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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발전하는 신라

신라는 17대 내물마립간 고구려의 군사 원조를 받아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한 왜구를 격퇴시켜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이후 신라에 주둔한 고구려의 군사력이 신라의 왕위 계승에 크게 작용하는 등 자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내물왕 이후에는 신라의 왕자들이 고구려에 인질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친고구려적 인물로 길들여진 왕자들에게 왕위 계승권이 우선적으로 주어진 듯하다.
내물왕이 죽은 뒤 그 동안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실성왕이 즉위하자, 그는 자신을 인질로 보냈던 내물왕에게 복수하는 뜻에서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고구려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눌지가 고구려의 신임을 얻어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오르자, 고구려인 자객을 보내 눌지를 죽이려 했다.
고구려는 이러한 실성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제거함으로써 눌지가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라 왕을 「마립간」이라 칭했다. 눌지마립간은 고구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평양으로 천도한 후 한층 더 정치, 군사적인 간섭을 강화해 오는 고구려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를 지키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눌지마립간은 먼저 박제상을 파견하여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동생 복호 왕자를 구출한 다음, 신라에 주둔해 있던 고구려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국 각처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433년에는 백제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고구려 침략에 공동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또한 그는 대외적인 위기속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왕실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해 왕위(王位)의 부자 상속 제도를 확립해다.
신라가 5세기 동안 꾸준히 왕권을 강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김씨 왕실의 종묘인 신궁(神宮)을 설치한 것이라든지, 경주 도처에서 발견되는 동산만한 대형 고분들을 만든 것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기 500년 내물왕 직계인 소지마립간이 죽은 뒤 내물왕계 왕통은 단절되고, 방계 혈통인 지증왕이 즉위했다. 지증왕은 신라의 본격적인 발전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지증왕 3년인 502년에는 전국에 농사를 장려를 장려하는 왕명을 공포하고 소로 경작하는 우경을 널리 보급시킴으로써 농업이 비약적이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산사람을 죽여 함께 묻는 비인도적인 순장 제도를 금지하여 인명의 존귀함을 강조하는 한편 노동력 확보에도 기여했다.
정치적 개혁으로는 국호를 한자명이 신라(新羅)로 정하고,「마립간」이란 칭호 대신「왕」이란 중국식 왕호를 사용했다. 이러한 국명 및 왕호의 중국화 정책은 단순한 명칭의 변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정치 조직과 운영 방식을 도입하려는 노력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 지증왕 6년인 505년에는 중국의 지방 통치 조직을 본딴 주군(州郡) 제도가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내정 개혁에 힘입어 512년에는 오늘날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을 합병하여 국력을 해외로 신장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법흥왕(法興王) 때에는 중앙 집권적인 귀족 국가로서의 통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법흥왕은 선대 지증왕이나 후대 진흥왕과 함께 6세기의 신라를 이끌어 나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어 낸 위대한 왕이었다. 법흥왕 7년인 520년에는 고구려, 백제에 뒤이어 율령(律令)을 반포함으로써 신라가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춘 법치 국가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다. 당시에 반포된 율령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오늘날 잘 알려진 백관의 공복제나 17관등제, 골품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은 이 밖에도 중앙 관제정비에도 힘써 영토 확장과 왕권 강화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병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법흥왕 18년에는 진골 귀족회의인 화백 회의의 대표자를「상대등」이라 이름하고, 수상 직책을 주어 왕과 귀족의 중간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는 방법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법흥왕 23년에는「건원」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세워 왕권이 확립된, 중국과 대등한 자주적 국가를 이룩했음을 과시했다.
불교의 전개와 공인과 관련해서는 종래의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512년 중국의 북조 대신 남조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당시 양나랑에서 온 원표(元表) 스님이 신라에 불교를 전해준 것이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같다. 처음에 진골 귀족들은 불교를 널리 퍼뜨리고자 노력했던 이차돈을 죽이는 등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크게 반대하였으나, 상대등 설치를 전후하여 법흥왕 14년인 527년경에 불교를 공인하게 된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통일과 국민의 정신을 호국 신앙으로 무장할 수 있는 사상적 뒷받침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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