍장이 조선에 대하여 일본과의 수교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내 왔다. 국내의 수교 허용론의 대두, 청국의 권고,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강압적 위협 등이 일본과의 수교 조약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접견 대신 신헌에게 “우리 나라는 일본과 3백 년 동안 통신사를 보내고 왜관을 설치, 호시(互市)하여 왔다. 비록 수 년 이래에 서계 문제로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자는 처지에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 등이 서로 편리하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신헌은 즉시 일본측과 교섭을 진행시켜 일본이 제안한 12개조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 강화도 조약의 내용

〈제1관〉 조선국은 자주지방이며 일본과의 평등지권을 보유한다. 이후 양국이 화친의 성실을 표하려 할 때에는 피차 동등한 예의로써 서로 대우하며 추호도 침월(侵越) 시혐(猜嫌)하여서는 안 된다. 우선 종전에 교정(交情)을 저해하는 환이었던 여러 예규를 일체 혁파하고 관유홍통(寬裕弘通)의 법을 개확(開擴)하여 서로 영원한 안녕을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경성에 파견하여 예조 판서와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의 장단은 모두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조선 정부 또한 수시로 사신을 일본국 동경에 파견하여 외무경과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제3관〉 이후 양국 왕래 공문은 일본의 그 국문을 사용하되 10년간은 따로 한문 역본 1통을 첨가하고 조선은 진문을 사용한다.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진에는 일본 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 구역이 되어 있다. 이제 마땅히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을 혁파하고 새로 만든 조약에 의거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또한, 조선국 정부는 따로 제 5관에 기재된 2개 항구를 열어 일본국 인민의 왕래 통상함을 들어 주어야 한다. 이 곳에 대지를 임차하고 가옥을 지으며, 혹 이 곳에 거주하는 조선 인민의 가옥을 임차함에 있어서도 각기 그 편의에 맡긴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처를 택하여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선박이 조선국 연해에서 혹 대풍을 만나거나 혹 땔감과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에 도달하기가 불능할 때에는 연안의 어떠한 항구에라도 기항하여 위험을 피하고 선구를 보충, 수선하며 땔감 등을 구입하도록 한다. 그 지방에서 공급한 비용은 선주가 배상하여야 되지만 무릇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는 지방 관민은 특별히 인휼을 가하고 구원을 다하도록 하고 보급에도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양국의 선박이 대양 중에서 파괴되어 선원이 표착하는 경우에는 그 지방 인민이 즉시 그들을 구휼, 생명을 보전하게 하고 지방관에게 보고하여 해당 지방관은 본국으로 호송하고나 그 근방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인도한다.
〈제7관〉조선국 연해의 도서 암초는 종전에 조사를 거치지 않아 극히 위험함에 일본국 항해자로 하여금 때에 따라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하고 그곳의 깊고 얕음을 살펴 도지를 편제하게 하여 양국 선객에게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도모하게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 지정 항구에 시의에 따라 일본국 상민을 관리하는 관원을 설치할 수 있다. 만약 양국이 교섭할 안건이 있을 때에는 그 곳 지방 장관과 만나 협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니 피차의 인민은 각자 임의에 따라 무역을 하며, 양국의 관리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지 못하며 제한 금지도 못한다. 만약 양국의 상민이 서로 속이거나 임차한 것을 보상하지 아니할 시는 양국 관리는 포탈한 상민을 나포하여 보상하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보상하지는 않는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항구에 재류 중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 인민과의 교섭에서 일어난 것이면 공평하게 조선국의 사판(査辦)에 돌아간다.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되 조금이라도 범죄를 비호해서는 안 되며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제11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므로 따로이 통상 장정을 만들어 양국 상민의 편의를 도모함이 마당하며, 또한 현금 의립한 각 조관 중에 다시 세목을 보완 첨가하여 조건에 준조(遵照)함에 편리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6개월 내에 양국이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 또는 강화부에 파견하여 정하게 한다.
〈제12관〉 위에서 의정된 11관의 조약은 이 날부터 준수한다. 양국 정부는 이를 변혁할 수 없으며, 영원히 신의를 가지고 준수하여 화의를 돈독히 한다. 이를 위해 약서 2통을 작성하여 양국이 위임한 대신이 각각 조인하고 상호 교부하여 빙신(憑信)으로 삼는다.
이 조약은 일본의 무력에 강요된 타율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이 미국과 체결하였던 미․일 조약의 내용의 불평등 내용을 그대로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며, 또한 조약의 내용이 쌍무적이 아니라 조선의 일방적인 의무만을 강요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근대적인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조선이 포함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근대 자본주의의 침략의 물결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의 출발이 된 것이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 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 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따.

▨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역점을 두었던 것이 개항장의 확보였다. 이를 통해 그들의 한 국 침략의 기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 조약에는 제 4, 5 관에 이에 관련된 조항으로 부산과 다른 두 개의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였는데, 두 개의 항구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에서 택하되 조약 체결 후 20개월 후에 개항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원래부터 동해안의 원산과 서해안의 인천을 지목하고 있었으나, 조선측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원산은 부근 함흥이 태조 이성계의 탄생지이며 인근에 그 조상들의 무덤이 남아 있어 이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며, 인천은 바로 서울의 인후이므로 수도의 방비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 반대하였다. 그 대안으로 조선측은 동해안은 청진이나 나남, 서해안은 군산이나 목포 또는 진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원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으로서, 인천은 서울과 가까워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원산은 일본의 요구로 1879년 7월에 개항하였으나, 인천의 경우는 조선측이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며, 1880년 김홍집을 수신사로 파견할 때, 이 문제를 일본 정부 당국과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일본의 압력으로 1881년 2월 인천을 개항할 것을 결정하여 20개월 뒤인 18882년 8월에 개항하게 되었다.

▨ 조선 책략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1879년 서울에 공사를 상주시키고, 원산에 이은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곡물 수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일본 정부와 직접 협의하기 위하여 제 2차 수신사로 김홍집을 파견하였다. 1880년 5월에 일본으로 간 수신사 일행은 일본측의 회담기피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김홍집이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 청국 공사 하 여장(何如章)과 참찬관 황 쭌셴과 만나 필담을 통하여 당시의 국제 정세를 논하였다. 황 쭌셴은 청국에서는 유럽의 소식에 밝은 인물로 서양 여러 나라의 정세를 김홍집에게 알려 주었다. 특히, 그가 저술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김홍집이 가지고 귀국하여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이 책은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기본적인 내용은 방아론(防俄論)으로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조선의 외교 방향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방으로 추진해야 될 것을 제시한 것이다. 또, 조선 책략에는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조선에서의 부정적인 생각을 해소시키려는 내용도 들어 있었으며,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서양의 다른 나라와도 수교하는 것이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정부가 미국과의 수교와 개화 정책의 추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에 반하여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1876년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과 수교를 하게 되자 구미 국가 가운데 미국이 특히 조선과의 수교를 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는 1866년 제너럴 셔먼 호의 불행한 사건과 함께 1871년 신미양요로 두 나라의 수교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조선과 수교에 성공한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의 수교 교섭을 하려 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의 독점적 활동을 위하여 다른 나라가 조선과 수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중재하기를 꺼리자 미국은 청의 이홍장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조선과의 수교가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조선과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다. 조선과의 교섭을 책임 맡은 슈펠트 제독은 1880년 7월 이홍장의 초청으로 톈진으로 가서 회담하였으며, 1881년 7월 두 번째의 회담을 하였다. 이 때,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에 간 어윤중이 톈진에 가서 미국과의 수교 문제로 이홍장과 협의하였으며, 1882년 영선사 김윤식이 톈진에 오자 그도 이홍장과 만나 이 문제를 협의하여 미국과의 수교 윤곽이 잡혀 나갔다. 이홍장이 조선과 미국꽈의 수교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외국과의 수교를 중재함으로써 조선에 청의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것과, 외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청의 영향 아래에 있음을 알려 그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조선에서 독점적인 일본의 지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미국과의 조약문은 조선 대표들이 참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청과 미국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1882년 5월 조선 대표인 신헌은 도장만 찍었을 뿐이었다. 조․미 통상 조약은 전문 14개조로 되었으며, 그 내용은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과 큰 차이가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다만, 제 1 관에 양국은 서로 거중 조정(居中調整 ;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뒤에 조선과 미국이 각각 그 해석에 있어 견해를 달리하였는바, 조선에서는 동맹 조항으로서 공수 동맹 또는 군사 동맹으로, 미국에서는 외교적인 우호의 표시로 해석하였다.
2. 근대 의식의 성장과 민족 운동의 전개


▨ 수신사 김기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측이 사신을 파견해 주기를 요청하자 의례적인 형식으로 조선 정부에서는 예조참의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3개월 만인 1876 4월 29일 일본측이 주선한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가서 20여일 동안 도쿄에 체류하였다. 수신사 일행은 75명으로 일본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전신, 철도, 군함, 대포 제조, 군사, 기계, 학술, 교육 등 각분야를 시찰하면서 일본의 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귀국하였다. 일본은 수신사를 통하여 일본의 발전 모습을 조선에 보임으로써 그들의 힘을 과시할 필요에서 수신사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김기수는 귀국 후에 국왕에게 복명하면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국왕에게 소개하였으며, 국왕의 개화 의욕을 북돋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귀국 후에 지은 일동기유(日東記遊)는 일본의 개화된 모습을 알려 주고 있다.

▨ 수신사 김홍집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해결해야 될 현안 문제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측에서는 현안 문제의 해결과 일본의 실정을 보다 상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제 2차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현안 문제는 일본이 1879년 원산의 개항을 요구하면서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자 이에 대처하는 문제와 미곡의 유출을 줄이는 것과 관세 배상 문제 등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김홍집을 수신사로 임명하였는데, 그 일행 가운데 주요 인사들은 윤웅렬, 이조연, 강위, 지석영 등이 포함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수신사 일행에 대한 접대는 후하게 하였으나, 수신사의 방일 목적이 일본의 이익과 배치되는 것이었으므로 일본 정부의 고관들은 김홍집과의 면담을 의도적으로 기피하여 수신사는 방일의 목적을 달



성할 수 없었다. 이에 김홍집은 주일 청국 공사관에 자주 들렀으며, 황 쭌셴이 지은 조선 책략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강화도 조약 이후 새로운 외국 문물의 수용과 외국과의 교섭 및 통상 등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의 개편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청국의 총리기무아문을 모방하여 1880년 12월(음) 종래의 의정부와 6조와는 별도로 정 1 품 아문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군국의 모든 일을 총령하여 그 권한이 방대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설치된 지 2년 후에 군국기무 등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군국사무아문과 외교 통상을 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나누어졌다.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당시의 12사와 그 업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대사 ; 중국과의 외교
교린사 ; 일본 및 각국과의 외교
군무사 ; 경향의 군사 사무
변정사 ; 국경 사무, 인근 국가의 동정 및 정탐
통상사 ; 외국과의 통상
군물사 ; 병기 제조
기계사 ; 각종 기계 제조
함선사 ; 각종 선박 제조
기연사 ; 연안 포구 왕래 선박 검사
어학사 ;각국 언어, 문학의 번역
전선사 ; 관리 선발과 관용품 조달
이용사 ; 재정 사무
통리기무아문 총리 대신에 영의정 이최응을 임명하였으며, 당상관으로는 김보현, 민겸호, 김병덕, 윤자헌, 조영하, 정범조, 신정희, 민영익, 이재긍, 김홍집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보수적 경향을 띤 인물이었으며, 개화파에 해당하는 인물은 김홍집 등 극소수였다.
통리군국사무아문은 1884년 의정부에 통합되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남아 있었다.

▨ 군제 개편과 별기군의 설치

개화 정책의 추진과 함께 부국 강병의 일환으로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군제의 개편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리하여 기존의 군제의 개편과 동시에 신식 군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기존 군제는 5영으로 나뉘었던 것을 무위영과 장어영 2영으로 통합하여 이경하와 신정희를 각각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별기군이란 신식 군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별기군은 1880년 김홍집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윤웅렬이 중심이 되어, 기존 군대에서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1881년 4월 무위영 소속으로 출발하였다. 별기군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대로 소총으로 무장하여 신식 훈련을 받았다. 교련소 당상에는 민영익, 정령관에 한성근, 좌부령관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원, 참령관에 우범선이었으며, 교관으로 일본군 소위 호리모도를 초빙하여 서대문 밖 모화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후에 하도감으로 옮겼다.

▨ 신사 유람단의 파견

강화도 조약 이후 김기수와 김홍집 등 두 차례의 수신사가 일본에 다녀온 뒤 일본이 발전한 모습이 소개되자 나라의 개혁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던 고종과 개화파 관료들은 개혁을 위한 자료의 수집과 일본의 실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대규모의 시찰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국내 사정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대하여 경계하면서, 특히 김홍집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을 둘러싸고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으므로 일본 시찰단을 공개리에 파견하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동래부 암행 어사로 발령하여 비밀리에 부산에 집결하도록 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람단으로 소개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시찰단은 12개 반으로 총 인원 60명으로서 각 반의 책임자는 전직 관리로 하고 수행원과 통역 및 하인들로 구성되었다. 각 반의 책임자는 개인적으로 국왕으로부터 시찰 대상에 대한 지시를 받고 귀국 후에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었다. 이들은 1881년 4월 10일(음력)에 부산을 출발하여 약 3개월 뒤에 귀국하였다.
12개 반의 책임자와 수행원, 그리고 시찰 대상은 다음과 같다.
책임자수행원시찰부서조준영
박정양
엄세영
강문형
조 병
민종묵
이헌영
심상학
홍영식
어윤중

이원희
김용원이봉식, 서상직
왕제응, 이상재
엄석주, 최성대
강진형, 변택호
안종수, 유기환
민재후, 박회식
이필영, 민건호
유진태, 이종빈
고영희, 성낙기, 김낙운
유길준, 유정수,
김량한, 윤치호
송헌빈, 심의영
손붕구문부성
내무성, 농무성
사법성
공무성
세관
외무성
세관
조폐
군부
대장성


군부
이들 책임자와 수행원들은 그 후 정부 내의 근대적 전문가로 발전하여 개화 정책의 추진에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수행원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고 유학생으로 남아 있도록 하였으니, 어윤중의 수행원이던 유길준과 유정수는 경응 의숙, 윤치호는 동인사(同人社), 김량한은 조선소에서 공부하였다. 또, 이원희는 특별히 일본에서 총포와 군함을 구입할 임무를 부여받았으나, 참모로 임명된 이동인이 급작스럽게 암살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 영선사의 파견

1881년 9월 정부에서는 개화 정책의 구체적인 표현의 하나로 무비 자강의 계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청의 부국 강병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톈진의 군사 공업 기지로 가서 근대식 병기 기술을 학습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직예총독 이홍장의 건의가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유학생 38명을 포함한 70여 명의 일행이 청국의 톈진에 있는 기기국으로 떠났다. 당시 유학생들은 주로 공장들이었다. 이들은 9월 26일에 떠나 11월 17일에 북경에 도착하고, 관리들과 협의하여 1882년 1월 38명의 유학생은 기기국의 동․남국 및 수사(水師) 학당과 수뢰(水雷) 학당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무기 제조법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 각 분야와 외국어도 습득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1882년 10월 학습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도중에 귀국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먼저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영향도 있었으며, 학도 중에는 각종의 사유로 도중에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재정의 어려움으로 유학 경비의 조달이 어려워졌으며, 서울에 기기창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유학생들의 귀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영선사의 파견은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후 조선의 개화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학도들의 비교적 체계적인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학습에 따라 과학 기술의 수용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지고 귀국한 다량의 과학 기술서적과 기계류는 이후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며, 특히 유학생들이 귀국한 후 그들이 중심이 되어 기기창(機器廠)이 설립되었다. 한편, 영선사로 청국에 가 있던 김윤식은 이홍장과 교류하면서 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는 데 활약하였다.

▨ 척화 주전론

19 세기 중반 이후 서양 열강의 침략 세력의 접근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권과 민족 문화 전통을 수호한다는 사상적 기반으로 전개된 것이 척화 주전론이다. 1866년 프랑스의 침입 사건은 서양의 침략 위협이 직접 현실화되는 것으로서,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즉, 병인양요는 군사적인 침략일 뿐 아니라 서양 자본주의의 경제적 침략이었으므로, 군사상, 경제상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시대 상황에서 제기된 사상이었다. 이는 병인양요 당시 사직소를 제출한 이항로의 상소 내용에 가장 대표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그는 서양의 침략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보고, 이를 막아 싸워 물리쳐야만 국가의 보존과 민족의 생존이 유지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안으로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주장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 왜양 일체론

1876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화도 조약의 체결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일본과의 조약 체결은 서구의 자본주의 침략 세력이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 나라에 침략하는 것으로 보고 일본과의 수교와 개항을 반대하는 논리로 제기된 척사론이다. 이 주장은, 강화도 조약을 반대한 최익현의 상소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최익현은 조약 체결의 불가함을 오불가소(五不可疎)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첫째, 일본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자주의 위기, 둘째, 일본의 사치품에 의한 조선의 전통 산업의 파괴, 셋째 일본은 서양의 적과 같으며 천주교가 확산되어 전통 예의의 위기, 넷째, 일본인에 의한 재산과 부녀자에 대한 약탈의 위기, 다섯째, 일본은 금수와 같으므로 문화 민족인 우리가 그들과 교류할 때에 도래할 문화의 위기 등이다. 이는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우리에게 닥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의 위기를 통찰한 주장이며, 한편으로는 조선의 우월한 문화 의식의 표현인 것이다. 최익현의 왜양 일체론은 단순히 일본과 서양이 동일하다는 각도에서 나타난 배타적인 척사론이 아니라, 일본이 서양의 침략 세력과 동일하게 우리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므로 이에 대해 그들보다 우수한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함께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신사 척사 운동

1880년 후반부터 시작되어 1881년에 격렬하게 전개된 척사 운동이다.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책략은 고종과 개화 세력의 적극적인 개화 정책의 추진에 자극제가 된 동시에, 한편으로는 전통을 고수하면서 밖으로부터 침투하는 이질 문화 내지 이와 결부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침략 세력을 막아야 된다는 척사론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척사론자들은 적극적 개화 정책의 계기가 된 조선 책략을 비판하고 이를 들여 온 김홍집을 비난하면서 나아가 정부의 개화 정책을 비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고종을 비난하기에까지 이르러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척사론의 주장자들인 유생들은 집단적인 상소 운동을 전개하여, 영남 유생 이만손의 만인소, 강원도 홍재학의 만인소는 그 대표적이다. 신사 척사 운동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개화 세력과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는 위정 척사 세력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개화와 보수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19세기 말 근대화의 추진과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자주권을 수호해야 하는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서 민족의 대응 과정이 내부적 분열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나타낸 결과를 초래하였다.

▨ 제물포 조약

1882년 임오군란으로 서울의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으로 별기군의 교관인 호리모도 소위와 육군 어학생 2명과 외무성 순사 1인이 살해되었다. 청군의 개입으로 난이 끝나고 홍선 대원군이 납치되자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의 사과와 배상 요구 및 거류민 보호를 위한 군대 출동 등을 결의하고 조선에 압력을 가하였다. 일본으로 쫓겨갔던 하나부사 공사가 서울로 돌아오자 조선의 전권 대신 이유원과 부관 김홍집은 그를 상대로 협상을 시작하여 1882년 7월 6개조로 된 제물포 조약과 수호조규속약을 체결하였다.

<제물포 조약>
제 1 조.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범인을 체포하여 엄징할 것.
제 2 조. 일본국 피해자를 후례로 장사 지낼 것.
제 3 조. 5만 원을 지불하여 피해자 유족 및 부상자에게 급여할 것.
제 4 조. 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
제 5 조. 일본 공사관에 군대를 주둔시켜 경비에 임하는 것을 허용할 것.
제 6 조. 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여 일본국에게 사죄할 것.
<수호조규속약>
제 1 조. 부산, 원산, 인천 각 항에 일본인 이정을 사방 각 50리로 하고 2년 후에는 다시 100리로 할 것.
제 2 조. 일본 공사와 영사 및 그 수행원이 조선 내지 각처를 여행할 수 있게 할 것.
이로 인해 일본인의 한국 내 왕래가 활발해져서 경제적 침투가 더욱 유리해졌으며, 특히 제물포 조약에 의해 서울에 공사관 호위라는 명목으로 일본 군대가 상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일본국에 사죄 사절을 파견한다는 조약에 따라 박영효를 정사, 김만식을 부사, 서광범을 종사관으로 하는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이 때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

임오군란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을 하게 된 청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에 뒤진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청국측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선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조선측에서도 조선 책략에 제시된 친중국론을 실행하고 조선을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선 내의 일본 상인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청 상인들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882년 8월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간섭을 증대하고 일본에 대항하는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청은 조선과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전문 8조로 된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며, 청국 상인들의 특혜를 인정하고, 청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에 상무 위원을 파견하는 한편, 그의 치외 법권을 인정하며, 종래 실시하던 국경 무역을 개방할 것 등이다. 이 조약은 결과적으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강화한다는 데 있었으며, 청 정부의 보호 밑에서 청 상인들이 각지에서 활동하여 일본 상인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농촌의 경제적 파탄이 가속화되었다.

▨ 개화 사상에 영향을 준 서적

19 세기 중엽 이후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무물에 대한 정보는 주로 중국에서 들어온 서적이었다. 이들 서적에는 중국인이 저술한 것도 있으며, 많은 분량이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는 조선 후기에도 같은 현상으로 천주교에 관련된 서적은 서양인의 저술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얻게 해 주는 정보원이 되었던 것이다. 개화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도 이는 같은 상황이었다. 1880년대 이후에는 일본이 신지식의 통로로 활용되었지만 아직도 중국은 중요한 통로였다. 이는 당시의 지식인의 지적 바탕이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와 개화파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요 서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역사․지리>
해국도지(海國圖志 ; , 1844년), 영환지략(瀛環志略 ; , 1850), 지구설략(地球說略 ; 미국 선교사 Richard Q. Way, 1856), 보법전기(譜法戰記, 王 , 1872)
<정치․법률>
조선 책략(朝鮮策略, , 1880), 만국공법(萬國公法, 미국 선교사 William Alexander Par - sons Martin, 1864), 흥아회잡사시(興亞會雜事詩 ; 1880년 일본에서 설립한 친목회 흥아회 회원들이 지은시), 이언(易言 ; , 1880)
<자연 과학>
격물입문(格物人門 ; 1866), 박물신편(博物新編 ; 영국 의사 Benjamin Hobson, 1855)
<신문․잡지>
신보(申報 ; 영국 상인 Ernest Major, 1872), 만국공보(萬國公報 ; 미국 선교사 Yong J. Allen, 1868),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 미국 선교사들, 1872), 격치휘편(格致彙編 ; 미국 선교사 John Fryer, 1876)
<한국인 저술 및 번역>
기화근사(箕和近事, 김옥균), 지구도경(地球圖經, 박영교), 농정신편(農政新編, 안종수)

▨ 한성 순보(漢城旬報)의 발행

한성 순보는 1833년 10월에 창간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문이다. 일간이 아니고 관보의 의미도 있어 신문이라고 하기에 미비한 점도 있으나, 새로운 소식을 게재하며 정기적으로 발행되었으며, 그 체제가 신문의 형태를 따랐기 때문이다. 1882년 말 임오군란의 결과 일본에 수신사로 간 박영효는 신문이 개화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귀국하면서 일본의 신문 기자와 인쇄 기술공을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한성 판윤으로 임명되자 신문 제작의 실무를 유길준에게 위촉하였다. 유길준은 신문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창간사를 작성해 놓았으나,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물러남에 따라 일시 그 일이 중지되었다가 1883년 8월 박문국이 설치되고 10월 30일에 창간호를 간행하게 되었다. 순보는 10일에 한 번씩 14개월 간 빠짐없이 간행되어 모두 40호 정도 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간행이 중단 되었다. 순보는 세계의 역사와 지리, 과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어 국민에게 새로운 지식을 접하게 하였으며, 한국의 개화 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86년 1월 1일부터 1주일에 한 번씩 한성 주보로 속간되었으나, 재정이 어려워 1888년 7월 폐간되었다. 특히, 주보는 국한문을 혼용하여 그 독자층이 확대되었으며, 그 영향도 사회 전반에 미쳤을 것이다.

▨ 유학생의 파견

새로운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은 유학생 파견으로 나타났다. 유학생의 파견은 개화파 인사들, 그 중에서도 김옥균이 앞장 서서 추진하였는데 대부분 일본에 치중되었다. 1881년 신사 유람단이 일본에 갔을 때, 수행원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서 유길준과 유정수가 경응 의숙에, 김양한이 조선소에, 윤치호가 동인사에 각각 유학하였으며, 1882년 김옥균이 국왕의 특명으로 일본에 가면서 수행원인 변수와 김용원이 화학과 양잠 학을 공부하였으며, 또다른 사람들은 육군 학교와 가죽 공장에 유학하였다. 임오군란 후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역시 그 일행 중에 경응 의숙과 동인사에 유학하였으며, 1883년 김옥균이 차관 교섭차 일본에 갈 때도 다수의 유학생을 인솔하였다. 박영효가 신문 제작 기술자로 데리고 온 일본 기술자가 귀국할 때 김옥균의 주선으로 17명이 도야마 육군 유년 학교에 유학하였는데, 서재필이 여기에 끼여 있었다. 그리하여 1883년 말에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은 약 50명이 되었으나, 개화당이 추진하고 있던 차관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비가 부족해져 1884년 봄에는 대부분 귀국하였다. 이들 유학생들은 거의 개화당에 가담하였으며, 갑신정변에 참여하였고, 그 후 한국 근대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1881년 청국 톈진에 영선사를 따라 무기 공장에 공부하러 간 학도들도 유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학생의 필요성은 그 후에도 정부에서 잘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895년 초(양력)에 발표된 홍범 14조에서도 ‘ ’라고 하여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 개화당의 차관 도입 교섭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지출이 증대하여 재정난이 계속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에서는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는 개화당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대하는 데도 필요한 일이었다. 김옥균은 이 일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이본을 왕래하였으며, 고종도 이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1882년 3월에 1차로 이본에 갔으나 차관을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882년 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김옥균이 동행하여 2차 일본 방문을 하여 17만 원의 차관을 얻었다. 이 돈은 임오군란에 대한 배상금으로 일부 지불하고, 나머지는 신문 제작비와 유학생 경비로 충당하였다. 박영효가 귀국한 뒤에도 김옥균은 계속 남아 차관 교섭을 하여, 국왕의 위임장이 있으면 차관을 하겠다는 일본측의 약속을 받고 일시 귀국하여 국왕의 위임장을 받아 1883년 5월 일본에 갔다. 그러나 일본은 김옥균이 조선의 정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지 못한 현실을 들어 차관 교섭을 기피하고 있는 사이 조선 정부의 보수 세력이 차관 교섭을 방해하여 결국 김옥균의 차관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차관을 통해 그들의 정치 세력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감에 비상 수단으로 정변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 갑신정변 실패 후의 개화당 인사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변에 참가하였던 개화당의 주요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었다. 이들은 쫓겨가는 일본의 공사 일행과 함께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선박 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미국에 갈 계획이었으나 여비를 구하지 못해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김옥균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본국에서 계속 건너오고, 일본 정부가 그의 존재를 거북하게 받아들여 멀리 외딴섬으로 보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자객으로 온 홍종우의 꼬임에 빠져 1894년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나, 상하이에서 머물고 있던 차에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세 사람은 1885년 함께 미국으로 갔으나, 곧 헤어져서 박영효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왔고, 1894년 갑오개혁이 진행되면서 사면을 받아 귀국하였다가, 1895년에 내무 대신과에 있다가 돌아와 1895년 법무 대신과 학부 대신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공사가 되기도 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고 의학 공부를 하여 병원을 경영하는 등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1896년 귀국하여 독립 신문을 간행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그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 한성 조약

189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 공사관 일행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탔으며, 일본인이 살해당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 공사가 정변에 개입되었다고 일본을 비난하면서 양국사이에 외교적 접촉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로 맺어진 것이 한성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조선 정부는 일본에 망명한 개화당 인사들의 송환요구와 정변 개입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정부에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새 공사관을 지을 땅과 경비를 부담하도록 하였다.

<한성 조약>
제 1. 조선국은 국서를 일본에 보내 사의(謝意)를 표명할 것.
제 2. 일본국의 해를 입은 유족 및 부상자를 휼급하고 상민의 화물이 훼손 약탈된 것을 전보(塡補)하기 위하여 조선국에서 십만원을 지불할 것.
제 3. 일본인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사문 나포하여 엄벌에 처할 것.
제 4. 일본 공사관은 신기지로 이축함을 요하는바 조선국은 마땅히 기지 방옥을 교부하여 공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하도록 할 것이며, 그 신축, 중건에 있어서는 조선국이 다시 2만원을 지불하여 공사비에 충용하도록 할 것.
제 5. 일본 호위병의 영사는 공관 부지를 택하여 정하고, 임오속약(즉, 제물포 조약) 제 5관에 비추어 시행할 것.
(부칙)
1. 제 2, 제4의 금액은 일본 은화로 계산할 것이며 3개월 기하여 인천에서 완불할 것.
2. 제 3의 흉도를 처단함은 입약 이후 20일을 기한으로 할 것.

▨ 톈진 조약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울에서 개화당 정부를 지원한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과 조선 정부를 지원한 청국군의 교전이 일어난 사건은 정변 이후 두 나라 사이에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정변이 끝난 후 한성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공사가 거느리고 온 일본군이 다시 서울에 주둔하게 됨으로써 청․일 양국의 군대가 제 3국에서 대치하게 된 상황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화된 그들의 세력을 회복하여 청과 균형된 상황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청국과의 외교적 담판이 필요하였다. 당시 청국은 프랑스와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 중 이어서 조선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한 상황임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2월 18일부터 3월 4일사이에 6차에 걸친 회담을 거쳐 이토 히로부미와 이 홍장 사이에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과 청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조선과 관련된 문제였으나, 조선의 의사는 일체 고려됨이 없이 두 나라 사이에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첫째,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는 것이고, 둘째,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출동할 필요가 있을 때는 서로 사전에 통보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의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조선에 출병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일본의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톈진 조약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은 더욱 심해졌으며,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면서 앞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위해서 청국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청․일 양 국의 경쟁적인 경제 침투로 인하여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고 농촌 사회에 현실 문제를 극복하려는 농민들의 의식이 고조되면서 동학 사상이 파급되며, 현실을 적절하게 이끌어 가지 못하는 정부와 양반 계층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으며, 이에 따라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전통 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고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톈진 조약>
1.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공사관을 호위하기 위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 날인한 날로부터 기산하여 4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그 이내에 각기 전체를 철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분쟁 야기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다. 중국군은 마산포로부터, 일본군은 인천항으로부터 철수한다.
1. 양국이 함께 승낙한 것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치안을 스스로 지키도록 조선 국왕에게 권하며, 또 조선 국왕에 의하여 다른 외국의 무관 1인이나 혹은 수인을 선발하여 교련의 일을 위임케 하되 이후 청․일 양국은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교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1.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청․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을 요할 때에는 마땅히 우선 상대방 국가에게 문서로 알릴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회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 방 곡 령

일본 상인들에 의한 한국의 곡식이 일본에 유출되어 한국 농촌의 곡식은 부족해지며, 곡식값이 폭등하여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져 갔다. 더욱이 흉작이 계속되어 농민의 참상이 더하였다. 정부에서는 한․일 간에 체결된 통상 장정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수정하여 한국에서 병란이나 흉작 등으로 국내에 식량이 부족할 경우 지방 장관의 방곡 망령으로 미곡 수출을 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방곡령을 발하기 1개월 전에 해당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통보하기로 하였다. 방곡의 문제는 그 이전에도 일정 지역 안의 미곡을 그 지방의 납세나 주민의 자금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방관의 이름으로 타 지방으로 미곡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1880년대에는 일본 상인들의 횡포로 미곡이 유출되자 곳곳에서 방곡이 시행되어 서울에 반입되는 쌀의 양이 줄어들어 쌀값이 폭등하고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1889년 함경도 감사의 콩수출 금지와 1889년 황해도 감사의 쌀 수출 금지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쌀 유출이 금지되게 되자 이익을 못 내게 된 일본 상인들은 일본 공사관과 결탁하여 방곡 시행 1개월 전에 사전 통보한다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 상인들이 입은 손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하라고 강요해 왔다. 그 후 경상도 지역에서도 방곡령이 발표되었는데, 방곡령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는 농촌 사회에는 반일 감정이 팽배해져 갔다.

▧ 보은 집회

1882년 삼례 집회와 1893년 복합 상소 운동을 통하여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과 지방관의 동학 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동학의 지도층은 본격적으로 저항 또는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문을 보내 보은에 교도를 집합시켜, 모인 교도의 숫자가 2만여에 달하였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동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수많은 인원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의 농촌 사회가 정부에 대해 불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정부의 국민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보은 집회는 동학의 움직임이 단순히 종교적인 활동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교도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표방하고 지방관의 횡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보은 관아의 삼문 앞에 게시된 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왜양의 적이 나라의 중심부에까지 침입함으로써 문란이 극도에 달하고 있고, 이에 따라 국도는 필경 이적의 소혈이 될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들은 동력서사(同力誓死)하여 왜양을 소탕하여 대의를 이루고자 한다.” 하였으니, 교조의 신원을 말하는 내용은 이미 자취가 없으니 이제는 단지 종교적 자유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왜양을 쳐부수겠다는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 동학의 조직

동학은 크게 충청도 지역의 북접과 전라도 지역의 남접으로 두 개의 계열이 있었다. 최제우가 처형되기 전에 최시형을 북접 도주로 임명하였으며, 또다른 사람이 남접 도주로 임명된 사람은 명확하지 않지만 뒤에 남접의 지도자로 서장옥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였다. 처음에 동학 농민군이 봉기할 때 그 시작은 남접에서였으며, 북접에서는 그 후 에 참여하였다. 동학의 포교는 제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그의 포교 활동은 1878년경 이후에 크게 활발해졌으며, 그 교세는 충청, 경상,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 강원도까지 파급되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더욱 번성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교단 조직이 갖추어졌다. 각처에 접소(接所)를 두고 여기에 대접주, 도접주, 수접주, 접주 등의 직책을 두었다. 즉, 큰 지역에 대접주를 두고 그 밑에 몇 명의 접주를 두어 소지역을 나누어 포교를 분담하였으며, 면에는 면접주가 있는 곳도 있었다. 한편 포(包)는 교구제도와 같은 것으로 대접주로 포주를 삼아 그 밑의 접주를 통솔하였다. 각기의 포에는 여섯 가지의 사무를 분장하여 이를 육임제(六任制)라 하였다. 접과 포는 동학 조직의 기본이었으며 이는 교단 조직이면서 동시에 교도를 동원하는 조직이기도 하였다.

▨ 군국기무처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중심 기관으로 설립된 일종의 국정 최고 기구의 성격을 가진 특설 기구로서 김홍집이 영의정으로서 총재로 임명되었으며, 기타 구성원으로는 부총재 1명과 20명 미만의 의원이 있었다. 운영은 합의제이며 공개적이고 다수결로 의결하여, 흥선 대원군에게 보고하고 최종적으로 국왕의 재가를 받는 절차를 거쳤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적 절차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왕과 왕비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정권 대행자의 위치에 있었던 흥선 대원군의 간섭도 배제하여 초정부적인 입법부의 성격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대체로 당시 일본의 원로원과 추밀원의 관제를 모방한 것으로 조직상으로는 의정부에 속하였지만 영의정 이하 정부 대신과 군사 지휘관 및 경찰 지휘자도 의원의 구성원으로서 이 기구 자체를 구속할 수가 없었다. 고려 말의 도평의사사 또는 조선 후기의 비변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7월 27일 설치되어 12월 17일 폐지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205건(혹은 208건)의 개혁안을 처리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1차 개혁

1894년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내용의 개혁이 실시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의정부 관제와 궁내부 관제, 경무청의 신설, 최고법원인 의금사의 설치, 관등의 축소(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관리의 월봉제 실시, 과거 제도 폐지와 새 관리 임용 제도 실시, 은본위제의 화폐 제도 실시, 문무관의 차별 폐지, 죄인 연좌법의 폐지, 공사 노비 제도의 혁파, 양자 제도의 개선, 조혼의 금지, 과부의 재혼 허용, 조세의 금납제, 도량형 통일 등이다. 이 기간에는 일본이 제2차 동학 농민 봉기로 교전 중이며 동시에 청․일 전쟁이 진행 중이어서 일본의 간섭이 비교적 미치지 못하여 혁신 관료의 독자적인 개혁이 진행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제1차 개혁은 정치 제도의 개혁이며, 국민의 개혁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며, 친일 세력의 개혁이라는 반발이 따르기도 하였으며, 국민의 오랜 관습으로 내려온 조혼 금지나 양자 제조 또는 과부 재가 허용 등은 실시되지도 못하였다.

▨ 갑오개혁기의 제2차 개혁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이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었으며, 동학 농민군도 그 저항이 약화된 상황이어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려는 의도에서 그 동안 개혁의 추진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반일적인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박영효를 사면하도록 하여 개혁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군국기무처가 해체되고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박영효는 내무 대신을 맡아 실권을 잡고 실제로 개혁을 주도하였다. 1895년 1월 9일 국왕이 직접 개혁에 앞장 선다는 의미로 조종(祖宗)에게 서고하고 개혁 정치의 내용을 내외에 선포하는 홍범14조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한 개혁으로는 의정부를 내각으로, 정부 기관의 명칭을 아문에서 부(部)로, 지방 제도를 23부(府)로, 신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한성 사범 학교와 외국어 학교의 설립, 사법부의 독립, 군사 제도의 일원화와 훈련대 사관 양성소 설치 등이다. 제2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개입되었으나, 청․일 전쟁 후에 일어난 삼국 간섭의 와중에서 일본의 적극 개입이 어려운 상황에서 박영효 중심의 독자적 개혁의 성격이 있다.

▨ 갑오개혁기의 제3차 개혁

제2차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김홍집이 물러나고 박영효가 일시 총리 서리를 맡았으며, 박정양이 총리가 되었다. 박영효가 반역 음모 사건으로 실각되고 김홍집이 다시 총리가 되었으나 삼국 간섭 이후 내각에 친러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때, 일본은 친러 세력의 배후가 명성 황후라는 사실을 알고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부랑배를 동원, 궁중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하였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3차 개혁은 박정양 다음에 김홍집이 다시 총리 대신이 되는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옮겨가는 때까지이다. 이 개혁을 보통 을미개혁이라고도 한다. 중요한 개혁 내용으로는 서울에 관립 소학교 설립, 건양 연호 사용, 태양력 사용, 우편업무의 재개, 군제 개혁으로 친위대와 진위대 편성, 단발령의 발표 등이다. 명성 황후 시해에 대한 반감에 더하여 단발령에 따른 반발이 결국 항일 의병 항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활빈당(活貧黨)

1898~1904년 기간 동안에 농촌에서는 활빈당이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활빈당은 본래 화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집단`이라는 의미의 활빈(活貧)당이라는 이름을 내건 다음에는 의적(義賊)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898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반침략, 반봉건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평소 40~50명 적으면 10~30명 단위로 총과 칼로 무장하고 말을 타고 다니며 양반 부호가의 재물을 빼앗아 이를 빈민이나 영세 소상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그들은 외국 상인이나 외국 자본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활빈당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민중의 경제 안정과 제국주의의 이권 침탈에 대한 반대를 나타내었다.
“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을 채용할 것”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금할 것”
“행상인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금할 것”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타국에게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보안회(保安會)의 활동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 의정서를 강요한 직후 이른바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및 세목’ 등의 대한경영안(對韓經營案)을 만들어 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진행하면서 내하(內河) 및 연해 어업권을 비롯하여 철도 부설권과 관리권, 통신 기관 권리권, 삼림 벌채권,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강점하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도 강탈하려 하였다. 일제는 주한 공사를 통하여 50년간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일본인에게 위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 속에는 황무지의 개간, 정리, 척식 등 모든 경영권과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권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일제는 황무지를 개척하고 그곳을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하려 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요구가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반대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04년 7월 13일 전의관(前議官) 송수만, 심상운 등이 중심이 되어 보안회를 조직하였다. 보안회는 종로 백목전(白木廛) 도가(都家)에 본부를 두고, 공개적으로 성토 대회를 열어 일제의 황무지 요구에 결사 반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정부 고관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확산되었으며, 지방의 진위대가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는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보안회 지도 인사들을 납치하였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이 계속 되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정부는 일본 경찰의 철수를 요구하는 동시에 촌토의 땅도 외국인에게 내어 주지 않을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고 보안회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보안회 운동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선두에서 전개한 대중적 항일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에 해당된다.

▨ 헌정 연구회

보안회가 해산한 뒤에 협동회, 공진회, 진명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었으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고, 1905년 5월에 독립 협회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헌정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헌정 연구회는 이준, 양한묵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과 정부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야 되며, 국민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자유롭게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입헌 의회제도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특히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나 대한 제국 정부에서 민간인이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으며, 더욱이 을사조약이 강요된 이후에는 한국인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였으므로, 합법적인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한 자강회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지식인들과 민족 운동가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산업의 진흥과 교육 보급 등 사회 문화운동으로 그 활동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4월에 창립된 단체가 대한 자강회였다. 대한 자강회는 헌정 연구회를 계승하여 윤치호를 회장으로 하고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임진수, 김상범 등 발기인 5명을 포함한 10명의 평의원, 최재학, 정운복 등 10명을 간사원으로 하는 지도부를 구성하여,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에 27개소의 지부를 두었다. 대한 자강회의 목적은 자강회 규칙 제 2조에 ‘교육의 확장과 산업의 발달을 연구, 실시하는 것으로 자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후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에서 보이듯이 국권 회복의 기초가 되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애국주의적 신지식을 교육하고 근대 산업을 일으켜 국민의 자강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 목적은 당시 국권회복을 위해 직접적이고 무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의병 활동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자강회에서는 무력 대결은 시기와 역량을 고려하지 못한 무모한 행위라고 하여 비판하였다. 대한 자강회는 국민의 계몽을 위해 정기적으로 연설회를 개최하고 ‘월보’를 발행하였다. 월보의 창간호는 1906년 7월호부터인데 자강회가 해산당하는 1907년 7월까지 13호가 나왔다. 월보의 내용은 학교 교육 운동, 사회 교육 운동, 사상 확대 계몽 운동, 정치․경제에 관한 논설 등 다양하였으나, 주로 교육에 관한 것이 많아 학교 설립과 의무 교육의 주장, 학계의 소식, 여러 가지의 교육 내용 등을 다루었다. 대한 자강회는 통감부의 감시 하에서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의 활동이었으므로 그 활동의 폭이 좁아 보다 대중적이고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지식인 중심의 계몽운동이었다는 한계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대원장부(大垣丈夫)를 택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또 월보의 문체가 토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자로 되어 있어 일반 대중이 읽기에는 너무 어려웠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더욱이, 통감부의 일본인들은 자강회의 배후에서 그 조직을 조정하고, 전국의 항일 지식인들을 파악하여 이들을 조정하고 항일 의식을 둔화 마비시키고자 하였다. 통감부에서 관찰사나 군수 등의 관리에 자강회 회원을 발탁한 것도 통감부의 교활한 민족 분열책이었던 것이다.

▨ 신민회(新民會)

대한 자강회의 해산 이후 국권 회복을 전제로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한 단체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비밀 결사로서 그 이전의 합법적인 단체와는 성격과 활동 내용에서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미국에서 동포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다가1907년 2월 귀국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연회 등을 통해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신민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 애국적 선구자들이 자기 수양에 힘써 역량을 키우고 민중의 모범이 될 것.
○ 그러한 동지들이 굳게 단결하여 힘을 더욱 크 게 할 것.
○ 그 힘으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전력하여 민족 적 역량을 준비할 것.
○ 그리하여 앞으로는 오는 독립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주적 역량으로 민족 재생의 큰 사업을 이룩할 것.
신민회는 양기탁을 총감독으로 하고, 안창호,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등이 창건위원이 되었으며, 중심 인물로는 최광옥,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조성환, 김구, 신채호, 이강,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등이었다. 신민회의 조직 체계와 규정은 신민회가 비밀주의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회원은 전국적으로 약 8백 명에 달하여 당시 주요계몽 운동가는 거의 망라되었으며, 특히 서북 지방의 교사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종적인 연락에 의해 비밀을 고수하면서 회원 각자가 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업으로 는 1908년 평양 대성 학교의 설립과 운영이며, 평양의 마산동에 설립한 자기 회사와 서울, 평양, 대구에 설치한 태극 서관이었다. 태극 서관은 손님으로 가장한 신민회 회원들의 연락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자체 내에 인쇄 시설을 갖추어 각종 도서를 발간할 계획이었으나, 일제가 조작한 총독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된 105인이 사건을 계기로 그 지도부가 체포되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한편, 신민회는 청년 운동의 일환으로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주로 서북 지방에 분회를 두고 청년의 인격 수양과 단체 생활의 연마, 일인 일기 교육으로서 직업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안창호는 청년 학우회의 4대 정신으로 무실, 역행, 충의 , 용감을 내세웠다. 청년 학우회는 청년 수양단체로서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1910년 국권 침탈과 함께 모든 단체가 해산될 때 함께 해산당하였다. 청년 학우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에 의해 흥사단이 설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수양 동우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의 활동 중에 해외에 독립 운동 기지를 만들어 국권 침탈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공헌하였다.

▨ 서북 학회

1908년 1월 이미 활동하고 있던 지역 학회인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통합되어 설립되었다. 1907년에 강제 체결된 정미 7조약으로 보안법과 신문지법이 만들어져 국권 회복 운동이 점점 어려워져 가는 상황에서 기존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여 현실적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신민회의 창립으로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의 회원들이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서북 학회로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그 설립 취지와 목적이 동일하여 양 단체의. 통합은 예견된 일이었다. 1907년 3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서울 유학생들이 친목 단체로 서북 학생 친목회를 결성하여 친목 활동과 더불어 애국심 고취와 애국의길 을 도모하는 데 목적을 두었는데 서우 학회와 한북 흥학회가 이를 후원하였다. 1908년 1월 2일 임시 회장 이동휘의 지도하에 양 학회의 인사 149명이 참가하여 창립 총회를 열었는데 선출된 임원은 회장에 정운복, 부회장에 강윤희, 총무에 김달하, 부총무에 김주병, 평의원에 이종호, 태명식, 이갑, 정진흥, 김명준, 최재학, 주혁, 현승규, 윤익선, 오주혁, 주동한 등이었다. 서북 학회의 설립 취지와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권을 회복하고 인권을 신장하여 근대 문명 국가를 건설 한다. 둘째, 지식과 세력을 양성하여 사회 발달과 문명 증진을 꽤한다. 셋째, 실력 양성으로 민력을 증진한다. 넷째, 단체들이 하나로 되어 민력을 결집시킨다.

▨ 기호 흥학회

1908년 1월 19일에 정영택 등의 발기로 경기도 및 충청 남북도의 학문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기호 지방이 옛날부터 정치와 문화 및 학문의 중심지였으므로 이 전통을 지킬 것을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내세웠으며, 그 취지서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건설로 전국 청년의 교육에 힘써야 할 것은 늦출 수 없는 급무‘라고 하였다. 각지에 지회 설립에 착수하여1909년 7월까지의 지회 상황을 보면 경기도에 광주, 수원, 양근, 장단, 교하, 강화 등 6개소, 충청 남도에 서산, 공주, 연산, 당진, 해미, 목천, 홍주 등 7개소, 충청북도에 청주, 충주, 청양, 풍덕 등 4개소로 모두 17개소였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기호 학교 등 학교 설립과 운영, 월보의 발간, 강연회 등을 통한 계몽 활동 등이었다.
3. 근대의 경제와 사회


▨ 일본 상인의 쌀 유출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상인들이 한국에서 수입 한 것은 쌀, 쇠가죽, 콩, 생사, 인삼 등 주로 1차 생산품으로서 그들의 국내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원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쌀은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1887년부터 1882년 5개년 동안에 부산과 원산을 통해 한국에서 유출된 쌀은 전체 수출량의 30%에 이르렀으며, 콩은 10%였다. 1882년 이후에는 콩 유출량이 점점 늘어나더니, 1980년대에 들어 다시 쌀의 유출량이 증가되었다.
당시 한국의 쌀값이 일본의 ⅓에 해당되었으므로 일본 상인들은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상인들은 많은 쌀을 경쟁적으로 유출시켰고, 상대적으로 한국 내의 쌀이 부족해져 쌀값이 폭등하여, 당시 흉작이 겹친 농촌 경제와 일반 서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상인들은 전라도 곡창 지대에서 입도 선매 등의 방법으로 싼값으로 쌀을 유출하였다.

▨ 열강의 이권 침탈

자본 수출을 통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 정책은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서 후진 지역의 광산, 철도, 농장, 공장 등의 개발과 경영에 투가하며, 후진 지역의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손쉽게 확보하여 막대한 이윤을 보장받으려는 것이 식민지 침략의 목적이었다. 1984년 이전에는 주로 상품 수출의 형태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 침략이 진행되었으며, 주로 일본과 청국의 상인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또, 해관 세수권, 연안 어부 채취권, 전신 부설권, 저탄소 설치권 등이 역시 일보노가 처국에 의해 독점되었다.
청․ 일 전쟁 이후에는 광산이나 철도 등 보다 중요한 자원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침략당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남북을 종단하는 철도 기본 간선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삼국 간섭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1896년 아관 파천을 전후하여 주요한 이권들이 러시아와 미국에 넘어갔다. 이는 당시의 조선 정계에 친러파와 친미파 세력이 증대되고 있었던 것과도 연결된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 쟁탈 대상은 철도, 광산, 전기, 수도, 전신 등 국가의 기간 산업부분이었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값싼 한국의 노동력과 풍부한 원료를 약탈하여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는 그들에게 예속되어 민족 자본의 성장이 억제되었고, 자주적 근대화의 진전에 장애를 받게 되어싿. 이들은 광산의 개발권과 철도의 부설권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경영권까지 장악했으며, 인근의 토지와 산림까지 장악하였다.
열강의 이권에서 나오는 이윤은 막대한 것으로서 미국의 운산 금광의 경우 1902년의 국내의 금생산의 ¼을 차지하였고 연간 순수익률의 증가는 300%에 달하였다. 1897년~1915년 사이의 금 생산고는 4천 9백 50만 원이었는데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될 당시 일본에 진 국채가 1천 3백만 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권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만한 일이다.
1895~1904년의 제국주의 열강의 한국에 대한 주요 이권 침략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일 본>
경부 철도 부설권 1898
평양 탄광 석탄 전매권 1898
경인 철도 부설권(미국으로부터매입 1898
충남 직산 금광 채굴권 1900
경기도 연해 어업권 1901
인삼의 수출 독점권 1901
충청, 황해,평안도 연해 어업권 1904

<미 국>
평북 운산 금광 채굴권 1895
경인 철도 부설권(1898 일본에 백만달러에 매도함.) 1986
서울 전기,수도 시설권 1897
서울 전차 부설권 1898
<러시아>
함북 경원 종성 금광 채굴권 1896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1896
압록강 유역, 울릉도 삼림 채벌권 1896
부산 절영도 저탄소 설치권 1987
동해안 포경권 1899

<프랑스>
경의 철도 부설권(일본에넘김) 1896
평북 창성 금광 채굴권 1901
평양 무연탄 광산 채굴권 1903

<영 국>
평남 은산 금광 채굴권 1898

<독 일>
강원도 금성 당현 금광 채굴권 1898


▨ 메가다의 화폐 정책

1904년 8월 러․일 전쟁이 진행 중일 때,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침략하기 위한 소위 ‘ 대한 시설 강령 (對韓施設綱領)’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제 1차 한․일 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대한 제국 정부는 일본이 추천하는 외교와 재정 고문을 채용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이 때, 외교 고문으로 온 사람이 미국인 스티븐스이고, 재정 고문은 일본인 메가다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를 정리하여 일본의 금융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메가다는 “한국의 화폐가 문란하고 재정이 고갈되었으니 화폐를 급속히 정리하고 국가 재정의 원천인 세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1905년 9월 18일 화폐 조례를 만들어 일본의 화폐 제도에 따른 금본위제로 하고, 한국에서 그 동안 통용되고 있던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여 일본 제일 은행권을 본위 화페로 하였다. 백동화와 엽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일본 상인들의 농간에 의해 많은 손해를 보았다.
메가다의 화폐 정책은 한국 상인의 자산과 화폐를 일본 상인들에게 넘겨 주어 한국의 경제를 일본이 장악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극심한 금융 공황이 일어나 한국 상인들은 도산하는 사람이 늘어났으며. 농촌 경제를 분해시켜 농민을 농촌에서 유리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메가다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할 것을 강요하여 일본 정부와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재정적 예속을 강화하시켜 나갔다.

▨ 국채 보상 운동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의 재정 고문 메가다의 강요에 의해 대한 제국 정부는 190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2백만 원의 공채를 모집하고, 일본 제일 은행으로부터 3백만 원과 12월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백오십만 원의 차관을 들여 왔다. 또, 통감으로 온 이토는 ‘한국의 시정 개선’을 위해 세관 수입을 담보로 하여 일본 흥업 은행으로부터 일천만원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다.
통감부는 차관으로 들여 온 자금으로 식민지 통치 기구를 유지, 확대하며 침략과 약탈을 강화하고, 대한 제국 정부를 재정적으로 일본에 예속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매년 6.5%의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되는 이 차관으로 통감부는 한국에서 일본인의 생활 조건을 만들고 일제의 침략을 위한 시설을 하는데 사용하였다. 즉, 남포와 평양간의 도로와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영일만에 이르는 도로를 확장하고, 인천과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 거류민을 위한 상수도 시설, 일본인의 관청 보수와 봉급 지불에 주로 소비하였다
통감부는 한국을 침략하면서 일본인의 한국 친투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의 형식으로 조달하여 이를 한국 정부에 떠넘기는 것이었다. 1907년 대한 제국 정부가 짊어진 외채 총액은 1천 3백만 원으로 이는 1년 세출 예산에 맞먹는 막대한 것으로서 당시 8백만 원 가까운 재정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대한 제국으로서는 외채 상환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애국적 지식인들은 차관이 국권을 유린하고 식민지적 예속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보고 외채의 상환이 국권 회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하면서, 이를 대중적인 참여에 의해 해결하도록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하여 1907년 2월 16일 대구의 서상돈이 금연한 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뜻으로 단연회를 조직하고 이에 대한 취지서를 만들어 전국에 호소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를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본회는 일본에 대한 국채 1천 3백만 원을 보상하기로 목적함.
․보상 방법은 일반 국민의 의금을 모집함. 단,금액은 다소를 불구함.
․본회에 의금을 납부한 인원은 본회 회원 으로 인정하고 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공 포함.
․의금으로 모은 돈은 위의 액수에 달하기까 지 신용이 있는 우리 나라 은행에 일치함. 단,수합된 금액은 매월 말에 신문에 포고 함.
․본회는 목적을 달한 후에 해산함.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된 후 뒤에 국채 보상 단연 의무회, 국채 보상 일심회, 국채 보상 동정회, 국채 보상 의무소, 국채 보상부인되 등 전국적으로 20여 개의 단체가 경성되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3월 말에는 이종일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지원금 총합소와 4월 초에는 이준 등이 중심이 된 국채 보상 연합 회의소가 조직되어 각각 수금액의 촹괄과 국민 지도의 업무를 분담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이어졌다.
국채 보상 운동의 전국적 확대에는 황성 시문, 대한 매일 신보, 제국 신문 등 민족 신문들의 홍보 활동이 크게 작용하였다. 농민들은 식량을 판 돈의 일부를, 노동자는 어렵게 번 한 푼의 돈을, 남자들은 단연회에 가입하여 금연한 돈을, 여자들은 찬값을 절약하여. 또는 가락지와 비녀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각종 패물 등을 기생들까지도 돈을 거두었다.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보상운동에 앞장섰던 단체들을 해산시키며, 지도급 인사들을 회유하여 친일 활동으로 변절시키고, 보상금 횡령 사건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일으키는 등 갖은 모략을 다하였다. 특히, 보상 운동에 앞장섰던 대한 매일 신보를 탄압하여 영국인 방행자 베델을 추방하려 하였으며, 국채 보상금 소비 사건을 날조하여 양기탁에게 혐의를 씌웠다. 결국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한민족의 순수한 애국심이 국채를 보상해서 나라를 지킨다는 소박한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국채 보상으로 국권이 수호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라를 지켜 보려는 민중의 의식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인 것이다.

▨ 증기선의 운행과 해운업의 발달

서양 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타고 온 증기선은 서양 문명의 우수함을 보여 준 대표적인 것이며, 이러한 배를 마련하는 것은 부국 강병의 중요한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1881년 개화 정책이 추진될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에서 군함을 구입하려 계획하였고, 1994년 이후에는 중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증기선을 구입하거나 임차하여 사용하였다. 해안을 따라 세미를 운반하는 데 증기선은 크게 편리하였으나 일본 증기선 회사가 이를 독점하여 이익을 챙겼다. 이에 대하여 경강 상인들이 종래 세미 운반을 맡아오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증기선을 구입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1884년 정부에서 세 척의 증기선을 구입하여 세미 운반에 사용하였으며, 1889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에는 정부와 상인의 합작으로 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주로 세미 운반의 청부를 맡았다. 1895년 한국에서 증기선을 소유했던 실태는 144척에 38,403톤이었다. 189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운수업도 크게 발전하여 종래 일본 자본가에게 독점되어 오던 것을 민족 해운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대한 협동 우선회사, 인척 우선 회사, 인척 윤선 주식회사 등 해운 기업이 출현하였다.

▨ 농광 회사

러․일 전쟁을 일으킨 직후 일본은 한국 전 국토의 ¼에 해당하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해 오자, 이에 대항하여 일부 애국적인 관료와 실업인들이 한국인이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농광 회사를 설립하고 정부에 개간 특허를 요청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를 1904년 7월 11일 허가하였다.
이 회사는 황무지 개간 사업과 함께 당시 외국인이 이권으로 노리고 있던 광산 개발까지 포함시켜 모든 이권을 확보하여 외국인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이 항의하고 그들이 요구한 황무지 개척권을 강요하자 애국 지사들이 보안회를 조직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농광 회사의 해체를 요구하여 황무지 개척권 문제는 일본의 요구를 일단 막는 것으로 해결 되었다.

▨ 근대적 상회사(商會社)의 활동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 등 개항장으로 들어오는 외국 상인들로부터 외국 상품을 모아 이를 국내 각 지역에 팔고 국내의 농촌으로부터 직접 곡물을 사서 외국 상인들과 거래를 하면서 개항장과 농촌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개항장에 자리잡은 객주와 여각 및 보부상 등 전통 상인들이었다. 이들 상인들은 외국 상인들의 침투에 대항해서 상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체제의 확립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1880년대 초부터 근대적인 상업 체제로 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회사릐 설립은 일본이나 청국 또는 영국 상인들의 활동에서 영향을 받은 바도 있지만 일찍이 개화 사상가들도 상사 또는 회사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한 적도 있어 이러한 내외의 분위기로 회사설립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회사들은 그 이름이 회(會), 사(社), 상회, 상사, 상회사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대부분 한자 회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설립 과정은 정부에 상회 장정을 통리아문에 보내면 아문이 허가서를 보내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결국 관허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 상회사들은 1883년경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여 갑오개혁 이전까지 전국에 약 40여 개가 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평양에 설립된 대동 상회와 서울에 설립된 장통회사(또는 장통사)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서 전국 각지에 상회 직원이 파송되었다.

▨ 근대적 섬유 공업의 발달

1880년대에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부국 강병의 방안을 강구하던 일부 개화파 중에서 근대적 산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근대적인 공업의 일환으로 면재춤 생산 기계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특히, 지석영은 1882년 근대적 직조기를 구입할 것을 상소하고 있었으며, 정부에서는 1884년 농상, 직조 등의 관영을 위해 설국치관(設局置官)을 명하여, 1885년 정부 내에 직조국(織造局)이 설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1884년에 고ㅛ종의 명으로 중국인 공장들을 모집하였으며, 1885년부터는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중국인 기술자를 더 모집하였고, 사기(紗機) 4개를 중국에서 구입하였으며, 곧이어 직금 기계(織錦機械) 32건을 구입하였다. 이외에도 중국에서 면사와 직조 기계를 몇 번에 걸쳐 구입하였다. 그러다가 1891년 이후 경영난에 따라 생산이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1897년 이후 광무개혁이 진행되면서 산업의 발전을 위한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897년 년경에 대조선 저포 제사(大朝鮮苧布製絲) 회사의 설립, 1899년에 한상 방적 고본(漢上紡績股本) 회사, 1898년에 직조 권업장이 설립되었으며, 1990년에는 한성 직조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일반인들 가운데서도 지방에 직조 회사를 설립하여 직물을 생산하였다. 1902년 2월 김덕창 이라는 사람이 서울의 중부 장통방 중곡동에 김덕창 염직 공업소를 설립하여, 외국에서 수입한 면제사를 원료로 하여 면포를 염색 직조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김덕창은 일본에서 제작한 개량식 족답직기(足踏織機) 8대화 S직조기 9대를 설치하고 40명의 직공을 고용하면서 연간 6천 4백 단의 면포를 생산하였다. 그 당시 수입 면포가 70만 단이라는 수량과 비교할 때 그 생산량은 미미한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덕창 염직 공소의 설립을 계기로 하여 서울에 38개소의 직조 공장이 설립되어 근대적인 민족 섬유 공업의 발달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영세하여 전체로 S직조기는 208대였고 한 공장당 직조기는 평균 6대에 불과한 소규모의 것이었다.


4. 근대 문화의 발달

▨ 동도 서기론(東道西器論)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에서 전해진 서양의 문물을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갔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의 우수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서양을 오랑캐로 인식하여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서학을 배척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이 형성되고 서양의 무력 침략에 접하면서, 특히 무기를 중심으로 한 기술의 위력을 알게 되었으며, 개항 이후 서양의 기술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의 수용은 전통적인 기술 문화를 유지하면서 부국 강병의 수단으로 기술만을 수용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다.
동도 서기론은 그 성격상 중국에서 일어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과 동일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일면으로는 전통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으나,서양의 과학 기술 문화의 근본 배경인 자유주의와 국가주의적 정치 체제를 바탕으로 한 합리주의 및 과학 정신의 전통을 충분ㅁ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서양 문화 수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 박문국(博文局)

1883년 8월 통리아문의 한 기구로 설립된 박문국은 외국어를 학습하던 동문학에 부속된 기관이었다. 원래 동문학에서는 서적의 편찬과 신문 간행을 계획하였었는데 , 이 안에 박문국을 설치한 것이다.
박영효가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일본에 사절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일본으로부터 신문 제작 기술자를 데리고 왔으며, 귀국 후에 유길준에게 신문 간행의 일을 맡겼다. 1883년 2월경 당시 통리아문 주사로 근무 중이던 유길준이 신문국 장정을 만들었는데, 이 때 신문을 간행하는 사무처리를 박문국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 직후 박영효가 한성 판윤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유길준도 신문 간행의 일을 중지하고 말았다.
그 후에 정부에서 신문을 간행하기 위하여 유길준이 만들어 놓은 이름을 그대로 살려 1883년 8월 17일 박문국을 설치하고 0월 30일 한성 순보가 창간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한성 순보는 간행이 준단되었으나 박문국의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885년 6월 박문국이 중건되고 1886년 1월 25일 한성 주보로 다시 간행되어 1888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 교육 입국 조서

1895년 2월 2일에 ‘교육에 관한 조칙’으로 발표 된 교육 입국 조서는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극명하게 밝혀 주는 것이며, 1895년에 진행된 교육 개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교육 입국 조서의 내용은 교육이 국가 발전의 기반이 됨을 밝히고, 세게의 부강한 국가들이 교육을 통하여 이를 이룩하였으니 교육은 국가 보존의 긴요한 방법이라고 교육의 중요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종래 일부 계층에 제한되어 관리 등용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또는 특수 계층의 신분적 유지를 위한 성격이 강했던 교육이 국가와 민족의 자주 독립을 이룩하는 근본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으로서, 교육관의 일대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또, 교육의 기본 정신도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여, 과거에 실시되었던 교육을 허명 교육으로 비판하였다.
교육의 삼대 강령으로 덕양(德養), 체양(體樣), 지양(智養)을 제시햐여 교육이 지, 덕, 체가 조화된 전인 교육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학교를 널리 세워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국가 발전과 왕실의 안전에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박영효의 교육 이념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1888년 국왕에게 나라의 근대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개화 상소’를 올렸다. 이는 개화 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표현시킨 대표적인 내용으로서 이를 통해 개화 사상의 사상적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상소한 개혁의 방안으로 7개항을 제시하였으며, 그 가운데 교육에 관한 내용을 통해 한국의 근대 교육의 성격을 알아볼 수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내용을 ‘교민재덕문예이치본(敎民才德文藝以治本)이라 하여 교육을 정치의 군본이라 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교육 개혁의 구체적 방안으로 모두 열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앞서 교육의 성격을 논하면서 교육은 인간 생활의 지침이라며, 학교 설립은 국가의 급무라고 하였다. 또, 실용을 앞세운 교육을 강조하여 종래의 교육의 폐단을 비판하고 있다.
교육 개혁의 방안에는 의무 교육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소․중학교의 설립과 고등 교육의 실시, 국사와 국어 국문의 교육, 외국인 고빙을 통한 근대 학술 교육, 서적의 출판과 박물관 설치, 강연회 등 개최로 국민 계몽, 외국어 학습과 신문의 발행 및 종교의 자유 등이 있다. 그 가운데서 박영효는 특히 국사와 국문을 먼저 국민에게 교육시킬 것을 강조하고, 이를 통한 민족의 자각과 부국 강병의 정신적 기반을 이룩할 것을 제시하였다. 자국의 역사를 먼저 교육시킬 것을 강조한 것은 다른 방안에서도 제시하고 있어 그가 내세운 근대 교육이 국민 정신을 고취하여 나라를 지키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박영효의 교육애 대한 생각은 1895년 그가 내부 대신으로 직접 개혁의 실천을 담당하면서 지방관에게 개혁의 세부 항목으로 지시한 내용에서도 '먼저 그 지방의 인민에게 국사와 국문을 교육시킬 것'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교육관이 1895년 근대 교육을 추진한는 기본 이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한국의 근대 교육

한국의 근대 교육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침략에 대하여 국권을 수호하며, 동시에 자주적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한민족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한국 근대 교육은 전통 시대를 벗어나서 근대에 들어와 실시되었다는 시간적 의마가 아닌 역사적 의마가 큰 것이다. 한국 근대 교육은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적 개혁이 추진되는 내용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자주적인 개혁으로 이루어졌으며, 민족의 의자가 표현된 개혁이었다.
한국의 그낻적 개혁 과정에서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전통 체제를 탈피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이 침략이 수반되는 모순이 나타났으나, 교육 개혁은 전통 교육에서 탈피하면서 동시에 침투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적 논리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 교육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그 교육 내용이 민족적 전통을 확인하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국사와 국문이 중요시되었다. 때문에 한국 근대 교육은 어느 때 어떤 상황보다도 민족적 성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근대 민족 교육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 근대적 교과서의 간행

근대 교육이 발전하기 시작하는 1895년에 근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근대적 교과서의 편찬이라는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갑오개혁이 시작될 당시 관제 개혁에서 학무아문에는 교과서 편찬을 전담하는 부서가 설치되었으며, 그 후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학무아문으로 하여금 소학교 교과서의 편찬을 조속히 실시할 것을 논의하였다. 1895년 5월에 주일본 공사관에 훈령을 보내 교과서 편찬에 참고할 것이니 일본 교과서를 구입하여 보내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교과서 편찬이 1895년 전반에 진행 중이었으며, 일본 교과서가 참고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5년에 학부에서 발행한 교과서는 모두 17종이었으며, 주로 소학교용이었다. 처음에는 학부에서만 교과서가 간행되더니 1900년을 전후하여 민간에서도 간행되었으며, 점차 학부 간행보다도 그 수가 늘어났다. 이는 구가 재정이 교과서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만큼 넉넉하지 못한 이유이며, 국민의 교육열이 증대되면서 부족한 교과서를 민간에서 편찬하였던 것이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식민지 지배를 준비하는 교육 침략 정책이 실시되고, 사립 학교를 억압하면서 그 교육 내용을 통제하기 위해 1908년 교과용 도서 검정 제도가 실시되어 한국의 교과서는 커다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즉, 통감부는 엄격한 검정 규정을 만들어 일제의 침략을 나타내거나 민족의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담긴 교과서는 이의 사용이나 발행을 금지하면서, 1906년 이전에 발행된 애국적이고 민족전인 교과서도 모두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부터는 검정에 통과된 검정 교과서나 사용이 인정되는 인정 교과서만 학교에서 사용되었다.

▨ 북간도 공립 소학교
연변 지방에서 한국인의 근대적인 교육 기관으로 그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있는 것이 대한 제국 정부에서 설립한 북간도 공립 소학교(北間島公立小學校)이다. 1895년부터 각지에 설립된 공립 소학교에는 한성 사범 학교 졸업생을 교원으로 임명하였으며, 지방 현지에서 부교원을 임용하여 부족한 교사를 보충하였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에는 1905년 3월 17일자로 학부에서 오재영, 김용흡, 김성진, 최정현, 박병휘, 노승룡, 이남섭, 김중경 등 8명이 부교원으로 임용되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규모나 교육 내용에 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공립 소학교의 설립과 경비의 지출이 지방관의 관할 사항이었으나, 부교원의 임용이 학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대한 제국 정부에서는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이주민의 보호와 한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1903년에 간도 지방의 한국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 양성을 제의하기도 하였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정부와 관련 있는 북간도 공립 소학교의 개교는 한국의 행정권 내지 통치권이 이 지역에 행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지고 있는 사실을 1906년 초 한국에 설치된 통감부에서 1907년 간도 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였으며, 간도 파출소의 일본인이 1906년에 이상설이 설립한 서전서숙을 방해하다가 서전서숙이 자진 페쇄하자 그 터를 사서 그 곳에 1908년 간도 보통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간도 보통 학교는 일제 통감부의 식민지 준비 교육 기관으로서 한민족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인을 만들기 위한 곳이었다.
북간도 공립 소학교는 한국의 공립 소학교와 같이 외세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족 교육 기관으로서, 간도 지역에 설립된 한민족 최초의 공적인 교육 기관인 것이다.

▨ 독사신론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신채호가 1908년 대한 매일 신보에 연재한 사론이다.
이는 신채호의 국사관이 형성되는 내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1910년 봄에 최남선이 발행하는 ‘소년’지 제 3 권 제 8 호에 국사신론(國史新論)이라는 제목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게재하였는데, 그 내용은 민족을 단위로 한 민족 국가의 역사를 재구성하자는 것이 그 주지로서, 민족을 역사 전개의 주체로 파악하는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서론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의 역사는 민족 소장 성쇠의 상태를 열서할 자라.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무할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이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그 역시 중하다.… 즉, 고대의 불완전한 역사라도 이를 상구하면 동국주족, 단군 후에의 발달한 실적이 밝거늘 어찌하여 우리 조상을 거짓으로 말함이 이에 이르렀느뇨….”

▨ 국사의 연구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민족 운동의 정신적 바탕인 국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국사 연구는 민족 정신의 앙양과 교양을 높이는 데에 주력하였으나, 아직 근대 역사학으로서 학문적 기반은 갖추지 못하였다. 국사연구의 경향은 국민 교양적인 성격을 띠면서 애국계몽 운동으로 연결된 경향과, 국사 교과서로 편찬되어 학교 교육에 연결된 경향으로 구분될 수 있다. 국사 연구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신문이나 학회에서 발행하는 월보에 논설이나 인물 전기 또는 國朝故事등을 연재하여 역사 지식4을 넓히고 민족 정신의 함양에 이바지하였다. 국사 교과서는 국문 교과서와 함께 국민 정신 교육에 기여하였는데, 국사 교과서 편찬에 활약이 컸던 사람은 현채와 김택영이었다. 교과서의 내용은 종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면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단군 조선의 강조, 안정복의 삼한정통론 계승, 외침에서 공을 세운 위인이나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의 활동상이 강조되었다. 이 밖에도, 외국인의 건국가와 망국사 또는 피침사와 함께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의 전기가 많았는데 이태리 건국 삼걸전, 월남 망국사, 파란 멸망사, 미국 독립사, 애급 식민사, 비사맥전, 워싱톤전 등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학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읽던 책이었다.

▨ 서유견문

유길준이 지은 서유견문은 그 문체가 전통적인 문체에서 벗어나 국․한문을 혼용하고 새로운 문체를 사용했다는 데에서 국어학상으로도 귀중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19세기말 외세가 침투하는 상황에서 나라의 자주 독립유지와 근대 국가로 발전하려는 개화 운동의 사상적 측면과 서양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가는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서유견문이 쓰여진 시기는 대략적으로 1885년 12월 그가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길에 정부가 연금되었다가 1892년 11월 자유를 찾게 되는 기간이다. 그는 일본과 미국 유학 중의 자료와 귀국하는 도중에 유럽 각국을 둘러보면서 견문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타고 후에 그 원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갑오개혁이 진해오디면서 등용되어 일본에 가는 길에 일본에 원고를 가지고 가서 1895년에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크게 여행기, 서양 문물에 대한 소개, 개화 사상, 애국심의 표현 등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가장 많은 분향은 서양을 소개하는 애뇬으로서, 이에는 국가의 권리, 국민의 교육, 국민의 권리, 정부의 종류 및 정치 제도, 정부의 기능, 조세, 화폐, 법률 등 서양의 정치, 학문과 각종 풍속, 신앙,산업, 문명의 이기 등에 관해 소개와 해설을 함께 싣고 있다.
개화 사상에는 유길준의 개화에 대한 인식, 개화의 개념, 개화의 방법, 개화의 등급 등으로 서술되었으며, 개화를 하는 데 있어 외국 문화를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국의 우수한 문화도 계승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곳곳에 애국심을 나타내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각국의 권리는 논하면서, 아무리 약소국의 군주라 하더라도 강대국의 군주와 동등한 에를 주고받고 있으며, 강대국에서 파견되 ㄴ사신이 약소국의 국왕과 대등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한문 혼용체로 서술한 것은 일반 국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 근대 문학의 경향
190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은 창가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3․조 혹은 4․4조로 된 초기의 형태, 즉 애국가 같은 것은 전통적인 시가에서 연속된 양식이다. 창가의 내용은 개화 사살을 노래한 것과 ‘社會燈(대한 매일 신보)’에서 나타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최남선은 1908년 소년지에 ‘海에게서 少年에게’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신체시라고 불리는 이러한 양식은 일본의 신체시와 비슷하지만 최남선은 그대로 시라고 하였다.
소설은 신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인직의 ‘열의 누(1906)’와 ‘귀의 성 (1908)’, 이해조의 ‘花의 血 (1911), 최찬식의 ’추월색(1912), 안국선의 ‘금수 회의록(19080’등이 대표적이다. 흔히 신소설이라고 하지만 작품 구조상에서는 새로운 것은 없고, 오히려 이전의 소설보다 가부장적인 측면이 더욱 강하여 후퇴한 면도 보이고 있다. 이광수의 ‘무정(1910)’은 일상어의 문체 확립, 작품 구조의 확립2, 장편 소설의 가능성 등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도덕과 구도덕의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삼각 연애 관계의 구조가 민족주의라는 초개인적인 이념으로 결말짓게 되는 이 소설은 당시 한국 지식층이 열렬한 독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한민족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이광수의 소설은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할수 있었다.

▨ 근대 예술의 발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서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국민적 예술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문화와 예술은 양반과 상민의 뚜렷한 구분이 지어져 내려 왔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 양반은 아악을 교양으로 하고 가끔 기악(妓樂)과 광대의 판소리를 그들의 연회 석상에서 연주하도록 하였으며, 평민들은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꼭두각시 놀음 등을 즐겼다. 근대에 와서도 지식인들은 시조나 가곡을 상식으로 알았고, 서민들은 춘향가, 심청전, 토기 타령 등 판소리가 유행하였다.
미술도 양반들의 여가로 즐겼으며, 도화원의 전문 화가도 있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천시되었다. 개항 이후에 미술가들은 직업인으로 위치를 굳혀 갔으며, 1906년을 전후로 하여서는 서양 화풍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반 사회에서는 재래식 미술, 즉 동양화풍이 견지되었으며, 서민층에서는 이른바 민화가 유행되었다. 서양식 유화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진 않으나 1905년 프랑스 공사관에서 개최되었던 외국인 전시회에 한국인이 그린 유화가 출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극은 양반 사회에서는 천시의 대상이 되어 주로 서민들 사이에서 이른바 민속 가면극이 성행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양반이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익살이 대부분이었다. 양주 별산대 놀이가 궁중에서 외국 사신의 영접용으로 공연된 적이 있었지만 연극은 서민들의 독점물이었다.

▨ 근대 과학 기술의 수용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이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 서양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으나, 이는 서양 과학의 정밀성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체계적인 이해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이양선의 빈번한 출몰과 중국의 정세 변화를 통해서 서양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기술이 천주교의 포교 활동을 위한 수단이라고 이해하면서 이를 배척하였으나, 점자 천주교와 외세의 침략을 과학 기술과는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양 기술(西器)은 수용하되 서교(西敎)는 배척하는 동도 서기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특히, 부국 강병을 위해 서양 기술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개화 사상과 연결되었으며, 과학 기술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부가 앞장서서 과학 기술을 수용하였다.
농상 공사에서는 독일인을 초빙하여 기술 지도를 받았으며, 일본 유학생 중에는 양잠법을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직조국은 1888년 다량의 방직 기계를 구입하고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였으며, 지조국(紙造局)은 1891년 일본 상인으로부터 각종 제지 기계를 구입하였다. 또, 광산 개발을 위해 1888년 미국에서 채광기를 구입학도 미국인 광산 기술자를 초빙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에 고취되어 민간인들도 서양 과학 기술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각종 기계를 수입하여 근대 공업을 발달시켜 갔으며, 점차 자체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다. 전기와 통신 사업도 확대되어 갔으니, 1887년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되었으며, 1884년에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 사이에 해저 전선의 부설, 1885년 전보국의 설치, 1887년 서울, 공주, 대구, 부산을 연결하는 전선의 부설, 1898년 궁중과 정부 각 아문 사이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가설, 경인 철도의 부설에 이어 경부, 경의 철도 부설되었다. 이 가운데는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에 의한 것이 많이 있으나, 이로 인해 한국에 과학 기술의 보급이 이루어진 면도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 학교가 설립되면서 기술 교육도 실시되었다. 특히, 대한 제국의 산업 진흥 정책과 관련되어 과학 기술 교육을 위한 학교가 다수 설립되었으니, 기예학교, 경성 의학교, 상공 학교, 철도 학교, 광업 학교, 공업 전습소, 전무 학당, 우무 학당 등이 그것이다.
과학 기술 수용에도 시기적인 특징이 있는데 흥선대원군 때에는 무기를 수용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무기와 각종 기계를 수용하더니, 1895년 이후에는 과학 기술 자체를 수용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기술 교육 정책은 재정 부족으로 곤란을 받았다. 외국인 기술 교사를 초빙하였으나 봉급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국내의 기술 교사는 봉급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또,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경비를 보내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기술 교육 정책은 꾸준히 실시되었다

▨ 제국주의 시대

15세기 이래로 전개되었던 식민지 쟁탈 경쟁은 18세기 말 이후에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각국은 국내의 정치 사회 문제 해결에 몰두하게 되어 식민지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 혁명의 진전에 따른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었다.
즉, 과거에는 본국의 공업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확보와 상품의 시장 또는 이민 대상지로서의 식민지가 개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달이 독점 자본주의 또는 금융 자본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잉여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자본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특히, 1870년대 말 독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적극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이 격렬해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19세기 말의 식민지 경쟁은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대외적 위신과 관련되어 각국은 식민지 확보를 가장 중요한 우선 정책으로 추진하였으며, 그 대상 지역도 전세계의 후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각국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보 정책과 이와 관련되어 경쟁 국가에 대항하는 정책을 세계 정책이라고 하고, 이러한 세계 정책을 추진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제국주의 국가라고 하며,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1870년대 말부터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진 지역에 대한 식민
지 진출은 경제적 종속과 함께 정치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후진 지역의 전통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변화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각국이 근대화 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국제적 긴장 상태가 조성되고, 이는 무력 충돌로 확대되어 제 1차 세계 대전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19세기 말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 홍선 대원군의 집권

1863년 말 철종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죽자 후계자를 둘러싸고 조야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오랫동안의 세도 정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해 오던 안동 김씨 세력이 후계자 문제에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 동안 안동 김씨 세도가에게 억눌려 불우한 생활을 해 오면서도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던 흥선군 이하응과, 역시 안동 김씨의 세력에 반발을 하고 있던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익종으로 추존됨.)의 비인 신정 왕후 조씨를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세력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되어, 궁중의 제일 어른의 자격으로 12세 된 흥선군의 둘째 아들에게 후계를 명하니 이가 고종이었다.
그리하여 홍선군 이하응은 왕의 생부로서 홍선 대원군이 되어 국왕이 아직 어린 이유로 자신이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홍선 대원군의 왕실 제보를 보면 도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즉, 정조의 이모제(異母第)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한 사람이 16대 인종의 왕자 인평 대군의 6세손인 남연군이었다. 이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흥선군은 익종(즉, 효명 세자)과 정조의 이모제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과 같은 항렬이 된다. 그러므로 신정 왕후 조 대비는 흥선 군의 아들에게 익종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나아가 안동 김씨에 대해 풍양 조씨의 세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국왕을 낳은 생부에게 주어진 명칭으로서, 선조가 즉위하자 그의 생부 덕흥군이 덕흥 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이 즉위하여서는 전계군이 전계 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망 후에 대원군의 추존을 받았으나 홍선 대원군은 살아 잇는 대원군으로서 조선 역사상 유일한 경우였으며, 왕이 아직 나이 어리니 국가의 전권을 잡고 야심찬 정치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 19세기 중엽 국내외 정세

1860년대 전후의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커다란 변화와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년 간 계속된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지방 양반과 관리들에 의해 수취 체제 특히 삼정이 그 상궤를 벗어나 운영됨으로써 민생이 파탄에 빠지자 조선 후기 이후 경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성장하고 있던 농민 의식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1862년 진주에서 비롯된 임술 농민 봉기(壬戌農民蜂起)는 삼남 각지에 삽시간에 파급되어 갔다. 이는 당시의 농민들이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와 이를 운영하는 양반 세력에 대항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농민 의식을 대변하여 농민들이 추구하는 변화를 지향하며 전통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현실 사회에 비판적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동학은 조선 왕조의 정치적, 사회적 지배 체제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왕조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확보를 목표로 하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진행되는 시기로서, 일본이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중국은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굴복한 후에 1856년 애로호 사건의 결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굴복하였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연해에는 서양 선박들이 표착하거나 접근하여 와 한국인들의 두려움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함락 소식은 동일한 문화권인 우리 나라에도 서양인들이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안으로 전통 체제를 위협하는 농민들의 봉기, 밖으로 식민지 침략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접근은 국가의 자주권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대내외로 위기에 당면한 당시 조선 왕조로서는 이에 대처하는 정치 개혁이 필수적인 시대 상황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 통상 수교 거부 정책

1863년 말 집권한 홍선 대원군은 서양과 일본의 통상 수교 요청을 반대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천주교를 박해하여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를 다수 처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며, 통상을 요구하는 제너럴 셔먼 호의 침몰에 대한 책임 문제를 들어 강화도에 침입하여 수교를 강요하면 미국을 격퇴하였다. 일본의 수교 요구를 서계(書契) 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일반적으로 쇄국 정책으로 표현하여 왔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과정에서 추진된 것이다. 천주교의 박해도 천주교도들이 그 신앙 문제와 관련시켜 외세와 연결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실제로 1860년 이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월경하여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하여 베이징을 함락시킨 것도 1860년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침략의 시작이 통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당시에 열강의 통상 및 수교 요구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는 침략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 홍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외세, 즉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이었으며, 이는 민족의 이익과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 윤리와 체제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타협을 거부하는 배타적인 보수성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였다. 종래 쇄국 정책에 대한 설명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이고 고루한 정책으로서, 이로 인해 한국의 서양 문물 수용이 늦어졌으며 근대화에 지각하게 되었다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 통상이나 수교를 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으며, 이를 거부하는 조선 왕조의 정책이 그들에게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쇄국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은 동양 3국(중국, 일본, 조선)이었으며, 이들 3국은 그들의 침략 대상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해 쇄국 정책을 실시한 것은 그들의 이익이 수반된 수교 요구를 조선이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쇄국 정책은 침략자가 그들의 국가 이익의 차원에서 상대방을 폄하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이 홍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강요로 맺어진 강화도 조약과 이로 인해 이루어진 개항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공헌이라는 것을 보다 과장하기 위해서도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비판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쇄국이라는 의미가 국가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침략 세력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음이 역사적 진실이라면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 수호를 위한 정책을 비판하는 결과이다. 쇄국 정책이라는 표현은 주체적인 역사 이해의 측면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홍선 대원군의 외교 정책은 과거의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일본이나 서양의 침략적 성격에 대응하여 자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 호포법(戶布法)의 실시

조선 왕조의 재정 수입은 농민들이 부담하는 조세 징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조선 왕조의 수취 체제(收取體制)의 대표적인 내용은 삼정(三政)으로 표현된다. 이 가운데 군정(軍政)에 해당하는 군포의 수납은 영조 때 균역법에 의해 농민의 부담이 감소되었으나, 양반들은 면제되었으며, 이전부터 관행으로 내려온 각종의 부정이 자행되어 농민들의 부담은 많아지고, 이에 대한 불만이 높아 갔다. 1862년 진주 민란이 일어나자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安劾使) 박규수(朴奎壽)는 민란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이의 개혁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삼정이정청(三政嫠正廳)을 설치하고 삼정의 개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것이 동포제(洞布制)로서 일부 양반에게도 군포의 부담을 의무화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정이 정청의 개혁안은 철종이 곧 죽어 시행되지 못하고 홍선 대원군에 의해 시행될 수 있었다. 홍선 대원군은 재정 수입의 증대와 농민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양반들은 그들이 평민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양반의 반발을 막고 그들의 위신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양반의 이름 대신에 하인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매호당 2냥씩 징수하는 균등 과세의 원칙을 세웠다.

▨ 서원의 정리

조선 후기에 양반들의 세력 기반의 확충을 위한 서원의 남설이 계속되어 18세기 말 정조 때에는 전국적으로 65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국가 재정의 낭비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농민들에게 많은 폐단을 주었다. 서원을 통한 지방 양반들의 횡포는 민심을 이반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홍선 대원군의 경우에도 세도가에 눌려 불우한 생활을 할 때 이들 서원의 비행과 횡포를 직접 경험하면서 그 폐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집권을 하자 곧 전국의 서원과 향사(鄕祠)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명령한 후, 곧이어 서원의 사설 및 남설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1865년 3월 횡포가 극심하여 백성의 원성이 가장 높았던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유생들은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홍선 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이를 벌할 것이다.”라고 하며 강경하게 그의 의지를 실현시키며 아울러 전국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을 남겨 두고 모두 철폐하도록 하였다. 서원 정리 작업은 경복궁의 중건 사업,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는 동안일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871년 신미년에 이를 마무리지었다. 서원 정리 결과 막대한 토지가 국가에 환수되었으며, 농민들의 불법적 부담이 감소되어 크게 환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양반 세력은 홍선 대원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홍선 대원군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사창제(社倉制)의 실시

홍선 대원군의 재정 확보책과 민심의 안정을 위한 개혁에서 수취 체제의 개혁은 중요한 비중을 가진다. 1867년(고종 4년) 삼정의 하나인 환곡(還穀)제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환곡의 폐단은 삼정 가운데서 가장 피해가 컸었떤 것으로, 지방에서 관리와 토호들이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는 것으로 환곡이 많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환곡은 농민 구휼책의 하나로 정부에서 면을 단위로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1/10의 이자를 받아들여 국가 세수에도 이바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곡의 배정과 운영에 있어 양반 지주와 토호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고, 각종의 불법이 저질러 농민의 부담이 가중되어 이에 따른 원성이 높았다. 홍선 대원군이 실시한 사창제의 내용은 면을 단위로 하던 것을 리(里)를 단위로 하여 사창을 설치하고, 마을 안에서 덕망이 있으면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사수(社首)라고 하여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사창제의 실시로 환곡의 폐단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농민의 생활 향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환곡제 실시에 수반되었던 각종 비리가 줄어들고 국가의 원곡(元穀)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이자 수입이 늘어나 재정 수입이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홍선 대원군의 국방 강화책

홍선 대원군은 집권 직후 서양 세력의 침략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관계를 개혁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종래에는 비변사에서 정치와 군사를 총괄하여 상대적으로 국왕의 군사에 대한 통제권이 취약하였으나, 비변사를 철폐하여 정무는 의정부에서 군사는 삼군부에서 전담하도록 한 것이다. 군사 체제의 개편에서는 우선 수준 통제사의 지위를 격상시켜 수군을 우대하여 연안의 방비에 관심을 기울였고, 오가작통법을 부활시켜 일종의 민병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강화도를 중심으로 연안에 포대를 확충하고 대포를 설치하여 수도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우수한 군인을 뽑아 군사 기술을 연마시키고, 특히 서북 지방의 포수를 따로 뽑아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홍선 대원군은 신무기 개발에도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수뢰포와 선박 등의 제조와 실험, 방탄복의 제작 등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력 침략에 대비하여 우수한 서양 기술을 수용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 병인양요(프랑스의 강화도 침략)

병인박해를 계기로 하여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한 것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제 1차는 1866년 8월 12일(양력 ; 9월 20일)에서 8월 22일(양력 ; 9월 30일)까지, 제 2차는 9월 5일(양력 ; 10월 13일)에서 10월 12일(양력 ; 11월 18일)까지이다. 12명의 선교사 가운데 3명만이 살아 남았다는 리델 신부의 소식을 들은 톈진 주재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se) 제독은 본국과 연락을 취하면서 3척의 군함으로 남양만을 거쳐 강화 수로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염창, 양화진, 서강까지 왔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7척의 군함에 6백 명의 병력으로 재차 침입해 와서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은 그들이 강화도를 점령하면 조선 정부가 쉽게 항복 하리라고 기대하였으며, 강화성을 공격, 점령하고 나서는 통진을 공격하였으며 문수산성까지 정찰하였다. 대원군을 필두로 조선 정부에서는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정부는 강력하게 양이보국(洋夷保國)을 내세우면서 항전을 준비하였으며,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비밀리에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10월 3일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에 도착하자 잠복하였던 선방 포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큰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방화, 약탈하고 다수의 서적을 약탈하고 패주하였다. 프랑스군이 격퇴된 후에 조선에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며, 홍선 대원군의 서양 배척 정책은 강화되었다.

▨ 신미양요(미국의 강화도 침략)

1871년 3월 미국의 주청 특명 전권 공사인 로우(Low, F.F)는 일본의 나가사키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아시아 함대의 로저스(Rodgers, J.)사령관으로 5척의 군함과 대포 85문, 123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는 5년 전인 1866년 1척의 미국 상선이 행방 불명되었는데 그 소식을 알길이 없더니, 병인박해 당시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를 통해 대동강에서 서양 선박 1척이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미국 정부에서는 이를 계기로 조선에 무력적 위협을 가하여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정책이 결정된 결과인 것이다. 미국 군함은 남양만을 지나 강화 해협에 이르러 4월 29일 우세한 화력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병인양요 이후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고, 더욱이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을 계기로 서양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여서 연안의 방비를 엄히 하고 있었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다시 광성진을 공격하였다. 여기는 어재연이 경군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며, 미군의 공격에 백병전으로 저항하여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일시 광성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미군도 조선군의 저항이 의의로 완강하였으며, 더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미군은 광성진을 방화한 후 퇴각하였다. 광성진의 함락과 어재연의 전사는 조선의 조야에 커다란 공포가 되었으나, 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강력한 척양 정책을 표방하면서 척화비를 각 지역에 설치하여 양이 격퇴의 의지를 보였다. 앞서 프랑스군의 침입에 뒤이은 미군의 침입 사건은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지게 하였으며, 보다 강경한 양이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서양과의 수교가 더욱 시간이 지연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제너럴 셔먼 호 사건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침략하기 직전인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이르렀다. 이 배에는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 W.B.)이 조선과의 교역을 트기 위해 서양인 5명과 중국인 13명을 포함한 19명과 통역으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Thomas, R.J.)가 타고 있었다. 당시 평안 감사였던 박규수는 중군 이현익을 보내 조선이 외국인과 교역하지 않는 국법이 있으므로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그를 잡아 가두는 횡포를 저질로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으나, 물이 점차 원래의 수위로 돌아옴에 따라 셔먼 호는 강바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잡힌 중군을 구해 낸 후 박규수는 셔먼 호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려 화공과 포격을 가하여 결국 셔먼 호가 침몰하고, 승무원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 척 화 비

1871년 신미양요에서 강화도에 침략해 온 미국과 싸우는 과정에서 한동안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일시 광성진이 함락당하고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크자 이를 격퇴하는 것은 지구전으로 대항하면서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한 흥선 대원군은 국왕의 교서를 통해 “양이가 화(和)를 하고자 함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수천 년의 예의 국가가 어찌 견양(犬羊)과 상화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몇 년을 지낸다 하여도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고 배척할 것이며, 만약 화(和)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다음의 내용이 들어 있는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洋夷侵 非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 통상 개화론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후 척양(斥洋)․척왜(斥倭) 정책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에 일부 선각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외국과 통상을 하며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생각은 이미 실학자들, 특히 북학파들이 제기하고 있었는데 박제가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규경, 최한기 등 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에 의해 상당히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오경석의 경우는 역관으로 중국에 자주 왕래하면서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 서양을 소개하는 서적을 가지고 와서 이를 서로 읽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에 관심을 가졌으며, 진보적인 젊은이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이 통상 개화론은 뒤에 개화 사상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 서계(書契) 문제

1868년 일본에 새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그들의 왕정 복고 사실을 대마도주(主)를 통해 조선에 알리는 외교 문서, 즉 서계를 동래 부사에게 전하였다. 이 때, 초량(草梁)왜관에 왜학 훈도 안동준이 이 서계를 받아 보니 그 내용 속에 ‘皇上’, ‘ ’, ‘ ’ 등 중국 정부에서 사용하는 문구가 있으며, 종래 대마도주 종씨(宗氏)가 사용하던 조선 정부에서 보내 준 도서(圖書, 즉 도장)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0년에는 일본 정부가 직접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과 교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서계의 내용을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 국내에서는 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불평 세력이 등장하였고, 이들 세력을 나라 밖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정한론이 제기되었으며, 대만 출병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일본과의 분쟁을 피하고 관계를 개선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74년 다시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서계 수용 문제가 논의되어 일본은 다시 서계를 가지고 왔으나, 그 내용에 ‘大日本’, ‘皇上’등의 문구가 여전히 들어 있어 실제로 교섭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 운요 호 사건

1875년 일본과 서계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정한론이나 대만 출병 사실과 관련하여 일본과 수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박규수, 이최응, 양헌수 등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조정의 대다수 의견은 서계의 내용과 그 절차 문제 등을 내세워 수교할 수 없다는 의견이어서 협의가 결렬되었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일각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의견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무력을 수반한 교섭을 강요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그리하여 1875년 4월 세척의 군함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였고 그 중에 운요 호는 부산에 입항하였다가 다시 동해에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갔다가 나가시키로 돌아갔다. 8월에는 조선의 해안에서 중국에 가는 항로를 조사한다고 하면서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다. 항로 조사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조선과의 무력 충동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하여 수교 교섭을 강요하려는 술책이었던 것이다. 운요호에서는 먹을 물을 구한다고 보트를 내려 강화도의 초지진 포대로 접근하는 외국 선박을 응징하기 위해 포격을 가하였다. 운요호에서는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와 초지진이 파괴되었으며, 돌아가던 운요호는 영종진에 대해서도 포격을 가하고 상륙하여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수교를 강요하기 위한 정략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일본의 대 한국 침략의 시발이었던 것이다.

▨ 강화도 조약의 체결 과정

1875년 12월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구로다를 특명 전권 대신으로 하여 8척의 군함과 6백여 명의 병력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가 강화도로 향하였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대의 추가 파병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는 무력을 수반하여 조선을 굴복시키겠다는 계획적인 침략 행위였다. 1876년 1월 조선 신헌(申憲)을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강화도 연무당에서 담판이 벌어졌다. 회담이 시작되기에 앞서 일본은 함포를 발사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대를 상륙시키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세 차례나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례한 태도로 회담이 결렬되다시피 하였다. 고종이 정부 고관들의 대책 회의를 소집하였을 대 당시 조선 조정의 다수 의견은 일본의 침략 도전 행위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 때, 박규수는 일본과 수교를 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본이 수호를 청하면서 병선을 대기하였으니, 그 실정은 예측할 수 없으나, 수호 사절(修好使節)이라고 말하니 우리가 먼저 공격할 수 없으며, 만일 의외의 일이 일어날 경우 용병(用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삼천리 강토가 내수외양(內修外攘)의 방책을 다했던들 조그만 섬나라가 이처럼 우리를 감히 엿보고 공격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군대로써는 일본의 군대 힘을 막을 수 없으니 그들의 청을 들어 수호를 맺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박규수의 의견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당시 청국의 실권자인 이홍장이 조선에 대하여 일본과의 수교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내 왔다. 국내의 수교 허용론의 대두, 청국의 권고,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강압적 위협 등이 일본과의 수교 조약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접견 대신 신헌에게 “우리 나라는 일본과 3백 년 동안 통신사를 보내고 왜관을 설치, 호시(互市)하여 왔다. 비록 수 년 이래에 서계 문제로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자는 처지에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 등이 서로 편리하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신헌은 즉시 일본측과 교섭을 진행시켜 일본이 제안한 12개조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 강화도 조약의 내용

〈제1관〉 조선국은 자주지방이며 일본과의 평등지권을 보유한다. 이후 양국이 화친의 성실을 표하려 할 때에는 피차 동등한 예의로써 서로 대우하며 추호도 침월(侵越) 시혐(猜嫌)하여서는 안 된다. 우선 종전에 교정(交情)을 저해하는 환이었던 여러 예규를 일체 혁파하고 관유홍통(寬裕弘通)의 법을 개확(開擴)하여 서로 영원한 안녕을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경성에 파견하여 예조 판서와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의 장단은 모두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조선 정부 또한 수시로 사신을 일본국 동경에 파견하여 외무경과 직접 만나 교제 사무를 상의하며, 해당 사신의 머무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사정에 맡긴다.
〈제3관〉 이후 양국 왕래 공문은 일본의 그 국문을 사용하되 10년간은 따로 한문 역본 1통을 첨가하고 조선은 진문을 사용한다.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진에는 일본 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 구역이 되어 있다. 이제 마땅히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을 혁파하고 새로 만든 조약에 의거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또한, 조선국 정부는 따로 제 5관에 기재된 2개 항구를 열어 일본국 인민의 왕래 통상함을 들어 주어야 한다. 이 곳에 대지를 임차하고 가옥을 지으며, 혹 이 곳에 거주하는 조선 인민의 가옥을 임차함에 있어서도 각기 그 편의에 맡긴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처를 택하여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선박이 조선국 연해에서 혹 대풍을 만나거나 혹 땔감과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에 도달하기가 불능할 때에는 연안의 어떠한 항구에라도 기항하여 위험을 피하고 선구를 보충, 수선하며 땔감 등을 구입하도록 한다. 그 지방에서 공급한 비용은 선주가 배상하여야 되지만 무릇 이와 같은 일에 있어서는 지방 관민은 특별히 인휼을 가하고 구원을 다하도록 하고 보급에도 인색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양국의 선박이 대양 중에서 파괴되어 선원이 표착하는 경우에는 그 지방 인민이 즉시 그들을 구휼, 생명을 보전하게 하고 지방관에게 보고하여 해당 지방관은 본국으로 호송하고나 그 근방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인도한다.
〈제7관〉조선국 연해의 도서 암초는 종전에 조사를 거치지 않아 극히 위험함에 일본국 항해자로 하여금 때에 따라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하고 그곳의 깊고 얕음을 살펴 도지를 편제하게 하여 양국 선객에게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도모하게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 지정 항구에 시의에 따라 일본국 상민을 관리하는 관원을 설치할 수 있다. 만약 양국이 교섭할 안건이 있을 때에는 그 곳 지방 장관과 만나 협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니 피차의 인민은 각자 임의에 따라 무역을 하며, 양국의 관리는 조금도 이에 간여하지 못하며 제한 금지도 못한다. 만약 양국의 상민이 서로 속이거나 임차한 것을 보상하지 아니할 시는 양국 관리는 포탈한 상민을 나포하여 보상하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보상하지는 않는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항구에 재류 중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 인민과의 교섭에서 일어난 것이면 공평하게 조선국의 사판(査辦)에 돌아간다.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되 조금이라도 범죄를 비호해서는 안 되며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제11관〉 양국은 이미 통호하였으므로 따로이 통상 장정을 만들어 양국 상민의 편의를 도모함이 마당하며, 또한 현금 의립한 각 조관 중에 다시 세목을 보완 첨가하여 조건에 준조(遵照)함에 편리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부터 6개월 내에 양국이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 또는 강화부에 파견하여 정하게 한다.
〈제12관〉 위에서 의정된 11관의 조약은 이 날부터 준수한다. 양국 정부는 이를 변혁할 수 없으며, 영원히 신의를 가지고 준수하여 화의를 돈독히 한다. 이를 위해 약서 2통을 작성하여 양국이 위임한 대신이 각각 조인하고 상호 교부하여 빙신(憑信)으로 삼는다.
이 조약은 일본의 무력에 강요된 타율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이 미국과 체결하였던 미․일 조약의 내용의 불평등 내용을 그대로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며, 또한 조약의 내용이 쌍무적이 아니라 조선의 일방적인 의무만을 강요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근대적인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조선이 포함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근대 자본주의의 침략의 물결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의 출발이 된 것이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 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 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다.

▨ 조․일 통상 장정

강화도 조약 제11관에 별도의 무역에 관한 장정을 만든다는 내용에 따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통상 장정은 무역 규칙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11개조로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지도층이 국제 무역의 경향에 도무지 추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일본측이 그들의 일방적인 이익을 내세운 규정을 한 번의 검토 없이 그대로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정의 내용 가운데 특히 제6조 “이후 조선국 항구에 머무는 일본인은 양곡을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과, 제 7조 “일본국 정부에 소속된 선박은 조선의 항구에서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의 내용에서 보이듯이 일본 상인들에 의해 한국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선박들이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었다. 더구나 화물의 출입에 관세도 면세되는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상품이 물밀 듯이 한국에 밀려 들어왔으며, 농촌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농촌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종래의 한국의 수공업 체제는 그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통상 장정에 의한 무관세 무역은 7년간이나 실시되다가 1883년 7월에 비로소 수정되어 관세가 징수되었으나, 관세 징수 업무가 외국인에게 장악되어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재정 관리가 침해당하였따.

▨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역점을 두었던 것이 개항장의 확보였다. 이를 통해 그들의 한 국 침략의 기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 조약에는 제 4, 5 관에 이에 관련된 조항으로 부산과 다른 두 개의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였는데, 두 개의 항구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연해 중에서 택하되 조약 체결 후 20개월 후에 개항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원래부터 동해안의 원산과 서해안의 인천을 지목하고 있었으나, 조선측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원산은 부근 함흥이 태조 이성계의 탄생지이며 인근에 그 조상들의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