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나 자신을 먼저 비워야 한다.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빨갱이 (bchs9027)
프로필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전체 글보기(384)
세계사
이런저런역사상식
동영상자료
한국사수업
역사읽기자료1
인물한국사
국사진도핵심내용
사회진도핵심내용
역사읽기자료
역사사진자료
그림과함께하는역사수업
국사용어해설
답사와관련한자료
원주지역사
이런생각저런생각
설문
백만가지 주제
오늘 전체
방문자 64 127003
구독자 0 9
댓글 0 180
참조글 0 7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
2009 06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 댓글 전체보기
감사
님 너무감사 제가 숙재..
정말 알고 싶었던 내용..
좋은 정보 잘 보고 갑..
대한민국!!!!!!!!..
최근 참조글 전체보기
Xanax xr cru..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없음
- jiwon6733
- qkqh980225
- twin1747
- jam
 즐겨찾기
 즐겨찾기 글모음
개설일 : 2005/11/26
 


오금이 저리는 사진들

오금이 저리는 사진

황희 정승의 못말리는 아들들

http://kr.blog.yahoo.에서 퍼온 글입니다.
교육 목적으로만 사용하겠습니다.

(黃喜, 1363~1452)

조선시대 대표적인 재상,하면 누구나 황희(黃喜) 정승을 떠올리게 됩니다. 태종과 세종 시대 24년간 재상을 지냈으며 그 중 18년을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던 황희는 세종을 보필해 조선이 발전할 토대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지요.

분명 능력있는 정치인이자 관료였음에는 틀림없지만, 황희 정승을 '청백리의 표상'으로 보는 것은 후대의 포장 덕분입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다양한 비리 사건으로 탄핵을 받기도 했었지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뇌물수수, 관직알선으로 탄핵을 받았던 기록이 여러 건 남겨져 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 받았을 뿐이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賣官買職)하고, 형옥(刑獄)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는데요.

유명한 사건으로는 사위의 살인사건을 은폐, 조작하려 시도했다가 파직을 당했던 것(금방 복귀되었습니다만)과 친구였던 박포(제2차 왕자의 난의 주모자로 몰려 참형당함)의 아내와 간통한 사실이 적발된 것 등이 있었지요.

그럼에도 황희의 정치적 수완과 포용력을 높이 산 세종대왕은 매번 서슬 퍼런 사헌부에게서 황희를 구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인 흠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능력을 중시한 실용적인 판단이었지요. 황희 스스로도 워낙 처세에 능하여 비리 사건에도 불구하고 일 잘하는 관료로서의 이미지를 잃지 않았고요.

경기도 파주 황희 선생의 묘

이런 황희에게도 생각대로 되지 않아 속앓이를 해야 했던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말썽꾼 아들들이었습니다.

병진년(1436년)에 내탕고의 금잔과 광평대군의 금띠를 잃어버렸으나 훔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이때(1440년)에 이르러 또 동궁이 쓰던 이엄(일종의 방한구)을 잃어버렸다. 중생(仲生)이 한 짓으로 의심하여 삼군진무를 시켜 그 집을 수색하게 하매, 이엄을 잠자리 속에서 얻게 되어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였더니, 그전에 잃어버렸던 금잔과 금띠도 모두 중생이 훔친 것으로 자복하였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22년(1440) 10월 12일 기록 중

위 글에 등장하는 황중생(黃仲生)은 황희가 첩으로 삼은 내섬시(內贍寺)의 여종에게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서얼인데다 문무에 모두 소질이 없었던 중생이었지만, 아버지의 '백' 덕분에 동궁전 사환으로 취직할 수 있었지요. 머지않아 왕위에 오를 동궁의 시중을 드는 자리라 사환 중에서도 요직으로 꼽히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후광으로 어렵게 얻은 자리에서 중생이가 한 짓은 도둑질. 그것도 동궁전 내탕고에서 보관하던 금잔, 금띠, 동궁의 물품 등 왕실의 재산을 빼돌리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릅니다. 

의금부의 조사로 모든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는데, 중생의 집에서 나온 금잔이 절반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절반을 어찌했느냐 문초하자, 중생은 '적형(嫡兄) 황보신(黃保身)에게 주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황희 정승의 영정

바로 여기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는데요. 보신은 황희의 본처 소생 3형제 중 둘째였습니다.

중생이까지는 서자여서 대충 넘어갈 수 있다 해도, 적자까지 왕실 재산 도둑질에 관여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야말로 가문에 먹칠을 하는 셈이었지요. 더군다나 이복동생이 빼돌린 금붙이를 나눠가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황보신 역시 떳떳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보신은 당연히 '그런 적 없노라' 딱 잡아떼었으나, 중생과 의금부에서 실랑이를 하던 과정에서 그만 이전에 보신이 저지른 다른 비리 사건들까지 줄줄이 발각됩니다. 보신이 의금부 지사로 있을 때 첩에게 주려고 상습적으로 관의 재산을 빼돌린 것이 드러난 것이지요.

워낙에 죄상이 명확했던 덕에 황희의 아들일지라도 벌을 면치는 못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었다면 유배를 당했을 중죄였건만 보신은 장 몇대 맞고 보석금 좀 내는 것에 그쳤습니다.

어쨌거나 사건이 여기서 마무리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적자 중 첫째, 치신(致身)이가 치워 나가는 밥상에 한술 걸치고 듭니다.

보신이 죄를 짓고 파직된 탓에 연봉으로 받았던 과전을 반납해야 했는데요, 당시 호조 참판의 자리에 있던 형 치신이 동생의 위치 좋은 땅 대신 자기 소유의 거친 땅을 대신 반납합니다.

즉, 나라에서 내린 땅을 간 크게도 멋대로 바꿔치기 해버린 것이지요. 중죄를 지은 동생이 아버지 덕분에 겨우 풀려났건만, 눈치를 보고 몸을 낮추기 보다는 이 때를 노려 또 한 건의 사기를 치려 했다니, 어이없음을 넘어 감탄이 나올 배포(?)랄까요.

결국 어찌해서건 황희의 이름을 세워주려 했던 세종도 포기하고, 황치신을 파직시켰다고 합니다.

분노한 황희는 형제들이 줄줄이 벌을 받게 된 원인을 제공한 중생을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내쳤고, 이후 중생은 황씨 성을 쓰지 못해 '조중생'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반면, 적자인 보신의 경우에는 이후 황희가 직접 문종에게 청해 직첩을 돌려받았습니다.

황수신의 글씨 <근묵>

한편, 위 사건에는 관련이 없었던 셋째 황수신(黃守身)은 이후 영의정에 올라  2대에 걸쳐 최고의 관료 자리를 지키는 영광을 누렸으나(황희의 세 아들은 모두 과거가 아닌 음서로 관직에 진출), 그 역시 형들을 닮은 구석(?)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친분이 있는 임원준을 의서찬집관(醫書撰集官)으로 부정 발탁했다가 삭직당하는가 하면, 아산의 전토를 멋대로 농장으로 만들었다가 여러 차례 탄핵당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완벽한 공정한 사회를 꿈꾸기는 어렵겠지만
공정택이란 사람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공정했다고 택한 검찰은
법을 잘 모르는 이 백성도 납득이 가질 않네요.
힘을 갖고 있는 국가 권력 기관이 언제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날이 오려나.....잘돼야 될텐데.... 잘 될 턱이 있나...
그 옛날 잘 나가던 코미디언의 대사와 몸짓이 생각납니다.

**[오마이뉴스] 에서 퍼왔습니다. 교육용으로만 사용하겠습니다.

공정택은 노무현보다 강했다?


공정택 서울교육감은 지난해 7월 치른 최초의 민선 서울교육감 선거에서 1.7%P의 박빙의 차이로 '교육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선거 과정에서도 각종 불법 선거 시비로 구설에 올랐고, 선거 후에는 현직 학교장과 학원장 등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부적절하게 받은 돈이 밝혀져 물의를 일으켰다.
결국 검찰에 의해 사설 학원장에게서 1억 900여만 원을 무이자로 빌린 것에 대해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4억 원에 이르는 돈을 부인이 차명으로 관리하다가 선거 자금으로 사용한 것은 재산신고 누락 혐의로 공직자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3월, 징역 6월이 구형되었던 1심에서 당선 무효형에 해당되는 벌금 150만 원을 받았고, 6월 10일 2심에서도 똑같은 형이 선고되었다. 2심 선고까지만 보고 물러나겠다던 공 교육감은 억울하다면서 말을 뒤집고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비록 검찰이 징역 6월을 구형했고 1, 2심에서 모두 재산신고 누락이 인정되어 당선 무효형인 150만 원의 벌금을 받기는 했지만, 이는 공정택 교육감이 저지른 여러 가지 행위들의 아주 일부에 대해서만 죄를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공정택 교육감에 비하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 전 대통령)에게는 검찰이 너무나 가혹하고, 이중적 잣대를 들이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검찰이 기소하지 않고 무혐의 처분한 공 교육감의 혐의와 (예상을 깨고) 공개적으로 뇌물죄가 인정된다고 밝힌 노 전 대통령의 혐의를 비교해 보자.
돈을 준 사람이 이렇게 달랐다
노 전 대통령에게 돈을 주었다고 자백한 사람은 지방 중소기업인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돈의 규모는 아내와 아들, 조카사위 등을 통하여 최대 640만 달러이고 노 전 대통령 측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정상적 투자를 빼면 100만 달러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 전 대통령 측에 돈을 준 박연차 회장은 노 전 대통령과 동향 출신에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정치인 노무현을 재정적으로 후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검찰 내부에서조차 업무연관성이 있는 어떤 직책에 있는 사람이 특정한 대가를 조건으로 받는 일반적인 뇌물과 성격이 다르다는 지적이 나왔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어쨌든 노 전 대통령과 박연차 회장은 20년 넘게 알았던 사람이다. 검찰 역시 노 전 대통령 측에서 박 회장에게 어떤 이익을 대가로 주었는지에 대한 어떤 증거도 내보이지 못하고, 그냥 포괄적 뇌물이라고만 언론에 흘렸다.
이와 비교해 공 교육감에게 돈을 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22억 원 정도 되는 선거자금 중 최소 15억 원 이상을 사설학원장에게 빌리거나 그의 보증으로 은행에서 빌렸다. 인간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는 S학원 사학 이사에게 3억 원을 빌리고, 현직 학교장과 교감, 그리고 학교급식업체 사장, 학교 공사업체 사장, 자립형사립고 우선협상대상자 등에게서 수천만원을 받았다. 
공정택 서울교육감
ⓒ 남소연


첫 번째, 선거자금의 대부분을 사설학원장들로부터 마련한 것부터가 문제가 된다. 그러나 검찰은 이들이 공 교육감과 특수관계인 제자와 친인척 관계라는 점을 인정해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일부 사설학원 강사들이 아무런 친분이 없음에도 적금 통장을 깨서 공 교육감에게 선거자금을 빌려주었다고 하는데도, 검찰은 아무런 대가성이 없다면서 그냥 넘어갔다.
공 교육감은 30명에 이르는 현직 교장과 교감, 교사들에게서 선거 자금을 받았다. 이후 문제가 되니 돌려주었다고 하는데 검찰은 "교장들은 이것이 불법인지 몰랐다"고 봐주고, "교장과 공 교육감은 아무런 업무연관성이 없다"며 공 교육감에 대해 무혐의 처분했다.
사설학원업자인 제자 최모씨로부터 수억 원을 무이자로 빌려서 선거자금으로 사용하는 과정 역시 의혹 투성이다. 왜 공 교육감은 무이자로 빌려 놓고도 국회에서는 이자까지 쳐서 갚았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그리고 왜 최씨는 이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돌려받을 생각도 없이 그냥 준 돈이라고 했을까?
둘 중 어느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검찰은 이 부분도 밝히지 않았다.
과연 서울교육감과 그가 직접 인사권과 지도감독권을 가진 교장, 교감이 아무런 업무 연관성이 없고, 서울교육감의 감사와 지도감독 대상인 사설학원과 교육감이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가? 과연 이들의 관계가 노 전 대통령과 20년 지기 후원인인 박연차 회장 사이보다 업무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공 교육감에게 돈 준 사람들, 모두 업무 연관성 없다?
두 번째로 학교 급식업체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다. 최소 3개 이상의 급식업체가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은 액수의 돈을 갖다 주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검찰은 아무런 범죄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은 학교 급식의 직영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낮으며, 공 교육감은 법으로 규정된 급식 직영 전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직영 급식을 지도감독해야 할 서울교육감에게 직영급식이 되면 심각한 영업손실을 입을 것이 명확한 급식업체 사장이 순수한 마음으로 돈을 주었다고 하는 말을 어느 국민이 신뢰할 수 있을까? 과연 급식업체 사장과 서울교육감의 관계가 정치인과 20년 지기 후원인 사이의 연관성보다 적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세 번째로, 더 놀라운 것은 자립형사립고 우선협상 대상자인 하나금융지주회사와 공 교육감의 관계이다. 자립형사립고 우선협상 대상자였던 하나금융지주회사 회장과 하나은행장은 각각 공 교육감에게 선거 자금을 주었다. 처음에는 부정하다가 결국 개인적인 친분으로 주었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교육감 당선 이후 곧바로 하나고 설립을 인가받아 내년 3월 개교를 앞두고 있다.
올해 1월 30월 하나고는 서울시와 임대계약까지 마쳤는데 서울시는 651억 원을 주고 산 땅을 0.5%의 임대요율로 하나금융 측에 50년간 임대하고, 기간 만료 후에 50년 범위 내에서 계약을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한민국 어느 사립학교에도 준 적이 없는 파격적인 특별대우다. 이런 상황에서도 검찰이 공 교육감과 하나금융회장과 행장의 후원금이 아무런 업무 연관성이 없다면서 무혐의 처분한 것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검찰이 보기에 정말 자립형사립고 우선협상 대상자였던 하나금융지주회사의 회장-은행장과 서울교육감의 업무연관성보다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의 업무연관성이 더 컸던 것일까?
네 번째로, 검찰은 S사학법인 이사에게 3억의 거금을 빌린 사실도 무혐의 처리했다. 이 사학 소속의 학교들엔 최근 수년간 다른 학교들에 비해서 훨씬 많은 공사비가 지원돼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이사는 개인적으로 공 교육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데, 왜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 3억 원이라는 거금을 선거자금으로 빌려주었는지 검찰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사학이사가 아무 친분도 없고, 자신을 지도감독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교육감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선뜻 3억 원을 선거자금으로 빌려주었다는 주장을 그대로 믿을 국민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검찰은 이것도 노 전 대통령과 박연차 회장의 관계보다 더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공정택이 받으면 무죄, 노무현이 받으면 유죄

뇌물죄는 단순히 돈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인정되지 않는 범죄이다. 단순히 돈을 주고 받은 것은 민사상의 권리의무관계이지 형사상의 범죄 유무와는 상관없다. 이번 박연차 수사에서 신한금융 회장이 박 회장에게서 50억 원을 받았지만 대가성이 없어서 무혐의 처분되고,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이 받은 상품권 역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뇌물은 돈을 준 사람과 돈을 받은 사람 사이의 업무 연관성과 대가성이 인정되어야 성립하는 범죄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교육대통령'인 공 교육감이 개인적 친분이 거의 없는 현직학교장, 교감, 사학이사, 학교급식업체사장, 자립형사립고 우선협상대상자 등에게서 받은 선거 자금은 불법이 아니라서 무혐의 처분하고, 노 전 대통령 측에서 20년 지기 후원인에게서 받은 돈은 범죄가 성립한다는 것이 대한민국 검찰의 논리이다.
돈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관계를 고려해보면 공 교육감과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처분에 대해 검찰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또는 형법 어디에도 '교육대통령'은 받아도 되고, 대통령은 받으면 안 되는 돈이 따로 구분돼 있지는 않을 것이다.
포괄적 뇌물죄? 노 전 대통령에게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된다면 '교육대통령'이라는 서울교육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감은 받아도 되고, 대통령은 안 되는 돈은 대한민국 헌법과 형법에 없다. 그러나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돈을 받았는지 여부도 증명하지 못했다.
뇌물죄 성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돈의 사용처가 아니라 돈의 출처이다. 결국 그 돈을 누구에게서 왜 받았느냐 하는 것이 뇌물죄의 판단 근거라는 의미이다.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이 받은 돈의 출처는 명확했다. 모두 그의 20년 지기 후원인이라는 박연차 회장에게서 받은 돈이다. 둘의 관계도 확실하고, 돈의 출처도 확실하다. 그렇다면 검찰이 범죄 성립 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 돈을 왜 받았는지, 그 돈의 존재 여부를 알았는지, 그리고 그 돈으로 인한 대가가 무엇인지 등을 밝혀야 하는 것이 법적 상식이다.
그런데 검찰은 돈의 출처도, 두 사람의 관계도 확실한데 범죄와는 아무 관련 없는 돈의 사용처를 캐고 다니면서 대통령과 가족들에게 망신을 주었다. 전두환이나 노태우가 현재 가치로 수조원에 달하는 뇌물을 받았음에도 돈을 어디에 썼는지 밝히지 않은 것과 비교해 보면 검찰의 행동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검찰의 이중잣대, 의혹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회장에게 어떤 이득을 주었는지, 그 돈의 존재를 재임 중에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생전에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하였고, 서거 이후에 말이 없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하여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만 공소권이 없으므로 증거는 밝히지 않고 진실을 역사에 기록으로 영원히 남긴다'는 발표를 한다.
이로써 온 국민 앞에 노 전 대통령이 범죄자이지만 죽어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검찰 발표를 두고 "고인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면서 격분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에 비하면 공 교육감의 아내가 가지고 있었다는 4억 원이 넘는 차명 재산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납득하기 어렵다. 공 교육감의 부인은 칠순 노인으로 아무런 소득원이 없는 가정 주부이다. 그런 주부가 수년간에 걸쳐 회당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을 현금으로, 그것도 통장을 계속 바꾸면서 4억 원이 넘는 재산을 모으고 관리했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당연히 출처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한 수사에서 공 교육감과 부인이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냥 가지고 있던 돈'이라고 해명하자 이를 그대로 믿고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은 돈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관계도 명확하고, 돈의 출처도 명확한 노 전 대통령 사건에서 범죄 혐의 성립 여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용처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반면 똑같은 대한민국 검찰은 어디서,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도 알 수 없고, 다른 사람 명의로 관리하던 것을 선거자금으로 사용한 공 교육감의 차명 재산에 대해서는 재산 신고 누락만 문제 삼았을 뿐, 출처도 밝히지 않았고 뇌물죄는 적용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교육대통령'이라는 공정택 서울교육감과 진짜 대통령이었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는 이제 모두 끝났다. 살아있는 권력인 이명박 대통령의 교육계 돌격대장이라는 공 교육감의 각종 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봐주고, 죽은 권력인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범죄와 상관없는 것들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검찰의 이중잣대에 대한 국민적 의혹은 여전하다.

참다운 지식인의 삶이란 무엇일까?
또한 대한민국 기득권층에 암적인 존재로
바위같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반민중적이고
반역사적이고
반통일적인 세력은
언제나 소멸되는 시대를 맞으려나.


"노무현 죽인 것은 지식인의 글" "파시스트들이 원래 거대한 건축공사 즐겨"
[오마이뉴스] 에서 퍼왔습니다. 교육용으로만 활용하겠습니다.

"착잡하다. 지식인이 글로 죽였다. 나도 서울대 교수에 TK 출신으로 기득권층에 속한다. 학벌과 지역주의로 강고하게 결합한 기득권 세력이 리버럴 정치인을 소외시키고 소멸시킨 게 아닌가?"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최근호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의 본질은 기득권 세력의 집단 따돌림이라면서 "지식인이 글로 죽였다"는 말로 이른바 '해바라기 지식인'들의 책임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황석영 작품에 담겨 있던 참지식인 인식, 한꺼번에 증발"


먼저 한 전 총재는 "학벌과 지역주의로 강고하게 결합한 기득권 세력이 리버럴 정치인을 소외시키고 소멸시킨 것 아니냐"면서 "분단세력과 수구 언론 권력이 그의 재임 기간에도 끊임없이 괴롭혔고 퇴임 이후엔 조직적으로 괴롭혔다"는 말로 '집단 따돌림' 주체를 분명히 밝혔다.


한 전 총재는 "특정인을 지목해 언급하기는 곤란하다"면서도 '해바라기 지식인'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다. 특히 "아무개 명예교수에게는 지식인이란 단어를 붙이는 자체가 사치스러울 정도"라면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읽어내는 방식을 보면 과연 그가 체계적인 역사인식을 갖고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매섭게 비판했다.


최근 황석영 작가의 발언에 대한 의견도 잇따랐다. 한 전 총재는 "민중과 함께 하는 참지식인의 모습이 담겨 있던 그의 작품은 아름다웠다"면서 "그런데 그 아름다운 인식이 한꺼번에 증발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작품이 작가에 의해 배신당하지 않길 바란다"고 뼈 있는 주문도 빼놓지 않았다.


한 전 총재는 "지식인은 자신의 계급 이해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다른 계급의 편에 서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날카롭게 비판해야 한다"면서 "부도덕한 정부일수록 정의나 성장 따위의 화려한 레토릭이 발달하는 만큼, 그 수사 뒤에 있는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게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나치나 파시스트들이 원래 거대한 건축공사 즐겨"


한 전 총재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나치'를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실패하면 파시즘이 온다고 경고했는데, 1년이 지난 상황에서 보면 예상이 적중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을 떨치기 어렵다"면서 "중도 실용정부라는 기치는 허상임이 확실해졌다"고 진단했다.


이어 "성급한 업적주의에 매달리다 보니 '토목공사 정부'로 가고 있다. 나치나 파시스트들이 원래 거대한 건축공사를 즐긴다"고 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란 용어에 대해서는 "그 자체가 파시즘적"이라며 "권력이 재벌의 금권력과 밀착해 국정을 함께 운영하겠다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 때문에 한 전 총재는 지식인과 '줄씨알'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줄 안(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접속하고 소통하고 공론화하며 학자나 전문가 못지 않은 미네르바 같은 유기적 지식인들이 줄씨알"이라면서 "지식인이 줄씨알과 연대해 지식을 지혜로 재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전 총재는 "이와 같은 연대를 가장 두려워하는 세력이 21세기 파시스트 권력"이라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에서 나타나듯 우아하게 지기로 결심할 때 진짜 이기며, 그의 유서 내용은 그를 욕했던 많은 사람들까지 울렸다. 줄씨알도 언어 사용이 세련됐으면 한다"는 주문을 덧붙였다.

☞ 평화는 쌀(禾)을고루 나누어(平) 먹는(口) 것이라네요.....

3년반 뒤엔 어떤 대통령을 뽑아야 할까.
경제라는 귀신에 홀려 몰표를 던져준 국민들은
이제 현재 이 시점에서, 이 상황에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하는데...
지루한 앞으로의 시간속에서 아니 역사속에서
3년반뒤엔 또 어떤 역사가 전개될지 역사만 알 것이다.



노무현 역사 이어달리기, 질투는 없다 "DJ는 그 시기에 가장 탁월했던 정치인"
[오마이뉴스]에서 글 퍼왔습니다. 교육용으로만 사용하겠습니다. 
지난 2007년 9월 16일 인터뷰 중인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 제공


2000년 3월 22일 아침 8시, 부산 코모도 호텔 커피숍.


나는 점퍼차림으로 나타난 노무현 민주당 의원과 마주앉았다. 서울 종로의 지역구 의원이던 그는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겨 선거에 도전하는 '무모한' 일을 하고 있었다. 빵과 커피로 아침을 하면서 인터뷰는 시작됐다.


- 바쁘시지요?


"전쟁터입니다. 하루 하루가."


노무현 의원은 솔직했다. 그는 차기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속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언론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대권도전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왜 대통령에 출마하려고 하느냐니까 이렇게 답했다.


"내가 차기에 대해 의욕을 갖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과 생산적 복지정책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지역화합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여야를 막론하고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김근태 의원과 나 두 사람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 대통령이란 참으로 복잡한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골치 아픈 자리일 텐데요,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이 되기 위해 노무현 의원이 지금 가장 우선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게 뭘까요?"하고 되묻다가 이렇게 답했다.


"판단력… 역사적 안목을 기르는 일입니다."


포부는 그렇게 컸다. 하지만 당시 그가 대통령으로 나서면 그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노무현계 현역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통령 준비 "역사적 안목 기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때 민주당 국회의원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누구를 거울 삼아 '역사적 안목'을 기르고 있었을까? 해외 인물로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었다고 정치인 노무현은 나중에 밝혔다. 그렇다면 국내 인물 가운데는? 아마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2006년 2월 26일 출입기자들과 취임 3주년 기념 등산을 한 후 점심식사 자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역사적 안목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난 1971년 DJ가 내놓은 4대국 보장론이나 통일정책은 아주 파격적입니다. 우리는 DJ를 최근의 정치인으로 보지만 그가 정치권에 등장해서 1970년에 대선후보가 되어 1971년 대선 때 제시했던 정책방향을 그 시대 속에서 보면 아주 천재적인 것들입니다. 그가 당시의 세계정세를 나름대로 읽고 내놓은 외교 통일정책들을 보면 그가 매우 뛰어난 안목을 가진 정치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평가는 공부를 하지 않고는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대통령에 필요한 역사적 안목을 갖추기 위해 197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정치인 김대중의 행적을 공부한 것이다.


내가 2007년 10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인터뷰했을 때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그 시기의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했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민들 앞에서 오열했다. 정치인 노무현과 영영 이별하는 날, 김대중 전 대통령은 경복궁에서 열린 국민장에 참석해 먼저 떠나버린 후배 대통령 영정 앞에 헌화했다. 그리고 권양숙씨 등 유족의 손을 잡고 눈물을 쏟아냈다. DJ가 대중 앞에서 펑펑 운 것은 1987년 광주 방문 때 5.18 국립묘지(당시는 망월동 공동묘지)를 참배해 통한의 눈물을 흘린 이후 처음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날 이렇게 심정을 밝혔다.


"평생 민주화 동지를 잃었고, 민주정권 10년을 같이했던 사람으로서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입니다."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 그 표현은 그냥 예의 차원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소에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사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한나라당이 그 두 정치인이 만들어낸 정권에 대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 묶음으로 보듯이 그들은 한국정치의 한 산맥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보수언론으로부터 '준비 안 된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자주 들었던 노무현에게 바로 전임이었던 '준비된 대통령' 김대중은 어떤 존재였을까?


지난 29일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울고 있다.
ⓒ 연합뉴스조보희


"정치의 천재, 정책의 천재" 김대중의 천재성 탐구


- 이 점은 예전부터 궁금했는데요, 노무현 대통령께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존재인가요, 믿음직한 큰형님일 수도 있고, 때로는 질투의 대상일 수도 있겠는데요.


동석했던 황방열 기자가 물었다.


"그분은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완전한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 시기에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죠.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가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분을 평가할 때 그 점을 우리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그 기본적인 전제를 먼저 우리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와보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퇴임 5년이 지난 지금 이런저런 평가들이 있지만, 내가 청와대에 들어와서 보니 이 정부의 구석구석에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가 남아있었습니다. 내가 창조적인 것이라고, 내가 처음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들어가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런 것이 한두 개가 아니고 상당히 많습니다. 정부 혁신 부분에도 그런 것이 있고,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머리를 빌려서 하는 지도자와는 다르다고 했다.


"아까 곳곳에 그분의 발자취가 남아있다고 내가 말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 스스로 비전, 전략, 정책에서 역시 탁월한 대통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대강대강 주변의 학자들이 적어준 것이 아니라, 머리를 빌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입니다. 한 수준을 뛰어넘는 거죠. 머리를 빌려서 하는 지도자와는 다릅니다. 말하자면 철학과 가치, 전략, 정책 모두 탁월한 정치인입니다."


노 대통령은 그 청와대 인터뷰보다 3개월 전에 있었던 참여정부평가포럼 연설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


"해외 다니면서, 외교하면서 제가 받은 느낌인데요, 한국이 국제무대의 당당한 일원으로 등장한 때는 국민의 정부부터입니다. 지도자의 정통성이 국가위신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많이 실감하고 다닙니다. 제가 국민의 정부의 정책을 다시 한번 평가해 보면서 과연 지도자의 자리는 머리를 빌려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 같다, 해박한 지식, 지식과 정보에 대한 탐욕, 깊이 있는 사고력, 잘 정리된 가치와 철학이 꼭 필요한 자리인 것 같다,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DJ는 천재"라는 표현까지 썼다. 2006년 2월 26일 청와대 출입기자와 취임 3주년 기념 오찬을 하면서 기자들에게 "천재성 탐구"를 권했다.


"내가 그동안 부품소재산업에 대해 많이 떠들었는데 알고 보니 지난 2001년에 DJ가 법까지 다 만들어놓았더군요. 손댈 만한 것은 대개 한 번씩 손질을 해두었더군요. DJ 시절 일어났던 시스템의 정리나 정책 시스템의 과정들을 한번 연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다른 DJ의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의 천재 DJ가 아니라 정책에 있어서도 천재성을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양반은 총체적인 능력, 역량이 천재급 정치인입니다."


김대중 지지자들은 그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그날 오찬에서 웃으면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당 시절) 당내에서 DJ는 '교사(敎師) 정치인'이었습니다. 대정부 질문을 앞둔 의원들을 다 모아놓고 강연을 했어요. 내용은 물론 질문 기법까지 세세하게 가르쳤습니다."


"87년 양김분열 상처 내가 꿰매보려 했지만..."


탁월한 대통령, 탁월한 정치인, 정치의 천재이자 정책의 천재.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노 대통령의 평가는 그렇게 여러 자리에서 주저없이 나왔다. 그에 대한 인물탐구, 공부가 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일부 지역에서는 감정과 선입견에 의해 평가를 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보통 그분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분에 대한 감정을 먼저 앞세웁니다. 옛날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 만들어 놓은, 특히 <조선일보>가 만들어 놓은 그런 선입견을 먼저 내세웁니다. 그래서 '빨갱이, 거짓말쟁이 아니냐' 그러는 거죠. 우리 고향에서는 그분을 빨갱이, 거짓말쟁이, 전라도, 이 세 가지를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그렇게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큰 틀에서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일부 386세대가 그분을 볼 때도 반칙이 많지 않았느냐, 정치적인 술수라든지, 권위주의라든지 그런 것들이 있지 않았느냐고 볼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 상황들, 몇몇 실책들만을 가지고 지도자를 평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정하게 평가를 해야지요."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시대의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분도 사람입니다.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지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열성적 지지자도 많지만) 권위주의적이라고, 권모술수를 부린다고,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그분이 (정계은퇴 선언 번복 등의 경우처럼) 그렇게 욕먹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정권교체도 없었고 대통령이 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섭섭한 대목은 없었을까? 그는 1987년 양김씨(김대중-김영삼)의 분열, 후보단일화 실패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하나, 지금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은 1987년 대선에서 YS하고 후보단일화에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집권당인 노태우 후보에) 이길 방법이 없으면 그랬어야 하는 것인데, 타협했어야 하는 것인데…." 


그는 덧붙였다.


"그때 생긴 일 때문에 (영호남의 민주화세력이) 분열됐고, 나는 그 분열의 상처를 한 번 꿰매 보려고 내 나름대로 정치에서 필사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성공 못하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그분의 공(功)과(過) 모두 거울일 뿐입니다."


"국민의 정부 덕분에 열매 따고 있다"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폐회 선언 직후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연단을 내려오고 있다.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그렇다면 왜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을까? 참여정부가 집권 초에 국민의 정부의 대북송금 건을 특검으로 수사할 때만 해도 전현직 대통령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했었는데….


아마도 한 팀이 되어 역사의 이어달리기를 함께 하고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앞 주자의 성과가 곧 자신의 성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국가 운영의 전략적 관점이랄까, 국가 운영의 시스템에 대해 상당히 전략적 관점으로 접근한 것이 국민의 정부 때부터입니다. 그 전 김영삼 정부 때는, 물론 제도 개혁도 일부 있었지만, 주로 단발적 개혁이 많았고 정부의 시스템 자체를 놓고 개혁을 한 것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뭐랄까, 사고의 깊이라고 할까요? 그 사고력의 수준만큼 국가 운영 시스템이 개혁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정부에 와서는 내가 또 그 쪽에 취미가 있으니까 정부 혁신을 미시적인 부분까지 5년 내내 진행했지요."


노무현 대통령은 이어달리기 게임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했다.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도 그는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국민의 정부 덕분에 참여정부가 열매를 따고 있다고 강조했다.


"경제정책의 성과가 성장률로 나타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살고 있는 반도체, 휴대폰, 그밖에 여러 가지 수준 높은 기술들은 우리 정부에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지난해 수출 3000억 불을 초과 달성한 것도 다 이전 정부에서 준비하고 성장시켜온 것들을, 저희 정부에서 열매를 따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 때문에 진보의 정책이 채택될 수 있었고 라면 사재기가 없는 사회가 됐다고 했다.


"국가 발전전략의 전환은 국민의 정부에서 시작됐습니다. 자유와 인권이 신장되고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청렴위원회 설치 등 많은 진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에서 복지정책의 토대가 구축됐습니다. 생산적 복지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바로 국민의 정부가 진보의 정책을 채택한 것이고요, 그 국민의 정부가 시장경제를 강조함으로써 시장경제와 진보정책의 조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평화주의 전략, 포용정책을 통해 안정과 활력을 조화시켰지요. 그래서 라면 사재기, 방독면 사재기와 같은 얘기는 국민의 정부 이래 지금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노 대통령은 아예 "참여정부와 국민의 정부는 똑같다"고까지 했다.


"참여정부는 진보를 지향하는 정부입니다. 참여정부는 역시 평화를 지향하는 정부입니다. 국민의 정부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농담을 해서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좀 다른 게 있어야 하는데…."


역사 이어달리기에 질투는 없다


인간인 이상 질투를 느낄 만할 것이다. 보수언론으로부터 준비 안 된 대통령이라는 말을 밥먹듯 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고 노벨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어찌 질투심이 없겠는가? 형제간에도 그런 것이 있을진대.


그러나 전임 대통령을 평가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표정과 말투에서 나는 그것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질투보다 공부를 택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퇴임 직전에도 계속 대통령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2000년 대권도전선언 인터뷰를 하기 위해 부산의 한 호텔에서 마주앉았을 때 그가 대통령을 하기 위해 "역사적 안목을 기르고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역사적 안목을 갖춘 두 사람은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두 정치인은 한 팀이었다. 역사의 이어달리기에서 자기 시대에 다가온 책무와 도전을 회피하지 않았다. 국민의 염원을 안고 한 방향으로 달렸다. 김대중은 정권교체, 평화통일의 염원을 안고, 노무현은 특권 없는 사회, 지역주의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달렸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한 길 위에서였다. 두 사람은 역사와 대결에서 한 몸이었다.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바보 노무현의 죽음을 접하고 "내 몸의 반이 무너진 심정"이라고 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바보 노무현의 영결식장에서 추도사를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 '똑똑한 김대중'의 한평생에서,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이 뭔가 대중 앞에 글을 써서 발표를 하려고 하는데 '자격미달'이라고 거절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영정 뒤에 잠들어 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가 그토록 "당대의 가장 탁월한 정치인"이라고 칭송했던 이가 그에 대한 추도사도 마음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 뭐라 생각했을까?


이명박 정권은 그런 식이다. 한 전직 대통령이 정치보복 논란 속에 저세상으로 갔는데, 또 다른 노(老) 전직 대통령에게는 추도사도 못하게 하는 모욕을 안겨준다. 왜 그런 무리수를 둘까? 김대중-노무현 이어달리기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그들은 모르나보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역사의 이어달리기, 그 길에 함께하는 이들은 두 전직 대통령만이 아님을. 


노무현은 김대중을 공부했다. 이제 살아남은 자 누군가가 노무현을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 1 | 2 ] 다음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