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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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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조선의 비밀병기 신기전


 최근 '신기전'이란 조선시대 화약무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앞서 말하자면, 그 무기의 정확한 명칭은 '화차'라고 불리는 총통(銃筒)무기의 일종이며,
신기전은 화살에 화약을 매달아 쏘는 무기를 말하는 것이다.

  신기전을 로켓으로 본다면 총통기는 일종의 로켓발사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형태는 현대의 다연장 로켓포와 상당부분 유사한 점이 있다.



*국조오례의 병기도설에 실려 있는 화차의 설계도

 14세기 말은 중국에서는 원왕조과 붕괴되고 명왕조가 성립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이 왕조교체를 하는 혼란기였다.  그리고 이 혼란기를 틈타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이 남쪽에서는 일본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그런데 조선은 일찍이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 개발된 화약무기로 인해 극에달하였던 왜구의 해상침입을 격퇴한 바 있었기에, 화약무기의 효용과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 당시의 화약무기는 해상에 떠 있는 목조군선을 격침시키거나 화염으로 태울 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육상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1392년 왕조교체에 성공한 조선은 세종대왕대에 이르러 차츰 왕조가  안정을 찾아갔고, 그에따라  국방력강화및 육상에서 효율적인 전투를 목적으로 각종 화기를 개발하게 된다.

 세계최초의 로켓무기 대신기전



 신기전은 조선시대 화약 추진 화살로 고려 말기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주화(走火)를 1448년(세종 30)에 개량한 것이다.

처음만들어질 당시에는  일반나무로 대[幹]를 만들고 가죽으로 깃[翎]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무화살은 만들기도 쉽지 않고 가죽은 구하기 어려우므로, 대나무로 대를 만들고 깃[羽]으로 살깃을 만들어 재 시험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성능이 우수하여 시험자는 다음과 같이 세종대왕에게 아뢰었다.

 화살이 멀리 가고 단단하여 나무화살보다 훨씬 나으니,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갑절이나 됩니다. 또 깃털로 살깃을 만드는 것 역시 편하고 쉬우니, 이 뒤로는 이 예(例)에 의하여 만들고, 모름지기 어교(魚膠)로 살깃[翎]을 붙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나무역시 습기나 부패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옻칠을 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종류에는 크기에 따라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등이 있다. 그 밖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도 있긴 하지만 대신기전과 같은 규격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이 같은 화약무기를 최초의 로켓 발사포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하여 해석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 할 수 있다.

  우선 중국에서는 1232년 등장하는 비화창(날으는 불창)을 최초의 로켓무기로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비화창은 발사하면 200m정도 날아가 떨어져 사방 6∼7m 정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위력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금나라 군대가 몽고군에 저항하기 위해 사용한 신무기로 중국이 개발한 무기라고 볼 수 없다.
 더구나 이 비화창에 로켓 무기가 적용되었다고 확인할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리고 서양 최초의 로켓 발사포는, 인도군이 사용하던 것을 모방하여 영국의 W. 콩그레브가 1805년 제작한 것이다. 물론 콩그레브의 개발품은 살상력이나 효율성면에서 대신기전보다 앞서지만,시기적으로 상당히 늦은 19세기의 발명품이며 중량도 가벼운 편이다. 
 
평균 길이는 1m, 평균 지름은 10cm, 무게는 1∼2.8kg정도이며, 최대 사정 거리는 2천 7백m 였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신기전 경우  1474년 편찬된 「국조오례서례」병기도설에 그 설명및 설계도까지 정밀하게 나와있어, 로켓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하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선 대신기전은 1448년 제작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서양의 로켓무기보다 147년이나 앞설뿐더러,  길이는 무려 5m가 넘는 17자(521cm)이고 무게는 7~8kg이나 된다. 

  윗부분에 원통형의 종이통(로켓엔진)이 부착된 형태로 이 속에 화약을 채우며, 아래에는 연소가스 배출을 위해 지름 1치 2푼(36.8㎜)의 구멍을 내게 된다. 바로 신기전에 최초의 로켓원리가 적용되었다고 보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대신기전의 경우 사정거리역시  1천보(800~900m)가량 되어, 19세기 이전까지의 어떠한 로켓형 무기보다도 가장  무거운 중량을 가장 멀리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은 대신기전과 같은 규격이지만 발화통 내에 철편(鐵片)을 포함하고 있어 살상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대신기전의 사거리가 2km 이상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압록강이나 두만강 너머까지 적을 요격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사거리를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중신기전은 길이 4자 5치(137.9cm)로 역시 휴대하기 어려웠지만 소신기전은 길이 3자 3치(101.1cm)로 병사개인 화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신기전의 경우 대·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부착되지 않았다. 중신기전은 150m, 소신기전은 100m쯤으로 추측된다.

 그림처럼 개인화기로서의 신기전은 발화통에 불인 붙인 후 병사가 직접 활을 쏘아야 했다. 물론 정면으로 맞으면 충분한 살상력을 가지겠지만,  지휘장교가 신호를 보내거나 적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많이 쓰였다.


 이렇게 개발된 무기를 최전방인 4군 6진에 배치시켰음은 물론이고, 보다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화기를 다루는 훈련까지 실시하였다. 다만 화약무기 제조가 어려워 원할하게 이루어 지진 못하였다. 따라서 총통및 신기전의 연습은 매우 제한적이고 엄격하게 실시되었는데, 중소 신기전의 경우 국경지대인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만 매년 1회씩 실시하였으며, 대신기전은 2년에 1회씩 실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신기전을 실전에 사용할 때가 왔다.  1451년 정월 김종서 장군이 지키던 압록강 방면에는, 북방유목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북방유목민들의 주력은 기마병으로, 조선의 단순한 보기병 보충만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할 수 없었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이 결빙되어, 기마병으로도 자유자재로 넘어 올 수 있게되면, 조선으로써는 감당하기 매우 어려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김종서 장군은 조정에 최대한 많은량의 신기전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도 사태의 긴박함을 인식하고 신기 3천과 소 신기전4천을 평안도 에 보내도록 명하였다.

 이렇게 김종서장군과 조정의 신속한 화기충원으로 인해 야인들의 적대적인 움직임을 원천봉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징옥등의 변방무장역시 북방야인들을 견제할 무기로 신기전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유용한 무기였다. 다만 소신기전의 경우 실용성과 화력에 문제가 되어 생산이 1451년 이후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후 신기전은 중신기전을 주축으로 하여 운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기전의 업레이드 화차


조선시대 실전에 사용했던 전차(戰車)로 수레 위에 발사장치를 부착하여, 이동이 순조롭고 단번에 여러 개의 활 또는 총을 쏠 수 있게 고안된 무기이다.

 조선시대에만 5가지 화차가 있었는데, 첫번째 화차는 1409년(태종 9) 군기감소속 이도(李韜)·최해산(崔海山) 등이 화약무기를 연구하던 끝에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를 장탄한 동통을 수레에 장치하여 달리면서 발사하였다.

  두번째 화차는 1451년(문종 1) 문종이 손수 창안한 문종화차이다.


 우리에게 흔히 신기전으로 알려진 무기가 바로 문종시대 때 고안된 화차이다. 이는 수레 위에 틀을 만들어 중신기전(中神機箭) 100개와 사전총통 50개를 설치하여 심지에 불을 붙이며 차례로 발사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공들여 만든 신기전및 총통무기는 과연 실전에 사용된 일이 있었으며 그 위력은 어느정도였을까?  재차 언급하자면 총통무기는 지자총통, 천자총통처럼 함포화기까지 포함하는 화포무기의 총칭이다.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는 오직 해전에서만은 화력의 우위를 보였는데,  그러한 우위가 총통무기의 우수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이다.

 반면 신기전은 개인화기로서는 별다른 위력을 보여주지 못하였지만, 신기전이 위력은 역시 화차에 장착하였을 때야 다연장 로켓포로서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화차는 임란당시 1차적으로 평양성등에 배치되어 일본군의 북진을 상당기간 저지하는데 활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진(朴晉)장군이 경주 탈환시 사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으며, 권율(權慄)장군이 행주산성 전투에도 사용하여 그 위력을 보여 주었다.



 
최대사거리 36km 현재 우리육군이 보유한
K-136 구룡 다연장 로켓포




조선시대 다연장 로켓포인 화차에서 신기전을 발사하는 모습


이처럼 우수한 화약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었지만, 끝내  국력 배양에 대한 적극적인 국방체재의 전환은 이루어 지지 못하였다. 더구나 임란이후 중국에서 청왕조가 성립하면서 극심한 내정간섭이 이루어 졌고, 이것은 열악하였던 조선의 화기개발및 도입을 더욱 제한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발명품이 세상을 바꾸는 큰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뒤에 따르는 수많은 개선과 노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사회국가적 지원이 필요한 것이다.

광화문 수난사

 광화문은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광화문은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당시 전소되었으나.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러나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었던 만큼 일제에 의해 가장 먼저 훼손되기 시작한 건축물이다. 



 위의 사진은 광화문을 찍은 사진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1900년도로 추정되며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훼손당하기 전의 모습인데,
문 앞쪽으로 돌 계단과 좌우의 돌 난간, 그리고 해태상과 길 옆의 육조건물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제는 육조건물을 훼손하함은 물론, 건춘문 북쪽으로 광화문을 이전시켜 버려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다.



경복궁 뒷편의 북악산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찍힌 것을 보아서, 이전된 것을 분명히 알수 있다. 당시 경복궁 앞쪽으로 하천이 흘렀던 것을 알 수 있다.



1925~1926년 무렵 광화문. 뒤쪽으로 거의 완성된 총독부 건물이 보인다. 왕과 고관대작들만 드나들었던 앞쪽의 계단이 사라지고 차와 수레가 오갈 수 있도록 경사로가 형성돼 있다 



1929년 경복궁 건춘문 옆으로 옮긴 뒤 1929년 조선박람회가 열리고 있을 때의 광화문. 여러 기둥이 세워지고 일본식 건축물로 광화문의 고유한 멋을 훼손함은 물론 2층이었던 광화문 누각을 3층으로 개조하였다. 




1996년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기 직전의 광화문모습이다.  일제는 식민지 기간동안 광화문을 완전히 헐었는데, 1968년 복원당시 정확한 고증없이 복원한 탓으로, 조선총독부 건물과는 일직선이지만 긍정전과는 상당히 뒤틀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05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광화문이 모습. 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자리에 복원된 흥례문이 보이고 근정문, 근정전과 대체로 일직선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약간 뒤틀려 보인다.

  광화문및 경복궁의 공사는 현재완료형이 아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미 6조건물의 부활과 함께 서울시는 광화문 광장을 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광화문역시 높이와 위치가 원형과는 여전히 맞지 않아, 현재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광화문은 여전히 미래 진행형이며,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나라 역사의 이정표로써 그 위대한 자태를 더욱더 빛내게 될 것이다.

경복궁을 지키는 돌 짐승들

경복궁을 지키는 돌 짐승들



 경복궁안  근정전으로 들어가려면 앞에는 돌다리가 보이고 그곳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명당수와 석축이 눈에 보인다. 이 도랑을 어구라 하고, 돌다리를 영제교라고 한다.

 영제교 좌우 어구 양 옆에는 돌짐승 4마리 보이는데, 이들 돌짐승들은 도랑으로 흐르는 물길을 타고 나쁜 기운이 궁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금방이라도 뛰어내려 사악한 기운을 먹어치우기라도 할듯한 기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소임을 맡은 돌짐승들이 무섭기보다는 미소를 띠고 있거나 혀를 낼름 내밀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앞 월대 난간 기둥과 계단 그리고 기둥석에도 갖가지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를 법수라고 하는데, 쥐, 소, 호랑이 등의 각 띠를 상징하는 12지신상과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방신등이 조각되어 있다.



북쪽의 방위신인 현무의 모습
현무는 대체적으로 거북의 모습을 본땄다.


좌측 즉 동쪽의 방위신인 청룡의 모습



남쪽의 방위신인 주작의 모습
예전사람은 기본적으로 닭의 모습을 바탕으로
주작을 상상했다.



우측, 즉 서쪽의 방위신인 백호의 모습
하지만 사나운 호랑이라기 보다는
고양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친근한 모습이다.


 북쪽을 지키는 방위신은 현무이며 12지신중 쥐를 배치하였다.
남쪽에는 주작과 말등을 배치하여 근정전을 지키도록 하였다. 
동쪽은 청룡과 토끼, 소, 뱀을 서쪽은 백호와 원숭이등을 배치하였다.
 

 
12지신상중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 가장 두드러진 토끼상이다.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얼굴이다.

  궁궐을 지키고 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오방신과 12지신들이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라 친근하며 장난기까지 느껴지는 표정을 짖고 있다.   이 조각상들을 보고 있노라면 권위로 사람들을 압도하기 보다는, 여유로움과 온화함으로 모두가 함께하고자 한 우리조상들의 멋과 낭만을 느낄 수 있다.



 그냥 지나치기 쉽긴 하지만 경복궁 월대 1층과 2층에는 돌기둥 난간끝에도 있는 돌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돌짐승은 해태인데, 전설에 의하면 해태는 불을 먹고 사는 짐승으라 하여 화제를 막기위해 조각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돌조각이 특이한 점은 아비와 어미가 새끼를 품고 지키는 형상이다. 

  엎드려 있는 모습은 주인의 은총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왕에게 순응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군주는 만백성의 아버지로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고 백성역시 아버지를 섬기듯 군주를 섬기라는 유교적 이상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의 주요건물과 기능

경복궁의 주요건물과 기능

 흥례문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복궁의 남문에 해당하는 광화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광화문을 통과하면 근정문과 근정전이 나온다.
 근정문은 정도전에 의해 홍례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광화문이 궁궐로 들어가기 위한 성곽과 성루의 기능이 강조된 문이라라면, 이 홍례문이 실질적인 대문이 되는 것이다.
 
 위의 사진 밖이 광화문이고 안쪽이 홍례문이며, 그 뒷편에 있는 것이 북악산이다. 수문장 교대식을 재현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편전 (= 사정전)

경복궁 사정전은 왕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는 공간이다. 사정전 건물은 벽체가 없고 전체를 개방하여 문과 창을 달았다. 사정전 좌우에는 만춘전과 천추전이 있는데, 사정전에는 온돌이 없고 마루로 되어 있고, 천추전과 만춘전에는 구들 장치가 되어 있어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정전 : 정도전이 경복궁을 지을 때 붙인 이름으로  '천하의 이치를 헤아려, 마땅히 세밀히 살피고 깊이 생각하며 다스려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정전 내부에는 임금이 앉는 어좌와, 뒷편에는 일월오악도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조선왕조의 영원무궁함을 기원하고, 왕의 은혜가 해와 달처럼 온 백성에게 두루 빛추어 줄 것을 담은 의미이다.

 대하드라마에서 왕과 신하들이 각종 정책등을 의논하고, 왕의 최종명령을 하는 모습을 보개 되는데 바로 이 편전인 사정전에서 이루어 지게 된다.


침전(=강녕전)

강녕전은  한마디로 왕이 잠자리를 위해 만든 침전이다. 정면 11칸, 측면 5칸으로 길죽한 모양이며  왕의 침전 답게 용마루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중앙은 마루를 깔았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동서 양측에는 井자 모양으로 9개의 방을 두었는데, 중앙에는 왕이 주무시고 주변 8개 방에는 상궁들이 숙직하였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에는 일체의 가구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정도전이 왕의 건강함을 기원하는 뜻에서 침전에 강녕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강녕전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동소침인 연생전이 있고, 서쪽에는 서소침인 경성전이 있다. 원래 강녕전은 헐어 창덕궁의 희정당을 짓는데 쓰여졌고,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건물의 용도는 모두 왕의 잠자리를 위한 공간이다.

교태전과 강녕전은 사진상으로 보면 비슷해 보이는데, 강녕전은 계단위 돌마루 부분이 ㄷ자형태로 돌출되어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교태전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중앙에는 대청 마루를 깔고 동서 양쪽에 온돌방을 만들었다. 원래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은 창덕궁의 화재로 뜯어다가 창덕궁의 대조전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교태전은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중궁전을 곤전이라고도 하며 곤은 땅을 상징하고 왕은 하늘을 상징하는 용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 신성한 소통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도록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 
 

향원정



경복궁 향원정은 고종 10년(1873)에 건청궁을 축조할 때 그 남쪽에 연못을 만들고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 지붕의 정자와 구름다리 모양의 취향교를 건설하여 건청궁과 연결하게 하였다.
원래 취향교는 향원정 북쪽에 있어 건청궁과 연결되었으나 한국 전쟁 때 부서진 것을 복구하면서 남쪽에 옮겨 가설하였다. 위치상 경복궁에서 가장 뒷편에 있다. 뒷편으로 보이는 것이 북악산이다.

경회루


 경회루는 옛만원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져 있어 매우 유명해진 건물이다.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을 뿐더러,48개의 육중한 돌기둥이 지금까지도 침하 현상 없이 수평을 유지하고 있어 조선의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중요한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경복궁을 중건할 때 태조가 지은 누각이 원래 있었으나, 태종 12년(1412)에 이를 크게 고쳐 짓고 주위에 네모난 연못을 팠다.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다시 지었다.

익산미륵사지 (益山彌勒寺址)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불교 총서(朝鮮佛敎 叢書)》에 실린 고려 초 혜거국사비문에 의하면 후백제 견훤 때(922)에 미륵사의 개탑(改塔)의 기사가 실려 있어 이때 미륵사의 탑이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조선시대《동국여지승람》과 영조 때 강후진(康侯晋)《와유록(臥遊錄)》에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전자에서는

"석탑이 극대하여 그 높이가 수십척으로 동방석탑 중 제일이다."고 하였고

후자에서는 "밭둑 사이에 7층석탑이 있는데 대단히 높고 크며…

세상에서 이르기를 동방석탑에서 제일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다. 백년 전 벼락으로 인하여 그 반이 허물어졌고,

밭둑 사이에 초석과 석조가 널리 있는데, 그 반이 노출되거나 전체가 노출되었고… 종각의 초석으로 보이는 것이 완연히 남아 있다…"
라고 하여 이때 이미 사찰이 폐허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재현품



1980년부터 1995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 주도하에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건물의 기본적인 구조를 확인하였다. 다만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의 현존 석탑중 최대 최고 규모이긴 하지만 아시아 최대라고는 볼 수 없다.
  석탑터 주변에서 출토된 부재로 동원(東院) 석탑의 복원안을 연구한 결과 9층임이 밝혀져 1993년 동탑이 복원된 바 있고 목탑 역시 복원안이 마련되어 1997년 개관된 전시관에 그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람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중심사역외에 서편에는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건물터가 있고, 북편에는 조선시대 가람터가 확인됨으로써 백제 이후 계속된 미륵사의 모습과 하한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역(寺域) 남측에는 거대한 동·서 연못지가 있고 그 규모와 조성방법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확인되었다.

각 원의 금당(金堂)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중원의 금당이 동·서 금당보다 규모면에서 조금 크다. 특히 금당은 바닥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높이 1m 정도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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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있다. 

 절터에서 출토된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1587)'과 '만력십칠년(萬曆十七年)(1589)' 명 기와를 통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절이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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