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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6
 

너무나도 다른 길을 걸은 연남생과 김원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권력


 
우리나라의 고대 통일전쟁이 그 절정을 이루던 7세기 중엽, 한치앞도 예측할 수 없었던 격동의 시대에 절대권력자의 아들이었으면서도 너무나도 다른길을 걸은 두 인물이었다. 바로 고구려의 절대권력자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과 신라의 절대권력자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그들이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귀족세력으로,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옹립하는 반정에 성공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끈질긴 고구려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아냄으로써, 고구려의 확고부동한 통치자로 자리를 굳혀갔다
 연개소문에게는 남생(南生)·남건(南建)·남산(南産) 등 세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대막리지의 자리에 올랐을 당시 장남 남생의 나이는 9세였다.

 그러나 연남생은 보장왕 20년 664년 그의 나이 30세 때 당나라와 벌인 압록강 전투에세 3만명이나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면서, 권력계승 구도에 차질을 빚데 된다. 물론 당 고종이 철군명령을 내린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최종적인 승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연남생은 패전의 책임은 면할수 있었지만, 절대 권력의 계승자로서 상당한 결점이 생긴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전통적인 귀족출신이었다면, 김유신은 가야출신으로 자수성가한 권력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유신 역시 성골계열의 왕조를 종식시키고 진골계열의 무열왕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김원술은 김유신의 차남으로 보이며, 671년 신라와 당나라가 일전을 벌인 석문전투에서 처음으로 기록이 보인다.

 당시 당나라는 말갈병등을 동원하는 등 총 10여 만명의 병력으로 석문의 들에 진영을 펼쳐놓고 있었으며, 신라는 그 아래쪽에서 마주 보고 있는 대방의 들에 진영을 펼쳤다. 이 석문전투에서 처음에는 신라가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고 나갔지만, 승리를 낙관한 나머지 적진 너무 깊은곳까지 추격하고 또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부대를 분산배치하는 과정에서 급습을 받아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로인해 대아찬 효천등이 전사하자, 김원술역시 스스로 비장(裨將)이 되어 적진으로 돌격하려 하였다. 그때 김원술의 보좌였던 담릉은 '헛되이 죽어서는 안된다'며 말류하였다. 그래도 김원술은 적진으로 뛰어들려 하였지만 담릉이 말고삐를 잡고 놓지 않아서 전사할 수 없었다 한다.
 그런데 신라의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당군의 추격을 받아, 일길찬 아진함과 그 아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철군하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

 석문전투를 지휘하였던 지휘장군은 의복과 춘장으로, 김원술에게 패전의 책임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유신의 입장은 단호하였다. 비록 비장이란 낮은 직책에 있었지만 패하여 살아돌아온 김원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아들의 참수를 요청할 정도였다.

 문무왕은 원술의 직책이 비장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만 중형을 내리기 어렵다며 죄를 면해 주었다. 그러나 김원술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아버지인 김유신조차 만나지 못한 채 시골에 내려가 숨어 살았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서 연개소문과 김유신 그리고 연남생과 김원술의 입장이 분명하게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연개소문은 연남생이 군사 3만명이나 잃은 패전을 당하였지만, 그에게 절대권력을 계승시켰다. 권력을 개인적인 점유의 수단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또 연남생 역시 부끄러움을 안다면 권력승계를 스스로 자제할 수 있어야 했다.

 
 국가를 저버린 연남생, 국가를 구원한 김원술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 한후 연남생은 막리지의 지위를 계승하였지만,  남건과 남산과의 권력투쟁끝에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로 망명한 내용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연남생은 당나라의 간자로 생각되는 신원이 불분명한 작자가 하는 말을 너무도 쉽게 믿어 버렸다. 남건 남산 형제에게는 남생이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 하고 남생에게는 그가 지방을 순시하는 동원 두 형제가 정권을 장악하려 한다고 이간질을 한 것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남건은 왕명을 빌어 연남생을 평양으로 소환하자, 연남생이 이를 의심하여 친한 사람을 몰래 보내지만, 동생인 남건은 그를 억류한 후 남생의 아들인 헌충(獻忠)을 살해하고 만 것이다. 평양성으로 돌아오라는 왕명까지 어긴 상황, 어차피 반역자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면, 차라리 당나라의 힘을 빌어 아들의 원수라도 갚는 것이 나았을까? 

 결국 연남생은 말갈과 거란의 군사들까지 규합하여 당나라에 망명하고 말았다. 국정을 총괄하던 연남생이 망명한 것도 고구려로 볼 때는 크나큰 손실이었지만, 고구려 국방의 큰 축이었던 말갈과 거란군의 이탈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었다. 여기에 백제를 병합하고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킨 신라군이 가담함으로써, 고구려는 668년 800년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연남생의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심이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그와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은, 권력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김원술처럼 패전장수로 스스로 수취심을 느끼고, 권자에서 과감하게 내려 오는 길을 택하였다면, 적어도 역사상 절대 지워질 수 없는 오명을 남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 당나라로 망명하고서도,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고구려 원정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든다.
1923년 중국 하남성 낙양 남쪽에서  출토된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해 가을 칙을 받들어 사공(司空), 영국공(英國公) 이적(=이세적)과 함께 서로 경략을 책임지고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같이 내쳐서 막바로 평양성에 다다르니, 앞에서 노래 부르고 뒤에서 춤추며 멀리 높은 성벽의 성가퀴를 깨뜨렸다.>
...........
<(당에) 순응하고 (고구려에) ()함으로 도모하여 능히 요동에서 패수의 끝까지 맑게 하였다. .... 교화를 기다리다가 일찍 죽음에 갑작스럽기가 아침이슬보다 앞서니, 그 죽음을 말함에 천자의 슬픔이 진실로 깊다.

 공성전에서 선봉장으로 나선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의 당나라 망명은 단순히 위기를 벗어나 살고싶은 마음에서 이뤄진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들을 잃은 절망감에서부터 시작된 형제에 대한 지독한 복수심.. 그것은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고국패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만든 것이다. 고구려 원정에 대한 공이 얼마나 컸는지는,
당고종으로부터 우위대장군을 제수 받고, 변국공(卞國公)으로 진봉 된 후  식읍으로 3,000호가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식읍 3000호라면 3000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과 세금은 물론,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언제든 무한노동에 동원할 권리를 말한다. 또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진 이후에는, 그곳의 관리로 부임하여 679년 나이 46세에 사망할 때 까지 여생을 보내게 된다.

임신서기석

두명의 화랑이 서로에 대한 신의와 신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비석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해 기록한다. ....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연남생이 고구려를 받친 대가로 이처럼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던 675년, 김원술은 초야에 묻혀 살다가 신라의 대당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바로 대당전쟁 최대의 승부처였던 매초성(=매소천성)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김원술은 죽을 각오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고국을 패망시키기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운 연남생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 문무대왕으로부터 공에 대한 포상도 받았지만, 포상은 물론 벼슬길도 마다 한 채, 당시에는 도읍 경주와 상당한 거리에 있는 진주지방까지 내려가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날 전쟁터에서 적에게 등을보인 화랑도로서의 불명예와, 아버지인 김유신장군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두사람의 일생을 바라보며

 올바른 교육을 받고 정의로운 심성을 가진 군인이라면 과연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보통사람들에게까지 그같은 도덕성을 강요할수는 없지만, 사회지도층으로써 보통사람보다 더 많은 권력과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도덕성과 책임감을 지는 일은 당연하다.


  연남생의 후손이 있다면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우리민족에게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김원술은 진주 지방으로 내려가, 우리나라 진주 김씨의 시조가 되셨다. 비록 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하긴 하였지만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줄 알았던 김원술.
 비록 어렵고 고독한 길이었지만 정의로운 길을 걸었기에,  아버지에겐 용서받지 못한 자식이었지만, 후손들에겐 영원히 추앙받는 조상이 된 것이다.

   만약 가상공간에서 김원술과 연남생을 마주서게 된다면, 당나라 황제의 극진한 조서를 받은 연남생과 후손 대대로 이어지는 자긍심과 당당함을 남겨 준 김원술 중 누구의 일생이 진정 빛나는 것인지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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