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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설계자 환관 김사행
2008/07/11 오전 10:57 | 인물한국사 | [빨갱이]

경복궁의 설계자 환관 김사행,


 현재 서울시에는 창덕궁을 비롯한 덕수궁, 창경궁등 꾀 많은 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정궁은 오직 하나 경복궁밖에 없으며, 나머지 궁궐은 필요에의해서 지어지거나, 임란당시 경복궁이 완전소각되면서 중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대원군에 의해서 이전의 궁궐보다 10배 이상으로 대규모 중건된 경복궁의 원 설계자는 누구일까? 모두 아는 상식이겠지만 대원군은 경복궁의 중건을 명했을 뿐 설계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역시 궁궐공사를 지시하였을 뿐이며, 또 이 조선의 정궁에 '경복'이란 이름을 지어준 '정도전'역시 작명인일지는 모르지만 이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은 시공하고 설계한 사람은 아니다.

 사실 정도전은 학자이자 정치가이지, 건축이나 토목공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인물이다. 경복궁의 최초 시공자는 바로 환관출신의 김사행이다.
 물론 원래의 건물들이 완전소각되어 그의 솜씨를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경복궁의 주 건물인 근정전을 비롯해,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등이 그의 감독아래 하나 둘 완공되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경복궁을 지은 천재건축가 김사행의 이름은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작명자 정도전이 차지했다. 이런 왜곡이 일어난 이유는 다름아닌 그가 환관(宦官)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후일의 태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당했기 때문에 오욕의 이름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환관 김사행

환관 김사행(金師幸)은 그가 원나라 환관으로 있다가 고려 공민왕 때 돌아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내시부사로 승차하였고, 이후 각종 대규모 토목공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일예로 공민왕비이자 몽골족 출신인 노국공주가 사망하자, 그녀를 추모하기 위한 대규모 사찰 공사를 단행하였고, 능묘조성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하여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당시 말 한필은 현재로 치면 경호원을 대동한 최고급 자동차를 받는것이나 마찬가지의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같은 대규모 건축공사를 시행한 것으로 봐서  아마도 북경에 있으면서부터 건축에 각별한 조예를 갈고닦았던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국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환관은, 그 운명역시 국왕과 함께 하였다.  환관 최만생등이 공민왕을 암살하고 우왕이 즉위하자 김사행은 ‘왕을 부추겨 사치를 조장하고 대규모 공역(工役)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는 죄목으로 익주(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의 관노로 전락했다.
 그나마 다른 환관처럼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은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우왕은 다시 김사행을 불러들였고 창왕, 공양왕을 거치면서도 김사행은 위태로운 가운데 궁궐생활을 이어갔다. 김사행은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며 성리학을 익히는 자리인 경연에 참석하려는 공양왕에게 “한두 번 빠진다고 국정에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며 불교를 믿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공양왕 시절 최고 실권자는 이성계였다.
공양왕의 내시부사였던 김사행은 두 사람 사이의 가교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김사행을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조선 개국과 함께 김사행은 고려의 배에서 조선의 배로 옮겨 탔다. 건국 1년을 맞은 태조 2년 7월 27일 이성계는 창업에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교지를 내려 치하했다. 그 중에 김사행이 포함돼 있다.

내시부 판사 김사행은 내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궐내의 제도가 갖춰지지 못했는데 고려조가 왕성했을 때의 궁중 제도와 의식을 일일이 알아내어 지나친 것은 줄이고 모자란 것은 보태어서 내조(內助)의 다스림을 장식했으니 공을 기록할 만하다.”

고려 말 환관의 폐단을 몸소 겪은 개국공신들은 환관을 모두 궁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대부의 집안에도 종이 있는데 궁궐에 국왕이나 중전의 시중을 드는 환관이 없을 수 없었다. 태조의 이 같은 뜻을 받들어 조선 초 내시부의 제도를 정비한 장본인이 바로 김사행이었다.

경복궁을 짖다



한양 천도 및 경복궁 창건을 추진할 때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건국 초기에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사(役事)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도 반대의 선봉에 있었다.
반면 하륜을 비롯한 일부 신하들은 “건국 초야말로 왕권의 위엄을 상징할 대역사를 일으킬 적기”라며 태조를 지지했다. 

조선실록 태종조에 보면 태종 이방원이 태조 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태조 때 모든 공역(工役)을 김사행이 맡았다. 온 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김사행이 태조를 권하여 공역을 일으켰다’.
 따러서 환관 김사행은 태조의 뜻을 받을어, 경복궁 건축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자 공사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경복궁 공사의 공이 인정되어 김사행은  벼슬이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事)에 이르고 가락백(駕洛伯)에 봉해져 항상 가마를 탄 채 궁궐에 드나들었을 정도이다. 조선시대 전 역사상 환관으로서 이 같은 영화를 누린것은 그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1398년 후비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김사행은 당연히 국왕의 뜻을 받들었다. 그것이 곧 환관이 본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되고 말았다.
 후비소생이 왕자로 지명된 것에 반발한 태종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간을 축출하고, 여기에 관련된 인물을 모조리 사형시키고 말았다.

   김사행 역시 참수형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죄목은 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죄목은 고려말 우왕시절 그가 익주로 쫓겨날 때와 같았다.
왕을 부추겨 사치를 조장하고 대규모 공역(工役)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의 최대 치적이 그의 사형집행 이유가 되어 버린것이다.


김사행
(金師幸 ?∼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환관(宦官). 초명은 광대(廣大). 공민왕의 총애를 받고 판내부사(判內府事)에 이르렀으며 왕명으로 정릉영전(正陵影殿)의 대역사를 일으킨 결과 국가 재력을 소모하고 민생을 괴롭혔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선왕 때의 대역사를 일으킨 죄로 가산이 몰수되고 익주(益州)로 쫓겨났으나 곧 풀려났다. 조선 태조 초에도 역시 총애를 받아 벼슬이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司事)에 이르고 가락백(駕洛伯)에 봉해져 항상 가마를 탄 채 궁궐에 드나들었다. 후에 정도전(鄭道傳)의 난에 관련되어 삼군부(三軍府)에 의해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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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란을 격파한 강감찬
2008/07/11 오전 10:54 | 인물한국사 | [빨갱이]



귀주대첩 - 강감찬 고려를 지키다.


 한반도를 넘어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던 고려, 그리고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를 쳐야만 했던 거란, 양대 세력의 전쟁은 무려 20년이 넘게 진행되었다.
 거란은 총 3차에 걸쳐 고려를 정복하고자 하였지만 고려는 그때마다 그들을 이겨냈으며,영웅은 언제나 탄생하였다.

 거란의 1차 침입은 993년에 있었다. 그러나 서희는 그들의 목적이 전쟁이 아닌 봉건관계 체결이라는 것을 간파하였다. 또한 거란의 군사가 80만이라고는 하지만 정예부대는 8만 정도에 불과하였고, 이 정예부대는 안융진 싸움에서 대패하여 기세가 꺽인 상태이다.
 이에 서희는 거란의 총장 소손녕과 담판을 하여, 거란의 동경이었던 요양은 고구려의 땅임으로 고려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같은 서희의 강경외교노선이 먹혀 들어 고려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강동 6주를 얻는 성과를 얻었고, 이로 인하여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까지 북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란은 국호를 요로 고치며 더욱 강성해 졌다. 1010년에는 강조의 목종 폐립과 현종옹립을 구실로 총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숫적으로는 1차 침입보다 적었지만 40만모두가 전투병력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병력은 오히려 더 많았다.
 특히  강조가 통주방면에서 패한것은 고려의 큰 위기였고, 고려는 개성까지 함락되어야만 했다. 이때 대신들은 현종에게 항복을 권유하기도 하였지만 강감찬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양규등이 후방에서 적의 보급을 끊고 유격전을 실시하여 적의 정예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얻었다.
 이에 고려와 요는 화의가 성립되어 양국은 대등한 수준의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하지만 요의 고려 침공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1013년에는 여진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오기도 하였으며, 고려왕이 직접 내방하여 예를 갖추라는 요구까지 하였다.
 고려는 그때마다 요의 공격을 격퇴하는 한편, 개성에 나성을 축조하는 등 요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고 20만명의 병력을 양성하였다.
 요나라 역시 소배압의 지휘아래 20만의 대군을 양성하였다. 소배압은 소손녕의 형으로써, 당시까지 단 한번도 패전을 기록하지 않은 무적의 장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1018년 고려의 명운을 건 요나라와의 일대 접전이 펼쳐졌다. 강감찬은 우선 기병 1만 2천명을 선발하여, 요나라의 선발부대를 기습하였다. 이 전쟁에서 선발부대가 거의 전멸하자, 소배압은 작전을 바꾸어 직접 개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소배압이 이끄는 본진이 매우 빠른 속도로 개성의 100리 밖까지 진격해 오자, 정면 대결이 불가피 해졌다. 그러나 강감찬은 개경일대에 이미 방어라인을 철저하게 구축시켜 놓았고, 소배압은 이 방어라인을 뚫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 강감찬은 요군의 보급을 끊고 후방을 교란시켰다.
 
  일단 후방보급이 끊어지고, 혹독한 겨울의 추위와 청야작전으로 인해 요의 군사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는 사이 이탈자도 속출하여 남은 병사는 정예병 10만여명이 전부였다. 결국 소배압은 남은 병사를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퇴각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소배압에게 뜻밖에 좋은 첩보가 들어왔다.
 바로 귀주성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대로 아무성과 없이 요국으로 돌아간다면, 문책은 물론이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배압은 귀주성이라도 점령하여 작은 성과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감찬 장군의 준비된 빈성정책이었다.

 고려군의 허실만을 보고 그 뒤에 숨어있는 함정을 눈치체지 못한 소배압은 그대로 귀주성으로 총 병력을 집중시켜 밀고 들어갔다. 이날은 1019년 2월 1일, 고려사에 있어 최대의 승전이 기록된 날이다.
 마치 독안에 든 쥐처럼 성안에 가두켜진 꼴이 된 요군은, 그들의 전략중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수 있는 기마대의  공간장악능력을 상실하였다. 더구나 좁은 장소에 10여만명이 움집함으로 인해서 군대의 대오가 크게 훼손되어 버렷다.

 그리고 이때 고려군은 사방에서 포위하여 총 공격을 단행하였다.소배압은 결사적으로 퇴로를 뚫고 후퇴하였지만, 고려군은 귀주 동쪽방면에서 추격에 추격을 거듭하였다. 더구나 바람역시 고려군에게 유리하게 불어, 요군은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 할 수 조차 없었다. 이 하루밤의 전투에서 소배압은 수만여명을 잃고 말았다. 살아 돌아간 요군은 수천에 지나지 않앗으며,  소배압 역시 본국에서 징계를 받았다.

 이 엄청난 승리로 인하여 고려는 동방의 강국임을 천하에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동 6성을 정비하고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내외에 국방력을 과시하였다.
 1019년 5월에는 요나라에서 화친을 제의하는 사절단이 왔으며, 동여진 역시 추장 나사불이 직접 입조하여 화의를 약속하였다.
 이에 고려현종은 말갈, 탐라, 흑수등의 복속민들 대표들을 입조시켜 그들에게 연회를 배풀어 주는 등, 고려의 위용을 천하에 알렸다.

 귀주대첩의 승리는 정보전과 기만술, 그리고 적의 침략에 대비한 정예병 양성이 종합적으로 맞아떨어진 대승이었다. 특히 적의 허위정보를 믿게끔 만드는 기만술은,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정보의 파악 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뛰어난 전략 뒤에는 그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정예병 양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고려수호의 영웅 강감찬은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위대한 성웅이라고 할 수 있다.



강감찬
(姜邯贊 948∼1031(정종 3∼현종 22))

고려의 명장(名將). 초명은 은천(殷川). 본관은 금주(衿州).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 983년(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고, 1010년(현종 1) 거란(契丹) 성종(聖宗)의 침입에 조신(朝臣)들은 항복을 주장했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시키도록 하여 물러가게 했다. 그뒤 국자좨주(國子祭酒)·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서경유수(西京留守)·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고, 1018년(현종 9)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고려에 침공하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1019년 회군(回軍)하는 적을 구주(龜州)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1030년(현종 21) 왕에게 청하여 개경(開京)에 축성(築城)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고, 1031년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 식읍일천호(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시호는 인헌(仁憲).

강동육주 (江東六州)

고려 성종 때 평안북도 서북면(西北面) 해안지대에 설치한 흥화(興化)·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구주(龜州)·곽주(郭州) 등 6주(州). 고려 때 군사상 교통상 요지였던 강동6주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993년(성종 12) 거란의 1차침입 때 서희(徐熙)가 거란장군 소손녕(蕭遜寧)을 만나 압록강의 동쪽지방을 개척한 뒤에 거란과 국교를 열 것을 조건으로 고려는 강동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6주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6주 개척 후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흥(長興;泰川)·귀화(歸化;郭山)·선천(宣川;宣州)·안의(安義;定州)·흥화(興化;義州東)·구주(龜州;龜城) 등지에 강동6성을 쌓고 거란에게 적의를 보였다. 이에 거란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약속불이행을 추궁하고 국왕이 친히 내조(內朝)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강동6주 반환을 요구하여 왔다. 고려에서 이를 듣지 않자 거란은 1018년(현종 9) 이래 3차에 걸쳐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우고 침입하였으나 번번이 고려의 항전으로 이득을 보지 못하였으며, 특히 제3차 침입 때 소배압(蕭排押)이 거느린 거란군은 구주(龜州)에서 강감찬(姜邯贊)에 의해 대파되어 돌아갔는데, 이를 구주대첩이라고 한다. 두 나라는 서로 적대관계에 지쳤기 때문에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는 대신 거란은 강동6주의 요구를 철회하였으므로 강동6주는 계속해서 고려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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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대 격파 김윤후 장군
2008/07/11 오전 10:45 | 인물한국사 | [빨갱이]

<세계 최강 몽골군대를 2번 격파하다!!>

<역사의 천존고>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고려의 자존 김윤후

 1231에서1258년에 이르기 까지  28년에 걸친 대 원과의 치열한 항쟁. ....
13세기 당시 원제국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가장 드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원제국에게 무려 30여년간을 항쟁하였다것에 세계 역사속에서도 독 보일 위대한 업적일 것이다.

 그러나 25년 항쟁사를 보다 자세히 살펴 보면 오히려 부끄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도데체 40년 동안 고려왕조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최씨정권이 한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1차 원의 침략 후 전쟁 상황이 여이치 않자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여 자신들의 안위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대원항쟁이 한창이던 1236년에 판각된 8만 대장경 역시 문화적으로야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우수한 것이지만, 냉혹하게 말하면 최씨정권이 열심히 기도해 줄테니 백성들이 알아서 나가 싸우라는 것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병장기를 만들고 정규군을 양성하여 후방깊숙히 침투한 몽고군의 배후를 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28년간의 항쟁사에서 고려 땅에 정규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후 전개된 삼별초의 끈질긴 항쟁조차 사실 원의 명령에 의해 출병한 고려군과의  싸움이었다.

 그처럼 모순되고 부끄러웠던 항쟁, 그처럼 무기력했던 정권, 그리고 일방적이고 참혹하였던 패배........
 그러나 오직 단 한명, 김윤후가 있었기에 우리는 대원 항쟁을 자랑스럽고 위대한 업적이라 말 할 수 있다.

 김윤후 그는 백현원(白峴院)이라는 사찰의 수도승이었다. 그런데 1231년 원제국이 1차 침입을 한데 이어 1232년 다시 침입하였다.
 특히 이번에는  1차 침입과는 달리 경상도 지역까지 남하하며, 강화도로 도피한 고려조정의 개경환도를 요구하였다.

 고려조정은 이 요구를 거부하였지만, 그 외 어떠한 조치도 한 것이 없다. 따라서 육지에서는 온갖 약탈과 방화 그리고 살육과 간음이 자행되었다.
 당시 몽고족의 풍습상 적지에서의 약탈은 정당한 것이었고, 결혼이나 아이가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미인을 취하는 것은 자랑거리였다.
 더구나 고려조정이 항복하지 않았음으로, 그에대한 보복은 당연한 행위였다.  그러니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피신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민중들은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장을 시작했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의병이 효시였다.
 즉 김윤후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병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규 훈륜도 받지 못한 민간군이 세계 최강의 원제국 군대와 맞서 싸우기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김윤후에겐 오직 단 한번 뿐인 기회가 오고 있었다.

 몽골장군 살리타이[撤禮塔(살례탑)]그는 고구려 원정군의 대원수였고 1차 고구려 원정 당시에도 의주와 귀주등을 함락시키고 개경을 포위하여 고려조정과의 화의를 성립시킨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김윤후가 있는 처인성(處仁城,지금의 경기도 용인지역)으로 오고 있었다. 당시 처인성은 집단 노예촌인 부곡이 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전략적인 요충지이고, 또 부곡이란 곳은 단순 노비뿐 아니라, 각종 기술을 보유한 기능공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생산기지였다.
 
 김윤후는 그곳에서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직 한명 살리타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한번의 기회.....
 그러나 그는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쏜 화살을 여지없이 살리타이의 심장을 꾀 뚫었다. 대원수를 잃은 적들은 단번에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기회를 틈타 총 공격을 가하자 여지없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부곡은 전공을 인정받아 현으로 승격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기능을 갖고 있어도 노예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현으로 승격받음으로써 일반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부곡이 현으로 승격한 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전공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현으로 승격된 예는 없다.

 이후 김윤후역시 상장군이란 높은 직책을 하사 받지만, 오히려 공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김윤후는 21년 후인 1253년 원제국 5차 침입당시 다시 등장한다. 당시 김윤후가 맡은 직책은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처음 제수 받은 상장군과는 비교가 안되는 낮은 직책이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중요한 것은 충주를 지켜내느냐 아니면 적에게 뺴앗기고 마느냐는 것이었다. 충주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중원으로 불리며 매우 중요하게 여기던 곳이다. 그곳을 빼앗기게 되면 한반도 남부까지 점령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한마디로 최씨 무인정권이 권력승계만을 신경쓰고있던 강화도만 남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윤후는 충주 민간군을 이끌고 70여일에 걸친 길고 긴 항쟁을 하게 된다. 정규군이라고는 별감직을 제수 받은 김윤후 자신과 몇명의 관병이 전부였다. 모든 전쟁은 민간군이 자발적으로 해야 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70일간의 기나긴 항전으로 인해, 성안의 식량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더구나 오랜 싸움으로 지친 사람들은, 원 제국군의 끝없는 항복권유에 동요되고 있었다.
 이 때 김윤후는 성안에 있던 노비들을 불러 모은다. 그는 일찌기 처인성 전투에서도 경험한 바 있지만, 노비들이 전투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싸우겠다는 투지를 불어 넣어 줄 방법이다. 따라서 그는 노비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승을 이룩한다면 귀천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그리고 그 증거로 김윤후는 즉각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획한 말과 소를 고루 나눠 주었다. 이 것은 당시 엄격하였던 신분제 사회 질서상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가 승려 출신이였던 것이 이런 신분제적 질서를 뛰어넘는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말에 크게 감동을 받은 노비들은 앞을 다투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였다. 노비출신들의 군대가 용맹하게 싸우자 다른 민간군들도 다시한번 투지를 불태우며 전투에 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몽고군은 충주성의 점령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거둔 명백한 승전보 였다. 그리고 김윤후가 했던 약속역시 지켜졌다. 우선 충주가 국원경으로 승격돼 집단적인 포상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개개인중에서도 전공이 뛰어난 자는 신분에 관계없이 포상을 받게 되었다.

  김윤후 역시 그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뒤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않았다. 원종 때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며 우복야(守司空右僕耶)로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정확한 사망연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결국은 패전으로 끝난 대몽항쟁을 보며, 쓸쓸하게 승려의 한사람으로 생을 살다가 갔으리라....
 그러나 역사에서 결과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궂이 결과론을 고집한다면 그 옛날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몽골이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 결과론을 거론하자면 가장 최종시점인 현재에서 평가해야 된다.  그러니 역사에서 결과론을 고집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총 7차의 대몽항쟁중 2차와 5차는 명백한 고려의 승리이다. 그리고 그 승리를 이끈 것은 고려왕조도 최씨무인정권도 아닌 평범한 백성들과 천대받던 노비들과 특수부락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신분제 사회속에서 그것을 당연한 숙명으로 여기며 살았겠지만, 승리의 그 순간만큼은 이 땅이 주인이 바로 그들이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김윤후가 있었다.
 김윤후는 바로 고려의 자존을 지켜냈던 것이다.

김윤후 (金允侯 ?∼?)

고려시대의 승장(僧將).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白峴院)에서 수도(修道)하다가 몽골 침입 때 몽골장군 살리타이[撤禮塔(살례탑)]를 처인성(處仁城;龍仁)에서 죽였는데, 그 공으로 임금이 상장군(上將軍)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뒤에 섭랑장(攝郞將)을 거쳐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고 70여 일을 공격했으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사수하고 몽골군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그 밖의 군공을 세운 자는 관노·백정에 이르기까지 상을 받았다. 뒤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으나 그때 동북면은 이미 몽골의 수중에 들어갔으므로 부임하지 않았고, 원종 때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이듬해 수사공우복야(守司空右僕耶)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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