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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완성자 정약용
조선 후기 정조, 순조 때 경세치용을 주로 하는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학자로 일컬어지는 정약용(1762-1836)은, 단순한 실학 사상가를 넘어서 비판 정신이 투철했던 개혁 사상가이기도 했다. 실학파 중에서도 경세치용의 학문을 이루는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은 그는 전통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며, 당시의 관료 체제 . 사회 . 경제 등 다방면에 결친 개혁 사상을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전래돈 서양 문물을 긍적적으로 수용하면서 현실에 바탕을 둔 새로운 시대로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실학자일 뿐만 아니라 개혁 사상가였으며, 현실에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유능한 관리였고, 또 항상 국가와 백성을 생각하는 일념으로 민본주의를 실천하려고 한 성실한 실천인이었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시대는 대내적으로 조선 봉건 사회가 붕괴 과정에 들어서면서 근대 사회로 옮겨 가는 과도기로서, 상공업과 농업의 진전에 따른 사회 문제가 발생하던 때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청대의 고증학과 서구의 자연과학 사상이 전래되어 당시의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주던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 74년간의 그의 활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자를 미용 또는 송보, 호를 다산, 여유당이라 했으며, 1762년 8월 5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지금의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마현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중앙에서 은퇴한 양반으로서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낙향하여 전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했던 그는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서 경서와 시문을 공부했는데, 학문에도 뛰어났지만 장난도 매우 심했다고 한다.
한편 남인파에 속해 관직을 은퇴했던 그의 아버지는 1778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시파의 남인을 등용함에다라 다시 관직에 나아가 호조좌랑이 되어 상경했다. ⌈시파⌋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할 때 동정적이었고 그를 돕고자 했었기 때문에 이때 시파가 중용된 것이다.
가족들과 함게 한양으로 이사온 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이가환의 매부인 이승훈을 따라 이익의 학문을 배우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현실에 바탕을 둔 학문으로서의 실학, 그중에서도 특히 정치와 경제 문제에 주목하고 나아가 사회의 혁신을 통해 부국강병의 국가 재건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학문으로서의 서학, 천주교와 서구의 과학 문화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져 남인 계열의 학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새로운 학문의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1784년 23세 때에는 정조에게 <중용>을 강의했고, 구 후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임금의 질의에 응하여 많은 논책을 올리는 중요한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1785년 서학과 천주교를 믿던 남인 일파들이 정부 당국의 탄압을 받아 형조에 체포되고 김범우가 유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도 1790년 충청도 해미로 귀양갔으나 불과 10일 만에 풀려났다.
1792년, 31세 되던 해에는 홍문관 수찬이 되어 마침 축성중인 수원성의 설계도를 작성하여 왕에게 올렸다. 그리고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활차와 기중기를 만들어 축성 공사에 이용함으로써 비용을 절약하고 공정을 당축하여 쉽게 건축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수원성은 오늘날에도 온전하게 남아서 한국 도성을 대표하고 있다.
또한 그는 1794년 경기도 관찰사 서영보와 그 문객의 협잡을 조사하기 위해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경기도 연천 방면을 사찰하게 되었다. 그는 서영보와 그 문객의 협잡을 그대로 보고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때 그의 눈에 비친 비참한 농촌의 모습은 정약용을 실학 연구에 더욱 몰두하게 만들었다.
이때 청년 어사의 눈에 비친 참혹할 정도로 궁핍한 농촌의 정경을 통해 알게 된 관리의 수탈과 부패, 그리고 지방 행정의 난맥상과 관리의 악행은 후일 그의 학문 연구의 현실적인 기틀이 되었다. 지방 순찰에서 돌아와 왕에게 돌아와 왕에게 올린 공식적인 복명서인 ⌈경기 어사 벅먕흐런시서⌋에서 그는 백성의 고혈을 짜는 지방관의 가렴주구를 공정무사하게 엄벌할 것과, 농민을 중히 여기고 국법을 존중할 거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복수심에 불타 있던 서영보에 의해 훗날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1795년 7월, 밀입국하여 천주교를 포교하고 있던 청의 신부주문모가 체포되고 신자 여러 명이 사형에 처해진 사건이 일어났다. 정약용도 둘째형 약전과 함께 이 사건에 연좌되었다. 그의 형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자 정조는 할 수 없이 그를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좌천시켰다. 1800년, 정약용을 믿고 존경하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대비 김씨를 배경로한 수구파가 득세하게 되자, 정조의 신임을 얻고 있던 유능한 남인들에 대한 공격이 집중되었다.
마침내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탄압인 신유사옥이 일어났고 그도 투옥되었다. 한편 이때를 전후하여 세계의 천주교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수천 명의 순교자가 나왔고, 그로 인해 도처에서 천주교 성지가 생기게 되었다. 이가환에 이어 이승훈, 그의 둘째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 권철신 등도 투옥되어 정약종과 이가환은 옥중에서 매맞아 죽고, 정약전은 전라도의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정약용에 대해서는 석방시키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강경론자의 목소리도 높아 결국 경상도 장기로 귀양가 어느 군교의 집에 몸을 맡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18년간에 걸친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천주교도 황사영이 충북 제천의 옹기 굴 속에 숨어 흰 명주 수건에 쓴 밀서를 밀사를 통해 청에 보내 프랑스 함대를 출동시켜 천주교도를 구하고 조선을 응징하도록 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탄압이 더욱 가중되어 결국 그는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가게 되고,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강진에 도착해서는 어느 주막집 노파의 뒷방 한 칸을 얻어 일채 바깥 울입을 끊고 사람도 만나지 않은 채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재미난 것은, 한평생을 학문 연구와 멸사 봉공의 철저한 관리로서 근엄하게 살았던 정약용도 역시 남자이고 인간이었다. 주막집 노파의 어린 딸이 아침 저녁으로 선생의 식사와 수발을 돕다가 이 불우한 천재 학자를 불쌍히 여기게 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되어 두 사람의 나이를 초월한 아름다운 로맨스가 싹트게 된다.
유배된 정약용을 여러 차례 구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번번이 서영보 등 반대파의 방해로 실패하고, 마침내 57세 되던 1818년 9월 14일에 이태순의 상소에 의해 귀양살이가 풀리고 1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유배 생활 18년 동안 유교적 정신 세계를 전면적으로 연구하여, 이것을 기반으로 국가의 제도와 정치. 경제. 법률 . 국방에 이르는 다방면에 걸친 연구 성과를 저술로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조선의 현실 사외의 개혁에 주목하여 집필한<경세유표>와 <목민심서>는 가장 주목되는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저서는 그의 구가개혁안의 경륜을 체계화한 것으로서 실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그때까지 의 실학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위의 두 저서는 모두 정치 개혁론에 관한 것으로서 제도의 간소화와 경제 정책의 시정을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경세유표>는 그의 경학적 전지식을 기울여 국가 제도의 간소화를 토대로 토지, 조세 제도의 개혁으로부터 산업 기술, 무역정책까지 다루고 있다. <목민심서>는 민생을 위한 경제론으로서 중앙 정부와의 연관 속에서 지방 수령과 농민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한펴, 그 기반이 되는 농촌 경제와 지방 행정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그 후 타당성이 인정되어 조선조 관료들의 필독서로서 많이 읽히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물론 베트남의ᅡ 호지명까지도 이 책을 항상 곁에 두고 통치에 임했다고 하니 그 가치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선진적 기술 혁신론은 <기예론>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개화론의 싹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대외통상론에 있어서도 중국을 통한 간접 교역이 아니라 서구 각국과 직접적으로 교역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엔 일본땅 오키나와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독립국이었으면서 한국에 친근햇던 유구를 통한 직교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햇다. 이것은 매우 진보적인 주장으로 뒤의ᅡ 개국론자들의 주장과 다리를 놓는 구실을 하고 잇다고 보여진다.
이 밖에도 그의 정치 사상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민중이 통치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통치자가 민중을 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렇지 못한 당시 사회 제도의 불합리성을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인간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여 통치하는 사람과 통치를 받는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하며, 통치자는 ᄇ민중에 의해 추대된 사람이라야 한다는 당시로는 기막히게 선구적이도 뛰어난 민주주의적 식견을 보여 주기도 앴다,.
한 사람의 학자가 일생을 통해 10여 권의 저술을 남기기도 어렵다. 글건데도 불구하고 그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것도 어느 것 하나 뛰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5백여 권의 저술은 <여유당전서> 2백여 권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 저술은 그의 생애 중 가장 어려웟던 시대에 불굴의 신념과 강렬한 비판 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잇다. 그는 1836년 2월 22일 75세를 일기로 조용히 새애를 마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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